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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5 22

[동문]대학로에서 만난 `빨간 속옷의 사나이` 류태호 동문

지난 4월 개봉한 영화 '살인의 추억'과 지난 86년 시작해 올해로 여섯 번째를 맡는 연극 '날 보러와요'가 생활 속의 코미디를 선사하며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그러나 화성연쇄살인사건이라는 동일한 소재를 지닌 두 작품에서 같은 배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는 배우가 있다는 사실은 더욱 큰 화제다. 영화에서는 빨간 여자 속옷을 입고 다니며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두 번째 용의자로, 연극에서는 다시 용의자로 1인 4역을 소화해내는 류태호(연영 86년졸) 동문이 그 주인공. 위클리한양은 류 동문을 만나 무대에서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 연기를 시작하게 된 동기가 있다면? 특별한 동기는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화 연출을 하고 싶어서 연극영화과에 갔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처음 2년 동안은 공부를 열심히 하지 못해 F를 많이 받았다. 군대에 갔다 와서는 열심히 했다. 연극영화과 최형민 교수님을 만난 것도 그쯤이었다. 최 교수님의 연기 수업을 듣고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 졸업 후 연극에 몸을 담았으니, 17년 동안 배우로서 살아온 셈이다. - 연극 배우는 배곯는 직업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연극을 하면서 힘들었던 적도 많았을 것 같은데. 지금은 이렇게 많은 관객들에게 박수를 받는 배우가 됐지만, 무명 시절에는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을 때가 많았다. 배우 생활 10년째에 접어들었던 지난 95년이 가장 힘든 시기였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웠고 이혼을 했다. 슬럼프에 빠져서 연극을 그만 둘 생각까지 했다. - '날 보러 와요'를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다고 하는데, 그토록 이 작품에 애착을 갖는 이유가 뭔가? 연극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때 이 작품이 전환점이 됐다. 내게 연기의 즐거움을 다시 알게 해 줬고 배우의 길에 매진할 수 있도록 자신감을 줬다. 첫 공연 때부터 매번 용의자로 역할을 맡았다. 논문을 통해 각각의 캐릭터가 작품에 형상화되는 과정이나 작가, 연출가 등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공연 제작의 실체를 드러냈다. - '날 보러와요'를 영화화한 '살인의 추억'에서도 용의자중 1명으로 출연하는데, 촬영 중의 에피소드는 없었나? 빨간 속옷을 입고 무덤 가에서 이상한 짓을 하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줄행랑을 치는 장면을 찍을 때였다. 맹장 수술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뛰는데 무척 힘이 들었다. 경찰 세 명을 따돌리려고 백 미터 달리기 선수처럼 뛰어야 했다. 아직 관객들과 함께 영화를 보지 못했다. 사람들이 어떤 장면에서 웃고 우는지 보고 싶다. - 현재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고도 들었다. 학생들에게 연기를 가르치고 있지만, 내가 배우는 것도 많다. 지금의 학생들은 다른 웃음과 슬픔을 가지고 있다. 시대가 변하면서 사람들의 생각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예전에는 미선이·효순이 사건이 가져다 준 그런 슬픔이 없었다. 월드컵에 열광하던 그 기쁨도 없었다. 학생들이 연기하는 모습에서 새로운 기쁨과 슬픔을 찾을 수 있다. - 무대 위에서의 진정한 성공이란 무엇인가? 성공의 기준을 어디에다 두고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몇 평 아파트에 사는지, 자식은 몇 명인지를 묻는다면 내 나이 또래의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나는 성공한 편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연기를 하면서 나를 보고 웃고 우는 관객들을 보면 행복하다. 행복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늙어서 '파파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배우로서 살고 싶다.

2003-05 15

[동문]평상 바쳐 국내 최대 식물원 건립한 학택식물원 원장 이택주 동문

매년 5월 14일. 이성에게 사랑을 고백하거나 사랑이 여전히 유효함을 알리기 위해 가슴 뜨거운 청춘들은 꽃집으로 향한다. 사랑과 욕망, 열정, 기쁨 그리고 아름다움과 절정이라는 꽃말로 포장된 장미를 연인에게 안겨주기 위해서다. 장미꽃을 선물한다는 뜻에서 '로즈데이(rose day)'라고 붙여진 이 날에 애인이 없는 사람들은 카레라이스를 먹으며 내년을 기약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로즈데이가 왜 어떤 유래로 생긴 지에 대해서는 속시원한 해답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와 더불어 사랑의 전도사로 대표되는 장미가 종묘 값과는 별도로 한 뿌리 당 1천원이 넘는 로열티를 주고 수입되는 현실을 아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 국내에서 거래되는 장미는 현재 50여 종으로 전량 외국의 육종회사가 개발한 것들이다. 연간 판매고가 100억원을 넘어섰다는 통계도 있다. 식물 종자는 더 이상 생명자원을 이유로 단순히 보존되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확보를 위해 치열한 경쟁을 치러야만 하는 하나의 '상품'인 것이다. 식물 유전자 사관학교, 한택식물원 종자를 둘러싼 소리 없는 전쟁이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20년이 넘는 세월을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야생화를 위해 헌신한 인물이 있다. 우리나라 야생식물의 보금자리이자 세계적인 규모의 식물원을 맨손으로 일군 이택주(토목 64년졸) 동문. 좁다란 시골길을 따라 도착한 한택식물원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우리를 반긴 것은 이 동문이 아닌 비봉산 자락에 안긴 한 그루의 아름드리 소나무였다. "우리나라 자생식물은 수억 년 동안의 지구 변천을 겪으며 고유한 유전자를 자지고 있습니다. 그 것을 이용해 무엇을 만들어 갈지 아무도 모를 만큼 유전자는 엄청난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의 확보를 위해 전 세계가 소리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죠. 종자는 냉장고에 넣어서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개체를 땅에 키우면서 보존하는 것입니다." 이 동문은 우리나라가 우수한 종을 많이 확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자전쟁에서 뒤쳐지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미스킴 라일락'을 이야기한다. 국제 라일락 시장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고 있는 '미스킴 라일락'의 조상은 한국에만 서식하던 물푸레나무과 꽃나무였다. 1947년 한 미국인이 북한산 백운대 부근 정향나무에서 씨 12개를 받아가 이 중 한 개체에서 얻은 품종이 바로 미스킴 라일락. 전 세계 꽃 시장의 40퍼센트를 점유할 정도로 엄청난 매매 규모를 자랑하는 이 종을 우리는 그 기원도 모른 채 역수입했다는 것이 이 동문의 설명이다. 한택식물원은 이렇듯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식물유전자 보존을 위한 효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생식물과 이 동문의 기이한 인연은 그의 나이 40대 초반 무렵에 시작됐다. 가수 남진 씨의 '저 푸른 초원 위에'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할 만치 전원생활에 대한 매력이 넓게 퍼졌던 70년 대 초, 이 동문은 돈을 많이 벌어 고향에서 전원생활을 하겠다는 유년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낙향했다. 그가 처음 시작한 것은 낙농사업. 그러나 제 1차 소파동으로 인해 손해만 잔뜩 보고 낙농의 꿈을 접어야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조경수를 심는 것. 기왕이면 좋은 나무를 심자는 생각에 유럽의 식물원을 둘러보던 그는 지구상에서 식물원이 없는 나라는 한국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환경보호는 식물보호에서 시작돼야 "우리는 기초과학 중의 기초과학인 식물학을 접어두고 중화학 공업 등 돈 되는 것에만 골몰했습니다.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국가에서도 기초과학을 중요시해서 식물원을 건립했지요. 외국의 퍼스트 레이디가 오면 가장 먼저 찾는 곳이 식물원이기도 합니다. 한국에도 제대로 된 식물원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럼 내가 한 번 해보자'하고 시작한 것이 이 어려운 작업의 시초가 됐지요." 이 동문이 힘주어 표현한 '어려운 작업'이라는 말에는 지난 20여 년 간의 고단한 역정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동안 이 곳에 투자된 자금만도 1백 억이 훌쩍 넘었다고. 대대로 물려받은 선산이라 부지 비용이 들어가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비용은 순수하게 자비로 충당된 것. 자금 사정이 어려워 고민하며 지샌 밤은 자생식물을 공부하면서 보낸 시간이기도 했다. 식물 관련 책을 끌어안고 공부할수록 식물원에 대한 애착은 더 커졌고 중도에 포기하면 아무도 이 작업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소명의식도 높아갔다. 그러나 정작 이 동문을 힘들게 했던 것은 재정적인 압박보다는 식물원에 대한 우리사회의 철저한 무관심과 무지였다. "1992년 리우 회담 결과로 생물다양성 협약이 체결돼 생태계를 보전하기 위한 실천들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지요. 한국도 그 협약에 따라 환경부에서 자연보존법을 제정했습니다. 지난 2001년에는 '자생지와 희귀식물 보전지구'로 지정되기도 했지요. 그런데 정작 필요한 지원은 거의 없었어요. '무슨 쓸 데 없는 짓이냐'는 반응이었죠. 단순히 유리 온실을 지어서 그곳에 관목식물이나 들이는 것이 식물원의 전부로 생각되는 현실입니다. 불고기 집이 커다란 정원을 뜻하는 '가든'으로 둔갑하기도 하지요.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 조경을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환경이 성장의 논리를 극복해 가는 지금, 환경운동의 첫걸음도 식물로부터 시작돼야한다는 것이 이 동문의 소신이다. 잔디를 심으면 지렁이나 땅강아지가 생기고, 잔디를 갉아먹는 벌레가 생기고, 또 그것을 잡아먹는 새가 날아온다는 것이다. 쓰레기 폐기물 등 결과적인 것만 보지말고 환경을 살릴 수 있는 기본부터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자는 것. 이와 함께 식물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교수들도 땅을 일궈 식물을 키워봐야 한다는 것이 이 동문의 생각이다. 이렇듯 식물에 대한 이 동문의 애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세계 최초로 조성된 생태공원이다. 자연 계곡을 따라 조성된 이 공원은 자연생태 조건과 동일하게 꾸미느라 8년이라는 긴 세월을 공들인 곳이다. 깽깽이풀과 복수초, 노루귀, 하늘매발톱, 금낭화 등 봄꽃이 지고 나면 여름꽃이 피고, 다시 그 자리에 가을꽃이 피는 자연의 순환과정을 따른 곳으로 겨울을 제외하면 1년 내내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식물원은 '나의 것' 아닌 '모두의 것' 전국의 섬과 산, 들판을 누비며 이름도 잘 모르는 자생식물을 일일이 책을 통해 확인하고, 채집하며 옮겨심기 시작한지 어언 24년. 이 동문은 한택식물원이 30만평 넓이에 토종 수목류와 자생화 2천 4백 여종을 비롯해 외국종 6천여 종이 자라고 있는 세계적인 식물원임을 자부한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식물연구소와 생태학습원을 설립해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 이 동문이 식물원을 공익법인으로 등록한 것도 식물원은 결코 개인 소유가 아닌 모든 사람들의 공유물이라는 그의 고집 때문이다. "성공이라는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성공한 사람이라고 자부합니다. 제 나이가 되면 젊었을 때 화려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은퇴를 하지요. 하지만 저는 지금에 와서 꽃이 펴서 죽을 때까지 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동문을 뿌리 하나에 대를 4번 갈고 마지막 죽으면서 백 년에 한 번 처음 꽃을 피우는 대나무꽃에 빗댄다면 지나친 비유일까. "중간에 포기 안 한 게 천만 다행이다"라고 너털웃음을 짓는 이 동문에게서 식물원 입구에 자리잡은 키 큰 낙락장송의 기상을 엿보았다. 학력 및 약력 이택주 동문은 1964년 토목과를 졸업하고 1970년부터 1978년까지 동국대에서 도시행정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1968년 신한기술원에 입사한 이 동문은 사단법인 이수토지구획 정리조합 업무부장과 사업소장, 학림건설 상임고문을 역임하고 1979년 고향인 용인시에서 한택식물원을 건립했다. 현재 사단법인 자생식물단체 부회장을 맡고 있는 이 동문은 한국식물원협회 부회장과 고문을 역임하기도 했다. 주요 상훈으로 1995년 환경보전활동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1998년 '야생화농의 소득증대를 위한 우리 꽃 박람회' 농림부 장관상, 1999년 '소득증대를 위한 우리 꽃 박람회' 환경부 장관상, 2001년 경기도지사가 수여하는 농어민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2003-05 08

[동문]주택문제, 성장과 안정의 접점 찾는 건교부 도시건축심의관 서종대 동문

지난 1일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난곡'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주거권과 재개발 명분을 놓고 오랜 갈등을 끝내고 마지막 14가구가 철거되면서 달동네 난곡은 서울시민의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재개발과 주거권, 그린벨트와 재산권 등 공공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은 근본적으로 갈등의 요인을 내포하고 있다. 환경보존이나 공공개발이 전체의 이익을 추구한다고 해서 주거권과 재산권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가 부정되거나 침해되어도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재개발과 지역개발계획에 대한 주무부처는 건설교통부. 이 곳에서 미래를 생각하는 도시 계획과 현실적 해결책의 접점을 찾아가는 도시건축심의관 서종대 동문(경제 83졸)을 만났다. 난개발 해결, 제도보다 시행이 중요해 산업기반 및 인구가 수도권으로 집중되면서 발생한 난개발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부상한지 오래다. 경기도 지역, 서울의 외곽에서 쉽게 목격되는 난개발의 폐해는 대부분 대단위 주거지역은 형성되었음에도 그에 따른 생활의 기본적 인프라가 갖추어지지 못한 데서 야기된다. 무분별한 대도시 위주의 산업개발과 수도권 팽창이 부른 산업화의 생채기이다. 서 동문은 이러한 난개발 문제가 올해부터 시행되는 '국토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에 의해 일정 부분 해소될 것으로 예상한다. "이 법은 지금까지 무분별하게 진행된 국토 개발을 체계적으로 하기 위한 법률입니다. 과거에는 수요가 생긴 다음에 기본 시설이 따라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농지 한가운데 덩그렇게 놓인 아파트들이 생겼죠. 하지만 계획도시에 들어가면 이러한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수요가 어느 정도 발생할 지역을 사전에 선정, 개발함으로써 사람들이 충분히 살만한 여건을 만들어준 다음 입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 법의 기본 취지입니다." 법의 취지가 좋다고 해서 결과가 반드시 좋을 수는 없는 법. 서 동문은 이러한 명제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는 제도를 만드는 것보다 올바르게 시행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다. 제도를 만듦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행과정에서 발생하는 현실적 어려움에 대해 제도를 보완해 나가는 사후 행정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서 동문은 바로 이러한 사후 적용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 말한다. 성장과 안정, 두 마리 토끼 잡는다 "재건축 문제, 그린벨트와 주택보급 계획 등은 내수산업의 성장이나 안정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주택정책과 같은 경우, 사회정책과 경제정책의 중간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정정책과 상당히 유사하죠. 성장 위주로 많은 주택을 보급하면, 건설업이 살아나고 투기심리는 안정되지만 주택가격이 하락하고, 안정 위주로 수요에 따른 공급만을 고려하면 주택가격이 상승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떤 시책이든 두 가지를 잘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서 동문은 재건축 문제와 그린벨트 문제에 있어서 개인권을 상당히 중요시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무조건적인 정부 중심의 사고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린벨트의 경우, 개인권에 대한 고려나 확실한 조사 없이 무분별하게 지정되어온 경향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정책에 의한 피해는 구제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서 동문의 입장. 올해까지 진행되는 그린벨트 재조정 계획은 그런 맥락에서 진행되고 있다. 풀 곳은 확실히 풀어주고 지킬 곳은 강하게 지킨다는 것이다. 경제관계부처 최연소 국장 지난 3월, 참여정부의 각 부처는 대대적인 인사이동을 단행했다. 그 핵심은 능력 위주의 인사이동이었고 이른바 '사람에 맞추는 자리가 아니라 자리에 맞는 사람을 쓰겠다'는 신 정부의 인사 원칙이 반영된 것이었다. 3월에 있었던 인사를 통해 도시건축심의관에 발탁된 서 동문은 경제부처 '최연소 국장'이란 칭호를 함께 받았다. 다소 빠른 승진이 아니냐는 말에 손사래를 치는 서 동문은 무엇이 성공인지 모르지만, 성공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직업과 지위라는 것은 인생의 전 과정 속에서, 자기가 필요한 자리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자리에 조금 빨리 온 것은 이 자리에서 저의 어떤 부분이 필요했기 때문이지 저의 능력이 탁월해서라 생각지는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리에 연연해서 말을 하지만, 그것은 표현의 수단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관점에서 직장과 지위라는 것은 사회에 얼마나 도움되는 일을 할 수 있는지, 그 일을 하면서 내 맘이 편안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판단 기준입니다." 공직은 '사랑의 실천' 구현할 최고의 공간 서종대 동문은 건설교통부의 토지, 주택, 기획예산 담당을 거쳐 청와대 SOC 기획단, 경제수석실 등 전체적인 업무를 조율, 기획하는 일을 해왔다.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살만한 곳에서 일해온 그 이지만, 서 동문에게는 오히려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자신의 주 전공분야인 주택과 토지이용에 대한 실무 경험을 충분히 쌓을 수 없었다는 것.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그가 품은 자신의 분야에 대한 애착은 남다르다. "저는 솔직히 어떤 자리에 오르고 싶다거나 모든 일을 관장하는 일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건 청와대에서 많이 했습니다. 그것보다는 제가 담당하고 있는 주택과 토지이용에 있어서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싶습니다. 우리나라가 이제 주택보급률이 100퍼센트를 넘었다고 하는데, 선진국에서 사용하는 인구 1000명당 주택수로 한다면 가야 할 길은 멀었습니다. 1가구 1주택의 명제에서 벗어나 집이 필요한 이들에게 모두 집을 공급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품은 직업 철학을 모교의 건학이념에서 찾는다. 그 역시 재학생 때는 건학이념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사회 속에서 재학시절 무의식중에 들어왔던 사랑의 실천, 성실, 겸손과 같은 단어들이 지금 그에게 큰 힘이 되고 있노라고 고백한다. "모교의 건학이념은 정말 어느 곳에 내놓아도 주목받을 마음가짐입니다. 단순히 학교에 필요한 정신이라기보다 사회 속에서 자신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자산이 된다는 거죠. 저는 많은 후배들이 공직에 진출했으면 합니다. 본교의 건학이념을 가장 잘 실천할 수 있는 공간일 뿐만 아니라 어떤 특정인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이 아닌, 공익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후배들에게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학력 및 약력 서종대 동문은 1981년 25회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2년 뒤인 1983년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정책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서 동문은 이후 1991년, 영국 버밍험대에서 경제개발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건설교통부에서 토지정책, 주택정책, 기획예산을 담당한 서 동문은 1995년부터 청와대 SOC 기획단, 경제수석실 과장으로 근무했다. 이후 필리핀대사관 1등 서기관을 역임한 후 건설교통부로 돌아와 주택관리, 주택정책, 예산, 총무과장 등을 거쳐 지난 3월부터 건설교통부 도시건축심의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2003-04 22

[동문]우리의 표준을 세계의 기준으로 만드는 품질경영사무국장 송원섭 동문

지난 시절, '한국공업규격'을 뜻하는 'KS(Korea industrial Standard)' 마크는 상품의 우수한 품질을 함축하는 하나의 보통명사였다. 기업들은 자사의 제품이 KS 인증을 받았다는 것을 부각시켰고, 이는 제품의 소비자 신뢰도로 직결되었다. 소비자들은 KS라는 마크를 믿고 제품을 구입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각종 공산품 광고에 KS 인증을 단골메뉴로 등장시켰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 주위에서 KS 인증을 내세우는 제품광고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KS의 공신력이 없어졌기 때문일까? 대답은 'NO'다. 이는 과거 회사에서 KS 인증이 달성해야 되는 목표였다면, 이제는 제품을 생산해 팔기 위한 마지노선으로 변화한 결과라 할 수 있다. KS 인증기관이자 ISO, JIS(일본공업규격)와 같은 산업표준화 및 품질경영 등 제반 관리 기술의 보급 촉진을 목표로 1962년 설립된 한국표준협회. 이곳에서 품질을 통한 고객만족 실현을 목표로 품질경영 계획과 확산 보급을 이끌고 있는 품질경영추진사무국장 송원섭 동문(공업경영 74졸)을 만났다. 표준을 선점해야 세계를 리드한다 포디즘이 지배하던 산업사회 초기, 각 기업들은 대량생산을 위해 너도나도 부품의 표준화를 실시했다. 이러한 대량생산 체제 하에서 똑같은 모양과 똑같은 품질의 제품들은 연일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표준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은 그 제품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적절한 상징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산업구조는 대량생산 체제에서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로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소량생산 체제 속에서 표준화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송 동문은 오히려 미래사회에서 현재보다 표준의 의미가 더욱 커질 것이라 전망한다. "현대 산업사회에서 표준을 선점하는 것은 세계 산업의 리딩 그룹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기준으로 다른 후발주자를 맞추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죠. 또한 지구촌 사회에서는 호환성이 필수입니다. 모든 제품을 하나의 회사에서 생산해 조립했던 과거와는 달리 대부분의 부품은 아웃소싱으로 제조됩니다. 이런 이유로 다품종 소량화 시대에도 표준화는 중요한 것입니다. 만들면 팔리던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송 동문이 근무하는 부서는 품질경영추진사무국. 그는 품질이라고 하면 공장에 의해서 제조된 물품만이 떠올리는 것은 근대적이지 못한 생각이라고 일축한다. 국제표준화기구에서 시행하는 ISO 9000시리즈에서는 품질이라는 단어를 단순 상품만이 아닌 서비스, 교육, 행정을 포함해 모든 분야에 들어가는 중요한 요소라고 정의한다. 즉 현대사회에서 품질은 해당 상품 또는 서비스가 갖춰야 할 고유한 특성들의 집합을 얼마나 잘 충족시키고 있느냐 하는 정도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더 이상 품질경영이라는 말이 제품이라는 산업적 결과물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표준은 최고가 아닌 최저, 표준 이후 발전 담보돼야 세계무역규모 10위권, 1인당 국민총생산 만 달러 시대를 맞고 있는 오늘, 우리의 표준화 수준에 관한 문제는 꼭 짚고 넘어가야 되는 항목이다. 송 동문의 말처럼 표준의 선점이 세계화의 척도라고 본다면 우리의 분야별 표준화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은 곧 미래 사회에서의 경쟁력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ISO 9000 시리즈, KS 인증 심사원, 영국 표준협회 심사원 그리고 일본공업규격 심사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는 송 동문은 우리의 전망이 그다지 밝은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조선공업 같은 경우, 탑 클래스 수준이고 반도체 특히 핸드폰 같은 경우는 세계 3위권이라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별한 분야에서는 그렇고 일반 무역규모에서도 세계 10위권이 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가공무역에 의존하는 무역구조인 점을 감안한다면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동차의 예를 들어보죠. 자동차의 경우, 앞으로 5년 후에는 세계 6위권 안으로 들어야 세계시장에서 생존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5년 전에는 10위권 안에 들자는 것이 업계나 저희 협회의 목표였습니다. 시장 생존구조가 변하고 있습니다. 시장이 베스트만이 살아남는 구조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죠." 송 동문이 생각하는 세계화 전략은 간단하다. 모든 분야가 국제적인 표준 이상으로 잘 돼 있어야 한다는 것. 그는 표준이라는 것이 최상이 아니라 최하를 의미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즉 세계 속에서 통용되고 가치를 지니기 위한 마지노선인 것이다. 이런 그의 생각을 바탕으로 유추해 본다면 세계 표준화 기구의 인증이라는 제도 자체보다는 그 후 그것을 통해 어떻게 발전시키고 유지시켜 나가느냐가 중요한 문제인 것은 자명하다. "우리나라 대학들은 서로 순위를 메기고 다투지만 어떤 대학도 세계 100위안에 들지 못합니다. 이것은 교육이라는 부분은 교육적 세계화 표준에 뒤떨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막연한 이미지나 하나의 요소가 아니라 전체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제대로 조화를 이룰 때 질은 높아질 수 있습니다. 본교도 행정에 있어서 ISO 9001에 인증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단순히 이것만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교수님들의 연구, 학생들의 학구열과 같은 대학의 구체적인 요소들이 이 모두 복합적으로 발전할 때 우리가 목표로 하는 세계 100위권 대학 진입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표준'이 그들의 '기준' 돼야 최근 대기업들은 경영의 목표를 말할 때 흔히 '고객감동'을 말한다. 이제 모든 분야에 있어서 고객만족의 시대를 넘어 고객감동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인간은 동물과 달라서 시대와 문화에 따라 사고와 느낌의 기대치가 달라져 왔다. 과거에는 떨리는 자동차도 다리의 고통을 덜어주었기에 만족할 수 있었다면 오늘날 자동차는 승차감과 안전도는 물론 미관과 디자인의 만족도도 높아야 한다. 또한 음식 역시 과거에는 소화기관의 포만감을 위한 것이었다면, 현대에는 혀뿐만 아니라 눈을 만족시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만족을 넘어 감동에 이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증명하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소득수준이 만 불이라고 합니다. 7년 전에 만 불이 되었다가 IMF위기를 겪으며, 이제 겨우 다시 만 불이 됐습니다. 일본이나 싱가포르 같은 경우는 만 불이 되고 5년 만에 2만 불이 되었습니다. 2만 불 이상이 되어야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경기가 안 좋다고 3퍼센트, 5퍼센트를 얘기하는데 이 수준이라면 2만 불이 되기 위해서는 10년이 걸립니다. 교육과 같은 비산업분야는 더욱 심각한 수준입니다. 결코 자기 만족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아직 멀었습니다." 송 동문은 자신의 바람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소득, 문화수준, 서비스, 제품 등 모든 분야에서 월드 베스트에 오르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한 개인에 의해 이뤄질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우리의 실력을 키워 모든 분야에서 우리의 품질과 표준을 확산시키는 것만이 월드 클래스가 되는 길이라고 말하는 송원섭 동문. 이 세대를 위해서라면 산업 발달만으로도 족하지만, 우리 후세들에게 '살만한'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서는 우리의 표준을 세계의 기준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그의 당부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학력 및 약력 송원섭 동문은 1974년 공업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82년 연세대에서 공업경영학 석사학위를, 1997년 전북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83년 부천대학을 시작으로 전주대와 연세대에서 강단에 서기도 했고, 1987년부터 한국표준협회 업무를 시작해 연수원장과 ISO 시스템 인증원 원장을 두루 역임했다. 현재 국가공인 품질심사관련 7개의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으며 약 20여 기업 및 단체에 경영진단, 지도, 심사 및 교육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한국표준협회장상과 산업자원부 장관상을 수상한 바 있다.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2003-04 15

[동문]`시청자 만족이 방송의 최대 목표` MBC 시사제작 4CP 백종문 동문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공중파 방송은 매체의 속성상 무엇보다 공익성을 요구받게 된다. 텔레비전을 가진 가구가 극소수였던 과거와 달리 리모컨 단추 하나로 텔레비전과 쉽게 맞닿을 수 있는 오늘날, 방송의 공익성은 새롭게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최근 시청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방송의 과도한 폭력성이나 선정성이 사회문제로 비화되기도 하지만, 공익성 확보를 위한 방송사들의 노력은 안팎으로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공익성 확보의 주역은 바로 '시사·교양' 프로그램. 백종문(신방 85년졸) 동문은 다소 딱딱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공익'이란 화두를 시청자들에게 좀 더 유익하고 재미있게 풀어가려 노력한다. '딴따라'의 피가 흐르지 않는 프로듀서 문화방송(이하 MBC) 시사제작국 4CP 부장인 백 동문이 방송계에 첫 발을 내딛은 것은 지난 1985년. 군 제대 후 '놀만큼 놀았던' 과거를 청산하고 진로를 고민하던 중 언론사를 선택한 것이 계기였다고. 이후 MBC의 합격통지서를 받아든 그는 제작 프로듀서가 아닌 편성 프로듀서로 활동을 시작했다. 편성 프로듀서란 제작된 프로그램의 방영 여부, 방영 시간 등을 결정하는 중요한 자리. 그러나 입사 후 3년이 지날 때 즈음, 백 동문은 보직변경을 요청했다. 직접 프로그램 제작을 맡아보고 싶은 욕심이 더 컸기 때문이다. "PD에는 텔레비전, 텔레비전 제작, 라디오 제작, 편성 PD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3년 정도 편성 PD를 하고 나니 제작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시에 드라마, 예능, 시사교양 등의 분야가 있었는데, 결국 시사교양 제작을 택했습니다. 시사 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가 주는 매력이 컸고, 예능 분야엔 소질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아무래도 제 몸에는 '딴따라'의 피가 흐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웃음)" 백 동문의 이름 뒤에 따라다니는 직함은 'CP'이다. 일반인들에게 다소 생소할 수도 있는 이 직함은 Chief Producer의 약자로 일반 기업체의 부장에 해당하는 직위. 단일 프로그램을 맡는 담당 PD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총괄적으로 관리하고 행정적인 부분을 지원하는 책임 프로듀서의 위치다. 현재 백 동문이 맡고 있는 프로그램은 '와! e멋진세상'과 '타임머신'.두 프로그램 모두 시청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MBC 시사교양 분야의 간판 프로그램이다. 'PD수첩' 보람과 갈등 모두 안겨줘 "MBC 시사교양 프로그램들이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는 데에는 아마도 시청자들이 가장 원하고 필요해 하는 것, 즉 시청자 니즈(needs)에 대해 민감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PD수첩', 자연다큐멘터리, 아침방송 등 그런 면에서 강점을 보인다고 할 수 있죠. 또한 저희 시사제작국 제작진들이 유독 사회적으로 덜 오염되고 순수합니다. 물론 사회화가 덜 됐다는 평가를 내린다면 그것이 약점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자신의 소신을 밀어붙이는 강점이 있지요." 백 동문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은 바로 'PD수첩'. 백 동문에게 방송인으로서의 보람과 갈등을 모두 맛보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지난 92년부터 97년까지 약 70여 편을 제작하며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이 프로그램에서 그는 때로는 PD로서, 때로는 책임 프로듀서 겸 진행자로서 최선을 다했다고 회고한다. "PD수첩을 맡았을 때, 사회적 약자, 즉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서 방송하며 많은 시청자들이 박수를 쳐줄 때 제일 행복했습니다. 방송 후에도 '내가 진짜 방송을 했구나', '내가 그 사람들에게 눈곱만큼이라도 기여를 했구나' 하는 보람이 가장 컸죠. PD수첩의 주제가 억눌린 자들,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삼고 그것의 원인을 찾아 고발하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7년간 PD수첩을 맡으며 저만의 뿌듯함과 자신감으로 제 인생의 황금기를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시사 프로그램, 사회 갈등 해소의 역할 해야 시사 프로그램 제작의 전문가로 꼽히는 백 동문. 그는 시사프로그램은 시류를 잘못 읽으면 제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시사문제를 다루는 프로그램의 경우 다양성이 담보되고 그것을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중요한데, 백 동문이 보기에 최근의 시사 프로그램은 아직 개선해야 할 점이 많다는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는 개혁과 보수, 젊은층과 노년층 등의 대립적인 구도로 나눠지는 것 같습니다. 알게 모르게 편가르기가 심해졌다는 뜻이겠죠. 그러나 시사교양 프로그램, 또는 방송이 그런 시류만을 쫓아 갈등을 부추기거나 확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시사 프로그램은 우리 사회의 갈등을 풀어주는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것은 방송과 언론 전체의 몫이기도 하죠." 최근 백 동문은 교양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옮겨 시청자들에게 좀 더 편안히 다가가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한 달 전 MBC 내에서도 드라마 다음으로 시청률이 높다는 '타임머신'의 책임 프로듀서를 맡게 된 그는 시청률에 대한 부담이 아닌 다른 걱정이 앞선다고 말한다. 선정성과 지나친 과장 등 시청자들의 지적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 동문은 교양 프로그램답게 가족 모두가 즐겁게 볼 수 있는 '유익한'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하고 있다. "저는 항상 시청자들에게 재밌고 유익한 프로그램 만들어 제공하는 것을 최선의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너무 원론적이라고요? 하지만 그것이 공중파 방송 제작자의 기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본에 충실해야 그 다음 것을 바라볼 수 있겠죠. 더불어 방송 프로그램은 제작자 자신이 보기 위해 만드는 것이 아닌, 보여주기 위해서 만드는 일종의 제품과 같습니다. 교양 프로그램은 더욱 그렇죠. 즉 사람들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유익하고 재미있다면 그 프로그램은 충분히 사랑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뚜렷한 자기 목표, 성공의 지름길 백 동문은 프로듀서에 대해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장점이 가장 큰 직업이라 설명한다. 경치 좋은 관광지에서부터 이라크 전쟁 현장까지 많은 것을 보고, 겪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재미만이 프로듀서의 생활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은 아니라고 말한다. '시청자들이 만족하고 호응해 줄 수 있는 방송을 만들겠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고, 그것이 좋은 프로그램으로 평가받을 때야 비로소 일에 전념할 수 있는 진정한 힘이 나온다는 것이다. "요즘 방송국에 신입사원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자신의 다양한 끼를 곧잘 발휘하곤 합니다. 단조로운 모범생 스타일도 아닌, 그렇다고 노는 것만 밝히는 친구들도 아닙니다. 상황과 환경에 맞게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끼를 표출하곤 하죠. 그러나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뚜렷한 자기목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양인 여러분들도 일단 뚜렷한 목적을 갖고 열심히 노력하면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비단 방송이나 언론뿐만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서 목표를 분명히 잡고 정진하면, 처음 한두 번은 실패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엔 성공에 이를 것으로 확신합니다." 학력 및 약력 백종문 동문은 1978년 본교 신문방송학과에 입학, 1985년 졸업했다. MBC 입사 후 3년간 편성 PD로 활동했으며, 이후 제작 PD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1992년부터 1997년까지 MBC 간판 시사프로그램 'PD 수첩'의 제작 및 진행자로 활동했으며 언론인 해외 연수를 마친 2000년부터는 'PD 수첩'의 책임 프로듀서를 맡기도 했다. 이후 '피자의 아침'을 비롯한 다수의 시사·교양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했다. 현재는 수요일 저녁 7시 20분에 방송되는 '와! e멋진세상'과 일요일 저녁 10시 35분에 방영되는 '타임머신'의 책임 프로듀서를 담당하고 있다. 사진 : 이재룡 사진기자 ikikata@ihanyang.ac.kr

2003-04 01

[동문]형벌제도 구조조정 진두지휘하는 법무부 보호국장 정동기 동문

일반인들이 '형벌'이란 단어를 접할 때 흔히들 잔뜩 웅크린 채 창살 아래 들어앉은 재소자를 떠올리며 사회로부터의 철저한 '격리'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범죄자가 사회화가 덜 된 청소년이거나 정신병리학적으로 문제가 있을 경우 이 같은 '격리 조치'가 적절하지 않다는 것에는 이미 폭넓은 사회적 인식이 있다. 이런 경우 내려지는 조치가 바로 '보호관찰제도'이다. 교도소 수감이 오히려 부적절한 범죄자들을 '부작용' 없이 교화하는 방법으로서 운용되는 '보호관찰제도'는 최근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보안관찰제도'와는 언뜻 유사한 듯 하면서도 그 대상과 효과가 전혀 다르다는 측면에서 엄밀한 구분을 필요로 한다. '죄 짓지 않고 살아가는 평범한 소시민'들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도 있는 '보호관찰제도'를 관장하는 곳은 법무부 보호국. 그리고 이 법무부 보호국의 중심에는 본교 출신 최초 검사로 한양 법조계의 수장급으로 인정받는 정동기(법학 76년졸) 동문이 있다. 보호국장 임명된 '보호관찰제 박사' "보호관찰제도는 범죄인을 교도소 등에 보내지 않고 가정과 사회로 돌려보내 보호관찰관의 지도와 감독을 받게 하는 제도입니다. 일정 시간 무보수 봉사활동을 하게 하는 사회봉사명령, 약물남용치료와 교통사범 준법교육 등을 받게 하는 수강명령을 통해 교화·선도하는 최신 형사정책 수단 중의 하나죠. 보호관찰이라는 용어는 협의로는 보호관찰관의 지도·감독을 받는 자체 또는 그 활동을 의미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보호관찰과 사회봉사명령, 수강명령들을 포함한 광의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정 동문은 지난 12일, 본교 출신으로는 최초로 검사장 승진과 동시에 법무부 보호국장에 임명됐다. 모 일간지에서 보호관찰제도에 관한 박사학위 소지자인 정 동문이 보호국장에 임명되어 보호국 업무는 더욱 전문성을 띄게 됐다고 평가할 정도로 그의 능력은 대내외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지난 1987년 보호국 검사로 보호관찰 업무와 첫 인연을 맺은 뒤 15년이 지난 지금, 정 동문이 자신의 뜻을 펼칠 진정한 기회가 온 것이다. "보호관찰은 범죄인의 인권을 최대한 보장하면서도 재범을 효과적으로 방지함과 함께 범죄예방에 소요되는 국가 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는 가장 선진적인 형사정책입니다. 각각의 프로그램이 모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죠. 치료감호는 정신이상자와 같은 범죄자를 적절히 통제하기 위해서, 보호감호는 상습범을 대상으로 실시됩니다. 특히 보호관찰은 범죄자들이 교도소, 소년원 같은 곳에서 범죄 수법을 배우거나 출소 후 사회 부적응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매우 효과적입니다." 형벌제 구조조정의 본부 '법무부 보호국' 보호관찰제도는 1869년 미국 메사츄세츠 주에서 최초로 입법화된 이후 영국, 스웨덴, 일본, 독일 등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실시되며 그 효과가 널리 입증돼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호·치료감호가 지난 82년부터 실시됐고, 보호관찰은 지난 89년 7월 1일 전국 12개 보호관찰소와 6개 지소가 개청되며 소년범을 대상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정 동문은 보호관찰의 역사가 짧은 만큼 아직 넘어야할 산도 많은 것이 현실이라고 말한다. "사회인식 부족이 제일 아쉽습니다. 일반인들은 범죄자는 꼭 교도소에 가서 죄값을 치르고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나 교도소 수감 자체는 국가비용만 증가시킬 뿐 범죄자와 피범죄자 사이에 이득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특히 마약, 공공질서 문란 같은 사회적 범죄는 사회봉사로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보호국은 형벌제도의 구조조정을 이루는 곳입니다. 교도소 이외의 공간에서도 범죄자를 충분히 교화할 수 있다는 사회인식이 더욱 필요한 때입니다." 정 동문은 유독 '형벌의 양극화'를 강조한다. 범죄자가 자신의 범죄로 인한 개인 또는 사회가 입은 피해를 보상해야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개선의 여지가 있는 사람은 가급적 사회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와 인권을 최대한 존중하면서도 재범 가능성을 방지해 건전한 사회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줌으로써 더 밝은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보호국의 '존재이유'라고 정 동문은 역설한다. "제대로 된 보호관찰을 시행하기 위해서 계속적인 인력 충원과 시설 확충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현재 보호관찰관 1인당 300명 정도의 보호관찰대상자를 담당하고 있는 것을 1인당 75명 수준으로 줄일 것입니다. 또한 최근 소년원에서 영어, 인터넷 교육 등을 실시하는 것과 같이 보호행정의 전반에 있어서도 개선을 추진할 생각입니다. 소년원 들어가서 '사람 버렸다'라는 말이 아닌 '사람 됐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게 해야죠." '최초'의 수식은 '부담' 아닌 '원동력' 지난 81년, 본교 출신 첫 검사로 법조계에 입문한지 23년. 그러나 정 동문은 '최초'라는 말이 부담이 되기보다는 본교에 대한 자부심을 더욱 강하게 해주는 원동력이 된다고 말한다. 후배들이 많이 노력해 준 덕에 어디에서든 자신 있게 '한양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정 동문은 지금의 '한양인'이라면 어떤 분야에서도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한다. "학교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준 학교 당국과 후배들에게 항상 고맙습니다. 본교의 위상이 높아진 것은 학교 구성원 모두가 훌륭하게 제 몫을 다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공학, 법, 언론, 행정, 경제 모든 분야에서 경쟁력을 가지고 앞서나가는 모습을 보면 매우 흐뭇하고 자랑스럽습니다. 여러분들의 재능에 노력이 배가된다면 세계 제일의 대학이 되는 것도 문제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에 제가 도움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 돕고 싶습니다. 열심히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학력 및 약력 정동기 동문은 1976년 본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78년과 1998년 동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각각 받았다. 지난 1981년 서울지방검찰정 북부지청 검사를 시작으로 법무부를 비롯해 부산, 대구, 창원지방 검찰청에서 부장검사를 역임했으며, 지난 12일 검사장급인 법무부 보호국장으로 승진했다. 「사회봉사명령제도의 연구」 외 13편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캠브리지 대학에서 방문학자과정을 수료했다. 저서로 『보안처분제도론』이 있다.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2003-03 15

[동문]`선택된 소수 아닌 소외된 다수 위해`

국민참여 정부를 기치로 노무현 정부가 출범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의 일등공신이자 노무현 대통령 당선을 정치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일로 회상하는 추미애(법학 81년졸) 국회의원. '당당함이 아름다운 정치인'이라는 수식어를 가진 추미애 동문을 의원회관 414호에서 만났다. 낡은 정치 타파, 힘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판사라는 직업을 버리고 정치에 입문한지 만 9년, 이제 그녀는 자타가 공인하는 차세대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2002년 대통령 선거는 노무현 대통령의 진가를 세상에 알린 동시에 차세대 정치인 추미애를 세상에 알린 계기가 되기도 했다. 국민참여운동본부 대표로서, 희망돼지 엄마로서 지켜온 소신 있는 발언과 행동은 젊은 유권자들이 주축을 이룬 네티즌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힘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직접적인 접촉은 없지만 네티즌들이 인터넷을 통해 익명 또는 실명으로 다양한 의견을 주고 있습니다. 과거 국민은 추상적 집단이었지만 요사이 국민은 인터넷을 통해 의견 동향을 볼 수 있는 존재, 보이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 국민과 함께 원칙을 가지고 간다면, 소수 이익 집단이 저항하는 것은 시간이 가면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추 동문은 '정치발전 없이는 사법발전도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지난 1995년 9월 새정치국민회의 창당과 함께 당 부대변인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그녀는 입당 때부터 '학연·지연·혈연에 기반한 낡은 정치'와의 결별을 외쳤다. 그리고 그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그녀는 이번 선거에서 작은 희망을 보았다고. 유권자들이 고루한 지역적 사고를 극복하고 인물을 중요시하는,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지역 주민 대표 아닌 지역 유권자의 대표로 지방자치라는 말과 함께 지역 행정가를 주민의 손으로 선출한기 시작한지도 어언 8년.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자치 단체장 선거 때가 되면 행정관료와 정치인은 서로의 공을 챙기기에 바쁘다. 자신의 치적을 높여 민심을 얻기 위한 것이다. 행정관료는 모든 지역 문제 해결이 자신의 행정능력에서 비롯된 것처럼 말하고, 정치인은 자신의 로비가 중요했음을 강조한다. '무엇을 어떻게 왜' 보다는 '누가'가 논쟁의 핵심이다. 추 동문은 이러한 치적 싸움의 가치 없음을 지적한다. 정치인과 행정관료의 일은 엄연히 구분되어 있다는 것이다. "국회의원은 대의 정치에서 간접 민주정치를 실현하는 사람입니다. 지역이 전체에서 소외되었다면 지역 유권자의 대표로서 국회의원이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어야 하죠. 하지만 지역의 민원을 처리한다든지, 지방자치 단체장이 있는 상태에서 행정가의 일에 개입하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지역의 일은 행정가가 하는 것이죠. 지역일과 국정이 어느 정도 혼재된 상태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국회의원으로서 품위와 의무, 도덕성을 지키면서 일을 처리한다는 원칙을 가져야 합니다. 포퓰리즘에 의해 모든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려 하거나 권력을 행사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선택된 소수 아닌 소외된 다수를 생각한다 추 의원은 많은 매체들로부터 '원칙을 지키는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녀는 '원칙'이라는 단어를 그다지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이 맡은 위치에서 적당히 넘어갈 때 그것으로 인해 생길 부작용을 늘 경계하고 있다는 정도의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법관이나 국회의원 같은 지위는 그녀에게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제가 지금 하는 것은 정치입니다. 일반적으로 정치는 소수 상위계층 사람들보다는 하위층 즉 사회에서 소외된 다수에 의지하고자 하죠. 저는 이 다수를 생각하면서 행동하려 합니다. 사회적 형평성의 관점에서 소외계층의 힘을 보완해 주고 사회의 전체적인 균형을 맞추기 위한 거죠. 그것이 사안에 따라 인권일수도 있고, 잘못된 역사의 수정일수도 있습니다. 이런 가치들을 바르게 지켜나가는 것, 이것이 저의 원칙이라면 원칙일 것입니다. 저도 힘들면 적당히 넘어가고 싶을 때가 있죠.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생길 고통받는 사람과 부작용을 생각하면 그런 나태함이 수그러듭니다." 추 동문이 고집하는 이러한 올곧음은 그녀와 관련된 여러 기록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군사정권 시절, 판사로 재직하던 추 동문은 이념서적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양심에 따라 기각시켰고 즉심재판을 방청하는 정보과 형사에게 '즉심은 방청이 허용되지 않으니 나가라'고 호통을 쳤다는 일화를 가지고 있다. 정치인이 된 후에도 그녀의 원칙은 여러 정치적 사안에 적용되었다. 한총련 사건 수사과정에서 발생한 경찰의 여학생 성추행은 공개 추궁대상이 됐고 전자주민카드에 대해서는 정권 재창출 보다 중요한 것은 인권이라며 도입에 반대했다. 여성에게 주어지는 특혜 '또 다른 차별' 뿐 최초의 야당 여성 부대변인, 현직 판사 출신으로는 최초의 야당 정치인, 최초 지역구 재선 여성 국회의원 등 그녀를 수식하는 말에는 최초 혹은 여성이라는 수식어가 줄곧 함께한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지는 역할과 관심에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최초의 여성대통령 탄생과 관련한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여성의 출마 여부가 관심의 대상이 안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때도 여성에 대한 편견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여성이기 때문에 주목받는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 여성이 정당하게 평가받는 양성평등사회가 구현되길 하는 바램입니다." 그녀는 97년 대선에서도 여성에게 주어지는 '꽃'의 역할은 할 수 없다며 수석 대변인직을 고사했다. 추 의원의 여성관은 능력주의다. 여성이기 때문에 특별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 것. 남자든 여자든 능력에 따라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성(性)에 대한 원칙이다. 정치인의 제 1 덕목 '사명감' "출세의 도구나 수단으로 의원직을 탐내서는 안됩니다. 만약 그런 의도를 가지고 정치인이 되려한다면, 수단과 방법을 통해 그것을 취하는 순간 추구해야할 목표가 끝나 버리기 때문이죠. 자기 가치관을 주입하고 실천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사명감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열정적인 사명감은 그 일을 끝까지 그리고 열심히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사명감을 발견할 때 정치뿐만이 아니라 모든 일의 성취가 진지해지고 쉬워집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고 해야 되는 일과 이유를 찾는 것은 자동차의 시동을 거는 것과 같습니다. 일단 시동만 걸린다면 달리는 것은 어렵지 않겠죠?(웃음)" 추 동문에게 늘 바쁜 일상 속에서 스스로를 재충전 방법을 물었다. 여가 그 자체가 많이 부족하기에 시간이 날 때마다 그냥 독서를 한다는 답변이 되돌아온다. 육체적 휴식을 물었던 것에 지식의 부족함을 메우는 재충전을 답한 것이다. 다시 육체적 휴식방법을 묻자, 그녀는 출퇴근 차안에서의 단잠이 최고의 휴식이라고 답한다. 그녀가 분주한 만큼 세상이 더욱 많이 바뀔 것이라는 기대감에 마음이 흐뭇해진다. 정치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사회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각이 그토록 간절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의도에 가면 대한민국의 '작은 희망' 추미애를 만날 수 있다. 학력 및 약력 추미애 동문은 1981년 본교 법대를 졸업하고 1983년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1982년 제24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춘천지법, 광주고법 등지에서 판사로 재직했다. '정치발전 없이는 사법발전도 없다'는 생각으로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부대변인으로 정계에 입문, 같은 해 서울 광진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99년에는 홍콩 '아시아위크지' 선정 '새천년을 이끌어 갈 아시아의 젊은 지도자'에 선정되기도 했다. 1998년 한국유권자운동연합인 선정한 '국회의정활동' 행자위 최우수상을 받았다. 2000년 재선 후 2002년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으나 정치적 소신에 의해 사퇴했다.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2003-03 01

[동문]'IT 산업이요? 잘 달리는 말인데 더 잘 뛰게 해야죠'

60년대 후반, 텔레비전은 부의 상징이었다. 그 시절,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한 청년에게 고장난 텔레비전 한 세트가 전해졌다. 한양대 전자공학과 학생이라는 신분이 이웃집 아주머니에게는 전파상의 전문수리공보다 더 대단해 보였던 것일까? 난감한 상황 앞에 청년이 내린 결정은, 포기가 아닌 도전이었다. 그 길로 청계천 중고서점가로 달려가 한참만에 '텔레비전 수리서'를 찾은 청년은 고장난 흑백 텔레비전과의 씨름을 시작했다. 이 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청년의 도전은 쉼 없이 계속되어 왔다. 정보통신분야에서 도전과 끈기로 걸어온 30여 년의 세월, 한국전산원 지식정보기술단 단장 윤병남 동문(전자 75년졸)의 이야기이다. 지식정보사회의 개척자 대한민국을 세계 최대의 초고속인터넷 강국으로 끌어올린 핵심기관은 정보통신부 산하 한국전산원이었다. 지식정보사회의 개척자임을 자인하는 한국전산원은 1987년 설립되어 현재 산하 기구로 정보화기획단과 국가정보화센터, 정보화지원단 및 지식정보기술단을 운영하고 있다. 윤병남 동문이 현재 단장을 맡고 있는 지식정보기술단은 정보화 기술의 연구 및 정책 개발을 통해 국가정보화를 주도하는 핵심 브레인 집단이기도 하다. 지식정보기술단은 다시 산하에 정보화표준부, 정보기술감리부, 전자거래연구부 등을 두고 있다. 정보화표준부는 정보기술을 정보화 사업에 적용하는데 필요한 표준개발이 시행되는 곳이다. 정보기술감리부는 정보시스템감리제도의 발전과 감리 시행을 수행하고 있다. 점차 정보시스템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는 반면, 시스템 사고로 인한 정보누출도 그만큼 잦아졌다. 정보기술감리부는 이런 위험들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도록 한다. 전자거래연구부는 새로운 e-비지니스 모델의 연구 및 응용을 주도해 나가고 있는 곳. 특히 전자거래연구부는 지난 해 말 시작한 '소기업 네트워크 사업'으로 인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전국적인 초고속통신망을 가진 우리나라는 네트워크를 통한 무한한 사업 가능성이 그야말로 무궁무진합니다. 우리의 통신망은 정지된 화면의 이미지 뿐 아니라 동영상 이미지들을 실시간으로 충분히 제공할 수 있을 만큼 우수한 수준입니다. 이런 비디오가 기존의 글자와 소리보다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이런 토대 위에서 성립된 네트워크 사업이 이젠 대기업 뿐 아니라 소기업에서도 가능해졌습니다. 이제 동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기 전, 집안에 앉아 식당의 분위기 뿐 아니라 음식의 모양까지도 살펴볼 수 있게 됐습니다." 한국의 IT 성장은 '예견되었던 것' 1999년부터 국책사업인 초고속국가망 사업단장을 역임하고 있던 그에게 2001년은 뜻깊은 해였다. 21세기의 첫해인 2001년 윤 동문은 프랑스 파리에서 한국의 초고속인터넷망 개발과 정착, 보급에 대해 발표하는 기회를 가졌다. OECD의 공식초청에 의한 윤 동문의 발표를 통해 우리나라 초고속인터넷망에 대한 세계적 관심은 다시 한번 증폭되었다. 이 자리에서 많은 국가 대표들은 한국 초고속망의 급속한 성장과 그 비결에 대해 의아해 했다고. 이런 의문점에 대해 윤 동문의 답은 명료하다. 우리나라의 성장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인고의 시간 끝에 달성됐다는 것. "80년대 초 가격대비 성능이 세계최고인 TDX(전전자교환기)가 계발되었습니다. 이후 반도체산업 성장, CDMA의 세계 최초 상용화를 거쳐 초고속 인터넷 망 구축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는 지난 20년 간 한 순간의 쉼도 없이 기술을 쌓아왔습니다. 지난 월드컵과 아시안 게임을 기간 중에는 IMT2000을 소개하면서 IT강국임을 다시 한번 과시했습니다. 게다가 우리의 문화가 크게 알려지는 계기가 되어 대한민국이라는 브랜드의 가치를 높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유능한 국민들의 성실성과 애국심이 지난 20년 간 축적되어 만들어진 결과입니다." 지금의 결과가 한순간의 성과가 아닌 수년간 지속되어온 국가 전체의 성과임을 강조하는 윤 동문의 말에 자긍심이 가득하다. 이런 그의 긍지 뒤에는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뛰어 온 그의 땀방울이 있다. 윤 동문은 전국 일가구 일전화시대를 열었던 TDX 계발 연구를 주도한 핵심인사 중 한 사람이었다. 한국을 IT강국으로 성장시키는 시발점이 되었던 TDX의 계발에서부터 지금까지 윤 동문은 한국 정보화 사업에 있어 핵심 브레인의 위치를 고수해오고 있다. 타고난 노력가인 그의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일면이다. 잘 달리는 말, 더 잘 뛰게 해야 초고속인터넷망 보급률 세계 1위. 2001년 OECD 공표 이후로 우리나라의 초고속인터넷망 보급률은 끝없이 성장하고 있다. 이와 발 맞추어 신기술 개발도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너무 앞만 보고 달려 온 것이 문제였을까? 세계 여러 나라들로부터 초고속의 메카로 통하는 우리나라가 지금 인터넷초고속망 사업에 큰 고비를 맞고 있다. 전국 가구수의 70퍼센트에 달하는 초고속인터넷 이용 가구수로 인해 우리의 내수시장은 포화상태로 가고 있으며, 수많은 국가들이 우리의 성공을 추격해오고 있다. 더 높은 발전으로의 도약을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의 변화가 선두과제라고 윤 동문은 주장한다. "초고속인터넷망 산업에 새 변화를 창조하지 못하면 IT산업의 미래는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국내시장은 이미 포화상태이고, 해외시장은 아직 우리의 발전속도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의 IT산업 수출이 점차 늘고 있지만, 아직도 반도체, 초고속망 광케이블 등 일부 하드웨어 품목에만 치중해 있는 듯 합니다. 게다가 외부 경쟁체제가 더욱 가속화됨에 따라 선두에 선 우리의 지위는 시시각각 도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IT산업의 성장을 위해서는 소프트웨어 및 디지털콘텐츠 개발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새로운 변화를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윤 동문은 지금의 IT 강국 이미지를 인터넷컨텐츠에 연계시키면 새로운 기술발전의 도약이 가능할 것이라 말한다. 기술문제 이외에도 점차 늘어가는 정보 불평등, 사생활 침해 등의 사회문제 해결도 변화의 한 축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이미 이를 위한 국가의 다양한 정책들이 추진되고 있단다. 'IT를 통한 삶의 질 향상' 이란 신 정부의 정책기조를 보면 신 정부도 잘해내지 않겠냐고 윤 단장은 전망한다. '잘 달리는 말, 더 잘 뛰게 해야'며 IT산업의 부흥을 독려하는 윤 동문이지만, 성장의 이면에 땀흘린 엔지니어들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당부도 덧붙인다. "IMF의 성공적 극복에 IT산업이 큰 몫을 해 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IT산업의 급속한 수출 증대는 고용창출로 이어져 우리나라 경제 활성화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성과를 일궈낸 기술자들의 공로는 제대로 보상받지 못했습니다. 산업시대가 종식되고 새로운 정보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이제는 지식기반경제사회가 열렸습니다. 지식기술에 대한 저작권도 인정되고, 기술자들도 충분한 노력의 대가를 받아야 할 때가 왔습니다. 보다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도 이것은 필수과제입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본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이후 외국기업을 거쳐 한국전자통신원, 한국전산원에 근무하기까지 지난 오랜 시간동안 윤 동문은 꾸준히 외길만을 걷고 있다. 우리나라 정보통신사업의 산 증인으로 30여년을 살아온 그는 이젠 해외에서도 끊임없이 강연 요청에 시달리는 베테랑. 오늘의 그를 있게한 원동력을 물으니 '뚝심을 가지고 밀고 가는 것'이란 짧은 답변이 뒤따른다. "하고자 하는 분야를 꾸준히 뚝심 있게 밀고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어학능력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특히 인터넷의 세상에서 영어는 하나의 중요한 프로토콜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입니다. '돈을 잃으면 조금을 잃는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요,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건강이 우선되야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요?" 20년 동안 즐겨온 스키와 수영, 스킨스쿠버, 테니스 그리고 마라톤. 빠른 업무환경 변화와 격무로 잘 알려진 정보산업의 중심에서 지금까지 그를 지켜온 원동력은 자신의 몸을 위한 '부지런함'에 있었다. 이번 주에도 10Km 단축마라톤 코스를 완주할 예정이라며 흐뭇한 미소에 젖는 윤 동문. 인생이라는 마라톤을 쉼 없이 달려온 그가 매일 아침 고쳐 메는 것은 운동화 끈이 아닌 삶에 대한 '열정'이다. 학력 및 약력 윤병남 동문은 1975년 본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스페리유니벡사 컴퓨터하드웨어 엔지니어로 근무하다 삼성전자를 거쳐 한국전자통신원(ETRI)에 입사했다. 입사초기에 TDX 교환시스템 개발의 연구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한국전자통신원 근무시절인 1989년 청주대학교에서 정보통신학 석사학위를, 1997년에 충남대학교에서 전산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9년부터 국책사업인 초고속국가망 구축사업 사업단장으로 활동해 왔으며 한국전산원 국가정보화센터 단장을 거쳐 현재 지식기술사업단 단장을 역임하고 있다. 2001년 초고속국가망 구축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저서로 『지능망 기술』,『정보시스템 아웃소싱 방법론』등이 있다.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ayang.ac.kr

2003-02 22

[동문]`기자의 속성은 풍부한 호기심`

언론 비평 전문지인 미디어오늘은 신년호를 맞아 현직기자 3백 7명에게 존경하는 언론인을 물었다. 결과는 참담한 수준이었다. 전체 응답자의 과반수가 넘는 53.6퍼센트가 존경하는 언론인을 묻는 질문에 ‘잘 모른다' 즉 '없다'고 답한 것이다. 지사형 기자가 실종된 시대, 언론인 윤리보다 경영논리가 강조되는 시대이기에 후배들에게 늘상 '기자정신'을 강조했던 천관우 선생의 빈자리는 더욱 크게 다가온다. 임나일본부설의 허구성을 밝힌 사학자인 동시에 동아일보 해직기자출신 언론인 고 천관우 선생. 20여년 전에 군사정권 아래서도 소신 있는 기사로 언론인의 귀감이 된 그를 사표로, 30여년 동안 정론을 견지해온 언론인이 있다. 바로 최철주(화공 67년졸) 중앙일보 논설고문이다. 본교 출신 최초 중앙언론사 편집국장이자 총동문회가 선정한 '2002년 자랑스런 한양인'에 선정된 최 동문을 만나 그의 지나온 삶과 언론에 대한 생각을 들어 보았다. 이공계 출신 언론사 편집국장 60년대 학번들은 본교 공대를 최고의 위치로 올려놓은 세대이다. 60년대 말은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계획과 함께 공업입국이 국가의 목표로 제시됐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많은 인재들을 공대로 끌어들였고 공대 중심의 본교는 '명문사학'으로써 확고한 터전을 잡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화공과는 중화학공업 육성이라는 경제정책에 부응해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최고로 여겨지던 화공과를 졸업한 최 동문이 보장된 앞 길이 아닌 기자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궁금증에 대해 그는 '우연'이라는 단어로 기자가 된 사연을 설명한다. "졸업 후 럭키금성에 들어갔습니다. 회사의 권유로 제대 후 잠시 쉬고있던 어느 날, 우연히 중앙일보 수습기자를 모집하는 사고를 보았습니다. 당시는 언론인에 대한 생각보다는 제 자신의 지식 수준을 확인할 겸 시험삼아 지원했는데, 운 좋게 1, 2차를 통과했습니다. 면접에서 면접관이 공대을 나와서 왜 신문사를 지원했느냐고 물었을 때도 '그냥 하고 싶어 왔습니다'라고 했더니 더 이상 질문을 안 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틀렸구나' 했죠.(웃음) 그런데 합격을 했던 거죠. 그 때 생각했습니다. '나도 모르는 바람으로 인생이 바뀔 수가 있구나, 내 길이 이렇게 나타날 수 있구나'라고 말입니다." 쉬운 경제, 생활 속의 경제를 지향한다 최 동문은 지난 30여년 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해 왔다. 입사 후 10년간 동양방송에서 방송기자로 재직했던 최 동문은 80년 언론 통폐합 후 신문으로 자리를 옮겨 경제부 차장, 부장, 해외특파원, 논설위원, 편집국장의 지위를 두루 역임했다. 하지만 그는 다양한 지위 속에서 경제라는 일관된 화두를 풀어냈다. "사람들은 모든 사고나 행동에서 자기도 모르게 경제적인 판단을 하고 그 결과에 따라 움직입니다. 남자, 여자가 만나서 결혼하는 것도 '저 사람이 나와 같이 살면 행복하게 해주겠구나'라는 판단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물론 감성적인 부분도 있지만, 이성적인 이해타산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나쁜 의미의 이해타산이 아니라, 좋은 면에서 따지고 드는 겁니다. 이렇듯 모든 일에는 경제적인 요인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경제라는 용어를 쓰지 않지만 자기도 모르게 경제적인 결정을 하고 삽니다. 경제라는 것이 결코 딱딱한 숫자 나열이 아니다는 겁니다." 이러한 그의 신념은 수많은 최 동문의 기사와 편집국장 시절의 업적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지난 94년 논설위원 재직시 '성의 경제학'이라는 기획 칼럼을 연재, 독자들로부터 높은 호응을 얻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경제는 어렵고 딱딱한 것으로 치부되었기에 그의 숫자 없는 경제학은 독자들에게 더욱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이후 최 동문은 편집국장을 역임하면서, 종합일간지 최초로 중앙일보에 경제 섹션을 증면, 강화했다. 당시 파격적이라고까지 평가되었던 이러한 판단은 현재 중앙일보를 경제에 강한 일간지로 자리매김하는 결과를 이끌었다. "종합 일간지들을 보면 경제를 보는 시각이 합리적이지 못한 경우가 가끔씩 있습니다. 감성으로 경제의 한쪽 면만 본다든지, 경제를 한 부분만 보고 전달하거나, 해설하는 경우죠. 이런 풍토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고 경제기사를 정확하고 독자가 알기 쉽게 써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를 위해 자체적으로 경제관련 기자를 전문적으로 육성하고, 경제기사를 지면에 많이 반영했습니다. 자체 조사에 따르면 독자들 중 중앙일보를 보는 이유 가운데 경제관련 만족도에 관한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이후 저희신문은 독자에 부응하기 위해 더욱 경제기자 육성 및 섹션 강화해 신경을 씁니다. 이런 순환구조는 강점을 더욱 강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언론인의 제 1명제, '정론직필' 언론의 본질에 대한 질문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다양한 형식을 빌어 논의되어 왔다. 얼마 전 신문 기자로 변신한 도올 김용옥 선생은 자신의 의견을 과감하게 들어내는 형식의 '뉴 저널리즘'을 주창하기도 했다. 타당한 논거를 가진다면 자신의 의견을 주장해도 된다는 의견과 기자는 기자일 뿐이라는 입장 사이에서 지속된 오래된 논쟁에 대해 30여년 동안 펜을 잡아온 최 동문의 대답은 간결하면서도 명확했다. "문제는 있는 현상을 얼마만큼 정확하게 볼 수 있느냐는 겁니다. 자신의 의견이라는 것은 정확하게 보고, 전달한다는 것이 전제된 후에 논의될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겁니다. 정확하게 보기 위해서는 많은 자기 공부를 해야하고 여러 의견 또한 들어봐야 합니다. 그리고 대중들한테 정확하게 표현, 전달하기 위해서도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중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한쪽으로 편향된 보도를 하게 되는 거죠. 주장에 대한 논의는 이러한 것들이 모두 정확하게 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최 동문은 국내기자 뿐만 아니라 두 차례의 일본 특파원 생활, 해외 순환 특파원 등을 거치며 다양한 기획과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은 그에게 사실을 정확하게 보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절감하게 했다고 한다. 앞뒤좌우를 모두 살펴보아야 정확한 상황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듣는 측면이나 본 측면만을 전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에는 속보경쟁으로 인해 이러한 경우가 더욱 빈번해지고 있죠. 예를 들어 미국의 신용평가 기관이 우리 신용등급을 낮춘다는 전망이 있다고 할 때, 일차적으로는 그것이 속보로 들어와야 합니다. 하지만 직후에는 정확한 분석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기자 자신이 확실한 정보를 갖지 못한다면, 기사가 야당의 의견을 내거나 미국의 음모설에만 치우친다거나 또는 정부의 대변인 역할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자가 갖춰야 할 최대 덕목은 '호기심' 런닝타임 두 시간짜리 영화 한 시간만 보기, 신간서적 속독하기, 회사 근처 갤러리 둘러보기 등 짜투리 시간을 이용하는 최 동문의 취미는 다소 독특하다. 그의 이러한 취미는 신문기자로서 문화흐름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가 언제나 이렇듯 쫓기는 듯하게 취미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다른 취미는 산책이다. 여유 있을 때 자신의 집 근처나 인사동 뒷골목을 산책한다는 최 동문. 그는 그 곳들을 걸으며 사람 사는 모습을 보고 그 안에서 자신이 글로써 표현할 수 있는 부분들을 찾는다고 한다. 결국 이 역시 방법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글쓰기 준비작업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인 듯 하다. "저는 기자의 속성을 풍부한 호기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건이나 사물에 대해 무심코 넘어가지 않는 것이죠. 기자가 되기를 원하는 후배들이나 혹은 언론계에서 일 하기를 희망하는 후배들이 있다면 지독한 자기노력과 준비를 하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갈수록 언론사의 문이 좁아지기 때문에 평상시부터 사고의 폭과 견문을 넓히고 전문 분야에 대한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미디어라는 분야는 여러분의 젊음을 투자해 볼 만한 곳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편집국장을 지나 논설고문으로서 중앙일보를 이끌고 있는 최철주 동문. 자신의 본래 업무를 중요시하기에 외부 일을 최소화시킨다는 그이지만 두 가지 외부 직함을 더 가지고 있다. 중앙인사위원회 정책자문과 대통령 직속 농어촌 특별 위원회 위원이 그것. 자신이 언론인으로서 풀지 못했던 문제를 풀기 위해서 맡은 직함이라는 그의 설명을 들으며, 30여년을 언론계에서 보낸 최 동문의 호기심과 열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기사가 아닌 장문의 글로 독자를 만나고 싶다는 그이지만, 책 한 권 쓸 만큼의 여유가 최 동문에게 주어질 날이 아직 요원해 보이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학력 및 약력 최철주 동문은 1967년 본교 화공과를 졸업했다. 1970년 중앙일보사에 입사해 10년 동안 동양방송 TV기자를 거쳐 80년부터 중앙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해오고 있다. 해외특파원, 경제부 차장, 부장, 논설고문 등을 거쳐 지난 1999년부터 2001년까지 본교 최초로 중앙일간지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현재 중앙일보 논설고문으로 있으며, 한양언론인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한 최 동문은 지난 10일 '2002년 자랑스런 한양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2003-02 22

[동문]`금남의 벽을 깬다` 남자간호사협회장 김낙주 동문

' 간호사'라는 직업을 떠올리며 드는 첫 생각은 '여자', '섬세함', '부드러움' 정도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남녀평등을 넘어 양성평등의 시대가 도래한 요즘, 간호사라는 직업 역시 더 이상 금남(禁男)의 성역은 아니다. 선진국일수록 남자 간호부장의 수가 많다는 통계가 말해주듯 우리나라에서도 그 성역은 무너지고 있다. 본교가 배출한 첫 남자간호사 김낙주(간호 86년졸) 동문은 금남의 영역을 개척하기 시작한 1세대 남자간호사. 삼성서울병원 간호과장으로 남자간호사협회장을 맡아 활약 중인 김 동문을 만나보았다. - 간호학과에 입학하게 된 동기는? 직접적인 이유는 의대를 지원해 불합격하고 다음 순위인 간호학과에 합격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간호학과에 자신 있게 등록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르게 살고 싶다'는 욕구가 강했기 때문이다.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며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메리트였던 것 같다. - 본교의 첫 간호학과 남학생으로서 좋았던 점과 힘들었던 점이 있다면? 간호학과 최초 남학생이다 보니 많은 교수님들과 친해져 도움도 많이 받았다. 교양수업의 교수님들도 나를 기억해 주시고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시 동기생도 없었고 후배 역시 없어 힘들었다. 남들의 눈을 의식해 자격지심이 생기기도 해 학교생활의 폭을 넓히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또 나름대로 유명인사가 되다보니 대리출석은 생각지도 못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웃음) - 학부 시절 단과대 부학생회장에 입후보했다 중도하차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당시 의과대 선거는 정학생회장은 의예과에서, 부학생회장은 간호학과에서 한 명씩 출마했다. 그런데 간호학과에서 한 명밖에 없는 남자가 출마한다고 하니 주위의 시선이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당시엔 사람들이 나를 간호학과 학생이 아닌 그냥 남자로만 생각했던 것 같다. 많이 아쉬운 일이었지만 한 조직의 대표의 자리에 성을 구분하는 일은 앞으로도 없어져야 한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역할에 대한 능력이 우선되야 할 것이다. - 남자간호사협회는 어떤 단체인가? 남자간호사협회는 지난 92년 250여명의 남자간호사들이 모여 창립한 단체다. 현재 125명이 정식회원으로 등록되어있지만 실제는 2000여명의 남자 간호사가 현직에서 일하고 있다. 지금 회장직을 맡고 있는 것은 지난 99년부터이고 올해로 4년째를 맡는다. 지난해 12월에는 홈페이지(www.mannurse.com)를 개설했고, 오는 3월 15일에 8차 창립총회를 갖는다. 아직 활동이 미약하지만 계속 성장하리라고 본다. - 남자간호사 만의 장점이 있다면? 먼저 환자들에게 주는 신뢰가 더 높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성 환자들의 경우 같은 여성보다는 남자 간호사에게 더 큰 믿음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 또한 기술적 부분에 경쟁력이 뛰어나다. 아직은 마취, 수술실, 인공신장실, 정신과 등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지만 활동 분야는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예전과 같은 선입견이나 편견도 많이 사라져 조만간 산부인과에서도 남자간호사를 볼 수 있는 날이 올 것으로 본다. - 간호학을 공부하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예전과 달리 본인의 의사로 간호학과에 진학하는 학생들이 많아진 것으로 알고있다. 그만큼 간호학의 비전이 높이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미래사회에서 간호학은 인간을 탐구, 연구하고 생명을 살리는데 있어 핵심적인 분야가 될 것이고, 이에 따라 양성평등의 사회에서 남자 간호사의 역할 역시 매우 중요하다. 후배들이 자신을 가지고 성실히 공부해 좋은 간호사가 되길 바란다. - 본교에서 간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곧 박사 과정에 들어간다고 하는데. 후배들에게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었으면 하기 때문이다. 나에겐 배우고 닮고 싶은 모델이 없었다. 말하자면 남자간호사로써 닮고 싶은 샘플이 되고 싶다. 내년 경에 박사과정을 시작할 생각이다. 박사를 마친 후엔 간호학과의 임상교수가 되고 싶다. 의예과는 교수가 임상과 수업을 병행해 과목에 현실감이 있지만, 간호학과는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살아 있는 현장의 지식을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다. 사진 : 박용일 학생기자 jajunation@iha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