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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 05

[교수]Looking Around, 더 넓은 세상으로

여기, 남들이 유학 간다고 미국으로 떠날 때 혼자만 그 반대편으로 날아간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대한민국 최초의 터키 유학생인 이희수 교수다. 그는 이슬람을 사랑했고, 이제 그가 사랑한 이슬람은 우리나라 최고의 중동학자가 된 그를 사랑한다. 남들이 다 가는 편한 길을 거부하고 ‘나의 길’에 서기까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나보자. ▲ 국제문화대학 문화인류학과 이희수 교수 이슬람과 사랑에 빠지다 사실 처음부터 터키에 관심이 있어서 공부를 한 건 아니었다는 이희수 교수. 엄격하신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서울대를 가려 했던 그는 고된 삼수 생활 끝에 한국외대 터키어과에 진학하게 됐다. 그리고 대학 동기와도 세 살이나 차이가 났고, 미팅도 소풍도 심지어는 데모에도 끼워주지 않는 외로움에 도서관에서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렇게 공부를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한 끝에, 만년 이류 인생을 졸업하기로 결심한다. “아무도 안 가는 길, 남들이 싫어하는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을 했죠. 그때 섬광처럼 스친 생각이 아무도 가까이 가려고도 않는 이슬람을 내가 끌어안아주면 되겠다는 거였어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슬람을 끌어안으려면 공부를 더 해야 하는데 공부할 책이 없었다. 책이라곤 영어로 된 책뿐인데 모두 서구의 시선에서 써진 책이다보니 다 좋지 않은 이야기뿐이었다. “터키를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할 대목이 없는 거예요. 마침 그때 학교에 아랍어과 교환교수로 앨 콜리라는 이집트 출신 교수님이 와 계셨는데 그분을 만나고 터키에 대해 제대로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2년간 100권 정도의 원서를 읽고 나니 정말로 더 읽을 책이 없었다. 그때 부터는 교수님을 통해 입수한 이슬람에서 출간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 책들을 읽으니 지금까지 배워온 서구의 시선에서 서술된 것과 정 반대의 이야기가 있었다. “서양 사람들이 쓴 책을 한 100권 읽고, 이슬람 사람들이 쓴 책을 한 100권 또 읽으니까 제게 균형 감각이 생겼어요. 얼마나 편파적인 공부를 하고 있던 건지도 알게 되었죠.” 최초에서 최고까지 학부를 전 과목 A라는 훌륭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한 이 교수는 터키 대통령 방한 때 체결된 문화교류협정의 일환인 터키 이스탄불대학 국비유학생 선발공고를 보게 된다. 그리고 큰 강당에서 홀로 시험을 본 그는 기회를 얻어냈다. 다른 사람들이 미국,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를 탈 때, 이 교수는 혼자 반대편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지금은 1,200만 명인 이스탄불 인구가 당시 600만 명 정도 되었을 때인데, 대사관조차 앙카라에 있어 이스탄불에는 대한민국 교민이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택시를 타고 학교에 들어서는 순간 제가 한국 최초의 터키 유학생이자, 터키에선 최초의 동양인 유학생이 되는 겁니다. 그다음엔 터키 최초의 동양인 교수가 되었고요. 그다음부터는 저 혼자밖에 없으니까 최초, 최초, 최초에요. ‘최초’라는 수식어가 한 10년 쯤 계속되다 보니 어느 순간 최고라는 말이 붙어 있더라고요” 더 볼 책이 없을 만큼 공부한 대학생 이희수는 그렇게 한국 사회에서 ‘이슬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최고의 중동학자가 되었다. 중동학자의 이슬람 이야기 이슬람 세계를 생각하면 전쟁이나 테러 등의 부정적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기 쉽다. 2001년 9·11테러 이후 이 교수는 테러 등의 중동 관련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방송에 자주 출연하게 되었다. “서구는 테러라는 모습으로, 이슬람 사람들은 다 테러리스트라는 담론을 계속해서 만들고 있어요. 물론 우리는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테러를 용서해선 안 됩니다. 무고한 희생을 만드는 테러는 분명 잘못된 일이니까요.” 그는 ‘테러리스트’를 옹호하는 것이 아닌, 평화를 사랑하는 이슬람 사람들을 변호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구촌에 서구와 협력하고 함께 살아가려는 97%의 건강한 이슬람 주류공동체는 버리면 안 되죠. 실제 테러 동조세력은 3% 정도인데, 그 사람들이 이슬람을 믿기 때문에 전체를 다 매도해버리는 게 오류에요.” 10년이 넘게 중동 지역에 체류하며 연구를 진행한 이 교수는 이슬람 사람들을 “내일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오늘 찾아온 손님을 그냥 보내지 않는 참 의리 있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설령 그것 때문에 자기가 생명의 위험에 처한다 해도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끝까지 보호해 주는 사람들이 바로 이슬람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슬람교는 다섯 번씩 예배를 하며 범죄를 예방하는데, 이는 ‘내가 악과 결탁하지 않게 지켜 주소서’하고 새벽을 시작하고, 낮 12시 쯤 되면 ‘혹시 나쁜 길로 가지 않는지 지켜 주소서’하고 점검을 한다고 한다. 또 오후 4시와 일몰 즈음엔 ‘오늘 하루 무사히 일을 마칠 수 있게 해 주셔서’, 잠자기 전엔 ‘건강한 수면으로 내일도 내가 정도로 일하게 해 달라’는 기도로 악이 스며들 여지를 없앤다. “그런 사회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라 훨씬 준법정신도 투철하고 온순하죠. 테러리스트의 모습만 보면 다 호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일반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온순하고 훨씬 종교적이고 윤리적이에요.” 실제로 이슬람 사회의 범죄율은 한국 사회의 범죄율보다 현저히 낮다. 함께하기 위한 노력 이 교수는 내국인 재학생들과 우리 대학의 수많은 외국인 학생들의 교류가 잘 되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교류를 위해서 한밀레 멘토링 외에도 많은 학생들이 참여 가능한 정기적인 문화 행사로 세계 공통어인 음악이나 운동 등의 취미를 통해 교류하는 방법을 추천했다. “그 친구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게 한국에 와서도 한국 문화를 배울 기회가 거의 없다는 거예요. 문화 행사가 많지 않은 공대에서 공부하니 배울 기회가 없잖아요. 우리 학생들이 한국어나 한국 문화, 명절 문화 이런 것들을 직접 설명을 해주고 하면 얼마나 좋아할까요? 가르치며 배우는 우리 학생들의 주목할 만한 성장도 기대할 수 있겠고요.” 그는 학생들이 접할 수 있는 가장 가까이 있는 새로운 문화가 외국인 유학생들이고, 이렇게 가까이 학교 안에도 있는데 이를 주목하지 않고 문화 교류를 위해 비행기를 타고 나가거나 학교 밖에서 외국 친구를 만나려는 우리 학생들에게 아쉬움을 표했다. 레몬 교수, 교수 이희수 이 교수의 목표는 ‘레몬 교수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레몬이란 것은 맛이나 향기나 빛깔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쥐어짜질 때 존재가치가 있는 과일이죠. 나는 사랑하는 학생들을 위해 한 방울의 지식도 남기지 않고 다 내어 놓는 레몬 교수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가 시험으로 성적을 평가하지 않는 이유도 이와 같다. 그가 대학 입시를 겪으며 경험한 아픔을 어떤 일이 있어도 학생에게는 그 고통을 강요하지 않겠다는 결심 때문이다. “왜 시험 보는 한 시간 동안에 페이퍼에 잘 쓰고 못 쓰고에 따라 일류 인생, 이류 인생이 결정 되느냐는 거죠. 만약 성적 때문에 평가할 필요가 있어도 사람은 길게 보면서 그 사람의 다양한 모습을 다 보고 평가해줘야 하는 거예요.” 한 학기 내내 학생들과 눈높이를 맞추려고 많이 노력한다는 이 교수는 무엇을 하든 학생 스스로 주제를 선택하게 한다. 하나의 표준을 두고, 자기가 자신 있는 주제로, 자기 생각으로 평가를 받아야 공정한 노력의 평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20년 가까이 강단에 서면서 아직 한 번도 시험을 본 적은 없습니다. 한 때 학교에서 경고도 받았는데요, 저는 이 원칙을 퇴임할 때까지 지킬 겁니다.” 이렇게 학생들을 믿어주고, 마음 깊이 사랑하는 그는 정말 레몬 같은 교수였다. 나를 기다리는 세상으로 이 교수는 강의를 통해 모든 젊은이들의 인력과 관심이 미국, 중국, 일본, 유럽 등에만 집중되어 있는 사실에 안타까워했다. 97%를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인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버릴 문화권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어느 지역에 대한 전문가도, 이해도 우리 사회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꼭 중동으로 가라는 것이 아니다. 남들과는 다르지만, 내가 보람을 느끼고 우리 사회에도 도움이 되는 일을 찾으라는 이야기다. “세상은 판에 박혀 있지 않습니다. 나를 기다리는 엄청나게 큰 세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 세요. 철저히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찾으면 좋겠다는 얘기입니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게 없잖아요. 이 사회는 역 피라미드형이라 밑에서는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한 단계만 올라가도 세상이 확 트이고 넓어지죠. 한번 시작하면 가능성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는 우리 사회 구조를 잘 이해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행착오가 용서되는 대학생 시절엔 최대한 많이 도전하고 넘어 지는 게 좋아요.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부지런히 돌아다녀서 성장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학생들이 편협하고 편견에 갇힌 시야가 아닌, 열린 마음으로 세계를 만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는 이 교수. 그의 눈에서는 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듬뿍 묻어났다. 그저 그런 삶, 편하고 안정적인 삶이 아닌 이희수 교수가 그랬던 것처럼, 나만의 꿈을 사는 우리 학우들의 비상을 기대한다. Editor 김예진 학생기자 Photographer 박수빈 학생기자

2013-05 07

[교수]'이슬람'하면 떠오르는 사람

“15억 57개 국가를 가진 이슬람세계를 적대적 이해당사자로 취급한다면, 지구촌 4분의 1을 버려두고 21세기 전략을 짜는 것과 같다. 어쩌면 이는 허구일지도 모른다.” 이슬람 전문가 이희수 교수(국문대·문화인류)의 강변이다. 평생을 이슬람에 대한 편견과 싸워온 그를 인터넷한양이 마주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걷다 이 교수는 ‘삼수생’이었다. 서울대에 진학하기 위해 세 번이나 도전했지만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결국 서울대를 포기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터키어학과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동기 480명 중 150명이 서울대를 갈 정도였다. 자격지심이 들었다. 이 교수는 “이제는 남들이 가는 길을 가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남들과 다른 길, 나의 고등학교 동기들이 가지 않는 길, 생각하지 않는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대학교 1학년이 된 이 교수에게는 고민이 생겼다. 무엇이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인가 하는 고민이었다. 그러다 대학교 2학년, ‘1차 중동 오일쇼크’가 터졌다. 전 국민이 고통 받고, 중소기업이 도산했다. 중동, 이슬람, 아랍이란 단어만 나오면 모든 국민이 치를 떨었다. 이때 이 교수의 머리 속에 섬광처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미워하는 ‘이슬람’, ‘중동’. 그러나 여기는 앞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미워하는 너를 내가 끌어안고 예뻐해줄게’ 이때부터 이슬람과 이 교수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최초, 최고라는 수식어 이슬람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하기로 마음 먹은 이 교수. 하지만 당시 이슬람에 관한 자료는 국내에 전무한 상황. 어쩔 수 없이 영어 원서를 읽기 시작했다. 2년 동안 100권 정도를 읽었다. 일주일에 원서 한 권을 읽은 셈이다. 원서다 보니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많았다. 마침 외대 아랍어과에 ‘엘 콜리’라는 이집트 교수가 와 있었다. 이 교수는 무작정 교수 방을 찾아갔다. “엘 콜리 교수를 2년 동안 거의 매주 만났습니다. 젊은 한국 학생이 이슬람을 공부하겠다고 찾아왔으니 많이 놀라워했죠. 이집트나 파키스탄, 인도 쪽에서 발간된, 그 사람들의 시각으로 된 자료도 보내주었습니다. 엘 콜리 교수 덕분에 이슬람에 대해 균형감각을 잡게 됐죠.” 이 교수의 학업은 중동지역학 석사과정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석사학위를 받은 뒤, 이 교수는 국비 유학생 시험을 쳤다. 모든 친구들이 미국이나 캐나다로 향할 때, 이 교수는 혼자서 이스탄불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1983년, 이스탄불대학에 간 첫 한국인 유학생이 되었다. “제가 가는 길에는 항상 최초, 최고라는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니 최초고, 저 혼자 밖에 공부하는 사람이 없으니까요(웃음). 최초의 이스탄불대학 한국인 유학생. 최초의 이슬람 연구 박사 학위. 그렇다고 제가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 교수는 최초라는 수식어 하나를 더 추가했다. 박사학위를 받은 뒤 이스탄불 마르마라 대학에 교수로 임용된 것. ‘최초’의 동양인 교수였다. 기적적으로 교수가 되다 이 교수는 부푼 기대를 안고 1990년에 귀국했다. 하지만, 당시 국내 200개 대학에서 이슬람에 관한 강좌가 개설된 곳은 단 한군데도 없었다. 대학 교수가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고, 강의를 할 수 있는 곳도 전무했다. “막막했습니다. 불러주는 곳도 없고, 1년간 완전한 실업상태였죠. 부모님 집에 방 하나 빌려서 네 식구가 살았습니다. 첫 번째 좌절이었습니다. 책을 쳐다 보기도 싫었어요. 아무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죠. 당장 아이 유치원비도 내지 못하는 가장이었으니까요.” 하지만 1991년,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우리대학 안산캠퍼스(현 ERICA캠퍼스) 문화인류학과의 한 교수가 특강을 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처음으로 한국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제가 공부한 것이 앞으로 얼마나 가치 있을지 설명했지요. 강의를 들은 학생들과 교수가 많은 관심을 보여 다음 학기부터 문화인류학과에서 한 강좌를 맡아 달라고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이것이 우리대학과의 첫 인연입니다.” 이후 3년 동안 열심히 강의한 이 교수는 1993년, 교육부에서 운영하는 ‘브레인 풀’ 제도를 알게 됐다. 브레인 풀 제도는 해외 우수 석학들에게 월급을 주고 대학에서 강의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제도. 당시 이 교수는 이스탄불대학 교수 신분을 유지하고 있어, 해외 석학으로 분류돼 지원할 수 있었다. “150:1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 인문분야 브레인 풀 교수로 선정됐습니다.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가 저를 선정한 것입니다. 이 계기를 통해 우리대학에 오게 됐습니다. 2년 동안은 정부로부터 월급을 받다가 1995년부터 정식으로 교수로 부임했죠. 교수가 된 과정이 정말 기적적이었습니다.” ‘이슬람=이희수’ 우리대학 교수가 된 후, 이 교수는 이슬람과 관련된 일이라면 항상 발 벗고 나섰다. 특히 1999년 8월 ‘터키 대지진 돕기 국민 운동’에서 이 교수의 역할은 상당했다. 이때 모금한 금액만 23억 원. 터키 대지진은 약 4 만 명이 사망한 20세기 최대의 재앙이다. 하지만 당시 우리 정부가 낸 구호금 고작 7만불, 8 천 만원 정도였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인 방글라데시가 10만 불을 보낸 것과 비교하면 부끄러운 수준이었던 것이다. “터키는 6.25때 군인 1만 5천명을 보냈어요. 사상자 3천명을 내면서까지 우리를 도와준 혈맹입니다. 이런 나라가 대재앙 속에 무너 졌는데, 단돈 8 천 만원을 보내는 것은 ‘해외 토픽’감이었습니다. 이건 아니다 싶었죠. 신문에 긴급 칼럼을 썼습니다. 많은 분들이 칼럼에 공감했는지, 터키를 돕자는 분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40일간 ‘터키 대지진 돕기 국민 운동’을 진행하게 됐지요. 수업도 안 했습니다. 학생들에게는 이런 얘기를 했죠. ‘우리가 배우는 문화인류학은 다른 나라의 사람들과 아픔을 함께하면서 문화적으로 공유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운동을 할 수밖에 없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최고의 수업이다. 여러분들도 함께 동참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이죠. 다행이 모든 학생들이 동의하고, 모두 운동에 함께 했습니다.” 터키 대지진의 여파가 아물 때쯤인 2001년,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바로 9.11 테러다. 국제 테러집단인 ‘알카에다’가 미국 쌍둥이 빌딩을 비행기로 들이받은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슬람’은 국제, 국내 할 것 없이 최대 이슈로 부상했다. “9.11 테러가 일어나기 전에는 우리나라의 언론이나 정부 기관에서도 ‘알카에다’라는 이름을 들어본 사람조차 없었습니다. 그만큼 이슬람에 대해 무지했었던 것이지요. 정부에서 위기관리반, 비상대책반이 급하게 가동됐습니다. 하지만 위기에 대응하려면, 위기 유발인자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정부에서 전문가를 불러모으려 했으나 전문가가 많지 않았죠. 그때 24시간 대기 해달라는 정부로부터의 요청을 받았고, 회의부터 언론에까지 거의 저 혼자서 감당해야 했습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이슬람’ 하면 ‘이희수’가 떠오르게 된 계기였다. 9.11 테러 이후 기업은 기업대로, 정부기관은 정부기관대로 이슬람에 대해 알아야 하는 상황이 됐다. 석유와 에너지 수입의 92% 를 이슬람세계에 의존하고, 건설플랜트의 70%를 의존하고 있는 절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는 전혀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 사회가 깨달았던 것이다. “이슬람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폭증했죠. 학교 강의 외 외부강연을 1년에 100회 이상 할 정도였니까요. 강연에서, 이슬람 세계에 대한 적대적인 편견을 버리고, 그들을 지속 가능한 우리 파트너로 만드는 방안을 계속해서 강조했습니다. 시장 관리 차원에서도 그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 문화를 끌어안아야 한다고 피력한거죠. 조금씩 사회 분위기가 성숙되어 정부 부처, 사법연수원, 외교안보연구원 등에 제 과목이 포함되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은 5년, 학생과 후학을 위해 온 힘을 쏟을 것” 최근 이 교수에게는 또 다시 흥분되는 ‘과제’가 생겼다. 바로 ‘쿠쉬나메’다. 쿠쉬나메는 페르시아 왕자가 신라 공주와 결혼하고, 삼국통일의 혁혁한 공헌을 세워 신라왕의 배려를 받다가, 다시 페르시아로 돌아가 쓴 책이다. 책의 60%가 신라에 관한 이야기다. 이 교수는 3년째 이 책의 번역 해제 작업을 주도하고 있다. 이 작업은 올해 말이 되면 윤곽이 드러날 예정. “신라사를 중심으로 한 고대사는 전적으로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매달려있어요. 여기서 한치 앞도 나가지 못하고 있죠. 더 이상 사료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 쿠쉬나메의 발견을 통해 우리 고대사를 다시 써야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신라의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을 테니까요. 제가 보기에는 왕오천축국전 발굴 이후에 최대의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중동지역에 흩어져있는 한국학 사료에 관심이 생겼어요. 당시 중동은 세계 제국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 나라에 대한 데이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국의 특징이죠. 신라와 고려에 대한 기록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350만권 정도의 필사본이 중동지역에 남아있습니다. 이것을 잘 분석한다면 사료로서 아주 높은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많이 발굴해서 국내학계에 전해주면, 후학들이 연구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현재 나에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슬람과 함께 쉴 새 없이 달려온 이 교수. 어느새 정년이 5년 밖에 남지 않았다. “마지막 5년 동안 지식의 한 방울까지 후배와 제자들에게 전해주고 싶어요.” 학력 및 약력 이희수 교수(국문대·문화인류)는 국내 최고의 이슬람 전문가로 꼽힌다. 한국외국어대에서 터키학을 전공하고 같은 대학에서 중동지역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83년에 터키 국립 이스탄불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스탄불 마르마라대학에서 2년간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91년 귀국, 93년부터 지금까지 우리대학 ERICA캠퍼스 문화인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학부를 졸업한 79년부터 이슬람권에 대한 현장연구를 시작해 올해로 연구생활만 34년을 맞은 그는 57개 세계 이슬람 국가 대부분을 방문해 보았다고 한다. 저서 '이희수 교수의 이슬람', '이슬람과 한국 문화', '이슬람 문화’ 등은 일반인이 이슬람 문화에 대해 이해하는 데 필수서적으로 꼽힌다. 이상무 학생기자 yourfirst@hanyang.ac.kr 정규진 사진기자 flowkj@ha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