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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 08

[동문]이론과 실무경험 고루 갖춘 광고학 연구자

김봉철 동문(신문방송학과 81)은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연구위원을 거쳐 지난 2004년부터 조선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수십 편의 논문과 학술 발표, 각종 저서를 집필하면서도 한국광고학회 부회장과 한국언론학회, 한국방송학회 이사를 지내는 등 광고 및 언론 분야에서 연구자와 실무자의 영역을 넘나들고 있다. 김 동문이 올해 가을부터 임기가 시작되는 한국광고PR실학회 7대 회장에 선출됐다. 한국광고PR실학회 7대 회장 선출 "어깨 무겁다" ▲ 김봉철 동문(신문방송학과 81) 한국광고PR실학회는 광고 및 PR을 전공하는 연구자와 실무자로 구성된 전국 규모의 학회다. 광고 이론과 실무를 겸하는 산학협력 중심의 학회로, 해마다 두 차례 정기 학술대회를 열고 있다. 한국연구재단 등재 학술지인 '광고PR실학연구'도 1년에 4번 발행한다. 김 동문은 "전국 규모 학회의 회장을 맡아 어깨가 무겁다"며 "학자로서 자기 분야의 학회장을 맡는 것은 매우 기쁘고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임기가 오는 가을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회장으로서 구체적인 계획은 수립하지 않고 있다. 그는 "정식 취임 전까지 역대 회장들이 이룬 업적을 살피면서 차근차근 계획을 세우겠다"고 했다. 김 동문은 2004년부터 조선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광고의 이론화와 과학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국내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단 점이나 현업에 있다가 교수직에 올랐다는 점에서 핸디캡을 느꼈다"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논문 집필과 학회 활동을 열심히 했다"고 했다. 덕분에 교수가 된지 3년 만에 조선대에서 가장 많은 논문을 쓴 교수로 수상했고, 지난해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받았다. 이 밖에도 2011년 한국PR협회 최우수 논문상, 2013년 한국광고학회 제일기획 학술상 등을 수상한 김 동문은 현재 언론중재위원회와 방송광고균형발전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일련의 활동에 대해 그는 “보도로 인해 침해를 입은 사람이 언론을 상대로 피해구제를 요청할 때, 이들의 고충을 듣고 원만한 합의를 모색하는 역할"이라며 "중재가 끝난 후 양쪽의 당사자가 모두 만족할 때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실무 경험이 광고학 연구에 큰 도움돼 광고학 분야에서 뼈가 굵은 김 동문이지만, 대학에 들어올 때만 해도 광고계로 나설 계획은 없었다. "어렸을 때는 책 읽거나 글 쓰는 걸 좋아해서 국문학이나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졸업 후가 어려울 거란 생각에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신문방송학과에서 광고를 배우는 지도 몰랐다는 그. 우연한 기회는 대학교 4학년 때 찾아왔다. "제일기획에서 주최한 대학생 광고논문 공모에서 대상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광고 쪽으로 진출하게 됐습니다." 김 동문은 졸업 후 IMF로 회사를 그만둘 때까지 약 11년 동안 광고 회사에서 일했다. 1997년도에 회사를 나와 공부를 시작해 우리대학에서 1996년 광고홍보학 석사학위를, 2002년 신문방송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해부터 김 동문은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연구위원으로 2년간 재직했고, 조선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2004년에 부임했다. 광고학은 실용 학문이며, 때문에 실무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김 동문은 "광고 회사에서 근무한 경험과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연구위원 경력이 교수 생활에도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한국광고PR실학회가 2016년 홍콩 중문대학교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참가한 모습이다. (출처: 한국광고PR실학회) 방송 광고의 위기, 어떻게 타개할까 김 동문의 생각에 지금은 한국 방송 및 광고의 위기다. "지상파 방송들의 주 수익원은 광고인데, 지상파 광고가 줄어들고 있어요. SNS 등 다른 광고 매체들이 많이 생겨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내 경기가 좋지 않아서 기업들이 광고비를 많이 안 쓰고 있어요." 때문에 김 동문은 방송사가 광고 외의 수익 모델을 창출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했다. 외부적으로는 경기가 활성화 돼 기업의 광고비 지출이 늘어야 한다고도 말했다. 대학 수준에서는 이론과 기술을 접목한 신문방송학 교육이 필요하단 것이 그의 생각. 김 동문은 "인간이 있는 한 커뮤니케이션은 사라질 수 없고, 때문에 신문방송학도 인간이 있는 한 꼭 필요한 분야"라면서도 "과거의 신문방송학이 저널리즘 위주의 학문이었다면, 오늘날에는 기술과 이론을 접목한 '융복합 학문'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연구자와 실무자의 영역을 넘나드는 김 동문은 교수 생활에 큰 애착을 갖고 있다. "자신의 연구를 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이 직업이 성직처럼 느껴진다"는 그. 마지막으로 언론, 방송, 광고 분야 등으로 진출하려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전했다. "무슨 일이든 즐기면서 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방송이나 광고 등은 더 그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취업이 어려워 낙담하는 후배들이 많겠지만,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노력하길 바랍니다." 글/오상훈 기자 ilgok3@hanyang.ac.kr

2017-01 03 중요기사

[동문]남성 프로배구 '여성 주심 1호' 전영아 심판의 10년

2006년 뉴스H(구 인터넷한양)에는 프로배구 ‘2호 여성 주심’으로 데뷔한 전영아 동문(경기지도학과 94)의 이야기가 소개됐다. 초등학교 때 배구에 입문해 선수 생활을 거쳐 프로배구 V리그의 심판으로 당당히 변신에 성공한 그였다. 10년이 지난 지금, 전 동문은 남성 프로배구에 진출한 '1호 여성 주심'이란 새 타이틀을 달았다. 지난 만남 이후 10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듣기 위해 전 동문을 찾았다. 남성 배구리그 ‘1호 여성주심’ 새로운 역사를 쓰다 지난해 12월 18일 안산 상록수체육관에서 열린 우리카드와 OK저축은행의 프로배구 남자부 V리그 경기. 심판석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 등장했다. 심판석에 앉은 이는 여자부 경기에서 심판을 보던 전영아 동문이었다. 남자부 경기에 여성 주심이 투입된 것은 2005년 V리그 출범 이후 처음있는 일. 차분한 모습으로 경기에 임한 전 동문은 매끄러운 경기운영을 보여주며 무리 없이 경기를 마쳤다. 이로써 전 동문은 2006년 프로배구 ‘2호 여성 주심’에 이어 10년 후인 지난해 남자부 ‘1호 여성 주심’에 오르며 대한민국 프로배구의 역사를 새로 썼다. 12년 경력의 고참이 된 전 동문은 “프로배구 사상 최초라는 사실에 특별함을 느낀다”며 “역사적인 날로 평생 기억에 남을 것 같다”는 소감을 전했다. 남성 주심이 주로 섰던 남자 프로배구 리그에서 전 동문이 경기에 나선 데는 서태원 심판위원장의 영향이 컸다. “서태원 위원장님은 파격적인 심판 배정을 서슴지 않는 분이에요. 덕분에 제가 관행을 깨고 주심으로 나설 수 있었죠." 물론 하루 아침에 파격의 중심이 된 것은 아니다. 전 동문은 ‘검증의 시간’을 잘 견뎠다고 했다. 지난해 7-8월 한·중·일 친선배구대회가 특히 중요했다. 당시 부심으로 두 차례 심판 기회를 얻은 전 동문은 경기를 잘 소화해내면서 여성도 남자 경기에서 심판을 맡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전영아 동문(경기지도학과 94)이 지난해 12월 18일 열린 우리카드와 OK저축은행의 프로배구 남자부 경기에서 심판을 보고 있다. (출처: 전영아 동문) 인터뷰 이후 10년을 묻다 전영아 동문이 본지와 인터뷰를 한지도 10년이 지났다. 전 동문은 10년 동안 있었던 일들 중 ‘빅(BIG) 3’를 꼽았다. 첫째는 역시 '1호 여성 주심'이 된 것이다. 나머지 두 가지는 국제심판 자격증을 취득한 것, 그리고 심판상을 수상한 것이었다. "프로 심판이 되며 목표로 삼았던 국제심판이 됐단 사실이 가장 중요해요." 전 동문은 2010년 국내 시험을 통과, 1년 동안 지원자 예비 코스를 밟은 후 2012년에 당당히 국제심판 자격증을 거머쥐었다. 국제심판 자격증 취득 후 겹경사가 이어졌다. 최고의 심판에게 주어진다는 ‘심판상’을 수상한 것. 8년 만에 2012-2013 프로배구 V리그 시상식에서 심판상을 받으며 베테랑으로 인정받았다. ▲전영아 동문과 지난 2일 한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물론 국제심판 자격증을 취득하고 최고의 심판 자리에 오르기까지 탄탄대로를 걸은 것만은 아니다. 전 동문은 프로 심판으로 섰던 초기, 오심이나 미흡한 경기 운영에 대한 악플로 힘들었던 시절을 회상했다. “불특정다수에게 비난받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어요. 연예인의 심정이 이해가 가더라고요." 또 국제심판 자격증을 취득하는 과정에서는 두 차례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 힘든 순간마다 전 동문이 마음을 다잡고 속으로 외친 한 마디는 ‘할 수 있다’였다. “처음에는 노력해도 안 되는 것 같아서 좌절도 많이 했는데,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말자고 다짐했어요. 가족들과 부모님의 응원이 큰 힘이 됐죠.” 전 동문은 굳은 다짐 끝에 응시 가능 연령 안에 들어가는 마지막 해에 합격의 기쁨을 누렸다. 전 동문은 2014 인천 아시안게임과 2015 광주 하계유니버시아드 등 여러 국제 경기에 참여하며 국제심판으로 활동하고 있다. V리그에서도 든든한 12년차 베테랑이다. 과거와 현재의 차이를 묻는 말에 전 동문은 “과거엔 원칙대로만 하려고 하는 경향이 커서 감독이나 선수들과 관계가 좋지 않았다”며 “이제는 운용의 묘를 살려 부드러운 경기 진행을 하도록 신경 쓴다”고 말했다. 하지만 심판석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전 동문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이 오심이다. “경기 승패에 영향을 미치는 오심이 났을 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어요. 오심은 인간이라면 피할 순 없는 것 같아요. 최소화하려고 노력할 뿐이죠. 모호한 상황에선 부심, 선심과 이견을 조율해요. 시각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청각도 최대한 활용하고요." 덕목 지키는 심판 되고 싶어 전영아 동문은 자신의 심판 생활의 원동력이 된 덕목으로 정확한 규칙과 규정 숙지, 철저한 자리관리 및 평정심 유지를 뽑았다. “심판이라면 규칙과 규정을 완벽하게 알고 있는 게 제일 중요해요. 다음은 컨디션이나 건강 유지 차원에서의 자기관리죠. 심판은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에요. 마지막으로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할 수 있는 마음의 평정심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준비된 심판으로서 양팀 감독과 선수, 관객 등 모두가 만족하는 경기를 마쳤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는 전 동문이다. 그에게 남은 목표는 이제 과거보다 많지는 않지만, 조심스레 다음 목표를 말하는 목소리에는 설렘이 묻어났다. “프로 심판으로서 건강을 유지하면서 끝까지 가보고 싶어요. 그러면 언젠가는 국제배구연맹(FIVB)의 지명심판으로 올림픽 경기에 나서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요.”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 부모님의 도움이 컸어요.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싶어요." 전영아 동문이 인터뷰를 마치면서 한 말이다. 글/ 김상연 기자 ksy1442@hanyang.ac.kr 사진/ 문하나 기자 onlyoneluna@hanyang.ac.kr

2016-12 06

[동문]저항을 그리는 몸짓

촛불집회가 열리는 광화문 광장, 이 현장을 맨발에 하얀 속적삼 차림으로 누비는 이가 있다. 사회교육원 무용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장순향 동문(체육학 박사 졸업)의 이야기다. ▲ 사회교육원 무용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장순향 동문(체육학 박사 졸업)과 지난 1일 만났다. Q1. 안녕하세요, 장순향 교수님.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계시나요? 반가워요. 가장 최근의 활동으로는 한국민족춤협회를 이끌며 광화문 광장에서 문화예술인 텐트시위에 동참하고 있어요. 어지러운 시국 가운데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의 존재가 밝혀지면서 많은 분이 발 벗고 나섰죠. 제 개인적으로는 매주 금요일마다 광장 춤 교실을 열고 있어요. 광장의 기운을 신명 나게 하고 싶었거든요. 현장에 참여하는 시민들에게 춤을 가르쳐주고 즉석에서 공연을 펼칩니다. Q2. 교수님을 두고 ‘무용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늘 고민하며 추모, 투쟁 현장에서 춤을 춘 생명과 평화의 춤꾼'이라 설명한 글을 봤습니다. 1989년과 1990년에 각각 부마 항쟁과 광주 민주화 운동을 주제로 한 무용극을 무대에 올렸어요. 나중에 안 사실인데 전국 최초라고 하더라고요. 비록 ‘인쇄물 발행 전면 금지’라는 외압도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관객들에게 무대를 선보일 수 있었어요. 두 공연을 생각하면서 삶을 되돌아봤을 때 ‘내가 인생에서 할 일을 했구나‘란 생각이 들어요. 그 외에도 농민과 노동자들의 투쟁이 있는 장소나, 4.16 참사와 윤 일병 사건 등 추모와 애도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습니다. Q3. 춤으로 종횡무진 누비셨네요. 무용가로 가장 보람을 느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저의 춤을 본 사람이 정말로 위로받고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느낄 때요. 또 너무나 분노에 차 있는 사람이 제 춤을 보고 함께 공감할 때도 마찬가지죠. 지난 촛불 집회 때 하야 춤을 추고 무대에서 내려오니까 어떤 분이 막 저를 찾아와서 부둥켜안더군요. 눈물을 글썽거리며 하시던 말이 '분노를 춤으로 보여주니까 너무 시원하다'는 거였어요. 그럴 땐 춤이 사람들에게 많은 희망을 심어줄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이 드네요. Q4. 춤은 언제부터 배우신 건가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춤을 배웠어요. 중학교에 올라간 후 무용을 하다가 집 안의 반대가 심해 도시로 전학을 가게 됐어요. 다행히 무용 선생님의 배려로 몰래 무용학원에 다닐 수 있었네요. 제가 계속 춤을 출 수 있게 만들어주신 분이에요. 이후에 이필이 스승님 밑에서 춤을 배웠어요. 형편상 수업료를 내지 못해 청소나 궂은일로 대신하던 시절이었죠. 1981년에는 인간문화재 이매방 스승님의 문하로 들어갔어요.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와 제97호 살풀이춤을 각각 전수 및 이수 받게 됩니다. ▲ 장향순 동문이 '사드반대'라고 적힌 부채를 들고 춤을 추고 있다. (출처: 장순향 동문) Q5. 오랜 세월 동안 춤으로 행동하는 삶을 사셨는데, 이런 삶을 추구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부산에서 대학을 다녔어요. 이 시절 함석헌 선생님의 평론지 <씨알의 소리>를 읽으며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당시의 학습지침서였죠. 폭력에 대한 거부와 권위에 대한 저항 정신을 접하며 노동운동에도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한번은 신분을 중졸로 속여 공장에 위장 취직을 한 적도 있는데요. 거기서 노동현장의 열악함을 직접 목격하고 그걸 춤으로 만들었죠. 전자칩을 만들고 조립하는 데서 나오는 동작들을 춤으로 승화시켜 공연을 열었더니 많은 관객이 몰리더라고요. 자기네들의 이야기를 한다니까 그것이 소문이 나서 마산 지역 노동자분들이 찾아주신 거였어요. Q7. '장순향의 춤'을 어떻게 정의하고 싶으세요. 무용수라면 누구나 넓은 공연장에서 아름다운 의상을 입고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춤추고 싶은 욕망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춤을 필요로 하는 현장이 있으면 달려가는 것이 우선적인 역할이라고 생각했어요. 춤은 무대에서 늘 조명을 받으면서 예쁘고 곱게 추는 것이 전부가 아니에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무언가를, 신체의 표현으로 꺼내어 저항할 수 있습니다. 몸짓과 동작으로 잘못된 것을 저항할 줄 아는 것이 제 춤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Q8. 교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요? 남북통일에 관심이 많아요. 앞으로 통일에 이바지하는 활동을 이어나가고 싶어요. 지난 2006년에 북한 해외 유일 예술단체인 금강산 가극단에서 남쪽 춤을 알려달라는 요청이 왔고 제가 남측 대표로 파견돼 춤을 가르친 적이 있어요. 실제로 그들을 보니까 남쪽이 고향인 사람이 상당수라 놀랐던 기억이 있죠. 남북 간의 긴장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점진적인 교류를 통해 예술이 궁극적으로 통일에 초석이 되는 역할을 하면 좋겠어요. 정치와 경제를 떠나 예술부터 통일에 앞장선다면 수월하지 않을까요. Q9. 마지막으로 무용을 배우는 한양인들에게 한마디 하신다면. 사회문제에 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앞서 말했지만, 춤을 예쁘게 추려고만 하지 말고, 사회 속에서 내가 춤으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충분히 고민하고 자신만의 춤을 추면 좋겠어요. ▲ 장순향 동문은 "춤을 하길 참 잘했다"며 무용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글/ 김상연 기자 ksy1442@hanyang.ac.kr 사진/ 김윤수 기자 rladbstn625@hanyang.ac.kr

2016-12 05 중요기사

[동문]1, 2, 3차 美 대선토론 동시통역… 동료들이 “간 크다” 하더라

지난 미국 대선은 세간의 이슈였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와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의 토론회도 3차에 걸쳐 국내 방송을 통해 생중계됐다. 그 내용만큼 주목 받은 것이 동시 통역이었다. 생방송 대선 토론은 통역 환경의 어려움 때문에 빌 클린턴 시절 이후 진행된 적이 없었다. 통역사 최현진 동문(영미언어문화학과 01)은 3차에 걸친 미국 대선후보 토론 생방송 동시통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냈다. 1, 2, 3차 美 대선 토론의 또 다른 주인공 ‘동시통역사’ 최현진 동문(영미언어문화학과 01)은 7년차의 베테랑 통역사다. 대표적인 경력으로는 UN 국제민간항공기구 이사국 총회 대한민국 대표단, 국토교통부 영어 자문관, 한-미 항공보안협력회의, 아세안+3 정보장관 회의 통역 등이 있다. 통역으로 사회에 도움을 주고 싶단 뜻에서 UN 북한인권조사위원회, 입양아를 찾는 KBS 프로그램 '사람을 찾습니다' 등에서는 재능기부 형식으로 통역을 맡기도 했다. 현재는 통역대학원에서 강의를 진행 중일 정도로 탁월한 역량을 갖췄다. 지난 9월부터 10월까지는 연합뉴스TV에서 미국 대선후보 토론을 생방송으로 동시통역했다. 1, 2, 3차로 이어진 이번 토론을 모두 소화한 통역사는 최 동문 뿐이다. 연사와의 소통이 불가능한 생방송 통역의 경우 일반적인 국제회의 통역보다 난이도가 높기로 유명하다. 통역사로서 최 동문의 입지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예전에 정치 인사 토론을 종종 맡아선지 1차 토론을 맡아보지 않겠냐는 추천을 받았어요. 준비 기간이 하루도 남지 않아 부담스러웠지만 용기를 냈죠. ‘자막에 뜰 메인 포인트만이라도 오역하지 말자’는 마음가짐으로 갔어요.” 1차 토론의 반응이 좋자 2, 3차 토론까지 맡게 됐다. 2차부터는 최 동문이 힐러리로, 남자통역사가 트럼프 역할로 호흡을 맞췄다. “1차 토론 이후 열흘 동안 두 후보에 관한 뉴스와 미국 경제, 금융, 산업, 분쟁 지역, 교역, 기후 변화 등 관련 기사란 기사는 모조리 읽었어요. 잠 자는 시간을 빼곤 새 뉴스를 읽는 생활을 한동안 했죠." 그렇게 3차까지 이어진 대선토론 통역을 끝내자 동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주변에서 어떻게 그 무서운 걸 해냈냐고, 간 크다고 하더라고요(웃음).” 빌 클린턴 시절 이후 처음으로 진행된 대선토론 동시통역이라 더 뜻깊었다. "아쉬움도 있지만, 그 어떤 통역도 이제는 두렵지 않을 정도로 영광이고 행복하죠.” ▲ 최현진 동문(영미언어문화학과 01)은 연합뉴스TV에서 미국 대선후보 토론회 생방송 동시통역을 맡았다. ▲ 연사를 보지 못한 채로 방송만 보며 하는 통역은 난이도가 매우 높다. (출처: 최현진 동문) 언어 실력은 기본, 논리력과 순발력, 지구력 중요해 최현진, 그는 영미언어문화학과가 배출한 4명의 통역사 중 한 명이다. 영미언어문화학과는 실용학풍이란 목표 하에 통역과 번역 교육을 중점적으로 가르친다. “1학년 때 이태형 교수님과 진로에 대해 면담한 적이 있어요. '영어로는 최고가 되고 싶다' 했더니 통역대학원 입학 시험과 기출 문제를 보여주시며 진학을 권하셨죠." 이태형 교수(영미언어문화학과)는 오랜 시간 동시통역 연구를 집대성한 인물. 그의 지도 하에 최 동문은 통역대학원에 진학해 통역사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최 동문은 다소 길을 돌아 꿈에 닿게됐다. “학부 졸업 후에 1년은 더 공부해야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어요.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마케팅 회사에 취업했죠." 회사에서 2년 정도 일했지만, 늘 통역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한 최 동문은 통역대학원 진학을 다시 준비하게 됐다. "6개월 동안 학원에 박혀서 공부만 하다가 합격했다"는 최 동문은 대학원에서도 하루종일 공부와 통역 연습만하는 모범생이었다. 하지만 통역이 너무 좋아 그 시간도 보람찼다고 전했다. 노력 끝에 인정받는 통역가가 된 최 동문은 "통역에선 언어실력은 기본, 논리력과 지구력이 중요하다"고 했다. "타인을 말을 해석해 또 다른 사람을 이해시키기 위해선 이야기를 이끄는 '논리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 이를 위해 시사, 경제, 경영, 과학, 기술, 예술 등 다방면에 대한 관심과 지식도 필요하다. 매일같이 국제회의에 참석하고, 장기간의 통역을 소화하기 위해선 지구력도 필수다. 마지막으로 그는 통역사의 역할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강조했다. "통역사의 역할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중요해요. 내 의견을 말하는 것이 아닌 데다, 의미를 잘못 전달하면 위험할 수 있어요." ▲ 최현진 동문(오른쪽)이 아세안+3 정보장관 회의에서 '휘스퍼링' 중인 모습. 소수의 청자에게 귓속말로 통역하는 방법이다. (출처: 최현진 동문) 화려함보다는 은은함이 장점인 통역사 'An aura of sophistication'은 최 동문이 되고 싶은 통역사의 모습이자 좌우명이다. 세련되고 정교한 아우라를 풍기는 통역을 하고 싶단 의미다. "통역사는 'Shine' 하기보다 'Glow' 해야한다고 생각해요. 화려한 주인공보다 그림자에 가까운 직업이지만, 은은하게 제 역할을 해야하는 직업입니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통역사의 가치에 대해 강조한다. “학생들에게 통역을 가르칠 때마다 하는 말이 있어요. 통역사는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이란 거예요. 어렵기로 악명이 높지만, 노력하면 굉장히 큰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직업이죠." 자신의 길에 대한 확신이 돋보이는 최 동문. 그 뚝심으로 두 가지 꿈을 이뤘다. 첫 번째 꿈은 통역사가 되는 것, 두 번째는 통역을 가르치는 교육자가 되는 것이었다. “앞으로는 통역에 대해 학문적으로 깊이있게 접근하고 싶어요. 모교인 한양대에서도 강의를 할 기회가 있으면 언제든 맡고 싶습니다." ▲ 최현진 동문은 좌우명 ‘An aura of sophistication'처럼 세련되고 정교한 아우라가 풍기는 통역을 한다. 글/ 추화정 기자 lily1702@hanyang.ac.kr 사진/ 김윤수 기자 rladbstn625@hanyang.ac.kr

2016-11 27

[동문]극공작소 ‘마방진’ 대표 고강민 동문(경영학부 97)

고등학교 때 길거리에서 발견한 극단 단원 모집 공고. 무작정 찾아가 연극을 해보겠다고 말했다. 배우는 물론 기획, 연출 등 연극과 관련된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척척 해냈고, 다니던 고등학교 축제에서 기획과 연출을 도맡아 하기도 했다. 극공작소 ‘마방진’ 대표 고강민 동문(경영학부 97)의 어린시절 이야기다. ‘단원들이 행복해야 관객들도 행복하다’는 신념 아래 7년째 극단을 운영해오고 있는 고 동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단원들이 모여 하나의 마방진을 이루다 극공작소 ‘마방진’은 배우, 연출, 기획 등 46명의 단원들이 창작극 위주의 공연을 선보이는 극단이다. 2005년에 고선웅 연출가가 창단했으며 2010년부턴 고 동문이 합류해 대표를 맡았다. 고 동문은 극단의 프로듀서로 일하며 연극 선정, 공연장 대관부터 단원 지휘까지 공연 전반을 총괄한다. 가로, 세로, 대각선에 위치한 수의 합이 모두 같아지도록 만든 정사각형 모양의 배열을 뜻하는 '마방진'이란 이름답게 극단은 단원들의 합을 중시한다. “극단 이름에 단원 모두가 모여 최선을 다할 때 좋은 연극이 나온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고 동문은 설명했다. 마방진의 대표작은 <홍도>다. 1936년에 공연된 신파극 <홍도야 우지마라>를 각색한 작품. 지난 2014년 공연을 시작해 서울, 이천, 인천 등 전국 각지에서 공연을 선보였다. 동아연극상, 예술의전당 예술대상을 수상하는 등 평단의 호평도 받았다. 해외에서도 <홍도>에 관심을 갖고 공연을 요청했다. 특히 중동 지역에서 관심이 많다고. 중동 지역의 폐쇄적인 문화와 우리나라 유교 문화 사이에 공통된 특성이 있다는 게 고 동문의 생각이다. 지난 10월엔 아랍에미리트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 극공작소 '마방진' 대표 고강민 동문(경영학부 97)과 지난 24일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오로지 연극만 봤던 열정의 나날 고 동문은 중학생 시절 텔레비전을 통해 연극을 처음봤다. 이후 학교에서 연극을 할 기회가 있을 때면 항상 주인공을 도맡아 했고, 무료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던 중 길거리의 극단 모집 벽보를 보고 찾아가 극단의 단원이 됐다. 연극이라면 무엇이든 좋았기에 고 동문은 연극영화학과 진학을 다짐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혀 포기했고, 연극영화과에 가는 대신 연극동아리에 들어가겠다 결심했다. 그렇게 대학 입학을 하자마자 ERICA캠퍼스의 ‘무대 밖의 삐에로’에 가입했다. 대학교 재학 내내 연극에만 몰두했던 고 동문은 졸업 이후 공연제작사 ‘아츠플레이’에 입사했다. 컨설팅 분야 전문가들이 컨설팅을 통해 공연 분야의 시스템을 체계화하기 위해 세운 기업이었다. 하지만 회사에서 3-4년 가량을 일하니 회의감이 밀려왔다고.. “현장에서 일하는 연극인들과 계약을 맺을 때 회사의 상황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다 보니 제가 계속 그들에게 불리한 조건을 제시하고 있더라고요.” 고 동문의 본래 꿈은 생계 때문에 연극을 이어나가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힘쓰는 것이었다. ‘이 회사에선 내가 대학로에 악역을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한 고 동문은 그 길로 회사를 떠났다. “연극하는 사람들을 잘되게 해주려고 시작했는데 회사에만 있다 보니 이 바닥을 너무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다시 바닥에서부터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고 동문은 국악뮤지컬집단 ‘타루’에서 기획실장으로 일했고, 이후 고선웅 연출가로부터 지금의 대표직을 제안받게 됐다. 학부 시절부터 고선웅 연출가의 팬이었다는 그는 "좋아하는 연출가에게서 협업 제의를 받았다는 사실에 뛸 듯이 기뻤다”고 말했다. ▲ 지난 8월 예술의 전당에서 연극 <홍도> 공연이 끝난 후 배우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출처: 문화뉴스) 연극만의 색깔을 찾는 과정 고 동문의 신조는 연극은 영화나 드라마를 따라가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연극은 그 특성상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한다기 보단 관객들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져요. 이런 점에서 영화나 드라마와 차이를 보이죠.” 때문에 “연극은 영화나 드라마와 경쟁하려고 하기보다는 연극만의 강점을 살릴 수 있는 방식으로 공연해야 한다”고 했다. 고 동문은 아직도 연극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와 연극만의 스타일이 무엇인지, 그 답을 찾고 있다. 자본이 풍족하지 못하고 사회적 분위기에 따른 변동이 큰 문화산업의 특성상 극단 운영은 항상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을 마친 후 관객들의 환한 표정을 보는 행복감에 고 동문은 이 일을 내려놓을 수 없다. “공연이 끝나고 사람들이 퇴장할 때의 표정을 보면 공연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알 수 있어요. 작년에 칠레에서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드’를 각색한 ‘칼로막베스’를 공연할 때는 5회 공연이 전회 매진되고 기립박수를 받기도 했는데 그때의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지금껏 연극만 보고 달려온 고 동문은 큰 욕심이 없다. 그저 현재의 작품에 충실할 뿐이다. ▲ 고강민 동문이 피아노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글/ 최연재 기자 cyj0914@hanyang.ac.kr 사진/김윤수 기자 rladbstn625@hanyang.ac.kr

2016-11 27 중요기사

[동문]강렬함과 부드러움, 두 얼굴의 남자 유슬기 (2)

인기리에 방영 중인 음악예능 '팬텀싱어'에 한 남자가 무대에 올랐다. <Granada>의 라틴풍 피아노 반주가 흐르고, 강렬한 목소리에 먼저 귀가 곤두섰다. 반주는 차츰 템포를 빨리하며 부드럽게 변했고, 비장함이 가득했던 두 눈은 상대를 바라보는 눈으로, 당당히 뻗었던 양 팔은 세심한 손길로 바뀌었다.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하나의 곡에 모두 담은 그는 우리대학 출신 유슬기 동문(성악과 06). 경연 준비로 바쁜 그는 잠시 짬을 내 뉴스H의 전화인터뷰 요청에 응했다. ‘팬텀싱어’ 세상에 나오지 못한 실력자를 찾다 지난 11월 11일부터 인기리에 방영 중인 ‘팬텀싱어’는 다양한 음악 장르의 실력자를 선발해 남성 4중창단을 결성하려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도전자는 무려 2,000여명. 유슬기 동문(성악과 06)도 수많은 도전자 중 하나였다. "2015년 제대 이후 진로 고민이 많았어요. 유학을 가고자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던 중에 팬텀싱어를 알게 됐죠. 저에게 다른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참여하게 됐습니다." 우리대학 성악과와 대학원에서 갈고 닦은 실력을 바탕으로, 유 동문은 본선진출자 32명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유 동문은 본선진출 이후 첫 방송이 있었던 지난 11일 <Granada> 무대를 통해 주목받기 시작했다. 심사위원에게 "프로그램 기획 의도와 딱 맞는 인물"이란 호평을 들었다. 유 동문이 자신의 매력을 보여주기 위해 그 곡을 선택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강렬함과 부드러움 다 지니고 있는 곡이에요. 부드럽다는 사람이 강하기 힘들고, 강한 사람은 부드럽기 어렵다고 하잖아요. 전 두 가지 면을 다 소화할 수 있다는 점을 어필하고 싶었어요." 다행히 유 동문의 계산은 잘 맞아 떨어졌다. ▲ 테너 유슬기 동문(성악과 06)의 JTBC '팬텀싱어' 무대영상 성악, 자신만의 색깔로 풀어내다 유 동문에게 성악은 특별한 의미다. 인생의 전부일 뿐만 아니라, 위기 때마다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 보고 방향을 정하는 지도가 됐다. “15살부터 성악을 했고 학부 시절부터는 연습실 문을 닫는 밤11시까지 매일매일 연습했죠." 엄청난 연습량은 그에게 학부와 대학원을 수석으로 졸업하는 영예를 안겼지만, '잘해야 한다'는 중압감과 압박감을 동시에 줬다. "학부 시절에 1학년 첫 실기 시험에서 얼떨결에 1등을 했어요. 이상하게도 그 이후로 계속 '잘 해야만 해'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유슬기 동문의 표정에서 애절한 감성이 느껴진다(출처: JTBC). 그러던 중 자신의 새로운 색깔을 탐색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가수 윤민수의 보컬트레이너로 일하면서부터다. 실용음악을 접하며 유 동문은 성악 발성에 개성을 입히기 시작했다. “생각 자체가 크게 달라졌죠. 이전에는 '소리'를 위주로 노래했다면, 지금은 '노래'에 방점을 찍어요. 소리 자체의 아름다움보다 가사 전달이나 감정 표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요." 이런 점은 스승인 고성현 교수(성악과)에게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 “교수님 특유의 카리스마와 깊은 표현을 배우려 했어요. 그런 것들이 은연 중 감정과 가사 전달에 더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네요.” 팬텀싱어, 성악가 그리고 유슬기 “지금 함께 경쟁 중인 31명 모두 대단하신 분들이란 걸 느껴요. 그만큼 저도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도 느끼고요(웃음).” 유 동문은 당분간 팬텀싱어 경연에 집중하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이 추구하는 성악 스타일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죠. 앞으로 제 노래를 들은 누구나 '아! 이건 유슬기의 목소리다'라고 알아차릴 수 있도록 제 색깔을 명확히 하고 싶습니다." 팬텀싱어를 통해 성악가로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유슬기 동문이었다. 글/ 박성배 기자 ppang1120@hanyang.ac.kr

2016-11 22 중요기사

[동문]'하태핫태' 만든 주인공, 더해피프로덕션 대표 김정훈 동문(연영과 83)

다음의 상황을 듣고 떠오르는 장면을 상상하시오. 땀이 쏟아지는 엄청난 폭염, 매운 음식을 먹고 어쩔 줄 모르는 친구, 개봉과 동시에 흥행에 성공한 영화, 금요일 밤 홍대의 길거리. 이 모든 상황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까. 올해 바로 그런 유행어가 있었다. '하태핫태!'. 올 여름을 강타했던 이 문구는 어느 광고쟁이의 손 끝에서 탄생했다. 30여년 동안 각종 히트작을 만들어 온 김정훈 동문(연극영화학과 83)이다. 유학 준비 중에 '덜컥' 광고계에 입사하다 ▲지난 11월 17일 강남구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김정훈 동문(연극영화학과 83)을 만났다. 김정훈 동문은 더해피프로덕션의 대표 CF 감독이다. 초등학교 소풍의 필수템이었던 ‘깜찍이 소다’와, 톱스타 이효리가 등장했던 ‘델몬트 망고’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많은 광고가 그의 손을 거쳤다. 이번 여름에는 오션월드 광고로 소위말해 '대박'을 쳤다. 랩퍼 지코를 출연시켜 '하태핫태'라는 유행어를 만들었다. 이쯤되면 '히트작 제조기'라 불릴 만하다. 대학 졸업 후 30여년 동안 광고계에 종사하고 있는 김 동문은 우연한 기회로 그 길에 들어섰다. 연극영화학과 출신인 그에게 광고계는 생소한 분야였다. “원래는 졸업 후에 영화 이론을 더 공부하고 싶어서 유학을 준비했어요. 그런데 부모님께서 '대학을 6년이나 다녔으면 취업을 해야하지 않겠냐'고 성화를 내셔서 홧김에 원서를 냈어요.” 막상 광고 회사에 원서를 접수하고 나니 만만치 않은 경쟁률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김 동문은 6차례 시험을 술술 통과하며 덜컥 PD로 입사하게 된다. “연극, 영화와 광고는 같은 맥락에 있다고 생각해요. 창작욕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다는 측면에서요. 이런 점 때문에 광고계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영상물은 광고가 될 수도, 영화가 될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Creative’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결과물인 거죠.” 학부 시절 연출, 기획 등으로 연극에 참여한 경험도 좋은 바탕이 됐다. 이후 여러 프로덕션을 거치며 업계에서 입지를 다졌고, 1996년 더해피프로덕션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히트작은 CF 감독의 숙명 “CF 감독은 숙명이 있어요. 남들이 알만한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히트작이 있어야 사람들이 믿고 일을 맡겨요." 김정훈 동문은 회사 설립 후 ‘깜찍이 소다’를 시작으로 수많은 히트작을 만들었다. "운이 좋았죠. 좋은 작품을 맡는 것도 행운이에요." 겸손하게 손사래를 쳤지만, 김 동문의 히트작 뒤에는 철저한 기획 및 제작 과정이 있었다. “광고를 만들 때는 '왜 이런 컷을 써야하는가'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해요. 시장 상황이나 소비자의 패턴에 부합하는 논리가 없으면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죠.” 김정훈 동문은 사전에 모든 합의를 마친 후에야 디렉팅을 시작한다. 한 작품만으로도 바쁜 광고 업무지만, 김 동문은 한 박자 더 빠른 쪽을 선호한다. “광고는 한 편만 작업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항상 복수의 작품을 구성하고 분류하는 작업을 진행하죠. 머리 속으로요. 촬영 중에도 다음 편을 구상하거나, 새로운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려요.” 멀티태스킹이 가능한 김 동문에게 일련의 광고 작업은 적성에 딱 맞았다. ▲ '히트작 제조기' 김정훈 동문이 지금까지 제작한 광고들 (출처: 김정훈 동문) 하지만 모두가 주목할 작품을 만들어야 한단 사실이 압박이 되기도 했다. “5년 전에 신경정신과 상담을 받았어요. 중요한 PT 전날이면 잠을 제대로 못 자겠더라고요. 꿈 속에서도 PT를 하고, 광고주가 제게 했던 질문이꿈에서 깬 뒤에도 생생했어요. 스트레스 때문에 가수면 상태가 지속돼서 그렇대요.” 그럼에도 김 동문은 자신의 광고로 인해 구매율이 올랐을 때의 희열 때문에 이 일을 놓을 수 없다. “일반적인 디렉터는 '아트'를 하지만, 광고는 상업 예술이에요. 광고를 본 사람이 제품을 사느냐, 아니냐가 성공을 결정하죠. 우리 회사에서 만든 광고가 히트 상품으로 이어질 때 가장 큰 보람을 느껴요.” 환갑 때까지 광고 만들고 싶어 크리에이티브한 사고에 대한 노하우를 묻자 김 동문은 주저 없이 ‘관찰’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회의를 할 때도, 술자리에 앉아서도 관찰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왼쪽 다리 위에 있는 찢어진 청바지 구멍을 왜 저렇게 만지고 있을까?’ 이런 식으로 사람을 많이 보는 편이죠(웃음). 그런 이유를 끊임 없이 가정해보고 머리 속에 담아둬요." 사고하기를 멈추지 않는 그에겐 한 가지 목표가 있다. “환갑 잔치를 촬영장에서 하려고요. 많은 이들이 나이가 많으면 설 자리가 줄어든다고 생각하는데, 크리에이티브에는 나이 제한이 없어요. "제 아이디어가 논리적으로나 창의적으로 적절하지 않고, 분석력이 떨어진다 느낄 때까지는 일해야죠. 잘하면 70세까지도 가능하지 않을까요?(웃음). ▲ 차가운 논리와 뜨거운 아이디어가 건재하는 한 김정훈 동문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글/김상연 기자 ksy1442@hanyang.ac.kr 사진/김윤수 기자 rladbstn625@hanyang.ac.kr

2016-11 21

[동문]코리안심포니 오케스트라 작곡가 박명훈 동문

“현대음악은 복잡한 21세기를 잘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난 10월 11일, 코리아심포니 오케스트라 상주 작곡가로 위촉된 박명훈 동문(작곡과 99)이 말하는 현대음악의 정의다. 학창 시절부터 자신만의 개성을 살린 곡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했다는 박 동문.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또, 어떤 음악 세계를 지니고 있을까. Q1. 코리안심포니 오케스트라 상주작곡가로 위촉되셨습니다. 소감이 어떠신가요. 한국에는 2-3년전까지만 해도 ‘상주작곡가’라는 개념이 없었어요. 오케스트라 입장에선 자금 문제가 있고, 계약 관리도 힘드니 쉽게 시도하지 않았었죠. 그런 점에서 별다른 제약 없이 제가 만든 곡을 들려드릴 수 있게 돼서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또 저와 같은 현대음악 작곡가는 대단위 오케스트라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쉽지 않기 때문에 굉장히 기대가 됩니다. Q2. 상주작곡가는 어떤 방식으로 일하게 되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오케스트라 상주작곡가는 간단히 말해 소속 오케스트라를 위해 곡을 쓰는 작곡가를 의미해요. 이번 경우에는 코리아심포니 오케스트라가 2018-19년에 연주할 음악을 1년 동안 작곡하게 되는 거죠. 현재 요청 받은 시간은 30분인데, 15분 분량의 곡 두 개를 작업할 생각이에요. 하나는 피아노 협주곡으로 진행하려 하고, 나머지 하나는 아직 구상 단계에 있습니다. 1년이 결코 긴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열심히 작곡에 매진해야할 거예요(웃음). Q3. 우리대학에서 강의도 진행 중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상주작곡가 외에 맡고 계신 다른 일이 있다면. '작곡워크샵'이라는 4학년 과정을 맡고 있어요. 한국에선 잘 연주되지 않는, 가장 최신 경향의 작품을 듣고 분석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굉장히 의미가 있어요. 상대적으로 약한 한국의 현대음악 필드에 몸담을 인재를 기르는 거니까요. 출강 외에도 앙상블 아인스(Ensemble Eins)에서 예술감독과 작곡가를 맡고 있어요. 제 작품을 연주할 수 있는 무대이기도 하고, 다른 음악가에게 앙상블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도 열어줄 수 있어요. 상주작곡가도, 앙상블 활동도, 학교 강의도 제게는 나름의 의미가 있어요. ▲ 지난 11월 18일 코리안심포니 오케스트라 박명훈 동문(작곡과 99)을 만나 소감을 들었다. Q4. 음악은 어떻게 전공하게 되셨나요. 4살 때 피아노를 처음 배우게 됐어요.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는 피아노 학원과 미술 학원을 다 다녔었죠. 아버지께서 화가셨는데 '그림으론 힘들다. 음악 쪽으로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하셨어요. 그래서 음악을 계속 공부했고, 피아노는 흥미가 떨어져 그만두고 작곡으로 방향을 옮기게 됐죠. Q5. 대학 졸업 후에 독일로 유학을 가셨죠.. 대학 생활과 유학 시절에 관해 들려주신다면. 대학 때 공부를 같이했던 후배가 있어요. 그 친구랑 음대 친구들과 같이 ‘FCG(Free Composition Group)’란 동아리를 만들어서 매해 새로운 곡을 발표하는 리사이틀을 진행했어요. 동아리는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어서 가끔 공연을 보러 가요. 후배들이 기특하기도 하고, 저도 감회가 새롭더라고요. 졸업 후에는 독일의 쾰른과 뒤셀도르프에서 9년 동안 유학 생활을 했어요. 독일은 한국과 달리 현대음악에 대한 관심이 높고, 작곡 환경도 열려있단 게 가장 좋았어요. 한국의 연주자들은 클래식 오케스트라, 앙상블에 주로 참여하려 하는데 유럽은 오히려 새로운 작품에 대한 관심이 컸거든요. 덕분에 저만의 개성을 가진 음악을 완성하는 계기가 됐죠. ▲ 박명훈 동문은 지난 지난 5월 29일 '토루 타케미츠 국제작곡콩쿠르'에서 2위에 올랐다. 작곡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 중에 하나다. (출처: 박명훈 동문) Q6. 작곡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어떤 예술 분야든 ‘개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나만의 것'을 만드는 일이 사실은 굉장히 어렵거든요. 하지만 일단 개성을 지니게 되면 그 값어치는 상당히 커져요. 제게 그런 개성을 표현할 수 있게 영감을 준 것은 '그림'이었어요. 아버지가 화가셔서 그랬는지, 미술 작품에 영감을 받아 작곡을 시도했던 적이 많아요. 파울 클레의 그림을 보고 음악화하는 작업도 진행했고, 최근 '토루 타케미츠 국제작곡콩쿠르'에서 2위에 입상했던 곡도 아버지의 그림에 영감을 받았죠. Q7. 실제로 연주를 맡기면 구상했던 것과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연주자와의 협업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작곡은 저만의 생각을 표현한 것이라서 실제 연주 과정에선 '소통'도 중요한 점 중에 하나예요. 머리 속에서 구상했던 것이 연주자를 통해서 표현되지 않고, 나아가 관객에게 전달되지 않는다면 제 작품은 자기 만족에 지나지 않을 거예요.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고 드러내기 위해서는 연주자와의 소통, 그리고 관객과의 소통이 필수적이죠. 결론적으로 작곡은 '개성', 표현은 '소통'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Q8.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목표가 궁금합니다. 유학 시절 중에 만났던 동료가 제 곡에 대해서 "꼭 너 같은 곡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저의 개성을 인정 받은 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전 기본적으로 ‘작곡가’입니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이나 앙상블 활동도 의미가 있지만, 역시 저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작곡' 그 자체에 있겠죠. 그런만큼 여기서 머무르지 않고 계속해서 좋은 음악을 들려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앙상블 아인스가 연주한 박명훈 동문의 작품 'encounter for alto flute, english horn, violin, viola and contrabass' 글/ 박성배 기자 ppang1120@hanyang.ac.kr 사진/ 박민영 기자 manutdmin@hanyang.ac.kr

2016-11 16

[동문][희망, 100℃] 한양을 빛내는 아름다운 사랑의 실천

이종훈 회장은 자랑스러운 한양의 선배로서, 활발한 동문회 활동과 발전기금 기부 등을 통해 누구보다 한양의 발전에 앞장서 왔다. 현재까지 모교를 위해 6억 원이 넘는 발전기금을 기부하여 명예의 전당 President's Honor Club에 등재된 이종훈 회장을 만나 그가 꿈꾸는 한양발전에 대한 희망을 들어보았다. ▲이종훈 동문(사학과 75)은 인천도시가스 회장직 외에도 한양대 동문장학회 이사장, 한양발전후원회 1기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다. 도전과 성장의 한양을 이끄는 힘, 기부 이종훈 회장은 적극적인 동문회 활동과 발전기금 기부 등을 통해 모교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며 각별한 '한양 사랑'을 실천해왔다. 특히 모교 동문장학회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대학의 안정적 운영을 위한 재정 지원의 필요성과 발전기금의 중요성에 대해 절실히 깨달았다고 한다. 최근 모교에서는 집중거액모금캠페인과 대중모금캠페인 등 다양한 모금활동을 추진하며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만, 이종훈 회장은 여전히 대학의 재정 확충의 필요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총장님과 대외협력처 관계자, 그리고 동문들께서 재정 확충을 위해 애를 쓰고 계시지만, 아직도 주요 경쟁대학들에 비해 많이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무엇보다 젊은 동문들의 호응과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모금에 대한 아이디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진행되고 있는 대중모금 캠페인 <Club 동행한대>와 같이 후배를 사랑하는 동문들의 뜨거운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모금 캠페인, 작지만 큰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대중적인 모금 캠페인이 한양의 도전과 성장에 큰 힘이 된다는 것이다. 이종훈 회장은 그러한 작은 아이디어가 여러 동문의 마음을 열고 기부에 한 걸음 다가서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사랑의 실천으로 함께하는 ‘동행’ ▲ 2015년 9월 한양발전후원회 정기모임 (BMW드라이빙센터)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함께 ‘동행’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 학교의 교훈은 ‘사랑의 실천’으로, 나눔이야말로 사랑을 실천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사는 공동체 구성원의 하나로서 당연한 의무가 나눔이라고 이종훈 회장은 말했다. 그러한 평소의 생각대로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기부를 실천하고, 그것이 한양이 말하는 ‘사랑의 실천’의 길임을 강조했다. 한양대는 명문 사립대학으로서 위상을 드높여왔으며, 이제 세계적인 명문 대학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이종훈 회장은 특정 학과를 더욱 특화시켜 나감으로써 국내에서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명문대학으로 우뚝 설 수 있다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 그러한 학과의 발전으로 학교 전체의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특정한 학과의 발전과 세계적인 대학으로서 한양이 그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는 발전기금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도 덧붙였다. 글로벌 한양의 꿈을 앞당기는 것이 바로 모교의 발전을 위하는 동문의 힘에 있다는 것이다. 뜻은 높게, 자세는 낮게 ▲2016학년도 2학기 한양대학교 동문장학회 장학금 수여식 이종훈 회장은 근면과 성실의 아이콘으로 통한다. 최고를 향하는 것이 아닌 최선의 힘을 믿기에 성실한 행동주의자인 지금의 그가 있을 수 있었다. 근면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분야에서 노력하면 반드시 그 보상은 따라온다는 신념으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왔다. “어릴 적 어른들께서 말씀하시길, 대부는 재천(在天)이고 소부는 근면이라고 말을 하시곤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열심히 노력하고 근면하면 반드시 보람은 뒤따라온다고 생각합니다.” 이종훈 회장이 자랑스러운 한양의 선배로서 그 이름을 드높여온 것도 특유의 성실함과 목표에 대한 굳은 의지 덕분이었다. “‘뜻은 높게 자세는 낮게’ 매 순간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여 목표를 향해 나아가십시오. 원대한 것만 같던 꿈도 여러분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기부는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가장 아름다운 행위라는 것이 이종훈 회장의 생각이다. 누군가의 꿈을 지원하고, 그 꿈이 실현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주는 것, 작은 손길이 다른 이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바로 기부라는 것이다. 이종훈 회장은 기부라는 뜻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이기에 기부의 액수 때문에 고민하거나 기부 자체를 망설일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망설이는 그때가 바로 기부를 행해야 할 때이고, 기부에 대한 결심이 섰을 때 함께하는 마음이 통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기부는 '돈'의 크기가 아닌 '마음'의 크기와 그를 실행하는 실천력이 중요한 것이라고 했다. “다음이나 내년으로 미룰 것이 아니라 지금 바로 기부를 실천해 보세요, 크고 작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천’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한양의 이름이 세계 속에서 빛나게 하기 위해 '실천'하는 한양인 이종훈 회장의 '사랑'의 마음은 앞으로도 계속 전해질 것이다.

2016-11 16

[동문]문득 흥얼거리는 노래를 만들고 싶다, 싱어송라이터 가호

"힘들 때나 즐거울 때 문득 부르게 되는 노래를 만들고 싶다". 싱어송라이터 '가호'로 활동하는 임지선 동문(무용학과 05)의 바람이다. 임 동문은 조용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심정을 음악에 옮긴다. 몇 년 전부터 앓고 있는 돌발성 난청 때문에 어려움도 많지만, 음악은 그가 '살아가는 힘'이자 '숨쉬는 원동력'이다. 임 동문의 연습실 근처에 위치한 합정동의 어느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 “신의 가호를 바란다는 뜻에서 '가호'라는 예명을 만들었어요. 지난 2012년부터 사용하고 있죠." 오전 11시에 잡힌 인터뷰 때문에 이른 시간에 기상한 임 동문은 "평소 자는 시간에 깨어있어 피곤하다"고 웃었다. 오는 12월 발매할 앨범 작업 때문에 밤새 곡을 쓰고 아침에 잠자리에 드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낮에는 작업이 잘 안되더라고요. 밤낮이 바뀐 생활이 버릇이 됐어요." 임 동문은 직접 곡을 쓰는 싱어송라이터다. 임 동문이 멜로디와 가사를 만들면, 세션들과 함께하는 편곡 작업이 이어진다. 평소에는 건반을 치는 친구와 함께 홍대 인근에서 밴드 공연을 주로 연다. ▲ 임지선 동문(무용학과 05)이 지난 11월 15일 인터뷰에서 자신의 예명인 '가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임 동문이 '돌발성 난청'을 앓고 있단 점이다. "갑자기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어요. 병원에 갔더니 스트레스로 인한 돌발성 난청이라고 했어요. 120 데시벨 이상의 소리만 들을 수 있어서 답답했죠." 졸업을 앞둔 시점부터 약 2년 정도 지속된 난청은 "부모님 목소리가 기억이 안날 정도"로 악화됐다. 때문에 임 동문은 공연장 진동에 의지해 노래를 불렀다. "드럼에서 발로 차는 동작인 '킥' 소리나, 벽 진동에 의지해 노래를 했어요." 그럼에도 음악 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다행히 증상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6개월 정도 음악을 했더니, 어느 날부터 선명하진 않았지만 멜로디가 들렸어요. 처음에는 어리둥절했고, 곧 '다시 들리는구나' 싶어서 눈물이 났죠." 여전히 치료 중에 있는 임 동문은 잘 들리지 않는 왼쪽 귀를 보호하기 위해 작업할 때도 왼쪽 귀를 막는다. 20년 꿈 무용 접었지만 현재에 만족해 임 동문은 한국무용을 전공했다. 무용과에 있는 대다수 학생들처럼 임 동문도 어려서부터 무용만을 바라봤다. "20년 가까이 무용만 했는데도 제 길이 맞는지 고민이 됐어요. 무용을 계속할 자신도 없었고." 선택의 기로에 선 그는 결국 음악을 택했다. "음악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다룰 수 있는 악기는 피아노 밖에 없었어요. 무모하게 뛰어든 거죠(웃음).” 음악을 한다는 딸의 말에 부모님 반대도 컸지만, 지금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만으로 행복하단다. 학부 시절부터 밴드 음악을 좋아했다는 임 동문의 노래는 자신이 즐겨 듣던 음악을 꼭 닮았다. "밴드 음악을 좋아했어요. 특히 '넬'에게 푹 빠져서 고등학생 때부터 앨범을 모으고 콘서트를 보러갔죠." 작곡을 배운 적은 없어 느낌에 의지해 곡을 쓴다. 떠오르는 멜로디를 녹음해뒀다가 곡으로 만든다. "연인과 헤어진 직후나, 감정의 기복이 심할 때 곡을 써요. 그러면 제 기분이 노래에 그대로 드러나요." 예컨대 사랑을 노래한 곡 'Do you fee the same'은 자신의 연애 경험을 담았다. “스웨덴 친구와 연애했을 때, 일주일 동안 스웨덴으로 여행을 갔어요. 당시의 설렘과 낭만에 취해서 이렇게 즐거운 느낌의 곡을 만들게 됐죠." ▲ 싱어송라이터 가호로 활동하는 임지선 동문의 'Do you feel the same' 라이브 영상. 음악은 나의 힘! 임 동문은 음악이 “살아가는 힘이자 숨쉬는 원동력”이라고 했다. “노래하는 것은 아직도 어렵고 힘들어서 트레이닝을 계속해서 받아요. 비음을 쓰면서도 힘이 있고 안정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연습하고 있어요.“ 임 동문은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꼭 할말이 있다고 했다. "저는 학부 전공과 무관한 일을 하고 있어요. 전공에 너무 얽매이지 않고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을 꼭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임 동문의 꿈은 많은 이들이 힘들 때나 즐거울 때 문득 흥얼거리는 노래를 만드는 것이다. ▲ 임지선 동문은 음악이 '살아가는 힘'이자 '숨쉬는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글/ 추화정 기자 lily1702@hanyang.ac.kr 사진/ 김윤수 기자 rladbstn625@ha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