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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 02

[동문]다큐멘터리 영화의 새 지평을 열다

역대 다큐멘터리 영화 사상 최단기간 100만 관객 돌파, 누적 관객 185만, 관람객 평점 ‘9.49(10점 만점)’, 제18회 전주국제영화제 전주 시네마 프로젝트 초청. 이는 지난 5월 말에 개봉한 영화 <노무현입니다>의 흥행 성적표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하 '노 전 대통령')의 정치 인생을 다룬 이 영화는 4번의 낙선, 지지율 2%의 만년 꼴찌 후보가 지난 2002년 새천년민주당의 ‘국민 참여경선’을 통해 결국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과정을 빼꼼하게 그려낸다. 당시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이 영화는 과연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제작됐을까. 영화 <노무현입니다>의 감독 이창재 동문(법학과 88)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파격적인 시도, 그리고 예상치 못한 흥행 올해 우리나라는 헌정(憲政) 상 유례없는 ‘첫 현직 대통령 탄핵’과 ‘장미 대선’을 동시에 치렀다. 그 결과, 약 9년 만에 여야가 바뀌었고, 민주당 계열의 문재인 후보가 제19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리고 지난 4월 29일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막을 연 영화 <노무현입니다>는 5월 25일 극장가에 정식 개봉 후 다큐멘터리 영화 사상 최단기간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는 제16대 대통령 선거로 노 전 대통령이 선출되고 약 15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노 전 대통령을 다룬 영화는 이전에도 존재했다. 지난 2013년 개봉해 1,000만 관객을 돌파한 <변호인>과 지난해 가을 개봉한 <무현-두 도시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다른 영화들과 달리 어떤 부분에 방점을 찍고 제작됐을까. "현재 사회는 대의정치를 표방하지만 실제론 Top-down 방식으로 당 수뇌부가 많은 결정을 하죠. 또 최근엔 여러 부정부패들로 인해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신뢰도 역시 하락했습니다." 이 동문은 우리가 ‘국민주권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경각심을 일깨우고자 영화를 제작했다. "지난 2002년 새천년민주당의 ‘국민참여경선’ 제도는 전무후무(前無後無) 한 제도로 당내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일반 국민이 50%의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하지만 불과 15년 전의 이야기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당시의 기억을 상당 부분 잊어버렸죠." 이 동문은 파란만장했던 노 전 대통령의 일생 중 ‘승리하는 인생’을 보여주고 잊힌 기억을 재조명하기 위해 지난 2002년 경선 과정을 치밀하게 그려냈다. ▲영화 <노무현입니다>는 "지역갈등을 해소하고, 동서통합과 화해를 이루자"는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소신과 정치관을 잘 담아냈다. (출처: 전주국제영화제) 영화는 지난 1992년 제14대 총선(부산 동구)을 시작으로 4번의 낙선 끝에 노 전 대통령이 대선 후보가 된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백미(白眉)라 꼽을 수 있는 부분은 중간중간 총 39명의 인터뷰이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안희정 충남지사, 대통령 보좌진과 비서관 등 쟁쟁한 정치인부터 영화배우 명계남 씨, 운전기사 노수현 씨, 작가 유시민 씨, 전 중앙정보부 공무원 이화춘 씨 등 각계각층의 인물들을 섭외했다. “섭외 과정이 어렵진 않았어요. 오히려 인터뷰이들이 노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한 감정 조절을 힘들어하셨죠” 원래 다큐멘터리 영화는 그 특성상 감독이 주인공의 내밀한 심정을 깊이 있게 파고들며, 그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이끌어내는 과정이 수반된다. 다만 이번 영화는 주인공 없이 주변 인물들을 통해 그 모습을 그려내야 했다. “각 인터뷰이들이 하나의 세포가 되어 모자이크처럼 노무현 대통령을 그려낸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보통 객관적인 인터뷰의 경우 인물을 15도나 30도 등 측면으로 담는데, 저는 정면으로 인물들을 담아냈습니다.” ▲영화 <노무현입니다>의 인터뷰이로 출연한 현 충남지사 안희정 씨. 영화 촬영을 위해 진행한 인터뷰 는 총 9000분 정도지만, 실제로는 40분 정도만 사용됐다. (출처: 전주국제영화제) 갈 지(之):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꿈과 가치 사실 지금까지 이 동문은 <사이에서>(2006), <길 위에서>(2012), <목숨>(2014) 등 인간의 삶과 죽음을 다룬 여러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해 왔다. “주변에선 이런 말을 하죠. 상업적으로 보면 돈도 안 되는 영화를 왜 계속 만드냐고. 하지만, 저는 영화가 끝났을 때 큰 찬사를 받지 않더라도 제가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한 점에 만족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계속 전하고 싶은 다른 이야기들을 만드는 거고요.” 물리적인 성공은 파이가 정해져 있기에 한계가 있고, 결국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외적 가치가 아닌 내적 가치라는 것. “꿈은 우리에게 목표를 향해 달리게 하는 동력, 즉 동기를 부여합니다. 반면에 가치는 달려가는 과정에서 회의감에 빠지지 않고, 왜 달려가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해소합니다. 그렇기에 이 둘은 항상 함께해야 하죠.” 이는 서른다섯이라는 늦은 나이에 영화를 배우러 미국 유학을 간 이 동문의 삶을 관통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창재 동문(법학과 88)을 지난 9월 29일 중앙대에 위치한 교수실에서 만났다. 법학을 전공했지만 법과 관련된 실무적인 일을 하기는 싫었고, 평소 글쓰기와 독서를 좋아해 문학 쪽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러다가 교내 ‘언론고시반’의 초기 멤버로 활약했고, 졸업 후 신문사와 광고기획사, 다큐멘터리 방송 채널 등에서 근무했다. 하지만, 어느 날 인생에 회의감이 찾아왔다. 나이 든 다른 선배들의 모습을 보며, 본인도 언젠가 저들처럼 틀에 박힌 삶을 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실패도 인생의 일부기 때문에, 꿈을 타협하지 말고 내가 책임지면서 내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주변의 만류와 걱정을 뿌리치고, 결국 이 동문은 지난 2001년 미국행 비행기를 탔고 귀국 후에는 형 집에 붙어살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 온갖 정력을 다한 뒤에 더 한층 노력을 기울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제 모든 걸 소진했다고 느낀 시점에 대학 교직 자리가 났죠.” 그 후 이 동문은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영상학과 교수로 부임해 현재까지 재직 중이다. ▲영화 <노무현입니다>의 메인 예고편. (출처: Youtube) 주체성 있는 삶을 살기 바랍니다. “제가 유학을 떠나기 전엔 IMF로 많은 분들이 실직, 해고를 당했고 그런 외부적인 상황은 항상 썰물∙밀물처럼 오고 갔습니다. 또 현재 많은 젊은 청년들은 자신이 무엇을 잘 하는지 모르는 채 단지 불안하다는 이유로 남들보다 앞서가려 무엇이든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말처럼, 이 동문은 성공과 실패를 떠나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지에 대한 고민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즉 자신이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을 하며 갈 지(之)자를 그리더라도 자신의 가치에 따라 행동하라는 것이다. “주어진 환경이 고되고 힘들지라도, 많은 청년들이 자신의 꿈을 찾아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살길 바랍니다. 운이 따르려면 운에게도 기회를 줘야 합니다.” ▲영화 <노무현입니다>의 메인 포스터와 티저 포스터 (출처: 전주국제영화제) 글/ 오상훈 기자 ilgok3@hanyang.ac.kr 사진/ 김윤수 기자 rladbstn625@hanyang.ac.kr

2017-09 27

[동문]“국악하는 제자들이 절 통해 많이 얻어갔으면 해요”

뭔가를 배우려는 사람에게 필요한 환경이라면, 그건 곧 배움이 있는 곳일 테다. 특히 예술을 하는 이에겐 더욱 그렇다. 어렸을 때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기 위해 예술학교에 진학한다. 그 중 국악을 하려는 이들이라면 절대 모를 리 없는 학교가 있다.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는 국립국악중·고등학교와 더불어 전국에 두 곳뿐인 '국립 국악학교'다. 지난 9월, 판소리 학사 1호로 알려진 왕기철 동문(국악과 81)이 국립전통예술중·고교 신임 교장으로 취임했다. 최초의 소리꾼 교장 되시겠다. 설립자의 제자가 모교의 교장으로 왕기철 동문은 판소리 명창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이수자이며, 제27회 전주대사습 판소리 명창부 장원(대통령상)을 수상하며 판소리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 1999년부터 13년 동안 국립창극단에서 명창으로서 주연을 도맡아 무대를 펼치곤 했다. 국립창극단은 국악 중 창극을 하는 이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다. ▲왕기철 동문(국악과 81)과 지난 25일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 교장실에서 만났다. 왕 동문과 국립전통예술중·고 사이의 인연은 상당히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왕 동문은 열여섯 살에 형의 추천으로 가야금 병창의 명인 향사 박귀희 씨의 제자가 됐다. 그 뒤 박 씨가 설립한 서울국악예고(현 국립전통예술고)를 졸업했다. 한양대 국악과를 졸업하고는 다시 서울국악예고로 돌아와 1998년까지 십여 년 동안 판소리 전임으로 교편을 잡았다. 이듬해 1999년부터 국립창극단에서 활동하다 몇 년 전부터 또다시 모교로 돌아왔다. 줄곧 학생들을 가르치다 이번 학기부터 교장으로 임명됐다. 햇수로만 따지면 국립창극단에 있던 기간보다 오래 모교에 있었던 셈. 최근 돌아오게 된 계기는 후배들에게 자신이 무대에 서며 느낀 점들을 알리겠다는 바람에서다. “국립창극단에 있는 게 예술에 전념하긴 좋아요. 매번 공연만 연습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교육을 통해 후배들, 혹은 전통예술을 이끌어 갈 학생들과 함께 예술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싶어 어렵사리 다시 교편을 잡았습니다.” 그렇게 모교로 돌아온 때는 지난 2013년. 소위 판소리에는 잔뼈가 굵었지만, 국립학교기에 남들과 똑같이 필기, 실기 시험을 통해 평교사로 들어왔다. “그래서 오히려 교사로서 자부심은 있어요. '나도 다 시험 통과해서 들어왔다' 그런 거죠.” 교장이지만 학생들과 계속 교류하고파 교장선생님의 위치는 일반적으로 학생들에겐 멀기만 하다. 학교에서 가끔 마주치는 높은 분일 뿐이다. 하지만 왕 동문은 그간 해왔듯 학생들과 면대면 교류를 이어가고자 한다. “학교 선배로서, 선생으로서, 국립창극단에서 뛰었던 사람으로서 본보기가 되고 싶어요. 연습이나 삶에서 힘든 점이 있는 학생들은 여전히 절 찾아오곤 하죠. 그럴 때면 반갑게 맞이하고 제 경험을 통해 알려주는거죠. 그 아이들이 원하는 길을 걸어온 자로서 건네는 구체적인 도움이죠. 앞으로도 그런 교장으로 지내고 싶습니다.” 실제로 왕 동문이 걸어온 길은 국립전통예술고에 들어온 학생들에게는 무척 가고싶은 길이다. 고교 졸업 후 국악과에 들어갔고, 이후 국립예술단체에 들어가 메인을 도맡았다. 그런 길을 걸어왔기에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은 것이 여전히 많다. “또한 학생들의 삶에 대한 고민도 들어주곤 해요. 공연자의 마음이 좋지 않으면 좋은 소리가 날 수 없죠. 그래서 항상 밝게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합니다. 또 요즘은 인터넷으로 영상도 찾아볼 수 있으니까, 제가 나서는 무대를 보면서 많은 도움이 되기를 바라죠.” 또다시 1호란 타이틀 왕 동문의 이번 교장 임명은 판소리계에서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다. 그간 없었던, 소리꾼이 교장이 된 첫 경우이기 때문. “지금도 여기저기서 축하인사가 와요. 그 축하 받은거 만큼, 교장으로서 주어진 일도 잘 해야겠죠. 소리꾼으로서 활동도 계속 하고요.” 이미 소리꾼 학사 1호라는 타이틀을 한 번 얻어서인지, 왕 동문의 담담한 목소리에는 처음이라는 타이틀에 맞는 책임감이 가득했다. ▲왕기철 동문은 "교장으로서 그리고 선배 소리꾼으로서 학생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글/ 이상호 기자 ta4tsg@hanyang.ac.kr 사진/ 최민주 기자 lovelymin12@hanyang.ac.kr

2017-09 18 중요기사

[동문][세계 속의 한양인] 지구 반대편에서는 빙수가 열풍!

잉카문명의 발원지이자,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따뜻한 기후를 자랑하는 나라 페루. 한국에서 무려 21시간을 비행해야만 도착하는 이곳에선 새로운 디저트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이슈의 주인공은 한국에서 사계절 내내 즐길 수 있는 눈꽃 빙수. 표지도 동문(경영학부 09)은 아이스크림의 수요가 높은 페루에 빙수라는 음식을 알리기 위해 친구와 함께 페루 최초의 빙수 가게 ‘미스터 빙수’를 차렸다. 여름엔 줄 서서 먹는다고 소문난 이 가게, 어떻게 페루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어서 와, 빙수는 처음이지? 올해 4월 초, 페루의 수도 리마에 개업한 ‘미스터 빙수’는 현재 다섯 개의 메뉴인 ‘딸기 빙수(Fresa Bingsu), ‘망고 빙수(Mango Bingsu)’, ‘초코 빙수(Choco Bingsu)’, ‘치즈 빙수(Cheese Bingsu), 그리고 ‘멜론 빙수(Melon Bingsu)’를 페루 사람들에게 선보인다. 빙수 외에도 한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허니브레드’와 ‘초코브레드’, 그리고 컵라면과 한국 과자들도 판매한다. ▲’미스터 빙수’의 다섯 가지 빙수. 과일 빙수는 제철과일에 따라 대체되기도 한다. (출처: 표지도 동문) 빙수 재료는 모두 페루에서 구하지만, 한국의 생과일 빙수와 다를 것 없다는 점이 특징. “오히려 한국적인 메뉴를 페루 사람들이 많이 찾는 것 같아요. 다만, 한국에서 맛볼 수 있는 팥빙수나 인절미 빙수는 아직 팔지 않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팥이나 떡을 현지인들이 좋아하진 않거든요.” 한국의 빙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던 표 동문은 그 경험을 살려 빙수를 직접 만든다. 듬뿍 담겨 있는 제철 과일과 혀에 닿자마자 사르르 녹는 미세한 우유 얼음 조각들은 페루인의 입맛에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그들은 처음 맛보는 디저트에 엄지를 치켜세우며 ‘맛있다’라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고. “건강한 느낌을 주는 생과일과 우유가 들어간 메뉴다 보니, 기존에 현지인들이 즐겨 먹던 아이스크림보다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현재 ‘미스터 빙수’ 페이스북 공식 페이지의 좋아요 수는 무려 1만 4천여 개에 달한다. 개업한지 5달 남짓이지만, 현지 방송에도 출연할 만큼 ‘빙수 열풍’은 대단하다. ▲한국으로부터 상륙한 눈꽃 빙수를 맛보기 위해 ‘미스터 빙수’앞에 줄서 있는 현지인들. (출처: 표지도 동문) 지난 2014년에 교환학생으로 페루 땅에 첫발을 디딘 표 동문. 흥미롭게도 중학생 때부터 장래희망이 ‘사장님’이었던 그는 현지에서 생활하며 각종 사업 아이템을 물색했다. 그렇게 1년 후 표 동문은 이곳에 빙수를 들여오기로 했다. “페루 사람들은 아이스크림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인기에 비해 종류가 많지 않더라고요. 눈꽃 빙수라면 통할 거라고 확신했죠.” 빙수가 이미 보편화된 한국과는 달리, ‘블루오션’이라고 생각했던 남미행은 성공적이었다. 창업의 밑거름이 된 대학생활 “교환학생 생활을 하며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졌어요. 다른 나라 사람들의 문화와 사고방식이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고, 제가 생각할 수 있는 폭이 편협했다는 것을 깨달았죠.” 페루에서의 경험은 표 동문 인생의 전환점이자 창업의 원동력이었다. 페루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도 잊을 수 없다. “저를 한국에서 입양한 아들이라며 따뜻하게 맞아 주신 페루 홈스테이 가족들은 낯선 땅에 도착한 저에게 포근한 둥지를 제공해줬어요. 이들의 존재가 창업을 준비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표 동문은 언어에도 두려움 없이 부딪혔다. “일부러 현지인들을 계속 만나서 현지언어를 쓰려고 노력했어요. 모르는 단어나 문장은 그때그때 적어서 외웠고, 1년간 한국어를 쓰지 않고 스페인어만 하니 저 스스로가 뿌듯할 정도로 실력이 많이 늘었죠.” 덕분에 표 동문은 창업 과정 중 언어의 어려움은 없었다고 말했다. 손님들과의 일상생활 소통도 가능하기에 그들이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었다. ▲현지인 손님들과 포즈를 취하는 표지도 동문(오른쪽)과 동료 김주엽씨. 표 동문은 손님들이 한 번 빙수를 맛보고 꾸준히 다시 찾아올 때 가장 보람을 많이 느낀다고 말했다. (출처: 표지도 동문) 표 동문은 교환학생 외에도 ‘또래 튜터링’, 멕시코 어학 프로그램, 응원단, 그리고 가지각색의 아르바이트로 바쁘게 지냈던 대학 생활을 진심으로 그리워했다. “지금도 대학생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많이 들 정도로 학교생활이 너무 즐거웠어요. 특히 과 자체가 창업과 밀접하기도 했고, 창업을 지지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큰 동기부여가 됐습니다. 창업에 관련된 수업인 ‘경영자료분석’에서 창업을 가정하여 사업계획서를 써보고, 분석하고, 발표했던 것이 실제로 가게를 낼 때 많은 도움이 됐죠.” 남미 전역이 ‘눈꽃’으로 물들 때까지 “남미 전역에 확장할 계획이 없었다면 시작도 안 했어요.” 표 동문은 미스터 빙수의 분점을 페루의 타지역들과 남미의 다른 나라에 내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확장을 위해서는 넉넉한 자본이 필요한 것이 현실. 그는 "매출이 상대적으로 저조한 현재, 페루의 겨울을 극복하고 다가오는 여름을 준비하는 일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또한, 다가오는 여름에는 과일 빙수의 종류를 늘리고 커피 빙수도 추가하면서 빙수의 종류를 다양화할 계획이라고. “고객들이 빙수만 먹으러 오는 게 아니라, 한국의 디저트 문화를 경험하는 동시에 한국의 매력에 푹 빠질 수 있도록 노력할 거예요.” 페루에서 얻은 귀중한 교훈들과 좋은 인연들을 새기며 언제나 정성 들인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표 동문. ‘세계 속의 한양인’으로서 한국의 위상을 남미에서 높이겠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페루 여행을 계획하고 있거나 여행 중인 한양인이라면, 먼 타지에서 맛볼 수 있는 빙수를 만나러 ‘미스터 빙수’를 방문해 보는 것은 어떨까. ▲’미스터 빙수’가게 안에서 빙수를 들고 활짝 웃고 있는 표지도 동문(왼쪽)과 동료 김주엽씨. 옆 쇼윈도에는 한국 과자인 ‘빼빼로’도 판매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출처: 표지도 동문) 글/ 유혜정 기자 haejy95@hanyang.ac.kr

2017-09 13

[동문][동고동락] 세 국적, 다섯학생의 글로벌 창업 체험

지난 6월 21일 한양종합기술연구원(HIT)에서 ‘2017 글로벌 창업 아이디어 해커톤대회’가 열렸다. 이날 처음 만나 ‘한중미’ 팀을 이룬 한국, 중국, 미국 국적의 다섯 학생들은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모아 우수상이라는 쾌거를 거뒀다. 한중미 팀을 이끈 이강우(철학과 13) 학생과 중국 국적의 고영군(대학원 대중문화 시나리오학과 석사과정 16) 학생을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글. 이주비(학생기자) / 사진. 안홍범 ▲ 2017 글로벌 창업 아이디어 해커톤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은 ‘한중미’ 팀 ▲ ‘한중미’ 팀에 유일한 한국인 학생으로 참여한 이강우 학생 현장에서 처음 만난 한국, 미국, 중국 학생들 글로벌 해커톤대회의 주제는 국가별 특성에 맞는 사업 아이템을 찾는 것이었다. 대회 참가자들이 나름의 창업 아이템을 미리 준비해 오고, 이를 토대로 팀원을 모아 기획한 뒤 발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날 따로 참여했던 이강우 학생과 고영군 학생 역시 나름의 창업 아이템을 준비해왔지만 팀원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랜덤으로 구성된 팀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서로의 아이디어가 실현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 그 자리에서 새로운 아이템을 구상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 국적의 도레이(대학원 유아교육학과 석사과정 17) 학생이 중국 유아교육과 관련된 문제를 제기했다. 중국인 팀원들을 비롯해 모두가 이에 대해 크게 공감했고, 그렇게 한중미 팀의 주제는 ‘중국 유아시장 교육 콘텐츠’로 정해졌다. 팀원 다섯 명 중 한 명은 한국인, 또 다른 한 명은 미국에서 온 교환학생, 나머지 세 명이 중국인이었던 만큼 중국의 특성을 잘 살릴 수 있을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고영군 학생은 “중국에서는 아이에 대한 관심이 무척 큰 편”이라며 “중국의 유아시장이 아직은 많이 발달하지 못한 상태라 타깃으로 잡으면 좋을 것 같았다”며 주제 선정 이유를 밝혔다. 이강우 학생은 “중국은 두 자녀 정책 도입 이후 어린 아이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동시에 맞벌이 부부 수도 증가하고 있는 추세”라고 덧붙였다. “맞벌이 부부의 아이들은 대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손에 맡겨져 길러지는데, 그러다 보니 중요한 시기에 감수성이나 사회성 등과 같은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교육을 위한 솔루션을 제시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죠.” ▲ 이강우 학생(왼쪽)과 고영군 학생이 환하게 웃으며 승리의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인생의 튼튼한 토대가 될 다양한 창업 경험 ▲ 해커톤대회를 통해 창업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말하는 고영군 학생 한국, 중국, 미국 세 국가의 학생들이 만난 만큼 의사소통이 쉽지만은 않았다. 이강우 학생은 “한국말을 못하는 중국인 유학생도 있었고, 영어를 못하는 친구도 있었어요. 반면에 미국 친구는 중국어를 하지 못해서 소통을 할 때 몇 번의 통역을 거쳐야 했죠”라고 대회 당시의 고충을 밝혔다.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로 바뀌었다. 다른 팀에 비해 높은 외국인 학생 비율이 한중미 팀의 장점이자 차별점으로 작용한 것이다. 미리 준비해 온 아이디어로 발표를 준비한 다른 팀들과는 달리 한중미 팀은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난 팀원들의 특성을 살려 주제를 정하고, 발표를 준비했다는 점에서 대회의 취지에 더 부합했던 것이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중국 유아시장 콘텐츠는 그 가능성을 인정받아 결국 우수상을 받았다. 고영군 학생은 “이번 대회 참여를 통해 창업 아이템 기획 단계에서의 노하우를 많이 배울 수 있었다”며 “머릿속에 있는 막연한 아이디어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길 수 있는지를 알게 됐다”고 대회 참여 소감을 전했다. 이강우 학생은 다양한 창업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번 대회 지원자 중에는 실제로 창업을 해본 분들도 있었어요. 심사위원들 중에 전문가와 투자자도 있었고요. 그래서인지 수업으로는 접할 수 없었던 소중한 경험을 한 것 같습니다. 백세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자의든 타의든 창업은 이제 필수가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지금 당장 창업을 하지 않더라도 꾸준히 관심을 가지려고 합니다.” 비록 하루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창업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고 한목소리로 말하는 한중미 팀원들. 창업에 대한 그들의 남다른 관심이 언젠가 알찬 결실로 이어지길 바란다. 사랑한대 2017년 9-10월호 이북 보기

2017-09 12

[동문][꿈꾸는 청춘] 반가운 실패! 청춘이라면 두려워 말라

열정과 패기로 똘똘 뭉친 권현진 씨. 청춘의 다른 이름이 열정과 패기라면 권현진 씨는 지금 청춘의 한가운데를 온전히 통과하고 있는 중이다. 일찍이 다양한 사회 경험을 쌓으며 꿈을 키워나간 권현진 씨의 취업 성공 비결은 실패를 통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단점을 개선한 것이다. 글. 박영임 / 사진. 안홍범 ▲ 권현진(스포츠산업학과 08) 동문 꿈에 그리던 금융사 취업에 성공 졸업 2년 만에 처음으로 모교를 찾은 권현진 씨. 몰라보게 달라진 교정의 모습에 그동안 소원했던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지방에서 근무하다 보니 모교를 자주 찾지 못했습니다. 바뀐 게 너무 많네요.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는 후배들이 부럽습니다. 앞으로는 자주 찾아오겠습니다.” 2015년 8월에 졸업한 권현진 씨는 졸업을 한 달 앞둔 그해 7월, 국민은행의 최종 면접에 합격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드디어 은행원의 꿈을 이루게 된 것이다. 증권사, 생명보험사 등 여러 금융사에 도전했던 권현진 씨는 세 번의 고배를 마신 끝에 결국 네 번째 도전에서 축배를 들 수 있었다. “금융사 중에서도 가장 가고 싶은 은행에 취업하게 돼 더욱 기뻤습니다. 다른 직업은 생각해본 적도 없거든요.” 취업 후 고향인 포항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하게 된 권현진 씨. 이제 만 2년이 된 새내기 은행원의 일상은 어떤 모습일까. “가계여신 업무를 담당한 지 6개월이 됐습니다. 증권사의 대학생 서포터즈로 활동하던 시절, 무작정 현직 종사자들을 찾아가 궁금한 점을 묻곤 했습니다. 나름 금융 지식을 탄탄히 쌓았다고 자신했는데 제 착각이더군요. 현장에서 새로운 고객을 만날 때마다 또 다른 사례를 접하게 됩니다. 공부할 게 너무 많아서 지금도 계속 배우고 있는 중이에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최강 열정 오래전부터 은행원을 꿈꿀 정도로 평소 금융에 관심이 많았던 권현진 씨. 의외로 그의 전공은 스포츠산업학과다. 물론 전공과 무관한 직종에 종사하는 경우는 흔하다. 하지만 스포츠 관련 공기업이나 협회, 프로구단 등에서 일하는 다른 동기들과 비교하면 은행에서 일하는 권현진 씨의 행보가 이색적인 건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은행원을 꿈꾸게 된 걸까. 권현진 씨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축구 선수로 활동했다. 대학 진학에는 뜻이 없었지만 한양대학교에 스포츠산업학과가 신설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학과 창립 이듬해에 지원했다. 좋아하는 운동은 취미 생활로 즐기는 것이 현명하다는 생각에 경영학을 다중 전공했다. “어렸을 때부터 돈이나 재테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은행원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단순히 자산가가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해당 분야의 전문 지식을 갖춘 금융 전문가로 성장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는 대학교 2학년 때까지 배달, 공사장 일용직, 판매원, 장사를 비롯해 헬스 트레이너, 경호원, 유아 체육 강사, 보험설계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 경험을 쌓았다. 세상을 경험하고 싶은 마음에 재미있어 보이는 일은 가리지 않고 도전했다. 그러다 보니 학창 시절에도 늘 두 개 이상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취업 활동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건 군대에서 전역한 3학년 때부터다. 당시 그 흔한 토익 점수 하나 없어 이력서 한 줄을 채우기 어려웠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며 교내 커리어개발센터의 모의 면접과 취업 박람회 등 각종 프로그램에 무조건 참여했다. 여기에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운영하는 학술 동아리, 증권사의 대학생 서포터즈, 한국경제신문의 대학생 경제포럼, 평창 스페셜올림픽 스태프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전문 지식을 쌓아갔다. 무슨 활동을 하던 팀장을 자처하며 리더십을 키웠다. 남들보다 열심히 활동해야겠다는 생각에 적극적으로 직책을 도맡았던 것이다. 이런 열정으로 하루 수면 시간이 2~3시간밖에 되지 않았지만 스스로의 선택에 최선을 다했다. 그때의 치열했던 시간들 없이 오늘날의 그의 모습을 상상하기는 힘들다. ▲ 권 동문은 "실패를 통해 배워야 해요. 제가 원래 긍정적인 성격이기도 하지만, 실패하면 낙담하기보다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러다 보면 슬럼프에 빠질 새가 없죠." 라고 말한다. 프레젠테이션의 고수가 되기까지 권현진 씨가 졸업 전에 원하는 곳에 취업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운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단점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덕분이다. 특히 프레젠테이션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발성과 발음 연습을 하고,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데 익숙해지도록 발표 기회를 적극적으로 찾아 다녔다. 덕분에 지금은 대중 앞에서도 떨지 않고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전할 자신이 있다. 하지만 대학 신입생 때만 해도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사람들 앞에 서면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 발표 수업을 하기 위해 마이크를 잡았을 때 너무 떨려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제가 얼마나 발표를 못하는지 처음 알았습니다.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면 평생 힘들겠구나 싶더군요. 그래서 일부러 발표의 기회를 늘렸습니다.” 발표 수업을 피하기보다 오히려 찾아서 수강하고 발표자를 자원했다. 경험을 늘리지 않으면 극복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렇게 발표 경험이 쌓이니 서서히 무대 울렁증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한국경제신문 대학생 경제포럼에 참여했을 때는 500여 명 앞에서도 성공적으로 프레젠테이션을 마칠 수 있었다. “특히 경영학 수업이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프로젝트 수업이나 발표 수업이 많거든요. 간혹 팀플레이 수업을 할 때 수동적인 학생들이 있는데 적극적으로 수업에 임해야 성장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은행원은 나의 천직이자 운명 얼마 전 개봉한 영화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에는 한 신문사의 사망 기사 전문 기자가 죽음을 앞두고 있는 광고인에게 성공 비법을 묻는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은 주저 없이 말한다. “성공 비법? 그런 건 없어. 성공하려면 크게 한번 넘어져봐야 해.” 그러면서 “네가 실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실수가 너를 만든다”고 조언한다. 이제 막 직장 생활을 시작한 권현진 씨에게 성공이라는 수식은 아직 이르다. 하지만 그 또한 다년간의 사회 경험 덕분인지 영화 속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실패 없이는 성장도 없다’고 말한다. “실패를 통해 배워야 해요. 제가 원래 긍정적인 성격이기도 하지만, 실패하면 낙담하기보다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러다 보면 슬럼프에 빠질 새가 없죠.” 한창 취업 준비를 하던 시절, 최종 면접에서 여러 차례 낙방했지만 절망하기보다 자신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냉철하게 분석한 권현진 씨. 혹시라도 자신의 활동적인 성향과 금융권에서 바라는 인재상이 맞지 않는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다. 하지만 꿈을 포기할 수 없기에 은행원이 되려는 이유와 함께 자신의 꿈과 열정을 진정성 있게 전달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 “은행에는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정을 들려줍니다. 그러면 저는 최선을 다해 도움을 드리고, 저 또한 도움을 받고 정보를 청하기도 합니다. 은행원은 어느 직업보다 세상을 폭넓게 배울 수 있고, 끝없이 공부하며 성장할 수 있는 직업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은행원은 저의 천직입니다.” 누구보다 투철한 직업관을 가지고 있는 권현진 씨. 그는 금융 전문가의 꿈을 향해 자기 계발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랑한대 2017년 9-10월호 이북 보기

2017-09 11

[동문][人사이드 人터뷰] 민화에 이야기를 담는 스토리텔러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 미인도, 초충도 등을 그리며 전통화 디렉터로 활약한 민화 작가 오순경 동문.드라마 종영 후 신사임당의 진품과 드라마 속에 사용된 작품을 나란히 감상할 수 있는 ‘사임당, 그녀의 이야기’전을 열었다. 서울 부암동 서울미술관을 찾아 민화와 그녀의 이야기를 청해 들었다. 글. 박영임 / 사진. 안홍범 민화, 복을 비는 그림 “연꽃은 군자의 그림으로 입신출세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자녀가 과거시험 공부를 하는 동안 화원을 불러 옆방에서 연화도를 그리게 했죠. 그리고 과거를 보러 떠나기 전날 좋은 기운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연화도를 펼쳤습니다.” 오순경 작가의 설명을 들으니 단순히 연꽃을 그린 그림이라고만 생각했던 연화도에서 아들의 장원급제를 바라는 부모의 간절한 바람이 전해진다. 고이 간직했던 그림을 펼치는 마음 자체가 정결한 의식이 아니었을까. 오늘날로 치면 수능 시험을 보는 자녀를 위해 백일기도를 드리거나 백팔배를 올리는 부모의 심경과 같았으리라. 오순경 작가는 그림 속의 꽃, 새, 물고기 하나도 뜻 없이 등장하는 것이 없다며 설명을 이었다. “연과(연밥)는 연이어 과거에 급제함, 잉어 두 마리는 소과와 대과, 여뀌(보리처럼 생긴 알맹이가 붉은 식물)는 고난을 극복하고 공부를 마침, 갈대는 임금이 내리는 밥상, 한 마리의 해오라기는 일로(一路), 즉 한길을 걷는 군자를 뜻합니다. 연화도는 결국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공부를 마친 뒤 연이어 과거에 급제해 임금님이 주는 밥상을 받고 군자의 길을 걸으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민화에는 그림마다 복을 비는 마음이 담겨 있다. 예를 들어 파초도는 기사회생, 모란도는 부귀영화, 나비는 평안장수를 의미한다. 그래서 민화는 길상도(부귀와 행복 등 염원을 사물에 의탁해 나타낸 그림)라 불린다. 그저 다채로운 색감에 해학적인 그림이라 생각했던 민화. 하지만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 흥미로운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드라마 전통화 디렉터라는 새로운 분야 개척 오순경 작가에게는 전통화 디렉터라는 또 다른 직함이 있다. 미인도, 초충도, 궁모란도 등 전시회 속 작품들이 사용된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 전통화 디렉터로 활동하며 미술 자문은 물론 드라마 속 그림을 그렸다. 특히 드라마에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매개체로 등장하는 미인도는 신사임당 역을 맡은 배우 이영애씨의 아름다움을 단아하게 표현해 오랫동안 눈길이 머문다. “지난 2014년 민화 작가가 주인공이었던 <마마>라는 드라마에서 미술 자문을 하며 전통화 디렉터라는 말을 직접 만들었습니다. 미술감독과는 다른 일이기에 전문적인 직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드라마에서 한 점의 작품이 완성되는 과정을 화면에 담으려면 초본, 중간본, 80% 완성본, 100% 완성본처럼 같은 그림을 네 가지 버전으로 준비해야 한다.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는 총 200점이 넘는 그림을 그려야 했다. 게다가 기획 단계부터 충분한 협의를 거쳐 어떤 그림을 사용할 것인지 정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전날 대본이 수정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어쩔 수 없이 다음 날 촬영에 지장이 없도록 뜬눈으로 밤을 새며 작품을 완성해야 하는 날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는 우리 그림의 아름다움을 소개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이기에 작업을 마다하지 않는다. 특히 이번 드라마는 중국, 일본, 대만, 홍콩 등에 수출되는 작품이라 해외 시청자들에게도 우리의 전통미를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 “시대적으로 조선 전·중기 화풍만 담아야 하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작가를 설득해 현대 장면에서 주인공들이 미술관에서 조선 후기 작품을 감상하는 장면을 삽입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드라마 속에서는 상당 부분 편집되고 말았죠.” 드라마뿐 아니라 민화 에세이 <민화, 색을 품다>를 출간하는 등 누구보다 민화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는 오순경 작가. 드라마 덕분에 신사임당의 작품과 나란히 전시하는 기회를 얻게 됐지만, 신사임당의 작품과 비교되는 것이 부담되기도 했던 게 사실이다. “‘고화’와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민화’는 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갖고 있어요. 한자리에서 고화와 민화를 같이 감상하며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취향을 깨우쳐주는 것도 작가의 일이니까요.” 인생이라는 무대, 뜨거운 열정으로 돌진 연극영화학과에서 무대미술을 전공한 오순경 작가는 민화 작가로 활동하기 전부터 영화와 드라마에서 미술 자문을 맡아 일했다. 드라마 <마마>와 <사임당, 빛의 일기> 이전에는 드라마 <연애시대>와 영화 <싸움>, <오싹한 연애>, <파파> 등의 미술 자문을 했다. 이런 이력이 있었기에 보다 수월하게 전통화 디렉터로 일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무대미술과 민화 작가라는 독특한 조합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고등학생 시절 미대 진학을 준비하던 오순경 작가는 응용미술 분야를 탐색하던 중 무대미술이라는 분야를 처음 알게 됐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기에 연극영화학과가 있는 대학에 무작정 전화를 걸어 무대미술을 배울 수 있느냐고 물었다. 때마침 무대미술을 전공한 신일수 교수가 한양대학교에 부임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앞뒤 잴 것 없이 지원했다 . 민화를 시작할 때도 그랬다. 병원에서 대기하다가 우연히 펼친 잡지에서 접하게 된 민화. 평소 현대화보다 고화를 좋아했던 오순경 작가는 단번에 민화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그 길로 민화 강좌에 등록했다. “어느 날 정조 능행도를 보고 저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진을 찍을 수 없기 때문에 정조 능행도가 전시된 미술관을 전시 기간 내내 출근하듯 찾아가 그렸습니다. 완성하는 데 총 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죠.” 가로 10m, 세로 2m에 이르는 대작인 데다 손톱만한 크기의 인물이 7,000명 넘게 등장하는 정조 능행도는 함부로 도전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 하지만 오순경 작가는 기어코 작품을 완성했다. 그런 집념을 높이 산 민화계의 원로 송규태 선생이 그녀를 기꺼이 문하생으로 받아줬다.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정조 능행도를 완성하고 나니 실력은 장족의 발전을 이뤘다.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집념과 근성이 민화 만학도를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 것이다. “무엇을 하든 제대로 잘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하는 편입니다. 무언가에 꽂히면 거침없이 돌진하고, 하나에만 몰입하는 성격이에요.” 이야기를 전하는 민화 작가 그렇다면 대학 시절은 어땠을까. 무대미술은 물론 연기까지 도맡았던 오순경 작가는 4년 내내 최다 출연자로 명성을 날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창 시절을 보다 열심히 보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라고. “지금 대학 생활을 열심히 보내고 있다면 자신을 의심하거나 불안해하지 마세요.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더라도 분명 미래에 도움이 될 겁니다.” 열정의 소유자 오순경 작가가 후배들에게 전하는 조언이다. 그녀 역시 의심하거나 불안해하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향해 씩씩하게 걸어가고 있다. “앞으로도 전시회, 드라마, 영화 등을 통해 우리 그림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겠습니다. 그리고 민화가 전통만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이야기를 전하는 창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도 보여주고 싶어요.”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오순경 작가. 다음 전시회에서는 그녀의 그림에서 또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사랑한대 2017년 9-10월호 이북 보기

2017-09 04 중요기사

[동문]재즈와 대중을 잇는 가교 되고파

재즈 음악은 즉흥성과 유연함이 매력이다. 보컬은 악보에 적힌 박자와 음정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그루브와 감성으로 자유롭게 음악을 채워 나간다. 그래서 재즈에는 노래하는 이의 개성과 실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누군가에겐 부담일 수 있는 재즈의 특성. 그러나 조정희 동문(국어국문학 97)은 그것을 재즈의 매력으로 손꼽는다. 따듯한 노랫말과 몽환적인 보이스로 풍성한 선율을 만들어내는 재즈 보컬리스트 조정희 동문을 만났다. 늦깎이 음악인, 재즈를 만나다 조정희 동문은 재즈 보컬리스트다. 지난 2011년 재즈 프로젝트 밴드 ‘박근쌀롱’의 앨범 제작에 참여하며 국내 재즈씬(Scene)에 처음 이름을 알렸다. 이후 그녀는 ‘3월의 토끼’라는 밴드를 결성해 재즈 보컬로 본격 데뷔했다. 그 밖에도 다수의 개인 앨범을 발표했으며 ‘엔젤아이즈’, ‘굿와이프’ 등 드라마 OST 작업에 참여하며 재즈 보컬리스트로서 그녀만의 입지를 굳혀왔다. 조 동문의 음악을 논할 때 밴드 '3월의 토끼'를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재즈 프로젝트 밴드 '3월의 토끼'로 데뷔 앨범을 발매했고, 이 때 작업한 세 편의 앨범은 재즈 음악계에 보컬 조정희를 알리는 본격적인 계기가 됐다. '3월의 토끼'라는 귀여운 이름에는 사실 그녀의 음악적 철학이 담겨 있다.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 이상한 나라에 도착하잖아요. 이처럼 많은 분들이 저희를 통해 재즈 음악에 빠졌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담아 지은 이름이에요. 아마 이 때부터 대중들과 재즈로 소통하겠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재즈 보컬리스트로 활동 중인 조정희 동문(국어국문학과 97) 재밌는 점은 그녀가 음악 전공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학부 시절 조 동문은 그저 음악을 좋아하던 국문학도였다. 대학 생활은 즐거웠고, 학과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하지만 졸업을 목전에 두고 진로를 고민하면서 불현듯 ‘좋아하는 음악을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렇게 조 동문은 졸업 후 뒤늦은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개인 레슨을 받으며 기본기를 다졌고 맨몸으로 무대에 올랐다. 비교적 늦은 시작인만큼 더 많이 부딪히고 깨지며 실력을 쌓았다. “젊기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음악이 좋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미래에 대한 걱정도 잊혔으니까요.” 물론 쉽지만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재즈 보컬리스트로 데뷔하기까지 무려 10년이 걸렸다. 음악적 정체성을 찾기 위한 방황의 시간이었다. 대중가요부터 팝, 메탈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넘나드는 고민이 이어졌다. 그런 그녀의 방황을 끝낸 것이 바로 재즈였다. 재즈를 만난 후 그녀는 온전히 음악에 몸을 맡길 수 있었다. 대중적이지 않은 음악을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은 늘 존재했지만 좋아하고 가슴 뛰는 일을 하는 즐거움이 더 컸다. 그녀의 음악을 찾는 이들도 점점 많아져 갔다. 재즈, 모두가 즐기는 음악이 되길 어느덧 15년 차 음악인이지만 그녀는 여전히 하고 싶은 일이 많다. 국어국문학과 출신답게 최근에는 윤동주 시인의 동시에 재즈 선율을 입히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얼마 전 지원한 창작 동요제에서는 결선 진출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앨범 작업 역시 진행 중이다. 그녀는 이날 “계절이 바뀔 때마다 꺼내 들을 수 있는 선물 같은 음악을 선보일 예정”이라는 음악적 계획도 덧붙였다. ▲지난 1일 진행된 인터뷰에서 조정희 동문이 재즈 대중화에 대한 소망을 전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녀는 재즈와 대중을 잇는 가교 역할을 수행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다. 그래서 그녀는 설명이 있는 공연을 기획하는 등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통해 재즈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아직 우리나라에서 재즈는 어렵고 낯선 장르인 것 같아 늘 안타까워요. 과거에는 나만의 음악을 만드는 데 급급했다면, 지금은 어떻게 하면 대중과 더 많이 소통하는 재즈 음악을 만들 수 있을까 늘 고민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재즈가 됐으면 해요.” 음악 안에서 가슴 뛸 것 조 동문은 현재 우리대학 실용음악과 교수직을 겸하고 있다. 그녀는 무대에서 쌓은 경험과 노하우를 하나라도 더 전하는데 주력한다. 오디션을 위한 테크닉보다는 노래하는 이의 감성이 담긴 진짜 음악을 가르치고 싶다는 그녀. "퍽퍽한 현실 속에서도 음악인의 꿈을 잃지 않는 어린 친구들이 무척 대견하다"는 조 동문은 끝으로 후배이자 제자들을 향해 “소신을 잃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하는 뮤지션들로 거듭나길 바란다"는 응원의 메시지를 덧붙였다. ▲조정희 동문은 후배 뮤지션들에게 "소신껏 좋아하는 음악을 하라"는 조언을 건넸다. 글/ 김예랑 기자 ys2847@hanyang.ac.kr 사진/ 김윤수 기자 rladbstn625@hanyang.ac.kr

2017-08 28

[동문]성실함이 만든 특별한 바둑 인생

가로, 세로 19줄의 정방형 세계에서 펼쳐지는 우아한 두뇌 싸움, 바둑. 정수현 동문(영어영문학과 76)은 삶의 대부분을 바둑과 함께했다. 정 동문의 성실함은 그의 커리어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제1기 프로신왕전 우승, KBS바둑왕전과 SBS바둑최강전 준우승'이란 수상 경력을 기본으로 바둑 관련 40여 권의 저서를 집필한 ‘최초의 바둑학 교수’ 타이틀은 정 동문의 바둑인생을 대변한다. 바둑을 향한 꿈을 꾸다 정 동문은 고등학생 때부터 바둑을 시작했다. 바둑을 배우면서 재미를 느껴 책을 보며 공부했고, 나중에 실력이 늘자 프로기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가장 존경하는 기사는 일본에서 활약한 기성(棋聖) 우칭위안(吳淸源) 9단이었습니다. 창의적인 발상과 발군의 기량을 가진 우칭위안 9단의 기보를 많이 연구했죠.” 프로기사가 되기 위해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들어갔지만, 당시 제도가 중단되어 반년동안 정 동문 혼자 연구생을 하기도 했다. "저는 주로 책을 중심으로 공부를 하는 타입이었고, 그래서 바둑도 좀 이론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정 동문은 주니어 기사들이 출전하는 타이틀전인 제1기 프로신왕전에서 우승하면서 바둑계에 이름을 알렸다. “제게 힘든 상대인 강훈 6단과 결승에서 만났죠. 끈질긴 스타일의 강훈 6단에게는 상대 전적이 좋지 않았는데, 마음을 가다듬고 둬서 2대1로 승리를 거두고 타이틀을 차지했습니다.” 이어서 KBS바둑왕전과 SBS바둑최강전에선 잇달아 준우승을 차지했다. “제가 빨리 두는 바둑에 좀 능한 편입니다. 대학생 때 시합을 빨리 하고 강의에 참석하려다 보니 빨리 두는 습관이 생겼죠. KBS바둑왕전, SBS바둑최강전 모두 속기전인데, 결승에 올랐다가 이창호 9단에게 두 번 다 고배를 마셔 준우승에 그쳤습니다.” 한양대 학부시절엔 프로기사 생활과 병행하다 보니 바빴다. 대학생 때 후배와 ‘한양기우회’라는 바둑모임을 만들었고, 현재까지도 대학바둑모임의 이상적인 모델로 인정 받고있다. “시합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라 1년 평균 시합바둑을 30판에서 40판 정도를 뒀어요. 프로기사들은 연습으로 바둑을 두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둔 바둑을 연구, 분석하는 방법을 많이 씁니다. 그래서 바둑연구회를 몇 개 만들어 소집단으로 연구하는 방법을 쓰곤 했죠." 후배와 바둑모임을 만들자고 상의를 한 후 벽보를 붙였다. 노천극장에서 학생들이 모여 기우회를 조직했고 바둑동아리 방에서 바둑을 두고 친목을 도모하는 활동을 했다고. “나중에는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한 바둑특강도 열기도 했죠.“ ▲현재 정수현 동문은 KBS일요바둑, 바둑왕전, 바둑TV의 해설자를 맡고 있다. (출처: 세계일보) 바둑이라면 뭐든지 OK 정 동문은 ‘반상의 파노라마’. ‘인생과 바둑’. ‘바둑 읽는 CEO’, ‘현대바둑의 이해’ 등 40여 권의 책을 쓸 정도로 왕성한 집필 활동을 이어왔다. “처음에 쓰게 된 계기는 미국의 바둑행사에 갔을 때 한 교포가 제발 영어로 된 바둑책을 하나라도 써서 보내달라고 한 것 때문이었죠." 일본에서 나온 책만 있으니 한국 교포로서 좀 아쉽다는 것이었다. "애국심이 발동해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뒤 출판사에서 요청해 계속 저술을 하게 됐어요.“ 덕분에 정 동문은 바둑학과가 생기기 전부터 ‘바둑학 교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1997년에는 별명에 불과했던 바둑학 교수에 실제로 오른다. 프로기사 활동 중 최초로 바둑학과가 설립된 명지대 측으로부터 바둑학 교수직을 제의 받은 것. 최초의 바둑학 교수가 된 정 동문은 20년 가까이 대학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현재 한국프로기사회와 한국바둑학회에서 회장을 맡고 있다. “최초로 바둑학과 교수가 되어 국제바둑학 학술대회를 열고 바둑학회를 조직했어요.” 이밖에도 KBS일요바둑, 바둑왕전, 바둑TV 등의 해설자로도 활약하고 있다. 바둑방송에서는 한 판을 한 시간 정도 방영할 경우 바둑도 그 정도의 시간으로 진행되는 것이 좋다. 너무 일찍 끝나거나 너무 오래 가면 방송편집이나 해설 모두 힘이 든다고. “가끔 시합바둑이 30분만에 끝나버려 나머지 시간을 해설로 메우려고 땀을 흘리기도 합니다(웃음).” 바둑계에서 정 동문의 왕성한 활동은 유명하다. 프로기사를 거쳐 바둑 학계, 나아가 해설자까지 인생 전반을 바둑에 바친 셈이다. ▲정수현 동문이 지난해 한 행사에서 바둑경영 특강을 진행하고 있다. (출처: 이투뉴스) 성실함이 만든 바둑 인생 정 동문의 꾸준한 바둑 경력의 원동력은 성실함이다. 그의 좌우명도 정성은 모든 사물의 근본이므로 정성이 없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의 '불성무물(不誠無物)'. “제가 살아오면서 느낀 게,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무엇인가를 하는 것보다 타인이나 사회를 위해 뭔가를 할 때 보람이 있고, 결과적으로 자신에게도 유익한 일이 생기더라고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열성을 다해 하다 보면 의미있는 결과를 얻게 되거든요.” 그에게 바둑은 만병통치약이다. "저는 좋아하는 바둑을 직업으로 가졌고, 바둑학을 연구하여 새로운 바둑의 세계를 발견했어요. 학생들에게 종종 ‘바둑은 만병통치약(panacea)인가?’라는 강의를 합니다. 바둑이 인간생활에 다양한 역할을 하는 것에 스스로 놀라기도 하죠.“ 정 동문은 바둑에 대해 '대단히 흥미진진하면서도 그 안에 삶의 교훈과 지혜가 담긴 문화적 이기'라고 표현했다. “근래에는 바둑이 글로벌 마인드스포츠로 자리잡으면서 바둑을 알면 세계의 친구들과 교류할 수 있으니 교양으로 바둑을 배우는 것도 추천해요.” ▲불성무물(不誠無物: 정성은 모든 사물의 근본이므로 정성이 없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음)의 좌우명처럼 정수현 동문에겐 성실함이 가장 중요하다. (출처: 이코노믹 리뷰) 글/ 추화정 기자 lily1702@hanyang.ac.kr

2017-08 23

[동문][한양피플] 30년을 뛰어넘어 마주한 끝7학번 선후배

지난 5월 25일 생활과학대학에서는 학번의 마지막 숫자가 7로 끝나는 67, 77, 87, 97, 07학번 동문이 모이는 재미있는 풍경이 연출됐다. 말 그대로 ‘끝7학번 한양대 생활과학대학 동문의 날’이 열린 것. 이 행사에 참석한 87학번 예명지 동문과 17학번 강태훈 학생을 만나 끝7학번 한양인의 생각과 고민, 학교에 대한 애정을 들어봤다. 글. 오인숙 / 사진. 안홍범 생활과학대학 동문이 함께한 자리 입학 10년, 20년, 30년, 40년, 50년을 맞이하는 동문들의 친목을 도모하고 지속적인 정보 교류와 소통의 장을 마련하고자 기획된 ‘끝7학번 한양대 생활과학대학 동문의 날’. 재미있는 기획만큼이나 각자 다양한 영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선후배가 함께한 귀한 자리였다. 이날 행사에는 생활과학대학의 역사 소개와 재학생 밴드의 축하 공연, 선후배가 함께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 등이 마련됐다. 또 행사에 참석한 의류학과, 식품영양학과, 실내건축디자인학과 동문들이 17학번 재학생을 위한 장학금 지원을 약속하는 훈훈한 장면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 보석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는 예명지(실내건축디자인학과 87) 동문은 “제가 졸업한 학과가 꾸준히 발전하는 모습을 보니 매우 자랑스럽다”며 “보석 디자인이라는 생소한 분야로 가기 전에 디자인에 관심을 갖게 된 첫 계기가 학교에서 배운 인테리어 디자인이었다”며 오래 전 기억을 떠올렸다. 의류학과 1학년 대표로 행사에 참여한 강태훈(의류학과 17) 학생은 “졸업 하신 선배님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은데,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계시는 선배님들을 뵐 수 있어서 좋았다”며 “한양인으로서 새삼 자부심과 소속감을 느꼈고, 저 역시 앞으로 후배들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 17학번 강태훈 학생(왼쪽)과 87학번 예명지 동문이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양의 의미는 달라도 애교심은 같아 생활과학대학 선후배로 자리를 함께한 예명지 디자이너와 강태훈 학생은 30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다양한 이야기와 생각을 나눴다. 입시 공부를 하면서 무엇을 하면 행복할까 고민하다가 패션 분야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에 의류학과로 진학했다는 강태훈 학생. 하지만 요즘 그에게 고민이 생겼다. 입학을 하고 보니, 고등학교 때부터 패션 공부를 한 친구들이 많아서 자신이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고 불안하다는 것. 그런 후배의 모습을 보며 예명지 디자이너는 “지금은 한창 그런 고민을 할 때”라며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놓는다. “제가 우리나라 1세대 보석 디자이너인 셈인데, 당시만 해도 그 길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저 역시 디자인 공부를 시작하면서 내 길이 맞는지 고민을 한 적도 있고요. 하지만 만약 그때 중도 포기했다면 보석 디자이너로서의 25년 인생은 없었겠죠.” 그가 보석 디자인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교 4학년 때다. 하고싶은 것을 찾은 후에는 최선을 다해 공부하고 활동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도전의 여왕’이라고 불렀다. 그 결과, 명실상부 해외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작가로 이름을 올렸다. “하고 싶은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꾸준히 노력해야 해요. 지금 당장 실망스러운 부분이 있더라도 열심히 하세요. 하지만 1학년 때는 무엇보다 많이 놀아야 해요.(웃음)” 자신의 꿈을 믿고 흔들리지 않고 나아간다면 10년 뒤 강태훈 학생은 멋진 패션 디자이너로 성장해 있으리라. 반면 한 분야에서 이미 일가를 이룬 예명지 디자이너는 또 어떤 근사한 꿈을 꾸고 있을까. “지금까지 국제적인 활동에 집중하며 쉼 없이 달려왔는데, 올해는 한 박자 쉬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해요. 쉼표가 필요한 시기거든요. 10년쯤 후에는 세계적인 작가로서 후배들을 독려하고 있는 제 모습을 그려봅니다.” 강태훈 학생에게 한양대가 새로운 시작의 첫발을 내딛는 디딤돌이라면, 예명지 디자이너에게는 늘 그립고 고마운 뒷산 같은 존재다. 생각만 해도 든든하고 불끈 힘이 솟는 곳, 모교란 바로 그런 것이다. 30년이란 시간의 간격처럼 각자의 마음속에 담긴 한양대의 의미는 조금씩 다르지만, 학교에 대한 사랑만큼은 같은 크기로 아로새겨져 있었다. 사랑한대 2017년 7-8월호 이북 보기

2017-08 22

[동문]정장도 퍼즐 한 조각 꼭 끼워 맞추듯이

주름 하나 없이 깔끔하게 다려진 셔츠와 갓 닦은 듯 반짝이는 구두.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초년생들은 익숙했던 사복을 벗어던지고 정장을 입는다. 하지만 만만찮은 맞춤정장의 가격과 빠듯한 예약제 시스템 때문에 정장 하나 맞추기도 힘든 것이 현실. 이러한 사회 초년생들의 고충을 덜어주기 위해 안지수, 신요섭 동문(이상 중문과 06)은 회사 생활을 뒤로하고 2030 세대를 위한 맞춤 정장 서비스를 시작했다. ‘Suitable’의 뜻처럼 맵시 나는 옷을 추구하다 “처음 브랜드 이름을 정할 때 수트라는 단어를 온종일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영어의 ‘suitable’이라는 용어가 떠올랐죠. ‘수트’와 ‘에이블’의 합성어로 긍정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어요” 이렇게 ‘수트에이블’은 지난 2015년 3월 정식 출시를 거쳐 2030 세대를 위한 정장과 기성복 판매를 시작했다. 패션이라는 공통 관심사를 갖고 있던 안지수, 신요섭 동문은 자연스레 공동 대표가 됐다. 현재는 ‘Better design, better fit’이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개인의 체형에 맞는 정장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제공하고 있다. 두 사람은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는 기존 맞춤정장의 불편함을 보완해 ‘찾아가는’ 맞춤정장 서비스를 시작했다. “정장을 맞추려면 강남, 광화문 일대의 숍을 2~3차례 방문해야 해요. 예약도 꼭 해야 하는데, 시간을 맞추기도 어렵고, 비용도 그렇게 싸지 않죠. 이런 점들에서 불편함을 겪는 고객들이 많아서, 저희는 고객분들이 편한 시간에 회사로 찾아가서 원단 선택부터 치수 측정까지 다 해드리고 있어요.” ▲자신이 디자인한 ‘수트에이블’의 옷들 앞에서 자세를 취하는 안지수 동문. 그가 입은 스트라이프 셔츠 또한 직접 만든 옷이다. 수트에이블은 '모든 고객들을 최우선으로 둔다'는 철칙을 지킨다. 그리고 이 원칙은 어떤 경우에도 예외가 없다. “지인의 소개로 몸이 불편하신 분의 옷을 맞추게 됐어요. 다른 매장 몇 군데를 방문하셨는데, 정장을 맞추지 못한다는 대답을 듣다가 저한테까지 연락이 닿은 거예요. 그분의 정장을 맞춰드리고 싶은 생각이 들어 시간과 공을 들였죠. 옷이 완성된 후, 그 옷을 입고 절 다시 찾아오셨는데, 정말 행복해 보이고 멋있으셨어요.” 안 동문은 가슴 뭉클했던 순간을 계기로, 몸이 불편하신 분들께 꼭 맞는 옷을 맞춰드리려고 노력한다. 고객 한 분 한 분께 최선을 다하는 이유에서일까. 수트에이블의 재구매율은 굉장히 높은 편이다. 계속해서 단골을 유지하기 위해 안 동문과 신 동문은 수트에이블의 야심작인 ‘테일러 카’ 서비스를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테일러 카는 트럭을 이용해 직접 찾아가는 맞춤정장 서비스다. “장소가 마땅치 않아 고객님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한계점을 느꼈어요. 카페는 주위 시선 때문에 불편하고 회의실은 예약이 차 있을 때도 있어서 푸드트럭의 개념처럼 테일러 카를 고안해냈어요. 고객님들이 차 안에서 편하게 옷을 입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편리성을 추구한 아이디어예요.”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1년 10개월 동안 마케팅 관련 회사에 다니면서 안 동문은 패션을 직업이 아닌 취미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패션과는 거리가 먼일을 하다 보니 만족도가 굉장히 낮았다는 그다. “평생 일한다고 생각했을 때, 제가 밤낮 가리지 않고 열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패션 분야였어요. 그 생각이 회사를 나와야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졌죠.” 마침 신 동문도 비슷한 시기에 회사를 나오고 진로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던 중이었다. 학부 시절 때부터 친했던 두 사람은 진로에 대해 자연스럽게 얘기를 나누다 이직이 아닌 패션 분야로의 창업을 택했다. ▲안지수 동문은 인터뷰 내내 패션을 향한 아낌없는 사랑을 보여줬다. 그는 현재의 직업을 진정으로 즐기고 있었다. 중어중문학과 출신인 두 사람이 패션 업계로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학부 시절 때부터 옷과 패션에 애정을 품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음은 안 동문의 설명. “어렸을 때부터 옷에 관심이 매우 많았어요. 꾸미는 걸 좋아해서 1학년 때 하얗게 염색한 폭탄 머리를 하고 학교를 들어왔죠. 그때 당시 제일 튀었고, 항상 사람들은 제가 무엇을 입는지 물어보곤 했어요. 그럴 때마다 성심성의껏 대답해줬고, 제가 일러준 옷을 사서 입고 오면 기분이 좋았어요.” 안 동문은 지금도 고객들에게 정장을 맞춰주는 것뿐만 아니라, 고객별로 어울리는 옷 색깔과 헤어스타일도 제안해준다. 패션 제안을 해주는 것에 있어 보람을 느끼는 그다. 일을 시작할 때 지인으로부터 소개받은 선생님에게 옷 만드는 것을 배울 수 있던 것도 창업에 큰 힘이 됐다. 25년가량 맞춤정장을 전문으로 하셨던 분을 은사님으로 모시면서 정장 관련 분야에 대한 안목을 넓혔다. 하지만 비전공자인 안 동문이 단숨에 기술을 터득하는 것은 고된 일이었다. “저는 옷을 좋아하고 사서 입기만 했지, 만든다는 생각은 정말 못 했었어요. 그래도 매일 같이 선생님을 찾아가 배운 덕에 창업을 더욱 빠르게 진행할 수 있었죠.” 옷을 통해 긍정적인 에너지 전파하고 싶어 아직은 창업에 있어 유년기를 거쳐 가는 기업이지만, 벌써 ‘수트에이블’의 옷들은 중국 백화점의 편집숍에도 소량 입고 되고 있다. 안 동문은 "앞으로 더 넓은 시장으로 뻗어 나가길 원한다"고 했다. “중어중문학문과를 전공했다 보니, 언어적인 부분에서는 유리할 것 같아요. 벌써 중국에서 작게 하고 있지만, 더 큰 인정을 받고 싶고, 저희 옷을 많은 사람이 입었으면 좋겠어요.” 나아가, 수트에이블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바로 고객들이 옷을 입음으로써 느끼는 만족감과 높은 자존감이다. “남자분들 출근 하기 전, 거울을 봤을 때 유독 마음에 드는 날이 있잖아요. 전 여자친구 만나도 꿀릴 게 없을 것 같고(웃음).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수트에이블’의 옷을 입고 문 밖으로 나갈 때, 발걸음 하나하나가 희망에 차 있으면 좋겠어요. 저희 옷을 입고, 겉으로만 멋있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도 멋있어졌으면 하는 게 제 바람이에요.” ▲이 날의 ‘패션피플’ 안지수 동문. ‘수트에이블’ 상의와, 롱 슬랙스, 그리고 츄바스코 샌들로 ‘데일리룩’ 을 선보였다. 글/ 유혜정 기자 haejy95@hanyang.ac.kr 사진/ 최민주 기자 lovelymin12@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