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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 30

[오피니언][짧은 글 긴 이야기] 다르게 생각하라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인공지능의 엄청난 발전에 따라 일자리가 점점 줄어들 것이라는 예측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학생들에게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안겨준다.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은 복합적이기 때문에 데이터를 바탕으로 하는 과학적 사고만으로는 해결이 어렵다. 시대의 변화가 너무 빠르고, 발전의 방향이 급진적이기 때문에 과거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예측은 빗나가게 된다. 그래서 과거가 아닌 미래에 집중함으로써 문제를 미리 예측하고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시대에 파괴적 혁신을 가져올 수 있는 ‘디자인 씽킹(Design Thinking)’이다. 글. 한승현(3D Maker·독어독문학과 15 한지희 학생 학부모) / 그림. 안우정 미래에 집중한 문제 해결 방법 디자인 사고의 핵심은 ‘인간 중심’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고를 하기 전, 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그 사람의 문제를 알기 위해서 공감하고,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숨어 있는 문제를 찾아야 한다. 이때 주의할 점은 추측하지 말고 관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를 찾은 후에는 문제를 정의한다. 문제 정의가 가장 중요한 단계다. 좋은 문제 정의는 좋은 아이디어 도출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문제를 정의할 때는 ‘진짜 문제인가?’, ‘해결할 가치가 있는 문제인가?’, ‘영감을 주는 문제인가?’의 세 가지 원칙을 사용한다. 이를 적용한 문제 정의의 결과물이 관점 서술문인데, ‘누가? 어떤 이유로 ~한다. ~하는 방법은 없을까?’의 형식으로 작성한다. 아이디어 도출은 문제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때는 자유분방하게 아이디어를 내야 한다. 상대방의 의견에 대해서는 늘 ‘Yes’라고 답하며, 그 의견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추가해야 한다. 아이디어를 많이 내야 보석 같은 좋은 아이디어를 찾을 수 있다. 실례로 디자인스쿨에서는 5분당 100개의 아이디어를 낸다고 한다. 도출된 아이디어 중 최선의 아이디어는 시제품으로 만들어지는데, 아이디어를 테스트하기 위해서다. 시제품에는 스케치, 시나리오, 입체 제작물이 있다. 시제품은 주변에 있는 재료로 가장 빠르고, 수정하기 쉽게 만들어야 한다. 시제품을 대상들에게 평가받고, 피드백을 통해 디자인 씽킹 과정의 문제점을 파악한다. 이러한 프로세스의 순환을 통해 최선의 아이디어를 찾는 것이 바로 디자인 씽킹이다. 즉, 디자인 씽킹은 답을 찾으려고 하는 사고가 아니라 최선의 방법을 찾는 것이다. 최선의 아이디어를 찾는 과정 디자인 씽킹은 ‘완벽한 것은 없으며, 모든 것에 문제가 존재한다’라는 인식에서 시작된다. 이는 한국의 사고방식과는 사뭇 다르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문제가 없으면 해결도 없기 때문에 모든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문제가 있다고 인정하거나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또한 디자인 씽킹에는 부정적인 사고가 없다. 문제가 있다고 한 번 인식하면 그 문제에는 반드시 해결책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실제로 해결책이 있다. 디자인 씽킹에서는 인간이 핵심이다. ‘누구를 위하여 디자인하는가?’는 디자인 씽킹에서 꼭 필요한 질문이다. 누군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깊이 알아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평소에 나와 주변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관찰을 통해서 나와 이웃의 불편한 점을 찾고 기록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디자인 씽킹에서 이루어지는 극단적 협력에서는 타 분야 전문가와 의 협력이 중요하다. 디자인 씽킹 집단은 전혀 다른 분야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아이디어 도출 과정에서 상대방의 의견에 ‘Yes’라고 대답해야 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나만의 의견을 고집하면 필연적으로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제로 베이스(zero-base)에서 시작해 다른 사람의 의견을 수용하고 소화한 후 내 아이디어를 추가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면 그것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던 독특한 아이디어가 된다. 이 구조에서는 내가 낸 아이디어가 부정되지 않고, 그래서 ‘극단적인 협력’이 일어난다. 전혀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협력하기 위해서는 서로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필요한데, 여기서 ‘시각화(visualization)’가 사용된다. 시각화에서는 문자와 이미지가 결합된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사용한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훌륭한 방법이지만,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만났을 때 서로의 간극을 줄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그런 면에서 시각화는 문자에 이미지를 더하는 방식으로 서로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서로의 의견을 이해하기 쉽게 만든다. 또한 시각화 과정을 거칠 때 단어를 이미지화하면서 창의적 발상이 일어난다. 디자인 씽킹의 프로세스 중 ‘공감’에서 수집한 많은 자료를 정리하는 데에도 시각화는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이처럼 시각화는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이기 때문에 단어의 핵심을 이미지화하기 위한 연습에 습관을 들여야 한다. 사랑한대 2017년 5-6월호 이북 보기

2017-05 23

[오피니언][건강한대] 우리 아이 눈 건강을 위한 체크리스트

시력 발달의 핵심적인 시기는 생후 2~3개월 이내다. 물론 이 시기가 지난 후에도 적절한 시자극이 있어야 정상적으로 시력이 발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력 발달을 방해하는 흔한 원인은 무엇일까? 글. 강민호 교수(한양대학교병원 안과) / 그림. 안우정 약시의 원인은 사시와 굴절이상 대개 시력은 6세 정도가 되어야 거의 완전한 발달을 하게 된다. 하지만 안구는 정상이지만 유・소아기에 시력 발달을 위한 적절한 시자극이 부족하면 안경으로 교정해도 정상 시력이 나오지 않는 약시라는 시력 장애가 발생하게 된다. 약시는 전 인구의 2% 내외로 추정되고 있으며, 국내 취학 전 아동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약시의 유병률은 0.2% 정도로 보고된다. 약시는 주로 사시와 굴절이상(근시, 원시, 난시, 부동시)이 원인의 98% 정도를 차지한다. 기타 기질적 원인으로는 선천백내장, 선천녹내장이 있지만 드물고, 안검하수의 경우 조기에 진단이 되므로 일반적으로 약시는 사시와 굴절이상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만 4~5세에 안과 검진 받아야 사시의 경우 외관상 안구의 정렬이 바르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조기에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굴절이상의 경우 외관상으로 알 수 없고, 특히 부동시(오른쪽 눈과 왼쪽 눈의 굴절이 다르거나 또는 같은 종류의 굴절이라도 그 굴절도가 다른 것)의 경우 한쪽 눈의 시력이 좋으면 아이들이 일상생활을 하는 데 지장이 없어 늦게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약시는 조기 치료가 중요한데, 치료를 시작하는 연령이 낮을수록 시력 회복이 잘 되고 치료 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 만 8~9세 이후에는 시기능과 관련된 뇌기능이 성숙해 더 이상 뇌가 시자극에 반응하지 않기 때문에 치료를 통한 시력 호전 가능성이 매우 낮다. 불행히도 국내 보고에 따르면, 약시 환자의 절반 정도가 만 5세가 넘어서야 처음으로 약시 관련 안과 진료를 받는다. 이처럼 치료 시기가 늦어지는 탓에 치료 기간이 길어지고 시력 또한 완벽하게 발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따라서 시력 발달 장애 증상이 있는 경우 즉각적인 안과 진료를 통해 기질적 원인의 유무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 아무 증상이 없더라도 만 4~5세 정도에는 안과 검진을 통해 정상적인 시력 발달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림치료 후 주기적인 관찰 필요 약시의 기본 치료는 굴절이상이 있을 경우 안경을 통해 굴절이상을 교정해서 적절한 시자극이 눈에 도달하게 하고, 약시가 생긴 눈을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정상적인 눈을 가리는 가림치료를 하는 것이다. 약물을 이용한 치료는 제한적이고 부작용이 있어서 가림치료가 약시 치료의 근간이 된다. 눈을 가리는 시간은 약시의 정도, 나이, 순응도에 따라 다르다. 약시가 심하고 빨리 호전시킬 필요가 있는 경우 종일 가림을 하기도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하루 6시간 이상은 치료 효과가 비슷하기 때문에 대개 부분 가림치료로 시작한다. 약시 치료 후 시력이 정상화되더라도 안경이나 가림치료를 중단 건강한대할 경우 다시 약시가 생기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치료 후 2년 이상 주기적인 경과 관찰이 필요하고, 약시의 재발 방지를 위해 일정 기간은 유지 치료가 필요하다. 정기적인 검사로 좋은 시력 유지해야 취학 후 시력이 떨어지는 문제로 안과 진료를 받는 경우가 많은데, 시력이 잘 발달해서 나안시력(육안으로 측정한 시력)이 좋더라도 크면서 안구의 길이 성장이 생기면 눈의 굴절 상태가 근시로 진행되기 때문에 나안시력이 떨어질 수 있다. 이런 경우 안경을 착용해서 굴절이상을 교정하게 되면 정상적인 시력을 보이므로 약시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성장에 따른 굴절이상을 적절한 시기에 교정해주고 좋은 시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6개월에서 1년에 한 번 정도 정기적인 굴절이상의 변화 유무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력 발달에 장애가 있는 어린이의 증상 (부동시는 증상이 없음)◀ • 생후 3~4개월이 되어도 엄마와 눈을 잘 맞추지 못한다 • 그림이나 책을 너무 가까이서 본다 • 눈 정렬이 바르지 못하고(초점이 이상하거나 몰려 보임), 고개를 기울이거나 옆으로 돌려서 본다 • 눈을 자주 비빈다 • 눈이 흔들린다 • 한쪽 눈만 자주 감거나 눈부셔 한다 • 눈꺼풀이 처져 있거나 눈동자의 색깔이 이상하다 • 미숙아, 유전 질환이 있거나 눈 관련 질환의 가족력이 있다 사랑한대 2017년 5-6월호 이북 보기

2017-05 22

[오피니언][타임머신] 배움 그 이상의 가치를 담은 캠퍼스

내게 대학 캠퍼스는 방황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방황과 회의의 날들이 없었다면 나는 전공과목인 수학에만 집중하고 문학, 철학, 미술 등의 영역으로 관심을 확장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함기석(시인/동화작가·수학과 86) ▲ 친구들과 목포항에서 찰칵!(출처: 함기석 동문) 사색의 숲에서 만난 책들 교문에서 진사로를 따라 언덕을 올라가면 1층에 서점과 우체국이 있던 학생회관 건물이 나왔다. 그곳 광장에서 가파른 희망의 계단을 오르면 건물이 하나 나왔다. 자연대와 사회대가 함께 쓰던 곳이었다. 거기서 대학 본관으로 내려가는 길에 작은 쉼터 공간이 있었다. 낡은 나무벤치가 있고 나무들이 많은 그곳을 나는 ‘사색의 숲’이라 부르곤 했다. 그곳엔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과 아름다운 그늘이 있었다.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있었다. 강의가 없는 시간이면 나는 친구들 몰래 혼자 그곳으로 내려가 철학책을 읽곤 했다. 랭보나 발레리 같은 프랑스 시인들의 번역시집, 민중문학 계열의 책들을 읽었다. 책에는 내가 모르던 노동자의 삶과 참혹한 현실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열악한 환경에 처한 노동자들의 울분과 비애가 짙게 배어 있었다. 자본을 매개로 가진 자와 무산자 사이의 대립 구조에서 수탈과 차별이 발생한다는 걸 난 알게 되었다. 이 구조적 모순이 끝없는 대립을 낳고 노동자들의 저항과 분노를 촉발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책도 불구적 현실을 타파할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진 못했다. 오히려 이념과 사상이 개인의 생각과 상상을 획일화시키고 문학의 자유로운 형식을 억압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질문과 낭만과 분노가 어우러진 공간 ▲ 86학번 친구들과 강원도 속초 민박집에서(출처: 함기석 동문) 돌이켜보면 내가 다니던 80년대 중반의 대학 캠퍼스는 단순한 배움의 공간만이 아니었다. 그곳은 시대의 현장이었고 투쟁의 참여마당이었다. 가치 있고 참된 삶의 방향을 찾기 위한 질문의 공간이었고 낭만의 공간이었다. 어떤 학우에겐 연인과의 아름다운 데이트 공간이었고, 어떤 학우에겐 미래를 위한 아름다운 설계 공간이었고, 어떤 학우에겐 시대에 대한 분노의 표출 공간이었다. 시위대를 진압 해산하기 위해 전투경찰이 학내까지 진입하기도 했다. 보통 한양대 시위는 학교 정문 앞의 삼거리 광장이 전투경찰과의 대치 공간이었다. 거기서 거센 구호와 함께 전투적인 투석이 이루어졌고 그에 맞대응한 체루가스 살포와 지랄탄 공격이 이어지곤 했다. 따가운 눈물을 흘리면서도 우린 가슴 속에서 들끓는 불의에 대한 저항을 멈출 수 없었다. 눈에 비닐 랩을 두른 채 화염병을 던졌다. 시위가 점점 과격해지면 전경들은 곤봉과 방패를 휘두르며 매우 조직적으로 전진해왔다. 검은 철모와 무장한 옷과 방패까지 갖춘 전경대원들을 태운 차량이 학내 진사로 광장까지 밀고 들어올 때도 있었다. 그럼 쫓기고 쫓기다 뿔뿔이 흩어졌다가 우린 다시 시계탑에 모여들었다. 그곳은 자연대, 사회대에서 공대, 상대, 인문대, 사범대로 갈라지는 길목이었고 그곳에서 마지막 노래와 구호를 힘차게 외치고는 해산을 했다. 갈등과 번민의 시간을 보내다 그 당시 나는 김남주 시인의 시를 접하기 시작했다. 그의 시는 지배계급의 억압과 착취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독재의 현실과 참상을 노골적으로 폭로하고, 비인간적인 삶을 강요당하는 수많은 근로대중들의 삶과 노동 투쟁을 가슴 아프게 새겨내었다. 그에게 시인은 민중들이 불의와 폭력에 맞서 싸워나가도록 둥둥 북소리를 울리는 자이며, 전투의 나팔 소리를 울리는 자이며, 살인과 고문을 자행하는 압제자의 가슴에 창을 꽂는 자였다. 그에게 시는 이 땅의 독재 권력과 맞서 싸운 무기였고, 무사안일에 빠진 소시민들의 의식을 일깨운 날카로운 채찍이었다. 1980년 광주항쟁 관련 동영상과 자료들 그리고 광주 출신 친구들의 증언을 접하면서 나는 점점 더 깊은 회의와 시대에 대한 상실감에 빠져들었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진실과 역사는 대부분 날조된 것이라는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더 이상 학교에 붙어 있기 힘들었다. 갈등과 번민 속에서 나는 배낭을 싸매고 무작정 서울을 떴다. 서울역에서 마지막 야간열차에 몸을 싣고 남쪽 바다로 떠났다. 한 달 가까운 시간을 전국을 떠돌다 돌아와 보니 기말고사가 시작되었다. 필수과목이었던 군사훈련 과목인 교련을 비롯해 물리실험, 화학실험 등 여러 과목에서 낙제점이 나왔고 나는 도망치듯 군에 자원입대했다. ▲ 수학과 동기생들과 기념 촬영을 했다 (출처: 함기석 동문) 어리고 순수했던 그 시절 돌이켜보면 대학 생활은 참으로 짧다. 친구들과 후회 없이 질퍽하게 놀았고 암담한 시대 속에서 가슴 뜨겁게 보냈던 시절이었다. 규락, 은화, 학주, 재진, 원우, 전우, 흥기, 종태 등등 동기생들을 떠올려 본다. 그들 또한 치기와 열망에 사로잡혔던 그때 그 시절이 몹시 그리울 거다. 그때 우린 어렸고 세상도 어렸다. 그때 우리의 심장은 뜨거웠고 머리는 경직되지 않았다. 태양도 달도 별도 모두 우리 편이었고 우린 깔깔거리며 세상을 맘대로 주물러 반죽했다. 정말이지 그때 우린 어리고 어렸다. 그래서 순수했고 겁이 없었고 실패가 두렵지 않았다. 돌아보면 대학은 아련하고 아픈 고향집 같은 곳이다. 떠나온 지 30여 년이 지나서야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사랑한대 2017년 5-6월호 이북 보기

2017-04 04

[오피니언][짧은 글 긴 이야기] 캠퍼스와 함께한 나의 성장과 발전

한양플라자 3층 학생 식당이 리모델링됐다. 아무래도 많이 낡긴 했었다. 다 떨어져가는 벽지와 오래된 의자, 탁자들도 칙칙한 분위기에 한몫했지만 이래저래 다른 학생 식당들이나 시설들이 세련된 모습으로 변하면서 상대적으로 누추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1월과 2월 두 달 동안의 공사를 거쳐 다시 문을 열었는데, 꽤나 그럴싸한 모습이다. 글. 양재영(사회학과 11) / 그림. 안우정 6년 전 교정을 떠올리며 ‘여기도 바뀌었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처음 입학했던 2011년의 교정과 지금의 그것은 6년 터울일 뿐인데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외형적으로 많이 바뀌었다. 노천극장 앞의 세련된 미래자동차공학관, 다듬어진 한양둘레길, 곳곳에 새로 생긴 카페들은 내 신입생 시절에는 없던 것들이다. 내부적으로는 어떤가. 불과 6년 전이지만 그 시절 생활과학대는 온수는커녕 한 층에 한 개의 화장실도 없었다고 한다. 공간이 너무 부족해 화장실로 쓰던 공간을 과방으로 개조해서 사용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진다. 또한 이전에는 없었던 수많은 단체들이 생겨났으며 시스템도 많이 개선됐다. 그렇게 묵묵히 내가 몸담은 학교의 변화를 천천히 떠올려보고 있자니 문득 나의 성장과 변화는 나의 모교와 함께 자란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대를 시작하며 한양대에 입학했고 그 이후 지금까지 보냈던 많은 시간들이 학교와 관련된 것이었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이제 4학년, 취업 준비에 매달려 하루하루 나 자신의 발전에만 매몰되어 있었기에 나에게는 이런 생각들이 꽤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항상 나 자신의 발전을 위해 하루하루 찾던 이 공간도 나와 함께 변화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떤 씨앗도 혼자 발아할 수 없다 취업 준비생이란 타이틀이 이제 나를 부른다고 느낄 즈음의 학생들의 시야란 상당히 좁아지기 마련이다. 남을 배려할 마음의 여유를 챙기기에는 자신이 처한 현실이 너무나 각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단 나부터 살고 보자는 이기적인 마음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어떤 씨앗도 자기 혼자의 힘으로 발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씨앗이 온전히 나무로 자라기 위해서는 자신을 품어줄 비옥한 토양과 적절한 영양분 그리고 옆에서 성장을 함께할 다른 씨앗이 필요한 법이다. 이 교정은 나와 많은 것을 함께하는 비옥한 토양 같은 것이다. 때론 전문적인 지식을 쌓아주는 선생님으로, 주린 배를 채워주는 식당으로, 흥에 겨운 밤을 보내며 아침을 지새웠던 친구로 함께해왔다. 항상 나를 품어주고 길러줬다는 뜻이다. 또한 나와 함께 자랄 많은 친구들을 만나게 해준 것도 우리 학교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공부하고 고충을 토로할 수 있는 인연들을 만난 것도 바로 학교가 우리에게 제공해준 것들이다. 나의 뿌리를 기억하는 일 추수의 때, 나라는 사람이 황금빛으로 익을 때 나는 이 캠퍼스를 떠날 것이다. 사회에서 원하는 인재로 알맞게 익어서 어딘가에서 요긴하게 사용될 터이다. 그때가 되면 천천히 변화하는 교정의 모습을 더 이상 이 자리에서 지켜볼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학교에 영원히 남을 수는 없을지라도 중요한 것은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나의 뿌리를 기억하는 일이다. 내가 성장했던 고향을 떠올리고 나와 함께 공부한 친구들을 기억하며 사는 것은 곧 나라는 사람이 어떻게 이 자리에 존재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감사를 갖는 것이다. 비록 아직은 미래에 대한 걱정에 잠 못 이루는 취업 준비생일지라도, 이런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나와 함께 성장하는 많은 존재들을 떠올리며 나는 오늘도 도서관으로 향한다. 사랑한대 2017년 3-4월호 이북 보기

2017-03 31

[오피니언][건강한대] 건강한 잇몸, 올바른 치아 관리

충치와 풍치를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올바른 칫솔질을 배워 깨끗한 구강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프라그란 치아에 끈적끈적하게 붙어 있는 거의 무색의 얇은 막으로, 이 프라그가 충치와 잇몸병의 주원인이다. 글. 황경균 교수(한양대학교병원 치과) / 그림. 안우정 충치와 풍치 예방은 프라그 제거부터 칫솔질은 마구잡이로 닦아서 치아에 광을 내는 것이 아니라, 음식물 찌꺼기와 프라그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칫솔질은 앞뒤가 아닌 위아래로 구석구석 쓸어내듯이 닦아야 한다. 우선 칫솔을 빗자루처럼 잇몸에서 치아 쪽으로 쓸어내듯이 움직여 치아를 2~3개씩 닦는다. 또 한 부위를 10회 정도 쓸어내리고, 빠진 부위 없이 구석구석 순서를 정해 닦는다. 어금니 안쪽을 닦을 때는 칫솔 끝부분으로 1~2개씩 나눠서 닦는다. 이 방법이 익숙하지 않을 때는 거울을 보고 부위를 확인하며 닦는다. 특히 잇몸이 나쁜 사람들은 칫솔이 치아 사이로 충분히 들어가도록 움직여 치아 사이에 음식물 찌꺼기가 남아 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음식을 먹은 후 3분이 지나면 치아 표면에 세균막인 프라그가 형성되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식후 3분 이내에, 하루 세 번 이상, 3분 정도 칫솔질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어린아이의 경우 간식 먹는 버릇을 고쳐야 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음식을 먹이지 않는 것이 좋다. 또 아이스크림, 청량음료 등 어린이 치아에 치명적인 음식은 먹은 후에 반드시 물로 헹구는 습관을 길러 주는 것이 중요하다. 칫솔은 자연모로 된 것보다 인공모로 이루어진 것이 좋으며, 모든 치아에 접근하기 편한 크기의 것을 선택한다. 칫솔질 외의 보조 수단으로 치아 사이의 음식물 찌꺼기를 제거해 줄 수 있는 치간칫솔이나 치실을 사용함으로써 세균이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없앨 수 있다. 치아 건강 도우미 ‘불소’를 이용한 충치 예방 구강 건강에 좋은 음식물을 잘 섭취하고 해가 되는 음식의 섭취를 줄이는 것도 충치 예방에 도움이 된다. 당분은 충치를 잘 생기게 한다. 따라서 당분이 다량 함유된 비스킷, 케이크, 초콜릿, 양갱, 도넛, 설탕, 빵, 밀가루 음식 등의 섭취를 줄인다. 이런 식품을 먹은 후에는 즉시 칫솔질을 하는 것이 좋다. 반면 호두, 잣, 땅콩과 같은 지방질이나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생선 및 어패류 등 단백질이 많은 음식은 자주 섭취하는 것이 좋다. 또 채소나 과일을 많이 먹으면 치아 면을 씻어주는 자정 작용으로 충치를 예방할 수 있다. 충치 예방에 상당히 효과적인 방법으로 산에 대한 저항성을 높여 주는 불소 이용법이 있다. 불소란 충치를 예방할 수 있는 원소로 치아 건강의 핵심적 요소다. 불소는 세균에 의해 생기는 산에 잘 견디어 치아를 보호하고 치아 표면에 불소막을 형성해 초기에 충치를 일으키는 세균을 억제하는 작용을 한다. 또 다른 방법은 치과에서 불소를 치아 면에 발라주는 불소도포법이 있는데, 약 40~70%의 충치 예방 효과가 있다. 치아의 틈새를 미리 메우는 치면열구전색법 충치 예방법으로 치아 틈새나 구멍을 미리 메워 주는 치면열구전색법이 있다. 어금니의 씹는 면은 음식물을 잘 부수고 갈 수 있게 거친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의 깊고 가느다란 틈새와 작은 구멍들이 있는데 이곳에 음식물이나 프라그가 잘 낀다. 칫솔질로는 이 틈새에 낀 음식물이 제거되지 않아 충치가 생기기 쉽다. 이와 같은 틈새나 구멍을 플라스틱 계통의 레진으로 미리 메워 충치를 예방하는 방법이 치면열구전색법이다. 약 65~90%의 충치 예방 효과가 있는데, 치아를 인공적으로 갈아내지 않고 시행하는 것이 장점이다. 치면열구전색은 5세의 아동부터 영구치 어금니가 완전히 나오는 15세까지의 연령에서 시행된다. 충치의 발생률이 높거나 씹는 면의 틈새가 깊은 치아를 가진 이들에게 효과적이다. 건강한 치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기적인 구강 검사를 통해서 충치 및 풍치가 발생하기 전이나 초기에 치료해 병의 진행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 구강 검사는 6개월 간격으로 정기적으로 하는 것을 권장한다. ▶알쏭달쏭 치아 건강 상식◀ 1 사탕은 무조건 충치를 일으킨다? 음식의 성분과 음식을 먹는 습관은 충치 발생에 중요한 요인이다. 음식에 함유된 설탕은 치면세균막의 내부에서 산을 제조할 뿐만 아니라 매우 끈끈한 당단백질을 만들어 세균막이 치면에 단단히 부착되도록 도와주므로 단 음식을 자주 먹는 습관은 충치 발생을 증가시킨다. 2 임신 중에는 치과 치료를 받으면 안 된다? 임신 시의 치과 치료는 안정기인 4~6개월에 받는 것이 좋다. 이를 제외한 임신 초기나 말기에는 심한 통증 완화에 필요한 치료나 스케일링 등의 치료 외에 약을 복용하는 치료는 피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무작정 통증을 참는 것보다 치과의사와의 상담을 통해 임신 시 안전한 약을 복용하고 치료받는 것이 좋다. 3 전동칫솔이 잘 닦인다? 전동칫솔은 이를 닦는 동작을 적절히 조절할 수 없는 것이 단점이며, 과도한 압력으로 치경부 마모증을 일으키기도 한다. 충치 예방을 위해서는 칫솔 선택도 중요하지만 올바른 잇솔질을 통한 구강 위생 관리가 더욱 중요하다. 4 구강세정제가 충치를 예방한다? 잇솔질 후 구강에 남아 있는 치면세균막의 제거와 일시적으로 구강 내 미생물의 양을 감소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잇솔질 후의 보조적인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옳다. 5 소금으로 닦으면 치아가 튼튼해진다? 큰 소금 입자가 치아를 마모시켜 시린 증상이 나타날 수 있으므로 직접 소금으로 닦기보다는 잇솔질 후 소금물로 입 안을 헹구는 것이 좋다. 사랑한대 2017년 3-4월호 이북 보기

2017-03 31

[오피니언][타임머신] 아름다운 시간 속 추억의 편린들

몇 해 전 일이다. 한양대학교병원을 찾게 된 것은 대학 동창이 내게 전한 부고 때문이었다. 학교 다닐 때 시인이셨던 교수님의 부인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선약이 잡혀 있긴 했지만 약속을 취소하고 강변북로로 핸들을 꺾었다. 그런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만나게 될 친구들과 졸업 후 한 번도 찾지 않은 학교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궁금했다. 이순임(소설가/㈜램프웨이 대표·국어국문학과 85) ▲1988년 팰리스호텔에서 열린 사은회 때의 모습(출처: 이순임 동문) 문득 떠오른 졸업식 날의 풍경 한양대역 근처에 이를 무렵, 문득 졸업식 날이 떠올랐다. 엄마는 새로 맞춘 한복을 곱게 차려 입으셨고 은빛 스팽글이 달린 토트백을 드셨다. 그런데 전철 안은 사람들로 미어터졌고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인파에 밀려 엄마는 맨 아래 계단까지 어떻게 내려왔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지갑이 없어진 걸 알게 된 것은 우왕좌왕 식을 마치고 사진을 찍은 다음이었다. 엄마 안색은 순식간에 달라지셨다. 그제야 엄마는 계단 내리막에서 누군가 툭, 치고 지나간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부모님은 무슨 이유에선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진관에 들러 나란히 독사진을 찍으셨다. 그때 찍은 사진이 엄마의 영정사진이 됐고, 기일이 돌아올 때마다 나는 한복 입은 엄마를 보게 된다. 30년 전 소매치기를 당하고 마음이 상해 있던 엄마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은 역에서 곧바로 갈 수 있도록 학교까지 통로가 이어져 있다고 들었다. 그때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30년의 시간을 거꾸로 돌리다 나는 천천히 차의 속도를 낮추면서 교문을 찾아보았다. 둘이었던 교문이 언제 없어졌는지 하나만 남아 있었다. 정확하게 ▲ 2학년 때 협궤열차 앞에서 국문과 친구들과 추억을 남 겼다. (출처: 이순임 동문) 어느 쪽에 있었는지 구분이 안 됐다. 뒤이어 내 눈을 의심했다. 빼곡하게 들어선 학교의 신축 건물들이 하나둘 모습을 나타냈다. 나는 아예 차를 정차시키고 차창 문을 열어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옛날의 그 학교가 아닌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 하는 기분이 들었다. 1985년에 타임머신을 타고 간 2015년 미래에 대한 이야기. 불현듯 <백 투 더 퓨처 2>란 영화가 떠올랐다. 나 역시 85년도 새내기 대학 생활을 함께했던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어언 30년의 시간을 영화처럼 거꾸로 돌리고 있었으니 맞추기라도 한 듯, 시간의 간극이 일치했다. 나는 이미 지난 시간 속에 묻혀 있었다. 촌스런 펌에 청바지와 운동화 차림이었던 친구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들을 만나면 어깨동무를 하고 겅중겅중 뛰어보다가 지치면 오래도록 포옹하고 싶었다. 그리고 아직도 심장이 뜨겁게 뛰는지 하하호호 웃고도 싶었다. 마음은 벌써 장례식장에 닿기도 전에 저만큼 앞서 가고 있었다. 과거의 한 순간으로 나를 이끈 힘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걷는 것을 유난히 싫어한다. 1985년 신입생 합격자 발표를 보기 위해 나는 정문에서부터 힘겹게 언덕을 올랐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는 합격자 명단이 대운동장에 붙여져 있었다. 어렵게 물어 찾아갔던 그 넓은 운동장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30여 년 전 겨울, 외투에 손을 넣은 채 운동장을 걷는 나의 뒷모습이 그려졌다. 합격자 명 ▲ 학과 친구들과 함께 인천항에서 찰칵!(출처: 이순임 동문) 단 공고문 앞에서 수험번호를 발견하고 안도했던 나. 물론 나는 ERICA캠퍼스가 더 친숙했다. 바람이 많고 허허벌판이었던 안산은 지금 아무리 눈 씻고 찾아보려 해도 옛날의 바람을 만날 수 없으리라. 친구들과 수원과 인천을 오가는 협궤열차를 탄 적도 있다. 어떻게 해서 그 많은 인원이 열차를 타고 인천항에 가게 됐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무엇이 과거의 한 순간으로 나를 이끌었을까. 벌써 학교를 졸업한 지 30년이 다 되어간다. 나도 이제 나이가 먹을 만큼 먹은 셈이다. 묵은 짐을 정리하다가 아이들의 어릴 적 앨범을 펼쳐 보게 됐다. 그 가운데 사진 한 장이 유난히 내 마음을 붙들고 놓아주질 않았다. 사진 속의 두 아들은 볼우물이 파일 만큼 헤벌쭉 웃고 있었다. 특히 눈이 좀 큰 편인 작은애의 까만 눈동자가 조명처럼 빛났다. 게다가 조막만한 양 주먹은 오므리고 두 팔은 가슴께까지 가 있었다. 보면 볼수록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나는 스마트폰의 카메라를 작동시켜 사진을 옮겨두었다. 한동안 매일 아침 사진을 보고 하루를 시작했다. 아름다운 장면은 기억을 불러내는 한, 현재에도 미래에도 늘 살아있기 마련이다. 살아있기에 만날 수 있었던 그새 어둠이 내렸고 장례식장이 어디에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도대체 모르겠군. 천천히 차를 몰며 혼잣말을 하고 있을 때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국문과였던 친구들이 많이 와 있는데 언제 도착하느냐는 물음이었다. 하긴 그 친구를 만나게 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 친구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한다는 말이 “살아있어 줘서 고마워!”였다. 나는 그 말을 오래도록 곱씹었다. 살아있다는 것은 매우 신비로운 일이다. 장례식장에 가는 동안 나는 과거라 말하는 시간 속에서 추억의 편린들을 꺼냈었다. 모두 살아있는 기억들이었다. 30여 년 전에 비해 많이 달라진 학교 전경이야말로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강렬하게 깨닫게 해 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장례식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살아있기 때문에 우리는 만났다. 사랑한대 2017년 3-4월호 이북 보기

2017-01 19

[오피니언][짧은 글 긴 이야기] 2017년, 내 인생의 선물 같은 한 해가 되길

새해가 밝았다. 지난 한 해를 열심히 보낸 나에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간을 선물하고 싶다. 1년이 지나 2017년을 마무리하며, 후회 없는 한 해였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길 바란다. 글. 이주비(한국언어문학과 14) / 그림. 안우정 인생 23년 차가 된 소감 스물세 살,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나이다. 스물세 살은 아직도 자신에 대해 잘 모를 나이다. 스물세 살은 미숙한 어른이다. 가끔은 자신이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을 잊기도 하는. 스물세 살은 그런 나이다. 2017년, 난 스물세 살이 됐다. 대학에 들어온 지 4년째다. 학교에 입학해서 정신없이 놀다 보니 1년이 지났고, 적응 좀 했다 싶으니 2년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렇게 3년이 지나 있었다. 사회에서 스물세 살은 풋풋한 대학생이지만, 학교 안에서는 늙은이 취급받기 십상이다. 안팎의 온도차가 이렇게 심하니 어서 빨리 취업을 해서 학교를 떠나는 게 답이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4학년이 된 이상 이제 취업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금까지는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따뜻하게 살았지만 1년 뒤에는 냉랭한 사회로 내몰리게 된다. 그때를 대비해 준비해야 한다. 누군가는 지금도 늦었으니 당장 목표를 정해서 달려가라고 내게 말한다. 하지만 솔직히 난 아직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또 다른 누군가는 바로 그게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 나이라면, 그 학년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진로를 확실하게 정해뒀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반박하고 싶다. 과연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고. 당신의 인생은 그렇게 확신으로 가득 차 있느냐고. 벌써부터 주변의 지대한 관심이 나를 지치게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의 유익함 2016년의 나는 정신없이 달려왔다. 아니, 2016년만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나는 내내 옆에 어떤 풍경이 펼쳐져 있는지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달리기에만 급급했다. 그렇기에 나를 알아간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방학을 쉬기만 하면서 지낸 게 손에 꼽을 정도다. 초등학생 때는 제외하더라도 중·고등학생 때는 공부하느라, 대학교 들어와서는 아르바이트하고 학원에 다니느라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그래도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방학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대학교1학년 겨울방학을 꼽고 싶다. 그때 특별한 일을 한 건 아니다. 말 그대로, 정말 하는 게 없었다. 책을 읽고, 보고 싶은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글을 쓰고, 잠도 자고 싶은 만큼 실컷 잤다. 그럼에도 왜 가장 기억에 남느냐고 묻는다면, 그 시간은 온전히 나만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게으름을 피우다 보면 온갖 잡념들이 날 사로잡았고, 내 존재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태한 생활이 반복되면서 자기혐오의 감정도 들었지만 돌이켜보면 그 또한 다시는 없을 유익한 시간이었다. 나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언제 다시 주어질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때를 떠올리며 나는 다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 1월을 계획 중이다. 제대로 달리기 위해선 가끔은 뒹굴며 쉬는 시간도 필요하다. 이번 겨울도 그때의 겨울처럼 보내고 싶다. 그리고 난 같은 이유로 또 다른 계획을 세우게 됐다. 재충전, 그리고 다시 시작 난 느리더라도 신중히 결정한 나만의 길을 가길 원한다. 성급히 내린 결정을 믿지 못해서이기도 하고, 성격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민 끝에 올해는 휴학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건 순전히 나를 위한 선택이었다.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은 학교와 집만을 오가는 틀에 박힌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 속에선 제한된 경험만 가능했다. 대학 생활 3년은 이런 나에게 그전의 19년간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특히 대학 생활은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나를 알아나가는 데 도움을 줬다. 그렇지만 학교에 다니면서 하고 싶은 것들을 모두 하기란 너무 벅찬 일이었고, 난 내가 원하는 것들만 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해 휴학을 결정했다. 그러나 세상만사 내 뜻대로만 되지 않는 법. 누구보다 먼저 주위의 사람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설령 그들이 직접적으로 표현하진 않더라도 무언의 압박을 주기도 했다. 아니면 나 스스로 휴학하는 이유가 타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해 뜨끔한 것일 수도 있다. 사실 그렇다고 해서 내게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내 마음대로 살아보는 것. 이게 다였다. 처음엔 도저히 이해 못 하시던 부모님도 나의 거듭된 주장에 결국 백기를 드셨다. 어찌 됐건 올해 나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나만의 시간을 갖게 됐다. 평생 나에게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떤 것에 구속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아볼 기회는 이번 한 번뿐인 것이다. 2017년을 어떻게 채워 나갈지 기대된다. 사랑한대 2017년 1-2월호 이북 보기

2017-01 17

[오피니언][건강한대] 겨울철 비단결 같은 피부 만들기

겨울에는 날씨가 차고 건조해 각질이 일기 쉽다. 또한 아토피 피부염, 주부 습진 등이 악화될 수 있으며 노인은 건조 피부염으로 고생하기도 한다. 따라서 겨울철에는 어느 계절보다 적절한 피부 관리와 보습이 필수적이다. 글. 노영석 교수(한양대학교병원 피부과) / 그림. 안우정 추운 계절에 자주 발생하는 피부병 겨울에 흔히 접할 수 있는 피부 질환으로 동창, 동상, 피부 건조증을 꼽을 수 있다. 이에 대한 증상은 무엇이고, 치료 및 예방은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동창은 5~10℃의 낮은 온도에 장기간 노출됐을 때 생기는 비정상적인 국소적 염증 반응으로 손가락, 발가락, 코, 귀 등에 홍색 또는 자색의 종창이 발생하는데, 소양감과 통증을 동반하며 2~3주 내에 자연 소실된다. 동창을 피하려면 손발이 젖은 상태로 추운 데 오래 노출되지 않도록 하고, 따뜻한 의복 착용, 규칙적인 운동과 금연, 비타민 복용 등이 도움이 된다. 동상은 영하 2~10℃의 심한 추위에 노출돼 조직이 얼어버려 혈액 공급이 안 되는 상태를 말하며 귀, 코, 뺨, 손가락, 발가락 등에 자주 발생한다. 언 부위는 창백하고 통증이 없지만 따뜻하게 해주면 홍반, 괴사, 물집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치료는 가능한 한 빨리 따뜻하게 해주는 것이 우선이며, 통증이 있으면 진통제를 투여하고 죽은 조직을 외과적으로 절제하는 등 증상에 따른 치료가 필요하다. 피부 건조증은 피부 표면에 있는 지질 부족으로 수분을 공기 중으로 빼앗겨서 피부가 건조한 상태를 말하며 가려움증을 동반한다. 피부가 건조하면 거칠어지며 피부 표면에 비듬처럼 하얀 인설이 일어나게 된다. 심하면 피부가 갈라져서 균열이 생기기도 한다. 가려움증은 피부를 문지르거나 긁게 만들어 상처나 염증을 유발할 수 있다. 이런 경우 피부 지질의 균형이 깨져서 피부 건조증을 유발하고 이것이 다시 가려움증을 악화시키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부드럽게 보송보송, 피부 관리 노하우 추운 계절에도 비단결처럼 고운 피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주의가 필요하다. 첫째, 피부에 수분을 공급한다. 샤워와 목욕의 횟수를 줄이고, 너무 뜨거운 물보다는 미지근한 물로 씻는 것이 좋다. 목욕 횟수는 일주일에 2~3회가 적당하고, 거친 때밀이 수건으로 때를 미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순한 비누나 세정 제품을 사용하고, 목욕 후에는 세제가 피부에 남아 있지 않도록 충분히 여러 번 씻는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을 때에는 문지르지 말고 가볍게 두드려 닦고, 목욕 후 3분 이내에 보습제나 로션을 바르도록 한다. 또 실내 온도가 지나치게 높지 않도록 과도한 난방을 피하고, 가습기를 사용하거나 자기 전에 실내에 젖은 빨래를 널어서 적정 습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낮은 온도에서 장시간 야외 노출을 피한다. 스키, 겨울 등산 등의 운동을 오랫동안 하는 경우 과도한 일광 노출로 인해 얼굴이 화끈거리거나 피부색이 검게 변할 수 있으므로 자외선 차단제를 발라 피부를 보호한다. 셋째, 춥다고 전기난로 앞에 너무 가까이 있거나 피부에 오랜 시간 핫팩을 대고 있는 행동은 피한다. 이러한 경우 그물 모양의 적갈색 반점 및 색소 침착이 나타날 수 있고, 이것이 만성화되면 피부암을 유발할 수 있다. 동상과 동창, 생활 속 꼼꼼 예방법 ➊ 적당한 두께의 양말과 편안한 신발을 착용한다 혈액 순환이 원활하지 않으면 말단 부위의 온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강추위가 아니더라도 꽉 끼는 장갑, 신발, 양말 등은 피한다. 종아리까지 덮는 부츠를 신거나 키높이 깔창, 너무 두꺼운 양말을 신으면 발을 조이거나 꽉 끼게 만들어 발의 혈액 순환을 방해한다. 여기에 땀까지 나면 신발 속의 습도가 높아져 동창 및 동상의 위험이 높아진다. ➋ 신발이나 속옷 등이 젖으면 신속하게 말린다 옷이나 속옷, 양말이 땀이나 물기로 젖으면 바로 마른 옷이나 속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래야 수분으로 인한 체온 저하를 방지할 수 있다. 신발이나 장갑이 젖은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되도록 빨리 젖은 신발과 장갑을 벗고 신속하게 손발을 말려야 한다. ➌ 혈액 순환이 잘 되도록 자주 움직인다 추운 곳에 장시간 노출될 때는 수시로 몸을 움직여서 혈액 순환이 잘 되도록 해야 한다. 손발이 얼었을 때는 가능한 한 빨리 따뜻한 곳으로 이동하고, 동상이 의심되는 부위가 바닥에 닿지 않도록 한다. 특히 눈 부위가 얼었을 때는 비비거나 문지르지 않도록 주의한다. 사랑한대 2017년 1-2월호 이북 보기

2017-01 17

[오피니언][타임머신] 프랑스에서 만난 안산 칼바람의 추억

인생은 우연과 선택이 쌓이면서 계속된다. 94학번인 나는 수능 1세대로 시험을 두 번 쳤고, 기대보다 낮은 점수를 받았다. 실망했지만 재수는 싫었다. 딱히 하고 싶거나 가고 싶은 학과는 없었지만, 하기 싫은 것은 분명했다. 법대와 상경대 계열은 몸서리치게 싫었다. 대구를 벗어나고 싶었고, 특이한 학과의 이름과 당시 국내에 두 곳밖에 없다는 희소성에 끌려 나는 한양대 안산캠퍼스(이하 ERICA캠퍼스) 광고홍보학과에 입학했다. 글. 이동섭(광고홍보학과 94) 동문 ERICA캠퍼스의 칼바람과 길카페 ▲ 이동섭 동문이 함께 자취하던 동기와 사진을 찍고 있다. 내 모교는 추위로 기억된다. 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고 입학식을 했던 행당캠퍼스(서울캠퍼스)는 추웠고, 수업을 듣는 ERICA캠퍼스는 몹시 추웠다. 멀리 서해의 바람은 캠퍼스까지 곧장 불어와 3월에도 안산은 여전히 한겨울이었다. 학교 건물은 낮고 흩어져 있어 바람을 막지 못했다. 바닷바람은 물기를 가득 머금어 차갑고 날카로워 외투를 비집고 몸 안쪽까지 파고들었다. 햇빛이 화창해도 몸은 으슬으슬할 만큼 위력적이었다. 우리는 ‘칼바람’이라 불렀다. 학교 정문을 나서면 왼편으로 추수가 끝난 논이 바닥을 휑하게 드러낸 채 저 멀리까지 이어졌다. 해는 일찍 졌고, 추위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석호상가 지하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2차로 선배들은 어디서 신문과 종이 뭉치, 나뭇조각 등을 가져와 학교 밖 길거리에서 불을 피워주었다. ‘길카페’였다. 바닥에 앉으면 땅의 한기가 훅 올라오면서 취기를 몰아냈다. 거창한 구호를 외치며 급하게 소주 몇 잔을 마시면 몸이 다시 데워지며 추위가 물러갔다. 취기와 추위를 모두 끌어안고 우리는 작은 모닥불을 피운 채 이야기를 하고, 학과와 동아리 노래 등을 배웠다. 남자 후배에게 인기 많았던 몇몇 선배들은 기타를 치며 각종 요상한 노래를 쉴 새 없이 불렀다. 혼자 부르면 부끄러워도 같이 부르면 신나는 그런 노래들이었다. 온기와 웃음이 가득했던 그 길카페가, 나는 좋았다. 오렌지족의 시대와 도서관 ▲ 이동섭 동문이 자취하던 집 1988년부터 1997년까지는 한국 역사에서 가장 행복했던 기간인 듯싶다. 정치적으로 민주화가 이뤄지고, 경제적으로 번영했던 10년이다. 정치와 경제의 안정은 청춘들에게 자신의 삶을 살 수 있게, 혹은 죄책감 없이 살 수 있도록 만들었다. X세대와 오렌지족의 시대였으니, 데모와 나라 걱정은 지나간 유행이었다. 이때의 시대적 명제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라’였다. 대학에 오니, 다른 애들은 모두 저마다 하고 싶은 일이 확실히 있는 듯 보였다. 당시만 해도 하고 싶은 일이 없었던 나는 초조했다. 무언가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고 열심히 공부하고 싶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아 불안했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고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친밀하게 굴지 못했던 성격 탓에 공강 시간은 주로 혼자 시간을 보냈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마주친 책을 읽고, 그 가운데 재밌게 본 책의 저자의 다른 책과 그 저자에게 영향을 준 책들을 찾아 읽었다. ▲ 이동섭 동문이 학년 MT로 가평을 갔을 때 '듀스'의 노래에 맞춰 춤을 연습하던 모습 독서 리스트는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했고, 나는 그 예측할 수 없음이 즐거웠다. 도서관에 비치된 거의 모든 주간지와 월간지의 목차를 보고, 관심 있는 기사들은 복사해서 밑줄 치며 읽었다. 탐독은 자연스럽게 다른 분야들로 넓어졌다. 그렇게 해서 나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왕가위 감독의 영화, 반 고흐와 에곤 쉴레의 그림, 로버트 프랭크와 디안 아버스의 사진, 장정일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김현의 문학비평과 기형도의 시, 베토벤과 슈만의 음악 등을 알게 됐다. 문화와 예술의 테두리 안에서 일하고 싶었지만, 작품을 창작할 재능이 없다는 두려움에 선뜻 뛰어들지 못했다. 졸업을 하면서 나는 광고회사가 아닌 미술관에 취직해서 1년 남짓 일했으나, 여전히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했다. 남들처럼 살았으나 남들처럼 살아지지 않았다. 월급의 쾌감도 무뎌졌고, 소주로도 고민은 도저히 해결되지 않았다. 2000년 5월 1일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파리 유학과 예술인문학 파리 유학 시절, 4년 동안 맞았던 안산의 습기 찬 칼바람이 그리우면 파리에서 가장 가까운 바닷가 도시 르아브르(Le Havre)로 가곤 했다. 아이슬란드 너머 북해에서 영국을 거 ▲ '영화로 맺어진 인연(영맺인)'이라는 소모임에 서 영화 촬영 실습을 하고 있는 이동섭 동문 쳐 그곳으로 밀려오는 바람은 차갑고 눅눅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마지막으로 그 바람을 맞으며 깨달았다. 지 금의 나는 ERICA캠퍼스 도서관에서 본격적으로 길러진 셈이구나! 그곳에서 보냈던 시간들로 인해 나는 파리에서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고 그것들을 관통하는 학제 간 연구에 관심이 생겼던 듯하다. 그것이 내 대학 생활의 가장 큰 추수물이었다. 덕분에 파리에서 10여 년 동안 사진과 현대 무용, 영화와 패션, 미술과 공연 등 여러 분야를 즐겁게 공부할 수 있었다. 그 중심에는 항상 시대와 사람에 대한 질문이 놓여 있었다. 나는 예술을 통해 사람과 세상을 연구하고, 그것을 동시대의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방송과 신문에서 예술 작품을 재료 삼아 인문학을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한편, 대학에서는 문화예술을 중심으로 다양한 장르를 융합시키는 강의를 하고 있다. 셔틀버스는 한대앞역에서 ▲ 학교 앞에서 동기, 후배와 사진을 찍는 이동섭 동문 얼마 전, 내가 출연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보시고 연락하신 은사님께서 후배들에게 특강을 부탁하셨다. 졸업하고 약 15년 만에 캠퍼스를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내가 학교를 다닐 때는 상록수역에서 내려서 셔틀버스를 타거나 태화버스를 타야만 했는데, 한양대 학과 잠바를 입은 학생들이 아무도 그곳에서 내리지 않기에 의아했다. 그들을 따라 한대앞역에서 내렸다. 풍경이 너무 많이 변해서 다른 도시 같았다. 학교 앞 드넓게 휑했던 논은 모두 건물로 가득했고, 길카페를 했었던 인도는 어딘지 흔적도 없었다. 우리 학과도 내가 다녔던 단과대 건물을 떠나 새로운 건물에 자리 잡고 있었다. 변화가 낯설고 아쉬웠으나, 예전의 나처럼 변하지 않은 칼바람을 맞으며 후배들은 꿈을 키우고 있었다. 사랑한대 2017년 1-2월호 이북 보기

2016-12 06

[오피니언]"4차혁명, 대학 자율성이 답이다"

본 글은 12월 6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이영무 총장의 기고문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편집자 주> "4차혁명, 대학 자율성이 답이다" 이영무 한양대 총장  올해 1월 다보스 포럼에선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필요한 21세기 핵심 어젠다 중 하나로 ‘교육’이 제시됐다. 특히 자료 기반 문제 해결, 비판적 사고, 창의력, 의사소통, 협업 능력, 융합 능력 등의 핵심 역량을 갖춘 융복합 인재 양성의 중요성이 화두였다.  우리도 세계적 추세에 부응하기 위한 교육의 변화가 불가피하다. 무엇보다 21세기를 선도할 핵심 인력 양성 기관인 대학의 혁신이 필수적이 됐다. 혁신의 키워드는 대학의 학사제도 운영에 있어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는 규제의 완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럼 구체적으로는 뭘 해야 할까.  첫째, 대학의 학과 간, 전공 간 칸막이를 없애고 경계를 허물어 융합 전공 제도를 운영해야 한다. 우리 대학의 학사제도에는 융복합 교육을 시행하는 데 있어 물리적·제도적 제약이 상당수 존재한다. 다양한 전공 분야 지식을 습득하고 이를 통해 하나의 주제를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제도적 변화가 필요하다. 또 별도의 학과 개편 없이 주(主)전공 이외의 다전공만 이수해 학위를 받는 것도 허용돼야 한다.  둘째, 수업 운영에서 학생들이 시간을 자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보편적으로 운영되는 2학기제는 학기당 15주 내내 수업을 진행해야 한다는 틀에 갇혀 있다. 이처럼 획일화된 수업 방식은 단계적 학습이나 산업현장과 대학 간의 이론·실습의 병행을 어렵게 한다. 학점당 15시간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교과목의 특성이나 학생의 역량 수준을 반영하여 수업을 집중적으로 이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셋째, 전공 분야의 특성에 따라 석사 과정 졸업 요건을 탄력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고등교육법령상 우리나라 석사 과정의 수업 연한은 대학원 수업은 최소 1년 6개월로 정해져 있다. 반면 대부분의 선진국은 석사학위를 1년 이내에 취득할 수 있다.  다양한 학문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그 과정에서 창의적 아이디어를 이끌어 내며 이를 현실로 옮기는 능력을 지닌 인재, 이것이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상이다. 이런 인재를 키우기 위해 탄력적인 대학의 학사 운영이 요구되지만, 우리 제도는 여전히 경직돼 있다. 이를 탈피할 수 있도록 관련 규제 완화와 운영 자율화가 절실하다. 자율화에 따른 부작용에 대한 우려로 규제 완화를 망설인다면 세계 시장에서 한국 사회와 한국의 대학들은 도태될 게 뻔하다.  정부도 대학의 엄중한 책무가 실현 가능해지도록 대학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자율화를 위한 인식 전환을 심사숙고할 때다. 이영무 한양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