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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 31

[동문][NOW 꿈꾸는 사람들] 사람을 향해 걸어온 나날들

지난 5월 24일 한양대 서울캠퍼스에서 ‘자랑스러운 한양공대인상’ 시상식이 열렸다. 한양대 공과대학 졸업생 중 사회에 크게 기여하고 업적이 우수한 동문에게 수여하는 상으로, 올해는 이범택 (주)크린토피아 회장(섬유공학 72)과 정상진 HDX(주) 회장(전자공학 71)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지난 1992년 (주)크린토피아를 설립해 국내 대표적인 세탁 전문 서비스 회사로 성장시킨 이범택 회장을 만나봤다. 글. 노윤영 사진. 안홍범·미디어전략센터 ▲ 이범택 (주)크린토피아 회장(섬유공학 72) 소비자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곧 기업인의 정도 한양대학교는 친환경 세탁 문화를 이끌고 다양한 나눔 문화 활동을 펼친 공로를 인정해 ‘제9회 자랑스러운 한양공대인상’ 수상자로 이범택 회장을 선정했다. 모교에서 주는 상이라 더 각별하게 느껴진다는 이범택 회장은 “다른 무엇보다 더 의미 있는 상”이라며 환한 모습으로 수상 소감을 전했다. 이범택 회장은 지난 1992년 크린토피아를 론칭해 136개 지사와 2630개 가맹점을 보유한 회사로 성장시켰다. 경영 비결을 묻는 질문에 그는 자신의 첫 번째 경영 철학인 ‘정도(正道)’를 언급했다. “세탁 사업을 시작할 즈음 유사 경쟁업체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주변에 흔들리지 말고 기업의 정도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생각한 정도란 사람, 즉 소비자와 가맹주 모두를 고려한 사업 정책이었다. 사업 초창기에는 세탁 서비스를 분당과 서울 강남 지역에만 집중했는데, 이는 전국 각지로 가맹점을 늘려나가던 경쟁업체들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가맹점을 늘리면 그만큼 서비스 지역이 넓어집니다. 지금은 가맹점에서 수거한 세탁물을 각 지사에서 세탁하고 있지만, 사업 초기에는 이런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아 본사에서 전국의 세탁물을 관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원거리 소비자에게 질이 낮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보다 본사에서 가까운 분당과 강남 지역에 우선 집중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죠.” 가맹점 입장도 고려했다. 내부 인테리어 비용을 최소화해 부담을 줄이고, 카드 수수료의 50%를 지원하는 정책 등은 모두 소자본으로 창업한 가맹주들의 입장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크린토피아의 열린 사업 정책은 입소문을 타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무수한 경쟁업체 사이에서 앞서나가며 결국 국내 최고의 세탁 전문 서비스 회사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이유다. ▲ 이범택 회장이 자랑스러운 한양공대인상 부조 제막식 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이범택 회장에게 사업은 꼭 성공해야만 하는 ‘필생의 가업’이었다. “제 아버님은 사업을 중도에 그만두신 경험이 있습니다. 때문에 4남매를 대학에 보내느라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렸을 때부터 제 꿈은 분명했습니다. ‘반드시 사업으로 성공해 집안을 일으켜 세우자!’는 것이었죠.” 그렇다면 이범택 회장은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는 전공인 섬유공학을 살려 1986년 염색과 섬유가공을 전문으로 하는 보고실업을 창업했다. 청바지 가공 전문 회사였는데 유명 브랜드에서 경쟁적으로 찾을 정도로 평이 좋았다. 물론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 쉽지만은 않았다. 3D 직종으로 불리는 탓에 인력 수급에 어려움도 많았다. 사업은 1992년 새로운 전환기를 맞았다. 이범택 회장이 일본의 세탁편의점에서 힌트를 얻어 세탁을 전문으로 하는 크린토피아 사업부를 차린 것. ‘세탁을 저렴한 가격으로 손쉽게 맡길 수 있는 편의점’이란 아이디어는 그야말로 획기적이었다. 이 회장은 1990년대 후반 섬유가공업의 수익성이 갈수록 떨어지자 이를 접고 세탁 사업에 전념했다. 이후 더욱 큰 주목을 받으며 지금의 크린토피아로 자리를 잡았다. 나눔에 눈을 뜨다 이범택 회장은 30여 년간 사업을 경영하며 쉽지 않은 길을 걸었다. 많은 굴곡을 겪고 사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그의 생각은 점차 바뀌었다. 나와 가족을 위해 시작한 사업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을 둘러싼 이 세상 사람들의 소중함과 그 가치에 대해 깨닫게 된 것이다. “사업은 절대 혼자서 할 수 없다는 걸 직접 몸으로 체험하며 깨달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와 크린토피아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면서 주변을 돌아보게 됐고, 나눔에 눈을 떴습니다.” 이범택 회장이 두 번째 경영 철학으로 사람을 내세우는 이유다. 그는 가장 보람 있었던 나눔 활동으로 아름다운가게와 함께했던 자선 활동, 옷 기부를 통한 무료 세탁 서비스 등을 손꼽았다. “1990년대 중후반에 아름다운가게의 옷들을 세탁·다림질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옷이 워낙 많다 보니 모든 양을 소화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매장에 진열된 옷 중 우리가 세탁한 옷들이 제일 먼저 팔린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참 뿌듯했지요. 자체적으로 옷을 기부했던 활동도 기억에 남습니다. 사람들에게 옷을 기부받아 어려운 시설에 전하고, 기부자에게는 와이셔츠 같은 옷을 무료로 세탁해드렸죠. 보통 옷 세 벌을 기부하면 한 벌을 무료로 세탁해주는 방식이었는데 반응이 아주 뜨거웠어요. 우리의 작은 나눔이 누군가에게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 더없는 기쁨을 느꼈습니다.” 나눔의 매력에 빠진 이범택 회장은 그 후로도 정기적인 자선 및 봉사 활동을 펼쳤다. 지난 2014년 7월에는 한양대학교에 발전기금으로 5억 원을 기부했다. 2017년 3월에는 의류학과에 ‘의료기관용 의류 디자인’이라는 과제를 내주며 5000만 원을 전달하기도 했다. 그는 앞으로도 다양한 봉사와 기부 활동을 멈추지 않을 계획이다. “학교에서 수많은 선후배와 교수님들을 만난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습니다. 모교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은 만큼 고마움을 잊지 않기 위한 나눔이었습니다. 의류학과 과제는 크린토피아가 향후 진행할 사업과 연관이 있습니다. 의사나 간호사복, 환자복 등의 의료기관용 의류 대여 사업을 계획하고 있는데, 그 의류의 디자인을 모교 의류학과 학생들에게 부탁한 거죠. 후배들의 초롱초롱한 아이디어를 기대합니다.” ▲ 시상식장에서 이범택 회장(가운데)과 이영무 총장(오른쪽)이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 ▲ '2018 자랑스러운 한양공대인상’ 시상식 후 진행된 기념 촬영 사업을 하고 싶다면 업종보다는 사람이 먼저 이범택 회장은 후배들에게 ‘열정’이라는 두 글자를 강조했다. “공부든 일이든 될 때까지 하겠다는 열정적인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더군요. 공부도 마찬가지지만 사업의 길도 고단하고 힘듭니다. 항상 평탄한 길만 걸을 수는 없지요. 그렇다고 중도에 포기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사업하다가 잘 안 되면 회사에 들어가겠다는 생각은 애당초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한번 시작했으면 열매를 맺겠다는 열정과 끈기가 필요합니다.” 이미 국내 최고의 세탁 전문 서비스 업체에 올랐지만, 지금에 만족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범택 회장은 크린토피아가 앞으로 품질과 서비스 모든 측면에서 더 큰 발전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더불어 그는 후배들을 위한 애정 어린 조언을 이어나갔다.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보면, 창업을 하고 싶다면 업종보다는 어떤 사람들과 일할 것인지를 먼저 정해야 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창업하려면 그리고 성공하고 싶다면 그만큼 사람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주지요. 열정적으로 공부하고 일하되 함께할 사람의 중요성을 잊지 마세요. 적합한 사람과 함께해야 그만큼 성공에 가까워집니다.” 소비자 입장에서 생각하는 기업인의 정도를 걸으며 사람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해온 이범택 회장은 열정적으로 기업을 경영하며 이 자리까지 올랐다. 지금처럼 열정적이면서도 유연한 경영 철학을 가지고 있는 한 크린토피아는 멈추지 않고 성장해나갈 것이다. ” 사랑한대 2018년 07-08월호 이북 보기

2018-07 29 중요기사

[동문]중동에서 온 청년, 한양에서 성장하다

매주 다양한 국가의 20~30대 청년들이 뜨거운 안건을 놓고 토론하는 예능 프로그램 JTBC <비정상회담>이 지난해 12월 마침표를 찍었다. 사메르 샘훈(Samer Samhoun) 동문(경영학 석사 졸업)은 레바논을 대표해 18회(2014. 11. 03) ‘일일비정상’으로 출연했다. 당시 샘훈 동문은 한양대 경영전문대학원에서 MBA 과정을 밟고 있었다. 지금 그는 한국 시민권을 기다리고 있다. 한양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사메르 샘훈(Samhoun) 동문이 JTBC <비정상회담> 18회(클릭 시 다시보기 홈페이지로 연결됩니다.) 레바논 대표로 출였했다. (JTBC 제공) 유학생의 한양살이 2008년 여름이었다. 샘훈 동문은 아버지의 권유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사업가인 아버지께서 한국과 중동 간 교류가 활발해질 것이라 말씀하셨죠. 저는 고등학교 졸업 후 한국 정부 초청 외국인 장학 사업(KGSP, Korean Government Scholarship Program)에 선발됐습니다.” 교육부는 전 세계의 고등교육 우수 인재를 초청해 국내 대학(원)에서 학위를 취득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샘훈 동문은 한양대 어학당에서 8개월 한국어 연수 과정을 이수한 뒤 기계공학부 09학번이 됐다. 학교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샘훈 동문은 서툰 한국어 실력으로 종종 곤욕을 치렀다. “처음에 반말과 존댓말의 차이를 잘 알지 못했어요. 반말이 짧아 존댓말보다 편하다고 생각했죠. 수업 중 교수님께 ‘이건 뭐야?’라고 여쭤봤어요. 갑자기 교실이 조용해졌지만, 모두 제가 유학생인 것을 알고 웃으며 넘어갔습니다.” 한국인 학생들과 친해지기도 쉽지 않았다고 한다. “다행히 다른 유학생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레 한국 학생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잦아졌어요.” ▲ (왼쪽에서 두 번째)사메르 샘훈 동문이 '2013학년도 후기 학위수여식'을 마치고 가족과 함께 사진 촬영하고 있다. 그는 한양대에서 기계공학부를 이수했다. (샘훈 동문 제공) 학부는 마쳤지만, 한양에 더 머물기로 했다. 샘훈 동문은 더 심도 깊은 공부를 하고 싶었다. “졸업 전 삼성 에스원 해외 영업 파트 태스크포스팀(TFT, Task Force Team)에서 잠깐 일하는 동안 중동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직접 봤습니다. 제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전문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는 한양대 경영전문대학원(MBA)에 진학해 글로벌 창업(Global Startup)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레바논 대표에서 한국인으로 샘훈 동문은 JTBC <비정상회담>의 처음이자 마지막 레바논 대표였다. MBA 과정을 거칠 때, 그는 삼성의료원에서 통역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간호사의 추천에 의해 출연 제의가 들어왔다. 처음에는 출연을 망설였다고 한다. 학업과 하고 있는 일에 충실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 출연을 결심했다. “여러 국적의 패널들과 이혼과 양육권에 대한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한국 사회를 한층 더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됐습니다.” ▲ 사메르 샘훈 동문(경영학 석사 졸업)은 한국과 중동 사이 가교 역할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한다. (샘훈 동문 제공) 그는 여러 계획을 세우고 있다. “우선 한국 시민권 취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를 계기로 현재 하는 사업을 확장하고 싶습니다.” 현재 샘훈 동문은 스타트업에 자문을 제공한다. 이 뿐 아니다. 중동 진출에 관심을 보이는 기업들에도 컨설팅을 진행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온 의료 관광객을 위한 통·번역 회사를 운영하기도 한다. “최종적으로 제 경험을 공유할 기회를 얻고 싶어요.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샘훈 동문은 한양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학교에서 전공 지식만 배운 것이 아닙니다. 서로 도우면서 성장하고, 무엇보다 사랑을 실천하는 법을 알게 됐습니다.” 샘훈 동문은 재학생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한다. “한양플라자에서 커피를 사는 학생이 사회를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편의점에서 빵을 사 먹는 학생이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Forbes)에 이름을 올릴 수도 있습니다. 한양인 모두가 한양인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글/ 유승현 기자 dbtmdgus9543@hanyang.ac.kr

2018-07 09 중요기사

[동문]국제학도들, 경찰의 길을 택하다. (1)

국제학부는 2003년도 신설된 이래 많은 인재를 배출해왔다. 글로벌 사회로 진출한 많은 동문이 후배들을 이끌어주고 있다. 그중 국민의 안전을 위해 밤낮없이 활동하고 있는 경찰의 길을 택한 두 사람이 있다. 국제학부에서 경찰의 길은 흔치 않은 경우. 경찰의 길을 택한 정현중 동문(국제학부 06)과 서준 동문(국제학부 08), 두 사람을 만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 본교 출신으로 현직 경찰이 된 정현중 동문(국제학부 06, 왼쪽)과 서준 동문(국제학부 08, 오른쪽)을 지난 4일 학교 안 카페에서 만났다. Q. 안녕하세요.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정현중: 네,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경찰청 교육정책담당관실 인재선발계에 재직 중인 정현중입니다. 서준: 안녕하세요. 저는 경찰청 외사국 국제협력과의 서준입니다. Q 경찰청에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정현중: 제가 있는 곳은 쉽게 채용 부서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경찰채용과 관련된 법령개정을 크게 다루고 있습니다. 30가지가 넘는 채용에 대해서 각 부서와 협의 후 기획부터 채용 마무리까지 모든 것을 담당하죠. 특별채용과 승진시험 문제를 내기도 합니다. 경찰은 의료, 의류, 전산, 항공헬기 조종사까지 굉장히 다양한 채용이 이루어집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다양한 업무를 해내고 있죠. 서준: 네 저는 그래서 경찰청이 또 다른 소(小) 생태계라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일하고 있는 곳은 크고 다양한 경찰청 속의 작은 외교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경찰은 대한민국이 관할이지만, 관할 밖인 해외에 있는 국민들도 보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억울하게 구금되거나 외국으로 도피한 범인을 검거해야 할 경우 외국 경찰과의 협력관계가 굉장히 중요하죠. 이를 위해 우리나라 경찰청이 원만한 국제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국제활동을 펼치는 곳입니다. 저는 주로 통번역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 서준 동문(국제학부 08)은 우리나라 경찰이 원만한 국제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이바지하고 있다. 위 사진은 주한 이탈리아 대사 의 경찰청 방문 당시 통·번역을 담당한 서준 동문(왼쪽)의 모습. Q. 국제학부에서 경찰의 길을 택하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인 것 같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정현중: 처음에는 외무고시를 준비하고자 국제학부에 들어왔어요. 현실적인 장벽으로 고민하던 중 군에 입대했는데, 그곳에서 인생이 바뀌었죠. 전투경찰로 배치받아 일하면서 좋은 선임들을 만나 공무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버리게 됐어요. 도전적이고 합리적인 모습을 보면서 경찰에 대한 꿈이 커졌습니다. 경찰후보생 추천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경찰 준비를 하게 됐죠. 서준: 저 같은 경우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경찰에 대한 꿈이 있었던 것 같아요. 경찰차만 지나가도 정신을 못 차렸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대학에서 진로 고민을 하다가 내가 하고 싶은 게 뭘까 하고 깊게 생각하다 보니 어렸을 때 꿈꿔왔던 경찰을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러다 경찰에 대한 꿈이 커져갔고, 마침 외국어 특별채용 전형이 떠서 지원하게 됐죠. Q 경찰을 준비하신 전반적인 과정이 궁금합니다. 정현중: 제대 후 두 학기가 남았을 때 휴학을 결심했습니다. 죽기 살기로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모든 걸 쏟아부었죠. 공부할 때 이후를 생각하지 않고 절박한 심정으로 공부했던 것 같아요. 모든 것을 경찰시험에 집중시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서준: 저 같은 경우는 특별채용이었기 때문에 준비과정이 조금 다릅니다. 특별채용에서는 해당 특기 실기가 굉장히 중요해요. 제가 들어온 외국어 특별채용의 경우에는 어학 · 번역능력이 우선적으로 요구됩니다. 저는 시중에 존재하는 모든 기출문제를 모아서 시간과 단어 수를 하나하나 세어가며 연습을 했어요. 영자신문을 옆에 놔두고 비교하면서 계속 준비했죠. 체력 부분이 미흡한 것 같아 체력학원을 병행했어요. 저는 운전면허 자격증을 취득하는 게 제일 어려웠어요. 지원 전에 1종 보통 자격증을 정말 아슬아슬하게 땄죠. ▲ 정현중 동문(국제학부 06)이 경찰을 준비했던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Q 국제학부에서 경찰을 준비한다는 것이 힘들진 않았나요? 정현중: 오히려 국제학부에서 배웠던 게 도움이 많이 됐어요. 국제학부 수업 중에 국제법 수업이 있었는데, 경찰학 개론에서 배우는 외사경찰 분야와 흡사한 부분이 많았어요. 공부할 때 많은 도움이 됐죠. 서준: 저도 외국어 특별채용 전형이었기 때문에 국제학부를 다녔던 게 더 큰 도움이었죠. 실기시험에서 번역문제를 풀 때, 재학하면서 경험했던 번역 아르바이트가 많은 도움이 됐어요. 국제학부 특성상 법학, 건축, 공대 등 다양한 분야에서 번역하곤 했는데, 마침 법학 분야 번역문제가 출제됐어요. 국제학부의 간 학문적인 학풍이 지금의 저를 이끈 것 같아요. 후배들도 취업만 바라보지 말고 다양한 경험을 했으면 좋겠네요. Q 경찰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서준: 아무나 하는 직업은 아닌 것 같아요. 이 일을 하다 보면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과 마주하게 되죠. 살아가면서 살인자의 얼굴을 본 적이 있나요? 변사체는요? 경찰을 준비하고자 하는 후배들이라면 기본적으로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최근 유행한 경찰 드라마를 보는 것과는 굉장히 다르기 때문이죠. 밖에서 이틀 삼일 밤을 새우면서 일할 수 있는지, 위험한 상황과 스트레스를 견딜 수 있을지. 이런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큰 정신적 고통을 견딜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해보길 바라요. 저는 이만큼 보람찬 직업이 없다고 생각해요. 다시 돌아가도 경찰의 길을 택할 겁니다. 정현중: 앞에서 말한 것처럼 경찰업무에선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언론에 가장 민감하기도 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도 하거든요. 흔들리지 않는 정신력이 중요합니다. 혹시나 경찰을 준비하는 후배들이 있다면 혼자 고민하지 말고 저희처럼 이미 경찰로 활동하고 있는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했으면 좋겠네요. 두려워하지 말고 연락하길 바라요. 여러분을 응원합니다. 글/ 황유진 기자 lizbeth123@hanyang.ac.kr 사진/ 박근형 기자 awesome2319@hanyang.ac.kr

2018-07 09

[동문]우인철 동문 "청년정치 시대 열겠다"

정치가 젊어지고 있다. 로마 첫 여성 시장 비르지니아 라지(Raggi)는 39세다. 에마뉘엘 마크롱(Macron) 프랑스 대통령은 39세에 당선됐다. 심지어 오스트리아 총리 제바스티안 쿠르츠(Kurz)는 31세에 취임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국회의원 평균 연령 55세. 30대는 겨우 두 명뿐이다. 경력과 나이를 정치능력의 중요 잣대로 삼고 있다. 여기에 출사표를 던진 이가 있다. 세대교체를 통해 새 정치를 꿈꾸는 청년, 우리미래 중앙당 조직위원장 우인철 동문(분자생명과학부 05)을 만났다. 청년 문제 해결을 위해 우 동문은 한양대에서 분자생명과학을 전공했다. 언뜻 보면 의아하다. 배운 것이 정치와 크게 관련 있어 보이지 않는다. 학생회 활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지난달 13일에 치러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출마했다. 무엇 때문에 그는 정치에 뛰어들었을까? 시작은 4학년 때 한 대외활동이었다. 우 동문은 청년 주거 문제, 등록금 문제, 취업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한 청년단체 ‘청년포럼'에 참여했다. ▲ 우인철 동문(분자생명과학부 05)과 지난 6일 우리미래 중앙당사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한창 안철수 전 바른미래당 서울시장 후보의 ‘청춘콘서트’를 기획하고 있을 때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지난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뒀다. 우 동문은 ‘청춘콘서트’에 참여한 사람들과 뜻을 모아 청년당을 창당했다. “정치를 통해 삶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적어도 등록금 문제만은 바로잡고 싶어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했죠.” 그러나, 신생 정당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득표율이 3%에 못 미쳤다. 원내 진출이 좌절됐고, 정당은 해산했다. 정치가 우리 삶을 바꿀 수 있다 우 동문은 정당 해산 후 3년간 서울시 청년허브 일자리 사업단에서 청년 혁신 일자리 사업, 청년 정책 네트워크 사업, 청년 교육 사업을 담당했다. 지난 2015년부터는 인문학 공동체 연구모임 ‘수유너머’와 청년포럼에서 청년들과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됐다. 우 동문은 청년당 시절에 못 했던 새로운 정치를 하고 싶어졌다. “정치를 통해 우리 삶을 치유하고 싶었어요.”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들과 ‘우리미래’를 창당했다. ▲ 청년임대주택사업 추진을 촉구하기 위해 철야 텐트 시위를 했던 당시 우인철 동문의 모습(우리미래 홈페이지 갈무리) 청년 문제는 곧 사회 문제다. 우 동문은 청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 서울 곳곳은 청년임대주택사업이 무산될 위기다. 일부 주민들이 반대하기 때문이다. 우 동문은 현장을 찾아가 '청년임대주택을 지키기 위한 청년텐트'를 치고 밤을 새며 시위했다. “살인적인 월세와 집값으로 휘청대는 청년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바꿔보고 싶었습니다.” 채용비리 의혹이 있는 의원의 구속수사를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뛰며 우 동문은 ‘청년들에게 잘 지내냐고 묻고 싶어’ 서울시장 후보에 출마했다고 한다. “어쩌면 이렇게 묻는 것도 조심스러운 시대입니다. 어둡다고만 할 수 없지만 만만치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방황할 수도 있고, 자유롭게 시도하고 싶어도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 환경을 고치고 싶었습니다.” 우 동문은 1만1599표(득표율 0.2%)를 받으며 7위에 이름을 올렸다. 결과만 봤을 때 아쉬움이 남을 수 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서울시장 선거는 시작일 뿐이었다. 1만 명이 넘는 서울 시민이 공감하고 선택했다. ▲ 우리미래의 슬로건 앞에서 미소짓고 있는 우인철 동문. 우 동문은 청년의 힘으로 변화하는 대한민국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청년 주거 문제 등과 관련해 계속해서 목소리를 낼 것입니다. 정치 세대 교체를 하고, 사회를 바꿔나가고 싶습니다. 2020년 총선 때는 ‘우리미래’에 원내 진출을 하는 청년 국회의원들이 한 명 이상 나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우 동문은 보편화 돼 있는 엘리트의 의미를 다시 정의한다. “엘리트는 사회에서 뛰어난 능력이 있다고 인정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회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 공동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한양대 후배들이 엘리트가 되길 바랍니다.” 글/ 유승현 기자 dbtmdgus9543@hanyang.ac.kr 사진/ 이진명 기자 rha925@hanyang.ac.kr

2018-06 10 중요기사

[동문]누구나 스마트폰 포토그래퍼가 될 수 있도록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상. 창작은 이런 지루함에서 탈피하는 좋은 해법이 될 수 있다. 글을 쓰는 것도, 작곡에 도전해 보는 것도 좋다. 그렇다면 스마트폰 사진 아티스트가 돼 보는 것은 어떨까? 누구나 스마트폰 사진 아티스트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사진작가 방현수(기계공학부 08)씨를 지난 4일 만났다. “저희 전공 수업 중에 ‘열역학’이라는 과목이 있어요. 이 수업을 4번이나 재수강을 했는데, 그래도 F학점을 받았죠.” 방현수 씨(기계공학부 08)는 자신의 대학생활을 방황했던 침체기라 말했다. 전공 공부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고, 방씨는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게 됐다. 과외와 각종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마련하던 방 씨는 첫 여윳돈으로 카메라를 샀다. ▲ 지난 4일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 공업센터에서 자신의 대학생활에서 겪었던 어려웠던 점을 설명하고 있는 방현수(기계공학부 08) 씨. “그 당시 정체된 저와 달리 매일 성장하는 동기들의 소식을 들었죠. 뒤쳐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힘들었습니다.” 그런 방 씨를 치유해 준 것은 카메라였다. 소소한 집안의 사물부터 집밖 풍경을 찍다 보니 자신에게도 잘하는 분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진으로 자신감을 얻은 방 씨는 복학을 결심했고, 당시 기계과 내 사진 동아리 '빛담'(현재는 공대 소속 동아리)에 들어가 활동했다. 다음해 11월에는 방송사 tvN에서 주최하는 ‘위시캠핑 포토스타’ 프로그램에 나가 2위를 차지했다. 사진작가로서 커리어를 쌓던 중 Frip(야외 엑티비티 플랫폼)에서 사진 강연 요청을 받았다. 카메라에서 위로를 받았던 방 씨이기에, 어떻게하면 이 감동을 청중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을까 밤낮없이 고민했다. 방법은 '스마트폰 사진 강연'이었다. 고가의 사진 장비 대신 그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보정하는 법을 알려주자 반응은 뜨거웠다. 이후에도 계속해 강연 요청이 이어졌고, 방 씨는 이 분야에서 창업 가능성을 발견했다. 이를 계기로 스마트폰 사진에 대한 강연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1인 기업을 설립하게 됐다. ▲ 방 씨가 자신의 핸드폰으로 직접 촬영한 사진(방현수 씨 본인 제공) ▲ 방 씨가 자신의 핸드폰으로 직접 촬영한 사진(방현수 씨 본인 제공) “사진을 찍으면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덜하게 나올 때가 많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장비로, 사진을 더 잘 찍을 수 있도록 사람들을 돕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방 씨는 말했다. 후배들에 대한 응원도 잊지 않았다. "전공 공부가 맞지 않아 고민하고 있는 후배들이 많을 것 같아요.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아가는 그 고민의 과정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고민하고 방황했던 덕분에 안 맞는 일은 확실하게 찾았죠. 그렇게 계속 고민하다보면 결국에는 진정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글/ 김가은 기자 kimgaeun98@hanyang.ac.kr 사진/ 강초현 기자 guschrkd@hanyang.ac.kr

2018-06 09

[동문]'늦게 피는 꽃이 더 아름답다'...베트남의 영웅 박항서 동문(체육 77) (5)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중심에 한양인이 있었다. 바로 박항서 동문(체육학과 77)이 그 주인공. 박 동문은 지난해 10월 베트남 축구 성인 대표팀과 23세 이하(이하 U-23)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했다. 베트남은 올해 초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에서 준우승을 거뒀다. AFC가 주관하는 대회에서 동남아시아 국가가 결승에 진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베트남의 영웅’이 된 박 동문의 이야기를 담았다. 악바리의 드리블 성미가 깔깔하고 고집이 세며 모진 사람. 박 동문의 별명은 ‘악바리’였다. 늦은 시작탓에 남들보다 열심히 했다고 한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나니 축구가 너무 하고 싶었습니다. 1학년 2학기 때부터 고등학교 축구팀에 들어갔죠. 운동에 대한 천부적인 소질도 없었기 때문에 다른 선수들을 따라잡기 위해 죽기 살기로 노력했습니다.” 박 동문은 경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로 축구 선수가 되기 위해 한양대 체육학과에 진학했다. ▲ 럭키 금성 선수 시절 박항서 동문(체육학과 77)이 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일간스포츠 제공) 박 동문은 대학 시절을 회상했다. “고(故) 최은택 교수(체육학과)님과 고(故) 배기면 교수(체육학과)님의 가르침으로 선수로서 한층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고마우신 분들입니다.” 박 동문은 한양대 졸업 후 제일은행 축구단에 입단했다. 얼마 있지 않아 육군 축구단에서 군복무를 했다. 전역하고 럭키 금성 황소(현 FC 서울)에서 프로축구 선수로 데뷔해 맹활약했다. 1985년에는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1986년에는 주장으로 선임됐다. 선수에서 지도자로 “5년간의 선수 생활을 끝내고 지도자의 길을 걷기로 했습니다.” 박 동문은 후배 선수를 키우고 싶었다. 자신을 존재하게 만들어준 은사들에게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일찍 선수 생활을 그만 두는 것도 아쉬웠죠. 하지만 빨리 지도자로 자리 잡을 수 있어 후회하지 않습니다.” 1989년부터 안양 LG 치타스(현 FC 서울)의 트레이너로 활동했다. LG 치타스의 코치를 거쳐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코치를 맡기도 했다. 2002년에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수석코치로 히딩크 감독을 보좌했다. (지난 기사 보기 - 월드컵 4강 신화 일군 `특급 참모`) ▲ 박항서 동문이 베트남 축구대표팀 선수들과 훈련하고 있다. (베트남 축구협회 제공) 시간이 흐르며 월드컵 열기가 식듯, 박 동문은 점점 사람들에게서 잊혀졌다. 2015년 12월에는 상주 상무 감독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다. 7개월 전에는 3부 리그인 창원시청 축구단 감독을 맡고 있었다. 젊은 지도자들이 계속 배출되는 상황에서 불가피한 일이었다. 박 동문에게 베트남은 기회의 땅이었다. 선수와 지도자 경험을 통해 갖게 된 지식과 철학을 쏟을 수 있는 곳이었다. “축구 인생에 있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후배 감독들에게도 해외 진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59세라는 늦은 나이에 박 동문은 새로운 전성기를 맞았다. 베트남 축구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AFC 주최 U-23 챔피언십에서 베트남을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베트남 정부로부터 3급 노동 훈장을 받았다. 노동, 창의성, 국가건설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세운 사람에게 수여하는 훈장으로 3급이 가장 높다. 불과 작년만 해도 밀려난 지도자였던 박 동문. 지금은 박항서 열풍을 일으키며 자신의 업적을 새로 쌓고 있다. ▲ <집사부일체>에 출연한 박항서 동문이 ‘사부의 한마디’를 말하고 있다. (SBS 제공) 끝으로 박 동문은 한양인에게 격려의 한마디를 전했다. “고개 숙이지 마세요.” 베트남 선수들에게도 했던 말이다. 박 동문 역시 선수와 지도자의 길을 걸으며 많이 넘어졌고, 힘든 순간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고개 숙이지 않고 묵묵히 달린 결과 끝내 베트남의 별이 됐다. “한양인으로서 긍지를 가지고 도전하는 삶을 사세요. 최선을 다했으면 당당해도 됩니다. 결과에 자부심을 가지세요.” 글/ 유승현 기자 dbtmdgus9543@hanyang.ac.kr

2018-06 04

[동문]춤을 통해 그가 말하는 세상

무용은 추상적이고, 정형화되지 않는다. “무용은 말로 할 수 없는 말이에요.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너무 많은 느낌과 생각을 은유적으로 실체화 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은은하면서 강력하기도 한 춤은 말보다 더 강한 메시지를 세상에 전한다고 김성용 동문(무용학 박사과정)은 말한다. 1997년 만 20세 최연소로 제27회 동아무용콩쿠르 대상 수상. 이어서 2000년에 일본으로 넘어가 개인작으로 무대를 선보이더니, 2년 뒤 한국인 최초로 나고야 국제 현대무용 콩쿠르에서 은메달을 수상하며 일본을 포함, 세계를 주목시켰다. 지난해 12월 대구시립무용단 예술감독 겸 안무자로 취임한 무용인 김성용 동문이다. ▲ 1976년생, 43세의 나이의 젊은 리더십을 갖춘 김성용 동문(무용학 박사과정) (김 동문 제공) 어린 시절 주변 친구들이 과학자, 선생님을 꿈으로 이야기 할 적에도 김성용 동문은 안무가를 꿈꿨다. 그것도 대구 무용단의 안무감독이라는 구체적인 꿈을 그렸다. 김 동문은 10대 시절부터 몸으로 활동하는 것을 곧잘 했다.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연기를 추천했다. 당시 대구에는 연기를 배울만한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경북예술고등학교에 입학했고, 이후 남자 무용수로서의 첫 걸음을 내딛었다. 이후 한양대 무용학과에 입학해 2000년에 학사 과정을 마친 김 동문은 무용학으로 박사과정까지 이어가고 있다. 부임 후 첫 데뷔작 ‘군중’과 그 이후 김 동문은 "대구시립무용단에서 최종 오퍼를 받았을 때에도 실감나지 않을 정도로 기뻤다"고 말했다. 무용단 데뷔작으로는 <군중>을 기획했다. 김 동문이 대구시민들과 첫 조우한 작품이다. <군중>은 폭력이라는 문제의식을 독창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들인 가해자, 피해자, 방관자 모두에게 상처가 존재한다는 다소 어둡지만 희망적인 내용이다. 이 작품으로 김 동문은 지난 3월 13~14일 양일간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정기공연을 마무리지었다. ▲ 작품 <Moving Violence Episode 1&2>의 공연 모습. (김성용 동문 제공) 김 동문은 “순수 예술가들은 '작품의 깊이'와 '대중성'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지기 쉽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예술가들은 그것을 극복하고 합의점을 찾아 표현을 멈추지 않는다. 관객이 문화와 예술을 경험하고, 일상에 풍요를 가져다 주는 것이 예술의 궁극적인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 동문은 더 많은 관객들과 만나길 희망한다. 관객들에게 전할 메시지를 무대에 담아내 대중과 소통을 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무용수로서의 삶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차세대 독보적인 현대무용가로서 김 동문은 8월 29일 창무국제공연예술제에 초청받아 신작 발표를 준비중이다. 10여 명의 무용수들과 투어공연을 할 예정이다.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일본 등에서 러브콜이 쇄도하고 있다. 9월 베트남 호치민 오페라하우스 무대와 11월 미국 플로리다 던컨시어터 공연 등을 준비하며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다. ▲ 무대 위 김성용 동문의 모습. 흡인력 있는 눈빛과 연기로 몰입을 고조시킨다. (김 동문 제공) 무대를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잠재돼 있는 무언가를 찾게 해주고 싶다는 김 동문. 일상에서 느끼지 못한 감정과 감각을 느끼게 해주고 그 안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야 말로 그가 실현하고자 하는 무용 예술의 가치다. 글/ 김민지 기자 melon852@hanyang.ac.kr

2018-05 31

[동문][NOW 꿈꾸는 사람들] 문화재 연구는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

지난 1월 최종덕 동문이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했다.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장과 숭례문 복구단 단장 등을 거치며 문화재 복원에 대한 철학을 확고히 다지게 됐다는 최 소장. 산업화로 밀려난 소중한 전통기법을 되살리는 데 헌신하고 싶다는 그에게서 우리 옛것에 대한 애정이 물씬 느껴졌다. 글. 박영임 사진. 안홍범 ▲ 최종덕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 (건축공학 78) 문화재를 문화재답게 “양은그릇을 사려고 놋쇠 그릇을 죄다 내다 팔았던 시절이 있었죠. 포마이카 가구(합판 표면을 플라스틱 재료 등으로 코팅한 가구)를 들여놓기 위해 손때 묻은 고가구를 갖다 버리기도 했고요. 궁핍한 시절이라 뒤를 돌아볼 여력이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도 경제적 삶과 함께 정신적 삶을 소중히 여겨야 할 때입니다.” 우리 옛것이 홀대받았던 시절. 산업화의 거센 물결에 휩쓸려 명맥이 끊긴 전통을 이제 와 이으려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어떤 전통은 되살릴 방법조차 없다. 더욱이 관건은 문화재를 ‘어떻게’ 복원하느냐이다. 외양의 재현에 만족할 것인가, 문화재를 만들던 당시의 기법까지 살려야 할 것인가. 얼핏 생각해도 전통 재료와 전통 기법까지 되살리는 것이 옳을 듯한데, 최 소장은 현실은 다르다며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숭례문 복구작업 전까지만 해도 건축물 복원에 쓸 기왓장을 일반 공산품처럼 공장에서 찍어내 KS마크 심사를 통과해야 했다고. “숭례문 복구단장을 맡으며 느꼈던 점인데요. 문화재 복원 역시 산업의 역사와 궤를 같이합니다. 능률과 효율성을 중시했던 거죠. 그래서 모든 것이 공업화, 표준화됐습니다. 사실 문화재는 그렇게 표준화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말입니다. 앞으로 조상들의 생각을 헤아려 우리 문화재를 문화재답게, 그 근본으로 돌아가 진정성을 회복하는 데 힘을 쏟겠습니다.” 이런 환경 가운데 우리 문화재의 연구, 조사, 개발 등 문화유산과 관련된 종합 연구를 수행하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역할이 막중하다. 최 소장은 임기 내내 문화재 보존의 올바른 방향성을 정립하는 일에 온 힘을 다하겠다며 각오를 다졌다. ▲ 최 소장은 '문화재는 우리의 정체성이자 옛 문화를 볼 수 있는 창과 같습니다. 공간의 역사성과 시간적 깊이를 더해주며 우리의 생활을 더 풍요롭게 해주고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라고 말한다. 잊을 수 없는 창덕궁과 숭례문 문화재청 여러 부서를 거치며 창덕궁관리소장, 숭례문 복구단 단장, 문화재보존국장, 문화재정책국장, 국립고궁박물관 관장 등을 역임한 최종덕 소장은 그 어느 일 하나 보람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회고했다. 그래도 굳이 하나를 꼽자면 2005년부터 2006년까지 창덕궁관리소장으로 일하던 때를 잊을 수 없다. 마침 창덕궁 창건 (1405년) 600년을 맞은 역사적인 해에 소장직을 맡았다. “당시 창건 600주년을 기념하며 어가행렬 재현 등 다양한 행사를 열고, 기념 책자 발간과 함께 ‘세계의 궁궐과 창덕궁-21세기 고궁의 보존과 활용’이라는 주제로 국제 학술대회도 개최했습니다. 그래서 더 보람이 컸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2년 정도 창덕궁에서 거주하는 특별한 경험도 했다. 명분은 관리·감독 강화였지만, 궁궐 생활이 어찌 아무나 경험해 볼 수 있는 일이겠는가. “CCTV도 없던 시절이라 한밤에도 경내를 홀로 순찰하곤 했습니다. 창덕궁은 사계절마다 독특한 매력을 지닌 곳입니다. 정자, 돌, 나무, 조형물 등 옛사람들의 흔적도 많이 느낄 수 있고요.” 특히 낙선재와 연경당, 부용정 일대를 좋아한다는 최종덕 소장에게 창덕궁은 언제나 평온하게 마음을 쉬일 수 있는 그런 곳이다. 그런가 하면 숭례문은 문화재 보존에 대한 철학을 다시 한번 숙고할 수 있게 한 따끔한 교훈의 장이다. 2008년 화재로 소실된 후 5년간 숭례문 복구 작업을 진행했을 때 그는 복구단 단장을 맡았다. 당시 복구 작업은 국민적 관심의 대상이었던 만큼 관계 기관 모두 의욕적으로 진행했다. 그러나 단청 박락 현상이 일어나 부실 복구라는 불명예는 물론이고, 러시아산 소나무 논란 등 온갖 헛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최종덕 소장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가감 없이 <숭례문 세우기-숭례문 복구단장 5년의 현장 기록>이라는 책으로 엮었다. 책이 출간된 후 직위 해제를 당하기도 했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복구단장을 맡으며 매일 기록을 남겼습니다. 한국전쟁 때 훼손돼 1960년대에 대규모 수리작업이 있었지만 아주 간단한 수리 보고서만 있어 복구 작업을 하면서 아쉬운 점이 많았습니다. 복구 작업은 과거와 끊임없이 대화하는 작업입니다. 그런데 기록이 없으면 과거로부터 대답을 들을 수 없는 거죠. 후대를 위해 어떤 생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그러한 결정을 하게 됐는지 반드시 기록을 남겨야 합니다. 그리고 세금을 낸 국민들에게 보고하는 것은 공무원으로서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최종덕 소장은 오로지 후대에게 문화재 복원·복구의 본보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자랑하고픈 공적뿐 아니라 숨기고 싶은 과실까지 세세히 책에 담았다. 그는 “조선시대만 해도 국가적인 행사는 항상 의궤를 작성해 기록을 남기는 전통이 있었다”며 “그러한 좋은 전통은 다시 되살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책 한 권이 인도한 문화재 사랑 최종덕 소장은 숭례문 복구 작업에 대한 책뿐 아니라 <조선의 참 궁궐 창덕궁> 등 창덕궁에 대한 책도 여러 권 출간했다. 학창 시절 일기도 쓰기 싫어했다는 그는 글쓰기와는 담을 쌓고 살았던 학생이었다. 그러던 그가 어떻게 책을 쓰게 된 것일까. 그 사정에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부추김 아닌 부추김이 있었다. 창덕궁관리소장으로 근무할 당시 유홍준 전 청장은 창덕궁에 대한 책을 써보는 게 어떻겠냐며 넌지시 제안했다. 그러더니 만날 때마다 원고의 진행 상황을 점검하는 것이 아닌가. 고집스러운 추궁에 결국 최 소장은 책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책을 통해 대중에게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을 알리는 것이 얼마나 보람된 일인지 잘 알고 있다. 사실 최종덕 소장이 문화재와 관련된 일을 하게 된 것도 유홍준 전 청장의 힘이 컸다. 건축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여느 건축학도들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건물을 올리는 건축가를 선망했다. 대학 시절만 해도 문화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유일하게 문화재와 관련된 건축사 수업에서 D학점을 받은 적도 있어 나중에 문화재와 관련된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대학 졸업 후 5급 공채 기술직(기술고시)에 합격해 당시 건설부에서 사무관으로 일하던 중 유홍준 전 청장이 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책을 읽고 문화재와 관련된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문화재관리국으로 보직 변경을 신청했습니다. 주위에선 작은 부처로 옮기면 출셋길 막힌다고 말렸었죠.”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재미와 보람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그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남들이 좋아하는 것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문화재관리국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는 미국 오리건대학교에서 역사보존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는 등 문화재에 대한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문화재와 관련된 일을 하며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조금 더 일찍 관심을 갖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일상에 공간의 역사성과 시간의 깊이를 더하다 최종덕 소장은 다소 우회하긴 했지만 기꺼이 열정을 쏟을 대상을 찾았기에 후회 없이 30여 년의 공직 생활에 신명을 다했다. 하지만 조금 더 일찍 길을 걷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크다. “당시 정국이 어수선하기도 했지만 솔직히 말해 대학 생활을 성실하게 보내지는 못했습니다. 군대를 다녀온 후 뒤늦게 철이 들었죠. 그래서 후배들에게는 최대한 대학 생활에 열심히 몰입하라고 조언해주고 싶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길을 좀 더 일찍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최 소장은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으로서 문화재 사랑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문화재는 우리의 정체성이자 옛 문화를 볼 수 있는 창과 같습니다. 우리의 일상적 공간을 아파트가 차지하면서 옛 흔적들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문화재는 공간의 역사성과 시간적 깊이를 더해주며 우리의 생활을 더 풍요롭게 해주고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그 가치를 보존하는 일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주길 부탁합니다.” 사랑한대 2018년 05-06월호 이북 보기

2018-05 31

[동문][도전#해시태그]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는 블랙루비스튜디오

11세기에 발간된 <보석의 서>라는 책에서는 루비를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보석이라고 표현했다. 블랙루비스튜디오라는 이름은 이러한 전설에서 따왔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블랙루비처럼 독특한 자신만의 색을 어디서든 발현하고 싶다는 뜻이다. 글. 이주비(학생기자) 사진. 안홍범 ▲ 소재우 블랙루비스튜디오 대표(융합전자공학 12) 게임이 좋아서 게임을 만들다 2016년에 문을 연 블랙루비스튜디오의 첫 도전 작품은 바로 게임. 소재우 대표는 중학교 때부터 게임을 취미 삼아 만들어왔다. “한창 게임을 만들 때 저는 집단지성에 꽂혀 있었어요. 게임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좋아서 하는 거잖아요.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의 생각이 모여 무언가가 이뤄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1년 동안 본격적으로 게임 제작 공부를 했어요.” 게임을 통한 집단지성은 어떻게 이뤄지는 것일까. 일례로 생물학 난제를 해결해서 과학지 <네이처>에 실린 게임도 있다. 게임 유저가 푸는 퍼즐이 생물학 난제였는데, 개인의 힘으로는 풀 수 없었던 문제를 몇 만 명 유저의 협력으로 금방 풀어버린 것. 소 대표는 집단지성과 자발적 참여를 동시에 유도하는 데 게임만큼 좋은 매체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높았다. “재미있는 게임 하나를 만들기도 어려운데 집단지성까지 접목하는 게 만만치 않았어요. 게임을 통해 사람들의 행동을 집단지성으로 활용하려면 행동 패턴까지 다 분석해야 했으니까요. 게임의 성공과 치밀한 설계를 모두 달성하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가 집단지성에 관심을 둔 것은 스타트업의 현실적인 한계를 고려한 결과였다. 인력, 시간, 자본 등 모든 면에서 제한적인 스타트업에서는 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그러나 집단지성을 이용하면 달랐다. 게임에 참여하는 이들을 통해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자동화 시스템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두려움을 이겨낸 즐거움 인생에 쉬운 길은 없다지만, 특히 창업은 많은 위험 요소와 큰 부담을 안고 가야 하기 때문에 선뜻 발을 떼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재우 대표가 재학 중 창업에 도전한 가장 큰 이유는 워라밸(Work & Life Balance), 즉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제가 좋아하는 개발을 일로 삼으면서 한편으론 즐기고 싶었어요. 평범한 직장인에게 직업은 그저 일일뿐인 경우가 많잖아요? 전 지금 제가 하는 일이 아주 재미있어요.” 창업 과정에서 어려운 점은 없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너무 많아 무엇부터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아이템을 선정하고 팀원을 구하는 것부터 매출에 대한 고민까지 직접 기업을 운영하기 위해선 신경 써야 할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건 마음에 맞는 팀원을 구하는 일이었다. 창업 초반엔 팀원 변동이 잦았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작년에 핵심 멤버가 고정됐고, 현재는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파트너를 구하기까지 소재우 대표가 내건 조건은 딱 두 가지였다. “장난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첫 번째 조건은 내일부터 당장 출근하는 거예요.(웃음) 정말 중요한 조건이죠. 두 번째는 배움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 스타트업은 아무래도 업무와 상황이 계속 변하니까 끊임없이 공부하는 게 중요해요.” 파트너를 구했다 하더라도 창업까지는 첩첩산중. 다행히 학교의 도움이 있었다. 교내에는 다양한 창업 프로그램들이 있는데 이를 통해 창업을 꿈꾸는 이들은 조언과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소재우 대표도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지금의 블랙루비스튜디오를 만들었다. 블랙루비스튜디오를 움직이는 엔진 여러 게임과 애플리케이션을 만들면서 현실적인 한계에 직면한 소재우 대표는 시스템의 핵심 기반인 엔진부터 만들어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현재는 엔진이 어느 정도 구축되면서 이를 토대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게 됐다. 엔진은 시스템을 갖추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블랙루비스튜디오는 엔진을 토대로 20여 가지의 파생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서비스를 선별하는 기준은 자동화 가능 여부다. 스타트업의 인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동화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블랙루비스튜디오의 주요 서비스로 꼽히는 파인드빅파이브(Findbig5)도 같은 맥락에서 탄생했다. 이 서비스는 전 세계 30여 개의 언론사에서 IT 정보를 실시간으로 수집한 다음 주요 이슈를 선별해 고객에게 제공한다. 물론 모든 과정은 자동화로 이뤄진다. 여기서 빅파이브(Big5)는 페이스북,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아마존의 다섯 개 IT 기업을 의미한다. 이 기업들은 나스닥(NASDAQ)의 40%를 차지한다. 다섯 기업의 영향력과 지위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올 3월에 출시했으니 앞으로 더 지켜봐야겠지만, 대부분의 고객은 정보가 많이 필요한 직업군에 계신 분들입니다. 리서치나 컨설팅 분야, 혹은 국내 IT 소식보다는 해외 IT 뉴스가 필요하신 분들이죠.” 지난해 12월 블랙루비스튜디오는 아이크래프트로 인수됐다. 업계에선 성공적인 인수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인수 전후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크래프트 관계자와 정기적으로 미팅을 하는데, 많은 조언을 얻습니다. 사업 체계를 잡는 데 도움을 받고 있어 저와 팀원들은 아이디어와 개발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됐죠.” ▲ 소재우 대표가 개발한 북극을 배경으로 한 3D 퍼즐 게임 Arctic Episode ▲ 소재우 대표가 개발한 북극을 배경으로 한 3D 퍼즐 게임 Arctic Episode 함께여서 더욱 빛난다 블랙루비스튜디오는 자신만의 길을 만들며 묵묵히 걸어왔다. 그렇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다. “당장은 기술적인 부분에 집중하기보다는 새로운 것들을 접하고 공부하길 좋아하는 팀원들을 많이 뽑고 싶어요.” 그는 인터뷰 내내 팀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어느덧 창업 3년 차. 사업을 위해 잠시 휴학 중인 그에게 예비 창업자들을 위한 조언을 구했다. “팀원을 구하기 어려울 때는 학교 안에서 찾아보세요. 생각보다 쉽고 빠르게 만날 수 있어요. 사람은 완벽하지 못한 존재잖아요. 팀원이 한 명이라도 더 늘면 제가 보지 못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고,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넓어지는 것 같아요. 제가 못하는 걸 팀원들이 보완해줄 수 있죠.” 블랙루비스튜디오의 강점 역시 팀원들이다. 소재우 대표는 새로운 걸 배우는 데 두려워하지 않는 팀원들이 곧 회사의 경쟁력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블랙루비스튜디오 구성원들은 업무 외에도 다양한 분야의 스터디를 함께 진행하며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블랙루비스튜디오의 궁극적인 목표는 기술의 생활화다. 소재우 대표는 누구나 알 만한 기술개발 서비스를 만들고 싶다고 밝혔다. 아울러 원하는 일을 하면서 재미있게 일할 수 있는 회사를 꿈꾼다. 실제로 팀원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의견을 내고 회사의 정식 업무 외에 사이드 프로젝트도 진행할 수 있다. 구성원들이 자신의 일을 좋아하고 회사에 애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소재우 대표에게는 세 가지 취미가 있다. 게임, 개발, 독서가 그것이다. 그런데 요즘 그중 하나가 탈락 위기에 놓였다. “게임 개발 프로젝트를 엎고 나서 게임에 대한 흥미가 전보다 줄었어요(웃음). 만약 개발을 놓아버리면 제 삶이 팍팍해질 거예요. 취미를 더 잃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남은 두 가지를 정말 잘해야 해요.” 흔히들 취미와 직업은 따로 두라고 한다. 취미는 회사 밖에서 즐겨야 한다지만, 소재우 대표는 여전히 일터에서 재미를 찾는다. 그리고 좋아하는 일, 재미있는 일을 그 누구보다 잘할 수 있게 될 때까지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 소 대표는 '제가 좋아하는 개발을 일로 삼으면서 한편으론 즐기고 싶었어요. 평범한 직장인에게 직업은 그저 일일뿐인 경우가 많잖아요? 전 지금 제가 하는 일이 아주 재미있어요.' 라고 말한다. 사랑한대 2018년 05-06월호 이북 보기

2018-05 31

[동문][사랑나눔+Ⅰ] 홈런왕 헐크 라오스에 야구를 심다

맨발의 아이들이 야구단 모집 공고를 보고 찾아왔다. 사정이 나은 아이는 다 떨어져 가는 신발이나 폐타이어를 잘라 만든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테스트 삼아 야구공을 던져줬더니 작은 축구공인 줄 알고 발로 받았다. 이랬던 아이들이 5년이 지난 지금 2018 아시안게임을 준비 중이다. 야구 불모지 라오스에서 이만수 감독이 일군 기적이다. 글. 전수아 사진. 안홍범 ▲ 이만수 라오J브라더스 구단주(체육학 78) 야구보다 물과 빵을 찾아온 아이들 2014년, 이만수 감독이 라오스 땅을 밟기 전까지 그 나라에는 야구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야구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던 아이들이 야구를 배우겠다며 찾아온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처음 만난 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더니 ‘하루 세끼 먹는 것’이라더군요. 야구단에 지원한 아이들 중에는 물과 빵을 준다는 이야기에 솔깃해서 온 아이도 많았지요.” 먹고 살기도 어려운 와중에 야구를 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던 이만수 감독은 어렸을 적 그가 야구를 처음 배우던 때를 떠올렸다. 라오스의 아이들처럼 야구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친구를 따라 야구팀에 들어갔다. 다들 하루 살기도 빠듯한 형편에 야구 장비를 마련할 길은 자급자족뿐. 신문지나 스케치북의 도톰한 표지를 뜯어서 글러브를 만들고 공사장에서 각목을 얻어와 배트 대신 휘둘렀다. 기부받은 야구공은 실밥이 다 터져 선수들이 각자 기워서 썼다. 지금의 야구 인프라와 비교하면 천지 차이다. 그런 환경에서 야구를 했어도 얼마나 즐거웠는지, 어떤 꿈을 꿀 수 있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이만수 감독은 두려움 없이 아이들의 손을 잡았다. 열 번 찍혀 라오스로 넘어간 헐크 그런데 왜 라오스였을까? “2013년 가을에 이메일 한 통을 받았습니다. 라오스에 거주하는 한국인인데 이곳에 와서 야구를 가르쳐 줄 수 없느냐는 거예요. 전혀 일면식도 없던 분이고, 게다가 SK와이번스 감독으로 한창 바쁠 때라 대답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메일이 한 달 동안 계속 오더군요.” 이야기라도 들어보자 싶어 이만수 감독은 전화를 걸어 왜 라오스에서 야구를 하려는 것이냐고 물었다. 돌아온 답은 야구 불모지 라오스에 한국 최고의 인기 스포츠인 야구를 전파하고 싶다는 것. 이 감독은 시간 될 때 가보겠노라며 통화를 마쳤다. 이는 사실 완곡한 거절의 표현이었다. 문제는 듣는 이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후 틈만 나면 라오스에서 전화가 왔다. 언제 오실 수 있느냐며 애타게 기다리는 그에게 2014년 봄에는 사비를 털어 1,000만 원 상당의 야구 장비를 보내주었다. 프로팀에서 처분하려고 내놓은 장비 중에서 쓸 만한 것을 골라 보내주기도 했다. 얼마 후 라오스에서 사진을 몇 장 보내왔다. 사진 속에는 어디서 모았는지 몇 명의 아이들이 SK와이번스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유니폼 소매며 바짓단을 둘둘 접어 입은 아이들의 모습에서 어렸을 적 도움을 받았던 기억이 난 이만수 감독. 그렇게 슬슬 라오스 쪽으로 마음이 기울던 차, 감독직을 사퇴하게 된 이 감독은 결국 라오스로 향했다. 그리고 이 감독을 끈기 있게 찾은 그 교포와 함께 ‘라오J브라더스’라는 야구단을 만들었다. 진심이 통하기까지 절대 깨지지 않을 한국 야구 프로야구사 최초의 기록을 쓴 사나이, 홈런왕 헐크, 이 화려한 수식어에 걸맞게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이만수 감독. 그의 전성기를 기억하는 팬들은 언제 어디서든 그를 환영했다. 그런데 라오J브라더스를 맡고 나서는 상황이 변했다. “야구단을 운영하려면 필요한 게 많습니다. 제가 가진 것을 보태는 것으로는 역부족이어서, 감독 겸 구단주직을 맡아 직접 후원 유치에 나섰지요. 우선은 저를 좋아해주시던 분들을 찾아갔는데, 그때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거절이란 걸 배웠어요.” 라오J브라더스 얘기를 꺼내는 순간 느껴지는 급격한 온도 차에 당황스러웠던 것도 잠시, 다른 분을 찾아가면 잘 들어주시겠거니 하며 희망을 품었던 그는 연이은 거절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거절은 라오스에서도 이어졌다. 지원을 받기 위해 지자체와 정부 기관의 문을 두드려 봤지만 거의 2년간 문전박대만 당했다. 한편에서는 이만수 감독의 도전을 두고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겠느냐는 반응도 보였다. 희망과 도움을 주는 이보다 거절과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더 많았던 때. 그래도 이만수 감독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최선을 다했다. 라오스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벽지를 돌며 아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쳤고, 강연 활동이나 광고를 찍고 얻은 수입을 라오J브라더스 살림에 보탰다. “몇 달 지나니까 제 진심이 조금씩 통하더군요. 언론에도 라오J브라더스가 소개되면서 전국에서 십시일반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셨습니다. 야구 장비와 후원금이 모이기 시작했죠.” 라오스 정부에서도 관심과 도움을 보내주었다. 행정적인 지원과 함께 국제 대회에 참가할 수 있도록 야구협회와 야구연맹을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해준 것. 또한 야구로 아이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준 공로를 인정해 이만수 감독에게 2016년에는 총리상을, 올해 초에는 대통령상을 수여했다. 아이들과 함께 꾸는 꿈 라오J브라더스도 이제 5년 차. 이만수 감독은 많은 분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전한다. 훈련장도 서울시설공단에서 재능기부로 지어주었다. 2년 전에는 국제교류재단 초청으로 라오스 아이들이 부산에 오기도 했다. 비행기를 처음 타고 부산에 온 아이들은 야구 경기를 관람하고 한국 문화를 체험했다. 매일매일 신나는 경험을 한 아이들은 마지막 날에는 집에 가기 싫다며 펑펑 울었다고. 그런 아이들을 겨우 달래 라오스로 돌아간 후, 그는 아이들에게 다시 물었다. “너희들은 꿈이 뭐니?” 큰 기대 없이 던진 질문에 아이들은 놀라운 대답을 들려주었다. “한 아이는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싶다고 하고, 다른 아이는 라오스가 의료 환경이 열악하니 의사가 되어 아파도 참고 사는 친구들을 도와주고 싶다더군요. 비로소 꿈이 생긴 아이들을 보면서 뿌듯한 마음이 드는 한편 괘씸한 거예요. 기껏 가르쳐 놨더니 야구하겠다는 애는 없냐고 볼멘소리를 했더니 두 아이가 야구 열심히 해서 한국에서 뛰겠다기에 그래 잘해보자 했지요.” 하루 세끼 챙겨 먹는 게 꿈이던 아이들에게 새로운 꿈이 생겼다. 야구를 하면서 노력과 성장의 기쁨을 맛본 덕분이다. 오늘도 열심히 훈련 중인 아이들은 오는 6월 화성시 초청으로 진행될 미니캠프에 참가할 계획이다. 캠프 후에는 라오스 국가대표를 꾸려 2018 아시안게임에 출전한다. 실력으로 따지면 아시안게임에 참가할 다른 팀에 한참 못 미치지만 설령 어마어마한 점수 차로 지더라도 상관없다는 이만수 감독. 큰 무대에 서고, 월등히 뛰어난 상대와 겨뤄보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배우고 성장한 아이들 중에 야구 지도자가 탄생하고, 그리하여 아직은 계획 중인 라오스 최초의 야구장에서 야구 리그를 여는 것. 야구인 이만수의 새로운 꿈이다. 사랑한대 2018년 05-06월호 이북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