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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 12

[오피니언]마음의 여행이요 일탈이 되는 축제는 나에게 ‘뜨거운 소란 속의 차가운 고요’였다

떠들썩한 축제 마당 한편에 시화가 걸려 있다. 국문학과의 시인 지망생은 소란이 소란으로 들리지 않았다. 소란 속의 고요, 두 가지 매력이 담겨 있는 것이 축제의 시화전 아니었던가. 아우성 속 또 다른 세상으로 이끌어주었던 액자. 단 한 사람이 알아보고, 꽃 한 송이 걸어주기를 기다리던 신록의 교정 한 모퉁이가 이제는 푸르러졌다. ▲ 글 고운기 (시인, 문화콘텐츠학과 조교수, 80·국어국문) 졸업하고 4반세기가 흘러 모교의 교수로 돌아와 다시 보는 후배들의 축제는 훨씬 조직적이고 윤택해졌다. 축제는 일탈이다. 일상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의 대표가 여행이라면 축제는 마음의 여행이요, 그래서 또 하나의 일탈이다. 일탈은 곧 모험을 동반한다. 마음의 모험 흠뻑 젖어 있는 후배들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 또한 어느새 슬며시 끼어들곤 한다. 주점에서 털리는 지갑의 돈이 솔찬하지만 말이다. 축제 때면 내가 다니던 국문학과는 시화전을 열었다. 글깨나 쓴다는 친구들에게는 기다려지는 행사였다. 시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직접 그림을 그리기도 했으니, 시화전을 통해 재주가 있고 없음이 두루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강의실 하나가 방과 후면 화실로 변했다. 거기에는 재학생뿐 아니라 동문 선배도 함께해 이미 등단한 선배 시인을 만난다는 즐거움도 있었다. 나는 언제쯤 등단이라는 절차를 거쳐 시인이 될까, 시인의 자격으로 옛 강의실을 찾아와 시화를 만들 수 있을까, 내 시가 세상에 나가 많은 사람의 가슴을 적실 작품이 되기는 할까. 어느 때보다 축제의 가슴 설렘은 시화전을 준비하는 한 달 남짓 나의 미래와 결부되어 고양되었다. 열정으로 만든 시 한 편 그리고 고요한 기다림 시화전을 오픈하는 날 아침이면 분주했다. 액자에 담긴 완성된 시화를 찾아오고, 공대 건축학과의 협조를 받아 그들이 쓰는 이젤을 빌려오고, 학생회관 앞 공터를 전시장으로 확보해 진열했다. 학과의 교수와 학생이 모여 엄숙히 치르는 테이프 커팅, 축제 동안 시화는 자랑과 부끄러움을 함께 안고 모두에게 선보여졌다. 그리고 고요한 기다림. 전시장은 당번을 정한 순서대로 지키지만 당번이 아니더라도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맴돌기 일쑤였다. 누가 찾아올지, 누군가 내 시를 읽고 한마디 하지 않을지, 정말 누군가 예쁜 꽃이라도 한 송이 시화 끝에 걸어주지나 않을지. 마음에 둔 여자 후배가 “형, 이번 시도 참 좋아요!”라고 말 걸어오면 뭐라고 답할까. 그때 여학생들은 남자 선배를 ‘형’이라 불렀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 기억 속 시화전에는 꽃도, 여자 후배도 없었다. 아주 의례적으로 달아주는 후배의 꽃송이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면 술 마시러 가자고 이끄는 선배가 있을 뿐이었다. 물론 그건 내 시가 결코 못나서가 아니요, 나를 좋아하는 후배가 없어서도 아니었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 학교 안에는 두세 개 문학 동아리가 있어 그들과 묘한 경쟁심이 발동되기도 했다. 같은 시화전을 여는데 적어도 대학 안의 ‘문학 본산’인 국문학과가 뒤처져서야 쓰겠는가. 내가 후배였을 때 선배들은 은근히 그 같은 중압감을 우리에게 주었다. 내가 선배가 된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더욱 열심히 시를 쓰게 했고, 뭔가 더 기발하게 그림을 그리게 한 원동력이었을 터다. 문학이 무슨 경쟁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3학년 마치던 겨울, 나는 운 좋게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시인으로 등단했다. 4학년 축제 때는 그 시를, ‘신춘문예 당선작’이라는 꼬리표와 함께 전시했었다. 후배들 앞에서 어깨 한번 들썩였던 기억이다. 4월의 개나리가 피고 지고, 교정에는 새순 돋는 신록의 나무가 싱그러워질 때쯤이면 강의실이 화실로 변하는 한 달 남짓의 축제 시화전 준비 기간을, 세상의 어떤 일보다 아름다웠던 일로 추억한다. 우리는 그런 신록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축제 기간에 휴강하지 않는다. 엄격해진 학사관리 때문인지, 수업 결손 없는 축제를 열라고 하는 것 같다. 아무래도 좀 어설프다. 밤새 놀이와 술판에 취했던 학생들이 아침이면 강의실로 꾸역꾸역 모여든다. 이 와중에 결석은 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가상하지만 아무래도 정상적인 수업이 될 리 없다. 꼭 이래야 하나 싶다. 내가 유학했던 일본의 게이오慶應 대학은 목요일 저녁부터 일요일까지 축제를 열었다. 월요일은 보수일補修日이다. 그러니까 금요일과 월요일만 휴강하면 되었다. 주말을 끼기 때문에 동문 선배와 지역 주민이 많이 찾아왔다. 자연스럽게 동문 간, 지역사회 간 유대를 도모하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학교를 매개로 모두가 함께 모여 까무러치도록 노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축제의 일탈만큼은 철저히 보장해주는 쪽이 낫지 않을까. 국문학과가 지금도 시화전을 하는지 모르겠다. 초대해주지 않더라도 올해는 슬쩍 한번 찾아가 보고 싶다. 꽃 한 송이도 준비하겠다. 열심히 쓴 시화 한 편에 달아주고, 마침 주인공이 거기 있거든 그 길로 주점에 데려가 술 한잔 사겠다. 에디터 양효선|사진 최재인

2013-03 25

[오피니언]사랑을 팔아, 굼과 추억 그리고 희망을 사다

▲ 김준혁 _ 법학과 08 한양대의 건학이념은 그저 말로 끝나지 않고 교수, 학생, 직원, 동문 등 모든 한양인의 배움과 실천 속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사랑의 실천과 근명, 정직, 겸손, 봉사의 핵심가치를 만들어가는 생생한 한양의 이야기를 지금 만나 보세요. * 본 글은 2010 제10회 사회봉사 체험수기 공모전 - 서울캠퍼스 최우수상 수상작 원문임 ‘나누리’와의 만남 나는 비록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은 아니지만, 그에 못지않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왔다. 그리고 누군가가 지금은 어떠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지금처럼 행복하고 눈물겨운 하루가 있을 수 없다고. 어린 시절 나는 꿈과 패기가 넘치는 소년이었다. 부모님은 철부지 꼬마의 자신감을 존중해주었으며, 나 역시 부모님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마음깊이 존경하였다. 나는 영업부에 근무하셔서 해외에 계셨던 아버지가 멋있어 보여 어린 시절부터 외교관을 꿈꿔왔다. 당시에는 50평의 넓은 집과 강아지가 뛰놀 만큼의 정원이 있을 정도로 경제적으로도 유복했고, 우리 가족들은 모두가 화목하게 지냈다. 그때의 나는 동화 속에 나오는 어린 시절의 행복한 주인공과 별다를 바 없었다. 그러다가 반전을 맞게 된 것은 중학교 때였다. 아버지가 법을 잘 모르셔서 사기를 당했고, 우리 가족들은 원래 살던 집에서 쫓겨나 18평의 임대아파트로 이사를 해야만 했다. 원래 살던 집의 반도 안 되는 평수에 가구도 다 들어가지 않아 피아노나 고가구들은 모두 처분해야 했고, 몇 년 간 키워오던 강아지도 키울 형편이 되지 않으니 다른 집에 보내야만 했다. 한창 사춘기였던 때에, 나는 아버지의 무능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고, 약자를 보호해주지 않는 법을 증오하게 되었다. 왜 법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지 않는가? 정의란 법이 둘러쓰고 있는 가면에 불과한 것인가? 라는 질문에 회의를 가진 나는, 꿈을 외교관에서 법관으로 전향하게 되었다. 이때에 내가 법관이 되겠다는 동기는 법을 알아야겠다는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복수심과 비뚤어진 가치관에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던 나의 생각이 바뀌게 된 것은 고등학교 봉사동아리인 ‘나누리’ 활동을 통해서이다. 처음에는 대학에서 요구하는 필수 봉사시간을 이수하기 위해 시작한 봉사였다. 하지만 나는 봉사활동을 하면서 점차 바뀌어가는 스로에 대해 놀라게 되었다. ‘나누리’는 고아들이나 혹은 이혼이나 한쪽의 사망으로 한 부모 가정이 된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쳐주는 활동을 한다. 나는 이곳에서 내가 가진 것의 고마움을 깨달을 수 있었다. 비록 과거에 비해 지금은 어렵지만, 그래도 나는 부모님이 모두 살아 계시고, 내 팔다리가 모두 멀쩡하며, 더구나 집도 있지 않은가? 이 아이들에 비하면 얼마나 행복한가!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행복은 내 마음속의 파랑새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종종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스스로를 불행의 감옥 속으로 집어넣는다. 항상 위를 바라보고, 스스로 남보다 못하다고,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평생토록 그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스스로가 마음속에 이미 감옥을 만들어두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들을 보며 내가 가진 것의 소중함을 비로소 배울 수 있었다. 나는 딸아이 넷 가진 아빠 많은 아이들이 나를 통해 차츰 웃음을 되찾게 되었다. 양육원은 집에서 한 시간이 넘는 거리였다. 더구나 주말 저녁에는 다른 친구들처럼 놀고 싶은 마음도 가득하다. 하지만 일요일 밤에 아이들의 농담을 떠올리며 기분 좋게 잠드는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다. 묘하게도 행복이란 마치 바이러스와 같아서 작은 기쁨이 큰 기쁨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흐뭇하게 한다. ‘나누리’의 활동이 3년차가 되어갈 즈음, 나는 내가 가진 능력과 재능을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고 사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나와 비슷하게 부모가 법을 잘 몰라서 사기를 당한 아이들도 여럿 있었다. 이것이 아이들과 내가 접점이 많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들이 비슷하지 않았다면 우리들은 서로 마음의 문을 열기가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이때 사람들의 이러한 법률의 무지가 정말 안타깝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만약 법관이 된다면 일정한 영역에서 이러한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할 힘이 생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아이들을 만남으로 법관이 되겠다는 나의 결심의 동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아이들과 나의 동병상련이 사회를 향해 날카롭게 갈아두었던 칼날을 무디게 만들었던 것이다. 5분만 늦어도 애타게 나를 찾는 아이들로 인하여 나는 어느 순간 키라에서 슈바이처가 되어있었다. 한양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도 나는 응봉지역아동센터 사회봉사팀장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3년째 계속하고 있다. 아마도 ‘나누리’에서의 습관이 관성이 붙은 것일 게다. 처음에는 나를 너무 어려워하여 수업할 때 눈도 못 마주치던 아이들이라 사실 수업을 하면서도 굉장히 서먹했다. 이러한 관계를 개선해보고자 아이들과 함께 영화도 보러가고 공연도 보러가고 놀이공원에도 데려갔더니, 이제는 공공장소에서도 나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곤 한다. 아이들은 나에게 많은 이야기들을 한다. 학교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일을 신나게 이야기하기도 하고, 친구와 싸워 속상하다고 수업도중에 펑펑 울기도 하고, 누구 남자친구가 어떠니 저떠니하는 이야기들. 그런데 이야기를 듣다보면 마치 내가 마냥 아빠가 된 기분이다. 이런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했더니, 그 다음부터 사적인 자리에서는 아예 아이들이 나를 아빠라고 부른다. 그래서 나는 나이 스물넷에 딸아이 넷 가진 아빠가 되어 버렸다. 올해 스승의 날에는 아이들에게 정성스런 편지를 받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유치한 포장지에는 아이들다운 귀여움이 물씬 담겨 있었는데, 내용은 그보다 더 감동적이었다. 아이들은 나를 아빠라고 부를 때 정말 아빠가 옆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전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자신들을 위해주는 것에 항상 감사하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특히 내가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고 자기가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까지 선생님과의 인연을 평생 이어가고 싶다는 부분에서는 눈물이 왈칵 나올 뻔 했다. 늘 말썽 많고 장난기가 많은 녀석들이었지만 아이들의 편지로 인해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들 ‘나누리’에서의 고아들과 지역아동센터의 저소득층 아이들은 늘 사랑을 갈구한다. 부모가 없어서 아예 사랑을 받을 기회가 없었거나 혹은 한쪽이 있다고 하여도 밖에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도덕이나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아이들을 위해주려고 노력한다. 어떤 선생님은 내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얘기하곤 하신다. 하지만 나는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을 받은 아이들이 나중에 사랑을 베풀 줄도 알기 때문이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하지마’라는 제재만 받은 아이들은 사회를 삐딱하게 바라보게 되고, 사회에 대한 공격성이 더욱 커지게 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학교생활을 하며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 나는 그 나이의 내 모습을 상상한다. 늘 활기차고 패기가 있던 어린 소년을 떠올린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면 무엇을 하겠냐는 교장 선생님의 질문에 ‘사과나무를 심겠다.’라고 당당히 소리치던 아이를. 전교생 앞에서 신입생 대표로 선서를 하던 똑똑한 우등생을. 절도사건으로 단체기합을 주겠다는 담임선생님께 이것은 부당하다고 소리쳤던 건방진 반장을. 나의 머릿속의 소년을 떠올릴 때면 나는 좌절된 현실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 기분이다. 그래, 그때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왜 지금에 와서 불가능하겠는가? 봉사란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 엄밀히 따지면 나는 ‘봉사’라는 의미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봉사’란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마치 자신을 희생하며 나누어주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영어에서는 봉사를 하는 사람(volunteer)은 있어도 봉사를 받는 사람을 의미하는 단어는 없다. 참된 의미에서 봉사란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봉사라는 단어보다 나눔이라는 단어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랑을 팔아, 아이들에게서 꿈과 추억 그리고 희망을 산다. 내가 아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은 내가 가진 경험과 지식 그리고 사랑밖에 없다. 하지만 아이들은 나에게 의미 있는 꿈을 되찾아 주었고, 그 꿈이 실현시킬 수 있도록 늘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시켜준다. 아이들은 나를 통해 아빠를 보고, 나는 아이들을 통해 내 존재의 가치를 느낀다. 우리들은 서로에게 희망이 되는 셈이다. 나는 비록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은 아니지만, 그에 못지않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왔다. 그리고 누군가가 지금은 어떠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지금처럼 행복하고 눈물겨운 하루가 있을 수 없다고.

2013-03 20

[오피니언]그 시절의 '쪽지통신' 지금의 너는 상상할 수 있니?

가끔 상상한다. 그때 그 시절, 지금처럼 휴대전화나 아니 적어도 삐삐라도 있었다면 우린 어떻게 되었을까. 마음만 먹으면 어디서나, 누구와도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지금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그 시절의 이야기. 쉽게 닿지 않아 그만큼 애달팠지만 그 누가 부정하랴. 도서관 게시판에 빼곡하게 붙어 있던 수많은 쪽지가 만들어낸 공간들이 꼭 그만큼의 낭만이 되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음을. 대학 2학년 시절 맞이한 봄은 유독 바람의 서슬이 아파서 늘 웅크리고 다녔다. 3월 말이 되어서야 내 여자친구는 “이제야 봄이 왔네. 내일 토요일인데 우리 대공원에 놀러 가자!”고 말했다. 우리는 오전 11시에 한양대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모처럼 나도 봄풀과 봄 나무들이랑 한 타령으로 몸을 흔들어대며 다소 들뜬 마음으로 걸을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전동차가 한양대역에 정차하지 않고 지나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역사에서 화재가 발생했다고 한다. ▲ 1970년대 한양대 중앙도서관의 전경. 수많은 젊은이의 꿈과 사랑 그리고 미래가 공존했던 추억의 장소다. 문자로도 전화로도 쉬이 닿을 수 없던 시절 휴대전화 같은 것은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이럴 때 무전기라도 있으면 그녀에게 연락을 할 텐데’ 하는 생각으로 발만 동동 굴렀다. 건대 입구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한양대역 근처로 돌아왔다. 10여 대의 소방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으나 소방 호스도 제대로 겨냥하지 않고 있는 걸로 보아 화재가 심각하지 않음을 짐작케 했다. 곧 소방차들이 하나둘씩 철수했고 역사로 사람들이 들어섰다. 하지만 그녀는 없었다. 이미 약속 시간은 2시간이 지난 상태였다. 나는 그렇게 역사에서 다시 1시간을 묵히다가 문득 학교 도서관을 떠올렸다. 평소 도서관의 작은 게시판을 통신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문득 그녀가 보고 싶다거나 갑자기 일이 생겨 집에 가야 한다거나 하면, ‘인진아, 나 시골에서 어머니가 오셔서 급하게 집에 가야 해. 미안. 내일 3시에 여기서 보자.’ 그렇게 쪽지에다 적어 게시판에 꽂아두었다. 내 쪽지를 본 그녀는 ‘어머니가 맛있는 거 해주겠네. 낼 보자’ 하는 답글을 내 글 위에다 꽂아두었다. 그 생각이 나자 빛의 속도로 도서관을 향해 뛰었다. 숨을 헐떡거리면서 게시판을 뒤졌으나 그녀가 남긴 쪽지는 없었다. ‘인진아, 나 도서관 4층에 있어. 그리로 와.’ 일부러 눈에 잘 띄도록 붓펜으로 쓴 쪽지를 붙여놓고 도서관 4층에서 기다렸다. 1시간쯤 기다렸을까. 과 친구가 “야, 너 토요일에도 나와서 공부하네. 당구나 치러가자” 하고 거의 강제로 손을 잡아끌었다. 당구가 끝나자 6시가 넘어버렸지만 나는 다시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게시판에 그녀의 쪽지가 보였다. ‘시우야, 4층 가봤더니 없네. 나, 카페 꽃다에 있을게. 4시 2분.’ 빛의 속도로 언덕길을 뛰어서 내려갔다. 일이 꼬이려고 그랬는지 카페 문 앞에는 ‘금일은 쉽니다’라는 푯말이 붙어 있었다. 돌아서려다가 푯말 아래에 붙은 작은 쪽지가 보였다. ‘시우야, 카페 이솝으로 와.’ 나는 다시 빛의 속도로 달렸다. 하지만 아무리 카페 안을 뒤져도 그녀는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도서관으로 갔다. 인진이가 남긴 쪽지는 없었다. ‘인진아, 나 간다. 저녁 7시 15분.’ 그러고 보니 종일 굶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는 고파도 밥은 먹고 싶지 않았다. ▲ 현재 한양대의 지성들이 모이는 백남학술정보관. 깔끔하게 정돈된 서가를 비롯해 최첨단 시설과 휴식 공간을 갖춘 학교 도서관이다. 여백 없는 단순함이 때론 필요할 테지 월요일에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너 그제 무지무지 배고팠지? 나도 그랬어” 하고 입을 열었다. “그래도 무척 좋았어. 비록 옆에 있지는 않았지만 만나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얼마 나 많이 뛰어다녔니? 상상만 해도 즐겁고 웃음이 나와. 꼭 옆에 붙어 있어야만 데이트하는 거 아니잖아? 나한테는 그런 시간들이, 그런 네 눈빛이 더없이 소중하고 고마워. 재밌다! 일부러 하려고 해도 못 하잖아!” 하고 웃었다. 그제야 나도 웃을 수 있었다. 올해 대학에 가는 딸에게 최신형 스마트폰을 사주고 저녁을 먹으면서 그런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가만히 듣고 있던 딸이 그 여친과는 왜 헤어졌냐고 물었다. “3학년 때 그놈이 갑자기 휴학해버렸어. 한마디 의논도 없이. 그게 화가 나서 잠시 헤어져 있자고 한 게…. 하지만 보고 싶을 때가 있었어. 그런데 그때마다 연락이 안 됐어. 그놈이 시골 할머니 댁에 가 있어서. 그때 휴대전화만 있었어도…. 그래, 비록 휴대전화는 옛날 쪽지만큼 여백은 없어도 나름대로 좋은 점도 있더라. 그래서 아빠는 다시 대학 가면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면서 연애 한번 하고 싶어. 가끔은 단순하면서도 빠르고 여백이 없이 사는 너희가 2 부러울 때도 있거든. 그냥….” 글 이상권(아동문학가, 국어국문학과 84학번)|에디터 최미현|사진 홍보팀

2013-03 20

[오피니언]우리 시대 43인의 시인에 대한 헌사(獻詞)

▲ 글_이재복문학평론가한양대 한국언어문학과 교수1996년 등단 이후, 제9회 고석규 비평문학상, 제5회 젊은 평론가상, 제7회 애지 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몸>, <비만한 이성>, <우리 시대 43인의 시인에 대한 헌사>, <한국 현대시의 미와 숭고> 등 다수의 저서를 발표했다. 다소 빛바랜 책이 한 권 내 앞에 놓여 있다. <현대시학> 1998년 11월호다. 두 번째 장을 넘기면 왼쪽 맨 윗자리로 ‘내가 읽은 이달의 작품’이라는 자주색 글씨가 눈에 띈다. 지난 달 발표된 시 중에서 한 편을 선정해서 원고지 20~30매 정도로 쓰는 <현대시학>의 고정란이다. 나의 시 비평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때 내가 선정한 첫 작품이 김혜순의 <문신(文身)>이었고, 첫 시 비평이 ‘몸 혹은 존재의 견고함’이었다. 지금 읽어보면 부끄러움이 앞서는 아주 촌스러운 글이다. 마치 우연한 기회에 한 건 잡은 촌놈이 나름대로 폼을 잡고는 있지만 세련되고 은밀하게 숨기는 법을 몰라 그 욕망을 줄줄 흘리고 다닌다거나 낯설고 물 설은 세계에 잔뜩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처럼 촌스러운 그 글이 내 시 비평의 첫 문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이 글이 기반이 되어 나는 시 비평가로서 이름을 알리고 그 나름의 입지를 마련하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시 비평을 하게 되면서 더 많은 시를 읽고 쓰고 하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시인들과 직접 만나는 일이 빈번하게 되었다. 이들과의 만남은 청탁을 불문했다. 어느 때 어느 곳을 가도 시인 한 두 명쯤은 늘 만나게 되었다. 이들과 인사동이나 혜화동 아니면 신촌의 어느 집에서 만나 나눈 말과 마신 술과 부른 노래 등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가족보다도 내 인생의 30〜40대를 이들과 함께 한 시간이 많았다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나는 이들에게 참으로 많은 상처를 받기도 했고 또 상처를 주기도 했다. 때때로 이들은 가망 없는 희망을 꿈꾸는 이상주의자 같기도 했고, 절해고도인 소도(蘇塗)의 나라에서 세상과의 불통을 즐기는 은둔주의자 같기도 했고, 온갖 자학과 피학 그리고 자기연민과 자기애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위중한 에고이스트 같기도 했다. 나는 이들의 이러한 태도가 무척이나 흥미로웠고 또 가여워보였다. 이 냉정하고 음험한 세상과는 전혀 맞지 않는 정신 구조와 행동 양태를 보이는 이들을 주시하면서 나는 이들과의 차이에서 오는 어떤 안도감 같을 것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이 차이가 내 속에서 묘한 우월감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 우월감은 차츰 이 가여운 존재들에게서 어떤 이상한 혹은 견고한 힘 같은 것을 느끼게 되면서 산산이 부서지게 되었다. 내가 이들에게서 느꼈던 힘은 오래전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읽었을 때 느꼈던 이상한 전율 같은 것이었다. 이 시에서 내가 특히 이상한 전율을 느낀 곳은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라는 대목이다. 시인은 산골로 가는 것에 대해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세상을 버리는 것이라고 당당히 말하고 있다. 이 말은 단순히 세상이 더럽기 때문에 버린다는 의미가 아니다. 시인은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린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세상의 어떤 구속과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절대적인 자유 의지와 그 경지를 표상하고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이곳에서 신생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응앙응앙 우는 흰 당나귀의 울음’은 그 신생을 알리는 신성한 소리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만난 시인들은 백석이 그러했듯이 이미 흰 당나귀가 응앙응앙 우는 세계 속에서 신생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것을 뒤늦게 깨달았고, 운 좋게도 때때로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하’는 시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적어도 이제 나는 이들이 신산한 내 삶의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내 안에 자리하고 있는 이들의 존재는 너무 크고 높기 때문에 언제나 숭고의 대상이다. 이들은 내 속에서 고조곤히 와 이야기하지만 그 목소리는 강렬한 기운으로 나를 늘 긴장하게 하고 또 엄청난 매혹으로 나를 사로잡는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들이 왜 세상을 구원할 선지자로 불리게 되는지를 이해하게 되고, 기꺼이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린다’는 이들의 목소리에 이끌리게 된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림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그것을 이룰 수 있다는 이 지독한 역설을 온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적어도 이들의 말이 지니고 있는 진정성만큼은 이해한다. 이들이 갈망하고 또 이들이 이루려는 세상에 기꺼이 발을 들이고 싶어서 나는 오늘도 시인들을 만나고 또 이들의 시를 읽는다. 1998년 겨울 이후 지금까지 내가 만나고 읽은 시인과 시는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나는 이 만남을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만남 중의 하나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이 무수한 만남 중에서 오늘 여기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내 놓은 ‘우리 시대 43인의 시인과 시’는 그 중에서도 각별한 것들이다. 나는 이들과 이들의 시로부터 과분할 정도의 따뜻한 위안과 세상의 이면을 드려다 볼 많은 기회와 내 삶의 먼 곳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그것을 이루고 싶은 진정한 용기와 열정을 배웠다. 나는 이들과 이들의 시를 위해 미력하지만 내 마음을 가득 담아 43인의 시인과 이들의 시에 대한 헌사의 글을 올린다. 앞으로 이 헌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들과 이들의 시에 대한 만남이 이어지는 한 계속될 것이다. 바라건대 새해에는 더 많은 시인들의 응앙응앙 우는 소리를 듣고 싶다.

2013-03 20

[오피니언]이슬람과 한국문화 1500년의 문화교류

▲ 글_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서울캠퍼스 박물관장 터키 국립이스탄불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고, 중동-이슬람문화권을 연구하는 문화인류학자. 현재 한국이슬람학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이슬람>, <80일간의 세계문화기행> 등이 있다. 우리 민족은 고대부터 노마드(nomad, 유목민) 인자와 글로벌 DNA를 갖고 있었다. 동서를 관통하는 실크로드가 열린 이후 한반도는 세상의 첨단과 과학, 기술을 온몸으로 호흡하는 공간이었고, 우리 민족은 나와 다른 생각, 다른 가치를 받아들여 자기화하는 탁월한 예지력과 역량을 갖고 있었다. 이제는 신라와 관계를 맺었던 세계역사라는 큰 흐름 속에서 한국역사를 재조명하고 의미있는 재해석을 시도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고 시급하다. 신라와 아랍-서아시아라는 1만km가 넘는 지리적 공백 때문에 한국학자들 일부가 두 문화권의 접촉사실에 의문을 표시해 왔지만, 세계해상교역을 주름잡던 무슬림들이 이미 8세기 이후 중국 동남부 해안도시에 대규모로 거주하면서 신라시장을 관리하고 공략해 왔다는 사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17명의 아랍학자가 기술한 20여 권의 각종 학술서에서도 신라에 관한 재미있는 기록은 물론, 무슬림들이 신라로 진출해 정착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한반도로 물품이 몰려오고 인적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문화적 접촉이 잦은 소통 채널은 이미 기원전·후부터 뚫려있는 실크로드라는 문명의 젖줄이었다. 7세기 이전까지는 아직 인도양을 가로지르는 원거리 항해술과 그에 적합한 선박의 건조가 따라주지 못했기 때문에 부분적인 근해 해상 교역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안전한 육상실크로드가 이용되었다. 육상 실크로드는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한 축으로 하고 다른 한 축으로는 중국의 서안(西安)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 수많은 지로와 간선도로가 있어 실핏줄처럼 교역망이 연결되었다. 간선도로를 따라 콘스탄티노플에서 출발한 대상과 교역 물품들은 통상 10개월의 시차를 두고 신라사회까지 전달될 수 있었다. 아시아의 동에서 서까지, 유행의 전파속도가 1년 미만이었다면 당시 신라 상층부는 지구촌과 거의 동시 패션 시대를 살았다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 터키 카파토키아의 본죽 트리. 파란 부적은 악귀로부터 보호하는 이슬람 민간 신앙의 표시이다. 이러한 접촉과 교류는 5세기경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무엇보다 페르시아산 유리, 카펫의 사용, 장신구와 페르시아풍 금속공예와 황금보검, 서역인 토용과 괘릉의 무인석상 등을 들 수 있다. 그 외 서아시아와의 교류를 짐작하게 하는 석조물로는 감은사 부도 사천왕상의 사자두상을 들 수 있다. 통일신라 시대인 7세기의 유물인 사자두상은 헤라클레스의 사자두상과 비교될 수 있는데 실크로드를 통한 문화교류의 결과로 보인다. 또한 경주박물관에 있는 통일신라 시대 입수쌍조문(立樹雙鳥文) 석조유물과 황룡사 목탑지 사리공에서 발견된 화수대금문금구(花樹對禽文金具)도 실크로드 교류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의미 있는 유물이다. 나무를 가운데 두고 좌우에 두 마리의 새를 대칭 시킨 후 둥근 테두리를 연꽃 장식으로 조각한 유물들이다. 이러한 모티프와 조각 기법은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에 속하는 전형적인 양식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650년경 이슬람 세력에 의해 사산조 페르시아가 멸망하자 왕자를 포함한 많은 정치적 망명자들이 신라에 피신한 사실도 밝혀졌다. 페르시아 왕자 일행이 해로로 신라에 정치적 망명을 해오면서 신라 공주와 결혼하고 신라사회에 관한 방대한 정보를 남긴 <쿠쉬나메>라는 고대 페르시아 구전 서사시가 발굴되어 학계를 깜짝 놀라게 하고 있다. 현재 8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필사본은 영국 박물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란학자들과 공동연구를 통해 곧 세상에 알려질 예정이다. 500페이지에 달하는 신라관련 내용이 제대로 번역-재해석이 이루어진다면 우리 한국 고대사의 지평을 획기적으로 넓힐 소중한 자료가 될 전망이다. 이슬람 전후 시기에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를 관통하는 서아시아와 한반도 간의 교역과 문화교류의 발전은 주로 국제도시 장안을 중심으로 한 중국과의 간접 접촉이 주를 이룬다. 또한 해로를 통해 신라로 직접 내왕하는 때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처용의 등장이다. 처용은 이슬람권에서 신라로 온 실존적 인물이다. 그 시기는 황소의 난과 연관이 있다. 황소의 난은 유럽에서의 게르만 민족 대이동에 버금가는 엄청난 인구이동의 소용돌이였다. 처용 일행은 중국 동남부 해안에 오래전부터 거주해 왔던 상인-관료출신으로 이 난을 피해 신라로 망명한 집단일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실크로드 교역과 문화적 접촉의 종착역은 한반도였다. 조선 초기까지도 한반도는 바깥문명에 열려있었고 외부 문물을 받아들여 자기화하는 비교적 단단한 자기 용광로를 갖고 있었다. 문화는 섞일수록 풍성해지고 발전한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묵묵히 개척하면서 새로운 파이어니어로서 우뚝 선 한양인들에게 이 책은 우리의 글로벌 정신과 문화민족의 저력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촉매제가 될 것이라 믿는다.

2013-03 20

[오피니언]우리는 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가?

▲ 글_김정기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한양대 신문학과 졸. 뉴욕주립대 커뮤니케이션 석사, 켄트주립대 커뮤니케이션 박사 학위취득했다. 기획조정처부처장, 언론정보대학장, 언론중재위원, <커뮤니케이션이론> 편집장, 한국언론학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언론정보대학원장, 창의성과 인터랙션연구소장, 방송통신위원회 미디어다양성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 중이다. 지난 5월에 필자는 <나를 좋아하게 하는 커뮤니케이션! 호감을 얻는 소통의 지혜>라는 대중서를 펴냈다. ‘나는 커뮤니케이션 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이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소통의 가치와 사람들 간의 관계가 지니는 가치에 대해 높아진 사람들의 인식에 동참하고 싶어서였다. 아전인수의 주장이 난무하는 미디어만 있고 사람은 없는 커뮤니케이션은 즐거운 공동체 형성과는 거리가 먼 공허한 허울이라는 자각에 대한 반성이기도 했다. 행복하려면 돈과 권력보다 자신의 정체성에 충실하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아야 하며, 자기존재감과 인간관계의 형성, 유지, 발전, 해체의 핵심은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지혜로의 귀의였다.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 정호승의 ‘수선화에게’ 우리는 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가?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묻는 이 질문에 선뜻 뾰족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왜 말을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거나 궁금해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에 공감한다면 외로움을 느끼고 있고, 애인이나 친구에게 말을 건네고 함께 있고 싶은 거다. ‘산 그림자도 마을로 내려오듯이’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지듯이’ 말과 이야기로 누군가에게 퍼져가고 싶음이다. 외로움을 달랠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한 것이다. “…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 쪽에 가두어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 나온다. 우리는 분수가 터지고 밝은 햇빛 아래 뭇 꽃이 피고 영웅과 신들의 동상으로 치장된 광장에서 바다처럼 우람찬 합창에 한몫 끼기를 원하며 그와 똑같은 진실로 개인의 일기장과 저녁에 벗어놓은 채 새벽에 잊고 간 애인의 장갑이 얹힌 침대에 걸터앉아서 광장을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을 원한다…” (최인훈의 <광장>, 1961년판 서문) 사람은 밀실과 광장을 왕래하는 존재라는 이 서문은 커뮤니케이션하는 이유를 또 다른 측면에서 보여준다. 자신만의 공간인 밀실에서 인간은 누구의 간섭도 없이 자아를 위로하고 자유와 꿈을 가꾼다. 자아와 자유와 꿈이 팽창할수록 인간은 밀실의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궁금해진다. 수군거리는 광장의 이야기에 합세하려고 한다. 밀실에서 가꾼 자아는 자기표현을 통해 타인과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광장의 이야기, 세상의 이야기가 된다. 커뮤니케이션은 밀실에서 가꾼 도도한 개인성을 사회적 동물로서 광장의 타인들과 어울리게 한다. 밀실과 광장을 융합하는 징검다리다. 우리가 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가에 대한 답은 하나일 수 없다. 천차만별이다. 그렇지만 커뮤니케이션 행위가 인간의 인식욕구(Need to know)와 공시욕구(need to inform)에 뿌리를 두고 있는 건 사실일 것이다. 인식욕구가 자신의 외부세계, 즉 다른 인간들과 세상에 대하여 알고 싶어 한다면, 공시욕구는 자신의 내부세계를 외부세계의 타인들에게 알리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욕구충족의 수단으로 커뮤니케이션을 보는 것은 오래된 견해이다. 커뮤니케이션을 제대로 한다면 욕구를 해소하면서 인간사회가 카오스(혼란)가 아닌 코스모스(조화)의 세계로 이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말하고 남의 말을 듣고 대화하고 토론하는 커뮤니케이션은 오래전부터 교육의 핵심 대상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체험하고 있듯이 말은 코스모스만이 아니라 카오스의 원인이기도 하다. 좋은 커뮤니케이션을 찾아가야 할 이유이다. 타인과 고도의 지적인 행위로 교류하는 인간 세계에 수학 공식 같은 처방전은 불가능하다. 중요한 점은 설명, 주장, 설득의 머리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고 배려, 공감, 감동이 있는 소통의 커뮤니케이션이다. 머리와 가슴이 서로 동행하고 마침내 일치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 걸리는 여행은 머리에서 출발하여 가슴으로 오는 여행이라는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이리라. 어떻게 하면 머리와 가슴의 거리를 줄이고 또 줄여갈 수 있을까? 갈 길은 멀고 서산에 해는 기울고 있지만 그 거리를 줄이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지혜를 찾아 헤매려고 한다. 이 책은 인간은 공유하는 만큼 이해하고 존재하는 커뮤니케이션의 동물, 호모 커뮤니쿠스(Homo Communicus)라는 점을 대변하는 11개 핵심 커뮤니케이션 개념과 사례를 필자가 선택하여 구성했다.

2013-03 20

[오피니언]한양캠퍼스 곳곳에서 희망을 만드는 직원들

▲ 글_김은정총무처 인사팀 계장 뜨거운 여름의 열기가 성큼 다가온 6월의 어느 토요일, 오전 10시를 넘긴 시간. 수원의 한 연수원에는 서울캠퍼스와 ERICA캠퍼스에서 모여든 일곱 명의 직원들이 때로는 열띤 토론을 하고, 때로는 무거운 표정으로 노트북 화면만을 응시하기도 하는 등 그렇게 스무 시간째 무언가를 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 한양대학교 직원 선발, 육성, 배치, 교육 등 인사시스템의 전반에 관한 지난 3년간의 발자취를 담아내는 동시에, 향후 한양대학교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과 목표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현재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고 있다. 지난 3년간 우리 대학이 시행했던 제반 제도들과 교육 프로그램들에 관한 자료를 하나도 빠짐없이 모으면서 때로는 반성의 의견도, 때로는 즐거웠던 순간을 회상하며 보고서 작업의 열기를 한층 더해갔다. 이러기를 다섯 차례. 이들은 주말이건 업무가 끝난 저녁시간이건 업무 시작 전 이른 아침이건 아랑곳하지 않고 보고서에 담을 내용에 대한 고민과 ‘3회 연속 인증’이라는 한양의 이름을 드높이고자 하는 공동의 목표를 생각하며 가슴 두근거렸던 것 같다. 바로 이들은 ‘2012년도 공공기관 인재개발 우수기관 인증제(Best HRD)’(이하 Best HRD) 3회 연속 인증을 받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Best HRD는 2006년부터 교육과학기술부와 행정안전부가 공동주관으로 매년 민간과 공공부문에 대하여 실시하고 있는데 한 번 인증을 획득하면 3년 뒤 재인증 심사를 받도록 하는 인적자원개발에 관한 인증 프로그램이다. 본교는 2006년 공공기관 중 4년제 대학으로는 첫 인증을 취득했고, 3년 뒤인 2009년에도 인증획득에 성공했으며 올해 3회차 인증을 받기 위한 준비를 하는 과정에 있다. 참고로 8월 20일 현장심사를 마쳤으며, 10월 중순 최종 점수와 함께 인증여부가 발표될 예정이다. 이 인증은 각 기관에 큰 지원금을 주는 것도 아니고 제도적인 혜택을 주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 직원들은 6월부터 지금까지 왜 이런 노력을 경주하고 있을까? 각 기관의 전략과 인적자원에 대한 정책에 대하여 글로벌 기준은 물론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도록 최적화된 기준들을 가지고 있기에 이 인증을 취득한다는 것은 우리 한양대학교의 현 위치를 객관적으로 평가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 대학은 ‘New Hanyang 2020’이라는 비전 하에 ‘LION RULE’ 전략을 실행하는데 있어 경영진뿐 아니라 교수, 직원 등 모든 구성원들이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는데, 특히 전략방향 중Management Plan 영역인 ‘책임경영 강화, 행정역량 향상, 성과주의 강화, 핵심자산 구축’이 직원 역량에 관한 부분과 연결되기 때문에 이번 Best HRD는 어느 때보다도 우리를 객관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사실 대학이라는 틀을 놓고 보면 직원은 그리 눈에 띄는 위치는 아니다. 흔히 대학의 3주체로 교수, 학생, 직원을 이야기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대학 직원은 그저 형식적인 일을 하는 단순 관리자로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 직원은 그 어느 누구보다 대학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고,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일들을 처리하고 있다. 그러기에 직원들이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고, 대학에 대한 이해를 돕도록 하는 직원 교육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결국 Best HRD 인증은 단순 인증이 아니라 대학 발전의 밑거름이 되는 직원으로 성장하는 환경에 대한 검증의 과정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그동안 끊임없이 변화하고 치열해지는 교육환경 속에서 우리 대학에 가해지는 수많은 요구들에 행동으로 응답하는 직원들이 존재하게 되고, 수많은 어려움을 헤쳐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최근 2012학년도 하반기 신입직원 선발에 1,700여 명의 우수한 인재들이 지원을 했는데, 이 지원자의 수는 지속적인 증가추이를 보이고 있다. 경쟁률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대학 행정을 하려는 사람이 많은 만큼 한양인으로서의 마인드를 갖춘 진짜 인재를 선발하는 것은 점점 더 쉽지 않은 과정이 되고 있다. 결국은 사람이다. 대학은 우수한 인재를 입학시켜 사회에 어엿한 일꾼으로 성장시키는 교육기관이기도 하지만 교육 환경의 뼈대를 견고하게 구축할 최적의 직원 인프라를 구축해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탁월함으로 한양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노력해온 선배 직원들 그리고 새롭게 맞이할 보석 같은 신입직원들이 함께 성장하고, 이 성장이 바로 우리 한양다움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바로 거기에 한양 비전 달성은 물론 내적, 외적 성장의 비전이 있다.

2013-03 20

[오피니언]조용한 봄과 시끄러운 여름을 넘어 풍성한 가을로

글_이상욱 한양대학교 철학과 교수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양자적 혼돈현상에 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후 런던대학교에서 자연현상을 모형을 통해 이해하려는 작업연구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고, 2001년 로버트 맥켄지 상을 수상했다. 런던 정경대학 철학과 객원교수로 활동하다 현재 한양대학교 철학과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함께 지은 책으로 〈과학으로 생각한다〉, 〈과학기술의 철학적 이해〉등이 있다. 카슨은 봄이 왔는데도 새가 울지 않는(그래서 ‘조용한’) 가상 상황에 대한 서정적 묘사로 책을 시작한다. 그 이후 내용은 어떻게 이런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치밀한 분석이다. 카슨은 수많은 실증적 자료에 입각한 과학적 분석을 통해 합성물질의 과다사용의 문제점과 환경보존의 필요성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한다. 봄이 조용해진 이유는 새의 알껍질이 얇아져서 어린 새가 부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알껍질이 얇아진 이유는 어미새의 몸에 축적된 DDT와 같은 살충제 때문이다. 살충제를 뿌린 사람들은 특별히 ‘조용한’ 봄을 원했던 것이 아니다. 살충제는 당연히 해충을 박멸하려고 살포되었다. 하지만 살충제는 ‘의도되지 않았던’ 여러 부작용을 가져왔다. 그 부작용의 끔찍함을 카슨은 ‘조용한 봄’으로 상징화한 것이다. <조용한 봄>은 환경운동 분야에서 소로의 <월든>이나 레오폴드의 <모래군의 열두달>과 함께 고전으로 평가된다. 소로와 레오폴드의 책도 환경운동이나 생태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카슨의 책처럼 세계를 바꾸지는 못했다. 카슨의 책이 출간된 후 케네디 대통령은 과학자문위원회에 살충제 사용실태에 대한 조사를 주문했고 자문위원회는 카슨의 입장을 옹호하는 취지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책의 대중적 인기와 영향력은 CBS 방송국이 몇몇 광고주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조용한 봄>의 내용에 기반한 다큐멘터리를 제작·방영하면서 더욱 높아졌다. 결국 농무부, 화학 회사 등의 조직적 방해에도 불구하고, 1964년 <야생보호법>, 1969년 <환경정책법>이 미의회를 통과했고 화학물질의 사용을 규제하는 여러 법률 제정으로 이어졌다. 일부 논자들은 카슨의 <침묵의 봄>이 현대 과학의 근본적 문제를 지적하며 자연의 경이를 재발견할 것을 주창했다고 파악한다. 카슨을 유기농의 시조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카슨의 생각이나 책 내용 어느 것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평생 과학과 글쓰기를 함께 사랑하며 이 둘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를 고민했던 카슨은 자신이 과학적 분석을 통해서만 알아낼 수 있었던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다. 자연에 대한 글쓰기에 있어서도 지나친 의인화를 삼가고 관련 과학 전문가가 읽어도 사실적으로 틀린 부분을 찾아내지 못할 만큼 ‘정확하게’ 내용을 전달하려 애썼다. 카슨이 기존 환원적 과학 연구의 문제점을 알아낸 것도 환원적 연구를 통해서였다. 카슨은 실험실에서 특정 인과 관계만을 고립시켜 탐구한 후 그 결과가 복잡한 인과 관계가 얽혀 있는 생태계에서도 여전히 타당하리라 기대하는 과학계의 관행을 비판했다. 이 비판 역시 시적 상상력이 아니라 과학 연구에서 나왔다. 일반 시민을 위한 자신의 책에 카슨이 구태여 유기화합물의 구조식을 포함시킨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카슨은 왜 합성살충제가 예기치 않은 부작용을 가져오는지의 과학적 메커니즘을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카슨은 어떤 의미에서도 반과학적 환경 운동가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특유의 세심한 관찰력, 핵심적 자료에 접근할 수 있었던 정부과학자로서의 기회, 다양한 과학적 결과로부터 패턴을 읽어낼 줄 아는 통찰력, 과학 내용을 대중에게 쉽고 호소력 있게 풀어낼 수 있는 빼어난 글솜씨,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대중에게 알리려는 사명감을 고루 갖춘 행동하는 과학 지식인이었다. 화학물질 사용에 대한 카슨의 견해 중 일부, 특히 살충제의 암 유발 가능성 등은 출간 당시 입수 가능한 증거에 의해 의심의 여지없이 확증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카슨 견해의 대부분은 후속 연구를 통해 옳다는 점이 밝혀졌지만, 당시에는 <조용한 봄>이 ‘시끄러운 여름’을 가져왔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올해는 <조용한 봄>이 출간된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는 카슨의 책을 통해 과학 연구와 그것의 응용이 보다 조심스럽게 이루어져야 함을 배웠고 결국 ‘조용한 봄’을 새가 지저귀는 ‘즐거운 봄’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카슨의 책이 불러일으킨 ‘시끄러운 여름’은 카슨이 촉구했던 합성 화학물질에 대한 더 많은 과학 연구와 대안적 살충방법의 모색을 통해 ‘풍성한 가을’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진정으로 가치로운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보다 깊이 성찰하고 그것이 가져올 사회적 영향에 대해 면밀히 따져보며 그러한 생각의 결과를 생태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더 많은 과학지식과 결합해야 할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융복합 연구에 해당되는 이러한 작업에 <과학기술의 철학적 이해> 및 관련 교과목을 통해 잘 훈련된 한양대학교 학생들이 큰 기여를 하게 되기를 바란다. *이 글의 내용은 필자가 2012년 5월 21일자 〈경향신문〉 ‘과학 오디세이’란에 기고한 글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2013-03 20

[오피니언]모두 다 다른 태양 아래서 살아가야 한다

글_김명지 재학생 정치외교학·10 한대신문 편집장 어린 시절 나의 스케치북 속엔 샛노란 태양이 비치는 심심한 풍경이 있었다. 노란 빛의 햇살은 내가 눈으로 직접 보고 경험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태양이 노랗다는 사실을 의심해본 적 없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당시 아이들 중 대다수는 태양을 붉은색으로 그려 넣었다. 그들은 태양의 개념에 왜 그런 ‘보이지 않는’ 색깔을 대입하게 됐을까. 자신이 눈으로 본 노란 빛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을까. 대체 누가 그들에게 ‘태양은 붉은 것’이라고 일러줬을까. 나는 이 노란색 태양, 빨간색 태양의 기억을 곱씹으며 이것이 결국 개인의 세계관이 타의에 의해 어그러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생각했다. 수동적인, 나아가 무기력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세계관의 모습은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왔던 세태인 것이다. 나는 가끔 인생에서 정말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몇 개나 될까 짚어본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대부분의 물건들은 시장의 요구에 맞춘 공급자의 기성품이다. 내 것임에도 내가 스스로 만들 수 없는 사회, 어느 작가는 이것을 두고 ‘레디메이드 인생’이라고도 했다. 소설 속에서 스스로 세계를 만들 기회를 빼앗긴 룸펜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는데, 우리는 이 소설을 과거 또는 나와는 상관없는 인생 이야기로만 치부할 수 없을 것이다. ‘레디메이드’된 모든 것들에 의해 무기력하게 굴러가는 인생은 지금도 차고 넘친다. 이 무기력함은 가장 내 것일 것만 같은 영역인 ‘이름’의 문제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된다. “당신은 누구십니까”하는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이름을 소개하며 답변을 시작한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부르고자 할 때 내 이름을 말할 것이다. 이처럼 이름은 그 어느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을 나만의 것이다. 그러나 이 이름 역시 가장 나의 것이라 할만하면서도 완전히 타의에 의해 결정되고 마는 아이러니를 안고 있다. 부모님, 조부모님, 혹은 철학원에 이르기까지, 방법은 다양하다.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곧 나를 나타내는 단어조차 내 마음대로 정할 수 없게 태어난 타고난 무기력함이 느껴지는 부분이다.이러한 ‘선천적인’ 우울함 속에서 출발하는 인생은 너무나 수동적이다. 정해진 매뉴얼대로 사는 레디메이드 인생, 나는 문득 이 청춘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뒤이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부끄러운 얘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학내 학보사 기자로 일하면서, 또 앞으로도 이러한 업을 추구하면서도 나는 좀처럼 책을 읽기가 힘들다. 기사 관련, 전공과목 관련, 과제 관련 도서를 제외하고 대학에 진학해 스스로 골라 읽은 책이 몇 권이나 있는지 세어보자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며 자괴감을 전하면 많은 사람들이 내게 경고하듯 말하곤 했다. “그러다 후회할 거다.” 분명 책을 읽는 것은 나의 내적 성장에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책을 읽지 않거나 공부에 ‘매진’하지 않거나 하는 일 등이 향후 좀 더 성숙한 성인으로서의 나에게 오점이 될 수 있으리란 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나태, 그리고 거기에 자동으로 따라붙는 자기 위안이 심화되는 20대 초반의 삶에 책 읽기나 공부하기 따위의 고전적인 패러다임이 더 이상 어떤 변화의 힘을 줄 수 있을까. 우리는 그와 같은 일들을 오래전부터 강조 받아왔다. 이것이 너를 성숙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그러니 이 길을 따라 네 삶의 방향을 생각해보라고. 그러나 이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내 세계관을 만들 때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는 내게 누군가 그 방법을 물을 수 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좋겠다는 건데?” 그러나 그 방법을 누군가 제시해줘선 안된다. 남이 제시해준 가이드라인을 따라가는 나태함이 반복되는 모습이야말로 내가 지금껏 설명했던 모든 문제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학생기자로서 경험한 세계관에 따라 밖에 나가고, 걷고, 그러다 뛰고, 또 결국엔 다시 생각해보기를 권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와 반대로 방안에서 은둔하는 삶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그런 모습 또한 누군가에게는 분명 멋진 삶을 살게 해줄 잠재적 힘이 되리라.정답은 없다. 각자의 삶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신의 그림에 자신이 판단한 색깔을 넣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초록색 태양이든, 파란색 태양이든 상관없다. 누가 일괄적으로 정해주듯 모두가 같은 색깔만 아니면 될 것 같다. 모두 똑같은 붉은 태양보다는 노란색 태양, 초록색 태양, 파란색 태양 아래에서 사는 것이 나는 더 행복할 것 같다

2013-03 20

[오피니언]'사각지대’에서 벗어난 '생각지도'로의 여행

‘사각지대死角地帶’에서 벗어난 ‘생각지도生角地圖’로의 여행 글_유영만 한양대학교 사범대학 교육공학과 교수 한양교수학습개발 센터장 한양대학교 사범대학 교육공학과 석사 과정을 마치고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서 교육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학습체제연구소 연구원을 역임했다. 삼성경제연구소와 삼성인력개발원에서 경영혁신 및 지식경영에 대한 교육을 담당했다. 대표적인 저서로 <니체는 나체다>, <생각지도 못한 생각지도> 등이 있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 그런데 과연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누구나 생각하면서 산다고 말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생각이란 습관적으로 생각하는 것, 타성과 고정관념에 젖어 사는 것을 뜻하지 않고, 이전과는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 의지나 의도와 관계없이 남의 생각이 내 생각 속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들어옵니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들어온 남의 생각이 내 생각의 주인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생각을 기반으로 제기되는 의견일지라도 편견일 수 있고, 내 생각으로 이해한 것이 오해일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각지대에 빠진 상식과 선입견, 그리고 생각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난 후 ‘의견(意見)’을 제시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의견’은 습관적으로 생각해 온 ‘의견’, 즉 자기 중심적 ‘편견’과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본 ‘선입견’에 불과한 경우가 많습니다. ‘의견(意見)’도 ‘의심(疑心)’해볼 만한 ‘의견(疑見)’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스갯소리로 사람에겐 자기 나이만큼 키워온 개(犬) 두 마리가 있다고 합니다. 그 개 이름은 ‘편견(偏見)’과 ‘선입견(先入見)’입니다. 내가 이제까지 해온 생각이 편견과 선입견으로 포장된 습관적 생각이나 고정관념, 타성이나 관성을 벗어나기 어려운 이유는 우리의 생각이 사각지대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의 생각은 사각사각(死角死角) 죽어갑니다. 사각지대에 가입하는 순간, 관습과 타성에 젖어 안색은 사색이 되고, 그 때부터 ‘상식’의 덫에 걸려 ‘몰상식’한 발상을 인정하지 않는 ‘식상’한 삶을 살아갑니다. 상식은 다시 습관과 결탁하여 ‘고정관념’으로 변질됩니다. 상식은 좌정관천의 경험과 합작하여 ‘편견’으로 전락합니다. 상식은 새로운 생각을 거부하면서 ‘선입견’으로 굳어집니다. 상식은 관습과 어울리면서 웬만한 타격으로는 깨지지 않는 ‘타성’으로 자리 잡습니다. 타성으로 자리 잡은 고정관념과 상식의 덫에 걸린 식상함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색다른 자극이 필요합니다. 배가 고프면 ‘설렁탕’, 뇌가 고프면 ‘뇌진탕’을… 색다른 자극이란 뇌가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모든 자극을 의미합니다. 가령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일, 이제까지 가보지 못한 낯선 곳으로의 여행, 도전적인 프로젝트 전개, 이제까지 제기하지 않은 낯선 질문하기, 뇌가 경험해보지 못한 한계나 위기 상황과의 직면 등등을 말합니다. 이런 낯선 경험들이 뇌에 낯선 자극을 전달합니다. 낯선 경험의 폭과 깊이가, 뇌가 생각할 수 있는 폭과 깊이를 결정합니다. 사람의 뇌는 낯선 경험에 직면하면 반사적으로 다른 질문을 던지고 이전과는 다른 대안을 모색하고자 긴장 모드로 전환합니다. 배가 고프면 ‘설렁탕’을 먹지만 뇌가 고프면 ‘뇌진탕’을 먹어야 합니다! ‘뇌진탕’은 주로 일시적 의식 소실을 동반하는 증상을 말하지만 광범위하게 뇌에 충격이 가해져서 ‘뇌가 놀랐다’는 상황까지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뇌를 놀라게 한다는 말은 편안한 뇌에 이제까지 받았던 자극과는 다른 자극을 줌으로써 뇌세포가 움직이도록 하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뇌진탕’은 결국 뇌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촉진하는 모든 외부적 자극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뇌진탕’은 뇌가 고프게 만드는 자극인 것입니다. 속옷만 갈아입지 말고 생각도 갈아입자! 옷이 더러우면 빨래를 하듯이, 생각도 타성에 젖어 습관적으로 생각하다 보면 얼룩이 생기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세탁을 해주어야 합니다. 속옷만 갈아입지 말고 생각도 갈아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도 시간이 지나면서 굳은 각질이 생기고 비듬으로 뒤덮입니다. 생각을 자주 쓰지 않고 방치하면 자신도 모르게 생긴 각질이 생각의 근육을 둔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생각주름 위에 뒤덮인 비듬에 생각벌레가 서식해서 생각 가려움증을 유발합니다. 생각벌레는 생각 가려움증을 유발하는데 문제는 생각의 가려움이 오만 가지 쓸데없는 잡생각까지 하도록 만든다는 점입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근거 없는 잡생각인 경우가 많습니다. 타성에 굳어진 생각의 근육을 풀어주려면 생각 마사지가 필요합니다. 생각 근육도 쓰면 쓸수록 발달하지만 쓰지 않고 방치하면 생각의 때가 끼고 각질이 생겨 유연한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생각 근육이 굳어 유연성을 잃으면 틀에 박힌 생각만 일삼고, 고정관념이 늘기 시작합니다. ‘고정관념’이 ‘고정본능’으로 바뀌어서 급기야 치유불가능에 가까운 ‘고장관념(고장 난 관념의 파편)’이 내 생각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고장 난 관념의 파편, 즉 ‘고장관념’을 없애는 데에는 생각경락 마사지 또는 생각 세탁이 유효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생각에 켜켜이 쌓인 생각의 때와 비듬은 얼마나 됩니까? 사각사각 죽어가는 생각을 되살리고 싶다면 머리만 감을 것이 아니라 생각도 하루에 한 번씩 생각샴푸로 감아주어야 합니다. 생각을 빨아주어야 생각 근육이 유연해지고 생각의 때와 비듬이 끼지 않습니다. 매일 머리를 감듯 매일 생각이 살아 숨 쉬도록 생각도 흔들어 깨워줘야 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생각지도 유영만 저, 위너스북 고정관념을 버리고 창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기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책. 감수성, 상상력, 창조성, 역발상, 전문성, 혁신력 등의 주제를 통해 새로운 시각으로의 접근법을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