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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 08

[동문][사랑, 36.5°C]어렵게 내디딘 모교기부의 첫걸음이 마음 속 무거운 짐을 덜어줍니다

권선홍 교수는 1972년 한양대학교 고시반 공채 1기로 입학해 1976년 외무고시 1호 합격자가 된 자랑스러운 동문이다. 그는 대학 4년과 석사 2년을 합한 6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다. 그 수혜를 언젠가는 후배들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부채감을 평생 안고 살면서도 첫걸음을 떼기가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고 한다. 정년퇴임을 앞둔 나이가 되어서야 시작한 그의 기부는 ‘파워엘리트 나무그늘 캠페인’ 1호 기부자가 되면서 무거웠던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었다. 행정고시반 장학금으로 300만 원을 선뜻 쾌척하며 그 동안 마음만 있었던 어려운 한 걸음을 뗀 것이다. 글 편집실 / 사진 홍승진 ▲ 권선홍(72 법학) 부산외국어대학교 외교학과 교수 한양대학교 외무고시 1호 합격자이십니다. 법학을 전공하셨는데 사법고시가 아니라 외무고시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나요? 고등학교 시절부터 한국을 둘러싼 문제를 총체적으로 다루는 한국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그 시절엔 한국학이라는 용어도 생소하던 시절이라 진로를 찾기가 어려웠어요. 고등학교 3학년 때 친구가 한양대학교에 장학금을 지원하는 고시반 장학생 선발시험이 있으니 함께 응시해보자고 권유했어요. 사실 그 당시엔 대학 갈 형편이 못돼, 고시가 뭔지도 모른 채 장학금에 생활비까지 준다는 말에 응시를 했죠. 다행히 합격해 남들처럼 사법고시 공부를 시작했지만 제 적성과는 맞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다 2학년 1학기 때 한대신문사에서 주최하는 학술상에 응모했다가 인문사회분야의 최우수상을 수상하게 되었죠. 그것을 계기로 한국학 공부로 전과하고 싶어 사학과 학과장님과 여러 차례 면담하며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여의치가 않았어요. 결국 고시반에 남기로 했지만 나중에 학문의 길로 나가려면 사법고시보다는 어학을 좀 더 공부할 수 있는 외무고시가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2학년 2학기부터 외무고시로 진로를 바꾸었어요. 파워엘리트 나무그늘 캠페인 1호 기부자이십니다. 기부를 결정하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고시반 동기들 중에는 이미 장학금 되돌려주기 운동에 동참하는 친구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런 친구들에 비하면 많이 늦은 편이지요. 그동안 생활하다 보니 여유가 없기도 했지만, 사실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어요. 천 단위, 억 단위의 기부자들도 많잖아요. 그들에 비하면 형편없이 작은 금액이라고 생각하니 선뜻 나서기가 어려웠어요.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어느새 정년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더 늦어지면 안 되겠다 싶어 방법을 찾던 차에 마침 ‘파워엘리트 나무그늘 캠페인’ 소식을 들었어요. 고시반 장학금의 수혜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모금 캠페인이라 더욱 뜻깊은 것 같습니다. 교수님도 장학금 수혜자이십니다. 장학금이 교수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요. 제가 전기도 없던 시골 출신인데다 경제적으로도 대학갈 형편이 못되었어요. 그런 와중에 한양대학교 고시반 공채 1기로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1972년 당시 장학금 외에도 생활비를 매달 15,000원씩 받았는데 공장 노동자들의 한 달 봉급과 맞먹는 수준이었어요. 고시반 학생들이 이런 파격적인 지원을 받으며 공부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합격생들이 많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 모교의 지원이 없었다면 오늘날 이 자리에 있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권동문은 '장학금 지원을 받으며 공부한 고시반 출신 선후배 동문들! 우리가 십시일반 모은 기부금이 어려운 후배들에게는 매우 큰 힘이 됩니다.' 라고 말했다. 요즘 학생들을 보면 격세지감을 많이 느끼실 것 같습니다. 조언을 해주신다면? 젊은이들은 누구나 자기의 세대가 제일 어려운 세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즘 젊은이들도 지독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클 것입니다. 제 막내아들도 현재 취업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 그 절박함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을 알면서도 요즘말로 ‘최선의 노력을 다 하라’는 말밖에 못해 늘 미안하지요. 자신이 좋아하거나 일생을 바칠 만한 목표를 정하고 20~30년 정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그 분야에서 세계 최고 고수가 되어주길 바랍니다. 또한 취업 준비 등으로 힘든 일이 많겠지만 너무 경쟁에 매몰되지 말고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모교 기부를 새롭게 시작하면서 생각이 바뀐 부분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저에게 모교에 대한 기부는 학창시절 혜택을 받은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도리였습니다. 엄청난 혜택을 받으며 공부를 했으니 최소한이라도 되갚아야 하는 거잖아요. 저로서는 부산 총동문회와 지난해 11월 창립 20주년인 한양산악회 모임에 열심히 참여했던 것도 그러한 생각에서였지요. 그럼에도 기부를 계속 미루다가 어렵게 첫발을 뗀 느낌입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았으니 어렵게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시작하고 보니 조금 마음이 가볍습니다. 이제 정년퇴임하면 경제적으로 더 여유롭지 못할 수도 있지만, 훨씬 더 가벼운 마음으로 나름대로 기부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부의 어려운 첫걸음을 떼셨다고 하셨는데, 여전히 어렵게 느끼시는 분들에게 한말씀 해주신다면? 정년퇴임을 앞두고 뒤늦게 시작했는데 어쩌다 보니 캠페인의 1호 기부자가 되었습니다. 소액기부임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동문들께서 참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인터뷰에 응하게 되었습니다. 장학금 지원을 받으며 공부한 고시반 출신 선후배 동문들의 마음은 비슷하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십시일반 모은 기부금이 어려운 후배들에게는 매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동행한대 2017년 WINTER (제8호) 이북 보기

2018-02 08

[동문][사랑, 36.5°C] 큰 마음보다 살뜰한 맘으로 자주 나누고 싶어요

어느 날 갑자기 닥친 교통사고. 그날 이후 주변의 교통사고로 휴학한 후배들이 눈에 들어왔다는 임영란 동문은 그들을 위해 도서구입비 100만 원을 기부하기로 한다. 딸의 이런 마음은 자식을 잃을 뻔했던 아찔한 경험을 한 아버지를 움직였다. 같은 부모로서 세월호 가족의 슬픔을 그 누구보다 이해하는 부친 임재호 씨는 단원고 출신 학생들과 교통사고 피해 학생들을 위해 1,000만 원을 기부하며, 딸의 깊은 마음에 자식 가진 아비의 진한 마음을 더했다. 새해부터는 대중모금 캠페인 ‘Club 동행한대’의 후원자로도 나선 임영란 동문, 그에게 기부란 큰 맘 먹고 ‘한턱 쏘는’ 행위가 아니다. 그랬다면 아직 시작도 못했을 일, 일상 속에서 커피 한 잔 값을 아끼는 살뜰한 마음으로 아픈 이들의 마음을 보듬는 따뜻한 시선이 필요한 일이라고 한다. 글 편집실/사진 홍승진 ▲ 임영란(05 컴퓨터교육학) 동문 지난해 말에 발생한 교통사고로 통원치료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현재 경과는 어떠신지요? 임영란_ 졸업 후 임용고사를 거쳐 현재 고등학교 수학교사로 근무하고 있어요. 지난 해 10월 말, 출장길이었는데 신호대기 중 갑자기 뒤차가 와서 추돌하는 사고가 있었어요. 사고 현장에서 강한 충격을 느끼기는 했지만 외상도 없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죠. 다음날 통증이 심해 병원에 갔더니 근육이 놀랐다며 5일치 약과 물리치료를 처방해 주어서 좀 참으면 괜찮아지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도 호전되지 않다가 결국 수업 중에 심한 두통으로 쓰러지게 되었어요. 알고 보니 뇌진탕과 편타손상이라 집중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하더군요. 경황이 없었을 텐데 교통사고가 기부를 결심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임영란_ 이번 교통사고를 겪으면서 우스갯소리로 ‘호의를 베풀면 호구가 된다’라는 말을 실감했어요. 몸도 아팠지만 가해차량 운전자의 비양심적인 행동으로 마음고생이 많았습니다. 제대로 된 배상을 받기 위해 직접 자동차 손해배상 보장법도 공부하고 많은 사례와 판례들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보다 더 억울한 피해자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특히 쉽게 합의를 했다가 나중에 큰 후유증에 시달리며 결국 학업을 중단한 학생들도 있더라고요. 사실 저도 정확한 배상을 받는 것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현재 치료를 꾸준히 받아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고 공무원이라 병가 중에도 월급이 나오는 것에 감사함을 느껴 사회에 조금의 도움이 되고자 12월 월급의 반은 그들을 위해 기부하자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교통사고로 휴학한 후배들을 위한 도서구입비’라는 특이한 용도로 기부를 하셨습니다. 임영란_ 교통사고가 기부의 계기였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교통사고를 당한 후배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어요. 제가 큰 금액을 기부할 수 있었다면 생활비나 학비를 지원했을 테지만 소액기부였기 때문에 어떤 용도로 기부할까 고민하다가 문득 대학 다닐 때 전공서적 구입비용이 늘 부담이었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비록 적은 금액이라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본 기억이 있는 후배라면 나중에 또 누군가를 도울 줄 아는 선배로 성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조금 담아 보았습니다. 기부하실 때 아버님의 지원도 있었습니다. 아버님과 함께 기부를 하게 된 배경은요? 임영란_ 아버지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입니다. 제가 재수를 결정했을 때도, 임용고사 준비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을 때도 항상 저를 믿고 응원해 주셨어요. 현재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계시는데 그동안 일과 가족을 챙기시느라 여행 한 번 마음 편하게 다녀오신 적이 없으셨어요. 그래서 아버지 회갑기념으로 1월에 가족끼리 유럽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제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치료기간이 길어지게 되어 결국 여행을 취소하게 되었어요. 죄송한 마음에 여행적금으로 모은 돈을 회갑선물로 드렸더니 그 돈을 선뜻 단원고 출신 학생들에게 기부하자고 하셨어요. 학창시절에도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임영란_ 학창시절 ‘한양어린이학교’라는 동아리 회원으로 활동을 했어요. 한양대학교병원에 입원한 소아암환아들에게 교육봉사를 하는 동아리로 SK, 굿네이버스 등 기업들의 후원을 받아 좀 더 다양한 교육활동들을 진행했던 기억이 납니다. 졸업 후에는 동아리 졸업생들이 중심이 되어 후배사랑장학금이라는 이름으로 장학금을 지원하다가 2017년에 ‘한양어린이학교 후배사랑 장학기금’을 만들었어요. 사실 이 기금을 만들면서 후배들을 위해 모교에 기부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 임동문은 '이번 기부는 비록 적은 금액이지만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본 기억이 있는 후배라면 나중에 또 누군가를 도울 줄 아는 선배로 성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담아 시작했습니다' 라고 말했다. 아버님은 기업가로서 평소에도 지역사회에 기부를 많이 실천하시는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따님의 기부가 아버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임재호_ 제 영향이라고 하기는 쑥스럽습니다. 사고 후유증이 심해져 많이 놀랐을 텐데도 그 와중에 기부를 하겠다는 생각까지 했으니 대견하지요. 제 사업장 인근에 단원고가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단원고 아이들을 생각하면 늘 마음이 무거웠어요. 마침 딸아이가 자기 모교에 기부를 한다고 하니 단원고 출신의 학생이 있다면 그들에게도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저는 3~4년 전까지만 해도 지독한 워커홀릭이었습니다. 이렇게 살다간 일만 하다 죽겠구나 라는 생각에 뒤늦게 대학공부를 시작해 작년에 졸업했습니다. 대학 동기들 중 딸 또래의 친구들이 어려운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본격적인 기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새해에는 금전적인 기부 외에도 직접 현장에 나가는 봉사활동도 참여할 계획입니다. 사업장 인근에 외국인 노동자나 다문화가정이 많거든요. 이번 기부를 계기로 2018년 1월부터는 ‘Club 동행한대’ 후원자가 되셨습니다. 기부를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동문들에게 한말씀 해주신다면? 임영란_ 한 달에 다섯 잔의 커피를 참는다면 ‘Club 동행한대’ 1구좌를 개설할 수 있습니다. 저도 커피를 무척 좋아하지만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커피 한 잔 마실 여유가 없는 날도 있어요. 그런데 ‘Club 동행한대’ 후원자가 된 이후로는 ‘이런 날은 한 구좌 개설할 수 있겠다’ 싶으니까 업무 스트레스까지 줄어들더라고요. 커피 한 잔 값의 큰 힘을 여러분도 실천해 보셨으면 합니다. 동행한대 2017년 WINTER (제8호) 이북 보기

2018-02 06

[동문]창업 교육의 학문적 가치를 입증하다

대부분의 대학교는 창업지원교육을 시행한다. 단기적으로 보면 학생들에게 취업 이외의 선택지를 제시하는 것이고, 장기적으로는 자신만의 직업을 개척하는 것을 돕기 위한 것이다. 그런 만큼, 교육이라는 틀에서 이뤄지는 창업지원교육이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창업 역량을 키워주는지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도 존재한다. 이영근 동문(경영학부 08)은 이러한 편견을 깨고 대학교 내 창업 교육의 실질적인 효과를 증명하는 논문을 써내 창업학 논문 대상을 수상했다. 열정과 집념이 성과를 드러내다 “창업학을 연구한 지 1년 반 만에 '2018년 창업학 논문' 대상이라는 큰 상을 수상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쁘네요.” 이번 수상에 대해 이 동문이 밝힌 소감이다. 상을 수상하면서 기존에 연구하던 창업에 대해 더 깊은 애정과 책임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이 동문은 창업학에 대한 확고한 열정과 의지를 보였다. “앞으로 한국의 중소기업과 중견기업의 성장에 실질적으로 기여하고 싶고, 더욱 연구에 매진하여 한국을 빛내는 대표 창업학자가 되고 싶어요.” 이영근 동문에게 창업학 논문 대상을 수여한 학회는 ‘USASBE(United States Association for Small Business and Entrepreneurship)’로, 미국 중소기업 및 창업학 협회에서 주최하는 연차 학술대회다. 1981년 설립돼 38년에 달하는 역사를 가진 이 단체는 세계 최대 규모의 중소기업 및 창업학 학회로 약 5,000여명의 학자들이 속해 있다. 이 동문은 이 학술대회에서 수많은 경쟁과 검증을 거친 결과, 대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2018년 학술대회에는 24개국 254개 대학교가 참여해 400편 이상의 논문을 제출했어요. 제 논문은 ‘교육’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을 거쳐 대상 후보에 올랐고 ‘이론’, ‘실증, ‘신인’ 부문 최우수상 수상작들과 경쟁해 최종 대상으로 선정됐습니다.” ▲이영근(경영학부 08) 동문에게 대상을 수여한 'USASBE'는 미국 중소기업 및 창업학 협회에서 주최하는 연차 학술대회로, 세계 최대 규모의 창업학 및 중소기업 분야의 권위있는 학회다. (출처 : International council for small business) 또한, 논문 대상 수상 이외에도 이 동문은 카우프만 재단(Kauffmann Foundation)으로부터 장학금을 지원을 약속 받았다. “카우프만 재단은 기업가정신과 창업 문화 육성 사업을 펼치는 가장 큰 단체 중 하나예요. 이 단체에서 장학금을 받고, 창업학과 경영학의 대가들에게 직접 축하 인사를 받게 돼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질 않네요.” 미리 알고 창업하면 더 좋다 그를 대상으로 이끈 논문 이야기를 놓칠 수 없다. 이 동문은 ‘대학교 창업 교육이 창업 능력 향상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논문을 썼다고 설명했다. “저는 이번 논문을 통해서 학생들의 창업가적 역량이 대학교 교육을 통해서 향상될 수 있는지 연구했어요. 지도교수님인 패트릭 크라이져(Patrick Kreiser) 교수와 함께 창업과 교육의 관계를 고민하며 논문을 진행했죠.” ▲이영근 동문(경영학부 08)은 'USASBE'에서 2018 창업학 논문 대상 수상의 쾌거를 올렸다. (출처 : 이영근 동문) 이 동문이 미국의 주립대학교 학부생 92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경영대학과 공과대학에서 제공되는 교과과정과 과목들을 분석한 결과, 대학에서 제공하는 창업 관련 교육이 대학생들의 창업 역량을 강화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창업 관련 교육들이 대학생들의 창업가적 능력을 키우는 데 실제로 도움이 된 거죠. 또한 창업 경험이 있는 가족 구성원이 있으면, 창업을 더욱 꿈꾸게 되는 경향이 있었으며, 창업을 꿈꾸는 학생들 일수록 창업가적 능력이 높았습니다.” 물론 이러한 연구가 쉽게 이루어진 건 아니다. 이 동문은 수많은 커리큘럼을 일일이 분석하고, 학부 수업들과 비교하면서 연구를 진행하는 것을 가장 큰 어려움으로 꼽았다. “경영대학 인증(AACSB)과 공과대학 인증(ABET)에서 제공하는 커리큘럼을 분석하고, 미국 대학교의 실제 학부 수업들과 비교하는 것에 많은 시간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동문에겐 이 주제를 연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전세계적으로 창업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만큼, 창업 관련 교육들의 실질적인 효과에 대해 연구할 필요성을 느꼈어요. 예를 들어, 창업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창업 교육이 실질적으로 학생들의 창업으로 연결되는지 등을 논문을 통해서 실증적으로 풀어내고 싶었죠.“ 현 이슈에 대한 이 동문의 탐구정신과 열정이 실증적인 성과를 맺은 셈이다. 창업을 꿈꾸는 학생들에게 창업을 원하고, 창업 교육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아직까지 감이 안 잡히는 한양인도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학생들에게 이영근 동문은 모교의 지원을 최대한 이용하라는 조언을 건넨다. “학부 시절 저는 한양대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캡스톤디자인 수업을 통해서 컨설팅을 접했고, 수업 중 화장품 회사 대표를 직접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또한 해외인턴 프로그램을 통해서 인도네시아 현지 공장에 방문하여 실제 경영환경을 접할 수 있었어요. 이처럼 한양대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쌓은 경험들이 현재 창업학을 공부하는 데 밑거름이 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이 동문은 창업에 필요한 마음가짐 또한 중요하다고 말했다. “제가 지난해에 한국 중소기업 임원진 1,4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했던 설문조사에 따르면, 경영자들은 공통적으로 높은 혁신성, 진취성, 그리고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설문조사 결과를 인용해 이 동문은 "적극적인 마음가짐과 자발성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창업 그 자체가 학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이영근 동문은 후배들이 창업을 어려운 과업이 아닌, 파고들 가치가 있는 학문으로 받아들이길 부탁했다. (출처 : 연합뉴스) 글/채근백 기자 cormsqor12@hanyang.ac.kr

2018-02 05

[동문]꿈이 있으니 길이 있고, 그렇기에 행복하다

막연하게 살기도 벅찬 요즘이다. 누구는 크게 꿈을 꾸라며 자꾸만 채찍질한다. 하지만 어떡해야 이룰 수 있을까, 아니면 그런 고민조차 들지 않아 절망하는 청춘들이다. 스스로 말하길 ‘무모하게 살아왔다’던 김재빈 동문(성악과 09)은 조금씩 자신의 영역을 개척해 갔다. 특유의 무모함은 무대를 펼치며 꿈도 펼치는 그를 만들었다. 팝페라 가수 테너 김재빈 동문을 만났다. ▲에클레시아(Ekklesia)의 리더이자 팝페라 테너 가수, 김재빈 동문(성악과 09)이다. (출처 김재빈 동문) 무작정 찾아다닌 공연 기회 김재빈 동문은 주로 에클레시아(Ekklesia)라는 그룹으로 활동 중이다. 에클레시아는 김 동문이 졸업하면서 만든 그룹으로 이름은 그리스어로 ‘부르다’(to call)라는 뜻을 갖고있다. “관객들이 '우릴 불렀다'라는 뜻을 주로 쓰고 있어요. 종교적으로는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라는 뜻도 있죠. 팀 이름을 짓고자 하던 중에 친누나가 툭 던진 단어가 그룹의 정체성이 됐어요. 다른 이들에게 물었을 때 ‘꽃 이름 같다 예쁘다’는 얘기도 있어서 주저할 이유가 없었죠.” 시작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학창시절 유엔젤보이스(UangelVoice)라는 팝페라 그룹에서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나름 이름을 알린 바 있다. 그럼에도 막상 함께한 단원 몇 명과 함께 에클레시아를 결성했을 때 맞닥뜨린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이름을 알려야 섭외가 들어오는데 공연이 없으니, 그럴 기회도 부족했다. 무명의 악순환이었다. 김 동문은 에클레시아 결성 초기를 떠올리면 “어떻게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만큼 힘든 나날이었다. “무작정 공연장소를 찾아다니며 ‘우리를 무대에 세워달라. 페이는 받지 않겠다’고 말하고 다녔어요. 유엔젤보이스 시절 알게된 팬분들을 통해 공연 섭외도 조금씩 받을 수 있었고요. 그렇게 반년은 거의 무보수였고 , 2년이 지나니까 서서히 페이도 받았던 거 같아요.” 무작정 했던 보험설계사도 또 다른 기회로 김 동문은 예술가로는 특이하게 보험설계사로 일한 경력이 눈에 띈다. 이에 김 동문은 “얻은 것도 많은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그룹 리더로서, 그룹 이름의 앨범이 없다는 점이 무척 아쉬웠어요. 재정적으로 불안한 상황에서 팀원들에게 돈을 걷는 것도 미안한 상황이었죠. 한 4개월 공연과 병행하면서 처음 목이 쉬는 경험도 하며 결국 그만뒀어요. 고객들께도 죄송했지만 오히려 ‘너가 음악에 전념하길 바란다’고 응원해주셨죠. 그렇게 정리하고 나온 보험회사가 팀에게도 또다른 기회가 됐어요.” ▲보험회사와의 인연은 일반인CF에도 나가는 기회도 안기는 등 김재빈 동문에게 다양한 경험을 선사했다. (출처: 김재빈 동문) 보험회사에선 보험설계사를 교육할 때 설계사와 고객 사이의 여러 감동 이야기를 들려준다. 설계사들의 심리적인 면을 보강하기 위해서다. 평생 음악만 하다 접한 낯선 이야기는 김 동문에게 새로운 자극이었다. 이야기를 바탕으로 기획한 공연은 다른 보험회사와 인연을 맺어줬다. “노래 사이사이에 메시지를 얹어요. 가령 포기하지 말라는 얘기를 위해 ‘등산을 하는데, 너무 힘들어 지름길을 찾았지만 결국 포기하지 않는 길이 지름길이더라’는 말을 하죠. 편법은 없다. 그러고서 ‘포기하지 말라는 의미로 이 노래를 들려주겠다’하는 거예요." 이 공연은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인정받아 보험회사와 장기적으로 계약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약간의 여유가 생겼고 김 동문과 그룹 에클레시아에 또 다른 원동력이 됐다. 단복도 맞추고, 팬들을 위한 공연도 기획하고. 이렇게 쌓인 프로필은 에클레시아를 증명하는 이력이 돼 더 많은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결국 포기하지 않고 가야겠구나, 앞으로도 포기 않을 이유가 됐죠.” 지금 에클레시아는 자유롭지만, 서로가 필요할 때 의지할 수 있는 동료들이 함께한다. ▲지난 2017년 에클레시아 팬들과 만난 자리. "이제는 혼자가는 길이 아녜요." (출처: 김재빈 동문) 은사님을 만난 값진 경험 에클레시아 결성 초기도 힘들었지만, 한양대를 오기까지도 김 동문에게 있어 잊지 못할 시기다. 지방의 한 대학 성악과에 진학했던 김 동문에게 우연히 같은 부대를 간 동기가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무작정 상경하자던 그의 설득에 넘어갔다. “큰 물로 가자던 그 말이 그땐 그렇게나 달콤했죠.(웃음) 군대서 받은 돈을 모아 휴가 때마다 서울로 가서 박흥우 선생님께 레슨을 받았어요.” 이제는 10년도 넘었지만 아직도 김 동문에게 그의 이름 석 자는 잊지 못할 은혜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레슨비도 간신히 내던 그를 박대하지 않고 열성적으로 가르쳤다. “제대한 후에는 아예 ‘너 형편 어려우면 그냥 (돈 없어도) 가르쳐주겠다. 와라’ 하셨어요. 정말 큰 은혜였죠.” 박 선생님 밑에서 열성을 다하는 한편, 생활비를 구하고자 온갖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렇게 25살이 돼서야 김 동문은 한양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군대 전역 후 2년만이다. “식당, 카페, 배달, 용역 등 안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어요. 그렇게 들어간 학교에서 곽신형 교수님을 만났죠.” 한양대 명예교수인 곽신형 교수(성악과)를 사사하게 됐다. 가정형편을 알기에 많이 챙기고, 더욱 보듬어 주던 곽 교수 덕에 김 동문은 위로도 많이 받았다. 그리고 3학년이 될 무렵 곽 교수가 팝페라 그룹 유엔젤보이스 입단을 추천하며 김 동문의 팝페라 입문이 시작됐다. “그때만 해도 팝페라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어요. 저 역시 ‘왜 저를?’하는 마음도 있었죠. 그런 계속 설득하셨어요. 경험이 될 거다. 그리고 교수님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입단을 준비했죠.” 유엔젤보이스와 남은 학부시절을 함께했다. 성악만 해온 김 동문에게 팝페라는 조금 생경했다. “마이크를 쓰지 않다가 쓰려니 무척 낯설었어요. 내 귀에 들리는 내 목소리. 지금은 익숙해졌죠. 경험이 쌓이면서 팝페라라는 장르가 익숙해졌던 거 같아요.” 당시를 회상하면 “좀 많이 무모했었다”며 웃는 김 동문이다. 하지만 그 무모함은 결국 에클레시아와 지금의 김 동문을 만들었다. 무모하게, 하지만 주저않고 지하철에서 선보인 공연 무대는 ‘왜 음악을 하는가’에 대한 답변도 더해줬다. 공연 시장이 침체기이던 2014년 중순, 에클레시아는 서울메트로(현 서울교통공사)에서 제공하는 공연무대를 지원받아 무대에 설 기회를 얻었다. 그렇게 공연을 하던 어느 날 한 모녀가 유독 눈에 밟혔다. “아이는 공연 내내 열중하고 어머니는 왜인지 핸드폰을 틈틈이 보곤 했죠. 그렇게 1시간 공연을 다 본 모녀는 떠났어요. 그런데 어머님께서 케이크과 커피를 사들고 오신 거예요. 사진을 요청하면서 말씀하셨죠. ‘원래 음악을 안 듣는 아인데 이 무대는 계속 보고 싶어해서 과외도 미루고 보게 해줬다. 너무 고마운데 현금이 없어 이렇게나마 보답하고 싶다.’ 그때 행복해하던 아이의 모습이 아직도 떠올라요. 내가 의미있는 일을 하고 있구나.” ▲서울메트로(현 서울교통공사)의 기획으로 열린 무대에서 만난 모녀는 김재빈 동문에게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안겼다. (출처: 김재빈 동문) 역경이 있었지만, 꾸준한 노력들은 어느샌가 보답으로 돌아왔다. 어려움에도 당당했다. “학창시절 생계 관련 장학금 덕에 부담을 덜었어요. 낼 서류도 많았지만, 부끄럽지 않았죠. 등록금 내준다는대. (웃음)” 그는 즐거우면 무조건 한다. “바보였지만, 거절이 두렵지 않아 문부터 두드리고 보는 바보 였어요.” 김 동문의 삶의 궤적은 그렇게 두드리며 만들어졌다. “해보고 나니까 ‘되네?’ 했던 거 같아요. 보험회사와도 콜라보가 됐잖아요? 앞으로도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공연을 기획해가는 게 꿈이에요.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물론 공연과 음반, 사회공헌도 함께해야죠.” 꿈이 있었기에 힘이 든 것도 잊고 살아왔고, 지금도 꿈이 있어 행복하다는 김 동문. 행복은 길이 있기에 있다는 그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더 많은 영상을 에클레시아 공식 유투브 계정에서 볼 수 있습니다. 클릭시 이동) 글/ 이상호 기자 ta4tsg@hanyang.ac.kr

2018-01 25

[동문][희망, 100℃] 30년 전 각인된 한양인의 DNA가 여전히 우리의 머리와 가슴 속에서 뛰고 있다

참석자 수 600명 육박, 밴드 가입 1,200명 돌파, 발전기금 모금액 3억 원 돌파. 지난해 10월 성황리에 개최된 ‘한양87 홈커밍데이’가 쓴 놀라운 기록들이다. 역대 최고의 기록들이었다. 행사가 끝난 후 입소문이 번지면서 동문 선배들 사이에서 “도대체 87학번 준비위원장이 누구였냐”고 묻는 이들이 많았다. 2017년 코스닥에 상장된 기업인 필옵틱스의 대표 한기수 동문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준비위원장으로서의 왕성한 활동은 물론, 스스로 1억 원이라는 통 큰 기부를 실천하며 모교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글 편집실/사진 홍승진 ▲ 한기수(87 물리학) 필옵틱스 대표이사 대기업이라는 안전지대 밖으로, 창업 그리고 상장 한기수 동문은 삼성SDI에 입사하여 10년간 근무하다가 퇴사한 후, 자동화설비 제조사인 필옵틱스를 창업했다. 2017년에는 코스닥 상장까지 성공적으로 마쳐 기업의 성장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결과적으로는 성공적인 선택이었지만, 직장인으로서 대기업이라는 안전지대를 떠나기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직장인들에게 입사 5년, 10년은 정말 빠르게 지나갑니다. 너무 바쁘다 보니 미래를 생각할 겨를조차 없죠. 그런데 입사 10년차가 가까워질 즈음, 10년 먼저 입사한 선배들이 줄줄이 회사를 떠나는 모습을 보며 나의 10년 후 모습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 역시 10년 후에는 회사를 떠나야 할 수도 있는데, 그때 뭔가를 새로 시작하는 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입사 10년차 되던 해에 사표를 썼다. 퇴사 후 중소기업에 재입사해 중소기업의 생태계도 배우며 필옵틱스를 설립하기까지 4년 정도의 준비기간이 필요했다. 2008년 창업을 했으니 올해로 딱 10년째가 되었다. 직장인으로 10년, 경영인으로 10년이다. 직장인이 ‘주어진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경영자는 ‘새로운 일을 찾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아직도 설계 실무에서 손을 놓지 않고 있기 때문에 제가 엔지니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달라졌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특히 초창기부터 함께 일했던 직원들은 예전보다 판단 속도가 빨라졌다고 하더군요.” 좀 더 냉철해지고 판단력이 좋아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판단기준이 단순해졌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표현했다. 사업성이 있느냐 없느냐가 가장 큰 판단 기준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빠른 판단’ 못지않게 ‘현명한 판단’을 위해, 경영자로서 늘 긴장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한양87 홈커밍데이 준비위원장, 역대급 기록을 남기다 이렇듯 바쁘게 살았으니 졸업 후 학교와의 교류는 어려운 일이었다. 모교를 다시 찾은 소감에 대해 ‘지하철이 연결되어 있어 놀랐다’는 말을 했을 정도이다. 지하철이 연결된 것이 2000년대 초반의 일이니 그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다시 학교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다. 지난해 학교 측으로부터 ‘87학번 홈커밍데이’ 준비위원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졸업 후 학교와 교류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뜻밖의 제안이었지만 반가웠습니다. ‘준비위원장’이라는 직함이 부담스러웠지만 학교에서 요구하는 것은 없으니 행사 인사말이나 준비하면 된다고 해서 덜컥 수락을 했지요. 그런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어요. 행사를 준비하는 100일간 학교에서 요구하는 것은 정말 하나도 없었어요. 다만, 우리가 알아서 준비해야 할 일들이 많더군요. (웃음)” 87학번들이 주체가 되는 행사였기 때문에, 동기들의 힘을 모으는 것이 중요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준비위원장을 맡은 후 제일 먼저 한 일도 동기들을 밴드에 가입시키는 일이었다. 87학번 동문이 3,600명 정도 되는데 밴드에 가입한 인원이 무려 1,200명에 이르렀다. 전체 동문의 3분의 1이 가입한 셈이다. 행사 계획, 발전기금 모금 관련 게시물에는 하루에 수백 개 이상의 댓글이 달릴 정도로 참여율이 높았다. 한기수 동문은 일일이 챙겨 읽다가 노안이 찾아왔다며, 진담 반 농담 반 그간의 고생을 에둘러 말했다. 행사 당일 참석 인원이 600명에 달했고, 뒤풀이에 합류한 동문들까지 포함하면 실제 참석자 수는 훨씬 많았다. “이번 행사의 성공은 100일간 동기들이 내 일처럼 나서 도와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학교가 차려준 밥상에 숟가락만 얹듯이 참여하는 행사였다면 동기들이 느끼는 자부심과 성취감은 덜했겠죠.” 발전기금 모금 3억 원 돌파, 87학번의 자취를 남기고 싶다 87학번 홈커밍데이가 남긴 역대급 기록 중 모교 발전기금 모금을 빼놓을 수가 없다. 무려 3억 원이 넘는 기금이 모금되었는데, 홈커밍데이 역사상 유례가 없는 규모였다. 얼마나 많은 동문들의 참여가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기수 동문은 그 공을 모두 동기들에게 돌리며, 기금을 사용함에 있어서도 87학번의 자취를 남기고 싶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동기들이 적극적으로 모금에 참여해주면 더욱 뜻깊은 행사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매칭기금’ 방식을 활용해 보았어요. 예를 들어 동기들이 1,000만 원을 기부하면, 제가 같은 금액을 보태서 2,000만 원을 만드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모금을 하다 보니 3억 원이나 모았어요. 다시 생각해 봐도 동기들의 호응과 참여가 없었다면 3억 원 모금이 가능했을까 싶어요.” 워낙 성공적인 행사였기에 준비위원장으로서의 소감도 남다를 법한데, 그는 ‘나의 일상이 홈커밍데이 전과 후로 완전히 바뀌었다’는 말로 소감을 대신했다. 행사를 마친 후에도 꾸준히 동기들과 모임을 가지고 있으며, 오는 3월에는 87학번 동기회도 정식으로 출범할 예정이라고 귀띔했다. ▲ 한기수 대표이사는 학교에서 청년창업을 준비하는 후배들을 위한 ‘차세대 청년기업 육성기금’에 기부를 했다. 창업선배로서의 어려움이 반영된 마음으로 학교에서 지원하는 다양한 창업 프로그램 지원 속에서 두려움 없이 도전하고 실패하는 경험을 해보라는 당부의 뜻이다. 너무 오랫동안 모교 발전에 무심했다는 자책감 한기수 동문은 홈커밍데이 모금에 보탠 1억 원 이외에도, 재학생들의 창업교육 지원에 써달라며 1억 원을 기부했다. 또한 창업교육 지원과 물리학과 장학금으로 5억 원이 넘는 기부를 약정했다. 그는 모교의 발전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기쁘다며, 이런 기회들이 더욱 많은 동문들에게 주어지기를 희망했다. “동문이라면 누구나 모교에 대한 애정을 품고 있습니다. 바쁘게 살면서도 한양대 관련 기사가 나오면 그냥 지나치질 못하고, 입시철이면 대학 순위에 은근히 신경을 쓰게 되지요. 하지만 이런 관심이 바로 기부로 연결되기는 힘들어요. 저 같은 경우에도 모교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은 늘 있었지만, 선뜻 학교에 연락하기가 쉽지는 않더군요.” 한기수 동문은 오랫동안 모교 발전에 무심했다는 자책과 후배들에 대한 미안함이 컸다고 토로한다. 그래서 홈커밍데이 준비위원장 제안이 왔을 때도, 모교가 따뜻한 손을 내미는 것처럼 반가웠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창업을 준비하는 후배들을 위해 기부를 하게 된 이유가, 창업 선배로서 창업의 어려움을 잘 알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다. “사실 제가 학창시절 장학금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은 못합니다. (웃음) 오히려 한창 호기심이 왕성할 나이에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는 것보다는 다양한 경험을 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회사에서 직원을 채용할 때도 호기심이 많은 친구들에게 먼저 눈이 갑니다. 실제로 업무해결 능력도 뛰어나더군요.” 그는 직장인으로서 가장 불행한 일이 ‘일의 선택권’을 가질 수 없는 점이었다며, 청년창업은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강조했다. 학교에서 지원하는 창업 프로그램을 활용해 두려움 없이 도전하고 실패하는 경험을 일찍 해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한양인의 DNA가 각인된 선배로서, 모교의 발전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방법들을 계속 찾아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는 홈커밍데이를 계기로 기억 속에서 잠자고 있던 한양인의 DNA가 30년 만에 깨어나 머리와 가슴 속에서 힘차게 뛰노는 것이 느껴진다며, 이는 3,600명 동기들의 한결같은 심정일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너무 오랫동안 모교 발전에 무심했다는 미안함은 이제 접어도 되지 않을까. 동행한대 2017년 WINTER (제8호) 이북 보기

2018-01 22

[동문]무거운 별 가슴에 새기고

지난해 말 국방부가 군 장성급 인사를 단행했다. 이번 인사에서는 총 110명이 진급했으며, 그중 77명이 준장으로 진급했다. 지난 1월 11일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준장 진급자들에게 삼정검(四寅劍)을 수여했다. 대통령이 직접 진급자들에게 삼정검을 수여한 것은 창군이래 처음이다. 대통령의 삼정검 수여는 국가를 위해 힘써달라는 준엄한 명령인 셈. 삼정검에는 육·해·공 3군이 일체가 돼 호국·통일·번영 이 세 정신을 달성하라는 뜻이 담겨있다. 그래서 장군의 상징인 삼정검은 그 무게감이 남다르다. 위국헌신 군인본문(爲國獻身 軍人本分) 지난해 12월 말에 단행된 준장 인사에 자랑스러운 한양인이 이름을 올렸다. 삼정검을 가슴에 새긴 이상철 동문(경제학과 86)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동문은 ERICA 캠퍼스 학생군사교육단(ROTC, 이하 학군단) 출신으로 1990년 학군단 28기로 임관한 3,533명 중 유일하게 준장에 진급했다. 이 동문은 “장성 진급은 단지 직위 상승이 아니라 국가 안보와 군 발전에 막중한 책임감을 의미하기에 그 무게가 남다르다”며 “군인으로서의 자세를 다시 한번 가슴 속 깊이 새기고 군 본연의 임무완수에 더욱 정진하라는 의미로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1월 11일 이상철 동문은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삼정검을 수여받았다. (출처: 이상철 동문) 이상철 동문은 현재 육군 제2작전사령부 소속으로 근무 중이다. 준장 진급 후 진급신고, 삼성검 수여식, 장군 진급자 교육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바쁜 와중이지만 이 동문은 모교 방문도 잊지 않았다. 진급 직후 한양대 학군단을 찾아 후배들에게 격려의 말을 전했다. 뿐만 아니라 지난 1월 11일 한양대 신년 인사회에 참석해 모교 관계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30년 외길 군인 인생 이상철 동문은 말 그대로 ‘군인’의 삶을 살았다. 1986년 대학 입학 후 1988년 한양대 학군단에 지원했다. 입학부터 이 동문은 학군단 지원을 희망해왔다. 이 동문의 할아버지는 6.25전쟁 중 전사했고, 아버지는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시 병사로 토벌 작전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은 국가보훈대상자다. 이러한 배경 덕에 이 동문은 어린 시절부터 군인의 삶을 꿈꿔왔다. 적성과도 잘 맞았다. 남자로 태어나 국가 안보에 헌신할 수 있는 직업을 갖는다는 것이 스스로 큰 영광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동문이 학군단에 지원한 1988년에는 총 103명이 장교로 임관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3, 4학년 2년간 훈련을 받았습니다. 학업과 훈련을 병행하기 때문에 종종 어려움도 있었지만 동기들과 함께 우정을 키우면서 즐겁게 지냈죠. 아쉽게도 극히 일부만 군에 남았고, 대부분의 동기들이 사회로 진출했습니다.” 군에 남은 이 동문은 707특공연대 소대장을 시작으로 특공대대 작전항공장교, 강원도에서 2차 중대장과, 연대 및 사단 작전장교를 거쳐 1차로 소령으로 진급했다. 이후 대구대 학군단 교관,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실무자 등의 생활을 거쳐 1차로 중령 진급, 53사단 해안대대장 및 사단 작전 참모 등으로 근무하면서 대령으로 진급했다. 53사단 해안연대장, 2작전사령부 관리과장 등을 거쳐 이번 인사를 통해 준장으로 진급했다. 돌아보니 어느덧 29년 11개월. 군인으로 살아온 30년이었다. 이 동문은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며 30년 군 생활을 겸손하게 회상했다. 그러나 이 동문은 단 한 순간도 맡은 업무를 게을리 한 적이 없는 타고난 노력파다. 30년간 진급의 관문마다 1차로 합격해 군인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동문의 꾸준한 노력 덕분이었다. 이 동문은 “내 욕심은 내려놓고 최대한 양보하면서 힘든 것은 내가 한다는 자세로 임했다”는 삶의 자세를 겸허하게 전했다. ▲이상철 동문은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정신으로 솔선수범 하는 장교가 될 것"이라고 했다. (출처: 이상철 동문) 준장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 힘든 순간도 많았다. 직업군인이기에 근무지를 자주 옮겨야 했다. 30년 동안 무려 19번에 걸친 이사로 인해 자녀들이 잦은 전학과 학업으로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볼 때면 그의 마음이 무너지는 듯 했다. “내가 군인이라는 이유로 가족들에게 똑같은 고통을 강요하는 것 같아 미안함이 컸죠.” 그러나 이내 이 동문은 “아들, 딸이 힘든 시간을 잘 이겨내고 어느덧 대학생이 됐다”며 “잘 커줘서 고맙고 흐뭇하다”고 말했다. “저의 수고가 온 국민들이 편안하게 살아가는데 밑거름이 된다고 생각할 때에 가장 큰 보람을 느낍니다.” 이 동문의 가치관에는 그가 뼛속까지 군인이라는 사실이 잘 드러난다. 자신의 노력이 국가와 인류 발전에 기여한다면 이 동문에게 그보다 더 큰 보람은 없다고. 끝으로 이 동문은 준장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막중한 사명감으로 하루하루 임할 것이라는 앞으로의 다짐을 전했다. “진급은 더 많은 권한을 의미하지만 그 권한을 좋은 곳에 사용하고 싶습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정신으로 솔선수범하는 장교가 되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또 군 문화 역시 개선하며 국민들에게 신뢰받는 군을 만들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글 / 김예랑 기자 ys2847@hanyang.ac.kr

2018-01 17

[동문]기술고시, 공익 기여라는 꿈의 발판이 되다

자연과학 분야의 인재를 선발하는 국가고시인 '5급 기술 국가공무원 공개경쟁채용시험(이하 기술고시)'. 2017년 기술고시 최종합격자 73명 중 한양대 출신은 무려 15명이었다. 그중 권용은(기계공학 13), 박성열(전기생체공학 12), 전의건(건축공학 08) 동문과 조원담(화학공학과 4) 씨는 주요직렬 4개에서 수석합격의 기쁨을 맛봤다. 수험기간과 택했던 공부 방법은 각자 달랐지만, 모두 하나의 공통된 목표를 향해 전심전력했다. 기술고시 합격을 통해 꿈에 한층 더 가까워진 전의건 동문과 조원담 씨를 직접 만났다. 마라톤과 같았던 수험생활 “2차 시험의 마지막 과목을 치르기 전날, 수많은 유성이 저에게 쏟아지는 꿈을 꿨어요. 상서로운 기운과 함께 다음날 시험장에 입실했는데, 제가 특별히 잘하는 분야의 문제가 나와서 수석합격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한양대 기술고시반에서 꾸준히 공부를 이어나간 전의건 동문은 4년 만에 합격과 수석합격,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았다. 공익에 이바지할 수 있는 직업을 원했던 전 동문은 20살 때의 진로 탐색 시간을 통해 기술고시를 처음 알게 됐다. 항상 관심은 있었지만,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하게 될 줄 몰랐던 그는 학군단 전역 직후 고시반에 들어갔다. “살아가면서 뭘 해야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봤는데, 기술고시가 가장 가치있는 길이었어요.” ▲”공공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돼서 봉사활동도 했었어요. 기술고시에 응시한다면 제 전공도 살릴 수 있고, 더 큰 범위에서 공익 달성에 기여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전의건 동문(건축공학부 08)은 지난 2014년 6월에 고시반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다. “1, 2, 3차 시험이 모두 처음이라 어떻게 시험을 봐야 할지 걱정이 많았어요. 그래서 전공시험에 임하는 마음으로 시험을 쳤어요. 그 마음가짐이 저를 합격의 길로 인도해준 것 같아요.” 학교 재학 중 기술고시를 급하게 준비한 조원담 씨는 지난 2016년 11월에 공부를 시작해 준비 12개월 만에 당당히 합격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빠듯한 시간 동안 쉴새 없이 책상 앞에 붙어있었던 그다. 평소 공직자인 아버지가 헌신적으로 국가를 위해 일하는 모습도 조 씨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제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나 이루고 싶은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기술고시가 제일 적합했다고 생각해요.” ▲조원담(화학공학과 4) 씨는 ”합격도 불확실한 상황이었다"며 "준비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올해는 정말 기대를 안 했는데, 운이 따르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합격 소감을 전했다. 반복적으로, 또는 효율적으로 전 동문과 조 씨가 선호한 공부 방법은 달랐다. 반복적인 암기 학습을 선호했던 전 동문은 황농문 저자의 <몰입>을 읽고 감명을 받아 공부할 때 적용했다. “한 가지 문제에 대해 골똘히, 그리고 자주 생각하면 효율이 극대화된다는 내용이었어요. 저도 수험 기간 동안에는 공부하고자 하는 것을 종일 생각했어요." 공부와 수영을 병행하던 그는 아침에 수영하면서도 공부했던 것 중 모르거나, 헷갈리는 것들을 연상했다. 밥을 먹거나, 샤워하거나, 잠자기 직전에도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갔다. "하다못해 꿈속에서까지 나왔던 것 같네요." 조 씨는 “기출문제를 잘 본 것이 단기간에 합격할 수 있던 방법”이라고 말했다. 미리미리 해둔 전공 공부 덕에 수월했다.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이 실제 시험에서 많이 출제돼요. 그런 관련 수업들 위주로 수강했던 것 같아요. 그 지식을 기반으로 기출문제를 보며 출제유형을 익히고, 출제 가능성이 높은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략했습니다.” 4학년 1학기 재학 중 2차 시험 준비를 해야 했던 조 씨는 어느 것을 우선순위로 둬야 할지 고민했지만, 부담이 적은 과목 위주로 선택한 결과 2차 시험에 시간을 더 할애할 수 있었다. ▲’굴을 파야 금을 얻는다.’ 하나의 관문 기술고시를 통과한 두 사람의 미래 공직자로서의 모습이 기대된다. 같은 시기, 고시반에서 상주하다시피 했던 전 동문과 조 씨는 고시반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다음은 전 동문의 설명. “물리적 혜택은 기숙사와 식대, 그리고 공부 장소를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받는 거예요. 또 다른 혜택으로는 선배들이 구축해놓은 자료들로 다른 수험생 친구들과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죠.” 또한, 일주일에 같은 과 수험생들끼리 한 번씩 모여 스터디를 한 것도 큰 도움이 됐다고. “진도를 정해놓고 같이 공부를 하고,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서로 공유하면서 보완할 수 있었어요.” 조 씨는 힘든 순간을 공유하며 서로에게 위로가 돼준 팀원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원대한 목표를 향해 기술고시라는 큰 장벽을 넘어선 두 사람의 추후 계획은 구체적이었다. 전 동문은 국토부 녹색건축과에서 일하는 것이 목표다. “궁극적으로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요. 그게 사실 제일 어렵잖아요. 저를 보고 사람들이 ‘저 사람 일 참 잘한다’라는 생각을 했으면 해요. 공무원으로서 국가에 기여한 후, 다른 나라로부터 제가 진행한 사업이나 정책이 본받을만하다는 평을 받고 싶네요.” 조 씨는 산업부에서 에너지 수급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 에너지 불안정이 국가 정세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에너지 안정화를 위해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2018 기술고시 1차 시험이 머지않은 지금. 전 동문과 조 씨는 수험생들에게 가장 간절한 것이 응원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따뜻한 응원의 말을 건넸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그들을 응원해준 사람은 부모님이었다. 조 씨는 시험 응시에 용기를 북돋아준 부모님의 지지 덕분에 수험생활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전 동문도 매주 학교에 찾아온 부모님의 응원에 감사함을 표했다. ▲인터뷰가 진행됐던 HIT 건물 앞에 걸려져 있는 플랜카드 앞에서 두 사람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글/ 유혜정 기자 haejy95@hanyang.ac.kr 사진/ 최민주 기자 lovelymin12@hanyang.ac.kr

2018-01 06 중요기사

[동문][세계 속의 한양인] 배움을 꿈꾸던 학생, 미국서 회계사로 안착하다

한양대는 올해로 개교 79주년을 맞는다. 동아공과학원, 동아고등공업학원 등을 거쳐 지난 1948년 한양공과대학으로 승격, 1959년 종합대학으로 개편하면서 현재의 이름인 한양대학교가 됐다. 이때 학교를 다녔던 동문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그중 한 동문이 지난해 11월 모교를 방문했다. 수십 년 전 미국으로 떠났던 이종혁 동문(공업경영학과 58)이다. ▲이종혁 동문(공업경영학과 58)은 건축과 수료 후 오랜 시간이 흐른 지난해 11월 한양대 총장실에서 건축공학과 명예졸업상을 수여받았다. 근 60년만의 명예졸업장 수여 이종혁 동문은 우리대학 공업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 소노마주립대학교 경영학 학사, 골든게이트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석사, 아고시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캘리포니아 주 공인회계사(CPA) 자격을 취득한 이 동문은 암스트롱 대학, 캘리포니아 이스트 베이주립대학교, 아고시대학교 등 여러 곳에서 겸임교수를 지낸 바 있다. 이외에도 캘리포니아 주정부, 오클랜드 시에서 경제 자문위원을 지낸 바 있으며, 지난 1977년부터 The Lee Accountancy Group이라는 회계법인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이 동문이 지난 2017년 11월 모교를 찾은 이유는 명예졸업식 때문이었다. 이영무 총장을 비롯해 정성훈 공과대학장(유기나노공학과), 박준석 건축공학부장(건축공학부), 노승범 건축학부장(건축학부)이 참석한 이 자리에서 이 동문은 우리대학 건축공학 명예졸업장을 수여받았다. 건축과로 입학해 3년을 다녔던 이 동문이었다. 하지만 문교부 유학시험 합격 후에 군복무, 그리고 제대 후 미국행이 지연되던 중 공업경영학과로 전과했다. 졸업하면서 건축과는 수료로만 남았다. 그렇게 50년이 훌쩍 넘은 지금 건축공학학사 명예졸업장을 수여받은 이 동문의 감회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미처 건축과 졸업장을 받지 못해 함께했던 동창 주변에서 맴돌았어요. (그들에게) 동창이라 하지도 못했는데 이젠 당당히 어깨피고 동창이라 이야기 할 수 있게 됐네요.” 이 동문은 이번 명예졸업장 수여식에서 발전기금 4만 달러를 기부 약정했다. 1년에 1만 달러씩, 4년에 걸쳐 총 4만 달러다. “함경도에서 피난 온 실향민으로 학교에서 여러모로 도움도 받고 등록금도 면제 받았어요. 이제 4년간 등록금 낸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장학금이 성적 우수자보단, 앞길을 개척할 수 있는 학생에게 쓰였으면 해요.” ▲이종혁 동문은 미국으로 건너간 이래 회계학 분야와 한인 동포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12년 열린 이 동문의 출판기념회의 모습. (출처: 미주 한국일보) 학문 열정을 쫓은 봉사자 이 동문의 행보는 수많은 '발자취'로 가득하다. 그 발자취를 관통하는 키워드라면 단연 ‘회계학’이다. 회계학 박사 및 기나긴 겸임교수 이력, 경제 자문위원 그리고 현직 회계법인 대표라는 직책까지 1965년 대학 졸업 이후 오로지 한길이다. 지난 2016년에는 오클랜드 매거진 주최 독자들이 뽑은 지역 최고의 회계사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처음부터 회계학을 하진 않았다. 한양대 입학 당시, 이 동문은 폐허가 된 서울을 보며 복구에 힘쓰고 싶었고, 이는 건축과로 그를 이끌었다. 그랬던 그가 경영학에 들어선 건 군 제대 직후다. “유학시험을 붙고 해병대에 자원입대해 제대하고 나니, 산업 심리학에 대한 흥미가 생겼어요. 유학이 지연되면서 한양대에서도 경영학을 배우고자 공업경영학과에 입학했죠. 학과에서 회계학을 네 과목 들었는데 하다보니 재밌기도 해서 이쪽 분야를 쭉 공부했어요. 건축과 다니며 제도설계 훈련을 받았던 게 큰 도움도 되더군요.” 한편, 이 동문은 성실한 봉사자로도 통한다. 지난 2004년 미국 오클랜드 시는 그의 다양한 공로를 인정해 2004년 3월 5일을 '이종혁의 날'로 공포하기도 했다. 오클랜드 시는 저소득층과 무주택자를 위한 추수 감사절 만찬을 주도하곤 했는데 당시 이 동문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저 스스로도 많은 지원을 했고, 여러 기업체와 사회 단체, 한인 동포들과도 연결돼 있어 주변에 도움을 요청했죠. 이화대학 동문회와 해병대 전우회 등에도 부탁하고 해서 많은 이의 지원을 이끌어낼 수 있었어요. 이종혁의 날은 이에 대한 감사인사로 받았습니다. 혹자는 어려운 유년생활이 한이 돼서냐고도 하던데, 백인 사회에서 ‘하면 된다’고 보이고도 싶었고 제 나름대로의 목표도 있었던 거 같아요.” “누구든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갔으면” 오랜만에 방문한 모교에 대해 이 동문은 대단하다는 말을 전했다. “1965년 졸업하고는 서울에 와도 들를 기회가 없었어요. 전에는 가건물까지 합쳐 건물이 5, 6개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셀 수 없이 많은 건물과 시설들이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힘들었던 전후 한국 한양대를 다녔던 이 동문. 연구시설이 잘 갖춰진 곳에서 공부하겠단 바람을 좇아 떠난 미국에서 수많은 학생을 가르쳤고, 지금도 회계법인 대표로서 활발히 일하고 있다. 끝으로 이 동문은 “누구든 열심히 살고, 열심히 사랑하고,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베푸는 삶을 살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종혁 동문은 한국의 재학생 후배들에게 '열심히'라는 말을 무척 강조했다. (출처: 미주 한국일보) 글/ 이상호 기자 ta4tsg@hanyang.ac.kr

2017-12 31 중요기사

[동문]의학과 미술로 심신을 진단합니다 (1)

지난 11월 개봉해 아직까지도 잔잔한 인기를 끌고 있는 영화 <러빙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의 생애를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고흐가 사망한지 1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이의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이유를 알려준다. 서른일곱의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반 고흐의 정확한 사인(死因)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가 남긴 여러 작품을 통해 당시의 의료 실태는 충분히 추론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여러 명화를 통해 의학 지식을 쉽고 친근하게 설명하고자 내과 의사 박광혁 동문(의학과 92)이 최근 <미술관에 간 의학자>라는 책을 냈다. 그림 속에 스며든 화가의 모습 ▲<미술과에 간 의학자>의 저자 박광혁 동문(의학과 92)을 지난 28일 중계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19세기 프랑스 파리의 늦은 저녁시간. 노곤한 몸을 이끌고 많은 노동자와 예술가들이 카페에서 너나 할 거 없이 ‘압생트’(쑥을 주원료로 만든 녹색의 도수가 높은 술)를 주문한다. 공허하고 지친 마음을 달래고자 마시는 술 한 모금. 그러나 당시 ‘압생트’에는 시신경을 손상시키고 발작을 일으키는 유해 물질이 들어있다는 소문이 펴지며 결국 20세기 초 유통이 금지된다. 그리고 당시 압생트를 즐기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던 빈센트 반 고흐. 1889년에 그가 그린 <별이 빛나는 밤에>의 노란색 코로나는 그가 압생트에 중독돼 사물이 노랗게 보이는 황시증(黃視症)을 앓아 그렇게 표현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실 이는 잘못된 정보에요. 당시 고흐는 간질을 앓고 있었고, 간질을 치료하는 약물의 부작용으로 코로나 현상이 보인 거죠. 그리고 실제 압생트의 독성은 그렇게 심한 편이 아니었습니다.” 한편, 고흐가 총상을 입고 쓰러진 당시 그를 목격했던 ‘가셰 박사’는 초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만큼 고흐와 절친한 사이였지만, 의사로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방관해 고흐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징계 및 범법 사유에 해당하는 의료 과실이죠. 비록 가셰 박사가 정신과 의사이긴 했지만, 그 후 고흐는 30시간이나 살아있으며 담배를 피우기도 했으니까요.” ▲(왼쪽부터)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별이 빛나는 밤에>와 <가셰 박사의 초상>. 고흐는 정신장애로 인한 고통을 밤하늘에 요동치는 소용돌이로 묘사했으며, 그의 작품에 노란색이 많은 이유는 그가 황시증을 앓았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가셰 박사의 초상>은 초상화 장르에 대한 고흐의 실험정신이 담긴 작품이며, 1990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 이후 종적을 감췄다. ▲(왼쪽부터) 빈센트 반 고흐와 같은 나이인 37세에 세상을 뜬 '툴루즈 로트레크'의 모습과 그가 그린 <커피 포트>.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병으로 키가 152cm에 불과했던 그는 성장이 멈춘 자신의 짧은 다리와 큰 머리, 통통한 몸을 커피포트에 빗대어 그렸던 19C 말의 화가로 고흐와는 절친한 사이였다. 백문이 불여일견, 미술작품으로 상처를 치유하다 어린 시절 그리스 로마 신화를 좋아했던 박 동문은 우연한 기회에 ‘프로메테우스(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준 죄로 인해 코카서스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고통을 당하는 신화 속 인물)’의 그림을 보고 굉장히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당시 글로 된 이야기보다 그림 한 편이 훨씬 더 많은 것을 설명해줄 수 있다고 느꼈어요. 또 그 이후로는 그림에 관심을 갖고 틈틈이 갤러리도 가곤 했죠.” 대학 시절 떠난 유럽 배낭여행은 그를 서양 미술에 더 매료되고 빠져들게 만들었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서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본 것이 바로 그 계기였다. 프랑스 7월 혁명을 그리고 있는 해당 작품 앞에서 박 동문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고교 시절 신촌에 볼일이 있어 나갔던 적이 있어요. 그때가 1987년 6월이었는데 당시 제 앞에서 한 청년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이 바로 이한열 열사더군요” 그 후 오랜 시간 동안 트라우마를 앓았다는 박 동문은 작품에 나온 어린 아이의 모습을 보며 깊은 감동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 때 확신했어요. 진짜 나를 힐링 해주고 치유 해주는건 그림이구나. 그래서 공부를 하다가도 스트레스를 풀러 미술관에 갔어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프랑스의 낭만주의 화가였던 들라크루아는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조국의 승리를 위해 직접 나서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조국을 위해 이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는 말을 남겼다. 지금은 내과 개업의로 자리를 잡았지만, 박 동문은 오후 시간대 학교나 기업체∙ 관공서 등에 강의를 하러 다니기도 한다. 지난 2010년 처음 의사와 간호사를 대상으로 시작한 강의가 점차 인기를 끌며 유명세를 타게 된 것. 또 현재는 ‘모나리자 스마일’이라는 비공개 모임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여러 흥미로운 주제를 선정해 해당 미술 작품을 설명하기도 한다. “명화로 보는 도박, 명화로 보는 갑상선, 명화로 보는 키스 등 매번 다른 주제를 정하는데 저 스스로도 그 과정이 정말 즐겁고 행복해요. 평소에도 틈이 날 때마다 늘 강의에 대해 생각하고 정리하죠” ▲지난 2016년 9월부터 진행해 온 '모나리자 스마일' 모임. 박광혁 동문은 해당 모임에서 강의해 온 내용과 그동안 기고했던 칼럼을 모아 이번 <미술관에 간 의학자>책을 편찬했다. (출처: 박광혁 동문) 미술을 향한 무한한 애정 지금까지 의사의 길을 걸으며 치열한 삶을 살아왔던 박 동문. 인턴과 레지던트 시절엔 일에 쫓겨 여유 없이 살아왔지만 개업 후 조금씩 삶의 여유가 생기면서 미술관을 가고 꾸준히 미술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아무리 바쁘고 여유가 없어도 늘 옆구리에는 미술책을 지니고 있었어요. 이게 저에겐 정말 큰 힘이 됐죠.” 이렇게 자신의 삶에 큰 버팀목이 돼준 미술. 그만큼 박 동문은 앞으로도 더욱 많은 활동을 하며 역량을 펼치고 싶다고 말했다. “치열한 삶을 살았던 화가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분들의 작품을 다룬 책을 한 권 더 써보고 싶어요. 또 앞으로 융∙복합적인 인문학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강연하고 싶기도 해요.” ▲박광혁 동문은 "우리나라 화가들 중엔 반 고흐처럼 물감 값이 없어서 그림을 못 그리는 분들도 많다"며 "이런 분들을 위한 전시 기회와 지원 프로그램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글/ 오상훈 기자 ilgok3@hanyang.ac.kr 사진/ 강초현 기자 guschrkd@hanyang.ac.kr

2017-12 26 중요기사

[동문]몸으로 그려내는 아름다운 이야기

예술은 아지랑이처럼 희미하다가도 명확하게 보이는 순간이 찾아온다. ‘영감’이라고 하는 그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그 순간과 마주하고 작품으로 그려내는 일은 쉽지 않다. 이지희 동문(무용학과 01)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영감을 작품으로 승화한다. 작품의 성과를 충북무용대상 예술상 수상으로 만끽하고 있는 이 동문을 눈이 그친 21일 잠실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내 한 몸 다 던져 “예전에는 나 자신을 위해 살았다면, 이번 대회는 공동체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기회였어요.” 충북 청주 출신인 이 동문에게 이번 전국무용제는 지역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전국무용제는 전국 각 시/도의 대표 무용단이 모여 경합하는 권위있는 안무 경연대회예요. 충북지역에서 전국무용제에 진출할 대표를 뽑는 충북무용제를 통해 작품을 올렸고, 본 무용제에서 3개 상을 수상했죠.” 이 동문은 안무를 창작한 이에게 수여하는 안무상과 주역 무용수로서 받을 수 있는 개인 연기상, 그리고 무용팀이 받은 은상을 합쳐 총 3개 상을 수상했다. 이에 힘입어 충북무용협회가 주관하는 '2017 충북무용대상'에서는 예술상을 받았다. 지역 대표로서 거둔 성공에 그는 매우 고무적인 반응이었다. ▲이지희 동문(무용학과 01)의 작품 ‘MOON LIGHT’ 중 한 장면. 이 동문은 이번 작품에서 안무와 연출 양측 분야에서 호평을 받았다. (출처: 이지희 동문) *사진을 클릭하면 공연 'MOON LIGHT' 하이라이트 영상을 볼 수 있다. 또한 이 동문은 대회수상이 지역을 빛내는 성과로 끝나지 않고, 지역 내 무용 인프라를 키울 수 있는 한 걸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충북 내 대학교들에 무용과가 사라졌습니다. 예고 하나만 있는 게 현 실정이고요.” 그는 전국무용제나 기타 큰 제전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지역 무용수들로 이루어진 팀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충북은 현재 무용인구가 얼마 없는 열악한 환경입니다. 이번 수상을 통해 지역 무용인들을 위한 인프라와 지원이 활발해졌으면 좋겠어요.” 지역인재발전의 포부를 안고, 이 동문은 다음 해 전국무용제를 내다보고 있다. “올해는 울산에서 전국무용제가 열렸어요. 그리고 다음 해에는 충북에서 전국무용제가 열릴 예정이죠. 고향에서 열리는 대회인 만큼, 도움 되는 역할을 찾아 준비 중이에요.” ▲이지희 동문은 이번 수상이 지역 무용인들의 활성화로 이어지는 초석이 되길 바라고 있다. 무대 위, 진정한 나를 찾아나서다 이 동문이 전국 대회에서 부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안무가, 무용수가 되겠다고 결심한 순간은 잘 모르겠어요. 어느 순간부터 안무를 짜고 무용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책을 좋아하는 아버지와 한국무용을 전공한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이 동문은 책과 춤, 둘 모두를 어릴 때부터 즐기며 자연스럽게 춤을 통해 이야기를 만드는 법을 습득했다. 이 동문은 이렇게 얻은 능력을 초등학교 때 무용반 활동을 하며 자연스럽게 갈고 닦았다. “어렸을 때 무용하면 뭔가 로망이 있잖아요(웃음). 그때부터 본격적인 무용을 하게 됐어요.” 대학에 입학해서도 무용수로 탄탄한 기초를 다져가는 동시에, 이 동문은 안무가 활동 또한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대학 재학 때 김복희 교수님과 손관중 교수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그분들 밑에서 무용과 안무를 배웠죠.” 두 가지를 함께 배웠기에 퍼포먼스가 중요한 90년대 무용수의 시대와, 이후 주목받기 시작한 안무가의 시대를 거쳐 나올 수 있었다는 게 이 동문의 답이다. “90년대는 무용수의 실력이 부족했어요. 주역 무용수의 능력이 부각되는 시기였죠. 하지만 현재는 무용수들이 상향평준화 됐어요. 안무의 독창성과 표현력이 부각되는 시기가 바로 지금이에요.” 안무의 독창성과 다양성을 골고루 경험한 것은 현재의 성과를 얻을 수 있던 원동력이 됐다. ▲김복희 무용단의 주역 무용수로 활약하던 시기의 이지희 동문. 사진은 당시 손관중 교수의 작품 ‘跡(적). 8 – 공간플러스’에서 주역 무용수로 열연 중인 모습 (출처: 해외문화홍보원) 갈고 닦은 기본기와 쌓인 경험에서 나아가, 이 동문은 항상 시선을 새롭게 두려고 노력한다. “대학교 3학년 때, 워크숍에서 테크닉과 기본기는 좋지만, 색깔이 없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때부터 춤과 더불어 생각을 하기 시작했죠.” ‘기존의 무미건조한 나’를 깨고 싶어서 홀로 훌쩍 떠나보는 무모한 경험도 불사했다는 이 동문. 현재는 이전엔 알아차리지 못했던, 본인의 삶 근처에서 그려지는 다양한 색깔의 경험을 관찰하며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작품 소재는 모두 삶 속에 있었지만, 제 시선이 그걸 못 보던 거였죠. 이젠 스쳐 지나가는 삶 속 하나 하나를 둘러보는 버릇을 들이고 있습니다.” 곧 다가올 다음 막을 향해 올해를 마무리한 이 동문이지만, 다음 해를 맞이해 다시 바빠질 예정이다. 현재는 직접 안무를 짜고 출연하는 듀엣(두 명의 무용수가 연출하는 안무) 작품을 연출 중이다. “이미 완성도 있는 작품으로 올해만 10여 차례 공연된 작품입니다. 또한 다음 해에 미국, 일본, 홍콩에 초청받아 공연을 할 예정이에요.” 이 외에도 충북에서 열리는 전국무용제 보조, 한양대학교 동문 무용단 ‘가림다댄스컴퍼니’의 공연이 2018년으로 예정돼있다. “가림다댄스컴퍼니에서 안무가와 무용수 외에 기획, 총무 담당을 맡고 있어요. 3월 기획공연과 6월 정기공연 등, 예정된 공연을 준비 중이죠. 바쁘지만, 가능한 최선을 다해 임할 예정입니다.” 바쁜 와중에도 이 동문은 무용인으로서 후배들에게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무용을 사랑하지만, 빨리 좌절하고 포기하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건 무용을 떠나 모든 삶의 방향에서 한 번씩 마주치는 상황이라 생각해요.” 무용 하나만을 보고 달렸더니 직업과 기회가 따라왔다는 이 동문은 후배들에게 꿈을 포기하지 말고 조금만 더 힘을 내보자고 격려했다. “현실적으로는 무용은 힘듭니다. 활동 여건이 매우 고된 직업입니다. 그래도 조금만, 힘들더라도 곧 이루어질 꿈을 따라 한걸음만 더 내딛기를 기원합니다. 포기하지 말자고요.” ▲이지희 동문은 같은 무용인들에게 힘든 현실이더라도, 조금만 버티고 꿈을 향해 함께 나아가자고 격려했다. 글/ 채근백 기자 cormsqor12@hanyang.ac.kr 사진/ 이진명 기자 rha925@ha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