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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3 15

[동문]`선택된 소수 아닌 소외된 다수 위해`

국민참여 정부를 기치로 노무현 정부가 출범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의 일등공신이자 노무현 대통령 당선을 정치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일로 회상하는 추미애(법학 81년졸) 국회의원. '당당함이 아름다운 정치인'이라는 수식어를 가진 추미애 동문을 의원회관 414호에서 만났다. 낡은 정치 타파, 힘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판사라는 직업을 버리고 정치에 입문한지 만 9년, 이제 그녀는 자타가 공인하는 차세대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2002년 대통령 선거는 노무현 대통령의 진가를 세상에 알린 동시에 차세대 정치인 추미애를 세상에 알린 계기가 되기도 했다. 국민참여운동본부 대표로서, 희망돼지 엄마로서 지켜온 소신 있는 발언과 행동은 젊은 유권자들이 주축을 이룬 네티즌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힘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직접적인 접촉은 없지만 네티즌들이 인터넷을 통해 익명 또는 실명으로 다양한 의견을 주고 있습니다. 과거 국민은 추상적 집단이었지만 요사이 국민은 인터넷을 통해 의견 동향을 볼 수 있는 존재, 보이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 국민과 함께 원칙을 가지고 간다면, 소수 이익 집단이 저항하는 것은 시간이 가면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추 동문은 '정치발전 없이는 사법발전도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지난 1995년 9월 새정치국민회의 창당과 함께 당 부대변인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그녀는 입당 때부터 '학연·지연·혈연에 기반한 낡은 정치'와의 결별을 외쳤다. 그리고 그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그녀는 이번 선거에서 작은 희망을 보았다고. 유권자들이 고루한 지역적 사고를 극복하고 인물을 중요시하는,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지역 주민 대표 아닌 지역 유권자의 대표로 지방자치라는 말과 함께 지역 행정가를 주민의 손으로 선출한기 시작한지도 어언 8년.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자치 단체장 선거 때가 되면 행정관료와 정치인은 서로의 공을 챙기기에 바쁘다. 자신의 치적을 높여 민심을 얻기 위한 것이다. 행정관료는 모든 지역 문제 해결이 자신의 행정능력에서 비롯된 것처럼 말하고, 정치인은 자신의 로비가 중요했음을 강조한다. '무엇을 어떻게 왜' 보다는 '누가'가 논쟁의 핵심이다. 추 동문은 이러한 치적 싸움의 가치 없음을 지적한다. 정치인과 행정관료의 일은 엄연히 구분되어 있다는 것이다. "국회의원은 대의 정치에서 간접 민주정치를 실현하는 사람입니다. 지역이 전체에서 소외되었다면 지역 유권자의 대표로서 국회의원이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어야 하죠. 하지만 지역의 민원을 처리한다든지, 지방자치 단체장이 있는 상태에서 행정가의 일에 개입하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지역의 일은 행정가가 하는 것이죠. 지역일과 국정이 어느 정도 혼재된 상태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국회의원으로서 품위와 의무, 도덕성을 지키면서 일을 처리한다는 원칙을 가져야 합니다. 포퓰리즘에 의해 모든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려 하거나 권력을 행사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선택된 소수 아닌 소외된 다수를 생각한다 추 의원은 많은 매체들로부터 '원칙을 지키는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녀는 '원칙'이라는 단어를 그다지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이 맡은 위치에서 적당히 넘어갈 때 그것으로 인해 생길 부작용을 늘 경계하고 있다는 정도의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법관이나 국회의원 같은 지위는 그녀에게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제가 지금 하는 것은 정치입니다. 일반적으로 정치는 소수 상위계층 사람들보다는 하위층 즉 사회에서 소외된 다수에 의지하고자 하죠. 저는 이 다수를 생각하면서 행동하려 합니다. 사회적 형평성의 관점에서 소외계층의 힘을 보완해 주고 사회의 전체적인 균형을 맞추기 위한 거죠. 그것이 사안에 따라 인권일수도 있고, 잘못된 역사의 수정일수도 있습니다. 이런 가치들을 바르게 지켜나가는 것, 이것이 저의 원칙이라면 원칙일 것입니다. 저도 힘들면 적당히 넘어가고 싶을 때가 있죠.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생길 고통받는 사람과 부작용을 생각하면 그런 나태함이 수그러듭니다." 추 동문이 고집하는 이러한 올곧음은 그녀와 관련된 여러 기록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군사정권 시절, 판사로 재직하던 추 동문은 이념서적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양심에 따라 기각시켰고 즉심재판을 방청하는 정보과 형사에게 '즉심은 방청이 허용되지 않으니 나가라'고 호통을 쳤다는 일화를 가지고 있다. 정치인이 된 후에도 그녀의 원칙은 여러 정치적 사안에 적용되었다. 한총련 사건 수사과정에서 발생한 경찰의 여학생 성추행은 공개 추궁대상이 됐고 전자주민카드에 대해서는 정권 재창출 보다 중요한 것은 인권이라며 도입에 반대했다. 여성에게 주어지는 특혜 '또 다른 차별' 뿐 최초의 야당 여성 부대변인, 현직 판사 출신으로는 최초의 야당 정치인, 최초 지역구 재선 여성 국회의원 등 그녀를 수식하는 말에는 최초 혹은 여성이라는 수식어가 줄곧 함께한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지는 역할과 관심에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최초의 여성대통령 탄생과 관련한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여성의 출마 여부가 관심의 대상이 안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때도 여성에 대한 편견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여성이기 때문에 주목받는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 여성이 정당하게 평가받는 양성평등사회가 구현되길 하는 바램입니다." 그녀는 97년 대선에서도 여성에게 주어지는 '꽃'의 역할은 할 수 없다며 수석 대변인직을 고사했다. 추 의원의 여성관은 능력주의다. 여성이기 때문에 특별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 것. 남자든 여자든 능력에 따라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성(性)에 대한 원칙이다. 정치인의 제 1 덕목 '사명감' "출세의 도구나 수단으로 의원직을 탐내서는 안됩니다. 만약 그런 의도를 가지고 정치인이 되려한다면, 수단과 방법을 통해 그것을 취하는 순간 추구해야할 목표가 끝나 버리기 때문이죠. 자기 가치관을 주입하고 실천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사명감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열정적인 사명감은 그 일을 끝까지 그리고 열심히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사명감을 발견할 때 정치뿐만이 아니라 모든 일의 성취가 진지해지고 쉬워집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고 해야 되는 일과 이유를 찾는 것은 자동차의 시동을 거는 것과 같습니다. 일단 시동만 걸린다면 달리는 것은 어렵지 않겠죠?(웃음)" 추 동문에게 늘 바쁜 일상 속에서 스스로를 재충전 방법을 물었다. 여가 그 자체가 많이 부족하기에 시간이 날 때마다 그냥 독서를 한다는 답변이 되돌아온다. 육체적 휴식을 물었던 것에 지식의 부족함을 메우는 재충전을 답한 것이다. 다시 육체적 휴식방법을 묻자, 그녀는 출퇴근 차안에서의 단잠이 최고의 휴식이라고 답한다. 그녀가 분주한 만큼 세상이 더욱 많이 바뀔 것이라는 기대감에 마음이 흐뭇해진다. 정치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사회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각이 그토록 간절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의도에 가면 대한민국의 '작은 희망' 추미애를 만날 수 있다. 학력 및 약력 추미애 동문은 1981년 본교 법대를 졸업하고 1983년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1982년 제24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춘천지법, 광주고법 등지에서 판사로 재직했다. '정치발전 없이는 사법발전도 없다'는 생각으로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부대변인으로 정계에 입문, 같은 해 서울 광진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99년에는 홍콩 '아시아위크지' 선정 '새천년을 이끌어 갈 아시아의 젊은 지도자'에 선정되기도 했다. 1998년 한국유권자운동연합인 선정한 '국회의정활동' 행자위 최우수상을 받았다. 2000년 재선 후 2002년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으나 정치적 소신에 의해 사퇴했다.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2003-03 01

[동문]'IT 산업이요? 잘 달리는 말인데 더 잘 뛰게 해야죠'

60년대 후반, 텔레비전은 부의 상징이었다. 그 시절,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한 청년에게 고장난 텔레비전 한 세트가 전해졌다. 한양대 전자공학과 학생이라는 신분이 이웃집 아주머니에게는 전파상의 전문수리공보다 더 대단해 보였던 것일까? 난감한 상황 앞에 청년이 내린 결정은, 포기가 아닌 도전이었다. 그 길로 청계천 중고서점가로 달려가 한참만에 '텔레비전 수리서'를 찾은 청년은 고장난 흑백 텔레비전과의 씨름을 시작했다. 이 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청년의 도전은 쉼 없이 계속되어 왔다. 정보통신분야에서 도전과 끈기로 걸어온 30여 년의 세월, 한국전산원 지식정보기술단 단장 윤병남 동문(전자 75년졸)의 이야기이다. 지식정보사회의 개척자 대한민국을 세계 최대의 초고속인터넷 강국으로 끌어올린 핵심기관은 정보통신부 산하 한국전산원이었다. 지식정보사회의 개척자임을 자인하는 한국전산원은 1987년 설립되어 현재 산하 기구로 정보화기획단과 국가정보화센터, 정보화지원단 및 지식정보기술단을 운영하고 있다. 윤병남 동문이 현재 단장을 맡고 있는 지식정보기술단은 정보화 기술의 연구 및 정책 개발을 통해 국가정보화를 주도하는 핵심 브레인 집단이기도 하다. 지식정보기술단은 다시 산하에 정보화표준부, 정보기술감리부, 전자거래연구부 등을 두고 있다. 정보화표준부는 정보기술을 정보화 사업에 적용하는데 필요한 표준개발이 시행되는 곳이다. 정보기술감리부는 정보시스템감리제도의 발전과 감리 시행을 수행하고 있다. 점차 정보시스템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는 반면, 시스템 사고로 인한 정보누출도 그만큼 잦아졌다. 정보기술감리부는 이런 위험들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도록 한다. 전자거래연구부는 새로운 e-비지니스 모델의 연구 및 응용을 주도해 나가고 있는 곳. 특히 전자거래연구부는 지난 해 말 시작한 '소기업 네트워크 사업'으로 인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전국적인 초고속통신망을 가진 우리나라는 네트워크를 통한 무한한 사업 가능성이 그야말로 무궁무진합니다. 우리의 통신망은 정지된 화면의 이미지 뿐 아니라 동영상 이미지들을 실시간으로 충분히 제공할 수 있을 만큼 우수한 수준입니다. 이런 비디오가 기존의 글자와 소리보다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이런 토대 위에서 성립된 네트워크 사업이 이젠 대기업 뿐 아니라 소기업에서도 가능해졌습니다. 이제 동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기 전, 집안에 앉아 식당의 분위기 뿐 아니라 음식의 모양까지도 살펴볼 수 있게 됐습니다." 한국의 IT 성장은 '예견되었던 것' 1999년부터 국책사업인 초고속국가망 사업단장을 역임하고 있던 그에게 2001년은 뜻깊은 해였다. 21세기의 첫해인 2001년 윤 동문은 프랑스 파리에서 한국의 초고속인터넷망 개발과 정착, 보급에 대해 발표하는 기회를 가졌다. OECD의 공식초청에 의한 윤 동문의 발표를 통해 우리나라 초고속인터넷망에 대한 세계적 관심은 다시 한번 증폭되었다. 이 자리에서 많은 국가 대표들은 한국 초고속망의 급속한 성장과 그 비결에 대해 의아해 했다고. 이런 의문점에 대해 윤 동문의 답은 명료하다. 우리나라의 성장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인고의 시간 끝에 달성됐다는 것. "80년대 초 가격대비 성능이 세계최고인 TDX(전전자교환기)가 계발되었습니다. 이후 반도체산업 성장, CDMA의 세계 최초 상용화를 거쳐 초고속 인터넷 망 구축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는 지난 20년 간 한 순간의 쉼도 없이 기술을 쌓아왔습니다. 지난 월드컵과 아시안 게임을 기간 중에는 IMT2000을 소개하면서 IT강국임을 다시 한번 과시했습니다. 게다가 우리의 문화가 크게 알려지는 계기가 되어 대한민국이라는 브랜드의 가치를 높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유능한 국민들의 성실성과 애국심이 지난 20년 간 축적되어 만들어진 결과입니다." 지금의 결과가 한순간의 성과가 아닌 수년간 지속되어온 국가 전체의 성과임을 강조하는 윤 동문의 말에 자긍심이 가득하다. 이런 그의 긍지 뒤에는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뛰어 온 그의 땀방울이 있다. 윤 동문은 전국 일가구 일전화시대를 열었던 TDX 계발 연구를 주도한 핵심인사 중 한 사람이었다. 한국을 IT강국으로 성장시키는 시발점이 되었던 TDX의 계발에서부터 지금까지 윤 동문은 한국 정보화 사업에 있어 핵심 브레인의 위치를 고수해오고 있다. 타고난 노력가인 그의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일면이다. 잘 달리는 말, 더 잘 뛰게 해야 초고속인터넷망 보급률 세계 1위. 2001년 OECD 공표 이후로 우리나라의 초고속인터넷망 보급률은 끝없이 성장하고 있다. 이와 발 맞추어 신기술 개발도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너무 앞만 보고 달려 온 것이 문제였을까? 세계 여러 나라들로부터 초고속의 메카로 통하는 우리나라가 지금 인터넷초고속망 사업에 큰 고비를 맞고 있다. 전국 가구수의 70퍼센트에 달하는 초고속인터넷 이용 가구수로 인해 우리의 내수시장은 포화상태로 가고 있으며, 수많은 국가들이 우리의 성공을 추격해오고 있다. 더 높은 발전으로의 도약을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의 변화가 선두과제라고 윤 동문은 주장한다. "초고속인터넷망 산업에 새 변화를 창조하지 못하면 IT산업의 미래는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국내시장은 이미 포화상태이고, 해외시장은 아직 우리의 발전속도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의 IT산업 수출이 점차 늘고 있지만, 아직도 반도체, 초고속망 광케이블 등 일부 하드웨어 품목에만 치중해 있는 듯 합니다. 게다가 외부 경쟁체제가 더욱 가속화됨에 따라 선두에 선 우리의 지위는 시시각각 도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IT산업의 성장을 위해서는 소프트웨어 및 디지털콘텐츠 개발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새로운 변화를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윤 동문은 지금의 IT 강국 이미지를 인터넷컨텐츠에 연계시키면 새로운 기술발전의 도약이 가능할 것이라 말한다. 기술문제 이외에도 점차 늘어가는 정보 불평등, 사생활 침해 등의 사회문제 해결도 변화의 한 축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이미 이를 위한 국가의 다양한 정책들이 추진되고 있단다. 'IT를 통한 삶의 질 향상' 이란 신 정부의 정책기조를 보면 신 정부도 잘해내지 않겠냐고 윤 단장은 전망한다. '잘 달리는 말, 더 잘 뛰게 해야'며 IT산업의 부흥을 독려하는 윤 동문이지만, 성장의 이면에 땀흘린 엔지니어들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당부도 덧붙인다. "IMF의 성공적 극복에 IT산업이 큰 몫을 해 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IT산업의 급속한 수출 증대는 고용창출로 이어져 우리나라 경제 활성화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성과를 일궈낸 기술자들의 공로는 제대로 보상받지 못했습니다. 산업시대가 종식되고 새로운 정보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이제는 지식기반경제사회가 열렸습니다. 지식기술에 대한 저작권도 인정되고, 기술자들도 충분한 노력의 대가를 받아야 할 때가 왔습니다. 보다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도 이것은 필수과제입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본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이후 외국기업을 거쳐 한국전자통신원, 한국전산원에 근무하기까지 지난 오랜 시간동안 윤 동문은 꾸준히 외길만을 걷고 있다. 우리나라 정보통신사업의 산 증인으로 30여년을 살아온 그는 이젠 해외에서도 끊임없이 강연 요청에 시달리는 베테랑. 오늘의 그를 있게한 원동력을 물으니 '뚝심을 가지고 밀고 가는 것'이란 짧은 답변이 뒤따른다. "하고자 하는 분야를 꾸준히 뚝심 있게 밀고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어학능력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특히 인터넷의 세상에서 영어는 하나의 중요한 프로토콜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입니다. '돈을 잃으면 조금을 잃는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요,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건강이 우선되야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요?" 20년 동안 즐겨온 스키와 수영, 스킨스쿠버, 테니스 그리고 마라톤. 빠른 업무환경 변화와 격무로 잘 알려진 정보산업의 중심에서 지금까지 그를 지켜온 원동력은 자신의 몸을 위한 '부지런함'에 있었다. 이번 주에도 10Km 단축마라톤 코스를 완주할 예정이라며 흐뭇한 미소에 젖는 윤 동문. 인생이라는 마라톤을 쉼 없이 달려온 그가 매일 아침 고쳐 메는 것은 운동화 끈이 아닌 삶에 대한 '열정'이다. 학력 및 약력 윤병남 동문은 1975년 본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스페리유니벡사 컴퓨터하드웨어 엔지니어로 근무하다 삼성전자를 거쳐 한국전자통신원(ETRI)에 입사했다. 입사초기에 TDX 교환시스템 개발의 연구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한국전자통신원 근무시절인 1989년 청주대학교에서 정보통신학 석사학위를, 1997년에 충남대학교에서 전산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9년부터 국책사업인 초고속국가망 구축사업 사업단장으로 활동해 왔으며 한국전산원 국가정보화센터 단장을 거쳐 현재 지식기술사업단 단장을 역임하고 있다. 2001년 초고속국가망 구축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저서로 『지능망 기술』,『정보시스템 아웃소싱 방법론』등이 있다.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ayang.ac.kr

2003-02 22

[동문]`기자의 속성은 풍부한 호기심`

언론 비평 전문지인 미디어오늘은 신년호를 맞아 현직기자 3백 7명에게 존경하는 언론인을 물었다. 결과는 참담한 수준이었다. 전체 응답자의 과반수가 넘는 53.6퍼센트가 존경하는 언론인을 묻는 질문에 ‘잘 모른다' 즉 '없다'고 답한 것이다. 지사형 기자가 실종된 시대, 언론인 윤리보다 경영논리가 강조되는 시대이기에 후배들에게 늘상 '기자정신'을 강조했던 천관우 선생의 빈자리는 더욱 크게 다가온다. 임나일본부설의 허구성을 밝힌 사학자인 동시에 동아일보 해직기자출신 언론인 고 천관우 선생. 20여년 전에 군사정권 아래서도 소신 있는 기사로 언론인의 귀감이 된 그를 사표로, 30여년 동안 정론을 견지해온 언론인이 있다. 바로 최철주(화공 67년졸) 중앙일보 논설고문이다. 본교 출신 최초 중앙언론사 편집국장이자 총동문회가 선정한 '2002년 자랑스런 한양인'에 선정된 최 동문을 만나 그의 지나온 삶과 언론에 대한 생각을 들어 보았다. 이공계 출신 언론사 편집국장 60년대 학번들은 본교 공대를 최고의 위치로 올려놓은 세대이다. 60년대 말은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계획과 함께 공업입국이 국가의 목표로 제시됐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많은 인재들을 공대로 끌어들였고 공대 중심의 본교는 '명문사학'으로써 확고한 터전을 잡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화공과는 중화학공업 육성이라는 경제정책에 부응해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최고로 여겨지던 화공과를 졸업한 최 동문이 보장된 앞 길이 아닌 기자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궁금증에 대해 그는 '우연'이라는 단어로 기자가 된 사연을 설명한다. "졸업 후 럭키금성에 들어갔습니다. 회사의 권유로 제대 후 잠시 쉬고있던 어느 날, 우연히 중앙일보 수습기자를 모집하는 사고를 보았습니다. 당시는 언론인에 대한 생각보다는 제 자신의 지식 수준을 확인할 겸 시험삼아 지원했는데, 운 좋게 1, 2차를 통과했습니다. 면접에서 면접관이 공대을 나와서 왜 신문사를 지원했느냐고 물었을 때도 '그냥 하고 싶어 왔습니다'라고 했더니 더 이상 질문을 안 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틀렸구나' 했죠.(웃음) 그런데 합격을 했던 거죠. 그 때 생각했습니다. '나도 모르는 바람으로 인생이 바뀔 수가 있구나, 내 길이 이렇게 나타날 수 있구나'라고 말입니다." 쉬운 경제, 생활 속의 경제를 지향한다 최 동문은 지난 30여년 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해 왔다. 입사 후 10년간 동양방송에서 방송기자로 재직했던 최 동문은 80년 언론 통폐합 후 신문으로 자리를 옮겨 경제부 차장, 부장, 해외특파원, 논설위원, 편집국장의 지위를 두루 역임했다. 하지만 그는 다양한 지위 속에서 경제라는 일관된 화두를 풀어냈다. "사람들은 모든 사고나 행동에서 자기도 모르게 경제적인 판단을 하고 그 결과에 따라 움직입니다. 남자, 여자가 만나서 결혼하는 것도 '저 사람이 나와 같이 살면 행복하게 해주겠구나'라는 판단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물론 감성적인 부분도 있지만, 이성적인 이해타산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나쁜 의미의 이해타산이 아니라, 좋은 면에서 따지고 드는 겁니다. 이렇듯 모든 일에는 경제적인 요인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경제라는 용어를 쓰지 않지만 자기도 모르게 경제적인 결정을 하고 삽니다. 경제라는 것이 결코 딱딱한 숫자 나열이 아니다는 겁니다." 이러한 그의 신념은 수많은 최 동문의 기사와 편집국장 시절의 업적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지난 94년 논설위원 재직시 '성의 경제학'이라는 기획 칼럼을 연재, 독자들로부터 높은 호응을 얻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경제는 어렵고 딱딱한 것으로 치부되었기에 그의 숫자 없는 경제학은 독자들에게 더욱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이후 최 동문은 편집국장을 역임하면서, 종합일간지 최초로 중앙일보에 경제 섹션을 증면, 강화했다. 당시 파격적이라고까지 평가되었던 이러한 판단은 현재 중앙일보를 경제에 강한 일간지로 자리매김하는 결과를 이끌었다. "종합 일간지들을 보면 경제를 보는 시각이 합리적이지 못한 경우가 가끔씩 있습니다. 감성으로 경제의 한쪽 면만 본다든지, 경제를 한 부분만 보고 전달하거나, 해설하는 경우죠. 이런 풍토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고 경제기사를 정확하고 독자가 알기 쉽게 써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를 위해 자체적으로 경제관련 기자를 전문적으로 육성하고, 경제기사를 지면에 많이 반영했습니다. 자체 조사에 따르면 독자들 중 중앙일보를 보는 이유 가운데 경제관련 만족도에 관한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이후 저희신문은 독자에 부응하기 위해 더욱 경제기자 육성 및 섹션 강화해 신경을 씁니다. 이런 순환구조는 강점을 더욱 강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언론인의 제 1명제, '정론직필' 언론의 본질에 대한 질문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다양한 형식을 빌어 논의되어 왔다. 얼마 전 신문 기자로 변신한 도올 김용옥 선생은 자신의 의견을 과감하게 들어내는 형식의 '뉴 저널리즘'을 주창하기도 했다. 타당한 논거를 가진다면 자신의 의견을 주장해도 된다는 의견과 기자는 기자일 뿐이라는 입장 사이에서 지속된 오래된 논쟁에 대해 30여년 동안 펜을 잡아온 최 동문의 대답은 간결하면서도 명확했다. "문제는 있는 현상을 얼마만큼 정확하게 볼 수 있느냐는 겁니다. 자신의 의견이라는 것은 정확하게 보고, 전달한다는 것이 전제된 후에 논의될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겁니다. 정확하게 보기 위해서는 많은 자기 공부를 해야하고 여러 의견 또한 들어봐야 합니다. 그리고 대중들한테 정확하게 표현, 전달하기 위해서도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중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한쪽으로 편향된 보도를 하게 되는 거죠. 주장에 대한 논의는 이러한 것들이 모두 정확하게 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최 동문은 국내기자 뿐만 아니라 두 차례의 일본 특파원 생활, 해외 순환 특파원 등을 거치며 다양한 기획과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은 그에게 사실을 정확하게 보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절감하게 했다고 한다. 앞뒤좌우를 모두 살펴보아야 정확한 상황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듣는 측면이나 본 측면만을 전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에는 속보경쟁으로 인해 이러한 경우가 더욱 빈번해지고 있죠. 예를 들어 미국의 신용평가 기관이 우리 신용등급을 낮춘다는 전망이 있다고 할 때, 일차적으로는 그것이 속보로 들어와야 합니다. 하지만 직후에는 정확한 분석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기자 자신이 확실한 정보를 갖지 못한다면, 기사가 야당의 의견을 내거나 미국의 음모설에만 치우친다거나 또는 정부의 대변인 역할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자가 갖춰야 할 최대 덕목은 '호기심' 런닝타임 두 시간짜리 영화 한 시간만 보기, 신간서적 속독하기, 회사 근처 갤러리 둘러보기 등 짜투리 시간을 이용하는 최 동문의 취미는 다소 독특하다. 그의 이러한 취미는 신문기자로서 문화흐름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가 언제나 이렇듯 쫓기는 듯하게 취미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다른 취미는 산책이다. 여유 있을 때 자신의 집 근처나 인사동 뒷골목을 산책한다는 최 동문. 그는 그 곳들을 걸으며 사람 사는 모습을 보고 그 안에서 자신이 글로써 표현할 수 있는 부분들을 찾는다고 한다. 결국 이 역시 방법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글쓰기 준비작업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인 듯 하다. "저는 기자의 속성을 풍부한 호기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건이나 사물에 대해 무심코 넘어가지 않는 것이죠. 기자가 되기를 원하는 후배들이나 혹은 언론계에서 일 하기를 희망하는 후배들이 있다면 지독한 자기노력과 준비를 하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갈수록 언론사의 문이 좁아지기 때문에 평상시부터 사고의 폭과 견문을 넓히고 전문 분야에 대한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미디어라는 분야는 여러분의 젊음을 투자해 볼 만한 곳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편집국장을 지나 논설고문으로서 중앙일보를 이끌고 있는 최철주 동문. 자신의 본래 업무를 중요시하기에 외부 일을 최소화시킨다는 그이지만 두 가지 외부 직함을 더 가지고 있다. 중앙인사위원회 정책자문과 대통령 직속 농어촌 특별 위원회 위원이 그것. 자신이 언론인으로서 풀지 못했던 문제를 풀기 위해서 맡은 직함이라는 그의 설명을 들으며, 30여년을 언론계에서 보낸 최 동문의 호기심과 열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기사가 아닌 장문의 글로 독자를 만나고 싶다는 그이지만, 책 한 권 쓸 만큼의 여유가 최 동문에게 주어질 날이 아직 요원해 보이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학력 및 약력 최철주 동문은 1967년 본교 화공과를 졸업했다. 1970년 중앙일보사에 입사해 10년 동안 동양방송 TV기자를 거쳐 80년부터 중앙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해오고 있다. 해외특파원, 경제부 차장, 부장, 논설고문 등을 거쳐 지난 1999년부터 2001년까지 본교 최초로 중앙일간지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현재 중앙일보 논설고문으로 있으며, 한양언론인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한 최 동문은 지난 10일 '2002년 자랑스런 한양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2003-02 22

[동문]`금남의 벽을 깬다` 남자간호사협회장 김낙주 동문

' 간호사'라는 직업을 떠올리며 드는 첫 생각은 '여자', '섬세함', '부드러움' 정도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남녀평등을 넘어 양성평등의 시대가 도래한 요즘, 간호사라는 직업 역시 더 이상 금남(禁男)의 성역은 아니다. 선진국일수록 남자 간호부장의 수가 많다는 통계가 말해주듯 우리나라에서도 그 성역은 무너지고 있다. 본교가 배출한 첫 남자간호사 김낙주(간호 86년졸) 동문은 금남의 영역을 개척하기 시작한 1세대 남자간호사. 삼성서울병원 간호과장으로 남자간호사협회장을 맡아 활약 중인 김 동문을 만나보았다. - 간호학과에 입학하게 된 동기는? 직접적인 이유는 의대를 지원해 불합격하고 다음 순위인 간호학과에 합격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간호학과에 자신 있게 등록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르게 살고 싶다'는 욕구가 강했기 때문이다.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며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메리트였던 것 같다. - 본교의 첫 간호학과 남학생으로서 좋았던 점과 힘들었던 점이 있다면? 간호학과 최초 남학생이다 보니 많은 교수님들과 친해져 도움도 많이 받았다. 교양수업의 교수님들도 나를 기억해 주시고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시 동기생도 없었고 후배 역시 없어 힘들었다. 남들의 눈을 의식해 자격지심이 생기기도 해 학교생활의 폭을 넓히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또 나름대로 유명인사가 되다보니 대리출석은 생각지도 못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웃음) - 학부 시절 단과대 부학생회장에 입후보했다 중도하차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당시 의과대 선거는 정학생회장은 의예과에서, 부학생회장은 간호학과에서 한 명씩 출마했다. 그런데 간호학과에서 한 명밖에 없는 남자가 출마한다고 하니 주위의 시선이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당시엔 사람들이 나를 간호학과 학생이 아닌 그냥 남자로만 생각했던 것 같다. 많이 아쉬운 일이었지만 한 조직의 대표의 자리에 성을 구분하는 일은 앞으로도 없어져야 한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역할에 대한 능력이 우선되야 할 것이다. - 남자간호사협회는 어떤 단체인가? 남자간호사협회는 지난 92년 250여명의 남자간호사들이 모여 창립한 단체다. 현재 125명이 정식회원으로 등록되어있지만 실제는 2000여명의 남자 간호사가 현직에서 일하고 있다. 지금 회장직을 맡고 있는 것은 지난 99년부터이고 올해로 4년째를 맡는다. 지난해 12월에는 홈페이지(www.mannurse.com)를 개설했고, 오는 3월 15일에 8차 창립총회를 갖는다. 아직 활동이 미약하지만 계속 성장하리라고 본다. - 남자간호사 만의 장점이 있다면? 먼저 환자들에게 주는 신뢰가 더 높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성 환자들의 경우 같은 여성보다는 남자 간호사에게 더 큰 믿음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 또한 기술적 부분에 경쟁력이 뛰어나다. 아직은 마취, 수술실, 인공신장실, 정신과 등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지만 활동 분야는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예전과 같은 선입견이나 편견도 많이 사라져 조만간 산부인과에서도 남자간호사를 볼 수 있는 날이 올 것으로 본다. - 간호학을 공부하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예전과 달리 본인의 의사로 간호학과에 진학하는 학생들이 많아진 것으로 알고있다. 그만큼 간호학의 비전이 높이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미래사회에서 간호학은 인간을 탐구, 연구하고 생명을 살리는데 있어 핵심적인 분야가 될 것이고, 이에 따라 양성평등의 사회에서 남자 간호사의 역할 역시 매우 중요하다. 후배들이 자신을 가지고 성실히 공부해 좋은 간호사가 되길 바란다. - 본교에서 간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곧 박사 과정에 들어간다고 하는데. 후배들에게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었으면 하기 때문이다. 나에겐 배우고 닮고 싶은 모델이 없었다. 말하자면 남자간호사로써 닮고 싶은 샘플이 되고 싶다. 내년 경에 박사과정을 시작할 생각이다. 박사를 마친 후엔 간호학과의 임상교수가 되고 싶다. 의예과는 교수가 임상과 수업을 병행해 과목에 현실감이 있지만, 간호학과는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살아 있는 현장의 지식을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다. 사진 : 박용일 학생기자 jajunation@ihanyang.ac.kr

2003-02 15

[동문]`거품 걷히면 옥석 들어날 것`

46세의 나이에 최연소 회장에 취임, 20년 동안 GE(General Electric)를 초일류 기업으로 키워낸 잭 웰치(Jack Welch). 그가 이 시대 최고의 경영자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은 '전통'을 포기하고 '수익성'을 선택한 그의 과감한 결단 때문이었다. 1987년, 잭 웰치가 토마스 에디슨이 창립한 GE의 소형가전사업을 톰슨사의 의료기기사업과 맞바꾸었을 때 미국의 시민들은 그를 '매국노'라 비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잭 웰치는 GE가 21세기에도 생존하기 위해서는 고부가가치의 하이테크,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수익구조를 철저하게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결과는 싯가총액 2천4백60억 달러의 세계 최대 기업이었다. 포털사이트 하나포스닷컴을 운영하는 (주)하나로드림 CEO 안병균(전자통신 82년졸) 동문은 사업 차별화를 통한 수익성 확보를 무엇보다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잭 웰치와 닮은 구석이 있다. 후발주자임에도 불구하고 신기술의 과감한 도입으로 서비스 차별화를 시도하고, 유료회원 중심으로 수익구조를 개선하겠다는, 포털사이트 업계에 있어서 가히 도발적인 시도도 서슴지 않는다. 경영에 있어서 안 동문이 보여준 야심 찬 도전과 용기는 삼십대 중반에 다시 학업을 시작했던 그의 행적에도 잘 드러나 있다. '노력'과 '신뢰'로 뭉친 최고경영자 "학부 시절엔 공부를 열심히 못했지만 졸업과 취직을 하면서 공부에 대한 미련이 많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서른 다섯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KAIST에 입학했죠. 12살 연하의 띠동갑 학생들과 경쟁하면서 사실 힘들고 지치기도 했지만, 그 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했던 순간이 아닐까 합니다. MBA(경영학 석사) 역시 회사에서 인터넷사업팀을 맡다보니 e비즈니스에 관심이 생겨 공부하게 됐습니다. 공학을 전공했지만 관련 기술을 알고 있다보니 실제 경영활동에 있어 의사결정이나 이해가 빨라졌죠. IT 업계에선 공학도들이 경영자로써 유리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안 동문이 데이콤에 입사한 것은 1985년. 이후 1998년 데이콤의 자회사인 하나로통신으로 자리를 옮긴 후, 그는 지금까지 매년 승진을 거듭해 지금의 위치에 올랐다. 비결을 묻는 질문에 대한 안 동문의 답은 바로 '부단한 노력'과 '상호 신뢰'. 10, 20년 후의 자기모습을 그리고, 그 그림의 완성을 위해 충분한 스케치 과정을 거친다면, 강점을 살리고 약점을 보완해 더 나은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생활이나 일에 있어서 원칙을 지키고 산다면 윗사람이나 아랫사람과 신뢰를 쌓을 수 있고, 이것이 곧 성공의 밑받침이 될 수 있다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콘텐츠 차별화', '회원유료화'가 포털 성공의 열쇠 (주)하나로드림이 운영하는 포털사이트 하나포스닷컴은 지난해 4월 3일, 기존 사업자인 드림엑스와 하나넷을 통합하며 탄생한 신생 사이트이다. 초고속인터넷통신 사업자인 하나로통신에서 출발한 하나포스닷컴은 사실, 포털사이트로서 후발주자인데다 관련 업계의 경쟁도 치열해 성공을 낙관할 수만은 없는 상황. 그러나 안 동문은 내년엔 '다음'을 누르고 업계 1위로 등극할 것을 확신하고 있다.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갖춘 '브로드 밴드 포털'의 강점을 살린다면 경쟁력은 충분하다는 것이 안 동문의 설명이다. "합병 당시 관계기관의 조사 결과 하나포스닷컴은 업계 12위로 평가받았습니다. 하지만 지난 연말엔 5위로 뛰어올랐죠. 올해 안에는 3위로, 내년까지는 부동의 1위로 여겨지는 '다음'을 누릴 계획입니다. 3위안에 드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전체 광고의 70퍼센트가 집중되기 때문이죠. 닷컴 기업의 구조상 광고는 가장 큰 수입원이고, 광고를 많이 유치해야 영업이익률을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3위 입성의 진입장벽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저희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전망은 밝습니다." 안 동문이 말하는 하나포스닷컴의 성공비책은 크게 두 가지다. 차별화된 콘텐츠와 유료회원 확보가 바로 그것. 이를 위해 하나포스닷컴은 현재 미국 카네기멜론대에서 개발한 신개념의 검색서비스를 3월 중에 선보일 예정이다. 사용자가 원하는 카테고리별 검색이 가능한 이 솔루션은 지금까지 어떤 곳에서도 선보인 적이 없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와 더불어 최근 유행하는 고스톱, 포커와 같은 웹보드 게임도 추가하고 개인 컴퓨터에 툴(tool)바를 설치, 컴퓨터 부팅과 동시에 하나포스닷컴과의 접속과정을 단축시킨 편의 서비스도 준비중이다. 또한 하나로통신의 기간통신망을 이용, 데이터 전송이 유리한 강점을 내세워 동영상 콘텐츠 부문에서 비교우위를 점할 계획이다. "하나포스닷컴은 유료화의 전망이 어느 곳보다 밝습니다. 하나로통신의 초고속 인터넷 하나포스를 사용하는 300만 명을 주고객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죠. 이 사용자들을 월 5천원의 정액상품 고객으로 유치할 경우, ADSL 사용 청구서에 후불로 청구가 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업체보다 전망이 밝습니다. 또한 후불이기 때문에 심리적 거부감을 없애는 효과도 거둘 수 있고 후불고객은 해지율이 낮기 때문에 수익성에도 큰 도움이 되죠." 전문경영인 없는 닷컴, 결말은 '퇴출' 뿐 1998년 벤처 붐이 일어날 때만 해도 벤처기업들의 코스닥 상장률은 거의 100퍼센트에 가까웠다. 그러나 현재 벤처기업들의 코스닥 상장심사 통과율은 55퍼센트. 이제 거품은 가라앉고 옥석 가리기가 한창 진행 중인 형국이라고 관련 업계는 풀이한다. 안 동문 역시 미래 가치만을 가지고 고평가된 닷컴 기업들은 본질 가치를 제대로 따져봐야 할 것이라고 충고한다. 기업의 목표인 '최대매출·최대수익'을 달성하기 위해 기업들은 가시적인 성과를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벤처 기업들은 모든 면에서 취약합니다. 기술 하나만 갖고 시작했기 때문에 경영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다고 봐야 하죠. 특히 시장 선점효과나 확실한 기술 우위가 없다면 쉽게 무너집니다. 저는 현재 업계 1위 업체들의 발전 가능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표하고 싶습니다. 전문경영인 없이는 그 발전에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이죠. 야후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창업과 기업의 발전은 별도로 이뤄질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는 2004년 코스닥 상장을 노리는 하나포스닷컴의 CEO 안병균 동문. 여행과 사색을 즐기는 그는 후배들에게 '한양의 정체성' 찾기를 주문한다. 한양인이 어느 기업에서나 성실함과 능력을 인정받지만 타교에 비해 뚜렷한 자기 색깔을 갖지 못해 존재감이 크지 못한 점이 무척 아쉽다고. 또한 안 동문은 과거와 같이 조직에 대한 충성도 중요하지만 변화된 시대에 맞게 자신만의 개성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다고 덧붙인다. 창의적인 인재야말로 기업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콘텐츠임을 그가 모를 리가 없다. 학력 및 약력 안병균 동문은 1982년 서울캠퍼스 전자통신공학과를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친 후, 1985년 데이콤에 입사했다. 입사 후 기술직을 거쳐 천리안 사업부로 자리를 옮기며 인터넷사업의 마인드를 다졌다. 1996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입학해 정보 및 통신공학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2002년에는 헬싱키 경영대학에서 MBA(경영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올해 1월 (주)하나로드림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데이콤에서 하나로통신으로 자리를 옮긴 이후, 매년 승진을 거듭한 안 동문은 공학과 경영학의 마인드를 함께 갖춘 드문 인재로 업계에서 평가받고 있다.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2003-02 01

[동문]`한국 금융시장의 미래를 읽는다`

2002년 한 해, '부자아빠' 신드롬이 한국사회를 강타했다. 모 CF의 '난 부자아빠를 꿈꾼다'라는 카피로 시작된 부자 신드롬은 사회 분위기뿐만 아니라, 각종 투자 지침서와 경제관련 서적들을 도서판매 순위 1, 2위에 올려놓는 기염을 토했다. 과거 경제신문 혹은 경제관련 직종에서나 사용됐음직한 '재테크'니 '포트폴리오' 따위의 용어들이 이제 하나, 둘 일상어로 자리 잡아가는 모습도 이러한 경향을 잘 반영한다. '부자아빠'가 되는 지름길로 여겨지는 '재테크'. 그 중심에서 경제 흐름을 주도하는 '애널리스트'의 주가는, 지금 숨가쁘게 상승하고 있다. 하루 15시간 근무, '현장에서 찾는 즐거움' 대우증권 '애널리스트' 심상범 과장을 만난 것은 일반인들이 휴식을 만끽하고 있을 일요일 오후, 그의 일터에서였다. 과장이라는 직급이 무색할 정도로 심 동문에게 허락된 여가 시간은 많지 않았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거래가 이루어지는 날이면 그의 출근시간은 언제나 오전 6시경이다. 미국 증권시장이 끝난 직후부터 분석에 임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퇴근시간은 한국 시장이 끝나고 분석이 끝나는 오후 11시경, 하루 평균 15시간 이상을 회사에서 보내는 것이다. 누구나 꺼려할 만한 열악한 근무조건에도 불구하고 그가 '애널리스트'라는 직업에 종사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솔직히 단순히 돈만을 생각했다면 저는 이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을 겁니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자기가 하고 싶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지만 투자할 수 있는 것이죠. 애널리스트는 연구직입니다. 많은 분들이 저희를 투자상담원쯤으로 생각하시지만, 저희는 연구원이죠. 시장 자료를 통해 앞으로의 시장을 전망하고 예측하는 겁니다. 저희는 단지 분석하고 예측할 뿐이고 그 자료를 가지고 영업을 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습니다. 물론 그분들이 수입은 더 좋죠(웃음)." 데리버티브,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다 심 동문의 전문분야는 데리버티브. 우리말로는 파생금융상품이다. 선물과 옵션으로 대표되는 데리버티브가 한국 금융시장에 도입된 것은 지난 97년. 이제 불과 5년이 조금 지났을 뿐이다. 하지만 데리버티브 영역은 지난해 9월 말을 기준으로 시장 명목거래액만 906조 500억 원을 기록, 전년대비 45퍼센트의 증가율을 보였다. 더욱이 주가지수 옵션시장은 세계 1위, 주가지수 선물시장은 세계 4위 규모로 평가되고 있다. 그 어떤 금융분야보다 가파른 성장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석사학위 소지자인 심 동문의 대학원 논문은 바로 '이색옵션'. 공부할 당시 시장조차 형성되지 않았던 분야였지만, 그 당시 어리석어 보였던 판단이 지금 그를 체계적 교육을 받은 데리버티브 '1세대'로 불릴 수 있게 만들었다. "낯선 종목이지만, 파생금융상품이라는 것은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파생상품은 일종의 조합이죠. 조합을 통해 주식도 되고, 채권도 될 수 있습니다. 일종의 마술처럼 다양한 형태로 변형이 가능하다는 거죠. 하지만 가장 큰 장점은 증권처럼 현물을 거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같은 액수의 돈으로도 현물시장 몇 배의 거래를 성사시킬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익도 일반 주식이나 채권거래의 수 배에서 수십 배까지 더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익과 위험은 비례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심 동문은 2001년 말 보고서를 통해 '양적 성장은 끝났다. 이젠 질적 성장으로 전환할 때'라는 주장을 강력하게 펼쳤다. 하지만 1년이 흐른 지금, 아직도 양적 성장에 얽매인 우리의 선물·옵션시장은 여전히 왜곡된 형태로 진행 중이며, 그는 지금이 바로 변화되어야 할 적기라고 말한다. "파생상품은 태생적으로 기업들이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개발한 상품입니다. 즉 현물하는 사람들이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이 위험 회피라는 본래의 목적보다는 투기의 대상으로만 사용되고 있습니다. 물론 위험을 사기 위한 투기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현재 시장이 투기만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분명 문제입니다." 경계대상 1호, '모럴 해저드' 애널리스트들은 법적으로 투자한도가 제한되어 있다. 선점된 정보를 이용, 투기를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이런 법적 제재조치로써 모든 것이 해결될 수는 없다. 갈수록 지능적인 범죄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 속에서 금융감독원의 단속만으로 모든 금융부정행위를 적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 동문은 이 부분에서 애널리스트들의 도덕적 무장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애널리스트 개인에 관한 제재는 형식적이나마 법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더욱 무서운 것은 정보이용자에 대한 도덕적 해이입니다. 너무 쉽게 분석하고 글을 씁니다. 특히 법적으로는 애널리스트가 분석한 자료를 가지고 투자 후 심각한 경제적 피해를 보았다고 할지라도 애널리스트는 그것에 대해 책임지지 않습니다. 물론 연구원이기 때문에 책임성이 없는 것은 맞지만, 최근에 제가 본 애널리스트 중에서 책임 있는 분석과 글쓰기 의식이 결여된 연구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심 동문은 과장이 된 지금도 보고서 한 장을 쓰기 위해서는 몇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6년차 애널리스트인 그에게도 한 문장, 한 문장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신의 문장 하나로 수 천, 수 억의 자산을 잃는 사람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는 애널리스트 자신이 기준을 세울 수밖에 없다고 단호히 말한다. 누구도 제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의 기준조차 없다면, 금융시장 전체가 '모럴 해저드'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학문과 현실의 조화를 꿈꾼다 심 동문은 94년 본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96년 서강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지금까지 대우경제연구소, 현대선물 등을 거쳐 대우증권에서 연구원으로서 생활해 오고 있다. 그는 자신이 애널리스트라는 연구직을 직장으로 삼은 것도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회고한다. 학문과 경제적인 실리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직종이라 생각한 직업이 애널리스트였다는 것이다. "제가 지금 파생금융상품이라는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갖고 분석한다고는 하지만, 현재 분석과 전망의 틀로 사용하는 것들은 학부 수준에서 공부했던 내용입니다. 지금까지는 정보 수용자가 인식하기 어려운 용어와 최신의 경영학적 기법을 사용하면, 괜히 어렵게 한다고 노골적으로 꺼려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질적 성장을 시작한다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정말로 과학적이고 선진적인 이론과 기술이 필요한 거죠. 저는 그 시작에서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 더 공부를 하고 싶은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2002년 매경이코노미가 데리버티브 부문 3위로 심 동문을 선정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외부의 평가에 대해 연연하지 않는 모습이다. 애널리스트라는 연구원을 포퓰리즘에 따라 평가하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이다. 그는 시장을 걱정하는 진정한 애널리스트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말한다. 애널리스트의 진정한 임무는 시장을 정확하게 분석해 장기적이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심상범 동문. 그와 같은 프로의식을 가진 연구원들이 늘어갈 때 우리나라 금융시장도 '투기'의 오명을 벗고 진정한 '부자시장'으로 변모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학력 및 약력 심상범 동문은 1994년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96년 서강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학문과 취업 사이에서 고민하던 중, 애널리스트로 금융 현장에 뛰어들었다. 대우증권 연구소와 현대선물 등을 거쳐 2003년 대우증권 파생금융상품 분야 애널리스트로 활약 중이다. 바쁜 업무관계로 아직 미혼이라, 올해의 최대 수익은 '결혼'이 될 것이라 한다. 2002년 매경이코노미가 데리버티브 부문, 우수 애널리스트 3위로 선정한 바 있다.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ayang.ac.kr

2003-01 22

[동문]`검사의 임무는 처벌 아닌 사회방위`

'어 퓨 굿 맨'이나 '타임 투 킬'과 같은 법정영화 속에서 변호사는 선악 구도 속 피의자를 감싸는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에 반해 검사는 피의자를 기소하고, 판사에게 높은 형량을 요구하는 악역으로 묘사되기 일쑤다. 이러한 영화의 관습적인 반복은 검사라는 직업을 '딱딱하다' 또는 '비인간적'이다라는 식으로 일반인들에게 인상을 남기기 충분했다. 사실, 따뜻한 미소로 기소장을 읽으며 형량을 구형하는 검사란 상상하기 어려운 것 아닌가? 서울지검 동부지청 차장검사로 재직 중인 이동기(법학 78년졸) 동문을 만나며 그 '딱딱함'이 사회를 지키는 힘이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이 동문은 현재 동부지청 차장검사(사시 20회)로 재직 중이다. 오전 11시.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그는 다른 검사들과 사건을 배분하고 있었다. 회의가 끝난 후,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늦게 시작하는 것에 미안해하며 웃는 그에게 던진 첫 질문은 '검사를 왜 선택하게 되었냐'는 것. 다소 틀에 박힌 질문으로 시작했지만 말문을 여는 이 동문의 표정은 사뭇 진지해졌다. "저는 검사라는 직업을 예술가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세상의 모든 악을 검사가 전부 척결하지는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건에 대해 어떻게 처벌하고 대처할 것인지에 대한 검사의 밑그림이 필요한 것입니다. 판사는 이것을 가지고 이 밑그림이 잘 되었는지 평가하고 감정하는 위치라고 할 수 있지요. 저는 감정과 평가라는 작업보다 창조적인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검사의 임무는 기소가 아닌 '사회방위' 검사들도 연륜이 쌓임에 따라 공안사건, 민사사건, 형사사건 등 자신들의 전문분야를 형성한다. 이 동문은 1978년 사범시험에 합격한 후 지난 20여 년 동안 다양한 사건들을 거쳐 자신만의 전문분야를 만들어 왔다. 그의 전문분야는 기획과 연구파트. 이 동문은 법무연수원 기획과장, 법무부 송무국장, 사법연수원 교수 그리고 국가정보원 법률보좌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획, 연구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아왔다. 기획분야에서 오랫동안 근무했기에 이 동문은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을 묻는 질문에 다른 검사들처럼 굵직한 정치 사건이나 사회적 이슈가 있었던 사건들이 많지 않다며 말을 아끼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의 이력 속에는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들도 더러 발견된다. 이 동문은 지난 1991년 낙동강 폐수방류사건 당시에는 부산지검 고등검찰관으로 해당 기업 수사에 앞장섰고, 서해 페리호 사건, 가짜 고서화 사건 등을 성공적으로 해결해 국민들로부터 많은 호응과 격려를 받기도 했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굵직한 사건들도 있었건만 정작 이 동문은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2000년 창원지검 차장검사 시절의 사건을 꼽았다. 피의자는 당시 대학교 1학년 학생으로 혐의는 '강간미수치상'이었다. "실제로 이 죄목은 최소 5년에서 7년이 나올 수 있는 죄목입니다. 하지만 피의자의 가정 환경과 범행 동기가 계획적이지 않고 우발적이었다는 점 등 여러 가지 사항들을 감안해 담당 검사와 상의, 그 학생을 기소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피의자에게 재범의 소지가 없다고 판단됐기 때문이죠. 물론 사실 여부가 분명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냉정하게 피의자를 기소하면 그것으로 검사의 임무는 끝나는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검사는 사회를 방위한다는 위치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기소를 한다면 그 학생 한 명의 인생이 아니라 한 평생 그 학생만을 바라보며 살았던 그 부모들의 인생까지 망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최고보다 최선을 다하는 삶으로 이 동문은 지난해 12월 30일, 대통령이 수여하는 홍조근정훈장을 수훈했다. 이는 정부의 장·차관등 정무직을 제외한 정규 공무원으로는 최고 권위의 훈장이다. 사법시험 동기 중에서도 가장 먼저 수훈했다는 부수적인 영예와 외부의 높은 평가는 이 동문에게 있어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는 "저는 제 개인의 능력으로 그 상을 수상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단지 명의만 제 앞으로 되어 있을 뿐 그 상은 저의 대학 법조계 동문들과 사법 연수원 동기들이 모두 함께 수훈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며 축하의 말에 손사래를 친다. 이 동문은 검사로서의 지금까지의 삶이 무엇인가를 바라고, 이루기 위해 살아온 것은 아니었다 고백한다. 단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대해 최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해왔을 뿐이라는 것이다. "저는 사법연수원 교수 시절에도 학생들에게 항상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 흘러간 시간은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 현재 이 시간에 최선을 다하자고 말이죠. 이것은 저의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저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 최선을 다하면서 지금의 위치까지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에게 꼭 해보고 싶은 지위라든지 일이라는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한양인에게 고함, '도전하라!' 이 동문은 1975년 손용근 동문이 본교 최초로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3년 후인 1978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때문에 그의 주변에는 선배들이 많지 않았다. 2년여에 걸친 연수기간 동안 힘겨운 순간에 부딪힐 때마다 의지할 수 있는 선배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이런 여건 속에서 동문회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법조계에 한양 동문의 수가 줄어든 것을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동문은 과거 90년대 초반, 300명씩을 선발했던 당시에도 25명에서 30명에 달하는 합격자를 배출했는데, 선발인원이 늘어난 것에 비해 합격자 수는 그만큼 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동문은 법조인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재삼 당부를 잊지 않았다. "저희 모교가 짧은 시간 내에 많은 법조인을 배출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전체 법조인 수를 생각해 본다면 저희는 결코 많은 수가 아닙니다. 후배 분들이 항상 내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가졌으면 합니다. 자기가 남보다 똑똑하다 혹은 무엇인가 낫다라는 생각보다는 내가 2배의 노력을 해야 남만큼 될 수 있습니다. 아니 2배 이상해야 남만큼 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노력한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선배들은 그렇게 해왔고, 여러분들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이동기 동문 인터뷰 영상 보기 학력 및 약력 1956년 전북 정읍 출생. 1974년 법학과에 입학해 1978년 제20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983년 대구지방검찰청 검사를 거쳐 부산지검 고등검찰관, 전주지검 정읍지청장, 군산지청 부장검사, 법무연수원 기획과장, 사법연수원 교수, 서울지방검찰청 형사5부장 등을 두루 거쳤다. 1982년, 본교 법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1990년 다시 박사과정을 수료한 '학구파' 검사로 통한다. 1992년 업무유공 법무장관 표창을 받았고, 지난해 12월 홍조근정훈장을 수훈했다. 사진: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2003-01 22

[동문]`시민이 바꾸는 서울` 청계천복원 시민위원 김선아

흔히 서울을 말할 때 '색깔이 없는 도시', '근육만 육중하게 붙어있는 도시'라는 꼬리표를 달곤 한다. 빵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의 문제보다 크게 부풀리는 것이 우선의 가치로 여겨졌던 7, 80년대. 대한민국의 심장으로 닥치는 대로 내달려온 서울은 이제 '복마전'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혼란스럽고 숨막히는 공간이 돼 버렸다. 이러한 중병에 시달리고 있는 서울에 숨통을 틔워주기 위해 청계천 복원 사업의 시민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건축가가 있다. 바로 김선아(건축과 88년졸)동문. 청계천 복원의 기본 원칙을 '보존과 개입'이라 힘주어 말하는 김 동문을 마로니에 공원에서 만나보았다. - 건축가로서 시민위원회 활동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하다. 청계천 시민위원회는 5개 분과로, 각계의 전문가 및 시민단체 활동가들로 구성돼 있다. 서울시 청계천 복원사업 추진 본부에서 위촉을 해, 시민위원회 도시계획 분과에서 활동을 하게 됐다. 베니스 건축대학을 졸업할 때 도시건축 관련 논문으로 졸업을 한 점, 유럽의 건축설계와 도시계획부분을 구분 없이 공부한 것, 그 곳에서 이들과 교류하며 건축가로써 성장한 점이 고려된 것 같다. - 청계천 복원의 이유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은? 한 마디로 서울 강북의 정체성 회복 필요성 때문에 반드시 복원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시민위원으로서 구체적인 활동은 어떠한가. 서울시에서 추진하고 있는 청계천 복원계획의 방향 및 방법에 대한 비판과 감시기능을 하는 것이다. 도시계획 분과위원회는 서울시 도심부 개발과 함께 하는 청계천 복원에 따른 도심부의 발전 방향, 청계천 주변지역의 개발, 청계천 복원후의 서울시 강북의 도시 모습에 대한 서울시 및 서울 시정개발 연구원의 연구과정을 검토하고 방향제시를 한다. 최근까지는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갖고, 활발한 토론을 통해, 문제점 및 보완책을 제시했다. 위원회의 최연소 위원으로써 선배님들에게서 배우기도 하지만, 의견을 발표할 때에는 많은 분들이 경청을 하시며 공감을 표하기도 한다. - 얼마 전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청계천 복원에 대해 '보존과 개입'을 중시하는 유럽식을 강조한 바 있는데. 일단 '유럽식'이라는 말이 일종의 방법론처럼 서울에서 복사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를 해야한다는 것을 먼저 말하고 싶다. 유럽의 건축가들은 새로운 땅에 건물을 설계할 때 그 건물이 지어진 후 도시의 모습의 변화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빈 땅에 뭔가를 설계한다기보다 기존의 도시맥락과 같이 호흡할 수 있는 것을 찾는 다는 것이다. 이 점이 꼭 기존의 도시 맥락을 따르기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조화'라는 것은 다양한 방법으로 찾을 수 있다. 바둑을 하는 것으로 예를 들자면 바둑을 한 수, 한 수 두어갈 때 바둑판의 모습은 그 때, 그 때의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이들은 기존의 도시 맥락에 '개입'을 한다는 개념을 가지고 설계를 한다. - 바람직한 서울시의 상을 그린다면 가장 인상적인 서울의 모습은 도심을 가로지르는 고가도로와 고가도로 하부, 지하철공간, 버려진 인도, 동네를 가로지르는 8차선 도로, 어디를 가도 똑같은 단지계획 모습, 어디를 가도 그 지역의 정체성을 알 수 없는 모습들이다. 이탈리아에 있을 때는 지나치게 보존 위주로 진행돼 스스로 짓눌리는 도시의 숨통을 틔어 주는 좀더 전위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서울에 돌아오니 '개발은 이제 그만, 제발 보존을'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도시를 다듬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고가도로는 우리를 건조하게 만들지만, 그것이 가지고 있는 미학적인 면을 생각해 본다면, 땅위에 또 다른 땅을 만들어 주는 흥미로운 오브제이다. 문제는 현재의 고가도로는 자신이 가진 기능적 역할 외에는 어떠한 배려도 없이 놓여져 있다는 것이다. 또 그 하부를 보라. 얼마나 익명적인 공간이 형성되어 있는지. 인도 역시 5m, 7m 되는 인도들이 아주 무책임한 보도 블록으로 깔려 있을 뿐이다. 고가 도로문제나, 인도 등 공공 공간에 대해서는 공공 공간의 중요성을 역설하기보다는 리모델링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어디를 가나 똑같은 동네의 모습들도 심각하다. - 시민위원회 활동 외에도 사회 각계에서 활약해 오신 것으로 아는데. 정신적으로 가장 성숙한다는 30대를 보낸 곳이 유럽의 이탈리아다 보니, 그곳의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개인적으로 여러 예술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점과 부합돼 건축 외에도 다양한 일들을 하게됐다. 베니스에서 유학기간 동안 95년에 만들어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의 코디네이터일(95년-98년)을 했으며, 한겨레21 통신원(96년-98년) 등 몇몇 언론사에 기사를 쓰는 일을 했다. 이 두 가지 일은 서울로 돌아오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01년 9월에 '서울 2002, 도시 비전과 실천'전을 위해 서울 시정개발연구원 초빙 부연구위원으로 들어오게 됐다. 이 일을 계기로 오랜 시간 떠나 있었던 서울에 무슨 일들이 있었나를 빠른 시간에 밀도 있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 후 자연스럽게 서울시에서 했던 월드컵 공원, 낙산공원에 세워진 전시관기획 및 총괄을 하게 됐다. 그밖에 2002년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프로젝트 코디네이터로 일을 했고, 최근에는 청계천 전시관 기획을 하게 됐다.(김 동문은 현재 'studio seonahKIM' 대표와 명지대 건축과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 - 공사다망한 가운데에도 전시회를 열고 있는 것으로 안다. 제목은 'Visible vs. Invisible'이다. 99.9%의 건축가를 고용할 수 없는 일반 도시민들을 대상으로 했다. 지난해 있었던 2003년도 문예진흥원 기획공모전 선정돼 진흥원의 지원과 '공간', 'A Group 건축 사무소'의 후원으로 1월 17일부터 2월 2일까지 문예진흥원 마로니에 미술관 제2전시실에서 개최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도시' 와 '사람'이라는 두 가지 요소로 전개를 했다. 보이는 도시로는 우리가 흔히 지나다니며 보는 거리들, 거리 풍경, 막연히 서울이라고 생각하는 도시 모습들, 즉 우리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도시 인프라의 이면들, 익명적, 반복적 획일적 공간들을 보여주고자 했다. 내용적으로는 도시건축을 공부한 사람입장에서 또 한 사람의 인간으로써 느끼는 도시 서울의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다. - 한양 가족에게 당부하고픈 말이 있다면.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한양인의 명예를 위해서는 한양인임을 잊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앞으로의 세계는 더욱 경쟁과 능력위주로 움직일 것이다. 한양인들이 유대하고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각자의 분야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생활할 때 가능할 것이다.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2002-12 22

[동문]`이거 로맨틱 코메디 아니에요`

"한양대와 국문과는 영화 위한 아이디어의 원천" 충무로 불문율 속 감독의 고뇌 어린 영화 '피아노 치는 대통령' 전만배 감독(국문 92년졸) 대통령은 현대 국가 권력을 대변하는 최고의 상징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에 대한 인식이 남다를 수 있는 것은 강력한 중앙집권의 정치사를 오래도록 경험한 탓이다. 그러나 대통령에 대한 이 같은 인식도 점차 바뀌어 가고 있다. 대통령을 소재로 한 각종 유머가 일상에 지친 시민의 삶을 위로하기도 하고, 대통령선거는 이제 하나의 '국민축제'로 자리매김하는 모습이다. '대중적 인기'에 내재한 감독의 고뇌 한국 영화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을 주인공으로 다뤄 화제가 된 '피아노 치는 대통령'. 지난 12월 8일 개봉된 이후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 영화는 영화 자체의 흥미도 흥미이지만, 대통령을 유머스럽고 인간적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주목을 받고 있다. 대선을 앞두고 모 방송사가 조사한 '비서실장에 가장 잘 어울릴 연예인'을 묻는 코믹한 설문에 이 영화의 주연배우가 꼽혔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대통령 선거를 불과 10여일 앞두고 개봉된 이 영화에 대한 높은 관심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전만배 감독(국문과 92년졸)을 인터뷰하는 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 감독은 BBC와의 인터뷰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며, 30분이나 늦은 시간에 숨을 헐떡이며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감독, 그것도 이제 막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감독으로서는 아주 행복하죠. 하지만 제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아직도 부끄러움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정말 제 영화가 좋아서 사랑을 받는 것인지, 아니면 '대통령'이란 특별한 소재를 그저 잘 꾸며서 사랑을 받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면 부끄러울 뿐입니다. 영화가 나온 이후로 부끄러워서 잠을 편하게 잔 적이 별로 없습니다." 전 감독은 영화가 조금도 만족스럽지 않다고 거듭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경험하면서 신인 감독이 지난 한계와 이에 따른 경험 부족이 영화 제작 과정에서 만만치 않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영화의 내용을 둘러싸고 벌어진 정치권의 논쟁도 그에게는 부담스러운 짐이었다. 그는 정치권에서 벌어진 논쟁에 대한 질문에 간단히 답했다. "누구 말처럼 정말로 정치권의 개입이 있었으면 재정적으로는 넉넉하지 않았을까요?(웃음) 당연히 영화의 완성도도 지금보다 한층 나았을 것이고, 영화 보급이나 홍보의 측면에서도 훨씬 수월하지 않았겠느냐는 식으로 반론하고 싶습니다. 영화를 제작하면서 재정적으로 넉넉하지가 못해 힘들었던 점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영화를 자세히 보셨으면 알겠지만, 값싸게 찍은 장면도 굉장히 많고요." 진지하고 체온이 깃든 영화 만들고파 전 감독은 '재미있다'는 영화평이 나올 때마다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고 한다. 그가 원래 생각했던 '피아노 치는 대통령'의 대통령은 단순히 로맨틱하고 코믹한 대통령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 감독은 대중적인 평가와는 달리 '피아노 치는 대통령'이란 영화 자체가 사실은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라고 일축한다. 그가 처음에 그렸던 '한민욱 대통령(안성기 분)'은 매우 진지한 대통령이다. 딸의 담임인 최은수(최지우 분)와의 로맨스도 영화의 한 부분에 불과했다. 전 감독이 처음에 써 내려간 영화의 시나리오 역시 대통령과 그 주변 사람들의 고민과 좌절, 기쁨 등을 섬세하게 표현한 아주 진지한 작품이었다. 대통령과 그 주변인들의 인간적인 면을 여성정책, 독도 문제 등과 관련해서 매우 조심스럽고도 진지하게 표현하려던 게 당초 의도였다는 전 감독의 설명이다. 그러나 신인 감독은 첫 영화에서 확실히 흥행을 해야만 미래가 보장된다는 충무로의 '불문율'에서 전 감독은 조금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보다 흥행이 수월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로 기존의 계획을 수정했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영화는 아주 현실적인 문화 활동이며, 충무로는 아주 냉정한 동네입니다. 제가 앞으로 정말 하고 싶은 영화를 하기 위한 작전상 후퇴였다고 하고 싶네요. 제가 정말로 하고 싶은 영화요? '피아노 치는 대통령'하고는 많이 달라요. 진지하고 인간적인 향이 그윽한 영화를 하고 싶습니다. 언제 할꺼냐구요? (웃음) 글쎄요? 언젠가는 해야죠! 또 일단 이번 영화가 괜찮은 반응을 얻었기 때문에 앞으로는 조금씩이나마 저만의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전 감독이 정말 제작하고 싶은 따뜻한 영화는 '춘향이'를 주인공으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삼은 성장 영화이다. 그는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 '춘향이'와는 완전히 다른 '춘향이'를 그리고 싶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자신의 천한 신분에 대해서 월매에게 불평하고, 이몽룡이 단 한번의 잠자리 후 기약도 없이 과거를 보러 떠나는 것에 대해서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는 춘향이가 전 감독이 상상하는 춘향이다. 한마디로 전 감독은 예쁘게 포장된 대중적 상상력을 극복하고 그 속에 내재한 인간의 진지한 내면을 그리고 싶다는 것이다. 아이디어의 원천, '한양대 국문과' 전 감독은 어느 누구보다도 본교와 자신의 출신 학과인 국문과에 대해서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영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는 데 캠퍼스 생활과 국문학적 소양이 특히 많이 작용해 왔다는 것이다. '피아노 치는 대통령'에서 여자 주인공인 최은수가 국어 교사이고, 한민욱과 최은수의 인연을 조금 더 특별하게 만든 매개가 '황조가' 숙제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춘향이'를 주제로 한 성장 영화를 만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도 재학 시절 들었던 '춘향전 원전 강독'이란 전공 과목 덕분이다. 특히 영화의 '황조가' 장면에서는 정확한 한자 자문을 얻기 위해, 과 동기인 이승수(국문과 강사)씨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단다. "국문학적 소양이라... 평상시에 의식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특별히 국문학에 관심이 많은 것도 아니고요. 그렇지만 영화를 만들다 보면 국문학적 소양이 저도 모르게 꽤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습니다. 시나리오를 쓰는 데 있어서도 나름대로 큰 도움이 되는 것 같고요.(웃음) 전공 얘기를 하니까 이제는 박노준 교수님 (인문대·국문과 교수) 생각이 많이 나네요." 학교와 학창 시절에 대한 회고를 통해 그는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전 감독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가 품은 한양대와 한양인에 대한 애정을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전 감독은 본교 출신들이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개인적으로는 학교와 학과에 대한 애착심이 강하면서도 '뭉치는' 데는 조금 약한 것 같다는 지적을 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전 감독은 학교와 동문에 대한 애정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게 필요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화창한 햇살이 빛나던 진사로, 여름 노을이 아름답던 노천극장, 따뜻했던 인문대 그리고 밝고, 진지한 모습으로 캠퍼스를 돌아다니던 한양인들의 모습 속에서 저의 정서를 살찌울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학교에 대한 자부심도 클 수밖에 없었죠. 더군다나 장학금도 줬고요.(웃음) 앞으로도 계속해서 모교에 대한 애정과 감사함을 가질 것이며, 최대한 이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려고 할 것입니다. 후배 여러분들도 열심히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한양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세요!" 이세형 학생기자 sehyung@ihanyang.ac.kr 사진 : 김모련 학생기자 moryun@ihanyang.ac.kr 전만배 감독은 누구? 전만배 감독은 1983년에 본교 인문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학창시절 인문대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었다는 소문도 있었다고 한다. 또 일부 국문과 학생들마저도 그를 보며 연극영화과가 아니냐는 의문을 가질 정도로 영화 속에 빠져 살았노라 스스로를 소개한다. 그래서 졸업도 1992년으로 조금 늦어졌다는 설명이다. 지난 12월 8일 개봉한 입봉작 , '피아노 치는 대통령'을 통해 데뷔했다. 전 감독은 학교에서 후배들과 함께 영화와 살아가는 얘기를 하고 싶다며, 누군가가 자신을 초청(?)해 줄 것을 바라고 있다.

2002-12 15

[동문]`내가 오늘 읽는 것은 너의 미래`

<한양동문이 뛴다 32> 이제 국가의 장래에 대해 감히 '훈수'를 둘 만큼 현대사회의 시민은 도도해졌다. 모든 정보를 국가가 독점하고 사회의 미래에 대한 점괘를 오직 공무원이 놓던 시대는 아득한 추억의 저편에 있다. 현대에 있어 기업활동이란 단순히 양질의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고 판매하는데 그치지 않고, 장기적 관점에서 보다 많은 이윤 창출을 위해 국가와 시장의 미래를 예측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는 순수 연구의 영역까지도 포괄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국내 최고의 씽크탱크 중 하나임을 자임하는 삼성경제연구소는 정부의 경제정책에 곧잘 'F학점'을 내놓기도 하는 '도도한 시민'의 대표주자인 셈이다. 정부에 'F학점'을 내린 기업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컨설턴트로 재직 중인 송영필 동문(도시공학 91년졸)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의 '도도함'에 대해 누구보다 자부심이 높다. 민간 기반의 여타 경제연구소들이 모회사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한데 반해 삼성경제연구소는 자회사는 물론 정부에 대해서도 '입바른 소리'를 일삼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민간기업 연구소의 대부분이 단순히 증권회사를 지지해주는 역할을 수행해 오던 것에 반해 삼성경제연구소는 상대적으로 모회사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지위와 역할을 수행해 왔습니다. 또한 국가 엘리트가 주도하는 경제 연구가 아니라, 민간기업의 시각에서 경제 연구를 하고 있는 것도 저희 연구소의 특징입니다. 점차 그 위상이 높아져 가는 민간 기업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정부의 정책을 평가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저희 연구소의 대표적 업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역시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연구소의 배경을 두고 있는 탓에 삼성경제연구소가 갖는 한계도 없지 않다. 이른바 연구소라는 글자 앞에 붙여 놓은 '삼성'이라는 수식어가 갖는 음영이다. 삼성이라는 거대 기업의 경영 노하우가 축적되었을 것이라는 진실 아닌 진실을 이유로 벤치마킹을 꿈꾸는 다수의 기업들이 연구소에 컨설팅을 의뢰하는 반면, 경쟁 관계에 있는 유사한 규모의 대기업들간에는 기업보안을 이유로 상호 연구를 의뢰하거나, 수주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연구소의 동력, '학제간 연구' 송 동문의 약력을 검토하며 가장 먼저 떠오른 의문은 경제연구소에 몸담고 있는 그의 전공이 '도시공학'이라는 점이었다. 일반적으로 '컨설턴트'라고 하면 상경 계열의 학생들이 최고의 전문직종으로 희망하며, 실제로 해당 직업군을 독점하는 분야로 인식되기 쉽다. 하지만 송 동문은 본교 도시공학과를 졸업한 자신의 경력을 내세우며 경영에 대한 상기의 편견이 왜 협소한 것인지를 조목조목 나열하고 나섰다. 물론 경제연구소의 가장 큰 역할이 경제 예측과 기업 경영에 대한 자문이기는 하지만 경영은 재무와 회계를 넘어선 보다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우리나라에서 자주 목격되는 경제 현상 중 하나가 이른바 '경제 착시현상'이라는 것입니다. 현재에도 전체 경제의 통계 수치만을 살펴보면 상당한 호황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특정 업종군이나, 지역별 경제 상황을 살펴보면 IMF가 다시 도래했다고 느낄 만큼 어려운 분야와 지역이 있습니다. 이는 특정 업종의 고성장과 서울 위주의 발전이 과도한 탓에 통계수치상으로는 그 불황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경영의 바탕에는 일반인이 잘 인식하지 못하는 다양한 연구분야가 존재합니다. 저요? 부동산(real estate)이 제 연구 분야죠." 아울러 송 동문은 거시적인 국가경제 연구가 아닌 미시적인 지역경제 연구에 있어서 자신의 전공이 탁월한 쓰임을 발휘한다고 부연한다. 사실 송 동문 외에도 삼성경제연구소에는 사회학, 정치학은 물론, 문화예술 부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공을 지닌 컨설턴트들이 있다. 이러한 구성인자들이 많은 경쟁 민간연구소들이 도태되는 외환위기 와중에도 삼성경제연구소를 건실하게 지켜주었던 버팀목이 되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대부분의 민간연구소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 경제나 경영 부문인데 반해 저희 연구소는 학제간 연구를 많이 수행합니다. 그러다 보니 동일한 문제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다양한 견해가 제시됩니다. 도출된 의견들을 하나하나 융합하다 보면 기대하지 않았던 매우 놀라운 결론을 이끌어 낼 수가 있지요. 이런 경쟁력이 지난 외환위기 때에도, 오직 삼성경제연구소만이 발빠른 대응책을 낼 수 있게 한 동력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학벌의 신화'를 깬다 삼성경제연구소에 입사하기 전, 송 동문은 '서울시정개발연구원'에 잠시 몸을 담았다. 이후 삼성으로 자리를 옮긴 까닭을 그는 자신의 연구 결과물들이 실제로 어떻게 현실에 반영되는지 알 수 없었던 공공 연구기관의 한계 때문이라 설명했다. 또한 민간연구소가 공공연구소보다 상대적으로 현장 밀착적이라는 점 외에 공공연구기관이 지닌 학벌에 대한 신화가 자신을 옥죄고 있었노라 고백한다. "얼마 전 일본에서 학사 출신의 연구원이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아직까지 학벌이 중요한 우리나라나 공공 연구기관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 연구소에서는 학사, 석사 ,박사 따위의 학력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약 능력과 노력이 있다면 연구소 내의 그 어떤 지위까지도 승진이 가능합니다. 현재 삼성경제연구소를 총괄하는 소장님이 학사출신이라는 점을 알고 계십니까?" 삼성경제연구소가 지닌 개방적인 사고와 유연함은 비단 학력의 문제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공공 연구기관과는 달리, 매우 짧은 시간에 신속한 분석이 요구되는 3개월 미만의 단기 프로젝트들을 주로 수행한다. 따라서 동시대에 이슈화된 경제 전반의 문제들에 대해 그 어떤 공공연구소보다 빠른 연구와 분석을 제공하도록 훈련되어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내가 오늘 읽는 것은 당신의 미래 물론 송 동문은 삼성경제연구소가 단기 연구에 익숙한 탓에 주로 중장기 프로젝트를 하는 공공연구소들에 비해 보다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의 단점이라 말한다. 또한 철저한 능력 중심의 연구소 운영 방침으로 인해 '상시 구조조정'의 위험부담을 안고 살아야 하는 것은 민간연구소가 주는 '근심'이라는 사실도 덧붙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생 책상물림을 면치 못하는 연구원의 직분이 숙명처럼 행복하다 고백한다. 남들보다 늘 앞서 배우며 살아간다는 것이 주는 지적희열 탓이다. "이 직업은 항상 새로운 정보들을 먼저 찾아내고 접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물론 그것을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해 연구하고 공부해야 하지만, 세상의 흐름을 읽어낸다는 성취감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이 일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느라, 오늘 즐거운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불확실한 저의 미래를 걱정하지만, 제가 오늘 읽는 것은 당신의 미래입니다." 김자영 취재팀장 apriljy@ihanyang.ac.kr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학력 및 약력 송영필 동문은 1991년 본교 도시공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 서울대학교에서 도시계획학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같은 해 서울시정개발연구원에 입사했다가 이듬해인 1995년, 삼성경제연구소로 이적했다. 현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컨설턴트인 그는 '지역산업정책' 및 '부동산'을 자신의 전문 연구분야라 소개한다. 최근 '인터넷시대의 지자체 웹사이트 기능 강화방안', '재정동향점검시스템(FTMS)을 이용한 지자체 재정진단', '외국인 직접투자 촉진을 위한 정책과제' 등의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