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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 07

[교수]'이슬람'하면 떠오르는 사람

“15억 57개 국가를 가진 이슬람세계를 적대적 이해당사자로 취급한다면, 지구촌 4분의 1을 버려두고 21세기 전략을 짜는 것과 같다. 어쩌면 이는 허구일지도 모른다.” 이슬람 전문가 이희수 교수(국문대·문화인류)의 강변이다. 평생을 이슬람에 대한 편견과 싸워온 그를 인터넷한양이 마주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걷다 이 교수는 ‘삼수생’이었다. 서울대에 진학하기 위해 세 번이나 도전했지만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결국 서울대를 포기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터키어학과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동기 480명 중 150명이 서울대를 갈 정도였다. 자격지심이 들었다. 이 교수는 “이제는 남들이 가는 길을 가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남들과 다른 길, 나의 고등학교 동기들이 가지 않는 길, 생각하지 않는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대학교 1학년이 된 이 교수에게는 고민이 생겼다. 무엇이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인가 하는 고민이었다. 그러다 대학교 2학년, ‘1차 중동 오일쇼크’가 터졌다. 전 국민이 고통 받고, 중소기업이 도산했다. 중동, 이슬람, 아랍이란 단어만 나오면 모든 국민이 치를 떨었다. 이때 이 교수의 머리 속에 섬광처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미워하는 ‘이슬람’, ‘중동’. 그러나 여기는 앞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미워하는 너를 내가 끌어안고 예뻐해줄게’ 이때부터 이슬람과 이 교수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최초, 최고라는 수식어 이슬람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하기로 마음 먹은 이 교수. 하지만 당시 이슬람에 관한 자료는 국내에 전무한 상황. 어쩔 수 없이 영어 원서를 읽기 시작했다. 2년 동안 100권 정도를 읽었다. 일주일에 원서 한 권을 읽은 셈이다. 원서다 보니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많았다. 마침 외대 아랍어과에 ‘엘 콜리’라는 이집트 교수가 와 있었다. 이 교수는 무작정 교수 방을 찾아갔다. “엘 콜리 교수를 2년 동안 거의 매주 만났습니다. 젊은 한국 학생이 이슬람을 공부하겠다고 찾아왔으니 많이 놀라워했죠. 이집트나 파키스탄, 인도 쪽에서 발간된, 그 사람들의 시각으로 된 자료도 보내주었습니다. 엘 콜리 교수 덕분에 이슬람에 대해 균형감각을 잡게 됐죠.” 이 교수의 학업은 중동지역학 석사과정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석사학위를 받은 뒤, 이 교수는 국비 유학생 시험을 쳤다. 모든 친구들이 미국이나 캐나다로 향할 때, 이 교수는 혼자서 이스탄불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1983년, 이스탄불대학에 간 첫 한국인 유학생이 되었다. “제가 가는 길에는 항상 최초, 최고라는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니 최초고, 저 혼자 밖에 공부하는 사람이 없으니까요(웃음). 최초의 이스탄불대학 한국인 유학생. 최초의 이슬람 연구 박사 학위. 그렇다고 제가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 교수는 최초라는 수식어 하나를 더 추가했다. 박사학위를 받은 뒤 이스탄불 마르마라 대학에 교수로 임용된 것. ‘최초’의 동양인 교수였다. 기적적으로 교수가 되다 이 교수는 부푼 기대를 안고 1990년에 귀국했다. 하지만, 당시 국내 200개 대학에서 이슬람에 관한 강좌가 개설된 곳은 단 한군데도 없었다. 대학 교수가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고, 강의를 할 수 있는 곳도 전무했다. “막막했습니다. 불러주는 곳도 없고, 1년간 완전한 실업상태였죠. 부모님 집에 방 하나 빌려서 네 식구가 살았습니다. 첫 번째 좌절이었습니다. 책을 쳐다 보기도 싫었어요. 아무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죠. 당장 아이 유치원비도 내지 못하는 가장이었으니까요.” 하지만 1991년,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우리대학 안산캠퍼스(현 ERICA캠퍼스) 문화인류학과의 한 교수가 특강을 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처음으로 한국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제가 공부한 것이 앞으로 얼마나 가치 있을지 설명했지요. 강의를 들은 학생들과 교수가 많은 관심을 보여 다음 학기부터 문화인류학과에서 한 강좌를 맡아 달라고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이것이 우리대학과의 첫 인연입니다.” 이후 3년 동안 열심히 강의한 이 교수는 1993년, 교육부에서 운영하는 ‘브레인 풀’ 제도를 알게 됐다. 브레인 풀 제도는 해외 우수 석학들에게 월급을 주고 대학에서 강의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제도. 당시 이 교수는 이스탄불대학 교수 신분을 유지하고 있어, 해외 석학으로 분류돼 지원할 수 있었다. “150:1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 인문분야 브레인 풀 교수로 선정됐습니다.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가 저를 선정한 것입니다. 이 계기를 통해 우리대학에 오게 됐습니다. 2년 동안은 정부로부터 월급을 받다가 1995년부터 정식으로 교수로 부임했죠. 교수가 된 과정이 정말 기적적이었습니다.” ‘이슬람=이희수’ 우리대학 교수가 된 후, 이 교수는 이슬람과 관련된 일이라면 항상 발 벗고 나섰다. 특히 1999년 8월 ‘터키 대지진 돕기 국민 운동’에서 이 교수의 역할은 상당했다. 이때 모금한 금액만 23억 원. 터키 대지진은 약 4 만 명이 사망한 20세기 최대의 재앙이다. 하지만 당시 우리 정부가 낸 구호금 고작 7만불, 8 천 만원 정도였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인 방글라데시가 10만 불을 보낸 것과 비교하면 부끄러운 수준이었던 것이다. “터키는 6.25때 군인 1만 5천명을 보냈어요. 사상자 3천명을 내면서까지 우리를 도와준 혈맹입니다. 이런 나라가 대재앙 속에 무너 졌는데, 단돈 8 천 만원을 보내는 것은 ‘해외 토픽’감이었습니다. 이건 아니다 싶었죠. 신문에 긴급 칼럼을 썼습니다. 많은 분들이 칼럼에 공감했는지, 터키를 돕자는 분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40일간 ‘터키 대지진 돕기 국민 운동’을 진행하게 됐지요. 수업도 안 했습니다. 학생들에게는 이런 얘기를 했죠. ‘우리가 배우는 문화인류학은 다른 나라의 사람들과 아픔을 함께하면서 문화적으로 공유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운동을 할 수밖에 없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최고의 수업이다. 여러분들도 함께 동참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이죠. 다행이 모든 학생들이 동의하고, 모두 운동에 함께 했습니다.” 터키 대지진의 여파가 아물 때쯤인 2001년,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바로 9.11 테러다. 국제 테러집단인 ‘알카에다’가 미국 쌍둥이 빌딩을 비행기로 들이받은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슬람’은 국제, 국내 할 것 없이 최대 이슈로 부상했다. “9.11 테러가 일어나기 전에는 우리나라의 언론이나 정부 기관에서도 ‘알카에다’라는 이름을 들어본 사람조차 없었습니다. 그만큼 이슬람에 대해 무지했었던 것이지요. 정부에서 위기관리반, 비상대책반이 급하게 가동됐습니다. 하지만 위기에 대응하려면, 위기 유발인자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정부에서 전문가를 불러모으려 했으나 전문가가 많지 않았죠. 그때 24시간 대기 해달라는 정부로부터의 요청을 받았고, 회의부터 언론에까지 거의 저 혼자서 감당해야 했습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이슬람’ 하면 ‘이희수’가 떠오르게 된 계기였다. 9.11 테러 이후 기업은 기업대로, 정부기관은 정부기관대로 이슬람에 대해 알아야 하는 상황이 됐다. 석유와 에너지 수입의 92% 를 이슬람세계에 의존하고, 건설플랜트의 70%를 의존하고 있는 절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는 전혀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 사회가 깨달았던 것이다. “이슬람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폭증했죠. 학교 강의 외 외부강연을 1년에 100회 이상 할 정도였니까요. 강연에서, 이슬람 세계에 대한 적대적인 편견을 버리고, 그들을 지속 가능한 우리 파트너로 만드는 방안을 계속해서 강조했습니다. 시장 관리 차원에서도 그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 문화를 끌어안아야 한다고 피력한거죠. 조금씩 사회 분위기가 성숙되어 정부 부처, 사법연수원, 외교안보연구원 등에 제 과목이 포함되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은 5년, 학생과 후학을 위해 온 힘을 쏟을 것” 최근 이 교수에게는 또 다시 흥분되는 ‘과제’가 생겼다. 바로 ‘쿠쉬나메’다. 쿠쉬나메는 페르시아 왕자가 신라 공주와 결혼하고, 삼국통일의 혁혁한 공헌을 세워 신라왕의 배려를 받다가, 다시 페르시아로 돌아가 쓴 책이다. 책의 60%가 신라에 관한 이야기다. 이 교수는 3년째 이 책의 번역 해제 작업을 주도하고 있다. 이 작업은 올해 말이 되면 윤곽이 드러날 예정. “신라사를 중심으로 한 고대사는 전적으로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매달려있어요. 여기서 한치 앞도 나가지 못하고 있죠. 더 이상 사료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 쿠쉬나메의 발견을 통해 우리 고대사를 다시 써야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신라의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을 테니까요. 제가 보기에는 왕오천축국전 발굴 이후에 최대의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중동지역에 흩어져있는 한국학 사료에 관심이 생겼어요. 당시 중동은 세계 제국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 나라에 대한 데이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국의 특징이죠. 신라와 고려에 대한 기록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350만권 정도의 필사본이 중동지역에 남아있습니다. 이것을 잘 분석한다면 사료로서 아주 높은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많이 발굴해서 국내학계에 전해주면, 후학들이 연구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현재 나에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슬람과 함께 쉴 새 없이 달려온 이 교수. 어느새 정년이 5년 밖에 남지 않았다. “마지막 5년 동안 지식의 한 방울까지 후배와 제자들에게 전해주고 싶어요.” 학력 및 약력 이희수 교수(국문대·문화인류)는 국내 최고의 이슬람 전문가로 꼽힌다. 한국외국어대에서 터키학을 전공하고 같은 대학에서 중동지역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83년에 터키 국립 이스탄불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스탄불 마르마라대학에서 2년간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91년 귀국, 93년부터 지금까지 우리대학 ERICA캠퍼스 문화인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학부를 졸업한 79년부터 이슬람권에 대한 현장연구를 시작해 올해로 연구생활만 34년을 맞은 그는 57개 세계 이슬람 국가 대부분을 방문해 보았다고 한다. 저서 '이희수 교수의 이슬람', '이슬람과 한국 문화', '이슬람 문화’ 등은 일반인이 이슬람 문화에 대해 이해하는 데 필수서적으로 꼽힌다. 이상무 학생기자 yourfirst@hanyang.ac.kr 정규진 사진기자 flowkj@ha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