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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 13

[학생][人사이드人터뷰] 반짝반짝, 꿈꾸는 배우

영화 <4등>과 <시인의 사랑>으로 충무로의 주목을 받은 정가람 배우가 연극영화학과 18번 학번 새내기로 입학했다. 영화 <4등>에서 보여준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어린 광수’와는 달리 그는 연기에 대한 꿈을 조금씩 키워나가는 스물다섯의 꿈 많은 청년이었다. 글. 오인숙 사진. 안홍범 ▲ 배우 정가람(연극영화학과 18)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 “너무 행복하고 설렙니다. 빨리 학교에 가고 싶어요. 앞으로 어떻게 학교생활을 할지, 친구들과의 생활이 얼마나 재미있고 즐거울지 기대가 커요.” 18학번 또래보다 나이가 많은 신입생, 배우 정가람. 그는 부산외대를 자퇴하고 이번에 두 번째 신입생으로 한양대에 입학했다. 그와 한양대의 인연은 스무 살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에 올라와서 처음 산 곳이 왕십리였고, 2년간 살면서 학식도 접해봤을 만큼 한양대는 이미 그에게 친숙한 곳이었다. “사실 고향 친구가 한양대 학생이에요. 이번에 졸업을 앞두고 있죠. 어쩌다 보니 친구가 졸업할 때 제가 입학하게 됐네요.(웃음)” 그가 학교생활에서 가장 기대하고 있는 부분은 같은 꿈을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과 교류다. 연기와 연출이라는 하나의 꿈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고민을 나누고 진지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생각만 해도 흐뭇하다. “연기를 공부하는 또래 친구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지금까지 어떻게 준비해왔는지 무척 궁금해요. 친구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그만큼 저도 학교생활을 열심히 또 즐겁게 할 생각이고요.” <4등> 그리고 <시인의 사랑> 2016년 영화 <4등>에서 ‘어린 광수’ 역할로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그는 이 영화로 2016년 제53회 대종상 신인남우상, 2017년 한국영화기자협회 제8회 올해의 영화상 신인남우상을 거머쥐었다. 배우 정가람에게 이 영화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영화 <4등>은 사랑이죠.(웃음)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정말 감사한 작품이에요. 제가 제대로 배우 생활을 시작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고, 영화가 무엇인지 알려줬죠.” 단역으로 조금씩 방송에 얼굴을 내밀던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처음으로 의미 있는 역할을 맡게 됐고, 연기자로서의 책임감도 알게 됐다. 첫 영화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얼굴을 알리고, 이토록 주목받았으니 “<4등>은 사랑”이라는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4등>은 그가 연기에 대한 절실함을 가졌을 때 만난 작품이다. 수영 천재인 ‘어린 광수’와는 달리 연기에 대한 갈증으로 힘들었던 ‘스물두 살의 정가람’이었던 때, 연기를 제대로 하고 싶은 절실함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아야 했을 때, 그런 시기에 만난 작품이 <4등>이었다. “‘어린 광수’는 일주일 간격으로 한 달간 오디션을 보며 따낸 배역이에요. 그 기간이 오히려 배움과 성장의 시간처럼 여겨졌을 정도예요.” 어렵게 따낸 배역을 눈앞에서 보여줘야 할 첫 현장에서 그는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어쩔 줄 몰라 하던 그에게 정지우 감독이 말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해 보세요.” 그 한마디에 긴장이 풀렸던 걸까. 첫 영화에도 불구하고 그는 편하고 즐겁게 촬영에 임할 수 있었다. “한 선배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이 영화는 정지우 감독님이 레인이 없는 커다란 수영장을 만들고, 그곳에서 배우가 마음껏 수영할 수 있게 만들어준 작품이라고요. 저 역시 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연기했던 것 같아요.” <4등>에 이어 2017년에는 영화 <시인의 사랑>으로 또 한 번 주목 받았다. 그의 표현을 빌면, 제목처럼 시적인 감성이 풍부한 영화다. 시도 노래처럼 가슴에 와 닿는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작품이다. 두 번째 영화에서는 감정을 보여줘야 할 장면이 늘고, 배역의 비중도 월등히 커졌다. 양익준·전혜진 배우와 함께 영화를 이끌어가야 하는 부담이 컸지만, 두 선배를 믿고 따라갔다. “어려운 캐릭터였지만, 꼭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4등>에서는 하나만 생각하고 직진했다면, <시인의 사랑>에서는 캐릭터 분석을 비롯해 여러 생각과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감독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준비했던 기억이 납니다.” 모든 작품이 다 새롭고 다르다는 그의 말처럼, 이 영화 역시 새롭게 배우고 또 한 번 성장할 수 있게 만들어준 영화였다. 스무 살, 꿈을 찾아서 경남 밀양이 고향인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부모님의 권유대로 학교와 학과를 선택해 진학했다. 그러다 보니 배움에 대한 의욕도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스스로의 힘으로 뭔가를 이루고,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경험하며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열심히 찾았다. 그때 했던일 중의 하나가 소셜커머스 광고 모델이었다. “우연찮게 한두 번 하게 됐는데, 처음에는 영 어색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너무나 재미있는 거예요.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이 뭘까 찾다가 배우를 꿈꾸게 됐죠.” 영화는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무수히 봤더랬다. 하지만 한창 자신의 진로를 고민하던 시기에 보니 그저 관객의 입장에서 영화를 봤을 때와는 다르게 보였다. ‘나도 저런 멋진 일을 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으로 살며 여러 가지 인생을 경험해볼 수 있을까?’싶었다. 배우에 대한 간절한 꿈을 품고 상경했지만, 아무 연고도 없는 서울 생활이 호락호락할 리 없었다. 그저 막막했던 가운데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조금씩 돈을 모아 프로필 사진을 찍어 기획사에 보냈다. 운이 좋았는지 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그렇게 활동을 시작해 차곡차곡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쌓아갔다. ▲ 정 배우는 '연기를 공부하는 또래 친구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지금까지 어떻게 준비해왔는지 무척 궁금해요.' 라고 말한다. 여행처럼 영화처럼 살고파 “이 일을 하면서 좀 더 적극적으로 변하고 쾌활해진 것 같아요. 하고 싶은 말과 마음에 둔 생각들을 예전보다 더 쉽게 할 수 있게 됐거든요.”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엄마 아빠, 사랑해요”와 같은 말들. 예전에는 낯부끄러워 꺼내지도 못했던 말들을 이제는 서슴없이 할 수 있게 됐다. 그만큼 연기를 통해 친근하고 유연해졌음을 스스로 깨닫는다. 정가람 배우는 얼마 전 영화 <악질경찰>과 <독전>의 촬영을 끝내고, 현재 <기묘한 가족>을 찍고 있다. <악질경찰>에서는 프로 털이범으로, <독전>에서는 막내 형사를 맡아 상반된 역할을 소화했다. 인터뷰를 위해 그를 만난 날도 지방 촬영으로 한 달여 만에 서울에 올라오는 것이라고 했다. 영화가 끝나면 주로 여행을 간다. 다양한 문화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큰 그에게 여행은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다. 화면으로 보는 것과 직접 경험하는 것이 전혀 다른 것처럼 여행을 통해 자신이 몰랐던 또 다른 세상과 만나는 것은 무척이나 신나고 흥미로운 일이기도 하다.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우고 싶어요. 그래서 여행을 자주 다니려고 해요. 새로운 문화를 접할 때마다 ‘아, 이런 세상이 있구나’ 하고 새삼 느낍니다. 이런 경험이 저에게 주는 영향이 매우 큰 것 같아요. 무엇이든 많이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이 연기에도 도움이 되고요.” 어쩌면 그가 여행을 좋아하는 것은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는 앞으로 배우로서 더 많은 성장과 발전을 이루게 될 것이다. 어떤 배우가 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는 한참을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교과서 같은 답일지 모르겠지만, 믿고 볼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나이가 들어서까지 오랫동안 꾸준히 연기하고 싶거든요. 이 일이 너무 즐겁고 재미있어요.” 학교에서의 체계적인 배움은 오랫동안 연기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기도 할 테다. 또 다시 새로운 출발선 앞에 선 정가람 배우. 이제 막 그의 즐거운 도전이 시작됐다. 사랑 한대 2018년 01-02월호 이북 보기

2018-03 12

[학생]한양을 빛낸 2017 연구실적 우수자

밤 늦은 시간까지 꺼지지 않는 대학의 불빛 중 대부분은 연구실이 차지하고 있다. 각 분야별로 활발하게 이뤄지는 연구는 곧 대학의 저력과 교육의 질 향상으로 이어진다. 대학은 다양한 연구에 앞장서야 하며, 연구에 대한 지원 역시 적극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한편, 한양대 산학협력단이 지식기반사회를 주도해 나갈 창의적인 인재를 발굴·격려하기 위해 신진연구인력과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우수 연구 실적 포상제도를 실시했다. 젊은 연구자들의 의욕 고취와 연구 수준 극대화를 통해 우수 연구 인력을 더욱 양성하려는 한양대의 의지가 엿보인다. 타국에서 이어온 연구의 결실 2017 우수 연구자상 시상식이 지난 2월 1일 서울캠퍼스 한양종합기술연구원(HIT관) 1층에서 열렸다. 이 시상식은 한양대 산학협력단이 주관했으며, 지난해 1월부터 12월까지 기간 내 연구실적물이 있는 신진 연구인력과 서울캠퍼스 소속 일반대학원 및 의생명공학전문대학원 학생을 대상으로 했다. 교내 정보 포탈에 입력된 연구 자료를 근거로 총 12명의 연구자가 우수 연구자로 선정됐다. 시상은 ▲신진연구인력 논문 우수 ▲대학원생 논문 우수 ▲대학원생 학술활동 우수 부문 총 3가지 분야로 나눠 진행했다. 인문, 사회,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우수 연구자가 선정됐다. ▲(왼쪽부터) 대학원생 논문 우수 부문 수상한 웅구강(Xing Jiuqiang, 자연환경공학과 석박사 과정) 씨와 성태현 산학협력단장. 쟁쟁한 수상자들 중 외국인 연구자의 존재는 단연 눈길을 끈다. 대학원생 연구실적 우수자 중 한 명인 웅구강(Xing Jiuqiang, 자연환경공학과 석박사 과정) 씨는 중국인이다. 한국에서 유학생으로 생활한지 어언 6년. 길었던 연구 끝에 이번 시상식에서 한국 학생들을 제치고 우수 연구자로 선정됐다. “연구와 타지 생활 모두 너무 힘들었는데 이렇게 상을 받아서 영광입니다.” 웅구강 씨는 우수 연구자로 선정에 기쁨을 나타냈다. 웅구강 씨는 ‘미세조류를 이용한 수중 의약품 오염 물질 제거를 위한 생물학적 정화 기술’을 연구했다. 지난 2014년부터 시작한 연구는 무려 5년 가까이 이어졌다. 중국에서 학부를 마치고 유학길에 올랐던 그는 연세대 어학당을 다니며 약 2년간 한국어를 공부했다. 2014년 3월이 돼서야 연구실에 지원할 수 있었다. 처음 그는 연세대 연구실에서 ‘미세 조류’와 관련된 연구를 시작했다. 당시 지도 교수였던 전병훈 교수(자연환경공학)의 추천으로 선택한 주제였다. “단순히 폐수 처리만 연구하려 했는데 교수님 덕분에 더 깊은 공부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힘들었던 타지 생활, 아버지 같았던 교수님 웅구강 씨가 연세대를 떠나 한양대로 오게 된 데에는 전병훈 교수의 영향이 컸다. 한국 생활에 막 적응해나가고 있었던 그에게 전병훈 교수는 관심과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곳에서 만난 전병훈 교수는 덕분에 그는 자신감을 갖고 연구에 더욱 몰두했다. 웅구강 씨는 “전 교수님이 연대에서 한양대로 옮긴다는 말을 듣고 함께 왔다“며 “그는 내게 아버지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웅구강 씨는 이번 우수 연구자상 수상 역시 전 교수의 추천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 웅구강 씨(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연구실 팀원들과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출처: 응구강 씨) 이제는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그에게 지난 6년간의 한국 생활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처음에는 화장실이라는 말도 못했어요. 한국어 한마디도 모르는 상태로 한국에 왔거든요.” 언어는 그에게 큰 장벽처럼 여겨졌다. 2012년에 한국에 왔지만 연구실 문턱은 밟아보지도 못한 채 2년이 넘도록 한국어를 익혀야 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꾸준히 언어를 익히고, 연구에 몰두한 끝에 결실이 있었다. “처음엔 연구와 실험을 계속해도 결과가 나오지 않아 상심이 컸죠. 매일 오전 10시에 연구실에 와서 밤 늦게 집에 돌아가요. 그래도 언젠가부터 여러 편의 논문을 쓸 만큼 연구가 잘 나와서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미래 연구자를 꿈꾸며 웅구강 씨는 향후 몇 년은 한국에 더 머물며 연구를 이어나갈 생각이다. 지금까지 이어온 미세조류와 폐수처리에 관한 연구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 “분자 생명 쪽으로 분야를 넓혀 연구를 이어가고 싶어요. 가능하다면 박사 후 과정도 지원하고 싶고요.” 그의 궁극적인 꿈은 고국인 중국에 돌아가 연구자가 되는 것이다. 꿈이 있기에 웅 씨는 한국에서의 공부를 포기할 수 없다. “좋은 교수, 연구 시설 등이 있어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 지난 3월 9일 진행된 인터뷰에서 웅구강 씨는 "정말 영광스럽고 기쁘다"고 말했다. 글/ 김예랑 기자 ys2847@hanyang.ac.kr 사진/ 이진명 기자 rha925@hanyang.ac.kr

2018-03 08

[동문]누가 뭐래도 가야금 할래요 (1)

“아리아리”는 성대하게 막을 내렸던 2018 평창동계올림픽, 패럴림픽의 공식 인사법이다. ‘없는 길을 찾아가거나 길이 없을 때 길을 낸다’는 뜻으로, 파이팅 대신 순우리말로 쓰였다. 이를 알리기 위한 홍보대사 아리아리걸스는 지난 12월 앨범 <아리아리>를 발매했다. 총 6곡 중 4곡에 아름다운 가야금 선율이 담겼고, 이는 조영재 동문(음악 교육학 석사)의 참여로 이뤄졌다. ‘가야금영재’라는 예명으로 국악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조 동문이 오랜만에 모교를 방문했다. 뭐든 잘하고 싶었던 영재 “피아노는 배우기 싫어요.” 초등학생 시절 조 동문이 어머니께 했던 말이다. 그 후 조 동문은 가야금을 배웠고, 싫증내지 않고 곧잘 했다. 그는 가야금을 켜며 한양대 진학에 대한 꿈을 키웠다. “처음부터 한양대에 오고 싶었어요. 중고등학생 시절 존경하는 선생님들이 한양대 출신이셨거든요.” 꿈은 이뤄졌다. 조 동문은 한양대 입학해 최연소로 가야금 독주회를 열고, 성적우수장학금을 받는 등 활약을 이어갔다. ▲'가야금영재' 조영재 동문을 지난 3일 미래자동차공학관에서 만났다. 하지만 조 동문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신문방송학과 복수전공의 길을 택한다. “고등학교 때 국악방송의 존재를 알았어요. 가야금으로서 돈을 벌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고, 막연히 국악방송연출을 꿈꿨습니다.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다면, 해보자고 생각했죠.” 복수전공을 통해 관련 지식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알게 됐다. 모두 큰 자산이었다. 5년 동안의 공부는 국악방송 시험 3차 통과로 결실을 보았지만, 조 동문은 부모님의 바람대로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다. 가야금과의 ‘필연’ 대학원 석사를 졸업하고, 조 동문은 중·고등학교 음악 교사가 됐다. “안정적인 생활을 했지만, 마음 한편에는 답답함이 자리 잡았다. “항상 가야금 1등을 목표했는데, 교사가 되니 하고 싶은 게 없어졌어요. 꿈이 없으니 재미도 없고, 아무것도 잡히지 않더라고요. 가야금 연주를 다시 하고 싶었어요. 결국, 교사 일을 그만두고 지난해부터 ‘가야금영재’라는 예명으로 앨범 활동을 시작했다. “스스로 영재라고 칭하면, 사람들이 궁금해서 물어보더라고요. 제 이름이 영재라는 점과 함께 자연스레 이름을 알릴 수 있었어요.” 조 동문은 가야금에 탱고, 재즈, 삼바 장르가 혼합된 ‘가야금영재의 필연’을 발매했다. 익숙한 음악에 어우러진 가야금 선율은 전통음악의 편견을 깼다. “탱고 선법, 라틴계 음계 모두를 고려해서 가야금 리듬을 융합했어요. 우리 민요에 재즈를 얹는 시도도 감행했죠.” 이후 총 6회의 독일 순회를 진행한 조 동문은 앨범에 대한 세계인들의 뜨거운 반응을 느낄 수 있었다. “재독 동포와 독일 현지인이 공연을 보며 감동하는 모습을 잊을 수 없어요. 외국에서 공연하면 기사에 제 얼굴이 실리기도 하는데, 동네 전체가 저를 알아봐 주더라고요.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조영재 동문은 지난해 12월 평창응원가에 특별히 참여했다. “여자연예인야구단 소속이라, 일주일에 한 번씩 야구연습을 해요. 야구단이 홍보대사가 되면서 앨범을 낼 기회를 얻었죠.” 2018 평창동계올림픽〮패럴림픽 홍보대사로 위촉되면서, 조 동문은 강원도 아리랑, 본조아리랑의 선율을 넣은 곡 ‘Everybody Passion Crew’ 등을 전속작곡가와 함께 만들었다. “올림픽 기간 내내 20번이 넘는 연주를 했어요. 신나는 응원가와 가야금 선율이 정말 잘 어울리더라고요..” 꿈이 있어 행복합니다 흔히 국악이라면, 지루한 음악이라는 선입견이 존재한다. 하지만 조 동문은 이에 “딱 한 번만이라도 내 음악을 들어본다면 깜짝 놀랄 것”이라고 했다. “제 음악은 재즈, 라틴 등 다양한 장르가 어우러져 지루하지 않죠.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국악을 많이 듣지 않아요. 선진국이 자국 문화의 가치를 제고하는 데 힘쓰는 것처럼, 우리나라도 전통음악의 가치를 높게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내내 조영재 동문의 재치있는 농담으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가야금은 물론, 후배들에게 애정이 남달랐던 그는 인상깊은 조언을 건넸다. 안정적인 직업을 그만둔 후 전보다 통장에 여유가 없어졌지만, 조 동문은 꿈이 있어 행복하다. 가야금의 대중화를 위해서 방송인 데뷔를 앞둔 그는 “설레서 잠이 안 올 때도 있다”고 했다. “EDM, 재즈 등 여러 가지 가야금 음악을 구상 중이에요. 가야금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나의 상표 가치를 올리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에, 방송 활동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의 도움을 미안하게 여기는 대학생들을 향해 조 동문은 “여러 가지 하고 싶은 건 대학교 때 마음껏 하라”고 말했다. “성인이 됐지만, 충분히 어린 나이에요. 대학교 4년 동안 조금만 더 투자를 받고, 다양한 활동을 통해 본인이 원하는 것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중에 부모님께 몇 배가 넘는 보답을 할 수 있어요. 삶의 목표는 취업이 아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재미있게 하며 사는 것 아닐까요.” 조 동문에 관한 더 많은 소식은 다음 SNS계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페이스북 바로가기] 글/ 정민주 기자 audentia1003@hanyang.ac.kr 사진/ 이진명 기자 rha925@hanyang.ac.kr

2018-03 08

[교수]"공대교육의 미래를 밝게 이끌기 위해 노력할 것" (1)

한양대는 올해도 어김없이 국내외 대학평가에서 상승세를 기록했다. 공과대학은 각종 지표에서 좋은 평가를 기록하고 국제대회에서 성과를 올리며 세계적으로 위상을 높였다. 최근 또 좋은 소식이 있다. 한국공과대학장협의회(이하 한공협) 회장으로 한양대 공과대학장 정성훈 교수(유기나노공학)가 선출됐다. 한공협을 1년간 이끌어 갈 정 교수에게 공과대학에 대한 미래를 물었다. 대한민국 공과대학을 대표하는 길 정 교수는 한양대 섬유공학과(현 유기나노공학과) 졸업 후 한국바이린부직포에서 경험을 쌓았다. 이후 유학길을 떠나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 주립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지난 1995년 본교 유기나노공학과 교수로 부임했고 지난해부터 공과대학 학장을 맡고 있다. 공학에 대한 열정은 지금의 그를 만든 원동력이다. “교과서 같은 대답이지만, 항상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어요.” 정 교수는 학생에서 교수로 한양대를 다시 찾았을 때도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우리 공대 학생들을 잘 가르쳐 사회에 꼭 필요한 인재로 만들겠다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공협은 한국 공학교육에 대한 경쟁력을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구성된 공과대학 협의체다. 160여 개 공과대학이 참여해 정책제안 외에도 공학교육 관련 각종 활동을 진행한다. 정 교수는 지난 1일부터 회장 임기를 시작했다. “이런 큰 자리를 맡게 됐네요. 무엇보다 한양대를 빛낼 수 있어 큰 영광입니다.” 한공협 회장은 매년 수도권과 지방에서 교대로 선발된다. 이사회가 추천 후보를 받은 후 총회에서 투표를 진행하는데 정 교수는 만장일치로 회장으로 선출됐다. “협회 내 많은 사람이 한양대가 우리나라 공과대학을 대표한다고 하죠. 한양의 힘으로 제가 선출된 것 같네요.” ▲한국공과대학장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된 정성훈 교수(유기나노공학과)를 지난 7일 한양대 공업센터에 위치한 공과대학 학장실에서 만났다. “국민들에게 공학교육의 중요성을 알리고 우수한 인재들을 공과대학에 유치시키기 위해 힘쓰겠습니다.” 정 교수가 내비친 1년간의 포부다. “4차산업혁명에 맞춰 기업체에서는 이미 큰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요. 공과대학에서는 그런 교육을 아직 따라가지 못 하고 있죠.”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한 교육 전략을 세우고, 제대로 된 정부의 지원을 받는 공과대학을 만드는 일. 정 교수 스스로 앞장서고자 하는 길이다. “공학에 대한 사랑과 열정? 그건 기본이죠” 정 교수의 공학에 대한 열정과 사랑은 학부 시절부터 유명했다. 학부 시절 정 교수의 별명은 ‘정제포’였다. “섬유공학에서 배우는 여러 과목 중에 제포(직물을 만드는 수업; textile)는 동기들이 유독 어려워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정말 흥미로웠습니다.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날 ‘정제포’로 불러달라 먼저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섬유공학에 대한 유별난 사랑을 가진 정 교수는 졸업 후 공장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당시 공장은 열악한 환경과 업무 조건 탓에 공대생들이 꺼리던 길이었다. 그렇지만 정 교수에게는 해가 지는 게 원망스러웠을 정도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3년간 공장에서 쌓은 실무경험은 유학 생활에도 큰 도움이 됐다. “아무리 책으로 배우고 상상해도 실무를 보지 않으면 이해가 안 되는데, 제 머릿속에선 이미 공장이 돌아가고 있었죠.” 정 교수는 현장에서 배우고 익힌 것을 밑거름으로 석사, 박사과정을 밟는 동안 실무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 덕에 평소에도 학생들에게 실무경험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다. 전공을 즐겁게 공부하고, 현장에서 활용하며 익힌 것이 정 교수를 지금의 자리로 이끈 진정한 원동력이다. ▲정성훈 교수는 지난 날에 대한 얘기를 꺼내며 섬유공학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앞으로 밝힐 공학의 길 “학생들이 전공에 대해서 더 폭넓은 시야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정 교수는 공학도들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넸다. “전공 공부와 관련해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관련 산업을 자세히 파악하고, 나아가 창업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네요. 먼저 학교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기회를 놓치지 말고 맘껏 이용해보길 바라요.” 공학교육의 문제점을 찾고, 새로운 공학교육을 위한 콘텐츠를 만들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정 교수의 향후 일정은 공학교육을 위한 일로 가득 차 있었다. 정 교수는 “공대교육의 발전은 결국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잠깐의 인터뷰에서도 느낄 수 있었던 정 교수의 열정은 앞으로 한공협 회장으로서의 행보를 기대하게 한다. ▲정성훈 교수는 "한국의 공학도들을 위해 더 많은 기회와 지원을 제공하고자 힘쓰겠다"고 말했다. 글/ 황유진 기자 lizbeth123@hanyang.ac.kr 사진/ 최민주 기자 lovelymin12@hanyang.ac.kr

2018-03 02

[동문]아쟁의 시대에 획을 긋다

예술을 창작하는 일은 쉽지 않다. 오랜 활동 기간이 무색하게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런 만큼 예술가는 끝없이 연습하고 전문적인 노력을 더한다. 아쟁은 훌륭한 국악기임에도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악기다. 정미정 동문(음악학 박사)은 이를 개선하기 위해 ‘아쟁 크로스 오버’ 음악을 만들어내며 아쟁을 위한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아쟁과 재즈의 결합 지난 1월, 정미정 동문은 음반 발매기념 콘서트 ‘The Moon’ 연주회를 개최했다. 이번 공연은 정 동문이 새롭게 선보인 ‘아쟁 크로스 오버’로 이뤄졌다. 공연에는 재즈피아니스트, 드럼, 베이스, 보컬리스트 등 국내 최정상 재즈 연주자들이 함께했다. “개인 독주회를 열고 전통음반을 냈었지만, 이런 음반은 처음이에요. 일반인들의 취향에 부합하기 위해 대중적인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그의 앨범 ‘Moon’에는 재즈피아니스트와 정 동문의 작곡, 편곡을 거친 9개의 수록곡이 담겼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39호 한일섭제 박종선류 아쟁산조 이수자’, ‘성남시립국악단 상임 단원’ 등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정 동문은 이번 앨범에서 지금까지 쌓아온 음악성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작곡은 영감을 받으면 한꺼번에 이뤄져요. 이후 완성하는 데 2~3달 정도 걸렸어요.”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도 어렵지 않았다. “재즈 연주자들과 한 번 만나서 맞추고 공연을 했어요. 제 분야에 정통한 상태고, 모두 내공이 있었기에 즉흥연주도 어렵지 않았네요.” ▲지난 1월 19일에 열린 정미정 동문(음악학 박사)의 아쟁음반 발매기념 콘서트 'The Moon' 동영상 아쟁과 시작된 사랑 정 동문은 국악을 좋아했던 아버지와 오빠의 영향으로 아쟁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아쟁 연주를 시작했어요. 그전까지는 일반 학생처럼 공부했고, 진로 고민 후 아쟁을 연주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정 동문에게 아쟁은 운명이었다. “악기는 연주자와 비슷하게 간다고 생각해요. 아쟁은 조용하고 낮은 제 목소리와 어울려서 좋았습니다.” 독주 악기로서 70년이 된 아쟁은 역사가 짧다. “대학교에 아쟁 전공이 생긴 것은 최근 일이에요. 제가 한양대 아쟁 박사 2호니까요. 그래서 다른 국악기보다 시장경쟁력이 유리했습니다.” 정 동문은 연주자로서 박사학위가 중요했고, 이에 맞는 최고의 학교가 필요했다. “실기가 중심이지만, 이론을 배울 수 있는 곳을 찾았어요. 한양대는 워낙 음악 분야에서 유명한 학교라 합격했을 때 영광이었죠.” ▲지난 1월 30일, 재즈음악이 가득했던 신사동 카페에서 정미정 동문(음악학 박사)을 만났다. 세계와 만나다 ‘대만 국립 대북예술대학 교류연주회’를 비롯해 정미정 동문은 지금까지 12회의 개인 독주회와 4회의 듀오 음악회 등 세계 각지에서 아쟁을 연주했다. “한 번은 러시아에서 협연한 적이 있었는데요. 할머니가 ‘브라보’라고 외치시며 우셨어요. 전통아쟁은 사람을 붙잡는 매력이 있어서 러시아 감성에도 맞았죠.” 정 동문의 목표는 미국, 유럽 등에서 현지인들과 음악을 하는 것이다. “저는 세계음악을 지향해요. 미국에 가서 재즈 연주자를 만나고, 유럽에 가서 집시음악을 하는 것이 꿈이에요. 즉흥연주를 위해선 음악적인 내공이 필요해요. 지금은 차곡차곡 내실을 쌓으며 한 발을 내딛는 단계죠. 현지인과 같이 음악을 하는 것이 큰 공부가 될 겁니다.” ▲정미정 동문은 "연주자로서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는 문화예술의 길을 넓히겠다"고 했다. 아쟁을 기억해주세요 정 동문은 아쟁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토대로 아쟁의 시대를 열고 있다. 그의 최종 목표는 교육자가 되는 것이다. 정 동문은 “후배 아쟁 연주자가 시험 독주곡으로 사용할 수 있게 ‘국악 작품집’을 내고 싶다”고 했다. 대중에게 아쟁을 알리고, 후배를 위한 교육자를 꿈꾸고, 세계 음악을 지향하는 정 동문. 우리 악기 아쟁을 매개로 많은 이와 교감하는 정 동문의 열렬한 모습을 응원한다. 글/ 정민주 기자 audentia1003@hanyang.ac.kr 사진/ 최민주 기자 lovelymin12@hanyang.ac.kr

2018-02 28

[동문]연극을 보고, 느끼고, 말하다

무대, 배우, 관객, 희곡은 연극을 이루는 주 요소다. 연극평론가는 이 모든 것을 매의 눈으로 분석하고 비평한다. 무대의 현장감을 글로 옮기는 삶에서 연극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그렇기에 현재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옥란 동문(국어국문학과)의 일상도 연극과 함께한다. ‘2017 여석기 연극평론가상’의 주인공이 된 김 동문을 만났다. 세월호 전후로 나뉘는 연극들 ‘여석기 연극평론가상’의 수상작인 <레드와 블랙>은 지난 2013년부터 2015년까지의 연극을 다룬 김 동문의 세 번째 평론집이다. ‘1세대 평론가’였던 고(故) 여석기 씨는 연극전문지 <연극평론>을 창간하고, 연극평론을 하나의 전문 분야로 이끌었다. ‘여석기 평론가상’은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제정됐다. 매해 심사위원단의 토론을 거쳐 수상자를 선정한다. ▲지난 1월 10일 김옥란 동문(국어국문학과 87)이 '여석기 연극평론가상'을 수상하고 꽃다발을 들고 있다. (출처: 김옥란 동문) <레드와 블랙>은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레드 콤플렉스(공산주의에 대한 과민반응)'와, 그 연장에 있는 '블랙리스트 사태'의 줄임말이다. 또한, 이제는 레드와 블랙을 넘어서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저자의 생각을 담고 있다. 작품에서 눈 여겨 봐야 할 점은 세월호 참사 전후로 상연된 연극들이 실려 있다는 것이다. 세월호를 기점으로 연극계 작품들의 특징을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비판극을 주로 연출했던 박근형 연출가의 연극 <개구리>는 지난 2013년에 상연 후,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라갔어요. 그 후 연극계 내 광범위한 검열이 있었고, 국공립 극장들의 공연이 진행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어요.” 김 동문은 그렇게 연극계 블랙리스트와 부조리함에 맞서는 연극들을 기록하고, 하나의 책으로 묶어냈다. 국민들을 광장으로 모이게 한 혼란의 시기를 일관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은 <레드와 블랙>. 그 시기를 이겨내기 위한 연극인들의 노력이 책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책을 내는 과정에서 검열은 없었지만, 김 동문은 자체적으로 검열을 해야 했다고 말했다. “지원을 했을 때 몇 번 떨어졌어요. 그 후 목차를 바꾸고 편집을 했어요. 그렇게 이 책은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게끔 자리를 찾아간 것 같아요.” ▲세월호와 블랙리스트의 아픔을 겪어야 했던 연극계. 김 동문은 <레드와 블랙>에서 그 시대의 아픔을 작품해설로 풀어낸다. 연극과 토론, 그리고 글 고(故) 여석기 연극평론가와 김 동문의 문체는 많이 닮아있다. “선생님 생전에 인터뷰를 한 적이 있어요. 평론과 비평의 글 쓰기는 어때야 하는지 여쭤봤었는데, 대중과 소통하고 모두가 편하게 읽을 수 있게끔 쉽게 써야 한다고 하셨죠.” 그렇게 김 동문은 단문을 선호하게 됐다. 그가 생각하는 또 하나의 ‘평론의 언어’는 바로 현장감이다. 글을 쉽게 쓰되, 살아있어야 한다. “보통 연극의 주제나 의의를 쓰는 비평서가 많은데, 저는 제가 보고 느낀 것을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관객들과의 호흡, 반응, 그리고 장면에 대한 묘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김 동문은 비평을 할 때 무대의 시각적인 배열인 ‘미장센’에 집중해 연극 그대로의 느낌을 살린다. 배우들의 연기와 무대의 분위기가 간결한 글을 통해 전달된다. ▲김 동문은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공감'이라 말했다. "익숙한 것들을 통해 폭 넓은 공감을 얻는것도 중요하지만, '저런 것도 있었지'라는 생각을 상기 시켜주는 것도 필요해요." 지난 1987년, 김 동문의 학창시절에는 연극영화학과가 인문과학대학에 속해 있었다. 덕분에 다양한 학과의 학생들이 만날 기회가 많았다. 데모가 많았던 시절이라 휴강이 잦았던 때,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다 같이 모여 소설책을 읽고, 토론을 했어요. 저는 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걸 즐겼어요. 익숙해진 토론 문화가 비평에 도움이 많이 된 것 같네요.” 많이 보고, 듣고, 돌아다녔던 김 동문은 4학년 때 ‘희곡론’ 수업을 통해 희곡과 처음 만났다. 그 후 동대학원에서 한국희곡을 전공하며 숱한 공연을 관람했다. 평론가의 길을 자연스레 걷게 된 김 동문. 글로 자신의 생각을 나누고 싶은 소망에, 블로그 및 싸이월드와 같은 개인매체에 글을 게재하기 시작했다. “희곡 연구를 하는 것이 우선순위였지만, 글 쓰는 것이 마냥 좋았어요. 그렇게 평론가가 됐고, 지금도 하루 일과는 연극으로 꽉 차 있어요.”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연극의 미래 한국 연극의 발전 방향에 대해 김 동문의 생각을 들어봤다. 지금은 ‘제작극장’의 시대에요. 원래 극장은 작품을 섭외해서 대관 역할을 할 때가 많았는데, 이제는 극장이 제작 시스템을 갖추어 자체 기획을 해요. 매해 시즌마다 기조를 정하죠. 남산예술센터가 블랙리스트에 올랐을 때, 검열대상 작품들을 다 모아 상연했던 것처럼요. 이렇게 하면 훨씬 더 전문적인 기획력을 선보이게 돼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새로운 연출력과 형태를 끊임없이 연구하는 연극계의 미래는 밝다. 3년 마다 평론집을 한 권씩 내는 김 동문은 다시 희곡 연구에 전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연구자로서 역사를 기록해야 하는 의무가 있잖아요. 비평 작업했던 것을 모아 더 풍부한 이야기로 풀어내고 싶어요.” 고(故) 여석기 평론가가 강조했던 ‘대중과의 소통’을 김 동문은 블로그로 실천 중이다. 다양하게 선보여지는 연극들의 뒷이야기들을 blog.naver.com/kimockran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른 문화분야를 평론할 의향이 전혀 없을정도로, 김 동문의 모든 신경은 연극에 향해 있다. 글/유혜정 기자 haejy95@hanyang.ac.kr 사진/강초현 기자 guschrkd@hanyang.ac.kr

2018-02 27

[동문]아프리카로 간 공학도

신흥 투자시장으로서 아프리카 대륙이 가진 잠재성은 크다. 그 가운데, 아프리카개발은행(African Development Bank, 이하 AfDB)은 국가개발에 힘쓰고 있다. AfDB는 아프리카 지역회원국의 경제, 사회적 발전을 도와 빈곤감소를 도모하는 국제개발금융기구다. 공과대학 출신인 진승수 동문(기계공학과 03)은 이곳에서 시니어 컨설턴트로 활약하고 있다. 아프리카와의 인연 시작 “대학교 때부터 공학 외에도 경영, 금융 등에 관심이 많았어요. 플랜트 관련 수업을 들으며 ‘프로젝트 파이낸싱(Project Financing)’에 관심을 둔 것이 본격적인 시작이었죠.” 프로젝트 파이낸싱은 은행 등 금융기관이 특정 사업의 장래 현금흐름을 보고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이다. 대규모의 자금이 필요한 인프라 사업(도로, 항만, 발전, 공항, 병원 등)에 흔히 사용되는 일종의 금융기법이다. 공학과 금융을 함께 배운 진 동문에게 어울리는 분야인 셈이다. 진 동문은 대학 졸업 후 삼성물산 플랜트 사업부, 삼성 LED 사업 전략팀을 거쳐 카이스트의 금융 MBA로 진학했다. 그러다가 시선이 아프리카 대륙으로 향했다. 자금 융통의 가능성이 높은 아프리카는 새로운 도전의 땅이었다. “당시 기획재정부에서 시행한 ‘코리안 스페셜 인턴십(Korean Special Internship)’에 지원했어요. 1000:1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 AfDB에서 인턴으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됐죠.” 아프리카와 진 동문의 첫 만남이었다. 그의 인턴십 기간이 끝나갈 때쯤, 부서에서 에너지 프로젝트의 수익성 및 경제적 타당성 분석을 담당하는 시니어 컨설턴트를 뽑고 있었다. 인턴에서 바로 시니어 컨설턴트가 되는 경우는 없었지만, 진 동문은 함께 일한 동료들의 추천으로 바로 그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진 동문은 지난 2013년 말 AfDB에 입사한 이래 케냐의 나이로비(Nairobi)로 옮겨와 현재는 동아프리카 국가들의 에너지 프로젝트(발전소, 송배전 사업 등) 개발을 담당하고 있다. ▲진승수 동문(기계공학과 03)은 현재 AfDB에서 시니어 컨설턴트로 활동하고 있다. (출처: 진승수 동문) 변화를 이끄는 남자 시니어 컨설턴트가 된 진 동문은 에너지 프로젝트 파이낸싱 분야에서 주로 수익성 분석을 맡고 있다. 특히, 아프리카 내 국가의 정부나 민간기업에서 투자 협조를 요청할 경우, AfDB 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로 팀을 만들어 프로젝트의 파이낸싱 여부를 결정한다. 진 동문은 에너지 관련 분야를 리드하며 수익성 및 경제 타당성 분석을 담당한다. 프로젝트가 수익성이 나는지, 사회·경제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분석하는 일이다. 매 순간이 복합적인 분석과 선택의 연속이다. 하지만 진 동문은 멈추지 않는다. 강한 책임감이 그를 이끌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파이낸싱을 위해 현장을 가보면, 시골 지역은 아직 전기가 없거나 안정적으로 전기를 공급받지 못하는 곳이 많아요. 제가 참여한 발전소 및 송배전 사업을 통해 주민들의 삶이 나아지고, 지역에 경제개발 효과가 나타나는 걸 보면 뿌듯하죠.” 나아가 국가의 전기 관련 비용이 감소하는 등 국가 전체에 영향을 주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낀다는 진 동문이다. ▲AfDB가 중앙아프리카의 각국을 이어주는 도로 건설에 기여하면서 주민들의 생활 수준이 크게 향상됐다. (출처: AfDB 홈페이지) AfDB에서 근무하면서 진 동문은 튀니지, 코트디부아르, 케냐까지 세 나라를 거쳐왔다. 처음 접하는 아프리카문화와 습한 날씨로 처음에는 적응하는 것이 힘들었다. 하지만 지중해 연안의 아름다운 바다를 끼고 살아가는 주민들의 순수한 마음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가 좀 더 직업적 책임감에 몸을 맡기는 이유다. 현재 생활하고 있는 케냐의 나이로비는 흔히 생각하는 아프리카 기후와 전혀 다른 선선한 기후를 가진 곳이다. 동아프리카의 중심지인 만큼 외국인에게 가장 개방적이고 많은 기업이 거점을 두고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진 동문은 케냐에 얽힌 흥미로운 사실을 언급했다. “케냐는 모바일 머니(Mobile money)로 무엇이든 다 결제할 수 있는 캐시리스 사회(Cashless Society)의 주도국이라는 거죠.” 아프리카에서 그리는 미래 아프리카는 경제 성장률이 세계 평균 경제성장률보다 높은 대륙으로 개발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아프리카 근무 5년 차의 진 동문은 아프리카 경제성장에 긍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경제 성장률이 높고 워낙 개발수준이 낮아 개발의 영향이 아주 크게 느껴집니다. 전에 살던 코트디부아르의 아비장(Abidjan)에선 지난 3년 동안 도로 및 대교, 빌딩 등이 생겨났어요. 많은 기업이 들어와서 사업을 시작했죠. 여기에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급증한 모습을 보면 발전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네요.” 진 동문은 AfDB에서 단기적으로는 아프리카 에너지 프로젝트 파이낸싱 경험을 최대한 많이 쌓을 예정이다. 장기적으로는 에너지 파이낸스 전문가로서 아프리카 에너지 개발을 위한 더 많은 투자 유치를 하는 것이 목표다. 장기적인 비전을 묻는 마지막 질문에 진 동문은 “아직 한국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개발 금융의 역사가 짧기 때문에 해야 할 일들이 많다고 했다.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의 개발 금융의 경쟁력을 높이고 더 많은 개도국의 개발에 기여하면서 동시에 한국 기업들이 아프리카에 진출하는 걸 도와주고 싶습니다.” ▲진승수 동문은 현재 아내 이효경 씨와 함께 AfDB 동아프리카 지부에서 아프리카의 국가발전을 위해 일하고 있다. (출처: 동아일보) 글/ 황유진 기자 lizbeth123@hanyang.ac.kr

2018-02 13 중요기사

[교수]“지금도 건축하는 게 정말 기쁘고 보람차다”

청와대 영빈관. 귀한 손님을 맞는 곳이란 뜻처럼 외국의 대통령이나 총리가 방문했을 때 맞이하는 장소다. 우리나라를 알리는 민속공연과 만찬을 베푸는 공식행사장인 영빈관은 그 화려한 내부로도 유명하다. 이 내부 공간은 한양대 건축과를 졸업한 유희준 명예교수(건축공학과)의 손을 거쳤다. 최근까지도 활발히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유 교수는 최근 제21회 가톨릭 미술상에서 특별상을 수상했다. ▲지난 7일 한강이 보이는 유희준 명예교수(건축공학과)의 개인사무실에서 유 교수를 만났다. 정년퇴임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유 교수는 여전히 건축가로 작업을 이어오고 있었다. 건축계에선 세번째 ‘가톨릭 미술상’ 특별상 지난 1954년 한양대 건축과에 입학한 유희준 교수는 지난 1958년 졸업 이후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학에서 건축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그 후 미국 LA의 설계회사 럭맨그룹(Luckman Group)에서 근무하던 중 고(故) 이해성 교수(건축과)의 권유로 지난 1965년 우리대학 건축공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34년간 교수로 지내며 유 교수는 다수의 성당을 포함해 여러 건축물을 설계했다. 그중 상징적인 일이라면 청와대 영빈관 내부를 설계한 바 있고, 한국건축가협회 회장 또한 역임했다. 그 외에도 <건축기능+지각심리→형태미>라는 이름의 작품으로 지난 1978년에는 건축부문에서는 최초로 국전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1995년에는 대한민국 옥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정년퇴임 한 1999년부터 지금까지도 건축가로서 활동하고 있다. 이번에 유 교수가 받은 가톨릭 미술상은 한국천주교주교회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는 상이다. 교회 미술 발전과 토착화를 위해 제정한 이 상은 ‘한국 교회의 성미술 발전에 공헌도가 높은 작가’를 선정해 수여한다. 특별상은 여러 부문에 관계없이 가장 의미가 있는 이에게 시상한다. 유 교수 또한 일찍이 심사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었다. 이번 수상은 가톨릭계에 대한 평생의 공헌에 가톨릭계가 답하는 감사이기도 하다. 심사를 맡은 건축가 김창수 씨는 “1970, 80년대 척박한 환경에서도 서구의 교회건축을 답습하는 것이 아닌 독자적 창작을 추구해 한국 교회 현대적 종교건축의 방향 제시해 주셨다”며 “비록 많이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특별상을 모실 수 있게 돼 큰 기쁨”이라고 말했다. 막간 Q&A Q. 제21회 가톨릭 미술상 특별상을 수상하신 소감은 어떠신가요. 여태 건축부문에서 특별상을 받은 분이 두 분이에요. 제17회 때 제가 너무 존경하고 사랑하는 故 김수근 선생님께서 특별상을 받으셨는데 그때부터 ‘받으면 무척 영광이다’라는 생각을 했죠. 그 이전엔 고(故) 이희태 선생께서 최초로 특별상을 받으셨고. 그분들과 같은 상을 받게 돼서 많이 기쁘네요. Q. 건축가 고(故) 김수근 선생님과 교동초등학교 3년지기 선후배이시고, 생전 김 선생님과 자주 교류했다고 하신 바 있는데 기억나는 일화가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한 번은 저를 불러놓고 도면을 펼쳐 놓으신 적이 있어요. 아마 선생님께서 40대 전후였을 때인데 펼친 도면을 보며 물으셨죠. ‘내 여태 설계한 건 다 헛거고 이 작품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데 유 교수가 한 번 봐줘.’ 감히 선생님 작품에 손을 댈 상상을 못해서 극구 사양했지만 결국 두서너 군데를 ‘저 같으면 여긴 이렇게 했을 거 같아요’하고 정중히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응 그렇지?’하면서 흡족해 하셨는데, 그러고선 故 장세양 소장님을 불러 저를 옆에 두고 아까 말씀드린 부분들을 수정하라 하셨죠. 그때 너무 감사하고 지금도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죠. '지금까지 살아계셨더라면 어떤 활약을 보여주셨을지'라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합니다. 건축, 그리고 미술 유희준 교수의 사무실은 온갖 액자로 가득하다. 가족 사진 몇몇을 빼면 대부분 그의 작업물이 담긴 액자다. 특이한 점이라면 그중 일부는 회화미술 작품이다. 건축가로서는 독특하게 유 교수는 미술에도 조예가 깊다. 지난 2015년 말에는 <열정>이란 이름으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그때 전시된 작품 중 몇 점은 이전에 국제미술현상에서 결승출전자(Finalist winner) 상을 받았다. ▲지난 2015년 열린 유희준 교수의 개인전 <열정>에 실린 작품 <혼돈의 측량>. (출처: 유희준 교수) 유 교수의 회화작품은 구성이 치밀하다. 오히려 흐트러지게 그리는 게 잘 안된다. “중학교 때도 사생화를 그리고 미술선생님께 혼났죠. ‘이건 그림이 아니고 제도야!’ 빨간 벽돌과 흰색 돌 장식들을 꼼꼼히 그렸더니 그런 꾸지람을 들을 만도 했죠. 당시엔 무척 창피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부터 건축가 기질이 있던 거 같네요.” 정교수로 재직하던 시절에도 유 교수 곁에는 미술도 함께했다. 12년 동안 서울미대로 실내인테리어 디자인 관련 출강을 나간 바도 있고, 도서관에서는 언제나 건축책과 함께 미술책을 봤다. “당시 일 년에 한두 건씩 큼직한 설계 의뢰가 들어왔죠. 그 돈으로 미국에 가면 꼭 예일대에 있는 서점을 들렀는데, 거기서 앉아 책을 읽고 있노라면 정말 행복했죠. 건축책을 산 만큼 미술책을 샀던 거 같아요. 그만큼 건축이 좋았고, 미술도 좋았죠.” 유 교수는 “내 평생 건축하는게 정말 기쁘고, 지금 85살이지만 건축을 하면 마음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유 교수가 3년전 열었던 개인전 ‘열정’ 당시 밝혔듯, 건축은 그에게 있어 ‘인생이자 평생의 열정 그 자체’다. 그리고 함께해온 회화는, 유 교수 스스로를 건축과 함께 이끌어온 또 다른 열정의 징표다. ▲유희준 교수에게 건축은 곧 열정이다. 글/ 이상호 기자 ta4tsg@hanyang.ac.kr 사진/ 강초현 기자 guschrkd@hanyang.ac.kr

2018-02 12 중요기사

[동문]내 목소리 쓰일 곳 많아 감사해 (3)

뽀로로, 타요, 캐리 언니를 모르는 아이들이 있을까. 유아 애니메이션의 인기는 더욱 거세지는 추세다. 병원이나 식당에서 만화 영화에 심취한 아이들을 찾는 것이 어렵지 않을 정도. 바야흐로 유아 콘텐츠 전성시대다. 한 편의 애니메이션은 길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탄생한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작업은 바로 더빙이다. 성우의 더빙을 거쳐야만 비로소 한 편의 애니메이션이 완성된다. 오직 목소리만으로 캐릭터와 영상을 완성해가는 이들, 바로 녹음 전문가다. ‘쥐를 잡자’ 목소리의 주인공 윤나효 동문(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12)은 유아 콘텐츠 녹음 전문가다. ‘성우’라는 표현이 우리에게 더욱 익숙하지만 윤 동문은 성우라는 호칭을 사양했다. “타 성우 선배님들에 비하면 저는 유아 콘텐츠에 특화돼 유아 목소리를 많이 녹음하고 있어요. 아직은 성우보다는 유아 콘텐츠 녹음 전문가가 더 어울리는 것 같네요.” 벌써 십 수년 째 윤 동문은 유아 콘텐츠 녹음 활동을 이어왔다. ▲지난 2월 10일 진행된 인터뷰에서 윤나효 동문(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12)은 본인을 "녹음 전문가"라고 표현했다. 윤 동문이 처음 녹음을 시작하게 된 건 초등학교 4학년 때다. 어릴 때부터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KBS 합창단 소속으로 활동했을 정도.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즐겨 방송국에서 주최하는 창작동요제에도 여러 번 참가했다. 대상은 언제나 윤 동문의 몫이었다. 이후 그의 활동을 눈여겨보던 방송국 관계자들로부터 녹음을 하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그렇게 녹음 작업이 시작됐다. 여러 유아 콘텐츠나 아동의 목소리를 녹음에 참여했다. 특히 주말 예능 프로그램의 게임 주제곡 ‘쥐를 잡자’는 큰 인기를 끌었다. 초등학생이었지만 전문적으로 녹음에 임했다. “본격적으로 녹음을 시작한 후로는 한 여름이 될 때까지 매일 목티를 입었다고 어머니가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녹음 제의는 꾸준히 들어왔다. 그중 윤 동문은 2003년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 공연을 가장 인상적인 작업으로 꼽았다. “지금 평창 올림픽처럼 당시에도 북한 응원단이 참가해서 관심이 뜨거웠던 무대였던 걸로 기억해요. 무대에서 함께 노래를 했던 경험이 강렬하게 남아 있네요.” 그렇게 윤 동문은 대학 입학 전에 무려 700편이 넘는 음악과 녹음 작업을 진행했다. 하고 싶은 것 많은 대학생 초, 중, 고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윤 동문은 녹음 활동을 병행했다. 힘든 적은 없었다. 그에게 녹음은 항상 재미있는 일이었다.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시작한 일이 지금까지 이어질 줄은 스스로도 생각지 못했다. 방송국과 녹음실을 다녔던 경험을 살려 윤 동문은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과에 입학했다. 대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녹음은 계속됐다. “제 목소리가 어딘가에 쓰인다는 것이 여전히 신기할 뿐이에요. 녹음이 좋고 즐거워서 작업을 이어가고 있네요." ▲윤나효 동문은 "내 목소리가 쓰이는 것이 여전히 신기하다"고 말하며 "즐거워서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윤 동문은 본인을 두고 “항상 하고 싶은 일이 많고, 목표를 세워 그것들을 이뤄가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녹음 작업 외에도 여러 활동들로 바쁜 대학 생활을 보냈다. 특히 1년간 한양대 미디어전략센터의 ‘채널H’ 1기 기자로 활동하며 한양대의 다양한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휴학을 하고 인턴십에 합격해 미국에 머물던 때에는 시각 장애인을 위한 오디오북을 제작하는 프로젝트를 직접 기획했다. 마음이 맞는 네 명의 친구들과 힘을 합쳤다. 당시 버지니아 한미장애인협회 이사장이었던 한양대 김종량 이사장에게 기획안을 보내 재정적인 지원을 받기도 했다. 유아 콘텐츠 전문가를 목표로 최근 윤 동문은 ‘청소년 교과서’ 및 ‘유아용 영상 컨텐츠’ 녹음을 주로 맡고 있다. 전자는 청소년 교과서와 함께 배포되는 음성 및 영상 CD를 녹음하는 작업이다. 후자는 뽀로로, 타요 등의 영상에 등장하는 여러 캐릭터들의 목소리를 더빙하는 작업이다. 동시에 디지털 마케팅 회사에도 다니고 있다. “제 궁극적인 꿈과 목표는 ‘콘텐츠 전문가’에요. 지금은 콘텐츠에 목소리를 더하는 일을 주로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제가 직접 콘텐츠를 기획하고, 목소리를 입히고, 유통하는 걸 목표로 하고 있어요. 마케팅 회사를 다니며 그런 부분을 많이 배우고 있고요.” 윤 동문은 앞으로도 꾸준히 녹음과 회사생활을 병행할 계획이다. 끝으로 윤 동문은 "제가 가진 재능과 목소리가 누군가에게 선물처럼 전해진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며 "항상 남에게 선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남에게 선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윤나효 동문이 가진 소박한 꿈이다. 글/ 김예랑 기자 ys2847@hanyang.ac.kr 사진/ 최민주 기자 lovelymin12@hanyang.ac.kr

2018-02 08

[동문][사랑, 36.5°C]어렵게 내디딘 모교기부의 첫걸음이 마음 속 무거운 짐을 덜어줍니다

권선홍 교수는 1972년 한양대학교 고시반 공채 1기로 입학해 1976년 외무고시 1호 합격자가 된 자랑스러운 동문이다. 그는 대학 4년과 석사 2년을 합한 6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다. 그 수혜를 언젠가는 후배들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부채감을 평생 안고 살면서도 첫걸음을 떼기가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고 한다. 정년퇴임을 앞둔 나이가 되어서야 시작한 그의 기부는 ‘파워엘리트 나무그늘 캠페인’ 1호 기부자가 되면서 무거웠던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었다. 행정고시반 장학금으로 300만 원을 선뜻 쾌척하며 그 동안 마음만 있었던 어려운 한 걸음을 뗀 것이다. 글 편집실 / 사진 홍승진 ▲ 권선홍(72 법학) 부산외국어대학교 외교학과 교수 한양대학교 외무고시 1호 합격자이십니다. 법학을 전공하셨는데 사법고시가 아니라 외무고시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나요? 고등학교 시절부터 한국을 둘러싼 문제를 총체적으로 다루는 한국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그 시절엔 한국학이라는 용어도 생소하던 시절이라 진로를 찾기가 어려웠어요. 고등학교 3학년 때 친구가 한양대학교에 장학금을 지원하는 고시반 장학생 선발시험이 있으니 함께 응시해보자고 권유했어요. 사실 그 당시엔 대학 갈 형편이 못돼, 고시가 뭔지도 모른 채 장학금에 생활비까지 준다는 말에 응시를 했죠. 다행히 합격해 남들처럼 사법고시 공부를 시작했지만 제 적성과는 맞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다 2학년 1학기 때 한대신문사에서 주최하는 학술상에 응모했다가 인문사회분야의 최우수상을 수상하게 되었죠. 그것을 계기로 한국학 공부로 전과하고 싶어 사학과 학과장님과 여러 차례 면담하며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여의치가 않았어요. 결국 고시반에 남기로 했지만 나중에 학문의 길로 나가려면 사법고시보다는 어학을 좀 더 공부할 수 있는 외무고시가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2학년 2학기부터 외무고시로 진로를 바꾸었어요. 파워엘리트 나무그늘 캠페인 1호 기부자이십니다. 기부를 결정하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고시반 동기들 중에는 이미 장학금 되돌려주기 운동에 동참하는 친구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런 친구들에 비하면 많이 늦은 편이지요. 그동안 생활하다 보니 여유가 없기도 했지만, 사실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어요. 천 단위, 억 단위의 기부자들도 많잖아요. 그들에 비하면 형편없이 작은 금액이라고 생각하니 선뜻 나서기가 어려웠어요.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어느새 정년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더 늦어지면 안 되겠다 싶어 방법을 찾던 차에 마침 ‘파워엘리트 나무그늘 캠페인’ 소식을 들었어요. 고시반 장학금의 수혜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모금 캠페인이라 더욱 뜻깊은 것 같습니다. 교수님도 장학금 수혜자이십니다. 장학금이 교수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요. 제가 전기도 없던 시골 출신인데다 경제적으로도 대학갈 형편이 못되었어요. 그런 와중에 한양대학교 고시반 공채 1기로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1972년 당시 장학금 외에도 생활비를 매달 15,000원씩 받았는데 공장 노동자들의 한 달 봉급과 맞먹는 수준이었어요. 고시반 학생들이 이런 파격적인 지원을 받으며 공부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합격생들이 많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 모교의 지원이 없었다면 오늘날 이 자리에 있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권동문은 '장학금 지원을 받으며 공부한 고시반 출신 선후배 동문들! 우리가 십시일반 모은 기부금이 어려운 후배들에게는 매우 큰 힘이 됩니다.' 라고 말했다. 요즘 학생들을 보면 격세지감을 많이 느끼실 것 같습니다. 조언을 해주신다면? 젊은이들은 누구나 자기의 세대가 제일 어려운 세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즘 젊은이들도 지독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클 것입니다. 제 막내아들도 현재 취업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 그 절박함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을 알면서도 요즘말로 ‘최선의 노력을 다 하라’는 말밖에 못해 늘 미안하지요. 자신이 좋아하거나 일생을 바칠 만한 목표를 정하고 20~30년 정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그 분야에서 세계 최고 고수가 되어주길 바랍니다. 또한 취업 준비 등으로 힘든 일이 많겠지만 너무 경쟁에 매몰되지 말고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모교 기부를 새롭게 시작하면서 생각이 바뀐 부분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저에게 모교에 대한 기부는 학창시절 혜택을 받은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도리였습니다. 엄청난 혜택을 받으며 공부를 했으니 최소한이라도 되갚아야 하는 거잖아요. 저로서는 부산 총동문회와 지난해 11월 창립 20주년인 한양산악회 모임에 열심히 참여했던 것도 그러한 생각에서였지요. 그럼에도 기부를 계속 미루다가 어렵게 첫발을 뗀 느낌입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았으니 어렵게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시작하고 보니 조금 마음이 가볍습니다. 이제 정년퇴임하면 경제적으로 더 여유롭지 못할 수도 있지만, 훨씬 더 가벼운 마음으로 나름대로 기부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부의 어려운 첫걸음을 떼셨다고 하셨는데, 여전히 어렵게 느끼시는 분들에게 한말씀 해주신다면? 정년퇴임을 앞두고 뒤늦게 시작했는데 어쩌다 보니 캠페인의 1호 기부자가 되었습니다. 소액기부임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동문들께서 참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인터뷰에 응하게 되었습니다. 장학금 지원을 받으며 공부한 고시반 출신 선후배 동문들의 마음은 비슷하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십시일반 모은 기부금이 어려운 후배들에게는 매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동행한대 2017년 WINTER (제8호) 이북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