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2075건
뉴스 리스트
게시판 리스트 컨텐츠
2017-11 06

[동문]쉽지 않았지만, 걷고자 했던 길을 갔다

불확실한 세상.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인 이들이 많다. 때로는 자신이 가고 있는 이 길이 맞는지, 혹은 지금 와서 다른 길은 너무 늦은 건 아닐지. 어찌됐건 뒤로는 갈 수 없기에, 고민이 드는 건 당연하다. 특히 한 분야를 깊게 팠던 이일수록, 다른 분야를 파보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어렵다. 그러다 보니 김지희 동문(국악과 92)이 지금까지 걸어온 발걸음은, 조금 아니 많이 특이하게 느껴진다. 판소리 전공자임에도 뮤지컬, 민요 등 여러 장르의 노래를 소화해낸다. 십여 년 전 귀농 이후엔 민요도 새로 접한 김 동문을 간만의 서울 공연 전날인 10월 31일 우리대학 미래자동차공학관에서 만났다. ▲김지희 동문(국악과 92)이 공연 준비를 위해 상경한 지난 10월 1일 우리대학 미래자동차공학관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귀농 후 오래간만의 학교 방문에 김 동문은 무척 즐거워했다. 스토리텔링이 좋았던 소리꾼 김 동문은 오랜만에 찾은 모교를 무척 반가워했다. “학교가 많이 바뀌었네요. 특히 여기저기에 새로운 건물이 많이 생겼고.” 이십 년이 넘었지만 진사로부터 공과대학 건물들을 지나 음악대학까지 오르던 길은 잊혀지지 않는다고. 당시 김 동문은 판소리를 전공했다. 중학교 이전까지는 합창단이나 중창단에 속해 있다가, 국악고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솔직하게는, 서양음악을 해보고 싶었어요. 성악이나 오페라! 그랬는데 유학을 가야 한다는 점도 걸렸고, 어쩌다 보니 국악을 접하게 됐죠. 어렸을 때라 튀고 싶은 마음도 어렴풋이 있었던 듯해요.” 얼핏 오페라와 판소리는 거리감이 느껴지지만, 김 동문은 스토리텔링이라는 공통점에 마음이 갔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판소리를 시작해서 여기 한양대에서도 판소리 공부를 이어가게 됐죠.” 시작부터 여러 분야에 거부감이 없어서 였을까. 김 동문은 졸업 이후 창작 뮤지컬 등에도 배우로 참여하는 등 판소리 외에 다양한 장르의 모습을 내비쳤다. “판소리를 택할 때도 연극적인 요소에 무척 끌렸어요. 1인 다역으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고. 그래서인지 판소리를 하다가 ‘연극’을 또 좋아하게 됐어요. 이걸 하다 보니 마침 뮤지컬 붐이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었고, 고민을 하다가 ‘색다른 도전을 하자’는 생각에 뮤지컬 아카데미도 다녔죠.” 그렇게 뮤지컬에도 발을 뻗친 김 동문은 판소리, 창극, 여성극, 뮤지컬 등 여러 분야를 오가며 공연 활동을 이어갔다. 귀농도 또 하나의 도전 그리고 발판 그러던 중 택한 귀농은 너무나도 우연한 만남에서부터 시작됐다. 그 당시 지방으로도 오가며 공연하던 김 동문은 강원도 횡성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횡성에 혼자 농사를 짓겠다고 내려와 있었어요. 처음에는 시골 총각이라 그랬는데, 알고 보니까 대학 졸업하고 회사 다니다 다 때려치고 귀농한 거였죠. ‘어 이런 인생은 뭐지?’하는 마음에 친구가 될까 하다가 결혼을 하게 됐고, 같이 귀농했죠.” 선택은 정말 어느 순간, 이뤄졌다. “시골에 내려가 산다는 게 두렵기도 했죠. 그런데 뭐, 대뜸 가는 거죠. 톨게이트 통과했으니.” 김 동문의 귀농은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에게 선보인 첫 공연은 뜻밖의 난관에 봉착했다. “가서 사람들에게 신고식 겸 ‘제가 이거 하는 사람입니다’를 보여주려고 한 소절 뽑았죠. 그랬는데 다들 제 걱정을 해주는 거예요. 목 아프지 않냐, 젊은 처자가 애쓴다, 알고 보니 강원도 사람들은 판소리를 잘 모르고 있던 거죠.” 김 동문은 이에 일단 사람들과 친해지고자 했다. 함께 농사도 짓고, 같이 수다도 떨고, 보다 친숙한 민요도 부르고. 그러던 와중에 강원도 사람들의 ‘소리’도 접하게 됐다. 음악인으로서 놓칠 수 없던 김 동문은 녹음도 하고, 영상도 찍고 쫓아다니며 그들의 소리를 담았다. 이 또한 김 동문의 길, 소리 배움의 길이 됐다. 틈틈이 모은 노래들을 바탕으로 지난주 공연도 열었고, 이에 맞춰 강원지역의 노동요 등을 편곡 및 수록한 앨범 ‘길을 걷다’도 냈다. 돌이켜 보면, 귀농은 또 한 번 새로운 장르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된 셈이다. ▲ 김지희 동문은 그동안 모으고 모은 음악을 바탕으로 지난 1일 마포아트센터에서 '길을 걷다'란 주제로 '소리콘서트'를 열었다. 이번 공연은 국악 전공자로선 독특하게 '밴드 음악'으로 연출했다. (출처: 김지희 동문) “나의 소리 배움의 길” 김 동문은 최근에는 마을 장터나 일본의 바(bar) 등, 작지만 무척 다양한 곳에서 공연을 해오고 있다. 이번 ‘소리콘서트’는 최근엔 정말 오래간만인 대형 공연. 김 동문은 이렇게 다양한 곳에서 공연을 하면 그 매력서 헤어나올 수 없다고. “시골 장터에서 공연 후 흥겹게 즐기시던 할머니께 쌀도 받고 그럴 땐 대형 공연에서 느낄 수 없는 기쁨이 있죠.” 장소뿐 아니라 여러 장르를 오가는 점도 김 동문의 개성이다. 이번에 낸 앨범 ‘길을 걷다’의 수록곡이나, 이번 공연에서 선보인 곡들은 판소리 뿐 아니라 민요들을 소위 ‘밴드 음악’으로 편곡했다. “제 스스로도 곡을 써요. 여태껏 접했던 민요도 모아서 주변에 ‘밴드 음악’하는 이들과도 협업해서 지금의 결과물들을 만들었죠. 어떤 건 팝(Pop)스럽게, 어떤 건 (Rock)스럽게도.” 이번 공연이 끝나면 김 동문은 다시 횡성으로 가 농사와, 이후 공연도 준비하며 자신만의 음악도 가꿔갈 것이다. “가끔은 농담삼아 손해라고 말해요. 너무 이것저것 다 건드리기만 하고, 특화된 장르는 없다고. 이렇게 걸어온 길의 선택 선택마다도 쉽지 않았죠. 그래도 이게 저만의 길 아니겠어요?” ▲ 누가 뭐래도 김지희 동문은 그다운 음악을 이어갈 것이다. (출처: 김지희 동문) 글/ 이상호 기자 ta4tsg@hanyang.ac.kr 사진/ 김윤수 기자 rladbstn625@hanyang.ac.kr

2017-11 02 중요기사

[동문]평범하지만, 중요한 것들을 보여드릴게요

상품을 구입하며 모두가 생각하는 것은 똑같다. “이거 괜찮을까?” 블로그 리뷰는 뭔가 돈 받고 쓴 티가 나고, 광고를 그대로 믿자니 그것도 곤란하다. 이럴 때 상품정보 밑에 달린, 실제로 구매한 사람들이 달아 둔 후기는 마음의 안식이 된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검증된 정보를 소비자에게 제공하기 위해 화장품 관련 모바일 앱 ‘글로우픽’을 만들었고, 이제는 오프라인 유통 진출에 성공한 공준식(신문방송학과 03) 동문을 뉴스H가 만나봤다. 소비자에게 ‘등대’ 되고 싶어 글로우픽은 2014년 9월에 출시한 화장품 관련 모바일 앱이다. 유명세나 브랜드가 아닌, 소비자의 리뷰에 기반해 화장품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이 해당 앱의 가장 큰 장점이다.“지난 4-5년간 화장품 시장은 양적으로 크게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늘어난 광고와 마케팅 때문에 선택에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시장이 혼란스러울 때 소비자의 선택은 더욱 어려워진다는 공 대표는 평범하지만, 검증된 데이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브랜드나 TV에서 추천하는 게 아닌, ‘직접 써본’ 소비자들이 추천하는 제품이 중요합니다.” ▲공준식 대표는 혼란스러운 시장 속 소비자들의 선택을 돕기 위해 ‘글로우픽’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소비자들이 직접 써보고 평가한 데이터가 중요하다고 판단한 공준식 대표는 지난 3년간 소비자의 리뷰 데이터를 모으는 데 집중했다. “200만건 이상의 데이터를 모으는 데 집중했습니다.” 공 대표는 ‘평범한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앱 환경을 조성하여, 이용하는 사람들이 쉽게 리뷰를 남길 수 있게끔 유도했다. “소비자의 의견이 중요하다면, 우선 의견을 내기 쉽게 해야 합니다. 마치 기사를 쓰는 건 어렵지만, 기사 밑에 댓글을 다는 것은 어렵지 않은 것처럼 말이죠.” 쉽게 리뷰를 쓸 수 있는 환경과, 소비자들이 남긴 리뷰를 수집하는 것에 집중한 결과, 공준식 대표의 ‘글로우픽’은 경쟁업체들 중 가장 빠르게, 방대한 화장품 리뷰 데이터를 확보한 플랫폼이 되었다. 2-30만 명이 글로우픽을 매월 사용하고 있습니다.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브랜드나 유통채널 측에서 글로우픽을 인지하고 함께 사업을 진행할 만한 영향력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철학이 담긴 서비스를 위해 이러한 ‘글로우픽’의 선전에는 어떠한 노력이 숨어 있었을까? 공준식 대표는 계속해서 소비자들의 평가가 중요하단 사실을 시장에 알리는 데 노력을 쏟았다고 한다. “글로우픽은 소비자의 의견을 제일 우선으로 생각하고 리뷰에 임합니다. 브랜드나 성분이 어떻든, 많은 사람이 써보고 좋다고 느끼면 그게 곧 좋은 화장품인거죠.” 소비자의 의견을 중요히 여기고, 이를 시장에 꾸준히 알린 결과, 현재는 ‘글로우픽’과 함께 유통하고 싶어하는 브랜드가 늘었다고 한다. “이제는 새로운 제품이 나올 때 마다 글로우픽 리뷰를 얻고 싶어하는 브랜드도 생겼습니다. 공신력이 생긴 셈이죠.” ▲성공 뒤에는 노력이 함께한다. 공준식 대표는 ‘글로우픽’이 추구하는 소비자 평가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시장에 알리고자 했다. 수많은 화장품 관련 앱 중 하나에서 업계의 공신력 있는 기준으로 떠오르기까지 ‘글로우픽’이 여러 길을 걸어왔듯이, 공 대표 역시 여러가지 길들을 걸어왔다. “취업을 빨리 했습니다. 제대 후 3학년 1학기를 끝내고 바로 취업해 사회생활을 경험했습니다.” 신문사에서 웹 서비스를 기획하는 일을 맡았다는 공 대표는 기획자로서 세상을 바꿔보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회사의 규율과 제약 탓에 그꿈을 이룰 수 없다 생각한 그는 과감히 퇴사를 결정한다. 퇴사 이후, 기획자로서 글로벌 서비스를 런칭하고, 운영하고, 실패하는 과정을 2번 정도 경험했지만 공 대표는 꾸준히 재도전했다. “스타트업을 계속 런칭하면서 내 생각이 반영되어 있는 서비스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 스타트업에서 함께한 동료 한 명과 창업한 결과가 글로우픽입니다.” 실패에도 개의치 않고 ‘경험’을 찾아 나선 시도가 도움이 되었다고 공 대표는 말한다. 최근 청년 창업을 장려하는 사회분위기에 따라‘경험’의 중요성을 공 대표는 더더욱 강조한다. “창업은 개개인에게는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좋은 일이 되려면, 실패를 장려하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합니다.” 특히나 우리나라에서는 재도전을 장려하는 환경이 아직 아니라던 공 대표는 창업을 꿈꾸는 젊은 이들에게 신중할 것을 주문했다. “창업에 대한 긍정적인 면만 보고 뛰어드는 건 위험합니다. 시작했더라도 그만두고 평범한 직장인으로 돌아기기도 쉽지 않고요.” 하지만 공 대표는 창업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창업의 성공과 실패 모두를 경험하는 것에는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저도 성공과 실패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회사에 위기가 닥쳤을 때 극복해내지 못했을 겁니다. 다양한 직무를 체험해보고, 경험 하에서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창업에 있어 가장 중요합니다. 시도한다, 경험을 위해 공준식 대표는 최근 신세계백화점과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백화점 내의 뷰티 편집샵 '시코르'에 ‘글로우픽 존’을 설치함으로써, 오프라인 유통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 공 대표는 이러한 성과를 축하하기에는 아직 조심스럽다고 한다. “대단해 보일 수는 있지만, 이러한 성과 또한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성공에 도취되지 않고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의 공 대표는, 현재 글로우픽의 상태를 ‘시험대에 올랐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글로우픽은 최근 신세계백화점과 파트너십을 체결해 오프라인 매장을 개설했다. (사진제공 : 글로우데이즈) “이번에 확장한 유통망은 아직 자체적인 유통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기존의 유통망에 의존적인 형태로 함께하는 상황이지요.” 이러한 조건의 판로는 구축할 때 드는 리스크가 적은 대신, 돌아오는 것 역시 제한적인 형태로 돌아온다고 설명한 공 대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축을 시도해 본 이유를 밝혔다. “스타트업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 중 하나는 건드려보지 않은 영역을 건드릴 때입니다. 하지만 이번 유통망 구축은 최소한의 비용을 지불하고 미지의 영역에 발을 디디는 귀중한 경험을 얻는 것입니다. 적은 리스크로, 경험의 지름길을 가는 것이죠.” 과거에는 단순히 있는 그대로의 정보만을 제공했다면, 현재는 소비자의 변화에 맞춘 맞춤형 분석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공 대표는 ‘글로우픽’의 강점으로 내세운 데이터의 활용에 앞으로 더욱 박차를 가하려고 한다. “글로우픽에는 소비자의 트렌드가 있습니다. 트렌드에 부합하는 정보를 많이 모은 이상, 이걸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점입니다.” 지난 3년 동안 ‘많은’ 데이터를 모았으니 이젠 이 데이터를 가공하고 활용하여 ‘빅데이터’로 거듭나게 만들고 싶다는 공 대표. 온라인과 오프라인, 양 쪽에서 앞으로 ‘글로우픽’이 소비자들에게 보여줄 ‘데이터’가 기대된다. 글 / 채근백 cormsqor12@hanyang.ac.kr 사진 / 김윤수

2017-11 01

[동문]공간에 숨결을 불어넣다

사람들은 누구나 공간 속에서 생활한다. 휴식을 위한 주거공간부터 회사의 업무공간, 여가를 위한 문화공간까지 그 범위도 다양하다. 공간의 내부는 밖에서 바라보는 건물의 외관과 또 다른 느낌을 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건물의 문을 열고 내부에 들어선 후에야 비로소 그 건물에 대해 온전히 이해한다. 이런 공간을 만들어 내는 이들이 바로 ‘인테리어 디자이너’다. 딱딱하고 차가운 공간도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손을 거치면 포근하고 아늑한 곳으로 변화한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수많은 공간들에는 사실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손길이 닿아있다. 사용자가 행복한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박은아 동문(산업디자인학과 00)을 만났다. 모교를 탈바꿈하다 최근 ERICA캠퍼스에는 단과대학별 PBL라운지가 새롭게 조성됐다. 협소하고 노후했던 기존의 모습에서 탈피해 오직 학생들만을 위한 공간으로 변모했다. 10개의 각 단과대학별 라운지가 전혀 다른 컨셉으로 꾸며져 라운지를 찾는 학생들에게 쏠쏠한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마치 카페처럼 휴식과 학업이 모두 가능해 라운지를 찾는 학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건물의 주 사용자인 학생들을 전적으로 고려한 변화였다. 이러한 변화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박은아 동문(산업디자인 00)의 손끝에서 탄생했다.그는 학생들을 위한 공간 디자인이 필요하다는 한양대 각 사업단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 박은아 동문이 직접 디자인한 ERICA 캠퍼스 언론정보대학 라운지 모습 (사진 출처: 박은아 동문) 각 단과대학의 특성과 주 사용자를 고려한 환경개선이 이번 디자인의 쟁점이었다. 박 동문은 언론정보대학 ‘확산’, 예체능대학 ‘표현’, 디자인대학 ‘변형’ 등 각 단과대학의 컨셉트를 직접 선정했다. 그 역시 학부 시절 4년을 보냈던 공간이기에 학생들의 요구와 불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감재, 그래픽, 조명과 가구까지 고민을 거듭하며 세심하게 선정했다. “모교와 후배들을 위한 디자인을 하는 기회가 어디 흔할까요? 14년간 디자인한 수많은 공간 중에서도 무척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였습니다.” ▲ 박은아 동문이 직접 디자인한 ERICA 캠퍼스 디자인학 라운지 모습 (사진 출처: 박은아 동문) 확고한 꿈 그리고 도전 ‘집을 짓고 싶다’는 박 동문의 꿈은 19살부터 이어졌다. 학창시절에는 막연하게 건축가를 꿈꿨으나 점점 인테리어 디자인에 관심이 옮겨 갔다. 산업디자인학과에 진학한 것도 이러한 이유였다. 학부시절 내내 건축학과 수업을 함께 들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학년이 높아질수록 인테리어 디자인이라는 분야에 대한 확신이 생겼고, 즐겁게 학업에 임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살아가겠다는 확고한 의지 덕분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인테리어 설계회사에 입사했다. 현업에서 실무를 익히며 기본기를 쌓았다. 5년을 쉬지 않고 일했다. 업계 특성 상 하나의 프로젝트나 설계에 돌입할 때마다 며칠씩 밤을 새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박 동문은 매 순간이 즐거웠다. “사실 저는 정말 축복받은 사람이죠. 일찍이 확고한 꿈을 찾았고,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데다 그 일을 즐기면서 산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박은아 동문은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그 일을 즐기면서 산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라는 자신만의 신념을 밝혔다. 하지만 29살의 박 동문은 업계에서 인정받는 직장, 안정적인 직급을 내려놓고 돌연 미국행을 택했다. 나만의 작품이 아니라 찍어내는 디자인을 하고 있다는 고민 때문이었다. 스무 살부터 10년을 오직 꿈을 향해 달려왔기에, 스스로 휴식이 필요한 순간임을 직감했다. 많은 이들이 말렸지만, 언제나 그랬듯 박 동문은 스스로의 선택에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반 년을 뉴욕에 머무르며 오직 공부와 휴식에만 집중했다. 잊고 지냈던 디자인적 감수성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휴식이 있었기에 다시 도전할 수 있었다. 맨 땅에 헤딩하듯 구직활동을 시작했고, 낯선 미국 땅에서 바닥부터 다시 디자인에 도전했다. 외국인 인턴으로 시작해 정규 디자이너로 인정받기까지 꼬박 2년 반이 걸렸다. 피나는 노력 끝에 박 동문은 결국 타국에서도 인테리어 디자이너로서 자리잡았고, 그제야 그는 한국행을 택했다. 공간, 사용자를 최우선으로 한국에 돌아와 거취를 고민하던 박 동문은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디자인에 대한 무한한 애정, 스스로에 대한 확신, 그리고 사용자를 배려하는 박 동문의 섬세한 감각은 금세 입소문이 났다. 감사하게도 그를 찾는 이들이 점점 많아졌고, 지난 2012년 인테리어 설계회사 ‘디자인이유(Design EU)’ 설립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박 동문은 “디자인이유는 나만의 소신이 담긴 이름”이라고 말하며 “'그 공간의 사용자를 행복하게 하겠다'는 제 디자인의 이유가 녹아있다”고 말했다. ▲10년이 넘는 디자인 외길 인생, 그러나 박은아 동문은 여전히 디자인이 즐겁다. 박은아 동문이 공간을 디자인할 때 최우선으로 여기는 것은 바로 ‘공간의 사용자’다. 사용자의 니즈를 충족시키는 것은 물론, 나아가 사용자가 행복과 안정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내고자 노력한다. 그는 주거공간부터 오피스 및 상업공간까지 그 종류를 가리지 않고 공간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30평도 안 되는 작은 공간부터 3000평에 달하는 공간까지 그 크기와 주제는 매번 다르지만 모든 디자인에 최선을 다해 임한다. 디자인에 대한 확신이 있기에 어떤 제안도 거절해 본 일이 없다. 물론 힘든 순간도 적지 않다. 현장에서는 결국 정해진 예산 내에서 공간을 설계해야 하기에 디자인에 대한 갈증을 느끼는 순간이 종종 있다. 언제나 따라오는 창작의 고통과, 여성으로서 견뎌야 하는 크고 작은 수모도 존재한다. 하지만 여전히 디자인이 즐겁다는 박 동문이었다. 그에게 디자인은 살아가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쉬운 일은 결코 없을 테니, 어려운 순간에도 즐겁게 자신 있게 헤쳐 갈 생각입니다. 디자이너로 사는 삶이 행복합니다.” 글/ 김예랑 기자 ys2847@hanyang.ac.kr 사진/ 김윤수 기자 rladbstn625@hanyang.ac.kr

2017-11 01

[동문]궁궐의 벽지, 예술작품으로 거듭나다

벽을 꾸며주는 도배지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마주하는 막>의 연기백 작가는 도배지를 개인의 삶이 담겨 있는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재해석했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궁궐들의 옛 벽지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며 수집해온 장순용 동문(건축공학과 67)은 연 작가의 전시에 큰 도움을 줬다. 장 동문은 누군가에겐 쓰레기, 혹은 쓸모없는 것으로 비칠 수 있는 도배지들을 마음으로 품었다. 그렇게 단순한 폐자재도 그의 손을 거치면서 역사의 산물이 됐다. 우리 문화재에서 시작한 도배지 사랑 지금의 도배지는 크게 창호지와 장판지로 나뉜다. 하지만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왕실과 국가의 주요 행사를 기록 해 둔 의궤에 나와 있는 종이 이름이 80종류에 달한다. 문화재를 공부하던 중 장 동문은 이런 발견을 할 수 있었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문화유산들이 복원 될 때 옛날 종이를 재현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큰 아쉬움을 느꼈다고. “옛 종이를 재현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렵고 많은 노력이 들어요. 오래된 샘플을 통해 조사해야 하는데 도배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없으니 이런 과정도 없는 거죠.” ▲궁궐 도배지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정성이 깃든 복원을 간절하게 바랐던 장순용 동문이다. 장 동문은 궁궐벽지에 직접 관심을 갖고 샘플 채취를 시작했다. “1973년 운현궁 조사 일을 맡았는데, 옛날 도배지는 어떤 것일까 궁금했어요. 운현궁에서 벽지 샘플을 채취한 후 욕조에서 물에 불려 한 꺼풀 벗겨 보니, 벽지 하나에 10개 이상의 종이가 나왔어요.” 고종 즉위 이후 완공된 운현궁, 근대까지 8년 주기로 도배됐다는 사실을 장 동문은 벽지를 분해하면서 알아냈다. 그렇게 초창기 고종 즉위 2년부터 있었던 도배지라는 것을 입증하는 자료도 수집할 수 있었다. 장 동문은 계속해서 옛 벽지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창덕궁 낙선재 앞마당에 도배지들이 폐자재로 쌓여 있는 것을 봤을 때도 그대로 지나칠 수 없었다. 한양대 대학원생들과 함께 궁궐 건축에 대한 세미나 작업을 할 당시였다. “거기서도 도배지 문양이 보여서 가방 안에 샘플을 가져갔죠. 어차피 버리려고 폐자재로 모아둔 거니까요. 또 욕조에서 물에 불려 분리를 해보니 10장이 넘게 나왔어요.” 정교하게 만들어진 옛 벽지를 모아두면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 믿고 당시 문화재청에 연락했지만, 묵살됐다. 그 길로 장 동문은 본인만의 자료를 모아서 소장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장 동문의 여러 건축 자료들. 셀 수 없이 많은 책과 자료집이 장순용 동문의 사무실을 빼곡히 채웠다. 지난 80년과 90년대에는 궁궐의 복원공사가 한창 이루어질 때였다. 장 동문은 그 현장을 여러 번 방문하면서 복원 과정의 마무리인 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 실망감을 느꼈다. “궁궐의 설계 뼈대는 다 있는데, 마무리를 일반 한지로 끝내니까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죠. 한지로 도배 되는 것은 과거 사대부의 집에서 하던 과정이었거든요.” 그는 옛 도배지의 지혜와 미를 살려 똑같이 복원해주면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 수십 년 동안 관심을 갖고 얘기했지만, 그의 의견은 끝내 크게 반영되지 않았다. 비로소 가치를 인정받다 <마주하는 막>에서는 연 작가의 작품 외에도 장 동문이 수집한 궁궐벽지와 연구자료, 그리고 비망록들이 전시되고 있다. 그중 비망록에는 장 동문이 자료를 수집하며 겪었던 슬픈 사연의 감정이 그대로 묻어 나온다. “운현궁에서 찾은 자료들을 정리해서 스크랩북으로 갖고 있었어요. 마침 보수공사를 한다면서 자료를 빌려 달라해서 빌려 줬는데, 시간이 지나도 돌려주지를 않더라고요. 다시 연락을 해보니까 자료를 분실했다는 답변을 받았어요. 지난 1973년부터 20년 가까이 모아왔던 도배지 자료였는데 모든 것이 소실 된 셈이죠. 그 때는 정말 속상했어요.” 소중한 우리 문화재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단서들을 한 순간에 잃은 그의 목소리에는 아직도 허탈함이 남아있었다. ▲도배지 분실 사건 때 장순용 동문이 느꼈던 큰 상실감이 와 닿는 비망록. ▲장순용 동문이 연 작가에게 제공한 자료들 중 일부이다. 이제껏 그는 ‘외로운’ 도배지 연구가였다. 몇 년 동안 궁궐이나 문화재청에 도배지 복원이 섬세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 그의 의견을 들어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장 동문은 오히려 전문가보다 일반인들에게 자료를 보여주는 것을 더 선호한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도배지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올해 여름 경복궁에 위치한 국립고궁박물관이 궁궐건축에 관한 전시를 하겠다고 찾아왔어요. 박물관의 일부에 제가 수집한 자료들이 전시 됐죠.” 문화재 공부를 손에서 놓치지 않았던 장 동문이었기에, 이 전시는 그에게 특별한 경험이었다.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궁궐벽지에 대한 소신을 잃지 않았던 장 동문은 <마주하는 막>의 연기백 작가와도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됐다. 폐가 철거된 집에서 낡은 도배지를 모아 작품을 제작할 계획이었던 연 작가는 다양한 도배지를 소장하고 있다는 장 동문의 소식을 전해 듣고 그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연 작가가 ‘처음 보는 도배지들이 많다’며 굉장히 놀랬어요. 나중에는 다시 연락이 와서 벽지로 전시를 할건데 도움을 줄 수 있냐고 해서 기꺼이 자료를 주겠다고 했죠. 도배지에 관한 원고와 기고한 글들도 다 보여줬어요.” 장 동문은 젊은 작가가 자신과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것에 연대감을 느끼며, 아낌 없이 전시를 위해 자료제공을 해줬다. ▲장순용 동문이 수집한 궁궐벽지들이 '아마도 예술공간'에 전시돼 있다. 단 하나의 소망, 궁궐 도배지 복원 장 동문은 꾸준한 문화재 공부를 통해 배운 것들을 정리해서 다음 후학들에게 참고가 될 만한 자료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분야를 처음부터 배우려면 쉽지 않은데, 장 동문은 수십 년간 쌓아온 지식과 노하우를 후학들에게 전하고 싶다는 의지를 밝혔다. 제일 큰 바람은 궁궐 도배지가 하루 빨리 복원되는 것이다. "문화재와 문화유산 쪽으로의 용역비가 너무 박한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죠. 항상 저렴한 값으로 하려니까 그 점이 아쉽고, 문화재청 쪽에서는 그렇게 안 했으면 해요. 제대로 자료 조사를 하고, 복원설계를 충실히 갖출 수 있도록 여건 개선을 위해 노력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건축에서의 사소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벽지와 도배지. 하지만 그 누구도 유심히 관찰하고 조사하지 않은 궁궐벽지를 사랑한 장 동문은 어쩌면 그 자체로 궁궐 복원에 큰 이바지를 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정성과 애정이 듬뿍 묻어 나오는 자료들과 궁궐벽지, 그리고 비망록은 이태원에 위치한 ‘아마도예술공간’에서 관람할 수 있다. ▲“환경이 열악하더라도, 적성에 맞는 일을 하다 보면 좋은 때가 올 것입니다.” 장순용 동문은 후배들과 미래 건축학도들에게 "일단 정진하면 될 것"이라고 전했다. 글, 사진/ 유혜정 기자 haejy95@hanyang.ac.kr 사진/ 최민주 기자 lovelymin12@hanyang.ac.kr

2017-10 28 중요기사

[교수]함께한 17년, 일구어 낸 성과를 바라보며 (1)

기부문화 확산, 공익기금 조성, 사회공헌에 기여하는 ‘아름다운재단’이 올해로 17주년을 맞았다. 특정 개인이나 기업, 종교기관의 지원 없이 시민들의 참여로 설립된 이 재단은 사회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하는 공익활동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사업을 꾸준히 지속하고 있다. 이런 사회공헌을 실천하는 재단의 활동에 창립 초기부터 참여해온 사람이 있다. 2000년부터 아름다운재단에 참여하고 2012년 아름다운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해 2017년 2월까지 봉사한 예종석(한양대학교 경영학부)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뉴스 H가 예종석 교수를 만나봤다. 흙 속에서 피운 꽃 “뿌듯하고,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창립 초기부터 함께한 단체의 약진을 바라본 예종석 교수의 회고다. 재단이 출범한 2000년부터 창립에 참여하고, 정책 자문단장을 거쳐 기부문화연구소장을 역임한 후, 재단 이사를 거쳐 2대 이사장으로 취임하며 ‘아름다운재단’을 이끌었다. “그 당시 한국의 대다수가 바라보는 일반적인 재단의 위치는 재벌의 상속수단, 세금을 회피하기 위한 조세피난처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복지정책의 그늘에 놓인 사회적 약자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고 싶었던 예 교수는 어려운 길로 발을 내딛었다.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누가 처음 들어보는 신생 재단에 기부를 하겠습니까?” 그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편견과 새로이 출범한 재단이라는 핸디캡을 떠 안은 채 업무를 이어 나가던 중, 한 줄기 빛이 보였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께서 일본으로부터 받은 보상금 5천만원을 기부해 주셨습니다. 할머니의 기부를 종자돈으로 재단의 사업을 진행해 나갔습니다.” ▲아름다운재단 이사장이던 당시의 예종석 교수. 재단이 마주한 현실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사진 출처 : 세계일보 박진영 기자) 가까스로 재단을 궤도에 올려놓는 데는 성공했지만, 장애물은 많았다. “보수정권에서 아름다운재단을 안 좋게 봤어요. 우연의 일치인지, 재단을 거쳐 정계로 진출한 인사들이 대부분 야권에서 활동해서 보수정권에선 당연히 재단을 좋게 볼 수 없었을 겁니다.” 정치 이념에 관련되지 않는 일을 하고, 관여하지 않으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공격과 압박을 받았던 기억을 떠올린 예 교수는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기업의 기부가 끊기기 시작하고, 극우보수단체들이 심심치 않게 재단 사무실 앞에서 시위도 할 때였습니다. 정체불명의 사람들에게 고소고발도 15건씩이나 받았고요.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었죠.”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택한 방법이 역량을 기르는 것. 예종석 교수는 어떠한 여건에서도 할 일을 할 수 있는 재단이 되기 위해 체질을 바꿔야 했다고 한다. “역량을 길러서 어떠한 난국에서도 소외된 이웃을 돕고자 하는 목적사업을 해 나갈 수 있는 재단이 되어야 했습니다.” 다액 소수의 기부에서 소액 다수의 기부로, 준조세성 기부에서 자발적 기부로, 기업 기부에서 개인 기부로. 아름다운재단은 조금씩이지만, 꾸준히 우리나라의 기부문화의 판도를 바꿔 나갔고, 고정 기부자들을 확보해 나갔다. 2017년 현재, 아름다운재단은 크게 성장했다. “많은 참여자들 덕분입니다. 재단에 참여한 수많은 기부자들과 봉사자들이 없었으면, 재단의 오늘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재단에 관련된 모두가 함께 일구어 냈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싶습니다.” 많은 도전, 그걸 위한 사명감 위에서 말한 아름다운재단의 성과 외에도 예종석 교수의 족적은 매우 많다. 기업과 비영리 단체 양 쪽을 오가며 수많은 경영에 참여했다. 교수로서의 업무도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위의 업적들을 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예종석 교수는 사명감이라고 답했다. “기업과 비영리 섹터, 양 쪽을 이해하고 중간에서 이를 연결하는 역할을 해야겠다는 나름의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아름다운재단에서 주최하는 기부문화 관련 연구자료 발표행사인 기빙코리아에서 지속적으로 많은 기업들을 분석한 결과, 예 교수는 기업과 비영리 단체가 서로에 대한 이해가 미흡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예 교수는 양자 간의 간극을 좁히고 기부문화를 개선하고 싶다는 소망 하나로 활동을 이어나갔다고 했다. “우리나라 기업인의 기부는 대부분 법인의 돈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업의 홍보 효과를 위한 수단이 아닌, 진정성 있는 사회공헌 활동으로서 기부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법인 기부에서 개인 기부로, 다액소수의 기부에서 소액다수의 기부로 문화가 바뀌어야 하는 거죠.” 사명감을 차치하고라도, 예 교수는 이러한 활동을 자신이 좋아하기에 큰 부담 없이 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즐겁게 하는 일은 부담을 느끼지 않아요. 힘든 일이지만, 제가 좋아하고 즐기던 일이었으니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싶어서, 그리고 즐거워서. 예종석 교수는 본인이 접한 다양한 길들을 걷게 된 이유를 단 두 가지로 설명했다. 이러한 업적을 쌓는 데 필요한 경영학적 소양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예종석 교수는 경영학이라는 학문에 매력을 느껴 경영학으로 들어섰다고 한다. “공부할 당시에는 경제학 석사를 마치고 박사를 할 생각이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경영대학에서 소비자의사결정에 대한 강의를 들었는데, 큰 매력을 느꼈어요.” 경영학에서 소비자를 바라보는 시각에 큰 흥미를 느꼈다는 예 교수는 경영학에 입문하고 나서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을 만나는 행운 또한 얻었다고 한다. “그 당시 최고의 교수들 밑에서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뛰어난 학자들이 한 대학에 모여 있기 쉽지 않았는데, 저는 학생으로서는 매우 행운아였죠.” 가고자 하는 곳으로, 열심히 그리고 또 열심히 달려라 예종석 교수는 같은 길을 걷고자 하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열심히 하세요. 꿈을 이루고 싶다면 열심히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지극히 원론적인 이야기입니다만, 남들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할 수 밖에 없어요.” 하지만 예 교수는 노력 위에 먼저 생각할 몇 가지 것들을 주문한다. “지금 막 사회로 나가는 학생들은 가장 큰 변화를 겪는 시기에 살게 될 겁니다. 현재도 4차 산업 혁명이라는 변화의 물결이 진행되고 있으며, 변화의 속도는 더욱 빨라질 예정입니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확실하게 잡으세요.” 예종석 교수는 2019년 2월 정년을 맞는다. 이제는 제 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새로운 인생을 살 계획입니다. 물론, 그것도 제가 좋아하고 즐기는 일을 할 겁니다.” 전업 작가의 삶을 준비하고 있다는 예 교수는 본인의 말을 빌리자면 ‘번잡스러울 정도로 다양한 분야’에 일해본 경험이 새로운 삶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한다.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경험을 했어요. 그 경험들이 글의 소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교수, 기업의 경영자문역, 기부문화운동가, 비영리단체 경영자, 마케팅 전문가, 시사 칼럼니스트, 음식문화평론가, 체육단체간부 등 수많은 직함을 갖고 활동을 했던 예종석 교수는 경험을 살려 전업작가의 길을 걸어보려고 한다. 풍부한 경험을 가진 예종석 교수가 써 내려갈 또 다른 이야기가 기대된다. ▲예종석 교수는 다양한 경험을 살려 전업 작가로 활동하는 새로운 인생을 맞이할 예정이다. 글 / 사진 채근백 cormsqor12@hanyang.ac.kr

2017-10 23

[학생]배구선수 홍민기, 현대캐피탈 입단 (1)

겨울스포츠의 꽃이 프로배구라면 개막 전에 열리는 ‘신인 드래프트’ 추첨식은 만개 직전의 꽃봉오리다. 이 자리에서 각 구단은 약점 보완과 경기력 강화를 위해 필요한 선수들을 영입하며 막바지 정비에 들어간다. 팬들도 새로운 선수의 등장에 관심을 아끼지 않는다. 그렇게 9월 말 진행된 프로배구 남자부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 한양대 홍민기(생활스포츠학부 4) 씨가 현대캐피탈로부터 호명됐다. '한대 센터' 홍민기 씨가 프로로 도약하는 순간이었다. 신인드래프트, 그리고 프로 데뷔 고교 및 대학 배구에서 활약하고 있는 선수들은 졸업을 앞두고 드래프트 참가 신청서를 제출한다.신청서를 제출한 선수들은 한날 한시에 모여 프로 구단의 감독과 관계자로부터 선택을 받는다. 아마추어 선수로서 지난 시간들을 평가 받는 자리이자 프로 데뷔를 위해 거쳐야 관문이다. 그래서 선수들에게 드래프트 추첨식은 꿈 같은 자리다. 홍 씨에게도 드래프트 추첨식은 무척 떨리는 순간이었다. “현장에서는 담담하게 있었지만 정말 많이 긴장하고 있었어요. 입술이 바짝 마르고 아무 생각이 안 나더군요. 사실 아직도 실감을 못 하고 있습니다.” ▲홍민기 씨(왼쪽에서 두 번째)는 9월 25일 개최된 ‘2017-2018 KOVO 남자부 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현대캐피탈에 1차 지명됐다. (출처: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홈페이지) 요즘 홍 씨는 팀의 막내로서 적응과 연습에 한창이다. 현대캐피탈의 복합 베이스캠프인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에서 합숙한지 3주 째. 두 경기를 치렀고 원포인트로 교체 출전하며 프로리그의 감을 익히고 있다. “아무래도 대학 선수 시절과는 다르죠. 정해진 시간 내에 선수들의 기량을 끌어내는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훈련 프로그램에서 제가 프로에 왔다는 것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또 너무도 쟁쟁하신 감독님과 코치님, 선배님들 밑에서 본받아야 할 점도 정말 많고요.” 시종일관 담담하지만 꾸밈없는 목소리로 배구와 팀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홍 씨는 쉬는 시간에도 “어떻게 하면 배구를 더 잘할 수 있을까”만 생각한다고. “팀에 누가되지 않도록 매번 경기 내용을 복기하고 또 고민합니다. 천천히 팀에 녹아 드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한양대 대표 센터가 되다. 대학 선수 시절 홍민기 씨는 197cm의 신장과 강한 속공이 특징인 한양대 대표 센터였다. 아주 어릴 적부터 배구를 했을 것 같은 체격과 실력의 소유자지만, 사실 그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배구를 시작했다. 18살까지 홍 씨는 별다른 꿈이나 목표 없이 그저 체대 입시를 준비하던 학생이었다고. 이를 지켜보던 아버지께서 “하나라도 꾸준히 뭔가를 해보라”는 충고를 건넸고, 홍 씨는 고민 끝에 고등학교 배구단 입단을 신청했다. 반신반의하며 시작했지만 배구는 홍 씨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빠르게 실력이 늘었고 점점 재미가 붙었다. 이전부터 꾸준히 했던 육상 덕분에 신체 조건과 체력은 자신 있었다. 그렇게 그는 빠르게 고교 배구 선수로 자리잡았다. ▲지난 20일 홍민기(생활스포츠학부 4) 씨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늦은 시작이었기에 남들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연습에 할애해야 했다. 남들보다 30분 일찍 훈련을 시작했고 30분 늦게 훈련을 마쳤다. 쉬는 날에도 연습을 게을리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힘든 줄 모르고 그 시간을 즐겼다. 이미 그에게 배구는 삶,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수동적이었던 삶의 태도가 바뀌었고, 난생 처음으로 배구 선수라는 꿈과 목표를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노력 끝에 홍 씨는 우리대학에 진학해 한양대 배구단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뒤돌아보면 대학 생활이야말로 배구가 전부였다. 오전에는 ERICA캠퍼스에서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서울 캠퍼스에서 훈련하는 그야말로 치열한 생활이었다. ▲한양대 센터로 활약하던 당시의 모습 (출처: 홍민기 씨) 배구를 하는 매 순간이 즐거워 힘든 줄도 모르고 운동한다는 그에게도 분명 시련은 있었다. 대학 3학년 재학 당시, 경기를 앞두고 훈련하다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겪었던 것. 운동선수에게 크고 작은 부상은 떼놓을 수 없는 일상이지만 무릎 부상은 치명타였다. 수술 후 “선수 생활이 어려울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들어야 했고, 자신보다 더 힘들어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그를 괴롭게 했다. 힘들었지만 그는 재활에 몰두했다. 회복 속도가 빨랐던 홍 씨는 무리하게 필드에 복귀했다. 하지만 시련은 또 다시 홍 씨를 찾아왔다. 이른 복귀와 잦은 훈련으로 부상이 도져 다시 수술대에 오르게 된 것. 눈물 흘리는 어머니의 모습에 당시 홍 씨는 운동을 그만둘 생각까지 했다. “배구를 관두고 뭘 할까 고민했는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고 앞이 캄캄하더라고요. 역시 난 배구뿐이구나 깨달았어요. 몸 관리에 소홀했던 시간을 반성하고, 자만하진 않았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됐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확실하게 재활에 임했고, 이후 더 노력하게 된 계기가 됐죠.” 그렇게 홍 씨는 부상과 긴 공백을 딛고 다시 필드에서 날아올랐다. 묵묵히 운동한 끝에 그는 한양대를 대표하는 센터로 자리매김했다. 희생과 헌신하는 선수될 것 모든 단체 운동이 팀워크를 필요로 하지만 배구는 특히 그렇다. 리시브, 토스, 스파이크로 이어지는 경기 특성 탓에 배구에서는 한 선수가 단독으로 득점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또한 공이 떨어지면 실점하기에 팀원 간의 호흡이 어느 종목보다 중요하다. 홍 씨 역시 배구의 매력은 “팀워크”라고 말하며 “팀의 단합을 위해 희생과 헌신의 자세를 갖추기 위해 노력한다”는 소신도 덧붙였다. 이제 갓 프로에 입단한 신인이기에 부담감도 있지만, 언제나 그랬듯 즐거운 마음으로 배구에 임하고 있는 그다. 홍 씨의 배구 인생 최종 목표는 국가대표 배구 선수다. 한 걸음씩 더 넓은 무대로 나아갈 홍 씨의 앞날을 응원해본다. ▲지난 20일 진행된 인터뷰에서 홍민기 씨는 "신인의 자세로 최선을 다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글/ 김예랑 기자 ys2847@hanyang.ac.kr 사진/ 박영민 기자 pym0212@hanyang.ac.kr

2017-10 16

[학생]몸짓으로 전하는 무용수

갑자기 어두워지는 조명 속, 경기장 중앙에 펼쳐진 무대로 한 사람이 나타난다. 이어 흘러나오는 음악에 그는 춤을 춘다. 때로는 재빠르게, 때로는 여유 있게 행하는 동작은 음악과 어우러져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한다. 현대무용을 전공하는 김민아(생활무용예술학과 4) 씨는 매 공연마다 영상 속 발전해가는 자신의 모습이 무용을 계속하게 한 원동력이라 말한다. 올해 국제댄스연맹(IDO)에서 개최하는 ‘2017 IDO 월드 갈라’에 아시아인 최초로 참가를 앞두고 있는 김민아 씨를 만났다. 여러 댄스 종목의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가 모이는 자리 이번 IDO 월드 갈라는 다가오는 12월 9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다. 매해 전년도 국제댄스연맹이 개최한 모든 종목에서 우승한 무용수 중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Best of the Best)만이 갈라 무대에 오른다. 매년 약 20만 명의 무용수들이 IDO가 개최한 30개 종목에 도전하는 만큼 IDO 월드 갈라는 무용수들에게 엄청난 무대다. 한국댄스연맹(IDO Korea)의 말을 빌리자면 “모든 무용수들의 선망이 대상이자 가장 주목받는 무대”며 “이름을 올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무용수에게 가장 큰 영광이요 자랑”인 셈이다. ▲2017 IDO 월드 갈라에 이름을 올린 김민아(생활무용예술학과 4) 씨를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부담이 안된다면 거짓말이죠.” 갈라에 참가하는 자체만으로도 큰 영광인데, 김 씨에게는 여러 타이틀이 더 쥐어졌다. 올해 갈라에 선발된 팀은 15국가 총 18개다. 그중 김 씨는 ‘아시아 최초’다. 지난해 독일에서 열린 ‘2016 IDO 월드 발레, 모던, 재즈 챔피언쉽’에서 ‘모던&컨템포러리 댄스 솔로 피메일(어덜트)’ 부문 한국인 최초 1위를 차지했는데 이때 보여준 무대를 인정받아 이번 갈라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국내에선 무용이라 주목받지 못한 상황. “아쉽기는 하지만, 저를 계기로 무용자체가 다른 이들에게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오히려 좋은 성적을 거둬야겠단 욕심도 들어요.” ▲김민아 씨가 ‘2016 IDO 월드 발레, 모던, 재즈 챔피언쉽’에서 선보인 무대 김 씨는 이번 갈라 무대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조엡 베빙(Joep Beving)의 연주곡 ‘Ab Ovo’ 배경으로 시리아 내전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보도된 사진 중에 어린 아이가 피를 흘리고 있는 사진이 있어요. 이를 보면서 제가 느낀 것을 이번 작품에 담아내고자 해요.” 이번 무대의 안무는 김 씨의 느낌을 바탕으로 직접 제작해 선보일 예정이다. (Joep Beving - Ab Ovo 듣기) 무용수로서 긍정적인 욕심 무용수에게 자기 자신은 곧 무대의 전부다. 그렇기에 오히려 슬럼프는 급격하고 치명적이다. 김 씨는 그럴 때면 연습을 멈추고 생각을 정리한다. “컨디션이 나쁘거나 하면 연습이 아예 안돼요. 다시 해도 잘 안되는데, 아예 멈추고 혼자 돌아다녀요. 그러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다음날 연습을 재개하죠. 안산에 살다 보니 주로 서울 구경을 많이해요.” 김 씨는 아직 졸업을 앞둔 학부생이다. 이번 무대 외에도 앞으로 무수히 많은 무대가 김 씨 앞에 놓여있다. “졸업 후에는 해외 무용단에 입단하고 싶어요. 지금이 제가 가장 발전하기 좋은 시기라 생각해요. 그런 만큼 무용단에서 활동하며 제 최고의 모습을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한편으로는 안무 공부도 열심이다. 이번 갈라 무대처럼 직접 안무를 준비하기도 한다. “실기와 안무 모두 잘하면 좋겠단 생각도 많이 해요. 무용수로서 기대 수명이 낮은 점도 대비하고요.” 중학교 입학하기 얼마 전, 취미로 시작한 무용이었다. 그렇지만 여태 질리지 않았고, 앞으로도 질리지 않으리라 말하는 김 씨다. “매 무대 마다 발전하는 제 모습을 보면 무척 뿌듯해요. 이번 무대도 좋은 모습 보이고, 앞으로도 좋은 무대 보이는 무용수, 안무가가 되고 싶어요. 제 힘이 닿을 때까지.” ▲김민아 씨는 "매 무대 마다 즐겁고 뿌듯하다"라고 말한다. 글/ 이상호 기자 ta4tsg@hanyang.ac.kr 사진/ 박영민 기자 pym0212@hanyang.ac.kr

2017-10 06

[학생]로봇 '간장게장', '레알밥도둑'이네! (3)

지난 9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간 진행된 ‘2017 국제로봇콘테스트&R-BIZ 챌린지’에서 우리대학 로봇공학과 ‘레알밥도둑’팀이 우승을 차지했다. 간장게장처럼 생겨서 ‘간장게장’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그들의 터틀봇은 경쟁하는 다른 로봇들보다 빠른 속도로 주행하며 무대를 장악했다. 하지만 예기치 못 한 변수가 언제든 나타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레알밥도둑’팀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극적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한 ‘간장게장’은 어떻게 대회를 성황리에 마칠 수 있었을까. 기본에 충실한 터틀봇, ‘간장게장’ ‘레알밥도둑’팀은 팀장 이도규(로봇공학과 2) 씨와 정민재, 정현철, 조민수(이상 로봇공학과 3) 씨로 구성됐다. 로봇공학과에 입학해 3년을 다녔지만 로봇을 실제로 만들 기회가 없어 아쉬웠다는 ‘레알밥도둑’팀 일원들은 여러 대회를 찾아보다가, 학회 선배로부터 ‘터틀봇 오토레이스’ 대회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저희는 대회의 취지가 되는 로봇운영체제 ‘ROS(Robot Operating System)’을 익혀보고 싶었어요. 개발 환경도 컴퓨터 언어 중에서 C++, Python이라서 저희 팀원들이 부담없이 작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설계된 ‘간장게장’ 로봇은 로봇 회사인 ‘로보티즈(Robotis)’에서 출시한 ‘터틀봇3’에 기반을 둔다. ROS기반 자율주행 로봇플랫폼인 ‘터틀봇3’은 360도 방면의 모든 거리를 측정하는 레이저 센서 ‘라이더(lidar)’와 이동물체의 속도와 방향, 중력, 가속도를 측정하는 장치인 ‘관성 측정장치(Inertial Measurement Unit)’, 그리고 각종 센서들이 탑재돼 있다. 이러한 요소들에 의해 ‘터틀봇3’은 외부의 도움 없이 자율주행을 할 수 있는 ‘SLAM(Simultaneous Localization and Map-Building)’기능과 길을 찾아가는 ‘NAVIGATION’기능을 갖춘다. ‘레알밥도둑’팀은 제안서를 ‘로보티즈’에 제출 후 ‘터틀봇3’을 무상으로 지급받았다. ▲’레알밥도둑’팀의 로봇 ‘간장게장’. ROS로봇인 ‘터틀봇3’에 성능을 더한 로봇이다. (출처: 이도규 씨) 최대한 기본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 ‘간장게장’의 특징이다. 다음은 이 씨의 설명. “저희는 제공받은 플랫폼인 ‘터틀봇3’을 변형하거나 해체시키지 않았어요. 다른 팀들은 로봇을 해부해서 한층 더 쌓고, 몇 백 만 원짜리 센서를 부착할 때, 저희는 최고의 효율을 내기 위해 저가 센서와 컨트롤러를 사용했습니다.” 그렇게 ‘간장게장’은 영상처리와 물체인식을 하기 위한 카메라, 마이크로컴퓨터의 종류 중 하나이자 로봇의 두뇌 역할을 하는 ‘라즈베리파이3’, 통신 간섭을 피하기 위한 5Ghz 대역 와이파이 동글, 차단바, 그리고 터널 구간에 활용하기 위한 초음파 센서 부착으로 ‘탈바꿈’ 했다. 새로운 장비를 장착할 때 이 씨와 팀원들은 로봇 플랫폼에 구동이 가능한지, 그리고 내부 설정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연구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본과 크게 벗어나지 않은 로봇도 공부가 많이 필요했다. 이 씨는 ‘ROS 입문하기’를 가장 큰 장벽으로 꼽았다. “터틀봇 자체가 ROS 기반이어서 ROS를 모르면 아예 사용을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ROS는 로봇에 달린 센서들이 가져오는 데이터들을 서로 주고 받을 때 용이하게 하도록 도와주는 로봇 운영체제로, 통신을 코딩으로 다뤄요. 주변에 ROS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인터넷 카페와 구글을 통해 독학을 했습니다. 그 결과 원하는 알고리즘을 구현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렇게 사전 설정이 끝난 후, ‘간장게장’이 대회 환경에서 제대로 동작을 하게끔 여러 값들이 조정됐다. 값을 바꿀 때마다 로봇의 움직임이 달라지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 시간을 가장 많이 투자했다는 것이 이 씨의 설명이다. ‘최고’를 제치고 우승을 거두다 ‘간장게장’이 통과해야 하는 세부미션은 신호등 인식, 주차 표지판 인식, 차단바 인식, 그리고 터널 통과였다. 주어진 시간 안에 로봇이 미션을 잘 수행해야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사소한 미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닥에 그려진 선을 따라 가는 ‘라인트레이싱’이다. ‘레알밥도둑’팀은 로봇대회에서 명성이 높은 광운대학교 ‘ROBIT’팀과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 대비해 ‘간장게장’에 심혈을 기울였다. “바닥에 그어놓은 선을 따라 움직이는 ‘라인트레이싱’에서 비교를 해 봤을 때, ‘간장게장’이 다른 팀들에 비해 1.5배 빨랐습니다. 따라서 저희는 ‘라인트레이싱’에 더욱 공을 들였죠.” ▲본선 2차주행 때 사용된 경기장 트랙의 모습이다. (출처: 이도규 씨) 대회 당일날, 모든 팀들은 일산 킨텍스에 모여 대회 시작 전 까지 연습주행을 했다. ‘간장게장’은 대회 당일까지 연습주행에서 한번도 완주를 하지 못했지만, 대회 시작 2시간 전에 첫 완주를 성공했다. 1차주행과 함께 대회가 시작 된 후, ‘레알밥도둑’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다른 팀들이 경기 당일 컨디션이 안 좋았는데, 실수를 하실 때마다 괜히 저희 팀도 실수한 느낌이 들어 많이 긴장했습니다.” ‘간장게장’은 대회 당일 첫 미션을 통과했지만, 두 번째 미션인 ‘주차구간 인식’에 실패했기 때문에 ‘레알밥도둑’팀은 다음날 대회를 위해 늦게까지 코드를 수정했다. 준비는 ‘레알밥도둑’팀만 한 것이 아니었다. 대회 이튿날, 2차주행을 앞둔 많은 팀들은 연습주행에서 개선된 모습을 보였다. 이 씨는 그 때의 긴장감을 회상했다. “그 때는 마음을 비우고 목표를 ‘1위를 하자’가 아닌 ‘완주를 하자’로 바꿨어요. 본선 직전까지 연습주행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2차주행이 본격적으로 시작 된 후, ‘간장게장’은 전원이 켜지자마자 신호등구간을 통과하고, 1차주행 때 통과하지 못했던 ‘주차구간 인식’ 또한 성공했다. 터널입구를 진입할 때 로봇이 입구에 걸려 감점을 당했지만,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그렇게 최단기록으로 완주에 성공한 ‘간장게장’은 결승선에 통과했다. 라이벌인 광운대학교 ‘ROBIT’팀은 중간에 로봇의 이탈 때문에 은상을 확보했고, ‘레알밥도둑’팀은 영광의 1등을 수상했다. ▲로봇공학과 학회방에서 연습용 트랙을 제작해 터틀봇으로 연습했던 모습. 연습용 트랙은 실제 경기장의 규격에 맞춰 제작 됐다. (출처: 이도규 씨) 배운 이론들을 적용해보는 소중한 경험 ‘레알밥도둑’팀 일원인 정민재 씨는 대학에서 배운 이론들을 실제로 써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2017 국제로봇콘테스트&R-BIZ 챌린지’가 좋은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이론과 실제가 어떻게 다른지, 다름에도 이론이 왜 중요한지 알았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다른 팀원들의 기발한 아이디어를 보고 배우는 경험이 제일 즐거웠습니다.” 나머지 팀원들도 정 씨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들은 1등으로 호명되는 순간 서로를 끌어안고 환호했다. ‘간장게장’과 함께했던 3개월의 시간이 곧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날이었다. 또한, 이 씨는 도움을 주신 로봇공학과 교수님들에게 감사함을 표했다. “강민성 교수(로봇공학과)님께서 작업 환경, 연장, 그리고 각종 장비를 지원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한재권 교수(로봇공학과)님께서는 대회 현장을 잘 모르는 저희에게 대회 3일 전에 와이파이와 통신 문제를 상담 해주셨고, 5G대역폭을 지원하는 와이파이 동글을 제공해 주셔서 네트워크 통신의 간섭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희가 대회에서 사용한 여러 지식을 알려주신 모든 로봇공학과 교수님들이 계셔서 더욱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당분간 학업에만 집중할 것이라는 ‘레알밥도둑’팀. 경험을 쌓자는 취지로 시작된 그들의 도전은 계속될 예정이다. “내년 대회 시즌이 올 때 까지 또 이론을 연구하고 내공을 쌓을 예정입니다. 내년에는 팀원들 각자가 원하는 로봇 대회에 나가서 수상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왼쪽부터 정민재, 정현철, 조민수(이상 로봇공학과 3)씨와 이도규 씨(로봇공학과 2)가 '금상' 푯말을 자랑스럽게 들고 있다. (출처: 이도규 씨) 글/ 유혜정 기자 haejy95@hanyang.ac.kr

2017-10 04

[학생]이제 시작이야, 더 멋진 모습을 보여줄테니

9월의 어느 날, 21살의 갓 청년의 문턱에 들어선 대학생이 모교에 1억 원을 기부했다. 1억. 단 두 글자지만, 그 두 글자에서 느낄 수 있는 무거움과 노력은 이 액수를 기부한 대학생에 대해 놀라움과 궁금함을 자아내게 한다. 모교인 한양대학교에 1억 원을 기부하고 현재는 아비스파 후쿠오카에서 뛰고 있는 원두재(생활스포츠학부 2) 씨를 인터뷰했다. 이미 정한 꿈, 남은 건 시작 뿐 많은 사람이 재능과 열정을 가지고 스포츠계에 뛰어든다. 여기에는 각자의 꿈과 비전, 계기가 뒤따른다. 누군가의 훌륭한 플레이를 목격했거나, 처음 차 본 공이 발에 부드럽게 감기는 걸 경험하며, 미래의 정상급 선수가 된 나를 머릿속에 품는다. 하지만 원두재 씨의 계기는 조금 더 저돌적인 대답이었다. “정식으로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은 항상 있었어요. 중학교 들어가서 부모님께 말씀드려서, 본격적으로 시작했죠.” ▲원두재(생활스포츠학과 2) 씨는 2017년 7월 후쿠오카 아비스파에 입단하여 센터백으로 뛰고 있는 실력파 선수다. (출처: 원두재 씨 페이스북) 16학번임에도 망설임 없이 프로의 길을 택했고, 데뷔를 거친 지금은 한 사람의 몫을 해내고 있는 원 씨. 졸업 후 프로팀에 입단하는 길도 있었을 텐데, 힘든 일정을 무릅쓰고 프로의 길을 걸은 이유는 왜일까. 원 씨의 의중을 물어보자, 좋은 기회를 얻었기에 놓칠 수 없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어려서부터 프로에 가서 축구로 돈을 벌고 싶었어요. 부모님께 용돈도 드리고, 가정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저를 빠르게 프로로 이끌었습니다.” 환경의 절박함과 더불어 원두재 씨가 지닌 자신감 또한 프로 데뷔의 원동력 중 하나였다. “도전할 수 있었습니다. 프로 무대 가서도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힘들어도 겪을 가치는 있다 지금은 자신감과 실력으로 무장한 원 씨지만, 그에게도 남모를 고민과 고난의 시기가 있었다. “사실, 긴장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경기 도중에도 ‘열심히 뛰고, 자신감 있게 잘하자’는 자기최면을 걸 정도로요.” 대학교 입학 전, 고등학교에서 보낸 대표팀에서도 육체적,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다고 원 씨는 고백했다. “고등학교 3학년 말에 청소년 국가대표팀에 갔죠. 아는 사람도 없고, 운동도 힘든데다가 스포츠 탈장에 걸려서 수술이 필요한 상황인데도 참느라 너무 힘들었어요. 그 땐 대표팀에 너무 뽑히고 싶었거든요.”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벅찬 일들이 연달아 겹치며 마음고생을 했다는 그다. “오른쪽만 수술해도 될 걸 참고 안 하다가, 결국 양쪽 다 수술을 해야 했던 기억이 있어요. 꽤나 고생했죠.” ▲힘든 시기를 보낸 원두재 씨는 이 시기가 오히려 자신을 강하게 담금질 하는 시간이 되었다고 했다. (출처: 원두재 씨 페이스북) 하지만 이런 사건들은 원 씨가 성장할 수 있는 촉매재였다. 힘든 기억들은 당시에 원 씨를 괴롭혔지만, 현재의 원 씨를 있게 하는 토대 중 하나로 든든히 자리하고 있었다. “2017년 7월 29일 6시 홈경기, 야마가타와 데뷔전이 있었어요. 원래는 긴장 많이 하는 스타일인데, 고등학교 시절 대표팀에서 마음고생을 너무 하다보니 많이 떨리지가 않았습니다. 무려 데뷔전이었는데, 오히려 기대가 더 되었던 기억이 나네요.” 또한 그는 고등학교의 힘든 시절에서도 발전할 수 있었던 계기 중 하나를 주변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조언으로 꼽았다. “아현 중학교, 운호 고등학교에서 좋은 감독님과 코치님을 만났습니다. 좋은 것들을 많이 알려주셨어요. 이것저것 많이 신경을 써 주셨기에, 지금의 제가 이렇게 발전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요.” 한양대를 가슴에 품고 더 멀리, 더 높이 K리그와 유럽, 일본 프로 팀들의 러브콜을 한 몸에 받으며 어엿한 프로로 뛰고 있는 원두재 씨는 ‘내가 성장한 곳은 한양대’라고 말한다. “(제 미래에 대해) 선택의 기로에 선 적은 많았어요. 하지만 대학교 감독님이 절 믿고 경기에 투입해주신 것처럼, 저도 감독님을 믿고 모든 것을 맡겼어요.” 인생의 큰 기로에서 대학교 감독님의 선택을 믿을 수 있었던 이유는 서로에 대한 신뢰였다. “중학교 때는 미드필드 수비, 고등학교 때는 미드필더, 대학교에서는 포워드와 미드필드 중앙 수비를 했어요. 비슷하지만 다 다른 포지션이에요. 그래도 혹시나 제가 못할까 라는 불안감을 접어두시고 저를 전적으로 믿어주셨어요. 고마울 따름이죠.” 힘들 때 자신을 믿어준 한양의 신뢰를 가슴에 간직한 원두재 씨는 프로 입단 이후 지난 9월 4일, 1억이라는 거금을 우리 학교에 전달했다. “축구부가 운동장이 없어요. 웨이트실도 모든 운동부가 다 같이 써서 사실상 마음껏 운동하기가 힘들죠.” 원 씨는 열악했던 운동시설을 떠올리며 기부한 금액이 축구부에게 큰 힘이 됬으면 좋겠다고 했다. “많이 열악했던 시설과 물건들을 새로 마련하고, 좋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양을 가슴에 품은 원두재 씨의 한양사랑은 뒤따라 올 학우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은 성인으로서, 한 사람의 선수로 프로의 길을 걷고 있는 원두재 씨. 축구가 자신의 전부이자 매력덩어리라는 원 씨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한다. “되게 많은 사람들이 ‘성공했다’, ‘출세했다’고 하는데, 저는 오히려 멀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더 잘할 수 있고, 더 올라갈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포부를 밝힌 원 씨는 같은 길을 걷는 동기들과 뒤따라올 후배들에게 열심히 하자는 격려의 메시지도 전했다.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지만, 다같이 축구를 항상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했으면 좋겠어요.” 2017년, 프로 축구계에 또 한번 한양의 족적을 성공적으로 남긴 원두재 씨. 앞으로 더 높이, 더 멀리 뛰어나갈 그의 모습이 기다려진다. 글/ 채근백 기자 cormsqor12@hanyang.ac.kr

2017-10 03

[학생]무대 위 피아노가 되다 (1)

막이 오르고 적막이 가득했던 무대에는 쇼팽의 녹턴 13번이 흐른다. 무대 위 무용수는 마치 피아노가 된 듯 오직 몸짓만으로 녹턴을 표현해낸다.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강렬하다. 마치 눈에 보이듯 무용수의 손과 발이 녹턴의 선율을 형상화한다. 감정이 절제된 동작임에도 단조곡 특유의 서정성과 애상감이 섬세한 근육의 결을 따라 뿜어 나온다. 무대는 온전히 무용수의 몸짓으로 채워지고, 주저함 없는 눈빛으로 무용수는 관객들을 압도한다. 불과 5분이 채 안 되는 시간. 무용수는 혼신의 힘을 다해 날아오른다. 무대 위 피아노가 되다 권재헌(무용학과 4) 씨가 지난 9일 천안예술의전당에서 개최된 ‘2017 코리아국제현대무용콩쿠르(KIMDC)’에서 시니어 남자부분 대상(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과 금상의 영예를 안았다. 한국무용협회가 주최하고, 올해로 8회를 맞은 ‘코리아국제현대무용콩쿠르’는 타 장르 없이 오직 현대무용만으로 경연하는 유일한 국제 대회다. 올해는 한국 외 폴란드, 타이완, 말레이시아, 일본 등 12개국에서 온 209명의 무용수가 열띤 경합을 펼쳤다. 지난 6월 이미 한 차례의 예선을 거쳐 본선에 진출한 쟁쟁한 무용수들을 뚫고 권 씨는 당당히 대상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지난 9일 열린 '2017 코리아국제현대무용콩쿠르'에 참가한 권재헌 씨의 모습 (출처: 권재헌 씨) 권 씨에게 대상의 쾌거를 안겨준 작품 '하울링, 80개의 건반'은 서정적인 선율의 '녹턴 13번'에 맞춰 창작됐다. “무대 위의 저는 피아노예요. 제 움직임에 따라 녹턴이 울려 퍼지는 거죠(하울링).” 일반적인 작품의 경우, 내면의 감정을 신체로 표현해야 하기에 무용수의 감정 표출은 좋은 무대를 위한 핵심 요소다. 하지만 이번 작품의 경우, 권 씨는 오히려 감정을 절제하는데 주력했다. “악기에는 감정이 없잖아요. 절제된 감정으로 녹턴의 서정성을 뿜어내는 게 이번 작품의 핵심이었어요.” 권 씨의 이번 수상은 지난해 ‘제 46회 동아무용콩쿠르‘ 금상 수상 이후 불과 일 년여 만에 이룬 쾌거다. 하지만 경험 많은 그에게도 국제무대 첫 대상의 무게는 남달랐다. “사실 은상까지 제 이름이 호명되지 않아서 거의 낙담한 상태였어요. 대상에 제 이름이 불리자마자 눈물부터 나더군요. 주변 사람들 말로는 정말 아이처럼 울었다네요.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좋은 결과를 얻어 정말 뿌듯해요.” 아울러 권 씨는 이번 국제대회 대상 수상을 통해 군면제의 혜택을 누리게 됐다. 남자 무용수들에게 20대 초반 2년이라는 군 복무 기간은 현실적으로 큰 타격이기에 권 씨에게 이번 수상은 더욱 의미가 깊다. 대상, 인고의 시간 사실 권 씨는 지난해에도 이 대회에 참가한 바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쉽게도 장려에 그쳐 미련이 많이 남았다고. 그래서 올해 1월부터 본격적인 대회 준비에 돌입했다. 수많은 무대에 올랐던 권 씨지만, 콩쿠르 준비는 매번 힘들고 긴 자신과의 싸움이다. 음악 선정은 물론 안무 구상, 동선, 무대 기획까지 모든 과정이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그렇게 권 씨는 지난 5월 교내 오디션에서 이번 작품 첫 선을 보였다. 하지만 평가는 냉정했다. “다른 친구들에 비해 가능성이 없다는 교수님의 말에 크게 상처 입은 적도 있어요. 하지만 그 덕분에 오히려 열심히 준비한 계기가 된 것 같아요.” 그렇게 권 씨는 경연에 오르기 직전까지 음악과 안무를 수정하는 등 인고의 시간을 견딘 끝에 대상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스스로 지난해 가장 달라진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권 씨는 “떨림을 긴장이 아니라 설렘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는 겸손한 답을 건넸다. 언젠가 “진정한 고수는 힘이 안 들어간다”는 큰아버지의 말씀에 큰 감명을 받았다는 권 씨는 "지난해에 비해 늘어난 경험과 여유가 수상에 기여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인고의 시간을 견딘 끝에 권재헌 씨는 대상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춤이 좋았던 소년, 자유를 탐닉하다 “어릴 적부터 무대에서 춤 추는 걸 좋아했지만 따로 사교육을 받아본 적은 없었어요. 혼자 인터넷에서 동영상을 보고 따라 추는 정도였는데 우연히 중학교에서 열린 지역 예술고등학교 입시설명회를 찾았다가 지원하게 됐죠.” 발레에 적합한 체형을 갖추고 있던 권 씨는 운 좋게도 체격 및 체력 조건으로 선발하는 특기자 전형 덕분에 예고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렇게 고등학교 진학 이후 본격적인 무용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많은 친구들이 한국종합예술학교 진학을 꿈꿀 때 권 씨에게는 한양대 무용학과가 가장 큰 목표였다. 우리대학 출신 이준욱 무용수의 ‘돌이킬 수 없는’이라는 작품을 우연히 본 것이 계기였다. 대학 입시에 필수적인 경연대회 역시 ‘한양대학교무용콩쿨’을 선택했고, 한양대 교수진이 심사위원인 대회들을 찾아 나섰다. 실기 시험 당일 권 씨는 약 4분의 시험을 마치고 나오면서 합격했음을 직감했다고. “오전 7시 반부터 새벽 레슨을 받아야 하고, 대회를 준비할 때는 12시간이 넘도록 연습실에 머물러야 하지만 제가 선택한 길이니 즐겁게 하고 있어요.” 권 씨는 현대무용의 자유로움을 사랑한다. “현대무용은 정해진 틀이 없어요. 어디든 무대가 되고, 무엇을 해도 정답이라는 완전한 자유에 매력을 느껴 현대무용을 선택했어요.” 그래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 역시 관객들하고 어울리며 자유롭게 춤췄던 작품이다. “지난 2015년 선배님과 함께 했던 <하모니 어스(Harmony Us)>라는 작품이에요. 제가 관객석에 앉아 사람들과 섞여 있고, 선배님이 내려와 관객들의 호응을 유도하죠. 그 후 제가 모른 척 무대위로 끌려 올라가면 그 때부터 공연이 시작되는 거예요. 형식적이거나 어둡지 않고 춤추는 저희도, 보는 관객들도 모두 밝게 웃으며 즐겼던 작품이네요. 자유로운 현대무용이기에 가능한 이야기죠.” ▲사진은 하모니 어스 공연모습 (출처: 권재헌 씨) 강연하는 안무가를 꿈꾸며 권 씨의 오랜 꿈은 ‘안무가’다. 무용을 잘한다고 해서 안무를 잘 짜는 것은 아니다. 안무가는 춤 추는 사람이 아니라 창작자에 가깝다. 그래서 틈나는 대로 음악 공연과 전시회를 찾아 다닌다. “창작자는 시야가 넓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다양한 분야의 예술을 접하려고 노력해요. 현대무용에 답은 없지만 분명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작품들은 존재하잖아요. 예술성과 대중성을 모두 갖춘 안무를 창작해내고 싶어요.” 권 씨는 최근 안무가 외에 또 하나의 꿈이 생겼다. “궁극적인 목표라고 한다면 세계적인 안무가가 되는 것이라고 답해요. 하지만 현실적인 목표라고 한다면, 비전공자들을 대상으로 무용에 대해 강연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누군가 제 강연을 듣는다는 건 결국 제가 그 분야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겠죠? 언젠가 제 이름을 걸고 강연에 나서길 바라고 있어요.” ▲권재헌 씨는 지난 달 20일 진행한 인터뷰에서 "강연하는 안무가를 꿈꾼다"고 말했다. 글/ 김예랑 기자 ys2847@hanyang.ac.kr 사진/ 김윤수 기자 rladbstn625@ha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