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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 15

[교수]`실사구시가 민주주의를 살찌운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견인차 행정학과 박응격 교수 '민주주의의 꽃',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찬사를 받으며 지방자치제도가 부활한지 12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지난 6.13 지방선거에 참여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새롭게 출범할 민선 3기의 지방정부를 통해 보다 성숙된 모습의 지방자치제가 구축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투표용지에 도장을 찍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불거지는 단체장들의 비리와 제 기능을 못하는 지방의회 그리고 심화된 지역이기주의, 현저하게 낮은 지방재정 자립도 등으로 지방자치제에 대한 불신과 무용론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87년 본교에 지방자치연구소가 설립된 이후 현재까지 12여 년 동안 지방자치의 정착과 발전을 위해 매진해 온 박응격(사회대·행정과) 교수를 만나는 길은 주머니에 넣어둔 못이 언제 비집고 나올지 모르는 것 마냥 불편하기 짝이 없는 심정이었다. 지방자치 토착화와 함께 한 15년 "1987년 당시에는 암울한 권위주의가 팽배해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 시기에 개설된 지방자치연구소는 지방자치 없는 민주주의는 있을 수 없다는 신념 하에 지방자치 발전은 물론 민주주의의 토대를 만들어야겠다는 굳은 의지가 담긴 곳입니다. 그 후 90년 1기 지방의원이 선출되자 경험이 전무한 단체장들의 교육훈련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으로 지방자치대학원을 설치했지요. 장기적으로는 한국의 지방자치를 이끌어 갈 인재를 양성하고 현직 지방공무원이나 단체장, 의원들을 위한 단기 코스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박 교수의 지방자치에 관련한 연구와 활동은 국내 최초로 설립돼 주목을 받았던 지방자치연구소와 지방자치대학원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 교수가 소장으로 있는 지방자치연구소의 문을 두드렸을 때 박 교수는 나흘 후 본교에서 개최 예정인 '세계 대도시 거버넌스(governance)의 새로운 정책방안'에 대한 국제합동세미나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지난 86년 한국의 지방자치 발전을 위해 독일 프리드리히 나우만 재단과 공동연구협정을 체결한 이후 지금까지 지방자치연구소는 매년 3∼4회 정기적인 지방정책 세미나와 국제 학술세미나를 개최해 오고 있다. 이번 국제 학술세미나는 예전의 중앙집권적이고 권위적인 통치방식으로 대변되는 거버먼트(government)가 아닌 국민의 생활과 직결되는 다양한 정책에 대해 정부와 시민단체가 보조를 맞춰 나가는 '거버넌스(governance)'의 개념을 어떻게 정착시키느냐에 관한 것이다. 세계적으로 지방자치가 가장 잘 돼 있다고 평가받는 독일의 프리드리히 나우만 재단과 15년 간 변함 없는 교류협력사업에 앞장서온 박 교수는 지방자치가 우리나라에 탄탄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대학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지난 2000년 3월에 지방자치대학원장으로 부임하면서 당시 30명이던 정원을 42명으로 늘이고 석사과정뿐 아니라 지역주민, 공무원, 단체장 등을 대상으로 시민의식과 정치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한 아카데미를 개설하는데 주력하기도 했다. 그간의 활동이 말해주듯 박 교수는 지방자치에 대한 무용론과 허무주의가 계속적으로 고개를 내미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희망은 있고 또 그렇게 돼야만 한국의 민주주의는 발전한다'라고 자신 있게 잘라 말한다. 지방자치 없는 민주주의는 없다 "지방자치 없는 민주주의는 뿌리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성급한 사람은 지방자치의 해악을 확대해서 말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유기체적으로 보면 지방자치제는 부활한지 얼마 되지 않은 초등학생 수준에 불과합니다. 지금은 뿌리를 내리는 단계라 볼 수 있지요. 폭풍이 불면 줄기는 흔들리지만 뿌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뿌리만 살아 있으면 다시 싹이 돋기도 하지요.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긴 하지만 민주주의의 궁극적인 정상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뜨겁게 달구며 성황리에 막을 내린 월드컵이나 부산아시안게임에서 보듯 부정부패가 만연돼 혼란스러운 중앙정국에서도 지방자치만 꿋꿋하게 살아있으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박 교수의 설명이다. 그러나 박 교수는 막연히 앞으로 잘 될 것이라는 낙관론만을 나열하지는 않는다. 지방자치의 3요소라고 할 수 있는 지역 주민의 민주의식, 단체장의 자질과 능력, 의회의 투명하고 성실한 견제가 두루 갖춰지지 않고서는 빛 좋은 개살구로 전락해버릴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지역주민들의 민주의식은 나머지 두 가지 요소들을 견인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기재라고 강조한다. "유권자들이 지방자치단체의 살림을 남의 살림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단체장들은 지역주민의 무관심 속에 자의성이 커지기 마련이죠. 또한 아직까지도 단체장들의 경험이 부족한 경우가 많아서 집행부의 의도대로 끌려가기 쉽습니다. 한편 지방 의원들을 인물보다 정당 중심으로 뽑다보니 능력 있고 청렴한 인물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방정치는 중앙정치와 달리 생활정치이기 때문에 지역주민들이 보다 관심을 기울이고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두 눈을 부릅뜨고 성실한 지방행정을 했는지 잘 살려서 다음 선거에서 평가를 해 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민주주의를 향유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이지요" 지방자치 없는 민주주의가 있을 수 없듯이 재정 자립 없는 지방자치 또한 어불성설일 것이다. 지방재정 자립에는 관심이 없고 얼마나 큰 사업을 벌여 많은 재원을 끌어오느냐가 지방자치단체장의 능력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박 교수는 재정 자립 정도에 따라 자치권도 부여해주어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지적한다. 즉 10퍼센트만 재정 자립이 가능한 곳은 10퍼센트만큼만 자치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중앙정부에서 지방정부의 자구적인 노력을 보조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이다. 법치주의와 실사구시에 입각한 공직자의 사명 지방자치의 성공은 지역주민과 단체장, 의회의 자질이나 재정자립만 갖추어졌다고 성공할 수는 없다. 박 교수는 관료들의 기본 자질도 그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관료는 국민 대다수의 이익보다는 자신의 이익에 따라 정책을 실행해 간다'라는 말이 있다. 박 교수는 이렇듯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관료들에게 '법치주의'를 근간으로 행정을 하도록 해야한다고 강조한다. 건축가가 집을 지을 때 어림으로 지으면 안되고 설계도를 따라야 하듯이 관료들 역시, 법에 따라 집행하고 그것에 어긋날 때는 역시 법에 의해 엄중하게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공직자들이 정권 말기 레임덕 현상이 극대화됨에 따라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이익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정부 실패의 요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직자가 희생하더라도 국가와 국민의 이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따져봐야겠지요. 어떤 정치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집권당에 줄서지 않고 국민만 보고 나가는 중립성을 지켜야 합니다." 박 교수는 학자로서의 최고 지향을 율곡 이이 선생으로 꼽는다. 비록 48세의 짧은 생애를 마쳤지만 낮에는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맡은 바 일을 완수하고, 저녁에는 대학자들 이상으로 학문에 매진해 중국 당 태종 때의 정관정요를 능가하는 부국강병책을 제시한 점이 크게 본받을 만 하다는 것이다. "이이 선생같이 고위 관료뿐 아니라 소장관료까지 지식경영사회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해박한 전문지식을 함양해야 합니다. 학자들도 선진국의 학설보다는 우리 현실에 맞는 실사구시의 학문을 하도록 매진해야 하지요. 한양대의 건학 이념이 사랑의 실천인데 부모나 이웃에 사랑을 전하는 자선적인 개념으로 보기보다는 자기 전문분야의 지식을 필요한 곳에 쓸 수 있는 것이 참된 사랑의 실천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 교수가 제시하는 지방자치제의 성공요소나 관료로서의 기본 자질은 실질적인 행동으로 구현되지 않으면 교과서에서나 나옴직한 공허한 문구로만 남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원칙을 견지해 가면서 밤낮으로 학문에 매진하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현실에 적용시키는 방법을 연구하는 박 교수가 있기에 거센 바람에도 뽑히지 않는, 민주주의라는 뿌리깊은 나무는 거목으로 자랄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서용석 학생기자 antacamp@ihanyng.ac.kr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학력 및 경력 박응격 교수는 1968년 연세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이후 1970년 서울대에서 도시계획학 석사를, 1979년 독일 슈파이어 대학에서 행정학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1974년부터 1981년까지 건설부 국토개발연구원 수석연구원을 지냈으며 1981년부터 지금까지 본교 행정학과 교수 및 지방자치대학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건설부 중앙도시계획위원을 지낸 바 있으며 현재 동아일보 객원논설위원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신행정론』, 『현대행정학』, 『지방자치의 신사고』, 『독일연방정부론』 등 다수가 있다.

2002-10 15

[학생]대한민국 패션대전 산업자원부 장관상 의류학과 김정아양

'파리 신인 디자이너 콘테스트에 한국대표로' 발견과 창조 위해 노력하는 디자이너 될 터 지난 9월 24일, 패션센터에서 개최됐던 제20회 대한민국패션대전에서 본교 김정아(생활과학대·의류4) 양이 은상에 해당되는 산업자원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한국 패션협회가 주최한 본 대회는 국내 대표적인 신인디자이너의 등용문으로 김 양의 작품은 의류학과 졸업작품 패션쇼에도 선보임으로써 그 화려한 빛을 더했다. 이태리어로 거미의 성을 뜻하는 졸업작품패션쇼 '까쓰뗄로 델 라뇨(Castello del Ragno)'에서도 스탭으로 참가했다는 김 양을 만나 수상의 기쁨을 들어보았다. - 대한민국패션대전은 어떤 대회인가? 패션계열도 수많은 공모전이 있다. 그러나 본 대회는 많은 공모전들 중 유일하게 대통령상이 수상되는 권위 있는 대회다. 대통령상이 대상, 국무총리상이 금상, 산업자원부 장관상이 은상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수상자에게는 세계적인 패션전문 학원인 이태리 마랑고니 패션학교와 일본 모드학원의 유학, 사가디자인 연수 및 파리 신인 디자이너 컨테스트 참가 등의 기회를 부상으로 제공하고 있다. - 출품작을 소개한다면? 졸업작품을 디자인하기 시작할 무렵, 한창 '펑크'라는 장르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음악뿐만 아니라 문화와 패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컨셉을 많이 인용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전등을 지퍼로 연결해서 스텐드를 만든 작품을 보게 되었는데 옷을 이런 식으로 만들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퍼를 많이 사용하는 펑크의 특징을 강조하고자 하였고, 레오펑크의 상징인 붉은 체크를 사용함으로써 스코틀랜드의 분위기를 연출했다. 가죽점퍼나 왕관, 쇠장식 버클, 허리띠 하나까지도 터프한 느낌을 중심으로 드레시하게 표현했다.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었는데 악세사리 하나까지도 펑크의 이미지에 맞게 연출해야 하는 데 많이 신경을 썼다. - 작품 배경인 펑크에 대해 얘기해 달라. 펑크룩 자체로만 펑크를 느끼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번 작품을 통해 사회와 이데올로기 측면의 펑크를 표현하고자 했다. 사회부정, 반항, 혁명 등의 이미지로 그려지는 펑크는 그 자체로는 개혁을 시도하고 있지만, 기성 사회안에서는 오히려 상업적인 면으로 기성사회를 이용하고 있다. 그래서 펑크를 가리켜 이율배반적인 장르라 한다. 이러한 특징을 이번 작품에서는 구속과 자유, 한계와 이상 등의 추상적인 이미지로 나타내고자 하였다. - 오랜 시간동안 한 작품에만 전력해 수상소감이 남다를 것 같은데 처음에는 어차피 졸업전시회에 제출해야 되니 그냥 한번 지원이나 해 보자는 생각이었는데 1차 디자인 맵 심사를 우연찮게 통과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실컷 고생하고 떨어지면 더 속상하니까 나름대로 경험을 쌓았다는 것으로 만족하려 했는데 2차 스타일화 및 패턴 실기심사를 통과하고 나니 점점 뭔가가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이것으로서 그동안 뒷바라지 해 주신 부모님께 인정을 받는 것 같고, 부모님의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금상까지는 해외 패션학원에 유학의 기회가 주어지는 데 눈 앞에서 유학의 기회를 놓친 것을 생각하면 안타깝기도 하다. - 향후 계획은 어떠한가? 비비안 웨스트우드라는 영국디자이너가 있다.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비정형화된 젊은 감각을 유지하면서 작품 활동하는 모습이 부럽다. 나이가 들어도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발견과 창조활동을 게을리하지 않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창작하고자 하는 내 의지를 현실의 제약으로 인해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디자이너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 곧 파리로 떠난다고 들었다 이번 대회에서 수상한 학생들은 12월에 치러질 파리 국제 신인 디자이너 콘테스트에 한국대표로 출전하게 된다. 유학의 기회는 잃었지만 이번 대회는 대학생만을 출전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대학시절의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전력을 다할 것이다. 수상한 작품으로 응모해도 되지만 다시 새로운 디자인으로 승부하고 싶다. 앞으로 1달 동안은 예전처럼 학교 실습실에서 살아야 될 것 같다.(웃음) 최수정 학생기자 81choi@ihanyang.ac.kr

2002-10 08

[동문]`우리의 무대는 세계입니다`

"휴대폰은 살림이 아닌 하나의 패션입니다" '차별성' 앞세워 시장 공략 성공한 SK-텔레텍 윤민승 상무이사 (전기 86년 졸) '미국의 과학자들이 땅을 100미터쯤 파다가 구리조각 하나를 발견한다. 그들은 이를 근거로 2만 년 전에 유선전화망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놀란 일본의 과학자들이 땅을 파다가 작은 유리조각을 발견하고는 자신들은 광통신망을 갖고 있었노라 주장했다. 한국의 과학자들도 땅을 파 보았다. 수 백미터를 파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2만 년 전에 이미 무선통신망을 갖고 있었노라 주장했다.' 웃지 못할 상기의 유머는 어쩌면 오늘날 현실이 되어버린 듯 하다. 2001년을 기준으로 전국 휴대폰 가입자수가 2천 6백 만 명에 달하는 지금, 휴대폰은 마치 제2의 눈과 귀처럼 우리의 일상을 잠식하고 있다. 게다가 기존의 듣고 말하는 즐거움에 만족하던 휴대폰 단말기는 이제 보는 즐거움을 넘어서 외형적인 디자인뿐 아니라 칼라 액정과 대용량 정보 전송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진보를 거듭하고 있다. 특히 정보통신에 있어 세계 선두를 자임하는 국내 휴대폰 시장은 그야말로 세계 휴대폰 기술의 첨단을 보는 것과도 같다. 그 중심에 'SKY'란 브랜드로 잘 알려진 핸드폰으로 국내 시장에 우뚝선 SK-텔레텍이 있다. 후발 주자로 창립 4년 만에 굴지의 휴대폰 제조업체로 성장하기까지 윤민승 상무는 그 시작과 끝을 함께 하고 있는 마케팅 전문가다. 4년만에 시장 공략 성공한 비결, 'It's different' 5분 여를 기다리고 있을 때쯤 40대 초반의 신사가 빠른 걸음으로 들어와 악수를 청한다. 국내 굴지의 핸드폰 제조업체, SK-텔레텍의 윤민승 상무다. 카키색의 와이셔츠에 도라에몽이 그려진 넥타이를 매고 콜라를 마시는 윤 동문과의 첫 만남. 그 느낌은 마치 청량음료의 탄산이 입으로 가득히 퍼지는 기분이다. 독특한 그의 인상이 회사의 광고 문구와도 너무 닮아있다. 'It's different.' "처음 20명으로 시작한 회사가 4년만인 지금 사원 400명이 넘는 메이저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보수적이던 기존 전자업계에서 이 같은 단기간의 성장은 전대미문한 사건입니다. 이런 성장의 요인으로 '차별화' 전략을 내세우고자 합니다. 최초로 아이보리 색상의 단말기, 화음벨소리 그리고 카메라가 부착된 단말기를 국내에 도입한 것이 자사였습니다. 이렇게 기존의 것과 차별화를 주장하는 우리의 슬로건 'It's different'와 거기에 걸맞는 신기술이 결합되어 오늘의 성공이 가능했다 봅니다." SK-텔레텍이 후발주자로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소로 '차별성'을 꼽으면서, 자사 브랜드인 'SKY'의 프로모션을 꾸준히 한 것도 기업 성장의 요인이었다고 윤 동문은 덧붙이다. 또한 자사 브랜드 없이는 시장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는 그의 부연에 현재 단말기 시장을 이끌고 있는 'SKY' 브랜드를 창출한 SK-텔레텍의 위상을 다시금 실감하기도 한다. 회사 창업 때부터 마케팅 팀장을 맡아 시장 개척을 주도하고 현재 상무이사에 오른 그의 경력을 생각할 때, 회사의 성공을 위한 그의 역할과 노력이 사뭇 예사롭지 않았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자신의 별명이 워크홀릭(workholics)이라 소개하는 그의 미소 뒤로 고단했던 지난 시절이 아련히 비친다. 한국의 휴대폰, 세계 시장 공략의 첨병 자임 윤 동문은 본교 재학 시절인 80년대 초, 당시에는 매우 드물었던 배낭여행을 다녀올 정도로 세계에 대한 그의 관심은 유별났다 설명한다. 그래서일까, 1986년 입사초기부터 글로벌 마켓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그가 최근 가장 행복하다 말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누구에게나 매력적인 60억 인구의 중국시장에서 SK-텔레텍이 승승장구를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SK-텔레텍은 중국 유니콤 CDMA 사업장에 단말기 100만개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 아직 어떤 언론에도 공개하지 않은 따끈한 뉴스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즐거워 보인다. "우리나라의 휴대폰이 해외에서 호평을 받는 이유는, 첫째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제조업 분야에 탁월한 손재주를 지녔던 까닭이죠. 둘째로는 단말기 시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많은 연구자원이 투입되어 여타 산업보다 상대적으로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셋째는 60-80년대의 경제성장기를 거치면서 이미 휴대폰에 들어갈 기술적인 부품산업들이 발달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즉 잠재적 역량이 모두 갖춰져 있었다는 겁니다." 특히 그는 우리의 휴대폰 산업이 전자업계에서 일본을 앞지른 최초의 기술 영역이라고 덧붙인다. 항상 일본보다 한 걸음 느린 산업 경영을 하던 우리나라로서 모든 관심이 이 분야로 쏠린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한 관심이 현재 휴대폰 기술의 비약적 발전을 더욱 가속화 시켰다는 것이 윤 동문의 지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 뒤에도 음지가 존재한다. 날이 갈수록 디자인과 색상이 화려해지고, 끊임없이 새로운 기능을 갖추어 가는 휴대폰은 소비자들에게 너무나 유혹적이다. 게다가 기업 간의 경쟁으로 인한 현란한 광고들은 소비성향을 더욱 자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휴대폰이 지닌 내구성과 무관하게 교체 주기가 다소 빠른 현재의 상황은 일면 자원의 낭비라는 지적에 그도 이견을 달지 않는다. 그러나 휴대폰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에서 그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이제 휴대폰은 패션입니다. 새로운 모델의 운동화가 출시되어서, 이미 여러 개의 운동화가 있음에도 그것을 산다고 하면 뭐라고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휴대폰도 운동화와 다를 바 없습니다. 한시도 몸에서 떨어뜨릴 수 없는 필수품입니다. 게다가 국내 소비자들의 소비욕구는 기업들에게 엄청난 생존경쟁을 부추겼고, 그 결과 지금 세계 시장에서 우리의 휴대폰이 이렇게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낭비라고만 생각하기에 그 결과물들이 너무 달콤하지 않습니까?" 윤 동문은 내수시장이 없으면 기업이 살아남지 못한다고 강조하면서, 특히 기업들의 치열한 기술경쟁에는 어떠한 정치적 개입 없이 순수한 자율경쟁만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좁은 한국바닥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어떻게 세계 무대에 나가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겠습니까?"라고 부연하는 그의 말 뒤에는 SK-텔레텍에 대한 자부심이 짙게 배어난다. 잊지 못할 최고의 브랜드, '한양인' 본교 음대 교수를 지냈던 정은모 교수의 차남이기도 한 그의 한양 사랑은 각별하다. 80년대 초 대학 재학시절에 한번도 학교 배지를 가슴에서 뗀 적이 없다는 그의 말 한마디만으로도 한양에 대한 그의 애정은 모든 것을 증명한 셈이다. 그런 그는 요즘 한양인들에 대해 조금은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과거보다 한양인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다소 줄어든 게 아니냐'하는 것이 그의 솔직한 고백이다. "우리나라 산업이 이만큼 발전해 오기까지 한양동문들의 역할은 실로 대단한 것입니다. 어느 산업전선에서나 묵묵히 맡은 바 성실함을 다해 온 한양인들이 자랑스럽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자신이 성공적으로 업무를 수행한 뒤에도 그것을 공공의 성공으로만 돌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동문들과의 연계가 미약한 점도 아쉽습니다. 어느 분야에 가더라도 자랑스런 한양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위대한 한양인들'이라는 수식어를 서슴치 않으며 한양에 대한 기대와 조심스런 걱정들을 풀어놓는 그는 나이를 뛰어 넘어 살가운 선배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1시간 남짓의 짧은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또 다시 회의실로 뛰어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가 남긴 말들을 곰씹어보았다. "입사 면접을 치르면서 당시 최종현 회장에게 '동기 중에서 최초로 해외 지사를 가고 최초로 임원이 되고자 하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작년에 제 동기가 네가 말한 것을 다 이루었다라고 하더군요. 이럴 수 있었던 것은 제 나름대로 10년, 20년의 장기적인 미래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양인 여러분, 멀리 내다보고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미래는 여러분들에게 열려있습니다." 김자영 취재팀장 apriljy@ihanyang.ac.kr 사진: 이재룡 사진기자 ikikata@ihanyang.ac.kr 학력 및 경력 윤민승 상무는 1979년 본교 전기공학과에 입학하여 1986년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같은 해 선경 전자 본부에 입사하여 1991년부터 1994년까지 SK의 뉴욕지사에서 전자과장을 역임했다. 1997년 SK-텔레콤의 기획조정실 부장, 1998년 SK-텔레텍 창립과 함께 마케팅 팀장을 거쳐 현재 마케팅 담당 상무로 재직중이다.

2002-10 08

[학생]전국신인무용대회 특상 수상한 무용과 김성화 군

국내 최대의 신인 등용문서 최고상 수상 "병역면제 기회 살려 진정한 춤꾼 되고파" 한국무용협회가 주최한 제39회 전국신인무용경연대회에서 본교 4학년 김성화(체대·무용4) 군이 최고상인 특상을 수상했다. 이 대회는 신인무용인 등용을 위한 국내 대표적인 대회로 김 군은 이번 수상을 통해 병역특례 혜택을 받게됐다. 춤꾼들의 향연에 한양의 이름을 걸고 나가 최고의 실력을 발휘한 김 군을 만나 그 소감을 들어봤다. - 수상 소감을 말한다면 내가 한국에서 가장 큰 대회에서 특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처음엔 전혀 믿어지지 않았다. 1, 2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니 이제야 좀 실감이 나는 것 같다. 말할 수 없이 기쁘다. - 어떻게 무용을 시작하게 되었나 어렸을 때부터 춤에 관심이 있었지만, 중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내가 무용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즈음 본격적으로 무용을 전공하고자 마음먹었다. 부모님을 조르고 졸라 겨우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처음 2년 간은 발레를, 3학년 때에는 현대무용을 배웠다. -남자 무용수로서 특히 어려운 점이 있다면 사실, 남자 무용수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시선은 아직도 존재한다. 처음에는 좀 쑥스럽기도 했지만 지금은 자부심을 갖고 자신있게 사람들 앞에 선다. 5년 전만 해도 무용과 남학생 수가 참 적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과는 남학생이 20명 정도이고 다른 학교 무용학과에도 남학생의 진학률이 매우 높아진 것으로 알고 있다. - 여가 시간은 어떻게 보내나 매일 수업을 마치고 따로 연습시간이 있기 때문에 특별히 여가 시간이 생기지는 않지만, 가끔씩 친한 선·후배가 모여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격려한다. 선, 후배 모두 춤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보니 어떤 소재를 대해도 안무와 관련지어 생각하게 되는데, 이런 생각들을 모아 새로운 안무를 구상하기도 한다. - 이번 수상으로 병역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아는데 무용을 하는 남학생에게 군대란 정말 치명적인 일이다. 심지어 전에는 군대 문제만 해결된다면 만사가 다 잘 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군대에 다녀와서도 계속 활동할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힘든 일이다. 문제가 해결되어서 정말 기쁘다. 기회가 주어진 만큼 더욱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 도움을 주신 분들이 많을 텐데 우선 지도 교수이신 김복희, 손각중(체대·무용)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두 분 모두 대외적인 활동도 활발히 하시고 가정에도 충실하느라 참 바쁘시다. 그런 와중에도 학생들을 가르칠 때엔 언제나 학생들보다 더욱 열정적으로 뛰시고, 더 열심히 구상하신다. 인간적인 면으로나 예술적인 면으로나 두 분 교수님을 가장 존경한다. 또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말씀하시며 독려해주신 부모님과, '끼'로 똘똘 뭉친 선, 후배들께도 감사 드린다. - 현재의 활동과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12월 8, 9일에 두 지도 교수님께서 준비하신 '달과 까마귀'라는 공연이 열릴 예정이다. 나 역시 무용단원으로서 출연하는데 지금 한창 연습 중이다. 앞으로 미래에 내가 무엇을 하겠다고 확언할 수는 없다. 다만 현재 내가 빠져있는 무용에 최선을 다할 것이고, 그렇게만 한다면 좋은 결과가 따를 것이라 믿는다. 김모련 학생기자 moryun@ihanyang.ac.kr

2002-10 01

[동문]`한국의 라이자 미넬리`를 거부한다

"세계적인 배우보다는 작품을 즐기는 배우로 남을 터" 지난 10여년 간 30여 중 대형 작품서 열연 뮤지컬 배우 전수경 동문 (연영 89졸) 역사상 가장 큰 입장권 수익을 기록한 공연 작품이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오페라의 유령'은 뮤지컬 매니아가 아닌 일반 문화 대중들도 일생에 꼭 한 번은 보고 싶은 작품으로 꼽을 정도로 폭발적인 호응을 누렸던 작품이기도 하다. 이러한 여파는 국내에도 뮤지컬 붐이 이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화려한 율동과 연기, 그리고 심금을 울리는 노랫가락이 한 몸처럼 절묘하게 어우러진 뮤지컬이 국내에 상륙한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요즘만큼 뮤지컬에 대한 관심이 집중된 적은 없었다. 이는 지난 10여 년 동안 뮤지컬이 급속하게 대중 속으로 스며들면서 쌓여진 탄탄한 기반도 한 몫 단단히 했다는 평가다. 이러한 한국 뮤지컬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배우가 있다면 바로 30여 편의 중·대형 작품에서 주연과 조연을 넘나들며 열연해온 전수경 동문(연영 89졸)이다. 이러한 뮤지컬 스타를 만나러 가는 길은 멀리서만 볼 수 있는 별을 따듯 가슴 설레고 즐거운 기대감으로 시작됐다. 배우에게 육아는 연기의 깊이를 더할 수 있는 기재 "어서오세요!" 벨을 누르자 170센티미터가 훨씬 넘는 훤칠한 키의 '아줌마'가 문을 연다.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 빼어난 노래 솜씨와 넘치는 끼로 수많은 관중의 마음을 빼앗으며 온갖 박수갈채를 한 몸에 받았던 '스타'의 모습은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거실로 안내를 받고 들어가니 몇 일 후면 백일을 맞이하는 쌍둥이 자매 지온이와 시온이의 낯선 방문자를 신기한 듯 바라보는 맑은 눈망울이 눈에 들어왔다. "요즘 뭐하고 지내냐구요? 아기 돌보는 것이 지금으로선 제 인생에 가장 소중한 일이에요. 엄마가 된다는 것은 여성이 인생에서 경험하게 되는 가장 큰 변화이자 공부라고 할 수 있지요. 비록 예전에 비해 행동의 제약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육아를 바탕으로 한 인생공부를 하는 것이 배우로서 깊이를 더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요. 지금 저의 모습이 전혀 부끄럽거나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걸요." 육아를 자기 발전을 위한 하나의 기재라고 딱 잘라서 말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역시 프로는 다르구나'라는 생각에 처음 가졌던 실망감을 지운다. 사실, 전 동문은 뮤지컬 계에서 끊임없이 도전하는 배우로 유명하다. 대학 4학년 때인 88년도 MBC 대학가요제에서 동상을 수상하며 솔로 음반 작업에 들어가기도 했던 그녀는 독특한 음색의 가창력과 승부욕으로 90년 '캣츠' 오디션에 합격해 뮤지컬에 데뷔한다. 뮤지컬 배우에게 요구되는 것은 노래나 연기 뿐 아니라 춤 솜씨도 필수다. 전 동문은 춤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상태에서 순수한 열정 하나로 뮤지컬의 세계로 뛰어든 것이다. 이런 그이기에 올해 초 '틱,틱...붐!'을 마지막으로 쉴새없이 달려왔던 배우로서 현재의 공백은 휴지가 아니라 다음 작품을 준비하기 위한 끊임없는 연습과 공부의 시간이다. 뮤지컬 대중화와 함께 한 12년 배우 인생 전 동문이 처음 데뷔할 때만해도 우리나라 뮤지컬 수준은 걸음마 단계에 불과했다. 배우가 공연을 하고서도 출연료를 못 받는 경우도 허다했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1980년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이후 90년대 초까지 '캣츠', '코러스라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레 미제라블' 등 해외에서의 유명세가 국내까지 이어진 작품들이 공연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작품의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무대 연출이나 미술, 의상까지 그대로 모방한 표절작품이 풍미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창작극에 대한 요구가 공연제작자나 관객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분위기다. 그러나 창작극에 대한 전 동문에 대한 생각은 우리의 뮤지컬이 아직은 더 많이 배워야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창작을 너무 앞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창작이 필요하긴 합니다. 그러나 '뮤지컬'이라는 말 자체가 벌써 외국말입니다. 남의 나라 것을 하고 있으니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기까지는 모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봅니다. 기술이 쌓이면 그 다음에 우리의 혼도 들어가고 정서에 맞는 새로운 작품이 등장할 것입니다. 창작을 하면서 실패도 하고 여러 가지 시도도 하면서 많이 깨져야합니다. 그러는 중에 '난타' 같은 성공작이 나올 수 있는 거죠. 관객 수준도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좋은 스텝만 보강되면 훌륭한 작품이 나올 거라고 믿습니다." 전 동문이 지적한 작품이나 무대가 열악한 국내 사정에 비해 배우들의 역량은 놀랄 만큼 향상된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오페라의 유령'이 시쳇말로 '대박'을 터뜨리면서 남경주, 조승우씨 같은 베테랑 배우도 오디션에 떨어지고 신예 배우들이 대거 발탁되는 파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정말 긴장될 때가 많다"라고 속마음을 내비치는 전 동문에게 신예들의 도전은 늘 자기 발전의 즐거운 계기를 마련해 준다. 연륜이 쌓일수록 신인들이 도달할 수 없는 연기의 깊이를 더해가면서 늘 새로운 변신을 하게된다는 것이다. 전 동문은 긴 공백기를 거쳐 내년에 서게 될 무대에서는 지금과는 또 다른 모습을 선보일 것이라며 자신 있는 모습니다. 세계적인 배우보다 매 작품을 즐기는 배우로 남을 것 흔히 전 동문을 수식할 때 '한국의 라이자 미넬리'라는 꼬리표를 단다. 흑백영화 시대를 풍미했던 그녀의 어머니 주디 그란드 조차 시샘할 정도로 빼어난 역량을 자랑했던 세계적인 배우로 비유되는 것이다. 그러나 전 동문이 바라는 것은 제 2의 누군가가 아니라, 후배들이 '제 2의 전수경'으로 비유될 만큼 색깔 있는 배우가 되는 것이다. "추한 것조차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는 나이까지 끝까지 무대를 지키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세계적인 배우가 되면 좋겠지만 그것보다는 매 작품을 할 때마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누구와 비교하기보다는 작품을 즐기고 사랑하면서 연기하는 것이 가장 보람된 일이겠지요. 뮤지컬의 역사와 같이 나이를 먹어가며 끊임없이 변신한다는 생각으로 깊이 있는 연기를 키워나갈 것입니다." 전 동문이 설계하고 있는 내년은 비단 어머니가 된 후 배우로서 또 다른 변신을 시도하는 것뿐 아니라 대학원에 진학해 후배들을 양성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가는 해이기도 하다. 끊임없는 변신을 거듭하면서도 배우로서 자신의 위치를 한시도 잊지 않는 전 동문에게서 프로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서용석 학생기자 antacamp@ihanyang.ac.kr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전수경 동문은 누구? 전수경 동문은 1967년 생으로 1985년 본교 연영과에 입학했다. 전 동문은 90년 '캣츠'로 뮤지컬에 데뷔한 이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코러스 라인', '넌센스', '브로드웨이 42번가', '아가씨와 건달들', '갬블러' 등 30여 편에 달하는 작품에 주·조연급으로 연기했다. 그밖에 정극 '사천의 착한 여자', '러브레터' 등에서 열연했고 '돈을 갖고 튀어라', '고스트 맘마', '주노명 베이커리', '공공의 적' 등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수상경력으로는 88년 MBC대학가요제 동상 수상, 97년 제 3회 한국 뮤지컬 대상 여우조연상, 99년과 2002년 동 행사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현재 뮤지컬 배우 주원성 씨와 쌍둥이 자매 '시온', '주온'과 함께 성수동에서 살고 있다.

2002-10 01

[교수]`언어를 알아야 문화가 보인다`

'언어을 알아야 문화가 보인다' '갑골문자' 연구의 선구자 중어중문학과 손예철 교수 인문대 4층에 위치하고 있는 손예철 교수(인문대·중문과)의 연구실은 오래돼 보이는 한자 투성이의 각종 자료와 서적들로 어지럽고 부산해 보인다. 연구실 테이블에 놓여 있는 중국풍의 찻잔과 장식 소품들에도 왠지 모를 '연륜'이 있다. 동양의 문화를 읽어내는 키워드, 중문학을 공부하는 학자의 연구실에 들어왔다는 '편견' 때문일까? 연기는 없어도, 부산한 그의 연구실에서 매우 오래된 향 냄새가 났다. 대륙의 역사를 읽는 암호, 갑골문자 손 교수는 중국 문자학, 구체적으로는 고대문자인 갑골문자를 연구하는 학자다. 국내 최초로 갑골문자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한 것도 바로 손 교수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갑골문자는 지금으로부터 약 4천년 전 중국 은나라 시대에 쓰여졌던 문자로서 현재까지 발견된 한자 중 가장 오래된 형태의 문자다. 가장 오래된 한자라는 것만으로도 '매력'이 있지만, 갑골문자가 사용된 시기의 독특한 중국 문화와 역사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갑골문자는 더욱 특별하다. "다른 고대문자와는 정말 다릅니다. 단순히 은나라 때 사용됐던 문자만은 아닌 까닭입니다. 당시는 제정이 분리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전쟁, 왕실의 질병, 인재 등용 등과 같은 국가적인 행사를 진행할 때 왕은 항상 점을 쳤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통해 '길', '흉'을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점과 관련된 의식을 진행하고, 점의 내용을 기록할 때 사용한 문자가 바로 갑골문자입니다. 은나라 왕실에서 '실록'의 개념으로 쓰인 거죠. 문자로서의 가치도 가치지만, 그 당시의 문화와 역사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도 아주 큰 가치가 있습니다." 지난 1898년 은나라가 위치했던 중국 하남성 안양현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갑골문자는 거북의 복갑(거북이 껍데기의 배 부분)과 소의 견갑골(엉덩이 뼈)에 문자를 새긴 '갑골편'에 새겨져 있다. 발견 후 한동안 갑골편은 약재로 쓰일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다 1900년대 초반 '유악'이란 중국 관리가 병 치료를 위해 약재를 구입하는 과정에서 갑골편의 내용들을 우연히 읽게 됐고, 이 때부터 '귀중한 문화재'로 인정받게 된다. 그리고 1920년대에 들어 중국의 '중앙연구원'을 통해 갑골문자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다. 그 후 지금까지 '갑골편'은 13차에 걸쳐 약 10만여 편이 발견됐고, 현재 갑골문자에 대한 연구는 전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국내 최대 중한사전 편찬하기도 국내에서 처음으로 갑골문자를 연구한 학자답게, 손 교수는 지난 1996년 정인(은나라 왕실에서 '점'을 치던 종교인)을 시대별로 구분하고, 이들 집단의 성격 분석을 통해 갑골문자와 은시대를 고증한 『은대정복인물통고』를 번역하여 갑골문자와 은시대의 문물 제도를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손 교수가 한국 최대의 중한사전 편찬자라는 사실은 '갑골'의 두툼한 그늘에 가려있는 듯 하다. 지난 해 그가 편찬한 3천여 쪽의 중한사전은 한국 중문학 사상 최고, 최대의 사전으로 꼽힌다. 우리나라는 불과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영어를 비롯한 다른 외국어와는 달리 제대로 된 중한사전을 갖고 있지 못했다. 중국어의 경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는 발음을 포기한 2종의 사전이 있었으나, 수록된 표제자나 표제어의 수량이 전체 600페이지밖에 되지 않아서 소사전 규모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환경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손 교수는 14년 간의 작업을 진행한 끝에 인터넷 및 최신의 IT 용어까지 수록된 '제대로 된' 중한사전을 편찬하게 된 것이다. 사전을 편찬한다는 것은 흔히 하나의 언어를 '집대성'하는 대업에 비유된다. 무엇이 부족해서일까? <中國文字學>, <東亞 메이트 中韓辭典>, <說文解字譯註>, <甲骨卜辭 中의 祭祀 연구> 등과 같은 책들이 출간을 앞두고 있다하니, 그의 왕성한 집필력을 가히 짐작하기 어렵다. "사전의 출판은 일반인들을 위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큰 보람이 있는 작업이었죠. 사실 사전보다는 다른 연구서적들을 먼저 출판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하다보니 사전의 출판이 먼저 됐습니다. 계속해서 전문 연구와 함께 일반인들이 중국에 대한 지식을 넓힐 수 있는 집필에 시간을 많이 할애할 것입니다. 학자에게 있어서 책을 출판하는 작업은 자신의 연구성과를 정리해 발표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학문의 '열매'라는 거죠. 이런 결실이 맺어지고 있어서 그런지 연구의 재미를 요즘 아주 톡톡히 느끼고 있습니다." 한국 중문학을 다시 생각한다 손 교수는 사실 처음부터 중국문자를 공부하려 했던 건 아니라고 한다. 중국과 중국 문학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상당히 우연한 기회로 중문학을 전공하게 됐다고 한다. 또 솔직히 박사과정 이전까지는 별다른 학문적 성취나 흥미를 못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박사과정 때부터 파고들수록 진한 향이 느껴지는 중문학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렇게 오랜 과정과 시간을 통해 학문적 매력과 성취를 느낀 만큼, 손 교수는 중어중문학 교육 과정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또한 최근 임기 2년의 '한국중국학회장'에 선출되면서 그는 더더욱 중문학 교육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학회장으로서 그는 한국 중문학 연구와 교육의 방향을 잡는 작업에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다짐한다. "저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확실한 교육의 방향이나 개념 정립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최근의 경향을 보면 '실용주의'를 아주 강조하는데, 솔직히 걱정이 앞섭니다. 실용적인 가치관은 순수 학문인 인문학에서도 꼭 도입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외치는 것은 기초를 등한시한 실용주의입니다. 문학과 문화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는 제쳐두고 '말 만' 할 수 있는 중문학 교육을 하자는 주장도 나올 정도입니다. 그렇다보니 중문학 연구와 교육에서 크고 작은 부작용들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걸 최대한 바로 잡고 싶습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진정한 응용화와 실용화가 된다는 것을 역설하는 손 교수의 모습에서 자신의 학문세계에 대한 굳은 믿음과 원칙이 있는 인문학자의 강한 '열정'이 느껴졌다. 또한 갑골문자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는 손 교수의 얼굴 표정에 나타난 진지함을 통해 인간을 생각있는 존재로 만드는 인문학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인식할 수 있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손 교수가 지금까지 이룩한 연구 성과의 가치를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연구 성과들은 더욱 빛을 발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세형 학생기자 sehyung@ihanyang.ac.kr 사진: 이재룡 사진기자 ikikata@ihanyang.ac.kr 동영상: 박수영 학생기자 rawrat@ihanyang.ac.kr 학력 및 약력 손예철 교수는 서울대 중문과를 나와 국립대만대학교에서 문학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손 교수는 지난 1982년부터 본교 인문과학대 중어중문학과에 재직 중이며, 1992년부터 1993년까지는 하버드대학의 E.A.L.C 객원교수로 활동했다. 주요 저서로는 <은대정복인물통고>(3권), <東亞 프라임 中韓辭典>, <새로엮은 大學中國語> 등이 있으며, 논문은 총 22편을 작성했다. 또한 최근에는 임기 2년의 '한국중국학회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2002-10 01

[학생]국경넘은 사랑의 실천 필리핀 산모 감동시킨 간호학과 윤인아 양

국경 넘은 따뜻한 간호에 필리핀 산모 감동 "의사는 병을 고치지만 간호사는 사람을 간호한다" 국경을 넘은 따뜻한 봉사와 이를 잊지 못한 답례의 편지가 훈훈한 소식을 전하고 있다. 최근 본교 병원에서 출산한 필리핀 산모 Marites씨는 입원 기간 중 받았던 잊지 못할 간병과 친절을 잊지 못해 본교 간호학과장 앞으로 감사의 편지를 보내왔다. 화제의 주인공은 간호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인 윤인아 양. 국경을 넘은 사랑으로 주위를 훈훈하게 만든 나이팅게일을 만나보았다. - 필리핀 산모가 편지가 무척 감동적이다. 산모와 함께 보낸 시간에 대해 자세히 소개해 달라 그 산모는 실습 중에 만나게 되었는데, 사실 그 분은 산과 환자였고 나는 부인과 실습 중이었다. 아기를 낳고 나면 젖몸살이라고 해서 가슴이 붓고 매우 아프게 되는데, 환자는 첫 출산이라 젖몸살이 심했다. 마사지와 유축기 사용을 병행할 수 있도록 알려드렸다. 그러면서 차차 친해지게 되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게 됐다. 외국인으로서 불편을 먼저 말하는 편이 아니라 뭔가 도움을 줄수 있는 것이 없을까 먼저 고민을 했다. 수유 관리에 대해서 알려드리고, 모유의 보관 방법 등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남편이 없는 동안 외로움을 나누고자 많은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작은 친절인데 그토록 고마웠다니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다. - 국내 병원에서 외국인 환자를 맞았을 경우, 환자나 병원 모두에게 여러 가지 불편한 점들이 없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개선할 점들이 있다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아직은 많은 병원들에서 외국인 환자를 맞기에는 어려운 점들이 많이 있다. 외국인이 우리말을 잘 하지 못하거나 영어를 하지 못할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게다가 대부분의 외국인들이 무보험인 상황에서 경제적인 문제에 대한 지지체계를 찾는 것도 간호의 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감안해서 설명을 자세하게 여러 번 세심하게 반복하는 것도 중요하다. 기본적인 화장실 위치 안내, 수유 시간이나 아기 면회 시간에 대한 것들은 결코 한 두번의 설명으로 가능하지 않다. 설명을 잘 이해하셨는지, 행동으로 옮기시기에 무리가 없는지 등을 직접 보면서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따뜻한 대화와 정성이 외국인들에게 각별히 필요하다. - 언어가 통하지 않는 외국인 간병에 어려운 점은 없었나? 사실 별 어려움은 없었다. 내가 외국어를 잘해서가 아니고, 산모가 우리말을 잘 하는 편이었다. 영어라는 공통적인 언어도 도움이 많이 된 것은 물론이다. 조금 어려운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설명해 드렸을 때 확실히 이해했는지 언어적인 반응뿐만 아니라 실제 행동도 확인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가슴 마사지에 대해 설명을 드렸는데 별다른 이유 없이 안하고 계신다면 설명이 부족했을 가능성이 크다. 어려움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나에게 좋은 경험이었다는 생각이다. 영어 공부나, 학과 공부에 대한 진정한 필요성도 느꼈다. 간호라는 것이 이처럼 보람있는 일이라는 것도 새삼 깨닫게 된 계기가 됐다. - 며칠 전 간호학과의 나이팅게일 선서식이 있었다. 봉사의 삶으로써, 이 길을 선택한 특별한 계기나 이유가 있는가 어릴 적에는 꿈이 정말 많았다. 고3 때 대학 진로를 결정할 때에도 정말 힘들었다. 그러다 나가 가진 꿈들의 공통점을 생각해 봤는데, 모두 남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어릴 적에 병원을 많이 다녔고, 주변에 아픈 분들이 많았다. 내가 힘들었을 때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 항상 곁에 있었기에 힘든 때에 도움을 받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일찍부터 느꼈다. 그래서 내 삶을 통해서 나도 뭔가 남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의사보다는 간호사가 좀 더 인간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병의 치료는 병원이라는 환경에서만 가능한 경우가 많지만, 병원 밖에서도 아픈 마음까지 살필 수 있는 것은 간호사가 아닌가 싶다. 물론 이러한 진로 결정을 하기까지는 제 곁에서 도와준 많은 분들이 있었다. - 필리핀 산모는 물론, 남편 역시 윤인아 학생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고 편지는 전하고 있다. 그들에게 전하고픈 말이 있다면. 사실 아직 말하지 못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내가 더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이 편지를 받게 된 시기는 내가 이런저런 생각들로 한참 힘이 들었을 때다. 산모의 편지는 그런 중에 내가 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 주었다. 물론 내겐 많은 힘이 되었고, 삶에 힘을 낼 수 있는 전환점이 되었다. 오히려 내가 도움을 받았다고나 하는 것이 옳다. 아기가 건강하게 잘 클 수 있기를 기도하고 싶다. 또한 결코 쉽지만은 않은 한국 생활이겠지만 힘을 내기를 기원한다. - 진정 훌륭한 '간호'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또한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간호인의 삶을 살아갈 계획인가? 교수님들께서 항상 강조하시는 말씀이 있다. '의사는 병을 치료하지만 간호사는 환자를 간호한다'는 말이다. 나이팅게일이 했던 말로 기억한다. 간호란 전문성을 지니면서도 그야말로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이나 사람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정말 힘든 일이다. 앞으로 정말 멋진 간호사가 되려면 더 많은 지식이 필요하리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간호 분야뿐만 아니라, 영어와 같은 외국어 실력이나 병원 시스템 전산화와 관련된 컴퓨터 실력은 물론, 사회 전반적인 이슈들과 문화에 대해서도 말이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과 관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간호학이라는 학문이 임상 간호사뿐만 아니라 정말 많은 길들을 열어주기 때문에 앞으로의 정확한 진로 결정은 하지 못했지만, 지금의 생각을 잃지 않고 열심히 해나간다면 제게 주어진 일이 무엇인지 찾아나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김자영 취재팀장 apriljy@ihanyang.ac.kr 사진: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2002-09 22

[교수]`사람을 보고 사회를 읽는다`

"인구문제는 멀리 내다보고 미리 대비해야" 학문의 정도 지키는 인구학자 사회과학대학장 사회학과 김두섭 교수 매일 아침 학생들이 등교하기 2시간 전에 그는 출근을 한다. 그리고 정규 수업이 모두 끝난 뒤 정확히 2시간이 지나서야 그는 다시 퇴근채비를 한다. 수업의 끝과 시작에도 단 몇 분의 에누리가 없다. '딱히 할 줄 아는 취미도 없어 오직 공부만 한다'는 그의 무미건조한 고백이 섬뜩하기까지 하다. '교수는 학생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이며, 도톰한 안경 너머로 학생들을 주시하는 그의 강의에는 학문, 그 이상의 숙연함이 있다. 학문에 대한 성실함으로 20여년 가까이 묵묵히 자신의 연구실을 지켜온 한양의 칸트, 사회학과 김두섭 교수를 만났다. '통계'의 바다, 진실 찾는 숨은 그림 찾기 김두섭 교수는 인구학자다. 인구학은 출생과 결혼 및 사망에 관한 자료 수집과 그것들의 통계·수리적인 분석 방법 그리고 그 적용을 연구하는 협의의 형식인구학과, 인구 변동의 생물학적, 사회적, 경제적, 법적, 역사적 결정요인 등 인구 연구의 영역을 실체적이고도 이론적으로 연구하는 사회인구학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특히 현대에 이르러 사회문명의 발달로 사회구조가 복잡해지면서 지금까지의 학문 분야의 범위를 뛰어넘은 학제적 시점이 새로운 관심을 받고 있는데 그 중심에 인구학이 자리잡고 있다. 사회를 분석하는데 있어 통계적, 수리적 접근이 무엇보다 중요한 학문이다 보니, 김 교수 또한 방법론에 있어 주된 관심을 놓지 않는다. "통계라는 것은 한 나라를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인구와 경제에 관한 정보의 집합체, 나아가서는 그런 숫자들을 다루는 비법을 통칭합니다. 하루하루 복잡하고 빠르게 변화해 가는 사회현상을 이해하고 진단하여, 앞으로의 전망을 내리기 위해 통계는 정확한 현황 파악을 하게 해 줍니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나라에 인구의 크기를 숫자로 만들어 놓은 정보가 없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면 당장 국세청은 어떻게 세금을 걷고, 국방부는 어떻게 국방의 의무를 젊은이에게 지우겠습니까?" 김 교수는 이제 위로는 정책입안자에서부터, 아래로 개인에 이르기까지 통계란 모든 사람들의 '생활' 그 자체라고 말한다. 즉, 어떤 조직체든지 통계를 사용하지 않으면 기능을 유지하거나 존립할 수 없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고 그는 부연한다. 연일 언론 지상을 오르내리는 각종 통계를 보며 요즘 우리는 그의 말대로 '통계의 바다'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쉽게 깨닫기도 한다. 그렇다고 모든 통계가 사회를 정확히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김 교수가 경계하는 부분은 정확성을 표방하는 모든 사회조사에 내재한 '의도성'에 있다. "일부 사회문제라든지 정치적인 측면에 관한 조사는 어떤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조사를 일정 방향으로 의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른바 '여론몰이'를 말하는 겁니다. 단정하기 어려운 조사결과를 분석하고 해석하는데 있어서 일정 방향으로 의도적으로 유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일반사람들이 그것을 알아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조사는 신뢰성, 정확성, 대표성 이런 것이 생명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런 것들이 훼손된 상태에서 조사의 결과가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유포되고. 여과 없이 전달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한편 김 교수는 통계에 대한 정부의 인식에도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통계라는 것이 인간과 사회가 지닌 모든 경험의 축적계를 작성하는 매우 전문적인 작업임에도 우리나라는 통계에 관한 전문인력을 육성하는데 매우 척박한 환경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해외 선진국가들의 경우, 정부기관의 통계 전문가가 20년 이상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축적된 경험과 지식을 축적하는 반면, 우리나라는 너무도 쉽게 사람과 업무가 교체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통계를 딱딱하거나 어렵게만 생각하는 범사회적 풍토에도 김 교수의 우려가 자리한다. 이른바 '유저 프랜들리(user friendly)'. 보통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이해하며, 스스로 분석할 수 있는 그런 사회적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보다 많은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고 그는 역설한다. 상상해 보라. 군중이 전문가의 도움 없이 직접 사회를 분석하는 시대, 정치가 대중을 속이지 못하는 그 무서운 미래를. '누가 노인을 부양할 것인가?' 한국 인구의 위기를 말하다 현재 김 교수가 이사를 역임하고 있는 한국인구학회와 한국주택학회는 지난 11일'한국의 인구 및 주택' 보고서를 공동 발표한 바 있다. 이 보고서는 정부의 인구 정책을 유럽 선진국과 같은 '출산장려'정책으로 조속히 전환해야 한다고 제언하고 있다. 현재의 추세라면 20년 후에는 우리나라 역시 인구감소의 추세로 접어들 전망이다. 이에 김 교수는 그 시점이 더 당겨질 수도 있다고 진단한다. "우리의 인구문제는 매우 심각한 사태에 직면해 있습니다. 한 부부가 평생동안 출산하는 자녀의 수인 '합계출산력'이 1960년대 초, 6명에서 2000년 조사에서는 1.47명 정도로 떨어졌습니다. 2001년 조사에서는 더 낮은 수치로 나왔습니다. '합계출산력'이 2,1명으로 유지되어야 나라의 인구가 안정될 수 있음을 고려할 때 이것은 심각한 상황입니다. 몇 년 전 인구 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우리의 상황에서 출산력까지 저하된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출산율 저하로 노동력은 부족해지고 늘어난 노인 인구로 인해 부양 부담은 엄청난 압박으로 국가 경제를 위협할 수 있습니다." 김 교수는 노인인구의 부양부담을 10명이 1명을 부담하는 시스템에서 10명이 3, 4명을 부담하는 시스템으로 전환된다면 그 부양비용도 3배, 4배로 증가될 수 밖에 없다고 부연한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가 가진 연금제도, 의료보험제도도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게 될 것은 분명하다. 자기 소득의 10%가 노인 부양을 위해 사용되다가 그 부분이 30%로 늘어난다면 그에 따른 부양 부담은 상상을 초월하는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인구라는 것은 갑자기 문제가 생겼을 때, 정책을 만들어 하루 아침에 효과를 얻을 수 없는 것. 따라서 멀리 내다보고,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김 교수는 주장에 힘이 실리는 것은 당연하다. 남북통합, 미리 준비해야 인구문제에 대해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김 교수의 생각은 북한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동서독의 통일과정에서 자유주의 서독의 인구가 동독의 그것에 비해 거의 4배의 수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 후 동서독은 이질감 극복을 위해 10여년이 넘도록 고통을 겪었던 전례가 있다. 잠정적인 집계로 남한의 인구가 북한 인구의 2배에 달하는 현 상황을 고려할 때, 동서독의 경우보다 더욱 열악한 환경이 될 것이라고 김 교수는 설명한다. 또한 단편적인 지식들만 가지고 북한에 대해 전부 안다고 생각하는 오류는 경계해야 할 것이라고 김 교수는 덧붙인다. "북한에 대해 알려고 하기 전에 북한이란 그릇 안에 사람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회를 지탱하는 힘은 그 속에 존재하는 인간입니다. 그 안에 사람이 어떻게 분포되어 있고,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겉으로 내보이는 모습들보다 중요합니다. 일부 탈북자들의 말이나 외신의 보도에만 의존하여 북한에 대한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것'과 똑같은 상황을 연출할 것입니다. 동서독의 통합과정을 지켜본 장점을 이용해서 통일 후에 나타날 부작용을 최소화 할 수 있도록 북한 구조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야 할 것입니다." 김 교수는 지난 1994년 1월 초, 집계된 북한인구 센서스 자료에서 지역적 인구 집계와 연령적 인구 집계가 70만명 이상 차이가 났던 사례를 들며 우리가 가진 정보의 낙후성을 지적한다. 통합에 대비하여 북한의 내용을 이루는 사람들의 구조와 골격에 대한 연구를 진전시켜 북한 전체의 모습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사전 준비가 필수적임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영호남의 지역 감정보다 더욱 심각할 남북한의 이질적인 지역정서 문제는 결코 짧은 기간에 해결될 성격의 것이 아닌 까닭이다. 사람에 대한 탐구, 그들에게 돌려주고 싶다 1975년 서울대 사회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977년 동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1983년 인구학의 메카라 일컬어지는 미 브라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김 교수를 놓고 이른바 최고의 '엘리트'라 칭하는 것에는 누구도 이견을 달지 않는다. 인구문제와 관련하여 모든 언론 보도마다 그의 클립이 빠지지 않을 만큼 명실공히 최고의 인구학자가 된 데에는 우수한 교육환경보다 김 교수 스스로가 견지한 학문에 대한 성실함을 우리는 먼저 상기해야 한다. 그러나 인구, 즉 사람 그 자체가 학문적 테마인 김 교수가 스스로의 성취와 기쁨을 다시 사람에게 돌리는 것은 어찌보면 더욱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제가 사회학을 선택한 것도 그 중에서도 인구학을 전공하게 된 것도 모두 휼륭한 스승님들이 다 이끌어 주셨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진정 부모님과 스승에게서 그리고 동료에게서 많은 것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주변분들에게 받은 것만큼 저 역시 사회에 꼭 돌려주고 싶습니다. 사람을 공부하는 만큼, 그 공부의 결과가 부끄럽지 않아야겠죠. 진정으로 내가 받아온 것 만큼만이라도 내 주변사람들에게 베풀고 갈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김자영 취재팀장 apriljy@ihanyang.ac.kr 사진: 이재룡 사진기자 ikikata@ihanyang.ac.kr 동영상: 박수영 학생기자 rawrat@ihanyang.ac.kr 학력 및 약력 김두섭 교수는 서울대에서 1975년 문학사를, 1977년 동대학원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1983년 미 브라운대학(Brown Univ.)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다. 1984년부터 현재까지 본교 사회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있으며, 현재 사회과학대학장을 맡고 있다. 한국 인구학회와 한국사회학회의 이사직을 겸임하고 있으며, 국내 대표적인 사회학회지 '한국사회학'의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다. 21세기 남북문화 연구원 이사,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 종합분석 연구위원회 연구위원, 본교 아태지역연구센터 연구위원을 역임하고 있기도 하다. 국내외 70여편의 논문이 있으며, 20여권의 저서가 있다.

2002-09 22

[학생]보석디자인 공모전 금상 수상한 디대 임은주 양

총 출품작 683점, 국내 최대 규모 보석디자인전 동양적 이미지를 오리엔탈리즘으로 표현 이태리 보석디자이너협회와 국제보석디자이너학술협회가 후원하고 LG홈쇼핑이 주관한 '제 1회 LG홈쇼핑 국제보석디자인 공모전'에서 본교 임은주(디자인대·금속공예4) 양이 금상을 수상했다. 에스닉을 주제로 특별한 날을 위한 보석디자인을 요구한 본 대회에는 무려 683점이나 되는 출품작이 접수되 국내 최대 규모의 보석 디자인전이란 평을 받았다. 이번 공모전에서 출품작 '영혼의 소리'를 통해 금상을 수상한 임 양을 만나 공모전에 대한 소회를 들어보았다. - 이번 공모전에 참가하게 된 계기는 디자인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공모전은 아주 많은 편이다. 특히 우리 디자인대 내에서는 교수님이나, 선배들을 통해 이런 공모전에 관련된 정보는 상당히 빠른 편이다. 이번 공모전은 교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알게 되었다. 국제대회가 어떤 것인지 몸으로 느껴보고 싶었고, 졸업하기 전에 한번 더 소중한 경험을 남기고 싶어서 도전해 보자는 결심을 하게 됐다. -수상은 처음이라고 하던데 수상 소식을 접했을 때 기분은 어떠했나? 교수님께서 처음 말씀해 주셨을때는 믿기지 않았다. 내 작품이 수 백개의 작품들과 경쟁해서 1차 심사와 2차 심사를 통해 올라갔다는 걸 생각하면 정말 신기하기만 하다. 학교에서는 아무도 모르고 있을줄 만 알았는데 선후배들을 만날 때면 다들 축하해 주셔서 고맙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다. 이렇게나마 나를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어서 뿌듯하다. - 수상작 '영혼의 소리'는 어떤 작품인가 이번 공모전은 실물을 제작하기 전 아이디어를 스케치하는 단계인 '렌더링'으로 출품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컨셉 또한 다양하게 주어져 있었지만, '영혼의 소리'는 오리엔탈리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평소에도 친구들로부터 디자인 스타일이 특이하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 편인데 이번 작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금은 이국적이고 독특한 편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원을 사용하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데 나만의 스타일이 그대로 표현된 것 같다. - 작품의 어떤 점이 수상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 같나 동양적 이미지인 금빛, 자색, 녹색, 적색의 보석과 금속을 사용한 것이 화려함을 극대화했던 것 같다. 팬던트 부분의 유통적 이미지와 목걸이 줄 부분의 직선적 이미지가 동양적 미를 현대인들의 취향에 맞게 디자인하면서 강한 카리스마를 주도록 했다. 보석물림은 자연이 인간을 포용하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 편안하게 감싸안는 느낌이 들도록 했다. - 4년동안 금속디자인을 전공하면서 느낀점은 디자인대 내에서도 다른 과들은 대부분 컴퓨터 작업을 통해 작품을 구성한다. 하지만 금속공예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스케치 한 후 직접 손으로 작품을 창출해 낸다. 내 손을 통해 작품이 만들어 질 때의 뿌듯함은 엄마가 아이를 낳았을 때의 기분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전공은 편한 복장으로 작업할 때 효율성이 높기 때문에 치마도 잘 못 입고, 다른 과처럼 멋부리기도 어렵다.(웃음) - 도움주신 분들에게 한마디 우선 어릴 적부터 미술하는 것에 적극적으로 뒷받침이 되어주신 어머니와 묵묵히 지켜봐 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린다. 이번 공모전을 통해 받은 얼마 안 되는 상금이나마 부모님의 어깨를 가볍게 해 드릴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수시로 많은 정보를 주시고 제 디자인의 성숙도를 높여주신 추원교, 이형규, 이광선, 백경찬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최수정 학생기자 81choi@ihanyang.ac.kr

2002-09 15

[동문]`21세기 한국 해양정책의 집행관`

"해양정책은 '개발'과 '보존' 동시에 잡아야" 최초 중국 항로 개설에서 미래 해양정책까지 해양수산부 해양정책국장 서정호 동문 (법학 73) "해양수산부는 풍요로운 바다를 국민과 함께 만들어 가겠습니다." 해양수산부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모토다. 굳이 이러한 구호가 아니더라도 바다가 풍부한 '자원의 보고'임을 재삼 강조하는 것은 이제 상투적인 느낌마저 든다. 식량자원에서부터 광물자원 그리고 생명산업에서부터 관광산업에 이르기까지 바다가 지닌 가능성은 무한하다. 그런 측면에서, 바다로 먼저 진출한 국가들이 전성기를 누린 19세기처럼, 21세기는 바다의 자원을 먼저 개척하는 나라들이 번성할 것이란 예측을 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개발'과 '보존', 두 마리 토끼 잡는다 해양수산부 해양정책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서정호(법학 73) 동문. 그는 현재 해양수산부 내에서도 각종 해양정책과 관련된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핵심 관료다. 구체적으로는, 해양 환경 보전 그리고 해양 자원 개발과 관련된 정책의 수립 및 집행이 서 국장의 중심 업무이다. '개발'과 '보전'이란 다소 상충된 영역을 동시에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그냥 보면 대립적인 부분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 추진되고 있는 이른바 차세대 해양정책들은 바다를 최대한 보호하면서 동시에 최대한 개발하자는 것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양식기술 같은 것을 개발하면서도 양식장의 인근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관리도 철저히 하는 것이죠. 해양 환경의 보존을 통해 보다 다양하고 많은 양의 자원을 지속적으로 확보하자는 것이 해양수산부의 방침입니다." 서 국장은 이제 단순히 바다를 어업의 현장으로서만 인식해서는 아무런 발전이 없을 것이라 지적한다. 첨단 과학기술과 장기적인 안목을 이제 해양 정책에도 적용시켜야만 한다는 것이 서 국장의 지론이다. 가령 어업의 경우만 하더라도 과거와 달리 단순히 물고기를 잡는 기술 개발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설정하고 있으며, 어류 자원의 고갈 현상이 심각하게 제기되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현재의 WTO 체제에서는 외국산 수산물이 싼값에 국내 시장에 들어오는 것을 막을 길도 사실상 전무한 형편이다. 따라서 지금 당장은 힘들더라도 바이오 기술의 개발을 바탕으로 한 양식산업, 어촌과 갯벌을 활용한 관광산업, 그리고 해저 지하자원을 발굴하는 광물산업 등을 중심으로 해양산업의 전반적인 틀이 옮겨가는 게 바람직하다고 서 국장은 강조한다. 실제로 이러한 변화의 움직임은 이미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서 국장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도 태평양에서 구리, 망간, 니켈, 크롬 등과 같은 심해 광물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또한 수심 200미터에서 흐르는 심층수 개발과 해양 바이오 산업 육성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해양 전문통 해양정책과 관련된 서 국장의 거시적인 시각은 해양수산부 관료로서의 전문성을 잘 증명해 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러한 서 국장의 전문성은 지금까지 그가 걸어온 해양 행정관료로서의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에 배경을 두고 있기도 하다. 대학 3학년 때인, 지난 1975년 행정고시 17회로 관계에 입문한 서 국장은 해운항만청(舊 해양수산부) 진흥과장, 주중 대사관 초대 해양수산관, 기획예산담당관, 공보관, 안전관리관 등과 같은 부처 내 핵심 보직들을 두루 거쳤다. 그리고 지난 2000년부터 2002년까지 현정부 내 100대 요직(월간조선 2001년 2월자 참고) 중 하나로 꼽히는 해운물류국장으로 근무했다. 다양한 보직을 거친 만큼, 서 국장이 이룩한 성과들도 다양하다. 해운항만청 진흥과장으로 근무하던 지난 1990년, 서 국장은 당시 미수교 국가이던 중국과의 과감한 협상을 통해 카페리 항로를 최초로 개설했다. 또한 주중 대사관 해양수산관으로 재임 중이던 1993년에는 '한중 해운협의회'를 정례화 시키기도 했다. 서 국장이 해양수산부 내 '중국통'으로서 인정받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또한 해운물류국장으로 근무하던 시절에는 항만 운영과 관련된 업무의 일부를 민간 부문에 위탁토록 하는 작업인 '항만공사' 설립과 선박회사들의 선박활동을 쉽게 하는 '선박투자회사법'과 같은 큼직큼직한 사안들을 기획하기도 했다.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부처 배치를 받을 때 해운항만청이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처음 만들어진 부처라서 저희 기수에서 20여명이 해운항만청으로 발령을 받았죠. 당시만 해도 아무런 관련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걱정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쪽 분야의 일이 규모가 크고, 변화가 많은 특징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됐습니다. 업무가 제 적성에도 맡는 것 같아 재미도 있고, 보람도 많이 느낍니다(웃음). 어촌 출신은 아니지만 바다에 갈 때마다 아주 기분이 좋고, 친근함을 느낄 정도죠. 배 타는 것에도 비교적 적응을 잘하는 편이고요." 많은 후배들이 공직자의 길 걸었으면 대학 생활 중 기억에 남는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서 국장은 자신의 대학 생활이 너무 '드라이'했던 것 같다며 웃는다. 당시는 사회적으로도 어두웠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캠퍼스의 분위기도 무거울 수밖에 없었노라고 회고한다. 그러나 행정고시반에서 함께 공부했던 동기, 선·후배들과의 추억을 꺼내놓으며 환한 표정이다. "행정고시반에서 같이 공부를 했던 동기, 선·후배들과는 지금도 자주 만납니다. 박혁진(경제 73) 서울지방조달청장, 이종정(경제 73) 국가보훈처 기획관리관, 신현욱(법학 73) 정보통신부 정보통신연구진흥원 수석 전문위원 등과 같은 행정고시반 73학번들과는 지금도 매달 한 번씩 등산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학교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며 서 국장은 좀더 많은 후배들이 공직자의 길을 걸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특히 그는 해양수산부의 경우 업무의 성격이나 규모가 워낙 방대하고, 특수하기 때문에 아직 개척의 여지도 많다며, 공직에 관심 있는 후배들이 해양수산부에도 많이 진출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제가 공직에 있어서이겠지만, 더욱 많은 후배들이 행정고시를 통해 공직에 진출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우리 학교 출신의 행정고시 합격자들은 양적으로도 많고, 전 부처에 걸쳐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특히 초기 합격자들이 소속 부서의 중심적인 국장급으로 활발히 진출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행정계에 들어올 후배들은 선배들의 도움도 많이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웃음). 그런데 갈수록 행정고시보다는 사법고시를 훨씬 더 많이 준비하는 것 같아 조금 아쉽군요." 그는 이번 여름 한바탕 '전쟁'을 치루었다고 했다. 태풍으로 인해 우리나라 인근 연안에 엄청난 양의 쓰레기들이 떠내려왔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규모 적조 현상까지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국무총리 서리 인사가 있었고, 국정감사를 준비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그래서 서 국장은 이번 가을에도 또 한 번의 '큰 전쟁'을 치뤄야 할 것 같다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그의 웃음 속에서 아주 맑은 한국 해양의 기상도를 발견한다. 이세형 학생기자 sehyung@ihanyang.ac.kr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학력 및 약력 서정호 해양수산부 해양정책 국장은 1973년 본교 법학과에 입학해, 3학년이던 1975년, 행정고시 17회로 관계에 입문했다. 해운항만청(舊 해양수산부)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한 후, 지난 1986년 미국 워싱턴대에서 해사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부산지방해운항만청 항무과장, 해운항만청 진흥과장, 행정관리담당관, 주중 대사관 해양수산관 등으로 근무했다. 해양수산부 발족 후에는 기획예산담당관, 공보관, 안전관리관, 해운물류국장 등을 역임했으며, 2002년 현재, 해양정책국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2002-09 15

[교수]`즐거운 춤이 가장 훌륭한 춤이다`

몸의 언어로 빚어낸 한글 사랑 생활체육과학대학장 이숙재 교수 '디베르티스망(divertissement)'이란 것이 있다. '막간 여흥' 혹은 ‘기분 전환'을 지칭하는 이 말은 고전발레와 현대무용에 있어 유희를 위한 일련의 무용을 말하는 것으로, 작품의 줄거리와 관계없이 볼꺼리를 위해 삽입하는 화려한 춤이다. 무용에서 디베르티스망이 적절히 강조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춤이란 '이해'에 앞서 '보는' 예술인 까닭이다. 안산캠퍼스 생활무용예술학과의 이숙재 교수 역시 '춤이란 고귀하고 우아하기 이전에 즐거워야 하는 것'이라 단정하고 나선다. '본다'라는 행위는 언제나 말보다 선행한다. 나는 춤춘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 교수는 오는 9월 26일 아시안 게임 개막식 공연에 이어, 10월 9일과 10일 이틀 간 국립대극장에서 있을 한글날 기념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밀물현대무용단의 이사장을 비롯한 각종 직함들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최근 생활체육대학 학장에도 임명된 바 있다. 분주한 일상이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학장으로서도 정도를 따라, 정의롭게 그리고 합리적으로 업무에 임할 테지만 결코 무용인의 삶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이라 답한다. '프로는 아름답다'라는 모 광고의 문구가 머리 속을 스치는 순간, 공연에 대한 이 교수의 분주한 언어가 계속된다. "아시안게임 개막식 공연의 대 전제는 '통일로, 세계로, 미래로'입니다. 특히 이번 아시안 게임에 북한 선수들이 우리와 함께 경기에 출전하게 됩니다. 한글을 주제로 작품을 준비한 까닭은 통일이라는 민족의 대 염원을 앞에 두고, 북한과 우리의 공통점을 찾다보면 언어가 제 1순위일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한글은 우리가 한 민족이라는 가장 극명한 상징입니다. 이번 개막식 공연의 춤을 통해서 북한 선수들뿐만 아니라 모든 동포들이 그것을 꼭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아시안게임 개막식 공연에 이은 10월의 공연은 문화관광부 주최로 범국가적 차원에서 준비된 한글날 행사의 일환이다. 매년 쉬지 않고 무대에 올려 온 공연에 대해 이 교수의 애착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올해의 공연을 위해서도 일 년여 시간 동안 준비를 해왔노라 설명하는 이 교수는 학예회를 앞둔 소녀처럼 상기된 표정이다. 춤으로 승화된 한글, '읽지 말고 느껴라' "미국 유학시절에 다민족이 모여서 수업을 듣는데, 과제가 그 민족이 가진 고유한 소재를 통해 춤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한국의 기와집, 덕수궁, 장구 등의 사진을 가져갔는데, 중국 동료와 일본 동료가 가져 온 사진들이 저의 것과 너무 흡사했습니다. 왜냐하면 디자인에 있어서 차이는 있지만, 그 모든 것이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의 영향 아래 이루어 진 탓이었죠. 너무나 낙심하여 한국문화원에 가서 조사했더니 한민족만이 가진 독자적인 문화유산은 오로지 한글과 금속활자뿐이었습니다" 20여 년의 세월동안 이숙재 교수를 한글에 매달리게 만들었던 '한글사랑'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 때부터 한글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이 교수는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한글을 무용에 끌어 들였다. 춤 역시 무언(無言)의 언어임에 자꾸만 '말하고자' 하는 그녀의 욕망이 결국 '언어'에 귀착된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교수의 이런 '한글 사랑'이 처음부터 모두에게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다. "홀소리와 닿소리를 주제로 처음 무용을 만들었더니, 한글학회 분들이나 다른 무용하는 분들이 많이 반대하셨습니다. 그 동안 무용이라고 하면 서정적인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사실적인 소재로 무용을 만들어낸 제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던 거죠. 처음에는 이런 분들의 냉대에 힘들기도 했지만, 대한민국무용제에 출품한 작품이 수상을 하면서 점차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에 한글이 예술로 승화될 수 있음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무용제 수상 이후 한글의 홀소리와 닿소리 뿐 아니라 훈민정음 창제 원리인 '천(天)·지(地)·인(人)' 사상과 음양오행의 '화수목토(火水木土)'사상 모두를 무용의 소재로 개발해 오고 있다고 이 교수는 부연한다. 게다가 이 교수가 만들어낸 작품들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을 비롯해서 현대 무용계에서는 드물게 수 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무대에서 공연되어 왔다. 전국의 한글사랑 동아리들과 한글을 사랑하는 학자들의 지극한 애정 때문에라도 공연을 쉴 수 없다는 이 교수의 말에 행복한 웃음이 번진다. "이번 공연의 주제는 '움직이는 한글' 입니다. 많은 부분 사회 고발 형식을 가지고 있죠. 인터넷 시대, 디지털 시대에 돌입하면서 한글이 점차 왜곡되고 변형되어 가고 있습니다. 외래어가 접목된 단어들이 너무도 빈번히 사용되고, 이미지들이 언어를 대체해 가고 있습니다. 특히 한글의 변화주기가 50년, 10년으로 줄어들다가 근래에는 1년이 채 되지 않는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한글이 변모해 갔을 때 우리의 민족성과 자주성이 어떻게 변화되어 갈 것인가를 생각하며 작품을 준비했습니다." '즐거운' 춤이 '훌륭한' 춤이다 공연 예술이란 관객과의 호흡과 감동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문화다. 따라서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무대로 이끌어 내고자 하는 것은 모든 예술인에게 공통된 바램이다. 특히 현대무용은 타 예술에 비해 아직 우리나라에서 그 지지기반이 미약하기에 이 교수가 지닌 바램은 더욱 크다. 안산캠퍼스에 건립중인 무용관을 두고 마치 새 집에 이사를 앞둔 신혼부부처럼 이 교수는 설레이는 마음을 비춘다. 학교 당국에 깊은 감사를 표하는 동시에, 이번 기회를 통해 한양의 문화의식이 발전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인다. "현대무용의 대중화를 위해서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우선 무용이 즐거워야 합니다. 집에서 텔레비전 드라마를 볼 시간에 공연장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연이 즐거워야 합니다. 둘째는 그 작품을 연구해서는 안됩니다. '저것이 무엇일까?'라는 것을 가지고 보면 그 작품은 이미 실패한 것입니다. 영화를 볼 때 사전에 공부하고 가지 않듯이 무용에 있어서도 먼저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치밀한 호평보다 '즐거웠다'라는 관객의 반응이 작품에 던지는 최고의 찬사입니다." 이 교수는 현대 무용의 대중화를 위해 두 가지 조건을 설명하면서 무엇보다 무용에 대한 편견을 버릴 것을 당부한다. 기존에는 무용을 한다고 하면 무조건 키가 크고, 수려한 외모와 함께 날씬해야 한다는 사회적 편견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점차 미인에 대한 기준들이 무너지고, 무용도 개성에 맞는 스타일이 요구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 뚱뚱한 사람은 뚱뚱한 데로, 키가 작은 사람은 작은 데로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춤이 일상으로 들어온 시대에 우리는 있다고 덧붙인다. 욕망의 피날레, '갈 길이 멀다' 한 시간 여 동안의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지금까지의 수많은 작품들과 수상작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단호한 표정 속에 '없습니다'라는 짧은 대답이 뒤를 잇는다. 화려한 수상 경력을 무색하게 만드는 예술가의 끝없는 욕망이 짧은 언어에 담겨있다. "20대부터 인간의 세포가 노화되기 시작하여, 30대가 되면 늙기 시작하고 40대가 되면 기능이 저하되고, 50대가 되면 갱년기가, 60대가 되면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집니다. 어떤 면에서 저도 이미 무용수로서의 기량을 점점 잃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무가가 되어 내가 가진 철학과 사유를 무용으로 승화시킬 수는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없더라도 나의 작품이 200년, 300년 그리고 영원히 남기를 희망합니다. 평생을 바쳐서라도 그런 작품을 만들어 내고 싶습니다. 아직은 갈 길이 멉니다." 김자영 취재팀장 apriljy@ihanyang.ac.kr 사진: 이재룡 사진기자 ikikata@ihanyang.ac.kr 동영상: 박수영 학생기자 rawrat@ihanyang.ac.kr 학력 및 약력 이숙재 교수는 이화여자 대학교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뉴욕대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건국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밀물현대무용단 이사장, 한국무용협회 이사, 한국현대무용진흥회 부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1989년 제6회 코파나스상을 비롯해서, 1991년 한국예술가협회 최우수 예술가상(홀소리·닿소리), 1993년 서울무용제 대상 및 안무상, 1997년 이사도라 무용예술가상, 2000년 제1회 PAF 예술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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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세계 산부인과학회 최우수논문상 수상 박문일 교수

한양 태아감시시스템 개발로 정상발육여부 감별 "부드러운 출산환경 만들기에 앞장설 터" 위클리한양 '한양의 맥박을 찾아서' 서른 다섯 번째 주인공이었던 박문일(의대·산부인과) 교수 연구팀이 세계 산부인과 학회(IJGO)가 주는 전년도 최우수 임상연구논문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박 교수는 지난 2000년 1월 서울방송에서 방영된 뮤지컬 배우 최정원 씨의 수중분만을 지휘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미 지난해 본교에서 최우수교수상을 받은 박 교수에게 1년여만에 또 다시 찾아든 수상의 기쁨을 들어보았다. - 세계 산부인과 학회 최우수 논문상 수상 소감은 사실 세계적인 학회에 논문을 제출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논문 제출마다 매번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이번 수상 논문은 10여 년 이상 끊임없이 매달려 연구한 결과를 완성한 것이므로 기쁨이 더욱 크다. - 이번 수상 논문의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지금까지는 산모가 태아의 건강상태를 살펴볼 때 주로 초음파 검사를 이용하고, 임신 중기 이후에는 심박동검사를 병행해 알아보았다. 그러나 사실 심박동수가 정상이라고 해서 태아가 반드시 건강한 것은 아니며, 심박동검사는 의사가 눈으로 보고 판단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신개발 소프트웨어를 통해 태아의 정상발육 여부 감별 기법을 연구한 것이 이번 논문의 주 내용이다. -자체 개발한 한양 태아감시시스템은 어떤 역할을 하나 한양 태아감시시스템은 심박동 자동분석 소프트웨어이다. 우리 연구팀은 10여 년 동안 임산부 6천 4백 55명을 대상으로 태아 심박동 주요 변수를 분석하고, 태아의 정상발육 여부를 감별할 수 있는 기법을 연구했다. 이 소프트웨어는 그간의 연구 과정 데이터를 정확히 분석해내고 통계치를 산출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신개발 소프트웨어는 태아의 정상발육 여부를 더욱 정확하게 진단해낼 수 있도록 돕는 장치이다. - 신개발 소프트웨어의 명칭에 '한양'이라는 본교 명을 사용한 것이 눈에 띈다. 모교 사랑의 마음이라 생각해주면 좋겠다. 한양대학교에서 공부했고 또 지금은 한양대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어 우리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다. 이번 논문은 실용학풍이라는 한양대학의 슬로건과도 맞물려 더욱 좋은 결과를 얻은 것 같다. 후배들이 좀 더 자신감을 갖고 한양인의 정체성을 만들어내길 바란다. - 2000년 첫 날 방영된 수중분만 TV 프로그램을 기억하고 있다. 그 후 우리의 출산 문화는 어떻게 바뀌었나 TV 방영 이후 수중분만 뿐만 아니라 좌식분만, 그네분만 등 좀 더 편안한 출산 환경을 찾는 산모들이 크게 증가했다. 사실 의사의 관리는 일부 위험한 임산부들에게 필요한 것이지 모든 임산부들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유럽에서는 오래 전부터 임산부들이 편안한 출산 환경에서 아기를 낳도록 해왔고, 그러한 방식이 수(水)치료 개념으로 발전되었다. 현재 우리나라는 수중분만 등 수(水)치료 개념이 널리 알려지면서 제왕절개 시술비율이 6%나 감소했다. - 앞으로의 계획은 대한 태교 연구회를 만든 것이 올해로 삼 년째이다. 앞으로 전공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아 또 한번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내도록 노력하겠다. 또 부드러운 출산환경 운동(gentle birth movement)을 계속 펼쳐 우리 임산부들이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아이를 낳고, 고통을 줄일 수 있도록 힘쓰겠다. 김모련 학생기자 moryun@iha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