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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 20

[동문]경찰의 위상과 품격을 높입니다 (1)

각종 영화나 드라마 소재에 빠지지 않는 직업군으로 ‘경찰’을 빼놓을 수 없다. 비교적 최근 개봉한 영화 ‘청년경찰’이 그렇고, 지난해 수사물 드라마로 흥행한 tvN의 ‘시그널’이 그랬다. 일상을 둘러봐도 심심찮게 우리 주변에서 경찰을 접할 수 있다. 보통 경찰하면 각종 범죄와 치안∙수사 업무를 떠올리기 쉽지만, 경찰 조직 내에서 우리 주변의 소외된 이웃과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아름다운 선율을 전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그리고 그 중심엔 서울지방경찰청 홍보담당관실 경찰악대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는 박남용 동문(관현악과 96)이 있다. ‘외강내유(外剛內柔): 경찰과 악기의 닮은 꼴’ 한 때 체대생을 꿈꾸며 열심히 운동을 하던 박남용 동문은 평소에 음악도 좋아해 고교 시절 처음으로 트럼펫을 배웠다. 하다 보니 적성에도 잘 맞았고 교내 ‘윈드오케스트라’(현악기를 뺀 관악기와 타악기만으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며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트럼펫은 겉으로 보기엔 강렬해 보여요. 하지만 그 안엔 부드러움과 따뜻한 선율이 녹아 있죠. 그런 점이 제게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박남용 동문(관현악과 96)을 지난 17일 성수동에 위치한 동부경찰관 기동대 신관에서 만났다. 마침 박 동문은 '세계 아동학대 예방의 날(매년 11월 19일)' 기념 공연을 끝마치고 돌아왔다. 그 후 한양대 관현악과에 입학한 박 동문에게 의경 입대는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계기가 됐다. 구(舊) 부평 경찰종합학교에서 악대로 군 생활을 하며, 서울에는 직원으로 구성된 ‘경찰악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그 시점을 계기로 박 동문은 졸업 후 2004년 경찰의 길을 걷게 됐다. “주변에선 경찰을 한다고 하니 다들 말리는 분위기였어요. 당시는 경찰에 대해 안 좋은 이미지도 있었고 졸업 후 오케스트라에 입단하는 게 일반적이었니까요.” 이렇게 주변의 만류를 무릅쓰고 현재는 경찰관 19명과 의무경찰 35명으로 구성된 54인조 경찰악대에 속한 박 동문. 홍보담당관실 소속답게 주 업무는 여러 공식 행사에 참가해 경찰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것이지만, 사회 곳곳의 음악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힐링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한다. “‘경찰악대’라고 말하면 아직도 ‘군악대’로 착각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만큼 아직 홍보가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멋있다’고 칭찬해주시는 분들도 많고, 호응이 좋을 걸 예상해 앙코르곡은 항상 준비해 간답니다(웃음)” 맞춤형 서비스를 선보이는 금관 앙상블 현재 박 동문은 경찰악대 내 ‘금관 앙상블’의 리더를 맡고 있다. 일반적으로 공연은 '브라스 퀸텟(Brass quintet: 금관 5중주)'을 이뤄 나갈 때가 많지만 행사 규모가 크거나, 공연장 사전 답사 후 추가 인원이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도 있기에 '퀸텟'보다는 '앙상블'이라고 소개하는 편이다. "다 같이 10년 넘게 일하다 보니 손발이 잘 맞는 편이에요. 매년 레퍼토리도 바꾸고 계절에 따라, 연령층에 따라 편곡을 하다 보니 저희만의 특색 있는 곡도 많죠." ▲(정중앙) 박남용 동문(관현악과 96) 이 구로아트밸리에서 서울경찰악대 오케스트라와 '하이든협주곡'을 협연중인 모습이다 (출처: 박남용 동문) 예를 들어 ‘캐러비안의 해적’ OST의 경우 신나는 느낌을 주기 위해 ‘세트 드럼’을 한 명 추가하기도 하고, 낙엽 떨어지는 청량한 가을에는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연주하기도 한다. 특히 나이가 지긋한 분들이 많은 ‘노인복지 회관’에 가면 인기 트로트인 ‘어머나’, ‘네 박자’, ‘내 나이가 어때서’ 등을 편곡해 장내 분위기를 한층 띄우기도 한다고. “초임 때는 잘 몰랐는데 연륜이 쌓이고 리더가 되면서 선곡 순서에도 신경을 쓰게 돼요. 처음에는 분위기 있는 클래식으로 깔다가 중간쯤 분위기를 업 시키고 마무리는 다시 잔잔한 노래로 정리하죠.” ▲지난 7월11일 서울 성심여중에서 서울경찰악대가 진행한 학교폭력예방 음악회. (출처: Youtube) 음악으로 더 가깝고 친근하게 이처럼 박 동문은 ‘경찰악대’를 통해 많은 국민이 경찰에 대해 더 좋은 이미지와 인식을 형성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아직까지는 ‘경찰’과 ‘음악’이라는 조합이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렇기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죠.” 실제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현재 박 동문은 매주 토요일마다 ‘어린이 경찰 악대’를 운영하며 ‘트럼펫 재능 나눔 활동’을 펼치고 있다. 또 이전의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길거리 공연 같은 경우, 외국인들을 위해 팝송을 편곡하거나 어린이들을 위해 ‘도레미송’ 같은 동요를 준비해 가기도 했다고. “힘들긴 하지만 그만큼 보람을 느낄 수 있고 앞으로도 시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경찰이 되고 싶습니다.” ▲이 같은 박 동문의 꾸준한 노력이라면 ‘걸음새 뜬 소가 천 리를 간다’는 말처럼 더 많은 대중에게 오래도록 사랑받지 않을지 기대해 본다. 글/ 오상훈 기자 ilgok3@hanyang.ac.kr 사진/ 강초현 기자 guschrkd@hanyang.ac.kr

2017-11 19

[동문]마지막 사법시험 합격자 박종현 동문(법학과 92) (2)

사법시험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1950년 고등고시 사법과를 시작으로 70년간 대한민국의 법조인을 배출했던 사시제도는 59회 사법시험을 끝으로 폐지됐다. 배경에 관계없이 오직 시험 결과만으로 선발하는 희망의 사다리였고, 또 수많은 고시낭인을 양산해 고급 인력을 낭비하고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키는 제도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마지막 기회였던 이번 사법시험에서 한양인 7명이 당당히 합격을 거머쥐었다. 그중 최고령 합격자 박종현 동문(법학과 92)을 만났다. 15년의 공부, 포기는 없었다 박종현 동문이 지난 11월 7일 법무부가 발표한 제59회 사법시험 3차 합격자 명단 55명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이로써 박 동문은 마지막 사법시험의 최고령 합격자가 됐다. 합격하기까지 무려 15년이 걸렸다. 그야말로 인고의 세월이었다. 20대 끝자락에 뛰어들어, 30대 전부를 보내고, 4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법조인의 꿈을 이뤘다. 우직하게 사법시험 하나만을 목표로 달려온 시간이었다. “우선 꿈을 이뤄서 기쁘죠. 끝내 좋은 결과를 얻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최고령 합격자라니 조금 부끄럽기도 해요. 많은 분들이 축하해 주어 감사하고요. 요즘 여러 감정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지난 11월 17일 진행된 인터뷰에서 박종현 동문(법학과 92)이 "부끄럽고 감사하다"는 소감을 전했다. 대학 시절에는 뚜렷한 꿈이 없어 사법시험에 큰 뜻이 없었다. 대학 졸업 후 군대를 다녀온 20대 후반에서야 ‘전문성’을 갖춘 사회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법학과를 나왔으니 법조계 전문가가 되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렇게 박 동문은 결혼과 함께 2002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사법시험에 뛰어 들었다. 매일 아침 여섯 시 반에 집에서 나와 신림동 고시촌에서 공부했다. 식사 시간과 운동 시간을 제외하고는 공부에 몰두했다. 적어도 30분은 매일 운동했다. 사회와 단절되어 학원과 독서실만 오가는 생활이기에 운동을 하며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분명 초조할 때도 있었지만 박 동문은 스스로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다. “이러다 영원히 사회에 못 나가는 건 아닐까 불안할 때도 있었죠. 하지만 이렇게 노력하면 하늘도 언젠가 제 뜻을 이뤄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타고난 긍정적인 마인드 덕에 긴 시간 잘 이겨냈죠.” 또 박 동문이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의 든든한 응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5년간 한결같이 박 동문을 응원해 준 아내의 공이 컸다. “한 번도 제 공부에 대해 불만이나 비난을 한 적이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공부에 소홀하면 제 할 일은 공부라며 저를 이끌어 줬습니다. 가족 덕분에 저도 목표를 이룰 수 있었네요.” 길었던 20대의 방황, 끝내 꿈을 찾다 박 동문은 딱히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은 아니었다고 스스로의 대학시절을 회상했다. “남들하고 크게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것 같아요. 미팅도 하고 학회도 하는 딱 평범한 학생. 그런데 공부보다는 노는 걸 좋아했어요. 그 때부터 마음을 잡고 법을 공부했어야 했는데 말이죠.” 박 동문은 ”종종 장학금도 받았고 주어진 일은 열정적으로 해냈다”며 “단지 스스로 원하는 일이 뭔지 몰라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뚜렷한 목표나 꿈을 찾지 못한 채 대학 생활 4년을 보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박 동문의 시작이 남들보다 조금 늦어진 까닭이다. 하지만 한 번 전문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 뒤에는 흔들리지 않았다. ▲박종현 동문은 "특유의 유쾌한 성격 덕에 힘든 순간도 잘 이겨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사법시험의 경우 1차 시험에 합격한 이들은 다음 해 1차 시험을 면제 받는다. 2차 시험을 여섯 번 보고나니 12년이 훌쩍 흘렀다. “돌아보니 15년이네요. 처음부터 이렇게 길어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죠.” 1차에 합격하면 2년의 기회가 주어지니 포기가 쉽지 않았다. 2차 시험에서 고배를 마신 날이면 이루 말할 수 없는 허탈감과 좌절감에 휩싸였다. 하지만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특유의 유쾌함과 확고한 소신이 그를 일으켰다. 박 동문은 오히려 함께 스터디하는 어린 친구들을 독려했다. 탈락의 아쉬움을 훌훌 털어내고 다시 펜을 들었다. "힘든 순간을 잘 이겨내는 성격 덕분에 결국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교두보가 될 것 박 동문은 꿈에 그리던 사법연수원 입소만을 앞두고 있다. 다음 해 3월 연수원 입소 전까지 박 동문은 그동안 못했던 일들을 하며 시간을 보낼 계획이다. "생각해보니, 배낭 여행 한 번을 못 갔어요. 공부하면서 그게 큰 한이 되더라고요. 유럽 여행을 떠나 그 곳에서 아내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끝으로 그는 예비 법조인으로서 마음가짐을 전했다. "연수원에 입소하면 또 열심히 공부해야죠. 한양의 구성원으로 사랑의 실천을 행하는 법조인이 되고 싶어요. 지금 이 마음 잊지 않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작게나마 기여하기 위해 매순간 노력하며 살겠습니다." ▲박종현 동문은 "사랑의 실천을 행하는 법조인이 될 것"이라고 말하며 "사회의 교두보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글/ 김예랑 기자 ys2847@hanyang.ac.kr 사진/ 이진명 기자 rha925@hanyang.ac.kr

2017-11 14

[동문]절제해야 드러나는 글의 '민낯'

말로 언어를 구사하고,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은 어쩌면 인간에게 주어진 값진 선물이다. 누군가가 남긴 말과 글이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강력한 힘을 가지기도 한다. ‘브런치 북 프로젝트’에서 금상을 수상해 에세이 <나를 지키는 말 88>을 출간하고, 현재 인터넷 일간매체 ‘오마이뉴스’에서 음악 관련 기사를 쓰는 손화신 동문(국어국문학과 05)은 그런 글을 적어내고 싶은 사람이다. 글에 의해, 글을 위해 꿈을 키워나가고 있는 손 동문을 종이 내음과 커피 향이 은은히 퍼지는 어느 북카페에서 만났다. 불확실함이 가능으로 “작품은 불멸하는 존재잖아요. 항상 그게 멋있다고 느꼈어요. 제가 죽어도 오래 살아 있는 작품을 남기고 싶어요.” 어려서부터 글쓰기에 대한 로망을 가슴에 품고 있었던 그는 글쓰기가 마냥 좋아 한양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다. 졸업 후 기상캐스터와 기자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탓에 작가의 꿈은 40대쯤에나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 여행기를 출간한 지인의 소식이 전환점이 됐다. “저는 책을 내는 것이 굉장히 대단하고,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20대였던 지인이 책을 내는 것을 보니까, 할 수 있을 것 같았죠.” ▲손화신 동문(국어국문학과 05)은 ”나만의 문체를 갖고 싶다는 욕심이 기자 생활을 시작하고 생겼다"며 "글을 더 잘 쓰고, 계속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용기를 얻었지만, 가슴 한 편에는 작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남아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브랜드 ‘디올’의 전시회 취재 때 한 문구를 봤다. ‘그(크리스찬 디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이 문구를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제가 방황을 하는 이유는, 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라는걸 깨달았죠. 그 순간 저는 ‘아, 내가 원하는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기회도 결심과 함께 운명처럼 찾아왔다. 본격적으로 자신의 색깔이 드러나는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한 손 동문은 다음날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제공하는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brunch)의 ‘브런치 북 프로젝트’ 공고를 보게 됐다. 대상 수상자는 무려 ‘브런치’에서 책을 직접 출간해주는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보자마자 생각했어요. ‘이 대상은 내 거다.’ 두 달간 아침부터 밤까지 카페에 가서 글을 썼어요. 평소에 관심이 있던 주제인 ‘말과 스피치’에 대해 열정적으로 글을 썼죠.” 평소 손에서 펜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기록하던 습관 덕인지, 손 동문은 노고 끝에 금상을 수상했다. 대상을 놓치며 출간의 혜택을 받진 못 했지만, 손 동문은 오히려 도움 없이 책을 출간한 과정이 자신에게 유익했다고 말했다. “제가 스스로 출간을 하려고 출간계획서도 써보고 출판사와 회의도 진행했어요. 정말 A부터 Z까지 제가 다 했으니까, 보람 찼습니다.” 그렇게 바라던 그의 저서 <나를 지키는 말 88>은 마침내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손화신 동문의 첫 저서 <나를 지키는 말 88>은 ‘나 답지 못한 것으로부터 나를 지킨다’는 주제를 담고 있는 에세이다. (출처: YES 24) 간결하고 진솔하게 “최대한 감추고 버리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 참 멋있다고 생각해요.”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밝힌 손 동문의 글 스타일 또한 ‘소심’하다. 하지만 그만큼 깊고, 간결하다. “뭉크 같은 화가들은 정밀화처럼 세세하게 그리지 않잖아요. 그들은 대상을 왜곡하고, 추상화하면서 내재된 본질을 드러내요. 글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쓰려고 해요. 처음 글을 쓸 때는 화려한 문체를 사용했는데, 지금은 줄일 수 있을 때까지 줄이려고 노력하죠.” 이 때문에 손 동문은 글쓰기에서 퇴고의 과정을 가장 중요시하게 여긴다. 퇴고를 하며 불필요한 말과 단어를 빼고, 문체를 날렵하게 만드는 것이 그녀가 지향하는 ‘좋은 글’이다. 기자가 본업인 손 동문은 다소 딱딱해질 수 있는 기사에도 문학적, 시각적 표현을 가미한다. 간결함 다음으로 글에서 중요한 것은 설명이 아닌 ‘보여주는 것’이라는 게 손 동문의 설명. “시각적 표현들이 글을 살아나게 만들어요. 스무 살 때 ‘씨네21’이라는 매체의 인터뷰 기사 중 ‘방심한 순간에도 앙 다문 입술’이라는 표현을 읽으며 감명 받았어요. 인터뷰이의 성격이 소설적으로 표현 됐지만, 본질을 꿰뚫는 묘사가 멋있었어요.” 그는 독자가 읽었을 때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는 기사를 연재하려고 노력한다. “글을 탁월하게 잘 쓰고 싶어요. 그렇다 보니 기사는 보통 기사대로, 내 글은 일반적인 글대로 쓰지 않으려 해요.” 손 동문의 노력은 그가 적어내는 기사에서 잘 드러난다. 다음은 싱그러운 풍경이 그려지는, 가수 루시드폴 인터뷰 기사 중 일부다. 햇빛과 폭풍우와 농부의 사랑이 만든 감귤처럼 루시드폴이 만든 음악은 귀한 힘을 품고 있다. 그의 노래는 사람의 마음을 맑히고 조용한 가운데 다시 나아갈 힘을 준다. 너무 조곤한 목소리로 너무 차분한 노래들을 부르는데도 충만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건 신기한 일이다. Lucid Fall인 그가 이번 해 가을에 감귤과 함께 정규 8집을 수확했다. 앨범명은 <모든 삶은, 작고 크다>로, 직접 쓰고 찍은 글과 사진을 담은 에세이집과 묶여 온오프라인 서점에서만 판매된다. CD에는 그가 작사-작곡-편곡은 물론 혼자서 녹음 및 믹싱한 9곡이 실렸다. 타이틀곡은 ‘안녕,’이다. 거울과 같은 글들 글 쓰는 것이 서투른 사람들은 어떻게 쉽게 글을 쓸 수 있을까. 손 동문은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쓰는 것을 제안했다. 표면적으로는 그 대상에 대해 쓴 글 같지만, 글쓴이의 자아가 담길 수 밖에 없기 때문.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잡문집>에서 정답에 가장 가까운 내용이 나와요. ‘자소서를 어떻게 쓰는 것이 좋을까요’라는 독자의 질문에 하루키는 ‘굴튀김에 대해서 써보는 것은 어떠냐’고 답했죠. 굴 튀김의 재료와 만들어지는 과정을 서술해도, 결국은 자신을 비추는 글이 완성돼요. 자신에 대해 쓰는 글은 어렵게 느껴지기 마련이니 대상이나 주제를 정해 쓰는 것이 쉬워요.” 자신의 정체성이 묻어나는 글을 쓸 때와 독자들이 그 글들을 읽었을 때, 손 동문의 순간은 빛난다. “글쓰기라는 활동의 가장 큰 장점은 그걸 통해 ‘나 자신’을 더 잘 알게 된다는 것이에요. 내가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 알면 나중에 선택할 때도 더 적합하고, 좋은 선택을 하게끔 도와주죠. 글쓰기는 결국 탐구활동이에요.” 절제하기에 더욱 와닿는, 손 동문의 글은 (https://brunch.co.kr/@ihearyou)에서 읽어볼 수 있다. ▲“저는 에세이 같지만, 그래도 ‘작품’으로 불리는 글을 앞으로도 쓰고 싶어요.” 손화신 동문은 일상의 소소한 얘기도 나만의 개성을 갖고 쓰면 하나의 소설이나 시 처럼,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글/ 유혜정 기자 haejy95@hanyang.ac.kr 사진/ 최민주 기자 lovelymin12@hanyang.ac.kr

2017-11 06

[동문]쉽지 않았지만, 걷고자 했던 길을 갔다

불확실한 세상.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인 이들이 많다. 때로는 자신이 가고 있는 이 길이 맞는지, 혹은 지금 와서 다른 길은 너무 늦은 건 아닐지. 어찌됐건 뒤로는 갈 수 없기에, 고민이 드는 건 당연하다. 특히 한 분야를 깊게 팠던 이일수록, 다른 분야를 파보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어렵다. 그러다 보니 김지희 동문(국악과 92)이 지금까지 걸어온 발걸음은, 조금 아니 많이 특이하게 느껴진다. 판소리 전공자임에도 뮤지컬, 민요 등 여러 장르의 노래를 소화해낸다. 십여 년 전 귀농 이후엔 민요도 새로 접한 김 동문을 간만의 서울 공연 전날인 10월 31일 우리대학 미래자동차공학관에서 만났다. ▲김지희 동문(국악과 92)이 공연 준비를 위해 상경한 지난 10월 1일 우리대학 미래자동차공학관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귀농 후 오래간만의 학교 방문에 김 동문은 무척 즐거워했다. 스토리텔링이 좋았던 소리꾼 김 동문은 오랜만에 찾은 모교를 무척 반가워했다. “학교가 많이 바뀌었네요. 특히 여기저기에 새로운 건물이 많이 생겼고.” 이십 년이 넘었지만 진사로부터 공과대학 건물들을 지나 음악대학까지 오르던 길은 잊혀지지 않는다고. 당시 김 동문은 판소리를 전공했다. 중학교 이전까지는 합창단이나 중창단에 속해 있다가, 국악고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솔직하게는, 서양음악을 해보고 싶었어요. 성악이나 오페라! 그랬는데 유학을 가야 한다는 점도 걸렸고, 어쩌다 보니 국악을 접하게 됐죠. 어렸을 때라 튀고 싶은 마음도 어렴풋이 있었던 듯해요.” 얼핏 오페라와 판소리는 거리감이 느껴지지만, 김 동문은 스토리텔링이라는 공통점에 마음이 갔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판소리를 시작해서 여기 한양대에서도 판소리 공부를 이어가게 됐죠.” 시작부터 여러 분야에 거부감이 없어서 였을까. 김 동문은 졸업 이후 창작 뮤지컬 등에도 배우로 참여하는 등 판소리 외에 다양한 장르의 모습을 내비쳤다. “판소리를 택할 때도 연극적인 요소에 무척 끌렸어요. 1인 다역으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고. 그래서인지 판소리를 하다가 ‘연극’을 또 좋아하게 됐어요. 이걸 하다 보니 마침 뮤지컬 붐이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었고, 고민을 하다가 ‘색다른 도전을 하자’는 생각에 뮤지컬 아카데미도 다녔죠.” 그렇게 뮤지컬에도 발을 뻗친 김 동문은 판소리, 창극, 여성극, 뮤지컬 등 여러 분야를 오가며 공연 활동을 이어갔다. 귀농도 또 하나의 도전 그리고 발판 그러던 중 택한 귀농은 너무나도 우연한 만남에서부터 시작됐다. 그 당시 지방으로도 오가며 공연하던 김 동문은 강원도 횡성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횡성에 혼자 농사를 짓겠다고 내려와 있었어요. 처음에는 시골 총각이라 그랬는데, 알고 보니까 대학 졸업하고 회사 다니다 다 때려치고 귀농한 거였죠. ‘어 이런 인생은 뭐지?’하는 마음에 친구가 될까 하다가 결혼을 하게 됐고, 같이 귀농했죠.” 선택은 정말 어느 순간, 이뤄졌다. “시골에 내려가 산다는 게 두렵기도 했죠. 그런데 뭐, 대뜸 가는 거죠. 톨게이트 통과했으니.” 김 동문의 귀농은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에게 선보인 첫 공연은 뜻밖의 난관에 봉착했다. “가서 사람들에게 신고식 겸 ‘제가 이거 하는 사람입니다’를 보여주려고 한 소절 뽑았죠. 그랬는데 다들 제 걱정을 해주는 거예요. 목 아프지 않냐, 젊은 처자가 애쓴다, 알고 보니 강원도 사람들은 판소리를 잘 모르고 있던 거죠.” 김 동문은 이에 일단 사람들과 친해지고자 했다. 함께 농사도 짓고, 같이 수다도 떨고, 보다 친숙한 민요도 부르고. 그러던 와중에 강원도 사람들의 ‘소리’도 접하게 됐다. 음악인으로서 놓칠 수 없던 김 동문은 녹음도 하고, 영상도 찍고 쫓아다니며 그들의 소리를 담았다. 이 또한 김 동문의 길, 소리 배움의 길이 됐다. 틈틈이 모은 노래들을 바탕으로 지난주 공연도 열었고, 이에 맞춰 강원지역의 노동요 등을 편곡 및 수록한 앨범 ‘길을 걷다’도 냈다. 돌이켜 보면, 귀농은 또 한 번 새로운 장르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된 셈이다. ▲ 김지희 동문은 그동안 모으고 모은 음악을 바탕으로 지난 1일 마포아트센터에서 '길을 걷다'란 주제로 '소리콘서트'를 열었다. 이번 공연은 국악 전공자로선 독특하게 '밴드 음악'으로 연출했다. (출처: 김지희 동문) “나의 소리 배움의 길” 김 동문은 최근에는 마을 장터나 일본의 바(bar) 등, 작지만 무척 다양한 곳에서 공연을 해오고 있다. 이번 ‘소리콘서트’는 최근엔 정말 오래간만인 대형 공연. 김 동문은 이렇게 다양한 곳에서 공연을 하면 그 매력서 헤어나올 수 없다고. “시골 장터에서 공연 후 흥겹게 즐기시던 할머니께 쌀도 받고 그럴 땐 대형 공연에서 느낄 수 없는 기쁨이 있죠.” 장소뿐 아니라 여러 장르를 오가는 점도 김 동문의 개성이다. 이번에 낸 앨범 ‘길을 걷다’의 수록곡이나, 이번 공연에서 선보인 곡들은 판소리 뿐 아니라 민요들을 소위 ‘밴드 음악’으로 편곡했다. “제 스스로도 곡을 써요. 여태껏 접했던 민요도 모아서 주변에 ‘밴드 음악’하는 이들과도 협업해서 지금의 결과물들을 만들었죠. 어떤 건 팝(Pop)스럽게, 어떤 건 (Rock)스럽게도.” 이번 공연이 끝나면 김 동문은 다시 횡성으로 가 농사와, 이후 공연도 준비하며 자신만의 음악도 가꿔갈 것이다. “가끔은 농담삼아 손해라고 말해요. 너무 이것저것 다 건드리기만 하고, 특화된 장르는 없다고. 이렇게 걸어온 길의 선택 선택마다도 쉽지 않았죠. 그래도 이게 저만의 길 아니겠어요?” ▲ 누가 뭐래도 김지희 동문은 그다운 음악을 이어갈 것이다. (출처: 김지희 동문) 글/ 이상호 기자 ta4tsg@hanyang.ac.kr 사진/ 김윤수 기자 rladbstn625@hanyang.ac.kr

2017-11 02 중요기사

[동문]평범하지만, 중요한 것들을 보여드릴게요

상품을 구입하며 모두가 생각하는 것은 똑같다. “이거 괜찮을까?” 블로그 리뷰는 뭔가 돈 받고 쓴 티가 나고, 광고를 그대로 믿자니 그것도 곤란하다. 이럴 때 상품정보 밑에 달린, 실제로 구매한 사람들이 달아 둔 후기는 마음의 안식이 된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검증된 정보를 소비자에게 제공하기 위해 화장품 관련 모바일 앱 ‘글로우픽’을 만들었고, 이제는 오프라인 유통 진출에 성공한 공준식(신문방송학과 03) 동문을 뉴스H가 만나봤다. 소비자에게 ‘등대’ 되고 싶어 글로우픽은 2014년 9월에 출시한 화장품 관련 모바일 앱이다. 유명세나 브랜드가 아닌, 소비자의 리뷰에 기반해 화장품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이 해당 앱의 가장 큰 장점이다.“지난 4-5년간 화장품 시장은 양적으로 크게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늘어난 광고와 마케팅 때문에 선택에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시장이 혼란스러울 때 소비자의 선택은 더욱 어려워진다는 공 대표는 평범하지만, 검증된 데이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브랜드나 TV에서 추천하는 게 아닌, ‘직접 써본’ 소비자들이 추천하는 제품이 중요합니다.” ▲공준식 대표는 혼란스러운 시장 속 소비자들의 선택을 돕기 위해 ‘글로우픽’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소비자들이 직접 써보고 평가한 데이터가 중요하다고 판단한 공준식 대표는 지난 3년간 소비자의 리뷰 데이터를 모으는 데 집중했다. “200만건 이상의 데이터를 모으는 데 집중했습니다.” 공 대표는 ‘평범한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앱 환경을 조성하여, 이용하는 사람들이 쉽게 리뷰를 남길 수 있게끔 유도했다. “소비자의 의견이 중요하다면, 우선 의견을 내기 쉽게 해야 합니다. 마치 기사를 쓰는 건 어렵지만, 기사 밑에 댓글을 다는 것은 어렵지 않은 것처럼 말이죠.” 쉽게 리뷰를 쓸 수 있는 환경과, 소비자들이 남긴 리뷰를 수집하는 것에 집중한 결과, 공준식 대표의 ‘글로우픽’은 경쟁업체들 중 가장 빠르게, 방대한 화장품 리뷰 데이터를 확보한 플랫폼이 되었다. 2-30만 명이 글로우픽을 매월 사용하고 있습니다.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브랜드나 유통채널 측에서 글로우픽을 인지하고 함께 사업을 진행할 만한 영향력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철학이 담긴 서비스를 위해 이러한 ‘글로우픽’의 선전에는 어떠한 노력이 숨어 있었을까? 공준식 대표는 계속해서 소비자들의 평가가 중요하단 사실을 시장에 알리는 데 노력을 쏟았다고 한다. “글로우픽은 소비자의 의견을 제일 우선으로 생각하고 리뷰에 임합니다. 브랜드나 성분이 어떻든, 많은 사람이 써보고 좋다고 느끼면 그게 곧 좋은 화장품인거죠.” 소비자의 의견을 중요히 여기고, 이를 시장에 꾸준히 알린 결과, 현재는 ‘글로우픽’과 함께 유통하고 싶어하는 브랜드가 늘었다고 한다. “이제는 새로운 제품이 나올 때 마다 글로우픽 리뷰를 얻고 싶어하는 브랜드도 생겼습니다. 공신력이 생긴 셈이죠.” ▲성공 뒤에는 노력이 함께한다. 공준식 대표는 ‘글로우픽’이 추구하는 소비자 평가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시장에 알리고자 했다. 수많은 화장품 관련 앱 중 하나에서 업계의 공신력 있는 기준으로 떠오르기까지 ‘글로우픽’이 여러 길을 걸어왔듯이, 공 대표 역시 여러가지 길들을 걸어왔다. “취업을 빨리 했습니다. 제대 후 3학년 1학기를 끝내고 바로 취업해 사회생활을 경험했습니다.” 신문사에서 웹 서비스를 기획하는 일을 맡았다는 공 대표는 기획자로서 세상을 바꿔보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회사의 규율과 제약 탓에 그꿈을 이룰 수 없다 생각한 그는 과감히 퇴사를 결정한다. 퇴사 이후, 기획자로서 글로벌 서비스를 런칭하고, 운영하고, 실패하는 과정을 2번 정도 경험했지만 공 대표는 꾸준히 재도전했다. “스타트업을 계속 런칭하면서 내 생각이 반영되어 있는 서비스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 스타트업에서 함께한 동료 한 명과 창업한 결과가 글로우픽입니다.” 실패에도 개의치 않고 ‘경험’을 찾아 나선 시도가 도움이 되었다고 공 대표는 말한다. 최근 청년 창업을 장려하는 사회분위기에 따라‘경험’의 중요성을 공 대표는 더더욱 강조한다. “창업은 개개인에게는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좋은 일이 되려면, 실패를 장려하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합니다.” 특히나 우리나라에서는 재도전을 장려하는 환경이 아직 아니라던 공 대표는 창업을 꿈꾸는 젊은 이들에게 신중할 것을 주문했다. “창업에 대한 긍정적인 면만 보고 뛰어드는 건 위험합니다. 시작했더라도 그만두고 평범한 직장인으로 돌아기기도 쉽지 않고요.” 하지만 공 대표는 창업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창업의 성공과 실패 모두를 경험하는 것에는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저도 성공과 실패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회사에 위기가 닥쳤을 때 극복해내지 못했을 겁니다. 다양한 직무를 체험해보고, 경험 하에서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창업에 있어 가장 중요합니다. 시도한다, 경험을 위해 공준식 대표는 최근 신세계백화점과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백화점 내의 뷰티 편집샵 '시코르'에 ‘글로우픽 존’을 설치함으로써, 오프라인 유통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 공 대표는 이러한 성과를 축하하기에는 아직 조심스럽다고 한다. “대단해 보일 수는 있지만, 이러한 성과 또한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성공에 도취되지 않고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의 공 대표는, 현재 글로우픽의 상태를 ‘시험대에 올랐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글로우픽은 최근 신세계백화점과 파트너십을 체결해 오프라인 매장을 개설했다. (사진제공 : 글로우데이즈) “이번에 확장한 유통망은 아직 자체적인 유통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기존의 유통망에 의존적인 형태로 함께하는 상황이지요.” 이러한 조건의 판로는 구축할 때 드는 리스크가 적은 대신, 돌아오는 것 역시 제한적인 형태로 돌아온다고 설명한 공 대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축을 시도해 본 이유를 밝혔다. “스타트업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 중 하나는 건드려보지 않은 영역을 건드릴 때입니다. 하지만 이번 유통망 구축은 최소한의 비용을 지불하고 미지의 영역에 발을 디디는 귀중한 경험을 얻는 것입니다. 적은 리스크로, 경험의 지름길을 가는 것이죠.” 과거에는 단순히 있는 그대로의 정보만을 제공했다면, 현재는 소비자의 변화에 맞춘 맞춤형 분석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공 대표는 ‘글로우픽’의 강점으로 내세운 데이터의 활용에 앞으로 더욱 박차를 가하려고 한다. “글로우픽에는 소비자의 트렌드가 있습니다. 트렌드에 부합하는 정보를 많이 모은 이상, 이걸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점입니다.” 지난 3년 동안 ‘많은’ 데이터를 모았으니 이젠 이 데이터를 가공하고 활용하여 ‘빅데이터’로 거듭나게 만들고 싶다는 공 대표. 온라인과 오프라인, 양 쪽에서 앞으로 ‘글로우픽’이 소비자들에게 보여줄 ‘데이터’가 기대된다. 글 / 채근백 cormsqor12@hanyang.ac.kr 사진 / 김윤수

2017-11 01

[동문]공간에 숨결을 불어넣다

사람들은 누구나 공간 속에서 생활한다. 휴식을 위한 주거공간부터 회사의 업무공간, 여가를 위한 문화공간까지 그 범위도 다양하다. 공간의 내부는 밖에서 바라보는 건물의 외관과 또 다른 느낌을 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건물의 문을 열고 내부에 들어선 후에야 비로소 그 건물에 대해 온전히 이해한다. 이런 공간을 만들어 내는 이들이 바로 ‘인테리어 디자이너’다. 딱딱하고 차가운 공간도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손을 거치면 포근하고 아늑한 곳으로 변화한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수많은 공간들에는 사실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손길이 닿아있다. 사용자가 행복한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박은아 동문(산업디자인학과 00)을 만났다. 모교를 탈바꿈하다 최근 ERICA캠퍼스에는 단과대학별 PBL라운지가 새롭게 조성됐다. 협소하고 노후했던 기존의 모습에서 탈피해 오직 학생들만을 위한 공간으로 변모했다. 10개의 각 단과대학별 라운지가 전혀 다른 컨셉으로 꾸며져 라운지를 찾는 학생들에게 쏠쏠한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마치 카페처럼 휴식과 학업이 모두 가능해 라운지를 찾는 학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건물의 주 사용자인 학생들을 전적으로 고려한 변화였다. 이러한 변화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박은아 동문(산업디자인 00)의 손끝에서 탄생했다.그는 학생들을 위한 공간 디자인이 필요하다는 한양대 각 사업단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 박은아 동문이 직접 디자인한 ERICA 캠퍼스 언론정보대학 라운지 모습 (사진 출처: 박은아 동문) 각 단과대학의 특성과 주 사용자를 고려한 환경개선이 이번 디자인의 쟁점이었다. 박 동문은 언론정보대학 ‘확산’, 예체능대학 ‘표현’, 디자인대학 ‘변형’ 등 각 단과대학의 컨셉트를 직접 선정했다. 그 역시 학부 시절 4년을 보냈던 공간이기에 학생들의 요구와 불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감재, 그래픽, 조명과 가구까지 고민을 거듭하며 세심하게 선정했다. “모교와 후배들을 위한 디자인을 하는 기회가 어디 흔할까요? 14년간 디자인한 수많은 공간 중에서도 무척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였습니다.” ▲ 박은아 동문이 직접 디자인한 ERICA 캠퍼스 디자인학 라운지 모습 (사진 출처: 박은아 동문) 확고한 꿈 그리고 도전 ‘집을 짓고 싶다’는 박 동문의 꿈은 19살부터 이어졌다. 학창시절에는 막연하게 건축가를 꿈꿨으나 점점 인테리어 디자인에 관심이 옮겨 갔다. 산업디자인학과에 진학한 것도 이러한 이유였다. 학부시절 내내 건축학과 수업을 함께 들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학년이 높아질수록 인테리어 디자인이라는 분야에 대한 확신이 생겼고, 즐겁게 학업에 임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살아가겠다는 확고한 의지 덕분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인테리어 설계회사에 입사했다. 현업에서 실무를 익히며 기본기를 쌓았다. 5년을 쉬지 않고 일했다. 업계 특성 상 하나의 프로젝트나 설계에 돌입할 때마다 며칠씩 밤을 새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박 동문은 매 순간이 즐거웠다. “사실 저는 정말 축복받은 사람이죠. 일찍이 확고한 꿈을 찾았고,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데다 그 일을 즐기면서 산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박은아 동문은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그 일을 즐기면서 산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라는 자신만의 신념을 밝혔다. 하지만 29살의 박 동문은 업계에서 인정받는 직장, 안정적인 직급을 내려놓고 돌연 미국행을 택했다. 나만의 작품이 아니라 찍어내는 디자인을 하고 있다는 고민 때문이었다. 스무 살부터 10년을 오직 꿈을 향해 달려왔기에, 스스로 휴식이 필요한 순간임을 직감했다. 많은 이들이 말렸지만, 언제나 그랬듯 박 동문은 스스로의 선택에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반 년을 뉴욕에 머무르며 오직 공부와 휴식에만 집중했다. 잊고 지냈던 디자인적 감수성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휴식이 있었기에 다시 도전할 수 있었다. 맨 땅에 헤딩하듯 구직활동을 시작했고, 낯선 미국 땅에서 바닥부터 다시 디자인에 도전했다. 외국인 인턴으로 시작해 정규 디자이너로 인정받기까지 꼬박 2년 반이 걸렸다. 피나는 노력 끝에 박 동문은 결국 타국에서도 인테리어 디자이너로서 자리잡았고, 그제야 그는 한국행을 택했다. 공간, 사용자를 최우선으로 한국에 돌아와 거취를 고민하던 박 동문은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디자인에 대한 무한한 애정, 스스로에 대한 확신, 그리고 사용자를 배려하는 박 동문의 섬세한 감각은 금세 입소문이 났다. 감사하게도 그를 찾는 이들이 점점 많아졌고, 지난 2012년 인테리어 설계회사 ‘디자인이유(Design EU)’ 설립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박 동문은 “디자인이유는 나만의 소신이 담긴 이름”이라고 말하며 “'그 공간의 사용자를 행복하게 하겠다'는 제 디자인의 이유가 녹아있다”고 말했다. ▲10년이 넘는 디자인 외길 인생, 그러나 박은아 동문은 여전히 디자인이 즐겁다. 박은아 동문이 공간을 디자인할 때 최우선으로 여기는 것은 바로 ‘공간의 사용자’다. 사용자의 니즈를 충족시키는 것은 물론, 나아가 사용자가 행복과 안정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내고자 노력한다. 그는 주거공간부터 오피스 및 상업공간까지 그 종류를 가리지 않고 공간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30평도 안 되는 작은 공간부터 3000평에 달하는 공간까지 그 크기와 주제는 매번 다르지만 모든 디자인에 최선을 다해 임한다. 디자인에 대한 확신이 있기에 어떤 제안도 거절해 본 일이 없다. 물론 힘든 순간도 적지 않다. 현장에서는 결국 정해진 예산 내에서 공간을 설계해야 하기에 디자인에 대한 갈증을 느끼는 순간이 종종 있다. 언제나 따라오는 창작의 고통과, 여성으로서 견뎌야 하는 크고 작은 수모도 존재한다. 하지만 여전히 디자인이 즐겁다는 박 동문이었다. 그에게 디자인은 살아가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쉬운 일은 결코 없을 테니, 어려운 순간에도 즐겁게 자신 있게 헤쳐 갈 생각입니다. 디자이너로 사는 삶이 행복합니다.” 글/ 김예랑 기자 ys2847@hanyang.ac.kr 사진/ 김윤수 기자 rladbstn625@hanyang.ac.kr

2017-11 01

[동문]궁궐의 벽지, 예술작품으로 거듭나다

벽을 꾸며주는 도배지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마주하는 막>의 연기백 작가는 도배지를 개인의 삶이 담겨 있는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재해석했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궁궐들의 옛 벽지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며 수집해온 장순용 동문(건축공학과 67)은 연 작가의 전시에 큰 도움을 줬다. 장 동문은 누군가에겐 쓰레기, 혹은 쓸모없는 것으로 비칠 수 있는 도배지들을 마음으로 품었다. 그렇게 단순한 폐자재도 그의 손을 거치면서 역사의 산물이 됐다. 우리 문화재에서 시작한 도배지 사랑 지금의 도배지는 크게 창호지와 장판지로 나뉜다. 하지만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왕실과 국가의 주요 행사를 기록 해 둔 의궤에 나와 있는 종이 이름이 80종류에 달한다. 문화재를 공부하던 중 장 동문은 이런 발견을 할 수 있었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문화유산들이 복원 될 때 옛날 종이를 재현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큰 아쉬움을 느꼈다고. “옛 종이를 재현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렵고 많은 노력이 들어요. 오래된 샘플을 통해 조사해야 하는데 도배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없으니 이런 과정도 없는 거죠.” ▲궁궐 도배지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정성이 깃든 복원을 간절하게 바랐던 장순용 동문이다. 장 동문은 궁궐벽지에 직접 관심을 갖고 샘플 채취를 시작했다. “1973년 운현궁 조사 일을 맡았는데, 옛날 도배지는 어떤 것일까 궁금했어요. 운현궁에서 벽지 샘플을 채취한 후 욕조에서 물에 불려 한 꺼풀 벗겨 보니, 벽지 하나에 10개 이상의 종이가 나왔어요.” 고종 즉위 이후 완공된 운현궁, 근대까지 8년 주기로 도배됐다는 사실을 장 동문은 벽지를 분해하면서 알아냈다. 그렇게 초창기 고종 즉위 2년부터 있었던 도배지라는 것을 입증하는 자료도 수집할 수 있었다. 장 동문은 계속해서 옛 벽지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창덕궁 낙선재 앞마당에 도배지들이 폐자재로 쌓여 있는 것을 봤을 때도 그대로 지나칠 수 없었다. 한양대 대학원생들과 함께 궁궐 건축에 대한 세미나 작업을 할 당시였다. “거기서도 도배지 문양이 보여서 가방 안에 샘플을 가져갔죠. 어차피 버리려고 폐자재로 모아둔 거니까요. 또 욕조에서 물에 불려 분리를 해보니 10장이 넘게 나왔어요.” 정교하게 만들어진 옛 벽지를 모아두면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 믿고 당시 문화재청에 연락했지만, 묵살됐다. 그 길로 장 동문은 본인만의 자료를 모아서 소장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장 동문의 여러 건축 자료들. 셀 수 없이 많은 책과 자료집이 장순용 동문의 사무실을 빼곡히 채웠다. 지난 80년과 90년대에는 궁궐의 복원공사가 한창 이루어질 때였다. 장 동문은 그 현장을 여러 번 방문하면서 복원 과정의 마무리인 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 실망감을 느꼈다. “궁궐의 설계 뼈대는 다 있는데, 마무리를 일반 한지로 끝내니까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죠. 한지로 도배 되는 것은 과거 사대부의 집에서 하던 과정이었거든요.” 그는 옛 도배지의 지혜와 미를 살려 똑같이 복원해주면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 수십 년 동안 관심을 갖고 얘기했지만, 그의 의견은 끝내 크게 반영되지 않았다. 비로소 가치를 인정받다 <마주하는 막>에서는 연 작가의 작품 외에도 장 동문이 수집한 궁궐벽지와 연구자료, 그리고 비망록들이 전시되고 있다. 그중 비망록에는 장 동문이 자료를 수집하며 겪었던 슬픈 사연의 감정이 그대로 묻어 나온다. “운현궁에서 찾은 자료들을 정리해서 스크랩북으로 갖고 있었어요. 마침 보수공사를 한다면서 자료를 빌려 달라해서 빌려 줬는데, 시간이 지나도 돌려주지를 않더라고요. 다시 연락을 해보니까 자료를 분실했다는 답변을 받았어요. 지난 1973년부터 20년 가까이 모아왔던 도배지 자료였는데 모든 것이 소실 된 셈이죠. 그 때는 정말 속상했어요.” 소중한 우리 문화재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단서들을 한 순간에 잃은 그의 목소리에는 아직도 허탈함이 남아있었다. ▲도배지 분실 사건 때 장순용 동문이 느꼈던 큰 상실감이 와 닿는 비망록. ▲장순용 동문이 연 작가에게 제공한 자료들 중 일부이다. 이제껏 그는 ‘외로운’ 도배지 연구가였다. 몇 년 동안 궁궐이나 문화재청에 도배지 복원이 섬세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 그의 의견을 들어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장 동문은 오히려 전문가보다 일반인들에게 자료를 보여주는 것을 더 선호한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도배지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올해 여름 경복궁에 위치한 국립고궁박물관이 궁궐건축에 관한 전시를 하겠다고 찾아왔어요. 박물관의 일부에 제가 수집한 자료들이 전시 됐죠.” 문화재 공부를 손에서 놓치지 않았던 장 동문이었기에, 이 전시는 그에게 특별한 경험이었다.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궁궐벽지에 대한 소신을 잃지 않았던 장 동문은 <마주하는 막>의 연기백 작가와도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됐다. 폐가 철거된 집에서 낡은 도배지를 모아 작품을 제작할 계획이었던 연 작가는 다양한 도배지를 소장하고 있다는 장 동문의 소식을 전해 듣고 그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연 작가가 ‘처음 보는 도배지들이 많다’며 굉장히 놀랬어요. 나중에는 다시 연락이 와서 벽지로 전시를 할건데 도움을 줄 수 있냐고 해서 기꺼이 자료를 주겠다고 했죠. 도배지에 관한 원고와 기고한 글들도 다 보여줬어요.” 장 동문은 젊은 작가가 자신과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것에 연대감을 느끼며, 아낌 없이 전시를 위해 자료제공을 해줬다. ▲장순용 동문이 수집한 궁궐벽지들이 '아마도 예술공간'에 전시돼 있다. 단 하나의 소망, 궁궐 도배지 복원 장 동문은 꾸준한 문화재 공부를 통해 배운 것들을 정리해서 다음 후학들에게 참고가 될 만한 자료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분야를 처음부터 배우려면 쉽지 않은데, 장 동문은 수십 년간 쌓아온 지식과 노하우를 후학들에게 전하고 싶다는 의지를 밝혔다. 제일 큰 바람은 궁궐 도배지가 하루 빨리 복원되는 것이다. "문화재와 문화유산 쪽으로의 용역비가 너무 박한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죠. 항상 저렴한 값으로 하려니까 그 점이 아쉽고, 문화재청 쪽에서는 그렇게 안 했으면 해요. 제대로 자료 조사를 하고, 복원설계를 충실히 갖출 수 있도록 여건 개선을 위해 노력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건축에서의 사소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벽지와 도배지. 하지만 그 누구도 유심히 관찰하고 조사하지 않은 궁궐벽지를 사랑한 장 동문은 어쩌면 그 자체로 궁궐 복원에 큰 이바지를 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정성과 애정이 듬뿍 묻어 나오는 자료들과 궁궐벽지, 그리고 비망록은 이태원에 위치한 ‘아마도예술공간’에서 관람할 수 있다. ▲“환경이 열악하더라도, 적성에 맞는 일을 하다 보면 좋은 때가 올 것입니다.” 장순용 동문은 후배들과 미래 건축학도들에게 "일단 정진하면 될 것"이라고 전했다. 글, 사진/ 유혜정 기자 haejy95@hanyang.ac.kr 사진/ 최민주 기자 lovelymin12@hanyang.ac.kr

2017-10 02

[동문]다큐멘터리 영화의 새 지평을 열다

역대 다큐멘터리 영화 사상 최단기간 100만 관객 돌파, 누적 관객 185만, 관람객 평점 ‘9.49(10점 만점)’, 제18회 전주국제영화제 전주 시네마 프로젝트 초청. 이는 지난 5월 말에 개봉한 영화 <노무현입니다>의 흥행 성적표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하 '노 전 대통령')의 정치 인생을 다룬 이 영화는 4번의 낙선, 지지율 2%의 만년 꼴찌 후보가 지난 2002년 새천년민주당의 ‘국민 참여경선’을 통해 결국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과정을 빼꼼하게 그려낸다. 당시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이 영화는 과연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제작됐을까. 영화 <노무현입니다>의 감독 이창재 동문(법학과 88)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파격적인 시도, 그리고 예상치 못한 흥행 올해 우리나라는 헌정(憲政) 상 유례없는 ‘첫 현직 대통령 탄핵’과 ‘장미 대선’을 동시에 치렀다. 그 결과, 약 9년 만에 여야가 바뀌었고, 민주당 계열의 문재인 후보가 제19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리고 지난 4월 29일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막을 연 영화 <노무현입니다>는 5월 25일 극장가에 정식 개봉 후 다큐멘터리 영화 사상 최단기간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는 제16대 대통령 선거로 노 전 대통령이 선출되고 약 15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노 전 대통령을 다룬 영화는 이전에도 존재했다. 지난 2013년 개봉해 1,000만 관객을 돌파한 <변호인>과 지난해 가을 개봉한 <무현-두 도시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다른 영화들과 달리 어떤 부분에 방점을 찍고 제작됐을까. "현재 사회는 대의정치를 표방하지만 실제론 Top-down 방식으로 당 수뇌부가 많은 결정을 하죠. 또 최근엔 여러 부정부패들로 인해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신뢰도 역시 하락했습니다." 이 동문은 우리가 ‘국민주권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경각심을 일깨우고자 영화를 제작했다. "지난 2002년 새천년민주당의 ‘국민참여경선’ 제도는 전무후무(前無後無) 한 제도로 당내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일반 국민이 50%의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하지만 불과 15년 전의 이야기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당시의 기억을 상당 부분 잊어버렸죠." 이 동문은 파란만장했던 노 전 대통령의 일생 중 ‘승리하는 인생’을 보여주고 잊힌 기억을 재조명하기 위해 지난 2002년 경선 과정을 치밀하게 그려냈다. ▲영화 <노무현입니다>는 "지역갈등을 해소하고, 동서통합과 화해를 이루자"는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소신과 정치관을 잘 담아냈다. (출처: 전주국제영화제) 영화는 지난 1992년 제14대 총선(부산 동구)을 시작으로 4번의 낙선 끝에 노 전 대통령이 대선 후보가 된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백미(白眉)라 꼽을 수 있는 부분은 중간중간 총 39명의 인터뷰이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안희정 충남지사, 대통령 보좌진과 비서관 등 쟁쟁한 정치인부터 영화배우 명계남 씨, 운전기사 노수현 씨, 작가 유시민 씨, 전 중앙정보부 공무원 이화춘 씨 등 각계각층의 인물들을 섭외했다. “섭외 과정이 어렵진 않았어요. 오히려 인터뷰이들이 노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한 감정 조절을 힘들어하셨죠” 원래 다큐멘터리 영화는 그 특성상 감독이 주인공의 내밀한 심정을 깊이 있게 파고들며, 그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이끌어내는 과정이 수반된다. 다만 이번 영화는 주인공 없이 주변 인물들을 통해 그 모습을 그려내야 했다. “각 인터뷰이들이 하나의 세포가 되어 모자이크처럼 노무현 대통령을 그려낸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보통 객관적인 인터뷰의 경우 인물을 15도나 30도 등 측면으로 담는데, 저는 정면으로 인물들을 담아냈습니다.” ▲영화 <노무현입니다>의 인터뷰이로 출연한 현 충남지사 안희정 씨. 영화 촬영을 위해 진행한 인터뷰 는 총 9000분 정도지만, 실제로는 40분 정도만 사용됐다. (출처: 전주국제영화제) 갈 지(之):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꿈과 가치 사실 지금까지 이 동문은 <사이에서>(2006), <길 위에서>(2012), <목숨>(2014) 등 인간의 삶과 죽음을 다룬 여러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해 왔다. “주변에선 이런 말을 하죠. 상업적으로 보면 돈도 안 되는 영화를 왜 계속 만드냐고. 하지만, 저는 영화가 끝났을 때 큰 찬사를 받지 않더라도 제가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한 점에 만족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계속 전하고 싶은 다른 이야기들을 만드는 거고요.” 물리적인 성공은 파이가 정해져 있기에 한계가 있고, 결국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외적 가치가 아닌 내적 가치라는 것. “꿈은 우리에게 목표를 향해 달리게 하는 동력, 즉 동기를 부여합니다. 반면에 가치는 달려가는 과정에서 회의감에 빠지지 않고, 왜 달려가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해소합니다. 그렇기에 이 둘은 항상 함께해야 하죠.” 이는 서른다섯이라는 늦은 나이에 영화를 배우러 미국 유학을 간 이 동문의 삶을 관통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창재 동문(법학과 88)을 지난 9월 29일 중앙대에 위치한 교수실에서 만났다. 법학을 전공했지만 법과 관련된 실무적인 일을 하기는 싫었고, 평소 글쓰기와 독서를 좋아해 문학 쪽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러다가 교내 ‘언론고시반’의 초기 멤버로 활약했고, 졸업 후 신문사와 광고기획사, 다큐멘터리 방송 채널 등에서 근무했다. 하지만, 어느 날 인생에 회의감이 찾아왔다. 나이 든 다른 선배들의 모습을 보며, 본인도 언젠가 저들처럼 틀에 박힌 삶을 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실패도 인생의 일부기 때문에, 꿈을 타협하지 말고 내가 책임지면서 내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주변의 만류와 걱정을 뿌리치고, 결국 이 동문은 지난 2001년 미국행 비행기를 탔고 귀국 후에는 형 집에 붙어살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 온갖 정력을 다한 뒤에 더 한층 노력을 기울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제 모든 걸 소진했다고 느낀 시점에 대학 교직 자리가 났죠.” 그 후 이 동문은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영상학과 교수로 부임해 현재까지 재직 중이다. ▲영화 <노무현입니다>의 메인 예고편. (출처: Youtube) 주체성 있는 삶을 살기 바랍니다. “제가 유학을 떠나기 전엔 IMF로 많은 분들이 실직, 해고를 당했고 그런 외부적인 상황은 항상 썰물∙밀물처럼 오고 갔습니다. 또 현재 많은 젊은 청년들은 자신이 무엇을 잘 하는지 모르는 채 단지 불안하다는 이유로 남들보다 앞서가려 무엇이든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말처럼, 이 동문은 성공과 실패를 떠나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지에 대한 고민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즉 자신이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을 하며 갈 지(之)자를 그리더라도 자신의 가치에 따라 행동하라는 것이다. “주어진 환경이 고되고 힘들지라도, 많은 청년들이 자신의 꿈을 찾아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살길 바랍니다. 운이 따르려면 운에게도 기회를 줘야 합니다.” ▲영화 <노무현입니다>의 메인 포스터와 티저 포스터 (출처: 전주국제영화제) 글/ 오상훈 기자 ilgok3@hanyang.ac.kr 사진/ 김윤수 기자 rladbstn625@hanyang.ac.kr

2017-09 27

[동문]“국악하는 제자들이 절 통해 많이 얻어갔으면 해요”

뭔가를 배우려는 사람에게 필요한 환경이라면, 그건 곧 배움이 있는 곳일 테다. 특히 예술을 하는 이에겐 더욱 그렇다. 어렸을 때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기 위해 예술학교에 진학한다. 그 중 국악을 하려는 이들이라면 절대 모를 리 없는 학교가 있다.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는 국립국악중·고등학교와 더불어 전국에 두 곳뿐인 '국립 국악학교'다. 지난 9월, 판소리 학사 1호로 알려진 왕기철 동문(국악과 81)이 국립전통예술중·고교 신임 교장으로 취임했다. 최초의 소리꾼 교장 되시겠다. 설립자의 제자가 모교의 교장으로 왕기철 동문은 판소리 명창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이수자이며, 제27회 전주대사습 판소리 명창부 장원(대통령상)을 수상하며 판소리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 1999년부터 13년 동안 국립창극단에서 명창으로서 주연을 도맡아 무대를 펼치곤 했다. 국립창극단은 국악 중 창극을 하는 이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다. ▲왕기철 동문(국악과 81)과 지난 25일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 교장실에서 만났다. 왕 동문과 국립전통예술중·고 사이의 인연은 상당히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왕 동문은 열여섯 살에 형의 추천으로 가야금 병창의 명인 향사 박귀희 씨의 제자가 됐다. 그 뒤 박 씨가 설립한 서울국악예고(현 국립전통예술고)를 졸업했다. 한양대 국악과를 졸업하고는 다시 서울국악예고로 돌아와 1998년까지 십여 년 동안 판소리 전임으로 교편을 잡았다. 이듬해 1999년부터 국립창극단에서 활동하다 몇 년 전부터 또다시 모교로 돌아왔다. 줄곧 학생들을 가르치다 이번 학기부터 교장으로 임명됐다. 햇수로만 따지면 국립창극단에 있던 기간보다 오래 모교에 있었던 셈. 최근 돌아오게 된 계기는 후배들에게 자신이 무대에 서며 느낀 점들을 알리겠다는 바람에서다. “국립창극단에 있는 게 예술에 전념하긴 좋아요. 매번 공연만 연습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교육을 통해 후배들, 혹은 전통예술을 이끌어 갈 학생들과 함께 예술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싶어 어렵사리 다시 교편을 잡았습니다.” 그렇게 모교로 돌아온 때는 지난 2013년. 소위 판소리에는 잔뼈가 굵었지만, 국립학교기에 남들과 똑같이 필기, 실기 시험을 통해 평교사로 들어왔다. “그래서 오히려 교사로서 자부심은 있어요. '나도 다 시험 통과해서 들어왔다' 그런 거죠.” 교장이지만 학생들과 계속 교류하고파 교장선생님의 위치는 일반적으로 학생들에겐 멀기만 하다. 학교에서 가끔 마주치는 높은 분일 뿐이다. 하지만 왕 동문은 그간 해왔듯 학생들과 면대면 교류를 이어가고자 한다. “학교 선배로서, 선생으로서, 국립창극단에서 뛰었던 사람으로서 본보기가 되고 싶어요. 연습이나 삶에서 힘든 점이 있는 학생들은 여전히 절 찾아오곤 하죠. 그럴 때면 반갑게 맞이하고 제 경험을 통해 알려주는거죠. 그 아이들이 원하는 길을 걸어온 자로서 건네는 구체적인 도움이죠. 앞으로도 그런 교장으로 지내고 싶습니다.” 실제로 왕 동문이 걸어온 길은 국립전통예술고에 들어온 학생들에게는 무척 가고싶은 길이다. 고교 졸업 후 국악과에 들어갔고, 이후 국립예술단체에 들어가 메인을 도맡았다. 그런 길을 걸어왔기에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은 것이 여전히 많다. “또한 학생들의 삶에 대한 고민도 들어주곤 해요. 공연자의 마음이 좋지 않으면 좋은 소리가 날 수 없죠. 그래서 항상 밝게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합니다. 또 요즘은 인터넷으로 영상도 찾아볼 수 있으니까, 제가 나서는 무대를 보면서 많은 도움이 되기를 바라죠.” 또다시 1호란 타이틀 왕 동문의 이번 교장 임명은 판소리계에서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다. 그간 없었던, 소리꾼이 교장이 된 첫 경우이기 때문. “지금도 여기저기서 축하인사가 와요. 그 축하 받은거 만큼, 교장으로서 주어진 일도 잘 해야겠죠. 소리꾼으로서 활동도 계속 하고요.” 이미 소리꾼 학사 1호라는 타이틀을 한 번 얻어서인지, 왕 동문의 담담한 목소리에는 처음이라는 타이틀에 맞는 책임감이 가득했다. ▲왕기철 동문은 "교장으로서 그리고 선배 소리꾼으로서 학생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글/ 이상호 기자 ta4tsg@hanyang.ac.kr 사진/ 최민주 기자 lovelymin12@hanyang.ac.kr

2017-09 18 중요기사

[동문][세계 속의 한양인] 지구 반대편에서는 빙수가 열풍!

잉카문명의 발원지이자,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따뜻한 기후를 자랑하는 나라 페루. 한국에서 무려 21시간을 비행해야만 도착하는 이곳에선 새로운 디저트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이슈의 주인공은 한국에서 사계절 내내 즐길 수 있는 눈꽃 빙수. 표지도 동문(경영학부 09)은 아이스크림의 수요가 높은 페루에 빙수라는 음식을 알리기 위해 친구와 함께 페루 최초의 빙수 가게 ‘미스터 빙수’를 차렸다. 여름엔 줄 서서 먹는다고 소문난 이 가게, 어떻게 페루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어서 와, 빙수는 처음이지? 올해 4월 초, 페루의 수도 리마에 개업한 ‘미스터 빙수’는 현재 다섯 개의 메뉴인 ‘딸기 빙수(Fresa Bingsu), ‘망고 빙수(Mango Bingsu)’, ‘초코 빙수(Choco Bingsu)’, ‘치즈 빙수(Cheese Bingsu), 그리고 ‘멜론 빙수(Melon Bingsu)’를 페루 사람들에게 선보인다. 빙수 외에도 한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허니브레드’와 ‘초코브레드’, 그리고 컵라면과 한국 과자들도 판매한다. ▲’미스터 빙수’의 다섯 가지 빙수. 과일 빙수는 제철과일에 따라 대체되기도 한다. (출처: 표지도 동문) 빙수 재료는 모두 페루에서 구하지만, 한국의 생과일 빙수와 다를 것 없다는 점이 특징. “오히려 한국적인 메뉴를 페루 사람들이 많이 찾는 것 같아요. 다만, 한국에서 맛볼 수 있는 팥빙수나 인절미 빙수는 아직 팔지 않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팥이나 떡을 현지인들이 좋아하진 않거든요.” 한국의 빙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던 표 동문은 그 경험을 살려 빙수를 직접 만든다. 듬뿍 담겨 있는 제철 과일과 혀에 닿자마자 사르르 녹는 미세한 우유 얼음 조각들은 페루인의 입맛에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그들은 처음 맛보는 디저트에 엄지를 치켜세우며 ‘맛있다’라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고. “건강한 느낌을 주는 생과일과 우유가 들어간 메뉴다 보니, 기존에 현지인들이 즐겨 먹던 아이스크림보다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현재 ‘미스터 빙수’ 페이스북 공식 페이지의 좋아요 수는 무려 1만 4천여 개에 달한다. 개업한지 5달 남짓이지만, 현지 방송에도 출연할 만큼 ‘빙수 열풍’은 대단하다. ▲한국으로부터 상륙한 눈꽃 빙수를 맛보기 위해 ‘미스터 빙수’앞에 줄서 있는 현지인들. (출처: 표지도 동문) 지난 2014년에 교환학생으로 페루 땅에 첫발을 디딘 표 동문. 흥미롭게도 중학생 때부터 장래희망이 ‘사장님’이었던 그는 현지에서 생활하며 각종 사업 아이템을 물색했다. 그렇게 1년 후 표 동문은 이곳에 빙수를 들여오기로 했다. “페루 사람들은 아이스크림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인기에 비해 종류가 많지 않더라고요. 눈꽃 빙수라면 통할 거라고 확신했죠.” 빙수가 이미 보편화된 한국과는 달리, ‘블루오션’이라고 생각했던 남미행은 성공적이었다. 창업의 밑거름이 된 대학생활 “교환학생 생활을 하며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졌어요. 다른 나라 사람들의 문화와 사고방식이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고, 제가 생각할 수 있는 폭이 편협했다는 것을 깨달았죠.” 페루에서의 경험은 표 동문 인생의 전환점이자 창업의 원동력이었다. 페루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도 잊을 수 없다. “저를 한국에서 입양한 아들이라며 따뜻하게 맞아 주신 페루 홈스테이 가족들은 낯선 땅에 도착한 저에게 포근한 둥지를 제공해줬어요. 이들의 존재가 창업을 준비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표 동문은 언어에도 두려움 없이 부딪혔다. “일부러 현지인들을 계속 만나서 현지언어를 쓰려고 노력했어요. 모르는 단어나 문장은 그때그때 적어서 외웠고, 1년간 한국어를 쓰지 않고 스페인어만 하니 저 스스로가 뿌듯할 정도로 실력이 많이 늘었죠.” 덕분에 표 동문은 창업 과정 중 언어의 어려움은 없었다고 말했다. 손님들과의 일상생활 소통도 가능하기에 그들이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었다. ▲현지인 손님들과 포즈를 취하는 표지도 동문(오른쪽)과 동료 김주엽씨. 표 동문은 손님들이 한 번 빙수를 맛보고 꾸준히 다시 찾아올 때 가장 보람을 많이 느낀다고 말했다. (출처: 표지도 동문) 표 동문은 교환학생 외에도 ‘또래 튜터링’, 멕시코 어학 프로그램, 응원단, 그리고 가지각색의 아르바이트로 바쁘게 지냈던 대학 생활을 진심으로 그리워했다. “지금도 대학생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많이 들 정도로 학교생활이 너무 즐거웠어요. 특히 과 자체가 창업과 밀접하기도 했고, 창업을 지지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큰 동기부여가 됐습니다. 창업에 관련된 수업인 ‘경영자료분석’에서 창업을 가정하여 사업계획서를 써보고, 분석하고, 발표했던 것이 실제로 가게를 낼 때 많은 도움이 됐죠.” 남미 전역이 ‘눈꽃’으로 물들 때까지 “남미 전역에 확장할 계획이 없었다면 시작도 안 했어요.” 표 동문은 미스터 빙수의 분점을 페루의 타지역들과 남미의 다른 나라에 내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확장을 위해서는 넉넉한 자본이 필요한 것이 현실. 그는 "매출이 상대적으로 저조한 현재, 페루의 겨울을 극복하고 다가오는 여름을 준비하는 일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또한, 다가오는 여름에는 과일 빙수의 종류를 늘리고 커피 빙수도 추가하면서 빙수의 종류를 다양화할 계획이라고. “고객들이 빙수만 먹으러 오는 게 아니라, 한국의 디저트 문화를 경험하는 동시에 한국의 매력에 푹 빠질 수 있도록 노력할 거예요.” 페루에서 얻은 귀중한 교훈들과 좋은 인연들을 새기며 언제나 정성 들인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표 동문. ‘세계 속의 한양인’으로서 한국의 위상을 남미에서 높이겠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페루 여행을 계획하고 있거나 여행 중인 한양인이라면, 먼 타지에서 맛볼 수 있는 빙수를 만나러 ‘미스터 빙수’를 방문해 보는 것은 어떨까. ▲’미스터 빙수’가게 안에서 빙수를 들고 활짝 웃고 있는 표지도 동문(왼쪽)과 동료 김주엽씨. 옆 쇼윈도에는 한국 과자인 ‘빼빼로’도 판매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출처: 표지도 동문) 글/ 유혜정 기자 haejy95@ha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