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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3 기획 >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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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사근동 시절'을 추억하다

최성진(한겨레신문 기자·국어국문학과 96) 동문의 에세이

사자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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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yang.ac.kr/surl/a4ZM

내용
▲ 대학을 조업할 때까지 살던 낡은 사글셋방 자리에는
4층짜리 신축 건물이 들어섰다.

월세 12만 원짜리 사글셋방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12만 원짜리 사글셋방으로 기억한다. 별도의 화장실도 없는, 오래된 단층 단독주택 별채에 딸린 허름한 방 한 칸에 불과했다. ‘주방’보다는 ‘부엌’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공간에 쭈그리고 앉아 고무호스를 잡고 한 손으로 머리를 감았다. 온수는 나오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 기억은 불분명하다. 한양대 국문학과 재학 시절, 나는 주로 혼자였다. 학교 후문으로부터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사근동 셋방에서 졸업할 때까지 혼자 살았다. 밥은 학생회관이나 학교 근처 식당에서 혼자 먹는 둥 마는 둥 때웠고, 공부나 과제도 혼자 대충 해결했다. 가끔은 늦은 밤부터 이른 새벽까지 후문 근처에 있는 PC방에서, 역시 혼자 놀았다. 잠이 오든 말든, 12만 원짜리 셋방에서 가만히 혼자 누워 지낸 시
간도 많았다.
대학 졸업 직후에도 꽤 오랫동안 독거인으로 지냈으니, 대학 시절의 경험이 아주 낯선 것만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때를 떠올리면 유독 고립감 비슷한 감정이 느껴진다. 좁디좁은 셋방에 몸을 누인 나는 그때 주로 어떤 몽상으로 시간을 보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시기가 내게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다.

 
▲ 한양대 후문에서 이어지는 서울 성동구 사근동 골목



IMF 외환위기 직후, 불안의 시대


대학 졸업이 다가올수록 낯선 불안감을 종종 느꼈다. 어디론가 가야 하는데 갈 곳은 없는 처지, 취업난에 내몰린 것이다.
취업난은 해마다 거듭된다. 대졸 예정자의 취업률 곡선이 어떻게 휘고 꺾이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해보지 않았으니, ‘그때가 더 힘들었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청년 실업이라는 단어를 유행가 가사처럼 듣고 있는 지금과 비교하면, 약 20년 전 내가 경험한 취업난은 그나마 나은 편에 속할 수도 있다.
청년 실업 장기화를 겪고 있는 지금의 청년 세대가 우울하다면, 약 20년 전 우리는 불안했다는 정도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굳이 비교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다만 약 20년 전 우리 앞에 놓인 취업난을 애써 기억할 만하다면, 그건 단연 ‘IMF 외환위기’ 탓이다.  IMF 외환위기 사태가 불거진 것이 1997년 12월이었고, 그 여파는 내가 대학 4학년이던 1999년까지 이어졌다. 사회 진출을 앞두고도 딱히 진로를 정하지 못한 건 나만이 아니었다. 대학원 진학으로 방향을 튼 몇몇을 빼면 거의 대다수가 ‘미취업자’ 신세였다. 문 닫는 기업이 속출했으니 일자리가 증발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여럿이 함께’의 소중함


불안의 시대에 위로가 된 것은 고통이라면 고통이었을 당시의 경험이 나만의 것은 아니라 우리 모두, 곧 집단의 몫이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IMF 외환위기 직후 학교를 떠나야 했던 우리는 모두 불안했으니 경쟁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서로가 서로를 연민의 대상으로 바라볼 뿐 내가 주저앉혀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원초적 연대 의식이었다. 가끔 이름을 들으면 알 만한 기업의 채용 시험에 최종 합격한 동기를 위해서는 진심으로 축하를 보냈다. 그런 일이 자주 벌어지지는 않았다.
불안감이 커질수록 학교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학교에 있는 시간은 내게 소중하게 다가왔다. 처지가 비슷한 동기를 만나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아도 좋았고, 인문대 앞 벤치에 가만히 앉아 느끼는 가을바람도 좋았다. ‘일삼팔(138) 계단’이라고 부르던 그 길을 오르던 시간, 잠시 그 길 위에 멈춰 내려다보던 행당동 풍경도 근사했다.
1999년 늦가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현길언 교수님은 졸업을 앞둔 ‘예비 백수’들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시간이 오래 지나 현 교수님의 말씀이 머릿속에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얼기설기 다시 엮어보면 이렇다.
“취업이 어려워서 다들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걸로 안다. 졸업을 앞두고 있으니 지금 당장 진로를 결정해야 한다는 조급함도 느낄 수 있다. 졸업 이후에도 1~2년 정도 직업을 갖지 못한 채 지낼 수도 있다. 인생 전체에서 그렇게 백수로 지낼 수 있는 시기도 많지 않으니, 너무 조급하게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각자의 미래를 그려보는 것도 좋다.”
‘현대소설론’이었던가, 마지막 수업 시간에 들려주신 현 교수님의 말씀은 나를 비롯한 여러 예비 백수에게 적잖은 힘이 됐다.
 
▲ 2000년 2월 25일 국어국문학과 졸업 사진
 

여유를 잃지 말라는 가르침


대학을 졸업한 뒤 실제로도 8개월 남짓 백수로 지냈다. 그 뒤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하기 시작했고, 올해로 기자 경력 18년째를 맞았다.
자신이 맡고 있는 분야에 관한 취재를 한 뒤 기사를 내보내면 끝. 기자의 일에 대해 많은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어쩌면 그게 우리 일에 관한 가장 간결하고 정확한 설명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게 일부의 사실에 불과하다는 데에 있다.
소규모 신문사에 있을 때에는 좀 더 나은 곳으로 가려고 안간힘을 써야 했다. 정작 내가 원하는 신문사에 입사한 뒤에는 선후배 동료보다, 같은 분야를 담당하는 타사 동료보다 빼어난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강인한 ‘멘탈’과 체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건 바람직하지 않다. 마음을 다잡는다. 다른 사람과의 경쟁이 아닌 내가 기자가 되고자 했던 이유에 집중해야 한다. 다른 누구를 바라볼 시간에 자신과의 대화에 좀 더 투자해야 한다.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은데, 어쨌든 노력해야 한다. 
이따금 사근동(혹은 한양대) 시절을 떠올린다. 내가 졸업한 뒤 많은 것이 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현길언 교수님은 정년을 마친 뒤 퇴임했다. 한양대역과 학생회관을 직통으로 연결하는 지하철역 출구가 생겼다는 소식에 감탄했고, 일삼팔(138) 계단이 ‘일오팔(158) 계단’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에 한참 웃었다.
내가 졸업할 때까지 머문 12만 원짜리 사근동 셋방은 헐렸다. 그 자리에는 4층짜리 원룸 건물이 들어섰다. 그 어둡고 눅눅한 셋방은 이제 내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 도대체 그때, 내 머릿속에는 무슨 ‘쓸데없는’ 잡생각이 그리 많았던 건지 여전히 궁금하다. 문득 그때의 고요함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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