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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05 기획 > 기획 중요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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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민주화와 함께한 한양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마무리하며 민주화의 역사와 함께한 한양을 기억하다

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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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yang.ac.kr/surl/0NdTB

내용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이 마무리됐다. 6월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정신을 기억하는 달이었다. 자유와 평등과 같이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있을 수 있기까지 많은 사람의 희생과 노력이 필요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등의 그 순간 한양인도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다.  
 
▲한양대 학생회관 앞에서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시위가 열렸다. (대학 기록실 제공)

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 추모제
 
군사 정변으로 등장한 군사정권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망과 함께 붕괴했다. 그 후 당시 군인이었던 전두환과 노태우 전 대통령 중심의 신군부 세력이 등장했고, 민중운동 및 반군부 세력들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민주화 운동을 시작했다. 민주화 운동은 1980년 5월에 서울과 전국의 도시들로 광범위하게 전개되며 절정에 달했다. 광주에선 5월 초부터 학생들의 주도로 여러 집회와 시위가 열렸다. 시위가 확산되자 신군부는 공수부대를 투입했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전남대와 조선대엔 계엄군이 배치됐고 언론사와 방송국을 비롯한 광주 시내 주요 기관에 군인들이 투입됐다.
 
조선대와 전남대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에 전남대 정문으로 집결했다. 시위 과정에서 계엄군과 학생들의 충돌이 발생했고, 진압을 피해 광주 도심으로 진출한 학생들은 계엄군의 만행을 시민들에게 알렸다. 계엄군은 시위대뿐만 아니라 일반 광주 시민들에게도 무차별적으로 진압봉을 휘두르며 시민을 연행했다. 시위대는 무기획득과 계엄군의 만행을 알리고자 전남 지역으로 진출했다. 시위는 광주를 넘어 전남 지역으로 확대됐다. 시민들은 ‘시민군’으로 활동하며 계엄군에 맞섰다. 시민군은 5월 21일에 계엄군을 후퇴시켰다.
 
▲학생회관 앞 광장에서 광주민중봉기 추모제가 열렸다. (대학 기록실 제공)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사망자 218명, 행방불명자 363명, 상이자 5088명 등 피해자가 총 7200여 명에 이른다.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등의 목표를 가진 1인 시위운동, 집회 등을 전개했다. 해당 운동을 통해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비롯한 가해자 다수에 대한 법적 처벌이 이뤄졌다. 한양대에선 ‘광주 민중 봉기 추모제’라는 이름으로 민주화 운동에 대한 추모식이 학생회관 앞 광장에서 열렸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 6월 민주항쟁
 
전두환 정권에 맞서 전국에선 6월 민주 항쟁이 일어났다. 6월 민주 항쟁은 전두환 군사정권의 장기집권을 저지하기 위해 1987년 6월에 범국민적으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이다. 시위 중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이한열 열사 최루탄 사건’ 등이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민주화 운동이 전국적으로 진행됐다.
▲1987년 5월 18일, 한양대 교문에서 계엄군과 대치 중인 학생 시위대의 모습이다. (대학 기록실 제공)

서울대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 열사는 1987년 1월 13일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됐다. 민주화 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받고 있던 대학문화위원회 선배인 박종운을 잡기 위해 연행한 것이다. 수사관들은 박 열사가 순순히 대답하지 않자 여러 고문을 가했고 박 열사는 끝내 사망했다. 당시 정부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치니 갑자기 ‘억’하고 죽었다”고 박 열사의 사인을 발표했다. 시민들은 분노했지만 정부는 굴하지 않았다. 정부는 4·13 호헌 조치를 발표하며 개헌 논의를 중단한 채 현행헌법을 유지했다. 분노한 시민들과 학생들은 서울 곳곳에서 ‘고문살인 은폐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개최했고, 경찰을 피해 명동성당으로 들어가며 6일 동안의 운동을 펼쳤다. 계속되는 시위에 6월 29일,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은 6·29 선언을 발표했고, 전두환 전 대통령이 시민들의 요구를 수용하며 민주화 운동은 시민의 승리로 끝났다. 한양대에선 1987년 5월 초부터 학교 곳곳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한양대에서는 군인과 대치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을 자주 살펴볼 수 있었다.
 
서총련과 전대협이 만든 역사
 

전국 대학생 대표자 협의회(이하 전대협)는 1989년 6월 28일에 대학생 1500여 명이 참가한 ‘평양축전 참가를 위한 범국민 진군대회’의 전야제를 한양대 종합운동장에서 개최했다. 해당 대회엔 한양인도 참가했다. 전야제에선 6·29선언 2주년을 맞아 ‘6.29 사기 조작 분쇄 투쟁 2주기 기념 및 노태우 정권 퇴진 결의대회’를 가졌다. 이 대회는 한양대 노천극장에서 열렸다. 오후 11시경 당시 전대협의 임종석 의장은 한국외대에 재학 중이던 임수경 씨를 전대협 대표로 평양 청년 학생 축전에 참여시키기 위해 북한으로 보냈다고 발표했다.
 
▲1989년, 한양대 인문관 옥상에서 학생들이 농성을 벌이는 모습. 학생들과 전대협 소속 사람들은 책상과 의자를 비롯한 가구들로 바리게이트를 만들었다. (대학 기록실 제공)

제13회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은 북한 정부가 1989년에 개최한 행사였다. ‘반제 연대성, 평화와 친선을 위하여’라는 목표로 180여 개국의 대표들이 참가했다. 당시 임수경 씨는 북한 조선 학생위원장 김창룡 씨와 함께 ‘남북 청년 학생 공동선언’을 발표해 한국 사회에 이슈가 됐다. 학생들은 평양축전출정식과 함께 밤샘 농성에 들어갔다. 3일째 행사가 진행되던 중 한양대에 50개 중대의 7500여 명의 경찰이 투입됐다. 경찰은 학생들을 강제해산 시켰고 당시 인문관에서 농성 중인 800여 명의 학생과 대치했다. 경찰은 학생들을 연행하기도 했다. 당시 한양대엔 최루탄을 발사하는 경찰들과 최루탄 연기 사이로 화염병을 던지는 학생들이 전부였다.
 
▲1991년, 한양대에서 학생들과 경찰이 대치하는 모습. 학생들과 시민들은 '백골단 전경 해체, 공안 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 궐기대회와 시위'를 경찰의 원천봉쇄 속에서 강행했다. (대학 기록실 제공)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는 말이 있듯 더 나은 한양과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 역사를 기억하자.
 

글/김수지 기자       charcoal6116@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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