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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 31

[교수][스페셜토크] 전기기기 연구 분야의 명실상부 ‘톱클래스’

지난 3월에 열린 ‘2018학년도 연구실적 우수교원 시상식’에서 이주 교수가 공학 부문 HYU학술상을 받았다. ‘에너지변환연구실’을 운영하며 전기기기 설계 및 제어 분야를 이끌어온 공로를 인정받은 것. 이주 교수와 함께 연구실 식구들인 정동훈 학생(전기공학과 박사 5기)과 임종석 학생(전기공학과 박사 4기) 이 수상의 기쁨을 나누는 자리에 <사랑한대>가 함께했다. 글. 박영임 사진. 안홍범 ▲ 이주 전기·생체공학부 교수 한양대학교 최대 규모의 연구실 21년 동안 박사만 64명. 한양대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에너지변환연구실에서 배출한 박사의 수다. 이 중 22명은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으며, 20여 명은 국책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현재 연구실에 소속된 대학원생 수도 60명에 이른다. “에너지변환연구실은 인력, 연구비, 연구 실적 등 모든 면에서 우수한 성과를 자랑하는 한양대 최고의 연구실입니다.” 공학 부문 HYU학술상을 수상한 이주 교수에게 수상 소감을 청하자 연구실에 대한 자긍심 넘치는 멘트로 소감을 대신한다. 어쩌면 우문현답. 최고의 연구실을 이끌고 있기에 자연스럽게 HYU학술상을 수상하게 된 것이 아닐까. 이주 교수는 그동안 잘 따라준 학생들에게 모든 공을 돌리며, “엔지니어링은 무엇보다 팀워크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연구실을 소개하는 인터넷 홈페이지에도 훌륭한 연구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서로 존중하며 지식을 넓혀갈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는 이주 교수의 지론이 담겨 있다. “연구실 운영 시 융화와 배려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좋은 연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사회정의에도 맞지 않습니다.” 전기기기 설계와 제어, 모두 가능한 융합 인재 양성 이주 교수가 운영하는 에너지변환연구실은 에너지 변환 기기의 전자계 해석을 기반으로 기기 설계 및 개발과 제어에 대한 연구를 중점적으로 한다. 구체적으로는 철도 차량, 가전기기, 견인용 전동기, 자동차용 전장품, 다자 유도 구동 시스템 같은 다양한 전기기기를 설계하고 제어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전기기기 분야에서는 설계 연구나 제어 연구 중 한 분야만 진행하기도 쉽지 않은 일. 그런데 이주 교수는 설계 연구 및 제어 연구를 결합해 전기기기 해석과 설계, 제어가 모두 가능한 인재 육성을 연구실의 목표로 삼고 있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 그러나 가야 할 길을 걷는 것이 이주 교수가 연구자로서 고집하는 사명감이기 때문이다. 혹시 기기 설계와 제어 연구를 융합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평소 궁금증을 갖고 있던 정동훈 학생이 이주 교수에게 물었다. 정동훈학생 : 전기기기 설계만 연구하기에도 분야가 광범위한데 어떻게 설계와 제어의 융복합 연구를 결심하셨나요? 이 교수 : 전기기기 연구 분야를 선도하겠다는 욕심으로 남들보다 목표를 높게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시대와 기술의 변화에 따라 당연히 두 분야를 융합해야 합니다. 과거에는 수기로 계산해야 했으니 설계 연구만 해도 할 일이 많았지만 이제는 컴퓨터로 계산하는데 제어를 모르고 설계만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하지만 두 분야를 융합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고 그동안의 심경을 토로하는 이주 교수. 기기 설계와 제어 분야의 융합을 위해 그는 남들보다 몇 배로 땀을 흘려야 했다. 최근 3년간 SCI(Science Citation Index, 과학기술 논문 인용 색인)급 저널에 발표한 논문 수만 42편. 특허등록 13건(프로그램 등록 2건), 기술이전 1건의 연구개발 실적도 보유하고 있다. 이 중 <IEEE 트랜잭션 온 마그네틱스(IEEE Transactions on Magnetics)>에 발표한 ‘3D 프린팅 기술을 적용한 하이엔드 동기형 릴럭턴스 전동기 설계’에 대한 연구는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 중 하나인 3D 프린팅 기술을 전동기에 접목한 세계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릴럭턴스 전동기는 유도기를 대체해 산업 분야에 적용하기 위해 활발히 연구하고 있는 기기를 말한다. 이주 교수 연구팀은 기존에 갖고 있던 형상의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해 전동기 방식에 3D 프린팅 기술을 접목시켜 출력 밀도를 향상시켰다. 또한 전기·전자 분야의 최고 저널인 <IEEE 트랜잭션 온 인더스트리얼 일렉트로닉스(IEEE Transactions on Industrial Electronics)>에 게재된 ‘공정 손실을 고려한 IE4급(International Efficiency, 국제 에너지 효율 등급) 라인기동식 동기형 릴럭턴스 전동기 최적 설계’에 대한 연구는 IE4급 라인기동식 동기형 릴럭턴스 전동기의 공정 손실을 줄이기 위한 것으로, 추가적인 유한 요소 해석 기법을 개발해 해석의 정확도를 높였다. 이는 자석을 쓰지 않거나 저렴한 자석을 사용해 고효율 전동기를 제작하는 비희토류 전동기의 연구개발 사례다. ▲ 이 교수는 '저희 연구실에서 배출한 인재들이 대기업, 연구소, 대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전기기기 분야의 각 부문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며 우리나라 전기기기 분야의 기술 수준을 한 단계 도약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자신합니다.' 라고 말한다. 우수한 연구는 열정적인 강의로부터 “저희 연구실에서 배출한 인재들이 대기업, 연구소, 대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전기기기 분야의 각 부문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며 우리나라 전기기기 분야의 기술 수준을 한 단계 도약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자신합니다.” 이주 교수에게 에너지변환연구실을 통해 배출된 인재들은 그 어떤 상패와도 바꿀 수 없는 영광스러운 훈장이다. 교수의 본분은 사회에 꼭 필요한 우수한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훌륭한 연구 성과는 학부 강의에서 시작된다고 강조했다. 누군가는 연구자와 교육자의 역할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이주 교수는 우수한 연구 성과의 비결은 연구자 이전에 교수로서 인재 양성에 힘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학부 강의에서 학생들을 열정적으로 가르치면 그것이 선순환을 이루며 연구 성과로 이어집니다. 강의를 들은 우수한 인재들이 연구실에 많이 지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강의 우수 교수상을 네 번 받았는데 교수로서는 이 상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도 제자들이 원하는 곳에 취직해 원하는 연구를 계속 이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때다. 교수로서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냐고 말하는 이주 교수. 제자들에 대한 그의 지극한 애정을 익히 알고 있는 임종석 학생이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없는지 물었다. 임종석 학생 : 교수님으로서, 인생 선배로서 학교생활에 대한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이 교수 : 나이가 드니까 추억을 먹고 산다는 의미를 알겠습니다. 학생의 본분인 공부는 말할 것도 없고 여행도 많이 다니고 좋은 친구들도 사귀고 토론도 열심히 하면서 좋은 추억을 많이 쌓으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운 추억이 많을수록 인생이 풍부해지는 법이거든요. 이주 교수 또한 제자들과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기 위해 해마다 연구실 학생들과 스키장에 가는가 하면 등산, 축구, 래프팅 등 다양한 행사를 기획해 즐거운 시간을 함께하고 있다. 출판은 교육자로서 마지막 소명 이주 교수는 3년 전부터 ‘영구 자석 전동기 설계 제어’에 대한 책을 출간하기 위해 원고를 집필하는 중이다. 이미 2011년, 전기기기에 대한 책을 펴냈는데 많은 학교에서 교재로 사용하면서 전기기기 분야의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했다. “현재 진행 중인 작업을 마치면 연구실에서 배출된 우수한 논문들을 잘 정리해 책으로 발간하고 싶습니다.” 한 분야에 대한 지식을 집대성하는 작업도 후학을 양성하는 데 꼭 필요한 일임을 깨달았다는 이주 교수. 제자들 그리고 동일 분야의 인재들이 참고할 만한 책을 남기는 것, 이주 교수가 그리는 교육자로서의 마지막 과업이다. 사랑한대 2018년 05-06월호 이북 보기

2018-05 31

[동문][사랑나눔+Ⅰ] 홈런왕 헐크 라오스에 야구를 심다

맨발의 아이들이 야구단 모집 공고를 보고 찾아왔다. 사정이 나은 아이는 다 떨어져 가는 신발이나 폐타이어를 잘라 만든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테스트 삼아 야구공을 던져줬더니 작은 축구공인 줄 알고 발로 받았다. 이랬던 아이들이 5년이 지난 지금 2018 아시안게임을 준비 중이다. 야구 불모지 라오스에서 이만수 감독이 일군 기적이다. 글. 전수아 사진. 안홍범 ▲ 이만수 라오J브라더스 구단주(체육학 78) 야구보다 물과 빵을 찾아온 아이들 2014년, 이만수 감독이 라오스 땅을 밟기 전까지 그 나라에는 야구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야구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던 아이들이 야구를 배우겠다며 찾아온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처음 만난 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더니 ‘하루 세끼 먹는 것’이라더군요. 야구단에 지원한 아이들 중에는 물과 빵을 준다는 이야기에 솔깃해서 온 아이도 많았지요.” 먹고 살기도 어려운 와중에 야구를 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던 이만수 감독은 어렸을 적 그가 야구를 처음 배우던 때를 떠올렸다. 라오스의 아이들처럼 야구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친구를 따라 야구팀에 들어갔다. 다들 하루 살기도 빠듯한 형편에 야구 장비를 마련할 길은 자급자족뿐. 신문지나 스케치북의 도톰한 표지를 뜯어서 글러브를 만들고 공사장에서 각목을 얻어와 배트 대신 휘둘렀다. 기부받은 야구공은 실밥이 다 터져 선수들이 각자 기워서 썼다. 지금의 야구 인프라와 비교하면 천지 차이다. 그런 환경에서 야구를 했어도 얼마나 즐거웠는지, 어떤 꿈을 꿀 수 있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이만수 감독은 두려움 없이 아이들의 손을 잡았다. 열 번 찍혀 라오스로 넘어간 헐크 그런데 왜 라오스였을까? “2013년 가을에 이메일 한 통을 받았습니다. 라오스에 거주하는 한국인인데 이곳에 와서 야구를 가르쳐 줄 수 없느냐는 거예요. 전혀 일면식도 없던 분이고, 게다가 SK와이번스 감독으로 한창 바쁠 때라 대답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메일이 한 달 동안 계속 오더군요.” 이야기라도 들어보자 싶어 이만수 감독은 전화를 걸어 왜 라오스에서 야구를 하려는 것이냐고 물었다. 돌아온 답은 야구 불모지 라오스에 한국 최고의 인기 스포츠인 야구를 전파하고 싶다는 것. 이 감독은 시간 될 때 가보겠노라며 통화를 마쳤다. 이는 사실 완곡한 거절의 표현이었다. 문제는 듣는 이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후 틈만 나면 라오스에서 전화가 왔다. 언제 오실 수 있느냐며 애타게 기다리는 그에게 2014년 봄에는 사비를 털어 1,000만 원 상당의 야구 장비를 보내주었다. 프로팀에서 처분하려고 내놓은 장비 중에서 쓸 만한 것을 골라 보내주기도 했다. 얼마 후 라오스에서 사진을 몇 장 보내왔다. 사진 속에는 어디서 모았는지 몇 명의 아이들이 SK와이번스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유니폼 소매며 바짓단을 둘둘 접어 입은 아이들의 모습에서 어렸을 적 도움을 받았던 기억이 난 이만수 감독. 그렇게 슬슬 라오스 쪽으로 마음이 기울던 차, 감독직을 사퇴하게 된 이 감독은 결국 라오스로 향했다. 그리고 이 감독을 끈기 있게 찾은 그 교포와 함께 ‘라오J브라더스’라는 야구단을 만들었다. 진심이 통하기까지 절대 깨지지 않을 한국 야구 프로야구사 최초의 기록을 쓴 사나이, 홈런왕 헐크, 이 화려한 수식어에 걸맞게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이만수 감독. 그의 전성기를 기억하는 팬들은 언제 어디서든 그를 환영했다. 그런데 라오J브라더스를 맡고 나서는 상황이 변했다. “야구단을 운영하려면 필요한 게 많습니다. 제가 가진 것을 보태는 것으로는 역부족이어서, 감독 겸 구단주직을 맡아 직접 후원 유치에 나섰지요. 우선은 저를 좋아해주시던 분들을 찾아갔는데, 그때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거절이란 걸 배웠어요.” 라오J브라더스 얘기를 꺼내는 순간 느껴지는 급격한 온도 차에 당황스러웠던 것도 잠시, 다른 분을 찾아가면 잘 들어주시겠거니 하며 희망을 품었던 그는 연이은 거절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거절은 라오스에서도 이어졌다. 지원을 받기 위해 지자체와 정부 기관의 문을 두드려 봤지만 거의 2년간 문전박대만 당했다. 한편에서는 이만수 감독의 도전을 두고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겠느냐는 반응도 보였다. 희망과 도움을 주는 이보다 거절과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더 많았던 때. 그래도 이만수 감독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최선을 다했다. 라오스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벽지를 돌며 아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쳤고, 강연 활동이나 광고를 찍고 얻은 수입을 라오J브라더스 살림에 보탰다. “몇 달 지나니까 제 진심이 조금씩 통하더군요. 언론에도 라오J브라더스가 소개되면서 전국에서 십시일반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셨습니다. 야구 장비와 후원금이 모이기 시작했죠.” 라오스 정부에서도 관심과 도움을 보내주었다. 행정적인 지원과 함께 국제 대회에 참가할 수 있도록 야구협회와 야구연맹을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해준 것. 또한 야구로 아이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준 공로를 인정해 이만수 감독에게 2016년에는 총리상을, 올해 초에는 대통령상을 수여했다. 아이들과 함께 꾸는 꿈 라오J브라더스도 이제 5년 차. 이만수 감독은 많은 분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전한다. 훈련장도 서울시설공단에서 재능기부로 지어주었다. 2년 전에는 국제교류재단 초청으로 라오스 아이들이 부산에 오기도 했다. 비행기를 처음 타고 부산에 온 아이들은 야구 경기를 관람하고 한국 문화를 체험했다. 매일매일 신나는 경험을 한 아이들은 마지막 날에는 집에 가기 싫다며 펑펑 울었다고. 그런 아이들을 겨우 달래 라오스로 돌아간 후, 그는 아이들에게 다시 물었다. “너희들은 꿈이 뭐니?” 큰 기대 없이 던진 질문에 아이들은 놀라운 대답을 들려주었다. “한 아이는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싶다고 하고, 다른 아이는 라오스가 의료 환경이 열악하니 의사가 되어 아파도 참고 사는 친구들을 도와주고 싶다더군요. 비로소 꿈이 생긴 아이들을 보면서 뿌듯한 마음이 드는 한편 괘씸한 거예요. 기껏 가르쳐 놨더니 야구하겠다는 애는 없냐고 볼멘소리를 했더니 두 아이가 야구 열심히 해서 한국에서 뛰겠다기에 그래 잘해보자 했지요.” 하루 세끼 챙겨 먹는 게 꿈이던 아이들에게 새로운 꿈이 생겼다. 야구를 하면서 노력과 성장의 기쁨을 맛본 덕분이다. 오늘도 열심히 훈련 중인 아이들은 오는 6월 화성시 초청으로 진행될 미니캠프에 참가할 계획이다. 캠프 후에는 라오스 국가대표를 꾸려 2018 아시안게임에 출전한다. 실력으로 따지면 아시안게임에 참가할 다른 팀에 한참 못 미치지만 설령 어마어마한 점수 차로 지더라도 상관없다는 이만수 감독. 큰 무대에 서고, 월등히 뛰어난 상대와 겨뤄보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배우고 성장한 아이들 중에 야구 지도자가 탄생하고, 그리하여 아직은 계획 중인 라오스 최초의 야구장에서 야구 리그를 여는 것. 야구인 이만수의 새로운 꿈이다. 사랑한대 2018년 05-06월호 이북 보기

2018-03 15

[동문][사랑의 릴레이] 끝없는 배움과 나눔의 길, 삶을 꽃피우다

미국 회계법인 ‘리어카운턴시그룹(The Lee Accountancy Group)’의 이종혁 대표에게 지난해 11월 20일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뜻 깊은 날이었다. 이날 이 대표는 한양대 건축공학부 명예 졸업장을 받았다. 올해로 입학한 지 꼭 60년이 된 그에게 이 졸업장의 무게와 의미는 더욱 남다를 수밖에 없다. 글. 오인숙 / 사진. 안홍범 ▲ 리어카운턴시그룹 대표 이종혁(건축공학과 58) 동문 건축공학부 졸업장 받은 공인회계사 “제가 입학했을 당시 건축공학과 입학 정원이 50여 명이었어요. 건축공학과에서 3년 공부하고 공업경영학과로 전과해 졸업했으니 정작 공업경영학과에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죠.” 이 대표는 당시 건축공학과 친구들과의 인연을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다. 5년 만에 한국을 찾은 이번에도 도착하자마자 두 명의 친구를 만났다. 졸업장을 받은 이 대표의 얼굴은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 그는 친구들을 만나자마자 “나도 이제 건축공학과 졸업생”이라고 말하며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학위 욕심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학위만도 다섯 손가락이 꽉 찰 정도니 말이다. 한국과 미국에서 각각 받은 공업경영학과 학사와 경영학과 학사, 미국에서 세법과 회계학으로 받은 두 개의 석사에 경영학 박사학위까지 가지고 있는 그에게 건축공학부 명예 졸업장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열아홉, 스무 살에 만난 친구들이잖아요. 그 친구들을 아직까지 만나는데, 졸업장이 없어서인지 이상하게도 늘 허전함이 있더라고요. 뭔가 위축된 기분도 들었고요. 이제야 제대로 된 졸업장을 받았으니 좋을 수밖에요. 하하.” 그런 기쁨과 고마움의 표현이었을까. 이 대표는 졸업증서 명예 수여식 자리에서 한양대에 발전기금 4만 달러 기부를 약정했다. 1년에 1만 달러씩, 4년에 걸쳐 총 4만 달러를 기부하기로 한 것이다. “일종의 귀소본능 같은 게 아닌가 싶어요. 언젠가는 한국의 모교를 위해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어요. 저를 키운 곳이잖아요. 한양대에 다니는 탈북 학생들을 비롯해 여러 후배들을 위해 쓰였으면 합니다.” ▲ 가지고 있는 걸 나누면 자신의 생각과 사랑이 더 크게 빛을 발한다고 말하는 이종혁 대표 소외 계층을 위한 다양한 나눔 활동 이종혁 대표는 오랫동안 미국에서 다양한 봉사 활동과 기부를 펼쳤다. 가장 대표적인 활동으로 미국 오클랜드시 정부와 함께 개최하는 ‘오클랜드 추수감사절 만찬’을 꼽을 수 있다. 저소득층 주민들과 노숙자 등을 포함해 2,500명가량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고 공연을 선보이는 자리다. 그는 26년간 이 행사를 진행하며, 만찬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것부터 봉사 인력을 채용하는 일까지 모든 것을 도맡았다. “2016년까지 회장으로 있다가 이번에 후임자에게 넘겨줬습니다. 북캘리포니아에서 그렇게 크게 행사를 연 건 처음일 거예요. 한국인을 주축으로 한 유일한 행사이기도 하고요. 덕분에 한국인들의 단합에도 큰 역할을 했지요. 워낙 오래된 행사라 꾸준히 참여하는 봉사자와 기부자가 많습니다.” 이 행사에는 한국인 외에도 백인, 흑인, 멕시칸, 중국인, 베트남인 등 다양한 나라의 이민자들이 함께한다. 그들과 한데 힘을 합쳐 행사를 완성하고, 서로를 이해하며 모두가 화합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는 데 의미가 크다. 이러한 공로로 지난 2004년 제리 브라운 당시 오클랜드 시장(현 캘리포니아 주지사)은 3월 5일을 ‘이종혁의 날(Jong H. Lee Day)’로 공표한 바 있다. 소외 계층을 위해 꾸준히 만찬을 개최하고, 여러 인종을 화합시키는 가교 역할을 한 것에 대해 인정받은 것이다. 이 대표의 사랑의 실천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만찬 행사 외에도 기부를 통해 저소득층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 조성에 힘쓰고 있다. 미국의 모교에 매년 15,000달러씩 기부하고 있는데, 장학금 기부를 시작한 지도 어느새 10년이 훌쩍 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부금도 커져 학생당 500달러씩 지급하던 장학금이 2016년에는 2,000달러까지 늘었다. 이종혁 대표가 기부와 봉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뭘까. “제가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어요. 다섯 살이던 1945년에 남한으로 내려왔는데, 6・25 전쟁 때 가족을 다 잃고 혼자서 자랐어요. 제가 배고파 봤기 때문에 어른이 되면 주변의 어려운 학생들이나 어린 친구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늘 했습니다.” 어렵고 고됐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던 걸까. 그의 눈가가 금세 촉촉해졌다. “기부나 봉사활동을 하면 기분이 참 좋아요. 사실 내가 가지고 있는 게 꼭 내 것만은 아니거든요. 혼자 가지고 있으면 작게 쓰여지지만, 그걸 나누면 자신의 생각과 사랑이 더 크게 빛을 발하죠. 기부는 가진 게 많아야 하는 게 아니에요. 재벌이 큰돈을 내는 것만큼 평범한 사람들이 조금씩 기부하는 것도 중요해요. 그런 문화가 익숙하지 않아서 ‘조금 더 여유가 생기면 해야지’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바로 그때 시작해야 합니다.” ▲ 지난해 11월 한양대를 방문해 학교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성공의 원동력은 끝없는 배움 1958년 한양대 건축공학과에 입학한 그는 3학년을 마치고 군대(해병대)에 갔다. 전역 후 공업경영학과로 전과해 졸업했고, 이후 1~2년간 사회생활을 하다 1966년에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모두가 먹고살기 힘들었던 시절, 그는 더 넓은 곳에서 꿈을 펼치고 싶어 떠났다. 하지만 막상 낯선 땅에 도착하니 모든 것이 막막하고 힘들었다. 다시 대학에 들어간 그는 어느 교수의 추천대로 회계학을 공부해 공인회계사가 됐다. 그렇게 미국 캘리포니아주 공인회계사로 활동하면서 지난 1977년부터 회계법인 ‘리어카운턴시그룹’을 이끌고 있다. 회사를 운영하며 특임교수로도 오랫동안 활동한 그는 학생과 직원들에게 ‘끊임없이 공부할 것’을 강조한다. 학교 공부를 마쳤다고 멈추지 말고 계속 공부하라는 뜻이다. 그가 평생 살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바로 배움이다. 이 대표 역시 60세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쉼 없는 배움으로 성공을 이뤄낸 그가 하는 말이기에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뚜렷한 목표를 세워야 해요. 언제까지 무엇을 할지 정확하게 계획하고, 몇 년 후에 내 자신의 모습이 어떨지 단계별로 그려봐야 합니다. 미래를 그리지 않고 막연하게 공부하면 방향을 잃기 쉽습니다.” 이 대표 역시 그렇게 공부해서 지금의 자리에 왔다. 끝없는 배움의 결과를 스스로 보여준 셈이다. ▲ 이종혁 대표(왼쪽)가 명예 졸업장을 받은 후 이영무 총장과 기념 촬영을 했다 가정과 지역사회를 돌보는 리더 이종혁 대표를 만난 날은 그가 한국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었다. 한양대에 대한 애정이 더 깊어진 탓일까. 그는 앞으로 더 자주 한국을 찾겠다고 약속했다. 또 미국에 있는 동문들의 단합을 위해 한양재단을 기획 중이라고도 했다. “재단을 통해 동문들이 친교를 맺고 자신감과 소속감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그만큼 학교에 대한 사랑도 커질 거예요. 또 기금 마련으로 모교에 재정적인 도움을 줄 수도 있을 테고요.” 그는 올해 78세가 됐다. 입학한 지 꼭 60년째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했던가. 그의 생각과 활동은 여전히 왕성하다. “앞으로 10년은 더 일할 생각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공인회계사 일 외에 납세자를 위해 국세청과 협상(Tax Resolution)하는 일에 좀 더 힘을 쏟으려고 합니다. 변호사만큼 법을 잘 알아야 할 수 있는 일이죠.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을 대변하기도 하지만, 또 사업적으로도 가능성이 큰 일이에요. 사업을 좀 더 확장하고, 봉사와 기부도 보다 적극적으로 할 생각이에요.” 오랫동안 일하기 위해서는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얼마 전에 권투를 시작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은 이토록 멈출 줄 모른다. 이종혁 대표는 후배들에게도 진심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나 환경을 탓하지 말고 스스로를 발전시키면서 열심히 생활하세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가정과 지역사회를 돌본다면 훌륭한 리더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지난한 세월을 스스로의 정신과 마음가짐, 철학으로 무장해 고난을 이겨낸 이종혁 대표. 끝없는 배움과 사랑이 그의 삶을 아름답게 완성하고 있다. 사랑한대 2018년 01-02월호 이북 보기

2018-03 14

[동문][한양피플] 네 안에 숨어 있는 ‘너’를 깨워라

취업 경쟁이 심화되면서 기업이 원하는 인재상도 점점 더 까다로워지고 있다. 무조건 우수한 인재를 찾기보다는 조직에 적합한 인재를 찾고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신세계 인터내셔날 인사팀에 재직 중인 문세환 씨는 자신감과 차별화된 자신만의 스토리가 있다면 취업의 문을 여는 것은 한양대 출신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글. 박도근 / 사진. 안홍범 ▲ 신세계 인터내셔날 인사팀 문세환(법학과 08) 동문 자기소개서를 통해 ‘너’를 보여줘 지난해 9월 교내 올림픽체육관에서 150여 개의 기업이 참여한 ‘2017 한양 잡 디스커버리 페스티벌’이 열렸다. 소속 회사의 인사 담당자로 참가한 문세환 씨에게 이번 행사는 매우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자신의 꿈을 향해 한 발씩 내딛는 학교 후배들을 대상으로 취업 상담을 해주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문세환 씨는 그날 만난 후배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각별해 보였다고 한다. 그는 “채용 정보만 얻기 위해 온 학생들도 더러 있었지만 대체로 회사에 대해 아는 것도 많고, 준비를 많이 해온 것 같아 믿음직하고 뿌듯했다”고 소감을 전했다. 취업의 출발은 자기 자신의 개성과 특성 등이 진솔하게 녹아 있는 자기소개서를 쓰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는 성장 배경, 성격의 장·단점 등의 자기 이야기를 쓰는 것에도 요령이 필요하다고 했다. “남들과 차별화된 자기소개서를 쓰기 위해 제목은 면접관의 눈을 사로잡을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하고, 제목에 걸 맞는 내실 있는 콘텐츠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문세환 씨가 지금 몸담고 있는 패션 회사를 지망할 때 썼던 자기소개서에서 가장 평가가 좋았던 부분 역시 법학과를 2학년까지 마치고 사법시험을 준비했던 1년 동안 고시촌에서 ‘패션왕’처럼 보냈다고 쓴 대목이었다. 과장이 조금 섞이기는 했지만, 독창성 부분에서 면접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이력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시기를 덮어버리거나 감추기보다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입사하려는 회사와 연관성이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당당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 문 동문은 '남들과 차별화된 자기소개서를 쓰기 위해 제목은 면접관의 눈을 사로잡을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하고, 제목에 걸 맞는 내실 있는 콘텐츠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라고 말한다. 그는 해군 장교로 전역 6개월을 앞두고 취업 준비를 했다. 군 복무를 병행하느라 다른 지원자들보다 준비한 것이 많지는 않았지만, 밝고 건강해 보이는 면접 태도 덕분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자신감이라는 덕목은 취업 준비에 있어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실제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지원자가 그렇지 않은 지원자보다 수월하게 취업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소심하게 정답을 말하는 것과 조금 부족하더라도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입니다. 누구나 틀리거나 모를 수 있어요. 오히려 그럴 때일수록 배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됩니다.” 회사나 기업도 좋은 인재를 뽑아야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무조건 학점이나 어학 실력 또는 인턴 경력만 믿고 쉽게 사람을 채용하지 않는다. 신입 사원은 밝고 긍정적인 태도로 자기가 속한 부서나 팀에 좋은 기운을 불어넣어 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면접관이 자신감을 중요하게 평가하는 이유 또한 지원자가 기업에 몸담게 됐을 때를 고려해서다. 패션과 의상을 전공한 지원자가 대부분인 곳에서 법학과 출신의 해군 장교였던 그가 당당히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은 면접관이 어떠한 면에 가장 중점을 두고 평가하는지를 예측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세환 씨는 “요즘 기업에서 선호하는 인재에 부합하기에 미흡한 부분이 많았다”며 “한양대 출신이라 좋게 본 것 같다”며 겸손해했다. “우리 대학은 기업들이 무척 선호하는 학교 중 하나입니다. 그것만으로도 큰 스펙이 되는 만큼 후배들도 자신감을 갖고 취업 준비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묻지 마 지원’을 하기보다는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적합한 기업에 지원하는 것이 순서라는 걸 꼭 기억하길 바랍니다.” 노력을 멈추지 않는 한 내일은 오늘보다 취업에 성공할 확률이 0.1%라도 올라갈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내면에 차곡차곡 경험이 쌓이다보면 언젠가 100%에 도달할 것이다. 그날이 한 달 뒤가 될지 일 년 뒤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내일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사랑한대 2018년 01-02월호 이북 보기

2018-03 14

[학생][도전한대] 농촌과 농부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팜토리(Farmtory)는 농장(Farm)과 이야기(Story)를 합친 이름이다. 사명에서부터 팜토리가 지향하는 바가 잘 드러난다. 농장으로 상징되는 농촌과 농부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알리겠다는 의미다. 김강산 대표가 농촌과 농부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 하는 이유는 뭘까. 글. 이주비(학생기자) / 사진. 안홍범 ▲ 팜토리 대표 김강산(기계공학부 09) 학생 먹거리에 담긴 가치와 신뢰 안전한 먹거리에 대한 전 국민적 관심은 지난해 8월 발생한 살충제 계란 파동을 계기로 극대화됐다. 1,239곳의 산란계 농장 중 부적합 판정을 받은 농가는 52곳이었는데, 친환경 농가가 31개였고 일반 농가가 21개였다. 이에 친환경 인증 제도를 둘러싼 논란이 더욱 거세졌다. 닭 사육 방식에 대한 문제도 제기됐다. 단가를 최대한 낮추고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욕심이 부른 참사였다. “기존 유통라인은 대량소비 체제에 맞는 대량생산 방식으로 운영됐고, 품질보다는 가격으로 경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품질이 계속 안 좋아질 수밖에 없었어요. 반면 소량생산을 하면 좀 더 안전하고 높은 품질의 농산물이 나올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다품종 소량생산 방식으로 계속 바뀌어갈 거라고 봐요.” 안전한 먹거리에 대한 소비자의 요구와 다품종 소량생산이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는 지금, 소비자와 농부 간의 신뢰를 토대로 직거래를 운영하는 팜토리는 이 모든 것을 충족하고 있다. 팜토리는 농촌과 농부의 이야기를 소비자에게 전함으로써 소비자와 농부 간의 신뢰를 쌓아 농산물 직거래를 활성화한다. 농부의 이야기로 콘텐츠를 제작하는 것은 농부와 소비자 간 신뢰를 구축하는 방법 중 하나다. 또 농부가 직접 서울에 올라와 플리마켓 형태로 운영하는 농부시장을 개최해 고객과 직접 만나는 자리도 마련한다. 이는 경쟁업체와는 차별화된 팜토리만의 특징이다. “저희는 이제 시작 단계예요. 서울 도심 한가운데서 농부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저희 팜토리만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직접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농산물을 맛볼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한정적인 마트 시식 코너와 달리 저희 농부시장에선 누구나 모든 것을 맛볼 수 있어요. 이 과정에서 소비자는 자연스레 농부에 대한 신뢰를 쌓게 되고요.” 첫 창업, 시행착오의 연속 김강산 대표는 지난 2015년 창업 공모전을 준비하며 스타트업에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 공모전의 주제는 농촌 관광에 대한 것이었다. 우승을 하며 서비스를 론칭하고, 자연스레 창업을 했다. 덜컥 시작하게 된 창업이었던 만큼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하나하나 배워나가야 했다. “지금 팜토리가 제공하는 서비스 이전에 ‘트링’이라는 서비스가 있었어요. ‘트링’에선 농부가 직접 카드뉴스를 제작하는 등 콘텐츠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때 저희가 미처 살피지 못하고 간과한 것이 있어요. 바로 농부들의 연령대였죠. 정작 사용자인 농부들이 이런 서비스에 익숙하지 않았던 거예요.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사용자들이 저희가 제공한 서비스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어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팜토리는 변화의 방향을 모색해갔다. 그러던 중 직거래 장터인 농부시장을 알게 됐다. 김강산 대표가 직접 생산자로 참여해 청년 운영진으로 활동하면서 농부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좀 더 가까이에서 직접적으로 고민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농부시장을 알리는 한편 농부와 소비자 사이에 상시 구매채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온라인 쇼핑 플랫폼 ‘얼장(www.eoljang.com)’이 탄생했다. “트링의 경우 좋은 서비스였지만 사람들이 쓸 수 없었던 것처럼, 실질적으로 농부들께 필요한 것을 찾아서 이를 서비스화, 제품화하는 게 제 창업의 과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도 그 과정을 배워가고 있는 중이고요.” 농부와 소비자의 행복한 동행 이제 시작 단계인 팜토리가 앞으로 더욱 성장하기 위해서는 고객 분석이 가장 시급하다. 팜토리의 서비스를 원하는 고객과 생산자를 제대로 연결해주는 것이 중요하단 의미다. 팜토리가 주요 서비스로 내세우는 농부시장은 개최 장소에 따라 소비자의 성향이 뚜렷이 구분되고, 연령대와 성별에 따른 차이가 크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확한 고객 분석이 우선 이루어져야 한다. “사무실에서 타깃 고객을 설정하고 이를 실질적으로 적용했을 때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현장 데이터를 계속 축적해 이를 고객 서비스에 반영해 나갈 예정입니다.” 농산물 직거래를 위한 기본적인 인프라와 시스템도 좀 더 보강해나갈 계획이다. 팜토리와 함께할 농부를 꾸준히 발굴하고, 농부시장의 수도 늘려야 더 많은 고객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팜토리가 농부와 소비자 모두 만족할 수 있는 농산물 유통시장이 됐으면 좋겠어요. 아무래도 우리나라가 농업 선진국인 미국, 프랑스, 일본보다 시스템적으로 낙후된 부분이 많아요. 게다가 농업은 우리 생활에 무척 밀접해 있는 분야지만, 그에 비해 관심은 덜한 편이죠. 저희가 나서서 그런 점들을 개선해 농업의 든든한 토대를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창업 이후 쉼 없이 달려온 김강산 대표. 오는 2월 졸업을 앞두고 있는 그에게 소감을 물었다. “아직 준비가 부족해요. 졸업을 앞둔 친구들 모두 같은 마음일 거예요. 모두가 완벽히 준비해서 사회에 나가지는 못할 거예요. 그래도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이 있으니까 잘해내리라 믿습니다. 학교 안에서 많은 수혜를 받은 만큼 졸업 후에도 한양대학교라는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흔히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세 가지 요소로 ‘의식주’를 꼽는다. 더러는 ‘의식주’가 아닌 ‘식의주’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먹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위험한 먹거리에 늘 불안하다. 이런 시대에 소비자와 생산자 간에 끈끈한 신뢰를 구축하고, 바른 먹거리를 추구하는 팜토리의 움직임은 더욱 뜻 깊어 보인다. Q. 창업을 하면서 학교 프로그램을 이용한 게 있나요? A. 저는 교내 창업보육센터에서 1년 동안 활동하면서 멘토링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중 하나가 한양대와 SK가 협력해 진행한 ‘SK 청년비상 프로그램’(청년 기업가를 위해 기술사업화, 소셜벤처, 투자 유치, 글로벌 창업을 지원하는 프로젝트)이었고, 덕분에 서울 을지로에 위치한 SK 창조경제혁신센터에 입주할 수 있었죠. 특히 이 프로젝트에서 2016년 하반기에 진행된 인큐베이팅 기간 동안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어요. 당시 인연을 맺은 멘토께서 지금도 계속 멘토링을 해주고 계세요. 한양대는 창업 쪽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기 때문에 기회가 있을 때 한번쯤 도전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Q. 먼저 창업을 해본 경험자로서 창업을 꿈꾸는 한양인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A. 제가 수도권 대학생이 연합한 개발 연합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어서 지금도 동아리 회원들과 재미 삼아 창업대회에 나가곤 해요. 가보면 대부분 똑같은 아이템이에요. 사람들의 생각이 다 비슷한 거죠. 대개의 아이디어가 현실적으로 구현이 불가능하거나 혹은 남들도 이미 하고 있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창업을 하려면 자신이 하고자 하는 분야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아야 해요. 단순히 아이템만 가지고 무작정 시작하기보다는 그 분야에 대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배워야 하죠. 하고 싶은 분야가 생기면 관련 스타트업에서 일을 하거나 아르바이트를 해서 경험을 쌓을 필요가 있어요. 자기 분야를 정하고 깊이 파고들어 차별점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한대 2018년 01-02월호 이북 보기

2018-03 13

[학생][동고동락] ‘레알밥도둑’ X ‘간장게장’의 대활약

지난해 9월 14일부터 16일까지 사흘간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2017 국제로봇콘테스트&R-BIZ 챌린지에서 한양대의 ‘레알밥도둑’ 팀이 로봇 ‘간장게장’으로 대통령상을 받는 쾌거를 거뒀다. 재치 있는 팀명과 로봇 이름에서 그들이 이 대회를 얼마나 즐겼는지 엿볼 수 있다. ‘간장게장’의 우승을 이끈 ‘레알밥도둑’ 팀의 이도규·정현철·조민수(로봇공학과 13) 학생을 만나봤다. 글. 이주비(학생기자) 사진. 안홍범 ▲ 왼쪽부터 순서대로 조민수·이도규·정현철 학생 열정과 노력의 값진 결실 “금상! 레알밥도둑!” 호명이 되는 순간까지 긴장했다. 팀원들 모두 2등일 거라고 생각했다. 끝까지 이름이 불리지 않자 마음을 접기도 했다. 완주 시간이 짧아 유리했지만, 미션 수행 과정에서 받은 감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우승이었다. 자율주행이 콘셉트였던 대회에선 간장게장이 어떻게 움직이든 팀원들이 손을 쓸 수 없었다. 그저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 경기가 시작되는 순간, 간장게장에게 바통이 넘어가는 것이다. 팀원들은 그렇게 간장게장이 펼치는 경기를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완주할 때까지 누구 하나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저희가 열심히 노력해온 결과물이니까 제발 이탈하지 말라고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면서 경기를 지켜봤어요. 저희도 많이 긴장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노력한 만큼 좋은 결과가 나와서 다행이에요.”(이도규) 점수는 소프트웨어 오픈 소스 평가와 대회 당일 경주 성적을 합산해 산출됐다. 레알밥도둑 팀이 대회 당일 미션 수행에서 감점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우승할 수 있었던 것은 소프트웨어 점수에 소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장게장은 빠른 시간 내에 완주했지만 감점을 받았어요. 반면 모든 미션을 통과해서 감점을 받지 않고 완주한 팀이 있었어요. 결국 저희가 우승할 수 있었던 건 소프트웨어 점수를 잘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픈 소스를 올리는 페이지를 마감 직전까지 붙들고 정성을 쏟았던 게 최종 점수에서 차이를 만든 거죠.”(조민수) ▲ 레알밥도둑’ 팀원들이 금상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 왼쪽부터 순서대로 조민수ㆍ정현철ㆍ이도규ㆍ정민재 학생 ▲ ‘레알밥도둑’ 팀은 우승 로봇 ‘간장게장’으로 이번 대회를 준비했다 학교 밖 또 다른 배움의 장 대회 출전 경험은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새로운 것들을 알려준다. 많은 이들이 대외 활동을 권장하는 이유다. 레알밥도둑 팀도 이번 대회를 준비하면서 강의실 안에서는 배울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접했다. 특히 간장게장을 움직이게 하려면 ROS라는 기술이 필요한데, 이는 팀원들에게도 생소한 개념이었다. “ROS는 Robot Operating System의 약자예요. 흔히 OS라고 하면 윈도우와 같은 운영체제를 떠올리는데, ROS는 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로봇을 제어하기 위한, 로봇만을 위한 제어도구로 보면 될 거예요.”(조민수) 무엇보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프로그래밍의 오류를 잡아내는 일이었다. 처음엔 분명 이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실행시켰을 땐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다시 확인을 해봐도 오류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 오류들은 나중에야 아주 사소한 곳에서 발견되곤 했다. 이런 식으로 한 군데가 막혀서 시간을 소모해야 할 때가 가장 힘들었다. 레알밥도둑 팀이 이번 대회를 치르면서 배운 것은 무엇이었을까. “남들의 도움 없이 새로운 지식을 스스로 찾는 법을 익혔습니다. 대회를 준비하며 제가 알고 있던 지식보다는 새롭게 접하는 지식을 활용해야 할 때가 많아서 열심히 공부했어요. 작업 환경과 같은 부분은 교수님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요.”(정현철) “학교 강의실 안에서 배우는 지식 이외에도 실제로 지식을 어떻게 적용하는지를 배웠던 시간이었습니다. 이론이 통하지 않는 예외 사항도 많았는데, 그럴 때는 구글링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어요. 이렇게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야말로 사회에서 요구하는 중요한 능력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었던 것 같아요.”(이도규) 대회 주최 측에서는 상금 대신 로봇을 상품으로 지급했다. 이는 참여자들이 결과에 안주하지 말고, 수상을 발판 삼아 더욱 성장하길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부응하듯 레알밥도둑 팀원들은 앞으로 사회에 도움이 되고, 일상생활에서도 친숙한 로봇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학구열을 불태우고 있다. 사랑 한대 2018년 01-02월호 이북 보기

2018-03 13

[교수][시선 집중] 융합적 사고로 학문의 장벽을 허물다

ICT융합학부 박은일 교수가 한국연구재단과 엘스비어가 공동 주최한 ‘2017 올해의 신진 연구자상’을 수상했다. 이를 통해 세계적 수준의 잠재력은 물론 오늘보다 내일이 더 기대되는 연구자로 인정받았다. 특히 박 교수는 공학적 연구 방법과 인문사회학적 연구 방법을 접목시켜 신진 연구자로서의 도전적인 탐구 정신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글. 박영임 / 사진. 안홍범 ▲ ICT융합학부 박은일 교수 ERICA의 ‘막내 교수’에서 ‘올해의 신진 연구자’로 한양대학교 ICT융합학부는 젊은 교수진들이 대거 포진한 신생 학부다. 그중에서도 가장 젊은 박은일 교수(31세)가 지난해 ‘올해의 신진 연구자’ 7인에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올해의 신진 연구자는 한국연구재단과 세계적인 학술연구 출판사인 엘스비어(Elsevier)가 학술적 성과가 우수한 연구자를 조기 발굴해 세계적 수준의 연구자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고자 2017년 처음 제정한 상이다. 대상은 국내 연구자 중 최근 10년 이내 국제 학술지(엘스비어의 우수 학술 논문 데이터베이스인 SCOPUS 기준)에 처음 논문을 발표한 39세 이하 젊은 연구자들로, 학술 연구논문 피인용 실적을 다각도로 분석해 선정한다. 첫 시상식이 열린 지난해에는 이공 분야 5명, 인문사회 분야 2명이 올해의 신진 연구자로 뽑혔다. 이 중 박 교수는 인문사회 분야를 대표하는 연구자로 선정됐다. 사용자 데이터 분석을 활용한 상호작용 및 혁신에 관한 다양한 연구를 진행해 현재까지 국제 학술 논문 77편을 게재하고, 512회의 피인용 실적을 기록해 연구 경쟁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하지만 공학박사인 자신이 인문사회 분야 수상자로 선정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박은일 교수. “제 전공 분야가 전통적인 인문사회 분야가 아닌데 제가 받아도 되는 상이 맞는지에 대한 의문이 먼저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분야별 장벽이 높았는데, 최근에는 공학과 사회과학 방법론을 융합한 제 연구를 인문사회 분야로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박 교수의 논문은 특히 다른 연구자들에게 피인용되는 건수가 높은 편이다. 그중에서도 국제 학술지 발표 건수가 많아 국내뿐만 아니라 최근 급속한 경제 성장을 보이고 있는 중국, 동남아 연구자들에게 많이 인용되고 있다. 이는 박은일 교수의 연구가 국내 ICT(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Technologies, 정보통신기술) 사용자들의 특별한 현상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ICT 트렌드를 선도하는 우리나라가 시험 무대 역할을 하다 보니 국내 현상에서 미래를 예측하려는 글로벌 연구자들이 많은 것이다. 연구의 핵심 키워드는 ‘사용자’와 ‘데이터’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몇 해 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모바일 소셜 게임 ‘애니팡’의 성공 요인을 분석한 연구다. 그의 박사과정 시절 지도교수인 엄재용(Jay Ohm) 교수와 공동으로 수행한 이 연구는 2014년 논문이 게재된 후부터 지금까지 110회가 넘는 피인용 횟수를 보일 정도로 그의 연구 중에 가장 인기 있는 연구로 여겨진다. 단순히 게임이 재미있기 때문에 성공했을까. 아니면 소셜 게임이라는 사회적 네트워크가 주효했을까. 분석 결과 사회적 관계의 유용성, 즉 지인들과의 네트워크를 적극 표출하고 인간관계를 증대시키는 데 효과적이었던 것이 성공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었다. 지난해 5월에는 국내 학자로는 최초로 영국 에메랄드사에서 출판하는 SSCI(사회과학논문 인용색인)급 국제 저명 학술지인 <프로그램 저널(Program Journal)>에서 최우수 논문상을 받았다. 이때 발표한 논문의 내용은 교육용 로봇의 활용도 및 선택에 있어 사용자들의 심리적인 요인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실증 분석한 것이다. 교육용 로봇을 단순히 공학적으로만 접근하지 않고 사회과학 통계와 경영학 및 심리학적 연구 방법을 두루 접목시켜 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모바일 게임과 교육용 로봇을 연구한 두 편의 논문만 봐도 관심의 스펙트럼이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해 7월 지식경영학회에서 우수 논문상을 수상한 논문은 기업의 혁신 활동이 고용 창출 등 경제적 성과에 얼마나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지 연구한 것이었다. 그 밖에 다소 의외의 분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신재생 에너지의 경제성 평가에 대한 연구도 수행한 바 있다. 그만큼 박은일 교수는 연구 대상을 경계 짓지 않는다. 일상생활 중 궁금하거나 불편한 점이 생기면 그것이 바로 연구 대상이 된다. 이렇게 박 교수의 연구는 어느 한 분야로 한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하나의 키워드로 귀결시킬 수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사용자’와 그로 인한 ‘데이터’다. 모바일 게임이든, 로봇이든 이를 사용하는 것은 결국 사람일 터. 박 교수는 사용자의 경험과 상호작용을 분석하는 데 연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만 관심을 끄는 분야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공학과 인문사회학적 방법론을 아우르며 연구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결국 제가 하는 일은 사람을 통해 도출되는 사용자 데이터를 해석해 그 의미를 밝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데이터 사이언스 분야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소양과 공학적 소양이 모두 필요하기 때문에 학문의 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 박 교수는 '이제는 선제적으로 연구를 진행해 사용자의 미래 행동을 예측하고 그에 맞는 서비스를 미리 제시해야 합니다.' 라고 말한다. 다양한 대외 활동으로 융합적 사고 배양 예술과 과학을 넘나들던 융합형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박은일 교수도 처음부터 융합적 사고의 소유자였을까. 뜻밖에도 대학 시절에는 프로그래밍밖에 모르는 이른바 ‘컴돌이(컴퓨터공학도를 줄여 부르는 말)’였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학과 인문사회학적 방법론을 융합하는 연구자가 됐을까. “석사 시절, 공동 지도교수였던 안헬 포빌(Angel Pascual del Pobil) 교수께서 다양한 외부 활동을 강조하셨어요. 1년에 해외 학술대회를 12회나 참가한 적도 있죠. 그때 디자인 등 전공이 아닌 분야에도 참가할 것을 권유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왜 비전공 분야의 학술대회까지 참가해야 하는지 의아하게 여겼다. 하지만 다양한 분야의 연구 방법을 접하며, 해결할 수 없으리라 지레 단념했던 문제들의 실마리를 예상 밖의 분야에 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연구 분야도 폭넓어졌다. “예전에는 ‘저 주제는 연구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시도조차 하지 않았죠. 하지만 이제 다른 분야의 연구 방법론을 접목시키면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현재도 박 교수는 다양한 분야의 심포지엄이나 세미나에 참석하고 있다. 유연한 사고로 창의적인 연구 성과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학계가 신진 연구자에게 기대하는 자세가 바로 그러한 것일 테다. ICT융합학부에서 컴퓨터공학을 게임, 음악 등 문화 콘텐츠에 접목시키는 컬쳐테크 전공을 가르치고 있는 박 교수는 학생들에게도 다양한 대외 활동을 강조한다. “공모전, 학회 활동, 교환학생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적성을 찾고 자신만의 목표를 세워 꿈을 이루기 위한 포트폴리오를 구축해야 합니다. 자신만의 셀링 포인트를 만들어야죠.” 박 교수는 ICT융합학부 학생들이 입학 후 처음 접하는 전공과목을 가르치기 때문에 엄하게 기강을 잡는 편이다. 하지만 신생 학부라 선배가 없는 학생들을 위해 때로는 선배를 대신해 따뜻한 조언을 아끼지 않고 있다. 사회적 가치 창출하는 연구자 될 터 최근 박은일 교수는 사물인터넷과 스마트 시티(21세기의 새로운 도시 유형으로, 컴퓨터 기술의 발달로 도시 구성원들 간 네트워크가 완벽하게 갖춰져 있고 교통망이 거미줄처럼 효율적으로 짜여진 것이 특징이다) 내에서 예측되는 사용자의 이용 패턴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분야로 관심의 촉수가 뻗은 것이다. 하지만 스마트 시티는 이제 막 추진되고 있는 사업인데, 어떻게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까. “기존에는 과거의 데이터를 분석해 기업이나 산업의 개선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이제는 선제적으로 연구를 진행해 사용자의 미래 행동을 예측하고 그에 맞는 서비스를 미리 제시해야 합니다.” 사용자 행동 분석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용자 혁신을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이를 데이터 사이언스 분야로 확장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사회적·산업적으로 활용되지 않는 연구는 상아탑에 갇힌 연구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적으로 유용한 연구 성과를 도출하는 연구자가 되고 싶습니다.” 이렇게 박 교수의 연구 목표는 사용자 경험과 행동을 분석해 사회적·산업적 가치를 창출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사랑 한대 2018년 01-02월호 이북 보기

2018-03 13

[동문][꿈꾸는 청춘] 나의 청춘은 칠전팔기의 도전기

임진왜란의 3대 승전 중 하나로 꼽히는 행주대첩을 지휘한 권율 장군이 무과에 급제한 나이는 45세. 지난해 마지막 사법시험의 최고령 합격자로 주목받은 박종현 씨 또한 같은 나이에 합격의 기쁨을 누렸다. 도전에는 나이 제한이 없다고 말하는 그에게서 진정한 청춘의 자세를 배운다. 글. 박영임 / 사진. 안홍범 ▲ 제59회 사법시험 합격자 박종현(법학과 92) 동문 마지막 사법시험 최고령 합격자 신림동 고시촌에서만 꼬박 15년. 웬만하면 고시촌을 벗어나고 싶을 법도 하건만, 그는 만남의 장소를 굳이 신림동 인근으로 잡았다. 인터뷰를 마친 후 민사법 관련 스터디 모임이 있기도 하지만, 인생의 3분의 1이라는 시간을 온전히 이곳에서 보냈기에 가장 익숙한 곳이기 때문이리라. “저는 여전히 진행형 인간입니다. 실패와 성공의 경계에서 다행히 한 번의 기회를 얻었을 뿐이죠.” 마지막 사법시험의 최고령 합격자 박종현 씨의 말이다. 지난해 11월 7일은 법무부의 제59회 사법시험 최종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이다. 이날 발표는 많은 이들이 몇 곱절로 마음을 졸이며 기다려야 했다. 이번을 끝으로 지난 1950년 고등고시 사법과로 시작한 사법시험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응시자와 가족들은 발표의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발표 며칠 전부터 초조함으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넘긴 박종현 씨는 차마 합격자 명단을 직접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회사에 휴가까지 내고 곁을 지켜준 아내가 그를 대신해 명단을 확인했다. 합격자 명단에서 그렇게 기다리던 박종현이라는 이름 석 자를 발견한 순간, 부부는 끌어안고 한참이나 기쁨과 회환의 눈물을 흘렸다. “가장 먼저 ‘다행’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15년 동안 노력한 시간이 결실을 맺은 순간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박종현 씨는 내심 이번에는 합격하리라 기대하는 마음이 컸다고 고백한다. 마지막까지 흐트러짐 없이 정신력을 곧추세우고, 그 누구보다 성실히 준비했다고 자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건강 상태나 가정사 모두 원만했다. 모든 상황이 순조로웠다. 하지만 최고령 합격자라는 타이틀까지 얻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마흔다섯 살이면 최고령 합격자치고는 어린 편입니다. 오십이 넘어 합격하는 분들도 있었으니까요. 최고령 합격자로 주목받으니 부담이 되기도, 쑥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상징성이 있으니까 이 또한 고마운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긍정의 힘으로 도전 또 도전 결혼 후 서른에서야 본격적으로 사법시험을 준비했으니 남들보다 도전부터 늦었다. 그리고 지난 15년 동안 사법시험 1차 시험만 10여 차례, 2차 시험은 6번이나 치렀다. 10년이 넘으면 포기할 만도 한데 그가 끝까지 도전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던 버팀목은 무엇일까. “제가 좀 긍정적인 편입니다. 분명히 제게도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의 말을 요즘 유행하는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 정도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자신에 대한 충만한 신뢰감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남들보다 늦었다는 중압감이 없었겠는가. 한 해 한 해 수험 생활이 더해갈수록 심신이 피폐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는 반대로 자신과의 싸움 속에서 소중한 것들을 깊이 응시했다. “20대 때는 망연한 좌절감에 빠져 자신감을 갖지 못했던 것 같아요.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 제 자신과 삶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러면서 ‘더욱 열심히 노력하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자’고 다짐하게 됐습니다. 사실 마흔다섯 살이면 사회에서는 은퇴를 준비할 시기죠. 그렇다고 제가 마냥 좌절하고 있으면 하늘도 기회를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생각을 바꾸니 자신감으로 무장할 수 있었다. 그는 특히 어려운 역경을 헤치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고전문학 속 불굴의 주인공들을 보며 힘을 얻고 긍정적인 가치관을 배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고전과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실패에서 얻은 값진 깨달음 ▲ 박 동문은 '저는 여전히 진행형 인간입니다. 실패와 성공의 경계에서 다행히 한 번의 기회를 얻었을 뿐이죠.' 라고 말한다. 박종현 씨의 합격을 이야기하면서 아내와 가족들의 지지를 빼놓을 수 없다. 언제나 응원을 아끼지 않았던 이들이다. 하루는 가장으로서 미안한 마음에 아내 몰래 사법시험 교재 편찬 일을 해 생활비를 내놓은 적이 있다. 하지만 아내는 너무나도 매몰차게 돈 봉투를 거절했다. 그리고 공부에만 매진할 것을 당부했다. “그때 정신이 바짝 나더라고요. 가족들과 아내가 끝까지 믿어줬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누구나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어느 시집의 제목처럼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말을 아쉬움에 되뇌게 된다. 그래서 후배들에게는 자신의 가능성을 미리 재단하지 말고, 명확한 목표를 세워 정진할 것을 조언한다. “대학 때는 스스로 저의 한계를 제한했던 것 같아요. 그때 마음을 잡고 공부했어야 했는데, 돌아보면 후회도 됩니다. 학교에서 지원도 많이 해주는데 말이죠. 하지만 깨닫는 때가 따로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이라도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나이, 학벌 등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사람들이 많은데 열심히 노력하면 기회는 분명히 있습니다. 빨리 깨달을수록 기회도 빨리 얻을 수 있겠죠. 또 근시안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거시적인 시각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찾아보세요.” 자신처럼 그 깨달음이 늦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후배들에게 챙겨주는 말들이 많다. 하지만 꿈을 향한 도전을 언제까지 계속해야 할지, 그 과정을 걷는 이들에게는 어두운 터널 속을 헤매는 것처럼 막막하기만 할 때가 있다. “그동안 사법시험을 준비하며 꿈을 접고 포기하는 이들을 많이 봤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 접었으니 더 힘들 거라 생각합니다. 후회도 많을 테고요. 산 정상에 올라가서 보면 힘든 길이 오히려 지름길일 수도 있어요.” 실패를 많이 경험한 인생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이제 무대에 오를 시간 오는 3월이면 사법연수원에 들어가 진정한 법조인이 되기 위해 2년간 수련의 과정을 걸어야 한다. 그에 앞서 연수원 동기들과 스터디에 여념이 없는 중이지만, 틈틈이 그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친구들, 친지들과 만나 10여 년 만의 회포를 풀고 있다. 또 여행이나 악기 배우기 등 합격 이후로 미루고 하지 못했던 버킷 리스트들을 하나하나 실천 중이다. 유럽 여행을 앞두고 새벽마다 영어 회화 학원도 다니고 있다. 사법연수원에서의 생활도 기대가 크다. 최고령자가 자치회장을 맡는 관례에 따라 본의 아니게 자치회장 내정자가 된 그는 대학 시절 고등학교 동문회장을 지낸 경험을 떠올리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자치회장은 그렇다 치고 최대 스무 살 이상 차이가 나는 동기들과 생활해야 하는 것이 부담되지는 않을까. “고시촌에서도 저보다 한참 어린 수험생들과 잘 지냈습니다. 불편해하지 않도록 먼저 다가가야죠. 잘 어울릴 자신 있습니다. 그리고 귀하게 얻은 기회이니 더욱 치열하게 살 계획입니다.” 비로소 법조인의 관문을 통과했으니 앞으로 전문성을 쌓아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하는 박종현 씨. 비록 출발은 늦었지만 그렇기에 앞으로의 시간들이 더욱 소중하게 쓰일 것이다. 오랫동안 고치 속에서 때를 기다리던 꿈이 드디어 날개를 펼칠 시간이다. 사랑 한대 2018년 01-02월호 이북 보기

2018-03 13

[학생][人사이드人터뷰] 반짝반짝, 꿈꾸는 배우

영화 <4등>과 <시인의 사랑>으로 충무로의 주목을 받은 정가람 배우가 연극영화학과 18번 학번 새내기로 입학했다. 영화 <4등>에서 보여준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어린 광수’와는 달리 그는 연기에 대한 꿈을 조금씩 키워나가는 스물다섯의 꿈 많은 청년이었다. 글. 오인숙 사진. 안홍범 ▲ 배우 정가람(연극영화학과 18)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 “너무 행복하고 설렙니다. 빨리 학교에 가고 싶어요. 앞으로 어떻게 학교생활을 할지, 친구들과의 생활이 얼마나 재미있고 즐거울지 기대가 커요.” 18학번 또래보다 나이가 많은 신입생, 배우 정가람. 그는 부산외대를 자퇴하고 이번에 두 번째 신입생으로 한양대에 입학했다. 그와 한양대의 인연은 스무 살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에 올라와서 처음 산 곳이 왕십리였고, 2년간 살면서 학식도 접해봤을 만큼 한양대는 이미 그에게 친숙한 곳이었다. “사실 고향 친구가 한양대 학생이에요. 이번에 졸업을 앞두고 있죠. 어쩌다 보니 친구가 졸업할 때 제가 입학하게 됐네요.(웃음)” 그가 학교생활에서 가장 기대하고 있는 부분은 같은 꿈을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과 교류다. 연기와 연출이라는 하나의 꿈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고민을 나누고 진지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생각만 해도 흐뭇하다. “연기를 공부하는 또래 친구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지금까지 어떻게 준비해왔는지 무척 궁금해요. 친구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그만큼 저도 학교생활을 열심히 또 즐겁게 할 생각이고요.” <4등> 그리고 <시인의 사랑> 2016년 영화 <4등>에서 ‘어린 광수’ 역할로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그는 이 영화로 2016년 제53회 대종상 신인남우상, 2017년 한국영화기자협회 제8회 올해의 영화상 신인남우상을 거머쥐었다. 배우 정가람에게 이 영화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영화 <4등>은 사랑이죠.(웃음)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정말 감사한 작품이에요. 제가 제대로 배우 생활을 시작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고, 영화가 무엇인지 알려줬죠.” 단역으로 조금씩 방송에 얼굴을 내밀던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처음으로 의미 있는 역할을 맡게 됐고, 연기자로서의 책임감도 알게 됐다. 첫 영화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얼굴을 알리고, 이토록 주목받았으니 “<4등>은 사랑”이라는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4등>은 그가 연기에 대한 절실함을 가졌을 때 만난 작품이다. 수영 천재인 ‘어린 광수’와는 달리 연기에 대한 갈증으로 힘들었던 ‘스물두 살의 정가람’이었던 때, 연기를 제대로 하고 싶은 절실함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아야 했을 때, 그런 시기에 만난 작품이 <4등>이었다. “‘어린 광수’는 일주일 간격으로 한 달간 오디션을 보며 따낸 배역이에요. 그 기간이 오히려 배움과 성장의 시간처럼 여겨졌을 정도예요.” 어렵게 따낸 배역을 눈앞에서 보여줘야 할 첫 현장에서 그는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어쩔 줄 몰라 하던 그에게 정지우 감독이 말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해 보세요.” 그 한마디에 긴장이 풀렸던 걸까. 첫 영화에도 불구하고 그는 편하고 즐겁게 촬영에 임할 수 있었다. “한 선배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이 영화는 정지우 감독님이 레인이 없는 커다란 수영장을 만들고, 그곳에서 배우가 마음껏 수영할 수 있게 만들어준 작품이라고요. 저 역시 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연기했던 것 같아요.” <4등>에 이어 2017년에는 영화 <시인의 사랑>으로 또 한 번 주목 받았다. 그의 표현을 빌면, 제목처럼 시적인 감성이 풍부한 영화다. 시도 노래처럼 가슴에 와 닿는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작품이다. 두 번째 영화에서는 감정을 보여줘야 할 장면이 늘고, 배역의 비중도 월등히 커졌다. 양익준·전혜진 배우와 함께 영화를 이끌어가야 하는 부담이 컸지만, 두 선배를 믿고 따라갔다. “어려운 캐릭터였지만, 꼭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4등>에서는 하나만 생각하고 직진했다면, <시인의 사랑>에서는 캐릭터 분석을 비롯해 여러 생각과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감독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준비했던 기억이 납니다.” 모든 작품이 다 새롭고 다르다는 그의 말처럼, 이 영화 역시 새롭게 배우고 또 한 번 성장할 수 있게 만들어준 영화였다. 스무 살, 꿈을 찾아서 경남 밀양이 고향인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부모님의 권유대로 학교와 학과를 선택해 진학했다. 그러다 보니 배움에 대한 의욕도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스스로의 힘으로 뭔가를 이루고,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경험하며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열심히 찾았다. 그때 했던일 중의 하나가 소셜커머스 광고 모델이었다. “우연찮게 한두 번 하게 됐는데, 처음에는 영 어색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너무나 재미있는 거예요.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이 뭘까 찾다가 배우를 꿈꾸게 됐죠.” 영화는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무수히 봤더랬다. 하지만 한창 자신의 진로를 고민하던 시기에 보니 그저 관객의 입장에서 영화를 봤을 때와는 다르게 보였다. ‘나도 저런 멋진 일을 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으로 살며 여러 가지 인생을 경험해볼 수 있을까?’싶었다. 배우에 대한 간절한 꿈을 품고 상경했지만, 아무 연고도 없는 서울 생활이 호락호락할 리 없었다. 그저 막막했던 가운데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조금씩 돈을 모아 프로필 사진을 찍어 기획사에 보냈다. 운이 좋았는지 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그렇게 활동을 시작해 차곡차곡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쌓아갔다. ▲ 정 배우는 '연기를 공부하는 또래 친구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지금까지 어떻게 준비해왔는지 무척 궁금해요.' 라고 말한다. 여행처럼 영화처럼 살고파 “이 일을 하면서 좀 더 적극적으로 변하고 쾌활해진 것 같아요. 하고 싶은 말과 마음에 둔 생각들을 예전보다 더 쉽게 할 수 있게 됐거든요.”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엄마 아빠, 사랑해요”와 같은 말들. 예전에는 낯부끄러워 꺼내지도 못했던 말들을 이제는 서슴없이 할 수 있게 됐다. 그만큼 연기를 통해 친근하고 유연해졌음을 스스로 깨닫는다. 정가람 배우는 얼마 전 영화 <악질경찰>과 <독전>의 촬영을 끝내고, 현재 <기묘한 가족>을 찍고 있다. <악질경찰>에서는 프로 털이범으로, <독전>에서는 막내 형사를 맡아 상반된 역할을 소화했다. 인터뷰를 위해 그를 만난 날도 지방 촬영으로 한 달여 만에 서울에 올라오는 것이라고 했다. 영화가 끝나면 주로 여행을 간다. 다양한 문화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큰 그에게 여행은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다. 화면으로 보는 것과 직접 경험하는 것이 전혀 다른 것처럼 여행을 통해 자신이 몰랐던 또 다른 세상과 만나는 것은 무척이나 신나고 흥미로운 일이기도 하다.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우고 싶어요. 그래서 여행을 자주 다니려고 해요. 새로운 문화를 접할 때마다 ‘아, 이런 세상이 있구나’ 하고 새삼 느낍니다. 이런 경험이 저에게 주는 영향이 매우 큰 것 같아요. 무엇이든 많이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이 연기에도 도움이 되고요.” 어쩌면 그가 여행을 좋아하는 것은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는 앞으로 배우로서 더 많은 성장과 발전을 이루게 될 것이다. 어떤 배우가 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는 한참을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교과서 같은 답일지 모르겠지만, 믿고 볼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나이가 들어서까지 오랫동안 꾸준히 연기하고 싶거든요. 이 일이 너무 즐겁고 재미있어요.” 학교에서의 체계적인 배움은 오랫동안 연기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기도 할 테다. 또 다시 새로운 출발선 앞에 선 정가람 배우. 이제 막 그의 즐거운 도전이 시작됐다. 사랑 한대 2018년 01-02월호 이북 보기

2018-02 08

[동문][사랑, 36.5°C]어렵게 내디딘 모교기부의 첫걸음이 마음 속 무거운 짐을 덜어줍니다

권선홍 교수는 1972년 한양대학교 고시반 공채 1기로 입학해 1976년 외무고시 1호 합격자가 된 자랑스러운 동문이다. 그는 대학 4년과 석사 2년을 합한 6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다. 그 수혜를 언젠가는 후배들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부채감을 평생 안고 살면서도 첫걸음을 떼기가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고 한다. 정년퇴임을 앞둔 나이가 되어서야 시작한 그의 기부는 ‘파워엘리트 나무그늘 캠페인’ 1호 기부자가 되면서 무거웠던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었다. 행정고시반 장학금으로 300만 원을 선뜻 쾌척하며 그 동안 마음만 있었던 어려운 한 걸음을 뗀 것이다. 글 편집실 / 사진 홍승진 ▲ 권선홍(72 법학) 부산외국어대학교 외교학과 교수 한양대학교 외무고시 1호 합격자이십니다. 법학을 전공하셨는데 사법고시가 아니라 외무고시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나요? 고등학교 시절부터 한국을 둘러싼 문제를 총체적으로 다루는 한국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그 시절엔 한국학이라는 용어도 생소하던 시절이라 진로를 찾기가 어려웠어요. 고등학교 3학년 때 친구가 한양대학교에 장학금을 지원하는 고시반 장학생 선발시험이 있으니 함께 응시해보자고 권유했어요. 사실 그 당시엔 대학 갈 형편이 못돼, 고시가 뭔지도 모른 채 장학금에 생활비까지 준다는 말에 응시를 했죠. 다행히 합격해 남들처럼 사법고시 공부를 시작했지만 제 적성과는 맞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다 2학년 1학기 때 한대신문사에서 주최하는 학술상에 응모했다가 인문사회분야의 최우수상을 수상하게 되었죠. 그것을 계기로 한국학 공부로 전과하고 싶어 사학과 학과장님과 여러 차례 면담하며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여의치가 않았어요. 결국 고시반에 남기로 했지만 나중에 학문의 길로 나가려면 사법고시보다는 어학을 좀 더 공부할 수 있는 외무고시가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2학년 2학기부터 외무고시로 진로를 바꾸었어요. 파워엘리트 나무그늘 캠페인 1호 기부자이십니다. 기부를 결정하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고시반 동기들 중에는 이미 장학금 되돌려주기 운동에 동참하는 친구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런 친구들에 비하면 많이 늦은 편이지요. 그동안 생활하다 보니 여유가 없기도 했지만, 사실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어요. 천 단위, 억 단위의 기부자들도 많잖아요. 그들에 비하면 형편없이 작은 금액이라고 생각하니 선뜻 나서기가 어려웠어요.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어느새 정년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더 늦어지면 안 되겠다 싶어 방법을 찾던 차에 마침 ‘파워엘리트 나무그늘 캠페인’ 소식을 들었어요. 고시반 장학금의 수혜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모금 캠페인이라 더욱 뜻깊은 것 같습니다. 교수님도 장학금 수혜자이십니다. 장학금이 교수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요. 제가 전기도 없던 시골 출신인데다 경제적으로도 대학갈 형편이 못되었어요. 그런 와중에 한양대학교 고시반 공채 1기로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1972년 당시 장학금 외에도 생활비를 매달 15,000원씩 받았는데 공장 노동자들의 한 달 봉급과 맞먹는 수준이었어요. 고시반 학생들이 이런 파격적인 지원을 받으며 공부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합격생들이 많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 모교의 지원이 없었다면 오늘날 이 자리에 있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권동문은 '장학금 지원을 받으며 공부한 고시반 출신 선후배 동문들! 우리가 십시일반 모은 기부금이 어려운 후배들에게는 매우 큰 힘이 됩니다.' 라고 말했다. 요즘 학생들을 보면 격세지감을 많이 느끼실 것 같습니다. 조언을 해주신다면? 젊은이들은 누구나 자기의 세대가 제일 어려운 세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즘 젊은이들도 지독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클 것입니다. 제 막내아들도 현재 취업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 그 절박함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을 알면서도 요즘말로 ‘최선의 노력을 다 하라’는 말밖에 못해 늘 미안하지요. 자신이 좋아하거나 일생을 바칠 만한 목표를 정하고 20~30년 정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그 분야에서 세계 최고 고수가 되어주길 바랍니다. 또한 취업 준비 등으로 힘든 일이 많겠지만 너무 경쟁에 매몰되지 말고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모교 기부를 새롭게 시작하면서 생각이 바뀐 부분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저에게 모교에 대한 기부는 학창시절 혜택을 받은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도리였습니다. 엄청난 혜택을 받으며 공부를 했으니 최소한이라도 되갚아야 하는 거잖아요. 저로서는 부산 총동문회와 지난해 11월 창립 20주년인 한양산악회 모임에 열심히 참여했던 것도 그러한 생각에서였지요. 그럼에도 기부를 계속 미루다가 어렵게 첫발을 뗀 느낌입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았으니 어렵게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시작하고 보니 조금 마음이 가볍습니다. 이제 정년퇴임하면 경제적으로 더 여유롭지 못할 수도 있지만, 훨씬 더 가벼운 마음으로 나름대로 기부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부의 어려운 첫걸음을 떼셨다고 하셨는데, 여전히 어렵게 느끼시는 분들에게 한말씀 해주신다면? 정년퇴임을 앞두고 뒤늦게 시작했는데 어쩌다 보니 캠페인의 1호 기부자가 되었습니다. 소액기부임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동문들께서 참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인터뷰에 응하게 되었습니다. 장학금 지원을 받으며 공부한 고시반 출신 선후배 동문들의 마음은 비슷하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십시일반 모은 기부금이 어려운 후배들에게는 매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동행한대 2017년 WINTER (제8호) 이북 보기

2018-02 08

[동문][사랑, 36.5°C] 큰 마음보다 살뜰한 맘으로 자주 나누고 싶어요

어느 날 갑자기 닥친 교통사고. 그날 이후 주변의 교통사고로 휴학한 후배들이 눈에 들어왔다는 임영란 동문은 그들을 위해 도서구입비 100만 원을 기부하기로 한다. 딸의 이런 마음은 자식을 잃을 뻔했던 아찔한 경험을 한 아버지를 움직였다. 같은 부모로서 세월호 가족의 슬픔을 그 누구보다 이해하는 부친 임재호 씨는 단원고 출신 학생들과 교통사고 피해 학생들을 위해 1,000만 원을 기부하며, 딸의 깊은 마음에 자식 가진 아비의 진한 마음을 더했다. 새해부터는 대중모금 캠페인 ‘Club 동행한대’의 후원자로도 나선 임영란 동문, 그에게 기부란 큰 맘 먹고 ‘한턱 쏘는’ 행위가 아니다. 그랬다면 아직 시작도 못했을 일, 일상 속에서 커피 한 잔 값을 아끼는 살뜰한 마음으로 아픈 이들의 마음을 보듬는 따뜻한 시선이 필요한 일이라고 한다. 글 편집실/사진 홍승진 ▲ 임영란(05 컴퓨터교육학) 동문 지난해 말에 발생한 교통사고로 통원치료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현재 경과는 어떠신지요? 임영란_ 졸업 후 임용고사를 거쳐 현재 고등학교 수학교사로 근무하고 있어요. 지난 해 10월 말, 출장길이었는데 신호대기 중 갑자기 뒤차가 와서 추돌하는 사고가 있었어요. 사고 현장에서 강한 충격을 느끼기는 했지만 외상도 없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죠. 다음날 통증이 심해 병원에 갔더니 근육이 놀랐다며 5일치 약과 물리치료를 처방해 주어서 좀 참으면 괜찮아지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도 호전되지 않다가 결국 수업 중에 심한 두통으로 쓰러지게 되었어요. 알고 보니 뇌진탕과 편타손상이라 집중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하더군요. 경황이 없었을 텐데 교통사고가 기부를 결심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임영란_ 이번 교통사고를 겪으면서 우스갯소리로 ‘호의를 베풀면 호구가 된다’라는 말을 실감했어요. 몸도 아팠지만 가해차량 운전자의 비양심적인 행동으로 마음고생이 많았습니다. 제대로 된 배상을 받기 위해 직접 자동차 손해배상 보장법도 공부하고 많은 사례와 판례들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보다 더 억울한 피해자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특히 쉽게 합의를 했다가 나중에 큰 후유증에 시달리며 결국 학업을 중단한 학생들도 있더라고요. 사실 저도 정확한 배상을 받는 것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현재 치료를 꾸준히 받아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고 공무원이라 병가 중에도 월급이 나오는 것에 감사함을 느껴 사회에 조금의 도움이 되고자 12월 월급의 반은 그들을 위해 기부하자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교통사고로 휴학한 후배들을 위한 도서구입비’라는 특이한 용도로 기부를 하셨습니다. 임영란_ 교통사고가 기부의 계기였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교통사고를 당한 후배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어요. 제가 큰 금액을 기부할 수 있었다면 생활비나 학비를 지원했을 테지만 소액기부였기 때문에 어떤 용도로 기부할까 고민하다가 문득 대학 다닐 때 전공서적 구입비용이 늘 부담이었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비록 적은 금액이라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본 기억이 있는 후배라면 나중에 또 누군가를 도울 줄 아는 선배로 성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조금 담아 보았습니다. 기부하실 때 아버님의 지원도 있었습니다. 아버님과 함께 기부를 하게 된 배경은요? 임영란_ 아버지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입니다. 제가 재수를 결정했을 때도, 임용고사 준비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을 때도 항상 저를 믿고 응원해 주셨어요. 현재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계시는데 그동안 일과 가족을 챙기시느라 여행 한 번 마음 편하게 다녀오신 적이 없으셨어요. 그래서 아버지 회갑기념으로 1월에 가족끼리 유럽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제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치료기간이 길어지게 되어 결국 여행을 취소하게 되었어요. 죄송한 마음에 여행적금으로 모은 돈을 회갑선물로 드렸더니 그 돈을 선뜻 단원고 출신 학생들에게 기부하자고 하셨어요. 학창시절에도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임영란_ 학창시절 ‘한양어린이학교’라는 동아리 회원으로 활동을 했어요. 한양대학교병원에 입원한 소아암환아들에게 교육봉사를 하는 동아리로 SK, 굿네이버스 등 기업들의 후원을 받아 좀 더 다양한 교육활동들을 진행했던 기억이 납니다. 졸업 후에는 동아리 졸업생들이 중심이 되어 후배사랑장학금이라는 이름으로 장학금을 지원하다가 2017년에 ‘한양어린이학교 후배사랑 장학기금’을 만들었어요. 사실 이 기금을 만들면서 후배들을 위해 모교에 기부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 임동문은 '이번 기부는 비록 적은 금액이지만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본 기억이 있는 후배라면 나중에 또 누군가를 도울 줄 아는 선배로 성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담아 시작했습니다' 라고 말했다. 아버님은 기업가로서 평소에도 지역사회에 기부를 많이 실천하시는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따님의 기부가 아버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임재호_ 제 영향이라고 하기는 쑥스럽습니다. 사고 후유증이 심해져 많이 놀랐을 텐데도 그 와중에 기부를 하겠다는 생각까지 했으니 대견하지요. 제 사업장 인근에 단원고가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단원고 아이들을 생각하면 늘 마음이 무거웠어요. 마침 딸아이가 자기 모교에 기부를 한다고 하니 단원고 출신의 학생이 있다면 그들에게도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저는 3~4년 전까지만 해도 지독한 워커홀릭이었습니다. 이렇게 살다간 일만 하다 죽겠구나 라는 생각에 뒤늦게 대학공부를 시작해 작년에 졸업했습니다. 대학 동기들 중 딸 또래의 친구들이 어려운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본격적인 기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새해에는 금전적인 기부 외에도 직접 현장에 나가는 봉사활동도 참여할 계획입니다. 사업장 인근에 외국인 노동자나 다문화가정이 많거든요. 이번 기부를 계기로 2018년 1월부터는 ‘Club 동행한대’ 후원자가 되셨습니다. 기부를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동문들에게 한말씀 해주신다면? 임영란_ 한 달에 다섯 잔의 커피를 참는다면 ‘Club 동행한대’ 1구좌를 개설할 수 있습니다. 저도 커피를 무척 좋아하지만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커피 한 잔 마실 여유가 없는 날도 있어요. 그런데 ‘Club 동행한대’ 후원자가 된 이후로는 ‘이런 날은 한 구좌 개설할 수 있겠다’ 싶으니까 업무 스트레스까지 줄어들더라고요. 커피 한 잔 값의 큰 힘을 여러분도 실천해 보셨으면 합니다. 동행한대 2017년 WINTER (제8호) 이북 보기

2018-01 25

[동문][희망, 100℃] 30년 전 각인된 한양인의 DNA가 여전히 우리의 머리와 가슴 속에서 뛰고 있다

참석자 수 600명 육박, 밴드 가입 1,200명 돌파, 발전기금 모금액 3억 원 돌파. 지난해 10월 성황리에 개최된 ‘한양87 홈커밍데이’가 쓴 놀라운 기록들이다. 역대 최고의 기록들이었다. 행사가 끝난 후 입소문이 번지면서 동문 선배들 사이에서 “도대체 87학번 준비위원장이 누구였냐”고 묻는 이들이 많았다. 2017년 코스닥에 상장된 기업인 필옵틱스의 대표 한기수 동문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준비위원장으로서의 왕성한 활동은 물론, 스스로 1억 원이라는 통 큰 기부를 실천하며 모교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글 편집실/사진 홍승진 ▲ 한기수(87 물리학) 필옵틱스 대표이사 대기업이라는 안전지대 밖으로, 창업 그리고 상장 한기수 동문은 삼성SDI에 입사하여 10년간 근무하다가 퇴사한 후, 자동화설비 제조사인 필옵틱스를 창업했다. 2017년에는 코스닥 상장까지 성공적으로 마쳐 기업의 성장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결과적으로는 성공적인 선택이었지만, 직장인으로서 대기업이라는 안전지대를 떠나기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직장인들에게 입사 5년, 10년은 정말 빠르게 지나갑니다. 너무 바쁘다 보니 미래를 생각할 겨를조차 없죠. 그런데 입사 10년차가 가까워질 즈음, 10년 먼저 입사한 선배들이 줄줄이 회사를 떠나는 모습을 보며 나의 10년 후 모습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 역시 10년 후에는 회사를 떠나야 할 수도 있는데, 그때 뭔가를 새로 시작하는 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입사 10년차 되던 해에 사표를 썼다. 퇴사 후 중소기업에 재입사해 중소기업의 생태계도 배우며 필옵틱스를 설립하기까지 4년 정도의 준비기간이 필요했다. 2008년 창업을 했으니 올해로 딱 10년째가 되었다. 직장인으로 10년, 경영인으로 10년이다. 직장인이 ‘주어진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경영자는 ‘새로운 일을 찾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아직도 설계 실무에서 손을 놓지 않고 있기 때문에 제가 엔지니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달라졌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특히 초창기부터 함께 일했던 직원들은 예전보다 판단 속도가 빨라졌다고 하더군요.” 좀 더 냉철해지고 판단력이 좋아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판단기준이 단순해졌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표현했다. 사업성이 있느냐 없느냐가 가장 큰 판단 기준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빠른 판단’ 못지않게 ‘현명한 판단’을 위해, 경영자로서 늘 긴장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한양87 홈커밍데이 준비위원장, 역대급 기록을 남기다 이렇듯 바쁘게 살았으니 졸업 후 학교와의 교류는 어려운 일이었다. 모교를 다시 찾은 소감에 대해 ‘지하철이 연결되어 있어 놀랐다’는 말을 했을 정도이다. 지하철이 연결된 것이 2000년대 초반의 일이니 그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다시 학교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다. 지난해 학교 측으로부터 ‘87학번 홈커밍데이’ 준비위원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졸업 후 학교와 교류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뜻밖의 제안이었지만 반가웠습니다. ‘준비위원장’이라는 직함이 부담스러웠지만 학교에서 요구하는 것은 없으니 행사 인사말이나 준비하면 된다고 해서 덜컥 수락을 했지요. 그런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어요. 행사를 준비하는 100일간 학교에서 요구하는 것은 정말 하나도 없었어요. 다만, 우리가 알아서 준비해야 할 일들이 많더군요. (웃음)” 87학번들이 주체가 되는 행사였기 때문에, 동기들의 힘을 모으는 것이 중요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준비위원장을 맡은 후 제일 먼저 한 일도 동기들을 밴드에 가입시키는 일이었다. 87학번 동문이 3,600명 정도 되는데 밴드에 가입한 인원이 무려 1,200명에 이르렀다. 전체 동문의 3분의 1이 가입한 셈이다. 행사 계획, 발전기금 모금 관련 게시물에는 하루에 수백 개 이상의 댓글이 달릴 정도로 참여율이 높았다. 한기수 동문은 일일이 챙겨 읽다가 노안이 찾아왔다며, 진담 반 농담 반 그간의 고생을 에둘러 말했다. 행사 당일 참석 인원이 600명에 달했고, 뒤풀이에 합류한 동문들까지 포함하면 실제 참석자 수는 훨씬 많았다. “이번 행사의 성공은 100일간 동기들이 내 일처럼 나서 도와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학교가 차려준 밥상에 숟가락만 얹듯이 참여하는 행사였다면 동기들이 느끼는 자부심과 성취감은 덜했겠죠.” 발전기금 모금 3억 원 돌파, 87학번의 자취를 남기고 싶다 87학번 홈커밍데이가 남긴 역대급 기록 중 모교 발전기금 모금을 빼놓을 수가 없다. 무려 3억 원이 넘는 기금이 모금되었는데, 홈커밍데이 역사상 유례가 없는 규모였다. 얼마나 많은 동문들의 참여가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기수 동문은 그 공을 모두 동기들에게 돌리며, 기금을 사용함에 있어서도 87학번의 자취를 남기고 싶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동기들이 적극적으로 모금에 참여해주면 더욱 뜻깊은 행사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매칭기금’ 방식을 활용해 보았어요. 예를 들어 동기들이 1,000만 원을 기부하면, 제가 같은 금액을 보태서 2,000만 원을 만드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모금을 하다 보니 3억 원이나 모았어요. 다시 생각해 봐도 동기들의 호응과 참여가 없었다면 3억 원 모금이 가능했을까 싶어요.” 워낙 성공적인 행사였기에 준비위원장으로서의 소감도 남다를 법한데, 그는 ‘나의 일상이 홈커밍데이 전과 후로 완전히 바뀌었다’는 말로 소감을 대신했다. 행사를 마친 후에도 꾸준히 동기들과 모임을 가지고 있으며, 오는 3월에는 87학번 동기회도 정식으로 출범할 예정이라고 귀띔했다. ▲ 한기수 대표이사는 학교에서 청년창업을 준비하는 후배들을 위한 ‘차세대 청년기업 육성기금’에 기부를 했다. 창업선배로서의 어려움이 반영된 마음으로 학교에서 지원하는 다양한 창업 프로그램 지원 속에서 두려움 없이 도전하고 실패하는 경험을 해보라는 당부의 뜻이다. 너무 오랫동안 모교 발전에 무심했다는 자책감 한기수 동문은 홈커밍데이 모금에 보탠 1억 원 이외에도, 재학생들의 창업교육 지원에 써달라며 1억 원을 기부했다. 또한 창업교육 지원과 물리학과 장학금으로 5억 원이 넘는 기부를 약정했다. 그는 모교의 발전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기쁘다며, 이런 기회들이 더욱 많은 동문들에게 주어지기를 희망했다. “동문이라면 누구나 모교에 대한 애정을 품고 있습니다. 바쁘게 살면서도 한양대 관련 기사가 나오면 그냥 지나치질 못하고, 입시철이면 대학 순위에 은근히 신경을 쓰게 되지요. 하지만 이런 관심이 바로 기부로 연결되기는 힘들어요. 저 같은 경우에도 모교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은 늘 있었지만, 선뜻 학교에 연락하기가 쉽지는 않더군요.” 한기수 동문은 오랫동안 모교 발전에 무심했다는 자책과 후배들에 대한 미안함이 컸다고 토로한다. 그래서 홈커밍데이 준비위원장 제안이 왔을 때도, 모교가 따뜻한 손을 내미는 것처럼 반가웠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창업을 준비하는 후배들을 위해 기부를 하게 된 이유가, 창업 선배로서 창업의 어려움을 잘 알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다. “사실 제가 학창시절 장학금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은 못합니다. (웃음) 오히려 한창 호기심이 왕성할 나이에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는 것보다는 다양한 경험을 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회사에서 직원을 채용할 때도 호기심이 많은 친구들에게 먼저 눈이 갑니다. 실제로 업무해결 능력도 뛰어나더군요.” 그는 직장인으로서 가장 불행한 일이 ‘일의 선택권’을 가질 수 없는 점이었다며, 청년창업은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강조했다. 학교에서 지원하는 창업 프로그램을 활용해 두려움 없이 도전하고 실패하는 경험을 일찍 해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한양인의 DNA가 각인된 선배로서, 모교의 발전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방법들을 계속 찾아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는 홈커밍데이를 계기로 기억 속에서 잠자고 있던 한양인의 DNA가 30년 만에 깨어나 머리와 가슴 속에서 힘차게 뛰노는 것이 느껴진다며, 이는 3,600명 동기들의 한결같은 심정일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너무 오랫동안 모교 발전에 무심했다는 미안함은 이제 접어도 되지 않을까. 동행한대 2017년 WINTER (제8호) 이북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