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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 02

[교수]세모난 집 '시선재'를 짓다

건축가는 건물을 설계하고 짓기까지의 전 과정에 참여한다. 의뢰인의 요구를 지키는 동시에 건축물에 자신만의 가치를 담아내는 것이 건축가의 중요 임무다. 서현 교수(건축학부)는 제주도 서귀포시에 지은 삼각형 모양의 주택 ‘시선재’를 통해 새로운 건축을 만들어 보였다. 시선재를 지은 과정과 이에 담긴 가치는 서 교수의 신간 <건축가 서현의 세모난 집짓기>에 고스란히 담겼다. ‘시선재’를 짓기까지, 건축가 서현의 첫 ‘집 짓기’ 책 ▲ 서현 교수(건축학부)를 지난 22일 연구실에서 만나 '시선재'와 <건축가 서현의 세모난 집짓기>에 담긴 이야기를 들었다. 서현 교수는 건축과 사회의 소통을 고민하는 건축가이자 한양대 건축학부의 대표 교수다. ‘효형출판 사옥’, ‘김천상공회의소’, ‘해심헌’, ‘건원재’ 등을 설계했으며 해심헌은 ‘아름다운 제주 건축 7선’에 선정된 바 있다. 스테디 셀러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등 7권의 저작을 펴낸 서 교수. 지난 15일에 신간 <건축가 서현의 세모난 집짓기>가 출간됐다. 서 교수가 지은 ‘시선재’의 설계부터 시공까지 세세히 기록한 첫 번째 집 짓기 책이다. 서 교수는 “이 책을 통해 건축가의 역할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건축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은 건축가를 공학 지식을 갖춘 기술자쯤으로 생각하기 쉽다. 국내 여러 대학의 건축학부가 공과대학에 속해 있단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사실 건축학을 공대에서 배우는 곳은 동아시아뿐이에요.” 서 교수는 건축학이 공학의 하위 학문이 아니라 말한다. “건축가라면 공학, 인문학, 자연과학 등을 다 조금씩 알아야 해요.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지만, 여러 분야를 두루두루 알아야 건축에 활용할 수 있죠.” 서 교수의 ‘건원재’가 그런 작품이다. 건원재는 충남 공주에 위치한 주택으로 ‘둥근 하늘이 있는 집’이란 뜻을 가졌다. “건원재 중앙엔 동그란 천장이 있어서 1년에 2번, 춘분과 추분에 햇볕이 벽에 동그랗게 들어와요. 절기를 고려해 설계한 결과죠.” 서 교수의 이번 책에는 건축가의 역할과 고민이 도면과 스케치 등의 시각 자료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건축물을 홍보하기 위해 쓴 책은 아니에요. 홍보라면 언론이나 잡지에 알리는 편이 더 예쁘게 나오죠. 그보다는 이번 건물을 지은 과정에 대해 말하고 싶었어요.” 서 교수는 “건축가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며 “건축학 전공자에겐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다른 이들에겐 건축가가 어떤 일을 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건축가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아요. 지휘자를 보고 ‘연주는 안하고 봉만 흔드는 사람’이라 오해할 수 있지만, 오케스트라가 무대에 오르기까지 지휘자의 역할은 엄청나죠. 건축가도 마찬가집니다.” 건물에 가치 담는 것이 건축가의 일 ▲ '시선재'는 바닷가를 향하는 모서리가 유리로 돼있어 쉽 게 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 서현 교수는 "의뢰인이 '자신에 게 주는 선물'이기에 지금처럼 독특하게 만들었다.고 말한 다. (출처: 서현 교수) 그렇다면 ‘시선재’는 어떤 공간일까. 시선재는 삼각 기둥 형태의 건축물로 한 모서리가 바다를 향하고 있다. 의뢰인 부부는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 같은 집을 부탁했다. “선물이라면 그 안에 의미가 있어야 하잖아요. 처음부터 평범한 아파트와는 다른 공간을 짓기로 결정했죠.” 시선재는 특별한 집을 원하는 의뢰인의 의견과 독특한 부지 모양을 살려 삼각 기둥 형태가 됐다. 그러나 특이한 점은 외관만이 아니다. 시선재의 창문은 바닷가를 향해 난 ‘모서리’에 있다. 이렇게 모서리에 창문을 낸 것은 바다와 더 가깝게 느껴지게 한 것이라고 한다. “창문을 모서리에 내면 설계가 어려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물이니까’ 어려워도 시도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죠. 해결책을 강구한 끝에 건물을 완공할 수 있었어요.” 서 교수는 건축물에 가치를 담는 것이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시선재는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가치를 최우선으로 고려했다. “건축물에 어떤 가치를 부여할 것인가는 매번 달라져요. 주택의 경우 거주자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원하는지에 따라서죠.” 서 교수는 이런 건축을 위해서는 다양한 배경 지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예컨대 연구실을 짓는 경우에도 그 분야에 대한 공부가 필요합니다. 인문학을 연구하는 이와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이의 연구 방식이 다를 테니까요. 각자의 연구 방식에 대해 아는 것이 이들을 위한 공간을 짓는데 큰 도움이 되죠.” 건축물이 기본적으로 생활 공간이란 점도 잊지 않아야 한다. “자동차를 만드는 데 바퀴를 삼각형으로 만들고 범퍼도 공기 저항을 크게 받게 만들어 놓으면 예쁘다 한들 아무도 타지 않습니다. 건물도 그래요. 생활에 불편함이 없어야 합니다. 이것을 간과한 건축물은 가치가 담겼다고 볼 수가 없어요.” 그런 면에서 서 교수는 이화여대 ECC를 좋은 건축으로 뽑았다. “ECC가 훌륭한 이유는 공간을 매우 잘 활용했단 점 때문이에요. 일반적인 건축물은 길을 막을 수 밖에 없는데, ECC는 길을 막지 않고 양 옆에 여러 공간을 수용했죠. 때문에 버려지는 곳이 없어요.” 미적 요소만큼 실용성이 중요하단 것이 서 교수의 설명이다. 건축가로서 인정받고 싶어 서 교수는 “공간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게 건축가의 일”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건축물로 자신의 철학을 증명하고 싶다. “지금까지 7권의 책을 펴내며 건축에 관한 좋은 책을 쓰겠다는 목표는 이룬 것 같아요. 하지만 건축가로는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건축물로도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 그의 바람이다. “책으로 보여준 것에 걸맞은 건축물을 짓고 싶어요. 후배들이, 제자들이 그 가치를 인정하는 건물을 짓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매 작업마다 고민을 게을리 하지 않는 서 교수. 그의 목표는 언제나 ‘좋은 건물’이다. ▲ "건축가로서 부족하다"고 말하는 서현 교수지만 그의 건축물인 시선재는 주변 환경과 어우러지는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출처 : 서현 교수) 글/ 이상호 기자 ta4tsg@hanyang.ac.kr (☜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2016-07 12

[교수]사람을 위한 건축, '정답' 대신 '좋은 선택'이 있을 뿐!

안기현 교수(건축학부)는 “건축물은 의뢰인, 건축가, 시공사 세 주체의 합작”이라고 말한다. 의뢰인은 자신이 꿈꾸던 건축물을 건축가에게 설명하고, 건축가는 아이디어를 발휘해 건축물을 디자인한다. 시공사는 건축가의 의도에 가장 잘 부합하는 건물을 짓기 위해 노력한다. 건축물 하나에 그들의 꿈과 아이디어, 땀방울이 모두 담겨있다. 건축가라는 이름으로 그 일부분을 담당하는 안기현 교수가 ‘2016 젊은 건축가상’을 수상했다. 에이앤엘 스튜디오, 2016년 대표하는 젊은 건축가로 ▲ 안기현 교수(건축학부)와 지난 4일 진행한 인터 뷰에서 신민재 동문(건축공학부 96)과 함께 진행한 30개의 건축 프로젝트에 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 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2008년부터 매년 재능 있는 젊은 건축가를 선정해 ‘젊은 건축가상’을 수여하고 있다. 건축사 자격증을 취득한 만 45세 이하의 건축가가 대상이다. 개인 또는 팀의 작업물을 담은 포트폴리오를 제출하면 심사를 통해 3팀을 최종 선발한다. 안기현 교수는 건축사무소 ‘에이앤엘 스튜디오(AnLStudio)’를 함께 운영 중인 신민재 동문(건축공학부 96)과 한 팀이 돼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번 수상은 3번의 도전 끝에 찾아온 결실이다. “지난 2번 모두 최종단계에서 탈락했어요. 3번째 도전을 한 이유는 상 자체보다 공모전을 준비하는 과정에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죠. 지금까지의 프로젝트를 정리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구상하는 뜻깊은 시간이에요.” 에이앤엘 스튜디오 팀은 2010년부터 진행했던 30개의 건축 프로젝트를 재건축(Re-build), 재조직(Re-organize), 재점유(Re-occupy), 재생산(Re-generate), 재공공화(Re-public), 재계획(Re-program)의 6개 항목으로 나눠 소개했다. 공간을 재조명해 통념을 깨는 건축물을 짓는 것이 안 교수만의 특징이다. 양 층의 창문이 하나로 연결돼 위아래에서 빛이 들어오는 건축물 ‘다공(DAGONG)’, 판교 지역의 주차부족 문제 해결을 위해 지하에 주차장을 마련한 주택 ‘팝 하우스(POP HOUSE)’, 주거 공간에 다른 역할을 부여한 ‘홈오피스’와 ‘홈갤러리’ 등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또 무대 설치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설립한 이동형 구조체 ‘퍼레이드 온(PARADE-ON)’, 의자와 페인팅을 통해 공간에 활기를 불어넣은 ‘오쏘 벤치(ORTHO BENCH)’ 등 공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사례도 있다. “공간을 창의적으로 조직했을뿐 아니라 건축생산에 관련된 이해당사자 모두에게 열린 플랫폼을 제공했다”는 평가다. 사람을 위한 건축을 꿈꾸다 안 교수는 중학교 시절 TV 프로그램에 등장한 건축가의 모습을 보고 지금의 꿈을 갖게 됐다. “어릴 적부터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어요. 아버지께서 건축 관련 직종에 계셔서 어릴 적부터 건축을 접한 것도 큰 영향을 미쳤죠.” 안 교수는 건축가로서 본인만의 색깔을 찾기 위해 노력 중이다. “학교, 미술관, 병원 등 다양한 기능을 가진 공간을 디자인하고 싶어요. 그 과정에서 저만의 색깔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죠.” 이를 위해 만화, 소설, TV 프로그램, 영화 등 일상의 모든 곳에서 건축에 대한 영감을 얻고자 노력한다. “영감이 될 만한 사진이나 그림을 보면 기억해 두기도 하고 삽화가 나오지 않는 소설책을 읽으며 상상을 통해 영감을 얻으려 노력해요.” ▲ 1. 양 층의 창문이 하나로 연결된 건축물 ‘다공(DAGONG)’ 2. 지하에 주차장을 마련한 주택 ‘팝 하우스(POP HOUSE) 3. 이동형 무대 구조체 ‘퍼레이드 온(PARADE-ON)’ 4. 주차공간을 이용한 무대 '드림스테이지(DREAMSTAGE)' (출처: 안기현 교수) “건축이란 사람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만드는 거예요. 사람들이 건축물 안에서 행복하고 즐겁게 생활할 수 있도록 디자인하는 게 가장 중요하죠.” 안 교수의 말이다. 이처럼 ‘사람을 위한 건축’이 모토라는 안 교수는 의뢰인과 자신의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이 건축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이기 때문. “평생 살 집을 짓는 것이기 때문에 의뢰인의 의견을 가장 중시하죠. 거기에 저희의 아이디어를 보태 디자인을 하곤 하는데, 의뢰인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는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과정이 힘들 때도 있어요.” 건축 디자인, ‘정답’ 대신 ‘선택’ 있을 뿐 안 교수는 “건축 디자인에는 정답이 없고 선택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자신도 많은 것을 배운다고. “제가 학생들 작품에 피드백을 하기도 하고, 학생들이 제 작품에 피드백을 하기도 해요. 그 과정에서 ‘좋은 선택’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게 되죠.” 건축은 트렌드에 따라 풍토가 빠르게 바뀌는 분야라 끊임 없이 고민하고 발전을 꾀해야 한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진 학생들과 소통하는 시간이 안 교수에게 중요한 이유다. 안 교수는 재능이 부족하다고 건축가의 꿈을 쉽게 포기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타고난 재능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위치에 가기 위한 끊임 없는 노력이 더 중요해요” 훌륭한 건축가이자 지도자가 되길 꿈꾸는 안 교수는 자신의 삶이 언제나 건축과 함께하길 소망한다. ▲ 안 교수가 '퍼레이드 온(PARADE-ON)' 모형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글/ 최연재 기자 cyj0914@hanyang.ac.kr (☜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사진/ 문하나 기자 onlyoneluna@hanyang.ac.kr

2016-07 06

[교수]만화를 좋아하던 아이, 만화로 설명하는 과학자 되다

어린 시절엔 <꺼벙이>와 <철인 캉타우>를 좋아했다. <머털도사>를 그린 이두호 화백과 <맹꽁이 서당>으로 유명한 윤승운 화백은 신인철 교수(생명과학과)의 영웅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취미로 만화를 그렸던 그는 과학자가 된 지금도 만화를 그린다. 대학원생 때부터 만화를 연재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일반생물학을 쉽게 익힐 수 있는 <생물학 신(新) 완전정복>을 출간했다. 만화에 대한 애정을 꺾지 않고 이어온 신 교수를 만나봤다. 무겁지 않게 만화로 ▲ 신인철 교수(생명과학과)와 지난 6월 22일 신인 철 교수의 연구실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신인 철 교수는 최근 '카툰 콜리지'의 두번째 시리즈 <생 물학 신 완전정복>을 출간했다. 신 교수가 이번에 출간한 <생물학 신 완전정복>은 작년 3월에 출간한 <카툰 콜리지 분자세포생물학>에 이은 <카툰 콜리지> 두 번째 시리즈다. <카툰 콜리지>는 만화 위주의 대학교재다. “제가 원래 만화를 많이 좋아합니다. 그래서 수업에 만화를 활용하곤 했죠. 학생들이 ‘만화로 설명하면 이해가 쉽다’ 그러더군요. 이를 책으로 만들어 학생들이 과목의 전반적인 흐름을 파악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대학교재를 만화로 구성한 것은 <카툰 콜리지>가 세계 최초다. “첫 번째 책은 전공과목 교재로 쓰고 있어요. 두 번째 책은 생화학에 관해서 쓰려고 했는데 동료 교수님께서 교양과목 교재 제작을 제안하셔서 생물학 신 완전정복부터 만들었죠. 교양과목 수준으로 중고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생물학 신 완전정복>에는 ‘세포분열’과 같은 기본 개념부터 ‘신종플루’, ‘사스(SARS)’, ‘메르스(MERS)’와 같이 최근 화두인 주제들까지 수록돼 생물학을 아예 몰랐던 사람도 흥미롭게 읽어나갈 수 있다.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내용이 신 교수가 직접 그린 만화로 돼있다는 점이다.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운 게 아니라서 미숙하다는 의견도 있어요. 하지만 개성 있게 봐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꼭 직접 그리려고 하고 있죠.”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는 것 보다 직접 그리는 것이 효과적이라 생각하는 신 교수. “사랑하는 사람에게 얘기할 때 통역사가 있으면 전달력이 떨어지잖아요. 그림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하고 싶은 얘기를 직접 하는 것엔 엄청난 이점이 있죠.” 말이 다른 사람의 언어로 번역되면 의미가 퇴색하듯, 만화도 그러하다고 믿는 신 교수는 직접 만화를 그리기 위해서 1인 출판사를 통해 책을 출간했다. “1인 출판사를 통하다 보니 금전적인 제약은 있어요. 그래도 제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 만족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사랑한 만화 사실 신 교수가 만화를 그린 것은 카툰 콜리지가 처음이 아니다. “어릴 적부터 만화를 좋아해서 ‘꺼벙이’나 ‘철인 캉타우’ 등을 보고 따라 그리기도 하고 내용을 직접 구상해서 그리기도 했어요.” 직접 그린 만화를 친구들과 함께 보곤 했다. 그러나 우선은 과학자가 된 신 교수. 카이스트 1회 졸업생으로서 카이스트 석박사 학위까지 받았을 만큼 과학에 조예가 깊던 학생이었다. “만화를 좋아했지만 직업까지는 엄두를 못 냈어요. 대신 주변 사물에 대한 관찰을 좋아하던 습성 덕에 과학자가 된 듯해요.” 그런 그가 좋아하는 만화를 본격적으로 내보인 것은 대학원 시절부터다. “교수님 권유로 ‘분자생물학뉴스’라는 학회 뉴스레터에 <대학원생 블루스>를 연재하기 시작했어요. 대중들한테 잘 알려지지 않은 대학원생들의 애환과 소소한 유머들을 담았죠.” 대학원생이었기에 더 선명하게 그릴 수 있었던 대학원생들의 이야기. 블루스라는 제목은 과학자들의 삶이 알려진 것처럼 마냥 밝지만은 않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대학원생 블루스>를 연재할 당시에는 과학자에 대한 환상이 많이 퍼져있었어요. 대학원에 와서 환상이 깨진 사람이 많습니다. 진짜 하고 싶은 사람이 사정을 알고 왔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죠.” 언론 등에서 보여주지 못한 이면을 담고 싶은 바램이 담긴 제목인 셈이다. 블루스 시리즈는 <대학원생 블루스>를 4년간 연재한 이후 웹진으로 옮겨 <포닭 블루스>, <조교수 블루스>로 계속 연재 되고 있다. ▲ 신인철 교수는 '카툰 콜리지' 외에도 과학도들의 애환을 담은 '조교수 블루스'를 연재 중이다. 사진은 '조교수 블루스'의 한 장면 (출처 : 신인철 교수) 더 나아가려는 자세 신 교수는 현재 카툰 콜리지의 다음 시리즈를 준비하고 있다. 이번에는 생화학에 관해 그릴 계획이다. 완벽한 만화를 위해 여러가지 것들을 배우고 있다. “그림체를 지적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조금씩 배우고 있어요. 다음 작품이 생화학과 관련되다 보니까 분자 구조를 그리려고 컴퓨터 프로그램도 배우고 있어요.” 해외 시장 진출 계획도 있다. 신 교수는 “미국이나 일본 시장에서 출판 논의가 있다”며 “아직 번역 문제도 있어 진행이 더디지만 잘 진행돼서 하나의 컨텐츠로 발전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만화를 그리는 교수로서, 학생들도 남들이 안 하고 있는 새로운 영역을 찾아갈 수 있기를 권한다. “기존의 것을 따라하는 것만으론 큰 의미를 만들기 어려워요. 교수가 만화를 그리듯, 젊은 학생들도 새로운 필드를 개척해나갔으면 좋겠어요.” 기존의 틀에 갇혀서는 그 틀 안의 것만 재생산할 수 밖에 없다. 신 교수의 만화는 어려운 생물학을 설명하는 동시에, 우리에게 어려운 삶을 풀어나가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 신인철 교수는 "기존의 것을 따라하는 것만으론 큰 의미를 만들기 어렵다"며 남들이 하지 않은 것을 해보기를 권한다. 글/ 이상호 기자 ta4tsg@hanyang.ac.kr 사진/ 최민주 기자 lovelymin12@hanyang.ac.kr

2016-06 08

[교수]한양대 77주년 백남석학상의 주인공을 만나다

한양대 77주년 개교기념식이 지난 5월 13일 백남음악관에서 열렸다. 행사에서는 한양의 발전에 일조한 이들을 위해 다양한 시상이 진행됐다. 그 중에서도 고(故) 백남 김연준 박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백남석학상’은 단연 돋보였다. 올해로 4회째를 맞은 백남석학상은 일생을 교육 사업에 전념한 김연준 박사의 정신을 잇는다는 점에서 한양의 ‘학술적 가치’를 대표하는 상이다. 수상의 영예는 배기동 교수(문화인류학과)에게 돌아갔다. 이번 수상을 통해 배 교수는 고고학자로서의 우수한 성과를 다시 한번 인정받게 됐다. 자카르타 출장에서 막 돌아온 배 교수를 만났다. 백남의 정신을 아로새기다 ▲ 배기동 교수(문화인류학과)는 지난 5월 13일 백 남음악관에서 열린 77주년 개교기념식에서 '백남석 학상'을 수상했다. 백남석학상의 주인공이 된 배 교수는 어려서부터 ‘수집’에 관심이 많았다. 물건에 붙은 상표란 상표는 다 떼어서 집에 가져왔다. 더 많은 수집품에 대한 욕구가 자연스레 여행으로 이어졌고, 여행지를 다닐 때면 그 지역의 문화에 대해 사색에 빠지기 일쑤였다. “일찍부터 다양한 문화에 대해 공부하는 길을 가기로 마음 먹었죠. 새로운 영역에 계속 도전할 수 있는 ‘고고학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배 교수는 당시 국내 유일의 서울대 고고인류학과로 진학했다. 졸업 후 미국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전곡리 발굴현장 책임자를 비롯한 여러 현장 경험을 토대로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다. 이번 수상에 대해 배 교수는 “더 훌륭하신 분들이 많은데 죄송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겸손한 수상 소감과 달리, 배 교수는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고고학계 최고 권위자다. 배 교수는 ‘학술 연구’와 ‘사회 활동’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단 평가를 받는다. 이번 수상에도 그런 부분이 유리하게 작용했다. “선사시대 유적지나 유물 등 형태가 있는 ‘물질 문화’를 다뤘습니다. 역사 유적 발굴과 같은 고고학적 자료에, DNA 정보를 중심으로 한 유전학 검증 방법을 도입하는 융합연구를 진행했죠.” 연구 주제에 대한 배 교수의 설명. 지금까지 써낸 논문만 해도 50여편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배 교수는 일찍이 박물관 분야에 종사하며 우리 문화의 사회적 전파에 앞장섰다. “박물관은 일종의 ‘문화봉사’ 기관이에요. 시민들에게 우리 유산과 유적을 알리는 일을 했죠.” 현재는 한양대 문화재연구소장과 국제박물관협의회 한국위원회 의장 등을 역임하고 있는 그다. 고고학계에 새로운 지평을 열다 ▲ 국내 고고학계에 새로운 지평을 연 배기동 교수 와 지난 5월 27일 국제문화대학 4층 연구실에서 만 나 고고학자로서의 인생에 대해 들었다. 배 교수의 경력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은 연천 전곡리 유물을 발굴한 것이다. 1978년 전곡리에서는 동아시아 최초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전기 구석기의 대표적인 석기로 고(古)인류 진화 과정에 중요한 단서가 됨)가 발견됐다. 이 사실은 고고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때 배 교수는 발굴현장 책임자(field master)의 역할을 수행했다. 고고학자로서 찾아온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역사의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전곡리임에도, 역사시대 고분이나 건물 터처럼 화려한 유적이 없어 일반인들이 그 중요성을 알기는 다소 어려웠다. “유적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황량한 벌판을 보고 발걸음을 돌려 돌아가기 일쑤였어요.” 이에 배 교수는 구석기 유적지를 토대로 하나의 축제를 기획했다. ‘전곡리안의 귀환’이란 주제로 한반도를 포함한 전 세계의 구석기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학습형 축제를 만든 것. 이것이 올해로 24회를 맞는 ‘연천 구석기 축제’다. 그의 노력을 통해 전곡리 구석기 유적지는 연 평균 100만 명에 이르는 관광객이 찾는 유적지로 자리매김했다. 문화재를 발굴하고 이를 대중화하는 데 앞장섰던 배 교수의 면모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최근에는 전곡리 유적지를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시키기 위한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가고 있다. “세계적인 유산으로 만들어야죠. 과학적으로 좀 더 체계적인 분석을 통해 세계를 이해시키는 일이 남았어요.” 고고학자로서 책임 다한다 어느덧 배 교수의 고고학 인생은 종착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고고학자로서 할 일은 다했다고 봐요. 유적을 발굴해내고, 그것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렸죠.” 그러나 당분간 배 교수의 시간은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옛 당나라와 신라를 이어주는 항구였던 당성 지역(화성)과 국내에 보유 중인 외국 문화재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다. 고고학 지식 전수에 대한 한국형 모델도 구상하고 있어 머릿속이 바쁘다. 인내와 끈기의 상징과도 같은 고고학 분야에 인생을 건 배기동 교수. 그가 택한 길에 ‘멈춤’이란 표지판은 없는 듯 하다. ▲ 전곡선사박물관에 전시된 주먹도끼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배기동 교수의 모습. 배 교수가 발굴한 유적지와 유물이 존재하는 한 고고학에 대한 그의 열정도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출처: 조선뉴스프레스) 글/ 김상연 기자 ksy1442@hanyang.ac.kr (☜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사진/ 김윤수 기자 rladbstn625@hanyang.ac.kr

2016-05 11

[교수]프레임 안에 담아내는 건축의 미학

건축물엔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의미가 함께 담긴다. 건축이 공학이면서 동시에 예술인 이유다. 단순히 공학 지식을 익히는 것만으로는 건축의 본질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때문에 이강업 교수(건축학부)는 40여 년의 세월 동안 사진 속에 건축물의 사회문화적 의미를 함께 담고자 노력했다. 건축을 이해한 만큼 사진에 담을 수 있다는 그다. 건축과 사진, 그 사이에서 때론 백 가지의 이론보다 한 장의 사진이 더 크게 와 닿는 법. 조형미술을 다루는 건축학에선 특히 사진 자료가 중요하다. 대부분의 건축학 교수들은 사진작가들이 찍은 기존의 건축물 사진을 활용해 강의한다. 하지만 한양대에서 건축학을 강의하는 이강업 교수는 본인이 직접 찍은 수 백장의 사진을 이용해 강의한다. 직접 바라본 건축물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학생들에게 그 감상을 전한다. 이 교수는 “학생들에게 건축의 미학을 더욱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단 장점이 있다”고 했다. 이 교수가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40여 년 전 미국 유학시절부터다. 버클리대학교에서 건축학을 공부하며 당시 교수에게서 사진 찍는 법을 배웠다. 그 후로는 꼭 건축물을 사진으로 찍으며 공부했다고. 사진을 통해 건축물을 바라보면 시시각각 변하는 건물의 다양한 특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 이 교수는 “사진은 건축의 예술적 특성을 담아내기 때문에 건축 사진을 통해 건축물의 다양한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건축과 사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란 것. 강단에 오른 뒤에도 약 35년의 세월 동안 국내는 물론 해외 곳곳을 답사하며 건축물 사진을 찍어왔다. ▲ 이강업 교수(건축학부)는 40여 년간 국내는 물론 해외 곳곳을 답사하며 건축물 사진을 찍어왔다. (출처: 이강업 교수) 건축 사진으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다 ▲ 이강업 교수와 지난달 29일 한양대 연구실에서 만났다. 인터뷰에서 사진에 담긴 건축물의 사회문화적 의미를 들을 수 있었다. “건축물 사진을 찍을 때는 건축만 바라보지 않고 건축물에 얽힌 사회문화적 배경을 함께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물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 따라 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그 사진에 담긴 건축물의 모습도 달라집니다.” 이 교수의 사진 철학이다. 더불어 건축 사진은 자연과 함께 완성된다. 이 교수는 “같은 건축물이라도 화창한 날과 스산한 날의 건축물은 프레임 안에 매우 다르게 담기는 법”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가 찍은 프랑스의 몽셀미셀 수도원 사진을 보면 그 설명이 더욱 와 닿는다. 화창한 날씨에서 바라본 수도원과 다르게, 자욱하게 낀 안개로 가려진 수도원은 한층 더 신비스럽고 오묘한 분위기를 내뿜는다. 이 교수는 궁극적으로 건축을 통해 인간의 삶에 대한 탐구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예로부터 인간은 현실을 넘어선 초월적인 삶을 추구하고자 했다. 건축이 종교와 많은 부분 맞닿아 있는 것도 이 때문. 이 교수는 “많은 건축물에 신과 조우하고자 하는 인간의 바람이 담겨있다”고 설명했다. 페루 안데스 산맥에 있는 과거 잉카문명의 도시 터 마추픽추가 이를 대변한다. 산 정상에 신이 있다고 믿은 잉카인들은 높은 산꼭대기에 마을을 세워 신과 가까이에서 삶을 영위하고자 했다. “건축사는 종교 건축의 발전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신과의 만남을 고대하며 건축물을 세우곤 했습니다. 그곳에선 일상에서 벗어나 순수한 정신세계로 몰입한 것이죠” 이 교수는 건축 사진을 찍어 이와 같은 의미를 대중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사람이 건축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느낀 이 교수는 건물을 넘어 인체와 자연, 생명체 등으로 작품의 범주를 확장한다. “건축이 사람의 생각과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기에 사람은 물론, 자연물의 사진도 건축 사진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교수는 국내외에서 수 차례 전시회를 개최해 자신이 찍은 사진을 선보인 바 있다. 이달에는 예술의전당에서 ‘관조’란 주제로 전시회를 연다. 건축, 인체, 자연, 흔적의 네 코너로 나눠 전시한다. “관조란 사물을 바라보며 깊이 사색한다는 뜻입니다. 건축에서 나아가 모든 사물을 자세히 관찰하면 그 속에서 또 다른 가치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사진작가 이 교수의 진짜 도전은 지금부터 이 교수는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다. 올해가 강단에 서는 마지막 해다. 하지만 본격적인 ‘사진작가로서의 삶’을 준비하고 있기에 아쉽지만은 않다고. “사진을 찍으려면 무엇보다 시간적 여유가 많아야 하는데, 사진작가는 은퇴 후에 하기 딱 좋은 일이죠. 앞으로 여러 곳을 방문하며 더욱 많은 사진을 찍을 생각입니다. 저에겐 지금까지 꿈꿔온 진짜 도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교수의 말 속엔 앞으로의 삶에 대한 설렘이 가득했다. “제 힘이 닿을 때까지 아름답고 경이로운 사진을 최대한 많이 찍고 싶습니다.” 한평생 건축을 봐왔지만, 아직도 보고 싶은 것이 수도 없이 많다는 그다. 프레임 안에 모든 건축물이 담길 때까지 이 교수의 도전은 멈추지 않는다. ▲ 사진작가 이강업 교수의 진짜 도전은 지금부터다. “제 힘이 닿을 때까지 아름답고 경이로운 건축 사진을 가능한 많이 찍고 싶습니다.” (출처: 이강업 교수) 글/ 최연재 기자 cyj0914@hanyang.ac.kr (☜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사진/ 김윤수 기자 rladbstn625@hanyang.ac.kr

2016-05 04

[교수]남북한 축구... 스포츠 문화사적으로 접근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는 단연 ‘축구’다. 국가대항전에서 골이 터지면 함성소리가 온 동네 전체를 뒤덮고, 다음 날 스포츠뉴스 1면을 단번에 차지해버린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2002년 한일월드컵의 붉은 기운을 기억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축구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왜 프로축구는 프로야구만큼의 인기를 구가하지 못하는지, 남북한 축구는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이에 대한 답을 적은 학술서적을 최근 출간한 이종성 교수(스포츠산업학과)를 만났다. 스포츠 기자에서 영국 유학생으로 이종성 교수는 어떻게 남북한 축구사에 대해 연구하게 됐을까. 이 교수는 어릴 적부터 스포츠를 정말 좋아했고, 스포츠기자를 하고 싶은 꿈이 생겼다. 기자로서 스포츠 경기를 취재할 때 본인의 장점이 가장 돋보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교수는 한 인터넷매체에서 5년 간 스포츠 기자로 활동했다. 하지만 그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회상했다. “우리나라가 아직 ‘스포츠 역사’ 부분의 자료가 부족하다 보니 외신에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었어요. 국내에서 고급 정보를 듣는 경로도 많이 한정돼 있었죠. 무엇보다도 기자의 자질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일뿐 아니라, 사람들과의 친화력이나 분석력 등을 통해서 스스로 새로운 뉴스를 발굴해야 한다는 점에서 어려움을 느꼈어요.” 이 교수는 스포츠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고자 유학을 택했다. 2006년 독일월드컵 현지 취재를 마친 뒤 같은 해 9월 곧바로 영국 드몽포트대학교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석사 논문은 한국 야구의 발전에 대한 주제였으나, 축구팬이셨던 부친의 영향으로 박사 논문은 ‘남북한 축구사’로 방향을 돌렸다. 남북한이라는 분단된 환경에서 축구역사를 다룬 사례가 세계적으로도 드물었다는 점에 주목한 것. 1966년 북한이 8강 진출이라는 결과를 냈던 잉글랜드 월드컵은 FIFA의 변화를 이끈 월드컵이다. 영국에 북한 축구 관련 자료가 많은 것 또한 박사 논문의 연구 주제를 선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 논문이 최근 책으로 출간됐다. ‘남북한 축구사 1910년부터 2002년까지: 발전과 확산(A History of Football in North and South Korea c. 1910-2002 Development and Diffusion)’이다. ▲ 스포츠를 좋아했던 이종성 교수(스포츠산업학과)는 기자를 시작으로 스포츠계에 뛰어들었다. 남북한 축구사, 일제강점기부터 2002년까지 ▲ 남북한 축구사를 다룬 이종성 교수의 책 표지. 박지성 선수는 남북한 플레이 스타일의 총 집합체다. (출처: 피터랑(peterlang) 이 교수의 박사 논문은 유럽의 학술서 전문 출판사인 피터 랭(Peter Lang)의 권유로 세상에 나오게 됐다. 다소 생소하고 드문 주제인 남북한 축구사를 출판사가 눈 여겨본 덕이다. 이 교수는 스포츠 문화나 스포츠 역사에 관한 책이라면 학술서와 대중서의 경계를 허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외국인이 한국사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되리란 생각에 권유를 승낙했다고. 1년 6개월 동안 학위논문을 대폭 보강해 펴낸 이 책은 총 다섯 장으로 구성돼 있으며, 일제강점기와, 1966년 월드컵, 2002년 월드컵의 세 시기를 집중 탐구한다. 축구가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일제강점기부터, 이 교수가 역사적인 평가가 가능한 시점이라 판단한 2002년까지의 남북한 축구 이야기다. 제1장은 일제강점기의 조선 축구를 다룬다. 이 교수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1910년부터 조선 축구가 공식적으로 대중 속에 퍼졌다”고 했다. “당시 경성과 평양은 조선 축구의 두 축이었습니다. 독립을 갈망하는 대중들의 열망이 축구의 인기에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죠. 당시 대지주 계급들은 계몽이나 독립운동을 하는데 축구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의식을 갖고 적극적인 후원자를 자처했습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 1945년부터 1964년은 남한 축구에 있어 ‘격동의 시간’이었다. 반면, 북한은 축구 훈련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나갔던 시기이기도. 이를 통해 북한은 3장에서 소개되는 1995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8강이라는 쾌거를 올린다. 4장에서는 1974년부터 1991년까지 남한 축구의 부활을 그린다. 남북한은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무승부를 기록했고, 한국 축구는 자신감을 되찾는다. 이 시기는 남한이 경제적으로 북한을 완전히 추월한 때이기도 하다. 2002년 월드컵은 5장에 등장한다. 북한은 당시 우리나라와 이탈리아의 경기를 중계했다. 이 교수는 이 중계가 굉장히 이례적인 것이라 말했다. 북한 정권의 안정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다. 북한이 40년 전인 1966년에 이긴 이탈리아를, 한국은 2002년에야 비로소 이겼다는 것을 선전하는 효과를 노렸단 것이다. 동시에 한국보다 높은 경제 수준을 구가했던 당시의 영광을 그리워한다는 것이 이 교수의 평가다. 민족적 동질성을 숨길 순 없다 ▲ 일제감정기 당시 일본과 조선의 축구 경기를 다룬 그림. 이종성 교수는 이 그림을 통해 한국 축구가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됐다는 걸 알 수 있다고 했다. 이 교수가 이 책에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결말은 남북한의 플레이 스타일이다. “남북한은 오랜 분단으로 인해 이념 체제도 다르고 문화생활을 영위한 정도에도 차이가 많이 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1966년 북한이 보여준 경기와 2002년 한국이 펼친 경기는 플레이 스타일 면에서 많이 비슷합니다. 남북한 축구의 플레이 스타일의 총 집합체는 책 표지에 나타난 박지성 선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체계적으로 축구 기술이 앞선 것은 아니었지만 근면성을 내걸고 열심히 뛰는 스타일이란 것이죠.” 실제로 외국 언론의 평가도 이와 같다. 세련미에서는 차이가 나지만, 기본적인 플레이 스타일에서는 민족적인 동질성이 보인다는 의미다. 이처럼 각 시기마다 스포츠가 어떻게 발전했으며, 나라마다 발전 속도나 방향이 왜 비슷하거나 다른지,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연구하는 것이 ‘스포츠 문화사’의 영역이다. 우리는 ‘스포츠 문화사’적으로 어떤 전략을 펼칠 수 있을까. 이 교수는 ‘축구 외교’가 그 답이라고 했다. 북한이 국제무대로 나오려고 할 때, 축구를 통해 남북한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수 있다는 것. 남북한 교류에 있어 스포츠 문화사적 접근은 이 교수 개인의 연구 분야임과 동시에 한국이 탐구해야 할 과제일지 모른다. 글/ 박윤정 기자 dbwsjd602@hanyang.ac.kr (☜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사진/ 최민주 기자 lovelymin12@hanyang.ac.kr

2016-04 19

[교수]반도체 전문가, 기술한양의 선봉장이 되다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라 했다. 지식과 기술도 마찬가지다. 연구실에서 태어난 지식과 기술도 대학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상으로 나가야 가치를 얻는다. 이를 위해서는 대학과 기업, 정부를 이어주는 산학협력의 역할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산학협력단장 안진호 교수는 한양대학교의 우수한 연구성과를 빛내는데 앞장서고 있다. 산학협력의 패러다임을 바꾸다 ▲ 산학협력단장 안진호 교수(신소재공학부)를 만나 한양 대학교 산학협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안 교수는 2년 전 산학협력단장으로 임명돼 대학의 산학협력 패러다임을 바꾸기 위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한양대학교의 문을 두드리는 기업체와 연구자를 연결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산업체의 수요를 발굴하고 기업과 정부의 투자를 이끌어낸다. 안 교수는 ‘한양 미래 R&D 전략기획서 공모전’을 연례 행사로 안착시킨 것을 그간의 가장 큰 성과로 꼽았다. “한양대학 교수님들의 많은 연구성과들이 사장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홍보를 시도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어요. 그래서 교수님들의 연구성과를 두 페이지 정도로 짧게 받고, 이를 국책과제나 산학협력과제로 발전시키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 결과 지난해에만 연구비 150억원을 추가로 수주했다. 경기 불황으로 대학의 연구비 수주가 전반적으로 감소한 상황에서 얻은 성과라 그 의미가 더 크다. 또 안 교수는 국내외 폭넓은 네트워크를 활용해 학생들의 성장을 돕는 산학협력단을 만들고자 한다. 그 일환으로 세계 최대의 가전 박람회인 CES에 학생들을 파견했다. 학생들은 이 행사에서 동문 기업이 개발한 제품을 홍보하는 역할을 맡았다. “학생들이 직접 만든 제품은 아니었지만, 넓은 무대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만난 것이 큰 자극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사업을 이끄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를, 많은 기업들이 자기 제품을 소개하기 위해 모인 것을 보면서 느꼈을 거예요.” 거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학생들의 시야를 넓혀주고 싶다는 안 교수. 학교 안에서도 학생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고 싶단다. “HIT 지하에 가면 아이디어 팩토리나 이노베이션 센터 같은 시설이 있어요. 학생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고 싶어서 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을 데려가곤 합니다.” 기술을 너머 산업을 생각한 연구자 ▲ 안진호 교수는 지난 1월, 학생들을 세계 최대의 가전 박 람회인 CES의 현장으로 이끌었다. (출처: 한국경제) 안 교수는 반도체 노광공정 기술을 10년 이상 연구한 공학자다. 노광공정은 반도체 회로의 설계도인 포토마스크에 빛을 쬐 기판인 웨이퍼 위에 회로를 그려 넣는 공정이다. 반도체 제조 과정에서도 핵심으로 꼽힌다. 그러나 고성능 반도체를 만드는 매우 중요한 과정임에도, 반도체 강국인 한국조차 노광공정에 사용되는 장비를 독자적으로 만들지 못하고 있다. 노광공정 장비는 네덜란드의 ASML에서 독점 공급하고 있다. 안 교수는 저비용 고효율의 자체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극자외선을 이용한 노광공정을 10년에 걸쳐 연구했다. “노광공정에는 대당 1500억원 이상의 고가 장비가 사용됩니다. 개발 중인 기술이 상용화되면 더 적은 비용으로 고성능의 반도체를 만들 수 있게 되고, 품질 관리도 보다 쉬워질 겁니다. 현재 기술 이전을 위한 협상이 진행 중이니 내후년에는 상용화 될 거예요.” 안 교수 연구팀은 포토마스크만 보고도 전체 반도체 성능을 알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렌즈가 없는 CCD카메라를 이용한 극자외선 현미경을 만들어 포토마스크의 모든 정보를 알 수 있게 됐다. 안 교수의 연구는 처음부터 반도체 산업에서 활용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초점을 맞췄다. 고가의 장비를 사용하지 않고도 반도체의 품질을 검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지, 노광공정을 거치기 전에 미리 공정 결과를 예측할 수는 없을지 등 실질적인 고민에서 출발한 것. 이처럼 항상 기술 개발을 넘어 그 활용까지 생각한 자세가 산학협력단장으로 일하는데 큰 자산이 됐다. “연구실에서 개발한 기술이 바로 기업이나 산업에 쓰일 순 없어요. 다른 사람들이 활용할 수 있는 수준까지 개발돼야 기술이전이 가능한 거예요.” 공학자의 역할을 생각하다 산학협력단장으로서 맡은 바 소임이 끝나면 연구자의 자리로 돌아갈 안 교수. 그때가 되면 첨단 기술을 개발하는 연구를 마무리 짓고, 기술과 다른 학문을 융합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일을 해보고 싶다. 안 교수는 공학과, 예술, 심리학을 융합한 대학원 아트테크놀로지학과 설립에도 큰 힘을 보탰다. “공학자는 나이가 들수록 가치가 하락합니다. 언제까지나 새로운 것을 쫓아갈 수 없으니까요. 예순 살이 되면 지금까지 개발한 기술을 모두 기업체에 이전해주고 연구를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여태까지 공대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으니, 이제는 인문학이나 예술을 하신 분들과 함께 새로운 것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공학은 결국 대중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야 하는 것이니까요.”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을 너머 미래를 생각하는 안 교수의 이야기다. ▲ "공학은 대중에게도 널리 혜택이 돌아가는 일을 해야한다고 생각해요." 안진호 교수는 확고한 신념으로 한양대의 연구성과가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데 힘쓰고 있다. 글/ 정진훈 기자 cici0961@hanyang.ac.kr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사진/ 김혜임 기자 hitgirl827@hanyang.ac.kr

2016-04 11

[교수][한양에 女風이 분다] 이선영 교수(재료화학공학과)

‘뜨개질은 여자가, 기계 조작은 남자가’와 같이 당신도 혹시 남자와 여자의 일을 무조건적으로 구분 짓고 있지는 않는지? 여기 성별에 구애 받지 않고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펼치고 있는 한양의 여전사들이 있다. ‘공대’의 이미지가 강해 남성 리더를 떠올리기 쉬운 우리 대학에 여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3인을 소개한다. 두 번째로 만나볼 사람은 봉사로써 사랑의 실천을 행하며 선한 영향력을 나누는 이선영 한양대 재료화학공학과 교수(사진 중간)다. 많은 현대인들은 바쁜 일상에 치여 살며 외진 곳에 있는 이웃들을 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봉사는 언제나 ‘다음에’ ‘언젠간’ 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그러나 바쁜 일상 중에도 언제나 문명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이웃들을 돕겠다는 꿈을 안고 일 년에 한 번씩 네팔로 날아가는 사람이 있다. 2013년 처음 시작해 벌써 4년째다. 대한민국에서 네팔까지, 여자 혼자 나서기도 멀고 험한 그 길을 이선영 교수는 매년 ‘ERICA 공학 봉사단’을 꾸려 운영하며 한양대학교 학우들과 함께 그 길을 나선다. 좁은 비행기와 버스를 타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외진 산 속 마을까지 가는 길이 험난하고 멀지만 그 긴 시간동안 학생들과 선한 영향력을 나누며 보람을 느낀다는 그녀를 만나봤다. ▲ 이선영 한양대 재료화학공학과 교수 한양대학교 공학 봉사단, 운영하는 데 가장 힘든 점으로 많은 지원자들 중 누구를 뽑아야 할지 모르겠어서 골치라고 할 정도로 매년 경쟁률이 엄청나다. 해를 거듭할수록 지원하는 학생의 숫자도 늘어나 간절히 원하는 학생에게는 미안하지만 내년에 가자고 되레 부탁을 해야 할 정도로 공학 봉사단의 인기는 대단하다. 그렇게 치열한 경쟁을 뚫고 7-10명으로 편성되는 그들은 서울대학교, 경상대학교 등의 타 대학 봉사단들과 함께 겨울방학 중 한 달여 간 네팔의 산간 마을에 머물며 봉사활동을 펼친다. 그 곳에서 그들은 자가 전기 발전 시스템을 설치하고 온돌을 설치하는 등 자신들이 학교에서 배운 재능으로 사람들을 돕기도 하고 그 외에 학교 건물을 짓고 벽화를 그리는 등 네팔 산골 사람들의 마음을 풍요롭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 교내외적으로 받는 도움도 컸다고 한다. “LINC 사업단이며 산학협력단, CK사업단, 공학교육혁진센터, 공학대학 등 많은 곳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셔서 할 수 있는 일이였어요. 이번엔 사회봉사단에서까지 도움을 주셨죠. 매 년 한양인들의 나눔 정신이 더 크게 느껴져서 봉사단을 운영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게다가 봉사를 갈 때마다 받은 도움이 엄청나니 학교에 대한 애교심 또한 커지는 바죠.” “현지에서 직접 발로 뛰며 하는 봉사 내내 보람이 느껴지지만 한국에서 옷가지들을 모아 네팔의 어린이들에게 나눠주고 신발 한 켤레 없이 험한 산길을 오르내리는 아이들을 위해 운동화를 선물해주면 다음 해에 제게 받은 옷가지들을 입고 저를 향해 환하게 다시 웃어주는 아이들을 다시 볼 때가 가장 행복해요.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모두 때 타지 않고 선한 사람들이죠. 작년엔 봉사 기간이 끝나 다 함께 트럭을 타고 내려오는데 한 아주머니께서 멀리서 달려 오셨어요. 양 손에 당신 품보다 큰 과일 두 개를 들고 말이에요. 도와줘서 고맙다고, 가면서 먹으라고 그 과일들을 저희에게 들려주셨죠. 여러 번의 봉사경험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에요. 여러 날을 굶고 나서 빵 한 조각을 받아도 이웃들과 나누는 그들의 성품을 본받고 싶어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둘러 본 이선영 교수의 연구실에는 그녀의 선한 성품이 그대로 녹아나 있었다. 학생들의 코멘트가 가득 달린 게시판이며, 최고의 강의를 증명하는 수여 상패들이 쌓여있는 연구 자료와 함께 연구실의 자연스러운 인테리어가 됐다. 그녀에게 봉사는 단순히 우리 대학 학우들을 통솔해 네팔에 가는 순간만이 아닌 생활인 것이다. “봉사라는 건 많이 버려야 하는 거라는 선입견을 으레 가지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그만큼 얻는 게 분명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수업 중에도 배워서 남 주라는 말을 많이 하거든요. 봉사를 통해 얻는 것이야말로 살아있는 지식이라고 할 수 있죠.” 봉사뿐만이 아닌 수업 중에도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이선영 교수의 선한 발자취를 우리 대학 학우들도 함께 따라가 보는 게 어떨까? * ERICA 공학 봉사단: 이선영 교수는 매년 ‘ERICA 공학 봉사단’을 꾸려 운영하고 있다. 이 봉사단은 서울대학교, 경상대학교 등의 타 대학 봉사단과 함께 매년 겨울방학에 봉사지역으로 떠난다. 봉사활동을 희망하는 지원자들 중 7~10명의 인원을 선출하는 만큼 경쟁률이 치열하다. * 본 기사는 HY ERICA 2016년 3·4월 79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 79호 전체 기사 리스트 보러가기 (클릭)

2016-04 11

[교수][한양에 女風이 분다] 김상진 교수(한국언어문학과)

‘뜨개질은 여자가, 기계 조작은 남자가’와 같이 당신도 혹시 남자와 여자의 일을 무조건적으로 구분 짓고 있지는 않는지? 여기 성별에 구애 받지 않고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펼치고 있는 한양의 여전사들이 있다. ‘공대’의 이미지가 강해 남성 리더를 떠올리기 쉬운 우리 대학에 여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3인을 소개한다. 첫 번째로 만나볼 사람은 한국시조학회 역사상 첫 여성 회장으로 당선된 김상진 한양대 한국언어문학과 교수(사진 왼쪽)다. ▲ 김상진 한양대 한국언어문학과 교수 Q. 한국시조학회 역사상 첫 여성 회장으로 당선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우선 한국시조학회가 어떤 학회인지 궁금합니다. 학회란 보통 비슷한 전공의 여러 대학교 교수님들이 모여 어떠한 학문에 대해 깊이 있게 연구하는 모임이에요. 한국시조학회 역시 시조 관련 전공 교수님들끼리 모여 시조에 대한 자료를 발굴해 내기도 하고 학생들에게 어떻게 하면 시조를 흥미롭게 가르쳐줄 수 있을까를 연구하는 모임입니다. 쉽게 말해 시조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술모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Q. 한국시조학회에서 이전에 편집이사로 계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 어떻게 회장으로 당선이 되신건지, 당선되시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합니다. 사실 처음에는 큰 용기가 필요했어요. 보통은 비슷한 계열의 전공자 선생님분들이 학회에 데려가 주시는데, 저 같은 경우는 우리 학교에 시조관련 전공자가 저뿐이라 혼자서 학회를 찾아갔습니다. 한국시조학회에 처음 찾아가 저를 어필했죠. 지금도 학회 선생님들이 참 용감하게 혼자왔었다고 가끔 저를 보고 웃곤 하세요. 학회 회장으로 당선되는 데에는 논문을 가장 많이 썼다는 것이 큰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요즘은 인터넷의 보편화로 예전보다 논문 자료를 찾기 편해지는 등 여건이 좋아졌잖아요. 그 영향으로 저는 시종일관 시조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했었어요. 그러다보니 제가 논문을 가장 많이 쓰게 되었더라고요. 그런 점을 교수님들이 예쁘게 봐주신 것 같아요. 사실 이전까지 학회 회장은 남성이 해야 한다는 편견이 암암리에 존재했었는데 이제는 아무것도 따지지 말고 시조에 새로움을 더하며 역동적으로 학회를 잘 이끌어나갈 수 있는 사람을 뽑자는 분위기에 운 좋게도 제가 당선이 되었어요. 저를 떠올려주신 학회 선생님 들께 감사하죠. Q. 2년간의 회장 임기 동안 학회를 위하여 어떤 일을 하고 싶으신지 구체적인 계획이나 구상된 프로그램이 있나요? 지금까지는 시조 연구를 늘 해왔던 것만 하다보니 그 영역이 좁았어요. 영역을 넓히기 위해저는 시조의 글로벌화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외국 문학 전공자들도 함께 하여 영문학에서 시조를 바라보는 입장 그리고 중국, 일본, 프랑스 문화 등 다양한 입장에서 시조를 바라보고 연구하고 싶어요. 그리고 시조는 시이기도 하지만 노래이기도 해요. 의미 자체가 ‘때의 노래’거든요. 명칭에 맞게 현대 음악 즉 대중음악과 결합한 특집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학생들에게 시조가 이렇게 재미있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고 싶습니다. 학생들이 시조를 단순히 옛날의 문학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 정체되고 재미없다는 편견이 있기도 한데 그런 점들을 깨주고 싶어요. Q. 학문 분야뿐만 아니라 문화 활동에 있어서도 활약이 대단하시다고 들었습니다. E.T 밴드(Erica Teacher's Band)에서도 리더를 맡고 계신데 밴드 활동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쑥스럽지만 E.T 밴드에서도 회장을 맡고 있는데요. E.T밴드는 과거에 교수님들이 항상 연구에 지쳐있어서 교수님들에게도 활력을 불어넣어보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밴드였어요. 제가 피아노 전공을 준비하려고 했던 적이 있어서 키보드를 다룰 줄 아는데 교수님들의 권유로 시작하게 되었죠. 뜻밖에 교수님들끼리 호흡도 잘 맞고 주위의 반응도 좋아서 앞으로 더 적극적으로 홍보를 할 생각입니다. 이번 2016학년도 입학식에서도 공연을 했었는데 학우들과 학부모님들의 반응이 좋아 굉장히 뿌듯했어요. Q. <한양에 여풍이 분다>라는 주제에 맞게 여성으로서의 파워가 대단하신데 혹시 여성 학우들을 위한 조언이나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기준을 남에게 두지 말라고 조언해주고 싶어요. 무조건적으로 남성을 이기려 한다든지 잘 보이려고 하는 것은 기준을 남성에게 두고 있는 거잖아요. 스스로가 자신에 대해 대결 구조를 만들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살리고 나 자체로서의 나를 인정했으면 좋겠어요. 움츠려들지 말고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세요. 또 한 가지 모든 학우들에게 조언하고 싶은 점이 있어요. 간절히 원하면 목표가 생기고, 목표가 생기면 노력하게 됩니다. 많은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꼭 찾아 나섰으면 좋겠습니다. 김 교수는 일본의 하이쿠처럼 ‘한국의 문학’하면 세계 누구나 ‘시조’를 떠올릴 수 있을 때까지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한국시조학회에서 한양대학교 여성의 위상을 떨치고 있는 김상진 교수의 앞으로 의 행보를 기대해본다. * 하이쿠: 5,7,5의 음수율을 지닌 17자로 된 일본의 짧은 정형시를 일컫는 말이다. 하이쿠는 세계에서 그 유래를 보기 드문 짧은 시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대중시로서 확고한 자리를 잡고 있다. * 본 기사는 HY ERICA 2016년 3·4월 79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 79호 전체 기사 리스트 보러가기 (클릭)

2016-04 11

[교수]김효준 교수, 비만 없는 세상을 꿈꾸다

대한민국은 지금 다이어트 열풍이다. 비만율이 4.3%로 OECD 국가 44개국 중 43위를 할 정도로 세계 그 어느 곳보다 비만율이 낮고 조금만 검색해도 온오프라인에서 다이어트에 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다. 사람들은 효능이 검증되지 않은 다이어트 식품과 약품을 찾으면서까지 체중 감량에 열을 올린다. 대체 왜 대한민국은 ‘비만’을 이렇게 두려워하는 것일까? Editor 박서정, 배새아 학생기자, Photographer 김하은, 위대한 학생기자 ▲ 김효준 한양대 분자생명과학과 교수 그 이유는 아마 비만이 단순히 살의 문제를 넘어 건강까지도 위협하기 때문일 것이다. 비만은 당뇨, 동맥경화, 암 등 각종 성인병의 원인이 되며 그 외의 일상생활에도 많은 지장을 준다. 비만의 위협은 비단 대한민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보건기구 WTO에서는 이미 오래 전 비만을 질병으로 규정하고 세계 비만 인구를 줄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으며 유럽을 비롯한 다수 국가에서는 비만세라는 제도까지 도입해 비만율 줄이기에 앞장서고 있다. 그렇다면, 이미 발생한 비만을 치료하기에 앞서 비만을 예방해 비만 인구수가 0에 수렴하는 세상이 온다면 어떨까? 우리 대학에 ‘비만 예방 백신’을 개발한 사람이 있다. 김효준(과기대·분자생명) 교수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 김 교수는 이번 연구 성과에 대해 “1997년부터 시작해 오랫동안 이 백신을 붙들고 연구했다”며 “이 분야에서 차곡차곡 벽돌을 쌓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한 단계씩 과학 기술의 발전을 위해 노력할 뿐”이라는 겸손함을 보였다. “1997년부터 시작해 오랫동안 이 백신을 붙들고 연구했습니다. 연구라는 것은 한 번에 1에서 10으로 올라갈 수 없는 것이지요. 저는 이 분야에서 차곡차곡 벽돌을 쌓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한 단계씩 과학 기술의 발전을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 김 교수는 인터뷰를 시작하며 겸손하게 운을 띄웠다. 그의 손사래가 겸손으로 느껴졌던 것은 아마 연구실을 가득 메운 상패와 연구 자료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대표이사로 있는 바이오 벤처 에스제이바이오메드는 비만 예방 백신 개발을 공식 발표했다. 에스제이바이오메드는 과학기술부 바이오 디스커버리사업의 지원을 받아 지방 대사과정에서 비만성 체지방의 축적을 선택적으로 차단해주는 인공 펩티드(pB4)를 연구해 왔으며, 최근 동물실험을 거쳐 미국 특허를 획득했다. 특허를 받은 비만백신은 지방 대사와 인체 면역 반응 체계를 융합시킨 인체 친화적인 새로운 개념이다. 음식으로 섭취된 지방은 혈액을 통해 간으로 이송된다. 지방은 간에서 아포-B100 (apolipoprotein B-100)이라는 단백질로 둘러싸여 작은 기름방울 형태로 혈중으로 다시 방출되어 신체 각부에서 활용하고 저장하게 되는데 본 연구는 아포-B100의 특정부분의 구조를 흉내 낸 구조적 유사체 (mimotope)를 인공적으로 만들어 백신 형태로 주사하면 우리 몸에서 치료적 항체반응을 일으키는 펩티드인 미모토프(mimotope)를 이물질로 판단해서 이에 대한 항체를 만들어 내게 되는 원리이다. 이 항체는 지방입자를 둘러쌓고 있는 아포B-100에도 결합하게 되고 그 결과 지방입자의 분해, 저장을 저해하게 된다. 이 때 또 다른 중요한 기능이 나타나는데, 지방입자에 결합된 항체에 의해 특정 대식세포(macrophage)가 활성화되는 것이다. 이 연구에서 중요한 핵심은 지방조직, 특히 복부지방조직에서 지방입자-항체 복합체를 포획한 대식세포의 활성화에 따른 면역학적 기능과 지방세포내의 지방분해효소의 활성이 비만과 밀접하게 연계되어있다는 것이다. (주)에스제이바이오는 일반 실험용 쥐와 백신을 접종시킨 쥐를 고지방 음식으로 사육한 결과 일반 쥐의 경우 체중이 1.3~1.5배로 증가했지만 백신을 맞은 쥐의 경우는 기존 몸무게를 유지했다고 밝혔다. ▲ 김효준 교수는 이번 연구결과에 대해 “97년도에 처음 연구를 시작한 이후 여러 명의 학생들과 함께 연구한 결실”이라고 전했다. 그가 개발한 비만 예방 백신은 비만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접근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기존의 비만 치료 접근법과 차별화 된 이 백신은 안전하고 효과적인 비만 치료제로 기대되고 있다. 또한 이번 연구는 기존의 예방 백신과도 성향이 다르다. 1798년 Edward Jenner가 처음으로 천연두를 백신 요법으로 예방하는 시도를 성공했다. 그리고 그 뒤 결핵 등의 수많은 전염병에 대한 백신요법이 많은 사람들을 전염병으로부터 구했다. 이후 생명과학의 발전으로 유전자 공학과 면역학 등이 발전하면서 이제는 인플루엔자, 대상포진, 폐렴, 자궁경부암 등 다양한 병을 치료 및 예방하게 되었다. 하지만 백신은 아직 감염성 질병의 분야에만 국한돼 있다. 그러므로 김효준 교수의 비만 백신의 성공은 비감염성 질환의 영역의 기초가 될 수 있다. 비만, 동맥경화, 당뇨 등의 대사성 질환과 치매와 같은 노인성질환 그리고 흡연 같은 중독성 질환도 예방 혹은 치료하는 차세대 프리미엄 백신의 개발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비만’을 예방하는 백신을 만드는 것과 다르게 김효준 교수는 매우 마른 체형의 소유자였다. 그는 왜 하필 ‘비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일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비만을 극복하기 위해 정말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며 애를 쓰죠.” 비만을 치료하기 위해 비효율적이고 부작용이 있을 지도 모르는 약을 먹거나 수술까지 감행하는 사람들의 사례들을 보며 효율적이고 인체친화적인 방법으로 바이오 치료법을 시도해보고자 했다는 김효준 교수. 그가 개발한 백신은 매일 혹은 짧은 주기로 반복 투여하여 특정 기능을 차단하는 약과 달리 정기적으로 맞으면 비만을 억제하는 기능성 항체가 체내에 생성되어 비만이 억제된다고 한다. ▲ 김효준 교수가 한양대 Micro Biochip Center로부터 받은 감사패 “97년도에 처음 연구를 시작한 이후 여러 명의 학생들과 함께 연구한 결실입니다. 지금도 바이오 디스커버리 사업 명목으로 후속 연구가 진행되고 있고요.” 그가 처음 비만 백신을 연구할 때에는 완전히 독창적이고 새로운 개념으로 기존의 개념과의 연계성을 설명하는 데 애로사항이 많았다고 한다. 한 교수는 그에게 면역학을 다시 배우고 오라고 할 정도였다고. 그러나 2007년 이후 국제적 학술지에 지방 대사 및 면역학적 성과들이 속속 발표되면서 비로 소 그의 비만백신이 인정받게 됐다. “제가 만든 백신을 비롯한 모든 비만치료제는 살이 더 찌는 것을 막아주는 것입니다. 왕성한 식욕을 충족시켜도 살이 찌지 않는 비만 치료제로만 이 백신을 사용할 것을 권장합니다.” 적당히 뚱뚱한 사람이 마른 사람보다 오래 산다며 그는 자신이 과체중 혹은 비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체중 감량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백신을 권장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1980년대 후반 그가 처음 생명과학을 시작할 무렵에는 그 분야가 매우 생소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화학이 근본이 되어 생명 과학을 연구했지만 지금은 온전히 생명 과학만을 연구해도 그 양이 엄청날 정도로 분야가 넓어졌다. 정부에서 연구비가 지원되긴 하지만 이렇게 발전한 우리나라의 생명과학을 위한 자금력이 많이 부족한 상태라고 한다. 또한 취업률을 따져야 하다 보니 이론을 배우는 학부 이후에 석사, 박사를 통해 실기와 연구력을 배우지 않고 취업을 하는 학생들이 상당수라고 김 교수는 안타까움을 표출했다. “석사까지 배우는 것은 절름발이예요. 박사 과정까지 떼고 난 학생은 어느 기업에서든 데리고 가고 싶어 하죠.” 하지만 그도 현실을 이해한다. IT같은 경우는 회사에서 워낙 자금이 잘 도니 월급이 높지만 생명 과학 분야는 그에 비해 매출도 적고 그로 인해 인재를 양성하기에도 부족한 실정이라고 한다. 생명과학은 말 그대로 인간의 생명과 삶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항들을 연구한다. 윤리적인 문제가 끼어있긴 하지만 잘 연구하면 IT분야에 버금가지 않는 각광받는 사업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뜻이 있으면 가게 됩니다. 현재의 과학에 하나를 더 얹는 역할을 할 뿐, 그것을 뛰어넘어 얹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공상 과학이죠. 제가 은퇴를 하게 되면 또 다른 연구자들이 하나씩 더 쌓고 쌓아 올라가다보면 대한민국 생명과학도 미래가 밝다고 전망합니다.” 라고 말하는 그는 현재까지의 연구에 만족하지 않고 오늘도 연구를 멈추지 않는 연구벌레다. * 본 내용은 HY ERICA 2016년 3·4월 79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 79호 전체 기사 리스트 보러가기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