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후반, 텔레비전은 부의 상징이었다. 그 시절,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한 청년에게 고장난 텔레비전 한 세트가 전해졌다. 한양대 전자공학과 학생이라는 신분이 이웃집 아주머니에게는 전파상의 전문수리공보다 더 대단해 보였던 것일까? 난감한 상황 앞에 청년이 내린 결정은, 포기가 아닌 도전이었다. 그 길로 청계천 중고서점가로 달려가 한참만에 '텔레비전 수리서'를 찾은 청년은 고장난 흑백 텔레비전과의 씨름을 시작했다. 이 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청년의 도전은 쉼 없이 계속되어 왔다. 정보통신분야에서 도전과 끈기로 걸어온 30여 년의 세월, 한국전산원 지식정보기술단 단장 윤병남 동문(전자 75년졸)의 이야기이다.

지식정보사회의 개척자

대한민국을 세계 최대의 초고속인터넷 강국으로 끌어올린 핵심기관은 정보통신부 산하 한국전산원이었다. 지식정보사회의 개척자임을 자인하는 한국전산원은 1987년 설립되어 현재 산하 기구로 정보화기획단과 국가정보화센터, 정보화지원단 및 지식정보기술단을 운영하고 있다. 윤병남 동문이 현재 단장을 맡고 있는 지식정보기술단은 정보화 기술의 연구 및 정책 개발을 통해 국가정보화를 주도하는 핵심 브레인 집단이기도 하다. 지식정보기술단은 다시 산하에 정보화표준부, 정보기술감리부, 전자거래연구부 등을 두고 있다.

정보화표준부는 정보기술을 정보화 사업에 적용하는데 필요한 표준개발이 시행되는 곳이다. 정보기술감리부는 정보시스템감리제도의 발전과 감리 시행을 수행하고 있다. 점차 정보시스템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는 반면, 시스템 사고로 인한 정보누출도 그만큼 잦아졌다. 정보기술감리부는 이런 위험들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도록 한다. 전자거래연구부는 새로운 e-비지니스 모델의 연구 및 응용을 주도해 나가고 있는 곳. 특히 전자거래연구부는 지난 해 말 시작한 '소기업 네트워크 사업'으로 인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전국적인 초고속통신망을 가진 우리나라는 네트워크를 통한 무한한 사업 가능성이 그야말로 무궁무진합니다. 우리의 통신망은 정지된 화면의 이미지 뿐 아니라 동영상 이미지들을 실시간으로 충분히 제공할 수 있을 만큼 우수한 수준입니다. 이런 비디오가 기존의 글자와 소리보다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이런 토대 위에서 성립된 네트워크 사업이 이젠 대기업 뿐 아니라 소기업에서도 가능해졌습니다. 이제 동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기 전, 집안에 앉아 식당의 분위기 뿐 아니라 음식의 모양까지도 살펴볼 수 있게 됐습니다."

한국의 IT 성장은 '예견되었던 것'

1999년부터 국책사업인 초고속국가망 사업단장을 역임하고 있던 그에게 2001년은 뜻깊은 해였다. 21세기의 첫해인 2001년 윤 동문은 프랑스 파리에서 한국의 초고속인터넷망 개발과 정착, 보급에 대해 발표하는 기회를 가졌다. OECD의 공식초청에 의한 윤 동문의 발표를 통해 우리나라 초고속인터넷망에 대한 세계적 관심은 다시 한번 증폭되었다. 이 자리에서 많은 국가 대표들은 한국 초고속망의 급속한 성장과 그 비결에 대해 의아해 했다고. 이런 의문점에 대해 윤 동문의 답은 명료하다. 우리나라의 성장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인고의 시간 끝에 달성됐다는 것.

"80년대 초 가격대비 성능이 세계최고인 TDX(전전자교환기)가 계발되었습니다. 이후 반도체산업 성장, CDMA의 세계 최초 상용화를 거쳐 초고속 인터넷 망 구축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는 지난 20년 간 한 순간의 쉼도 없이 기술을 쌓아왔습니다. 지난 월드컵과 아시안 게임을 기간 중에는 IMT2000을 소개하면서 IT강국임을 다시 한번 과시했습니다. 게다가 우리의 문화가 크게 알려지는 계기가 되어 대한민국이라는 브랜드의 가치를 높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유능한 국민들의 성실성과 애국심이 지난 20년 간 축적되어 만들어진 결과입니다."

지금의 결과가 한순간의 성과가 아닌 수년간 지속되어온 국가 전체의 성과임을 강조하는 윤 동문의 말에 자긍심이 가득하다. 이런 그의 긍지 뒤에는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뛰어 온 그의 땀방울이 있다. 윤 동문은 전국 일가구 일전화시대를 열었던 TDX 계발 연구를 주도한 핵심인사 중 한 사람이었다. 한국을 IT강국으로 성장시키는 시발점이 되었던 TDX의 계발에서부터 지금까지 윤 동문은 한국 정보화 사업에 있어 핵심 브레인의 위치를 고수해오고 있다. 타고난 노력가인 그의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일면이다.

잘 달리는 말, 더 잘 뛰게 해야

초고속인터넷망 보급률 세계 1위. 2001년 OECD 공표 이후로 우리나라의 초고속인터넷망 보급률은 끝없이 성장하고 있다. 이와 발 맞추어 신기술 개발도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너무 앞만 보고 달려 온 것이 문제였을까? 세계 여러 나라들로부터 초고속의 메카로 통하는 우리나라가 지금 인터넷초고속망 사업에 큰 고비를 맞고 있다. 전국 가구수의 70퍼센트에 달하는 초고속인터넷 이용 가구수로 인해 우리의 내수시장은 포화상태로 가고 있으며, 수많은 국가들이 우리의 성공을 추격해오고 있다. 더 높은 발전으로의 도약을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의 변화가 선두과제라고 윤 동문은 주장한다.

"초고속인터넷망 산업에 새 변화를 창조하지 못하면 IT산업의 미래는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국내시장은 이미 포화상태이고, 해외시장은 아직 우리의 발전속도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의 IT산업 수출이 점차 늘고 있지만, 아직도 반도체, 초고속망 광케이블 등 일부 하드웨어 품목에만 치중해 있는 듯 합니다. 게다가 외부 경쟁체제가 더욱 가속화됨에 따라 선두에 선 우리의 지위는 시시각각 도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IT산업의 성장을 위해서는 소프트웨어 및 디지털콘텐츠 개발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새로운 변화를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윤 동문은 지금의 IT 강국 이미지를 인터넷컨텐츠에 연계시키면 새로운 기술발전의 도약이 가능할 것이라 말한다. 기술문제 이외에도 점차 늘어가는 정보 불평등, 사생활 침해 등의 사회문제 해결도 변화의 한 축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이미 이를 위한 국가의 다양한 정책들이 추진되고 있단다. 'IT를 통한 삶의 질 향상' 이란 신 정부의 정책기조를 보면 신 정부도 잘해내지 않겠냐고 윤 단장은 전망한다. '잘 달리는 말, 더 잘 뛰게 해야'며 IT산업의 부흥을 독려하는 윤 동문이지만, 성장의 이면에 땀흘린 엔지니어들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당부도 덧붙인다.

"IMF의 성공적 극복에 IT산업이 큰 몫을 해 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IT산업의 급속한 수출 증대는 고용창출로 이어져 우리나라 경제 활성화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성과를 일궈낸 기술자들의 공로는 제대로 보상받지 못했습니다. 산업시대가 종식되고 새로운 정보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이제는 지식기반경제사회가 열렸습니다. 지식기술에 대한 저작권도 인정되고, 기술자들도 충분한 노력의 대가를 받아야 할 때가 왔습니다. 보다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도 이것은 필수과제입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본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이후 외국기업을 거쳐 한국전자통신원, 한국전산원에 근무하기까지 지난 오랜 시간동안 윤 동문은 꾸준히 외길만을 걷고 있다. 우리나라 정보통신사업의 산 증인으로 30여년을 살아온 그는 이젠 해외에서도 끊임없이 강연 요청에 시달리는 베테랑. 오늘의 그를 있게한 원동력을 물으니 '뚝심을 가지고 밀고 가는 것'이란 짧은 답변이 뒤따른다.

"하고자 하는 분야를 꾸준히 뚝심 있게 밀고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어학능력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특히 인터넷의 세상에서 영어는 하나의 중요한 프로토콜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입니다. '돈을 잃으면 조금을 잃는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요,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건강이 우선되야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요?"

20년 동안 즐겨온 스키와 수영, 스킨스쿠버, 테니스 그리고 마라톤. 빠른 업무환경 변화와 격무로 잘 알려진 정보산업의 중심에서 지금까지 그를 지켜온 원동력은 자신의 몸을 위한 '부지런함'에 있었다. 이번 주에도 10Km 단축마라톤 코스를 완주할 예정이라며 흐뭇한 미소에 젖는 윤 동문. 인생이라는 마라톤을 쉼 없이 달려온 그가 매일 아침 고쳐 메는 것은 운동화 끈이 아닌 삶에 대한 '열정'이다.


김자영 취재팀장 apriljy@ihanyang.ac.kr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ayang.ac.kr


학력 및 약력

윤병남 동문은 1975년 본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스페리유니벡사 컴퓨터하드웨어 엔지니어로 근무하다 삼성전자를 거쳐 한국전자통신원(ETRI)에 입사했다. 입사초기에 TDX 교환시스템 개발의 연구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한국전자통신원 근무시절인 1989년 청주대학교에서 정보통신학 석사학위를, 1997년에 충남대학교에서 전산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9년부터 국책사업인 초고속국가망 구축사업 사업단장으로 활동해 왔으며 한국전산원 국가정보화센터 단장을 거쳐 현재 지식기술사업단 단장을 역임하고 있다. 2001년 초고속국가망 구축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저서로 『지능망 기술』,『정보시스템 아웃소싱 방법론』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