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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2 22

[오피니언]우리는 인간의 춤을 추고 있는가 [김운미]

김운미 교수 (체대 무용과) 오랜 옛날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춤은 생활 그 자체였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도 나오듯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에는 몇 날 며칠을 노래와 춤으로 지샜다. 노동과 놀이가 일체화되어 일하면서 노래하고 노래에 맞춰 춤추는 가운데 너무나 자연스럽게 삶의 기쁨을 누렸다. 이같이 우리 전래의 춤은 흥겨운 신과 멋(신명)을 숙련된 몸짓으로 표출함으로써 춤을 추는 자나 춤을 구경하는 자 모두 신명이 넘치는 굿판을 연출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은 어떠한가? 우리도 과연 춤을 놀이처럼 즐기고 있는가? 대학에서 춤을 가르치는 나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돌이켜보면 1960년대부터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입시 위주의 교육제도 하에서 춤은 대학의 무용학과에 들어가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 무용학과에 들어온 학생들은 춤의 테크닉 면에서는 숙달되었는지 모르나 자신의 생각을 몸으로 꾸며낸 것을 즐기고 노는 것이 춤의 진정한 속성이라는 것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사실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춤이란 어린 시절 부모 앞에서 재롱으로 보여줬던 그 때의 즐거움이 마지막 추억처럼 남겨져 있을 뿐, 따라하기 힘든 몸의 움직임 정도로만 생각해 왔던 것이 아닌가? 더구나 음악이나 미술은 일찍부터 독립된 학과목으로 인정되고 있었지만, 무용은 체육의 한 단원으로 명맥을 이어왔기에 춤이 신명나도록 즐거운 것이라는 것을 체계적으로 알 수 있는 기회는 더더욱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 말했듯이 과도한 욕망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은 춤추는 것과 꿈꾸는 것을 다시 배우지 않으면 삶의 행복을 느낄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춤이란 인간의 욕망을 풀어내는 춤뿐만 아니라 인간의 특권인 창조의 기쁨을 즐길 수 있는 춤, 살아있는 춤을 가리킨다. 이러한 춤을 추기 위해서는 우선 호흡을 다스리는 훈련을 해야 한다. 명상음악가인 김도향의 "항문을 조이고 우주를 마시자"는 노래가사를 따라하는 것도 좋은 훈련방법이다. 그는 하루에 500번씩 항문을 조이면 영혼의 숙변을 없앨 수 있어 몸과 마음이 다 건강해진다고 노래한다. 인간문화재 박병천 선생님도 춤을 출 때 숨의 저장을 위해서는 재래식 화장실에서 쪼그려 앉는 자세를 권했고, 연출가인 이윤택 역시 항문호흡이 연기호흡의 첫 단계라고 말한 바 있다. 항문호흡은 무용에서도 중요하다. 특히 춤추는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는 문명의 발달과 함께 잊혀졌던 원초적인 호흡(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원래의 에너지, 속도, 유연성과 민첩성을 유지하기 위한 호흡)이 습관화되어야 한다. 자기만의 춤 언어를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힘이 드는 법이다. 호흡이 익혀지면 이제 함께 생각하는 춤을 추어야 한다. 아니 함께 꿈을 꾸며 춤을 출 수 있는 마당을 무용가들이 마련해내야 한다. 사실 그 동안 관객과 함께 하는 춤을 지향해오긴 하였지만 실제로는 보여지는 춤에 그친 점이 없지 않다. 무용수들의 몸짓과 그들이 내뿜는 숨소리가 웅대한 무대장치와 화려한 조명에 가려지는 바람에 관객들은 그야말로 무용작품의 구경꾼 이상이 될 수 없었다. 그나마 구경꾼조차도 막대한 제작비에 비해 너무나 적은 것이 현실이다. 무용공연을 통해 반드시 무언가 교훈적인 메시지를 전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잘 훈련된 무용수들의 열정적인 몸짓을 보고 관객들이 함께 흥겨워하거나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도대체 정치·사회적으로 짜증나는 일이 많은 현대인들에게 신명을 불어넣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있겠는가? 그러한 춤이야말로 진정으로 인간의 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무용교육현실도 개선되어야 한다. 어린 시절의 재능을 발견하여 키워주는 선생님, 일상생활에서도 새로움을 발견함으로써 삶을 즐길 줄 알도록 격려해주는 선생님을 많이 배출하는 풍토가 되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나는 춤의 생명을 부활시킬 수 있는 방법을 실천하는 일에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생각이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사랑의 실천을 위해 행당 언덕을 오르내리는 한양인들과 진정한 인간의 춤을 추고 싶다.

2002-02 15

[오피니언]반쪽 섬나라 기질 고쳐야 산다[조진수]

조진수 교수(공대 기계공학부) 우리나라 사람은 누구든 중국을 대륙, 일본과 대만은 섬나라 그리고 한국은 반도라고 말한다. 또한 예로부터 중국인들은 대륙적 기질로 '만만디'하며 여유 있고 대범한 듯 좋게 표현해 왔고 일본인들에 대해서는 '섬나라 쪽발이' 기질로, 급하고 무례하고 이기적이며 색을 밝힌다는 등 비하적 표현을 해왔다. 그러면서도 우리민족에 대해서는 '동방예의지국의 참을성 많은 민족'이라는 자화자찬격인 찬사 외 '반도기질'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그런데 반세기 전 한반도는 남, 북으로 분리되었으며 가만히 보면 현재 북쪽이 막혀 있는 남한은 사방으로 진출할 수 있는 일본이나 대만보다도 지리적 여건이 불리한 '반쪽 섬나라'임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남한에는 약 10만 km2에 4천여만 명이, 대만에는 4만 km2도 안 되는 면적에 2천만 명 이상이, 일본에는 약 38만 km2에 1억 2천만 명이 살고 있다. 면적이나 인구로 봐도 남한의 절반도 안 되는 대만은 세계 경제무대에서 우리보다 월등한 위치에 있다. 그나마 IMF 전까지 많은 나라들이 남한을 경이롭게 여겼던 것은 6.25동란 후 최악 여건의 반쪽 섬나라가 보여준 고속 경제 성장이었다. 4개의 주(主)섬을 교량과 터널로 연결한 일본은 남한에 비하면 면적은 약 네 배요, 인구는 세 배이며 기술력은 세계 제2위인 대국이다. 게다가 세계 최고 수준의 질서의식을 갖고있는 그들에게서 요즘 '섬나라 기질'은 찾아보기 어렵다. 얼마 전 고유가 태풍에 우리 정부가 에너지 값 인상이니 10부제니 하며 법석을 떨고 있을 때 30년간 대비해온 일본은 전기요금을 내리는 여유를 보일 정도였다. 도리어 소위 '섬나라 기질'은 우리의 체질이 돼 가고 있다. '반쪽 섬나라' 반세기 결과인지는 몰라도 질서와 예의는 물론 난무하는 거짓말속에 사회 신뢰도도 해가 갈수록 땅에 떨어지고 있다. 각종 파렴치 범죄가 증가일로에 있고 국가 사범들은 해외로 도망가면 속수무책이다. 특히 '빨리빨리' 고질병은 우리에게 사회적, 경제적으로 많은 폐해를 안겨주고 있다. 조급성과 무계획성에 의한 피해 사례는 우리 기억에 남아 있는 각종 대형 사고 외에도 많다. 400여 km 남짓한 서울-부산간이 멀다며 수많은 돈을 들여 프랑스에서 직수입한 TGV는 아직도 시험운행중이다. 고유 원천 기술 없이 급히 시작한 이동전화 시스템은 미국 퀠컴사에 매년 수억 달러의 로열티를 지불해야 한다. 언론들은 경제개혁 기치아래 너무 서둔 나머지 국내기업을 해외에 헐값 매각한 사례를 지적하기도 한다. 삼척동자에게 물어봐도 우리의 소원은 통일되고 잘 사는 것이다. 통일은 반쪽섬나라 남한을 나머지 반쪽과 연결해서 다시 반도로 만드는 엄청난 일이다. 빨리빨리 기질로 조급하게 서둘러서는 절대로 안된다. 통일한국 건설비용을 줄이고 통일후 대외 경쟁력을 높여야 잘 살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에게 필요한 시스템은 고유 기술로 차근차근 완성할 수 있는 슬기를 지금부터라도 터득해야 한다. 우리가 무시하고 싫어하는 이웃에게서도 배울 것은 배워야 된다. 일본은 1988년 세계 최장 54km의 '세이칸' 해저 터널을 순수 기술로 42년 만에 완공해서 본(本)섬격인 혼슈와 북쪽 섬인 홋카이도를 연결했다. 또한 초고속 교통축인 '신칸센'은 1964년 도쿄-오사카선 개통후 현재는 남쪽 규슈의 하카다와 혼슈의 모리오카 사이 총연장 약 2,200km를 운행하고 있다. 1956년 기본 계획 수립후 44년이 지난 지금도 모리오카 북부에서는 신간선 개설 공사가 한창이다.

2002-02 08

[오피니언]신나게 놀아라, 놀자! [이진수]

이진수 교수(체대 체육과) 노는 것은 즐겁다. 그래서 나는 아들놈에게 항상 말한다. 많이 놀아라. 나는 학생들에게도 늘 강조한다. 신(神)나게 놀아라! 몰두(沒頭)하라! 몰두란 형이상(形而上)적인 관념이 아니다. 머리를 물 속에 담근 모습이다. 머리를 물 속에 담그면 숨을 쉴 수가 없다. 물 속에 머리를 담근 시간이 길면 길수록 숨이 가쁘다. 더 참으면 죽을 것 같다. 더 참다가 더 참으면 아주 죽을 수도 있다. 죽음에서 벗어나는 길은 숨을 쉬는 것이다. 숨을 쉬고 싶어 죽겠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절박한 것 한 가지, 이것을 몸으로 아는 것, 이것이 바로 몰두이다. 학생들이여 몰두하라! 아니 내가 아무리 몰두하라고 강조해도 깨닫지 못하겠거든 바로 오늘이라도 물 속에 머리를 박고 실제로 몰두를 체험하라!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하고 고민하는 학생이라면 지금 당장 머리를 물 속에 박는 몰두를 행하라! 그러나 신나게 놀아보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몰두를 행해도 그 일체감을 느끼기가 어렵다. 한국 민중문화의 특성을 '신들림'으로 파악한 사람은 우리 한양대에서 나와 한솥밥을 먹는 조흥윤 교수이다. 내가〈한국체육사상사〉를 쓰는 데에 조 교수의〈巫와 민족문화〉는 큰 참고가 되었다. 옛날에 촌사람들이 석전(石戰)을 하는 과정에서 돌에 맞아 골이 깨어져 나오면서도 '괜찮다, 괜찮아' 라고 했다던 이유를 여기에서 확신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머리가 깨어져 골이 밖으로 흘러나온 사람은 십중팔구 죽을 것인데도 죽는 것보다 더 신나는 일이 돌 던지며 노는 일이었던 것이다. 신이 오른 무당은 시퍼렇게 날이 선 작두 위에서 춤을 추어도 발가락이 잘리지 않는다. 신나게 놀아보지 못한 사람은 신(神)이 될 수 없다.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신은 God가 아니다. 이 신은 정신(精神)의 신이다. 정신은 창조적인 능력, 생산해 내는 에너지를 말한다. 정신은 허 준의〈동의보감>에 보이는 '정기신론'(精氣神論)의 정신이다. 정은 남성의 정액을 가르킨다. 남성에게 정액이 가득해야 원기(元氣)가 왕성해지고 창조력이 배가된다는 이론에서 나온 말이다. 정액이 가득한 남자는 눈이 반짝이고 행동이 민첩하며 여자를 보면 친절하게 접근한다. 피로하지 않으며 모든 일에 적극적이며 운동을 해 땀을 흘린다. 정액을 낭비하는 사람은 쉽게 피로하고 모든 일에 의욕이 없게 된다. 이런 사람에게 나는 '정신 차려'라고 외친다. 신(神)은 신(腎)과 음이 같다. 腎은 콩팥을 이름이나 사실은 사람의 성기(性器)를 의미하기도 한다. 외신(外腎)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의 절정체험(peak experience) 가운데에 성교행위가 포함되는 것은 인간의 섹스를 놀이의 한 가지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기사 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진정한 사랑에서 행해지는 섹스야말로 인간이 인간을 창조하는 거룩한 일을 성사시킨다. 정액을 아끼는 것을 허 준은 '보정'(寶精)이라 하였다. 앞에서 나는 원기에 관해 언급하였는데 이것은 사람 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산에도 물에도 있고 국가에도 이것은 있다. 지나친 자연훼손은 자연의 원기를 없애는 것이 된다. 국가의 원기를 사기(士氣)라고 한다. 국가의 정치를 담당하는 위정자, 고급관리가 썩으면 낭비가 많아져 그 국가의 위력은 사라지고 만다. 신선하여 썩지 않은 정치인을 뽑는 것은 우리들의 큰 일이다. 이것은 놀이가 아니다. 그러나 놀아보지 못한 사람은 안목이 없어 사이비 정치인에게 손쉽게 넘어간다. 사람으로 하여금 놀게 하고, 그 노는 모습을 보아 그 사람의 선악을 판단하여 인재를 등용한 것이 신라의 화랑제도였다. 신나게 놀아 본 사람은 사람을 안다. 놀이에 몰두해 본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알기 때문에 사람을 판단함에 착오가 적다. 사람의 수명을 80세로 본다면 대략 70만 시간이 조금 넘는다. 이중에서 35만 시간은 잠자는 시간이다. 그렇다면 일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30년 일한다고 계산하면 고작 7만 시간 정도이다. 일생의 십분의 일이란 짧은 시간을 위해 우리들은 밤잠을 설치면서 열심히 노력하는 꼴인 셈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28만 시간은 무슨 시간일까? 노는 시간이다. 낮잠을 자건, 농구를 하건, 카지노에서 도박을 하든 외국으로 유학을 가든 이 모든 것이 모두 노는 시간이다. 나는 7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22살에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2년, 다시 외국의 대학원에서 5년 이렇게 도합 21년을 공부하였는데 이 시간도 물론 28만 시간 안에 들어간다. 공부와 노는 것과는 틀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기 쉽다. 그러나 남들이 본 나의 공부는 나에게는 놀이였다. 나는 지금도 나의 연구실에서 정통도장(正統道藏)을 가지고 논다. 내가 가지고 노는 이것은 화투패도 컴퓨터게임도 아니다. 정통도장은 중국에서 간행된 도교 경전의 집대성이다. 나는 이 책들 속에 머리를 푹 쳐 박고 몰두하고 있다. 남들은 내가 연구실에서 열심히 작업하고 있다고 말하곤 훌륭한 교수라고 칭찬한다. 그러나 진실은 내가 연구실에서 놀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지금도 놀고 있다. 내가 이렇게 놀고 있으니 다른 이에게도 놀라고 권할 수가 있는 것이다. '놀고먹는 사람이 상팔자'란 말이 맞는다면 나야말로 팔자가 트인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놀아라! 네가 좋아하는 세계를 창조하고 그 속에서 놀아라!

2002-01 29

[오피니언]보혁 논쟁과 대학생의 토론문화 [홍용표]

보혁 논쟁과 대학생의 토론문화 홍용표 교수(사회대 정외과) 지난 한해 우리 사회는 여러 정치.사회적 이슈를 둘러싼 보혁논쟁의 열병을 앓았다. 특히 통일과 북한문제에 관한 논의가 그러했다. 대북지원의 유용성, 주적 개념의 폐지, 한국전쟁에 대한 김정일의 사과, 북한 방문단의 돌출행동, 국가보안법 개폐 문제 등을 둘러싸고 보수와 진보 세력 사이의 대립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대해 '국론분열'이니 '위기의 한국사회'니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따라서 주어진 주제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에 대해 '갈등', '분열'과 같은 부정적 측면만 강조한다면 자칫 획일성을 강요하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저마다 자신의 생각을 진솔하게 밝히고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며 서로의 다름은 토론을 통해 조율하는 것이 다원화된 민주사회의 올바른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 사회의 보수-진보세력간 논쟁은 이러한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논의의 과정에서 자신과 다른 견해는 무조건 배척하고 심지어 적대적으로 대하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났다. 상대방을 '수구세력', '반동', '빨갱이', '매국노' 등 감정적 언어로 매도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으며,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조차 자기와 입장이 같은 측은 선(善)이요, 다른 측은 악(惡)이라는 독선적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국론분열에 대한 걱정도 바로 이와 같은 태도 때문에 생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건전한 토론문화는 요원한 것인가? 다행히 요즘 대학생들의 토론을 지켜보면 앞으로 우리 사회에도 보다 성숙한 토론문화가 정착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된다. 필자는 지난해 몇몇 수업에서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주요 쟁점들(특히 북한.통일 문제에 관한)에 대해 학생들에게 토론을 시켜보았다. 이를 통해 느낀 것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주어진 문제에 대해 각자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그런 자신의 의견을 자신 있게 밝히는 한편, 상대방 의견을 존중할 줄 아는 태도를 지녔다는 점이다. 사실 처음 토론을 시작하면서 필자는 "혹시 대부분 의견이 비슷하여(주로 진보 성향으로) 토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떡하나"하고 걱정하였다. 이는 필자가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반독재.민주화 투쟁'의 열기가 캠퍼스를 휩쓸고 있었으며, 그 외에 다른 목소리는 용납되기 어려운 분위기가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 한 수업의 발표시간에 어떤 학우가 "현정부(제5공화국)가 비록 독재정권이지만 그래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도 있다."라고 '용감하게' 주장하였다가 학생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런 경험 때문에 획일적인 토론을 우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이미 민주화를 통해 다원화된 사회에서 성장한 2000년대 대학생들의 사고는 획일성에서 벗어나 있었다. 주어진 주제에 대해 진보.중도.보수 의견이 분명히 나왔으며, 자신이 '골보수'라고 서슴지 않고 말하는 학생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견해를 상당히 설득력 있게 피력하였다. 물론 관심 부족, 정보 부족 등으로 논쟁의 핵심을 비켜 가거나 주제와 동떨어진 논지를 펼치는 학생들도 있었으나, 강의와 토론을 통해 사실관계를 파악한 후에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밝혔다. 무엇보다도 대학생들은 일부 기성세대와는 달리 토론에서 자신의 의견을 반박하는 상대방의 주장도 경청하며, 그 중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는 성숙된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간혹 논쟁이 치열해지다 보니 흥분하기도 하고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하였으나, 최소한 그들의 토론에서는 기성세대가 보여준 것과 같은 언어의 폭력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진지한 토론을 통해 합리적인 대안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다원화된 교육환경에서 자라났고 또 자신의 개성을 중요시하는 요즘 신세대의 특성을 감안한다면 필자가 수업에서 접한 학생들 이외의 다른 학생들도 상당히 성숙한 토론 태도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아직 미숙하고 아쉬운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 현재는 올바른 태도를 지니고 있는 학생들도 사회에 진출하면서 기성세대의 그릇된 토론문화에 물들 수도 있다. 그러나 학생들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며 그들이 계속 건전한 토론문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앞으로 우리 사회의 토론문화는 분명히 개선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 교육자들이 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2002-01 22

[오피니언]디지털시대 가족 문화와 온고지신 [탁영란]

디지털시대 가족 문화와 온고지신 탁영란 교수(의대 간호과) 2002년 벽두에 연일 회자되는 여러 가지 핵심어 중에 새삼 새로운 이슈는 아니지만 우리의 가족 문화의 현주소를 확인하게 하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이슈의 관련설이다. 서울 강남 특정 지역의 부동산 시세 폭등과 유명 대입 준비 학원의 밀집의 관련이다. 이는 지치지 않고 우리 가족들이 갖는 두가지의 독특한 표상인 극단적 자녀 교육 중심과 입시 위주의 일탈된 가족 문화의 한 단면이 줄줄이 사탕처럼 사회 문화의 여러 영역에서 엮여 끝도 없는 위험한 외줄 타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러기 아빠, 조기 유학, 교육을 위해 이어지는 이민 행렬, 지구상에서 가장 바쁜 초등학생들이 우리 가족을 대변한다. 과연 우리는 자녀 교육을 위해 가족의 실존적 정체성은 외면한 채 모든 가족이 생존을 건 싸움을 하고 있다. 21세기가 시작된다고 희망찬 팡파레를 광화문 네거리에서 화려하게 울린 것이 어언 2년, IT강국으로의 자부심으로 지내온지 여러 해가 지났건만, 우리 가족 문화는 과연 디지털 시대에 '잘 살고 잘 교육하고 있는가'는 자문해 볼일이다. 가족의 절대 가치는 자녀 교육에 있다. 여기서의 교육은 진정한 교육을 말한다. 한국인에게 있어 가정은 '나'로부터 '천하'에 이르는 모든 것의 뿌리가 된다고 우리의 옛 선조들은 가르쳐왔다. 즉 가정은 삶의 각 부분을 꿰뚫어 묶는 통합체로서 '나'와 '우리'를 연결시키고 '한국인'과 '한국사회'를 연결시킨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우리 선조들의 자녀 교육은 공자가 제시한 인간상인 군자를 지향하고 있다. 공자는 〈논어〉에서 공손, 관용, 신의는 타인을 대하는 자세, 민첩함과 은혜는 개인적 특성으로 구성된 인(仁)을 강조하였다. 또한 이이(李珥)는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입지(立志)와 성(誠)을 주요 교육 목적이자 교육내용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입지는 자율적 인간으로 자신의 의지로 학문과 세상에 뜻을 세우는 것을, 성은 하늘의 실리이며 마음의 본체라고 하여 학문이든 일이든 성실함으로 임하는 마음의 자세를 언급했다. 인간은 누구나 발달 가능성을 가지고 노력하여 자신을 형성해 가는 존재이므로 타인이나 외부에 의존하기 보다는 자신의 뜻에 따라 달리 형성될 수 있는 자율적 존재임을 강조한다. 인터넷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더더욱 지식 정보와 더불어 인간 관계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인간의 발달은 지식과 감성의 발달의 형식적 의미보다는 근본적인 정신 즉 마음의 교육이 강조되고 있음이다. 이로써 창조력과 창의성, 다양성의 자양분이 가족 문화와 가치에 의해 배양되어 디지털 시대의 인간상을 구현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에서 자녀 교육은 사랑이라는 가족적 정체성으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부부간의, 부모 자녀간의, 자녀들간의 사랑의 공동체가 가족인 것은 디지털 시대에도 명백한 명제가 아닐 수 없다. 가족 문화는 살며(living), 사랑하며(loving), 학습(learning)되는 것이고, 다양함과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으로 훈련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임을 우리는 망각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디지털 시대의 가족이 이러한 창조적이고, 자율적인, 그러면서도 다양성을 추구하는 진정한 교육에 얼마 만큼의 관심과 주안점을 두고있는가를 온고지신(溫故知新)의 견지에서 새삼 되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2002-01 15

[오피니언]디지털 시대 문맹 퇴치를 위해서 [김상수]

디지털 시대 문맹 퇴치를 위해서 김상수 교수(디지털경제경영대 디지털경영학과) 우리가 살고 있고, 우리의 학생들이 살아가야 할 시대의 특성을 하나의 단어로 정의하라면 'digital'이라는 단어가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디지털 시대에 무슨 문맹(illiteracy)인가 하겠지만, 디지털 시대에도 퇴치해야 할 문맹이 있고, 이 같은 문맹을 퇴치해야만 디지털 시대에서 경쟁력을 갖는 구성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 문맹은 정보기술 문맹(IT illiteracy)이다. 디지털 시대에서 기본적으로 퇴치해야 할 문맹 중 하나는 기본적 정보 기술의 활용 능력 부족이다. 10여년 전에는 워드 프로세서만 다룰 줄 알아도 취업이 되었던 시절이 있었고, 불과 몇 년 전에는 인터넷 검색사가 유망한 직업이라고 이에 관련한 자격 시험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 시대에 이러한 능력을 가졌다고 누가 취업을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시대에는 인터넷, 워드, 엑셀, 파워포인트, 데이터 베이스, 멀티미디어 등의 기본적인 IT 기술의 활용 능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 직장에서 '저 학교에서 이런 것 안 배웠는데요!'라고 답할 때 여러분의 동료나 상사가 쳐다보는 눈길은 어떠할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 오싹한 기분이 들 것이다. 두 번째 문맹은 정보 문맹(information illiteracy)이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또 다른 문맹은 정보 분석 능력의 부족이다. '빠르고, 복잡하고, 통합되는 시대'가 특징인 디지털 시대에서는 다양한 유형의 의사결정을 신속하게 정확하게 수행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의사결정에 필요한 자료를 신속하게 수집해서 정확하게 분석하고,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정보 분석 능력이 필수적이다. 정보 분석 능력은 각 전공 분야에서 배운 탄탄한 전공 지식을 현장의 문제에 끊임없이 적용하는 훈련을 해야만 향상될 수 있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지식은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기업의 신제품 수요 예측을 정확하게 하는 관리자와 틀리게 하는 관리자, 주가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애널리스트와 엉터리로 하는 애널리스트, 환자의 병을 정확하게 진단하는 의사와 오진하는 의사, 기업의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해서 해결하는 컨설턴트와 혼란만 가중시킨 컨설턴트, 제품의 설계를 정확하게 하는 설계자와 그렇지 못한 설계자...어느 집단에 우리가 속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세 번째 문맹은 지식 문맹(knowledge illiteracy)이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경영학 역시 매우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특히 필자의 전공 분야인 경영 정보시스템 분야에서는 1년 전 강의 노트의 절반 이상을 바꾸어야 할 정도로 지식의 변화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 같은 시대에서는 새로운 지식의 검색, 활용, 창조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생존하기가 힘들 것이다. 따라서 각 자가 속해있는 분야의 변화를 체계적으로, 동태적으로, 입체적으로 분석해서 필요한 지식을 찾아내고, 활용하고, 창조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한정된 시간과 능력 속에서 필요한 지식을 찾아내고 준비하는 전략적 마인드가 필요하다. 중국 영화 〈동방불패〉에서 땅 위만 걸을 수 있는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과 물 속과 하늘을 날아 다닐 수 있는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의 경쟁력 차이는 주인공과 엑스트라의 차이로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문맹은 문화 문맹(culture illiteracy)이다. 문명과 역사라는 기반에 사회와 문화 시스템이 있고, 그 위에 정치, 교육, 법률, 경제 시스템이 있고, 그 위에 경제 주체인 기업과 우리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기반인 사회와 문화 코드를 읽어 내지 못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일거에 가치가 없어질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고, 살아가야 할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고 분석하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기업들도 세대별, 성별, 직업별, 지역별, 국가별 문화와 그 차이를 읽어 내지 못하면 경쟁력 있는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 수 없다. GOD, HOT, 스타크래프트, 핸드폰의 문화를 이해하지 않고는 최근의 청소년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HOT가 TV에 나온다고 저녁 식사시간에 10번 이상 걸려 오는 우리 딸과 그 친구들의 핸드폰 문화와 우리 부부의 문화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지만 말이다.

2002-01 08

[오피니언]건축교육, 무엇이 문제인가?[박용환]

박용환 교수(공대 건축공학부) 우리는 현재, 건축교육이 당면하고 있는 과제가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의 해결책이 얼마나 중요하고 시급한 것인가를 모두 공감하고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주저하거나, 침묵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먼저, 건축교육의 개혁은 왜 필요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이미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로 세계의 시장이 통합됨에 따라 국제 질서가 하나의 틀 속에서 그 기준에 맞추어 움직이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전문직은 그 자격요건이 국제적 검증에 관한 절차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건축사(Architect)와 같은 전문 서비스 분야에 관련된 자격의 국가간 상호인정 문제는 전문적 건축교육이 전제조건이 된다. 따라서 자격의 국가간 상호 인정을 위하여 요구되는 최소한의 국제기준에 의하여 건축교육의 방향, 교육형식 및 연한, 교육내용과 시설기준을 맞추는 것은 건축산업과 교육계가 대외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적 단계라고 생각된다. 미국의 경우 미국건축인증위원회(NAAB)에서, 영국의 경우 영국왕립건축가협회(RIBA)에서 교육의 내용과 기준의 검증을 위한 인증제도가 정착되어 있을 뿐 아니라, 국제적 인증서비스까지도 표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같은 흐름은 아시아권에서도 마찬가지로서, 최근 미국건축가협회(AIA)와 함께 국제건축가연맹(UIA)의 산하 기구에서 추진하는 국제기준 마련에 동참하고 있는 중국의 경우, 건축사 등록법을 마련하고 동시에 미국건축사등록원(NCARB), 미국건축가협회, 영국왕립건축가협회, 홍콩건축가협회(HKIA)등의 도움으로 국제적 수준의 건축교육 인증기준을 마련하는 등, 시장개방에 활발히 대처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도 과거의 오랜 건축교육의 체제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대응하려 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 50여년 동안 건축학과 건축공학의 통합교육에 따른 문제점들을 인식하고, 건축사와 기술사의 국제적 기준에 의거한 전문적인 실무교육과 대외 경쟁력 강화 등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왔으나, 구체적이고 현실적 대안의 부재로 가시적 성과를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급변하는 개방 경쟁 사회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할 현 시점에서 국가간의 쌍무협상에 대응할 수 있는 건축교육의 인증기준이 여태 마련되어 있지 않은 사실은 그것으로 인하여 가까운 장래에 예상되는 국가적 손실은 지극히 클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과 같은 배경으로 인한 국내 건축관련단체 및 건축인의 위기의식과 노력은 특히, 5년의 건축학 교육 과정을 확정한 일부 대학교는 2002학년도 신입생을 현재 모집 중에 있을 뿐만 아니라 종래 공과대학의 소속으로부터 분리하여 단과대학, 즉 건축대학으로서 새로이 출범한 대학들이 나타나고 있다. 전반적으로 보면 건축학의 경우, 현재 세 가지 대안이 중점적으로 검토되고 있는 것 같다. 5년제의 건축학 학사 과정, 4+2년제의 건축학 석사 과정, 3년 이상의 건축학 석사 과정 등이 그것인데, 여기에다 건축공학분야와의 관계, 건축전문대학원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서 교육의 형식과 내용은 크게 달라진다. 또한, 특정한 학문과의 연관을 고려할 경우에는 건축교육의 질적 차별화를 기대할 수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심히 우려되는 점은, 앞으로 일어나게 될 건축교육의 변화가 자칫 또 따른 획일화를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산업구조의 특성이 다르고, 문화와 관습이 서로 다른 지역적 특성을 교육의 기초와 목표로 삼지 않는 한, 건축교육은 국제 사회에서 독특한 가치를 형성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어떠한 교과과정이 인증의 대상이 될 경우, 그 부담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지금부터 연구해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새로이 달라져야 하는 건축교육의 내용과 기준을 보면, 세계무역기구는 건축 설계용역에 관한 다자간 협상기준을 국제건축가연맹(UIA)에 위임하였고, 여기에서 '건축실무에 관한 전문성 국제권고기준에 관한 협정'을 1999년 6월 제 21차 북경총회에서 채택한 바 있다. 동 협정에서는 건축사 자격의 국제인정을 위해 최소 5년 이상의 건축교육기간을 이수하고 최소 2년 간(향후 3년 목표)의 수련기간을 거칠 것을 권고하고 있다. 교육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졸업을 위한 최소 이수 학점 수는 160학점이며, 이것은 다섯 가지의 영역(교양, 문화, 설계, 기술, 실무, 선택)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교육목표, 교과과정 및 교과목 등의 설치는 대학교의 고유 권한에 속한다. 이처럼 건축교육에 있어서 개혁은 불가피하고 그 대응책이 지금 우리들에게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위한 문제점은 과연 무엇인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대학의 학사운영 측면에서 보면, 건축교육은 건축사 즉, 건축설계를 전문적으로 할 수 있는 법률적 자격을 지닌 사람이나 그 자격을 취득하기 위한 교육을 의미한다. 따라서 건축교육을 위한 교과과정 및 교과목 및 그 내용은 전문 교육이 가능하도록 구성되어야 한다. 이것은 국가에서 관리하는 자격증 취득을 위한 전제 조건이기 때문에 더욱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다. 5년이라는 기간(4년의 학부를 유지하면서 대학원에서 전문 학위를 수여하는 경우는 별개의 문제이지만)을 기존의 체계 내에서 운영하는 문제, 교양과목 및 선택과목을 다변화하는 문제, 특히 학부제(학부제는 전공필수를 최소화한다)라는 틀과 건축교육의 전문화가 서로 대립하는 문제 등은 교육개혁을 위해서는 당장에 해결되어야 하며, 또한 대학교와 같은 고등교육기관의 건축교육은 전문학위의 취득을 위한 것임을 적극 홍보함으로서 학생들의 혼란을 줄여나가야 될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으로, 제도적 변화에 관한 측면에서 보면, 건축사는 사회적 책임과 동시에 법률적 지위를 가진다. 따라서 건축교육의 개혁은 교육 그 차체의 질에 대한 평가에 머물지 않으며, 건축을 둘러싼 제반 제도의 개혁으로 이어져야 한다. 우선 각종 시험 및 고시의 형식과 내용에 관한 제도가 달라져야만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건축학 교육 인증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일이다. 그러나 현재 국제 기준에 맞는 인증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한국공학교육인증원(ABEEK)을 상대로 건축학 인증기준을 제출하게 되는 모순을 먼저 해결해야만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육내용의 변화에 관한 측면에서 보면, 건축의 핵심분야로서 건축실무 교육은 국가의 산업구조와 문화적 특성 및 그 사회에 있어서 해당분야의 전문성에 대한 성숙 정도를 반영하는 척도가 될 뿐만 아니라, 세계적 추세 또한 실무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따라서 건축교육의 개혁은 학제간 그리고 학계와 산업계와의 협동 연구를 적극 필요로 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양자는 긴밀한 협력의 체제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며, 그 결과로 학문적 발전 뿐만 아니라 산업계가 요구라는 우수한 건축인력을 배출하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세 가지 측면에서 본 문제를 요약해 보면, 교육인증원의 설립과 기준의 설정, 산학협력체제의 확립이 무엇보다 중요한 점으로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이상에서 언급한 사항들 이외에도 총체적으로는 건축인력의 수급실태와 전망을 비롯하여 신입생 모집방법, 재학생의 평가방법, 교수업적 평가 등 교육기관 내부의 국부적인 사항에 이르기까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너무나 많다. 끝으로, 교육 체제는 나라마다 자율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전문가를 국제적 질서에 따라 교류한다는 명분 하에 특정한 국가의 교육 체계를 그대로 모방하거나 이식할 수는 없다. 그것은 현실을 수용하면서 국제 사회의 요구를 발전적 방향으로 수용할 수 있는 교육적 제도를 확립해야만 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우려되는 것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아무리 문제의 해결이 힘들고 곤란하다 해도 각 대학은 그 나름대로의 건축교육의 개혁에 대한 진정한 스스로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결코 획일적인 것일 수는 없으며, 진정한 의미의 차별화, 특성화가 무엇인가를 찾아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