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478건
뉴스 리스트
게시판 리스트 컨텐츠
2016-10 31

[교수][기술 한양] 변화를 이끄는 공간의 완성

안기현 교수는 최근 2016년 ‘젊은 건축가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또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 한국관 전시에 공동 큐레이터로 참여해 ‘용적률 게임’이라는 주제로 전시를 기획, 성공적으로 마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정리. 오인숙 / 사진 제공. 안기현 교수) 올해의 젊은 건축가상 수상 ‘젊은 건축가상’ 2016년 수상자로 안기현 교수가 선정됐다. 준공된 건축물과 공간 환경의 완성도, 건축과 사회에 대한 사고, 조직과 작업 방식, 변화 환경에 대한 대응 능력 등 건축가로서의 기본 역량과 잠재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결과다. 이 상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우리나라의 미래 건축 문화를 선도할 우수한 젊은 건축가를 발굴하고 이들의 활발한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됐다. 올해는 총 28개 팀이 지원해 3팀(5명)의 최종 수상자가 선정됐으며, 안기현 교수는 AnlStudio 건축사사무소 신민재 대표와 함께 ‘AnlStudio’ 팀으로 수상자에 이름을 올렸다. 심사 총평에서는 “물리적인 공간을 창의적으로 조직하는 건축가로서뿐 아니라 새로운 미디어와 테크놀로지로 건축의 사용자 그리고 건축 생산에 관련된 이해 당사자들 모두에게 열린 플랫폼으로 확장된 영역에서 건축을 도모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는 평가를 받았다 ▲서울 신당동에 위치한 근린생활시설 건물로, 효율성과 경제성을 유지하면서 작은 입면의 변화를 통해 각 층별로 다양한 공간을 연출했다 ▲ 아모레퍼시픽뮤지엄에 설치했던 아트워크로, 연질의 플라스틱 파이프를 이용해 경계가 불분명한 파빌리온을 구축했다 ▲ 10평의 땅에 올린 3층의 작은 건물이지만 그 제약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담아낸 극소주택 인식 혹은 행동의 변화를 유발하는 공간과 건축 안기현 교수가 운영하는 AnL연구실에서 주력하는 연구 분야는 ‘인식 혹은 행동의 변화를 유발하는 공간과 건축’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많은 부분의 공간과 건축은 경제성과 효율성의 논리 아래 천편일률적으로 생산돼왔습니다. 쉽게는 서울 인구의 반이 거주하는 아파트가 그렇고, 한양대 학생들이 매일 공부하는 교육 공간도 예외는 아니죠. 저희 연구실은 이런 일상 속에 결여되어 있는 여러 개인적·사회적 표현 욕구와 충족되지 못한 요구들을 수용할 수 있는 다양성이 존재하는 건축과 공간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다채로운 삶의 방식들을 제안해나가고 인식 혹은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도시환경은 지난 60년간 근대화에서 산업화 과정을 거쳐 빠르게 성장해왔다. 이 과정에서 성장과 개발을 위해 생산성과 기능성에 집중하다 보니, 간과된 것들 혹은 편향된 가치와 삶의 방식으로 채워진 것이 많다. 동시에 저성장시대에 접어들면서 건축(공간)에 대한 사회문화적 요구는 다양해지고, 그 양상은 더 가속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안 교수는 “AnL연구실이 많은 이용자의 인식과 일상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도록 건축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을 제안하고, 이를 통해 풍성한 문화를 이끌어가는 역할을 수행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일상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과정 AnL연구실의 작업은 하드웨어 제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익숙한 환경을 새로운 방식으로 조율하려면 물리적인 하드웨어뿐 아니라 내재해 있는 다양한 습성과 문화를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좁은 시야에 갇히지 않고 과거와 현재, 지역과 전체, 이상과 현실, 개인과 집단과 같은 21세기의 공간적 조건을 폭넓은 스펙트럼으로 탐구해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AnL연구실에서 진행하는 미디어의 발달과 변화에 따른 설계 방법의 연구, 빅 데이터와 연관된 건축 환경 변화와 분석 방법에 대한연구, 디지털 툴과 구축 방법의 변화에 따른 건축 설계 및 구축 방법의 비교 연구, 스토리텔링 및 브랜딩과 연관한 공간/건축/도시설계 연구는 이에 필요한 리서치와 디자인 툴이다. 안 교수의 연구는 미래의 공간과 건축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저희 연구실의 작업은 모범 답안을 찾기보다 대안을 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폭넓은 스펙트럼의 해석과 다양한 해결 방안을살펴야 하기에 무엇보다 과정이 중요합니다. 이런 과정들이 누적되어 새로운 프로젝트에 더 넓은 스펙트럼을 제공할 때 우리의 작업이 연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겠죠.” 이렇게 확장된 사고가 결국 우리의 일상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믿는다. 의미 있는 건축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 안기현 교수가 지향하는 연구실은 좀 더 넓은 범위를 아우를 수 있는 말랑말랑하고 다방면의 기능을 갖춘(generalist-ic) 모습이다. 일례로, 디자인만이 아닌 계획에서 시공(직접 제작하는 수작업 포함), 건축에서 건축물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설치미술, 리서치, 전시 기획)까지 참여하고 조율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자세는 내부만이 아닌 외부로도 향해 있다. 관련 기술자나 협업 작가 심지어 클라이언트에게도 적용된다. 다양한 생각과 문화를 존중하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노력인 셈이다. “아직까지는 먼 미래보다는 주변에서 가능한 모든 재원을 파악하고 스펙트럼을 넓히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저희 연구실 역시 끊임없는 변화로 다양한 요구에 빠르게 대응하는 태도를 유지하고, 확장된 다양성으로 의미 있는 건축을 찾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안기현 교수와 AnL연구실의 의미 있는 도전이 앞으로 또 어떤 성과를 거둘지 귀추가 주목된다.

2016-10 18

[교수]학자의 길로 돌아온 법관, 양창수 교수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지난 2014년 9월 대법관의 임기를 마치고 우리대학에 부임한 양창수 교수(법학전문대학원)는 헌법 제10조를 직접 읽어주며 우리나라가 나아갈 기본 방향이 이 조문에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11년의 법관 생활을 마치고 양창수 교수의 대법관 시절 (출처: 연합뉴스) 양창수 교수(법학전문대학원)는 1976년 군법무관으로 법률가의 삶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서울대 법대, 사법고시, 연수원, 판사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트랙을 밟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판사직에 오래 있지 않고 1985년 서울대 법대 민법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다양하고 복잡하게 변화하는 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법 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학자 생활을 동경했습니다. 짧은 판사 생활 중에, 사회 맥락과는 무관하게 소개되는 법 이론만으론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가 어렵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교수로 24년 간 재직한 양 교수는 지난 2008년 임기 6년의 대법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법관이 되어서도 법관과 학자 사이에서 끊임 없이 갈등해야 했다. “법관은 늦지 않게 사건에 대한 결론을 내려야겠지만, 저는 결론을 내리게 된 과정을 이론적으로 면밀하게 검토하고, 그 결과를 판결문에 담고자 했습니다.” 양 교수는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는 판례를 재검토하고, 더 적절한 판결을 내릴 때 보람을 느꼈다. 하지만 끊임 없이 새 사건을 맡다 보면 모든 경우를 꼼꼼하게 검토할 수 없어 아쉬움이 많았다. 양 교수가 보기에 종전의 판례는 성급한 것이 많았고, 현 상황에 비춰 재고돼야 할 것도 많았다. “재판은 시대 상황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유형의 범죄, 새로운 거래 형태는 계속해서 생겨나요. 이에 대해 오랜 시간 가다듬은 판단을 내리는 것이 대법관의 책무죠." 양 교수가 우리대학 교수로 부임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판사와는 달리 교수는 자유가 있잖아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스스로 택해서 연구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죠." 개인은 국가보다 앞서야 ‘개인의 기본권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는 양 교수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인류의 발전 경험을 지표로 만든 것이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헌법 제10조를 보세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하죠. 모든 사람은 남을 해치지 않는 한 자신이 좋아하는 방식대로 살 권리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양 교수는 국가가 개인에게 인권을 '하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국가 이전에 가지는 기본권이 있다고 했다. 그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국가가 존재한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양 교수는 "개인이 국가에 앞서야 한다"고 말했다. “선공후사(先公後私)이나 멸사봉공(滅私奉公), 이런 말들이 나오게 된 맥락은 이해하지만, 말 자체로는 헌법 정신을 위배합니다. 전체를 위하여 개인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 법의 정신에 맞지 않습니다.” ▲ 지난 12일 제2법학관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양창수 교수가 헌법 제10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양 교수는 개인이 진정 원하는 바를 고민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고 말했다. “사실 기본적인 가치는 1948년의 제헌헌법을 통해 선언됐어요. 안타깝게도 광복 이후 기아와 전쟁, 분단을 거치며 이런 생각이 퇴색되고, 국가를 위해 많은 개인이 희생됐죠. 하지만 이제는 달라야 합니다.” 개인의 부활을 위해 양 교수가 가장 시급하게 생각하는 문제는 학교 교육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올바른 지향점과 가치관을 제시하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변화에는 그 변화가 지향하는 인간상에 맞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개인이 교육을 통해 자유롭게 자신의 지향점을 탐구하고, 국가는 개인이 원하는 바를 뒷받침하는 것이 양 교수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다. 사람에 대한 관찰이 법 적용의 기반 양 교수는 법조계, 특히 판사를 꿈꾸는 학생들이 갖춰야 할 능력으로 ‘법 공부에 대한 성실한 태도’와 함께 ‘사람에 대한 관찰’을 꼽았다. 사건을 재구성하고, 당사자의 언행의 의미와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에 대한 예리한 관찰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인생은 100억년이 넘는 우주에 시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하지만 그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제 인생의 원칙입니다. 나아가, 법조인으로 살면서 언제나 사회보다 그 속의 개인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양 교수와의 인터뷰는 사람을 위해 법이 있다는 가치를 다시 상기시켰다. ▲ 양창수 교수는 ‘법공부에 대한 성실한 태도’와 함께 ‘사람에 대한 관찰’이 법관의 중요 자질이라고 얘기한다. 글/박성배기자 ppang1120@hanyang.ac.kr 사진/최민주기자 lovelymin@hanyang.ac.kr

2016-09 21

[교수]사서(四書) 완역, 24년간의 결실 맺다

1992년 여름, 우리대학 부총장을 역임했던 고(故) 김병채 교수와 대만유학 1세대 동료 학자들이 모여 ‘동양고전연구회’를 설립했다. 이들은 동양철학의 기본서인 사서(<논어>, <맹자>, <대학>, <중용>)의 온전한 번역을 시작으로 연구 범위를 넓혀 나가고자 했다. 그렇게 흐른 시간이 24년, 지난 8월 드디어 완역본이 출간됐다. 김병채 교수의 권유로 2009년부터 번역작업에 참여해 지난 8년 간 <대학>, <중용>의 수정 작업과 <맹자>의 번역 작업에 참여한 김태용 교수(철학과)에게 25년 간의 완역 작업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김태용 교수(철학과)를 지난 9월 6일 연구실에서 만났다. 김태용 교수는 "사서에 대한 책임감이 나를 번역 작업으로 이끌었다"고 했다. 전공 분야 아니라 망설였지만 책임감에 참여해 김태용 교수는 중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자리를 잡아가던 지난 2009년 고(故) 김병채 교수로부터 번역 작업에 참여할 것을 제안 받았다. 노자(老子)를 전공한 김 교수는 전공 분야가 아니라는 생각에 처음에는 참여를 망설였다고 했다. “<중용>으로 학위논문을 쓰긴 했지만 제 주전공이 아닌 원전을 번역한다는 것, 특히 유가의 가장 중요한 서적인 사서를 번역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어요.” 그런 그를 번역 작업으로 이끈 것은 사서에 대한 ‘책임감’이다. “모든 동양철학자들의 입문서가 사서예요. 그 책들을 통해 처음으로 한문을 익히고 동양철학의 기본 관념을 배우죠.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사서의 목소리를 ‘원의(原意)’ 대로 전달해 지금의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게 하겠다는 책임감은 김 교수를 동양고전연구회로 이끌었다. 김 교수가 참여할 당시 동양고전연구회는 이미 10년 간의 <논어> 번역을 마친 후 2002년 출간하고, <대학>과 <중용>의 번역 작업을 마무리하던 시점이었다. 김 교수는 <대학>과 <중용>의 수정을 맡고, <맹자>의 초역과 완역에 참여하게 된다. 여러 학자가 모여 정확한 번역에 뜻을 모으는 것은 지난한 과정이었다. “여러 세대, 여러 대학에서 모인 학자들이니 의견 차도 많았죠. '모두가 해석에 동의할 때까지'라는 원칙 아래 어떨 때는 7-8시간씩 토론하기도 했습니다." 토론을 통해 합의를 도출해도 다른 작업이 있었다. “의미에 대해 합의한 이후에는 적절한 표현을 찾는 과정이 뒤따랐어요. 옛 문헌을 지금에 옮기다보니 표현을 찾기가 쉽지 않았죠.” 이처럼 여러 단계의 장고를 거쳐 <대학>과 <중용>은 도합 8년, <맹자>는 3년이 걸려서야 세상에 나왔다. ▲사서는 <논어> 번역에 10년, <대학>과 <중용>에 8년, <맹자>의 번역에 3년이 걸렸다. 이후 검토와 수정 작업까지 24년이 걸려서야 완역됐다. 사서(四書) 번역의 방향성과 원칙 동양고전연구회는 기존의 사서 번역과 어떤 차이를 두고 작업했을까. 평균 5-6년이란 긴 시간을 번역에 힘쓴 데는 3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원의(原意)’에 가깝게 쓰는 것. “우리나라에서 나온 사서의 번역본은 주희(朱熹)의 주석본에 기초하고 있어요. 하지만 주희는 사서가 집필된 시기와 800-900년 정도의 거리가 있는 학자입니다." 동양고전연구회는 주희의 해석을 벗어나 사서가 집필될 당시에 맡는 의미를 밝히고자 했다. “사서가 집필됐던 당대부터 나온 모든 주석본을 참고하며 썼습니다. 작업이 더딜 수 밖에 없었죠." ‘현대적 언어로의 번역’에도 공을 들였다. “동양고전연구회의 취지는 ‘동양고전에서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을 찾기 위함’이에요. 때문에 현재의 독자들이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김 교수를 비롯한 동양고전연구회 학자들은 지난 2014년 번역이 일단락 됐음에도 불구, 출판사 측과 합의해 2년 간의 수정 작업을 추가로 거쳤다. “당시에는 뜸만 들이고 출판은 안 한다고 출판사 내부에서 불만이 많았어요. 결과물을 보니 그 시간이 헛된 것이 아니었음이 느껴집니다." 마지막은 ‘이름을 건다’는 책임감. “학자에게 자신의 이름을 걸고 글을 쓴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예요. 자신이 쓴 것에 대해 모두 책임을 지겠다는 거니까요." 우리대학 교수진뿐만 아니라 강원대, 연세대 등 여러 대학의 학자가 모여 자존심을 걸고 작업했다. “'지(知)'라는 글자 하나를 해석할 때도 도덕을 뜻하는 지(知), 앎을 뜻하는 지(知) 등 다양한 해석이 가능했기 때문에 앞뒤가 맞을 수 있도록 조율하고 통일하는 과정이 굉장히 중요했어요.” 결국 ‘원의의 탐구’, ‘현대적 해석’, ‘학자의 명예’라는 3가지 요소는 번역 과정을 지난하게 했던 동시에 더 ‘완전한’ 번역본이 만들어질 수 있게끔한 원동력이었다. 사서(四書), 현대적 감각으로 다가설 수 있길 김 교수는 동양철학이 생소하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 “한국의 근대화 이후 들어온 서양철학의 역사는 기껏해야 100년이지만 동양철학은 최소 500년 이상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어른에게는 예의를 갖춘다’, ‘친구 사이는 신의가 있어야 한다’와 같은 것들은 우리 삶의 일부분이에요. 동양철학은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해하기 쉬울겁니다.” 이번 사서의 완역이 우리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으면 한다는 김 교수는 <논어>의 한 구절을 전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격물치지(格物致知), 즉 ‘지식을 넓히고 쌓는 것’을 의미해요. 하지만 정심성의(正心誠意), 즉, 바르게 마음을 가다듬고 그 지식을 사용해야만 세상을 아름답게 할 수 있을 거예요. 사서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바른 마음과 성실한 뜻을 찾아보길 바랍니다." ▲김태용 교수는 지식을 넓힌단 의미의 '격물치지(格物致知)'와 마음을 가다듬는다는 의미의 '정심성의(正心誠意)'를 강조하며 "학문의 길 또한 올바른 마음을 갖는 것부터 시작"이라고 말한다. 글/박성배 기자 ppang1120@hanyang.ac.kr 사진/문하나 기자 onlyoneluna@hanyang.ac.kr

2016-08 31

[교수]기부 문화 통한 '사랑의 실천' 꿈꾸다

올바른 기부문화의 확산을 바라는 사회 저명인사들의 발안으로 지난 2000년 시작된 아름다운 재단은 소액기부를 통해 기부의 대중화에 기여한 ‘1% 나눔운동’, 파업 이후 손해배상 판결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시작한 ‘노란봉투 캠페인’ 등에 성공하며 시민 기부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예종석 교수(경영학부)는 아름다운 재단이 설립 당시의 정책자문단장으로 활동을 시작, 지난 2012년부터 이사장을 맡아 기부문화 확산을 위해 일하고 있다. 아버지 따라 시작한 자선사업의 길, 아름다운 재단까지 부산 영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예 교수. 자선사업가셨던 아버지를 통해 ‘사랑의 실천’을 몸에 익혀 왔다. “아버지는 장학재단 영도육영회를 설립한 자선 사업가셨어요. 당시 열악했던 영도에 학교, 도서관 등을 지으면서 자선 사업을 몸소 행하셨죠.” 예 교수는 어릴 적 경험을 바탕으로 장학재단 ‘영도육영회’의 이사로 활동했고, 지난 2000년 시작된 아름다운 재단의 창립 멤버가 된다. “아름다운재단을 시작할 때 기억에 남는 일들이 많아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평생을 사신 김군자 할머니께서 5,000만원을 기부하셨고, 성수동에서 구둣방으로 생계를 이어가시던 고(故) 이창식 선생님께서 수입의 1%를 기부하기로 약속하셨어요.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 초기 자금을 마련했죠.” 아름다운 재단은 ‘아름다운 1% 100인위원회’를 발족하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예 교수는 정책자문단장으로 참여해 ‘기부의 대중화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86년부터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로 재직했던 예 교수는 전공 분야인 ‘마케팅’에서 그 해법을 찾았다. “마케팅의 기본은 고객의 ‘니즈’를 파악하고 만족시키는 거에요.” 기부자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며, 기부를 받는 사람은 어떤 것을 원하는지를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단 의미다. “모금은 마케팅이 필요해요. 당시 기부 문화 확산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사회복지 쪽 전공자가 많았는데, 마케팅 전공자였던 저는 모금 활동에 있어서 어느 정도 비교우위에 있었던 거죠(웃음).” 예 교수는 이후 ‘1% 나눔운동’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비영리 마케팅’을 통해 기부의 대중화를 이끌어내며, 아름다운 재단을 공익단체의 선두로 발돋움 시키는 데 기여했다. 예 교수는 동시에 여러 기업의 자문을 맡았던 경험을 살려 기업만의 ‘기부에 대한 니즈’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아름다운 재단과 기업을 잇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 “기부자로서의 기업과 이들이 지원하게 될 수혜자 사이를 연결할 사람이 필요했고, 경영학을 기본으로 마케팅을 전공한 제게 딱 맞는 영역이었어요.” 이런 경험을 토대로 예 교수는 지난 2012년부터 아름다운 재단 이사장에 취임해 현재까지 그 역할을 충실히 이행 중이다. ▲ '1% 나눔운동'과 '노란봉투 캠페인' 등을 성공적으로 이끈 예종석 교수(경영학부)는 현재 아름다운 재단 내에서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출처: 아름다운재단) 기부문화가 나아가야 할 길 ▲ 예종석 교수는 기부의 발전을 위해서 '사회환원의 전통 수립'과 '기부 및 봉사의 습관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예 교수는 두 가지 차원에서 기부 문화의 발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첫 번째로 사회환원의 전통이 성립돼야 한다. 예 교수는 일례로 1910년대 미국의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의 일화를 말했다. “카네기는 ‘부자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말년에 회사 지분을 모두 처리한 뒤 자선사업에만 몰두했어요. 자신의 부가 자신의 능력만이 아닌 사회로부터 비롯될 수 있음을 알았던 거죠.” 부의 사회 환원이란 전통은 빌 게이츠에서 마크 저커버그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예 교수는 특히 한국은 재벌 중심의 경제 발전을 이룬 탓에 사회구조적으로 이들에게 부가 편중됐던 점을 지적하며 “우리나라 또한 이러한 사회환원의 전통이 확립돼야 할 것”이라고 했다. 두 번째 발전 방향은 기부와 봉사의 ‘습관’ 문제였다. 예 교수는 교육제도의 문제를 언급하며 “우리나라의 입시 위주 교육이 개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의 교육 여건에는 ‘박애주의의 기쁨이 반영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 “기부와 봉사는 습관처럼 당연한 것이 돼야 하는데, 현재의 교육제도는 이것이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어요. 기부와 봉사를 하고 싶어도 시간이 없고, 그것이 옳은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지 않게 하는 것이죠.” 또 예 교수는 가정에서부터 시작되는 자선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부모의 솔선수범이 학생들의 기부와 봉사에 대한 습관화에 큰 영향을 끼칠 겁니다.” 사회 환원의 전통 수립과 기부 및 봉사의 습관을 위한 교육. 두 가지가 예 교수가 바라는 또 다른 기부의 형태였다. ‘사랑의 실천’ 실천하는 지성인으로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대학생은 지성인이고 이 사회의 리더입니다. 그걸 잊지 말고 사회에 좀 더 관심을 가져주세요.” 인터뷰를 통해 ‘기부’의 중요성을 설파한 예 교수는 학교 안에서도 ‘십시일밥’ 등의 단체를 지원하며 외연 확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학생이면 이 사회의 지성인이며, 사회로부터 일정 부분 혜택을 받은 사람이에요. 그렇다면 사회에 자신이 받은 혜택을 돌려주는 것도 중요하죠.” 예 교수는 ‘사랑의 실천’을 잊지 말라고 재차 부탁했다. ▲ '대학생은 사회의 지성인이며, 사회의 혜택을 받은 자'이기에 다시 사회로 혜택을 환원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예종석 교수는 한양대 학생들에게도 '사랑의 실천'을 당부했다. 글/ 박성배 기자 ppang1120@hanyang.ac.kr (☜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사진/ 최민주 기자 lovelymin12@hanyang.ac.kr

2016-08 02

[교수]세모난 집 '시선재'를 짓다

건축가는 건물을 설계하고 짓기까지의 전 과정에 참여한다. 의뢰인의 요구를 지키는 동시에 건축물에 자신만의 가치를 담아내는 것이 건축가의 중요 임무다. 서현 교수(건축학부)는 제주도 서귀포시에 지은 삼각형 모양의 주택 ‘시선재’를 통해 새로운 건축을 만들어 보였다. 시선재를 지은 과정과 이에 담긴 가치는 서 교수의 신간 <건축가 서현의 세모난 집짓기>에 고스란히 담겼다. ‘시선재’를 짓기까지, 건축가 서현의 첫 ‘집 짓기’ 책 ▲ 서현 교수(건축학부)를 지난 22일 연구실에서 만나 '시선재'와 <건축가 서현의 세모난 집짓기>에 담긴 이야기를 들었다. 서현 교수는 건축과 사회의 소통을 고민하는 건축가이자 한양대 건축학부의 대표 교수다. ‘효형출판 사옥’, ‘김천상공회의소’, ‘해심헌’, ‘건원재’ 등을 설계했으며 해심헌은 ‘아름다운 제주 건축 7선’에 선정된 바 있다. 스테디 셀러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등 7권의 저작을 펴낸 서 교수. 지난 15일에 신간 <건축가 서현의 세모난 집짓기>가 출간됐다. 서 교수가 지은 ‘시선재’의 설계부터 시공까지 세세히 기록한 첫 번째 집 짓기 책이다. 서 교수는 “이 책을 통해 건축가의 역할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건축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은 건축가를 공학 지식을 갖춘 기술자쯤으로 생각하기 쉽다. 국내 여러 대학의 건축학부가 공과대학에 속해 있단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사실 건축학을 공대에서 배우는 곳은 동아시아뿐이에요.” 서 교수는 건축학이 공학의 하위 학문이 아니라 말한다. “건축가라면 공학, 인문학, 자연과학 등을 다 조금씩 알아야 해요.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지만, 여러 분야를 두루두루 알아야 건축에 활용할 수 있죠.” 서 교수의 ‘건원재’가 그런 작품이다. 건원재는 충남 공주에 위치한 주택으로 ‘둥근 하늘이 있는 집’이란 뜻을 가졌다. “건원재 중앙엔 동그란 천장이 있어서 1년에 2번, 춘분과 추분에 햇볕이 벽에 동그랗게 들어와요. 절기를 고려해 설계한 결과죠.” 서 교수의 이번 책에는 건축가의 역할과 고민이 도면과 스케치 등의 시각 자료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건축물을 홍보하기 위해 쓴 책은 아니에요. 홍보라면 언론이나 잡지에 알리는 편이 더 예쁘게 나오죠. 그보다는 이번 건물을 지은 과정에 대해 말하고 싶었어요.” 서 교수는 “건축가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며 “건축학 전공자에겐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다른 이들에겐 건축가가 어떤 일을 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건축가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아요. 지휘자를 보고 ‘연주는 안하고 봉만 흔드는 사람’이라 오해할 수 있지만, 오케스트라가 무대에 오르기까지 지휘자의 역할은 엄청나죠. 건축가도 마찬가집니다.” 건물에 가치 담는 것이 건축가의 일 ▲ '시선재'는 바닷가를 향하는 모서리가 유리로 돼있어 쉽 게 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 서현 교수는 "의뢰인이 '자신에 게 주는 선물'이기에 지금처럼 독특하게 만들었다.고 말한 다. (출처: 서현 교수) 그렇다면 ‘시선재’는 어떤 공간일까. 시선재는 삼각 기둥 형태의 건축물로 한 모서리가 바다를 향하고 있다. 의뢰인 부부는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 같은 집을 부탁했다. “선물이라면 그 안에 의미가 있어야 하잖아요. 처음부터 평범한 아파트와는 다른 공간을 짓기로 결정했죠.” 시선재는 특별한 집을 원하는 의뢰인의 의견과 독특한 부지 모양을 살려 삼각 기둥 형태가 됐다. 그러나 특이한 점은 외관만이 아니다. 시선재의 창문은 바닷가를 향해 난 ‘모서리’에 있다. 이렇게 모서리에 창문을 낸 것은 바다와 더 가깝게 느껴지게 한 것이라고 한다. “창문을 모서리에 내면 설계가 어려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물이니까’ 어려워도 시도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죠. 해결책을 강구한 끝에 건물을 완공할 수 있었어요.” 서 교수는 건축물에 가치를 담는 것이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시선재는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가치를 최우선으로 고려했다. “건축물에 어떤 가치를 부여할 것인가는 매번 달라져요. 주택의 경우 거주자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원하는지에 따라서죠.” 서 교수는 이런 건축을 위해서는 다양한 배경 지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예컨대 연구실을 짓는 경우에도 그 분야에 대한 공부가 필요합니다. 인문학을 연구하는 이와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이의 연구 방식이 다를 테니까요. 각자의 연구 방식에 대해 아는 것이 이들을 위한 공간을 짓는데 큰 도움이 되죠.” 건축물이 기본적으로 생활 공간이란 점도 잊지 않아야 한다. “자동차를 만드는 데 바퀴를 삼각형으로 만들고 범퍼도 공기 저항을 크게 받게 만들어 놓으면 예쁘다 한들 아무도 타지 않습니다. 건물도 그래요. 생활에 불편함이 없어야 합니다. 이것을 간과한 건축물은 가치가 담겼다고 볼 수가 없어요.” 그런 면에서 서 교수는 이화여대 ECC를 좋은 건축으로 뽑았다. “ECC가 훌륭한 이유는 공간을 매우 잘 활용했단 점 때문이에요. 일반적인 건축물은 길을 막을 수 밖에 없는데, ECC는 길을 막지 않고 양 옆에 여러 공간을 수용했죠. 때문에 버려지는 곳이 없어요.” 미적 요소만큼 실용성이 중요하단 것이 서 교수의 설명이다. 건축가로서 인정받고 싶어 서 교수는 “공간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게 건축가의 일”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건축물로 자신의 철학을 증명하고 싶다. “지금까지 7권의 책을 펴내며 건축에 관한 좋은 책을 쓰겠다는 목표는 이룬 것 같아요. 하지만 건축가로는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건축물로도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 그의 바람이다. “책으로 보여준 것에 걸맞은 건축물을 짓고 싶어요. 후배들이, 제자들이 그 가치를 인정하는 건물을 짓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매 작업마다 고민을 게을리 하지 않는 서 교수. 그의 목표는 언제나 ‘좋은 건물’이다. ▲ "건축가로서 부족하다"고 말하는 서현 교수지만 그의 건축물인 시선재는 주변 환경과 어우러지는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출처 : 서현 교수) 글/ 이상호 기자 ta4tsg@hanyang.ac.kr (☜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2016-07 12

[교수]사람을 위한 건축, '정답' 대신 '좋은 선택'이 있을 뿐!

안기현 교수(건축학부)는 “건축물은 의뢰인, 건축가, 시공사 세 주체의 합작”이라고 말한다. 의뢰인은 자신이 꿈꾸던 건축물을 건축가에게 설명하고, 건축가는 아이디어를 발휘해 건축물을 디자인한다. 시공사는 건축가의 의도에 가장 잘 부합하는 건물을 짓기 위해 노력한다. 건축물 하나에 그들의 꿈과 아이디어, 땀방울이 모두 담겨있다. 건축가라는 이름으로 그 일부분을 담당하는 안기현 교수가 ‘2016 젊은 건축가상’을 수상했다. 에이앤엘 스튜디오, 2016년 대표하는 젊은 건축가로 ▲ 안기현 교수(건축학부)와 지난 4일 진행한 인터 뷰에서 신민재 동문(건축공학부 96)과 함께 진행한 30개의 건축 프로젝트에 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 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2008년부터 매년 재능 있는 젊은 건축가를 선정해 ‘젊은 건축가상’을 수여하고 있다. 건축사 자격증을 취득한 만 45세 이하의 건축가가 대상이다. 개인 또는 팀의 작업물을 담은 포트폴리오를 제출하면 심사를 통해 3팀을 최종 선발한다. 안기현 교수는 건축사무소 ‘에이앤엘 스튜디오(AnLStudio)’를 함께 운영 중인 신민재 동문(건축공학부 96)과 한 팀이 돼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번 수상은 3번의 도전 끝에 찾아온 결실이다. “지난 2번 모두 최종단계에서 탈락했어요. 3번째 도전을 한 이유는 상 자체보다 공모전을 준비하는 과정에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죠. 지금까지의 프로젝트를 정리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구상하는 뜻깊은 시간이에요.” 에이앤엘 스튜디오 팀은 2010년부터 진행했던 30개의 건축 프로젝트를 재건축(Re-build), 재조직(Re-organize), 재점유(Re-occupy), 재생산(Re-generate), 재공공화(Re-public), 재계획(Re-program)의 6개 항목으로 나눠 소개했다. 공간을 재조명해 통념을 깨는 건축물을 짓는 것이 안 교수만의 특징이다. 양 층의 창문이 하나로 연결돼 위아래에서 빛이 들어오는 건축물 ‘다공(DAGONG)’, 판교 지역의 주차부족 문제 해결을 위해 지하에 주차장을 마련한 주택 ‘팝 하우스(POP HOUSE)’, 주거 공간에 다른 역할을 부여한 ‘홈오피스’와 ‘홈갤러리’ 등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또 무대 설치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설립한 이동형 구조체 ‘퍼레이드 온(PARADE-ON)’, 의자와 페인팅을 통해 공간에 활기를 불어넣은 ‘오쏘 벤치(ORTHO BENCH)’ 등 공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사례도 있다. “공간을 창의적으로 조직했을뿐 아니라 건축생산에 관련된 이해당사자 모두에게 열린 플랫폼을 제공했다”는 평가다. 사람을 위한 건축을 꿈꾸다 안 교수는 중학교 시절 TV 프로그램에 등장한 건축가의 모습을 보고 지금의 꿈을 갖게 됐다. “어릴 적부터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어요. 아버지께서 건축 관련 직종에 계셔서 어릴 적부터 건축을 접한 것도 큰 영향을 미쳤죠.” 안 교수는 건축가로서 본인만의 색깔을 찾기 위해 노력 중이다. “학교, 미술관, 병원 등 다양한 기능을 가진 공간을 디자인하고 싶어요. 그 과정에서 저만의 색깔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죠.” 이를 위해 만화, 소설, TV 프로그램, 영화 등 일상의 모든 곳에서 건축에 대한 영감을 얻고자 노력한다. “영감이 될 만한 사진이나 그림을 보면 기억해 두기도 하고 삽화가 나오지 않는 소설책을 읽으며 상상을 통해 영감을 얻으려 노력해요.” ▲ 1. 양 층의 창문이 하나로 연결된 건축물 ‘다공(DAGONG)’ 2. 지하에 주차장을 마련한 주택 ‘팝 하우스(POP HOUSE) 3. 이동형 무대 구조체 ‘퍼레이드 온(PARADE-ON)’ 4. 주차공간을 이용한 무대 '드림스테이지(DREAMSTAGE)' (출처: 안기현 교수) “건축이란 사람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만드는 거예요. 사람들이 건축물 안에서 행복하고 즐겁게 생활할 수 있도록 디자인하는 게 가장 중요하죠.” 안 교수의 말이다. 이처럼 ‘사람을 위한 건축’이 모토라는 안 교수는 의뢰인과 자신의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이 건축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이기 때문. “평생 살 집을 짓는 것이기 때문에 의뢰인의 의견을 가장 중시하죠. 거기에 저희의 아이디어를 보태 디자인을 하곤 하는데, 의뢰인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는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과정이 힘들 때도 있어요.” 건축 디자인, ‘정답’ 대신 ‘선택’ 있을 뿐 안 교수는 “건축 디자인에는 정답이 없고 선택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자신도 많은 것을 배운다고. “제가 학생들 작품에 피드백을 하기도 하고, 학생들이 제 작품에 피드백을 하기도 해요. 그 과정에서 ‘좋은 선택’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게 되죠.” 건축은 트렌드에 따라 풍토가 빠르게 바뀌는 분야라 끊임 없이 고민하고 발전을 꾀해야 한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진 학생들과 소통하는 시간이 안 교수에게 중요한 이유다. 안 교수는 재능이 부족하다고 건축가의 꿈을 쉽게 포기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타고난 재능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위치에 가기 위한 끊임 없는 노력이 더 중요해요” 훌륭한 건축가이자 지도자가 되길 꿈꾸는 안 교수는 자신의 삶이 언제나 건축과 함께하길 소망한다. ▲ 안 교수가 '퍼레이드 온(PARADE-ON)' 모형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글/ 최연재 기자 cyj0914@hanyang.ac.kr (☜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사진/ 문하나 기자 onlyoneluna@hanyang.ac.kr

2016-07 06

[교수]만화를 좋아하던 아이, 만화로 설명하는 과학자 되다

어린 시절엔 <꺼벙이>와 <철인 캉타우>를 좋아했다. <머털도사>를 그린 이두호 화백과 <맹꽁이 서당>으로 유명한 윤승운 화백은 신인철 교수(생명과학과)의 영웅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취미로 만화를 그렸던 그는 과학자가 된 지금도 만화를 그린다. 대학원생 때부터 만화를 연재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일반생물학을 쉽게 익힐 수 있는 <생물학 신(新) 완전정복>을 출간했다. 만화에 대한 애정을 꺾지 않고 이어온 신 교수를 만나봤다. 무겁지 않게 만화로 ▲ 신인철 교수(생명과학과)와 지난 6월 22일 신인 철 교수의 연구실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신인 철 교수는 최근 '카툰 콜리지'의 두번째 시리즈 <생 물학 신 완전정복>을 출간했다. 신 교수가 이번에 출간한 <생물학 신 완전정복>은 작년 3월에 출간한 <카툰 콜리지 분자세포생물학>에 이은 <카툰 콜리지> 두 번째 시리즈다. <카툰 콜리지>는 만화 위주의 대학교재다. “제가 원래 만화를 많이 좋아합니다. 그래서 수업에 만화를 활용하곤 했죠. 학생들이 ‘만화로 설명하면 이해가 쉽다’ 그러더군요. 이를 책으로 만들어 학생들이 과목의 전반적인 흐름을 파악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대학교재를 만화로 구성한 것은 <카툰 콜리지>가 세계 최초다. “첫 번째 책은 전공과목 교재로 쓰고 있어요. 두 번째 책은 생화학에 관해서 쓰려고 했는데 동료 교수님께서 교양과목 교재 제작을 제안하셔서 생물학 신 완전정복부터 만들었죠. 교양과목 수준으로 중고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생물학 신 완전정복>에는 ‘세포분열’과 같은 기본 개념부터 ‘신종플루’, ‘사스(SARS)’, ‘메르스(MERS)’와 같이 최근 화두인 주제들까지 수록돼 생물학을 아예 몰랐던 사람도 흥미롭게 읽어나갈 수 있다.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내용이 신 교수가 직접 그린 만화로 돼있다는 점이다.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운 게 아니라서 미숙하다는 의견도 있어요. 하지만 개성 있게 봐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꼭 직접 그리려고 하고 있죠.”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는 것 보다 직접 그리는 것이 효과적이라 생각하는 신 교수. “사랑하는 사람에게 얘기할 때 통역사가 있으면 전달력이 떨어지잖아요. 그림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하고 싶은 얘기를 직접 하는 것엔 엄청난 이점이 있죠.” 말이 다른 사람의 언어로 번역되면 의미가 퇴색하듯, 만화도 그러하다고 믿는 신 교수는 직접 만화를 그리기 위해서 1인 출판사를 통해 책을 출간했다. “1인 출판사를 통하다 보니 금전적인 제약은 있어요. 그래도 제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 만족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사랑한 만화 사실 신 교수가 만화를 그린 것은 카툰 콜리지가 처음이 아니다. “어릴 적부터 만화를 좋아해서 ‘꺼벙이’나 ‘철인 캉타우’ 등을 보고 따라 그리기도 하고 내용을 직접 구상해서 그리기도 했어요.” 직접 그린 만화를 친구들과 함께 보곤 했다. 그러나 우선은 과학자가 된 신 교수. 카이스트 1회 졸업생으로서 카이스트 석박사 학위까지 받았을 만큼 과학에 조예가 깊던 학생이었다. “만화를 좋아했지만 직업까지는 엄두를 못 냈어요. 대신 주변 사물에 대한 관찰을 좋아하던 습성 덕에 과학자가 된 듯해요.” 그런 그가 좋아하는 만화를 본격적으로 내보인 것은 대학원 시절부터다. “교수님 권유로 ‘분자생물학뉴스’라는 학회 뉴스레터에 <대학원생 블루스>를 연재하기 시작했어요. 대중들한테 잘 알려지지 않은 대학원생들의 애환과 소소한 유머들을 담았죠.” 대학원생이었기에 더 선명하게 그릴 수 있었던 대학원생들의 이야기. 블루스라는 제목은 과학자들의 삶이 알려진 것처럼 마냥 밝지만은 않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대학원생 블루스>를 연재할 당시에는 과학자에 대한 환상이 많이 퍼져있었어요. 대학원에 와서 환상이 깨진 사람이 많습니다. 진짜 하고 싶은 사람이 사정을 알고 왔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죠.” 언론 등에서 보여주지 못한 이면을 담고 싶은 바램이 담긴 제목인 셈이다. 블루스 시리즈는 <대학원생 블루스>를 4년간 연재한 이후 웹진으로 옮겨 <포닭 블루스>, <조교수 블루스>로 계속 연재 되고 있다. ▲ 신인철 교수는 '카툰 콜리지' 외에도 과학도들의 애환을 담은 '조교수 블루스'를 연재 중이다. 사진은 '조교수 블루스'의 한 장면 (출처 : 신인철 교수) 더 나아가려는 자세 신 교수는 현재 카툰 콜리지의 다음 시리즈를 준비하고 있다. 이번에는 생화학에 관해 그릴 계획이다. 완벽한 만화를 위해 여러가지 것들을 배우고 있다. “그림체를 지적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조금씩 배우고 있어요. 다음 작품이 생화학과 관련되다 보니까 분자 구조를 그리려고 컴퓨터 프로그램도 배우고 있어요.” 해외 시장 진출 계획도 있다. 신 교수는 “미국이나 일본 시장에서 출판 논의가 있다”며 “아직 번역 문제도 있어 진행이 더디지만 잘 진행돼서 하나의 컨텐츠로 발전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만화를 그리는 교수로서, 학생들도 남들이 안 하고 있는 새로운 영역을 찾아갈 수 있기를 권한다. “기존의 것을 따라하는 것만으론 큰 의미를 만들기 어려워요. 교수가 만화를 그리듯, 젊은 학생들도 새로운 필드를 개척해나갔으면 좋겠어요.” 기존의 틀에 갇혀서는 그 틀 안의 것만 재생산할 수 밖에 없다. 신 교수의 만화는 어려운 생물학을 설명하는 동시에, 우리에게 어려운 삶을 풀어나가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 신인철 교수는 "기존의 것을 따라하는 것만으론 큰 의미를 만들기 어렵다"며 남들이 하지 않은 것을 해보기를 권한다. 글/ 이상호 기자 ta4tsg@hanyang.ac.kr 사진/ 최민주 기자 lovelymin12@hanyang.ac.kr

2016-06 08

[교수]한양대 77주년 백남석학상의 주인공을 만나다

한양대 77주년 개교기념식이 지난 5월 13일 백남음악관에서 열렸다. 행사에서는 한양의 발전에 일조한 이들을 위해 다양한 시상이 진행됐다. 그 중에서도 고(故) 백남 김연준 박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백남석학상’은 단연 돋보였다. 올해로 4회째를 맞은 백남석학상은 일생을 교육 사업에 전념한 김연준 박사의 정신을 잇는다는 점에서 한양의 ‘학술적 가치’를 대표하는 상이다. 수상의 영예는 배기동 교수(문화인류학과)에게 돌아갔다. 이번 수상을 통해 배 교수는 고고학자로서의 우수한 성과를 다시 한번 인정받게 됐다. 자카르타 출장에서 막 돌아온 배 교수를 만났다. 백남의 정신을 아로새기다 ▲ 배기동 교수(문화인류학과)는 지난 5월 13일 백 남음악관에서 열린 77주년 개교기념식에서 '백남석 학상'을 수상했다. 백남석학상의 주인공이 된 배 교수는 어려서부터 ‘수집’에 관심이 많았다. 물건에 붙은 상표란 상표는 다 떼어서 집에 가져왔다. 더 많은 수집품에 대한 욕구가 자연스레 여행으로 이어졌고, 여행지를 다닐 때면 그 지역의 문화에 대해 사색에 빠지기 일쑤였다. “일찍부터 다양한 문화에 대해 공부하는 길을 가기로 마음 먹었죠. 새로운 영역에 계속 도전할 수 있는 ‘고고학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배 교수는 당시 국내 유일의 서울대 고고인류학과로 진학했다. 졸업 후 미국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전곡리 발굴현장 책임자를 비롯한 여러 현장 경험을 토대로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다. 이번 수상에 대해 배 교수는 “더 훌륭하신 분들이 많은데 죄송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겸손한 수상 소감과 달리, 배 교수는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고고학계 최고 권위자다. 배 교수는 ‘학술 연구’와 ‘사회 활동’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단 평가를 받는다. 이번 수상에도 그런 부분이 유리하게 작용했다. “선사시대 유적지나 유물 등 형태가 있는 ‘물질 문화’를 다뤘습니다. 역사 유적 발굴과 같은 고고학적 자료에, DNA 정보를 중심으로 한 유전학 검증 방법을 도입하는 융합연구를 진행했죠.” 연구 주제에 대한 배 교수의 설명. 지금까지 써낸 논문만 해도 50여편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배 교수는 일찍이 박물관 분야에 종사하며 우리 문화의 사회적 전파에 앞장섰다. “박물관은 일종의 ‘문화봉사’ 기관이에요. 시민들에게 우리 유산과 유적을 알리는 일을 했죠.” 현재는 한양대 문화재연구소장과 국제박물관협의회 한국위원회 의장 등을 역임하고 있는 그다. 고고학계에 새로운 지평을 열다 ▲ 국내 고고학계에 새로운 지평을 연 배기동 교수 와 지난 5월 27일 국제문화대학 4층 연구실에서 만 나 고고학자로서의 인생에 대해 들었다. 배 교수의 경력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은 연천 전곡리 유물을 발굴한 것이다. 1978년 전곡리에서는 동아시아 최초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전기 구석기의 대표적인 석기로 고(古)인류 진화 과정에 중요한 단서가 됨)가 발견됐다. 이 사실은 고고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때 배 교수는 발굴현장 책임자(field master)의 역할을 수행했다. 고고학자로서 찾아온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역사의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전곡리임에도, 역사시대 고분이나 건물 터처럼 화려한 유적이 없어 일반인들이 그 중요성을 알기는 다소 어려웠다. “유적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황량한 벌판을 보고 발걸음을 돌려 돌아가기 일쑤였어요.” 이에 배 교수는 구석기 유적지를 토대로 하나의 축제를 기획했다. ‘전곡리안의 귀환’이란 주제로 한반도를 포함한 전 세계의 구석기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학습형 축제를 만든 것. 이것이 올해로 24회를 맞는 ‘연천 구석기 축제’다. 그의 노력을 통해 전곡리 구석기 유적지는 연 평균 100만 명에 이르는 관광객이 찾는 유적지로 자리매김했다. 문화재를 발굴하고 이를 대중화하는 데 앞장섰던 배 교수의 면모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최근에는 전곡리 유적지를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시키기 위한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가고 있다. “세계적인 유산으로 만들어야죠. 과학적으로 좀 더 체계적인 분석을 통해 세계를 이해시키는 일이 남았어요.” 고고학자로서 책임 다한다 어느덧 배 교수의 고고학 인생은 종착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고고학자로서 할 일은 다했다고 봐요. 유적을 발굴해내고, 그것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렸죠.” 그러나 당분간 배 교수의 시간은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옛 당나라와 신라를 이어주는 항구였던 당성 지역(화성)과 국내에 보유 중인 외국 문화재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다. 고고학 지식 전수에 대한 한국형 모델도 구상하고 있어 머릿속이 바쁘다. 인내와 끈기의 상징과도 같은 고고학 분야에 인생을 건 배기동 교수. 그가 택한 길에 ‘멈춤’이란 표지판은 없는 듯 하다. ▲ 전곡선사박물관에 전시된 주먹도끼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배기동 교수의 모습. 배 교수가 발굴한 유적지와 유물이 존재하는 한 고고학에 대한 그의 열정도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출처: 조선뉴스프레스) 글/ 김상연 기자 ksy1442@hanyang.ac.kr (☜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사진/ 김윤수 기자 rladbstn625@hanyang.ac.kr

2016-05 11

[교수]프레임 안에 담아내는 건축의 미학

건축물엔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의미가 함께 담긴다. 건축이 공학이면서 동시에 예술인 이유다. 단순히 공학 지식을 익히는 것만으로는 건축의 본질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때문에 이강업 교수(건축학부)는 40여 년의 세월 동안 사진 속에 건축물의 사회문화적 의미를 함께 담고자 노력했다. 건축을 이해한 만큼 사진에 담을 수 있다는 그다. 건축과 사진, 그 사이에서 때론 백 가지의 이론보다 한 장의 사진이 더 크게 와 닿는 법. 조형미술을 다루는 건축학에선 특히 사진 자료가 중요하다. 대부분의 건축학 교수들은 사진작가들이 찍은 기존의 건축물 사진을 활용해 강의한다. 하지만 한양대에서 건축학을 강의하는 이강업 교수는 본인이 직접 찍은 수 백장의 사진을 이용해 강의한다. 직접 바라본 건축물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학생들에게 그 감상을 전한다. 이 교수는 “학생들에게 건축의 미학을 더욱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단 장점이 있다”고 했다. 이 교수가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40여 년 전 미국 유학시절부터다. 버클리대학교에서 건축학을 공부하며 당시 교수에게서 사진 찍는 법을 배웠다. 그 후로는 꼭 건축물을 사진으로 찍으며 공부했다고. 사진을 통해 건축물을 바라보면 시시각각 변하는 건물의 다양한 특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 이 교수는 “사진은 건축의 예술적 특성을 담아내기 때문에 건축 사진을 통해 건축물의 다양한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건축과 사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란 것. 강단에 오른 뒤에도 약 35년의 세월 동안 국내는 물론 해외 곳곳을 답사하며 건축물 사진을 찍어왔다. ▲ 이강업 교수(건축학부)는 40여 년간 국내는 물론 해외 곳곳을 답사하며 건축물 사진을 찍어왔다. (출처: 이강업 교수) 건축 사진으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다 ▲ 이강업 교수와 지난달 29일 한양대 연구실에서 만났다. 인터뷰에서 사진에 담긴 건축물의 사회문화적 의미를 들을 수 있었다. “건축물 사진을 찍을 때는 건축만 바라보지 않고 건축물에 얽힌 사회문화적 배경을 함께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물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 따라 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그 사진에 담긴 건축물의 모습도 달라집니다.” 이 교수의 사진 철학이다. 더불어 건축 사진은 자연과 함께 완성된다. 이 교수는 “같은 건축물이라도 화창한 날과 스산한 날의 건축물은 프레임 안에 매우 다르게 담기는 법”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가 찍은 프랑스의 몽셀미셀 수도원 사진을 보면 그 설명이 더욱 와 닿는다. 화창한 날씨에서 바라본 수도원과 다르게, 자욱하게 낀 안개로 가려진 수도원은 한층 더 신비스럽고 오묘한 분위기를 내뿜는다. 이 교수는 궁극적으로 건축을 통해 인간의 삶에 대한 탐구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예로부터 인간은 현실을 넘어선 초월적인 삶을 추구하고자 했다. 건축이 종교와 많은 부분 맞닿아 있는 것도 이 때문. 이 교수는 “많은 건축물에 신과 조우하고자 하는 인간의 바람이 담겨있다”고 설명했다. 페루 안데스 산맥에 있는 과거 잉카문명의 도시 터 마추픽추가 이를 대변한다. 산 정상에 신이 있다고 믿은 잉카인들은 높은 산꼭대기에 마을을 세워 신과 가까이에서 삶을 영위하고자 했다. “건축사는 종교 건축의 발전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신과의 만남을 고대하며 건축물을 세우곤 했습니다. 그곳에선 일상에서 벗어나 순수한 정신세계로 몰입한 것이죠” 이 교수는 건축 사진을 찍어 이와 같은 의미를 대중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사람이 건축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느낀 이 교수는 건물을 넘어 인체와 자연, 생명체 등으로 작품의 범주를 확장한다. “건축이 사람의 생각과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기에 사람은 물론, 자연물의 사진도 건축 사진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교수는 국내외에서 수 차례 전시회를 개최해 자신이 찍은 사진을 선보인 바 있다. 이달에는 예술의전당에서 ‘관조’란 주제로 전시회를 연다. 건축, 인체, 자연, 흔적의 네 코너로 나눠 전시한다. “관조란 사물을 바라보며 깊이 사색한다는 뜻입니다. 건축에서 나아가 모든 사물을 자세히 관찰하면 그 속에서 또 다른 가치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사진작가 이 교수의 진짜 도전은 지금부터 이 교수는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다. 올해가 강단에 서는 마지막 해다. 하지만 본격적인 ‘사진작가로서의 삶’을 준비하고 있기에 아쉽지만은 않다고. “사진을 찍으려면 무엇보다 시간적 여유가 많아야 하는데, 사진작가는 은퇴 후에 하기 딱 좋은 일이죠. 앞으로 여러 곳을 방문하며 더욱 많은 사진을 찍을 생각입니다. 저에겐 지금까지 꿈꿔온 진짜 도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교수의 말 속엔 앞으로의 삶에 대한 설렘이 가득했다. “제 힘이 닿을 때까지 아름답고 경이로운 사진을 최대한 많이 찍고 싶습니다.” 한평생 건축을 봐왔지만, 아직도 보고 싶은 것이 수도 없이 많다는 그다. 프레임 안에 모든 건축물이 담길 때까지 이 교수의 도전은 멈추지 않는다. ▲ 사진작가 이강업 교수의 진짜 도전은 지금부터다. “제 힘이 닿을 때까지 아름답고 경이로운 건축 사진을 가능한 많이 찍고 싶습니다.” (출처: 이강업 교수) 글/ 최연재 기자 cyj0914@hanyang.ac.kr (☜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사진/ 김윤수 기자 rladbstn625@hanyang.ac.kr

2016-05 04

[교수]남북한 축구... 스포츠 문화사적으로 접근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는 단연 ‘축구’다. 국가대항전에서 골이 터지면 함성소리가 온 동네 전체를 뒤덮고, 다음 날 스포츠뉴스 1면을 단번에 차지해버린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2002년 한일월드컵의 붉은 기운을 기억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축구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왜 프로축구는 프로야구만큼의 인기를 구가하지 못하는지, 남북한 축구는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이에 대한 답을 적은 학술서적을 최근 출간한 이종성 교수(스포츠산업학과)를 만났다. 스포츠 기자에서 영국 유학생으로 이종성 교수는 어떻게 남북한 축구사에 대해 연구하게 됐을까. 이 교수는 어릴 적부터 스포츠를 정말 좋아했고, 스포츠기자를 하고 싶은 꿈이 생겼다. 기자로서 스포츠 경기를 취재할 때 본인의 장점이 가장 돋보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교수는 한 인터넷매체에서 5년 간 스포츠 기자로 활동했다. 하지만 그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회상했다. “우리나라가 아직 ‘스포츠 역사’ 부분의 자료가 부족하다 보니 외신에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었어요. 국내에서 고급 정보를 듣는 경로도 많이 한정돼 있었죠. 무엇보다도 기자의 자질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일뿐 아니라, 사람들과의 친화력이나 분석력 등을 통해서 스스로 새로운 뉴스를 발굴해야 한다는 점에서 어려움을 느꼈어요.” 이 교수는 스포츠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고자 유학을 택했다. 2006년 독일월드컵 현지 취재를 마친 뒤 같은 해 9월 곧바로 영국 드몽포트대학교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석사 논문은 한국 야구의 발전에 대한 주제였으나, 축구팬이셨던 부친의 영향으로 박사 논문은 ‘남북한 축구사’로 방향을 돌렸다. 남북한이라는 분단된 환경에서 축구역사를 다룬 사례가 세계적으로도 드물었다는 점에 주목한 것. 1966년 북한이 8강 진출이라는 결과를 냈던 잉글랜드 월드컵은 FIFA의 변화를 이끈 월드컵이다. 영국에 북한 축구 관련 자료가 많은 것 또한 박사 논문의 연구 주제를 선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 논문이 최근 책으로 출간됐다. ‘남북한 축구사 1910년부터 2002년까지: 발전과 확산(A History of Football in North and South Korea c. 1910-2002 Development and Diffusion)’이다. ▲ 스포츠를 좋아했던 이종성 교수(스포츠산업학과)는 기자를 시작으로 스포츠계에 뛰어들었다. 남북한 축구사, 일제강점기부터 2002년까지 ▲ 남북한 축구사를 다룬 이종성 교수의 책 표지. 박지성 선수는 남북한 플레이 스타일의 총 집합체다. (출처: 피터랑(peterlang) 이 교수의 박사 논문은 유럽의 학술서 전문 출판사인 피터 랭(Peter Lang)의 권유로 세상에 나오게 됐다. 다소 생소하고 드문 주제인 남북한 축구사를 출판사가 눈 여겨본 덕이다. 이 교수는 스포츠 문화나 스포츠 역사에 관한 책이라면 학술서와 대중서의 경계를 허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외국인이 한국사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되리란 생각에 권유를 승낙했다고. 1년 6개월 동안 학위논문을 대폭 보강해 펴낸 이 책은 총 다섯 장으로 구성돼 있으며, 일제강점기와, 1966년 월드컵, 2002년 월드컵의 세 시기를 집중 탐구한다. 축구가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일제강점기부터, 이 교수가 역사적인 평가가 가능한 시점이라 판단한 2002년까지의 남북한 축구 이야기다. 제1장은 일제강점기의 조선 축구를 다룬다. 이 교수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1910년부터 조선 축구가 공식적으로 대중 속에 퍼졌다”고 했다. “당시 경성과 평양은 조선 축구의 두 축이었습니다. 독립을 갈망하는 대중들의 열망이 축구의 인기에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죠. 당시 대지주 계급들은 계몽이나 독립운동을 하는데 축구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의식을 갖고 적극적인 후원자를 자처했습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 1945년부터 1964년은 남한 축구에 있어 ‘격동의 시간’이었다. 반면, 북한은 축구 훈련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나갔던 시기이기도. 이를 통해 북한은 3장에서 소개되는 1995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8강이라는 쾌거를 올린다. 4장에서는 1974년부터 1991년까지 남한 축구의 부활을 그린다. 남북한은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무승부를 기록했고, 한국 축구는 자신감을 되찾는다. 이 시기는 남한이 경제적으로 북한을 완전히 추월한 때이기도 하다. 2002년 월드컵은 5장에 등장한다. 북한은 당시 우리나라와 이탈리아의 경기를 중계했다. 이 교수는 이 중계가 굉장히 이례적인 것이라 말했다. 북한 정권의 안정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다. 북한이 40년 전인 1966년에 이긴 이탈리아를, 한국은 2002년에야 비로소 이겼다는 것을 선전하는 효과를 노렸단 것이다. 동시에 한국보다 높은 경제 수준을 구가했던 당시의 영광을 그리워한다는 것이 이 교수의 평가다. 민족적 동질성을 숨길 순 없다 ▲ 일제감정기 당시 일본과 조선의 축구 경기를 다룬 그림. 이종성 교수는 이 그림을 통해 한국 축구가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됐다는 걸 알 수 있다고 했다. 이 교수가 이 책에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결말은 남북한의 플레이 스타일이다. “남북한은 오랜 분단으로 인해 이념 체제도 다르고 문화생활을 영위한 정도에도 차이가 많이 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1966년 북한이 보여준 경기와 2002년 한국이 펼친 경기는 플레이 스타일 면에서 많이 비슷합니다. 남북한 축구의 플레이 스타일의 총 집합체는 책 표지에 나타난 박지성 선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체계적으로 축구 기술이 앞선 것은 아니었지만 근면성을 내걸고 열심히 뛰는 스타일이란 것이죠.” 실제로 외국 언론의 평가도 이와 같다. 세련미에서는 차이가 나지만, 기본적인 플레이 스타일에서는 민족적인 동질성이 보인다는 의미다. 이처럼 각 시기마다 스포츠가 어떻게 발전했으며, 나라마다 발전 속도나 방향이 왜 비슷하거나 다른지,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연구하는 것이 ‘스포츠 문화사’의 영역이다. 우리는 ‘스포츠 문화사’적으로 어떤 전략을 펼칠 수 있을까. 이 교수는 ‘축구 외교’가 그 답이라고 했다. 북한이 국제무대로 나오려고 할 때, 축구를 통해 남북한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수 있다는 것. 남북한 교류에 있어 스포츠 문화사적 접근은 이 교수 개인의 연구 분야임과 동시에 한국이 탐구해야 할 과제일지 모른다. 글/ 박윤정 기자 dbwsjd602@hanyang.ac.kr (☜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사진/ 최민주 기자 lovelymin12@ha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