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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 19

[교수]반도체 전문가, 기술한양의 선봉장이 되다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라 했다. 지식과 기술도 마찬가지다. 연구실에서 태어난 지식과 기술도 대학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상으로 나가야 가치를 얻는다. 이를 위해서는 대학과 기업, 정부를 이어주는 산학협력의 역할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산학협력단장 안진호 교수는 한양대학교의 우수한 연구성과를 빛내는데 앞장서고 있다. 산학협력의 패러다임을 바꾸다 ▲ 산학협력단장 안진호 교수(신소재공학부)를 만나 한양 대학교 산학협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안 교수는 2년 전 산학협력단장으로 임명돼 대학의 산학협력 패러다임을 바꾸기 위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한양대학교의 문을 두드리는 기업체와 연구자를 연결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산업체의 수요를 발굴하고 기업과 정부의 투자를 이끌어낸다. 안 교수는 ‘한양 미래 R&D 전략기획서 공모전’을 연례 행사로 안착시킨 것을 그간의 가장 큰 성과로 꼽았다. “한양대학 교수님들의 많은 연구성과들이 사장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홍보를 시도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어요. 그래서 교수님들의 연구성과를 두 페이지 정도로 짧게 받고, 이를 국책과제나 산학협력과제로 발전시키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 결과 지난해에만 연구비 150억원을 추가로 수주했다. 경기 불황으로 대학의 연구비 수주가 전반적으로 감소한 상황에서 얻은 성과라 그 의미가 더 크다. 또 안 교수는 국내외 폭넓은 네트워크를 활용해 학생들의 성장을 돕는 산학협력단을 만들고자 한다. 그 일환으로 세계 최대의 가전 박람회인 CES에 학생들을 파견했다. 학생들은 이 행사에서 동문 기업이 개발한 제품을 홍보하는 역할을 맡았다. “학생들이 직접 만든 제품은 아니었지만, 넓은 무대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만난 것이 큰 자극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사업을 이끄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를, 많은 기업들이 자기 제품을 소개하기 위해 모인 것을 보면서 느꼈을 거예요.” 거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학생들의 시야를 넓혀주고 싶다는 안 교수. 학교 안에서도 학생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고 싶단다. “HIT 지하에 가면 아이디어 팩토리나 이노베이션 센터 같은 시설이 있어요. 학생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고 싶어서 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을 데려가곤 합니다.” 기술을 너머 산업을 생각한 연구자 ▲ 안진호 교수는 지난 1월, 학생들을 세계 최대의 가전 박 람회인 CES의 현장으로 이끌었다. (출처: 한국경제) 안 교수는 반도체 노광공정 기술을 10년 이상 연구한 공학자다. 노광공정은 반도체 회로의 설계도인 포토마스크에 빛을 쬐 기판인 웨이퍼 위에 회로를 그려 넣는 공정이다. 반도체 제조 과정에서도 핵심으로 꼽힌다. 그러나 고성능 반도체를 만드는 매우 중요한 과정임에도, 반도체 강국인 한국조차 노광공정에 사용되는 장비를 독자적으로 만들지 못하고 있다. 노광공정 장비는 네덜란드의 ASML에서 독점 공급하고 있다. 안 교수는 저비용 고효율의 자체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극자외선을 이용한 노광공정을 10년에 걸쳐 연구했다. “노광공정에는 대당 1500억원 이상의 고가 장비가 사용됩니다. 개발 중인 기술이 상용화되면 더 적은 비용으로 고성능의 반도체를 만들 수 있게 되고, 품질 관리도 보다 쉬워질 겁니다. 현재 기술 이전을 위한 협상이 진행 중이니 내후년에는 상용화 될 거예요.” 안 교수 연구팀은 포토마스크만 보고도 전체 반도체 성능을 알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렌즈가 없는 CCD카메라를 이용한 극자외선 현미경을 만들어 포토마스크의 모든 정보를 알 수 있게 됐다. 안 교수의 연구는 처음부터 반도체 산업에서 활용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초점을 맞췄다. 고가의 장비를 사용하지 않고도 반도체의 품질을 검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지, 노광공정을 거치기 전에 미리 공정 결과를 예측할 수는 없을지 등 실질적인 고민에서 출발한 것. 이처럼 항상 기술 개발을 넘어 그 활용까지 생각한 자세가 산학협력단장으로 일하는데 큰 자산이 됐다. “연구실에서 개발한 기술이 바로 기업이나 산업에 쓰일 순 없어요. 다른 사람들이 활용할 수 있는 수준까지 개발돼야 기술이전이 가능한 거예요.” 공학자의 역할을 생각하다 산학협력단장으로서 맡은 바 소임이 끝나면 연구자의 자리로 돌아갈 안 교수. 그때가 되면 첨단 기술을 개발하는 연구를 마무리 짓고, 기술과 다른 학문을 융합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일을 해보고 싶다. 안 교수는 공학과, 예술, 심리학을 융합한 대학원 아트테크놀로지학과 설립에도 큰 힘을 보탰다. “공학자는 나이가 들수록 가치가 하락합니다. 언제까지나 새로운 것을 쫓아갈 수 없으니까요. 예순 살이 되면 지금까지 개발한 기술을 모두 기업체에 이전해주고 연구를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여태까지 공대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으니, 이제는 인문학이나 예술을 하신 분들과 함께 새로운 것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공학은 결국 대중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야 하는 것이니까요.”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을 너머 미래를 생각하는 안 교수의 이야기다. ▲ "공학은 대중에게도 널리 혜택이 돌아가는 일을 해야한다고 생각해요." 안진호 교수는 확고한 신념으로 한양대의 연구성과가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데 힘쓰고 있다. 글/ 정진훈 기자 cici0961@hanyang.ac.kr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사진/ 김혜임 기자 hitgirl827@hanyang.ac.kr

2016-04 11

[교수][한양에 女風이 분다] 이선영 교수(재료화학공학과)

‘뜨개질은 여자가, 기계 조작은 남자가’와 같이 당신도 혹시 남자와 여자의 일을 무조건적으로 구분 짓고 있지는 않는지? 여기 성별에 구애 받지 않고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펼치고 있는 한양의 여전사들이 있다. ‘공대’의 이미지가 강해 남성 리더를 떠올리기 쉬운 우리 대학에 여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3인을 소개한다. 두 번째로 만나볼 사람은 봉사로써 사랑의 실천을 행하며 선한 영향력을 나누는 이선영 한양대 재료화학공학과 교수(사진 중간)다. 많은 현대인들은 바쁜 일상에 치여 살며 외진 곳에 있는 이웃들을 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봉사는 언제나 ‘다음에’ ‘언젠간’ 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그러나 바쁜 일상 중에도 언제나 문명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이웃들을 돕겠다는 꿈을 안고 일 년에 한 번씩 네팔로 날아가는 사람이 있다. 2013년 처음 시작해 벌써 4년째다. 대한민국에서 네팔까지, 여자 혼자 나서기도 멀고 험한 그 길을 이선영 교수는 매년 ‘ERICA 공학 봉사단’을 꾸려 운영하며 한양대학교 학우들과 함께 그 길을 나선다. 좁은 비행기와 버스를 타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외진 산 속 마을까지 가는 길이 험난하고 멀지만 그 긴 시간동안 학생들과 선한 영향력을 나누며 보람을 느낀다는 그녀를 만나봤다. ▲ 이선영 한양대 재료화학공학과 교수 한양대학교 공학 봉사단, 운영하는 데 가장 힘든 점으로 많은 지원자들 중 누구를 뽑아야 할지 모르겠어서 골치라고 할 정도로 매년 경쟁률이 엄청나다. 해를 거듭할수록 지원하는 학생의 숫자도 늘어나 간절히 원하는 학생에게는 미안하지만 내년에 가자고 되레 부탁을 해야 할 정도로 공학 봉사단의 인기는 대단하다. 그렇게 치열한 경쟁을 뚫고 7-10명으로 편성되는 그들은 서울대학교, 경상대학교 등의 타 대학 봉사단들과 함께 겨울방학 중 한 달여 간 네팔의 산간 마을에 머물며 봉사활동을 펼친다. 그 곳에서 그들은 자가 전기 발전 시스템을 설치하고 온돌을 설치하는 등 자신들이 학교에서 배운 재능으로 사람들을 돕기도 하고 그 외에 학교 건물을 짓고 벽화를 그리는 등 네팔 산골 사람들의 마음을 풍요롭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 교내외적으로 받는 도움도 컸다고 한다. “LINC 사업단이며 산학협력단, CK사업단, 공학교육혁진센터, 공학대학 등 많은 곳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셔서 할 수 있는 일이였어요. 이번엔 사회봉사단에서까지 도움을 주셨죠. 매 년 한양인들의 나눔 정신이 더 크게 느껴져서 봉사단을 운영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게다가 봉사를 갈 때마다 받은 도움이 엄청나니 학교에 대한 애교심 또한 커지는 바죠.” “현지에서 직접 발로 뛰며 하는 봉사 내내 보람이 느껴지지만 한국에서 옷가지들을 모아 네팔의 어린이들에게 나눠주고 신발 한 켤레 없이 험한 산길을 오르내리는 아이들을 위해 운동화를 선물해주면 다음 해에 제게 받은 옷가지들을 입고 저를 향해 환하게 다시 웃어주는 아이들을 다시 볼 때가 가장 행복해요.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모두 때 타지 않고 선한 사람들이죠. 작년엔 봉사 기간이 끝나 다 함께 트럭을 타고 내려오는데 한 아주머니께서 멀리서 달려 오셨어요. 양 손에 당신 품보다 큰 과일 두 개를 들고 말이에요. 도와줘서 고맙다고, 가면서 먹으라고 그 과일들을 저희에게 들려주셨죠. 여러 번의 봉사경험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에요. 여러 날을 굶고 나서 빵 한 조각을 받아도 이웃들과 나누는 그들의 성품을 본받고 싶어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둘러 본 이선영 교수의 연구실에는 그녀의 선한 성품이 그대로 녹아나 있었다. 학생들의 코멘트가 가득 달린 게시판이며, 최고의 강의를 증명하는 수여 상패들이 쌓여있는 연구 자료와 함께 연구실의 자연스러운 인테리어가 됐다. 그녀에게 봉사는 단순히 우리 대학 학우들을 통솔해 네팔에 가는 순간만이 아닌 생활인 것이다. “봉사라는 건 많이 버려야 하는 거라는 선입견을 으레 가지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그만큼 얻는 게 분명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수업 중에도 배워서 남 주라는 말을 많이 하거든요. 봉사를 통해 얻는 것이야말로 살아있는 지식이라고 할 수 있죠.” 봉사뿐만이 아닌 수업 중에도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이선영 교수의 선한 발자취를 우리 대학 학우들도 함께 따라가 보는 게 어떨까? * ERICA 공학 봉사단: 이선영 교수는 매년 ‘ERICA 공학 봉사단’을 꾸려 운영하고 있다. 이 봉사단은 서울대학교, 경상대학교 등의 타 대학 봉사단과 함께 매년 겨울방학에 봉사지역으로 떠난다. 봉사활동을 희망하는 지원자들 중 7~10명의 인원을 선출하는 만큼 경쟁률이 치열하다. * 본 기사는 HY ERICA 2016년 3·4월 79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 79호 전체 기사 리스트 보러가기 (클릭)

2016-04 11

[교수][한양에 女風이 분다] 김상진 교수(한국언어문학과)

‘뜨개질은 여자가, 기계 조작은 남자가’와 같이 당신도 혹시 남자와 여자의 일을 무조건적으로 구분 짓고 있지는 않는지? 여기 성별에 구애 받지 않고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펼치고 있는 한양의 여전사들이 있다. ‘공대’의 이미지가 강해 남성 리더를 떠올리기 쉬운 우리 대학에 여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3인을 소개한다. 첫 번째로 만나볼 사람은 한국시조학회 역사상 첫 여성 회장으로 당선된 김상진 한양대 한국언어문학과 교수(사진 왼쪽)다. ▲ 김상진 한양대 한국언어문학과 교수 Q. 한국시조학회 역사상 첫 여성 회장으로 당선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우선 한국시조학회가 어떤 학회인지 궁금합니다. 학회란 보통 비슷한 전공의 여러 대학교 교수님들이 모여 어떠한 학문에 대해 깊이 있게 연구하는 모임이에요. 한국시조학회 역시 시조 관련 전공 교수님들끼리 모여 시조에 대한 자료를 발굴해 내기도 하고 학생들에게 어떻게 하면 시조를 흥미롭게 가르쳐줄 수 있을까를 연구하는 모임입니다. 쉽게 말해 시조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술모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Q. 한국시조학회에서 이전에 편집이사로 계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 어떻게 회장으로 당선이 되신건지, 당선되시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합니다. 사실 처음에는 큰 용기가 필요했어요. 보통은 비슷한 계열의 전공자 선생님분들이 학회에 데려가 주시는데, 저 같은 경우는 우리 학교에 시조관련 전공자가 저뿐이라 혼자서 학회를 찾아갔습니다. 한국시조학회에 처음 찾아가 저를 어필했죠. 지금도 학회 선생님들이 참 용감하게 혼자왔었다고 가끔 저를 보고 웃곤 하세요. 학회 회장으로 당선되는 데에는 논문을 가장 많이 썼다는 것이 큰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요즘은 인터넷의 보편화로 예전보다 논문 자료를 찾기 편해지는 등 여건이 좋아졌잖아요. 그 영향으로 저는 시종일관 시조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했었어요. 그러다보니 제가 논문을 가장 많이 쓰게 되었더라고요. 그런 점을 교수님들이 예쁘게 봐주신 것 같아요. 사실 이전까지 학회 회장은 남성이 해야 한다는 편견이 암암리에 존재했었는데 이제는 아무것도 따지지 말고 시조에 새로움을 더하며 역동적으로 학회를 잘 이끌어나갈 수 있는 사람을 뽑자는 분위기에 운 좋게도 제가 당선이 되었어요. 저를 떠올려주신 학회 선생님 들께 감사하죠. Q. 2년간의 회장 임기 동안 학회를 위하여 어떤 일을 하고 싶으신지 구체적인 계획이나 구상된 프로그램이 있나요? 지금까지는 시조 연구를 늘 해왔던 것만 하다보니 그 영역이 좁았어요. 영역을 넓히기 위해저는 시조의 글로벌화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외국 문학 전공자들도 함께 하여 영문학에서 시조를 바라보는 입장 그리고 중국, 일본, 프랑스 문화 등 다양한 입장에서 시조를 바라보고 연구하고 싶어요. 그리고 시조는 시이기도 하지만 노래이기도 해요. 의미 자체가 ‘때의 노래’거든요. 명칭에 맞게 현대 음악 즉 대중음악과 결합한 특집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학생들에게 시조가 이렇게 재미있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고 싶습니다. 학생들이 시조를 단순히 옛날의 문학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 정체되고 재미없다는 편견이 있기도 한데 그런 점들을 깨주고 싶어요. Q. 학문 분야뿐만 아니라 문화 활동에 있어서도 활약이 대단하시다고 들었습니다. E.T 밴드(Erica Teacher's Band)에서도 리더를 맡고 계신데 밴드 활동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쑥스럽지만 E.T 밴드에서도 회장을 맡고 있는데요. E.T밴드는 과거에 교수님들이 항상 연구에 지쳐있어서 교수님들에게도 활력을 불어넣어보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밴드였어요. 제가 피아노 전공을 준비하려고 했던 적이 있어서 키보드를 다룰 줄 아는데 교수님들의 권유로 시작하게 되었죠. 뜻밖에 교수님들끼리 호흡도 잘 맞고 주위의 반응도 좋아서 앞으로 더 적극적으로 홍보를 할 생각입니다. 이번 2016학년도 입학식에서도 공연을 했었는데 학우들과 학부모님들의 반응이 좋아 굉장히 뿌듯했어요. Q. <한양에 여풍이 분다>라는 주제에 맞게 여성으로서의 파워가 대단하신데 혹시 여성 학우들을 위한 조언이나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기준을 남에게 두지 말라고 조언해주고 싶어요. 무조건적으로 남성을 이기려 한다든지 잘 보이려고 하는 것은 기준을 남성에게 두고 있는 거잖아요. 스스로가 자신에 대해 대결 구조를 만들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살리고 나 자체로서의 나를 인정했으면 좋겠어요. 움츠려들지 말고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세요. 또 한 가지 모든 학우들에게 조언하고 싶은 점이 있어요. 간절히 원하면 목표가 생기고, 목표가 생기면 노력하게 됩니다. 많은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꼭 찾아 나섰으면 좋겠습니다. 김 교수는 일본의 하이쿠처럼 ‘한국의 문학’하면 세계 누구나 ‘시조’를 떠올릴 수 있을 때까지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한국시조학회에서 한양대학교 여성의 위상을 떨치고 있는 김상진 교수의 앞으로 의 행보를 기대해본다. * 하이쿠: 5,7,5의 음수율을 지닌 17자로 된 일본의 짧은 정형시를 일컫는 말이다. 하이쿠는 세계에서 그 유래를 보기 드문 짧은 시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대중시로서 확고한 자리를 잡고 있다. * 본 기사는 HY ERICA 2016년 3·4월 79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 79호 전체 기사 리스트 보러가기 (클릭)

2016-04 11

[교수]김효준 교수, 비만 없는 세상을 꿈꾸다

대한민국은 지금 다이어트 열풍이다. 비만율이 4.3%로 OECD 국가 44개국 중 43위를 할 정도로 세계 그 어느 곳보다 비만율이 낮고 조금만 검색해도 온오프라인에서 다이어트에 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다. 사람들은 효능이 검증되지 않은 다이어트 식품과 약품을 찾으면서까지 체중 감량에 열을 올린다. 대체 왜 대한민국은 ‘비만’을 이렇게 두려워하는 것일까? Editor 박서정, 배새아 학생기자, Photographer 김하은, 위대한 학생기자 ▲ 김효준 한양대 분자생명과학과 교수 그 이유는 아마 비만이 단순히 살의 문제를 넘어 건강까지도 위협하기 때문일 것이다. 비만은 당뇨, 동맥경화, 암 등 각종 성인병의 원인이 되며 그 외의 일상생활에도 많은 지장을 준다. 비만의 위협은 비단 대한민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보건기구 WTO에서는 이미 오래 전 비만을 질병으로 규정하고 세계 비만 인구를 줄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으며 유럽을 비롯한 다수 국가에서는 비만세라는 제도까지 도입해 비만율 줄이기에 앞장서고 있다. 그렇다면, 이미 발생한 비만을 치료하기에 앞서 비만을 예방해 비만 인구수가 0에 수렴하는 세상이 온다면 어떨까? 우리 대학에 ‘비만 예방 백신’을 개발한 사람이 있다. 김효준(과기대·분자생명) 교수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 김 교수는 이번 연구 성과에 대해 “1997년부터 시작해 오랫동안 이 백신을 붙들고 연구했다”며 “이 분야에서 차곡차곡 벽돌을 쌓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한 단계씩 과학 기술의 발전을 위해 노력할 뿐”이라는 겸손함을 보였다. “1997년부터 시작해 오랫동안 이 백신을 붙들고 연구했습니다. 연구라는 것은 한 번에 1에서 10으로 올라갈 수 없는 것이지요. 저는 이 분야에서 차곡차곡 벽돌을 쌓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한 단계씩 과학 기술의 발전을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 김 교수는 인터뷰를 시작하며 겸손하게 운을 띄웠다. 그의 손사래가 겸손으로 느껴졌던 것은 아마 연구실을 가득 메운 상패와 연구 자료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대표이사로 있는 바이오 벤처 에스제이바이오메드는 비만 예방 백신 개발을 공식 발표했다. 에스제이바이오메드는 과학기술부 바이오 디스커버리사업의 지원을 받아 지방 대사과정에서 비만성 체지방의 축적을 선택적으로 차단해주는 인공 펩티드(pB4)를 연구해 왔으며, 최근 동물실험을 거쳐 미국 특허를 획득했다. 특허를 받은 비만백신은 지방 대사와 인체 면역 반응 체계를 융합시킨 인체 친화적인 새로운 개념이다. 음식으로 섭취된 지방은 혈액을 통해 간으로 이송된다. 지방은 간에서 아포-B100 (apolipoprotein B-100)이라는 단백질로 둘러싸여 작은 기름방울 형태로 혈중으로 다시 방출되어 신체 각부에서 활용하고 저장하게 되는데 본 연구는 아포-B100의 특정부분의 구조를 흉내 낸 구조적 유사체 (mimotope)를 인공적으로 만들어 백신 형태로 주사하면 우리 몸에서 치료적 항체반응을 일으키는 펩티드인 미모토프(mimotope)를 이물질로 판단해서 이에 대한 항체를 만들어 내게 되는 원리이다. 이 항체는 지방입자를 둘러쌓고 있는 아포B-100에도 결합하게 되고 그 결과 지방입자의 분해, 저장을 저해하게 된다. 이 때 또 다른 중요한 기능이 나타나는데, 지방입자에 결합된 항체에 의해 특정 대식세포(macrophage)가 활성화되는 것이다. 이 연구에서 중요한 핵심은 지방조직, 특히 복부지방조직에서 지방입자-항체 복합체를 포획한 대식세포의 활성화에 따른 면역학적 기능과 지방세포내의 지방분해효소의 활성이 비만과 밀접하게 연계되어있다는 것이다. (주)에스제이바이오는 일반 실험용 쥐와 백신을 접종시킨 쥐를 고지방 음식으로 사육한 결과 일반 쥐의 경우 체중이 1.3~1.5배로 증가했지만 백신을 맞은 쥐의 경우는 기존 몸무게를 유지했다고 밝혔다. ▲ 김효준 교수는 이번 연구결과에 대해 “97년도에 처음 연구를 시작한 이후 여러 명의 학생들과 함께 연구한 결실”이라고 전했다. 그가 개발한 비만 예방 백신은 비만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접근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기존의 비만 치료 접근법과 차별화 된 이 백신은 안전하고 효과적인 비만 치료제로 기대되고 있다. 또한 이번 연구는 기존의 예방 백신과도 성향이 다르다. 1798년 Edward Jenner가 처음으로 천연두를 백신 요법으로 예방하는 시도를 성공했다. 그리고 그 뒤 결핵 등의 수많은 전염병에 대한 백신요법이 많은 사람들을 전염병으로부터 구했다. 이후 생명과학의 발전으로 유전자 공학과 면역학 등이 발전하면서 이제는 인플루엔자, 대상포진, 폐렴, 자궁경부암 등 다양한 병을 치료 및 예방하게 되었다. 하지만 백신은 아직 감염성 질병의 분야에만 국한돼 있다. 그러므로 김효준 교수의 비만 백신의 성공은 비감염성 질환의 영역의 기초가 될 수 있다. 비만, 동맥경화, 당뇨 등의 대사성 질환과 치매와 같은 노인성질환 그리고 흡연 같은 중독성 질환도 예방 혹은 치료하는 차세대 프리미엄 백신의 개발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비만’을 예방하는 백신을 만드는 것과 다르게 김효준 교수는 매우 마른 체형의 소유자였다. 그는 왜 하필 ‘비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일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비만을 극복하기 위해 정말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며 애를 쓰죠.” 비만을 치료하기 위해 비효율적이고 부작용이 있을 지도 모르는 약을 먹거나 수술까지 감행하는 사람들의 사례들을 보며 효율적이고 인체친화적인 방법으로 바이오 치료법을 시도해보고자 했다는 김효준 교수. 그가 개발한 백신은 매일 혹은 짧은 주기로 반복 투여하여 특정 기능을 차단하는 약과 달리 정기적으로 맞으면 비만을 억제하는 기능성 항체가 체내에 생성되어 비만이 억제된다고 한다. ▲ 김효준 교수가 한양대 Micro Biochip Center로부터 받은 감사패 “97년도에 처음 연구를 시작한 이후 여러 명의 학생들과 함께 연구한 결실입니다. 지금도 바이오 디스커버리 사업 명목으로 후속 연구가 진행되고 있고요.” 그가 처음 비만 백신을 연구할 때에는 완전히 독창적이고 새로운 개념으로 기존의 개념과의 연계성을 설명하는 데 애로사항이 많았다고 한다. 한 교수는 그에게 면역학을 다시 배우고 오라고 할 정도였다고. 그러나 2007년 이후 국제적 학술지에 지방 대사 및 면역학적 성과들이 속속 발표되면서 비로 소 그의 비만백신이 인정받게 됐다. “제가 만든 백신을 비롯한 모든 비만치료제는 살이 더 찌는 것을 막아주는 것입니다. 왕성한 식욕을 충족시켜도 살이 찌지 않는 비만 치료제로만 이 백신을 사용할 것을 권장합니다.” 적당히 뚱뚱한 사람이 마른 사람보다 오래 산다며 그는 자신이 과체중 혹은 비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체중 감량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백신을 권장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1980년대 후반 그가 처음 생명과학을 시작할 무렵에는 그 분야가 매우 생소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화학이 근본이 되어 생명 과학을 연구했지만 지금은 온전히 생명 과학만을 연구해도 그 양이 엄청날 정도로 분야가 넓어졌다. 정부에서 연구비가 지원되긴 하지만 이렇게 발전한 우리나라의 생명과학을 위한 자금력이 많이 부족한 상태라고 한다. 또한 취업률을 따져야 하다 보니 이론을 배우는 학부 이후에 석사, 박사를 통해 실기와 연구력을 배우지 않고 취업을 하는 학생들이 상당수라고 김 교수는 안타까움을 표출했다. “석사까지 배우는 것은 절름발이예요. 박사 과정까지 떼고 난 학생은 어느 기업에서든 데리고 가고 싶어 하죠.” 하지만 그도 현실을 이해한다. IT같은 경우는 회사에서 워낙 자금이 잘 도니 월급이 높지만 생명 과학 분야는 그에 비해 매출도 적고 그로 인해 인재를 양성하기에도 부족한 실정이라고 한다. 생명과학은 말 그대로 인간의 생명과 삶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항들을 연구한다. 윤리적인 문제가 끼어있긴 하지만 잘 연구하면 IT분야에 버금가지 않는 각광받는 사업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뜻이 있으면 가게 됩니다. 현재의 과학에 하나를 더 얹는 역할을 할 뿐, 그것을 뛰어넘어 얹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공상 과학이죠. 제가 은퇴를 하게 되면 또 다른 연구자들이 하나씩 더 쌓고 쌓아 올라가다보면 대한민국 생명과학도 미래가 밝다고 전망합니다.” 라고 말하는 그는 현재까지의 연구에 만족하지 않고 오늘도 연구를 멈추지 않는 연구벌레다. * 본 내용은 HY ERICA 2016년 3·4월 79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 79호 전체 기사 리스트 보러가기 (클릭)

2016-04 07

[교수]고독한 검투사 처럼, 무대 위 성악가의 끝없는 결투

오케스트라의 음악이 시작되고 오페라 극장의 막이 오르면 무대 위의 성악가는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존재가 된다. 목소리만으로 수많은 관객과 마주해야 하는 장장 세 시간의 공연. 그 시간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돌리기 위해선 음악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필요하다. 그 신념 하나로 세계 무대에 당당히 이름을 알린 바리톤 고성현 교수(성악과)를 지난 18일 만났다. 성악가이자 교수로, 그리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한 사람으로서의 인간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내 음악에 한 점 부끄럼 없기를 ▲ 바리톤 고성현 교수(성악과)를 만나 어린 시절 부터 앞으로의 계획까지, 음악과 함께 살아온 이야 기를 들었다. 고성현 교수는 온 세계를 누비며 우리나라 성악의 대표 주자로 자리잡은 인물이다. 23년 전 한양대학교에 임용됐고, 이후에도 끊임없이 세계 무대를 향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특히 베르디 서거 100주년 기념으로 독일 쾰른에서 공연된 오페라 ‘리골레토’에서는 서양 성악가들을 제치고 전체 공연의 주연을 꿰찼다. 셀 수 없이 많은 무대에 올랐지만 이스라엘의 수도 텔아비브에서 지난 2003년 공연한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그 무대에서 고 교수는 음악 인생을 통틀어 가장 열띤 환호를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덟 번의 실내 공연이 끝나고 추가로 진행된 야외 공연에 15만 명에 달하는 관객이 모였던 것.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라는 곡을 불렀을 땐 무대와 관객이 하나되는 것 같았다고. “수많은 관객이 주황색 야광봉을 촛불처럼 들고 있었어요. 꿈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 펼쳐진 거죠. 어떤 음악가라도 자신에게 가장 큰 관심과 사랑을 준 무대를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꼽을 거예요.” 고 교수가 이 무대를 소중히 생각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영국에서의 출연 요청을 고사하고 올라간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고 교수는 이스라엘에 체류 중이던 당시 ‘런던으로 날아와 세계적인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와 함께 공연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급박한 전화였음에도 불구하고, 고 교수는 예정된 공연을 생각해 이스라엘 텔아비브 극장과의 신의를 지켰다. “성악가의 커리어에서는 어디서 어떤 공연을 했는지가 중요해요. 런던 코벤트 가든은 이스라엘에 비할 수 없는 큰 무대에요. 그런데 런던으로 날아가면 바로 무대에 서야 했어요. 그렇게는 노래하고 싶지 않았어요.” 이 교수의 결정은 이스라엘 안에서도 큰 화제가 됐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제가 당연히 런던으로 갈 줄 알았대요. 남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마지막 야외 공연이 이스라엘 전역으로 생중계 됐어요. 신문에서는 ‘한국에서 온 모세’라고 대서특필 됐어요. 외국에서 잘 안되면 귀국해서 제자들하고 노래하면서 살겠다는 마음으로 내린 결정인데, 결과적으로는 음악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셈이 됐죠.” 고 교수가 쉽게 타협하지 않은 이유는 부끄럽지 않은 음악을 하겠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젊은 나이에 임용된 교수이면서, 오페라의 본고장인 유럽 무대에 서는 동양인으로 살아가는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겠다는 것. “성악가는 고대 로마의 검투사 같은 존재에요. 적게는 2천 명, 많게는 수만 명 앞에서 싸워야 하니까요. 호랑이처럼 포효하는 음악과, 물소 떼처럼 무대로 달려들 것 같은 관객 앞에 서는 제 목소리에 힘이 없다면 저는 부끄러운 존재가 되는 거에요. 해외 무대에서는 더 그렇겠죠.” 고 교수는 늘 자신이 가진 능력의 최선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해 왔다. 마지막 결투를 마친 뒤 홀연히 자리를 떠나는 서부 영화 주인공처럼, 어떤 미련과 후회도 남지 않도록 무대에서 온 힘을 다한다. 더 많은 이들과의 소통을 꿈꾸다 고 교수는 오페라 극장 밖에서도 음악으로 세상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왔다. 방송 출연은 물론, 작년에는 크로스오버 앨범도 발매했다. 좋은 노래를 많은 사람에게 들려주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이라고 말하는 고 교수. 순수한 정서가 담긴 노래를 통해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의 눈높이를 더 높여주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요즘 셰프들은 방송에 출연해서 떡볶이처럼 우리에게 친숙한 음식을 만들면서 인기를 얻고 있잖아요. 제가 크로스오버 앨범을 내고, 많은 사람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노래를 부르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에요. 이태리어나 독일어로 부르는 것보다는 우리말로 부르면 더 많은 사람이 듣게 될 테니까요.” ▲ 오페라 <팔리아치>의 아리아를 열창하는 고성현 교수. 이탈리아에서는 성악가 네 명의 목소리를 합친 것과 같다며 '콰트로 바리토니'라는 찬사를 받았다. (출처 : 고성현 교수) 클래식이라는 틀 안에만 자신의 음악을 가두어두고 싶지 않다는 고 교수. 대중음악을 부르는 것은 자신을 통해서 더욱 많은 이들이 클래식과 오페라에 가까워지게 하는 동시에 자신의 음악세계를 넓혀가는 한 과정이란다. “이탈리아에서는 파스타가 거의 주식에 가깝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가끔 먹는 음식이잖아요. 음악도 마찬가진거 같아요. 유럽에서는 오페라가 대중적인 문화예술이지만 여기서는 아니잖아요. 제가 오페라만 혹은 클래식만 고수하면 누구하고도 소통할 수 없을거에요. 음악은 함께 즐겨야 하는 거잖아요.” 나를 내려놓고 세상을 바라보다 고 교수는 이제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자신을 내려놓고 지금보다 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의 역할에 온 힘을 다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과 삶을 쉽게 부정하지 않는 것이 고 교수가 생각하는 겸손의 의미다. “사람들은 제가 모든 성악가가 꿈꾸는 벨 칸토 창법을 완벽하게 구사한다고 얘기하는데, 저도 아직 갈 길이 멀어요. 저도 소리가 어제 다르고 오늘 또 다른데요. 제가 살아있을 때는 저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기도 힘들어요. 그런데 조금 더 나이 먹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어른들이 젊은 친구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그래서인지 고 교수는 제자들을 대할 때만큼은 자신의 기준을 잠시 뒤로 하고, 그들과 같은 눈높이에 서려고 한다. 제자들의 부족한 점을 더 많이 보게 됐지만, 그것을 다 지적하지는 않는다고. 설령 제자들이 자신의 기대치를 충족하지 못한다 해도 말이다. “제가 저를 대하는 기준으로 아이들을 대하면 미래의 모든 가능성을 잘라버리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십 년, 이십 년 더 노래해야 자신의 음악을 완성할 수 있을 테니까, 그것을 키워주려면 제가 그 눈높이로 내려가야죠.” ▲ 고성현 교수는 "순수한 정서가 담긴 노래가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았으면 한다"고 이야기한다. (영상을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출처 : 문화빅뱅 더 콘서트/네이버 TV캐스트) 한 걸음 더 나아가 직접 사람들을 찾아가 음악의 향기를 전하려고 한다. 자신의 이름을 건 문화재단을 설립해, 클래식 음악 공연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은 곳에서 공연을 열고, 그곳에서 노래하겠다는 것. 작은 봉고차에 스피커 하나만 싣고, 시골 마을과 섬마을, 대학가를 돌아다니며 노래하는 것이 고 교수의 꿈이다. “제가 번 돈을 기부하는 것보다는 재능기부의 형태로 노래하는 것이 더 의미 있을 거에요. 차나 스피커를 사거나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재원은 저처럼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기업가들이 기부해줬으면 해요. 각자가 잘할 수 있는 일에 힘을 보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거죠.” 고전 음악을 노래하는 성악가이지만, 고 교수의 눈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을 넘어 언젠가 다가올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재능으로 더 밝은 내일을 만들기를 꿈꾸는 고 교수의 노래는 앞으로도 많은 이들의 가슴에 울려 퍼질 것이다. ▲ "나이가 들면 사람의 생각은 점점 부정적으로 변해요. 그때가 오기 전에 여러분 안에 있는 긍정의 힘을 잘 다스리시기 바랍니다." 고성현 교수의 목소리에는 내일을 꿈꾸는 긍정의 힘이 담겨 있다. 글/ 정진훈 기자 cici0961@hanyang.ac.kr (☜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사진/ 이재오 기자 bigpie19@hanyang.ac.kr

2016-03 15

[교수]세기의 숙제...'중력파 연구'에서 두각, 이현규 교수

중력파가 발견됐다. 아인슈타인이 그 존재를 예측한지 정확히 100년 만이다. 힉스 입자와 더불어 21세기 물리학 분야의 최고 성과라 꼽히는 중력파 검출. 1000여명이 참여한 이번 논문에는 한국인 과학자 14명도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한국중력파연구협력단(KGWG) 연구진들이다. 한양대 이현규 교수도 여기에 속해있다. 한평생 물리학을 연구하고, 올해로 교직을 떠나는 이현규 교수(물리학과)를 만났다. 아인슈타인의 숙원을 풀다 ▲ 지난 2월 26일 한양대학교 자연과학관에서 정 년퇴임을 앞둔 이현규 교수(물리학과)를 만났다. 이현규 교수는 한국중력파연구협력단(KGWG)의 단원으로 이번 중력파 발견 연구 논문에 당당히 이 름을 올렸다. 이 교수는 입자물리학의 범주 안에서 ‘고밀도 강입자’, ‘천체 입자’ 등을 연구해 온 학자다. 특히 '쿼크'의 기본 모형을 알아내는 데 주력했다. 쿼크는 지금까지 밝혀진 것 중에서 가장 작은 입자로 불리지만, 그 구조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블랙홀이나 중성자별 등을 자세히 관찰하면 쿼크의 상호 작용을 더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감마선 폭발이라는 새로운 천체 현상이 발견됐죠.” 감마선 폭발은 중성자별이 충돌하며 발생하는 현상이다. 중력파 역시 그 과정에서 방출되는데, 이들이 쿼크 입자의 구조를 판별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는 게 이 교수의 설명이다. 중력파는 물질과 간섭하지 않고, 무한히 뻗어나가기 때문에 쿼크의 구조를 정확히 알려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단서라는 것. 그렇게 이 교수는 중력파 연구에 발을 디디게 된다. “각지에서 중력파를 연구하는 이들이 모여서 한국중력파연구협력단을 만들었어요. 지난 2000년 초반의 일이었죠. 그리고 지난 2009년 라이고 과학협력단(LSC, LIGO Scientific Collaboration)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이 교수는 이번 연구에서 레이저간섭계중력파관측소인 라이고(LIGO, Laser Interferometer Gravitational-Wave Observatory)가 수집한 정보를 처리하고, 해석하는 역할을 맡았다. 중력파는 굉장히 미약할뿐더러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때문에 단 한번의 중력파 검출을 위해서도 막대한 정보량을 수집해야 한다. 이 교수는 “입자에 대한 궁금증으로 시작한 일인 만큼 개인적으로는 감마선 폭발로 인한 중력파 신호를 검출하는 데 집중했다”고 했다. 중력파 검출이 가진 의미는 어마어마하다. 이 교수는 “우리가 전자기파를 통해서 새롭게 우주를 보게 된 것처럼, 중력파를 통해서 완전히 새로운 우주를 들을 수 있게 됐다”며 “또 다른 정보체계가 생길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중력파 연구가 파생시킬 응용 분야는 무궁무진하다. 빅뱅 직후의 우주를 탐구할 수도 있고, 다양한 천체 형상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별이 폭발하면서 생기는 중력파엔 어떤 ‘정보’가 실려 있습니다. 그 정보를 통해서 굉장히 작은 입자의 구조를 볼 수도 있고, 폭발 전 별의 상태도 알 수가 있어요.” 이 교수는 “중력파를 이용한 통신도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지구를 투과해 통신이 가능한 만큼 통신 분야에서의 활용도 기대가 됩니다.” ▲ 데이비드 라이츠(David Reitze) 미국 라이고(LIGO) 실험 책임자(미국 캘리포니아공대 교수)가 한국시간으로 지난 2월 12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중력파를 찾았다고 발표하고 있다. 물리학에 입문하다 ▲ 이현규 교수는 37년의 교직 생활을 마치는 소감 에 대해 "그동안 했던 일을 계속할 예정이라 그런 지 생각만큼 아쉽지는 않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한평생 물리학을 연구했다. 물리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등학교 때 물리반에서 활동했어요. 학교에 마침 실험기구도 많았고,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됐죠”. 이 교수는 중력가속도를 탐구하려고 북한산 백운대에 올랐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몇 개의 추랑 스톱 워치만 가지고 단출하게 시도한 실험이에요. 고도가 높은 산에선 추가 얼마나 움직이는지, 고도가 낮은 바다에선 추가 얼마나 움직이는지를 측정하는 거였죠 .” 변변찮은 장비라 실험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그 과정만큼은 너무나 즐거웠다는 이 교수. 결국 물리학도의 길을 걷게 됐다. 학부 시절부터 물리학을 전공한 이 교수는 입자물리학, 천체물리학 등을 지속적으로 연구해 교수의 자리까지 올랐다. 하나의 정답을 찾기 위해, 다양한 분야를 탐구하는 과정 자체에 매력을 느꼈다고. 하지만 물리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국가적 지원은 다른 과학 분야에 비해 미비한 실정이다. “우리나라에서 물리학을 한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화학이나 기계공학 같은, 더 실용적인 분야에 관심을 주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수는 우직하게 물리학 연구를 계속했다. “학문에는 끈기가 있어야 합니다. 강직하게 연구를 계속하는 것이 중요하죠.” 이 교수의 연구 열정은 퇴임 후에도 계속될 전망이다. “중력파 연구를 마무리 지을 생각이에요. 중력파를 통해 입자 내부의 구조를 발견하려는 연구를 멈추지 않을 겁니다.” 물리학에 대한 순수한 열정 이 교수는 퇴임을 앞두고 학생들에게 남기고 싶은 한마디로 “꿈을 잃지 말되, 명확한 방향을 가지고 노력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환경이 바뀌면 꿈을 잃게 됩니다. 그럴 때 마음을 다잡고 꿈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끈기를 가지고 열심히 하는 것이 최선이죠.” 일생을 물리학 연구에 바친 학자의 면모가 풍겼다. 이 교수는 “많은 사람들이 물리학을 통해 세상을 보는 또 다른 눈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물리학에 관해서라면 누구보다 뜨거운 열정을 가진 그. 물리학 이야기를 전하는 이 교수의 눈빛이 어린아이처럼 반짝였다. 글/ 이재오 기자 bigpie19@hanyang.ac.kr (☜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사진/ 김윤수 기자 rladbstn625@hanyang.ac.kr

2016-03 09

[교수]나눔을 통한 한양다움, 한양대 이영무 총장 인터뷰

* 본 인터뷰는 한양대 사회봉사단 저널 '희망 함께 한대' 2016년 2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 한양대 이영무 총장과의 인터뷰. ‘사랑의 실천’, ‘사회봉사 과목’, ‘사회봉사단’ 등과 관련한 진솔하고 유의미한 이야기를 나눴다. Q. 사랑의 실천에 관한 총장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또한 이를 실천하신 개인적인 경험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한양대학교에는 사랑의 실천이라는 정신이 굳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를 세워주신 설립자 분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어렸을 적에는 사랑의 실천이라는 가치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지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한양대학교를 마친 뒤 유학을 가고, 교수로 재직하는 과정을 거치며 성장하면서 제가 받은 사랑의 깊이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대학 재학 4년 간 학교의 신문 기자로 활동을 했습니다. 이로 인해 장학 혜택을 받을 수 있었고 성적 장학금도 받았습니다.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학업을 지속할 수 있었지요. 학업을 마친 뒤 1982년도에는 제2기 교비 유학생으로 뽑혀 유학을 가게 됐습니다. 가기 전에는 본교로 돌아와 제가 받은 사랑을 나누겠다는 서약에 서명하는 과정이 있었고, 저는 제가 학교와 다른 분들에게 받은 배움과 사랑을 다시금 나누기 위해 한양대학교로 돌아와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교수로 재직하던 중, 다양한 학생들을 만나면서 이들에게 제가 받은 사랑을 나누어주고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를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러던 중 1988년도에 2학년 2학기 복학을 준비하는 한 학생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서른다섯의 교수였어요. 이 학생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친구였고 등록금이 없어 복학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성내 역 근처의 쓰레기 집하장이 그 친구의 집이었는데 저는 그의 눈빛에서 절실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제가 받아 온 기회와 사랑, 가능성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친구를 위해 받을 수 있는 장학 혜택을 알아봐주었고 제 사비를 내어 주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그를 돕고 싶었고 제가 받은 사랑을 깨닫게 해 주었음에 감사했습니다. 그 학생은 무사히 졸업한 뒤 지금은 한 회계법인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아버지의 사업 부도로 빚을 상속받은 여학생이 있었어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곧잘 해 대학에 왔고, 저는 그 학생이 ‘중간고사 공부 좀 해 봤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많은 학생들에게 중간고사 공부란, 너무도 하기 싫은 일이었을 텐데도 그 학생은 아르바이트를 할 시간도 부족해 공부를 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저는 이러한 만남들을 계기로 제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보며 제가 그 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는지 알 수 있었어요. 그리고 저의 자리에서 제가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게 되었습니다. 2000년도는 저의 아들과 딸이 모두 한양대학교에 들어 온 해입니다. 감사하게도 둘 다 등록금 장학 혜택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며 이들의 혜택이 다른 친구에게도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등록금 기부를 할 수 있었고 이러한 기회에 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2020년 퇴직을 앞두고 조그만 목표를 하나 정했습니다. 매 년 1000만원씩 기부를 목표로 퇴임까지 1억 원 정도의 장학 혜택을 학생들에게 돌려주고 싶었습니다. 제가 이렇듯 나눔을 결심하고 나니 나눌 것이 더 커지는 일이 생기더군요. 저는 제 전공을 살리면서 누군가를 돕고 싶었습니다. 고분자학을 전공했는데 세상으로 눈을 돌리니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았습니다. 전공 연구와 논문 등을 기반으로 2010년에 녹색기술대상 상금으로 3000만원을 받게 되었고 적정 기술 관련 물 부족 국가를 위한 고분자 필터 개발로 경암 학술상으로 2억 원의 상금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 2000년도에는 창업을 통해 메디폼, 가딕스 등의 제품으로 1억 원 정도의 배당금을 받아 이 모든 상금들을 통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모으고자 했던 ‘파이’가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퇴임 전까지 5억 원을 기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답니다. 이러한 스토리를 들려드리는 이유는 ‘나누려 할수록 커진다’는 것을 제가 경험했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약 43년간의 기간 동안 제가 받은 것들을 나름대로 나누려고 했던 것들을 나누다 보니 그럴수록 더 많은 것들을 받게 되는 것 같아요. 얼마를 기부하는가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자리에서 나눌 수 있는 것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것, 그리고 사회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일만큼 보람된 것은 없습니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나누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Q. 현재 한양대학교에서는 사회봉사 과목이 정규 교과과목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갖는 사회적 영향과 그 의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1994년 전국의 대학들 중 최초로 사회봉사단을 창단하고 사회봉사를 교과목으로 학점화 하면서 한양대학교는 기타 다른 대학의 봉사를 이끌어내는 선도주자가 되었습니다. 대학에서의 봉사에 관한 일종의 ‘메카’가 된 것이지요. 또한 2009년에는 이를 기초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여 한양대학교의 모든 학생에게 봉사에 관한 기회가 더 크게 열렸습니다. 이것을 통해 학생들이 대학 시절에 봉사를 경험하면서 졸업 후에도 사회 각 자리에서 봉사에 대한 주도적이고 자주적인 활동을 지속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해서 나타난 것이 바로 동문 봉사단인 ‘희망 한대’입니다. 이들은 모두 사회 봉사단 출신이고, 열정적인 활동으로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 접한 봉사가 성인이 되어서도 개인의 가치관에 깊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지요. 저는 봉사가 우리 사회를 위한 단지 하나의 사건으로 남기보다는, 사회와 국가를 넘어 세계로 영향력을 끼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봉사라는 가치를 통해 한양대학교 학생들이 국제 사회를 변화시키고 인류에 이바지하는 변화를 이끌어 내리라 생각합니다. Q. 대학에서 사랑의 실천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실천되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학생들 입장에서의 사회봉사도 중요하지만, 학생과 교수, 그리고 임직원 모두가 마음속에 대학의 가치인 ‘사랑의 실천’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의 실천은 각자의 자리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역할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총장 입장에서 사랑의 실천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생각해 보고, 교육자적 입장에서 강의에 대한 발전을 꾀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며 학교의 구성원인 임직원들에 대해 내가 무엇을 해 드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 역시 사랑의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임직원 선생님들은 학교의 학생들에게 어떠한 배려와 나눔을 실천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요. 혹은 미래의 우리 학생들인 캠퍼스 투어를 온 고등학생들에게 무엇이 필요할까 하는 것들을 배려하는 것 역시 사랑의 실천입니다. 물질적인 것, 물건을 나누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구성원들이 서로 배려하고 나누며 베풂을 실천하는 것 역시 사랑의 실천이며 이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한양대학교 사회봉사단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총장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기존 22년 동안 사회봉사단이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길을 닦고 많은 족적을 남겼습니다. 이제는 국제사회에 대해, 대학의 전공 지식을 기반으로 전문화된 봉사를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의 명문 대학들의 시야는 자기 자신의 문제에만 국한되지도, 국내의 문제에 국한되지도 않습니다. 그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눔을 베풀 수 있는 글로벌 이슈, 예를 들면 기후 변화라든가 물 부족 문제와 같은 것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는 사실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대학의 입장에서, 학생의 입장에서 가지고 있는 솔루션을 내 놓는 것이 지금 우리가 국제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 봉사단 역시 20년 동안 많은 디딤돌을 놓았기에, 이제는 글로벌 이슈에 관해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시기가 되었습니다. 연탄 봉사, 김장과 같은 봉사도 중요하지만 이것을 지속하면서 한 차원 도약할 수 있는 성장하는 봉사자의 역할이 필요해졌다고 봅니다. 단순히 학생들, 사회 봉사단 뿐 아니라 동문들과 기업의 참여 역시 어우러져 더욱 효과적이고 영향력 있는 사랑의 실천을 행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Q. 마지막으로 사랑의 실천을 실천하고 있는 한양대학교의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대학이라는 시기는 인생에서 가장 귀한 ‘인생의 황금기’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 시절은 정말 중요한 시기이죠. 이 때 어떤 인풋을 받고 어떤 고민을 했는지에 따라 인생이 많이 달라집니다. 학생들이 내가 받은 사랑을 누군가에게 나누는 경험을 하는 것, 그 가치를 갖고 세상을 나가는 것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정말 큰 차이를 가져요. 우리 학생들이 사회와 미래를 위한 재목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확신하며 계층 간 희망의 끈, 인류를 향한 무한한 사랑의 실천을 이루는 사람이 되리라 기대합니다. 인터뷰·이정우 | 사진·정해준

2016-03 09

[교수]기업가를 키우는 도전... 창조와 균형의 기업생태계를 가꾸다

기업은 어떻게 태어나고 성장하며 쇠퇴하는가. 그 답을 찾기 위해 기업 현장을 발로 뛰며 연구한 교수가 있다. 한정화 교수(경영대 경영학)는 벤처기업과 경영전략을 연구하며 많은 기업인을 만나 목소리를 듣고, 기업의 성공 전략을 함께 고민하는 학자였다. 그 경험을 인정받아 지난 2013년, 중소기업 정책을 총괄하는 중소기업청장(이하 ‘중기청장’)으로 발탁됐다. 역대 중기청장중 가장 오래 재임하며, 중소기업과 벤처기업 육성에 필요한 정책들을 안착시켰다. 2년 10개월의 긴 공직 생활을 마치고 강단으로 돌아온 한 교수를 찾아가, 공직 생활의 소회에 관해 물었다. 창업자에게 힘이 되는 정책을 만들다 ▲ 지난 2월 25일, 학교로 돌아온 한정화 교수(경 영대 경영학)를 만나 우리 경제가 나아가야 할 길 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중소기업청은 중소중견기업에 대한 지원뿐 아니라, 전통시장 활성화와 벤처기업 육성,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공정거래 환경 구축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업무를 수행하는 정부 부처다. 여러 업종의 기업과 소상공인들을 위한 정책기관의 수장으로서 한 교수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무엇이었을까. 한 교수는 ‘창조정책’과 ‘균형정책’이 기업생태계 구축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더욱 많은 사람이 벤처창업을 통해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게 하는 것이 창조정책입니다. 균형정책은 시장 독점력을 가진 대기업과 그렇지 못한 중소기업, 소상공인 간의 불균형을 바로잡는 정책이고요. 이 두 정책을 통해서 창업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역량을 잘 발휘할 수 있는 기업생태계를 구축하고자 했습니다.” 한 교수의 창조정책을 대표하는 것은 실패한 창업자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는 이른바 ‘재도전정책’이다. 중기청장이 되기 전부터 한 교수는 우수한 인재들이 창업에 도전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고민했다. 창업에 실패한 이들이 막대한 빚 때문에 재기하기 힘들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고. “한 번 실패하면 인생에 금이 간다는 인식이 창업에 도전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에요. 그래서 과거의 빚이라는 족쇄에 매여 시장에서 고전하지 않도록 하는 정책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교수는 팔을 걷어붙였다. 창업자의 자금조달을 어렵게 하는 창업자 연대보증제도를 폐지하고, 열심히 기업 활동을 했지만 실패한 창업자들에 대한 채무조정이 가능하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이 밖에도 재창업교육과 멘토링 프로그램 등을 시행해 실패한 창업자들의 경험이 더 큰 성공을 위한 밑거름이 되도록 했다. 전문가들의 기술창업을 지원하는 프로그램 TIPS(Tech Incubator Program for Startup)를 도입한 것도 한 교수의 중요한 성과다. ▲ 한정화 교수가 중소기업청장이었던 지난 1월, 놀이방 매트 생산업체 아이앤에스를 찾아 생산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한 교수는 언제나 문제의 답을 찾아 현장으로 나서는 학자이자, 공직자였다. (출처: 한정화 교수 페이스북) ‘갑질’ 없는 사회를 생각하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불균형을 조정하고, 동반성장을 가능하게 하는데에도 한 교수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중기청장으로서 가장 주목받는 성과는 공영홈쇼핑 채널인 ‘아임쇼핑’을 설립한 것. 방송사업을 주관하는 미래창조과학부와 협력한 결과다. 홈쇼핑은 중소기업의 중요한 유통채널이자 홍보수단이지만, 대기업 채널들의 지위 남용으로 중소기업이 피해를 보는 사례가 많았다. 아임쇼핑은 기존 채널보다 판매수수료가 최대 11%포인트 낮고, 판매 수익을 농가와 중소기업 경쟁력 강화에 재투자해 홈쇼핑의 공공성을 강화했다. 한 교수는 “홈쇼핑 업체들의 이른바 ‘갑질’이 심하다보니, 중소기업들은 납품하고도 제대로 돈을 벌기 어려운 구조였습니다. 아임쇼핑이 홈쇼핑의 공공성을 높이는 도전을 시작한 후, 다른 업체들도 자극을 받아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 교수는 공정거래 환경 구축을 위해 더 힘쓰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시장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경제적 불균형과 불평등을 없애고 동반성장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공정거래 문제에는 아직도 힘의 불균형이 너무 큽니다. 우수한 기술력을 가진 중소기업의 핵심 인력을 대기업에서 스카우트 해서 기술을 탈취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있어요. 피해를 본 중소기업이 법적으로 대응하려고 해도, 소송을 통해 구제받기는 쉽지 않아요.” 불공정 경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혁명에 가까운 개혁이 필요하다고 한 교수는 말한다. “공정거래 문제는 국가가 위에서 강하게 틀을 잡아줘야 해요. 언제까지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변화하기를 기다릴 순 없어요.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먹고 살 수 있게 돕는 것이 바람직한 국가의 역할이잖아요. 우리 사회가 과감하게 변화를 시도해서 지금의 문제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중소기업청장 재임 시절, 한정화 교수는 여러 차례 전통시장을 찾아 상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사진은 작년 6월에 청주육거리시장에서 떡집 상인과 담소를 나누는 모습. (출처: 한정화 교수 페이스북) 기업가를 키우는 새로운 도전 한 교수는 이제 3년간의 공직 경험을 밑거름으로 내일의 기업가를 키우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국가의 전반적인 경제정책을 다루면서 얻은 경험과 통찰력을 학생들에게 전해주는 동시에, 학생들이 창업에 도전해 내일의 기업가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 목표라고. 한 교수는 ‘한중창업전략연구회’를 만들어, 한국 학생과 중국인 유학생이 함께 창업할 기회를 줄 계획이다. “우리 학생 중에는 중국을 무대로 사업하고 싶어하는 학생들이 있어요. 하지만 혼자만의 힘으로는 쉽지 않고, 좋은 파트너를 만나야 하죠. 중국 학생들도 한국에서 배운 지식을 활용해서 새로운 기회를 잡고 싶어해요. 두 나라의 학생들이 머리를 맞대고 힘을 합치면 시너지 효과가 날 거에요. 단순히 기본적인 지식뿐만 아니라, 자금을 유치해서 실전에 도전하는 기회를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기업가정신은 무엇인지 한 교수에게 물었다. 한 교수는 ‘불확실성에 대한 관용성(Tolerance for Ambiguity)’을 갖춰야 한다고 답했다. “사업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얘기하면 세상의 불확실성에 대한 도전이거든요. 무엇이든 확실한 것만 추구하는 사람들은 창업에 도전하면 건강을 해쳐요.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고, 내가 가진 자원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 기업가정신의 출발점입니다.” 전문가들이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하고, 작은 기업도 실력으로 공정하게 경쟁하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의 역할이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기업가를 길러 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답을 찾기 위한 한 교수의 도전은 멈추지 않는다. ▲ 한정화 교수는 “현실에 대한 불만족을 창조적으로 해결하는것이 기업가정신의 본질”이라고 정의한다. 글/ 정진훈 기자 cici0961@hanyang.ac.kr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사진/ 박설비 기자 sbi444@hanyang.ac.kr

2016-01 27

[교수]'고백할 수 없는'으로 영화에게 고백을

“어릴 때부터 늘 꿈꿔왔던 칸의 레드 카펫은 아니었지만, 작년 한해를 통틀어 가장 기쁜 일이었습니다”. 최인규(언론정보대 신문방송학) 교수의 또 다른 이름은 ‘영화 감독’이다. 지난해 열린 제16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레드 카펫을 밟았다. 학생들에게 영화를 가르치던 교수가 아니라, 엄연한 영화 감독으로 찾은 영화제였다. 영화 <고백할 수 없는>(2015) 통해 관객들과 만나고 온 최 교수. 언젠가 자신의 수업에서 소개할 수 있을 만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그를 만났다. ‘고백할 수 없는’으로 영화에 고백을 ▲ 최인규 교수(언론정보대 신문방송학)는 자신의 첫 장 편 연출작 <고백할 수 없는>(2016)에 대해 "선망 받는 인간의 어두운 면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최인규 교수는 ERICA 캠퍼스의 교양수업 ‘영화와 커뮤니케이션’으로 학생들과 만나고 있다. 그런 그의 또 다른 이름은 ‘영화 감독’이다. <고백할 수 없는>(2016)으로 첫 장편 영화를 연출했고, 지난해 제16회 전주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후보작에 선정됐다. 최 교수는 이전에도 <드라이플라워>(1998)를 비롯해 (2000) 등 다수의 단편 영화에 참여했고, <역전에 산다>(2003)를 기획한 바 있다. 그 외에도 많은 작품에 참여했으나, 10년이 넘도록 직접 연출한 작품은 없었다고. <고백할 수 없는>은 최 교수의 첫 장편 영화다. “많은 작품들을 준비했습니다. 미스터리, 멜로, 드라마 등 여러 작품을 기획했지만 영화화된 작품은 없었죠. 소위 말하는 대로 전부 ‘엎어’졌습니다.” 여러 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최 교수는 영화 연출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았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장편 영화 데뷔를 준비했다. <고백할 수 없는>은 2013년 무렵부터 ‘순결한 고백’이란 가제로 촬영한 작품이다. 고백할 수 없었던 트라우마를 고백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표현한다. 한 유명한 영화감독 병천은 딸의 사생활을 감시하다가 그녀를 괴롭히는 한 남자친구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병천은 차기작을 준비한다는 명목하에 그 친구를 납치해 인터뷰를 진행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분위기는 폭력적으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병천과 딸, 남자친구. 이 세명을 중심으로 타인에 의해 자신의 트라우마를 털어 놓을 수 밖에 없는 아이러니를 묘사한 것. <라쇼몽>(1950)의 현대판 재해석이다. 이 작품은 ‘만약 내가 유명한 감독이 된다면?’이란 가정에서 출발했다. 최 교수는 “유명해져버린 저를 생각해봤다”며, “허위의식과 매너리즘이 있을 법한 유명한 감독을 모델링 해서 썼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작품을 통해 “인간 내면의 숨겨진 악마성을 심리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이 작품은 제16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작품성과 대중성을 고루 인정 받았다. 최 교수는 “작품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대중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로 기쁜 일이었다”며 “환호를 받는 무대에 설 수 있어 좋았다”고 했다. “영화 일을 하며 효도한 일이 얼마 없었는데, 영화제 기간 동안 부모님들을 전주에 초대해 며칠 같이 지냈어요. 두 분의 격려를 받을 수 있었죠. 처음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 같은 보람을 느꼈어요.” <고백할 수 없는>은 이처럼 최 교수와 소중한 사람을 연결해 준 작품이 됐다. ▲영화 <고백할 수 없는>은 3월경에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영상을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에 ▲ "점심 시간에 영화를 보고, 휴가 때마다 영화제를 가는 저를 보며,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어 요." 그날로 최인규 교수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 고 영국으로 떠났다. (출처 : 헤럴드 리뷰스타) 최 교수는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졸업생이다. 원체 활동적인걸 좋아했던 최 교수. 대학교에 입학한 후 극회, 방송국 등 다양한 모임에 참여했다. 그러던 중 한 선배의 소개로 영화 동아리 ‘소나기’에 들어가게 된다. “선배의 권유를 받아들이면서 미래가 달라진 것 같아요. 그때 어영부영 만들던 영화가 알게 모르게 인생에 스며든 거죠.” 최 교수는 졸업 후 우연히 광고 회사에 입사했다. 그러나 도무지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갈수록 마음 한 켠에 영화를 만들고 싶다란 생각을 키웠다. “점심시간에 영화를 보고, 휴가를 내서 영화제를 가는 스스로를 보며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궁핍하더라도 영화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평소 <트레인스포팅>(1996), <풀몬티>(1997) 등 영국영화 특유의 자유로움을 좋아하던 최 교수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영국에서 돌아온 후에는 영화 프로듀서로 데뷔하며 강단에 서게 됐다. 최 교수가 강의하는 ‘영화와 커뮤니케이션’은 ERICA캠퍼스의 인기 교양 강좌다. 영화가 어떤 언어와 형태로 메시지를 전달하는지 알려주는 수업. 어느덧 맡은 지 10년이 지났다. “과거엔 감독들만이 전할 수 있는 다양한 요소들, 이를테면 미장셴이나 특유의 기법들을 가르쳤어요. 지금은 동시대의 영화가 가진 공통적인 특징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1세기에 개봉한 영화들이 이전의 영화들과 가진 차별성을 통해 영화를 이해시키는 것이죠.” <현대 영화의 은밀한 매력>과 <영화적 순간>은 이 수업을 위해 최 교수가 직접 집필했다. 영화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인생은 그 자체로 충분한 영화다 최 교수는 주로 어디서 영감을 떠올리냐는 질문에 “영감을 얻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호기심에서 비롯한 관찰”이라고 답했다. 안 가본 곳을 가는 것에서 주로 영감을 얻는다고. “거창하게 외국이 아니더라도,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골목에 가보는 거죠.” 그는 “골목의 체취나 새로 생긴 숍 등 모든 흥미로운 것들이 생각을 고취시키는 요소”라고 말했다. “만약 언덕이 있다면, ‘언덕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하고 생각합니다. 안 타본 버스 같은 걸 타고 종점까지 가기도 합니다.” 그의 많은 아이디어들은 이런 관찰에서 시작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상 모든 것들이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있다는 게 최 교수의 생각이다. 그의 꿈은 다양했다. 칸의 레드 카펫을 밟는 것, 본인의 수업에서 본인의 영화를 소개하는 것,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만난 감독 지망생과 멋지게 재회하는 것 등. 하지만 ‘영화인’ 최인규의 최종 목표는 본인의 철학을 온전히 다 담아낸 작품을 만드는 것이라고. “결국에 감독은 작품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러분들께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것이 하나의 작품으로 완전해질 때 비로소 제 꿈이 완성되는 거죠.” 인터뷰를 통해 관찰한 그의 인생은 그 자체로 즐거운 한 편의 영화였다. ▲ "영화가 가진 순수한 이미지와 사운드를 가지고 내 철학을 고백하는 것"이 영화인으로서의 최종 목표라는 최인규 교수. 영화 이야기에 눈이 반짝거리던 그의 인생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영화였다. 글/ 이재오 기자 bigpie19@hanyang.ac.kr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사진/ 김윤수 기자 rladbstn625@hanyang.ac.kr

2016-01 21

[교수]광고홍보학과 부부 교수, 최우수학술상 받다

국적을 비롯해 언어와 문화, 심지어 성별까지. 정말 다른 점이 많은 두 남녀가 ‘홍보’라는 공통 분모로 만났다. 토마스 호비(Hove) 교수(언정대 광고홍보)와 백혜진 교수(언정대 광고홍보)의 이야기다. 두 교수는 지난 11월 27일 공동 집필한 논문 ‘위험 제시 형식과 공포 메시지가 위험 인식에 미치는 효과 연구’를 통해 2015년 한국PR학회 최우수 학술상을 수상했다. 학문의 최우수작품을 만들어 내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시너지 효과를 보다 ▲ '공포확산', '패닉' 등 뉴스에서 다뤄지는 언어적 표현이 인간의 두려움을 증폭시킨다. (출처: Wikipedia) 한국PR학회 최우수 학술상은 학회지 <홍보학 연구(Journal of Public Relations Research)>에서 그 해의 가장 우수한 논문을 선정해 저자에게 주는 상이다. 토마스 호비 교수와 백혜진 교수는 공동 집필한 논문 ‘위험 제시 형식과 공포 메시지가 위험 인식에 미치는 효과(Effects of risk presentation format and fear message on lay people’s risk perceptions)로 이 상을 수상했다. 호비 교수는 “상대적으로 새로운 주제였기에 한국PR학회에서 관심을 가진 것이라 생각한다”며 “놀랍고도 고마운 결과”라고 했다. 백 교수도 “상을 받는 것은 항상 기쁜 일”이라며 “국내로 들어와 처음 맡은 연구가 그 가치를 인정받게 돼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논문은 기자들이 위험을 묘사하는 방식에 따라, 대중들의 위험 인식이 어떻게 다른지 다뤘다. 연구에서 위험은 발암물질, 광우병, 신종플루가 해당된다. 설문조사를 통해 연구가 진행됐다. 사람들에게 같은 위험에 대한 두 버전에 기사를 읽게 했고, 그들이 느끼는 감정을 통계화시켰다. 그 결과 사람들은 ‘치사율 3%’와 같은 구체적인 수치보다 ‘죽음의 확산’같은 언어적 표현에 더욱 두려움을 느낀다는 사실이 나타났다. “메르스 사태 때도 메르스 공포확산, 패닉상태 등의 표현이 대중들을 두려움으로 몰아넣었죠”. 백 교수는 “10을 기준으로 메르스의 실제 위험이 2 정도였다면, 대중들의 공포는 8에 달했다”며 “6의 차이는 기사에서 형성된 공포감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때문에 그녀는 기자들이 정확한 수치와 전문가 의견을 반영한 기사를 쓰는 법을 숙달해야 한다고 했다. 연구 과정에서 두 사람의 역할 분담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백 교수는 데이터에 기반한 통계분석, 양적 연구 등 실질적인 측정치를 다뤘다. 반면, 호비 교수는 추상적인 개념을 다룬 논문을 많이 쓴 이론가다. 호비 교수는 백 교수의 데이터에서 일리 있는 결과를 도출해 냈다. 언어 능력이 탄탄한 호비 교수 덕분에 데이터로 보여주기 어려운 내용까지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고. 두 사람은 각각 본인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업무를 수행했다. 그들의 조화가 연구 속에 녹아 들었고 완성도 높은 논문이 탄생했다. ▲ 서로의 강점이 조화를 이루며 강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 백혜진 교수와 토마스 호비 교수(언정대 광고홍보) 학문의 동료에서 인생의 동반자로 두 사람은 미국에서 처음 만났다. 생김새와 자라온 환경 등 많은 부분이 달랐다. 그러나 금발의 미국인 남성과 까만 눈동자를 가진 한국인 여성은 금세 사랑에 빠졌다. 같은 분야를 공부하면서다. 호비 교수는 “위스콘신대학 대학원에서 광고를 전공하며 백 교수를 만났다”고 운을 뗐다. “백 교수는 박사 학위를 끝내고 조지아대학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었어요. 그녀를 따라가 다른 학부에서 교수직을 시작했죠.” 두 사람은 그 뒤로도 동행을 계속했다. 지난 2008년 백 교수는 미시간주립대학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을 때 호비 교수를 함께 추천했다. 대학 측의 허가로 두 사람은 광고홍보학과 교수로 부임한다. 두 사람은 끝내 결혼에 성공, 가정을 꾸리게 됐다. 그러던 중,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다. 태평양을 건너 약 1만 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우리대학이 백 교수에게 교수직을 제안한 것이다. “국내로 들어오는 것을 두고 심각하게 논의했죠.” 백 교수는 당시를 회상했다. “무엇보다 호비 교수가 미국사람이고, 미시간에 정착하려는 마음으로 집도 사둔 상태였어요.” 하지만 호비 교수는 오히려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호비 교수는 “미국에서의 향후 20년은 예측 가능한 삶이었다”며 “한국에서 새롭게 펼쳐질 문화와 경험에 관심이 갔다”고 말했다. 결국 두 사람은 2012년 한국 땅을 밟았다. ▲ 위스콘신(Wisconsin), 조지아(Georgia), 미시간(Michigan)을 거쳐 10000여km 떨어진 우리대학까지 두 사람의 동행은 이어졌다. (출처: 구글지도) 귀국 후 두 사람은 빠르게 국내 생활에 적응했다. 호비 교수의 믿음직한 통역관이자, 한국 생활의 안내자인 백 교수 도움이 컸단다. 힘든 점도 있었다. “미국의 생활보다 5~6배 바빠진 것 같아요.” 한국에서는 교수 업무 외에도 학회 등 외부 활동이 잦기 때문이라고. 바쁜 생활 속에서 두 사람을 지탱하는 것은 ‘이해’다. 같은 분야의 일을 하다 보니 상대방에 대한 깊은 배려가 가능했다. “잦은 업무로 서로에게 소홀해지기도 했어요. 하지만 서로의 생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부족한 점은 채울 수 있었죠.” 연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분야의 종사자라면 흔히 경쟁 구도가 있기 마련인데 두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맞춰온 호흡을 통해 연구에서 파트너십을 발휘했다. 이해하고 협력하는 생활이 그들의 연구까지 이어진 셈이다. 멈추지 않는 도전 ▲ 서로를 의지하고 협력하면서 두 사람의 새로운 도전도 계속된다. (출처: 백혜진 교수)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번 수상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두 사람은 같은 분야에서 도전을 이어 가고 있다. 호비 교수의 최대 과제는 한국어 정복이다. 개인 튜터까지 둬가며 열심히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나아가 한국의 문화를 폭넓게 이해하고 미국 문화와 차이점을 연구하는 것이 현재의 계획. 백 교수는 헬스커뮤니케이션(Health Communication)분야를 필두로 홍보학의 정체성을 확고히 다지고자 한다. 이 분야에서 한국인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책을 집필하고 과학기술논문 인용색인(SCI급 논문)에 100편의 논문을 싣는 것이 그녀의 목표다. 최근에는 코이카(KOICA)와 협력해 공감캠프에 뛰어들었다. 향후 동티모르를 방문해 보건학자와 의료학자들과 협력하고 융합적인 차원의 보건 연구를 펼칠 계획이다. 호비 교수는 백 교수에 대해 묻는 질문에 “굉장히 사려 깊으며, 내가 본 사람 중 제일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백 교수는 제가 한국에서 더 재미있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 백 교수도 “호비 교수는 정말로 의지가 되는 사람”이라며 강한 신뢰를 나타냈다. 부부이자 동료로 서로를 이해하고 신뢰하는 두 교수. 국경을 뛰어 넘은 ‘같이’의 가치는 앞으로도 계속된다. 글/ 김상연 기자 ksy1442@hanyang.ac.kr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사진/ 김윤수 기자 rladbstn625@ha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