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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 15

[직원][사랑, 36.5°C]기부는 가족이 잘 되기를 바라는 깊은 진심과 같은 것

고등학교 시절 그녀는 체육특기생이었고, 그 덕에 3년 동안 학비를 내지 않고 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그때 받은 혜택은 그녀에게 빚이라기보다는 삶을 나아가게 하는 감사의 동력이었다. 내가 받은 도움의 손길을 반드시 다른 이들에게 건네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사회인이 되었던 한은순 씨는 그 약속을 실천하며 가족을 이루었고, 가족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지금까지 모교이자 직장인 한양대학교에 1,800만 원 이상의 발전기금을 기부해 왔다. 한은순 씨와 그녀의 뜻을 깊은 동지의식으로 함께해 온 가족들을 함께 만나보았다. 글. 편집실 / 사진. 홍승진 ▲ 한은순(90 경기지도학) 사회과학대학 행정팀 직원 Q. 남편 은희범 씨도 한양대 동문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떤 인연으로 만나셨는지요? A. 남편은 학부에서 박사까지 한양대를 다녔습니다. 제가 1학년 때 남편이 3학년으로 복학을 해 선후배 사이로 알고 지내다, 어느 날 제가 할머니 이야기를 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인연이 깊어졌어요. 중학교 다닐 때 할머니가 눈이 잘 안 보이셔서 매일 요강 치우는 일을 했어요. 다른 형제들은 서로 안하려고 한 일인데… 그것 말고도 할머니 세수며 목욕까지 다 제 차지였죠. 그 이야기를 들려준 이후 남편이 이것저것 챙겨주기 시작하면서 사이가 더욱 돈독해진 것 같아요. Q. 2007년부터 꾸준히 모교이자 직장인 한양대를 위해 기부를 하고 계십니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A. 제가 고등학교 때 육상부 체육특기생이었어요. 한양대에 원서를 내고 꼭 가고 싶어 ‘한양대 입학하고 나중에 직장을 다니면 이 은혜를 꼭 학교에 보답하겠다’고 기도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 혜택을 받고 다녔는데, 그때 받은 도움을 다시 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내내 했었죠. 1994년 입사하여 교직원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2007년부터는 작은 금액부터 기부를 시작해, 해마다 기부액을 조금씩 늘렸습니다. 급여가 오르지 않은 해에도 기부금은 꼭 증액했어요. 그리고 계좌이체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기부를 중단하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 강제성을 만들었죠. Q. 부모의 기부활동이 아이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것 같습니다. 기부를 할 때마다 아이에게도 이야기를 해주시는지요? A. 저희 집 가훈이 ‘감사’, ‘인사’, ‘봉사’입니다. 딸아이에게도 늘 약한 자를 도와주고 힘들고 어려운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이가 무학여고 1학년 때부터 3년 간 제가 감사기도와 함께 아이의 이름으로 한양대에 기부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는 아이를 한양대에 입학시켜 한양대 출신 가족을 만들겠다는 욕심이 있었는데, 인연이 닿지 않아 지금은 다른 대학 레저스포츠학과에 잘 다니고 있습니다. Q. 두 분이 오랫동안 한양대에 기부를 하셨고 다양한 봉사활동도 많이 하셔서 따님에게 자연스럽게 좋은 영향을 미쳤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A. 딸아이 얘기가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부모님이 기부나 봉사활동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일부러 봉사활동에 데리고 다녔는데,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이 사회에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자연스럽게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 영향 덕인지 대학에 들어가면서 전공하는 체육을 통해 누군가를 돕고 싶다고 하더군요. 재활치료사가 되려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 한은순(90 경기지도학) 사회과학대학 행정팀 직원 가족 Q. 기부를 하셨던 방식이 일시납, 정기납, 수시납 등 여러 형태입니다. 한 가지 방식이 아니라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A. ‘함께한대’는 일시납이었는데요, 어느 정도 여유가 있을 때 일시납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가장 쉽게 기부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래도 정기납인 것 같아요. 급여에서 일정 금액을 특정일에 이체하는 방식이죠. 기부를 고민하시는 분들에게는 이 방법을 추천합니다. 작은 금액부터 천천히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수시납은 한양교회에 감사헌금 형태로 내고 있고요. 저 같은 경우에는 학교 홈페이지나 메일에서 기부 관련 캠페인을 보면 입시수당 때 받았던 금액을 모았다가 그때그때 나눠서 기부를 하기도 합니다. Q. 한양대 이외에도 개인적으로 하시는 다른 기부나 봉사활동이 있을까요? A. 2011년 7월부터는 월드비전을 통해 월 3만 원씩 우간다에 있는 ‘타램오 디오’라는 초등학생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유니세프 성동구 성모보호작업장 시설을 매월 정기후원하고 있고요, (사)따뜻한한반도 사랑의연탄나눔운동본부에서 겨울철에 하는 연탄봉사와 성동구청 주관의 벽화봉사도 지속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학교와 관련해서는 사회과학대학 유학생들과 함께 2016년 11월에 인천 장봉도 혜림원에서 장애인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Q. 기부를 망설이는 분들에게 독려의 말씀을 하신다면? A. 저는 고액기부자가 아닌 소액기부자입니다. 돈이 많아서 하는 게 아니라 커피값 등을 아껴 여기저기 기부를 하고 있죠. 어떤 형태로든 우리 가족의 도움을 통해 공부하고 사회에 진출하는 한양인들이 있다면 그것만한 보람이 있을까요? 일단 1만 원이라도 정기납을 통해 시작해 보세요. 기부를 한다는 거창한 생각보다 우리 딸, 우리 남편이 잘 되기를 기원하는 공덕으로 시작한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동행한대 2017년 AUTUMN (제7호) 이북 보기

2017-11 15

[교수][사랑, 36.5°C]우리가 올린 벽돌 한 장이 글로벌 한양의 주춧돌이 되길 바라며

젊었을 때 현실보다는 관념과 이상에 치우쳤다는 강봉구 교수는 사회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했던 젊은 날 자신의 무력감을 아직도 기억한다. 공부에 몰입한 것도 아니었고,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고자 앞장 서 피켓을 든 기억도 없이 살아온 것이 부채로 남아 언제나 마음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런 마음의 짐을 덜고자 백만 원, 이백만 원 시작한 기부가 어느 새 천만 원을 채우는 사이 사회적 채무의식은 보람으로, 한양인의 자부심으로 서서히 변해가고 있었다. 글. 편집실 / 사진. 홍승진 ▲ 강봉구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 교수 Q. 처음 발전기금을 기부하신 것이 2011년이던데요, 교원으로 재직하시던 시점인지요? A. 학위를 마치고 돌아와 연구위원으로 2000년 3월 부임했습니다. 그러다 2007년 비정년트랙교원, 2011년 정년트랙교원이 되었으니 어느새 7년째 교수로서 한양대에 몸을 담고 있네요. 신분을 떠나서 한양대를 통해 지적으로 성장하고 좋은 일자리도 얻는 등 많은 혜택을 얻었으니, 제 기부는 어느 정도 그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라 해도 될 것 같습니다. Q. 학생 때와 교원이 되었을 때 학교를 보는 시각이 다를 것 같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지요? A. 학생은 교육서비스의 수혜자로 학교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활용할 수 있는 입장이라면, 교원은 그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학교는 노동과 자기실현의 장이기도 하죠. 그래서 교원이 된 후에는 타대학과의 경쟁이나 글로벌 한양을 실현하기 위한 학교의 위상에 더욱 민감해진 것 같습니다. Q. 교원으로서 그런 민감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교수님의 기부가 정말 절실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A. 제 기부내역을 보시면 많은 부분이 개교기념일을 앞두고 한 것입니다. 교원으로서 한양대의 발전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이를 위해 내가 한 일은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반성하게 되는 시점이기 때문이죠. 2008년도에 설립자 김연준 박사님께서 작고하셨을 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요, 제 나이 그때 오십이었습니다. 그런데 스물 여섯 약관의 나이에 기술공학을 바탕으로 민족의 자립을 고민하고 학교를 세우셨다는 게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 나이에 사회현실에 대한 불만이 앞섰을 뿐, 개선을 위한 비전과 실천이 따르지는 못했거든요. 그래서 10만 원, 20만 원 작은 금액부터 기부를 시작했습니다. 너무 큰 금액을 목표로 하면 영영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아 작은금액부터 시작하여 꾸준히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더 늦으면 안될 것 같다는 조급함도 한몫했지요. Q. 작은 금액이라고 하셨지만 시간이 흐르니 제법 큰 금액이 되었습니다.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나요? A. 가족들에게 상의를 하거나 알리지 않고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대외협력팀에서 보내는 감사편지를 본 아내가 알게 되었죠. 핀잔을 들을까 걱정했는데, 당신도 그런 일을 할 줄 아느냐며, 나중에 상황이 나아지면 더 크게 기부하라고 한술 더 떠 응원해 주더군요. Q.현재도 매월 급여에서 일정금액을 정기적으로 기부하고 계십니다. 일시납이 아닌 정기납입을 선택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A. 저 역시 봉급생활자입니다. 많은 금액을 한 번에 내기엔 상황이 녹록치 않죠.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소액이라도 꾸준히 한다면 세월의 힘을 입어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목표액을 정하고, 그것을 기부할 수 있는 시간안에서 나눠 내는 거죠. 이런 방식이 좋은 것은 기부든 봉사든 습관화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습관으로 몸과 마음에 체화되면 그때는 기부가 생활이 될 수 있거든요. Q.교수님의 그런 마음이 한양대에 어떤 변화를 만들기를 원하십니까? A. 우리 대학의 가장 큰 지향점이 ‘글로벌 한양’입니다. 글로벌 한양의 주체는 학생들이죠. 학생들의 글로벌 시야가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글로벌봉사단이나 해외 연구학습 인프라 조성 등 학생들이 해외에서 경험을 쌓을 수 있는 다양한 환경이 만들어졌으면 합니다. 지적으로 성장한 학생들로부터 즉, 새로운 세대로부터의 변화가 글로벌 한양의 실현을 더 앞당길 테니까요. Q.기부를 망설이는 분들에게 독려의 말씀을 하신다면? A. 나이가 들면서 회자정리(會者定離)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그 안에는 가진 것, 향유하는 것을 나누고 정리하여 이루어내는 단촐한 삶도 포함되어 있죠. 미국의 경우 개인의 사회적 성취는 자유경쟁의 보장과 법치라는 사회 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뛰어난 성취는 자신의 능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건강한 사회 시스템 속에서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지요. 공동체에 대한 감사와 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의 거부들은 교육과 대학에 기부합니다. 가장 보람 있는 기부는 모교에 대한 기부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의 수준이 그 사회의 수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교의 발전을 통해 우리사회의 성숙에 기여한다는 생각으로 소액부터 시작했으면 합니다. 우리가 올린 벽돌 한 장이 한양대를 세계 100대 명문대학에 진입시키는 밑받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문들의 기부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중장기모금 캠페인도 있었으면 합니다. 동행한대 2017년 AUTUMN (제7호) 이북 보기

2017-11 15

[교수][희망, 100℃] 한양대 의대의 글로벌 비상, 내 원대한 꿈이 되다

의과대학을 설립하는 것이 평생 꿈이었다는 하충식 한마음창원병원 이사장. 그러나 그는 그 오랜 꿈을 접었다. 2011년 한양대학교와 의료협약을 맺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대학 설립을 위해 마련한 돈을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발전에 기부하면서 그의 꿈은 한양대 의대와 함께 성장하고 있다. 200억 원 규모의 발전기금을 약정한후 지금껏 누적 기부액 26억 원을 꾸준히 기부하며, 이제 하충식 이사장의 꿈은 한양대 의과대학의 성장과 발전이라는 새로운 꿈으로 진화하고 있다. 글. 편집실 / 사진. 홍승진 ▲ 하충식 한양대학교 한마음창원병원 이사장 한양대 의과대학이 내 꿈을 실현시켜 줄 것이다 하충식 이사장은 ‘지방대 의대’ 출신이라는 뿌리 깊은 학력 차별의 꼬리표를 끊기 위해 평생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며 살아왔다고 한다. 400병상 규모의 종합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자수성가형 사업가로, 한양대 동문이 아님에도 한양대의 발전을 위해 200억 원의 발전기금을 약정했다. 이 돈은 평생의 꿈이었던 의과대학 설립 자금이었다. 요즘은 ‘한양대 의대의 발전이 곧 나의 꿈’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다닌다. 하충식 이사장이 한양대 의과대학을 이처럼 각별하게 생각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고향인 경남에 국내 최고의 의과대학을 설립하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어요. 경남은 의료환경과 교육환경이 제일 열악한 지역으로 손꼽히는데 이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실제로 140억 원을 들여 한 지방대학을 인수해 의과대학 설립을 도모하기도 했지만 포기했다. 전국에 41개의 의과대학이 있는데, 그가 또 설립한다면 42번째 의대가 생기는 것이다. 이는 42등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충식 이사장은 농담처럼 ‘어느 세월에 최고의 의대로 키우겠느냐’며 차라리 최고 수준의 의과대학을 발굴하고 더 발전시키는 방법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다 2011년 한양대학교 협력병원으로 지정되고, 깊은 신뢰관계가 형성되면서 결심을 굳혔다. 2015년에는 한양대와 의료임상, 교육, 연구협력에 대한 업무협약을 맺고 병원 이름도 ‘한양대학교 한마음창원병원’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앞으로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전임교수 30여 명을 비롯한 우수한 인력들이 배치될 예정이다. 또한 아시아의 의료 허브가 되겠다는 야심찬 목표로 ‘한양대학교 한마음국제의료원’을 신축 중이다. 완공되면 200여 명의 의사가 상주하게 되는데 이는 의과대학 1개가 만들어지는 것과 맞먹는 효과라고 한다. 그러니 한양대 의과대학이 하충식 이사장의 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양대학교가 글로벌 대학으로 비상하는 데 우리 의과대학이 든든한 날개가 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나의 기부가 그 밑거름이 되었으면 합니다.” 기부금과 별도로 매년 2천만 원씩 총 3억 원을 기부하기로 약정한 ‘창원사랑 한마음병원 장학기금’도 포함되어 있다. 이 장학기금은 경남 출신의 한양대 재학생들을 위해 사용된다. 현재 한마음창원병원에는에는 한양대 출신 교수가 여럿 재직 중인데, 이분들 역시 후배들을 위해서 매달 5만 원씩 기부를 하고 있다. 여기에 병원에서 좀 더 보태 매년 약정된 금액을 만들어 가고 있다. 하충식 이사장은 한양대에만 기부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초·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교까지 그가 졸업한 모교에도 매년 지속적인 기부를 하고 있어 이를 모두 포함하면 연평균 20억 원을 기부금으로 내고 있다. ‘부러운’ 부자가 아니라 ‘존경받는’ 부자가 필요한 사회 “거기 이사장님이 억수로 훌륭하신 분이라예. 창원 사람치고 그 양반 도움 안 받은 사람이 없을낍니더.” 창원중앙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한마음창원병원으로 가자고 했을 때 택시기사가 한 말이었다. 하충식 이사장은 경남지역민들 사이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인물로도 정평이 나있다. 2011년에는 국민이 추천하고 정부가 포상하는 제1회 국민추천포상에 선정되어 국민포장을 받기도 했다. 평소 근검 절약정신과 어려운 이웃을 위해 매년 수억 원을 기부하고 지역민을 위한 봉사를 실천하여 국민에게 희망과 감동을 주었다는 공로였다. “60~70년대엔 거지가 아니더라도 춘궁기에는 밥을 얻어먹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어머니께서는 ‘내 집에 들어오는 사람 빈 그릇으로 보내지 마라, 사람 괄시하면 못 쓴다’고 가르치셨어요.” 이런 밥상머리 교육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인턴 시절에도 명절이면 사비를 털어 병원 미화원들에게 선물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1994년 개원과 함께 본격적인 사회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21년째 매일 아침마다 직원들과 함께 병원과 주변 거리를 청소하며 국가기록원으로부터 국내 최장시간 자원봉사 인증을 받은 이력도 있다. 경남의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교복구입비, 수학여행비 지원금을 매년 4억 원씩 지원하고 있다. 파도 파도 미담 투성이니 요즘말로 ‘파파미’가 따로 없다. ▲ 하충식 이사장은 경남지역민들 사이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인물로도 정평이 나있다. 평소 근검 절약정신과 어려운 이웃을 위해 매년 수억 원을 기부하고 지역민을 위한 봉사를 실천하여 희망과 감동을 주고 있다. 돈을 물 쓰듯 펑펑 쓰는 자린고비 하충식 이사장은 자린고비로도 유명하다. 십 수 년 간 조심조심 타던 자동차가 수명을 다해 몇 해 전에는 차를 바꿨다. 이 차도 2,000만 원을 넘지 않는다. 더 이상은 과욕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골프는 아예 배우지도 않았고 배드민턴을 좋아한다. 진료를 보는 병원동과 달리 행정동 복도에는 형광등을 반만 켜두어 늘 어두컴컴하다. 이사장실은 물론, 회의실도 에어컨 대신 선풍기 2대로 여름을 났다. 뽁뽁이를 유리창에 붙여 냉난방비를 아끼고 있다. 이렇게 지독한 자린고비라는 소리를 들어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단다. 남을 도울 때는 돈을 물 쓰듯 쓸 줄 알기 때문이다. 그의 삶에서 기부란 도대체 무엇일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행복하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대답이 다소 진부하다 생각을 하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온 얼굴에 하회탈 같은 웃음주름살이 퍼진 표정으로 기부를 할 때의 행복함이 어떤 건지 대신 말해주었다. “기부나 남을 돕는 행위가 ‘내 주머니 털어서 비우는 것’ 같지만 궁극에는 10배로 채우는 행위입니다. 그간 기부를 통해 얻은 깨달음입니다. 사실, 우리 병원의 성장도 기부의 힘이 아닌가 싶어요. 한마음창원병원이 우리나라에서 기부를 가장 많이 하는 병원이기도 하지만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병원이기도 합니다.” 하충식 이사장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부자가 아니라 ‘존경받는’ 부자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13대를 이어간 경주 최 부잣집 같은 부자를 꿈꾼다. 이웃과 나누고 절제할 줄 아는 그의 삶의 방식이라면 대를 잇는 ‘하 부잣집’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동행한대 2017년 AUTUMN (제7호) 이북 보기

2017-11 14

[동문]절제해야 드러나는 글의 '민낯'

말로 언어를 구사하고,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은 어쩌면 인간에게 주어진 값진 선물이다. 누군가가 남긴 말과 글이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강력한 힘을 가지기도 한다. ‘브런치 북 프로젝트’에서 금상을 수상해 에세이 <나를 지키는 말 88>을 출간하고, 현재 인터넷 일간매체 ‘오마이뉴스’에서 음악 관련 기사를 쓰는 손화신 동문(국어국문학과 05)은 그런 글을 적어내고 싶은 사람이다. 글에 의해, 글을 위해 꿈을 키워나가고 있는 손 동문을 종이 내음과 커피 향이 은은히 퍼지는 어느 북카페에서 만났다. 불확실함이 가능으로 “작품은 불멸하는 존재잖아요. 항상 그게 멋있다고 느꼈어요. 제가 죽어도 오래 살아 있는 작품을 남기고 싶어요.” 어려서부터 글쓰기에 대한 로망을 가슴에 품고 있었던 그는 글쓰기가 마냥 좋아 한양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다. 졸업 후 기상캐스터와 기자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탓에 작가의 꿈은 40대쯤에나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 여행기를 출간한 지인의 소식이 전환점이 됐다. “저는 책을 내는 것이 굉장히 대단하고,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20대였던 지인이 책을 내는 것을 보니까, 할 수 있을 것 같았죠.” ▲손화신 동문(국어국문학과 05)은 ”나만의 문체를 갖고 싶다는 욕심이 기자 생활을 시작하고 생겼다"며 "글을 더 잘 쓰고, 계속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용기를 얻었지만, 가슴 한 편에는 작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남아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브랜드 ‘디올’의 전시회 취재 때 한 문구를 봤다. ‘그(크리스찬 디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이 문구를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제가 방황을 하는 이유는, 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라는걸 깨달았죠. 그 순간 저는 ‘아, 내가 원하는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기회도 결심과 함께 운명처럼 찾아왔다. 본격적으로 자신의 색깔이 드러나는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한 손 동문은 다음날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제공하는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brunch)의 ‘브런치 북 프로젝트’ 공고를 보게 됐다. 대상 수상자는 무려 ‘브런치’에서 책을 직접 출간해주는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보자마자 생각했어요. ‘이 대상은 내 거다.’ 두 달간 아침부터 밤까지 카페에 가서 글을 썼어요. 평소에 관심이 있던 주제인 ‘말과 스피치’에 대해 열정적으로 글을 썼죠.” 평소 손에서 펜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기록하던 습관 덕인지, 손 동문은 노고 끝에 금상을 수상했다. 대상을 놓치며 출간의 혜택을 받진 못 했지만, 손 동문은 오히려 도움 없이 책을 출간한 과정이 자신에게 유익했다고 말했다. “제가 스스로 출간을 하려고 출간계획서도 써보고 출판사와 회의도 진행했어요. 정말 A부터 Z까지 제가 다 했으니까, 보람 찼습니다.” 그렇게 바라던 그의 저서 <나를 지키는 말 88>은 마침내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손화신 동문의 첫 저서 <나를 지키는 말 88>은 ‘나 답지 못한 것으로부터 나를 지킨다’는 주제를 담고 있는 에세이다. (출처: YES 24) 간결하고 진솔하게 “최대한 감추고 버리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 참 멋있다고 생각해요.”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밝힌 손 동문의 글 스타일 또한 ‘소심’하다. 하지만 그만큼 깊고, 간결하다. “뭉크 같은 화가들은 정밀화처럼 세세하게 그리지 않잖아요. 그들은 대상을 왜곡하고, 추상화하면서 내재된 본질을 드러내요. 글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쓰려고 해요. 처음 글을 쓸 때는 화려한 문체를 사용했는데, 지금은 줄일 수 있을 때까지 줄이려고 노력하죠.” 이 때문에 손 동문은 글쓰기에서 퇴고의 과정을 가장 중요시하게 여긴다. 퇴고를 하며 불필요한 말과 단어를 빼고, 문체를 날렵하게 만드는 것이 그녀가 지향하는 ‘좋은 글’이다. 기자가 본업인 손 동문은 다소 딱딱해질 수 있는 기사에도 문학적, 시각적 표현을 가미한다. 간결함 다음으로 글에서 중요한 것은 설명이 아닌 ‘보여주는 것’이라는 게 손 동문의 설명. “시각적 표현들이 글을 살아나게 만들어요. 스무 살 때 ‘씨네21’이라는 매체의 인터뷰 기사 중 ‘방심한 순간에도 앙 다문 입술’이라는 표현을 읽으며 감명 받았어요. 인터뷰이의 성격이 소설적으로 표현 됐지만, 본질을 꿰뚫는 묘사가 멋있었어요.” 그는 독자가 읽었을 때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는 기사를 연재하려고 노력한다. “글을 탁월하게 잘 쓰고 싶어요. 그렇다 보니 기사는 보통 기사대로, 내 글은 일반적인 글대로 쓰지 않으려 해요.” 손 동문의 노력은 그가 적어내는 기사에서 잘 드러난다. 다음은 싱그러운 풍경이 그려지는, 가수 루시드폴 인터뷰 기사 중 일부다. 햇빛과 폭풍우와 농부의 사랑이 만든 감귤처럼 루시드폴이 만든 음악은 귀한 힘을 품고 있다. 그의 노래는 사람의 마음을 맑히고 조용한 가운데 다시 나아갈 힘을 준다. 너무 조곤한 목소리로 너무 차분한 노래들을 부르는데도 충만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건 신기한 일이다. Lucid Fall인 그가 이번 해 가을에 감귤과 함께 정규 8집을 수확했다. 앨범명은 <모든 삶은, 작고 크다>로, 직접 쓰고 찍은 글과 사진을 담은 에세이집과 묶여 온오프라인 서점에서만 판매된다. CD에는 그가 작사-작곡-편곡은 물론 혼자서 녹음 및 믹싱한 9곡이 실렸다. 타이틀곡은 ‘안녕,’이다. 거울과 같은 글들 글 쓰는 것이 서투른 사람들은 어떻게 쉽게 글을 쓸 수 있을까. 손 동문은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쓰는 것을 제안했다. 표면적으로는 그 대상에 대해 쓴 글 같지만, 글쓴이의 자아가 담길 수 밖에 없기 때문.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잡문집>에서 정답에 가장 가까운 내용이 나와요. ‘자소서를 어떻게 쓰는 것이 좋을까요’라는 독자의 질문에 하루키는 ‘굴튀김에 대해서 써보는 것은 어떠냐’고 답했죠. 굴 튀김의 재료와 만들어지는 과정을 서술해도, 결국은 자신을 비추는 글이 완성돼요. 자신에 대해 쓰는 글은 어렵게 느껴지기 마련이니 대상이나 주제를 정해 쓰는 것이 쉬워요.” 자신의 정체성이 묻어나는 글을 쓸 때와 독자들이 그 글들을 읽었을 때, 손 동문의 순간은 빛난다. “글쓰기라는 활동의 가장 큰 장점은 그걸 통해 ‘나 자신’을 더 잘 알게 된다는 것이에요. 내가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 알면 나중에 선택할 때도 더 적합하고, 좋은 선택을 하게끔 도와주죠. 글쓰기는 결국 탐구활동이에요.” 절제하기에 더욱 와닿는, 손 동문의 글은 (https://brunch.co.kr/@ihearyou)에서 읽어볼 수 있다. ▲“저는 에세이 같지만, 그래도 ‘작품’으로 불리는 글을 앞으로도 쓰고 싶어요.” 손화신 동문은 일상의 소소한 얘기도 나만의 개성을 갖고 쓰면 하나의 소설이나 시 처럼,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글/ 유혜정 기자 haejy95@hanyang.ac.kr 사진/ 최민주 기자 lovelymin12@hanyang.ac.kr

2017-11 14

[학생]눈부신 청춘 뒤 그림자를 주목하다

자유로움, 청춘, 열정, 패기. ‘대학생’ 하면 대체로 떠오르는 단어들이다. 하지만 이와 달리, 대학생들에게도 고뇌와 좌절은 쓰라리다. 때론 극단적인 생각으로 치닫는 대학생도 존재한다. 한양대 의학과 학생으로 이뤄진 팀이 대학생은 ‘자살위험집단이 아니다’라는 통념에 가려진 현실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들은 치밀한 연구를 통해 ‘대학생의 자살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비-대학생과의 비교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대한예방의학회 학생 학술상 동상을 수상했다. 의학과 학생 팀 중 조승원(의학과 2), 이우연, 진유현(이상 의학과 1) 씨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위기의 대학생들’을 찾아내다 대한예방의학회가 창립 70주년을 맞아 개최한 학생학술대회가 지난 10월 18일부터 이틀간 부산 해운대 그랜드호텔에서 진행됐다. 주제는 ‘치료에서 질병 예방으로, 국민 건강 증진 전략의 대전환’이었다. 총 11팀이 참여한 가운데, 한양대 의학과 학생 팀은 치열한 예선을 뚫고 동상을 차지했다. 조승원 씨는 대학생 신분의 ‘우리’에 관한 이야기가 좋은 반응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현재 대학생인 우리와 좀 더 가까운 이야기예요. 대학생, 그리고 청년들의 자살 생각에 대한 연구를 하고 싶단 마음을 원래 가지고 있었고요.” ▲지난 11일 이른 아침, 대한예방의학회 학생학술대회에서 동상을 수상한 한양대 의학과 학생팀의 일원들과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왼쪽부터 이우연, 조승원, 진유현 씨) 대학생 집단의 자살영향요인은 기존에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지 않은데다, 구체적인 데이터가 없어 체계적인 연구에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또래’ 계층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두고 연구를 진행했기에 유의미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평소에 (자살예방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주변에 자살예방교육을 실시하고, 자살위험에 노출된 분들을 도와주는 자살예방활동학회가 인원을 모집할 때 지원하기도 했어요.” 함께 논문을 발표한 이우연 씨와 진유현 씨 역시 자살예방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자살예방활동학회에 참여한 바가 있다. 이 씨는 삶과 자살 사이의 우선순위를 고민하는 과정을 보며 자살예방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삶이 지닌 가치와 그것을 포기할 선택권의 우선순위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이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좀 더 알아보고 싶고 현장 가까이에서 실태를 보고 싶었습니다.” 정신 건강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던 진 씨도 평소 정신건강증진센터에 방문해서 활동하는 것 자체에 큰 보람을 느끼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렇게 모인 김에 본격적으로 연구를 해보자고 얘기했어요.” 인원이 모인 그 길로 지체없이 한양대 학생연구 지원 프로그램에 학회 신청을 했다. 대학생과 비-대학생을 중점으로 파헤치다 의학과 학생 팀은 논문을 쓰기에 앞서 다양한 연구 과정을 거쳤다. 구체적인 수치와 관련 자료를 얻기 위해 다각도로 현 실태를 따져봐야 했다. “대학생 자살에 대한 대부분의 논문들이 300명에서 500명을 모집해서 설문조사를 시행합니다. 물론 바이어스(자료의 편향)가 발생해요. 대학생만이 특이 집단인지, 아니면 모든 집단에서 동일하게 일어나는 현상인지 구분이 어려워지는 거죠.” 정확한 결과를 위해 대학생과 비-대학생 두 집단을 세밀히 비교했다. “나이를 18~23세로 설정한 후, 대학교 재학, 휴학, 재수, 석사, 박사를 모두 제외한 순수한 비-대학생 집단과 대학 재학중인 집단으로 나눴습니다.” 세부적인 조사와 분석을 진행한 효과가 있었다. 조 씨는 연구를 진행하며 대학생이 노출된 자살위험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수치를 접할 수 있었다고 답했다. “사망한 대학생 100명 중 자살로 사망한 대학생이 거의 50퍼센트로 나타났습니다.” ▲의학과 학생팀은 ‘대학생의 자살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비-대학생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논문으로 대한예방의학회의 학생학술대회에서 학술상 동상을 수상했다. (출처: 한양대 의학과 학생 팀) 대학생 사망 비율 중 자살이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결과에, 진 씨 또한 다른 집단이 받는 관리에 비해 대학생 집단이 상대적으로 소외됐다고 지적한다. “대학생은 영-어덜트(Young-Adult)입니다. 청소년이나 일반 성인의 중간에 끼여 있어요. 즉 두 집단 모두에 속하지 않아서 예방정책이 거의 없는 편이죠. 연구나 정책적인 집중이 떨어진다고 생각해요.”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냈지만, 연구와 논문을 진행하는 동안 순풍만 불었던 건 아니다. “막연한 아이디어만 가지고 연구를 시작하기에는 빈약한 점이 너무 많았습니다.” 의학과 학생 팀은 신영전 교수(의학과 예방의학교실)의 도움이 없었다면 절대로 연구 성과를 거둘 수 없었을 거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 신 교수님이 안 계셨으면 아이디어들을 연구주제로 구체화하고, 방법론과 데이터를 찾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신 교수 덕에 기한에 맞춰 연구와 논문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며 의학과 학생 팀은 감사를 표했다. 다음 연구를 향해 의학과 학생 팀은 이번 연구에서 대학생의 비교대상이 된 비-대학생의 자살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에 대해서도 후속 연구를 진행하고 싶다고 밝혔다. “통계자료를 분석하니, 대학생 집단에 비해 비-대학생 집단의 자살생각 비율이 더 높았습니다.” 과거자료에서 대학생과 비-대학생의 차이를 확인하고, 기존의 조사기관에서 두 집단을 구분하는 변수를 알아보는 것을 시작으로 연구를 시작할 예정이란다. 의학과 학생 팀은 벌써 다음 연구를 할 생각으로 가득 차 보였다. “저희가 생각한 연구방법을 토대로 연구를 진행하고, 그 연구에 그치지 않고 추가적인 분석을 해보고 싶어요.” ▲같은 분야에 흥미를 가지고 의기투합한 결과,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의학과 학생팀. 그들이 보여준 깊은 고민과 열정이 진심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란다. 글/ 채근백 기자 cormsqor12@hanyang.ac.kr 사진/ 최민주 기자 lovelymin12@hanyang.ac.kr

2017-11 06

[동문]쉽지 않았지만, 걷고자 했던 길을 갔다

불확실한 세상.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인 이들이 많다. 때로는 자신이 가고 있는 이 길이 맞는지, 혹은 지금 와서 다른 길은 너무 늦은 건 아닐지. 어찌됐건 뒤로는 갈 수 없기에, 고민이 드는 건 당연하다. 특히 한 분야를 깊게 팠던 이일수록, 다른 분야를 파보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어렵다. 그러다 보니 김지희 동문(국악과 92)이 지금까지 걸어온 발걸음은, 조금 아니 많이 특이하게 느껴진다. 판소리 전공자임에도 뮤지컬, 민요 등 여러 장르의 노래를 소화해낸다. 십여 년 전 귀농 이후엔 민요도 새로 접한 김 동문을 간만의 서울 공연 전날인 10월 31일 우리대학 미래자동차공학관에서 만났다. ▲김지희 동문(국악과 92)이 공연 준비를 위해 상경한 지난 10월 1일 우리대학 미래자동차공학관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귀농 후 오래간만의 학교 방문에 김 동문은 무척 즐거워했다. 스토리텔링이 좋았던 소리꾼 김 동문은 오랜만에 찾은 모교를 무척 반가워했다. “학교가 많이 바뀌었네요. 특히 여기저기에 새로운 건물이 많이 생겼고.” 이십 년이 넘었지만 진사로부터 공과대학 건물들을 지나 음악대학까지 오르던 길은 잊혀지지 않는다고. 당시 김 동문은 판소리를 전공했다. 중학교 이전까지는 합창단이나 중창단에 속해 있다가, 국악고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솔직하게는, 서양음악을 해보고 싶었어요. 성악이나 오페라! 그랬는데 유학을 가야 한다는 점도 걸렸고, 어쩌다 보니 국악을 접하게 됐죠. 어렸을 때라 튀고 싶은 마음도 어렴풋이 있었던 듯해요.” 얼핏 오페라와 판소리는 거리감이 느껴지지만, 김 동문은 스토리텔링이라는 공통점에 마음이 갔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판소리를 시작해서 여기 한양대에서도 판소리 공부를 이어가게 됐죠.” 시작부터 여러 분야에 거부감이 없어서 였을까. 김 동문은 졸업 이후 창작 뮤지컬 등에도 배우로 참여하는 등 판소리 외에 다양한 장르의 모습을 내비쳤다. “판소리를 택할 때도 연극적인 요소에 무척 끌렸어요. 1인 다역으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고. 그래서인지 판소리를 하다가 ‘연극’을 또 좋아하게 됐어요. 이걸 하다 보니 마침 뮤지컬 붐이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었고, 고민을 하다가 ‘색다른 도전을 하자’는 생각에 뮤지컬 아카데미도 다녔죠.” 그렇게 뮤지컬에도 발을 뻗친 김 동문은 판소리, 창극, 여성극, 뮤지컬 등 여러 분야를 오가며 공연 활동을 이어갔다. 귀농도 또 하나의 도전 그리고 발판 그러던 중 택한 귀농은 너무나도 우연한 만남에서부터 시작됐다. 그 당시 지방으로도 오가며 공연하던 김 동문은 강원도 횡성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횡성에 혼자 농사를 짓겠다고 내려와 있었어요. 처음에는 시골 총각이라 그랬는데, 알고 보니까 대학 졸업하고 회사 다니다 다 때려치고 귀농한 거였죠. ‘어 이런 인생은 뭐지?’하는 마음에 친구가 될까 하다가 결혼을 하게 됐고, 같이 귀농했죠.” 선택은 정말 어느 순간, 이뤄졌다. “시골에 내려가 산다는 게 두렵기도 했죠. 그런데 뭐, 대뜸 가는 거죠. 톨게이트 통과했으니.” 김 동문의 귀농은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에게 선보인 첫 공연은 뜻밖의 난관에 봉착했다. “가서 사람들에게 신고식 겸 ‘제가 이거 하는 사람입니다’를 보여주려고 한 소절 뽑았죠. 그랬는데 다들 제 걱정을 해주는 거예요. 목 아프지 않냐, 젊은 처자가 애쓴다, 알고 보니 강원도 사람들은 판소리를 잘 모르고 있던 거죠.” 김 동문은 이에 일단 사람들과 친해지고자 했다. 함께 농사도 짓고, 같이 수다도 떨고, 보다 친숙한 민요도 부르고. 그러던 와중에 강원도 사람들의 ‘소리’도 접하게 됐다. 음악인으로서 놓칠 수 없던 김 동문은 녹음도 하고, 영상도 찍고 쫓아다니며 그들의 소리를 담았다. 이 또한 김 동문의 길, 소리 배움의 길이 됐다. 틈틈이 모은 노래들을 바탕으로 지난주 공연도 열었고, 이에 맞춰 강원지역의 노동요 등을 편곡 및 수록한 앨범 ‘길을 걷다’도 냈다. 돌이켜 보면, 귀농은 또 한 번 새로운 장르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된 셈이다. ▲ 김지희 동문은 그동안 모으고 모은 음악을 바탕으로 지난 1일 마포아트센터에서 '길을 걷다'란 주제로 '소리콘서트'를 열었다. 이번 공연은 국악 전공자로선 독특하게 '밴드 음악'으로 연출했다. (출처: 김지희 동문) “나의 소리 배움의 길” 김 동문은 최근에는 마을 장터나 일본의 바(bar) 등, 작지만 무척 다양한 곳에서 공연을 해오고 있다. 이번 ‘소리콘서트’는 최근엔 정말 오래간만인 대형 공연. 김 동문은 이렇게 다양한 곳에서 공연을 하면 그 매력서 헤어나올 수 없다고. “시골 장터에서 공연 후 흥겹게 즐기시던 할머니께 쌀도 받고 그럴 땐 대형 공연에서 느낄 수 없는 기쁨이 있죠.” 장소뿐 아니라 여러 장르를 오가는 점도 김 동문의 개성이다. 이번에 낸 앨범 ‘길을 걷다’의 수록곡이나, 이번 공연에서 선보인 곡들은 판소리 뿐 아니라 민요들을 소위 ‘밴드 음악’으로 편곡했다. “제 스스로도 곡을 써요. 여태껏 접했던 민요도 모아서 주변에 ‘밴드 음악’하는 이들과도 협업해서 지금의 결과물들을 만들었죠. 어떤 건 팝(Pop)스럽게, 어떤 건 (Rock)스럽게도.” 이번 공연이 끝나면 김 동문은 다시 횡성으로 가 농사와, 이후 공연도 준비하며 자신만의 음악도 가꿔갈 것이다. “가끔은 농담삼아 손해라고 말해요. 너무 이것저것 다 건드리기만 하고, 특화된 장르는 없다고. 이렇게 걸어온 길의 선택 선택마다도 쉽지 않았죠. 그래도 이게 저만의 길 아니겠어요?” ▲ 누가 뭐래도 김지희 동문은 그다운 음악을 이어갈 것이다. (출처: 김지희 동문) 글/ 이상호 기자 ta4tsg@hanyang.ac.kr 사진/ 김윤수 기자 rladbstn625@hanyang.ac.kr

2017-11 02 중요기사

[동문]평범하지만, 중요한 것들을 보여드릴게요

상품을 구입하며 모두가 생각하는 것은 똑같다. “이거 괜찮을까?” 블로그 리뷰는 뭔가 돈 받고 쓴 티가 나고, 광고를 그대로 믿자니 그것도 곤란하다. 이럴 때 상품정보 밑에 달린, 실제로 구매한 사람들이 달아 둔 후기는 마음의 안식이 된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검증된 정보를 소비자에게 제공하기 위해 화장품 관련 모바일 앱 ‘글로우픽’을 만들었고, 이제는 오프라인 유통 진출에 성공한 공준식(신문방송학과 03) 동문을 뉴스H가 만나봤다. 소비자에게 ‘등대’ 되고 싶어 글로우픽은 2014년 9월에 출시한 화장품 관련 모바일 앱이다. 유명세나 브랜드가 아닌, 소비자의 리뷰에 기반해 화장품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이 해당 앱의 가장 큰 장점이다.“지난 4-5년간 화장품 시장은 양적으로 크게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늘어난 광고와 마케팅 때문에 선택에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시장이 혼란스러울 때 소비자의 선택은 더욱 어려워진다는 공 대표는 평범하지만, 검증된 데이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브랜드나 TV에서 추천하는 게 아닌, ‘직접 써본’ 소비자들이 추천하는 제품이 중요합니다.” ▲공준식 대표는 혼란스러운 시장 속 소비자들의 선택을 돕기 위해 ‘글로우픽’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소비자들이 직접 써보고 평가한 데이터가 중요하다고 판단한 공준식 대표는 지난 3년간 소비자의 리뷰 데이터를 모으는 데 집중했다. “200만건 이상의 데이터를 모으는 데 집중했습니다.” 공 대표는 ‘평범한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앱 환경을 조성하여, 이용하는 사람들이 쉽게 리뷰를 남길 수 있게끔 유도했다. “소비자의 의견이 중요하다면, 우선 의견을 내기 쉽게 해야 합니다. 마치 기사를 쓰는 건 어렵지만, 기사 밑에 댓글을 다는 것은 어렵지 않은 것처럼 말이죠.” 쉽게 리뷰를 쓸 수 있는 환경과, 소비자들이 남긴 리뷰를 수집하는 것에 집중한 결과, 공준식 대표의 ‘글로우픽’은 경쟁업체들 중 가장 빠르게, 방대한 화장품 리뷰 데이터를 확보한 플랫폼이 되었다. 2-30만 명이 글로우픽을 매월 사용하고 있습니다.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브랜드나 유통채널 측에서 글로우픽을 인지하고 함께 사업을 진행할 만한 영향력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철학이 담긴 서비스를 위해 이러한 ‘글로우픽’의 선전에는 어떠한 노력이 숨어 있었을까? 공준식 대표는 계속해서 소비자들의 평가가 중요하단 사실을 시장에 알리는 데 노력을 쏟았다고 한다. “글로우픽은 소비자의 의견을 제일 우선으로 생각하고 리뷰에 임합니다. 브랜드나 성분이 어떻든, 많은 사람이 써보고 좋다고 느끼면 그게 곧 좋은 화장품인거죠.” 소비자의 의견을 중요히 여기고, 이를 시장에 꾸준히 알린 결과, 현재는 ‘글로우픽’과 함께 유통하고 싶어하는 브랜드가 늘었다고 한다. “이제는 새로운 제품이 나올 때 마다 글로우픽 리뷰를 얻고 싶어하는 브랜드도 생겼습니다. 공신력이 생긴 셈이죠.” ▲성공 뒤에는 노력이 함께한다. 공준식 대표는 ‘글로우픽’이 추구하는 소비자 평가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시장에 알리고자 했다. 수많은 화장품 관련 앱 중 하나에서 업계의 공신력 있는 기준으로 떠오르기까지 ‘글로우픽’이 여러 길을 걸어왔듯이, 공 대표 역시 여러가지 길들을 걸어왔다. “취업을 빨리 했습니다. 제대 후 3학년 1학기를 끝내고 바로 취업해 사회생활을 경험했습니다.” 신문사에서 웹 서비스를 기획하는 일을 맡았다는 공 대표는 기획자로서 세상을 바꿔보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회사의 규율과 제약 탓에 그꿈을 이룰 수 없다 생각한 그는 과감히 퇴사를 결정한다. 퇴사 이후, 기획자로서 글로벌 서비스를 런칭하고, 운영하고, 실패하는 과정을 2번 정도 경험했지만 공 대표는 꾸준히 재도전했다. “스타트업을 계속 런칭하면서 내 생각이 반영되어 있는 서비스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 스타트업에서 함께한 동료 한 명과 창업한 결과가 글로우픽입니다.” 실패에도 개의치 않고 ‘경험’을 찾아 나선 시도가 도움이 되었다고 공 대표는 말한다. 최근 청년 창업을 장려하는 사회분위기에 따라‘경험’의 중요성을 공 대표는 더더욱 강조한다. “창업은 개개인에게는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좋은 일이 되려면, 실패를 장려하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합니다.” 특히나 우리나라에서는 재도전을 장려하는 환경이 아직 아니라던 공 대표는 창업을 꿈꾸는 젊은 이들에게 신중할 것을 주문했다. “창업에 대한 긍정적인 면만 보고 뛰어드는 건 위험합니다. 시작했더라도 그만두고 평범한 직장인으로 돌아기기도 쉽지 않고요.” 하지만 공 대표는 창업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창업의 성공과 실패 모두를 경험하는 것에는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저도 성공과 실패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회사에 위기가 닥쳤을 때 극복해내지 못했을 겁니다. 다양한 직무를 체험해보고, 경험 하에서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창업에 있어 가장 중요합니다. 시도한다, 경험을 위해 공준식 대표는 최근 신세계백화점과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백화점 내의 뷰티 편집샵 '시코르'에 ‘글로우픽 존’을 설치함으로써, 오프라인 유통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 공 대표는 이러한 성과를 축하하기에는 아직 조심스럽다고 한다. “대단해 보일 수는 있지만, 이러한 성과 또한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성공에 도취되지 않고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의 공 대표는, 현재 글로우픽의 상태를 ‘시험대에 올랐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글로우픽은 최근 신세계백화점과 파트너십을 체결해 오프라인 매장을 개설했다. (사진제공 : 글로우데이즈) “이번에 확장한 유통망은 아직 자체적인 유통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기존의 유통망에 의존적인 형태로 함께하는 상황이지요.” 이러한 조건의 판로는 구축할 때 드는 리스크가 적은 대신, 돌아오는 것 역시 제한적인 형태로 돌아온다고 설명한 공 대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축을 시도해 본 이유를 밝혔다. “스타트업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 중 하나는 건드려보지 않은 영역을 건드릴 때입니다. 하지만 이번 유통망 구축은 최소한의 비용을 지불하고 미지의 영역에 발을 디디는 귀중한 경험을 얻는 것입니다. 적은 리스크로, 경험의 지름길을 가는 것이죠.” 과거에는 단순히 있는 그대로의 정보만을 제공했다면, 현재는 소비자의 변화에 맞춘 맞춤형 분석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공 대표는 ‘글로우픽’의 강점으로 내세운 데이터의 활용에 앞으로 더욱 박차를 가하려고 한다. “글로우픽에는 소비자의 트렌드가 있습니다. 트렌드에 부합하는 정보를 많이 모은 이상, 이걸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점입니다.” 지난 3년 동안 ‘많은’ 데이터를 모았으니 이젠 이 데이터를 가공하고 활용하여 ‘빅데이터’로 거듭나게 만들고 싶다는 공 대표. 온라인과 오프라인, 양 쪽에서 앞으로 ‘글로우픽’이 소비자들에게 보여줄 ‘데이터’가 기대된다. 글 / 채근백 cormsqor12@hanyang.ac.kr 사진 / 김윤수

2017-11 01

[동문]공간에 숨결을 불어넣다

사람들은 누구나 공간 속에서 생활한다. 휴식을 위한 주거공간부터 회사의 업무공간, 여가를 위한 문화공간까지 그 범위도 다양하다. 공간의 내부는 밖에서 바라보는 건물의 외관과 또 다른 느낌을 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건물의 문을 열고 내부에 들어선 후에야 비로소 그 건물에 대해 온전히 이해한다. 이런 공간을 만들어 내는 이들이 바로 ‘인테리어 디자이너’다. 딱딱하고 차가운 공간도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손을 거치면 포근하고 아늑한 곳으로 변화한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수많은 공간들에는 사실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손길이 닿아있다. 사용자가 행복한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박은아 동문(산업디자인학과 00)을 만났다. 모교를 탈바꿈하다 최근 ERICA캠퍼스에는 단과대학별 PBL라운지가 새롭게 조성됐다. 협소하고 노후했던 기존의 모습에서 탈피해 오직 학생들만을 위한 공간으로 변모했다. 10개의 각 단과대학별 라운지가 전혀 다른 컨셉으로 꾸며져 라운지를 찾는 학생들에게 쏠쏠한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마치 카페처럼 휴식과 학업이 모두 가능해 라운지를 찾는 학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건물의 주 사용자인 학생들을 전적으로 고려한 변화였다. 이러한 변화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박은아 동문(산업디자인 00)의 손끝에서 탄생했다.그는 학생들을 위한 공간 디자인이 필요하다는 한양대 각 사업단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 박은아 동문이 직접 디자인한 ERICA 캠퍼스 언론정보대학 라운지 모습 (사진 출처: 박은아 동문) 각 단과대학의 특성과 주 사용자를 고려한 환경개선이 이번 디자인의 쟁점이었다. 박 동문은 언론정보대학 ‘확산’, 예체능대학 ‘표현’, 디자인대학 ‘변형’ 등 각 단과대학의 컨셉트를 직접 선정했다. 그 역시 학부 시절 4년을 보냈던 공간이기에 학생들의 요구와 불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감재, 그래픽, 조명과 가구까지 고민을 거듭하며 세심하게 선정했다. “모교와 후배들을 위한 디자인을 하는 기회가 어디 흔할까요? 14년간 디자인한 수많은 공간 중에서도 무척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였습니다.” ▲ 박은아 동문이 직접 디자인한 ERICA 캠퍼스 디자인학 라운지 모습 (사진 출처: 박은아 동문) 확고한 꿈 그리고 도전 ‘집을 짓고 싶다’는 박 동문의 꿈은 19살부터 이어졌다. 학창시절에는 막연하게 건축가를 꿈꿨으나 점점 인테리어 디자인에 관심이 옮겨 갔다. 산업디자인학과에 진학한 것도 이러한 이유였다. 학부시절 내내 건축학과 수업을 함께 들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학년이 높아질수록 인테리어 디자인이라는 분야에 대한 확신이 생겼고, 즐겁게 학업에 임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살아가겠다는 확고한 의지 덕분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인테리어 설계회사에 입사했다. 현업에서 실무를 익히며 기본기를 쌓았다. 5년을 쉬지 않고 일했다. 업계 특성 상 하나의 프로젝트나 설계에 돌입할 때마다 며칠씩 밤을 새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박 동문은 매 순간이 즐거웠다. “사실 저는 정말 축복받은 사람이죠. 일찍이 확고한 꿈을 찾았고,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데다 그 일을 즐기면서 산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박은아 동문은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그 일을 즐기면서 산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라는 자신만의 신념을 밝혔다. 하지만 29살의 박 동문은 업계에서 인정받는 직장, 안정적인 직급을 내려놓고 돌연 미국행을 택했다. 나만의 작품이 아니라 찍어내는 디자인을 하고 있다는 고민 때문이었다. 스무 살부터 10년을 오직 꿈을 향해 달려왔기에, 스스로 휴식이 필요한 순간임을 직감했다. 많은 이들이 말렸지만, 언제나 그랬듯 박 동문은 스스로의 선택에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반 년을 뉴욕에 머무르며 오직 공부와 휴식에만 집중했다. 잊고 지냈던 디자인적 감수성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휴식이 있었기에 다시 도전할 수 있었다. 맨 땅에 헤딩하듯 구직활동을 시작했고, 낯선 미국 땅에서 바닥부터 다시 디자인에 도전했다. 외국인 인턴으로 시작해 정규 디자이너로 인정받기까지 꼬박 2년 반이 걸렸다. 피나는 노력 끝에 박 동문은 결국 타국에서도 인테리어 디자이너로서 자리잡았고, 그제야 그는 한국행을 택했다. 공간, 사용자를 최우선으로 한국에 돌아와 거취를 고민하던 박 동문은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디자인에 대한 무한한 애정, 스스로에 대한 확신, 그리고 사용자를 배려하는 박 동문의 섬세한 감각은 금세 입소문이 났다. 감사하게도 그를 찾는 이들이 점점 많아졌고, 지난 2012년 인테리어 설계회사 ‘디자인이유(Design EU)’ 설립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박 동문은 “디자인이유는 나만의 소신이 담긴 이름”이라고 말하며 “'그 공간의 사용자를 행복하게 하겠다'는 제 디자인의 이유가 녹아있다”고 말했다. ▲10년이 넘는 디자인 외길 인생, 그러나 박은아 동문은 여전히 디자인이 즐겁다. 박은아 동문이 공간을 디자인할 때 최우선으로 여기는 것은 바로 ‘공간의 사용자’다. 사용자의 니즈를 충족시키는 것은 물론, 나아가 사용자가 행복과 안정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내고자 노력한다. 그는 주거공간부터 오피스 및 상업공간까지 그 종류를 가리지 않고 공간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30평도 안 되는 작은 공간부터 3000평에 달하는 공간까지 그 크기와 주제는 매번 다르지만 모든 디자인에 최선을 다해 임한다. 디자인에 대한 확신이 있기에 어떤 제안도 거절해 본 일이 없다. 물론 힘든 순간도 적지 않다. 현장에서는 결국 정해진 예산 내에서 공간을 설계해야 하기에 디자인에 대한 갈증을 느끼는 순간이 종종 있다. 언제나 따라오는 창작의 고통과, 여성으로서 견뎌야 하는 크고 작은 수모도 존재한다. 하지만 여전히 디자인이 즐겁다는 박 동문이었다. 그에게 디자인은 살아가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쉬운 일은 결코 없을 테니, 어려운 순간에도 즐겁게 자신 있게 헤쳐 갈 생각입니다. 디자이너로 사는 삶이 행복합니다.” 글/ 김예랑 기자 ys2847@hanyang.ac.kr 사진/ 김윤수 기자 rladbstn625@hanyang.ac.kr

2017-11 01

[동문]궁궐의 벽지, 예술작품으로 거듭나다

벽을 꾸며주는 도배지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마주하는 막>의 연기백 작가는 도배지를 개인의 삶이 담겨 있는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재해석했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궁궐들의 옛 벽지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며 수집해온 장순용 동문(건축공학과 67)은 연 작가의 전시에 큰 도움을 줬다. 장 동문은 누군가에겐 쓰레기, 혹은 쓸모없는 것으로 비칠 수 있는 도배지들을 마음으로 품었다. 그렇게 단순한 폐자재도 그의 손을 거치면서 역사의 산물이 됐다. 우리 문화재에서 시작한 도배지 사랑 지금의 도배지는 크게 창호지와 장판지로 나뉜다. 하지만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왕실과 국가의 주요 행사를 기록 해 둔 의궤에 나와 있는 종이 이름이 80종류에 달한다. 문화재를 공부하던 중 장 동문은 이런 발견을 할 수 있었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문화유산들이 복원 될 때 옛날 종이를 재현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큰 아쉬움을 느꼈다고. “옛 종이를 재현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렵고 많은 노력이 들어요. 오래된 샘플을 통해 조사해야 하는데 도배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없으니 이런 과정도 없는 거죠.” ▲궁궐 도배지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정성이 깃든 복원을 간절하게 바랐던 장순용 동문이다. 장 동문은 궁궐벽지에 직접 관심을 갖고 샘플 채취를 시작했다. “1973년 운현궁 조사 일을 맡았는데, 옛날 도배지는 어떤 것일까 궁금했어요. 운현궁에서 벽지 샘플을 채취한 후 욕조에서 물에 불려 한 꺼풀 벗겨 보니, 벽지 하나에 10개 이상의 종이가 나왔어요.” 고종 즉위 이후 완공된 운현궁, 근대까지 8년 주기로 도배됐다는 사실을 장 동문은 벽지를 분해하면서 알아냈다. 그렇게 초창기 고종 즉위 2년부터 있었던 도배지라는 것을 입증하는 자료도 수집할 수 있었다. 장 동문은 계속해서 옛 벽지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창덕궁 낙선재 앞마당에 도배지들이 폐자재로 쌓여 있는 것을 봤을 때도 그대로 지나칠 수 없었다. 한양대 대학원생들과 함께 궁궐 건축에 대한 세미나 작업을 할 당시였다. “거기서도 도배지 문양이 보여서 가방 안에 샘플을 가져갔죠. 어차피 버리려고 폐자재로 모아둔 거니까요. 또 욕조에서 물에 불려 분리를 해보니 10장이 넘게 나왔어요.” 정교하게 만들어진 옛 벽지를 모아두면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 믿고 당시 문화재청에 연락했지만, 묵살됐다. 그 길로 장 동문은 본인만의 자료를 모아서 소장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장 동문의 여러 건축 자료들. 셀 수 없이 많은 책과 자료집이 장순용 동문의 사무실을 빼곡히 채웠다. 지난 80년과 90년대에는 궁궐의 복원공사가 한창 이루어질 때였다. 장 동문은 그 현장을 여러 번 방문하면서 복원 과정의 마무리인 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 실망감을 느꼈다. “궁궐의 설계 뼈대는 다 있는데, 마무리를 일반 한지로 끝내니까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죠. 한지로 도배 되는 것은 과거 사대부의 집에서 하던 과정이었거든요.” 그는 옛 도배지의 지혜와 미를 살려 똑같이 복원해주면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 수십 년 동안 관심을 갖고 얘기했지만, 그의 의견은 끝내 크게 반영되지 않았다. 비로소 가치를 인정받다 <마주하는 막>에서는 연 작가의 작품 외에도 장 동문이 수집한 궁궐벽지와 연구자료, 그리고 비망록들이 전시되고 있다. 그중 비망록에는 장 동문이 자료를 수집하며 겪었던 슬픈 사연의 감정이 그대로 묻어 나온다. “운현궁에서 찾은 자료들을 정리해서 스크랩북으로 갖고 있었어요. 마침 보수공사를 한다면서 자료를 빌려 달라해서 빌려 줬는데, 시간이 지나도 돌려주지를 않더라고요. 다시 연락을 해보니까 자료를 분실했다는 답변을 받았어요. 지난 1973년부터 20년 가까이 모아왔던 도배지 자료였는데 모든 것이 소실 된 셈이죠. 그 때는 정말 속상했어요.” 소중한 우리 문화재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단서들을 한 순간에 잃은 그의 목소리에는 아직도 허탈함이 남아있었다. ▲도배지 분실 사건 때 장순용 동문이 느꼈던 큰 상실감이 와 닿는 비망록. ▲장순용 동문이 연 작가에게 제공한 자료들 중 일부이다. 이제껏 그는 ‘외로운’ 도배지 연구가였다. 몇 년 동안 궁궐이나 문화재청에 도배지 복원이 섬세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 그의 의견을 들어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장 동문은 오히려 전문가보다 일반인들에게 자료를 보여주는 것을 더 선호한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도배지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올해 여름 경복궁에 위치한 국립고궁박물관이 궁궐건축에 관한 전시를 하겠다고 찾아왔어요. 박물관의 일부에 제가 수집한 자료들이 전시 됐죠.” 문화재 공부를 손에서 놓치지 않았던 장 동문이었기에, 이 전시는 그에게 특별한 경험이었다.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궁궐벽지에 대한 소신을 잃지 않았던 장 동문은 <마주하는 막>의 연기백 작가와도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됐다. 폐가 철거된 집에서 낡은 도배지를 모아 작품을 제작할 계획이었던 연 작가는 다양한 도배지를 소장하고 있다는 장 동문의 소식을 전해 듣고 그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연 작가가 ‘처음 보는 도배지들이 많다’며 굉장히 놀랬어요. 나중에는 다시 연락이 와서 벽지로 전시를 할건데 도움을 줄 수 있냐고 해서 기꺼이 자료를 주겠다고 했죠. 도배지에 관한 원고와 기고한 글들도 다 보여줬어요.” 장 동문은 젊은 작가가 자신과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것에 연대감을 느끼며, 아낌 없이 전시를 위해 자료제공을 해줬다. ▲장순용 동문이 수집한 궁궐벽지들이 '아마도 예술공간'에 전시돼 있다. 단 하나의 소망, 궁궐 도배지 복원 장 동문은 꾸준한 문화재 공부를 통해 배운 것들을 정리해서 다음 후학들에게 참고가 될 만한 자료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분야를 처음부터 배우려면 쉽지 않은데, 장 동문은 수십 년간 쌓아온 지식과 노하우를 후학들에게 전하고 싶다는 의지를 밝혔다. 제일 큰 바람은 궁궐 도배지가 하루 빨리 복원되는 것이다. "문화재와 문화유산 쪽으로의 용역비가 너무 박한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죠. 항상 저렴한 값으로 하려니까 그 점이 아쉽고, 문화재청 쪽에서는 그렇게 안 했으면 해요. 제대로 자료 조사를 하고, 복원설계를 충실히 갖출 수 있도록 여건 개선을 위해 노력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건축에서의 사소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벽지와 도배지. 하지만 그 누구도 유심히 관찰하고 조사하지 않은 궁궐벽지를 사랑한 장 동문은 어쩌면 그 자체로 궁궐 복원에 큰 이바지를 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정성과 애정이 듬뿍 묻어 나오는 자료들과 궁궐벽지, 그리고 비망록은 이태원에 위치한 ‘아마도예술공간’에서 관람할 수 있다. ▲“환경이 열악하더라도, 적성에 맞는 일을 하다 보면 좋은 때가 올 것입니다.” 장순용 동문은 후배들과 미래 건축학도들에게 "일단 정진하면 될 것"이라고 전했다. 글, 사진/ 유혜정 기자 haejy95@hanyang.ac.kr 사진/ 최민주 기자 lovelymin12@hanyang.ac.kr

2017-10 28 중요기사

[교수]함께한 17년, 일구어 낸 성과를 바라보며 (1)

기부문화 확산, 공익기금 조성, 사회공헌에 기여하는 ‘아름다운재단’이 올해로 17주년을 맞았다. 특정 개인이나 기업, 종교기관의 지원 없이 시민들의 참여로 설립된 이 재단은 사회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하는 공익활동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사업을 꾸준히 지속하고 있다. 이런 사회공헌을 실천하는 재단의 활동에 창립 초기부터 참여해온 사람이 있다. 2000년부터 아름다운재단에 참여하고 2012년 아름다운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해 2017년 2월까지 봉사한 예종석(한양대학교 경영학부)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뉴스 H가 예종석 교수를 만나봤다. 흙 속에서 피운 꽃 “뿌듯하고,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창립 초기부터 함께한 단체의 약진을 바라본 예종석 교수의 회고다. 재단이 출범한 2000년부터 창립에 참여하고, 정책 자문단장을 거쳐 기부문화연구소장을 역임한 후, 재단 이사를 거쳐 2대 이사장으로 취임하며 ‘아름다운재단’을 이끌었다. “그 당시 한국의 대다수가 바라보는 일반적인 재단의 위치는 재벌의 상속수단, 세금을 회피하기 위한 조세피난처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복지정책의 그늘에 놓인 사회적 약자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고 싶었던 예 교수는 어려운 길로 발을 내딛었다.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누가 처음 들어보는 신생 재단에 기부를 하겠습니까?” 그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편견과 새로이 출범한 재단이라는 핸디캡을 떠 안은 채 업무를 이어 나가던 중, 한 줄기 빛이 보였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께서 일본으로부터 받은 보상금 5천만원을 기부해 주셨습니다. 할머니의 기부를 종자돈으로 재단의 사업을 진행해 나갔습니다.” ▲아름다운재단 이사장이던 당시의 예종석 교수. 재단이 마주한 현실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사진 출처 : 세계일보 박진영 기자) 가까스로 재단을 궤도에 올려놓는 데는 성공했지만, 장애물은 많았다. “보수정권에서 아름다운재단을 안 좋게 봤어요. 우연의 일치인지, 재단을 거쳐 정계로 진출한 인사들이 대부분 야권에서 활동해서 보수정권에선 당연히 재단을 좋게 볼 수 없었을 겁니다.” 정치 이념에 관련되지 않는 일을 하고, 관여하지 않으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공격과 압박을 받았던 기억을 떠올린 예 교수는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기업의 기부가 끊기기 시작하고, 극우보수단체들이 심심치 않게 재단 사무실 앞에서 시위도 할 때였습니다. 정체불명의 사람들에게 고소고발도 15건씩이나 받았고요.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었죠.”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택한 방법이 역량을 기르는 것. 예종석 교수는 어떠한 여건에서도 할 일을 할 수 있는 재단이 되기 위해 체질을 바꿔야 했다고 한다. “역량을 길러서 어떠한 난국에서도 소외된 이웃을 돕고자 하는 목적사업을 해 나갈 수 있는 재단이 되어야 했습니다.” 다액 소수의 기부에서 소액 다수의 기부로, 준조세성 기부에서 자발적 기부로, 기업 기부에서 개인 기부로. 아름다운재단은 조금씩이지만, 꾸준히 우리나라의 기부문화의 판도를 바꿔 나갔고, 고정 기부자들을 확보해 나갔다. 2017년 현재, 아름다운재단은 크게 성장했다. “많은 참여자들 덕분입니다. 재단에 참여한 수많은 기부자들과 봉사자들이 없었으면, 재단의 오늘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재단에 관련된 모두가 함께 일구어 냈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싶습니다.” 많은 도전, 그걸 위한 사명감 위에서 말한 아름다운재단의 성과 외에도 예종석 교수의 족적은 매우 많다. 기업과 비영리 단체 양 쪽을 오가며 수많은 경영에 참여했다. 교수로서의 업무도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위의 업적들을 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예종석 교수는 사명감이라고 답했다. “기업과 비영리 섹터, 양 쪽을 이해하고 중간에서 이를 연결하는 역할을 해야겠다는 나름의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아름다운재단에서 주최하는 기부문화 관련 연구자료 발표행사인 기빙코리아에서 지속적으로 많은 기업들을 분석한 결과, 예 교수는 기업과 비영리 단체가 서로에 대한 이해가 미흡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예 교수는 양자 간의 간극을 좁히고 기부문화를 개선하고 싶다는 소망 하나로 활동을 이어나갔다고 했다. “우리나라 기업인의 기부는 대부분 법인의 돈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업의 홍보 효과를 위한 수단이 아닌, 진정성 있는 사회공헌 활동으로서 기부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법인 기부에서 개인 기부로, 다액소수의 기부에서 소액다수의 기부로 문화가 바뀌어야 하는 거죠.” 사명감을 차치하고라도, 예 교수는 이러한 활동을 자신이 좋아하기에 큰 부담 없이 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즐겁게 하는 일은 부담을 느끼지 않아요. 힘든 일이지만, 제가 좋아하고 즐기던 일이었으니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싶어서, 그리고 즐거워서. 예종석 교수는 본인이 접한 다양한 길들을 걷게 된 이유를 단 두 가지로 설명했다. 이러한 업적을 쌓는 데 필요한 경영학적 소양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예종석 교수는 경영학이라는 학문에 매력을 느껴 경영학으로 들어섰다고 한다. “공부할 당시에는 경제학 석사를 마치고 박사를 할 생각이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경영대학에서 소비자의사결정에 대한 강의를 들었는데, 큰 매력을 느꼈어요.” 경영학에서 소비자를 바라보는 시각에 큰 흥미를 느꼈다는 예 교수는 경영학에 입문하고 나서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을 만나는 행운 또한 얻었다고 한다. “그 당시 최고의 교수들 밑에서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뛰어난 학자들이 한 대학에 모여 있기 쉽지 않았는데, 저는 학생으로서는 매우 행운아였죠.” 가고자 하는 곳으로, 열심히 그리고 또 열심히 달려라 예종석 교수는 같은 길을 걷고자 하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열심히 하세요. 꿈을 이루고 싶다면 열심히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지극히 원론적인 이야기입니다만, 남들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할 수 밖에 없어요.” 하지만 예 교수는 노력 위에 먼저 생각할 몇 가지 것들을 주문한다. “지금 막 사회로 나가는 학생들은 가장 큰 변화를 겪는 시기에 살게 될 겁니다. 현재도 4차 산업 혁명이라는 변화의 물결이 진행되고 있으며, 변화의 속도는 더욱 빨라질 예정입니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확실하게 잡으세요.” 예종석 교수는 2019년 2월 정년을 맞는다. 이제는 제 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새로운 인생을 살 계획입니다. 물론, 그것도 제가 좋아하고 즐기는 일을 할 겁니다.” 전업 작가의 삶을 준비하고 있다는 예 교수는 본인의 말을 빌리자면 ‘번잡스러울 정도로 다양한 분야’에 일해본 경험이 새로운 삶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한다.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경험을 했어요. 그 경험들이 글의 소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교수, 기업의 경영자문역, 기부문화운동가, 비영리단체 경영자, 마케팅 전문가, 시사 칼럼니스트, 음식문화평론가, 체육단체간부 등 수많은 직함을 갖고 활동을 했던 예종석 교수는 경험을 살려 전업작가의 길을 걸어보려고 한다. 풍부한 경험을 가진 예종석 교수가 써 내려갈 또 다른 이야기가 기대된다. ▲예종석 교수는 다양한 경험을 살려 전업 작가로 활동하는 새로운 인생을 맞이할 예정이다. 글 / 사진 채근백 cormsqor12@ha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