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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3 22

[교수]`대륙을 알면 미래가 보인다`

대륙이 부상하고 있다. 지난 달 28일, 중국 국가통계국은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이 10조 위앤(약 1조 2천억 달러)을 돌파했다고 발표했다. 세계적 생산기지로서의 위상이 날로 상승되면서 이제 중국은 세계 제 6위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섰다. 지난 해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의 투자 대상국으로 부상한 중국은 연일 다국적 기업들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와의 관계에서도 자본과 경제발전 경험을 받아들이기에 열중하던 중국이 이제는 동등한 파트너로서의 경쟁을 추구하고 있다. 기회의 땅이 되리라 꿈꿔오던 중국이 어쩌면 가장 두려운 경쟁국이 될 날도 멀지 않았다. 이러한 대륙을 이기는 가장 최선의 길은 '그들을 먼저 제대로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사학과 임계순 교수의 말이다. 대륙을 알아야 우리의 미래가 보인다 "용이 비상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상하는 용의 생명선을 알아내서 그 생명선을 부여잡고 함께 비상해야만 살아 남을 수 있습니다. 만약 잘못 알고 용의 꼬리를 잡는다면 우리는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10년 전부터 많은 기업가들과 정치인들에게 중국의 급성장을 예고하고 우리의 대처방안을 부르짖던 이가 있다. 중국의 급부상에 대한 앞선 예견은 경제학자도, 정치학자도 아닌 사학자의 입에서 나왔다. 그가 바로 임계순 교수다. 평생을 중국 역사 연구에 받쳐 온 임 교수는 우리나라에서도 최고의 '중국통' 중의 한 명으로 꼽힌다. 중국 역사 연구를 통해 미래를 바라본 임 교수는 '역사를 알면 미래가 보인다'라는 역사의 교훈을 온 몸으로 증명한 셈이다. 그가 바라본 중국 급성장 배경은 18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의 발전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이미 중국은 1860년 이후 꾸준히 근대화가 진행되어 왔습니다. 당시 중국 연안지역은 서구열강에 의해 개발되고 있었고 특히 상해는 그러한 힘에 의해 1930년대에 이미 세계 제7위의 대도시로 발달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1949년부터 1978년까지의 공산혁명을 거친 전 국민들이 가난에 지쳐버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혁, 개방 이후 중국인들은 '먼저 잘살고 보자'라는 인식을 갖게 됐습니다. 천안문 사태를 거치면서도 민주화는 차치하고 경제에만 매달리게 된 것이죠." 대중국 교육부 파견 '1호' 교수 임 교수는 최근 중국과 미국간에 조성되는 우호적인 국제관계가 조만간 새로운 세계경제의 틀을 형성할 것이라 말한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서 미국의 생산기지가 될 때 현재 대미수출 의존도가 심각한 우리나라로서는 매우 치명적인 타격이 될 것이라는 추측 역시 매우 설득력이 있다. 하루가 다르게 도약하는 중국에 대항하여 살아남기 위해서 임 교수는 중국의 '생명줄'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이 해낼 수 없는 분야,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그런 분야의 사업과 서비스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중국에 대한 그릇된 선입견을 극복하고 대륙을 제대로 이해하는 작업이라고. "중국에는 우리나라 인구 규모에 달하는 상류층이 있습니다. 더 이상 과거의 인식으로 그들을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많은 중국인을 만나면서 제가 느낀 점은 그들이 어떤 면에서는 우리들보다 더욱 현대화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보면 겉모습만 보고 경솔하게 행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다릅니다. 늘 자기 자신과 상대방에 대해 신중히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또 권위주의가 팽배한 우리사회와 달리 평등에 대한 인식이 공산화 혁명을 통해 사회전체에 만연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매사에 서두르지 않습니다." 아직 중국과 우리나라간에 정식수교가 없었던 1991년, 임 교수는 교육부 제 1호 파견교수로 북경대학에 진출한다. 그녀는 1991년 당시 수교가 없던 중국에서 한국인으로 지내야 했던 일상이 경계와 두려움으로 가득 찬 것이었노라 고백한다. '한국인은 모두 부유하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던 중국인들에게 몇몇 한국인들이 '변'을 당하는 사례를 직접 목격하면서 임 교수가 택한 생존전략은 '동질감 형성'이었다. 그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것을 먹고, 똑같이 말하고, 생각하고자 했던 그녀의 노력에 중국인들은 결국 마음을 열었다. 그녀에게는 중국인 양부모도 생겼다. 중국 공략을 꿈꾸는 많은 기업들에게 임 교수는 제안하는 첫 번째 노하우 역시 '그들의 마인드로 사고하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중국에 가서 사업을 하려면 먼저 중국인이 되야 합니다. 물론 중국에 관한 관심이 급증하면서 관련 연구들이 많이 진척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대부분 중국의 표피적 모습만을 알고 있습니다. 광활한 대륙 중국은 지역마다 다른 문화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 다양한 역사적 사건에 의해 세대마다 가치관도 매우 다릅니다. 이 차이들을 알기 위해서 중국 역사를 공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중국의 역사 연구를 통해 '대륙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파악한다면 사업적 성공도 보장될 것입니다." 청시대 연구의 바이블 '청사(淸史)' 임 교수는 중국역사 중에서도 청대사(淸代史) 부문의 손꼽히는 권위자다. 그녀가 저술한 '청조팔기주방흥쇠사'는 세계의 저명한 역사학자들로부터 큰 반향을 일으키며 호평을 받았다. 이 책은 중국에서 재판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저서로 인해 삼련서적의 편집인은 그 해 '우수편집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고. 그러나 중국에 대한 임 교수의 연구는 학계는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그녀가 지난 1994년 출판한 『한국인의 짝사랑, 중국』은 당시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며 대륙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잘 대변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2000년에 처음 출판된 '청사'는 청나라 흥기에서부터 청나라 몰락까지를 한 권에 담고 있어요. 중국사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대개 아편전쟁 이후의 중국 근·현대 연구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어요. 혹 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청나라의 부분 부분에 치중한 역사를 연구하죠. 개인적으로 박사논문으로 청의 '팔기주방'을 쓰면서 청의 전기 연구를 많이 했어요. 그 과정에서 청나라 전체의 역사를 써보자는 자신감이 생겼죠." 중국 청시대 전체를 균형있게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청조의 변방정책 및 개혁 등 심도깊게 추적한 '청사(淸史)'는 2001년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기도 하였으며 현재 북경대학에 의해 중국어로 번역중이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 "제가 중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과거 우리 문화의 대부분이 대륙에서 건너왔습니다. 그렇다고 볼 때 그 대륙으로부터 어떤 문화가 우리에게 와서 그것이 어떻게 소화되고 어떤 형태로 변화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과정을 통해서만 대륙의 문화와 우리의 문화가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차이점 속에는 우리의 정체성과 우리 문화의 독특한 정체성이 발견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점차 획일화되어 가는 세계에서 우리의 모습을 잃지 않기 위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는 말이 있다. 승리를 위해서는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 한다는 이 말은 어쩐지 임 교수의 학문적 신념과 많이 닮아있는 듯 하다. 그녀는 우리나라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만을 강조하는 '우물안 개구리'식의 역사 연구는 지양해야 하며, 대륙진출을 위해서는 그들의 시장만을 살펴볼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알아야 한다고 재차 강조한다. 시간이 흘러 정년 퇴직을 하고 나면 우리나라의 역사와 중국의 역사를 연결해 새로운 역사서를 쓰고 싶다는 그녀다. 그러기 위해서 더 많은 연구와 해야할 공부가 남아있다고 스스로를 채근하는 노 교수 앞에서 문득 나태한 젊음이 부끄러워졌다. 학력 및 약력 임 교수는 1967년 이화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중국사 문학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1981년 미국 일리노이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중국과 국교가 수립되기 전인 1991년부터 1992년까지 북경대학 역사학과에서 한국 교육부의 파견교수로서 연구활동을 하면서 하남성 낙양대학에 출강한 경력을 갖고 있다. 동아시아경제연구원장을 역임했고 저소득층 맹인을 위한 사회사업가로도 많은 활동을 했다. 대표 저서로 『청조팔기주방흥쇠사』, 『한국인의 짝사랑, 중국』, 『중국의 여의주, 홍콩』, 『淸史, 만주족이 통치한 중국』, 『중국인이 바라본 韓國』등이 있고 역서로 『불멸의 지도자 등소평』등이 있다.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2003-03 22

[교수]신임 서울병원장 취임한 우영남 교수

2003년 3월, 신학기의 설렘과 부푼 기대들이 가득한 교정처럼 본교 의료원도 신임 병원장의 부임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서울병원 신임 병원장은 본교 의과대학장과 대한비뇨기과학회 이사장을 역임한 우영남(의대·비뇨기과)교수. 교수와 의사로서의 1인 2역에도 불구하고 병원장의 임무까지 맡은 우 교수를 만나 그의 새로운 각오를 들어보았다. - 우선 취임을 축하드린다. 소감이 어떠신지. 우선 막중한 부담감이 느껴지는게 솔직한 심정이다. 한양대 병원이 1972년 설립된 이후 벌써 30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초창기 때처럼 병원이 성장하는 시기가 아니라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될지 막막하고 착잡한 것이 사실이다. 처음 병원장 부임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머릿속을 스쳐갔던 생각이 '아차, 큰일났구나'였을 정도였다. - 부임한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지금 느끼는 가장 큰 애로사항은? 의과대학장이었을때는 남의 일인 줄만 알았던 일들이 이젠 병원장으로서 병원간의 경쟁체제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등 여러 가지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게 되었다. 과거엔 교수로서 연구와 강의에 비중을 두고 살았지만 이제 신경써야 할 부분이 한 둘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들어 갑자기 바빠졌다. 업무는 업무대로, 강의는 강의대로 또 진료는 진료대로 해야할 일들이 많은데 익숙지 않은 빡빡한 일정의 연속이다. 이 와중에도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하면서 더 잘 해야겠다고 하는 다짐이 오히려 중압감으로 바뀌고 있어 걱정이다. - 현재 병원발전에 가장 먼저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흔히 대학병원의 목표는 교육, 봉사, 진료 이 세 가지로 함축된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잘 어우러 질 수 있기 위해서는 재정적인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자생적으로 설립된 사립학교의 특성상 지금의 경영상태를 어떻게 정상화할 것인가에 대해 해결해야 될 문제가 많다. - 서울병원장으로서 자신만의 전략이 있다면. 의사는 의사대로 사무직은 사무직대로 흩어져 있는 각 부서의 마음들을 하나로 모아내는 것이 급선무다. 환자 진료라는 최종의 하모니를 연출해야만 하는 것이다. 병원내의 각 부서들을 어떻게 잘 추스려서 하나로 응집시킬 수 있느냐가 지금으로서는 최대의 관건이다. 2천여 식구들의 흩어져 있던 힘을 이제 하나로 모을 것이다. - 의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똑같은 병을 가진 환자가 있을 때 그는 나와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일수도, 나의 친척일수도, 나의 부모일 수도 있다. 의사도 의사이기 이전에 사람이다. 금전적인 문제를 떠나서 수술을 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섰을 때 판단력이 흐려질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환자가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느냐를 떠나 냉정하게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의사에게 요구된다. 어떤 환자를 대하더라도 그를 긍휼히 생각하는 마음가짐은 하나 같아야 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히포크라테스도 슈바이처 박사도 한결같이 강조한 사항이다. - 의사로서 지향하는 모델이 있다면. 의사가 된 동기를 '의사를 한 번도 못 보고 죽어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뒷산 바윗돌처럼 항상 서 있는 의사가 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신 성산(聖山) 장기려 선생님이 대학시절 은사님이다. 서울의대의 전신인 경성의전를 수석 졸업한 후 김일성 종합대학 교수를 지내기도 한 그는 국내 최초로 초기 간암환자를 대량 간절제술로 완치시킨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였다. 또한 보험제도가 없던 시절 부산에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해 국내 의료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는 등 생을 마치기까지 소외된 이웃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며 봉사의 삶을 살다 간 그야말로 '참의사'라고 생각한다. 모든 수술에 앞서 반드시 기도를 하셨던 선생님의 모습이 생각난다. 환자를 위하는 그 마음은 모든 의사들이 본받아야 할 것이다. - 앞으로의 다짐과 향후 계획이 있다면. 앞서 말했듯이 우선 힘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필수적이다. 개개인 구성원들의 마음을 단합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류마티스 분야 등 본교만의 강점을 더 살릴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이겠다. 앞으로 해야할 일이 많다. 잘 해야겠다는 욕심 때문인지 벌써 마음이 급하다.

2003-03 15

[동문]`선택된 소수 아닌 소외된 다수 위해`

국민참여 정부를 기치로 노무현 정부가 출범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의 일등공신이자 노무현 대통령 당선을 정치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일로 회상하는 추미애(법학 81년졸) 국회의원. '당당함이 아름다운 정치인'이라는 수식어를 가진 추미애 동문을 의원회관 414호에서 만났다. 낡은 정치 타파, 힘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판사라는 직업을 버리고 정치에 입문한지 만 9년, 이제 그녀는 자타가 공인하는 차세대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2002년 대통령 선거는 노무현 대통령의 진가를 세상에 알린 동시에 차세대 정치인 추미애를 세상에 알린 계기가 되기도 했다. 국민참여운동본부 대표로서, 희망돼지 엄마로서 지켜온 소신 있는 발언과 행동은 젊은 유권자들이 주축을 이룬 네티즌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힘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직접적인 접촉은 없지만 네티즌들이 인터넷을 통해 익명 또는 실명으로 다양한 의견을 주고 있습니다. 과거 국민은 추상적 집단이었지만 요사이 국민은 인터넷을 통해 의견 동향을 볼 수 있는 존재, 보이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 국민과 함께 원칙을 가지고 간다면, 소수 이익 집단이 저항하는 것은 시간이 가면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추 동문은 '정치발전 없이는 사법발전도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지난 1995년 9월 새정치국민회의 창당과 함께 당 부대변인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그녀는 입당 때부터 '학연·지연·혈연에 기반한 낡은 정치'와의 결별을 외쳤다. 그리고 그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그녀는 이번 선거에서 작은 희망을 보았다고. 유권자들이 고루한 지역적 사고를 극복하고 인물을 중요시하는,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지역 주민 대표 아닌 지역 유권자의 대표로 지방자치라는 말과 함께 지역 행정가를 주민의 손으로 선출한기 시작한지도 어언 8년.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자치 단체장 선거 때가 되면 행정관료와 정치인은 서로의 공을 챙기기에 바쁘다. 자신의 치적을 높여 민심을 얻기 위한 것이다. 행정관료는 모든 지역 문제 해결이 자신의 행정능력에서 비롯된 것처럼 말하고, 정치인은 자신의 로비가 중요했음을 강조한다. '무엇을 어떻게 왜' 보다는 '누가'가 논쟁의 핵심이다. 추 동문은 이러한 치적 싸움의 가치 없음을 지적한다. 정치인과 행정관료의 일은 엄연히 구분되어 있다는 것이다. "국회의원은 대의 정치에서 간접 민주정치를 실현하는 사람입니다. 지역이 전체에서 소외되었다면 지역 유권자의 대표로서 국회의원이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어야 하죠. 하지만 지역의 민원을 처리한다든지, 지방자치 단체장이 있는 상태에서 행정가의 일에 개입하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지역의 일은 행정가가 하는 것이죠. 지역일과 국정이 어느 정도 혼재된 상태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국회의원으로서 품위와 의무, 도덕성을 지키면서 일을 처리한다는 원칙을 가져야 합니다. 포퓰리즘에 의해 모든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려 하거나 권력을 행사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선택된 소수 아닌 소외된 다수를 생각한다 추 의원은 많은 매체들로부터 '원칙을 지키는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녀는 '원칙'이라는 단어를 그다지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이 맡은 위치에서 적당히 넘어갈 때 그것으로 인해 생길 부작용을 늘 경계하고 있다는 정도의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법관이나 국회의원 같은 지위는 그녀에게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제가 지금 하는 것은 정치입니다. 일반적으로 정치는 소수 상위계층 사람들보다는 하위층 즉 사회에서 소외된 다수에 의지하고자 하죠. 저는 이 다수를 생각하면서 행동하려 합니다. 사회적 형평성의 관점에서 소외계층의 힘을 보완해 주고 사회의 전체적인 균형을 맞추기 위한 거죠. 그것이 사안에 따라 인권일수도 있고, 잘못된 역사의 수정일수도 있습니다. 이런 가치들을 바르게 지켜나가는 것, 이것이 저의 원칙이라면 원칙일 것입니다. 저도 힘들면 적당히 넘어가고 싶을 때가 있죠.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생길 고통받는 사람과 부작용을 생각하면 그런 나태함이 수그러듭니다." 추 동문이 고집하는 이러한 올곧음은 그녀와 관련된 여러 기록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군사정권 시절, 판사로 재직하던 추 동문은 이념서적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양심에 따라 기각시켰고 즉심재판을 방청하는 정보과 형사에게 '즉심은 방청이 허용되지 않으니 나가라'고 호통을 쳤다는 일화를 가지고 있다. 정치인이 된 후에도 그녀의 원칙은 여러 정치적 사안에 적용되었다. 한총련 사건 수사과정에서 발생한 경찰의 여학생 성추행은 공개 추궁대상이 됐고 전자주민카드에 대해서는 정권 재창출 보다 중요한 것은 인권이라며 도입에 반대했다. 여성에게 주어지는 특혜 '또 다른 차별' 뿐 최초의 야당 여성 부대변인, 현직 판사 출신으로는 최초의 야당 정치인, 최초 지역구 재선 여성 국회의원 등 그녀를 수식하는 말에는 최초 혹은 여성이라는 수식어가 줄곧 함께한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지는 역할과 관심에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최초의 여성대통령 탄생과 관련한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여성의 출마 여부가 관심의 대상이 안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때도 여성에 대한 편견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여성이기 때문에 주목받는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 여성이 정당하게 평가받는 양성평등사회가 구현되길 하는 바램입니다." 그녀는 97년 대선에서도 여성에게 주어지는 '꽃'의 역할은 할 수 없다며 수석 대변인직을 고사했다. 추 의원의 여성관은 능력주의다. 여성이기 때문에 특별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 것. 남자든 여자든 능력에 따라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성(性)에 대한 원칙이다. 정치인의 제 1 덕목 '사명감' "출세의 도구나 수단으로 의원직을 탐내서는 안됩니다. 만약 그런 의도를 가지고 정치인이 되려한다면, 수단과 방법을 통해 그것을 취하는 순간 추구해야할 목표가 끝나 버리기 때문이죠. 자기 가치관을 주입하고 실천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사명감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열정적인 사명감은 그 일을 끝까지 그리고 열심히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사명감을 발견할 때 정치뿐만이 아니라 모든 일의 성취가 진지해지고 쉬워집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고 해야 되는 일과 이유를 찾는 것은 자동차의 시동을 거는 것과 같습니다. 일단 시동만 걸린다면 달리는 것은 어렵지 않겠죠?(웃음)" 추 동문에게 늘 바쁜 일상 속에서 스스로를 재충전 방법을 물었다. 여가 그 자체가 많이 부족하기에 시간이 날 때마다 그냥 독서를 한다는 답변이 되돌아온다. 육체적 휴식을 물었던 것에 지식의 부족함을 메우는 재충전을 답한 것이다. 다시 육체적 휴식방법을 묻자, 그녀는 출퇴근 차안에서의 단잠이 최고의 휴식이라고 답한다. 그녀가 분주한 만큼 세상이 더욱 많이 바뀔 것이라는 기대감에 마음이 흐뭇해진다. 정치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사회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각이 그토록 간절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의도에 가면 대한민국의 '작은 희망' 추미애를 만날 수 있다. 학력 및 약력 추미애 동문은 1981년 본교 법대를 졸업하고 1983년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1982년 제24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춘천지법, 광주고법 등지에서 판사로 재직했다. '정치발전 없이는 사법발전도 없다'는 생각으로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부대변인으로 정계에 입문, 같은 해 서울 광진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99년에는 홍콩 '아시아위크지' 선정 '새천년을 이끌어 갈 아시아의 젊은 지도자'에 선정되기도 했다. 1998년 한국유권자운동연합인 선정한 '국회의정활동' 행자위 최우수상을 받았다. 2000년 재선 후 2002년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으나 정치적 소신에 의해 사퇴했다.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2003-03 08

[교수]`유한한 인간의 무한한 창작`

'이제 보자기는 나이가 든 사람들에게조차 아련한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대대로 살아온 척박한 고향을 떠나면서 눈물로 멨던 보자기, 옷가지를 쌌던 보자기는 한번도 생각하지 않는다. 어려운 살림살이 가운데서도 예쁜 보자기는 좋은 데에 쓰려고 장농 밑에 곱게 간직하던 마음을 잊고 산 것이다.' - 저서 우리의 공예문화 中 국내 '금속공예 박사 1호'로 불리며 한국공예학회장직 맡고 있는 디자인대 추원교 교수가 오늘, 우리에게 전통공예를 이야기하는 까닭이다. 많은 학자들에 의해 공예연구는 미술사적 관점에서 논의되었고 이제 거의 체계화 단계에 이르렀다. 하지만 민족적 정체성이 담긴 공예품에 대한 문화적 관점의 평가는 소홀하였다는 것이 추 교수의 생각이다. 한국의 미는 추억의 너머에 근대화 50년, 다른 나라에 비해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변화는 엄청났다. 50년 동안의 변화는 우리에게 지난 5백년 동안 간직하던 모습을 짐작조차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제 전통가옥을 보기 위해서는 한옥마을이나 민속촌을 가야한다. 아버지, 할아버지가 사용하셨던 책과 물건들은 불편하다, 오래되었다는 말과 함께 버려졌고 어머니, 할머니께서 사용하시던 장신구와 생활용품은 필요없다, 촌스럽다는 말과 함께 폐기되었다. 이제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한국의 미를 찾는 것은 추억의 저편에만 있다. "요즘은 전통공예품을 너무 모르고 사용합니다. TV 사극을 보면 여인네들이 비녀를 꼽고 나옵니다. 몇 년 전 어떤 드라마에서 대원군의 부인이 비녀를 꼽고 나왔는데, 버섯 형태의 비녀를 꼽고 나왔습니다. 그건 보통 주모나 남정네를 기다리는 여인들이 사용하는 건데 말이죠. 이것은 모르기도 모를뿐더러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을 생각해 봐도 조상들 물건을 가지고 있는 집이 많지 않습니다. 돌아가시면 그 분이 보시던 책 하나, 젓가락 한 짝도 후손들이 제대로 보존하지 않습니다. 어떤 설명보다 그분이 쓰셨던 물건들이 피붙이로서의 유대감을 더 느낄 수 있게 하는데도 말이죠." '금속공예박사 1호'로 불리는 추 교수의 관심영역이 어느 날 갑자기 금속공예에서 전통공예로 변한 것은 아니다. 작가로서의 창작도구가 협의의 금속공예라면, 그가 품은 지적 호기심의 대상은 광의의 전통공예이다. 생활 감정이 듬뿍 담겨있는 미술이자 민족적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예술이 바로 공예라고 주장하는 추원교 교수. 문화재 전문위원, 민속공예품인증 심사위원,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심사위원 등 지금까지 그가 두루 역임한 직책들만을 보더라도 민속공예에 대한 그의 애착은 쉽게 읽을 수 있다. 우리시대 공예를 말한다 '공예'라는 말은 과거부터 생활쓰임새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져 사용된 용어다. 대량생산이 일반화되기 전, 수공품들은 사용함에 있어 이왕이면 아름다워야 한다는 인식아래 정성껏 제작되었다. 과거 공예라는 말은 쓰임을 바탕으로 아름다움을 추가하는 것, 즉 디자인에 앞서 쓸모를 강조한 말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산업화와 함께 공예의 의미에도 변화가 생겼다. 공예 수공품의 대량생산은 공예의 본래 정의에 '아름다움을 강조한 디자인'이라는 또 다른 의미를 추가시켰다. 공예의 본래적 의미인 쓰임보다 강조되는 아름다움에 대해 작가로서의 그의 입장은 분명했다. "오브제라고 불리는 '보는 공예'는 이제 시대적인 흐름입니다. 이것을 굳이 좋다, 나쁘다 라고 평가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공예의 특징이었던 쓰임과 아름다움은 대량생산과 디자인이라는 단어로 해결되었고 이제 공예는 예술 표현방식의 하나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바라만 보는 공예라고 해서 공예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은 근대 미학이론의 발전과 함께 공예의 범위가 외연적으로 확대된 결과입니다. 쉽게 말해, 사람 손이 많이 가는 것이 전통적 의미의 공예라면 기계적 제작 방식에서 강조되는 것은 디자인이라는 확대된 의미의 공예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공예개념의 외연적 확대와 함께 자신의 작품세계가 금속이라는 소재에 제한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금속 공예작가이기에 작품 제작에 있어 모든 생각을 금속으로 표현할 필요는 없다는 것. 두 차례의 개인전시회와 수많은 작품들을 통해 그의 이러한 생각들은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아름다운 돌, 뼈, 화석, 대리석, 유리 등 그의 소재는 무궁무진하기만 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구분 짓는 것을 좋아하죠. 금속공예가, 도예가, 서양화가, 동양화가처럼 말입니다. 앞에 붙은 단어들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주된 방식일 뿐입니다. 서양화가가 먹을 가지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고 해서 그가 잘못되거나, 아마추어적이지 않습니다. 금속, 섬유, 먹, 물감 등은 예술가의 생각을 표현하는 재료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저는 제 작품을 표현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소재를 고민하고, 그것을 사용하죠. 이것은 예술가로서 당연한 모습입니다." '작·업·일·상' 유한한 인간의 무한한 창작 '많은 작품을 하되 다작이 중요하지 않으며 부지런히 작업을 하되 서둘러서 마무리하지 말고, 기능과 아름다움을 생각하되 너무 의식하거나 과대한 수식을 피하자. 작품은 제작하고 싶은 것만을 제작하되 거기에는 거짓 없는 순수함을 가득 채우자. 또한 작품이 금전이 된다거나 작품으로 가져올 어떤 허망도 갖지 말고 작품에만 최선을 다하여 훗날 본인이 언제 보더라도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들자. 작품의 내면에는 본인의 서정과 갈망들을 표현하되, 이 땅의 정서를 표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작품 하나, 하나가 생명보다 오래 가고, 소중한데, 한 순간의 자만과 허위로 그 공을 헛되게 말라.' 추 교수가 대학원에 들어오는 모든 학생들에게 당부하며 전하는 글이다. 자신이 작품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학생들에게 전해주기 위함이다. 천 여 점에 이르는 작품을 이 같은 마음가짐으로 만들었기에 그에게는 수적으로도 많지만 어느 작품도 애착이 가지 않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 공예만으로 먹고 살 수 없어 교수가 됐다는 그는 이제 대중에게 눈을 돌리고 있다. "우리의 전통문화가 예상외로 반응이 좋아 다행입니다. 독자들의 반응은 우리 공예에 대한 관심이 아직 남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앞으로도 작품 활동은 계속하겠지만, 그것과 함께 책이나 여러 방식을 통해 우리 공예문화를 많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리기 위해 노력할 계획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몇 년을 바라본 계획이 아니라 평생을 걸쳐 해 나갈 겁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죠." 학력 및 약력 추원교 교수는 1973년 한양대 미대를 졸업하고 1976년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한양여자대학, 조선대학교 등에서 강의를 하며 1990년 본교에서 이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회의 개인작품전을 비롯해 다수의 초대전과 단체전에 참가했다. 디자인 대전 심사위원, 한국기능경기대회 심사장, 한국디자인협의회 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공예학회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지난 해에는 장애인기능경기대회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국내 논문 14편을 비롯해 대표 저서로 『귀금속 공예』와 『우리의 공예문화』가 있다.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2003-03 01

[동문]'IT 산업이요? 잘 달리는 말인데 더 잘 뛰게 해야죠'

60년대 후반, 텔레비전은 부의 상징이었다. 그 시절,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한 청년에게 고장난 텔레비전 한 세트가 전해졌다. 한양대 전자공학과 학생이라는 신분이 이웃집 아주머니에게는 전파상의 전문수리공보다 더 대단해 보였던 것일까? 난감한 상황 앞에 청년이 내린 결정은, 포기가 아닌 도전이었다. 그 길로 청계천 중고서점가로 달려가 한참만에 '텔레비전 수리서'를 찾은 청년은 고장난 흑백 텔레비전과의 씨름을 시작했다. 이 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청년의 도전은 쉼 없이 계속되어 왔다. 정보통신분야에서 도전과 끈기로 걸어온 30여 년의 세월, 한국전산원 지식정보기술단 단장 윤병남 동문(전자 75년졸)의 이야기이다. 지식정보사회의 개척자 대한민국을 세계 최대의 초고속인터넷 강국으로 끌어올린 핵심기관은 정보통신부 산하 한국전산원이었다. 지식정보사회의 개척자임을 자인하는 한국전산원은 1987년 설립되어 현재 산하 기구로 정보화기획단과 국가정보화센터, 정보화지원단 및 지식정보기술단을 운영하고 있다. 윤병남 동문이 현재 단장을 맡고 있는 지식정보기술단은 정보화 기술의 연구 및 정책 개발을 통해 국가정보화를 주도하는 핵심 브레인 집단이기도 하다. 지식정보기술단은 다시 산하에 정보화표준부, 정보기술감리부, 전자거래연구부 등을 두고 있다. 정보화표준부는 정보기술을 정보화 사업에 적용하는데 필요한 표준개발이 시행되는 곳이다. 정보기술감리부는 정보시스템감리제도의 발전과 감리 시행을 수행하고 있다. 점차 정보시스템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는 반면, 시스템 사고로 인한 정보누출도 그만큼 잦아졌다. 정보기술감리부는 이런 위험들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도록 한다. 전자거래연구부는 새로운 e-비지니스 모델의 연구 및 응용을 주도해 나가고 있는 곳. 특히 전자거래연구부는 지난 해 말 시작한 '소기업 네트워크 사업'으로 인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전국적인 초고속통신망을 가진 우리나라는 네트워크를 통한 무한한 사업 가능성이 그야말로 무궁무진합니다. 우리의 통신망은 정지된 화면의 이미지 뿐 아니라 동영상 이미지들을 실시간으로 충분히 제공할 수 있을 만큼 우수한 수준입니다. 이런 비디오가 기존의 글자와 소리보다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이런 토대 위에서 성립된 네트워크 사업이 이젠 대기업 뿐 아니라 소기업에서도 가능해졌습니다. 이제 동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기 전, 집안에 앉아 식당의 분위기 뿐 아니라 음식의 모양까지도 살펴볼 수 있게 됐습니다." 한국의 IT 성장은 '예견되었던 것' 1999년부터 국책사업인 초고속국가망 사업단장을 역임하고 있던 그에게 2001년은 뜻깊은 해였다. 21세기의 첫해인 2001년 윤 동문은 프랑스 파리에서 한국의 초고속인터넷망 개발과 정착, 보급에 대해 발표하는 기회를 가졌다. OECD의 공식초청에 의한 윤 동문의 발표를 통해 우리나라 초고속인터넷망에 대한 세계적 관심은 다시 한번 증폭되었다. 이 자리에서 많은 국가 대표들은 한국 초고속망의 급속한 성장과 그 비결에 대해 의아해 했다고. 이런 의문점에 대해 윤 동문의 답은 명료하다. 우리나라의 성장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인고의 시간 끝에 달성됐다는 것. "80년대 초 가격대비 성능이 세계최고인 TDX(전전자교환기)가 계발되었습니다. 이후 반도체산업 성장, CDMA의 세계 최초 상용화를 거쳐 초고속 인터넷 망 구축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는 지난 20년 간 한 순간의 쉼도 없이 기술을 쌓아왔습니다. 지난 월드컵과 아시안 게임을 기간 중에는 IMT2000을 소개하면서 IT강국임을 다시 한번 과시했습니다. 게다가 우리의 문화가 크게 알려지는 계기가 되어 대한민국이라는 브랜드의 가치를 높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유능한 국민들의 성실성과 애국심이 지난 20년 간 축적되어 만들어진 결과입니다." 지금의 결과가 한순간의 성과가 아닌 수년간 지속되어온 국가 전체의 성과임을 강조하는 윤 동문의 말에 자긍심이 가득하다. 이런 그의 긍지 뒤에는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뛰어 온 그의 땀방울이 있다. 윤 동문은 전국 일가구 일전화시대를 열었던 TDX 계발 연구를 주도한 핵심인사 중 한 사람이었다. 한국을 IT강국으로 성장시키는 시발점이 되었던 TDX의 계발에서부터 지금까지 윤 동문은 한국 정보화 사업에 있어 핵심 브레인의 위치를 고수해오고 있다. 타고난 노력가인 그의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일면이다. 잘 달리는 말, 더 잘 뛰게 해야 초고속인터넷망 보급률 세계 1위. 2001년 OECD 공표 이후로 우리나라의 초고속인터넷망 보급률은 끝없이 성장하고 있다. 이와 발 맞추어 신기술 개발도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너무 앞만 보고 달려 온 것이 문제였을까? 세계 여러 나라들로부터 초고속의 메카로 통하는 우리나라가 지금 인터넷초고속망 사업에 큰 고비를 맞고 있다. 전국 가구수의 70퍼센트에 달하는 초고속인터넷 이용 가구수로 인해 우리의 내수시장은 포화상태로 가고 있으며, 수많은 국가들이 우리의 성공을 추격해오고 있다. 더 높은 발전으로의 도약을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의 변화가 선두과제라고 윤 동문은 주장한다. "초고속인터넷망 산업에 새 변화를 창조하지 못하면 IT산업의 미래는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국내시장은 이미 포화상태이고, 해외시장은 아직 우리의 발전속도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의 IT산업 수출이 점차 늘고 있지만, 아직도 반도체, 초고속망 광케이블 등 일부 하드웨어 품목에만 치중해 있는 듯 합니다. 게다가 외부 경쟁체제가 더욱 가속화됨에 따라 선두에 선 우리의 지위는 시시각각 도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IT산업의 성장을 위해서는 소프트웨어 및 디지털콘텐츠 개발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새로운 변화를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윤 동문은 지금의 IT 강국 이미지를 인터넷컨텐츠에 연계시키면 새로운 기술발전의 도약이 가능할 것이라 말한다. 기술문제 이외에도 점차 늘어가는 정보 불평등, 사생활 침해 등의 사회문제 해결도 변화의 한 축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이미 이를 위한 국가의 다양한 정책들이 추진되고 있단다. 'IT를 통한 삶의 질 향상' 이란 신 정부의 정책기조를 보면 신 정부도 잘해내지 않겠냐고 윤 단장은 전망한다. '잘 달리는 말, 더 잘 뛰게 해야'며 IT산업의 부흥을 독려하는 윤 동문이지만, 성장의 이면에 땀흘린 엔지니어들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당부도 덧붙인다. "IMF의 성공적 극복에 IT산업이 큰 몫을 해 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IT산업의 급속한 수출 증대는 고용창출로 이어져 우리나라 경제 활성화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성과를 일궈낸 기술자들의 공로는 제대로 보상받지 못했습니다. 산업시대가 종식되고 새로운 정보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이제는 지식기반경제사회가 열렸습니다. 지식기술에 대한 저작권도 인정되고, 기술자들도 충분한 노력의 대가를 받아야 할 때가 왔습니다. 보다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도 이것은 필수과제입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본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이후 외국기업을 거쳐 한국전자통신원, 한국전산원에 근무하기까지 지난 오랜 시간동안 윤 동문은 꾸준히 외길만을 걷고 있다. 우리나라 정보통신사업의 산 증인으로 30여년을 살아온 그는 이젠 해외에서도 끊임없이 강연 요청에 시달리는 베테랑. 오늘의 그를 있게한 원동력을 물으니 '뚝심을 가지고 밀고 가는 것'이란 짧은 답변이 뒤따른다. "하고자 하는 분야를 꾸준히 뚝심 있게 밀고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어학능력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특히 인터넷의 세상에서 영어는 하나의 중요한 프로토콜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입니다. '돈을 잃으면 조금을 잃는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요,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건강이 우선되야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요?" 20년 동안 즐겨온 스키와 수영, 스킨스쿠버, 테니스 그리고 마라톤. 빠른 업무환경 변화와 격무로 잘 알려진 정보산업의 중심에서 지금까지 그를 지켜온 원동력은 자신의 몸을 위한 '부지런함'에 있었다. 이번 주에도 10Km 단축마라톤 코스를 완주할 예정이라며 흐뭇한 미소에 젖는 윤 동문. 인생이라는 마라톤을 쉼 없이 달려온 그가 매일 아침 고쳐 메는 것은 운동화 끈이 아닌 삶에 대한 '열정'이다. 학력 및 약력 윤병남 동문은 1975년 본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스페리유니벡사 컴퓨터하드웨어 엔지니어로 근무하다 삼성전자를 거쳐 한국전자통신원(ETRI)에 입사했다. 입사초기에 TDX 교환시스템 개발의 연구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한국전자통신원 근무시절인 1989년 청주대학교에서 정보통신학 석사학위를, 1997년에 충남대학교에서 전산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9년부터 국책사업인 초고속국가망 구축사업 사업단장으로 활동해 왔으며 한국전산원 국가정보화센터 단장을 거쳐 현재 지식기술사업단 단장을 역임하고 있다. 2001년 초고속국가망 구축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저서로 『지능망 기술』,『정보시스템 아웃소싱 방법론』등이 있다.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ayang.ac.kr

2003-03 01

[교수]"단순모방 아닌 21세기 한국의 미 찾아야"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전통공예는 실용적인 성격이 강했다. 용머리 조각을 한 상감청자는 오늘날 미술품으로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지만, 고려시대에는 어느 사대부의 안방에서 주전자 역할을 했다고 한다. 비단 상감청자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미술품으로 감상하고 있는 많은 문화유산들이 전통사회에서는 실용품으로 실제 구체적인 쓰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공예에 있어서 실생활에 사용하는 도자기 금속장식 목공예품 등을 만드는 작업과 감상을 위한 공예품 제작은 분명 다른 범주의 것으로 구분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범대 응용미술교육과의 이부연 교수는 욕심 많은 실용주의자다. 감상만을 위한 작품은 원치 않기 때문이다. '감상' 아닌 '실용' 위한 예술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W. 모리스 등이 주창한 미술공예운동은 실생활의 미화(美化)야말로 미를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미술가의 역할이어야 한다는 이념에서 출발했다. 이와 같이 응용미술은 순수미술에서의 '미의 원리'가 실생활에 응용되는 조형 활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감상을 위한 미술작품을 창작하는 것은 순수미술, 실생활에 사용하는 물건이나 도구에 미술을 접합시키는 것은 응용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미술은 대가(大家)들이 만들어 낸 순수미술(fine art)로서 주로 감상용으로 쓰였습니다. 반면 지금의 응용미술(applied art)의 뿌리는 전통사회의 장인들에게서 찾을 수 있죠. 동서를 막론하고 당시엔 장인들의 작품이 무시당했었지만, 세상이 과학화되고 실용화됨에 따라 응용미술이 더 각광을 받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응용미술교육이란 학문 역시 그리 역사가 길진 못합니다. 1940년대 들어 미국에서부터 체계화되기 시작한 미술교육은 특히 한국의 교육현실에 있어서는 가야할 길이 멉니다." 21세기 한국의 美와 정체성을 찾는다 이 교수의 전공 분야는 도자공예와 미술교육으로 압축된다. 특히 도자공예에 대한 이 교수의 애착은 남다르다. 지난 2001년 이천 도자기 엑스포에서 본교가 70평 규모의 대형 전시관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교수의 노력 덕분이었다. 당시 다른 대학이 3, 4평의 작은 전시관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하면 이는 엄청난 '사건'이었던 것. 이러한 도자기에 대한 이 교수의 사랑은 우리 것에 대한 강한 자부심에 근거한다. "우리의 도자공예는 매우 자랑스러운 장르입니다. 어떤 학문보다도 외국에 전해줄 수 있는 것이 많죠.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된 우리 도자기의 역사는 이집트, 중국을 비롯한 4대 문명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습니다. 고려청자만 해도 중국보다 우월했고,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넘어갔던 조선의 도자기들이 변화되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것만 봐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정책적 차원의 지원을 얻어, 세계로 뻗어나가야 할 때입니다. 지난 도자기 엑스포와 같은 행사가 계속돼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알리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이죠." 지난 97년부터 '한국미를 찾는 도자모임' 회장을 맡고 있기도 한 이 교수는 늘 '우리 것 다시 찾기'를 강조한다. 한민족의 도자기 역사가 긴 것은 사실이지만 지난 70, 80년대를 거치며 상당히 서양화 돼버렸다는 것이 이 교수의 설명이다. 그러나 이 교수가 단순히 과거의 것을 모방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 교수가 연구하고 추진하고 있는 것은 바로 현대인으로서의 한국인과 한국의 아름다움이다. 그의 식을 줄 모르는 창조력의 원천에는 21세기 한국의 정서와 정체성을 도자기로 빚어내려는 노력이 숨어 있다. 전인교육 위한 멀티플레이어, '점토' 이 교수가 도자공예를 예찬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도자기를 만드는 점토를 이용해 전인교육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본래의 성질을 유지하는 가소성이 뛰어난 점토는, 어떤 형태로든 변형이 가능하다. 따라서 이 점토를 이용하면 인간이 자신의 머릿속으로 상상한 모든 것을 구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교수는 점토야말로 인간의 정신을 자유롭게 해줌으로써 우리 교육의 지상 목표인 전인교육을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더불어 점토는 아이큐와 감성, 사회성을 비롯해 손과 팔 근육 발달을 통한 육체적 성장까지 촉진시킬 수 있어 아동들의 조기교육에 매우 유용하다. 아울러 정신 및 지체부자유 아동의 교육에도 점토는 매우 효과적이라는 설명이다. "지난 여름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도자공예 교육을 처음으로 실시했습니다. 한국의 미에 대한 체험과 이해를 높이기 위해 사물놀이를 들으며 도자기를 빚었고, 예상보다 높은 수준의 작품이 탄생했죠. 교육 이후에는 이 작품들을 장애인 복지시설에 기증하고, 그 곳에서 청소도 하고 공연도 했습니다. 당시 약 50여명의 학생들이 모였는데, 아마 처음엔 대부분 사회봉사 점수 취득이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정이 모두 끝난 후 평가해보니 학생들의 교육 성취도도 매우 높았고, 직접 교육에 참여한 응용미술교육과 학생들도 만족해했습니다. 비로소 이론과 실기, 전인교육이 함께 한 교육을 실시할 수 있었던 거죠." 현재 이 교수는 지난 도자공예 교육과 별개로 '길거리 미술교육'을 준비중이다. '길거리 미술교육'은 학생들만이 아닌 일반인들까지를 대상으로 마련된 커리큘럼으로, 인사동의 차 없는 날 등을 이용해 거리에서 진행할 예정이다. 물론 도자기 엑스포로 고조된 도자공예에 대한 관심을 더욱 높이고자 하는 욕심도 앞선다. 그러나 이 교수의 이런 교육 커리큘럼에는 창의성과 인성을 기르려면 주입식이 아닌, 실기위주의 미술 교육이 필요하다는 신념이 먼저 자리잡고 있다. 응용미술, 변화의 흐름 짚을 수 있어야 이 교수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때는 83년도. 이 교수는 당시만 해도 미술교육에 대한 인식은 부족했고 인적자원 역시 충분치 않았다고 회고한다. 미술교육계의 유학 1세대인 그는 지금도 미술교육분야의 발전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말한다. 사실 응용미술교육과는 현재도 취업률 100퍼센트를 자랑한다. 그러나 이 교수는 이를 넘어서 세상의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해 나가는 응용미술분야야 말로 학생들에게 최신의 정보를 제공하는 유익한 학문이 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또한 한양의 이름이 미술교육에 있어서도 곧 세계적 대열에 합류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21세기에는 세계화의 조류를 놓치지 말고 아이디어를 가지고 승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의 미를 잊지 말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미의 현대화를 이루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한국의 정체성을 제대로 짚어낸다면, 이를 통해 각자가 세계적인 전문가로 발돋움할 것입니다. 비단 세계적인 미술교육자나 디자이너 뿐 아니라 한양인 모두가 현대 한국인의 올바른 정체성을 찾는다면, 각자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 한양의 이름을 빛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학력 및 약력 이부연 교수는 1975년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77년 동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쳤다. 이후 83년 미주리 콜럼비아 대학에서 미술교육 박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후 지금까지 본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 논문 11편, 국외 논문 1편을 발표했으며, 개인 작품전은 국내와 국외 각각 3회, 4회씩을 열었다. 대한민국산업디자인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제7차 미술교육과정 심의위원, 한국도자공예가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미를 찾는 도자모임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미술교육학원론』이 있다.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2003-02 22

[동문]`기자의 속성은 풍부한 호기심`

언론 비평 전문지인 미디어오늘은 신년호를 맞아 현직기자 3백 7명에게 존경하는 언론인을 물었다. 결과는 참담한 수준이었다. 전체 응답자의 과반수가 넘는 53.6퍼센트가 존경하는 언론인을 묻는 질문에 ‘잘 모른다' 즉 '없다'고 답한 것이다. 지사형 기자가 실종된 시대, 언론인 윤리보다 경영논리가 강조되는 시대이기에 후배들에게 늘상 '기자정신'을 강조했던 천관우 선생의 빈자리는 더욱 크게 다가온다. 임나일본부설의 허구성을 밝힌 사학자인 동시에 동아일보 해직기자출신 언론인 고 천관우 선생. 20여년 전에 군사정권 아래서도 소신 있는 기사로 언론인의 귀감이 된 그를 사표로, 30여년 동안 정론을 견지해온 언론인이 있다. 바로 최철주(화공 67년졸) 중앙일보 논설고문이다. 본교 출신 최초 중앙언론사 편집국장이자 총동문회가 선정한 '2002년 자랑스런 한양인'에 선정된 최 동문을 만나 그의 지나온 삶과 언론에 대한 생각을 들어 보았다. 이공계 출신 언론사 편집국장 60년대 학번들은 본교 공대를 최고의 위치로 올려놓은 세대이다. 60년대 말은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계획과 함께 공업입국이 국가의 목표로 제시됐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많은 인재들을 공대로 끌어들였고 공대 중심의 본교는 '명문사학'으로써 확고한 터전을 잡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화공과는 중화학공업 육성이라는 경제정책에 부응해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최고로 여겨지던 화공과를 졸업한 최 동문이 보장된 앞 길이 아닌 기자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궁금증에 대해 그는 '우연'이라는 단어로 기자가 된 사연을 설명한다. "졸업 후 럭키금성에 들어갔습니다. 회사의 권유로 제대 후 잠시 쉬고있던 어느 날, 우연히 중앙일보 수습기자를 모집하는 사고를 보았습니다. 당시는 언론인에 대한 생각보다는 제 자신의 지식 수준을 확인할 겸 시험삼아 지원했는데, 운 좋게 1, 2차를 통과했습니다. 면접에서 면접관이 공대을 나와서 왜 신문사를 지원했느냐고 물었을 때도 '그냥 하고 싶어 왔습니다'라고 했더니 더 이상 질문을 안 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틀렸구나' 했죠.(웃음) 그런데 합격을 했던 거죠. 그 때 생각했습니다. '나도 모르는 바람으로 인생이 바뀔 수가 있구나, 내 길이 이렇게 나타날 수 있구나'라고 말입니다." 쉬운 경제, 생활 속의 경제를 지향한다 최 동문은 지난 30여년 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해 왔다. 입사 후 10년간 동양방송에서 방송기자로 재직했던 최 동문은 80년 언론 통폐합 후 신문으로 자리를 옮겨 경제부 차장, 부장, 해외특파원, 논설위원, 편집국장의 지위를 두루 역임했다. 하지만 그는 다양한 지위 속에서 경제라는 일관된 화두를 풀어냈다. "사람들은 모든 사고나 행동에서 자기도 모르게 경제적인 판단을 하고 그 결과에 따라 움직입니다. 남자, 여자가 만나서 결혼하는 것도 '저 사람이 나와 같이 살면 행복하게 해주겠구나'라는 판단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물론 감성적인 부분도 있지만, 이성적인 이해타산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나쁜 의미의 이해타산이 아니라, 좋은 면에서 따지고 드는 겁니다. 이렇듯 모든 일에는 경제적인 요인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경제라는 용어를 쓰지 않지만 자기도 모르게 경제적인 결정을 하고 삽니다. 경제라는 것이 결코 딱딱한 숫자 나열이 아니다는 겁니다." 이러한 그의 신념은 수많은 최 동문의 기사와 편집국장 시절의 업적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지난 94년 논설위원 재직시 '성의 경제학'이라는 기획 칼럼을 연재, 독자들로부터 높은 호응을 얻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경제는 어렵고 딱딱한 것으로 치부되었기에 그의 숫자 없는 경제학은 독자들에게 더욱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이후 최 동문은 편집국장을 역임하면서, 종합일간지 최초로 중앙일보에 경제 섹션을 증면, 강화했다. 당시 파격적이라고까지 평가되었던 이러한 판단은 현재 중앙일보를 경제에 강한 일간지로 자리매김하는 결과를 이끌었다. "종합 일간지들을 보면 경제를 보는 시각이 합리적이지 못한 경우가 가끔씩 있습니다. 감성으로 경제의 한쪽 면만 본다든지, 경제를 한 부분만 보고 전달하거나, 해설하는 경우죠. 이런 풍토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고 경제기사를 정확하고 독자가 알기 쉽게 써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를 위해 자체적으로 경제관련 기자를 전문적으로 육성하고, 경제기사를 지면에 많이 반영했습니다. 자체 조사에 따르면 독자들 중 중앙일보를 보는 이유 가운데 경제관련 만족도에 관한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이후 저희신문은 독자에 부응하기 위해 더욱 경제기자 육성 및 섹션 강화해 신경을 씁니다. 이런 순환구조는 강점을 더욱 강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언론인의 제 1명제, '정론직필' 언론의 본질에 대한 질문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다양한 형식을 빌어 논의되어 왔다. 얼마 전 신문 기자로 변신한 도올 김용옥 선생은 자신의 의견을 과감하게 들어내는 형식의 '뉴 저널리즘'을 주창하기도 했다. 타당한 논거를 가진다면 자신의 의견을 주장해도 된다는 의견과 기자는 기자일 뿐이라는 입장 사이에서 지속된 오래된 논쟁에 대해 30여년 동안 펜을 잡아온 최 동문의 대답은 간결하면서도 명확했다. "문제는 있는 현상을 얼마만큼 정확하게 볼 수 있느냐는 겁니다. 자신의 의견이라는 것은 정확하게 보고, 전달한다는 것이 전제된 후에 논의될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겁니다. 정확하게 보기 위해서는 많은 자기 공부를 해야하고 여러 의견 또한 들어봐야 합니다. 그리고 대중들한테 정확하게 표현, 전달하기 위해서도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중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한쪽으로 편향된 보도를 하게 되는 거죠. 주장에 대한 논의는 이러한 것들이 모두 정확하게 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최 동문은 국내기자 뿐만 아니라 두 차례의 일본 특파원 생활, 해외 순환 특파원 등을 거치며 다양한 기획과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은 그에게 사실을 정확하게 보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절감하게 했다고 한다. 앞뒤좌우를 모두 살펴보아야 정확한 상황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듣는 측면이나 본 측면만을 전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에는 속보경쟁으로 인해 이러한 경우가 더욱 빈번해지고 있죠. 예를 들어 미국의 신용평가 기관이 우리 신용등급을 낮춘다는 전망이 있다고 할 때, 일차적으로는 그것이 속보로 들어와야 합니다. 하지만 직후에는 정확한 분석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기자 자신이 확실한 정보를 갖지 못한다면, 기사가 야당의 의견을 내거나 미국의 음모설에만 치우친다거나 또는 정부의 대변인 역할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자가 갖춰야 할 최대 덕목은 '호기심' 런닝타임 두 시간짜리 영화 한 시간만 보기, 신간서적 속독하기, 회사 근처 갤러리 둘러보기 등 짜투리 시간을 이용하는 최 동문의 취미는 다소 독특하다. 그의 이러한 취미는 신문기자로서 문화흐름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가 언제나 이렇듯 쫓기는 듯하게 취미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다른 취미는 산책이다. 여유 있을 때 자신의 집 근처나 인사동 뒷골목을 산책한다는 최 동문. 그는 그 곳들을 걸으며 사람 사는 모습을 보고 그 안에서 자신이 글로써 표현할 수 있는 부분들을 찾는다고 한다. 결국 이 역시 방법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글쓰기 준비작업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인 듯 하다. "저는 기자의 속성을 풍부한 호기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건이나 사물에 대해 무심코 넘어가지 않는 것이죠. 기자가 되기를 원하는 후배들이나 혹은 언론계에서 일 하기를 희망하는 후배들이 있다면 지독한 자기노력과 준비를 하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갈수록 언론사의 문이 좁아지기 때문에 평상시부터 사고의 폭과 견문을 넓히고 전문 분야에 대한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미디어라는 분야는 여러분의 젊음을 투자해 볼 만한 곳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편집국장을 지나 논설고문으로서 중앙일보를 이끌고 있는 최철주 동문. 자신의 본래 업무를 중요시하기에 외부 일을 최소화시킨다는 그이지만 두 가지 외부 직함을 더 가지고 있다. 중앙인사위원회 정책자문과 대통령 직속 농어촌 특별 위원회 위원이 그것. 자신이 언론인으로서 풀지 못했던 문제를 풀기 위해서 맡은 직함이라는 그의 설명을 들으며, 30여년을 언론계에서 보낸 최 동문의 호기심과 열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기사가 아닌 장문의 글로 독자를 만나고 싶다는 그이지만, 책 한 권 쓸 만큼의 여유가 최 동문에게 주어질 날이 아직 요원해 보이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학력 및 약력 최철주 동문은 1967년 본교 화공과를 졸업했다. 1970년 중앙일보사에 입사해 10년 동안 동양방송 TV기자를 거쳐 80년부터 중앙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해오고 있다. 해외특파원, 경제부 차장, 부장, 논설고문 등을 거쳐 지난 1999년부터 2001년까지 본교 최초로 중앙일간지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현재 중앙일보 논설고문으로 있으며, 한양언론인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한 최 동문은 지난 10일 '2002년 자랑스런 한양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2003-02 22

[교수]"건축은 시대의 문화와 정신을 담는 그릇"

사소한 짧은 글 하나가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다는 상상을 해 보았는가? 하루에도 수 백, 수 천의 기사들이 넘쳐나는 신문 속에서 내 삶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야기할 글을 본 적이 있는가? 오히려 중요한 것은 훌륭한 글이 아니라 변화와 선택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에 있다. 고교 시절, 신문에 실린 '현대 건축의 반항아들'이란 기사를 읽고서 건축학자로서의 삶을 결심했던 한 청년은 지금 서울에 사라진 시민의 '광장'을 복원하는 꿈을 품고 시청 앞에 섰다. 서울캠퍼스 건축공학부 서현 교수의 이야기이다. 광장에 '자동차' 아닌 '사람'이 걷게 하라 서울시는 지난 달 28일 '시청 앞 광장 설계 공모전' 당선작을 발표했다. 당선 주인공은 인터시티 건축사 사무소와 함께 기획안을 출품한 서현 교수. 지난해 붉은 악마들이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외쳤던 공간, 겨울 내내 촛불시위로 달궈졌던 그 광장이 이제 '빛의 광장'으로 다시 태어나려고 한다. 서 교수가 제안한 빛, 유리, 모니터로 구성된 '빛의 광장' 건립안은 참신한 아이디어로 호평을 받고 있다. 하지만 긍정적인 시각 뒤에는 부정적 시각도 존재하기 마련인 법. 광장 조성에 반대하는 시각은 대체로 두 가지 입장에 서 있다. 광장 건립 자체에 대한 반대와, 서 교수의 '빛의 광장' 설계안에 대한 반대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서 교수의 입장은 단호하고도 명쾌하다. "저는 광장 조성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광장 조성 후 교통 혼잡을 우려합니다. 하지만 실제 교통광장은 구조상 상습적인 교통 혼잡과 정체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기형적 지역입니다. 이보다 더욱 중요한 이유는 이 사회가 가진 공정성의 문제입니다. 자동차 소유 유무를 떠나 교통광장은 모든 시민의 공간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존의 교통광장은 보행인을 무시한 차량 중심의 광장이었습니다. 횡단보도가 하나도 없는 이곳에서 보행자들은 길을 건너기 위해 미로 같은 지하도를 이용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이곳을 '사람'들의 공간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서 교수는 광장 복원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을 세상이 공평해지고 있다는 증거로 들고 싶다고 덧붙인다. 공평한 세상을 꿈꾸는 그의 의지는 '빛의 광장' 설계안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시청 앞 광장은 그 단어 그대로 시청을 전제로 존재하는 공간이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사회를 짓눌렀던 권위와 패권의 정치가 쇠퇴하면서 성장한 시민사회의 힘은 이제 관료제의 상징에 시민의 '지분'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선 전화와 초고속통신망 등 첨단 테크놀로지의 보급은 관료제에 의존하지 않는 시민사회의 힘을 자극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2002년 월드컵을 통해 드러난 '우리는 하나다'라는 공동체의식이 시민사회 형성을 더욱 가속화시켰구요. 단군이래 처음으로 한국을 세계 중심에 세운 근거가 바로 이 두 가지 테크놀로지와 공동체의식입니다. 이러한 현대 한국의 시민사회를 묘사할 가장 큰 두 가지 특징을 공간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빛의 광장'입니다." 도시는 역사가 축적된 공간 서 교수의 '빛의 광장' 기획안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 이유 중 하나로 새롭게 들어설 광장이 주위에 위치한 전통 사적과 역사적 유산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근거를 든다. 사적 제124호 지정된 덕수궁, 고종의 황제 즉위식과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조성되었던 원구단 등 각종 전통 사적지 곁에 조성될 현대식 '빛의 광장'은 결코 조화롭지 않은 공간이라는 것. 그러나 지금 광장을 점유하고 있는 수많은 차량의 물결은 과연 얼마나 전통에 부응하고 있단 말인가? "이 공간은 1926년 지금의 시청 건물 준공, 1974년 지하철 1호선 개통과 함께 한 태평로의 확장과 대한문 후퇴 이전, 1976년 플라자호텔 준공, 1999년 원구단공원 조성 등의 사건에 의해 이루어져 왔습니다. 이렇듯 시청 앞 광장은 시대가 흐르는 동안 계속해서 그 시대의 모습들이 차곡차곡 쌓여왔습니다. 2003년의 모습이 여기에 새겨진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봅니다. 건물은 한 순간의 역사를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도시는 각 시대의 역사가 쌓여 형성됩니다. 그것이 바로 건강한 도시의 모습입니다." '모든 시대의 건축가들은 그 시대의 모습을 파리시에 남겨 둬야 할 책임을 지닌다'라는 자크 시라크의 말을 인용하면서 서 교수는 건축이란 그 시대의 문화와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 역설한다. 따라서 건축은 기술만이 아닌 예술과 철학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현재 우리 시대의 정신을 잘 반영하고 있는 건축물이 무엇이냐 질문했더니 서 교수는 조금의 망설임 없이 '포스코 센터'를 소개한다. "제가 항상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이 건축을 규정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포스코 센터는 의미 있는 건축물입니다. 우선 투명성이라는 기업의 이상이 그대로 건물에 녹아있습니다. 투명성을 강조를 위해 건물 외벽은 유리로 구성되고, 로비는 시민들에게 개방됩니다. 이제 우리 사회에도 이만큼의 투명성을 구현하는 기업이 나타난 것입니다. 물론 기업의 자신감 없이는 불가능하겠죠. 투명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복잡한 기술도 요구됩니다. 포스코 센터는 그 한계를 넘어 우리에게 기술적 자신감도 심어주었습니다. 기업의 자신감과 기술의 자신감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건물입니다." 관찰과 상상력으로 미래를 열자 지금까지 우리나라 건축물의 아름다움이란 예쁜 기와와 처마선만을 주목하는 과거 지향적 사고가 지배적이었다. 서현 교수는 포스코 센터를 설명하면서 우리의 미래지향적 건축물들을 돌아볼 것을 권고한다. 서울의 구심점이 되는 남산타워를 비롯해 병풍을 닮은 힐튼호텔까지 우리 주변에도 훌륭한 건물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 같은 서 교수의 의지는 1998년 그의 저서『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라는 책에 잘 나타나 있다. 전문가 1백 명이 선정한 90년대의 책, 문화관광부 추천도서 등 화려한 수사를 얻은 이 책은 건축의 대중화를 이끈 '바이블'과도 같은 책이란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일단 이 책은 건축이 감상의 대상이라는 전제를 가집니다. 어떤 사람의 특수한 감수성은 특정한 영역에만 지정되어 발휘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어떤 그릇을 가져다 주어도 가득가득 채울 수 있을 만큼 열린 것이어야 합니다. 처음 미술품을 보고서 평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음악을 듣고도 건축물을 보고도 평가를 내릴 수 있습니다. 기본적인 감수성과 거기에 많은 건물들을 본 경험이 첨부된다면, 건물을 감상하고 그 안에 숨겨진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회색 콘크리트로 규격화 된 건물들로 꽉 채워진 도시에서 의미를 지닌 건축물을 찾아낸다는 것은 어린 시절 가슴 떨리던 보물찾기를 연상케 한다. 지금 그 보물찾기 놀이를 서 교수는 은근히 제안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이와 같을지 모른다. 우리는 모두 무수한 의미들을 찾기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지는 아닌지. 그런 의미에서일까? 스승으로서, 인생의 선배로서 잠언을 부탁했더니 서 교수는 삶의 가장 중요한 힘으로 '관찰과 상상력'을 꼽는다. "우선 적극적으로 대상을 관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대상으로 인해 내가 받는 감성을 고민하고 나아가 '나라면 어떻게 하겠다'라는 상상력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관찰과 상상력은 인간의 존재 의무인 동시에 적극적인 생존의지입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도 항상 변화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양인 모두가 삶을 적극적으로 관찰하고 상상력을 키워 이 세상의 주역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학력 및 약력 서현 교수는 1986년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1988년 동 대학원 건축학과 공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1992년 미국 콜럼비아대학에서 건축학 석사학위를 다시 받았다. 대한건축학회, 미국건축가협회(AIA) 회원으로 활동 중이며 대표 저서로 『그대가 본 이 거리를 말하라』,『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등 다수가 있다.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2003-02 22

[동문]`금남의 벽을 깬다` 남자간호사협회장 김낙주 동문

' 간호사'라는 직업을 떠올리며 드는 첫 생각은 '여자', '섬세함', '부드러움' 정도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남녀평등을 넘어 양성평등의 시대가 도래한 요즘, 간호사라는 직업 역시 더 이상 금남(禁男)의 성역은 아니다. 선진국일수록 남자 간호부장의 수가 많다는 통계가 말해주듯 우리나라에서도 그 성역은 무너지고 있다. 본교가 배출한 첫 남자간호사 김낙주(간호 86년졸) 동문은 금남의 영역을 개척하기 시작한 1세대 남자간호사. 삼성서울병원 간호과장으로 남자간호사협회장을 맡아 활약 중인 김 동문을 만나보았다. - 간호학과에 입학하게 된 동기는? 직접적인 이유는 의대를 지원해 불합격하고 다음 순위인 간호학과에 합격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간호학과에 자신 있게 등록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르게 살고 싶다'는 욕구가 강했기 때문이다.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며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메리트였던 것 같다. - 본교의 첫 간호학과 남학생으로서 좋았던 점과 힘들었던 점이 있다면? 간호학과 최초 남학생이다 보니 많은 교수님들과 친해져 도움도 많이 받았다. 교양수업의 교수님들도 나를 기억해 주시고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시 동기생도 없었고 후배 역시 없어 힘들었다. 남들의 눈을 의식해 자격지심이 생기기도 해 학교생활의 폭을 넓히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또 나름대로 유명인사가 되다보니 대리출석은 생각지도 못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웃음) - 학부 시절 단과대 부학생회장에 입후보했다 중도하차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당시 의과대 선거는 정학생회장은 의예과에서, 부학생회장은 간호학과에서 한 명씩 출마했다. 그런데 간호학과에서 한 명밖에 없는 남자가 출마한다고 하니 주위의 시선이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당시엔 사람들이 나를 간호학과 학생이 아닌 그냥 남자로만 생각했던 것 같다. 많이 아쉬운 일이었지만 한 조직의 대표의 자리에 성을 구분하는 일은 앞으로도 없어져야 한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역할에 대한 능력이 우선되야 할 것이다. - 남자간호사협회는 어떤 단체인가? 남자간호사협회는 지난 92년 250여명의 남자간호사들이 모여 창립한 단체다. 현재 125명이 정식회원으로 등록되어있지만 실제는 2000여명의 남자 간호사가 현직에서 일하고 있다. 지금 회장직을 맡고 있는 것은 지난 99년부터이고 올해로 4년째를 맡는다. 지난해 12월에는 홈페이지(www.mannurse.com)를 개설했고, 오는 3월 15일에 8차 창립총회를 갖는다. 아직 활동이 미약하지만 계속 성장하리라고 본다. - 남자간호사 만의 장점이 있다면? 먼저 환자들에게 주는 신뢰가 더 높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성 환자들의 경우 같은 여성보다는 남자 간호사에게 더 큰 믿음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 또한 기술적 부분에 경쟁력이 뛰어나다. 아직은 마취, 수술실, 인공신장실, 정신과 등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지만 활동 분야는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예전과 같은 선입견이나 편견도 많이 사라져 조만간 산부인과에서도 남자간호사를 볼 수 있는 날이 올 것으로 본다. - 간호학을 공부하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예전과 달리 본인의 의사로 간호학과에 진학하는 학생들이 많아진 것으로 알고있다. 그만큼 간호학의 비전이 높이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미래사회에서 간호학은 인간을 탐구, 연구하고 생명을 살리는데 있어 핵심적인 분야가 될 것이고, 이에 따라 양성평등의 사회에서 남자 간호사의 역할 역시 매우 중요하다. 후배들이 자신을 가지고 성실히 공부해 좋은 간호사가 되길 바란다. - 본교에서 간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곧 박사 과정에 들어간다고 하는데. 후배들에게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었으면 하기 때문이다. 나에겐 배우고 닮고 싶은 모델이 없었다. 말하자면 남자간호사로써 닮고 싶은 샘플이 되고 싶다. 내년 경에 박사과정을 시작할 생각이다. 박사를 마친 후엔 간호학과의 임상교수가 되고 싶다. 의예과는 교수가 임상과 수업을 병행해 과목에 현실감이 있지만, 간호학과는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살아 있는 현장의 지식을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다. 사진 : 박용일 학생기자 jajunation@ihanyang.ac.kr

2003-02 15

[동문]`거품 걷히면 옥석 들어날 것`

46세의 나이에 최연소 회장에 취임, 20년 동안 GE(General Electric)를 초일류 기업으로 키워낸 잭 웰치(Jack Welch). 그가 이 시대 최고의 경영자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은 '전통'을 포기하고 '수익성'을 선택한 그의 과감한 결단 때문이었다. 1987년, 잭 웰치가 토마스 에디슨이 창립한 GE의 소형가전사업을 톰슨사의 의료기기사업과 맞바꾸었을 때 미국의 시민들은 그를 '매국노'라 비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잭 웰치는 GE가 21세기에도 생존하기 위해서는 고부가가치의 하이테크,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수익구조를 철저하게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결과는 싯가총액 2천4백60억 달러의 세계 최대 기업이었다. 포털사이트 하나포스닷컴을 운영하는 (주)하나로드림 CEO 안병균(전자통신 82년졸) 동문은 사업 차별화를 통한 수익성 확보를 무엇보다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잭 웰치와 닮은 구석이 있다. 후발주자임에도 불구하고 신기술의 과감한 도입으로 서비스 차별화를 시도하고, 유료회원 중심으로 수익구조를 개선하겠다는, 포털사이트 업계에 있어서 가히 도발적인 시도도 서슴지 않는다. 경영에 있어서 안 동문이 보여준 야심 찬 도전과 용기는 삼십대 중반에 다시 학업을 시작했던 그의 행적에도 잘 드러나 있다. '노력'과 '신뢰'로 뭉친 최고경영자 "학부 시절엔 공부를 열심히 못했지만 졸업과 취직을 하면서 공부에 대한 미련이 많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서른 다섯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KAIST에 입학했죠. 12살 연하의 띠동갑 학생들과 경쟁하면서 사실 힘들고 지치기도 했지만, 그 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했던 순간이 아닐까 합니다. MBA(경영학 석사) 역시 회사에서 인터넷사업팀을 맡다보니 e비즈니스에 관심이 생겨 공부하게 됐습니다. 공학을 전공했지만 관련 기술을 알고 있다보니 실제 경영활동에 있어 의사결정이나 이해가 빨라졌죠. IT 업계에선 공학도들이 경영자로써 유리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안 동문이 데이콤에 입사한 것은 1985년. 이후 1998년 데이콤의 자회사인 하나로통신으로 자리를 옮긴 후, 그는 지금까지 매년 승진을 거듭해 지금의 위치에 올랐다. 비결을 묻는 질문에 대한 안 동문의 답은 바로 '부단한 노력'과 '상호 신뢰'. 10, 20년 후의 자기모습을 그리고, 그 그림의 완성을 위해 충분한 스케치 과정을 거친다면, 강점을 살리고 약점을 보완해 더 나은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생활이나 일에 있어서 원칙을 지키고 산다면 윗사람이나 아랫사람과 신뢰를 쌓을 수 있고, 이것이 곧 성공의 밑받침이 될 수 있다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콘텐츠 차별화', '회원유료화'가 포털 성공의 열쇠 (주)하나로드림이 운영하는 포털사이트 하나포스닷컴은 지난해 4월 3일, 기존 사업자인 드림엑스와 하나넷을 통합하며 탄생한 신생 사이트이다. 초고속인터넷통신 사업자인 하나로통신에서 출발한 하나포스닷컴은 사실, 포털사이트로서 후발주자인데다 관련 업계의 경쟁도 치열해 성공을 낙관할 수만은 없는 상황. 그러나 안 동문은 내년엔 '다음'을 누르고 업계 1위로 등극할 것을 확신하고 있다.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갖춘 '브로드 밴드 포털'의 강점을 살린다면 경쟁력은 충분하다는 것이 안 동문의 설명이다. "합병 당시 관계기관의 조사 결과 하나포스닷컴은 업계 12위로 평가받았습니다. 하지만 지난 연말엔 5위로 뛰어올랐죠. 올해 안에는 3위로, 내년까지는 부동의 1위로 여겨지는 '다음'을 누릴 계획입니다. 3위안에 드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전체 광고의 70퍼센트가 집중되기 때문이죠. 닷컴 기업의 구조상 광고는 가장 큰 수입원이고, 광고를 많이 유치해야 영업이익률을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3위 입성의 진입장벽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저희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전망은 밝습니다." 안 동문이 말하는 하나포스닷컴의 성공비책은 크게 두 가지다. 차별화된 콘텐츠와 유료회원 확보가 바로 그것. 이를 위해 하나포스닷컴은 현재 미국 카네기멜론대에서 개발한 신개념의 검색서비스를 3월 중에 선보일 예정이다. 사용자가 원하는 카테고리별 검색이 가능한 이 솔루션은 지금까지 어떤 곳에서도 선보인 적이 없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와 더불어 최근 유행하는 고스톱, 포커와 같은 웹보드 게임도 추가하고 개인 컴퓨터에 툴(tool)바를 설치, 컴퓨터 부팅과 동시에 하나포스닷컴과의 접속과정을 단축시킨 편의 서비스도 준비중이다. 또한 하나로통신의 기간통신망을 이용, 데이터 전송이 유리한 강점을 내세워 동영상 콘텐츠 부문에서 비교우위를 점할 계획이다. "하나포스닷컴은 유료화의 전망이 어느 곳보다 밝습니다. 하나로통신의 초고속 인터넷 하나포스를 사용하는 300만 명을 주고객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죠. 이 사용자들을 월 5천원의 정액상품 고객으로 유치할 경우, ADSL 사용 청구서에 후불로 청구가 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업체보다 전망이 밝습니다. 또한 후불이기 때문에 심리적 거부감을 없애는 효과도 거둘 수 있고 후불고객은 해지율이 낮기 때문에 수익성에도 큰 도움이 되죠." 전문경영인 없는 닷컴, 결말은 '퇴출' 뿐 1998년 벤처 붐이 일어날 때만 해도 벤처기업들의 코스닥 상장률은 거의 100퍼센트에 가까웠다. 그러나 현재 벤처기업들의 코스닥 상장심사 통과율은 55퍼센트. 이제 거품은 가라앉고 옥석 가리기가 한창 진행 중인 형국이라고 관련 업계는 풀이한다. 안 동문 역시 미래 가치만을 가지고 고평가된 닷컴 기업들은 본질 가치를 제대로 따져봐야 할 것이라고 충고한다. 기업의 목표인 '최대매출·최대수익'을 달성하기 위해 기업들은 가시적인 성과를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벤처 기업들은 모든 면에서 취약합니다. 기술 하나만 갖고 시작했기 때문에 경영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다고 봐야 하죠. 특히 시장 선점효과나 확실한 기술 우위가 없다면 쉽게 무너집니다. 저는 현재 업계 1위 업체들의 발전 가능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표하고 싶습니다. 전문경영인 없이는 그 발전에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이죠. 야후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창업과 기업의 발전은 별도로 이뤄질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는 2004년 코스닥 상장을 노리는 하나포스닷컴의 CEO 안병균 동문. 여행과 사색을 즐기는 그는 후배들에게 '한양의 정체성' 찾기를 주문한다. 한양인이 어느 기업에서나 성실함과 능력을 인정받지만 타교에 비해 뚜렷한 자기 색깔을 갖지 못해 존재감이 크지 못한 점이 무척 아쉽다고. 또한 안 동문은 과거와 같이 조직에 대한 충성도 중요하지만 변화된 시대에 맞게 자신만의 개성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다고 덧붙인다. 창의적인 인재야말로 기업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콘텐츠임을 그가 모를 리가 없다. 학력 및 약력 안병균 동문은 1982년 서울캠퍼스 전자통신공학과를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친 후, 1985년 데이콤에 입사했다. 입사 후 기술직을 거쳐 천리안 사업부로 자리를 옮기며 인터넷사업의 마인드를 다졌다. 1996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입학해 정보 및 통신공학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2002년에는 헬싱키 경영대학에서 MBA(경영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올해 1월 (주)하나로드림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데이콤에서 하나로통신으로 자리를 옮긴 이후, 매년 승진을 거듭한 안 동문은 공학과 경영학의 마인드를 함께 갖춘 드문 인재로 업계에서 평가받고 있다.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2003-02 15

[교수]`디지털 세상의 Error를 찾아라`

스마트카드란 집적회로(IC) 기억소자를 장착하여 대용량의 정보를 담을 수 있는 카드형태의 초소형 컴퓨터를 말한다. 국내에서 스마트카드와 관련된 사업은 1994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다. 그 이전에 있어 관련사업은 스마트카드라기보다 메모리카드 활용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업체들은 1994년부터 해외에서 관련기술을 수입하며 응용분야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관련업체들이 주력으로 삼았던 응용분야가 전자주민증사업을 위시로 한 국가정책적인 사업이었으니, 이는 사회단체들의 반대로 인해 결국 1998년 사업 자체가 중단되고 만다. 이후로 한국형 전자화폐사업이 추진되면서 스마트카드는 다시금 자신의 쓰임을 찾아가는 모습이다. 기술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켜라 "현재 TV 광고 중인 SK텔레콤 '모네타'와 KTF의‘K-merce'가 스마트 카드가 금융 분야에 응용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모네타와 K-merce는 전자화폐로서 신용카드의 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K-merce는 최근 국제로밍서비스 기능도 추가했습니다. 일본, 중국이 이웃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우리와 달리 유럽에는 수많은 나라들이 모여있습니다. 각 나라마다 통신회사가 다르기 때문에 국가 간 이동시 휴대폰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한다는 점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로밍 기술은 자신이 가입한 지역을 벗어났을 경우, 타지역 사업자의 통신 설비를 통해 즉각적인 서비스가 가능하게 만든 기술입니다." 국내 스마트카드 연구에 있어 대표적인 학자로 꼽히는 안산캠퍼스 전자컴퓨터공학부 도경구 교수는 현재 가장 활성화된 스마트카드 활용 분야로 금융과 통신영역을 든다. 유럽의 경우 우리나라와 달리 신용카드 결제가 오프라인 인증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탓에 상대적으로 신용카드 사기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유럽연합은 2005년까지 기존의 모든 마그네틱 신용카드를 스마트 카드로 대체할 예정이라고. 얼마 전, 현금카드 및 신용카드 복제 사기로 떠들썩했던 우리나라도 이러한 추세에 동참하지 않겠냐고 도 교수는 전망한다. 그는 스마트카드의 최고 장점을 복제불가능과 높은 보안성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사회단체들은 보안의 취약성을 이유로 스마트카드의 범사회적 도입을 반대해왔다. 실제로 몇 년 전 주민등록증과 건강보험카드를 스마트카드로 대체하려는 정부의 움직임은 사회단체들의 거센 장벽에 부딪혀 좌절된 바 있다. 스마트카드 속에 들어가는 대용량의 신상 데이터가 누출될 경우, 사생활 침해는 보다 심각한 국면을 맞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도 교수는 사회단체들의 이러한 주장은 지식의 결여에서 비롯된 오해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예전부터 우리의 주민등록증이나 건강보험에 관련된 정보는 중앙에서 관리되고 있습니다. 이미 종이나 컴퓨터에 보관되었던 정보를 스마트카드로 대체한다고 해서 기존 시스템의 취약한 보안이 강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마트카드를 도입함으로서 보안 장치를 가중시킬 수 있습니다. 종이나 컴퓨터에 보관되었던 정보는 제3자에 의해 노출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하지만 스마트카드의 경우는 원천적으로 정보의 저장장소에 대한 접근 권한이 차별적으로 프로그램 되기 때문에 더욱 안전하게 되지요. 더불어 추가적인 안전 장치로 스마트카드는 암호화된 비밀번호도 갖게 됩니다." 현재 프로그램 검증은 '주먹구구식' 종이와 마그네틱카드를 대체해 나가고 있는 스마트카드는 일종의 휴대가능한 극소형 컴퓨터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이 도 교수의 설명이다. 컴퓨터와 마찬가지로 스마트카드는 중앙처리장치, 메모리, 응용프로그램, 운영체제 등을 내장하고 있기 때문.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극소형이기 때문에 저장용량이나 프로세서의 속도에 제한이 가해진다는 것이다. 사실 도 교수의 주요 관심 분야는 스마트카드가 아닌 프로그래밍 언어. 프로그래머가 스마트카드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은 스마트카드도 결국 컴퓨터의 일종이었던 탓이다. "프로그래밍 언어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작성하기 위해 고안된 언어입니다. 우리가 컴퓨터를 이용하여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우선 그 연산과정을 컴퓨터에게 인지시켜야 합니다. 컴퓨터가 우리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바로 프로그래밍 언어입니다. 프로그램이 원래 기획자 의도대로 구동되기 위해서는 사람이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언어와 프로그래밍 언어가 비슷해야만 가능합니다. 하지만 간혹 인간의 언어와 컴퓨터의 언어가 일치하지 않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처음 프로그램 기획자의 의도대로 프로그램이 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생깁니다." 실제 윈도우 운영체제 같은 거대한 프로그램도 아무런 이유 없이 다운되는 경우가 잦다. 이른바 공포의 '블루스크린'은 완벽한 프로그램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화면 가득히 보여주며 시위하는 듯 하다. 프로그램에 오류가 발생한다는 것은 처음 기획자의 의도대로 프로그램이 실행되고 있지 않는 것이라고 도 교수는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오류들은 드물지만 엄청난 재난과 막대한 손해를 몰고 올 수도 있다고. 만약 공항의 항공기 관제시스템, 미사일 발사 제어 시스템, 온라인뱅킹 시스템 등을 프로그램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겨 전혀 엉뚱한 해답이 나온다면 그 피해는 가늠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설명이다. 현재 개발된 하나의 프로그램을 점검하는 방법은 대부분, 해당 프로그램을 반복 실행하여 발생하는 오류들을 제거해 나가는 경험적 방법에 의존하고 있다. 이 같은 방법의 문제는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는 것은 물론, 무엇보다 오류로부터의 안전성을 100퍼센트 확신할 수 없다는 불안감에 있다. 도 교수가 프로그램의 오류를 자동으로 검증, 완벽하게 분석해내는 시스템 개발에 몰두하는 것은 이 같은 연구가 비록 요원한 과제이지만, 디지털 환경에서 반드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과제인 까닭이다. 디지털 세상의 모든 Error를 지운다 "프로그램 오류로 인한 재난을 막기 위해서는 경험적 방법을 극복하고 오류를 자동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검증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검증 프로그램이 설계된 후에도 무조건 프로그램을 구동시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됩니다. 내 의도대로 프로그램이 잘 돌아가는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정확한 분석을 통해 이유를 규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궁극적으로 프로그램의 오류를 100퍼센트 찾아내 완벽한 안정성을 검증해내는 것이 '검증 프로그램'의 목표입니다. 제가 프로그램밍 언어에서 특히 주목하고 있는 분야가 바로 이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프로그래밍 언어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한 언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프로그램밍 언어는 인간과 기계를 연결해주는, 소통시켜주는 유일한 통로일지도 모른다. 감성을 지닌 인간과 합리적 사고중심인 기계가 소통하기 위해서는 상호 연동이 가능한 논리적 사고 체계를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도 교수는 말한다. 극도의 논리적 사고가 필요하고, 높은 수준의 완성도를 추구하는 탓일까? 프로그래밍 언어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꾸준히 지속되지 않는 소속 학과의 현실은 도 교수가 가장 우려하는 부분. 어렵고 힘든 일을 싫어하는 요즘 학생들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겠냐고 부연하는 그의 얼굴에 옅은 근심이 깃든다. "물론 전문가가 아닌 이상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더 나아가 컴퓨터를 배울 필요도 없습니다. 현재 컴퓨터를 사용하기 위한 수준은 TV 리모콘을 다루는 수준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수일지라도 프로그램의 완성도를 검증할 수 있는 전문가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자신이 쓰고 있는 프로그램이 인간의 편의를 위한 문명의 이기인지, 공동체의 안위를 위협할 폭탄의 뇌관인지를 누군가는 구별해 내야할 것 아닙니까?" 학력 및 약력 도경구 교수는 1980년 본교 산업공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1987년 미국 아이오아주립대학(Iowa State Univ.)에서 컴퓨터공학으로 석사학위를, 1992년 캔자스주립대학(Kansas State Univ.)에서 동일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1993년부터 3년간 일본의 아이주대(Aizu) 조교수를 역임하고, 1995년부터 안산캠퍼스 컴퓨터공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스마트카드연구소 대표이사, 한국정보과학회 프로그래밍언어연구회 총무, 대한통신정보보호학회 이사, 한국정보과학회 편집위원 등을 두루 역임했다. 사진 : 이재룡 사진기자 ikikata@ihanyang.ac.kr

2003-02 15

[교수]`내 옆방에 석학이` IEEE 현동석교수

현동석(공대·전자전기컴퓨터) 교수가 최근 세계 최대의 전자전기학회인 미국전자전기학회(the Institute of Electrical and Electronic Engineers. 이하 IEEE)의 석학회원(Fellow)으로 최근 선임된 사실이 알려졌다. 현 교수는 IEEE의 이사위원회로부터 '고성능 전력변환 시스템의 설계 해석 및 구현'에 대한 기여도와 전력전자 교육에 대한 선도자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올해 1월 1일부터 IEEE의 최고 등급회원으로 선임되는 영예를 안았다. 그 동안 '전력전자 연구실'을 운영하면서 전력변환장치에 관한 독보적인 연구로 주목 받아온 현 교수를 만나 이번 석학회원 선임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무엇보다 먼저 석학회원 선임을 축하드린다. 소감이 어떠한가. 개인적으로 대단한 명예다. 사실 한국사회는 외국보다 상대를 인정하고 칭찬하는 것에 대해 인색한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 국한되지 않고 선진국들 사이에서 공평한 심사를 통해 국제적으로 실력을 인정받은 것이 아닌가. 그래서 더욱 값진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선임을 통해 우리 한양대학교의 인지도도 높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 IEEE의 규모와 위상이 궁금하다. IEEE는 AIEE(American Institute of Electrical Engineers)가 그 모태다. 미국 내 전자전기 학술기관으로서 다양한 연구활동을 펼쳐오며 점점 그 영역이 확대돼, 현재는 전 세계적으로 전자전기분야의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학회다. 회원만 해도 70만명이나 되는 IEEE는 세부적으로 전기전자, 컴퓨터, 항공, 생물, 기계공학, 의학 등 37개의 광범위한 분야를 대상으로 하며 세계를 10개의 지역구로 나뉘어 유기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학회에 포함된 모든 영역이 확연히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각 분야간 학술교류나 정보교환이 무척 활발하다. 37개의 각 소사이어티 내에서 이루어지는 독자적인 학회활동도 주목할 만하다. 각 회원들은 전공에 따라 산업응용학회(Industry Applications Society), 전력전자학회(Power Electronics Society), 산업전자학회(Industry Electronics Society) 등 몇 개의 학회를 두고 메인 혹은 서브로 활동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 석학회원으로 선임되었다는 것이 뜻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IEEE의 석학회원 선임은 세계 최대 전기전자학회의 최고등급 회원이 되었음을 말한다. IEEE의 회원등급은 정식회원, 주니어회원, 시니어회원, 석학회원으로 나눠져 있고, 5년 이상의 연구성과를 중심으로 각 단계 회원으로서의 지식과 경험을 쌓았다고 인정되면 다음 등급으로 선임된다. IEEE에서는 전기 및 정보기술과학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세워 궁극적으로 인류 번영에 긍정적인 기여를 한 극소수의 연구원들을 매년 석학회원으로 임명하고 있다. 현재 IEEE 석학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연구원은 전체 미국전자전기학회 회원의 0.1%에 지나지 않으며 한국에서는 서정욱 전 과학기술부 장관과 안수길 서울대 명예교수 등 10여명에 불과하다. - 석학회원으로 선임되기까지의 절차가 매우 까다로울 것 같은데. 석학회원 자격을 갖춘 한 명의 노미네이터(지명 fellow)가 전기·전자·컴퓨터 등의 분야에 공적이 있는 한 시니어회원에 대해 기존 석학회원 5명 이상으로부터의 추천을 얻고, 다시 8개월에 걸친 심사를 통해 최종 선정한다. 석학회원으로 선임받았다는 것은 다른 시니어회원을 석학회원으로 추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 회원이 우수한 논문을 제출했다고 해서 평가의 잣대를 충족시켰다고 볼 수는 없다. 논문의 수준을 검증하기 위해 유사전공자들의 까다로운 심사와 다양한 형태의 자격검증 절차가 진행된다. - 고성능 전력 변환시스템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해 달라.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220V를 사용한다. 그러나 만약 발전소의 전압이 1000V라면 가정에서 사용 가능하도록 전압을 전환시켜야 한다. 각 발전기에 따라 필요로 하는 전압으로 변환시킬 수 있도록 설계하고, 해석하고, 또 실제 생활에 응용되도록 구현하는 것들이 나의 전공분야다. 간단히 형광등의 조도를 조절하거나, 에너지 소모를 줄이기 위한 제어기술도 포함될 수 있겠다. 앞부분의 고성능이란 수식어는 효율성은 극대화시키고, 노이즈는 최소화하기 위해 모든 성능을 높이도록 개발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되겠다. 본교 전력전자 연구실에서 개발해 온 인버터, 컨버터, 게이트 드라이브, AFP 등등의 분야가 이에 해당된다. - 세계 유수 학회의 석학회원으로서 향후 각오가 있다면. 이번 선임은 그 동안 학회회원으로서 꾸준히, 성실하게 활동한 결과들이 누적되어 나타난 성과라 생각한다. 나의 노력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며, 이것은 학자의 길을 걷는 나에게 채찍질이 되고 있다. 한 걸음에 10개의 계단을 올라갈 수 없듯이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내 자리를 지키며 조금씩 연구 활동에 정진하겠다. 산을 오를 때는 한 걸음, 한 걸을씩 나아갈수록 내려다 볼 수 있는 시야가 넓어져 정상에 오르면 가장 넒은 시야를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학문에 있어서 최정상은 누구도 감히 정복했다고 말할 수 없으니 끊임없이 연구에 매진하는 것이 학자의 도리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