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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2 기획 >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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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배움 그 이상의 가치를 담은 캠퍼스

함기석(시인/동화작가·수학과 86) 동문의 에세이

사자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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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yang.ac.kr/surl/xELM

내용
내게 대학 캠퍼스는 방황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방황과 회의의 날들이 없었다면 나는 전공과목인 수학에만 집중하고 문학, 철학, 미술 등의 영역으로 관심을 확장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함기석(시인/동화작가·수학과 86)
▲ 친구들과 목포항에서 찰칵!(출처: 함기석 동문)

사색의 숲에서 만난 책들


교문에서 진사로를 따라 언덕을 올라가면 1층에 서점과 우체국이 있던 학생회관 건물이 나왔다. 그곳 광장에서 가파른 희망의 계단을 오르면 건물이 하나 나왔다. 자연대와 사회대가 함께 쓰던 곳이었다. 거기서 대학 본관으로 내려가는 길에 작은 쉼터 공간이 있었다. 낡은 나무벤치가 있고 나무들이 많은 그곳을 나는 ‘사색의 숲’이라 부르곤 했다. 그곳엔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과 아름다운 그늘이 있었다.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있었다. 강의가 없는 시간이면 나는 친구들 몰래 혼자 그곳으로 내려가 철학책을 읽곤 했다. 랭보나 발레리 같은 프랑스 시인들의 번역시집, 민중문학 계열의 책들을 읽었다.
책에는 내가 모르던 노동자의 삶과 참혹한 현실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열악한 환경에 처한 노동자들의 울분과 비애가 짙게 배어 있었다. 자본을 매개로 가진 자와 무산자 사이의 대립 구조에서 수탈과 차별이 발생한다는 걸 난 알게 되었다. 이 구조적 모순이 끝없는 대립을 낳고 노동자들의 저항과 분노를 촉발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책도 불구적 현실을 타파할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진 못했다. 오히려 이념과 사상이 개인의 생각과 상상을 획일화시키고 문학의 자유로운 형식을 억압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질문과 낭만과 분노가 어우러진 공간

▲ 86학번 친구들과 강원도 속초 민박집에서(출처: 함기석 동문)

돌이켜보면 내가 다니던 80년대 중반의 대학 캠퍼스는 단순한 배움의 공간만이 아니었다. 그곳은 시대의 현장이었고 투쟁의 참여마당이었다. 가치 있고 참된 삶의 방향을 찾기 위한 질문의 공간이었고 낭만의 공간이었다. 어떤 학우에겐 연인과의 아름다운 데이트 공간이었고, 어떤 학우에겐 미래를 위한 아름다운 설계 공간이었고, 어떤 학우에겐 시대에 대한 분노의 표출 공간이었다.
시위대를 진압 해산하기 위해 전투경찰이 학내까지 진입하기도 했다. 보통 한양대 시위는 학교 정문 앞의 삼거리 광장이 전투경찰과의 대치 공간이었다. 거기서 거센 구호와 함께 전투적인 투석이 이루어졌고 그에 맞대응한 체루가스 살포와 지랄탄 공격이 이어지곤 했다. 따가운 눈물을 흘리면서도 우린 가슴 속에서 들끓는 불의에 대한 저항을 멈출 수 없었다. 눈에 비닐 랩을 두른 채 화염병을 던졌다. 시위가 점점 과격해지면 전경들은 곤봉과 방패를 휘두르며 매우 조직적으로 전진해왔다. 검은 철모와 무장한 옷과 방패까지 갖춘 전경대원들을 태운 차량이 학내 진사로 광장까지 밀고 들어올 때도 있었다. 그럼 쫓기고 쫓기다 뿔뿔이 흩어졌다가 우린 다시 시계탑에 모여들었다. 그곳은 자연대, 사회대에서 공대, 상대, 인문대, 사범대로 갈라지는 길목이었고 그곳에서 마지막 노래와 구호를 힘차게 외치고는 해산을 했다.

 

갈등과 번민의 시간을 보내다


그 당시 나는 김남주 시인의 시를 접하기 시작했다. 그의 시는 지배계급의 억압과 착취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독재의 현실과 참상을 노골적으로 폭로하고, 비인간적인 삶을 강요당하는 수많은 근로대중들의 삶과 노동 투쟁을 가슴 아프게 새겨내었다. 그에게 시인은 민중들이 불의와 폭력에 맞서 싸워나가도록 둥둥 북소리를 울리는 자이며, 전투의 나팔 소리를 울리는 자이며, 살인과 고문을 자행하는 압제자의 가슴에 창을 꽂는 자였다. 그에게 시는 이 땅의 독재 권력과 맞서 싸운 무기였고, 무사안일에 빠진 소시민들의 의식을 일깨운 날카로운 채찍이었다. 1980년 광주항쟁 관련 동영상과 자료들 그리고 광주 출신 친구들의 증언을 접하면서 나는 점점 더 깊은 회의와 시대에 대한 상실감에 빠져들었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진실과 역사는 대부분 날조된 것이라는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더 이상 학교에 붙어 있기 힘들었다. 갈등과 번민 속에서 나는 배낭을 싸매고 무작정 서울을 떴다. 서울역에서 마지막 야간열차에 몸을 싣고 남쪽 바다로 떠났다. 한 달 가까운 시간을 전국을 떠돌다 돌아와 보니 기말고사가 시작되었다. 필수과목이었던 군사훈련 과목인 교련을 비롯해 물리실험, 화학실험 등 여러 과목에서 낙제점이 나왔고 나는 도망치듯 군에 자원입대했다.
 
▲ 수학과 동기생들과 기념 촬영을 했다 (출처: 함기석 동문)
 

어리고 순수했던 그 시절


돌이켜보면 대학 생활은 참으로 짧다. 친구들과 후회 없이 질퍽하게 놀았고 암담한 시대 속에서 가슴 뜨겁게 보냈던 시절이었다. 규락, 은화, 학주, 재진, 원우, 전우, 흥기, 종태 등등 동기생들을 떠올려 본다. 그들 또한 치기와 열망에 사로잡혔던 그때 그 시절이 몹시 그리울 거다. 그때 우린 어렸고 세상도 어렸다. 그때 우리의 심장은 뜨거웠고 머리는 경직되지 않았다. 태양도 달도 별도 모두 우리 편이었고 우린 깔깔거리며 세상을 맘대로 주물러 반죽했다. 정말이지 그때 우린 어리고 어렸다. 그래서 순수했고 겁이 없었고 실패가 두렵지 않았다. 돌아보면 대학은 아련하고 아픈 고향집 같은 곳이다. 떠나온 지 30여 년이 지나서야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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