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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 17

[동문]기술고시, 공익 기여라는 꿈의 발판이 되다 (1)

자연과학 분야의 인재를 선발하는 국가고시인 '5급 기술 국가공무원 공개경쟁채용시험(이하 기술고시)'. 2017년 기술고시 최종합격자 73명 중 한양대 출신은 무려 15명이었다. 그중 권용은(기계공학 13), 박성열(전기생체공학 12), 전의건(건축공학 08) 동문과 조원담(화학공학과 4) 씨는 주요직렬 4개에서 수석합격의 기쁨을 맛봤다. 수험기간과 택했던 공부 방법은 각자 달랐지만, 모두 하나의 공통된 목표를 향해 전심전력했다. 기술고시 합격을 통해 꿈에 한층 더 가까워진 전의건 동문과 조원담 씨를 직접 만났다. 마라톤과 같았던 수험생활 “2차 시험의 마지막 과목을 치르기 전날, 수많은 유성이 저에게 쏟아지는 꿈을 꿨어요. 상서로운 기운과 함께 다음날 시험장에 입실했는데, 제가 특별히 잘하는 분야의 문제가 나와서 수석합격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한양대 기술고시반에서 꾸준히 공부를 이어나간 전의건 동문은 4년 만에 합격과 수석합격,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았다. 공익에 이바지할 수 있는 직업을 원했던 전 동문은 20살 때의 진로 탐색 시간을 통해 기술고시를 처음 알게 됐다. 항상 관심은 있었지만,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하게 될 줄 몰랐던 그는 학군단 전역 직후 고시반에 들어갔다. “살아가면서 뭘 해야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봤는데, 기술고시가 가장 가치있는 길이었어요.” ▲”공공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돼서 봉사활동도 했었어요. 기술고시에 응시한다면 제 전공도 살릴 수 있고, 더 큰 범위에서 공익 달성에 기여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전의건 동문(건축공학부 08)은 지난 2014년 6월에 고시반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다. “1, 2, 3차 시험이 모두 처음이라 어떻게 시험을 봐야 할지 걱정이 많았어요. 그래서 전공시험에 임하는 마음으로 시험을 쳤어요. 그 마음가짐이 저를 합격의 길로 인도해준 것 같아요.” 학교 재학 중 기술고시를 급하게 준비한 조원담 씨는 지난 2016년 11월에 공부를 시작해 준비 12개월 만에 당당히 합격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빠듯한 시간 동안 쉴새 없이 책상 앞에 붙어있었던 그다. 평소 공직자인 아버지가 헌신적으로 국가를 위해 일하는 모습도 조 씨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제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나 이루고 싶은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기술고시가 제일 적합했다고 생각해요.” ▲조원담(화학공학과 4) 씨는 ”합격도 불확실한 상황이었다"며 "준비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올해는 정말 기대를 안 했는데, 운이 따르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합격 소감을 전했다. 반복적으로, 또는 효율적으로 전 동문과 조 씨가 선호한 공부 방법은 달랐다. 반복적인 암기 학습을 선호했던 전 동문은 황농문 저자의 <몰입>을 읽고 감명을 받아 공부할 때 적용했다. “한 가지 문제에 대해 골똘히, 그리고 자주 생각하면 효율이 극대화된다는 내용이었어요. 저도 수험 기간 동안에는 공부하고자 하는 것을 종일 생각했어요." 공부와 수영을 병행하던 그는 아침에 수영하면서도 공부했던 것 중 모르거나, 헷갈리는 것들을 연상했다. 밥을 먹거나, 샤워하거나, 잠자기 직전에도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갔다. "하다못해 꿈속에서까지 나왔던 것 같네요." 조 씨는 “기출문제를 잘 본 것이 단기간에 합격할 수 있던 방법”이라고 말했다. 미리미리 해둔 전공 공부 덕에 수월했다.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이 실제 시험에서 많이 출제돼요. 그런 관련 수업들 위주로 수강했던 것 같아요. 그 지식을 기반으로 기출문제를 보며 출제유형을 익히고, 출제 가능성이 높은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략했습니다.” 4학년 1학기 재학 중 2차 시험 준비를 해야 했던 조 씨는 어느 것을 우선순위로 둬야 할지 고민했지만, 부담이 적은 과목 위주로 선택한 결과 2차 시험에 시간을 더 할애할 수 있었다. ▲’굴을 파야 금을 얻는다.’ 하나의 관문 기술고시를 통과한 두 사람의 미래 공직자로서의 모습이 기대된다. 같은 시기, 고시반에서 상주하다시피 했던 전 동문과 조 씨는 고시반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다음은 전 동문의 설명. “물리적 혜택은 기숙사와 식대, 그리고 공부 장소를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받는 거예요. 또 다른 혜택으로는 선배들이 구축해놓은 자료들로 다른 수험생 친구들과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죠.” 또한, 일주일에 같은 과 수험생들끼리 한 번씩 모여 스터디를 한 것도 큰 도움이 됐다고. “진도를 정해놓고 같이 공부를 하고,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서로 공유하면서 보완할 수 있었어요.” 조 씨는 힘든 순간을 공유하며 서로에게 위로가 돼준 팀원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원대한 목표를 향해 기술고시라는 큰 장벽을 넘어선 두 사람의 추후 계획은 구체적이었다. 전 동문은 국토부 녹색건축과에서 일하는 것이 목표다. “궁극적으로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요. 그게 사실 제일 어렵잖아요. 저를 보고 사람들이 ‘저 사람 일 참 잘한다’라는 생각을 했으면 해요. 공무원으로서 국가에 기여한 후, 다른 나라로부터 제가 진행한 사업이나 정책이 본받을만하다는 평을 받고 싶네요.” 조 씨는 산업부에서 에너지 수급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 에너지 불안정이 국가 정세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에너지 안정화를 위해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2018 기술고시 1차 시험이 머지않은 지금. 전 동문과 조 씨는 수험생들에게 가장 간절한 것이 응원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따뜻한 응원의 말을 건넸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그들을 응원해준 사람은 부모님이었다. 조 씨는 시험 응시에 용기를 북돋아준 부모님의 지지 덕분에 수험생활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전 동문도 매주 학교에 찾아온 부모님의 응원에 감사함을 표했다. ▲인터뷰가 진행됐던 HIT 건물 앞에 걸려져 있는 플랜카드 앞에서 두 사람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글/ 유혜정 기자 haejy95@hanyang.ac.kr 사진/ 최민주 기자 lovelymin12@hanyang.ac.kr

2018-01 06 중요기사

[동문][세계 속의 한양인] 배움을 꿈꾸던 학생, 미국서 회계사로 안착하다

한양대는 올해로 개교 79주년을 맞는다. 동아공과학원, 동아고등공업학원 등을 거쳐 지난 1948년 한양공과대학으로 승격, 1959년 종합대학으로 개편하면서 현재의 이름인 한양대학교가 됐다. 이때 학교를 다녔던 동문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그중 한 동문이 지난해 11월 모교를 방문했다. 수십 년 전 미국으로 떠났던 이종혁 동문(공업경영학과 58)이다. ▲이종혁 동문(공업경영학과 58)은 건축과 수료 후 오랜 시간이 흐른 지난해 11월 한양대 총장실에서 건축공학과 명예졸업상을 수여받았다. 근 60년만의 명예졸업장 수여 이종혁 동문은 우리대학 공업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 소노마주립대학교 경영학 학사, 골든게이트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석사, 아고시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캘리포니아 주 공인회계사(CPA) 자격을 취득한 이 동문은 암스트롱 대학, 캘리포니아 이스트 베이주립대학교, 아고시대학교 등 여러 곳에서 겸임교수를 지낸 바 있다. 이외에도 캘리포니아 주정부, 오클랜드 시에서 경제 자문위원을 지낸 바 있으며, 지난 1977년부터 The Lee Accountancy Group이라는 회계법인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이 동문이 지난 2017년 11월 모교를 찾은 이유는 명예졸업식 때문이었다. 이영무 총장을 비롯해 정성훈 공과대학장(유기나노공학과), 박준석 건축공학부장(건축공학부), 노승범 건축학부장(건축학부)이 참석한 이 자리에서 이 동문은 우리대학 건축공학 명예졸업장을 수여받았다. 건축과로 입학해 3년을 다녔던 이 동문이었다. 하지만 문교부 유학시험 합격 후에 군복무, 그리고 제대 후 미국행이 지연되던 중 공업경영학과로 전과했다. 졸업하면서 건축과는 수료로만 남았다. 그렇게 50년이 훌쩍 넘은 지금 건축공학학사 명예졸업장을 수여받은 이 동문의 감회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미처 건축과 졸업장을 받지 못해 함께했던 동창 주변에서 맴돌았어요. (그들에게) 동창이라 하지도 못했는데 이젠 당당히 어깨피고 동창이라 이야기 할 수 있게 됐네요.” 이 동문은 이번 명예졸업장 수여식에서 발전기금 4만 달러를 기부 약정했다. 1년에 1만 달러씩, 4년에 걸쳐 총 4만 달러다. “함경도에서 피난 온 실향민으로 학교에서 여러모로 도움도 받고 등록금도 면제 받았어요. 이제 4년간 등록금 낸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장학금이 성적 우수자보단, 앞길을 개척할 수 있는 학생에게 쓰였으면 해요.” ▲이종혁 동문은 미국으로 건너간 이래 회계학 분야와 한인 동포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12년 열린 이 동문의 출판기념회의 모습. (출처: 미주 한국일보) 학문 열정을 쫓은 봉사자 이 동문의 행보는 수많은 '발자취'로 가득하다. 그 발자취를 관통하는 키워드라면 단연 ‘회계학’이다. 회계학 박사 및 기나긴 겸임교수 이력, 경제 자문위원 그리고 현직 회계법인 대표라는 직책까지 1965년 대학 졸업 이후 오로지 한길이다. 지난 2016년에는 오클랜드 매거진 주최 독자들이 뽑은 지역 최고의 회계사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처음부터 회계학을 하진 않았다. 한양대 입학 당시, 이 동문은 폐허가 된 서울을 보며 복구에 힘쓰고 싶었고, 이는 건축과로 그를 이끌었다. 그랬던 그가 경영학에 들어선 건 군 제대 직후다. “유학시험을 붙고 해병대에 자원입대해 제대하고 나니, 산업 심리학에 대한 흥미가 생겼어요. 유학이 지연되면서 한양대에서도 경영학을 배우고자 공업경영학과에 입학했죠. 학과에서 회계학을 네 과목 들었는데 하다보니 재밌기도 해서 이쪽 분야를 쭉 공부했어요. 건축과 다니며 제도설계 훈련을 받았던 게 큰 도움도 되더군요.” 한편, 이 동문은 성실한 봉사자로도 통한다. 지난 2004년 미국 오클랜드 시는 그의 다양한 공로를 인정해 2004년 3월 5일을 '이종혁의 날'로 공포하기도 했다. 오클랜드 시는 저소득층과 무주택자를 위한 추수 감사절 만찬을 주도하곤 했는데 당시 이 동문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저 스스로도 많은 지원을 했고, 여러 기업체와 사회 단체, 한인 동포들과도 연결돼 있어 주변에 도움을 요청했죠. 이화대학 동문회와 해병대 전우회 등에도 부탁하고 해서 많은 이의 지원을 이끌어낼 수 있었어요. 이종혁의 날은 이에 대한 감사인사로 받았습니다. 혹자는 어려운 유년생활이 한이 돼서냐고도 하던데, 백인 사회에서 ‘하면 된다’고 보이고도 싶었고 제 나름대로의 목표도 있었던 거 같아요.” “누구든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갔으면” 오랜만에 방문한 모교에 대해 이 동문은 대단하다는 말을 전했다. “1965년 졸업하고는 서울에 와도 들를 기회가 없었어요. 전에는 가건물까지 합쳐 건물이 5, 6개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셀 수 없이 많은 건물과 시설들이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힘들었던 전후 한국 한양대를 다녔던 이 동문. 연구시설이 잘 갖춰진 곳에서 공부하겠단 바람을 좇아 떠난 미국에서 수많은 학생을 가르쳤고, 지금도 회계법인 대표로서 활발히 일하고 있다. 끝으로 이 동문은 “누구든 열심히 살고, 열심히 사랑하고,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베푸는 삶을 살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종혁 동문은 한국의 재학생 후배들에게 '열심히'라는 말을 무척 강조했다. (출처: 미주 한국일보) 글/ 이상호 기자 ta4tsg@hanyang.ac.kr

2017-12 31 중요기사

[동문]의학과 미술로 심신을 진단합니다 (1)

지난 11월 개봉해 아직까지도 잔잔한 인기를 끌고 있는 영화 <러빙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의 생애를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고흐가 사망한지 1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이의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이유를 알려준다. 서른일곱의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반 고흐의 정확한 사인(死因)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가 남긴 여러 작품을 통해 당시의 의료 실태는 충분히 추론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여러 명화를 통해 의학 지식을 쉽고 친근하게 설명하고자 내과 의사 박광혁 동문(의학과 92)이 최근 <미술관에 간 의학자>라는 책을 냈다. 그림 속에 스며든 화가의 모습 ▲<미술과에 간 의학자>의 저자 박광혁 동문(의학과 92)을 지난 28일 중계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19세기 프랑스 파리의 늦은 저녁시간. 노곤한 몸을 이끌고 많은 노동자와 예술가들이 카페에서 너나 할 거 없이 ‘압생트’(쑥을 주원료로 만든 녹색의 도수가 높은 술)를 주문한다. 공허하고 지친 마음을 달래고자 마시는 술 한 모금. 그러나 당시 ‘압생트’에는 시신경을 손상시키고 발작을 일으키는 유해 물질이 들어있다는 소문이 펴지며 결국 20세기 초 유통이 금지된다. 그리고 당시 압생트를 즐기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던 빈센트 반 고흐. 1889년에 그가 그린 <별이 빛나는 밤에>의 노란색 코로나는 그가 압생트에 중독돼 사물이 노랗게 보이는 황시증(黃視症)을 앓아 그렇게 표현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실 이는 잘못된 정보에요. 당시 고흐는 간질을 앓고 있었고, 간질을 치료하는 약물의 부작용으로 코로나 현상이 보인 거죠. 그리고 실제 압생트의 독성은 그렇게 심한 편이 아니었습니다.” 한편, 고흐가 총상을 입고 쓰러진 당시 그를 목격했던 ‘가셰 박사’는 초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만큼 고흐와 절친한 사이였지만, 의사로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방관해 고흐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징계 및 범법 사유에 해당하는 의료 과실이죠. 비록 가셰 박사가 정신과 의사이긴 했지만, 그 후 고흐는 30시간이나 살아있으며 담배를 피우기도 했으니까요.” ▲(왼쪽부터)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별이 빛나는 밤에>와 <가셰 박사의 초상>. 고흐는 정신장애로 인한 고통을 밤하늘에 요동치는 소용돌이로 묘사했으며, 그의 작품에 노란색이 많은 이유는 그가 황시증을 앓았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가셰 박사의 초상>은 초상화 장르에 대한 고흐의 실험정신이 담긴 작품이며, 1990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 이후 종적을 감췄다. ▲(왼쪽부터) 빈센트 반 고흐와 같은 나이인 37세에 세상을 뜬 '툴루즈 로트레크'의 모습과 그가 그린 <커피 포트>.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병으로 키가 152cm에 불과했던 그는 성장이 멈춘 자신의 짧은 다리와 큰 머리, 통통한 몸을 커피포트에 빗대어 그렸던 19C 말의 화가로 고흐와는 절친한 사이였다. 백문이 불여일견, 미술작품으로 상처를 치유하다 어린 시절 그리스 로마 신화를 좋아했던 박 동문은 우연한 기회에 ‘프로메테우스(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준 죄로 인해 코카서스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고통을 당하는 신화 속 인물)’의 그림을 보고 굉장히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당시 글로 된 이야기보다 그림 한 편이 훨씬 더 많은 것을 설명해줄 수 있다고 느꼈어요. 또 그 이후로는 그림에 관심을 갖고 틈틈이 갤러리도 가곤 했죠.” 대학 시절 떠난 유럽 배낭여행은 그를 서양 미술에 더 매료되고 빠져들게 만들었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서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본 것이 바로 그 계기였다. 프랑스 7월 혁명을 그리고 있는 해당 작품 앞에서 박 동문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고교 시절 신촌에 볼일이 있어 나갔던 적이 있어요. 그때가 1987년 6월이었는데 당시 제 앞에서 한 청년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이 바로 이한열 열사더군요” 그 후 오랜 시간 동안 트라우마를 앓았다는 박 동문은 작품에 나온 어린 아이의 모습을 보며 깊은 감동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 때 확신했어요. 진짜 나를 힐링 해주고 치유 해주는건 그림이구나. 그래서 공부를 하다가도 스트레스를 풀러 미술관에 갔어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프랑스의 낭만주의 화가였던 들라크루아는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조국의 승리를 위해 직접 나서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조국을 위해 이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는 말을 남겼다. 지금은 내과 개업의로 자리를 잡았지만, 박 동문은 오후 시간대 학교나 기업체∙ 관공서 등에 강의를 하러 다니기도 한다. 지난 2010년 처음 의사와 간호사를 대상으로 시작한 강의가 점차 인기를 끌며 유명세를 타게 된 것. 또 현재는 ‘모나리자 스마일’이라는 비공개 모임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여러 흥미로운 주제를 선정해 해당 미술 작품을 설명하기도 한다. “명화로 보는 도박, 명화로 보는 갑상선, 명화로 보는 키스 등 매번 다른 주제를 정하는데 저 스스로도 그 과정이 정말 즐겁고 행복해요. 평소에도 틈이 날 때마다 늘 강의에 대해 생각하고 정리하죠” ▲지난 2016년 9월부터 진행해 온 '모나리자 스마일' 모임. 박광혁 동문은 해당 모임에서 강의해 온 내용과 그동안 기고했던 칼럼을 모아 이번 <미술관에 간 의학자>책을 편찬했다. (출처: 박광혁 동문) 미술을 향한 무한한 애정 지금까지 의사의 길을 걸으며 치열한 삶을 살아왔던 박 동문. 인턴과 레지던트 시절엔 일에 쫓겨 여유 없이 살아왔지만 개업 후 조금씩 삶의 여유가 생기면서 미술관을 가고 꾸준히 미술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아무리 바쁘고 여유가 없어도 늘 옆구리에는 미술책을 지니고 있었어요. 이게 저에겐 정말 큰 힘이 됐죠.” 이렇게 자신의 삶에 큰 버팀목이 돼준 미술. 그만큼 박 동문은 앞으로도 더욱 많은 활동을 하며 역량을 펼치고 싶다고 말했다. “치열한 삶을 살았던 화가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분들의 작품을 다룬 책을 한 권 더 써보고 싶어요. 또 앞으로 융∙복합적인 인문학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강연하고 싶기도 해요.” ▲박광혁 동문은 "우리나라 화가들 중엔 반 고흐처럼 물감 값이 없어서 그림을 못 그리는 분들도 많다"며 "이런 분들을 위한 전시 기회와 지원 프로그램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글/ 오상훈 기자 ilgok3@hanyang.ac.kr 사진/ 강초현 기자 guschrkd@hanyang.ac.kr

2017-12 26 중요기사

[동문]몸으로 그려내는 아름다운 이야기

예술은 아지랑이처럼 희미하다가도 명확하게 보이는 순간이 찾아온다. ‘영감’이라고 하는 그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그 순간과 마주하고 작품으로 그려내는 일은 쉽지 않다. 이지희 동문(무용학과 01)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영감을 작품으로 승화한다. 작품의 성과를 충북무용대상 예술상 수상으로 만끽하고 있는 이 동문을 눈이 그친 21일 잠실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내 한 몸 다 던져 “예전에는 나 자신을 위해 살았다면, 이번 대회는 공동체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기회였어요.” 충북 청주 출신인 이 동문에게 이번 전국무용제는 지역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전국무용제는 전국 각 시/도의 대표 무용단이 모여 경합하는 권위있는 안무 경연대회예요. 충북지역에서 전국무용제에 진출할 대표를 뽑는 충북무용제를 통해 작품을 올렸고, 본 무용제에서 3개 상을 수상했죠.” 이 동문은 안무를 창작한 이에게 수여하는 안무상과 주역 무용수로서 받을 수 있는 개인 연기상, 그리고 무용팀이 받은 은상을 합쳐 총 3개 상을 수상했다. 이에 힘입어 충북무용협회가 주관하는 '2017 충북무용대상'에서는 예술상을 받았다. 지역 대표로서 거둔 성공에 그는 매우 고무적인 반응이었다. ▲이지희 동문(무용학과 01)의 작품 ‘MOON LIGHT’ 중 한 장면. 이 동문은 이번 작품에서 안무와 연출 양측 분야에서 호평을 받았다. (출처: 이지희 동문) *사진을 클릭하면 공연 'MOON LIGHT' 하이라이트 영상을 볼 수 있다. 또한 이 동문은 대회수상이 지역을 빛내는 성과로 끝나지 않고, 지역 내 무용 인프라를 키울 수 있는 한 걸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충북 내 대학교들에 무용과가 사라졌습니다. 예고 하나만 있는 게 현 실정이고요.” 그는 전국무용제나 기타 큰 제전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지역 무용수들로 이루어진 팀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충북은 현재 무용인구가 얼마 없는 열악한 환경입니다. 이번 수상을 통해 지역 무용인들을 위한 인프라와 지원이 활발해졌으면 좋겠어요.” 지역인재발전의 포부를 안고, 이 동문은 다음 해 전국무용제를 내다보고 있다. “올해는 울산에서 전국무용제가 열렸어요. 그리고 다음 해에는 충북에서 전국무용제가 열릴 예정이죠. 고향에서 열리는 대회인 만큼, 도움 되는 역할을 찾아 준비 중이에요.” ▲이지희 동문은 이번 수상이 지역 무용인들의 활성화로 이어지는 초석이 되길 바라고 있다. 무대 위, 진정한 나를 찾아나서다 이 동문이 전국 대회에서 부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안무가, 무용수가 되겠다고 결심한 순간은 잘 모르겠어요. 어느 순간부터 안무를 짜고 무용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책을 좋아하는 아버지와 한국무용을 전공한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이 동문은 책과 춤, 둘 모두를 어릴 때부터 즐기며 자연스럽게 춤을 통해 이야기를 만드는 법을 습득했다. 이 동문은 이렇게 얻은 능력을 초등학교 때 무용반 활동을 하며 자연스럽게 갈고 닦았다. “어렸을 때 무용하면 뭔가 로망이 있잖아요(웃음). 그때부터 본격적인 무용을 하게 됐어요.” 대학에 입학해서도 무용수로 탄탄한 기초를 다져가는 동시에, 이 동문은 안무가 활동 또한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대학 재학 때 김복희 교수님과 손관중 교수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그분들 밑에서 무용과 안무를 배웠죠.” 두 가지를 함께 배웠기에 퍼포먼스가 중요한 90년대 무용수의 시대와, 이후 주목받기 시작한 안무가의 시대를 거쳐 나올 수 있었다는 게 이 동문의 답이다. “90년대는 무용수의 실력이 부족했어요. 주역 무용수의 능력이 부각되는 시기였죠. 하지만 현재는 무용수들이 상향평준화 됐어요. 안무의 독창성과 표현력이 부각되는 시기가 바로 지금이에요.” 안무의 독창성과 다양성을 골고루 경험한 것은 현재의 성과를 얻을 수 있던 원동력이 됐다. ▲김복희 무용단의 주역 무용수로 활약하던 시기의 이지희 동문. 사진은 당시 손관중 교수의 작품 ‘跡(적). 8 – 공간플러스’에서 주역 무용수로 열연 중인 모습 (출처: 해외문화홍보원) 갈고 닦은 기본기와 쌓인 경험에서 나아가, 이 동문은 항상 시선을 새롭게 두려고 노력한다. “대학교 3학년 때, 워크숍에서 테크닉과 기본기는 좋지만, 색깔이 없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때부터 춤과 더불어 생각을 하기 시작했죠.” ‘기존의 무미건조한 나’를 깨고 싶어서 홀로 훌쩍 떠나보는 무모한 경험도 불사했다는 이 동문. 현재는 이전엔 알아차리지 못했던, 본인의 삶 근처에서 그려지는 다양한 색깔의 경험을 관찰하며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작품 소재는 모두 삶 속에 있었지만, 제 시선이 그걸 못 보던 거였죠. 이젠 스쳐 지나가는 삶 속 하나 하나를 둘러보는 버릇을 들이고 있습니다.” 곧 다가올 다음 막을 향해 올해를 마무리한 이 동문이지만, 다음 해를 맞이해 다시 바빠질 예정이다. 현재는 직접 안무를 짜고 출연하는 듀엣(두 명의 무용수가 연출하는 안무) 작품을 연출 중이다. “이미 완성도 있는 작품으로 올해만 10여 차례 공연된 작품입니다. 또한 다음 해에 미국, 일본, 홍콩에 초청받아 공연을 할 예정이에요.” 이 외에도 충북에서 열리는 전국무용제 보조, 한양대학교 동문 무용단 ‘가림다댄스컴퍼니’의 공연이 2018년으로 예정돼있다. “가림다댄스컴퍼니에서 안무가와 무용수 외에 기획, 총무 담당을 맡고 있어요. 3월 기획공연과 6월 정기공연 등, 예정된 공연을 준비 중이죠. 바쁘지만, 가능한 최선을 다해 임할 예정입니다.” 바쁜 와중에도 이 동문은 무용인으로서 후배들에게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무용을 사랑하지만, 빨리 좌절하고 포기하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건 무용을 떠나 모든 삶의 방향에서 한 번씩 마주치는 상황이라 생각해요.” 무용 하나만을 보고 달렸더니 직업과 기회가 따라왔다는 이 동문은 후배들에게 꿈을 포기하지 말고 조금만 더 힘을 내보자고 격려했다. “현실적으로는 무용은 힘듭니다. 활동 여건이 매우 고된 직업입니다. 그래도 조금만, 힘들더라도 곧 이루어질 꿈을 따라 한걸음만 더 내딛기를 기원합니다. 포기하지 말자고요.” ▲이지희 동문은 같은 무용인들에게 힘든 현실이더라도, 조금만 버티고 꿈을 향해 함께 나아가자고 격려했다. 글/ 채근백 기자 cormsqor12@hanyang.ac.kr 사진/ 이진명 기자 rha925@hanyang.ac.kr

2017-12 12 중요기사

[동문]당신에게 전하는 '이너피스(Inner peace)'

운동선수에게 필요한 자질은 어떤 것이 있을까. 누구는 판도를 뒤집을 만한 놀라운 기술이라고 이야기한다. 다른 누구는 불리한 상황을 버텨내는 지치지 않는 체력이라고 한다. 둘 다 운동선수에게 필요한 조건이고, 경기에서 멋진 결과를 내기 위해 필수적이다. 하지만 제 3의 요소에 주목한 사람이 있다. 화려한 기술, 왕성한 체력을 흔들림 없이 발휘할 수 있는 배경인 굳건한 `멘탈`. 이 연구분야 최전선에 있는 유충경 동문(경기지도학과 97)의 심리 트레이닝에 함께했다. `마음 다스리기`를 경험하다 프로 골퍼를 꿈꿨고, 대학교 때 프로 자격증을 취득해 활동한 유 동문은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기 원했다. 중학교 2학년때부터 경직된 환경 속에서 선수생활을 했다는 유 동문은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태에서 필드에 오르는 것이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기량이 좀처럼 오르지 않았습니다. 슬럼프였죠. 주변 상황도 골프에 열정을 가지기 어려운 환경이었어요.” ▲유충경 동문(경기지도학과 97)을 지난 8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야탑 역 근처 회의실에서 만났다. 인터뷰 시작 직전까지 유 동문은 선수들의 멘탈 트레이닝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런 유 동문에게 2008년에 시작한 박사과정은 새로운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첫 스윙이 됐다. “2004년을 마지막으로 선수생활을 마무리하고, 2008년도부터 스포츠심리학 박사과정을 밟았어요. 필드 위의 나를 알아가기 위해 심리학 공부를 시작했죠.” 자신의 심리에 대해 10개월간 이어진 카운셀링 또한 유 동문의 열정을 불타게 하는 촉매로 작용했다. “심리학에 대한 재미와 자신감, 그리고 내적 동기가 충분했어요. 그때부터 스포츠 심리에 그치지 않고 일반 심리, 상담 심리, 카운셀링 가릴 것 없이 공부했네요.” 인문과 자연을 아우르며 지식을 쌓는 과정은 힘들었지만, 그 결과는 정직했다. 2013년 잠깐 다시 선수로서 시합을 가진 유 동문은 현역으로 뛰었을 때 보다 더 좋은 성적을 거둔 기억을 떠올렸다. “스스로에게 심리 훈련을 임상 시험 식으로 적용했어요. 현역 때 보다 더 좋은 결과가 나왔죠.” 이 결과로 모종의 사명감을 느끼고, 골프 멘탈 트레이너의 길을 걷게 됐다. “누구나 자신의 기량을 100% 펼치고 싶어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흔들리지 않고 기량을 펼치는 데 도움을 주고 싶어요.” 아무도 가지 않던 '그린' 위에 오르다 연필 뒤에 지우개를 단다. 지금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처음으로 그 생각을 해내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선수 시절의 경험과, 심리학 박사의 전문성을 둘 다 요구하는 세계에 일찍이 뛰어들고, 성공적으로 융합해낸 유 동문. 그를 움직이게 한 동기는 무엇일까. “제가 그랬고, 다른 많은 선수들도 심리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에 대해 누구도 접근하지 않았고요.” 선수들이 겪는 심리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멘탈 트레이너를 시작한 유 동문은 “트레이닝을 받은 선수들이 보여주는 긍정적 마인드, 삶의 에너지와 경기력 향상이 좋은 성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유충경 동문(경기지도학과 97)이 파라다이스 골프레인지 2층에서 ‘골프 선수, 내 아이 어떻게 케어할 것인가?’ 라는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출처: 골프타임즈) 프로로서 쌓은 필드의 경험과 심리적인 분석 및 해결방안을 제시할 수 있는 유 동문은 현재 스포츠 선수들의 멘탈 트레이너로 활약 중이다. 지난 6월 KLPGA(한국여자프로골프) 프로 이수진 선수와 체결한 멘탈 트레이닝 훈련이 대표적이며, 이 외에도 국내의 골프 아카데미들과 협업해 선수 양성과정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심리적인 훈련에 대해 수요가 폭발적이에요. 바쁘지만, 저에게 주어진 소명이라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 지도하고 있네요.” -자신의 성공적 결과를 사용하는 것으로 성공적인 단기기억을 장기기억화 하는 전략화인 것이다…..중략…..이미 많은 선수들이 현장에서 사용하고 있고, 그 효과를 보고 있다. 1부 투어를 뛰는 선수들이 간혹 시합 당일 라커룸에서 일지나 수첩을 보고 있는 선수들을 종종 목격한다. 이들이 보고 있는 것이 바로 ‘긍정회상카드’로 이전에 자신이 성공한 샷들을 여러 범주화하여 기재한 것으로 휴대하기 편하게 수첩이나 일지에 적어 시합 당일 라커에 앉자 다시 꺼내본다.-[유충경의 멘탈 & 뇌학습], ‘자신감과 유능감을 높이는 긍정 회상카드'에서 발췌 ▲유충경 동문(경기지도학과 97)은 지난 6월 이수진 프로와 1년간 멘탈 트레이닝 훈련 계약을 체결했다. (출처: 골프타임즈) 굳건한 마음으로 유 동문은 선수로 뛰거나 지도자를 희망하는 후배들에게 멘탈 트레이닝의 중요성과 거부감 없는 접근을 요청했다. “기술이나 체력과 같이, 멘탈 또한 트레이닝의 일부분입니다. 사람을 편안하게 하고, 그 상황에서 자신이 가진 기량의 100%를 끌어내도록 할 수 있는 촉매제가 바로 심리 훈련입니다.” 또한 유 동문은 향후 자신과 같은 멘탈 트레이너들을 양성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싶다고 밝혔다. “심리적인 훈련을 원하는 선수들의 수요는 많습니다. 수요가 많으니, 선수들을 담당하는 트레이너 또한 많아야 하죠.” 아직까지 국내에서 스포츠 선수의 심리적인 일면을 담당할 영역의 발전이 미비하기에, 유 동문은 선봉에 서서 멘탈 트레이닝 영역의 전문성과 인프라를 일구어 나갈 것을 다짐했다. “골프는 상황을 분석하고 정보를 도출해 결과를 이끌어내는 스포츠예요. 결과를 이끌어내는 과정은 기술과 체력으로 커버할 수 있지만, 그 전 단계는 심리적인 단계죠. 최상의 성과를 이끌어내기 위해선 탄탄한 기술과 체력, 그 둘을 흔들리지 않게 할 굳건한 멘탈이 필요해요.” ▲국내에서도 선수들이 심리적으로 충분한 지원을 받게 해주고 싶다는 유충경 동문의 바람이 빠른 시일 내에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이라 예측해본다. 글/ 채근백 기자 cormsqor12@hanyang.ac.kr 사진/ 이진명 기자 rha925@hanyang.ac.kr

2017-12 04

[동문]의료 정보 플랫폼의 새 판을 짜다

평소 당뇨를 앓고 있는 60대의 김한양 씨. 오늘도 새벽 6시에 기상한 그는 웨어러블 메디컬 디바이스(Wearable medical device)를 통해 현재 몸 상태를 체크한다. 잠시 후 그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리고 최근 한 달간의 혈중 포도당 농도 그래프와, 중이염이 의심되니 이비인후과에 방문하라는 안내 메시지가 뜬다. 이윽고 찾아간 집 근처 병원. 전문의는 ‘블록체인’ 기술을 통해 김 씨의 다른 병원에서의 진료 기록들을 확인하고, 이에 맞는 일대일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진료 후 김 씨는 ‘메디토큰’으로 병원비를 결제하고 오늘 생성된 진료 기록은 고스란히 김 씨 휴대폰에 저장된다. ‘맞춤형 의료 서비스’, 진짜 시작은 지금부터 서울과학고를 졸업하고 영상 의학 전문의로 인턴, 레지던트 수료 후 올해 초 공중보건의 생활을 마친 이은솔 동문(의학과 03). 소위 잘 나가는 '엄친아'로서 탄탄대로를 걸어왔던 그가 난데없이 올해 4월 한 의료계 스타트업의 대표가 됐다. ‘비트코인’의 핵심 기술인 ‘블록체인’을 의료계에 접목해, ‘병원’ 중심의 폐쇄적인 의료 정보 시스템을 ‘환자’ 중심의 개방적인 시스템으로 바꾸겠다는 것. “현재의 의료 시스템은 불완전한 면이 많아요. 환자 입장에서는 1차 병원에서 받았던 검사를 2,3차 병원에서 다시 받기도 하고, 자신이 지금껏 어떤 진료를 받아왔는지 확인하기가 쉽지 않죠. 자신의 개인 정보가 어떻게 활용되는지 모르는 경우도 부지기수고요.” ▲이은솔 동문(의학과 03)의 말처럼 '메디블록'을 통해 환자는 불필요한 진료 비용을 감소할 수 있고 최적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다. 슈퍼 그레잇! 이 동문의 말처럼 현재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은 상당 부분 ‘병원’중심으로 구성돼있다. 환자의 진료 기록은 각기 다른 병원에 분산돼있고, 전문의와의 짧은 진료 시간 동안 자신의 모든 병력(病歷)을 전달하는 것 역시 쉽지 않다. 그렇기에 이 동문은 ‘메디블록(Medibloc, 클릭 시 홈페이지로 이동)’을 통해 탈 중앙화된 의료 정보 시스템과 개인 맞춤형 헬스케어 플랫폼을 구축하고자 한다. “블록체인 기술을 통해 의료 서비스 및 기기로부터 생성된 모든 정보를 한 곳에 저장하고 관리해요. 즉 세계 어디서든 통합된 의료 정보를 활용해 일대일 서비스 제공이 가능하죠. 그리고 저희 ‘메디블록’을 이용하는 참여자들은 ‘메디토큰(Medi Token: MED)’이라는 가상 화폐를 통해 서로 거래도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의료인은 환자의 의료 정보를 기록할 때 ‘메디토큰’을 지급받는다. 또 특정 질병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은 연구자는 환자에게 ‘메디토큰’을 지급하면 되고, 반대로 환자는 ‘메디토큰’을 통해 유료 서비스 결제가 가능하다. 단, 의료인은 환자의 승인을 받아야만 메디블록 시스템에 의료 정보를 기록할 수 있는데, 현재 해당 사업은 중국계 블록체인 플랫폼인 ‘퀀텀(QTUM)’을 통해 활발히 진행 중이다. 지난 11월 27일엔 ‘메디토큰’의 가상화폐공개(ITO: Initial Coin Offering)가 이루어졌으며, ‘메디토큰’ 총 발행량은 100억 개로, 1QTUM당 2000MED를 구입할 수 있다. (2017년 12월 초 기준: 1QTUM= 약 1만5000원) ▲'블록체인'은 공공 거래 장부라고도 불리며 가상 화폐로 거래할 때 발생할 수 있는 해킹을 막는 기술이다. 거래에 참여하는 모든 사용자에게 거래 내역을 보내 주며, 거래 때마다 이를 대조해 데이터 위조를 막는 방식을 사용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의료와 IT의 결합을 시도하다 그렇다면 이 동문은 언제부터 이렇게 의료계에 IT 기술을 적용하려는 생각을 했을까? “사실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대학을 다니는 동안에도 프로그래밍 관련 알바를 많이 했고, 영상 의학을 이용해 AI를 만드는 작업에도 참여했었죠. 나중엔 아산병원에서 전공의 생활을 했었는데, 그때도 프로그램 개발이나 의료 데이터 쪽에 관심이 많았어요.” 하지만, 이 동문은 본인이 좋아하는 분야에만 매몰돼 주객이 전도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즉 자신의 전문 분야를 어느정도 잘 해내는 상태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 “제가 만약 의대 공부나 레지던트 생활을 소홀히 했다면, 저는 아마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 됐을 거예요.” ▲(왼쪽 아래) 이은솔 동문과 메디블록의 여러 멤버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동문 반대편은 고등학교 동창인 고우균 공동 대표. (출처: 메디블록) 이렇게 지난 1년 여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올해 4월 창업에 성공한 이 동문. 그러나 IT 분야는 2-3년 주기로 특정 기업이 빠르게 뜨고 지는 만큼, 비교적 변화 속도가 느린 의료계에 이를 적용하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현재 블록체인을 보면 어느 정도 과장된 측면은 있어요. 특히 금융 쪽은 투기가 심하기 때문에 정부에서도 강력히 규제하려고 하죠. 하지만, 이를 의료 분야와 연관 지어 생각한다면 미래기술로서 큰 장래성이 있기에, 몇몇 관련 부처들은 계속해서 지원하려는 입장입니다.” ▲'메디블록(Medibloc) - 의료경험에 가치를 더하다' 홍보 영상(출처: Youtube) 보안성과 신뢰성, 두 마리 토끼를 둘 다 잡을 것 그렇다면 메디블록과 같은 블록체인 기반의 의료 정보 플랫폼이 상용화된 후, 예상되는 문제점이나 취약점은 없을까. 만약 악의를 품은 누군가가 의료 정보를 유출하거나 조작한다면 이는 해당 시스템의 보안성과 신뢰성을 훼손할 것이다. 이에 대해 이 동문은 “환자가 원하면 자신의 데이터를 암호화 한 후 서명한 채로 다른 별도의 저장소에 보관할 수 있으며, 본인이 가진 데이터가 진본인지 또는 수정됐는지를 확인할 수 있도록 플랫폼이 운영된다”고 말했다. 즉, 전자 문서로서의 기능과 역할은 차질 없이 수행된다는 것. “핸드폰 어플 출시 시점은 내년 말로 계획하고 있어요. 디자인과 편의성에도 신경을 쓰고 있는데 그만큼 많은 분들이 애용하길 기대 중입니다.” ▲이은솔 동문은 "향후 5년이나 10년 후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내다보는 것이 중요하다"며, "그때를 대비한 공부를 지금부터 조금씩 해야한다"고 조언했다. 글/ 오상훈 기자 ilgok3@hanyang.ac.kr 사진/ 최민주 기자 lovelymin12@hanyang.ac.

2017-11 30

[동문][人사이드 人터뷰] 열정, 아름다운 인생을 요리하는 레시피

인간의 일은 결국 먹고 사는 일이니, 손재주 중 제일 으뜸은 요리 솜씨가 아닐까. 음식을 만드는 일이 가장 소중한 일이고, 행복한 일이라고 말하는 이종임 원장. 지난 43년간 열정을 다했기에 후회도 없다는 이종임 원장의 맛있는 인생 레시피를 들어보자. 글. 박영임 사진. 안홍범 ▲요리연구가·수도요리학원 원장 이종임(식품영양학과 71) 동문 대대로 이어지는 손맛과 입맛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요리연구가라는 한 길을 걸어 온 수도요리학원의 이종임 원장. 그동안 귀하고 값진 음식들을 얼마나 많이 먹어보았을까. 그야말로 안 먹어본 산해진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종임 원장이 제일로 꼽는 음식은 사시사철 한국인의 여염집 밥상 위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된장찌개다. “전 직접 담근 장에 갖은 채소를 넣어 끓인 된장찌개를 제일 좋아합니다. 제가 늘 먹는 음식이고, 속이 가장 편한 음식이니까요.” 열무김치에 쓱쓱 비벼 먹어도 맛있고, 금방 쪄낸 호박잎에 싸먹어도 맛있는 구수한 된장찌개.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고 몸이 부담 없이 받아주는 음식이니, 과연 이종임 원장이 주저 없이 힐링푸드로 꼽을 만한 음식이다. 게다가 이종임 원장에게 된장찌개는 요리 솜씨를 물려준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평생 콩밥과 된장찌개를 즐겨 드셨어요. 그래서 94세의 나이에도 병치레 없이 여전히 건강하시죠. 아마 어머니가 된장찌개를 많이 해주셔서 저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이종임 원장은 어머니인 하숙정 수도요리학원 초대 원장에게 손맛뿐 아니라 입맛까지 대물림받은 듯하다. 그렇게 우리의 맛은 어머니에게서 어머니, 그리고 또 어머니에게로 이어져 내려왔다. 요리연구가의 숙명과 보람 이종임 원장은 지난 2000년 고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기념하는 노르웨이의 축하만찬장에서 한식 요리를 선보인 바 있다. 스웨덴에서 시상하는 다른 노벨상과 달리 노벨평화상은 노르웨이에서 시상식이 열리는데, 수상 국가를 대표하는 셰프를 초청해 그 나라의 전통 음식을 소개하는 것이 노벨평화상 축하만찬장의 전통이다. 이 귀한 자리에 한국을 대표하는 셰프로 초대받은 이종임 원장은 그동안 갈고닦은 손맛을 유감없이 발휘해 갈채를 받았다. “요리연구가로 일한 지난 40여 년 중에서 가장 보람되고 영광스러운 순간이었죠.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예요.” 어머니 하숙정 요리연구가를 비롯해 ‘요리계의 대모’로 유명한 고 하선정 요리연구가를 이모로 둔 이종임 원장은 요리명가에서 자라며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요리를 접했다. 어머니는 철마다 각종 젓갈과 장, 장아찌를 손수 담갔고, 그때마다 어깨너머로 어머니의 솜씨를 익혔다. 집에서 종종 일본 요리계 인사들을 접대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어머니가 손님상 치르는 것을 거들기도 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요리연구가의 길을 걷게 됐다. 사실 어릴 때는 워낙 활동적인 성격이라 스튜어디스나 기자를 꿈꿨다. 하지만 철이 들면서 당시 척박했던 우리의 식문화 개선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어머니가 눈에 밟히기 시작했고, 결국 어머니의 뒤를 잇기로 결심했다. “어머니가 1965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요리학원인 수도요리학원을 설립하셨는데, 당시는 먹고 살기도 힘든 때라 돈을 내고 요리를 배우려는 사람이 없었어요. 번번한 조리도구는 물론 식재료도 구하기 힘들었던 시절이죠. 그래서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모아놓고 요리강습을 다니셨어요.” 그렇게 요리연구가의 길로 접어든 이종임 원장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1981년 MBC <오늘의 요리>라는 요리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발탁되면서부터다. 당시는 우리나라에 컬러TV가 막 도입됐을 때인데, 50%에 육박한 시청률을 기록하며 전국의 주부들을 TV 앞으로 불러 모았다. 푸드 스타일링이라는 개념도 없던 시절에 이종임 원장은 테이블러너, 접시 하나도 직접 골라 음식이 더욱 돋보이도록 연출했다. “컬러 방송이니까 음식이 더욱 먹음직스럽게 보이도록 비주얼을 강조했죠. 그래야 시청자에게 생동감 있게 전달할 수 있으니까요. <오늘의 요리>가 그렇게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면 오늘의 저도 없었을 거예요.” ▲ 이종임 동문은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는것보다 건강한 음식을 먹어야죠. 좋은 재료로 정성껏 만들어 마음으로 먹는 음식을 만들고 싶어요." 라고 말한다. 열정을 다해 최고의 자리에 오르다 그동안 방송, 교육, 출판, 행사 등 다양한 무대에서 한식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활발하게 활동한 이종임 원장. 그는 현재 (사)대한식문화연구원장과 한양대 식품영양학과 겸임교수로도 활동 중이다. 무슨 일을 하던 열정과 최선을 다했고, 그것이 바로 이종임 원장을 요리 대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게 한 원천이다. “주어진 일은 철저히 준비하고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해요. 그래야 희열과 성취감을 느낄 수 있죠.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기회도 주어지고,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준비 돼 있지 않으면 기회가 와도 잡을 수 없는 법이죠.” 처음 요리연구가의 길을 걸을 때만 해도 지금처럼 정보를 구할 수 있는 통로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충무로에서 일본 요리잡지를 구해 하나하나 따라해보며 메뉴를 개발했다. 현재도 건강, 식재료, 영양 등 요리와 관련된 기사라면 스크랩하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또한 외식을 즐기지는 않지만 외식을 할 때면 요즘 젊은이들처럼 음식 사진을 수십 장씩 찍고 플레이팅과 식재료 배합을 연구한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와이너리에서 와인을 배우고, 일본에서 푸드 스타일링을 공부했다. 파티 프로듀싱과 와인 소믈리에 전문과정을 밟고, 음식에 맞는 그릇을 직접 빗기 위해 도예도 배웠다. “과거에는 배불리 먹는 것이 중요했지만 지금은 스타일링, 플레이팅 같은 음식의 부가적 가치도 중요해요. 음식 한 접시에 정성과 감동, 힐링과 같은 다양한 가치를 품을 수 있는 것이 요리의 매력이죠. 항상 새로운 지식을 배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종임 원장은 45세의 나이에도 서슴지 않고 식품공학 박사학위에 도전했다. 한 교수가 지나는 말로 한 “요리하는 사람 중엔 박사가 없어”라는 말을 듣고 오기가 발동한 것이다.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20대 어린 학생들 틈에 끼어 영어학원을 다니고, 입학한 후에는 일반 학생들과 똑같이 강의를 듣고 실험을 하며 7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예순이 넘어 조리기능장 자격도 취득했다. 요리에 있어서는 최고의 자리에 서길 원하는 이종임 원장의 열정이 맺은 결실이다. 마음을 주고받는 요리 10여 년 전부터 이종임 원장은 단지 혀가 원하는 음식이 아니라, 몸에 좋은 건강한 음식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음식으로 영양을 섭취하잖아요. 그만큼 먹는 게 중요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는 것보다 건강한 음식을 먹어야죠. 좋은 재료로 정성껏 만들어 마음으로 먹는 음식을 만들고 싶어요.” 그래서 이종임 원장의 냉장고에는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요네즈, 케첩, 굴소스 같은 것들을 찾을 수 없다. 가공된 식재료나 화학조미료를 치우고 천연재료를 우려내 맛을 내고 있다. 설탕 대신 매실청이나 유자청을, 인스턴트 간장 대신 직접 간장을 담그는 일은 많은 시간과 정성을 요하는 일이다. 그런데 본래 요리라는 것이 시간과 정성에 다름 아니다. 정성을 다해야 먹는 사람에게도 마음이 전해져 감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외식이나 즉석식품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인 현대인들.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지만 요리연구가로서 안타까움이 클 수밖에 없다. “가공식품에는 식품첨가물이 20~30가지가 들어 있어요. 이것이 우리 몸에 쌓이면 질병을 유발하죠. 거창하지 않아도 좋아요. 입에 당기는 음식만 찾지 말고 한두 가지라도 좋은 재료로 직접 만들어 먹거나, 외식을 할 때 가급적 건강한 음식을 선택해 먹으면 좋겠어요.” 내년 봄 출간을 목표로 최근 시니어를 위한 건강식 요리책을 준비하고 있는 이종임 원장.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다 는 요리연구가 이종임 원장의 다음 목표는 우리 몸을 위해 건강한 음식을 널리 전파하는 것이다. 사랑한대 2017년 11-12월호 이북 보기

2017-11 20

[동문]경찰의 위상과 품격을 높입니다 (1)

각종 영화나 드라마 소재에 빠지지 않는 직업군으로 ‘경찰’을 빼놓을 수 없다. 비교적 최근 개봉한 영화 ‘청년경찰’이 그렇고, 지난해 수사물 드라마로 흥행한 tvN의 ‘시그널’이 그랬다. 일상을 둘러봐도 심심찮게 우리 주변에서 경찰을 접할 수 있다. 보통 경찰하면 각종 범죄와 치안∙수사 업무를 떠올리기 쉽지만, 경찰 조직 내에서 우리 주변의 소외된 이웃과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아름다운 선율을 전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그리고 그 중심엔 서울지방경찰청 홍보담당관실 경찰악대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는 박남용 동문(관현악과 96)이 있다. ‘외강내유(外剛內柔): 경찰과 악기의 닮은 꼴’ 한 때 체대생을 꿈꾸며 열심히 운동을 하던 박남용 동문은 평소에 음악도 좋아해 고교 시절 처음으로 트럼펫을 배웠다. 하다 보니 적성에도 잘 맞았고 교내 ‘윈드오케스트라’(현악기를 뺀 관악기와 타악기만으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며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트럼펫은 겉으로 보기엔 강렬해 보여요. 하지만 그 안엔 부드러움과 따뜻한 선율이 녹아 있죠. 그런 점이 제게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박남용 동문(관현악과 96)을 지난 17일 성수동에 위치한 동부경찰관 기동대 신관에서 만났다. 마침 박 동문은 '세계 아동학대 예방의 날(매년 11월 19일)' 기념 공연을 끝마치고 돌아왔다. 그 후 한양대 관현악과에 입학한 박 동문에게 의경 입대는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계기가 됐다. 구(舊) 부평 경찰종합학교에서 악대로 군 생활을 하며, 서울에는 직원으로 구성된 ‘경찰악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그 시점을 계기로 박 동문은 졸업 후 2004년 경찰의 길을 걷게 됐다. “주변에선 경찰을 한다고 하니 다들 말리는 분위기였어요. 당시는 경찰에 대해 안 좋은 이미지도 있었고 졸업 후 오케스트라에 입단하는 게 일반적이었니까요.” 이렇게 주변의 만류를 무릅쓰고 현재는 경찰관 19명과 의무경찰 35명으로 구성된 54인조 경찰악대에 속한 박 동문. 홍보담당관실 소속답게 주 업무는 여러 공식 행사에 참가해 경찰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것이지만, 사회 곳곳의 음악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힐링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한다. “‘경찰악대’라고 말하면 아직도 ‘군악대’로 착각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만큼 아직 홍보가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멋있다’고 칭찬해주시는 분들도 많고, 호응이 좋을 걸 예상해 앙코르곡은 항상 준비해 간답니다(웃음)” 맞춤형 서비스를 선보이는 금관 앙상블 현재 박 동문은 경찰악대 내 ‘금관 앙상블’의 리더를 맡고 있다. 일반적으로 공연은 '브라스 퀸텟(Brass quintet: 금관 5중주)'을 이뤄 나갈 때가 많지만 행사 규모가 크거나, 공연장 사전 답사 후 추가 인원이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도 있기에 '퀸텟'보다는 '앙상블'이라고 소개하는 편이다. "다 같이 10년 넘게 일하다 보니 손발이 잘 맞는 편이에요. 매년 레퍼토리도 바꾸고 계절에 따라, 연령층에 따라 편곡을 하다 보니 저희만의 특색 있는 곡도 많죠." ▲(정중앙) 박남용 동문(관현악과 96) 이 구로아트밸리에서 서울경찰악대 오케스트라와 '하이든협주곡'을 협연중인 모습이다 (출처: 박남용 동문) 예를 들어 ‘캐러비안의 해적’ OST의 경우 신나는 느낌을 주기 위해 ‘세트 드럼’을 한 명 추가하기도 하고, 낙엽 떨어지는 청량한 가을에는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연주하기도 한다. 특히 나이가 지긋한 분들이 많은 ‘노인복지 회관’에 가면 인기 트로트인 ‘어머나’, ‘네 박자’, ‘내 나이가 어때서’ 등을 편곡해 장내 분위기를 한층 띄우기도 한다고. “초임 때는 잘 몰랐는데 연륜이 쌓이고 리더가 되면서 선곡 순서에도 신경을 쓰게 돼요. 처음에는 분위기 있는 클래식으로 깔다가 중간쯤 분위기를 업 시키고 마무리는 다시 잔잔한 노래로 정리하죠.” ▲지난 7월11일 서울 성심여중에서 서울경찰악대가 진행한 학교폭력예방 음악회. (출처: Youtube) 음악으로 더 가깝고 친근하게 이처럼 박 동문은 ‘경찰악대’를 통해 많은 국민이 경찰에 대해 더 좋은 이미지와 인식을 형성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아직까지는 ‘경찰’과 ‘음악’이라는 조합이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렇기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죠.” 실제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현재 박 동문은 매주 토요일마다 ‘어린이 경찰 악대’를 운영하며 ‘트럼펫 재능 나눔 활동’을 펼치고 있다. 또 이전의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길거리 공연 같은 경우, 외국인들을 위해 팝송을 편곡하거나 어린이들을 위해 ‘도레미송’ 같은 동요를 준비해 가기도 했다고. “힘들긴 하지만 그만큼 보람을 느낄 수 있고 앞으로도 시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경찰이 되고 싶습니다.” ▲이 같은 박 동문의 꾸준한 노력이라면 ‘걸음새 뜬 소가 천 리를 간다’는 말처럼 더 많은 대중에게 오래도록 사랑받지 않을지 기대해 본다. 글/ 오상훈 기자 ilgok3@hanyang.ac.kr 사진/ 강초현 기자 guschrkd@hanyang.ac.kr

2017-11 19

[동문]마지막 사법시험 합격자 박종현 동문(법학과 92) (2)

사법시험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1950년 고등고시 사법과를 시작으로 70년간 대한민국의 법조인을 배출했던 사시제도는 59회 사법시험을 끝으로 폐지됐다. 배경에 관계없이 오직 시험 결과만으로 선발하는 희망의 사다리였고, 또 수많은 고시낭인을 양산해 고급 인력을 낭비하고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키는 제도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마지막 기회였던 이번 사법시험에서 한양인 7명이 당당히 합격을 거머쥐었다. 그중 최고령 합격자 박종현 동문(법학과 92)을 만났다. 15년의 공부, 포기는 없었다 박종현 동문이 지난 11월 7일 법무부가 발표한 제59회 사법시험 3차 합격자 명단 55명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이로써 박 동문은 마지막 사법시험의 최고령 합격자가 됐다. 합격하기까지 무려 15년이 걸렸다. 그야말로 인고의 세월이었다. 20대 끝자락에 뛰어들어, 30대 전부를 보내고, 4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법조인의 꿈을 이뤘다. 우직하게 사법시험 하나만을 목표로 달려온 시간이었다. “우선 꿈을 이뤄서 기쁘죠. 끝내 좋은 결과를 얻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최고령 합격자라니 조금 부끄럽기도 해요. 많은 분들이 축하해 주어 감사하고요. 요즘 여러 감정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지난 11월 17일 진행된 인터뷰에서 박종현 동문(법학과 92)이 "부끄럽고 감사하다"는 소감을 전했다. 대학 시절에는 뚜렷한 꿈이 없어 사법시험에 큰 뜻이 없었다. 대학 졸업 후 군대를 다녀온 20대 후반에서야 ‘전문성’을 갖춘 사회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법학과를 나왔으니 법조계 전문가가 되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렇게 박 동문은 결혼과 함께 2002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사법시험에 뛰어 들었다. 매일 아침 여섯 시 반에 집에서 나와 신림동 고시촌에서 공부했다. 식사 시간과 운동 시간을 제외하고는 공부에 몰두했다. 적어도 30분은 매일 운동했다. 사회와 단절되어 학원과 독서실만 오가는 생활이기에 운동을 하며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분명 초조할 때도 있었지만 박 동문은 스스로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다. “이러다 영원히 사회에 못 나가는 건 아닐까 불안할 때도 있었죠. 하지만 이렇게 노력하면 하늘도 언젠가 제 뜻을 이뤄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타고난 긍정적인 마인드 덕에 긴 시간 잘 이겨냈죠.” 또 박 동문이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의 든든한 응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5년간 한결같이 박 동문을 응원해 준 아내의 공이 컸다. “한 번도 제 공부에 대해 불만이나 비난을 한 적이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공부에 소홀하면 제 할 일은 공부라며 저를 이끌어 줬습니다. 가족 덕분에 저도 목표를 이룰 수 있었네요.” 길었던 20대의 방황, 끝내 꿈을 찾다 박 동문은 딱히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은 아니었다고 스스로의 대학시절을 회상했다. “남들하고 크게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것 같아요. 미팅도 하고 학회도 하는 딱 평범한 학생. 그런데 공부보다는 노는 걸 좋아했어요. 그 때부터 마음을 잡고 법을 공부했어야 했는데 말이죠.” 박 동문은 ”종종 장학금도 받았고 주어진 일은 열정적으로 해냈다”며 “단지 스스로 원하는 일이 뭔지 몰라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뚜렷한 목표나 꿈을 찾지 못한 채 대학 생활 4년을 보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박 동문의 시작이 남들보다 조금 늦어진 까닭이다. 하지만 한 번 전문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 뒤에는 흔들리지 않았다. ▲박종현 동문은 "특유의 유쾌한 성격 덕에 힘든 순간도 잘 이겨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사법시험의 경우 1차 시험에 합격한 이들은 다음 해 1차 시험을 면제 받는다. 2차 시험을 여섯 번 보고나니 12년이 훌쩍 흘렀다. “돌아보니 15년이네요. 처음부터 이렇게 길어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죠.” 1차에 합격하면 2년의 기회가 주어지니 포기가 쉽지 않았다. 2차 시험에서 고배를 마신 날이면 이루 말할 수 없는 허탈감과 좌절감에 휩싸였다. 하지만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특유의 유쾌함과 확고한 소신이 그를 일으켰다. 박 동문은 오히려 함께 스터디하는 어린 친구들을 독려했다. 탈락의 아쉬움을 훌훌 털어내고 다시 펜을 들었다. "힘든 순간을 잘 이겨내는 성격 덕분에 결국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교두보가 될 것 박 동문은 꿈에 그리던 사법연수원 입소만을 앞두고 있다. 다음 해 3월 연수원 입소 전까지 박 동문은 그동안 못했던 일들을 하며 시간을 보낼 계획이다. "생각해보니, 배낭 여행 한 번을 못 갔어요. 공부하면서 그게 큰 한이 되더라고요. 유럽 여행을 떠나 그 곳에서 아내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끝으로 그는 예비 법조인으로서 마음가짐을 전했다. "연수원에 입소하면 또 열심히 공부해야죠. 한양의 구성원으로 사랑의 실천을 행하는 법조인이 되고 싶어요. 지금 이 마음 잊지 않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작게나마 기여하기 위해 매순간 노력하며 살겠습니다." ▲박종현 동문은 "사랑의 실천을 행하는 법조인이 될 것"이라고 말하며 "사회의 교두보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글/ 김예랑 기자 ys2847@hanyang.ac.kr 사진/ 이진명 기자 rha925@hanyang.ac.kr

2017-11 14

[동문]절제해야 드러나는 글의 '민낯'

말로 언어를 구사하고,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은 어쩌면 인간에게 주어진 값진 선물이다. 누군가가 남긴 말과 글이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강력한 힘을 가지기도 한다. ‘브런치 북 프로젝트’에서 금상을 수상해 에세이 <나를 지키는 말 88>을 출간하고, 현재 인터넷 일간매체 ‘오마이뉴스’에서 음악 관련 기사를 쓰는 손화신 동문(국어국문학과 05)은 그런 글을 적어내고 싶은 사람이다. 글에 의해, 글을 위해 꿈을 키워나가고 있는 손 동문을 종이 내음과 커피 향이 은은히 퍼지는 어느 북카페에서 만났다. 불확실함이 가능으로 “작품은 불멸하는 존재잖아요. 항상 그게 멋있다고 느꼈어요. 제가 죽어도 오래 살아 있는 작품을 남기고 싶어요.” 어려서부터 글쓰기에 대한 로망을 가슴에 품고 있었던 그는 글쓰기가 마냥 좋아 한양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다. 졸업 후 기상캐스터와 기자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탓에 작가의 꿈은 40대쯤에나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 여행기를 출간한 지인의 소식이 전환점이 됐다. “저는 책을 내는 것이 굉장히 대단하고,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20대였던 지인이 책을 내는 것을 보니까, 할 수 있을 것 같았죠.” ▲손화신 동문(국어국문학과 05)은 ”나만의 문체를 갖고 싶다는 욕심이 기자 생활을 시작하고 생겼다"며 "글을 더 잘 쓰고, 계속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용기를 얻었지만, 가슴 한 편에는 작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남아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브랜드 ‘디올’의 전시회 취재 때 한 문구를 봤다. ‘그(크리스찬 디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이 문구를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제가 방황을 하는 이유는, 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라는걸 깨달았죠. 그 순간 저는 ‘아, 내가 원하는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기회도 결심과 함께 운명처럼 찾아왔다. 본격적으로 자신의 색깔이 드러나는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한 손 동문은 다음날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제공하는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brunch)의 ‘브런치 북 프로젝트’ 공고를 보게 됐다. 대상 수상자는 무려 ‘브런치’에서 책을 직접 출간해주는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보자마자 생각했어요. ‘이 대상은 내 거다.’ 두 달간 아침부터 밤까지 카페에 가서 글을 썼어요. 평소에 관심이 있던 주제인 ‘말과 스피치’에 대해 열정적으로 글을 썼죠.” 평소 손에서 펜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기록하던 습관 덕인지, 손 동문은 노고 끝에 금상을 수상했다. 대상을 놓치며 출간의 혜택을 받진 못 했지만, 손 동문은 오히려 도움 없이 책을 출간한 과정이 자신에게 유익했다고 말했다. “제가 스스로 출간을 하려고 출간계획서도 써보고 출판사와 회의도 진행했어요. 정말 A부터 Z까지 제가 다 했으니까, 보람 찼습니다.” 그렇게 바라던 그의 저서 <나를 지키는 말 88>은 마침내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손화신 동문의 첫 저서 <나를 지키는 말 88>은 ‘나 답지 못한 것으로부터 나를 지킨다’는 주제를 담고 있는 에세이다. (출처: YES 24) 간결하고 진솔하게 “최대한 감추고 버리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 참 멋있다고 생각해요.”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밝힌 손 동문의 글 스타일 또한 ‘소심’하다. 하지만 그만큼 깊고, 간결하다. “뭉크 같은 화가들은 정밀화처럼 세세하게 그리지 않잖아요. 그들은 대상을 왜곡하고, 추상화하면서 내재된 본질을 드러내요. 글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쓰려고 해요. 처음 글을 쓸 때는 화려한 문체를 사용했는데, 지금은 줄일 수 있을 때까지 줄이려고 노력하죠.” 이 때문에 손 동문은 글쓰기에서 퇴고의 과정을 가장 중요시하게 여긴다. 퇴고를 하며 불필요한 말과 단어를 빼고, 문체를 날렵하게 만드는 것이 그녀가 지향하는 ‘좋은 글’이다. 기자가 본업인 손 동문은 다소 딱딱해질 수 있는 기사에도 문학적, 시각적 표현을 가미한다. 간결함 다음으로 글에서 중요한 것은 설명이 아닌 ‘보여주는 것’이라는 게 손 동문의 설명. “시각적 표현들이 글을 살아나게 만들어요. 스무 살 때 ‘씨네21’이라는 매체의 인터뷰 기사 중 ‘방심한 순간에도 앙 다문 입술’이라는 표현을 읽으며 감명 받았어요. 인터뷰이의 성격이 소설적으로 표현 됐지만, 본질을 꿰뚫는 묘사가 멋있었어요.” 그는 독자가 읽었을 때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는 기사를 연재하려고 노력한다. “글을 탁월하게 잘 쓰고 싶어요. 그렇다 보니 기사는 보통 기사대로, 내 글은 일반적인 글대로 쓰지 않으려 해요.” 손 동문의 노력은 그가 적어내는 기사에서 잘 드러난다. 다음은 싱그러운 풍경이 그려지는, 가수 루시드폴 인터뷰 기사 중 일부다. 햇빛과 폭풍우와 농부의 사랑이 만든 감귤처럼 루시드폴이 만든 음악은 귀한 힘을 품고 있다. 그의 노래는 사람의 마음을 맑히고 조용한 가운데 다시 나아갈 힘을 준다. 너무 조곤한 목소리로 너무 차분한 노래들을 부르는데도 충만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건 신기한 일이다. Lucid Fall인 그가 이번 해 가을에 감귤과 함께 정규 8집을 수확했다. 앨범명은 <모든 삶은, 작고 크다>로, 직접 쓰고 찍은 글과 사진을 담은 에세이집과 묶여 온오프라인 서점에서만 판매된다. CD에는 그가 작사-작곡-편곡은 물론 혼자서 녹음 및 믹싱한 9곡이 실렸다. 타이틀곡은 ‘안녕,’이다. 거울과 같은 글들 글 쓰는 것이 서투른 사람들은 어떻게 쉽게 글을 쓸 수 있을까. 손 동문은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쓰는 것을 제안했다. 표면적으로는 그 대상에 대해 쓴 글 같지만, 글쓴이의 자아가 담길 수 밖에 없기 때문.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잡문집>에서 정답에 가장 가까운 내용이 나와요. ‘자소서를 어떻게 쓰는 것이 좋을까요’라는 독자의 질문에 하루키는 ‘굴튀김에 대해서 써보는 것은 어떠냐’고 답했죠. 굴 튀김의 재료와 만들어지는 과정을 서술해도, 결국은 자신을 비추는 글이 완성돼요. 자신에 대해 쓰는 글은 어렵게 느껴지기 마련이니 대상이나 주제를 정해 쓰는 것이 쉬워요.” 자신의 정체성이 묻어나는 글을 쓸 때와 독자들이 그 글들을 읽었을 때, 손 동문의 순간은 빛난다. “글쓰기라는 활동의 가장 큰 장점은 그걸 통해 ‘나 자신’을 더 잘 알게 된다는 것이에요. 내가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 알면 나중에 선택할 때도 더 적합하고, 좋은 선택을 하게끔 도와주죠. 글쓰기는 결국 탐구활동이에요.” 절제하기에 더욱 와닿는, 손 동문의 글은 (https://brunch.co.kr/@ihearyou)에서 읽어볼 수 있다. ▲“저는 에세이 같지만, 그래도 ‘작품’으로 불리는 글을 앞으로도 쓰고 싶어요.” 손화신 동문은 일상의 소소한 얘기도 나만의 개성을 갖고 쓰면 하나의 소설이나 시 처럼,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글/ 유혜정 기자 haejy95@hanyang.ac.kr 사진/ 최민주 기자 lovelymin12@ha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