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2232건
뉴스 리스트
게시판 리스트 컨텐츠
2019-05 28

[동문][NOW 꿈꾸는 사람들] ‘유척 정신’으로 무장한 대한민국 경제 사령탑 (1)

지난해 11월 9일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임명된 홍남기 동문은 한양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행정고시 29회로 공직에 입문했다. 예산 전문가이자 경제 관료로 초대 국무조정실장을 역임해 국정 과제에 대한 이해도가 넓다고 평가받는 그가 경제 전반을 아우르며 우리나라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정리. 편집실 ▲홍남기 동문(경제학 80) Q. 경제부총리가 된 후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A. 무엇보다 우리 경제의 활력 제고를 위해 정말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경제장관회의 등 각종 회의 주재, 국무회의·총리회의 등 참석, 경제정책 조율회의 진행, 산업 및 수출 현장 방문 일정 등이 빼곡합니다. 특히 취임 시 말한 소위 ‘1+2+3 약속’, 즉 경제팀 one 보이스(1), 정부-청와대 두 목소리(2) 없도록 조율, 소상공인·중소기업·대기업(3) 등 매주 현장 방문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매일 빠듯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최근 한 달 동안 미국 워싱턴DC에서의 G20 재무장관회의 및 IMF/WB(국제통화기금/세계은행) 총회 참석, 북경에서의 일대일로 정상회의 참석, 피지에서의 ASEAN+3(동남아시아국가연합+한·중·일) 재무장관회의 및 ADB(아시아개발은행) 총회 등 세 차례의 국제회의에 대표로 참석했습니다. Q. 현재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A. 1985년 한양대를 떠난 후 줄곧 경제기획원-재정경제원-기획예산처-기획재정부 등 한 부처에서 근무했습니다. 물론 청와대와 외교부(주미대사관) 파견 근무도 있었지만요. 공직을 시작한 경제부처에서 33년 만에 해당 조직의 장에 오르는 운 좋은 기회를 얻었습니다. 제가 공직 생활 내내 지녔던 신조는 두 가지입니다. 나의 역량과 실력을 높이는 것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열심히 성실하게 업무에 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념이 저의 자산이었고 성장에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물론 그 바탕에는 한양대에서 대학원까지 공부하며 축적한 경제학 지식과 늘 몸에 체화되도록 듣고 접했던 건학 정신이자 교훈인 ‘사랑의 실천’이 있었습니다. Q. 공직 경험을 통해 얻은 자신만의 철학이 있다면요? A. 오랜 공직 생활을 하며 한결같이 지닌 마음가짐은 정도(正道)입니다. 이는 업무나 생활에 있어 늘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개인적으로 조선시대 유척을 가장 좋아해 제 스스로 이를 ‘유척 정신’이라 이름 붙이고, 공직 생활 내내 가능한 이를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Q. 재학 당시와 지금의 대학이 다른 점이 있을까요? A. 제가 다닐 때 대학은 ‘학업+학문 연구’에 중점을 뒀다면, 지금의 대학은 ‘학문 연구+산학 협동+창·취업 연계’ 등으로 그 영역이 크게 확대되는 양상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양대는 순수 학문 연구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산학연 연계 강화 및 활발한 창업 연구·지원 등으로 발 빠르게 선제 대응해 온 대학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서울캠퍼스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ERICA캠퍼스의 부각이 가장 뚜렷한 사례라고 볼 수 있지요. Q. 대학 재학 시절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이 있나요? A. 한양대 기숙사에서 졸업할 때까지 숙식하며 공부했기 때문에 제게는 한양대 캠퍼스 자체가 가장 그리운 곳입니다. 대학교, 대학원 생활의 모든 것이 한양대 캠퍼스에 녹아 있어 제 청춘이 그대로 머문 곳이기도 하지요. 기숙사에서 저를 포함한 80학번 동기 네 명이 함께 고시 공부를 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합격했습니다. 모두 기획재정부에서 함께 공직 생활을 하고 퇴직했지요. 저만 아직 공직에 복무 중입니다. 한양대 출신이라는 동지애와 친우애가 공직 생활 내내 큰 자산이었습니다. Q. 예전 인터뷰에서 다시 대학생으로 돌아간다면 ‘세계 여행’을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으신가요? A. 예. 변함없습니다. 대학생에게 공부가 전부는 아닙니다. 큰 세상을 경험해 보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며 글로벌한 시야를 갖는 것이 정말 중요해요. 개인적으로는 공직 기간 중에 영국 유학(2년), 미국 워싱턴주정부 예산성 파견 근무(2년), 워싱턴DC 주미한국대사관의 경제공사참사관 근무(3년) 등 해외 근무 경험과 수많은 해외 출장으로 글로벌 마인드의 중요성을 더욱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대학생으로 돌아간다면 주저 없이 세계 여행을 할 겁니다. 퇴직 후 가장 하고 싶은 저의 위시 리스트 중 하나가 가보지 않은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시야와 견문을 넓히는 것이기도 합니다. Q. 한양의 후배 또는 동문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A. 지금 우리는 초연결, 초지능화로 대변되는 4차 산업혁명의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이제까지 인류가 경험해 보지 못한 대변화가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었다면, 지금은 빠른 물고기가 느린 물고기를 잡아먹는 격이랄까요. 이런 변화에 적응하는 게 쉽진 않겠지만, 빠르게 적응할수록 기회와 가능성은 그만큼 많아질 것입니다. 우리 한양대 동문 그리고 후배들께서 시대를 잘 읽고 그 흐름을 타서 4차 산업혁명의 주역으로 우뚝 서길 기대합니다. 사랑한대 2019년 05-06월 (제248호) 이북 보기

2019-05 27 중요기사

[학생]코드(code)에 옷을 입히다

코드(code)는 컴퓨터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다. 컴퓨터에 명령들을 작성할 때 코드를 사용한다. 디지털 시대를 맞아 코드를 작성하는 ‘코딩’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코드는 교육을 받지 않으면 읽기 힘든 만큼 가독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이영수(컴퓨터공학부4) 씨는 코드의 특정 키워드를 자동으로 칠해주는 프로그램(클릭 시 관련 사이트로 이동) ‘Color Scripter’를 개발해 6년째 운영하고 있다. Color Scripter 탄생 이영수 씨는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Color Scripter’를 개발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컴퓨터에 관심을 가진 그는 여러 언어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 씨는 블로그에 본인이 알고 있는 내용을 코드와 함께 강의로 올리기 시작하면서 불편함을 느꼈다. 사용할 수 있는 적합한 구문 강조법(Syntax Highlighter)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영수(컴퓨터공학부 4) 씨는 “필요한 구문 강조법이 존재하지 않아 직접 만들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프로젝트는 사용자들에 의해 자체적인 생태계로 구성된다. 이 씨는 “Color Scripter를 사용할 시 표식을 남기게 했고, 사용자들이 블로그에 Color Scripter를 사용한 코드를 올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표식이나 링크를 통해 Color Scripter에 찾아온 방문자 수가 늘어나 현재는 일평균 550명을 기록했다. 점점 증가하는 사용자 수는 6년간 지속할 수 있게 한 동력이 됐다. “모르는 사람들이 제가 만든 것을 사용하고, Color Scripter를 써서 올린 블로그 글을 종종 발견했습니다. 굉장히 뿌듯한 경험이죠.” 유료화보다 값진 경험 이영수 씨와 사용자들이 함께 만든 Color Scripter는 무료 웹사이트다. 이 씨는 “사용자들에게 무료 서비스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며 “돈을 버는 제품은 사용자들의 불만을 바로 처리해야 하는 책임감이 필요하지만, 무료이기 때문에 재미있게 운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용자들은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어 Color Scripter의 생태계를 바꾸고 있다. 이 씨는 이들의 의견을 반영해 디자인 변경, 언어 추가, 옵션 설정 등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한다. 찾는 서비스가 없을 시 직접 쉽게 만들고 공유할 수 있는 ‘확장 스토어’도 생성했다. (클릭 시 관련 사이트로 이동) 이 씨는 1년 전부터 사용자들에게 후원을 받았다. “후원을 처음 열었을 때 후원금이 얼마나 모일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솔직하게 사용자들에게 벅찬 부분이 있다고 공개하니 바로 후원자가 생기더군요. 1년이 지난 지금 전체 누적 100명 이상의 사람들의 후원으로 안정적인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영수 씨는 “사용자들의 후원 덕분에 안정적인 서비스 운영이 가능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Color Scripter 홈페이지 제공) 함께 성장하는 서비스 이영수 씨에게 Color Scripter는 ‘함께 성장해 좋은 추억이 많은 친구’다. “무료이기에 얻을 수 있던 경험은 유료 서비스로 판매할 때보다 더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사용자들과 소통하면서 만들어낸 생태계이기 때문이죠.” 이 씨의 도전은 멈추지 않는다. 그는 “항상 많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준비될 때 원하는 것을 바로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글/ 정민주 기자 audentia1003@hanyang.ac.kr 사진/ 김주은 기자 coramOdeo@hanyang.ac.kr

2019-05 27 중요기사

[학생]옷으로 다시 피우는 꽃중년의 품격

패션 에이전시이자 브랜드 ‘헬로우젠틀’에서 지난해 6월 대한민국의 평범한 아저씨들을 위한 ‘패션 메이크오버(Fashion make-over)’ 캠페인 <더뉴그레이(THE NEW GREY)>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헬로우젠틀’ 편집장 여대륜(산업공학과 4) 씨는 현재 3기를 모집하며 성공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글, 편집/ 김민지 기자 melon852@hanyang.ac.kr 편집/ 임지우 기자 il04131@hanyang.ac.kr 사진/ 김주은 기자 coramOdeo@hanyang.ac.kr

2019-05 21

[동문][사랑, 36.5°C] 기부는 적은 돈을 크게 쓰는 방법

미국 회계법인 ‘더 리 어카운턴시 그룹(The Lee Accountancy Group)’ 이종혁 대표는 입학한지 60년 만인 지난 2017년 건축공학과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오랜 만에 모교를 찾으면서 그는 당시 등록금을 전액 면제 받으면서 공부했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감사의 마음을 갚기 위해 1년에 1만 달러씩, 총 4만 달러의 발전기금 기부를 실천하고 있다. 글 공주영 ▲이 동문은 "기부나 나눔 활동을 하는 이유는 제가 어려운 시절을 겪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가 가진 것을 더 가치 있게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기부는 적은 돈을 더 크게 쓰는 방법입니다."라고 말한다. Q. 1958년에 건축공학과에 입학하신 후, 공업경영학과로 전과를하셨습니다. 특별한 사유가 있으신지요? A. 입학 당시에는 폐허가 된 서울을 보며 복구에 힘쓰자는 결심으로 건축학과를 택했습니다. 그러다가 국가유학시험에 합격한 뒤, 국방대학원 연구사병으로 가서 인생의 전환기를 만났죠. 연구사병 시절, 교수님 연구를 도우려고 도서관에 자주 드나들면서 경영학 책을 많이 봤습니다. 경영학 석학들의 책을 번역하면서 굉장한 흥미를 갖게 되었어요. 그래서 제대 후에 공업경영학과로 전과를 했죠. 수업을 듣다보니 경영학의 근간이 되는 회계학 수업이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1965년에는 졸업한 다음에 미국으로 건너가서 본격적으로 경영학을 공부했고, 2007년에는 경영학 박사 학위까지 받았습니다. Q. 2017년에는 한양대 건축공학부 명예졸업장을 받으셨습니다. 더불어 오랜 만에 모교를 찾아 여러 모로 감회가 남다르셨으리라 생각되는데요. A. 2017년 11월 20일은 저에게 무척 뜻깊은 날입니다. 입학한지 꼭 60년 만에 받은 건축공학부 명예졸업장이었습니다. 도중에 전과를 했지만 건축공학과로 입학했고 3년을 공부했기 때문에 지금도 스무 살에 만난 과 친구들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명예졸업장 때문에 오랜 만에 들른 모교는 정말 놀라웠습니다. 제가 재학할 당시, 한양대학교는 목조건물 한 채와 석조건물 네댓 개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지금은 그때와 비교가 안 될 만큼 엄청난 규모이고, 학생들의 모습도 씩씩하고 활기차 보였습니다. Q. 졸업증서를 받던 자리에서 한양대에 1년에 1만 달러 씩, 4만 달러의 발전기금 기부를 약정하셨는데요. 당시 어떤 마음으로 기부를 결심하셨나요? A. 저는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다섯 살인 1945년에 남한으로 내려왔는데 6·25 전쟁이 터져 가족을 다 잃고 홀로 자랐습니다. 어렵게 공부를 하는 학생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지요. 실향민인 저에게 한양대학교에서 여러 도움을 주고, 등록금도 전액 면제해 주었습니다. 한양대학교가 저를 키워준 것이나 다름없지요. 모교를 위해 뭔가를 꼭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명예졸업증서 수여식이 그 기회가 되었습니다. Q. 미국에서도 다양한 봉사활동과 기부를 펼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봉사와 나눔을 실천하게 되었는지요? A. 24년 동안, 오클랜드시와 함께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2,500명 가량의 노숙자와 어려운 이웃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행사를 해왔습니다. 제가 자금 마련과 봉사자를 모으는 등의 일을 맡았는데 오클랜드시에서 그 공로를 인정해 2004년 3월 5일, ‘이종혁의 날(Jong H. Lee Day)’를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또 미국 모교에 10년 동안 매년 1만2,000달러 씩 기부하면서 저소득층 학생을 위한 장학금 조성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부나 나눔 활동을 하는 이유는 제가 어려운 시절을 겪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가 가진 것을 더 가치 있게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기부는 적은 돈을 더 크게 쓰는 방법입니다. Q. 대표님이 전달하고 있는 발전기금이 어떻게 쓰이길 원하시는지요? A. 6·25 전쟁 때문에 저에게는 초등학교 졸업장이 없습니다. 배움에 대한 애착이 큰 이유는 그만큼 어렵게 공부를 해서입니다. 35세가 되어서 석사 학위를 받고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따면서도 더 공부해야한다는 생각이 머리에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공부를 잘 하는 학생에게 돌아가는 장학금이 아니라, 발전의 가능성이 보이고 기회가 필요한 학생이라면 성적에 상관없이 기부금의 혜택을 받길 바랍니다. Q. 그 동안 꾸준히 기부와 나눔을 실천해오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A. 80에 가까운 나이가 되다 보니,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서 나눔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한양대로부터, 그리고 사회로부터 받은 여러 혜택을 누군가도 받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도 달라질 수 있겠지요. 기부는 뒤로 미루는 게 아니라, 지금 생각이 있다면 바로 실천해야 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적은 돈이 모여 큰 힘을 냅니다. 동행한대 2019년 Spring(제13호) 이북 보기

2019-05 21

[동문][사랑, 36.5°C] 나의 ‘빚’이 누군가에게 ‘빛’이 되길

곽용섭 변호사는 대학 시절 내내, 기숙사 고시반에서 생활하면서 장학금과 생활비를 받았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이 받은 이러한 혜택을 모두 당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 생각이 바뀌었다. 자신을 키운 것은 한양이며, 모교에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10년 간 기부를 약정하고 2018년부터 매월 일정금액을 기부하며 빚진 마음을 조금씩 갚아 나가고 있다.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다시 누군가에게 빛이 되어줄 것을 믿으며. 글 공주영ㅣ사진 이서연 ▲ 곽용섭(법학 84) 변호사 Q. 2018년 10월부터 매월 기부하고 계신데요. 10년간 6천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금액을 기부하기로 결심하신 계기가 있으신지요? A. 1984년 한양대 법학과에 입학하면서 기숙사 고시반 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기숙사 고시반은 260명 법학과 학생 중에서도 50명 이내만 선발해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었으니 저로서는 굉장히 큰 행운이었죠. 고시반에서는 조교가 공부도 살펴주고 생활지도도 해주었기 때문에 꾸준함을 잃지 않고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감사한 마음을 언젠가 목돈이 생기면 갚아야지 했는데, 때를 기다리다 보니 자꾸 늦어지더군요. 더는 미루면 안 되겠다는 마음에 나눠서라도 기부를 하자고 결심했습니다. Q. 기부를 약정하면서 ‘빚을 갚는다’라는 표현을 하셨습니다. 학교로부터 혜택을 많이 받으셨다고 하셨는데 어떤 내용인지요? A. 백남장학금과 대학 등록금, 대학원 등록금, 기숙사비까지 모두 제가 받은 혜택입니다. 당시에는 제가 받는 장학금이 얼마나 큰 혜택인지 몰랐습니다. ‘공부를 잘하니 당연히 장학금을 주는 게 아닌가?’하는 오만한 생각을 했죠. 하지만 사회에 나와 보니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공부를 잘 하는 건 개인이 지닌 재능 가운데 하나일 뿐이고, 만약 그 재능을 보살펴주는 한양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저도 없었겠죠. 그런 깨달음을 얻고 나니 ‘내가 받은 만큼 되돌려줘야 또 누군가가 나처럼 혜택을 받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빚을 갚는다’는 표현을 쓴 거죠. Q. 나눠서 내고 있지만 10년 동안 쌓이면 적지 않은 금액입니다. 혹시 부담스럽다는 생각은 안 드셨나요? A. 제가 받은 것에 비하면 큰 금액이 아닙니다. 심지어 채무 관계의 빚이었다면 이자까지 훨씬 더 붙었겠죠. 또 제 마음의 빚을 금액으로 정산할 수도 없습니다. 매월 정해진 금액을 납입하니 오히려 적금을 붓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변호사 역시 자영업자이기 때문에 형편이 좋을 때가 있고 나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예 자동이체를 신청해서 기부금이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빠져나가도록 해놓았습니다. ▲곽 동문은 " 공부를 잘 하는 건 개인이 지닌 재능 가운데 하나일 뿐이고, 만약 그 재능을 보살펴주는 한양이 없었더 라면 지금의 저도 없었겠죠" 라고 말한다. Q. 오래 전부터 기부를 해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부에 대한 변호사님의 철학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A. 광주에서 판사를 하던 시절, 여직원회에서 어린이를 돕는 기부에 동참해달라고 찾아왔어요. 그때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25년 동안 여러 가지 나눔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이 “나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이다.”라고 한 말이 있습니다. 저를 스무 살 이전까지 키워준 사람은 팔 남매 가운데 다섯 번째 누나였고, 그 이후에는 한양대가 저를 키웠죠. 그래서 저는 스스로를 빚 위에 서 있는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빚을 갚아야 하겠죠. Q. ‘빚’이라고 표현하셨지만 변호사님의 기부가 그 누군가에게는 ‘빛’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기부금이 어떻게 쓰이길 원하시는지요? A. 제가 낸 기부금이 어떻게 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학교에서 가장 필요한 곳에 써주실 거란 믿음이 있습니다. 공부가 절실한 저에게 한양이 준 도움은 큰 ‘빛’이었습니다. 공부하는 즐거움을 깨달은 이 곳에서 제가 공부를 지속할 수 있도록 해주었죠. 공부의 즐거움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후배들이 그런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곳에 사용된다면 더욱 감사할 것 같습니다. Q. 기부의 필요성을 느끼지만 시작을 어려워하는 분이 많습니다. 먼저 기부를 시작한 경험자로서 한 말씀 해주신다면? A. 졸업을 하고 보니 설립자의 정신인 ‘사랑의 실천’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학교가 학생들이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되어주었기 때문에 저 역시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불교에서 인드라망(우주적 그물망)에 의해 모든 존재가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합니다. 동문들이 조금씩 나눔을 실천한다면, 그것이 온 세상으로 퍼져 한양을 더욱 빛나게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기부에 있어 금액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실천을 하느냐가 훨씬 중요합니다. 동행한대 2019년 Spring(제13호) 이북 보기

2019-05 21

[동문][희망, 100°C] 좋은 기부를 통해 인생의 가치를 높이다

(주)나노 신동우 회장은 제자들과 함께 회사를 창업해 청년 일자리 창출이라는 모범 사례로 2017년 백남상을 수상했다. 이때 받은 상금 1억 원을 공과대학의 발전을 위해 기부했고 그 후 10년 간 10억 원을 기부하기로 약정했다. 신동우 회장의 이런 기부는 은퇴한 명예교수들의 편의공간인 ‘신동우 FACULTY LOUNGE’을 탄생시켰다. 그는 기부를 통해 자신의 인생이 훨씬 가치 있게 변화했다고 말한다. 글 공주영ㅣ사진 이서연 ▲신동우(무기재료공학 79) ㈜나노 회장 Q. 2017년 백남상 공학부문 상금 전액을 기부하시고, 10년 동안 10억 원을 기부하기로 약정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큰 나눔을 결심하셨는지요? A. 백남상 수상은 대학 연구실에서 개발한 기술로 교수와 학생이 창업하여 세상에 이로운 제품을 개발하고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킨 데 대한 평가였다고 생각합니다. 마땅히 할 일을 한 것뿐인데 1억 원이라는 거액의 상금을 받고 보니 부담스러운 마음도 없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을 위해 했던 일인 만큼, 상금 또한 학생들을 위해 쓰여야 하지 않나 싶어 기부를 결심했습니다. 항상 모교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터라, 이왕 시작한 김에 한 번에 내지는 못하더라도 가치 있는 나눔을 해보자라는 마음에 10년 약정으로 기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Q. 말씀하신 것처럼 교수 생활을 하시다가 회사를 창업하셨습니다. 창업을 하게 되신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A. 경상대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할 때, IMF사태가 터지면서 졸업생들의 취업 기회가 막혔습니다. 이를 어쩌나 고민하던 차에 정부에서 청년취업 문제 해결을 위한 파격적인 벤처 지원 정책을 펼쳤고, 학생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줘야겠다는 책임감으로 제자 4명과 함께 창업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제자를 대표이사로 하고 저는 뒤에서 도우려 했는데, 필요한 자금을 대출받으러 가니 대표이사가 보증을 서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혹시라도 잘못되면 한 청년에게 평생 빚을 지게 하겠구나 싶어 대표이사를 바꿨죠. 그렇게 회사를 세우고 나니 이 친구들을 실업자로 만들면 안 된다는 생각에 죽을 만큼 열심히 매달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20년이 흘러 이제는 탄탄한 글로벌 기업이 되었습니다. Q. 우연한 시작이었지만 좋은 결과를 도출하는 힘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한양대에 기부를 시작하신지도 어느덧 3년차에 접어들었는데요, 기부를 실천하신 소감은 어떠신지요? A. 처음 기부를 할 당시에는 세금을 내는 마음과 큰 차이가 없었는데, 막상 실천해보니 제가 낸 기부액보다 몇 배 이상의 좋은 일에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최근 백남학술관에 조성된 ‘신동우 FACULTY LOUNGE’는 은퇴하신 명예교수님들의 편의 공간인데, 디자인을 맡으신 교수님들께서 특별히 정성을 쏟아 주셔서 훌륭하고 의미 있는 공간으로 탄생했습니다. 앞으로 이 공간에서 교수님들이 학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실 수 있다니 기쁘고 뿌듯합니다. 기부를 행하는 것도 서로 생각이 같은 분과 함께하면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생각이 바르고 옳은 사람들이 모이니 나눔도 부가가치가 되어 돌아온다는 생각이 들었죠. Q. 한양대에서 무기재료공학을 전공하고, 한국과학기술원과 캠브리지대학교대학원에서 재료공학과 재료과학을 전공하셨는데, 이 같은 선택에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A. 저는 경상북도 상주 출신의 시골 청년이었습니다. 과외 한 번 받아본 적 없던 제가 대학에 들어와서 놀란 것은 교수님들의 훌륭한 수업이었습니다. 2학년 때 오근호 교수님이 미국에서 한양대로 부임을 오셨는데, 재료과학 원서 한 권을 한 학기에 마치는 열강을 하셨습니다. ‘공부가 참 재미있구나.’라는 걸 그때 많이 느꼈죠. 기말시험을 본 날, 우연히 교수님을 만났는데 제 시험성적이 가장 우수하다고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그 격려가 힘이 되어 더욱 열심히 공부를 했죠. 전공이 적성에 맞았기 때문에 몰입할 수 있었고, 수석 졸업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게 해준 한양이 저를 지금의 자리까지 이끌어준 셈입니다. Q. 한양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도 남다르신데요. 앞으로 모교가 어떻게 발전해나가기를 원하시는지요? A. 지난 2월 제 모교의 학위수여식에 학부형 자격으로 참석하게 되었는데, 제 아들이 졸업우수상을 받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36년 전 제가 받았던 상을 제 아이도 받게 되니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아무 것도 몰랐던 시골 청년을 이렇게까지 성장시켜주었는데, 제 자식까지 이렇게 잘 가르쳐주었으니 한양이야말로 제 은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며 교가를 제창하는데, 몸에 소름이 끼치며 뜨거운 감사의 마음이 들더군요. 이 은혜를 길이 갚아 나가리라 새로운 다짐도 했습니다. 올해가 한양대 개교 80주년인데, 20년 후면 개교 100주년입니다. 한양대가 국내 사립대학 종합평가 1위의 대학이 되기를 바라며, 개교 100주년에는 이 소망을 자축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신 동문은 " 마땅히 할 일을 한 것뿐인데 1억 원이라는 거액의 상금을 받고 보니 부담스러운 마음도 없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을 위해 했던 일인 만큼, 상금 또한 학생들을 위해 쓰여야 하지 않나 싶어 기부를 결심했습니다." 라고 말한다. Q. 교직에 오래 몸 담으셨고, 한양대에서도 특훈교수로 학생들을 만나고 계시는데요. 후배이자 제자인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A. 최근 신문기사에서 한 청년의 성장과정을 의미 있게 보았습니다. 항공기 정비사가 되려고 항공기술고에 진학하였고, 위탁교육을 통해 대학교 기계과에 진학하였습니다. 우연히 공인회계사시험 합격 축하 플래카드를 보고 동기가 부여되어 공인회계사 공부를 하여 합격했고, 공군 장교로 입대해서는 법적인 문제에 골몰하다가 군 복무 중 사법고시를 공부해서 현재 유명 로펌에 근무하는 신입 변호사의 이야기였습니다. 처음부터 거창한 꿈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 단계 한 단계 최선을 다한 결과였죠. 청년들은 이런 삶을 배워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청년들에게 ‘나에게 맞는 것이 무엇인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스스로 동기를 부여하라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현재에 집중할 수 있는 동기를 찾아서 몰입하다 보면, 한 단계 성장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 기부를 하고 난 후 더욱 그 가치를 느꼈다고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기부를 하고 싶지만 망설이고 계시는 많은 잠재 기부자 분들에게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백남상 수상자 선정 사유가 생각나는데,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공헌하신 분께 백남상을 드립니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기업 활동으로 백남상을 받았지만, 실은 한양에서 배운 근면, 정직, 겸손, 봉사의 정신과 실용학문이 오히려 경영 활동에 훌륭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은혜를 갚고자 기부를 시작했는데, 지금은 기부가 오히려 제 주변에 좋은 사람을 모이게 해주고 제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들었습니다. 큰 금액이 아니더라도 기부를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치를 여러분도 함께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동행한대 2019년 Spring(제13호) 이북 보기

2019-05 06 중요기사

[학생]암호분야 인재의 산실이 될 한양대 HUCC

한양대학교 암호 동아리 HUCC(Hanyang University Crypto Club)가 지난달 30일 ‘대학 암호동아리 지원 사업’에 선정됐다. 2016년에 시작된 대학 암호 동아리 지원 사업은 암호 인력양성 기반 마련을 위해 한국인터넷진흥원(KISA)과 한국암호포럼이 함께 운영하고 있다. 작년에 우수동아리에 선정된 바 있고 올해로 4년째 지원 동아리에 선정된 HUCC는 내년에도 국가 지원을 받으며 우수 동아리로서 활약을 이어간다. HUCC를 만나 그간의 활동과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 지난달 30일, 2019년도 대학 암호동아리 위촉식에서 ‘대학 암호동아리 지원 사업’에 선정된 동아리원들의 모습. (한국인터넷진흥원 제공) 암호 동아리는 암호를 공부하는 학술 동아리다. 4차 산업에 필수적인 암호학은 기본적으로 정보보호를 위한 이론과 기술(암호 기법, 암호 해독)에 대한 학문이다. 실제 적용 분야는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과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한 암호화폐가 있다. 더 나아가 5세대 이동통신에도 암호기술이 필요하다. 지난 2016년에 창립한 한양대학교 수학과 암호 동아리 HUCC(Hanyang University Crypto Club)는 각종 대회에서 매해 수상경력을 쌓으며 국내 최우수 대학 암호동아리로서 입지를 탄탄히 다지고 있다. 이번 2019년도 국가 지원 대상으로 선정된 암호 동아리는 총 여덟 군데다. 작년에 탈락한 곳을 포함해 총 40여개 동아리가 이번 사업에 지원했다. HUCC 회장 김정민(수학과 4) 씨는 올해 지원 대상으로 선정된 이유에 대해 “학생들에게 어떻게 암호학에 대한 지식을 다양한 방법으로 보급하고 있는지, 일반인들에게 어떻게 알려주고 홍보하고 있는지가 높게 평가됐다”고 설명했다. 안정적인 운영과 수상경력을 포함한 다양한 활동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셈이다. ▲ 한국암호포럼에서 지난해 12월 개최한 ‘2018 국가암호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HUCC. (한양대학교 HUCC 제공) HUCC는 동아리원끼리 하는 스터디 외 다양한 학술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생소한 암호학에 대한 이해를 전공 학생 외 일반 학생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공개 학술 세미나와 학술제를 열거나, 자체적으로 암호경시대회를 개최해 학생들이 어렵게 느낄 수 있는 암호학에 대한 인식을 깨뜨리고 암호기술에 대한 인식을 제고한다. HUCC는 지난해 10월 모든 한양대학교 학부생을 대상으로 하는 한양대학교 암호경시대회를 진행했다. 모든 참가자에게 야식과 참가상을 증정하고, 수상자들을 위한 시상식도 함께 열었다. 김정민 씨는 앞으로의 HUCC 활동 계획에 대해 “계속해서 암호학의 보급을 중점으로 둘 것”이라며 “공개 세미나를 열 때 암호 분야 관련 유명 외부인사들을 초청하고, 학업을 위한 기본적인 자제와, 관련 서적, 기자재들을 구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계속해서 공모전과 학술제가 동아리에서 국한되지 않고 많은 학생을 위한 자리가 되도록 할 예정이다. 김 씨는 마지막으로 “암호가 실제로 많은 분야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며 “많은 사람이 암호에 대해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관심을 갖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황성진(수학과 4) 씨, 배용준(수학과 2) 씨, 권다운(수학과 석사과정) 씨, 박도원(수학과 석사과정) 씨, 김정민(수학과 4) 씨, 주영진(수학과 석사과정) 씨. HUCC는 “앞으로 계획한 것들을 하나씩 지켜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글/ 김민지 기자 melon852@hanyang.ac.kr 사진/ 이현선 기자 qserakr@hanyang.ac.kr

2019-04 09 중요기사

[학생]벌드수흐, 국가대표 농구선수가 되는 그날까지 (2)

한양대에서 약 1011km 떨어진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의 '84학교'. 학생들은 수업이 끝나고 길거리 농구코트서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슛을 날릴 때 가장 행복했던 한 아이는 몽골이 아닌 이 땅 한국에서 농구선수가 됐다. 매 경기 평균 득점 20점, 명실상부 한양대 농구부 에이스 히시게 벌드수흐(189cm, 포워드). 그는 지난해 7년 만에 대학 리그 플레이오프(PO)에서 떨어진 한양대 대학농구의 위상을 다시 세울 유망주로 주목받고 있다. 몽골 소년에서 한양대 농구선수까지. 이제는 한국 농구 국가대표를 꿈꾸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안녕하세요. 한국 농구 국가대표를 꿈꾸는 히시게 벌드수흐(체육학과 2)입니다”.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한국에서 살았다. 그는 “몽골에서 어렸을 때 할머니와 같이 살았다”며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돌봐 줄 사람이 없어 어머니가 일하시는 한국으로 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농구가 좋았던 벌드수흐 씨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농구부에 들어갔다. ▲ 히시게 벌드수흐(체육학과2) 씨와 서울캠퍼스 올림픽체육관에서 지난 5일 진행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히시게 벌드수흐 씨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가 일하시는 한국에 들어왔다”며 “한국에서도 좋아하는 농구를 계속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 히시게 벌드수흐(체육학과 2)는 “여기로부터 약 1011km 떨어진 몽골 울란바토르 84학교에 다녔다”며 “학교 끝나면 길거리에서 형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농구를 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이방인으로서 농구선수에 도전하는 길은 어땠을까. 그는 중고등학교 때 엄연히 학교를 대표하는 농구선수였지만 전국체전과 같은 큰 대회 출전 기회를 얻지 못했다. 외국인 선수는 시합을 못 뛰는 조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가장 꿈 많은 시기였던 초등학교 때는 경기를 하나도 뛰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의료보험’을 꼽으며 “시합 중 다치면 병원에 가야지만 외국인들은 의료보험이 없어 병원비가 높게 책정된다”고 말했다. “부담스러운 병원비로 가장 힘들었다”며 “외국인들은 간단한 서류조차 발급받기 어려웠습니다”고 밝혔다. 대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입학했지만, 당시 리그에는 한 게임도 뛸 수 없었다. “같이 연습하고 동고동락한 팀이었지만, 친구들과 선배들이 뛰는 것을 관람석에서 지켜만 봐야 했다”며 “특히 지난해에는 대학 리그 성적이 저조해서 많이 질 때는 창피했고, 내가 다 답답하고 아쉬웠다”고 당시 심정을 말했다. 힘들었던 과거도 잠시였다. 벌드수흐는 지난해 10월 8일 한국에 귀화했다. 1, 2차로 나눠진 필기와 면접을 통과하고 애국가도 4절까지 외워 시험에 합격했다. “병원에 가면 주민등록증 하나로 해결된다는 점이 가장 좋아요. 처음 접수처에 주민등록증을 내밀 때 기분이 정말 좋았어요." ▲ 히시게 벌드수흐(체육학과 2) 씨는 ”외국인 선수는 초등학교 농구 시합에는 한 게임도, 중고등학교 때는 큰 시합은 못 뛰게 되어 있다”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한국인이 되기를 진심으로 꿈꿔왔었다”고 말했다. 벌드수흐 씨는 “외국인 전형으로 다른 동기들보다 입학이 늦었지만, 모두 환영해주고 스스럼없이 반겨줬다”고 말했다. “지난해 1월 중순쯤 합숙 생활에 합류했어요. 경기할 때 팀워크가 좋고, 든든한 수비로 인해서 속공이 좋은 팀인 한양대와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좋습니다.” 그는 “졸업하기 전에 대학리그 우승은 꼭 한번 해보고 싶다”며 “지금 팀에 저학년이 많은데 같이 열심히 훈련하면서 팀워크를 키운다면 우승도 노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벌드수흐 씨는 올해가 리그 첫 출전이지만 매 경기 평균 득점 20점 이상을 기록하는 등 벌써 상대팀이 긴장하는 선수가 됐다. 그는 “팀원들이 정신력을 잘 잡아주는 덕택”이라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해 올해를 잘 마무리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한양대 마크에 이어 태극마크를 향해 달리는 히시게 벌드수흐의 눈부신 앞날을 기대해보자. 글/ 김가은 기자 kate981212@hanyang.ac.kr 사진/ 박근형 기자 awesome2319@hanyang.ac.kr

2019-04 07 중요기사

[학생]카자흐스탄과 한국을 잇다 

의료관광은 개인이 자신의 거주지를 벗어나 다른 지방이나 외국으로 이동해 현지 의료기관을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2017년 보건복지부 발표에 따르면 강남을 찾은 외국인 의료관광객은 7만2346명, 카자흐스탄에서 오는 관광객이 네번째로 많다. 최근 3년간 한국을 찾은 카자흐스탄 방문객은 약 90%가량 증가하는 추세다. 이를 포착한 카자흐스탄 출신 유학생 자나딜 탈디바예프(Taldybayev, 경영학부 석사과정) 씨는 한국을 찾는 카자흐스탄 의료관광객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의료컨설팅사 KMK(KazMediKor)를 설립했다. 한국에서 창업할래요! 카자흐스탄에서 동양학을 전공했던 탈디바예프 씨는 우연히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접했다. 그 후 교환학생으로 1년간 한국을 방문했고, 2017년 9월 국가초청장학생으로 한양대학교 경영대학원에 입학했다. 한국에서 창업하고 싶던 탈디바예프 씨는 한양대학교 창업지원단의 도움을 받아 지난해 10월 의료컨설팅사 KMK 회사를 설립했다. “카자흐스탄에는 한국 기업들이 많고, 한국과 사업 파트너 관계도 돈독해요. 따라서 한국에서 창업하면 전망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의료컨설팅사 KMK(KazMediKor, 클릭 시 홈페이지로 이동) 회사는 김슬아(경영학부 박사과정) 씨와 자나딜 탈디바예프(Taldybayev, 경영학부 석사과정) 씨와 카킴 다나바예프(Danabayev, 언론정보대학원 박사과정) 씨가 함께 설립했다. 의료관광을 창업 아이템으로 생각한건 탈디바예프 씨. 그는 “어머니가 의료관광으로 한국을 방문해 치료를 잘 받으셨다"며 "이후 다른 카자흐스탄 친구들이 계속 한국에 치료를 받으러 오는 걸 보면서 창업 아이템을 떠올렸다"고 말했다. 탈디바예프 씨는 지난해부터 247 스타트업 돔(클릭 시 관련기사로 이동)에서 생활했다. 그는 "상담을 받으며 창업을 꿈꾸는 사람들과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게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계획서를 작성해 피드백을 주고받고, 겪는 문제도 비슷하니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지도 상의해요. 매주 보고서를 제출해 학기 말에 최종평가를 받습니다. 팀별 멘토링도 받으며 점차 성장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폭풍 성장 의료컨설팅사 KMK 의료컨설팅사 KMK는 한국과 카자흐스탄을 이어주는 의료관광 플랫폼 역할뿐만 아니라, 고객들에게 통역 및 여행 서비스를 제공한다. 회사는 지난해 10월 설립 이후 올해 2월부터 활발히 성장하고 있다. 탈디바예프 씨는 의료통역 아르바이트를 하다 알게 된 병원들과 사업관계를 맺고, 카자흐스탄에서 저명한 인플루언서(유명인)들을 초대해 회사 서비스를 홍보한다. “올해 백만 명이 넘는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보유한 카자흐스탄 국회의원이 한국을 방문해 저희 서비스를 사용했습니다. 한국 병원에서 건강검진과 피부관리를 받은 뒤에 한양대학교도 방문했죠. 덕분에 연예인들과 인플루언서들이 끊임없이 한국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탈디바예프 씨의 안목은 뛰어났다. 그는 우연히 방문한 취업박람회에서 만난 카자흐스탄 유학생 카킴 다나바예프(Danabayev, 언론정보대학원 박사과정) 씨에게 같이 사업을 하자고 제안했다. 유튜버와 기자로 활동하며 카자흐스탄에서 넓은 인맥을 보유한 카킴 씨는 현재 진행 중인 홍보활동을 모두 가능케 했다. 탈디바예프 씨의 연구실 동료인 CEO 김슬아(경영학부 박사과정) 씨 또한 한국 관련 행정을 도맡아 회사 성장에 박차를 가한다. 그는 셋의 팀워크가 뛰어나다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말이 유창한 탈디바예프 씨는 직접 통역서비스를 제공한다. 의료컨설팅사 KMK의 총 직원 수는 일곱명으로, 한국에는 공동대표 세 명과 프리랜서 한명, 카자흐스탄에는 두 명의 직원이 있다. 앞으로의 계획 탈디바예프 씨는 앞으로 기존 카자흐스탄 고객을 포함해 러시아권 고객들을 대상으로 사업을 넓힐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한양대학교에서 박사과정에 진학할 그는 “한양대학교의 학생으로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이 너무나도 많고, 이에 보답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포부를 전했다. 글/ 정민주 기자 audentia1003@hanyang.ac.kr 사진/ 이현선 기자 qserakr@hanyang.ac.kr

2019-03 25 중요기사

[학생]불가능을 가능으로, 평범한 대학생의 도전 인생 (2)

“거창한 계기는 없었어요. 우연히 한 잡지를 읽었는데, 고비 사막을 완주한 해병대 예비역 3명의 이야기가 있었어요. 굳이 사막에 가서 고생한 이유가 궁금했죠.” 유동현(전기생체공학부 1) 씨는 세계 4대 극지마라톤 시작 3개월 전 대회 소식을 접하면서 바로 출전 준비에 들어갔다. 평발에 과거 무릎 수술, 막대한 대회 참가비. 걸리는 게 많았지만 직접 경험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컸다. 지난해 4월 아프리카 사하라, 나미비아 사막 레이스를 시작으로 몽골 고비 사막, 악명 높은 칠레 아타카마 사막을 거쳐 12월 남극 마라톤까지 완주했다. 그는 만 22세의 나이로 최연소 그랜드슬램에 올랐다. 꿈 같은 1년간의 대장정 대회 출전자는 각각 250km에 달하는 4개 지역 사막의 6개의 스테이지, 총합해서 대략 1000km를 걷는다. 1년 동안 4개의 사막을 완주하는 ‘세계 4대 극지마라톤’이 지난 2008년에 만들어진 뒤, 완주에 성공한 사람은 총 78명이다. 그리고 지난해 열린 극지마라톤에서 가장 어린 나이로 완주 기록을 세운 유동현(전기생체공학부 1) 씨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 아직 마음은 사막에 있는 유동현(전기생체공학부 1) 씨. 경험했던 대자연이 아직 생생히 기억에 남는다며“학교에서 공부하면서도 그 때가 생각나요. 갑자기 일어나서 뛰고 싶어요."고 말했다. “처음 아프리카에 내려서 대회 집결지로 이동하는데 기분이 묘했어요. 도움 주신 분들이 많아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부담도 됐지만 기분은 좋았습니다.” 유동현 씨는 출발 전 당시를 회상하면서 부풀었던 마음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대회에 참가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사막 마라톤 출전은 440만 원, 남극 마라톤까지 출전하려면 1460만 원의 참가비가 추가로 필요했다. 학교 선배와 군대 전후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여러 기업에도 후원지원서를 냈다. 그렇게 여러 곳에서 유 씨를 응원하는 도움의 손길이 십시일반 모여 600만 원으로 첫 출전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출전 비용으로 충당하고 남은 금액으로 40여 가지의 필수 장비를 마련했다. “마라톤 경력도 없고 완주한다는 보장도 없어서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까 걱정했어요. 그러나 잘 알지도 못하는 한 젊은이의 도전을 응원해준 감사한 분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 사하라 사막 레이스 직후 다리가 보라색 점이 생기면서 마비됐 다.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다. (유동현 씨 제공) 고되지만 값진 경험의 길 4개 지역의 사막 레이스 거리는 각각 250km에 달한다. 출전자는 식량과 각종 장비를 든 배낭을 메고 일주일 안에 완주해야 한다. 250km의 거리를 80km, 40km, 10km 씩 몇 구간으로 나눠 달리는데, 80km구간은 서두르지 않으면 추운 밤까지 뛰어야 한다. 자신이 악조건이라고 생각했던 유 씨는 다른 참가자들을 보며 많은 것을 느꼈다. “레이스 최종 구간인 남극마라톤을 뛸 때는 시각장애인 친구, 한쪽 다리를 잃은 마라토너가 있었어요. 저는 달리면서 힘들어하고 불평도 했는데 오히려 그분들은 여유로웠어요.” 일흔이 넘는 노인, 몸이 불편한 사람, 엘리트 선수들, 재력가. 이들 모두 똑같이 힘든 환경, 공평함 속에서 함께 도우며 생활한다. “노인이 무거운 가방을 메고 꿋꿋이 완주하는 모습에 누구나 노력하면 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는 그는 1등이 중요한 레이스가 아니라는 사실에 감동했다. 또 각국에서 참가자들이 모이다 보니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유 씨는 저녁 시간 모닥불 앞에 모여 앉아 식사를 하며 각국의 소식과 그들의 생각에 대해 들었던 것이 좋았다고 말했다. “지친 와중에도 함께 한 사람들이 모두 에너지가 넘쳐서 덩달아 힘을 얻었어요. 다녀와 보니 갈 때 체력뿐 아니라 나라마다 간단 한 상식과 외국어는 준비해야 할 것 같아요.” ▲ 유동현 씨는 마라톤을 통해 소중한 인연들도 얻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고비사막 마라톤에서 완주한 후 친구들과 찍은 기념 사진을 찍은 모습, 함께 합숙한 텐트 메이트들과 한 컷, 가장 고단했던 칠레 아타카마 사막에서 함께한 친구와 포옹하는 모습, 남극으로 가는 배를 타기 직전 종합 등수 1위 친구와 찍힌 사진. (유동현 씨 제공) ‘사람들이 왜 이런 걸 할까?’ 하는 의문에서 시작했던 마라톤. 그는 “너무 많은 것을 느끼고 얻었다”고 말했다. “평소에 당연히 여기던 것들이 없어지니 사소한 것에 감사하게 됐어요. 환경부터 사람까지. 내리막길을 내려올 땐 절 지원해주신 분들이 떠올랐어요. 나중에는 절 도와준 분들처럼 꿈은 있지만, 현실의 벽 때문에 도전을 꺼리는 사람들을 돕고 싶습니다.” 도전하는 삶 현재 그는 다시 학교로 돌아와 학업에 열중하고 있다. 그렇지만 새로운 도전은 멈추지 않을 예정이다.“올해 철인삼종경기와 여름방학 때 미국 자전거 횡단을 계획 중이에요. 미국 자전거 횡단 대회는 7월 여름에 있는데 아침잠을 줄여가며 수영을 하고 자전거로 통학하며 틈틈이 준비 중이에요.” ▲ 사하라 사막 횡단 도중 유동현 씨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유동현 씨 제공) 마지막으로 유동현 씨에게 마라톤이 어떤 의미가 됐는지 물었다. “일상이 됐어요. 마라톤을 벗어나서도 마라톤 하기 전과 후의 나를 보면 스스로 달라진 제 모습이 보여요. 마라톤은 피니쉬 라인이 언제든 있어요. 속도가 빠르든 느리든 어찌 됐든 포기하지 않고 달리면 끝에 도달해요. 전에는 포기가 쉬웠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그의 밝고 당찬 대답에서 단단해진 내면을 볼 수 있었다. 글/ 김민지 기자 melon852@hanyang.ac.kr 사진/ 이현선 기자 qserakr@ha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