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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 01

[오피니언][타임머신] 내 학창 시절의 모든 것, <한양저널>

나는 1980년대 중후반에 대학에 다녔다. 학창 시절 대부분의 시간을 영자신문사 <The Hanyang Journal(이하 한양저널)>에서 보냈다. 그 당시 영자신문사는 출입할 때마다 긴장감을 주면서도 방황하는 청춘들을 끌어들이는 마력 같은 게 있었다. 일단 '먹고 자는 문제'가 해결됐다. 데드라인이 주는 엄청난 중압감 내 전공은 영문학이었지만 교실보다는 학생회관 3층 신문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월등히 많았다. 막차도 끝난 시간이면 학생회관 경비 아저씨의 눈을 피해 위험천만하게도 선홈통(빗물을 내리기 위해 지붕에서 땅바닥까지 수직으로 댄 홈통)을 타고 신문사에 들어가 밤새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들곤 했다. 이렇게 선후배들과 일탈 생활을 하다 보니 정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학과 수업을 얼마나 소홀히 했던지 시간에 몰려 방학 숙제 리포트를 베껴서 제출했다가 영문과 김일곤 교수님의 지적을 받고는 얼굴이 화끈거렸던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기사를 쓰면 고료가 나왔다. 학교 앞 중국집 ‘진미루’에서 외상 자장면을 배달시켜 먹고는 원고료가 나오면 뭉텅이로 갚았다. 묘하게도 기사를 마감하는 날, 그 전달 원고료가 지급됐다. 그러면 우리들 (주무, 학생편집국장, 외국인 지도교수, 기자 등 20여 명)은 파티를 했다. 한 달 고료는 하루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증발되기 일쑤였다. 학생들이 무슨 스트레스냐고 하겠지만 데드라인을 정해놓고 영어로 기사를 작성하는 일에는 엄청난 중압감이 있었다. 나는 영문과 학생이었지만 영어에 목말라했던 곳은 강의실보다는 오히려 신문사였다. 2학년 때 과락률이 높아 악명을 떨쳤던 ‘The Norton Anthology of English Literature(영문학사)’ 과목을 들었는데 2학기 때 ‘자율 펑크’를 냈다(지금 한양대 교무처장이 된 김성제 조교께서 백지 답안지를 내라고 조언했다). 영어 실력이 갖춰진 4학년 때 재수강을 했는데 교수님이 채점을 하면서 ‘이 학생이 누군가?’라고 물을 정도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영자신문사에서 먹고 잔 덕택을 본 것이다. 혹독했던 겨울 방학 집중 훈련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영자신문 기자들은 겨울 방학 때 집중적으로 훈련을 받았다. 해병대 훈련에서 육체적 고통이 통과의례 라면, 영자신문사 훈련에서는 정신적 고통이 통과의례였다. 교관들 (선배들)은 <주간조선>을 한 페이지씩 찢어준 뒤 이튿날 오전까지 번역, 제출하는 숙제를 냈다. 주어를 찾다가 밤을 꼬박 새고는 아침에 벌게진 토끼 눈을 서로 확인하고는 허리를 꺾었다. 눈이 쌓여 발이 푹푹 빠지는 진사로를 오르다가 도망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엉터리 번역을 제출해야 하는 것이 낯 뜨거웠고, 선배들의 ‘사랑의 매(당시에는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가 무서웠다. 하지만 이 과정을 견뎌내야 영자신문 기자로 인정받았다. 회초리를 드는 선배들을 욕하고, 가슴을 후벼 파는 면박에 반감을 키우면서도 묘한 고마움을 느꼈던 시절이었다. 그리곤 우리도 선배가 됐다. 후배들을 잡는 역사가 반복됐고, 견디 지 못한 후배들은 등을 보이기도 했다. 후배들의 반발에서 설명하기 힘든 배신감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치열했던 신문 제작 과정 1개월에 한 번 4페이지 또는 8페이지씩 만드는 신문(당시는 스탠더드 판형)인데, 제작 과정이 치열했다. 격론이 오가는 기획회의에서 기사와 필자가 선정됐다. 교내외 취재(대학로 공연을 고정으로 다룸)를 한 뒤 영어로 기사를 작성했다. 학생부장이 수정하고 학생편집국장이 다시 첨삭했다. 그리고 외국인 교수가 교정하고 한국 지도 교수가 오케이 사인을 내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기사가 완성됐다(당시는 반정부시위 절정기인 1980년대 중반으로 안기부에서 학생들의 동태를 살필 때였다). 최종 원고는 신촌에 있는 삼영인쇄소로 넘겨졌다. 신문을 받아들고는 새벽에 진사로에서 배포했다. 신문을 받아보는 학생 들의 얼굴을 볼 때 스스로 뿌듯하고 대견스러움이 가슴에 꽉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The Korea Herald>가 1985년 대학영자신문 콘테스트를 했는데 <The Hanyang Journal>이 대상을 받았다. 이듬해에도 최우수 편 집상과 우수 기사상을 받았다. 상패를 들고 총장께 보고하러 갔다가 격려금을 받은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선후배 간의 끈끈한 정 신문 제작 과정에 피땀을 쏟았기에 선후배와 동료들 간 끈끈한 정이 쌓여갔다. 사회에 진출해 잘나가는 선배들을 보고는 따라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연합뉴스 일본 지사장을 두 번이나 했던 김용수 선배는 후배들의 귀감이 됐다. 일본 정부 문서를 찾아내 위안부 기사를 국내에 처음 보도해 한국기자협회에서 시상하는 올해의 기자상 을 잇따라 받았다. 여러 후배들이 그를 본받아 기자가 되려고 밤잠 안 자고 노력했다. 가을바람이 불 때 언론사 입사 시험을 치러 다니면서 문턱이 얼마나 높은지 절감했다. 번번이 낙방했지만 가끔 학교에 들러 막걸리를 사주는 선배들의 격려에 마음을 다잡곤 했다. 지금은 영자신문사 출신들이 제법 많이 일간지와 방송사로 진출해 언론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연합뉴스는 물론이고 KBS, MBN, 세계일보, 한겨레, 동아일보, 스포츠서울, 코리아타임스, 코리아헤럴드, 문화일보 등에 기자 또는 PD를 배출했다. 내가 기자가 된 것도 <한양저널>과의 인연 때문이다. 한양대 이영무 총장과 김성제 교무처장도 영자신문사 출신이다. 전공이 각기 다른 별동대로 구성된 학생 조직 중에서 매우 다양한 곳에 인재를 배출한 게 영자신문이 아닌가 싶다. 원래 <The Hanyang Times>로 창간한 뒤 1980년 초 강제 폐간됐다가 복간되면서 <The Hanyang Journal>로 태어났다. 복간된 6월 중순 전후로 홈커밍데이 모임을 개최한다. 사회 진출 뒤 만나기가 여의치 않았던 선후배들이 학교에 모여서 술잔을 기울이는 기회다. 해산할 때 왕십리 골목길에서 발을 구르며 주먹을 흔들면서 구호를 외친다. “H, I can. Y, I can. T, I can. Hanyang Hanyang Times, Ya!” “Leaves, we do. Grass, we do. Leaves of grass, Hanyang Hanyang Journal, Ya~”(Leaves of Grass는 월트 휘트먼의 시 제목) (좌상)신문방송학과 오진환(왼쪽)·박영상 명예교수. <한양저널> 지도교수로서 미래 언론인 양성에 힘썼던 두 교수가 지난 1984년 겨울 학생기자들과 함께 경북 도산서원을 둘러본 뒤 촬영했다 (우상) <한양저널> 학생기자들이 1985년 울릉도 하계수련 도중 섬 일주를 하고 있다. 맨 오른쪽이 필자,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권순일 동아일보 기자 (좌하) 한양대 김성제 교무처장(앞줄 왼쪽 두 번째. 당시 <한양저널> 주무)이 1985년 여름 울릉도 성인봉을 학생기자들과 올랐다 (우하) 김성제 교무처장(오른쪽 두 번째)과 필자(맨 오른쪽)가 1985년 여름 울릉도 성인봉을 오른 뒤 쉬고 있는 모습 ▲ 1985년과 1986년에 <The Korea Herald>가 개최한 대학영자신문 콘테스트에서 <한양저널>이 대상과 우수상 등을 수상했다

2016-10 31

[오피니언][한대 단상] 일상적인 습관으로의 독서

책 읽기 좋은 계절이 왔다.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까? 상반기에는 한국 소설 최초로 맨부커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화제가 됐다. 세계 출판 시장에서 사랑받는 한국 문학을 짚어보고, 바람직한 독서문화에 대해 살펴본다. (글. 이구용 케이엘매니지먼트 대표·출판칼럼니스트 / 그림. 박하영) 세계로 뻗어가는 한국 문학 2016년은 글로벌 무대에서 한국 문학이 2011년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이후 가장 큰 주목을 받은 한 해다. 이 책은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뉴욕타임스와 아마존닷컴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2012년 봄에 신경숙은 세계적 권위의 맨아시아문학상을 수상했다. <엄마를 부탁해>는 지금까지 34개 나라로 번역판권이 팔렸고, 세계 여러 나라의 수많은 유력 언론매체로부터 집중 조명을 받으면서 한국문학은 글로벌 무대에서 큰 관심 대상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2013년 등장한 황선미의 <마당을 나온 암탉>은 미국과 영국에서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지금까지 29개 나라로 판권이 팔리며 한국 문학의 명성과 저력을 이어갔다. 그 후, 2015년 1월과 2016년 2월에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영국과 미국에서 각각 출간됐다. 지난 5월에 이 작품이 맨부커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하면서 한국 문학은 물론 한국 출판 저작물이 세계 출판 시장에서 그 입지를 다지며 한층 도약하는 기회를 가졌다. 글로벌 독자들은 한국 문학의 다양성을 차례로 경험하면서 그 매력에 점차 큰 호응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정명의 <별을 스치는 바람>은 영국에서 한 해 동안 번역 출간된 해외 소설 문학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에 수여하는 문학상인 ‘인디펜던트 해외문학상(Independent Foreign Fiction Prze)’ 후보에 올랐다. 정유정의 <7년의 밤>은 독일어권 유력 매체인 <디 자이트(Die Zeit)> 집계 ‘2015올해 최고의 범죄소설 톱 10’에 오르며 한국 장르문학 분야의 우수성과 가능성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또 지난 9월에는 프랑스 ‘코냑(Cognac) 도서전’ 선정 ‘2016 해외 최고의 추리소설 톱 10’에 올라 거듭 그만의 저력을 과시했다. 정유정의 최신 장편소설 <종의 기원>은 지난 9월에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미국의 펭귄북스를 비롯해 영국,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등 벌써 다섯 개 나라로 번역판권이 팔린 상태다. 김언수의 장편소설 <설계자들>은 지난 8월에 프랑스에서 ‘2016년 추리문학 그랑프리’ 최종 경쟁 후보작에 오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은 문학출판의 명문인 호주의 텍스트(TEXT)출판사로 판권이 팔려 영어권 독자를 넘어 세계 독자들을 만나게 됐다. 편혜영의 <재와 빨강>과 <홀>은 지난봄 두 작품의 영어판권이 함께 팔리면서 2017년과 2018년에 연속으로 번역 출간될 예정이다. 언어권마다 다른 출판·독서문화 필자는 출판저작권 에이전트로서 업무 성격상 여러 나라 다양한 언어권으로 출장을 다니면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어느나라 어느 언어권에서 어떤 책들이 잘 읽히고 덜 읽히는지를. 일례로, 유명 베스트셀러 작가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특정 언어권에서는 출간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그리고 밀리언셀러라 하더라도 언어권에 따라서 좋은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현지 출판사의 제작과 홍보 그리고 유통과 판매의 수완에 따라 현지 독자의 반응에 차이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와 관계없이 나라와 나라 혹은 언어권과 언어권에 따라 큰 격차를 보이는 예가 종종 있다. 언어권에 따라 철학적 사유가 녹아 있는 문학, 추리를 기반으로 한 문학, 그리고 달콤한 사랑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로맨스소설문학이 각각 대중의 사랑을 받듯 출판 시장의 성격은 저마다 차이를 보인다. 이처럼 각 언어권마다 출판문화와 독서문화는 다르게 나타난다. 따라서 문학을 해외 여러 나라로 수출하는 필자는 다양한 문학을 발굴하여 각 영역에서 선호하는 문학을 각각 선별해 진출시킨다. 그러다 보니 다양하면서도 독특한 개성과 뛰어난 작품성 그리고 대중적 접근성을 지닌 작가와 작품을 찾는다. 이 과정에서 한 가지 현상을 발견한다. 바로 각국 독자들이 형성하고 있는 독서문화다. 작은 의미에서 보면 한 개인의 독서 습관이다. 결국 한 사람의 독서습관이 한 나라의 독서문화, 나아가 산업적인 맥락에서의 출판문화의 골격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습관적으로 읽고 사유하는 자세 독서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행위 중 하나다. 그렇기 때문에 독서 습관을 견지하는 것이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다. 한국의경우, 아쉽게도 상당수의 독자들이 어린이와 청소년 시절에 이미 일상적인 행위로서의 독서가 아닌 책임과 의무를 기반으로 한 목적성 짙은 독서 행위를 몸에 익힌다.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인 습관으로의 독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독서가 어떤 특별한 문화 행위가 아닌 일상적인 습관에서 나오는 행위라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으며, 바로 그런 기반에서 어떤 형태의 책이든 자연스런 독서가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요즘 생각이다. 잡지와 만화, 무협지・로맨스・추리 등 장르문학과 순문학, 나아가역사, 철학 등 인문 교양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책을 쉽게 손닿는 곳에 두고 수시로 즐기는 상황이 되어야 한다. 한 나라 한 언어권에서 세계적인 문학 작품과 작가를 글로벌 무대로 배출하는 것은 해당 국가와 언어권 독자들의 몫이 크다. 글로벌 무대에서 그 작품과 작가가 파워를 지니게 되는 데에는 그 나라 독자들의 관심과 열정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노벨문학상 역시 이런 독서문화의 터전 위에서 지극히 자연스럽게 건져 올리는 결실이다. 많은 독자들이 일상에서 관심 갖고 가까이 할 때 바로 그런 행운이 어느 날 우연히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도리스 레싱이 말했듯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이제 초겨울로 접어든다. 손 내밀면 닿을 수 있는 곳곳에 어떤 분야의 책이든 놓아두고 단 몇 줄 혹은 몇 쪽씩이라도 습관적으로 읽고 사유하는 버릇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2016-07 20

[오피니언][나눔칼럼] 기부문화 발전 위한 명문대학의 4가지 역할

지금 대학은 단순히 지식의 전달을 넘어, 새로운 사회적 패러다임의 변화에 주요 리더십 역할을 스스로 자처하고 실행에 옮겨야 명문(名門)대학이 된다. 요즘은 명문의 지표가 기부금 총액과 연관을 짓는 정량적인 것을 넘어 더 깊고 넓고 지혜롭게 쓰고 모으는 정성적인 것까지 대학 경쟁력에 포함되고 있는 추세이다. 만약 명문대가 되는 것이 목표 중 하나라면 명문대의 정의가 확실하게 정립되어야 하고, 측정방법 또한 이해관계자 간에 공유되어야 한다. 대학은 교육을 통해 기부문화를 권장해 재학생이나 졸업생들에게 특별한 역할도 기대한다. 리처드 세넷은 저서인 《불평등 사회의 인간 존중》에서 어린이들이 바깥세상으로 나아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중간 계급으로 행동하는 법 외에도 다른 것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너는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답변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질문에 당당히 대답할 수 있어야 명문대 출신이다. 명문대학이기에 필란트로피 정신이 있는 것인지 필란트로피가 있기에 명문대학이 된 것인지 분명하진 않지만, 중요한 것은 미국의 명문대학에서는 이라는 점이다. 비록 사회 교육이 인간의 동정심의 영역을 확대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들이 대학기부를 통해 가치 사이클 안에서 조금씩 이루어져야 된다고 본다. 아직 한국사회 전반에 기부 생태계가 형성되어 있지는 않지만 기부문화에 대한 대학의 역할을 네 가지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1. 가치 생태계의 조성을 위한 인큐베이터 경제학자인 우마이르 하크(Umair Haque)는 기업을 대상으로 “당신이 가치순환생태계를 만들지 않는다면 누군가가 직접 만들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안에서 이리저리 팔려가겠죠.(중략) 몇몇 산업은 내부를 혁신하지 않으면 누군가가 모래무덤 밑에 묻힐 각오를 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대학도 같은 가치순환생태계 안에 있기에 같은 운명을 갖고 있다. 밖으로 나가기 위한 인큐베이터 역할을 산업의 소스인 대학에서 한다. 이때 가치 사슬(value chain)을 넘어 가치 사이클(value cycle)로 가야 하는데, 핵심은 필란트로피적 리더십이고, 대학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기부문화는 가치순환생태계의 윤활유나 촉매제 역할을 한다. 결국 명문이 되기 위해 기부문화를 촉진한다는 것은 성공적인 대학의 가치 사이클을 기반으로 전반적으로 스필오버 현상(spillover effect)이 일어나 가치순환생태계 내에서 사회전반에 걸쳐 기부산업을 촉진한다는 뜻이 된다. ▲ 대학의 가치 사이클 대학 기부문화의 뿌리는 단순히 대학 발전이라는 개념에서 시작된다. 대학의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한 기부나 모금에 대한 논의가 발전(Development)의 개념으로 잘못된 접근을 하고 있다. 희생자들의 보상에 초점을 맞추고 거창한 비전만 제시하기에 지속 가능하게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진정한 발전이란 단순한 재정 보충이 아닌 성공한 기부자를 축하하고 뒤처진 자를 말뿐인 멘토십(mentorship)을 넘어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힘인 스폰서십(sponsorship)으로 되어야 한다. 2. 철학과 학문이 있는 기부문화 소스 현재 우리나라에서 말하고 행해지는 ‘나눔’이란 Judaism의 charity, Greco-Roman 시대의 Philanthropy, 그리고 한국전통의 나눔 문화와의 혼합체이다. 이러한 융합에는 장점도 있지만 한편으론 개념에 대한 혼돈을 동반한다. 그 혼돈을 바로 학문적으로 잡아 주는 곳이 대학이다. 한양대에서 국내 최초로 ‘필란트로피의 이해와 실천’이라는 과목으로 교육이 진행 중이다. 대학에서 자원봉사나 기금모금 전에 기부문화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은 지식을 얻기 보다는 바른 질문을 하기 위함이다. 빌 게이츠가 필란트로피스트 라고 하면 누가 왜 그를 그렇게 불렀으며, 과연 필란트로피라는 개념은 우리나라에서 가능한가를 질문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부의 역사를 연구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다른 시대의 사건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다른 시대의 눈으로 봄으로써 지금 보는 것을 당연하게 보지 않고 의문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을 갖기 위함이다. 불행히도 많은 대학들은 그 의문을 던지지 못하고 있다. 대학의 문화는 그 사회의 질적 수준을 대변한다. 대학이 무엇을 가르치고 어떤 인재를 키워내는지는 사회의 경쟁력과 직결된다. 대학이 나눔과 봉사를 강조하면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더불어 사는 성숙함을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세계 최고 명문으로 꼽히는 하버드에서는 ‘나눔’을 중시하는 교육 철학을 가진다. 하버드대 안에서 학생들은 남과 더불어 살며 어려운 이들을 도울 수 있는 인재로 커 나간다. 급격한 성장기를 거쳐온 한국에서 대학은 산업 인력을 배출하는 통로 역할을 맡아왔다. 쉴 틈 없이 달려오는 동안 취업과 스펙 같은 학생 개인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 애를 썼다. 그래서 최근 한양대학에서도 남과 나눌 줄 아는 인재, 사회의 고민을 공유할 자세가 돼 있는 인재를 기르기 위한 노력이 한창이다. 사회 구성원 간 갈등 양상이 첨예해 지고 있는 상황에 대한 해답을 지성의 전당인 한양대가 찾으려는 열정이 있음이 확인이 되었다. 3. 포용적 비즈니스의 선도 우마이르 하크(Umair Haque)가 주장한 새로운 자본주의의 5가지 초석 중 하나인 ‘완전한 시장(market completion)’이라는 콘셉트는 20세기 자본주의가 돌보지 못한 이들을 위한 새로운 시장을 창조하자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렇게 하면 시장을 보다 ‘완전’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시장’에 대응되는 20세기 자본주의의 초석은 ‘시장 보호’이다. 기업은 자신의 시장을 지키기 위해 경쟁업체를 파괴하고 무너뜨리고 깨부수려 한다. 경쟁업체의 제품 유통을 제한해 소비자들이 자사 제품만을 쓰도록 가두려는 기업들은 1~2년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면 자사 제품에 소비자를 가두지 않은 기업들이 훨씬 앞서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때 포용적 비즈니스(inclusive business)와 공유경제(sharing economy)의 개념이 필요한데, 빈곤층 및 사회경제적 취약계층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이들에게 고용과 비즈니스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구체적인 방법으로 공급 측면에서 취약계층을 생산자, 공급자로서 비즈니스 가치사슬에 포함해 소득을 증진할 방안을 모색한다. 라인홀드 니버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다른 사람의 욕구를 자신의 욕구만큼이나 생생하게 받아들이고, 또한 먼 곳에 있는 사람의 필요성도 직접 눈앞에 드러난 필요성처럼 신속하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지성적인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기부문화 정신이 자기 대학 울타리를 넘어설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 이것은 기부금을 모아 대학 안에서만 쓰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좀더 폭 넓게 쓰는가에 대한 것이다. 전략적으로 대학의 목표가 최고의 기부금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졸업생 중에 얼마큼의 숫자가 한국 사회에 기부하는가에 대한 지수가 더 중요하다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생겨야 한다. 4. 정보 불균형을 해결하는 역할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발달한 대형단체들은 정보의 수집, 생산, 가공, 분배 능력이 뛰어나 양질의 다양한 정보를 신속하게 기부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소형단체들은 양질의 정보를 전달하기 힘들다. 우리 사회의 복지 불균형을 바로잡는 역할을 하는 민간 모금기관들 역시 극심한 정보의 불균형에서 시작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바로.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월드비전, 삼성생명공익재단 등 상위 1~2%의 기관이 전체 모금액의 77.3%를 차지하고 있었다. 반면 하위 64.6% 기관의 모금액은 1%에 불과했다. 마찬가지로 대학 기부금의 쏠림 현상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비영리단체의 정보 불균형은 이해 관계자의 불만, 갈등의 출발점이다. 전문지식이 요하는 문제에서는 더 심각하다. 물론 기부나 모금이 전문지식이 요하는가에 대한 이견이 있긴 하다. 그래서 많은 단체의 미션이 이런 정보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정보 서비스를 기반으로 한다. 대학 교육은 바로 이런 정보 불균형을 방지하기 위함이고, 그런 서비스가 필란트로피 산업의 중추역할을 하기도 한다. 기부자가 정보 불균형으로 인한 기부의 역선택을 초래하는 정보 불균형이 가장 근본적인 사회문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런 정보의 불균형을 해소시키고 건강한 기부문화에 대학이 밑거름 역할을 해야 한다. ▲ B.K. Ahn·한국기부문화연구소장 Bekay Ahn, CFRE (Certified Fund Raising Executive) 현. 한국기부문화연구소 소장 현. ICNPM(International Council for Nonprofit Management) 대표 현. 한양대학교 경영학과&공과대학 초빙교수 아시아 최초 CFRE(국제공인 모금전문가) 자격증 소지자로 텍사스 주립 대학 발전기금 자문위원, AFP 국제 분과 위원, CFRE 자격증 보드멤버로 활동했고, 아시안 대표로 국제 컨퍼런스 스피커와 대학 및 NPO/NGO 강사로 활동했다. 텍사스 주립대 석. 박사 과정에서 환경공학을 전공했고, Unitech Associates,Inc를 설립하여 환경영향평가와 성과관리 전문가로서 성공적으로 컨설팅 회사를 운영했다. 현 ICNPM(국제 비영리 협의회) 대표와 한국기부문화연구소 소장으로서 한국에서 기금조성 전문가 양성과 리더십을 위한 교육, 비영리기관의 기금조성 컨설팅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비영리단체 모금전략》, 《푼돈의 달변, 큰돈의 경청》, 《The Secret of Asking(착한 요청의 비밀)》, 《나눔이 준 판도라상자》, 《필란트로피의 이해와 실천》 등이 있다.

2016-07 01

[오피니언][타임머신] 눈물과 막걸리를 추억하며

내가 입학한 1985년은 대한민국 역사의 격동기 와중이었다. 1980년 광주의 한이 캠퍼스까지 이어져 대학은 어디나 하루가 멀다 하고 ‘짱돌과 최루탄의 부등가 교환’이 이어졌다. 우리 대학도 마찬가지였다. 낭만을 찾기 힘들었던 시절 ▲ 1985년 대동제 끝나고 인문동산에서 합창하는 모습 아침에 등교를 하면 그 전날 쏘아댄 최루탄 냄새가 가시지 않아 수업 시작 전부터 눈물과 콧물을 한 바가지씩 쏟아야 했다. 물론 그날도 어김없이 교문을 사이에 두고 돌과 화염병을 던지고 무자비하게 최루탄을 쏘아댈 테니 등굣길의 눈물은 기껏 전주곡에 불과했다. 사실 눈물 없이는 대학 생활 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요즘 학생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최루탄이 날아드는 교정을 상상할 수 있을까? 교정은 어디나 전쟁터처럼 깨진 벽돌과 최루탄 파편이 널브러졌다. 당연히 분위기는 험악하고 낭만은 눈을 씻고 봐도 찾지 못할 수밖에. 그해부터 대학 축제는 대동제로 바뀌고 축제의 상징인 ‘쌍쌍 파티’도 사라졌다. 대동제는 더 이상 청춘을 위한 파티가 아니라 5.18 기념일까지 이어지는, 더없이 투쟁하기 좋은 시즌이었다. 급우들도 운동권과 비운동권으로 갈라져 반목하고, 어느 해부터는 운동권끼리도 사상 투쟁에 휩쓸려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영문과 동기만 해도 시대의 중압감을 견디지 못한 탓에 네 댓 명이 정신병으로 고생했으니 당시의 혼란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인문동산과 동물원의 술자리 ▲ 저 뒤쪽이 인문동산이다. 계단을 올라가면 널따란 공터가 나온다. 지금은 자연대에 가렸겠지만 병원 건물도 보인다 돌이켜 보건대, 그 몇 년 동안 술의 힘으로 간신히 버틴 것 같다. 남들은 삶과 사회를 고민하고 괴로워하다가 몸과 마음까지 상했건만 우리 같은 껄렁이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술 속으로 숨어들기만 했다. 돌과 화염병을 던지고 술, 소위 ‘의식화’ 세미나를 끝내고 술, 수업 거부를 하고 또 술… 심지어 시험 기간 중에도 낮술을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어느 교수님은 개강 때마다 나를 보고는 “이번 학기도 어김없이 코가 빨가네”라며 웃곤 하셨다. 문제는 술값이었다. 학생이 무슨 돈이 그리 많다고 비싼 술집을 허구한 날 드나들겠는가. 당연히 술자리는 대부분 교정에서 이루어졌다. 술은 슈퍼에서 막걸리와 소주 몇 병, 안주는 대개 한양시장에서 공수해 온 오이, 당근 정도였다. 운이 좋으면 ‘행당 1번지’라는 튀김집에서 오징어튀김이나 고구마튀김을 1,000원 어치 사오거나 공돈 좀 생긴 선배가 이런저런 안주거리를 챙겨 왔다. 아침에 등교할 때 교재 대신 안주거리를 챙겨 오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술자리는 주로 ‘인문동산’과 ‘동물원’이었다. 당시는 캠퍼스 모습이 지금과 많이 달랐다. 인문대 앞 주차장 자리는 지금보다 지대가 훨씬 높았고 자연대 대신 그 자리에 완만한 경사의 풀밭이 있었다. 인문대가 한양대에서 제일 높은 위치였으니 자연히 인문동산이라 이름이 붙은 모양이었다. 동물원은 지금의 정문 위치다. 작은 정문 오른쪽으로 넓지 않은 풀밭이 있었는데 행인들이 오가며 철망 너머로 학생들이 술 마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동물원이었다. 교내에서 최루탄 냄새가 가장 심한 곳이라 투쟁 의지도 다지고 또 최루탄 냄새 핑계로 취중에 울기도 좋았다 밤낮없이 쏟은 눈물과 콧물 ▲ 입학 당시의 단체사진. 다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궁금하다 우리는 그렇게 술을 마시며 위정자들을 욕하고 노동가요를 부르고 신세 한탄을 하고 눈물을 흘리고… 오바이트를 했다. 낮에도 최루탄 가스에 눈물, 콧물을 쏟고 토악질을 해야 했으니, 요컨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눈물과 콧물과 담즙을 쏟은 셈이었다. 교내 술자리가 좋은 이유는 아무래도 ‘자유’ 때문이었다. 우리는 목이 터져라 노동가요를 부르고, 아무 데나 토하고, 아무렇게나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자다가 깨서 술자리가 파하지 않았으면 다시 합류해 술잔을 기울이고, 사위가 깜깜하고 아무도 없으면 툴툴 털고 일어나 집으로 발길을 떼면 그만이었다. 꾸짖는 사람도 없고 신경 쓰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기엔 사회는 틀어진 구석도, 억울한 이면도 너무 많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2학년 때 농활을 마치고 마무리할 때였다. 후배 한 명이 술에 잔뜩 취해서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친 것 이다. 그저 농활 행사를 낭만적으로 생각하고 룰루랄라 따라왔으련만, 하루 종일 중노동을 하고 마을회관에 돌아오면 선배들이 쉬지도 못하게 하고 이런저런 토론으로 괴롭힌 데다 툭하면 마을 파출소와 알력을 빚었으니 무서울 만도 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친구를 재워 놓고 한참을 웃었지만 그나마 그는 그렇게 술의 힘을 빌려 살아남고 우리와 한패가 되었다. 후배들을 위한 권주가 ▲ 1985년의 인문대. 오른쪽이 인문동산이다. 밖은 여전히 팍팍한 시절이다. 취업문은 훨씬 좁아지고 터무니없는 사건, 사고들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그때가 오히려 호시절이었을 수도 있겠다. 불리한 싸움일지언정 최루탄과 맞장도 떠보고, 마음 놓고 술에 취할 자유라도 있었으니 하는 말이다. 행여 그렇지 못했던들 우리가 쉽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지금이야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했으니 울분을 토로하거나 불의에 저항하는 방법이 우리 시대와는 사뭇 달라졌겠다. 보다 순화하고 정화된 느낌? 21세기의 후배들은 어떻게 이 시대를 버텨낼까? 그러고 보니 언젠가 캠퍼스 내 음주를 불허한다는 뉴스를 본 듯도 하다. 어쨌거나 여전히 우리 모두에게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시대다. 후배들에게 조심스레 막걸리 한 잔 건네 오니, 그대들의 울분일랑 부디 이 한 잔의 막걸리와 취기와 눈물에 실어 조금이나마 씻어낼 수 있기를 빌리다.

2016-05 11

[오피니언][나눔칼럼] 대학 경쟁력의 비밀병기 기부문화

▲ 최영우 ㈜도움과나눔 대표이사. 비영리 섹터를 위한 모금 컨설팅 회사인 ㈜도움과나눔의 CEO로서 한국의 자선단체, 교육기관, 의료기관 등의 모금 전략 컨설팅, 멘토링 및 강의 등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운영위원, 국제사랑영화제(기독영화제) 감사, (사)사교육걱정없는세상 이사직을 맡고 있다. 교육기관 및 시민기관, 종교단체. 문화 예술기관을 비롯한 각종 단체의 컨설팅을 맡고 있다. 필자는 대학, 병원, 자선단체 등 비영리단체가 모금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돕는 회사를 운영하면서 한국의 기부문화가 가장 역동적인 성장을 하는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행운을 가졌다. 4년 전부터는 한양대학교의 모금전략 수립을 돕고 학교가 모금 친화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에 도움을 드릴 수 있는 영광과 보람을 가질 수 있었다. 100년이나 된 미국의 모금전문컨설팅회사 Brakeley의 모금원칙을 한양 대학에 적용하면서 ‘오래된 새 것’을 다시 배우는 기회를 가졌다. 사실 모 금은 조직의 문화와 사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대학에게 돈 이 상의 가치를 가진다. 약 20여 년 전부터 유럽 대학들도 모금의 전략적 가 치를 이해하기 시작했고, 영국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학의 기부문화를 지원하고 있으며, 아시아에서는 한국, 홍콩, 싱가포르의 대학들이 모금에 대한 진지한 투자를 하고 있다. 모금을 통해 대학은 ‘진정한 사회적 대화’를 배운다 ‘공감과 경청’이 수반된 대화의 능력은 오늘날 사회가 인재에게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역량이다. 진정한 대화를 위해서는 ‘나는 변하지 않으면서 상대만 변화시키려는 설득’이 아니라 좋은 변화에 대해서 열려있는 유연 한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변하는 것이 최고의 예술작품 감상법이다’고 한 해석학자 가다머의 말은 적절하다. 대화도 내가 변하는 것이다. 개인뿐 아니라 대학과 같은 조직에게도 사회적 소통능력은 지속가능성의 필수요소이다. 사회와 열려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조직은 계속적인 혁 신이 가능하다. 때로 진정성을 가진 이들과의 대화는 대학에 근본적인 변 화를 요구하기도 한다. 그래서 대학에 대한 기부를 때로는 ‘거래적 기부 (transactional gift)’가 아니라 ‘변혁적 기부(transformational gift)’라고 부르 기도 한다. M 회장 이야기 한양대학교의 모금전략수립을 한 컨설팅 작업을 하면서 대 선배 M 회장님 을 만났다. 자동차부품 관련 중견기업을 운영하는 탁월한 기업가다. 수수 한 회장실에서 만난 회장님은 “일본 출장 갔다가 대학개혁에 관한 책을 일 부러 사서 보았어요. 지역사회와의 소통을 통한 미국 대학의 발전 등의 주 제가 흥미로웠어요. 동경대학교의 발전 모델을 보면서 총장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많이 생각났어요”라고 했다. 그는 모교가 비용을 지불하고 의뢰 한 컨설팅 인터뷰를 위해서 여러 권의 외국서적을 탐독하고 왔던 것이다. 대화는 대학을 열려있게 만들고 더 유효한 조직으로 강화시킨다. 대학이 100명의 기업인에게 기부를 받는다면 대학은 100명의 치열한 사업가의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조언’을 받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들은 대학에 자신의 세계를 개방한다. 한양대학교가 모금캠페인의 과정에서 진지한 노력으로 ‘한양발전후원회’ 를 결성했다. 금전적인 기부를 떠나 이 분들의 조언과 네트워크는 학교 입장에서는 무한한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모금을 통해 대학은 이타심의 경쟁력을 배운다 현대 경영학의 첨단연구 분야인 게임이론에서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다. 아무리 많은 게임의 시뮬레이션을 해봐도 가장 경쟁력 있는 전략은 ‘이타 적인 전략’이라는 것이다. Tit for Tat 전략. 스마트한 이타적 스탠스가 기 업의 경쟁력과 인재상에 미치는 함의는 지대하다. 경쟁에 경도된 한국의 교육시스템은 미래에는 경쟁력이 없는 인재를 길러내는 어리석은 투자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심각한 성찰이 필요한 분야이다. H 회장 이야기 최근 정례회의에서 H 회장님 이야기를 다루었다. 60년대 건강과 가정형 편 때문에 대학을 중퇴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선박엔진 관련 원천기 술을 가진 성공한 엔지니어 사업가로 존경을 받고 있다. 한양대학교로부 터 최근에 명예졸업장을 받으셨고, 대학에 큰 기부를 하셨다. 형편 때문 에 학교를 계속 다닐 수는 없었지만 그는 도서관에서 홀로 공부하며 대학 과정을 마쳤다. 총장님은 H 회장님이 기부하신 고마운 돈으로 도서관의 한 공간의 리모델링을 제안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공간에 ‘이 를 악물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 아닌, 학생 H의 사연’을 스토리로 만들어 기념하자고 결정했다. 한양대학의 미션인 ‘사랑의 실천’은 미래지향적이고 매력적인 가치이다. 대학의 기부문화는 대학의 본질적인 활동인 연구, 교육, 사회적 기여 속에 있는 이타적 가치를 명백하게 드러내고 강화시킨다. 이제 한양대학교는 고액기부 분야에서의 성공을 디딤돌로 삼아서 다수의 동문들에게 대학에 기여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캠페인을 준비 중이다. 수 많은 동문들로부터 듣게 될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또 대학을 어떻게 발전 시킬지 기대된다.

2016-04 29

[오피니언][타임머신] 교정 구석구석 녹아 있는 청춘의 기억들

‘어떤 전공을 선택할 것인가?’, ‘어느 대학에 지원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스스로에게 내린 답은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였다. 1989년 졸업 후 27년을 살아온 내 삶을 채점해보면 결코 틀린 답은 아닌 것 같다. 연기를 배웠기에 가능했던 일 ▲ 졸업식 기념사진. 뒤의 건물이 한양대학교병원이다. 흙으로 덮인 공터에는 자연과학관이 들어섰다. 셰익스피어가 그랬다. 인생은 연극이라고. 우리 삶이 무대 위 연극이라면 가장 뛰어난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 아닐까? 삶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멋진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적절한 타이밍에 명대사를 날릴 수 있었던 비결은 내가 연기를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방송작가로 KBS 연예대상 최우수 작가상을 수상하고, <유머가 이긴다>라는 베스트셀러를 비롯해 16권의 책을 쓰고, 연간 200여 차례 특강에 초대되고, 모교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으니 이 정도면 성공했다 자부할 수 있지 않을까? 학력고사를 본 우리 세대는 대부분 점수로 학과와 학교를 결정했다. 그러나 난 오래전부터 스티븐 스필버그나 조지 루카스처럼 영화를 전공해 영화감독이 될 것을 꿈꾸며 연극영화학과만 바라봤다. 그러면 왜 한양대였냐고? 솔직히 집에서 제일 가까웠기 때문이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 지금은 청량리역과 왕십리역이 전철로 운영되지만, 1980년대에는 똥차라고 불리던 ‘기동차’로 연결됐었다. 전기 대신 디젤로 달리는 기차였는데, 매일 학교를 가는 게 아니라 교외로 놀러가는 기분으로 등교했다. 왕십리역에서 내려 학교로 가는 길은 좁은 골목길이었는데, 지금은 상점들로 바글바글하다. 후문을 통해 인문관으로 올라가는 길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그대로다. 큰 차이라면 운동장이 변해 HIT(한양종합기술연구원)와 사이버대학교가 들어섰다는 점. 그 운동장에서 대학교 입학식을 하고, 거기 들어선 한양사이버대학원을 졸업했으니 나에게 그곳은 크나큰 추억이 담겨 있는 장소다. 나의 첫 번째 차, 프라이드 ▲ 내가 번 돈으로 산 나의 첫 번째 차, 프라이드 한양대를 갈 때마다 캠퍼스 내의 차량 숫자가 증가해 교통사고가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든다. 가급적 학생들은 편리하게 바로 연결되는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1980년대에는 학교에 차를 가지고 다니는 학생이 학과에 한두 명 정도였다. 그중에 하나가 나였다. 차를 갖고 다니는 것이 부담스러워 병원 주차장에 세워 놓고 걸어서 인문관을 올라 다녔다. 학생이 차를 갖고 있다는 게 창피했던 건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번 돈으로 산 차였으니까. 당시엔 학생들이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가 턱없이 부족했다. 지금처럼 편의점이나 PC방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난 창업을 결정했다. 군대를 다녀온 뒤 스스로 학비를 벌기로 결심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불편함을 찾아서 해결해주면 돈이 된다는 진리를 알고 있었기에. 1982년 내가 입학한 해에 18대 1의 경쟁률을 보였던 연극영화학과는 해가 갈수록 인기가 높아졌다. 하지만 정작 수험생들은 연극영화학과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서 불편함이 많았다. 그래서 여러 자료와 면접 요령을 적은 20쪽짜리 조잡한 입시요강을 만들어서 팔았다. 그랬더니 정보에 목말랐던 입시생들에게 불티나게 팔렸다. 덕분에 사흘 일하고 300만 원을 벌었다. 여기서 힌트를 얻어 ‘연영과 입시 상담’이란 문구와 함께 집 전화번호가 들어간 명함을 만들어서 예비 모임 때 돌렸다. 전화기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벨이 울려 80명가량의 예약자를 받았다. 혼자서는 도저히 상담이 불가능해 학교 앞 ‘일번지다방’을 통째로 빌리고 동기들을 데려와 입시 상담을 진행했다. 그렇게 이틀 만에 500만 원을 벌었다. 닷새 일하고 번 800만 원으로 ‘프라이드’를 샀다. 첫 번째 마이 카다. 전국 일주에서 졸업 행사까지 ▲ 친구와 함께 차 안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전국을 일주했다. 그 차로 단짝과 전국 일주를 했다. 차에서 먹고 자고… 그야말로 캠핑카가 따로 없었다. 그때 전국을 돌며 느낀 것은 우리나라가 무척이나 기형적으로 발전했다는 점이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이 도시 밖으로 나가보지 못했던 나는 여행을 하며 전국 방방곡곡의 작은 마을과 길을 돌아다니며 너무나 큰 차이와 차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후 누구나 똑같은 대접을 받는 공정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내 주변의 차별부터 없애야겠다는 마음으로 과대표에 도전해 학회장이 됐다. 1987년 학회장 임기 당시 기억에 남는 것은 서울시청에서 모이기로 한 6.10 민주항쟁 때 유일하게 시청 앞까지 진출한 것이다. 전경들이 나는 그냥 통과시켜 줬다. 연극영화학과 복학생이라는 신분이 전경들 눈에도 절대 ‘데모’ 안 하게 보였었나 보다. 그때 연인인 척 데이트를 하면 안 걸린다고 꾀어 같이 시청으로 걸어갔던 이화여대 2학년생의 얼굴이 지금은 점점 희미하게 기억 속으로 사라져 너무나 안타깝다. 학회장으로서 전국 최초로 과목평가제를 실시한 것도 떠오른다. 학기 말에 전 학년, 전 강의실을 다니면서 직접 수업에 대한 만족도를 조사한 뒤 대자보를 붙였다. 이제는 교수평가제가 상식이 됐지만, 그때는 정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교수들과 불편하게 지내기도 했다. 그런 내가 이제는 한양대 ERICA캠퍼스 특임교수가 되어 학생들의 평가를 받고 있다. ▲ 졸업식 후 ‘한양회관’에서 연극영화학과 친구들과 함께한 행사. 졸업식은 조금 색다르게 진행했다. 졸업 후 그냥 뿔뿔이 헤어지기가 아쉬워 함께 모여 식사를 했다. ‘한양회관’을 전부 빌려서 졸업식에 참석한 모든 부모님과 친척을 모이게 했다. 그리고 교수님들을 초대해서 행사를 가졌다. 선물 증정도 하고 큰절도 하고 편지도 읽고 친구 부모님들끼리 인사도 하고… 지금 생각해도 멋진 아이디어였다. 그렇게 졸업하고 헤어지면 끝인 줄 알았는데… 어제도 그 친구들과 함께 당구를 쳤다.

2016-03 17 중요기사

[오피니언][타임머신]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의미가 있다

왕십리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나는 30분 일찍 한양대역으로 가고 있다. 학교에 한 번 올라가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갑자기 너털웃음이 나왔다. ‘올라간다니’ 말이다. 그랬다. 다른 학교는 간다고 했지만 우리는 학교에 올라간다고 했다. 임병희(<목수의 인문학> 저자・국문학과 91) 한양대역 2번 출구 ▲ 91학번 친구들을 처음 만난 자리, 인문대 오리엔테이션(1991. 2. 24) 어디로 가든 학교는 올라가야 했다. 특히 국문학과가 있는 인문대는 더욱 심했다. 정문으로 가면 진사로를 올라야 했고, 진사로를 오르면 다시 138계단을 올라야 했다. 왕십리역에 내려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병원 후문을 향하든, 샛길로 나 있는 옹달샘 방향으로 가든 계단과 언덕은 피할 수 없었다. 한양대역, 젊은 청춘들과 함께 지하철에서 내린다. 싱그럽다. 잠시 동선을 그려본다. 학교를 한 번 돌아보려면 뚝섬 방향으로 나가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공대 후문으로 들어가 노천강당에 잠깐 앉았다가 사범대를 거쳐 인문대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웬걸, 한양대역에 내려 보니 없던 입구가 하나 있다. 그렇구나. 그 입구가 뚫렸구나. 학교를 다니다 보면 몇 가지 바람이 생기기 마련이다. 내가 다니던 남자고등학교에는 매년 근처의 여고와 합쳐져 남녀공학이 된다는 전설이 떠돌았다. 물론 근거 없는 남고생들의 소원일 뿐이다. 대학에 다닐 때도 그런 것이 있었다. 왕십리역 계단에 에스컬레이터가 생긴다거나 한양대역에서 학생회관이 있는 한마당 쪽으로 바로 나갈 수 있는 입구가 뚫린다거나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입구가 정말로 생긴 것이다. 첫 번째 충격이었다. 씁쓸한 듯 흐뭇한 학교의 변화 나는 동선을 수정했다. 학생회관 쪽으로 나가 본관을 돌아 노천강당으로 가기로 말이다. 그런데 가슴이 조금 두근댄다. ‘또 어떤 변화가 기다리고 있을까?’ 그 변화가 씁쓸할지 흐뭇할지는 아직 몰랐다. 어쩌면 씁쓸하면서 흐뭇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입구로 가니 몇 계단 오르지도 않았는데 학교에 도착했다. 마치 축지법을 써서 진사로를 건너뛰고 온 기분이다. 아, 그런데 모르는 건물이 보인다. 쌉싸름하다. 그래도 고딕스러운 본관은 여전했다. 노천강당이 보인다. 이곳은 아마 내가 학교를 다니면서 세 번째로 술을 많이 마신 장소일 것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우리는 꽃에 모여든 꿀벌처럼 노천강당의 양지를 찾았다. 새우깡 한 봉지, 소주와 맥주 몇 병을 들고 전공서적을 깔고 앉아 아직 가시지 않은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며 잔을 채우고 비웠다. 비가 오는 날이면 계단 밑에 들어가 마셨고, 날이 좋은 날이면 퍼질러 앉아서 마셨다. 그런데 이 좋은 봄날에 노천강당은 비어 있었다. 아니 사람이 없다는 게 아니다. 술 마시는 사람이 없다는 거다. 이건 새로 생긴 한양대역 입구보다 더 충격적이다. 그래도 잠시 앉았다. 나는 추억이라도 마셔야 했으니까. 사라진 것들에 대한 그리움 ▲ 138계단에서 동기들과 함께(1991. 7. 24) 드디어 인문대에 도착했다. 고개를 갸웃한다. 내가 알던 인문대가 이렇게 좋은 건물이었나 싶다. 2층 베란다도 완전히 달라져있다. 왠지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인문대 앞마당도 한참이나 좁아진 느낌이다. 예전에는 네트를 만들어 족구도 자주 했었는데, 이제는 족구도 잘 안하는 것 같다. 자꾸 쓴웃음이 난다. ‘이런 생각을 하면 꼰대라고 하던데’ 뭐 어쩔 수 없다. 생각이 나는 걸 어찌하겠는가? 마치 이방인처럼 인문대를 스쳐 138계단으로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계단이 나무다. 계단 양쪽에는 가로등도 있다. 문명화된 세상을 처음 보는 산골 촌뜨기가 된 기분이다. ‘그래, 많이도 달라졌구나.’ 시간이 흘러 나도 달라지고, 세상도 달라졌는데, 모든 달라지는 것을 경험하고 살았는데, 마음속에서 나는 옛날 학교의 모습을 부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왕십리 술집에서 친구를 만나 술을 마셨다. 우리는 새로 생긴 것보다 없어진 것들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 닭개장과 술국에 한 수저씩 조미료를 넣어 주던, 지금은 사라진 ‘부귀집’과 오돌뼈, 닭똥집에 소주병 쌓아가던 ‘마기집’도 이야기했다. 천 원짜리 몇 장으로 떡볶이와 순대를 양껏 먹을 수 있었던 시장통 화천 아주머니집도 빠지지 않았다. 언제 다시 오르려나 ▲ 국문학과 MT 캠프파이어(1991. 10. 24) 지금도 누군가를 만날 때면 자주 하는 소개말이 있다. 특히 같은 대학 출신을 만날 때 그렇다. 대신 소개를 해 주어도, 스스로 이야기를 해도 “한양대 국문과 91학번”이라고 말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지금은 가구를 만들며 글을 쓰고 있지만 여전히 나는 ‘한양대 국문과 91학번’이다. 그 속에 녹아 있는 건 단순히 학교와 입학년도가 아니다. 내가 청춘을 어디에서 어떻게 보냈는지를 말해 주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이며 경험이고 또한 지금의 나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진행형의 시간과 공간이다. 학교는 많이 좋아졌다. 그런데 나는 예전이 그립다. 그건 어쩌면 청춘의 내가 그리운 것인지도 모른다. 학교에 가 본 후, 또 많은 시간이 흘렀다. 새로운 건물이 들어선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변화는 피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20대 를 보낸 그곳으로 한양대를 기억한다. 시인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간 곳, 친구들을 만난 곳, 셀 수 없는 술잔을 기울이며 개똥철학과 인생과 사회를 이야기하며 분노하고 웃고 떠들던 곳, 사실 한양대는 학교라는 공간에만 있지 않다. 술에 취해 친구가 데려간 왕십리의 하숙집, 배낭 하나 짊어지고 떠났던 여행지, 138계단을 내려갈 때 느닷없이 달려와 어깨동무를 하던 친구, 그 모든 것이 한양대이다. 나는 다시 학교를 오르는 꿈을 꾼다.

2015-05 11

[오피니언][에리카 공간비평] 2. 거주자, 상권, 학생을 합치는 소리

앞서 거주자와 상권, 학생을 합치는 소리에 대한 필요성을 역설하며 1편을 마쳤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소리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이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펼치기 위해선 소리를 먹는 공간부터 이야기하여야 한다. 첫 번째 사진에 보이는 것은 바로 계란판이다. 밴드 연습실이나 녹음실에서 방음을 위해 계란판을 붙인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인테리어를 한 공간이 있다. 이곳에서는 학생들의 소음이 벽으로 흡수된다. 가게에서 나는 소리들을 흡수하여 그 공간에 있는 사람들의 귀를 편안하게 해 준다. 이러한 공간이 바로 학교 앞의 감성포차 ‘허구헌날’이다. 술집 허구헌날의 주인 ‘이창길’ 사장님은 과거 ‘비둘기가족’이라는 밴드에서 키보드를 연주하셨던, 30년 이상 음악을 전공한 프로 키보드 세션맨이시자 한국 사진가협회 소속으로 수많은 사진 공모전에서 꾸준히 결과를 보여주시는, 에리카 캠퍼스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진가 선생님이다. 현재 허구헌날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에리카 캠퍼스의 야생 조류 및 풍경들을 계속 소개해주시기도 한다. 이 허구헌날의 가장 독특한 점은 바로 대학동에서 유일한 라이브 포차로, 방문시 야마하 일렉톤의 라이브 재즈 연주와 함께, 라이브 키보드 반주를 통해서 학생들의 노래실력을 한두 곡씩 뽐낼 수 있는, 음악적 문화가 살아있는 독특한 술집이기 때문이다. 술집은 그냥 술을 마시는 공간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술집만의 안주가 있고 술이 있고 공간의 배치에 따라서 우리는 몇 명, 어떤 사람들과 어떤 분위기에서 이곳을 찾고, 그리고 소비하는지 규정된다. 허구헌날은 그런 특성이 가장 잘 나타난 곳이다. 술을 마시다보면 선생님의 라이브 재즈 연주를 듣다가 각 테이블에서 한 명씩 번갈아가며 서로 모르는 사람들의 노래를 듣는다. 잘 부르고 못 부르고보다 진심이 중요한 공간. 그리고 그들은 서로에게 박수를 치고 격려를 하고, 감탄하기도 한다. 90년대의 포크적, 또는 낭만이라고만 규정지었던 그 대학가의 분위기와 예술적 분위기로 묶여진 공간 속에서 결국 개개인의 화합이 이루어진다. 최근 허구헌날에서는 ‘한 CEO가 와서 학교 동아리 학생들이 술먹는 자리의 계산을 골든벨 울리고 떠났다’ 라는 이야기가 포스팅되었다. 과거 이승철이 부활의 멤버일 당시 부활의 매니저가 가수를 데리고 오기도 하고, 과거 사랑과 평화에서 세션을 하셨던 분이 레코딩을 하셨다며 가져오시기도 하는 공간. 신구 세대, 주거민들과 학생, 그리고 상권적인 결합이 이 ‘소리’로 결합되는 합치점이 아닐까. 그렇기에 이 소리를 이창길 사장님은 허투루 보내지 않는다. 가게를 인수하고 가장 먼저 한 것이 모든 소리를 흡수할 수 있도록 가게 전체에 방음벽과 계란판을 설치한 것이다. 가게 전체에서 대화를 나눌 때 그들의 목소리가 흡수되기에 서로의 대화가 서로의 술자리를 방해하지 않는다. 음악소리 역시 직접 연주를 하지만 과하지 않고 사람들의 대화 바닥으로 깔린다. 그 자체가 문화적인 소리가 될 뿐 소리가 전면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소리는 문화가 될 수 있다. 서로가 생각하는 낭만의 지점이 다르듯이, 그들이 똑같은 소리를 듣더라도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이 그 공간에 존재하고 움직이고, 그리고 직접 나가서 노래를 부르며 자신들의 목소리로 끄집어내는 순간 소리가 의미화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간혹 소란스럽게 떠드는 사람들에 대한 면박까지도 이 공간에서 약속된 하나의 ‘술집 사용법’인 것이다. 서문에서도 밝혔듯 에리카라는 캠퍼스와 그 대학동의 문화를 소비하고 그것을 이끌어 나가는 사람들에 의해서 공간의 의미도 바뀐다. 학생들이 마냥 잡담 이상으로 떠드는 공간이 아니라, 주민들이 그냥 술을 마신는 공간이 아니라, 낯선 사람들이 모여서 노래를 소비하고, 그러한 대학이라는 이미지가 가지는 낭만을 극대화 하는 공간으로써의 허구헌날의 가능성. 이것은 학교 앞에서 보여줄 수많은 가능성 중 좋은 한걸음이 되지 않을까. 이제는 학생들이 이러한 문화적 움직임을 한 차례 보여줄 때다. 사장님이 연주가 끝났을 때, 박수를 치면서 멋지다는 말 한 마디씩만 건네어보는 것은 어떨까? 그러한 움직임은 이제 서로가 서로를 ‘알’ 수 있게 만든다. 이러한 공통의 움직임, 상권과 학생이 합쳐지면서 만드는 독특한 문화가 있다. 바로 동아리나 학회의 ‘스폰’이라는 개념이다. 다음 공간비평 3편에서는 그 스폰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보도록 하자. [2. 거주자, 상권, 학생을 합치는 소리]앞서 거주자와 상권, 학생을 합치는 소리에 대한 필요성을 역설하며 1편을 마쳤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소리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이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펼치기 위해선 ... Posted by 한양대 ERICA 다 찍어드립니다. on 2015년 5월 8일 금요일

2015-05 08

[오피니언]다양한 주거 형식의 결합 추구와 최소 볼륨의 활용

과거 산업화 시대 한국 주거 문제의 모범답안은 아파트였다. 아파트는 경제적이고 효율적이며 편리할 뿐 아니라, 최고의 재테크 수단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아파트는 국가 경제 전반을 위협하는 부동산 거품, 가계 대출 증가의 주범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경제적 효용성이 약해지자 획일성, 익명성, 층간소음, 콘크리트 속의 인공적 삶 등등 아파트가 지닌 태생적 단점들이 더욱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에디터 박선영 | 글 남성택 교수 (한양대학교 건축학부) 건설 회사가 주도하던 아파트 열풍이 시들해지자, 수요자 중심의 개인 주택 건설이 뜻밖의 호기를 맞이했다. 서판교에 조성된 대규모 주택 단지가 이를 증명한다. 부유층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개인 주택이 중산층의 관심을 끌게 된 배경에는 2011년 각종 미디어를 통해 소개된 ‘땅콩집’의 역할이 컸다. 좁고 작은 두 채의 주택을 이어 붙인 땅콩집은 한 필지를 두 가구가 양분해 토지 비용에 대한 부담을 줄였고, 단순한 볼륨과 평면을 반복하는 것으로 건설 비용을 경감시키는 전략을 선보였다. ‘토지 구입부터 인테리어까지 3억 원’이 라는 캐치프레이즈는 누구나 한번쯤 품어봤을 ‘마당 있는 내 집’에 대한 현실화를 자극했다. 개개의 개인 주택들이 힘을 합쳐 하나의 군집을 이루며 거대 아파트 단지의 헤게모니에 대항하는 양상이 펼쳐졌다. 점점 높아지고 있는 개인 주택의 활성화에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주거 유형의 다양성이다. 이는 과거 아파트 건설에 치중했던 우리의 주거 현실에서 더욱 절실한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개인 주택 열풍의 중심에 있는 땅콩집은 수평적 반복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만큼, 다양성 측면에서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어 아쉬움을 남긴다. 일찍이 건축가 아돌프 로스(Adolf Loos)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의 주택은 당신의 인격을 거울처럼 비출 것이다. 따라서 당신만이 소유할 주택을 만들어야 한다.(1903)” 만일 공간이 삶을 제대로 담는다면, 저절로 그 삶을 ‘닮게’ 된다는 것이다. 집은 집주인의 인품을 표명한다. 따라서 자신의 주택을 짓는 것은 스스로를 깊이 돌이켜보며 정리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주택이 각 개인의 인격과 삶의 방식의 차이를 섬세히 반영할 때, 주거의 다양성은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1923년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가 완공시킨 라 로슈 잔네레 주택(Villa La Roche-Jeanneret)은 땅콩집과 흡사한 ‘2가구 1주택’으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젊은 은행가이자 부르주아 예술 수집가인 라울 라 로슈(Raul La Roche)의 독신 주거와 건축가의 친형이자 당시 무명 음악가였던 알베르 잔네레(Albert Jeanneret)의 신혼집이 될 일반 가정용 주거가 이웃해 계획되었다. 땅콩집이 동일한 주택들을 색깔로 구분한 반면, 코르뷔지에는 두 주택을 하나의 작품인 양 흰색 외장의 동일한 색깔로 통합했다. 하지만 라 로슈 잔네레 주택에서 두 주거 간 형태는 명확한 차이를 보여준다. 잔네레 부부의 주택이 합리적이고 기능적이며 경제적 평면을 지닌 단순 상자 형태라면, 라 로슈 주택은 예술 갤러리 등 특별한 프로그램 공간을 추가하며 곡선의 자유로운 형태를 선보인다. 각기 독립적으로 형성된 두 주택은 마치 샴 쌍둥이인 것처럼 병합된 것이다. 위 역사적 사례가 잘 보여주는 주거의 다양성은, 오늘날 강조되는 다른 실질적 요건들과 함께 고민되어야 한다. 고밀도 도심의 상황과 비싼 땅값을 고려하면 점유하는 대지 면적이 최소화되는 건축 계획이 최선일 수 있고, 건물의 지속 가능성의 가치 아래 건물 시공비와 유지비를 고려한다면 건물 외형의 겉넓이가 최소화될 수 있는 형태의 건축물이 당연히 유리하다. 따라서 가까운 미래 우리가 더욱 추구해야 할 주거 건축은 각기 다양한 주거 형식의 결합은 추구하되, 그 결합을 작고 좁으며 단순한 볼륨 속에서 이루어내야 한다는 사실이다. 1997년 완공된 MVRDV의 더블하우스가 좋은 예시다. 두 가구가 하나의 상자 형태로 결합한 더블하우스의 설계 과정은 좁은 영토 속에서의 총성 없는 내전, 끝없는 협상 상황과 흡사하다. 단순한 형태의 건물 내부에서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에 최적화된 공간은 쟁취하고, 불필요한 공간은 포기해나 간다.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각자에 맞는 공간 방식을 개척해나갈 때 형성된 건축은 마치 3차원의 퍼즐과 같다. 최소 볼륨 속에서 최대의 미로가 발견된다.

2015-05 04

[오피니언][에리카 공간비평] 1. 소리와 에리카

에리카 캠퍼스에는 빈 공간도 이름이 있다. 복지관 앞의 광장은 '민주광장'이고 도서관 옆 공터는 과거에 번개가 쳐서 비닐하우스가 불탔다고 해 '번개공원'이다. 공간은 이렇게 이름과 함께 그럴싸한 유래도 있다. 학교의 정문에 기울어진 건물 두 개를 비롯한 공간은 ‘아고라 광장’이라고 부른다. 이런 공간들보다 학생이 더 많이 다니는데도 불구하고 이름은 잘 모르는 공간이 있다. 학교 정문, 횡단보도를 건너면 나오는 천막과 트릭아트의 공간, 바로 '안단테 광장'이다. 안단테 광장은 안산이 안산 대학동 문화거리를 조성할 때 가장 핵심적으로 추진했던 공간이다. 대학동이라는 공간을 학교 앞 GS25시 맞은편의 석판으로 설정해 놓고 이곳에 천막을 치고 무대를 설치한 뒤 트릭아트를 그렸다. 이 공간에 갖추어놓은 것은 무척이나 많다. 배전반부터 각종 음악장비를 설치할 수 있도록 배려해 놓은 것이다. 안산시는 이 공간을 '안산의 홍대 버스킹 거리'처럼 만들려고 했었다. 이러한 기치에서 공간을 좀 더 활용해보고자 욕심냈던 프로젝트가 현재 4회까지 진행되었던 '안단테 프로젝트'이다. 첫 번째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공간이 바로 4회 안단테 프로젝트 준비 사진이고, 두 번째 사진은 2013년도에 있었던 1회 안단테 프로젝트의 모습이다. 음악을 할 수 있는 공간, 그리고 자유와 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으로서 안단테 광장은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가? 사실 버스킹이라는 것은 사용하는 사람들이 갖춰져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문화였고 이러한 문화를 '공간'적으로 갖춰진다고 이러한 변화가 바로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계속되는 안단테 프로젝트의 행사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버스킹 문화가 자주 일어나지 않는 것도 이러한 지점이다. 지금 이 공간은 어떤 위치에 있는가? 최근 에리카 대신 전해드립니다에서는 이 공간에서 이어지는 주거 거리까지, 고성과 고음, 주정 섞인 고함들에 대한 성토성 글이 몇 차례 올라왔다. ‘기존에 주거적인 공간으로 술집의 분위기가 싫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왜 술집 공간이 생기면서 내 주거권이 침해받아야 하는가’ 하는 논란. 그렇다. 지금 이곳은 소음으로 인한 문제적 공간이다. 안산시는 이러한 소음의 공간을 예상이라도 했던 것일까, 그리고 그곳이 진정 버스킹의 공간이 된다면 음악적인 것을 소음이라고 할 수 없을까? '음악'과 학교 앞 거리를 왜 연결하려고 했을까? 이것은 대학가에서 가지고 있는 음악에 대한 환상, 그리고 이 환상을 실현시켜주는 '호수공원'의 존재로 이어진다. 에리카는 타 학교와는 달리 호수공원이 두 곳 존재한다. 습지생태공원은 그 자체로 습지가 있는 자연 환경을 그대로 보존하는 식의 공간이다. 수많은 야생 조류들이 그곳에서 둥지를 틀고 살아가며 여름에는 연꽃이 만개한다. 그에 반해 호수공원은 인공적인 산물이다. 무대가 있고 건축물이 있고 분수가 쏘아진다. 하늘을 향해 원을 그리는 연꽃의 모습과 쏘아지는 분수의 모습은 일견 비슷하고 대조적이다. 중앙의 호수공원에서는 날씨가 좋아지면 나와서 바람을 즐기고 햇살을 맞는 학생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저녁이 되면 술과 주전부리를 가져와서 분위기를 즐기는 학생도 많다. 이 같은 모습은 에리카에서는 일상이지만 다른 학교의 학생들에게는 독특한 문화적 공간이기도 하다. 버스킹을 할 수 있고 바깥에서 잔디밭에 앉아 모여앉아서 술을 한 잔 걸칠 수 있는 곳. 그러한 공간적인 이미지는 과거 ‘대학가의 낭만’이라고 부르던 이미지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학교 건물들의 배치는 이 중앙의 복지관과 호수공원을 둘러싸고 있다. 양귀비 꽃밭이나 습지생태공원, 본관 뒤편의 잔디밭이나 민주광장 등 다른 조경적인 공간이 수업적인 동선 바깥에 위치하는 것을 감안하면, 이 호수공원의 지리적 위치는 무척이나 독특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람들이 버스킹이나 이렇게 머릿속에서 그리기만 해놓은 대학가의 낭만적 이미지를 소비하는 건 의미가 깊다. 취업과 일상 속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며 살아가는 청춘들의 표상이자 대학가의 삶 자체는 결국 일상이다. 도서관과, 총학생회와, 학생식당과, 공학대학의 건물과, 체대의 체육관과, 동아리건물 사이에 있는 그 기묘한 배치는 일상과 낭만을 합치시킨다. 이곳에서 우리는 노래를 소비하고 음악을 즐기며 여유를 즐기는 동시에 우리가 그려왔던 대학교 생활과 우리의 현실적 대학교 생활을 병렬적으로 소비하는 것이다. 이 같은 일상에서 이곳에서 일어나는 여유와 음악은 에리카 전체의 문화로 진화하지는 못할지언정 ‘쉬는 시간’ 동안의 여유는 우리가 그렸던 대학교 시절의 여유, 그 머릿속에서 가득했던 낭만의 시간으로 탈바꿈한다. 이러한 ‘대학교의 낭만’ 같은 추상적 이미지는 하나의 행위나 대상으로 확정되지 않는다. 통기타를 들고 언제나 즐겁게 즐기던 모습, 캠퍼스 커플로 학교를 거닐던 모습, 잔디밭에 누워서 낮잠 자는 모습, 그 여유와 문화적 공간이 따라온다. 호수공원이나 민주광장에서 이렇게 앰프를 들고 버스킹하는 사람들, 또는 어설픈 실력이나마 기타 하나를 들고 먹을 걸 가지고 나오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이런 문화적 속성 탓이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음악적 분위기와 열망을 학교 바깥까지 끌고 나와서 대학동이라는 문화로 만들려고 했던 시도가 아닐까. 상권과 학생, 그리고 대학동의 주민은 공간적으로 공유된 삶을 살고 있지만 그 삶의 스타일이 분리되어 있다. 그러한 분리를 이어주기 위해 교내의 ‘학생’들의 공간을 ‘주거민’들이 있는 곳까지 끌고 오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음악이었던 것이고. 그러면 이러한 시도를 하고 있는 다른 움직임이 있지 않을까? 위에서 말한 것처럼 대학동은 주민과 학생과 상권이 함께 하는 곳이다. 그리고 저런 음악적 확대는 학생과 주민의 연결점을 찾는 행동에 더 가깝다. 상권까지 연결된 행동은 없을까? 다음 2번 칼럼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학교 앞에서 이러한 문화적 움직임을 계속 시도하는 술집 <감성포차 허구헌날> 에 대한 것이다. [1. 소리와 에리카]에리카 캠퍼스에는 빈 공간도 이름이 있다. 복지관 앞의 광장은 '민주광장'이고 도서관 옆 공터는 과거에 번개가 쳐서 비닐하우스가 불탔다고 해 '번개공원'이다. 공간은 이렇게 이름과 함께 그럴... Posted by 한양대 ERICA 다 찍어드립니다. on 2015년 4월 29일 수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