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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 23

[동문]모든 사람이 농부가 되는 세상을 꿈꾸다

"물이 부족합니다." 내가 기르는 채소가 나에게 말을 건다면 어떨까. 4차 산업혁명에서 주목하고 있는 기술 중 하나인 사물인터넷(IoT; Internet of Things)은 사람과 사물 또는 사물과 사물이 인터넷으로 통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사물들이 인간들과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이다. 사물인터넷(IoT)을 농업 분야로 가져온 스타트업이 있다. 스타트업 ‘엔씽’은 사물인터넷(IoT) 기반의 텃밭을 구축해 스마트폰으로 40피트의 농장을 관리할 수 있는 스마트 팜(Smart Farm) 시대를 열었다. 잘나가는 스타트업 기업의 대표가 되기까지 엔씽(n.thing)은 사물인터넷(IoT)기술을 기반으로 농업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 스타트업이다. 2014년에 시작해 현재 국내외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엔씽의 대표 김혜연(전자통신공학 04) 동문은 학창시절부터 막연하게 창업을 꿈꿔왔다고 말한다. 고등학생 때부터 동네 가게 홈페이지를 제작하며 용돈 벌이를 했을 정도로 그의 학창시절은 남달랐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밴드동아리, 연예인 매니저, 트렌드 리포트 작성, 영국 어학연수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특히 SK텔레콤에서 트렌드 보고서를 작성을 도우면서 미래 트렌드에 관한 전반적인 맥락을 읽을 수 있었다. “앞으로 어떤 기술이 미래를 주도할지 미리 볼 수 있었어요. 2008년도 당시에 이미 사물인터넷(IoT), 3D 프린터, 인공지능 등의 기술을 논의하고 있었죠.” 이후 농자재 회사를 운영하시는 외삼촌의 사업을 돕기도 했다. 김 동문은 그곳에서 ‘스마트 농장’이라는 사업아이템을 얻게 됐다. 창업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외삼촌의 회사를 나온 김 동문은 농업 경험을 바탕으로 사물인터넷(IoT) 기반의 스마트농장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히 한국전자부품연구원에 연락이 닿아 위촉연구원으로 일할 기회를 얻었다. 사물인터넷(IoT) 관련 플랫폼을 만들고 연구원이 보유한 각종 기술에 대해 아이디어를 내는 일이었다. 김 동문은 이곳에서 사물인터넷(IoT)에 대한 경험을 쌓고 발전시켜 지금의 엔씽을 만들게 되었다고 말한다. ▲ 엔씽의 대표 김혜연(전자통신공학부 04) 동문을 서울 서초구 나루터로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만났다. 엔씽(n.thing); 수많은 분야(n개)에 도전한다 엔씽은 모든 사람이 농부가 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IT기술을 이용해 손쉽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여러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처음은 작은 스마트 화분 ‘플랜티’로 시작을 했다. 플랜티는 통신 모듈을 통해 언제 어디서든 스마트폰으로 화분을 제어할 수 있다. 식물의 주변 환경을 센서가 인지하고, 원격으로 급수가 가능해 사람이 직접 손댈 필요가 없다. 이렇게 작은 화분에서 조금씩 크기를 늘리기 시작했다. 재배형 화분인 ‘플랜티스퀘어’를 거쳐 현재 컨테이너형 스마트 농장 ‘플랜티큐브’를 만들었다. 스마트폰 하나로 누구나 손쉽게 자신의 농장을 가질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엔씽은 궁극적으로 농업 시스템 구조를 바꾸고자 한다. 한국은 여름에 덥고 습해 병충해가 많아 대부분의 농가에서 농약 사용은 불가피했다. 또한 농작물선택부터 판매까지 농부 한 사람이 관리하기에 벅찬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스마트 팜(Smart Farm)을 통해 식물 성장에 필요한 환경을 농장이 스스로 조절하면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친환경적인 농산물을 스마트폰 하나로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생태계. 앤씽이 나아 가고자 하는 방향이다. ▲ 엔씽에서 판매 중인 스마트 화분 ‘플랜티스퀘어’. 주방에서 손쉽게 친환경 바질을 키워 식재료로 활용할 수 있다. (출처: 엔씽 홈페이지) 김 동문은 엔씽을 미디어 회사라 칭한다. “상추를 키우는 것도 하나의 콘텐츠라고 생각합니다. 농업과 관련된 좋은 콘텐츠를 만들어 농업이 일상인 사회를 만들고자 합니다.” 갈수록 감소하는 농업인력과 앞으로의 식량난 문제에 엔씽이 만드는 새로운 농업생태계는 좋은 해결책이 될 것이라 자부한다. 실제로 현재 국내외에서 전폭적인 투자와 매출을 올리고 있다. 그는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고 말한다. “최종목표는 화성에 농장을 짓는 겁니다.” 창업을 꿈꾸는 대학생에게 김 동문은 절대 섣불리 창업하지 말라 한다. “대학생들에게 함부로 창업하라 하고 싶지 않죠. 모든 위험을 안고 기업의 앞길을 선택하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거든요.” 김 동문도 사업 초기에 막중한 책임감과 불안감을 겪었기에 누구보다 현실적으로 창업을 바라본다. 김 동문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에 대해 불안함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설명한다. 창업에서는 이러한 불안감을 이겨내고 첫발을 내딛는 것이 중요하다고. 또한 다양한 사고방식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김 동문은 이를 위해 대학에서 전공수업 외에 조별과제가 많은 교양수업을 일부러 듣기도 했다고. 경영, 디자인, 광고, 컴퓨터 공학 등 다양한 전공의 친구들과 과제를 하면서 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이는 현재 기업을 경영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김 동문은 대학생들에게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데 두려움을 가지지 말라고 조언한다. “인생은 골프와도 같아요. 일단 샷을 날려 공을 그린 위에 올려 둬야 홀을 향해 방향과 전략을 잡을 수 있죠. 일단 공을 세게 쳐봐야 아는 거예요.”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굴복하지 말라는 말 속에 다양한 도전이 만든 김 동문의 현재가 담겨있었다. ▲ “새로운 분야를 시도하는 데 있어 두려움을 가지지 마세요” 김혜연 동문은 대학생들에게 두려움을 이겨내는 의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글/ 황유진 기자 lizbeth123@hanyang.ac.kr 사진/ 이진명 기자 rha925@hanyang.ac.kr

2018-04 12 중요기사

[동문]네덜란드의 무사가 되어 한국에 알리다

박물관은 영어로 ‘Museum’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됐고, 여신 뮤즈(Muse)의 신전을 뜻한다. 시, 음악 등 아홉 가지의 학예에 능한 예술의 여신, 한양대에도 이에 적합한 사람이 있다. 현재 네덜란드에서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인 김수현 동문(피아노과 11)이 그 주인공.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생활을 보낸 그는, 박물관과 사랑에 빠져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동생과 함께 쌓은 피아노의 추억 김수현 동문과 동생 김소연 동문(피아노과 10)은 어린 시절을 피아노와 함께 보냈다.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시작했어요. 한 살 터울이었던 여동생은 금세 따라치기 시작했고, 피아노를 늘 곁에 두고 놀았습니다.” 이후 동생과 김 동문은 피아노를 사이에 두고 때론 친구가, 때론 경쟁자가 되곤 했다. “무대 공포증이 있는 제겐 피아노 콩쿨이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그 영향이 입시에도 미쳐 동생보다 늦게 한양대학교에 입학했어요.” ▲ 2013년 백남음악관에서 김수현 동문(피아노과 11)과 동생 김소연 동문(피아노과 10)이 함께한 피아노 듀오 연주 모습. (출처: 김수현 동문) 김 동문은 한양대학교에서 꿈꿔왔던 대학 생활을 이뤘다. “한양대학교는 당시 타 대학과는 다르게, 공연 기회의 확대, 편의시설 확충 등 음악대학에 대한 투자가 남달랐어요. 덕분에 한양인의 자부심을 가지고 학교를 열심히 다닐 수 있었습니다.” 동생과 함께 수업을 듣고, 고향에서 첫 공연을 여는 등 김 동문의 생활은 활기찼다. 특히 김 동문은 이대욱 교수(피아노과)와 함께했던 음악 공부를 가장 뜻깊은 시간으로 꼽았다. “지속적인 연주 활동을 하셨던 교수님을 보고,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클래식 음악의 위대함을 느꼈습니다. 또한, 음악이 주는 무한한 감정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 보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음악 교사를 그만두고, 네덜란드로 떠나다 김수현 동문은 학부생 때 ‘서양 음악사’, ‘낭만주의음악 연구’ 등 학문적인 분야의 수업을 듣고 학문 쪽에도 관심을 두게 됐다. “피아노 연주를 하는 것보다 연필을 잡고 책을 들여다보는 일이 더 좋았습니다. 때마침 찾아온 교직 이수를 병행하면서 교육학을 공부했어요.” 교사로서의 경험이 김 동문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예상한 그는 교단에 올라섰다. 하지만 졸업 후 유럽여행의 여운은 김 동문에게 네덜란드를 추억하게 했고, 결국 음악 교사를 그만두고 네덜란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나게 됐다. ▲ 2017년 6월 네덜란드 출국 전, 김수현 동문(피아노과 11)의 학교 마지막 근무 날.(출처: 김수현 동문) “홀로 갔던 3주간의 유럽여행은 꿈만 같았어요. ‘모나리자’를 비롯해 ‘키스’ 같은 명화를 직접 보고, 미술에 일가견이 없는 저 또한 넋을 놓았죠. 그때 유럽으로 공부를 하러 와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결국, 김 동문은 국민의 80%가 영어를 사용하고, 지리적으로 여행하기 편리한 나라 네덜란드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영어를 생활화하기 위해 네덜란드 가족과 함께 지내고, 작품에 대한 공부 후 언제든 박물관을 찾는다는 김 동문의 삶은 어느새 미술로 바뀌어 있었다. 미술과 네덜란드에 사랑을 느끼다 김 동문은 “미술 작품은 힘이 있다”고 했다. “아시다시피 저는 피아노를 전공한 사람입니다. 미술도, 역사도 공부하지 않은 제가 작품을 통해 당시 시대적 배경과 인간의 생애를 알아본다는 점이 너무 흥미로웠죠.” 그는 작품의 힘과 음악을 접목했다. “음악 작품은 귀로, 미술작품은 눈을 통해 감상하죠. 이 상반되는 특성을 하나로 합쳐 작품을 감상할 때 더욱 집중할 수 있었어요. 제가 알지 못했던 화가의 생애를 조사하다 보면, 비슷한 시대의 음악가들과 연관되는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모두 예술을 즐기는 나라에서 김 동문은 많은 사람에게 네덜란드를 알리고 싶었다. 이는 경남일보에 박물관에 대한 기사를 연재하게 이끌었고, 수차례의 노력 끝에 나온 원고는 큰 사랑을 받았다. 또한, 현재 김 동문은 외교부 해외정보센터 네덜란드 통신원으로서 네덜란드 워킹홀리데이에 대한 정보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박물관에 쏟았던 저의 큰 노력과 지식을 쉽게 풀어내어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습니다. 이러한 공부는 제 삶을 더욱 풍요롭고 빛나게 하지만, 나눌수록 더 빛나기 때문이죠.” (경남일보 기사 확인하기 / 네덜란드 정보 확인하기) ▲ 네덜란드 로테르담 박물관 방문 후 김수현 동문의 모습. (출처: 김수현 동문) 따듯한 마음, 오래 간직하시길 김수현 동문의 최종 목표는 예술과 대중이 한층 가까워지는 것이다. “요즘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음악과 미술 작품을 이해하기 쉽도록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구상 중입니다. 또, 네덜란드를 찾는 한국 관광객들에게 반고흐 미술관, 레이크스 박물관에 대한 투어 프로그램도 준비하고 있어요.” 전문성을 기르기 위해 내년 박물관학과 진학을 목표하는 김 동문은 “글을 계속 써서 책을 출판하고 싶다”고 했다. 네덜란드에 키워온 사랑을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다는 김 동문, 예술에 대한 다양하고 재밌는 이야기를 알리고 싶다는 그의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다. 글/ 정민주 기자 audentia1003@hanyang.ac.kr

2018-04 11

[동문]‘진보’라는 단어의 아이콘이 되고 싶어요

본명보다 예명 진보(JINBO)로 유명한 아티스트가 있다. 방 한켠에 ‘진보주의’, ‘미래주의’, ‘낙관주의’, ‘낭만주의’,’ 국제주의’를 걸어놓은 한주현 동문(경제금융학부 01)이 그 주인공. 흑인음악부터 K-POP까지 폭넓게 자신만의 음악을 선보이고 있다. 교내에선 문화 비즈니스 각계의 인사가 매주 나오는 옴니버스 강의 ‘문화비즈니스리더십’ 강연자로도 활동한다. 2015년 2학기부터 강연자로 나오고 있다. 한 동문을 만나 그의 독특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음악하는 집에서 키운 꿈 “어렸을 때 베란다에 살았어요. 제 방은 없었지만 음악 방은 있었죠.” 한 동문은 음악이 끊이지 않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께서는 지휘, 오르간, 성악 등을 하시는 만능 음악인이셨다. 위로는 형이 2명 있었다. 형들은 클라리넷과 플루트를 연주할 수 있었으며 학교에서는 밴드를 했었다. 음악 방에서는 다양한 노래를 접할 수 있었다. “큰 형은 엘비스 프레슬리(Presley)와 비틀스(The Beatles)와 같은 고전적인 음악을, 작은 형은 너바나(Nirvanan)와 지미 헨드릭스(Hendrix)와 같은 자유로운 음악을 틀어줬습니다.” ▲ 한주현 동문(경제금융학부 01)에게 음악이란 잘 구사할 수 있는 언어다. (출처 : 한주현 동문) 음악은 자연스럽게 삶의 일부가 됐다. 큰 형이 틀어준 바비 브라운(Brown)의 노래들, 특히 엠씨 해머(MC Hammer)의 ‘U can’t touch this’를 들으며 음악적 방향을 잡았다. 음악 방에서는 보이즈 투 맨(Boyz II Men)의 노래를 들으며 리듬 앤드 블루스(R&B)를 주 장르로 삼았다. 집에서 탄생한 음악적 감각을 학교에서도 크게 발휘했다. “수학여행에 갔을 때 서태지와 아이들 노래로 공연을 했어요. 그때 제가 안무를 직접 하기도 했어요. 공연하는 것이 저에게 잘 맞더라고요.” 한 동문은 음악가로 한 걸음 다가갔다. 한편 멋지기로는 과학자가 제일이라 생각했다. 수학을 좋아했지만 잘하기는 쉽지 않았다. “과학자가 되지 못할 바에 제가 가진 장점을 살리며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생각했어요. 그것이 아티스트였습니다. 우아하기도 하고요.” 한 동문은 퍼렐 윌리엄스(Williams)를 보며 꿈을 키웠다. 자신과 비슷한 점이 많다고 느꼈다. “악기를 귀신처럼 다루는 사람도 아니고, 랩을 엄청 잘하는 사람도 아녔지만 아티스트로서 겁 없이 일하는 것을 보며 저도 저렇게 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진보적인 음악가 한 동문의 방. ‘진보주의’, ‘미래주의’, ‘낙관주의’, ‘낭만주의’,’ 국제주의’ 벽에 적혀있는 단어들이다. 삶에 대한 신념이다. 음악가로서의 신념과도 일치한다. “항상 지향하며 살고 있어요. 아직은 음악에 이 중 한두 가지밖에 녹여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두 녹여낸 음악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 동문의 신념은 음악을 더 가치 있게 만든다.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은 아무것도 없는 진공에서 탄생하지 않는다. 한 동문은 서로 다른 장르를 어떻게 더 창의적으로 조합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예전에는 우리나라에 없는 새로운 장르를 찾으려고 했어요. 국경이 무의미해진 지금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장르들을 조합해 저만의 장르를 창조해야죠.” 지금도 한 동문은 다른 프로듀서들과 협업을 하며 장르 간 융합을 꾀하고 있다. 일전에는 일본의 유명 레이블인 재지 스포트(Jazzy Sport)에 소속되어 있는 개이글(GAGLE)과 같이 작업하기도 했다. ▲ 한주현 동문은 퀀시 존스(Jones)처럼 죽기 전까지 계속 음악을 하고 싶다고 한다. (출처 : 한주현 동문) 한 동문은 다양한 가수들과 음악을 작업했다. 빈지노의 ‘Aqua Man’에서 작곡, 편곡으로 참여했다. 흑인음악에 국한되지 않았다. 방탄소년단(BTS)의 ‘여기봐’에 작사, 작곡, 편곡으로, ‘Pied Piper’에는 작사, 작곡으로 참여했다. 그뿐만 아니라 작곡, 작사로 레드벨벳의 ‘봐 (Look)’에 참여하기도 했다. 앞으로도 협업하고 싶다고 한다. 특히 10대 아티스트와의 작업을 원한다. “세대마다 향유하는 문화가 다릅니다. 10대는 저에게 미지의 세대이죠. 어린 친구들과 작업을 하면 새로운 무엇인가가 만들어질 것 같습니다.” ‘앞으로 나아간다’. 진보의 사전적 정의다. 많은 사람은 진보를 정치적인 단어로 떠올린다. 주변에서 예명을 진보(Jinbo)로 지은 이유를 물어본다고 한다.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도 상단에 바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진보적으로 노력하는 음악가가 되고 싶습니다. 저는 ‘진보’라는 단어를 등에 업고 음악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전진해야 한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게 되죠. ‘진보’라는 단어를 듣고 저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아이콘이 되고 싶습니다.” "실전으로 빠르게 나오세요" ▲ 한주현 동문은 새로운 곡을 작업하고 있다. 5월 전시회를 통해 결과물을 공개할 예정이다. (출처 : 한주현 동문) 한 동문은 경제금융학부 출신이다. 현재 직업과 관련이 없어 보인다. 전공 선택에는 부모님의 영향이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었고, 대학에서도 음악을 전공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께서는 견문을 넓히길 바라셨는지 반대하셨죠.” 흡수가 굉장히 빨라서 공부에 흥미를 쉽게 붙였다. “뭐든지 즐겁게 합니다. 시도할 때 항상 재미있게 할 자세가 돼 있습니다.” 이런 성격 때문인지 여러 가지를 폭넓은 경험을 했고 경험들은 그에게 음악적 자양분이 됐다. “공부만 하는 것이 학생의 본분이 아닙니다. 후배들을 보면 정말 똑똑합니다. 공부만 하기에는 너무 아깝습니다. 다양한 사람들 만나면서 자신과 비슷한 비전을 가진 사람을 찾아봤으면 해요. 지식 습득도 중요하지만 급변하는 사회에 빨리 적응하는 법을 터득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한 동문은 빠르게 실전 경험을 쌓아봤으면 한다. 배운 지식을 통해 실전서 쌓은 경험물이 크다고 생각해서다. "음악이 아녀도 제 세계관이나 뜻과 맞으면 언제든 연락주세요. 같이 경험을 쌓아봅시다." 글/ 유승현 기자 dbmdgus9543@hanyang.ac.kr

2018-03 28

[동문]산에서 한국의 정체성을 찍고 싶어요

지난 3월 18일, 평창 동계 패럴림픽 폐회식을 끝으로 대한민국 두 번째 올림픽의 막이 내렸다. 강원도 정선군에 위치한 가리왕산은 이번 동계 올림픽의 스키 활강 경기장으로 지정됐다. 스키 활강 경기장에서의 일정은 단 3일. 그 3일을 위해 가리왕산은 나무 12만 그루를 잃었다. 조명환 동문(전자공학과 75)은 그 아픈 참상을 카메라 속에 담아 사진 영상전을 꾸렸다. 가리왕산을 주제로 한 그의 세 번째 전시는 지난 3월 28일부터 약 넉 달 간 서울특별시청 소리갤러리에서 열린다. 공학도 그리고 시작한 2회차 사진작가의 길 조 동문은 전자공학과 출신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 생활 10년, 개인 사업 10년 내내 사진과 관련된 일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대학생 때 대학미전에서 장려상을 받은 경험이 있는 사진가다. “대학교 시절에 사진 동아리 ‘하이포’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때는 강의실보다 동아리 방에 있던 시간이 길었죠.” 그랬던 조 동문은 회사에 다니고 경영일을 하느라 사진을 놓을 수밖에 없었고, 한동안은 잊고 지냈다. ▲지난 3월 21일 조명환 동문(전자공학과 75)을 조 동문의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조 동문은 사진작가로의 전업을 지천명에 찾아온 인생의 반환점이라 말한다. 인생의 반환점은 04년, 50살이 되던 해 조 동문에게 찾아왔다. “일주일 동안 백두산으로 여름휴가를 갔어요. 거기서 만난 지인께서 백두대간을 오르자고 했죠. 그렇게 백두대간 산악회를 시작하면서 일에서 마음이 멀어지고 오직 산만 생각났습니다. 인생이 바뀌어 버렸죠.” 사진을 업으로 삼은 건 그 후의 일이다. 산에 갔을 때 찍은 사진을 인터넷에 올렸는데 사람들 반응이 좋았다. 결국 ‘지천명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생각에 그동안 해오던 일을 정리했다. 어느덧 사진 경력 14년, 조 동문은 자신이 노력형이라고 말한다. “아직도 공부하느라 집에 늦게 들어가요.” 퇴사 후 사진 보정 작업을 위해 포토샵을 독학했고 책을 내기 위해 1인 출판사 ‘생것미디어’도 만들었다. 그동안 산을 타면서 허리, 무릎을 다쳐 수술도 했고 오른쪽 인대도 늘어나는 등 몸도 많이 상했지만, 산에 대한 그의 열정은 그대로다. “산에서 사진을 찍을 때면 항상 산꼭대기까지 올라갑니다. 그래야 산을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어요.” 그가 렌즈 속에 산을 담는 방식 '생것‘은 조 동문의 작품에 가장 많이 들어가는 단어다. “백두대간을 오르는데, 처음엔 산길 폭이 좁았어요. 근데 매번 갈 때마다 사람들의 잦은 왕래로 길이 넓어지고 뚜렷해지는 게 싫더라고요. 이전의 ’생것들을 그대로 남겨놓자‘해서, 그때부터 그 말을 쓰게 됐습니다.” 그의 사진에 사람이나 인공물은 없다. 이 또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 ‘생것’에 대한 그의 애정 때문이다. ▲조명환 동문이 출판한 사진집 중 일부. 모두 그의 1인 출판사 ‘생것미디어’에서 발간했다. 그가 사진을 찍는 방식은 다른 사진작가들과 차이점이 있다. 보통 사람들은 맑고 화창한 날씨에 산을 많이 찾는다. 그리고 대개 해가 잘 드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 사이에 사진을 찍는다. 그러나 조 동문은 다르다. 그 시간에는 좋은 사진을 건질 수 없다는 게 그의 견해다. “오히려 날씨가 쾌청하면 카메라를 접어요. 사람들이 찍는 것처럼 똑같이 찍는다면 건질 게 없습니다.” 그는 주로 비나 눈이 올 때, 새벽이나 밤에 산에 오른다. 남들과는 다른 독특한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사진이란 창조적인 것입니다. 경치 좋은 곳에서 매번 찍어봐야 작품이 나올 수 없어요. 새로운 시각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곧 예술의 본질이죠.” 한국의 정체성을 찍고 싶어요 조 동문은 산과 자연환경을 주로 찍다 보니 환경운동단체와 같이 활동하곤 한다. “환경운동 하는 사람들은 산과 자연이 자신과 동화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벌목을 하거나 환경을 해치면 내가 아픈 거죠.” 가리왕산도 같은 사례다. 그가 가리왕산을 처음 찾은 것은 2006년. 그 뒤로 평창 올림픽에 지정됐다고 해서 ‘욱’하는 마음에 다시 가게 됐다고. “가서 사진도 열심히 찍고 책도 만들었어요. 그리고 올림픽은 시작 됐는데 막상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파괴된 산의 모습을 넣어 달력을 만들었습니다.” 마침 그 소식을 들은 신문사가 그에게 취재요청을 했고, 조 동문의 인터뷰 기사를 본 곳에서 전시할 수 있게 갤러리를 내줬다. 경제적 요건 때문에 전시를 망설이던 그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산 본래의 모습을 사랑하고 아끼는 그에게 가장 의미 있는 사진은 정해져 있지 않다. 매 촬영 산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한 번 밖에서 200장에서 300장을 찍어오면 컴퓨터로 3일 정도 작업을 합니다. 그러다 보정 중에 마음에 드는 사진이 나오면 혼자 일어나서 하나 건졌다는 생각에 기뻐해요.” 조 동문은 우리나라 산에 한국의 정체성이 있다고 말한다. “결국에는 그런 사진을 찍고 싶어요. 한국의 정체성이 녹아 있는 마지막 한 장.” 그는 그 사진을 찍기 위해 오늘도 산에서 그리고 스튜디오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가리왕산을 주제로 한 조명환 동문의 세 번째 전시가 3월 28일부터 8월 15일까지 서울특별시청 소리갤러리에서 열린다. 사진은 슬라이드 영상 형식으로 구성된다. (출처: 조명환 동문) 글/ 옥유경 기자 halo1003@hanyang.ac.kr 사진/ 최민주 기자 lovelymin32@hanyang.ac.kr

2018-03 22

[동문]당신의 옷장에 ‘예쁨’을 채워드릴게요

‘내일 뭐 입지?’ 매일 아침 찾아오는 고민. 분명 옷을 샀는데 입을 옷이 없어 옷장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른다. 예쁜 옷을 사기 위해 휴대폰으로 인터넷 쇼핑을 한다. 하지만 다양한 가격대 속 넘쳐나는 상품 때문에 이것저것 비교하며 구매하기도 귀찮은 상황. 많은 여성이 겪는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서정민 동문(경영학과 01)이 쇼핑 앱 ‘브랜디’를 만들었다. 출시한지 2년 만에 누적 판매상품 300만 개를 기록한 ‘브랜디’는 여성들의 편리한 쇼핑을 담당하는 대표 앱이다. ‘오직 예쁜 옷만 모으는’ 브랜디 ‘오직 예쁜 옷만 모으다’는 지난 2016년 7월에 출시된 쇼핑 앱 ‘브랜디’의 대표 슬로건이다. 대표 서 동문은 소위 말하는 동대문 ‘보세’, 즉 브랜드가 없는 옷들을 한곳에 모아둔 플랫폼을 만들고 싶어 회사를 창업했다. 브랜디는 안드로이드와 iOS에서 모두 다운로드가 가능하며, 현재 3000여 개의 여성 쇼핑몰과 블로그로 옷 공동구매를 하는 ‘블로그 마켓’이 브랜디에 입점해 있다. 브랜디는 소비자와 판매자 사이에서 중개 역할을 해주는 셈이다. 앱을 다운로드 받으면 사용자의 나이를 기재하는 창이 뜬다. 나이 선택 시 이용자의 연령대에 따라 자동으로 추천되는 옷은 앱 메인에 노출된다. 그 외 쇼핑몰과 블로그 마켓의 여러 상품들을 손쉽게 조회하고, 찜하고, 구입 할 수 있다. 가장 인기가 좋은 ‘베스트’ 상품과 새로 입고된 상품들을 5% 할인해주는 ‘New 5%’의 기능은 브랜디 만의 이점. 쇼핑몰의 사이트를 따로 방문하지 않고도 구경부터 결제까지 모두 가능하기에 이용자는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브랜디를 실행하면 처음 뜨는 창. 선택한 연령대에 따라 메인에 노출되는 옷들이 달라진다. ▲브랜디의 메인 화면. 서 동문이 꼽은 브랜디의 강점은 모바일 최적화다. “브랜디의 디자인과 인터페이스는 정리가 잘 돼있어요. 상품을 보기 편리하죠. 사용자들은 앱을 켜면 평균 9분 정도를 구경 해요. 쇼핑몰에 개별적으로 접속해 물건을 구입하는 과정이 복잡한데, 브랜디를 이용하면 짧은 시간 내 쇼핑을 할 수 있어요.” 이렇게 여러 ‘브랜드’들과 소비자인 ‘나’ 자신이 최적화된 플랫폼 안에서 만날 수 있다는 이유로 서 대표는 ‘브랜디’라는 이름을 붙였다. 일찍부터 창업에 도전한 청년 브랜디가 서 동문의 첫 창업 기업은 아니다. 지난 2007년에 디자인과 패션을 접목한 자체제작 티셔츠 사업을 시작했던 서 대표의 나이는 그 당시 27살. 창업 후 7년동안 경영을 도맡고, 타 회사에 인수된 뒤 2년 가량 근무하다 브랜디를 창립했다. “첫 사업 때 저는 학생이었어요. 그 당시 도와줬던 친구들이 브랜디의 초기 멤버로 같이 들어왔고요.” 서 동문의 재학시절엔 지금처럼 창업이 큰 인기를 끌지 않았다. 그를 포함해 창업을 하고 싶어하던 학생은 단 한 명 뿐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도전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었던 것 같아요. 학생 때는 ‘벤처창업경진대회’에 도전해 대상을 받기도 하면서 창업에 일찍 눈을 떴죠. 제 회사를 만들겠다는 다짐을 일찍 한 것 같아요.” 서 동문은 자영업을 하는 친척들을 보고 자라며 자연스레 경영이라는 학문과 가까워졌다. 서 동문은 입학 때부터 품어온 창업에 대한 꿈을 입대 후 구체화했다. ▲"저희 회사의 목표는 거래액을 통해 돈을 버는 단편적인 것이 아니라, 고객님들께서 '스마트'한 소비자가 되게끔 안내해 주는거에요." “그 당시 ‘한양벤처동문회’라는 동문회 모임이 있었는데, 3학년 때 동문회에서 보조 역할을 했어요. 그 때는 창업을 보통 30대에 많이 했기 때문에 제일 젊은 선배님께서 37세셨어요. 저는 완전 막내였고. 창업하겠다고 선배님들 쫓아다니니까 저를 예쁘게 보셔서 실질적인 조언과 도움을 많이 주셨던 것 같아요.” 그렇게 과감하게, 무경험으로 시작한 창업. 서 동문은 직원 채용, 조직관리, 그리고 재무 등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하지만 잃을 것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나이였기에 적극적으로 임할 수 있었다고 서 동문은 말한다. ‘패션테크’ 사업에 앞장서다 남들보다 일찍 창업을 했던 서 동문은 경영자로서 자질을 갖추고 브랜디를 시작했다. “지금은 정직하게만 전진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나쁜 짓 하지 않고, 거짓말 하지 않고. 정직하게 하다 보면 뭐든 되겠지, 라는 마음가짐으로요.” 부서별 리더들이 일을 더욱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끔 매일 소통하고 힘을 북돋아주는 그다. “한국에는 특히나 패션과 기술을 접목한 ‘패션테크(Fashion-Technology)’ 사업이 없어요. 여기서 패션테크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플랫폼으로서, 콘텐츠와 첨단기술을 패션사업에 적용하는 것을 뜻해요. 한국은 제조업과 유통에 치우쳐져 있죠. 이탈리아의 ‘육스(Yoox)’, 그리고 영국의 ‘파페치(Farfetch)’와 같은 온라인 패션 플랫폼을 더욱 키우는 것이 목표에요.” 고객들이 브랜디를 통해 더욱 예뻐져야 한다는 신념으로, 서 동문은 브랜디의 기능을 대폭 확장할 예정이다. 개인에게 특정 의류를 추천하고 채팅을 통해 상담하는 기능을 탑재할 예정이라고. 오는 4월에는 브랜드 의류를 모아둔 플랫폼인 ‘Hyper’어플을 출시한다. ▲확장을 주 목표로 두고 있는 브랜디. 유명 쇼핑몰의 추가 입점과 더욱 넓은 범위로 마케팅을 할 계획이다. 남은 삶도 ‘창업자’로 살고 싶다는 서 동문. 자신과 직원들이 구상해낸 아이디어로 성공을 거둘 때 마다 그는 성취감을 느낀다. “창업은 결국 ‘존버정신(끝까지 버틴다는 속어)’이 중요해요. 저도 처음에 들었을 떈 무책임하다 생각했죠. 하지만 성공한 사례들을 보면 쉬워 보이지만, 그 과정은 정말 고되거든요. 창업을 시작하려는 한양인이라면 1~2년 안에 승부를 보겠다는 목표보다는 훌륭한 창업자로 성장하는 본질적인 방법을 찾아야 해요. 버티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글/ 유혜정 기자 haejy95@hanyang.ac.kr 사진/ 최민주 기자 lovelymin32@hanyang.ac.kr

2018-03 15

[동문][사랑의 릴레이] 끝없는 배움과 나눔의 길, 삶을 꽃피우다

미국 회계법인 ‘리어카운턴시그룹(The Lee Accountancy Group)’의 이종혁 대표에게 지난해 11월 20일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뜻 깊은 날이었다. 이날 이 대표는 한양대 건축공학부 명예 졸업장을 받았다. 올해로 입학한 지 꼭 60년이 된 그에게 이 졸업장의 무게와 의미는 더욱 남다를 수밖에 없다. 글. 오인숙 / 사진. 안홍범 ▲ 리어카운턴시그룹 대표 이종혁(건축공학과 58) 동문 건축공학부 졸업장 받은 공인회계사 “제가 입학했을 당시 건축공학과 입학 정원이 50여 명이었어요. 건축공학과에서 3년 공부하고 공업경영학과로 전과해 졸업했으니 정작 공업경영학과에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죠.” 이 대표는 당시 건축공학과 친구들과의 인연을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다. 5년 만에 한국을 찾은 이번에도 도착하자마자 두 명의 친구를 만났다. 졸업장을 받은 이 대표의 얼굴은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 그는 친구들을 만나자마자 “나도 이제 건축공학과 졸업생”이라고 말하며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학위 욕심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학위만도 다섯 손가락이 꽉 찰 정도니 말이다. 한국과 미국에서 각각 받은 공업경영학과 학사와 경영학과 학사, 미국에서 세법과 회계학으로 받은 두 개의 석사에 경영학 박사학위까지 가지고 있는 그에게 건축공학부 명예 졸업장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열아홉, 스무 살에 만난 친구들이잖아요. 그 친구들을 아직까지 만나는데, 졸업장이 없어서인지 이상하게도 늘 허전함이 있더라고요. 뭔가 위축된 기분도 들었고요. 이제야 제대로 된 졸업장을 받았으니 좋을 수밖에요. 하하.” 그런 기쁨과 고마움의 표현이었을까. 이 대표는 졸업증서 명예 수여식 자리에서 한양대에 발전기금 4만 달러 기부를 약정했다. 1년에 1만 달러씩, 4년에 걸쳐 총 4만 달러를 기부하기로 한 것이다. “일종의 귀소본능 같은 게 아닌가 싶어요. 언젠가는 한국의 모교를 위해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어요. 저를 키운 곳이잖아요. 한양대에 다니는 탈북 학생들을 비롯해 여러 후배들을 위해 쓰였으면 합니다.” ▲ 가지고 있는 걸 나누면 자신의 생각과 사랑이 더 크게 빛을 발한다고 말하는 이종혁 대표 소외 계층을 위한 다양한 나눔 활동 이종혁 대표는 오랫동안 미국에서 다양한 봉사 활동과 기부를 펼쳤다. 가장 대표적인 활동으로 미국 오클랜드시 정부와 함께 개최하는 ‘오클랜드 추수감사절 만찬’을 꼽을 수 있다. 저소득층 주민들과 노숙자 등을 포함해 2,500명가량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고 공연을 선보이는 자리다. 그는 26년간 이 행사를 진행하며, 만찬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것부터 봉사 인력을 채용하는 일까지 모든 것을 도맡았다. “2016년까지 회장으로 있다가 이번에 후임자에게 넘겨줬습니다. 북캘리포니아에서 그렇게 크게 행사를 연 건 처음일 거예요. 한국인을 주축으로 한 유일한 행사이기도 하고요. 덕분에 한국인들의 단합에도 큰 역할을 했지요. 워낙 오래된 행사라 꾸준히 참여하는 봉사자와 기부자가 많습니다.” 이 행사에는 한국인 외에도 백인, 흑인, 멕시칸, 중국인, 베트남인 등 다양한 나라의 이민자들이 함께한다. 그들과 한데 힘을 합쳐 행사를 완성하고, 서로를 이해하며 모두가 화합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는 데 의미가 크다. 이러한 공로로 지난 2004년 제리 브라운 당시 오클랜드 시장(현 캘리포니아 주지사)은 3월 5일을 ‘이종혁의 날(Jong H. Lee Day)’로 공표한 바 있다. 소외 계층을 위해 꾸준히 만찬을 개최하고, 여러 인종을 화합시키는 가교 역할을 한 것에 대해 인정받은 것이다. 이 대표의 사랑의 실천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만찬 행사 외에도 기부를 통해 저소득층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 조성에 힘쓰고 있다. 미국의 모교에 매년 15,000달러씩 기부하고 있는데, 장학금 기부를 시작한 지도 어느새 10년이 훌쩍 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부금도 커져 학생당 500달러씩 지급하던 장학금이 2016년에는 2,000달러까지 늘었다. 이종혁 대표가 기부와 봉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뭘까. “제가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어요. 다섯 살이던 1945년에 남한으로 내려왔는데, 6・25 전쟁 때 가족을 다 잃고 혼자서 자랐어요. 제가 배고파 봤기 때문에 어른이 되면 주변의 어려운 학생들이나 어린 친구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늘 했습니다.” 어렵고 고됐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던 걸까. 그의 눈가가 금세 촉촉해졌다. “기부나 봉사활동을 하면 기분이 참 좋아요. 사실 내가 가지고 있는 게 꼭 내 것만은 아니거든요. 혼자 가지고 있으면 작게 쓰여지지만, 그걸 나누면 자신의 생각과 사랑이 더 크게 빛을 발하죠. 기부는 가진 게 많아야 하는 게 아니에요. 재벌이 큰돈을 내는 것만큼 평범한 사람들이 조금씩 기부하는 것도 중요해요. 그런 문화가 익숙하지 않아서 ‘조금 더 여유가 생기면 해야지’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바로 그때 시작해야 합니다.” ▲ 지난해 11월 한양대를 방문해 학교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성공의 원동력은 끝없는 배움 1958년 한양대 건축공학과에 입학한 그는 3학년을 마치고 군대(해병대)에 갔다. 전역 후 공업경영학과로 전과해 졸업했고, 이후 1~2년간 사회생활을 하다 1966년에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모두가 먹고살기 힘들었던 시절, 그는 더 넓은 곳에서 꿈을 펼치고 싶어 떠났다. 하지만 막상 낯선 땅에 도착하니 모든 것이 막막하고 힘들었다. 다시 대학에 들어간 그는 어느 교수의 추천대로 회계학을 공부해 공인회계사가 됐다. 그렇게 미국 캘리포니아주 공인회계사로 활동하면서 지난 1977년부터 회계법인 ‘리어카운턴시그룹’을 이끌고 있다. 회사를 운영하며 특임교수로도 오랫동안 활동한 그는 학생과 직원들에게 ‘끊임없이 공부할 것’을 강조한다. 학교 공부를 마쳤다고 멈추지 말고 계속 공부하라는 뜻이다. 그가 평생 살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바로 배움이다. 이 대표 역시 60세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쉼 없는 배움으로 성공을 이뤄낸 그가 하는 말이기에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뚜렷한 목표를 세워야 해요. 언제까지 무엇을 할지 정확하게 계획하고, 몇 년 후에 내 자신의 모습이 어떨지 단계별로 그려봐야 합니다. 미래를 그리지 않고 막연하게 공부하면 방향을 잃기 쉽습니다.” 이 대표 역시 그렇게 공부해서 지금의 자리에 왔다. 끝없는 배움의 결과를 스스로 보여준 셈이다. ▲ 이종혁 대표(왼쪽)가 명예 졸업장을 받은 후 이영무 총장과 기념 촬영을 했다 가정과 지역사회를 돌보는 리더 이종혁 대표를 만난 날은 그가 한국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었다. 한양대에 대한 애정이 더 깊어진 탓일까. 그는 앞으로 더 자주 한국을 찾겠다고 약속했다. 또 미국에 있는 동문들의 단합을 위해 한양재단을 기획 중이라고도 했다. “재단을 통해 동문들이 친교를 맺고 자신감과 소속감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그만큼 학교에 대한 사랑도 커질 거예요. 또 기금 마련으로 모교에 재정적인 도움을 줄 수도 있을 테고요.” 그는 올해 78세가 됐다. 입학한 지 꼭 60년째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했던가. 그의 생각과 활동은 여전히 왕성하다. “앞으로 10년은 더 일할 생각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공인회계사 일 외에 납세자를 위해 국세청과 협상(Tax Resolution)하는 일에 좀 더 힘을 쏟으려고 합니다. 변호사만큼 법을 잘 알아야 할 수 있는 일이죠.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을 대변하기도 하지만, 또 사업적으로도 가능성이 큰 일이에요. 사업을 좀 더 확장하고, 봉사와 기부도 보다 적극적으로 할 생각이에요.” 오랫동안 일하기 위해서는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얼마 전에 권투를 시작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은 이토록 멈출 줄 모른다. 이종혁 대표는 후배들에게도 진심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나 환경을 탓하지 말고 스스로를 발전시키면서 열심히 생활하세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가정과 지역사회를 돌본다면 훌륭한 리더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지난한 세월을 스스로의 정신과 마음가짐, 철학으로 무장해 고난을 이겨낸 이종혁 대표. 끝없는 배움과 사랑이 그의 삶을 아름답게 완성하고 있다. 사랑한대 2018년 01-02월호 이북 보기

2018-03 14

[동문][한양피플] 네 안에 숨어 있는 ‘너’를 깨워라

취업 경쟁이 심화되면서 기업이 원하는 인재상도 점점 더 까다로워지고 있다. 무조건 우수한 인재를 찾기보다는 조직에 적합한 인재를 찾고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신세계 인터내셔날 인사팀에 재직 중인 문세환 씨는 자신감과 차별화된 자신만의 스토리가 있다면 취업의 문을 여는 것은 한양대 출신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글. 박도근 / 사진. 안홍범 ▲ 신세계 인터내셔날 인사팀 문세환(법학과 08) 동문 자기소개서를 통해 ‘너’를 보여줘 지난해 9월 교내 올림픽체육관에서 150여 개의 기업이 참여한 ‘2017 한양 잡 디스커버리 페스티벌’이 열렸다. 소속 회사의 인사 담당자로 참가한 문세환 씨에게 이번 행사는 매우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자신의 꿈을 향해 한 발씩 내딛는 학교 후배들을 대상으로 취업 상담을 해주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문세환 씨는 그날 만난 후배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각별해 보였다고 한다. 그는 “채용 정보만 얻기 위해 온 학생들도 더러 있었지만 대체로 회사에 대해 아는 것도 많고, 준비를 많이 해온 것 같아 믿음직하고 뿌듯했다”고 소감을 전했다. 취업의 출발은 자기 자신의 개성과 특성 등이 진솔하게 녹아 있는 자기소개서를 쓰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는 성장 배경, 성격의 장·단점 등의 자기 이야기를 쓰는 것에도 요령이 필요하다고 했다. “남들과 차별화된 자기소개서를 쓰기 위해 제목은 면접관의 눈을 사로잡을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하고, 제목에 걸 맞는 내실 있는 콘텐츠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문세환 씨가 지금 몸담고 있는 패션 회사를 지망할 때 썼던 자기소개서에서 가장 평가가 좋았던 부분 역시 법학과를 2학년까지 마치고 사법시험을 준비했던 1년 동안 고시촌에서 ‘패션왕’처럼 보냈다고 쓴 대목이었다. 과장이 조금 섞이기는 했지만, 독창성 부분에서 면접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이력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시기를 덮어버리거나 감추기보다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입사하려는 회사와 연관성이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당당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 문 동문은 '남들과 차별화된 자기소개서를 쓰기 위해 제목은 면접관의 눈을 사로잡을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하고, 제목에 걸 맞는 내실 있는 콘텐츠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라고 말한다. 그는 해군 장교로 전역 6개월을 앞두고 취업 준비를 했다. 군 복무를 병행하느라 다른 지원자들보다 준비한 것이 많지는 않았지만, 밝고 건강해 보이는 면접 태도 덕분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자신감이라는 덕목은 취업 준비에 있어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실제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지원자가 그렇지 않은 지원자보다 수월하게 취업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소심하게 정답을 말하는 것과 조금 부족하더라도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입니다. 누구나 틀리거나 모를 수 있어요. 오히려 그럴 때일수록 배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됩니다.” 회사나 기업도 좋은 인재를 뽑아야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무조건 학점이나 어학 실력 또는 인턴 경력만 믿고 쉽게 사람을 채용하지 않는다. 신입 사원은 밝고 긍정적인 태도로 자기가 속한 부서나 팀에 좋은 기운을 불어넣어 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면접관이 자신감을 중요하게 평가하는 이유 또한 지원자가 기업에 몸담게 됐을 때를 고려해서다. 패션과 의상을 전공한 지원자가 대부분인 곳에서 법학과 출신의 해군 장교였던 그가 당당히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은 면접관이 어떠한 면에 가장 중점을 두고 평가하는지를 예측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세환 씨는 “요즘 기업에서 선호하는 인재에 부합하기에 미흡한 부분이 많았다”며 “한양대 출신이라 좋게 본 것 같다”며 겸손해했다. “우리 대학은 기업들이 무척 선호하는 학교 중 하나입니다. 그것만으로도 큰 스펙이 되는 만큼 후배들도 자신감을 갖고 취업 준비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묻지 마 지원’을 하기보다는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적합한 기업에 지원하는 것이 순서라는 걸 꼭 기억하길 바랍니다.” 노력을 멈추지 않는 한 내일은 오늘보다 취업에 성공할 확률이 0.1%라도 올라갈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내면에 차곡차곡 경험이 쌓이다보면 언젠가 100%에 도달할 것이다. 그날이 한 달 뒤가 될지 일 년 뒤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내일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사랑한대 2018년 01-02월호 이북 보기

2018-03 14

[동문]저는 공학도 잘하는 의학자입니다

'21세기의 석유'로 불릴 만큼 현대 사회에서 데이터가 지닌 가치는 크다. 빅데이터는 4차산업혁명이라는 단어와 함께 어디서나 빠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얕게 배우거나 상업적 목적을 갖고 접근하는 이도 많다. 이런 때일수록 묵묵히 연구를 진행해온 사람이 중요하다. 한현욱 동문(전자전기공학부 94)은 컴퓨터공학과 의학을 전공해 데이터로 의학을 연구한다. 그를 판교에 위치한 차의과학대학 연구실에서 만났다. 공학과 의학의 만남 한현욱 동문이 걸어온 길은 공학과 의학 두 가지가 함께한다. 한양대 전자전기공학부와 서울대 대학원에서 공학을 공부했다. 이후 SAP에서 데이터베이스 플랫폼 'HANA'의 초기 개발자로 참여했고 LG전자기술원에서 근무한 바 있다. 이후 차의과학대 의학전문대학원에서 의사면허와 의료정보학 박사학위를 받으며 의료정보연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주대 의과대학 의료정보학교실 조교수를 지냈고 현재는 차의과학대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금은 크게 두 가지를 하고 있어요. 의료정보학, 그리고 블록체인.” ▲최근 차의과학대로 자리를 옮긴 한현욱 동문(전자전기공학부 94)을 지난 12일 한 동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의료정보학은 단어 그대로 의료 관련 정보를 분석하는 분야다. 환자의 질병, 치료 등에 대한 임상 데이터와 유전체와 의약품의 분자서열 등에 대한 데이터를 연구한다. 한 동문의 강점은 공학석사까지 데이터베이스를 연구했다는 점. “각 데이터 간의 상관관계를 연구하다 보면 유의미한 결과를 얻어낼 수 있어요. 질병 간의 관계나, 특정 분자가 어떤 질병을 만들어내는지 파악하죠. 빅데이터로 제공되는 자료를 이용하거나 수학적 모델링을 통해 상호관계를 도출해냅니다.” 이렇게 도출한 관계는 기초의학의 세부 분야에서 필요한 통찰을 제공하고 기존 결과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있다. 기술 도입으로 데이터 수집 향상시키고파 블록체인에 대한 연구도 궁극적으로 의료정보를 위한 일이다. 기존 체계에서 의료정보학 연구에 필요한 데이터 수집엔 한계가 있다. “임상 데이터가 많이 파편화 돼있어요. 의료법상 병원 내에서 이뤄진 진단 및 치료에 대한 자료는 외부서 볼 수 없어 여러 병원의 자료를 취합하기가 불가능합니다.” 특히 한 환자가 한 곳에서만 진료 받는 경우는 적다. “암이 의심되는 환자가, 4~5곳 병원에서 진단 받은 후 치료는 한 곳에서만 받을 수도 있죠. 이런 경우에도 각 병원에 진단 데이터는 있지만 치료 데이터가 없어 결국 연구에 쓰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이 외에 환자 측면에선 내 임상 데이터가 어떻게 쓰이는지 알고 싶어하죠. 이를 블록체인이 해결해줄 수 있을지 연구 중입니다.” 한 동문은 메디블록의 어드바이저다. 메디블록은 이은솔 동문(의학과 03)이 공동창립자로 있는 회사로 의학에 블록체인 도입을 시도하고 있다. 공학석사이자 의료정보학 박사인 한 동문은 아직 초창기지만 블록체인이 의료정보학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의료계에서는 블록체인을 통해 환자로부터 임상 데이터를 취합할 수 있습니다. 환자는 자신의 데이터에 대한 직접적인 보상을 받을 수 있죠.” 임상 데이터를 제공할 때 마다 환자는 블록체인 속 토큰을 받는다. 이를 통해 환자에게는 데이터를 보관할 유인이 생긴다.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해내는 셈. “아직까지는 시작 단계에 불과해요. 그럼에도 블록체인이 정보의 질을 높일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이은솔 동문 참고기사 - '의료 정보 플랫폼의 새 판을 짜다') 관심이 이끈 길 데이터베이스로 공학석사까지 취득하고도 의전원을 간 건 주위의 추천이 컸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던 중 접한 생물 관련 세미나는 큰 방향을 제시했다. “당시 학교에 다양한 분야의 세미나가 열렸어요. 데이터베이스를 공부하면서도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하던 중에 한 세미나에서 생물 쪽의 데이터 관련 연구가 절실해질 거란 말을 들었죠. 그때가 게놈 프로젝트 얘기가 있던 때였습니다.” 생물 쪽으로 방향을 정한 한 동문은 끊임없이 주변에 조언을 구했다. 대부분 ‘생물 관련 전공 지식이 크게 필요할 것이다’라며 관련 분야 대학원을 추천했다. 중간에 데이터베이스 플랫폼 HANA의 개발자로 참여하는 등 잠깐 다른 길도 걸었지만 박사 과정에 대한 의향도 컸던 한 동문. 이내 차의과학대 의학전문대학원에 입학했고 석사 과정과 박사 과정을 모두 밟아 의료정보학 박사가 됐다. “공학과 의학의 공부 방법은 너무나 달랐어요. 공학은 논리적 이해가 우선이었는데 의학은 암기가 우선이었죠. 저는 30대였는데 옆의 23살 동기는 젊어서 머리도 쌩쌩 돌아가고.(웃음) 그래도 박사 과정에서는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이해도 덕에 관련 논문을 읽을 때 부담이 훨씬 덜했죠. 나중에는 공부 효율이 높았던 거 같네요.” 한편으로 한 동문은 끝내 원하던 의료정보학의 길을 왔다는 자부심도 있다. “의전원 특성상 임상 위주로 수업이 많아요. 그쪽으로 돌아서는 이들도 많은데 끝내 여기까지 왔네요.” ▲<이것이 헬스케어 빅데이터이다>의 저자 한현욱 동문은 책에 헬스케어 빅데이터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실었다. 거품에 휘말리지 않고 묵묵히 한 동문은 최근 <이것이 헬스케어 빅데이터이다>라는 책도 냈다. 급증하는 빅데이터에 대한 관심 속 업계 전문가의 의견을 담은 책이다. “4차산업혁명 얘기가 나오면서 빅데이터에 대한 자료도 범람하고 있어요. 아쉬움이라면 대부분 상업적 측면에서 접근해서 의료쪽에 대한 이해도는 떨어지죠. 그간 기고한 칼럼이나 블로그 등에 쓴 글을 모아 펴냈습니다.” 한 동문이 펴낸 책에는 의료정보학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이 실려있다. 대중적으로 익숙한 ‘헬스케어 빅데이터’란 단어 속에 의료정보학이 뭐고, 왜 의료와 정보를 별개로 할 수 없는지 소개한다. “가끔 주변사람들이 말해요. ‘너는 취미생활을 너무 오래하고 있다’고. 좋아하고 재밌으니까 남들이 잘 안오는 길도 오게 됐네요.” 취미생활이라고 농담하지만 그만큼 한 동문이 연구분야에 갖는 애정 또한 크다. 지금은 각광받지만 언제 또 사그라들지 모르는 빅데이터 열풍. 그 안에서 묵묵히 연구중인 한 동문이 새삼 눈에 띄는 이유다. ▲한현욱 동문의 주력은 결국 의료정보학이다. 블록체인 연구는 더 나은 연구를 위한 방법 중 하나인 셈이다. 글/ 이상호 기자 ta4tsg@hanyang.ac.kr 사진/ 강초현 기자 guschrkd@hanyang.ac.kr

2018-03 13

[동문][꿈꾸는 청춘] 나의 청춘은 칠전팔기의 도전기

임진왜란의 3대 승전 중 하나로 꼽히는 행주대첩을 지휘한 권율 장군이 무과에 급제한 나이는 45세. 지난해 마지막 사법시험의 최고령 합격자로 주목받은 박종현 씨 또한 같은 나이에 합격의 기쁨을 누렸다. 도전에는 나이 제한이 없다고 말하는 그에게서 진정한 청춘의 자세를 배운다. 글. 박영임 / 사진. 안홍범 ▲ 제59회 사법시험 합격자 박종현(법학과 92) 동문 마지막 사법시험 최고령 합격자 신림동 고시촌에서만 꼬박 15년. 웬만하면 고시촌을 벗어나고 싶을 법도 하건만, 그는 만남의 장소를 굳이 신림동 인근으로 잡았다. 인터뷰를 마친 후 민사법 관련 스터디 모임이 있기도 하지만, 인생의 3분의 1이라는 시간을 온전히 이곳에서 보냈기에 가장 익숙한 곳이기 때문이리라. “저는 여전히 진행형 인간입니다. 실패와 성공의 경계에서 다행히 한 번의 기회를 얻었을 뿐이죠.” 마지막 사법시험의 최고령 합격자 박종현 씨의 말이다. 지난해 11월 7일은 법무부의 제59회 사법시험 최종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이다. 이날 발표는 많은 이들이 몇 곱절로 마음을 졸이며 기다려야 했다. 이번을 끝으로 지난 1950년 고등고시 사법과로 시작한 사법시험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응시자와 가족들은 발표의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발표 며칠 전부터 초조함으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넘긴 박종현 씨는 차마 합격자 명단을 직접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회사에 휴가까지 내고 곁을 지켜준 아내가 그를 대신해 명단을 확인했다. 합격자 명단에서 그렇게 기다리던 박종현이라는 이름 석 자를 발견한 순간, 부부는 끌어안고 한참이나 기쁨과 회환의 눈물을 흘렸다. “가장 먼저 ‘다행’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15년 동안 노력한 시간이 결실을 맺은 순간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박종현 씨는 내심 이번에는 합격하리라 기대하는 마음이 컸다고 고백한다. 마지막까지 흐트러짐 없이 정신력을 곧추세우고, 그 누구보다 성실히 준비했다고 자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건강 상태나 가정사 모두 원만했다. 모든 상황이 순조로웠다. 하지만 최고령 합격자라는 타이틀까지 얻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마흔다섯 살이면 최고령 합격자치고는 어린 편입니다. 오십이 넘어 합격하는 분들도 있었으니까요. 최고령 합격자로 주목받으니 부담이 되기도, 쑥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상징성이 있으니까 이 또한 고마운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긍정의 힘으로 도전 또 도전 결혼 후 서른에서야 본격적으로 사법시험을 준비했으니 남들보다 도전부터 늦었다. 그리고 지난 15년 동안 사법시험 1차 시험만 10여 차례, 2차 시험은 6번이나 치렀다. 10년이 넘으면 포기할 만도 한데 그가 끝까지 도전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던 버팀목은 무엇일까. “제가 좀 긍정적인 편입니다. 분명히 제게도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의 말을 요즘 유행하는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 정도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자신에 대한 충만한 신뢰감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남들보다 늦었다는 중압감이 없었겠는가. 한 해 한 해 수험 생활이 더해갈수록 심신이 피폐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는 반대로 자신과의 싸움 속에서 소중한 것들을 깊이 응시했다. “20대 때는 망연한 좌절감에 빠져 자신감을 갖지 못했던 것 같아요.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 제 자신과 삶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러면서 ‘더욱 열심히 노력하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자’고 다짐하게 됐습니다. 사실 마흔다섯 살이면 사회에서는 은퇴를 준비할 시기죠. 그렇다고 제가 마냥 좌절하고 있으면 하늘도 기회를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생각을 바꾸니 자신감으로 무장할 수 있었다. 그는 특히 어려운 역경을 헤치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고전문학 속 불굴의 주인공들을 보며 힘을 얻고 긍정적인 가치관을 배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고전과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실패에서 얻은 값진 깨달음 ▲ 박 동문은 '저는 여전히 진행형 인간입니다. 실패와 성공의 경계에서 다행히 한 번의 기회를 얻었을 뿐이죠.' 라고 말한다. 박종현 씨의 합격을 이야기하면서 아내와 가족들의 지지를 빼놓을 수 없다. 언제나 응원을 아끼지 않았던 이들이다. 하루는 가장으로서 미안한 마음에 아내 몰래 사법시험 교재 편찬 일을 해 생활비를 내놓은 적이 있다. 하지만 아내는 너무나도 매몰차게 돈 봉투를 거절했다. 그리고 공부에만 매진할 것을 당부했다. “그때 정신이 바짝 나더라고요. 가족들과 아내가 끝까지 믿어줬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누구나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어느 시집의 제목처럼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말을 아쉬움에 되뇌게 된다. 그래서 후배들에게는 자신의 가능성을 미리 재단하지 말고, 명확한 목표를 세워 정진할 것을 조언한다. “대학 때는 스스로 저의 한계를 제한했던 것 같아요. 그때 마음을 잡고 공부했어야 했는데, 돌아보면 후회도 됩니다. 학교에서 지원도 많이 해주는데 말이죠. 하지만 깨닫는 때가 따로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이라도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나이, 학벌 등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사람들이 많은데 열심히 노력하면 기회는 분명히 있습니다. 빨리 깨달을수록 기회도 빨리 얻을 수 있겠죠. 또 근시안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거시적인 시각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찾아보세요.” 자신처럼 그 깨달음이 늦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후배들에게 챙겨주는 말들이 많다. 하지만 꿈을 향한 도전을 언제까지 계속해야 할지, 그 과정을 걷는 이들에게는 어두운 터널 속을 헤매는 것처럼 막막하기만 할 때가 있다. “그동안 사법시험을 준비하며 꿈을 접고 포기하는 이들을 많이 봤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 접었으니 더 힘들 거라 생각합니다. 후회도 많을 테고요. 산 정상에 올라가서 보면 힘든 길이 오히려 지름길일 수도 있어요.” 실패를 많이 경험한 인생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이제 무대에 오를 시간 오는 3월이면 사법연수원에 들어가 진정한 법조인이 되기 위해 2년간 수련의 과정을 걸어야 한다. 그에 앞서 연수원 동기들과 스터디에 여념이 없는 중이지만, 틈틈이 그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친구들, 친지들과 만나 10여 년 만의 회포를 풀고 있다. 또 여행이나 악기 배우기 등 합격 이후로 미루고 하지 못했던 버킷 리스트들을 하나하나 실천 중이다. 유럽 여행을 앞두고 새벽마다 영어 회화 학원도 다니고 있다. 사법연수원에서의 생활도 기대가 크다. 최고령자가 자치회장을 맡는 관례에 따라 본의 아니게 자치회장 내정자가 된 그는 대학 시절 고등학교 동문회장을 지낸 경험을 떠올리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자치회장은 그렇다 치고 최대 스무 살 이상 차이가 나는 동기들과 생활해야 하는 것이 부담되지는 않을까. “고시촌에서도 저보다 한참 어린 수험생들과 잘 지냈습니다. 불편해하지 않도록 먼저 다가가야죠. 잘 어울릴 자신 있습니다. 그리고 귀하게 얻은 기회이니 더욱 치열하게 살 계획입니다.” 비로소 법조인의 관문을 통과했으니 앞으로 전문성을 쌓아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하는 박종현 씨. 비록 출발은 늦었지만 그렇기에 앞으로의 시간들이 더욱 소중하게 쓰일 것이다. 오랫동안 고치 속에서 때를 기다리던 꿈이 드디어 날개를 펼칠 시간이다. 사랑 한대 2018년 01-02월호 이북 보기

2018-03 08

[동문]누가 뭐래도 가야금 할래요 (1)

“아리아리”는 성대하게 막을 내렸던 2018 평창동계올림픽, 패럴림픽의 공식 인사법이다. ‘없는 길을 찾아가거나 길이 없을 때 길을 낸다’는 뜻으로, 파이팅 대신 순우리말로 쓰였다. 이를 알리기 위한 홍보대사 아리아리걸스는 지난 12월 앨범 <아리아리>를 발매했다. 총 6곡 중 4곡에 아름다운 가야금 선율이 담겼고, 이는 조영재 동문(음악 교육학 석사)의 참여로 이뤄졌다. ‘가야금영재’라는 예명으로 국악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조 동문이 오랜만에 모교를 방문했다. 뭐든 잘하고 싶었던 영재 “피아노는 배우기 싫어요.” 초등학생 시절 조 동문이 어머니께 했던 말이다. 그 후 조 동문은 가야금을 배웠고, 싫증내지 않고 곧잘 했다. 그는 가야금을 켜며 한양대 진학에 대한 꿈을 키웠다. “처음부터 한양대에 오고 싶었어요. 중고등학생 시절 존경하는 선생님들이 한양대 출신이셨거든요.” 꿈은 이뤄졌다. 조 동문은 한양대 입학해 최연소로 가야금 독주회를 열고, 성적우수장학금을 받는 등 활약을 이어갔다. ▲'가야금영재' 조영재 동문을 지난 3일 미래자동차공학관에서 만났다. 하지만 조 동문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신문방송학과 복수전공의 길을 택한다. “고등학교 때 국악방송의 존재를 알았어요. 가야금으로서 돈을 벌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고, 막연히 국악방송연출을 꿈꿨습니다.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다면, 해보자고 생각했죠.” 복수전공을 통해 관련 지식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알게 됐다. 모두 큰 자산이었다. 5년 동안의 공부는 국악방송 시험 3차 통과로 결실을 보았지만, 조 동문은 부모님의 바람대로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다. 가야금과의 ‘필연’ 대학원 석사를 졸업하고, 조 동문은 중·고등학교 음악 교사가 됐다. “안정적인 생활을 했지만, 마음 한편에는 답답함이 자리 잡았다. “항상 가야금 1등을 목표했는데, 교사가 되니 하고 싶은 게 없어졌어요. 꿈이 없으니 재미도 없고, 아무것도 잡히지 않더라고요. 가야금 연주를 다시 하고 싶었어요. 결국, 교사 일을 그만두고 지난해부터 ‘가야금영재’라는 예명으로 앨범 활동을 시작했다. “스스로 영재라고 칭하면, 사람들이 궁금해서 물어보더라고요. 제 이름이 영재라는 점과 함께 자연스레 이름을 알릴 수 있었어요.” 조 동문은 가야금에 탱고, 재즈, 삼바 장르가 혼합된 ‘가야금영재의 필연’을 발매했다. 익숙한 음악에 어우러진 가야금 선율은 전통음악의 편견을 깼다. “탱고 선법, 라틴계 음계 모두를 고려해서 가야금 리듬을 융합했어요. 우리 민요에 재즈를 얹는 시도도 감행했죠.” 이후 총 6회의 독일 순회를 진행한 조 동문은 앨범에 대한 세계인들의 뜨거운 반응을 느낄 수 있었다. “재독 동포와 독일 현지인이 공연을 보며 감동하는 모습을 잊을 수 없어요. 외국에서 공연하면 기사에 제 얼굴이 실리기도 하는데, 동네 전체가 저를 알아봐 주더라고요.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조영재 동문은 지난해 12월 평창응원가에 특별히 참여했다. “여자연예인야구단 소속이라, 일주일에 한 번씩 야구연습을 해요. 야구단이 홍보대사가 되면서 앨범을 낼 기회를 얻었죠.” 2018 평창동계올림픽〮패럴림픽 홍보대사로 위촉되면서, 조 동문은 강원도 아리랑, 본조아리랑의 선율을 넣은 곡 ‘Everybody Passion Crew’ 등을 전속작곡가와 함께 만들었다. “올림픽 기간 내내 20번이 넘는 연주를 했어요. 신나는 응원가와 가야금 선율이 정말 잘 어울리더라고요..” 꿈이 있어 행복합니다 흔히 국악이라면, 지루한 음악이라는 선입견이 존재한다. 하지만 조 동문은 이에 “딱 한 번만이라도 내 음악을 들어본다면 깜짝 놀랄 것”이라고 했다. “제 음악은 재즈, 라틴 등 다양한 장르가 어우러져 지루하지 않죠.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국악을 많이 듣지 않아요. 선진국이 자국 문화의 가치를 제고하는 데 힘쓰는 것처럼, 우리나라도 전통음악의 가치를 높게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내내 조영재 동문의 재치있는 농담으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가야금은 물론, 후배들에게 애정이 남달랐던 그는 인상깊은 조언을 건넸다. 안정적인 직업을 그만둔 후 전보다 통장에 여유가 없어졌지만, 조 동문은 꿈이 있어 행복하다. 가야금의 대중화를 위해서 방송인 데뷔를 앞둔 그는 “설레서 잠이 안 올 때도 있다”고 했다. “EDM, 재즈 등 여러 가지 가야금 음악을 구상 중이에요. 가야금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나의 상표 가치를 올리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에, 방송 활동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의 도움을 미안하게 여기는 대학생들을 향해 조 동문은 “여러 가지 하고 싶은 건 대학교 때 마음껏 하라”고 말했다. “성인이 됐지만, 충분히 어린 나이에요. 대학교 4년 동안 조금만 더 투자를 받고, 다양한 활동을 통해 본인이 원하는 것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중에 부모님께 몇 배가 넘는 보답을 할 수 있어요. 삶의 목표는 취업이 아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재미있게 하며 사는 것 아닐까요.” 조 동문에 관한 더 많은 소식은 다음 SNS계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페이스북 바로가기] 글/ 정민주 기자 audentia1003@hanyang.ac.kr 사진/ 이진명 기자 rha925@ha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