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2237건
뉴스 리스트
게시판 리스트 컨텐츠
2018-06 09

[동문]'늦게 피는 꽃이 더 아름답다'...베트남의 영웅 박항서 동문(체육 77) (6)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중심에 한양인이 있었다. 바로 박항서 동문(체육학과 77)이 그 주인공. 박 동문은 지난해 10월 베트남 축구 성인 대표팀과 23세 이하(이하 U-23)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했다. 베트남은 올해 초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에서 준우승을 거뒀다. AFC가 주관하는 대회에서 동남아시아 국가가 결승에 진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베트남의 영웅’이 된 박 동문의 이야기를 담았다. 악바리의 드리블 성미가 깔깔하고 고집이 세며 모진 사람. 박 동문의 별명은 ‘악바리’였다. 늦은 시작탓에 남들보다 열심히 했다고 한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나니 축구가 너무 하고 싶었습니다. 1학년 2학기 때부터 고등학교 축구팀에 들어갔죠. 운동에 대한 천부적인 소질도 없었기 때문에 다른 선수들을 따라잡기 위해 죽기 살기로 노력했습니다.” 박 동문은 경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로 축구 선수가 되기 위해 한양대 체육학과에 진학했다. ▲ 럭키 금성 선수 시절 박항서 동문(체육학과 77)이 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일간스포츠 제공) 박 동문은 대학 시절을 회상했다. “고(故) 최은택 교수(체육학과)님과 고(故) 배기면 교수(체육학과)님의 가르침으로 선수로서 한층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고마우신 분들입니다.” 박 동문은 한양대 졸업 후 제일은행 축구단에 입단했다. 얼마 있지 않아 육군 축구단에서 군복무를 했다. 전역하고 럭키 금성 황소(현 FC 서울)에서 프로축구 선수로 데뷔해 맹활약했다. 1985년에는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1986년에는 주장으로 선임됐다. 선수에서 지도자로 “5년간의 선수 생활을 끝내고 지도자의 길을 걷기로 했습니다.” 박 동문은 후배 선수를 키우고 싶었다. 자신을 존재하게 만들어준 은사들에게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일찍 선수 생활을 그만 두는 것도 아쉬웠죠. 하지만 빨리 지도자로 자리 잡을 수 있어 후회하지 않습니다.” 1989년부터 안양 LG 치타스(현 FC 서울)의 트레이너로 활동했다. LG 치타스의 코치를 거쳐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코치를 맡기도 했다. 2002년에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수석코치로 히딩크 감독을 보좌했다. (지난 기사 보기 - 월드컵 4강 신화 일군 `특급 참모`) ▲ 박항서 동문이 베트남 축구대표팀 선수들과 훈련하고 있다. (베트남 축구협회 제공) 시간이 흐르며 월드컵 열기가 식듯, 박 동문은 점점 사람들에게서 잊혀졌다. 2015년 12월에는 상주 상무 감독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다. 7개월 전에는 3부 리그인 창원시청 축구단 감독을 맡고 있었다. 젊은 지도자들이 계속 배출되는 상황에서 불가피한 일이었다. 박 동문에게 베트남은 기회의 땅이었다. 선수와 지도자 경험을 통해 갖게 된 지식과 철학을 쏟을 수 있는 곳이었다. “축구 인생에 있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후배 감독들에게도 해외 진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59세라는 늦은 나이에 박 동문은 새로운 전성기를 맞았다. 베트남 축구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AFC 주최 U-23 챔피언십에서 베트남을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베트남 정부로부터 3급 노동 훈장을 받았다. 노동, 창의성, 국가건설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세운 사람에게 수여하는 훈장으로 3급이 가장 높다. 불과 작년만 해도 밀려난 지도자였던 박 동문. 지금은 박항서 열풍을 일으키며 자신의 업적을 새로 쌓고 있다. ▲ <집사부일체>에 출연한 박항서 동문이 ‘사부의 한마디’를 말하고 있다. (SBS 제공) 끝으로 박 동문은 한양인에게 격려의 한마디를 전했다. “고개 숙이지 마세요.” 베트남 선수들에게도 했던 말이다. 박 동문 역시 선수와 지도자의 길을 걸으며 많이 넘어졌고, 힘든 순간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고개 숙이지 않고 묵묵히 달린 결과 끝내 베트남의 별이 됐다. “한양인으로서 긍지를 가지고 도전하는 삶을 사세요. 최선을 다했으면 당당해도 됩니다. 결과에 자부심을 가지세요.” 글/ 유승현 기자 dbtmdgus9543@hanyang.ac.kr

2018-06 04

[동문]춤을 통해 그가 말하는 세상

무용은 추상적이고, 정형화되지 않는다. “무용은 말로 할 수 없는 말이에요.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너무 많은 느낌과 생각을 은유적으로 실체화 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은은하면서 강력하기도 한 춤은 말보다 더 강한 메시지를 세상에 전한다고 김성용 동문(무용학 박사과정)은 말한다. 1997년 만 20세 최연소로 제27회 동아무용콩쿠르 대상 수상. 이어서 2000년에 일본으로 넘어가 개인작으로 무대를 선보이더니, 2년 뒤 한국인 최초로 나고야 국제 현대무용 콩쿠르에서 은메달을 수상하며 일본을 포함, 세계를 주목시켰다. 지난해 12월 대구시립무용단 예술감독 겸 안무자로 취임한 무용인 김성용 동문이다. ▲ 1976년생, 43세의 나이의 젊은 리더십을 갖춘 김성용 동문(무용학 박사과정) (김 동문 제공) 어린 시절 주변 친구들이 과학자, 선생님을 꿈으로 이야기 할 적에도 김성용 동문은 안무가를 꿈꿨다. 그것도 대구 무용단의 안무감독이라는 구체적인 꿈을 그렸다. 김 동문은 10대 시절부터 몸으로 활동하는 것을 곧잘 했다.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연기를 추천했다. 당시 대구에는 연기를 배울만한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경북예술고등학교에 입학했고, 이후 남자 무용수로서의 첫 걸음을 내딛었다. 이후 한양대 무용학과에 입학해 2000년에 학사 과정을 마친 김 동문은 무용학으로 박사과정까지 이어가고 있다. 부임 후 첫 데뷔작 ‘군중’과 그 이후 김 동문은 "대구시립무용단에서 최종 오퍼를 받았을 때에도 실감나지 않을 정도로 기뻤다"고 말했다. 무용단 데뷔작으로는 <군중>을 기획했다. 김 동문이 대구시민들과 첫 조우한 작품이다. <군중>은 폭력이라는 문제의식을 독창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들인 가해자, 피해자, 방관자 모두에게 상처가 존재한다는 다소 어둡지만 희망적인 내용이다. 이 작품으로 김 동문은 지난 3월 13~14일 양일간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정기공연을 마무리지었다. ▲ 작품 <Moving Violence Episode 1&2>의 공연 모습. (김성용 동문 제공) 김 동문은 “순수 예술가들은 '작품의 깊이'와 '대중성'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지기 쉽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예술가들은 그것을 극복하고 합의점을 찾아 표현을 멈추지 않는다. 관객이 문화와 예술을 경험하고, 일상에 풍요를 가져다 주는 것이 예술의 궁극적인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 동문은 더 많은 관객들과 만나길 희망한다. 관객들에게 전할 메시지를 무대에 담아내 대중과 소통을 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무용수로서의 삶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차세대 독보적인 현대무용가로서 김 동문은 8월 29일 창무국제공연예술제에 초청받아 신작 발표를 준비중이다. 10여 명의 무용수들과 투어공연을 할 예정이다.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일본 등에서 러브콜이 쇄도하고 있다. 9월 베트남 호치민 오페라하우스 무대와 11월 미국 플로리다 던컨시어터 공연 등을 준비하며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다. ▲ 무대 위 김성용 동문의 모습. 흡인력 있는 눈빛과 연기로 몰입을 고조시킨다. (김 동문 제공) 무대를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잠재돼 있는 무언가를 찾게 해주고 싶다는 김 동문. 일상에서 느끼지 못한 감정과 감각을 느끼게 해주고 그 안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야 말로 그가 실현하고자 하는 무용 예술의 가치다. 글/ 김민지 기자 melon852@hanyang.ac.kr

2018-06 03 중요기사

[교수]큰 새가 먼 길을 가듯이

무역(貿易). 서로 바꾸다. 옛부터 많은 학자들은 국가간 거래를 고민했다. 절대우위에 따른 자유무역을 주장한 애덤 스미스(Smith), 비교우위를 통해 양국 상호 이익이 가능하다고 말한 데이비드 리카르도(Ricardo), 상호수요이론을 제시한 존 스튜어트 밀(Mill)까지. 거래야말로 우리 생활에 없어선 안 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꿈을 수출하는 곳. 코트라 (이하 KOTRA,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에서 올 2월까지 사장을 지낸 김재홍 특훈교수(정책과학대학)를 만났다. 관료의 길 김 교수는 행정고시 26회로 공직에 입문했다. 한양대 행정학과를 다니며 관료의 꿈을 키웠다. “중고교 시절부터 법대에 가고 싶었습니다. 당시에는 행정학과가 법대에 있었죠. 법학보다는 행정학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영역을 배운다는 점이 유연하고 실용적으로 다가왔다는 김재홍 교수. 그는 지도교수의 권유로 대학교 3학년부터 본격적인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4년 간의 준비 끝에 시험에 합격했다. ▲ 김재홍 특훈교수(정책과학대학)를 지난달 30일 연구실에서 만났다. 자신의 인생 경험을 이야기하는 김 교수. 김 교수는 2013년 3월부터 2014년 7월까지 산업통상자원부 1차관을 지냈다. 1차관은 기획, 산업, 무역, 인사 업무 등을 관장한다. 김 교수는 원래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를 희망했다. “상공부는 국가의 상공정책을 수립하고 총괄하는 곳입니다. 경제지식으로만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론보다는 실물경제를 다루고 싶었습니다.” 워낙 인기가 많은 자리라 한 번에 갈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법제처에서 첫걸음을 내디뎠다. 7년 후 부처교류로 상공부에 전입했다. KOTRA에서 3년 김 교수는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KOTRA 사장직에 지원했다. “마음 먹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관피아'(관료와 마피아의 합성어로, 퇴직 후 공기업이나 관련 기관에 재취업하는 고위 공무원을 이르는 말) 방지법 제정이 추진되고 있을 때였어요. 퇴직 관료들의 재취업이 사실상 불가능했죠. 자칫 여론의 질타를 맞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주변의 적극적인 권유로 김 교수는 코트라 사장직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정부 정책에 대한 이해가 높았고, 다른 기관과 협업하는 데 필요한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끝내 김 교수는 관피아 논란을 잠재우고 KOTRA 사장에 임명됐다. ▲ KOTRA 사장 시절의 김재홍 교수(앞줄 왼쪽 두 번째). 2017년 9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 글로벌파트너링 사업(GP 아시아 2017)’ 국내 참가업체 쇼케이스를 둘러보고 있다. (코트라 제공) KOTRA는 대한민국 중소기업의 수출을 지원하고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는 기관이다. 김 교수는 “중소기업과 중견기업을 수출 주체로 전환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대기업 중심의 수출구조는 외부환경 변화에 영향을 받기 쉽기 때문이다. 한중FTA를 활용해 중국 자본유치에 힘쓰기도 했다. 대중국 투자가 2014년 11.8억 달러에서 2015년에 19.8억달러로 늘었다. 김 교수는 재직 중 수출 부진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지구를 22바퀴 돌았다. 3년 임기를 마쳤을 무렵, 무역 1조 달러를 회복했다. 더 크게 더 멀리 31년 반 동안의 공직생활이 쉽지만은 않았다. 정부 정책은 불특정 다수가 이해관계자다.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이 넓은 만큼 객관성과 공정성을 유지하기 쉽지않다. “돌이켜보면 지나치게 원리 원칙을 강조하다 보니 융통성 없는 집행이라 느껴지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공직자로서 국익을 위해 부끄럽지 않게 일한 것으로 위로합니다.” ▲ 인터뷰를 마친 김재홍 교수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붕정만리 기불탁속(鵬程萬里 飢不啄粟)’. ‘큰 새는 먼 길을 날아가는 도중에 아무리 배가 고파도 좁쌀은 쪼아 먹지 않는다’는 뜻이다. 김 교수의 인생철학이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담임선생님이 해 준 말을 가슴에 품고 살고 있다. “한양대 후배들이 먼 길을 가기 위해서는 사소한 것을 탐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것에 관심을 두지 마세요. 멀리 보고 높은 뜻을 품고 크게 행동하세요. 당장은 손해가 되더라도 결국 성공하는 인생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글/ 유승현 기자 dbtmdgus9543@hanyang.ac.kr 사진/ 이진명 기자 rha925@hanyang.ac.kr

2018-05 31

[동문][NOW 꿈꾸는 사람들] 문화재 연구는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

지난 1월 최종덕 동문이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했다.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장과 숭례문 복구단 단장 등을 거치며 문화재 복원에 대한 철학을 확고히 다지게 됐다는 최 소장. 산업화로 밀려난 소중한 전통기법을 되살리는 데 헌신하고 싶다는 그에게서 우리 옛것에 대한 애정이 물씬 느껴졌다. 글. 박영임 사진. 안홍범 ▲ 최종덕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 (건축공학 78) 문화재를 문화재답게 “양은그릇을 사려고 놋쇠 그릇을 죄다 내다 팔았던 시절이 있었죠. 포마이카 가구(합판 표면을 플라스틱 재료 등으로 코팅한 가구)를 들여놓기 위해 손때 묻은 고가구를 갖다 버리기도 했고요. 궁핍한 시절이라 뒤를 돌아볼 여력이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도 경제적 삶과 함께 정신적 삶을 소중히 여겨야 할 때입니다.” 우리 옛것이 홀대받았던 시절. 산업화의 거센 물결에 휩쓸려 명맥이 끊긴 전통을 이제 와 이으려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어떤 전통은 되살릴 방법조차 없다. 더욱이 관건은 문화재를 ‘어떻게’ 복원하느냐이다. 외양의 재현에 만족할 것인가, 문화재를 만들던 당시의 기법까지 살려야 할 것인가. 얼핏 생각해도 전통 재료와 전통 기법까지 되살리는 것이 옳을 듯한데, 최 소장은 현실은 다르다며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숭례문 복구작업 전까지만 해도 건축물 복원에 쓸 기왓장을 일반 공산품처럼 공장에서 찍어내 KS마크 심사를 통과해야 했다고. “숭례문 복구단장을 맡으며 느꼈던 점인데요. 문화재 복원 역시 산업의 역사와 궤를 같이합니다. 능률과 효율성을 중시했던 거죠. 그래서 모든 것이 공업화, 표준화됐습니다. 사실 문화재는 그렇게 표준화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말입니다. 앞으로 조상들의 생각을 헤아려 우리 문화재를 문화재답게, 그 근본으로 돌아가 진정성을 회복하는 데 힘을 쏟겠습니다.” 이런 환경 가운데 우리 문화재의 연구, 조사, 개발 등 문화유산과 관련된 종합 연구를 수행하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역할이 막중하다. 최 소장은 임기 내내 문화재 보존의 올바른 방향성을 정립하는 일에 온 힘을 다하겠다며 각오를 다졌다. ▲ 최 소장은 '문화재는 우리의 정체성이자 옛 문화를 볼 수 있는 창과 같습니다. 공간의 역사성과 시간적 깊이를 더해주며 우리의 생활을 더 풍요롭게 해주고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라고 말한다. 잊을 수 없는 창덕궁과 숭례문 문화재청 여러 부서를 거치며 창덕궁관리소장, 숭례문 복구단 단장, 문화재보존국장, 문화재정책국장, 국립고궁박물관 관장 등을 역임한 최종덕 소장은 그 어느 일 하나 보람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회고했다. 그래도 굳이 하나를 꼽자면 2005년부터 2006년까지 창덕궁관리소장으로 일하던 때를 잊을 수 없다. 마침 창덕궁 창건 (1405년) 600년을 맞은 역사적인 해에 소장직을 맡았다. “당시 창건 600주년을 기념하며 어가행렬 재현 등 다양한 행사를 열고, 기념 책자 발간과 함께 ‘세계의 궁궐과 창덕궁-21세기 고궁의 보존과 활용’이라는 주제로 국제 학술대회도 개최했습니다. 그래서 더 보람이 컸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2년 정도 창덕궁에서 거주하는 특별한 경험도 했다. 명분은 관리·감독 강화였지만, 궁궐 생활이 어찌 아무나 경험해 볼 수 있는 일이겠는가. “CCTV도 없던 시절이라 한밤에도 경내를 홀로 순찰하곤 했습니다. 창덕궁은 사계절마다 독특한 매력을 지닌 곳입니다. 정자, 돌, 나무, 조형물 등 옛사람들의 흔적도 많이 느낄 수 있고요.” 특히 낙선재와 연경당, 부용정 일대를 좋아한다는 최종덕 소장에게 창덕궁은 언제나 평온하게 마음을 쉬일 수 있는 그런 곳이다. 그런가 하면 숭례문은 문화재 보존에 대한 철학을 다시 한번 숙고할 수 있게 한 따끔한 교훈의 장이다. 2008년 화재로 소실된 후 5년간 숭례문 복구 작업을 진행했을 때 그는 복구단 단장을 맡았다. 당시 복구 작업은 국민적 관심의 대상이었던 만큼 관계 기관 모두 의욕적으로 진행했다. 그러나 단청 박락 현상이 일어나 부실 복구라는 불명예는 물론이고, 러시아산 소나무 논란 등 온갖 헛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최종덕 소장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가감 없이 <숭례문 세우기-숭례문 복구단장 5년의 현장 기록>이라는 책으로 엮었다. 책이 출간된 후 직위 해제를 당하기도 했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복구단장을 맡으며 매일 기록을 남겼습니다. 한국전쟁 때 훼손돼 1960년대에 대규모 수리작업이 있었지만 아주 간단한 수리 보고서만 있어 복구 작업을 하면서 아쉬운 점이 많았습니다. 복구 작업은 과거와 끊임없이 대화하는 작업입니다. 그런데 기록이 없으면 과거로부터 대답을 들을 수 없는 거죠. 후대를 위해 어떤 생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그러한 결정을 하게 됐는지 반드시 기록을 남겨야 합니다. 그리고 세금을 낸 국민들에게 보고하는 것은 공무원으로서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최종덕 소장은 오로지 후대에게 문화재 복원·복구의 본보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자랑하고픈 공적뿐 아니라 숨기고 싶은 과실까지 세세히 책에 담았다. 그는 “조선시대만 해도 국가적인 행사는 항상 의궤를 작성해 기록을 남기는 전통이 있었다”며 “그러한 좋은 전통은 다시 되살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책 한 권이 인도한 문화재 사랑 최종덕 소장은 숭례문 복구 작업에 대한 책뿐 아니라 <조선의 참 궁궐 창덕궁> 등 창덕궁에 대한 책도 여러 권 출간했다. 학창 시절 일기도 쓰기 싫어했다는 그는 글쓰기와는 담을 쌓고 살았던 학생이었다. 그러던 그가 어떻게 책을 쓰게 된 것일까. 그 사정에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부추김 아닌 부추김이 있었다. 창덕궁관리소장으로 근무할 당시 유홍준 전 청장은 창덕궁에 대한 책을 써보는 게 어떻겠냐며 넌지시 제안했다. 그러더니 만날 때마다 원고의 진행 상황을 점검하는 것이 아닌가. 고집스러운 추궁에 결국 최 소장은 책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책을 통해 대중에게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을 알리는 것이 얼마나 보람된 일인지 잘 알고 있다. 사실 최종덕 소장이 문화재와 관련된 일을 하게 된 것도 유홍준 전 청장의 힘이 컸다. 건축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여느 건축학도들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건물을 올리는 건축가를 선망했다. 대학 시절만 해도 문화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유일하게 문화재와 관련된 건축사 수업에서 D학점을 받은 적도 있어 나중에 문화재와 관련된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대학 졸업 후 5급 공채 기술직(기술고시)에 합격해 당시 건설부에서 사무관으로 일하던 중 유홍준 전 청장이 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책을 읽고 문화재와 관련된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문화재관리국으로 보직 변경을 신청했습니다. 주위에선 작은 부처로 옮기면 출셋길 막힌다고 말렸었죠.”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재미와 보람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그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남들이 좋아하는 것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문화재관리국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는 미국 오리건대학교에서 역사보존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는 등 문화재에 대한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문화재와 관련된 일을 하며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조금 더 일찍 관심을 갖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일상에 공간의 역사성과 시간의 깊이를 더하다 최종덕 소장은 다소 우회하긴 했지만 기꺼이 열정을 쏟을 대상을 찾았기에 후회 없이 30여 년의 공직 생활에 신명을 다했다. 하지만 조금 더 일찍 길을 걷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크다. “당시 정국이 어수선하기도 했지만 솔직히 말해 대학 생활을 성실하게 보내지는 못했습니다. 군대를 다녀온 후 뒤늦게 철이 들었죠. 그래서 후배들에게는 최대한 대학 생활에 열심히 몰입하라고 조언해주고 싶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길을 좀 더 일찍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최 소장은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으로서 문화재 사랑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문화재는 우리의 정체성이자 옛 문화를 볼 수 있는 창과 같습니다. 우리의 일상적 공간을 아파트가 차지하면서 옛 흔적들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문화재는 공간의 역사성과 시간적 깊이를 더해주며 우리의 생활을 더 풍요롭게 해주고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그 가치를 보존하는 일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주길 부탁합니다.” 사랑한대 2018년 05-06월호 이북 보기

2018-05 31

[동문][도전#해시태그]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는 블랙루비스튜디오

11세기에 발간된 <보석의 서>라는 책에서는 루비를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보석이라고 표현했다. 블랙루비스튜디오라는 이름은 이러한 전설에서 따왔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블랙루비처럼 독특한 자신만의 색을 어디서든 발현하고 싶다는 뜻이다. 글. 이주비(학생기자) 사진. 안홍범 ▲ 소재우 블랙루비스튜디오 대표(융합전자공학 12) 게임이 좋아서 게임을 만들다 2016년에 문을 연 블랙루비스튜디오의 첫 도전 작품은 바로 게임. 소재우 대표는 중학교 때부터 게임을 취미 삼아 만들어왔다. “한창 게임을 만들 때 저는 집단지성에 꽂혀 있었어요. 게임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좋아서 하는 거잖아요.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의 생각이 모여 무언가가 이뤄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1년 동안 본격적으로 게임 제작 공부를 했어요.” 게임을 통한 집단지성은 어떻게 이뤄지는 것일까. 일례로 생물학 난제를 해결해서 과학지 <네이처>에 실린 게임도 있다. 게임 유저가 푸는 퍼즐이 생물학 난제였는데, 개인의 힘으로는 풀 수 없었던 문제를 몇 만 명 유저의 협력으로 금방 풀어버린 것. 소 대표는 집단지성과 자발적 참여를 동시에 유도하는 데 게임만큼 좋은 매체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높았다. “재미있는 게임 하나를 만들기도 어려운데 집단지성까지 접목하는 게 만만치 않았어요. 게임을 통해 사람들의 행동을 집단지성으로 활용하려면 행동 패턴까지 다 분석해야 했으니까요. 게임의 성공과 치밀한 설계를 모두 달성하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가 집단지성에 관심을 둔 것은 스타트업의 현실적인 한계를 고려한 결과였다. 인력, 시간, 자본 등 모든 면에서 제한적인 스타트업에서는 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그러나 집단지성을 이용하면 달랐다. 게임에 참여하는 이들을 통해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자동화 시스템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두려움을 이겨낸 즐거움 인생에 쉬운 길은 없다지만, 특히 창업은 많은 위험 요소와 큰 부담을 안고 가야 하기 때문에 선뜻 발을 떼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재우 대표가 재학 중 창업에 도전한 가장 큰 이유는 워라밸(Work & Life Balance), 즉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제가 좋아하는 개발을 일로 삼으면서 한편으론 즐기고 싶었어요. 평범한 직장인에게 직업은 그저 일일뿐인 경우가 많잖아요? 전 지금 제가 하는 일이 아주 재미있어요.” 창업 과정에서 어려운 점은 없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너무 많아 무엇부터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아이템을 선정하고 팀원을 구하는 것부터 매출에 대한 고민까지 직접 기업을 운영하기 위해선 신경 써야 할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건 마음에 맞는 팀원을 구하는 일이었다. 창업 초반엔 팀원 변동이 잦았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작년에 핵심 멤버가 고정됐고, 현재는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파트너를 구하기까지 소재우 대표가 내건 조건은 딱 두 가지였다. “장난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첫 번째 조건은 내일부터 당장 출근하는 거예요.(웃음) 정말 중요한 조건이죠. 두 번째는 배움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 스타트업은 아무래도 업무와 상황이 계속 변하니까 끊임없이 공부하는 게 중요해요.” 파트너를 구했다 하더라도 창업까지는 첩첩산중. 다행히 학교의 도움이 있었다. 교내에는 다양한 창업 프로그램들이 있는데 이를 통해 창업을 꿈꾸는 이들은 조언과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소재우 대표도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지금의 블랙루비스튜디오를 만들었다. 블랙루비스튜디오를 움직이는 엔진 여러 게임과 애플리케이션을 만들면서 현실적인 한계에 직면한 소재우 대표는 시스템의 핵심 기반인 엔진부터 만들어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현재는 엔진이 어느 정도 구축되면서 이를 토대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게 됐다. 엔진은 시스템을 갖추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블랙루비스튜디오는 엔진을 토대로 20여 가지의 파생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서비스를 선별하는 기준은 자동화 가능 여부다. 스타트업의 인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동화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블랙루비스튜디오의 주요 서비스로 꼽히는 파인드빅파이브(Findbig5)도 같은 맥락에서 탄생했다. 이 서비스는 전 세계 30여 개의 언론사에서 IT 정보를 실시간으로 수집한 다음 주요 이슈를 선별해 고객에게 제공한다. 물론 모든 과정은 자동화로 이뤄진다. 여기서 빅파이브(Big5)는 페이스북,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아마존의 다섯 개 IT 기업을 의미한다. 이 기업들은 나스닥(NASDAQ)의 40%를 차지한다. 다섯 기업의 영향력과 지위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올 3월에 출시했으니 앞으로 더 지켜봐야겠지만, 대부분의 고객은 정보가 많이 필요한 직업군에 계신 분들입니다. 리서치나 컨설팅 분야, 혹은 국내 IT 소식보다는 해외 IT 뉴스가 필요하신 분들이죠.” 지난해 12월 블랙루비스튜디오는 아이크래프트로 인수됐다. 업계에선 성공적인 인수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인수 전후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크래프트 관계자와 정기적으로 미팅을 하는데, 많은 조언을 얻습니다. 사업 체계를 잡는 데 도움을 받고 있어 저와 팀원들은 아이디어와 개발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됐죠.” ▲ 소재우 대표가 개발한 북극을 배경으로 한 3D 퍼즐 게임 Arctic Episode ▲ 소재우 대표가 개발한 북극을 배경으로 한 3D 퍼즐 게임 Arctic Episode 함께여서 더욱 빛난다 블랙루비스튜디오는 자신만의 길을 만들며 묵묵히 걸어왔다. 그렇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다. “당장은 기술적인 부분에 집중하기보다는 새로운 것들을 접하고 공부하길 좋아하는 팀원들을 많이 뽑고 싶어요.” 그는 인터뷰 내내 팀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어느덧 창업 3년 차. 사업을 위해 잠시 휴학 중인 그에게 예비 창업자들을 위한 조언을 구했다. “팀원을 구하기 어려울 때는 학교 안에서 찾아보세요. 생각보다 쉽고 빠르게 만날 수 있어요. 사람은 완벽하지 못한 존재잖아요. 팀원이 한 명이라도 더 늘면 제가 보지 못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고,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넓어지는 것 같아요. 제가 못하는 걸 팀원들이 보완해줄 수 있죠.” 블랙루비스튜디오의 강점 역시 팀원들이다. 소재우 대표는 새로운 걸 배우는 데 두려워하지 않는 팀원들이 곧 회사의 경쟁력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블랙루비스튜디오 구성원들은 업무 외에도 다양한 분야의 스터디를 함께 진행하며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블랙루비스튜디오의 궁극적인 목표는 기술의 생활화다. 소재우 대표는 누구나 알 만한 기술개발 서비스를 만들고 싶다고 밝혔다. 아울러 원하는 일을 하면서 재미있게 일할 수 있는 회사를 꿈꾼다. 실제로 팀원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의견을 내고 회사의 정식 업무 외에 사이드 프로젝트도 진행할 수 있다. 구성원들이 자신의 일을 좋아하고 회사에 애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소재우 대표에게는 세 가지 취미가 있다. 게임, 개발, 독서가 그것이다. 그런데 요즘 그중 하나가 탈락 위기에 놓였다. “게임 개발 프로젝트를 엎고 나서 게임에 대한 흥미가 전보다 줄었어요(웃음). 만약 개발을 놓아버리면 제 삶이 팍팍해질 거예요. 취미를 더 잃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남은 두 가지를 정말 잘해야 해요.” 흔히들 취미와 직업은 따로 두라고 한다. 취미는 회사 밖에서 즐겨야 한다지만, 소재우 대표는 여전히 일터에서 재미를 찾는다. 그리고 좋아하는 일, 재미있는 일을 그 누구보다 잘할 수 있게 될 때까지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 소 대표는 '제가 좋아하는 개발을 일로 삼으면서 한편으론 즐기고 싶었어요. 평범한 직장인에게 직업은 그저 일일뿐인 경우가 많잖아요? 전 지금 제가 하는 일이 아주 재미있어요.' 라고 말한다. 사랑한대 2018년 05-06월호 이북 보기

2018-05 31

[교수][스페셜토크] 전기기기 연구 분야의 명실상부 ‘톱클래스’

지난 3월에 열린 ‘2018학년도 연구실적 우수교원 시상식’에서 이주 교수가 공학 부문 HYU학술상을 받았다. ‘에너지변환연구실’을 운영하며 전기기기 설계 및 제어 분야를 이끌어온 공로를 인정받은 것. 이주 교수와 함께 연구실 식구들인 정동훈 학생(전기공학과 박사 5기)과 임종석 학생(전기공학과 박사 4기) 이 수상의 기쁨을 나누는 자리에 <사랑한대>가 함께했다. 글. 박영임 사진. 안홍범 ▲ 이주 전기·생체공학부 교수 한양대학교 최대 규모의 연구실 21년 동안 박사만 64명. 한양대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에너지변환연구실에서 배출한 박사의 수다. 이 중 22명은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으며, 20여 명은 국책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현재 연구실에 소속된 대학원생 수도 60명에 이른다. “에너지변환연구실은 인력, 연구비, 연구 실적 등 모든 면에서 우수한 성과를 자랑하는 한양대 최고의 연구실입니다.” 공학 부문 HYU학술상을 수상한 이주 교수에게 수상 소감을 청하자 연구실에 대한 자긍심 넘치는 멘트로 소감을 대신한다. 어쩌면 우문현답. 최고의 연구실을 이끌고 있기에 자연스럽게 HYU학술상을 수상하게 된 것이 아닐까. 이주 교수는 그동안 잘 따라준 학생들에게 모든 공을 돌리며, “엔지니어링은 무엇보다 팀워크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연구실을 소개하는 인터넷 홈페이지에도 훌륭한 연구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서로 존중하며 지식을 넓혀갈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는 이주 교수의 지론이 담겨 있다. “연구실 운영 시 융화와 배려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좋은 연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사회정의에도 맞지 않습니다.” 전기기기 설계와 제어, 모두 가능한 융합 인재 양성 이주 교수가 운영하는 에너지변환연구실은 에너지 변환 기기의 전자계 해석을 기반으로 기기 설계 및 개발과 제어에 대한 연구를 중점적으로 한다. 구체적으로는 철도 차량, 가전기기, 견인용 전동기, 자동차용 전장품, 다자 유도 구동 시스템 같은 다양한 전기기기를 설계하고 제어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전기기기 분야에서는 설계 연구나 제어 연구 중 한 분야만 진행하기도 쉽지 않은 일. 그런데 이주 교수는 설계 연구 및 제어 연구를 결합해 전기기기 해석과 설계, 제어가 모두 가능한 인재 육성을 연구실의 목표로 삼고 있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 그러나 가야 할 길을 걷는 것이 이주 교수가 연구자로서 고집하는 사명감이기 때문이다. 혹시 기기 설계와 제어 연구를 융합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평소 궁금증을 갖고 있던 정동훈 학생이 이주 교수에게 물었다. 정동훈학생 : 전기기기 설계만 연구하기에도 분야가 광범위한데 어떻게 설계와 제어의 융복합 연구를 결심하셨나요? 이 교수 : 전기기기 연구 분야를 선도하겠다는 욕심으로 남들보다 목표를 높게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시대와 기술의 변화에 따라 당연히 두 분야를 융합해야 합니다. 과거에는 수기로 계산해야 했으니 설계 연구만 해도 할 일이 많았지만 이제는 컴퓨터로 계산하는데 제어를 모르고 설계만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하지만 두 분야를 융합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고 그동안의 심경을 토로하는 이주 교수. 기기 설계와 제어 분야의 융합을 위해 그는 남들보다 몇 배로 땀을 흘려야 했다. 최근 3년간 SCI(Science Citation Index, 과학기술 논문 인용 색인)급 저널에 발표한 논문 수만 42편. 특허등록 13건(프로그램 등록 2건), 기술이전 1건의 연구개발 실적도 보유하고 있다. 이 중 <IEEE 트랜잭션 온 마그네틱스(IEEE Transactions on Magnetics)>에 발표한 ‘3D 프린팅 기술을 적용한 하이엔드 동기형 릴럭턴스 전동기 설계’에 대한 연구는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 중 하나인 3D 프린팅 기술을 전동기에 접목한 세계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릴럭턴스 전동기는 유도기를 대체해 산업 분야에 적용하기 위해 활발히 연구하고 있는 기기를 말한다. 이주 교수 연구팀은 기존에 갖고 있던 형상의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해 전동기 방식에 3D 프린팅 기술을 접목시켜 출력 밀도를 향상시켰다. 또한 전기·전자 분야의 최고 저널인 <IEEE 트랜잭션 온 인더스트리얼 일렉트로닉스(IEEE Transactions on Industrial Electronics)>에 게재된 ‘공정 손실을 고려한 IE4급(International Efficiency, 국제 에너지 효율 등급) 라인기동식 동기형 릴럭턴스 전동기 최적 설계’에 대한 연구는 IE4급 라인기동식 동기형 릴럭턴스 전동기의 공정 손실을 줄이기 위한 것으로, 추가적인 유한 요소 해석 기법을 개발해 해석의 정확도를 높였다. 이는 자석을 쓰지 않거나 저렴한 자석을 사용해 고효율 전동기를 제작하는 비희토류 전동기의 연구개발 사례다. ▲ 이 교수는 '저희 연구실에서 배출한 인재들이 대기업, 연구소, 대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전기기기 분야의 각 부문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며 우리나라 전기기기 분야의 기술 수준을 한 단계 도약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자신합니다.' 라고 말한다. 우수한 연구는 열정적인 강의로부터 “저희 연구실에서 배출한 인재들이 대기업, 연구소, 대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전기기기 분야의 각 부문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며 우리나라 전기기기 분야의 기술 수준을 한 단계 도약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자신합니다.” 이주 교수에게 에너지변환연구실을 통해 배출된 인재들은 그 어떤 상패와도 바꿀 수 없는 영광스러운 훈장이다. 교수의 본분은 사회에 꼭 필요한 우수한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훌륭한 연구 성과는 학부 강의에서 시작된다고 강조했다. 누군가는 연구자와 교육자의 역할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이주 교수는 우수한 연구 성과의 비결은 연구자 이전에 교수로서 인재 양성에 힘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학부 강의에서 학생들을 열정적으로 가르치면 그것이 선순환을 이루며 연구 성과로 이어집니다. 강의를 들은 우수한 인재들이 연구실에 많이 지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강의 우수 교수상을 네 번 받았는데 교수로서는 이 상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도 제자들이 원하는 곳에 취직해 원하는 연구를 계속 이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때다. 교수로서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냐고 말하는 이주 교수. 제자들에 대한 그의 지극한 애정을 익히 알고 있는 임종석 학생이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없는지 물었다. 임종석 학생 : 교수님으로서, 인생 선배로서 학교생활에 대한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이 교수 : 나이가 드니까 추억을 먹고 산다는 의미를 알겠습니다. 학생의 본분인 공부는 말할 것도 없고 여행도 많이 다니고 좋은 친구들도 사귀고 토론도 열심히 하면서 좋은 추억을 많이 쌓으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운 추억이 많을수록 인생이 풍부해지는 법이거든요. 이주 교수 또한 제자들과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기 위해 해마다 연구실 학생들과 스키장에 가는가 하면 등산, 축구, 래프팅 등 다양한 행사를 기획해 즐거운 시간을 함께하고 있다. 출판은 교육자로서 마지막 소명 이주 교수는 3년 전부터 ‘영구 자석 전동기 설계 제어’에 대한 책을 출간하기 위해 원고를 집필하는 중이다. 이미 2011년, 전기기기에 대한 책을 펴냈는데 많은 학교에서 교재로 사용하면서 전기기기 분야의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했다. “현재 진행 중인 작업을 마치면 연구실에서 배출된 우수한 논문들을 잘 정리해 책으로 발간하고 싶습니다.” 한 분야에 대한 지식을 집대성하는 작업도 후학을 양성하는 데 꼭 필요한 일임을 깨달았다는 이주 교수. 제자들 그리고 동일 분야의 인재들이 참고할 만한 책을 남기는 것, 이주 교수가 그리는 교육자로서의 마지막 과업이다. 사랑한대 2018년 05-06월호 이북 보기

2018-05 31

[동문][사랑나눔+Ⅰ] 홈런왕 헐크 라오스에 야구를 심다

맨발의 아이들이 야구단 모집 공고를 보고 찾아왔다. 사정이 나은 아이는 다 떨어져 가는 신발이나 폐타이어를 잘라 만든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테스트 삼아 야구공을 던져줬더니 작은 축구공인 줄 알고 발로 받았다. 이랬던 아이들이 5년이 지난 지금 2018 아시안게임을 준비 중이다. 야구 불모지 라오스에서 이만수 감독이 일군 기적이다. 글. 전수아 사진. 안홍범 ▲ 이만수 라오J브라더스 구단주(체육학 78) 야구보다 물과 빵을 찾아온 아이들 2014년, 이만수 감독이 라오스 땅을 밟기 전까지 그 나라에는 야구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야구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던 아이들이 야구를 배우겠다며 찾아온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처음 만난 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더니 ‘하루 세끼 먹는 것’이라더군요. 야구단에 지원한 아이들 중에는 물과 빵을 준다는 이야기에 솔깃해서 온 아이도 많았지요.” 먹고 살기도 어려운 와중에 야구를 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던 이만수 감독은 어렸을 적 그가 야구를 처음 배우던 때를 떠올렸다. 라오스의 아이들처럼 야구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친구를 따라 야구팀에 들어갔다. 다들 하루 살기도 빠듯한 형편에 야구 장비를 마련할 길은 자급자족뿐. 신문지나 스케치북의 도톰한 표지를 뜯어서 글러브를 만들고 공사장에서 각목을 얻어와 배트 대신 휘둘렀다. 기부받은 야구공은 실밥이 다 터져 선수들이 각자 기워서 썼다. 지금의 야구 인프라와 비교하면 천지 차이다. 그런 환경에서 야구를 했어도 얼마나 즐거웠는지, 어떤 꿈을 꿀 수 있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이만수 감독은 두려움 없이 아이들의 손을 잡았다. 열 번 찍혀 라오스로 넘어간 헐크 그런데 왜 라오스였을까? “2013년 가을에 이메일 한 통을 받았습니다. 라오스에 거주하는 한국인인데 이곳에 와서 야구를 가르쳐 줄 수 없느냐는 거예요. 전혀 일면식도 없던 분이고, 게다가 SK와이번스 감독으로 한창 바쁠 때라 대답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메일이 한 달 동안 계속 오더군요.” 이야기라도 들어보자 싶어 이만수 감독은 전화를 걸어 왜 라오스에서 야구를 하려는 것이냐고 물었다. 돌아온 답은 야구 불모지 라오스에 한국 최고의 인기 스포츠인 야구를 전파하고 싶다는 것. 이 감독은 시간 될 때 가보겠노라며 통화를 마쳤다. 이는 사실 완곡한 거절의 표현이었다. 문제는 듣는 이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후 틈만 나면 라오스에서 전화가 왔다. 언제 오실 수 있느냐며 애타게 기다리는 그에게 2014년 봄에는 사비를 털어 1,000만 원 상당의 야구 장비를 보내주었다. 프로팀에서 처분하려고 내놓은 장비 중에서 쓸 만한 것을 골라 보내주기도 했다. 얼마 후 라오스에서 사진을 몇 장 보내왔다. 사진 속에는 어디서 모았는지 몇 명의 아이들이 SK와이번스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유니폼 소매며 바짓단을 둘둘 접어 입은 아이들의 모습에서 어렸을 적 도움을 받았던 기억이 난 이만수 감독. 그렇게 슬슬 라오스 쪽으로 마음이 기울던 차, 감독직을 사퇴하게 된 이 감독은 결국 라오스로 향했다. 그리고 이 감독을 끈기 있게 찾은 그 교포와 함께 ‘라오J브라더스’라는 야구단을 만들었다. 진심이 통하기까지 절대 깨지지 않을 한국 야구 프로야구사 최초의 기록을 쓴 사나이, 홈런왕 헐크, 이 화려한 수식어에 걸맞게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이만수 감독. 그의 전성기를 기억하는 팬들은 언제 어디서든 그를 환영했다. 그런데 라오J브라더스를 맡고 나서는 상황이 변했다. “야구단을 운영하려면 필요한 게 많습니다. 제가 가진 것을 보태는 것으로는 역부족이어서, 감독 겸 구단주직을 맡아 직접 후원 유치에 나섰지요. 우선은 저를 좋아해주시던 분들을 찾아갔는데, 그때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거절이란 걸 배웠어요.” 라오J브라더스 얘기를 꺼내는 순간 느껴지는 급격한 온도 차에 당황스러웠던 것도 잠시, 다른 분을 찾아가면 잘 들어주시겠거니 하며 희망을 품었던 그는 연이은 거절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거절은 라오스에서도 이어졌다. 지원을 받기 위해 지자체와 정부 기관의 문을 두드려 봤지만 거의 2년간 문전박대만 당했다. 한편에서는 이만수 감독의 도전을 두고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겠느냐는 반응도 보였다. 희망과 도움을 주는 이보다 거절과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더 많았던 때. 그래도 이만수 감독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최선을 다했다. 라오스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벽지를 돌며 아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쳤고, 강연 활동이나 광고를 찍고 얻은 수입을 라오J브라더스 살림에 보탰다. “몇 달 지나니까 제 진심이 조금씩 통하더군요. 언론에도 라오J브라더스가 소개되면서 전국에서 십시일반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셨습니다. 야구 장비와 후원금이 모이기 시작했죠.” 라오스 정부에서도 관심과 도움을 보내주었다. 행정적인 지원과 함께 국제 대회에 참가할 수 있도록 야구협회와 야구연맹을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해준 것. 또한 야구로 아이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준 공로를 인정해 이만수 감독에게 2016년에는 총리상을, 올해 초에는 대통령상을 수여했다. 아이들과 함께 꾸는 꿈 라오J브라더스도 이제 5년 차. 이만수 감독은 많은 분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전한다. 훈련장도 서울시설공단에서 재능기부로 지어주었다. 2년 전에는 국제교류재단 초청으로 라오스 아이들이 부산에 오기도 했다. 비행기를 처음 타고 부산에 온 아이들은 야구 경기를 관람하고 한국 문화를 체험했다. 매일매일 신나는 경험을 한 아이들은 마지막 날에는 집에 가기 싫다며 펑펑 울었다고. 그런 아이들을 겨우 달래 라오스로 돌아간 후, 그는 아이들에게 다시 물었다. “너희들은 꿈이 뭐니?” 큰 기대 없이 던진 질문에 아이들은 놀라운 대답을 들려주었다. “한 아이는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싶다고 하고, 다른 아이는 라오스가 의료 환경이 열악하니 의사가 되어 아파도 참고 사는 친구들을 도와주고 싶다더군요. 비로소 꿈이 생긴 아이들을 보면서 뿌듯한 마음이 드는 한편 괘씸한 거예요. 기껏 가르쳐 놨더니 야구하겠다는 애는 없냐고 볼멘소리를 했더니 두 아이가 야구 열심히 해서 한국에서 뛰겠다기에 그래 잘해보자 했지요.” 하루 세끼 챙겨 먹는 게 꿈이던 아이들에게 새로운 꿈이 생겼다. 야구를 하면서 노력과 성장의 기쁨을 맛본 덕분이다. 오늘도 열심히 훈련 중인 아이들은 오는 6월 화성시 초청으로 진행될 미니캠프에 참가할 계획이다. 캠프 후에는 라오스 국가대표를 꾸려 2018 아시안게임에 출전한다. 실력으로 따지면 아시안게임에 참가할 다른 팀에 한참 못 미치지만 설령 어마어마한 점수 차로 지더라도 상관없다는 이만수 감독. 큰 무대에 서고, 월등히 뛰어난 상대와 겨뤄보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배우고 성장한 아이들 중에 야구 지도자가 탄생하고, 그리하여 아직은 계획 중인 라오스 최초의 야구장에서 야구 리그를 여는 것. 야구인 이만수의 새로운 꿈이다. 사랑한대 2018년 05-06월호 이북 보기

2018-05 23 중요기사

[동문]여행 사진작가 이정현(영미언어문화학과 09) 동문

이정현 작가의 세계 여행 사진전 <ESSE>가 지난 4월 15일 막을 내렸다. 해방촌에서 첫 사진전을 가진 뒤 두 번째 전시다. 29살에 7만 원으로 세계여행을 나서 여행 작가로 돌아온 이정현(영미언어문화학과 09) 동문을 만났다. 지난 20일 일요일, 남대문 근처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모교에서 온 연락이라 더 반갑다며 밝게 웃는 이정현(영미언어문화학과 09) 동문. 이 씨는 23살에 중국에서 다니던 대학교를 자퇴하고, 한국에 와 한양대 ERICA캠퍼스에 편입했다. 생활비 때문에 영어 강사 일을 시작한 그는 경제적인 여유를 경험했다. 하지만 개인 사정으로 인해 대부분의 돈을 잃었고, 군 전역 후에는 고작 150만 원이 그가 가진 전부였다. “5년 동안 일해서 번 돈을 갑자기 잃고 자괴감이 들었어요. 영어강사로 번 돈을 잃은 거니 영어강사도 하고 싶지 않았고요.” 이 씨는 '도피처'로 여행을 생각했다. 이정현 동문의 세계여행 사진전 <ESSE>에 실린 작품들. (이정현 동문 제공) 첫 여행지였던 중국의 비자 발급비와 비행기 값을 빼니 이 씨에게 남은 것은 고작 7만원과 손에 쥔 카메라가 전부였다. 사실 이 씨는 군 생활 내내 사진병보다 자주 촬영 현장에 불릴 만큼 사진에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제대 후에도 이 씨는 사진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처음 1년은 여행을 하며 만난 사람들의 사진을 무료로 찍어 줬다. 돈에서 자유로워지겠다는 그의 각오 때문이다. 대신 사람들은 고마운 마음에 십시일반으로 그를 후원했다. 그렇게 여행 동안 받은 후원금만 1500만 원이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는 유스호스텔 스태프로 일하면서 손님들의 사진을 찍고, 인화해 주는 작업을 했다. 그가 찍어준 스냅사진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며 이 씨는 확신했다. “돈 때문에 영어 강사를 했는데 돈보다 좋아하는 게 생기면 그게 진짜 좋아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돈이 아닌 인생의 본질이 무엇일까를 고민했고요.” 고민 끝에 이 씨는 잘하고, 좋아하는 일로 남을 행복하게 하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결국 자신이 고민했던 인생의 본질을 찾은 것이다. 이정현 동문은 자신이 찍어준 사진에 기뻐하는 여행객들의 얼굴을 보고 다짐한다. (이정현 동문 제공) 그렇게 이 씨는 자신의 이름을 건 전시회까지 열었다. 그는 왜 전시 제목을 ‘ESSE’로 정했을까? ESSE는 영어 단어 Essence의 어원이다. 라틴어로 ‘존재’라는 뜻이다. “소유하지 말고 존재하라는 뜻이 담겨있어요. 결국 무소유, 집착하지 않는 삶이죠.” 이 씨는 요즘 웨딩 저널리즘 사진을 찍고 있다. 저널리즘 사진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찍는 사진이다. 사진가의 지시에 따라 찍는 콘셉트 사진과는 반대다. “저널리즘 사진은 피사체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사진이에요. 전시회도 그렇지만, 이야기가 많이 담긴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여행 작가로서의 삶도 여전하다. 이 씨는 다음 프로젝트인 ‘한국을 걷다’를 계획 중이다.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아름다운 한국의 지역을 한 달에 한 번씩 출사하는 내용이다. “사진을 찍을 때 프레임 안에 꼭 넣어야 할 것만 담아요. 인생도 같은 맥락이에요.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목표가 있어야 하죠.” 도피로 시작한 654일간의 여행은 그에게 삶의 목적을 알려줬다. 아직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사진작가로서 그의 여행은 이제 막 반점을 찍었다. 글/ 옥유경 기자 halo1003@hanyang.ac.kr 사진/ 강초현 기자 guschrkd@hanyang.ac.kr

2018-05 21 중요기사

[동문]세계 무대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

“성악은 마라톤보다 더 마라톤처럼 길게 봐야 해요.” 테너 신상근 동문(성악과 94) 은 지침 없이 긴 '마라톤'을 달려왔다. 국내 국립오페라단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독일, 그리고 최근 뉴욕으로까지 진출한 신 동문은 국제 무대를 자유롭게 누볐다. 그리고 지난 달 23일, 신 동문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이하 뉴욕 메트)에 정식 데뷔했다.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을 통해 데뷔한 신 동문은 동양인으로서 처음으로 주역인 로미오역을 맡게 됐다. 무겁지만 영광스러운 자리 지난달 23일 뉴욕 메트에서 신 동문은 4000여명의 관객 앞에서 열창했다. “재미있게 하려고 노력했어요. 관객들의 뜨거운 환호 속에 끝낸 영광스러운 무대였습니다.” 베이스 연광철 씨, 베이스바리톤 차정철 씨도 신 동문과 함께 한인 성악가로 무대에 올랐다. 동양인으로서 처음 로미오역을 맡게 된 것은 의미가 크다. 전례에 없던 일일 뿐더러 메트 무대가 동양인에게 인색하기 때문이다. “열명 중에 동양인이 둘만 돼도 ‘왜 이렇게 많냐’는 얘기가 나와요. 아직까지 동양인이 무대에 올라가는 비율은 많지 않아요.” 뉴욕 메트 또한 처음에는 비슷한 반응을 내보였다. 뉴욕 메트의 스태프들은 모두 신 동문을 추천했지만, 극장장은 조금 더 유명한 백인 테너를 캐스팅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역 자리에 당당히 오른 신 동문을 향한 객석과 현지 언론의 반응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지난 달 23일 테너 신상근 동문(성악과 94) 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데뷔를 했다. '로미오와 줄리엣' 작품에서 주인공 로미오 역을 맡았다. 사진은 에일린 페리즈(줄리엣 역) 과의 호흡을 맞추는 모습. (신상근 동문 제공) 국제 무대의 베테랑 뉴욕 메트의 서기까지의 과정은 길었다. 신 동문은 한양대를 졸업한 뒤 밀라노 라스칼라 아카데미(Accademia della Scala),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Mozarteum), 그리고 빈의 콘서바토리에서 공부를 했다. 그 후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무대에 섰고, 독일로 바로 넘어갔다. 독일에서는 도르트문트국립극장에서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로 데뷔를 했고, 뮌스터오페라하우스와 칼스루에 극장, 그리고 슈트트가르트국립극장에서 ‘리골레토’, ‘가면 무도회’, 그리고 ‘라트라비아타’ 등에 출연했다. ▲테너 신상근 동문(성악과 94) 가 독일 칼스루에 극장에서 활동 할 때 나왔던 '가면 무도회' 작품 포스터. (신상근 동문 제공) 주 무대가 유럽이었던 만큼 신 동문은 가족, 선배, 후배, 그리고 동기들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았다. “외국에서 혼자 무대를 하게 되면 많이 외로워요. 이번 뉴욕 메트에서는 운이 좋게도 한국인 성악가가 3명이나 있어서 같이 밥을 먹거나 얘기했지만, 유럽에서는 아니었어요. 한국에서 공연 후 먹던 치맥이 그리웠어요.” 외로움을 달래준 것은 관객들의 힘찬 박수세례였다. 주로 주역을 맡았던 신 동문은 커튼콜 때 항상 마지막으로 등장했다. “앞 차례보다 열정적으로 박수를 친 관객들에게 ‘뭔가를 주었구나’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독일 칼스루에 극장에서 하노버 극장으로 옮기기 전 마지막 공연을 했을 때, 극장장이 저를 향해 삼폐인과 함께 박수를 보냈어요. 그 때 관객들이 가지 말라고 했던 게 기억이 많이 남네요.” ▲테너 신상근 동문(성악과 94, 오른쪽)이 '까르멘'을 공연하는 모습. (신상근 동문 제공) 완성도에서 갈리는 성악 성악은 한끝 차이로 실력이 나뉜다고 한다. 신 동문에 의하면, 많은 한국인 성악가들의 기술은 완벽에 가깝지만, 국제 무대에 필요한 여러 요소들이 부족하다. “언어의 뉘앙스를 본인이 느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해요. 언어 공부에 시간을 많이 쏟아야 합니다. 문법이 맞느냐 보다는 노래를 들었을 때 그 나라 언어의 느낌을 잘 전달할 수 있어야 해요.” 신 동문은 현지 사람보다 더 현지 사람처럼 얘기할 줄 알아야 국제 무대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말했다. 국제 무대의 경험을 차곡차곡 쌓은 신 동문. 더욱 큰 무대를 꿈꾸기 보다, 질 높은 공연을 선사하고 싶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텍스트의 정확한 전달과 디테일에 신경을 쓰겠다는 말이다. 신 동문에게 성악이란 무엇이냐고 물었다. ‘잘 모르겠다’ 는 대답이 돌아왔다. “성악의 대가 프랑코 코렐리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말이에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모르니까 계속 찾아봐야겠죠?” ▲테너 신상근 동문(성악과 94) 의 프로필 사진. (신상근 동문 제공) 글/유혜정 기자 haejy95@hanyang.ac.kr

2018-05 14

[교수]“국경없이 어디로든, 과학기술을 필요로 하는 나라에 가는거죠.”

물이 부족한 아프리카 시골 마을. 이 마을에 사는 소년들은 생존을 위한 물을 긷느라 학교에 가지 못했다. 이 마을에 필요한 기술은 과연 현대사회의 스마트 기술일까? 이러한 질문에서 시작한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은 최근 국제개발과 구호의 화두다. 현지에서 적절하게 쓰일 수 있는 기술이라는 뜻 위에 '사람을 위한 가치'가 더해졌다. 국내에서 적정기술 개발과 보급에 국경없는 과학기술자회가 힘쓰고 있다. 우리대학 김용수 교수(원자력공학과)가 신임 회장으로 함께한다. 세상을 바꾸는 적정기술 지난 2009년 설립된 국경없는 과학기술자회는 가난한 지역사회에 방문해 과학기술로 문제해결을 돕는 국제교류단체다. 국경없는 과학기술자회가 집중하고 있는 곳은 개발도상국이다. 개발도상국의 현지 인프라 수준을 고려한‘적정기술’을 개발해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교육 봉사를 수행한다. 적정기술은 해당 지역의 문화적, 정치적, 환경적 상황을 고려해 지속적인 생산과 소비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기술이다. ▲ 지난 10일 교내 카페에서 김용수 교수(원자력공학과)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김 교수는 지난 4월 6일 국경없는 과학기술자회 회장으로 선출됐다. 지난달 6일 우리대학 김용수 교수(원자력공학과)가 국경없는 과학기술자회 제4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에너지가 부족한 지역에 풍력발전기를 개발해 세워주거나, 수급이 좋지 않은 지역에 정수기술을 통해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것. 김 교수가 생각하는 세상을 바꾸는 적정기술이다. 그는 고도의 과학이 개발도상국에 필요한 게 아니라고 설명한다. 각 지역의 수준에 따라 적정한 기술을 알려주고 기술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개개인의 삶의 현장에 맞춰야 지역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죠. 현지인들이 개개인의 삶의 질을 스스로 개선하게끔 하는 방향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을 바꾸고 있는 국경없는 과학기술자회. 김 교수는 신임 회장으로 큰 포부를 밝혔다. "기존 환경을 완전히 바꾸고자 합니다.” 현장중심의 봉사활동으로 직영을 더욱 넓히고, 각 단체와의 협력을 통해 더 큰 세상에 공헌하고자 한다. 우리대학에서 개최할 제9회 적정기술 국제 컨퍼런스에는 전 UN사무총장이었던 반기문을 초청해 기조 발언을 부탁했다. 또 앞으로 조직 개편을 통해 국경없는 과학기술자회가 더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우고있다. ▲ 적정기술 제품 중 잘 알려진 큐드럼(Q-drum). 큐드럼은 물을 긷기 위해 먼길을 다니는 아프리카 주민들의 고달픔을 해소했다. 이처럼 현지인에 맞춰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게 적정기술의 목표다. (출처: 큐드럼 홈페이지) 교내에서 캄보디아까지 그의 손길이 닿다 김 교수는 우리 대학 원자력공학과를 졸업하고 공과대학장까지 지낸 국내에서 명망 높은 원전해체 전문가다. 10년 전 자신이 가진 재능을 어떻게 활용할까 고민하던 김 교수는 적정기술을 접했다. 이에 매료된 김 교수는 전공을 살려 에너지 시스템구축 개발에 힘을 쏟았다.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던 과학기술자들이 모여서 힘을 합쳤죠. 필요에 따라 전공 이외의 공부까지 추가로 해야했어요.” 그렇게 시작한 나눔의 길. 그는 교내에 있던 사회봉사단을 '함께한대'로 분리해 운영하며 교내에 사랑의 실천을 알렸다. 지난 2015년, 김 교수와 함께한대는 캄보디아에서 공학교육 기반구축사업을 수행했다. 이번 7월에도 캄보디아에 갈 예정이다. “캄보디아 봉사를 함께한 학생들이 돌아와서 자체적으로 적정기술 동아리를 만들었어요. 우리 대학에 교수부터 학생까지 적정기술연구에 몰두하고 있다는 건 너무나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그는 앞으로도 교수와 학생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적정기술 문화를 유지 하고 싶다고 전했다. 그가 말하는 사랑의 실천 "우리 대학 학생들이 가진 얼이 있어요. 사랑의 실천을 이해하고 행하는 사람은 삶의 질이 다르다는 걸 꼭 알아뒀음 해요.” 김 교수는 우리 대학 학생들에게 사랑의 실천 정신을 거듭 강조했다. 자신이 국경없는 과학기술자회 회장이 된 것도 모두 사랑의 실천 덕분이라며 인터뷰 내내 모든 공헌을 학교에 돌렸다. 자신에게 집중되기보다 우리 대학이 이런 일에 힘쓰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으면 한다며 겸손을 잊지 않았다. ▲ 김용수 교수가 국경없는 과학기술자회에서 보여줄 ‘사랑의 실천’ 행보를 기대한다. 김 교수는 실제 교내에서 ‘사랑의 실천’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틈만 나면 주변 교수들에게 함께 적정기술을 연구하자고 권유한다. 원전 해체 연구도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할 연구라며 시작했다. 늘 바쁘게 움직이는 김 교수에게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봉사 한번과 기술 하나에 무엇이 달라지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온 세상이 바보라고 놀려도 저는 제가 줄 영향력을 믿습니다.” 그는 눈 한번 깜빡하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는 그의 정신에, 전한 손길 하나에 움직이고 있는 지구 반대편 사람들의 삶이 느껴지는 듯하다. 글/ 황유진 기자 lizbeth123@hanyang.ac.kr 사진/ 이진명 기자 rha925@ha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