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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6 15

[동문]경제위기 해법은 수출에 있다

우리는 지난 97년의 구제금융 한파를 아직도 씁쓸히 기억하고 있다. 기업의 연쇄부도로 아버지들은 거리로 내몰렸고, 어머니들은 한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시장에서 실랑이를 벌여야만 했다. 금모으기, 달러모으기 운동이 전개되고 사회·기업·학교·가정이 모두 허리띠를 졸라매고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런데 요즘 또다시 심상치 않은 한숨이 들려온다. 최근 서울경제연구센터의 발표에 따르면 서울시내 청년 실업률이 구제금융 시기의 수준에 근접한 것으로 나타났고, 통계청은 도소매 판매가 석 달 째 심각한 감소세라고 발표했다. 구제금융의 위기가 다시 왔다는 것이 상인들 사이에서는 이미 상식으로 통하고 있다는 언론의 조급한 보도도 있다. 이러한 경제 위기에 대해 한국수출보험공사 사장 임태진 동문(금속 67년졸)은 '수출만이 돌파구'라고 단언한다. 한국의 경제 여건상 수출이 과거 경제 발전의 초석이 되었듯이 지금 같은 위기를 극복할 방법도 역시 수출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찾아온 경제위기, '중동'을 공략하라 "사스(SARS)와 북핵 등의 악재로 수출시장이 부진을 면치 못한다고 걱정들이 많지만 사실 업체들의 노력으로 수출 규모는 작년에 비해 10퍼센트나 늘어났습니다. 한국수출보험공사는 수출업자가 수출을 하거나, 금융기관이 수출금융을 제공한 후 수입자로부터 수출대금을 회수하지 못해 발생하는 손실을 보험 또는 보증으로 지원하는 공적수출신용제도를 운영하는 기관입니다. 우리는 각 국에 수출 전문가를 두고 세계 44개 금융기관과 교류하고 있으며, 10만 건의 바이어 신용정보를 구축해 이를 6개월마다 업데이트하여 최신의 정보를 수출업체에 제공합니다. 한 마디로 기업들의 사기를 북돋워주고 지원하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이지요." 임 동문은 최근 세계적인 경기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중동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른바 제2의 중동특수를 겨냥한 각국의 무역업계 수장들이 잇달아 중동을 방문하고 있고 임 동문도 지난 4월, 윤진식 산업자원부 장관을 비롯한 여러 기업체 관계자들과 함께 이란, 오만, 아랍에미리트(UAE)를 방문했다. 중동에 있어서 한국의 공략점은 바로 플랜트 산업과 담수화 산업. 플랜트란 기술과 기계의 다원적 시스템이 적용되어 만들어진 단위공장으로 생산자가 목적으로 하는 원료나 중간재 혹은 최종 제품을 제조할 수 있는 시설을 뜻한다. 과거 석유파동의 난국을 극복했던 방법이 중동의 건설 특수였다면 현재 국내 많은 기업들은 플랜트 수출 산업을 제2의 중동공략을 위한 방안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값싼 공산품 수출은 중국에 밀리고, 고급품 수출은 선진국에 밀리는 상황이다 보니 중동시장 진출도 쉽지는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작년 LG건설이 세계 최대 가스전인 이란의 사우스파(Southpars) 개발 공사를 수주해 16억 달러를 번 것을 시작으로 많은 우리 기업들이 공사를 수주했지요. 이번 방문중에도 중동의 각 나라들로부터 수출 협약의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냈습니다. 벤처기업 육성을 통해 아이디어 상품을 공산품으로 연결해 판매하고, 우리의 우수한 IT기술이나 플랜트 등 기술적인 분야의 수출을 시도해야 합니다. 어렵긴 해도 아직 희망이 보입니다." 문화컨텐츠 산업 지원 육성 절실해 정보화의 진전에 따라 산업계에도 영화, 애니메이션, 소프트웨어 등 이른바 문화컨텐츠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국내 문화산업은 우수한 정보인프라를 바탕으로 선진국에 내 놓아도 뒤지지 않을 수준이며, 수출 또한 매우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임 동문의 설명이다. 그러나 많은 문화콘텐츠 업체들이 여전히 안정적인 자금확보와 시장에 대한 정보 부족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최근 한 업체가 자금 유동성에 밀려, 확실치 않은 정보에도 불구하고 계약을 체결했다가 외국 바이어에게 사기를 당했던 사례는 이 같은 어려움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이러한 문화컨텐츠 업체들의 어려움을 해소하고자 한국수출보험공사는 지난 3월, 컨텐츠 업체도 최고 1억원까지의 수출보험을 지원 받을 수 있도록 결정했다. "컨텐츠 수출은 그 동안 구매자의 주문에 따라 제품개발이 이뤄지기 때문에 사전에 객관적인 수출 가격이 나오지 않아 보험 지원이 사실상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최근 우리나라의 컨텐츠 수출 물량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음을 감안해 수출보험대상에 이를 포함시키기로 했습니다. 처음 지원했던 것은 심형래씨의 영화 '용가리'였죠. 제작비 지원과 함께 많은 정보를 제공해 성공적으로 수출을 마쳤습니다. 컨텐츠 수출업체가 보험에 가입함으로써 향후 국내 통신사업자, 종합상사 및 솔루션 업체들과의 해외 동반 진출이 보다 활성화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수출보험공사의 경영철학 '사람에 대한 따뜻함' 국내 기업들의 수출 지원을 선두에서 지휘하는 수출보험공사는 자사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선진의 경영시스템을 도입한 것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현재 수출보험공사는 지식경영시스템을 운영중이며 본부 및 팀별 성과에 대한 평가시스템을 독자적으로 개발해 도입했다. 이 같은 노력으로 기획예산처가 주관한 기금평가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고. 또한 전직급 연봉제를 오는 2007년까지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직위와 직급의 분리 운용을 통한 능력위주의 인사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특히 민간기업의 '주니어 보드'(Junior Board-임원진이 아닌 직원이 포함된 인사위원회)와 유사한 조직을 공공기관에 도입해 운영함으로써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우리는 인사위원회에 말단 직원까지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낮은 직급의 직원도 인사에 자신의 의견을 반영하게 함으로써 능력 위주의 공정한 인사가 가능해진 것이지요. 위원회에서 1.5배수의 인원을 추천하게 되므로 위원회의 의견을 90퍼센트 이상 인사에 반영하게 된 셈입니다. 또 민간기업과 같이 기존의 과·부의 체제를 탈피해 팀 체제를 이루고, 팀 안에서 맡은 일의 90퍼센트 이상을 직접 해결할 수 있도록 결제 단계를 3단계로 대폭 줄였습니다. 동호회의 활동비를 지원하고 어학연수나 외국의 대학원에 유학을 보내주는 등 직원의 복지향상에도 힘써 모두가 직장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지요." 임 동문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자신의 신념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똑같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이가 자기 자신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타인의 부족함을 감싸줄 줄 알고, 자신과 다른 생각을 받아들일 줄 아는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사회에 나와서도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장으로서의 전통적인 권위를 과감히 버리고 사람에 대한 따뜻한 관심을 잃지 않는 것은 그가 지닌 경영철학의 핵심이기도 하다. "몇 해 전 고시공부를 하다 쓰러져 반신불수가 된 여학생이 우리 공사에 입사지원서를 냈습니다. 능력이 뛰어나고 성실한 그 학생이 단지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여러 기업의 입사시험에서 고배를 마셨다더군요. 우리 임원진 사이에서도 다소 논란이 있었지만 그 학생의 능력만을 평가해 결국 합격시켰습니다. 현재 그 학생은 유능한 직원으로 성실히 일하고 있으며, 건강도 많이 좋아져 지팡이 없이도 걸을 수 있게 됐습니다. 밝게 웃으며 생활하는 그 여직원을 볼 때마다 합격시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직원에서 출발해 사장이 되기까지 동종업계에서는 드물게 평직원에서 출발해 사장의 자리에 올라 화제가 되기도 했던 임 동문은 오늘의 성공이 투철한 국가관과 성실한 자세에 기인한 것이라 고백한다. 공직자이다 보니 진급에 대한 야망보다는 자신이 맡은 직책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중요하게 여겨왔다는 것. 그는 선택에 기로에 섰을 때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신념으로 항상 공익을 위한 길을 택해왔다. "공직자의 임무는 국민이 잘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공직자라고 하면 일정한 월급이 나오므로 무조건 편할 것이라 생각하는 분들도 계신데, 안정된 생활이 장점인 것은 사실이지만 큰 돈을 벌 수 있거나 일하기가 쉬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공직자는 늘 모든 면에서 타인에게 모범이 되어야하고, 사람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으로 항상 몸가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지난 30여년의 세월을 타인을 위해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묵묵히 살아왔습니다.." 학력 및 약력 임태진 동문은 1943년 전남 장흥 출생으로 1967년 본교 금속학과를 졸업하고, 1995년 고려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상공부를 거쳐 공업진흥청 사무관 및 서기관을 역임했고 1992년 한국수출보험공사로 자리를 옮겼다. 총무부, 보상부 부장을 두루 역임하고 1993년 이사, 1998년 부사장직을 거쳐 2001년부터 한국수출보험공사 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1975년 상공부장관 표창을 받았으며, 1999년에는 IMF 시절 펼친 과감한 중소기업 지원 정책의 공을 인정받아 산업포장을 수상한 바 있다.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2003-06 15

[교수]디지털시대의 철학을 말한다-인문과학대학 역사철학부 이현목 교수

탈현대주의가 팽배한 21세기, 기술의 포로가 된 인간은 '사유'를 멈췄다. 이른바 '플러그앤플레이'의 시대가 아닌가. 인간은 기계의 플러그를 꼽으면 그만일 뿐, 사유마저 기계에 떠넘긴 인간의 나태함은 곧잘 '효율성'을 이유로 면죄부를 받는다. 철학이 소멸한 시대. 많은 이들은 철학의 부활을 위해 철학이 도도한 관념적 자존심을 버리고 현실 속으로 편입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동시대적 시스템 속에 철학이 포섭되어 다른 학문과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고, 이를 통해 범분과적인 기여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인문과학대학 역사철학부 이현복 교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문제는 철학이 다른 학문과 관계를 맺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지나치게 관계를 맺으려 한데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암흑에서 암흑으로' "지금의 문제는 철학이 다른 학문에 기생해서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리는 종속적인 관계를 지향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봅니다. 스스로를 주변 학문으로 전락시킨 것이지요. 21세기의 화두가 된, 인간성 상실의 문제나 환경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철학은 기생학문이 아니라 철학만의 학문이 되야 합니다. 철학이 과학에 종속되어 이론적 배경이나 만들어주고 현실사회의 쓰임을 억지로 찾으려다 보니 철학의 본령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고전적인 철학으로 돌아가 옛 사람들이 얘기했던 철학의 본류를 회복해 놓는 것이 현대에 철학이 기여할 수 있는 철학다움입니다." 현실사회로의 포섭을 포기하고 철학의 학문적 자존심 회복을 주창하는 이 교수의 전공은 근대 독일 철학이다. 굳이 주제별로 분류하자면 형이상학, 인식론에 대한 탐구가 그의 주된 학문적 관심이 된다. 이성에 대한 강한 신뢰를 바탕으로 근대 계몽의 기획을 주도했던 독일 철학이 그러하듯 이 교수가 디지털 시대에 있어서 철학의 소임을 다시 인간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철학이 외톨이가 되어 한없이 외로워질지라도 결코 기술에 포섭되지 않고 '자유로운 인간'에 대한 집념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진정한 계몽의 역사가 있었습니까? 저는 단연코 아직 없었다고 봅니다. 서구와 같이 우리가 차가운 이성을 바탕으로 계몽의 시대를 거쳤다면 지금은 매우 지적이고 논리적인 사유의 풍토가 조성되어 있었겠지만 불행히도 우리에게 그런 역사적 경험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이른바 암흑에서 암흑으로 뛰어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는 겁니다. 가치관의 혼란과 인간성 상실 등 정보 문명이 야기한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은 매우 당연한 귀결입니다. 지금이라도 철학은 이 같은 문제들에 성실히 답해야 합니다." 그가 스피노자에 심취한 까닭은 이 교수는 현재 17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Spinoza, Baruch de) 연구에 푹 빠져있다.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격언을 남긴, 매우 낙관적이고도 자족적인 철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 이 교수가 스피노자에 심취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속된 말로 그의 철학적 '내공'에 흠뻑 매료되었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표면적으로, 외연적으로 철학을 한 것이 아니라 내면적으로, 실천적으로 철학을 한 사람입니다. 이론으로 듣고 공중에 떠도는 언어의 집합이 아니라 평생의 삶을 통해 철학을 구현해 낸 사람이죠. 1960년대와 70년대 그리고 80년대에 이르기까지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이른바 ‘스피노자 르네상스’라 부르는 엄청난 연구의 붐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유럽사회가 인간의 자유에 대해 새롭게 각인하는 시기였지요.” 데카르트 철학을 바탕으로 희대의 저작 '윤리학(Ethica in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을 집필했던 스피노자는 자신의 조상인 유대의 교리를 인정하지 않아 파문을 당하고, 각지를 전전하며 극도로 고립된 삶을 영위했던 철학자다. 그는 평생토록 결혼을 하지 않았고, 부와 명성 따위와는 전혀 인연이 없었다. 렌즈를 갈아 생활을 영위하는 빈곤한 삶이었지만 1673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이 교수직을 제안해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오직 인간의 자유에 대한 스스로의 탐구에 방해를 받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지금까지 약 10년 동안 스피노자를 공부하고 있고, 집중적으로는 5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스피노자에 매달려 왔습니다.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어렵고 난해한 철학자이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매력이 있어요. 스피노자는 '자유로운 인간은 어떻게 가능한가'하는 주제에 대해 매우 분석적이고, 심도 있는 사유를 보여준 철학자입니다. 인간 해방의 단계를, 계몽의 단계를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지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기에 사람들이 스피노자를 찾았다는 것은 잉여는 반드시 결핍을(정신적) 가져온다는 사실을 잘 증명하는 것이지요." 100명의 취업보다 1명의 철학적 거장 필요해 지난 수 십년간 철학에만 전념해 온 이 교수가 스피노자를 '어렵다'고 고백하듯이 모든 학생들은 모든 철학자가 하나 같이 '어렵다'고 토로한다. 이 같은 학문적 난해함은 현실사회의 전망과는 별도로 학생들이 철학을 기피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는데 누구도 이견을 달지 않는다. 이 교수 역시 '철학이란 관찰과 실험을 통해 쉽게 검증되지 않는 난해한 학문'이라는데 이해를 같이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학문 이전에 학문의 '환경'에 관한 것이다. "유학 시절에 학부의 세미나 수업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갓 들어온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그야말로 초급 세미나였지요. 어느 날 한 학생이 발제를 하는데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히랍어와 라틴어의 원전까지 뒤져가며 작성한, 논리적인 형식이나 내용면에서 학생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거의 완벽한 수준이었던 겁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저 외에 교수나 다른 학생들 누구도 전혀 놀라지 않고 있더라는 사실입니다." 이 교수는 오랜 세월 서구사회가 지녀온 사유와 대화의 문화에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부모의 위계에 위축되지 않고 자유롭게 사고하고 논리적으로 대화하는 가정내의 소통 문화. 그리고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이 아닌 상호간의 대화와 토론을 통해 학습하는 제도교육에 이르기까지 서구가 지켜온 '토론의 전통'이 바로 그들의 철학적 역량을 말해준다는 설명이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이 교수는 국내 대학의 커리큘럼 속에서 시급히 개선되어야 할 점으로 '세미나 수업'의 빈곤을 지적한다. 교수가 생경한 구호와 개념을 일방적으로 나열하고 설파하는 방식이 아니라 학생 스스로가 치열한 사유의 과정을 거쳐 타인과 부딪히고 설득해 나가는 훈련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학생의 많고 적음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학과의 인기가 높고 낮음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중요한 것은 그들을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참된 철학도를 양성하자면 실로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그가 4학년을 마치고 졸업을 할 때, 철학적 통찰력과 비판의식을 제대로 갖게 해주어야 합니다. 철학 강좌는 지금보다도 훨씬 힘든 수업이 되어야 합니다. 철학이란 것이 원래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성공이란 백 명의 취업이 아니라 한 명의 철학적 거장의 탄생입니다." 학력 및 약력 이현복 교수는 경북대를 거쳐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Innsbruck) 대학에서 철학석사 및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1년 프랑스 파리10대학의 ‘16-18세기 철학연구소’ 연구원을 역임했고, 지난 1999년에는 독일 괴팅겐대학에서 객원교수로 재직한 바 있다. 한국칸트학회, 한국철학회, 철학연구회, 한국해석학회에서 활동 중이며 저서 및 역서로 『서양근대철학』(2001, 창작과비평사), 『철학의 거장들』(2001, 한길사)을 비롯 국내 5권, 국외 1권이 있으며 국내 16편, 국외 1편의 논문이 있다. 사진 : 이재룡 사진기자 ikikata@ihayang.ac.kr

2003-06 15

[학생]`학우 속으로` 이동총여 기획한 이민경 총여학생회장

'더 이상 기다리지 않겠다' 학생회 및 공동체적 활동에 대한 학생들의 참여와 관심이 어느 때보다 저조해진 요즘, 학생들을 직접 찾아가는 '모바일 학생회'가 등장해 화제다. 안산캠퍼스 총여학생회는 최근 '이동총여'란 기획으로 각 단과대학을 직접 방문, 설문조사를 통해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대화를 시도하고 있어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학생회에 대한 학생들의 수동적인 인식을 극복하고 학우 속에 자리하는 학생회로 거듭 나겠다는 것. 위클리한양은 안산캠퍼스 18대 총여학생회장 이민경(디경대·경영3) 학우를 만나 '이동총여'에 거는 기대를 들어보았다. - '이동총여'란 무엇인가? 이동총여는 학우들과 총여학생회의 직접적인 만남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준비한 행사이다. 총여학생회가 직접 각 단대별로 돌아다니며 로비나 여학생휴게실에서 설문조사를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학우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겠다는 취지다. - 실제로 학생들을 만나보니 어떤가? 이번 기획을 통해 학생들의 요구와 우리의 할 일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었다. 공대 같은 경우, 현재 여학생 휴게실이 형식상으로 있을 뿐 실험실 등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었다. 워낙 이런 분위기에 익숙해진 탓인지 지금은 여학생 휴게실의 필요성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특히 제 2공학관과 디자인대 같은 경우는 여학우들의 밤샘 작업이 많아 쉴 곳이 필요한데도 그런 공간이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동총여는 여학우들과의 오프라인 만남을 통해 생각을 공유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소중한 기회였다. 이번 설문을 통해 놀랐던 것 중 하나는 남학우들의 관심이 생각보다 많았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가 함께 하는 설문조사를 해 볼 생각이다. - '이동총여'를 하면서 어려웠던 점, 혹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집행부들이 모두 학생이다 보니 서로 공강 시간을 쪼개서 참여하고 있다. 역시 가장 힘든 건 시간문제 때문이다. 자기 생활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사실 이번 여름방학 때 단대 여학생회실을 리모델링할 예정이었으나 단대 여성위원회의 조사기간이 길어지는 바람에 공사가 연기되었다. 앞으로는 보다 체계적인 운영으로 행사에 차질이 없도록 노력하겠다. - 개인의 삶과 총여학생회장직을 함께 수행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워낙에 한 우물을 파는 성격이라 두 마리 토끼를 잡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학생으로서, 총여학생회장으로서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러 일을 하다보니 부딪치는 사람도 많았다. 역시 사람문제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한동안 이것 때문에 많이 고생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때의 방황으로 한결 성숙해졌음을 느낀다. 역시 노력해서 안 되는 일은 없는 것 같다.(웃음) - 앞으로 총여학생회가 계획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일단 2학기에 있을 문화제에 주력할 것이다. 강연과 퍼포먼스, 각종 이벤트를 준비중에 있다. 또 단대 여학생휴게실 리모델링을 마무리하고, 지속적으로 '이동총여'를 진행하는 한편 '이구동성' 발행에 주력할 예정이다. 방중에는 학내 행사 이외에 다양한 행사에도 참가할 예정이다. 당장 오는 7월 5일에는 '안양여성의 전화'가 처음으로 주최하는 여성 축제 기획에 참가할 계획이다. - 학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요즘 학생들은 외모나 말투가 중성적인 경향이 많다. 하지만 생각이나 행동에 있어서는 아직도 여성적이고, 남성적인 면을 구분하여 강조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또 남학우들의 경우 여성에 대한 호기심은 많지만 잘 알지 못하는 학생들이 있는 것을 볼 때면 속 시원하게 긁어주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될 때가 많아 답답하다. 이러한 것들을 보고 느낄 때마다 더욱 열심히 일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행사를 진행하다 보면 규모, 제정 등에서 노력해도 안 되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노력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더욱 열심히 일하는 총여학생회가 되겠다. 지켜봐 달라.

2003-06 08

[동문]"한양이여, 양키즈의 응집력을 배워라"

120년이 넘게 지속되어온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는, 야구를 즐기는 모든 이들에게 꿈의 무대로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야구팬들이 본격적으로 '빅 리그'를 접하게 된 것은 박찬호 동문(00년 명예졸업)이 지난 94년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에 입단하면서부터다. 공중파 TV의 생중계를 통해 그의 활약은 생생하게 전달되었고, 그의 손끝에서 사라지는 공 하나하나에 많은 이들이 웃고, 울었다. 최근에는 많은 한국 선수들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게 돼 국내 프로야구만큼 친숙해졌지만, 당시엔 수준 높은 경기와 다양한 볼거리로 신선함을 주기에 충분했다. 메이저리그 해설계의 제1선발 국내 선수들의 메이저리그 진출과 즈음하여 방송사들 역시 앞다투어 경기 중계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방송 중계에 있어 시청자들을 만족시킬만한 인력과 준비는 미흡했던 것이 사실이다. 현역 선수 출신들이 야구 해설위원으로 자리잡고 있던 당시, 메이저리그의 긴 역사와 그 안에서 뛰어왔고, 뛰고 있는 선수들의 면면을 생생히 전달하기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 너무나 부족했던 것. 하지만 지금 MBC-ESPN의 메이저리그 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는 이종률 동문(자원공학 92년졸)은 달랐다. 학창시절부터 'USA 투데이'와 미군방송을 끼고 살며 메이저리그를 접했던 그는, 선수 출신은 아니지만 다른 누구보다도 생생한 해설을 전달하며 메이저리그 해설의 첫 주자로 자리잡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들을 따라 야구장을 많이 갔었어요. 중·고등학교 때에는 AFKN을 한국방송보다 많이 봤고, 대학에서는 동아리를 통해 직접 야구를 하면서 미군부대와 메이저리그 야구서적을 파는 책방들을 다니며 책을 구해 읽었습니다. 이후 우연한 기회로 '주간야구'라는 야구 전문지의 기자로 2, 3년 동안 활동했습니다. 대기업에 합격해 입사를 앞두고 있던 시점에서 저로서는 나름대로 인생의 전환점을 이루는 결정을 했던 것이죠." 야구에 인생의 승부수를 던진 이 동문이지만 그의 선택에 따른 시련은 생각보다 빨리 다가왔다. 첫 직장이었던 '주간야구'가 문을 닫게 되었던 것. 이후 스포츠신문에 지원해 면접을 보게 됐지만 '축구를 취재할 수 있느냐'는 면접관의 질문에 '야구만을 취재하고 싶다'고 단호히 대답한 그는 평범한 회사원으로서 삶을 출발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한번 인연을 맺은 야구는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96년 당시 메이저리그를 중계하던 한 케이블 방송이 그에게 해설위원 자리를 제안한 것이다. 복잡한 해설은 사양, 즐거운 해설 지향해 "해설을 처음 시작할 때는 사실 막막하기도 했습니다. 주로 메이저리그에 대한 정보를 시청자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진행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메이저리그에 대해 저보다 훨씬 해박한 지식을 갖추신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됐고, 저의 해설 방식이 그다지 유용하지 못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저만의 개성을 찾아야 했죠. 그래서 전 해설에 '재미'를 추구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시청자들이 야구를 '편안히'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이 제 해설의 원칙이에요. 시원시원하게, 복잡하게 해설하지 않으려 합니다. 수시로 농담을 건네는 이유도 그것이죠. 승패도 중요하지만, 게임을 즐기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동문이 하루에 보는 메이저리그 경기는 대략 2, 3게임. 하루의 반나절을 야구경기에 모두 투자할 만큼 메이저리그에 정통한 그이지만, 이 동문은 자신의 약점에 대해 솔직히 털어놓기도 한다. 해설자로서 달변이지 못하고 선수생활을 해보지 않아 기술적인 분석에서 미흡하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 중계방송의 해설자 멘트를 그대로 옮겨 자기 말처럼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이 동문은 그런 행위 자체가 시청자에 대한 '반칙'이기 때문에 거부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의 약점을 냉정히 평가하던 그도 박찬호 동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목소리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박찬호의 부진은 작년의 허리 부상에 기인합니다. 기존의 부상에 거액의 몸값으로 이적한 부담이 크다보니 무리한 등판을 강행했고, 이는 부상과 부진의 악순환을 만든 것이죠. 또한 이제는 파워 위주의 투수가 아닌 제구력과 기교를 중심으로 한 스타일로 변화해야 할 때입니다. 사실 파워 투수로 10년 이상 지속한다는 것은 메이저리그에서도 드문 일이죠. 변화의 과도기에 있는 박찬호에 대해 예전만큼의 기대보다는 격려가 필요합니다. 동문의 한 사람으로서 또한 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박찬호를 누구보다 한양인들이 아껴줘야 할 것입니다." 한양에 필요한 것은 뉴욕 양키스의 '응집력' 이 동문이 가장 좋아하는 메이저리그 팀은 내셔널리그의 강호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작년도 월드시리즈 우승팀인 아메리칸리그의 '애너하임 에인절스'다. 지금은 강한 전력을 가졌지만 이 동문이 이 팀들을 좋아했던 것은 90년대 초반부터라고. 이유를 묻자 이들의 전력이 약했기 때문에 오히려 좋아했다는 의외의 대답이다. 천성적으로 약자의 편을 서기를 좋아한다는 그는 지금 자신이 응원하는 팀들이 선전하고 있어 해설할 때마다 기분이 좋다고 귀띔한다. 하지만 본교를 메이저리그 야구팀에 비교해 달라는 질문에 그는 의외로 강한 팀을 예로 들었다. 바로 월드시리즈 26회 우승에 빛나는 전통의 강호 '뉴욕 양키즈'이다. "지금의 한양대를 보면 마치 '애틀랜타 브레이브즈'와 비슷한 이미지입니다. 브레이브즈는 항상 리그 최강의 전력을 가졌음에도 우승과 인연이 많지 않았습니다. 개개인의 능력은 누가 보아도 손색이 없었지만 단결력이 부족했던 것이죠. 지금 우리 학교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사회에 진출한 후에도 서로 협력하는 힘을 보였으면 합니다. 마치 '뉴욕 양키즈'와 같이 말이죠. 양키즈는 항상 최강의 전력은 아니지만, 늘 중요한 순간에 보이지 않는 힘을 발휘합니다. 물론 이 말은 본교 학생들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그 능력과 힘을 한데 모을 수 있는, 양키즈와 같은 응집력을 발휘한다면 한양의 승률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학력 및 약력 이 동문은 1968년 서울 출생으로 지난 1992년 본교 자원공학과를 졸업했다. 1991년부터 1993년까지‘주간야구’에서 기자 생활을 했으며, 1996년부터 2000년까지는 케이블 방송인 ‘스포츠 TV(현 SBS 스포츠TV)’의 메이저리그 해설을 맡았다. 이후 2001년부터 현재까지 MBC 및 MBC-ESPN의 메이저리그 해설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영화보다 재미있는 메이저리그』, 『양키즈는 왜 강한가』 등이 있으며 각종 매체에 스포츠 칼럼을 연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2003-06 08

[교수]"eZ SPC는 한양 자부심과 긍지의 산물"

흔히 IE(Industrial Engineering)로 축약되는 산업공학이란 생산활동에 있어서 인력과 자재, 설비, 기술 그리고 자금 등 생산에 있어서의 총체적인 시스템을 설계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응용학문이다. 이러한 산업공학은 최근 컴퓨터 기술의 발전에 힘입은 정보화, 자동화의 추세에 따라 물리적 생산과정에 주목했던 전통과는 달리 정보에 대한 기능적 접근을 강화하는 쪽으로 신속히 재편되는 형국이다. 안산캠퍼스 산업공학과가 기계공학과와 함께 '기계정보경영공학'으로 그 이름을 바꾸고 새로운 변화를 시도한 것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적극 수용한 결과다. 강창욱 교수는 이에 대해 이른바 '통합의 공학'으로서 '산업공학의 전통과 정보화를 함께 수용하는 한편 국제적 감각도 놓치지 않겠다는 전략적 기획'이라 설명한다. 전문화·국제화·정보화 수용하는 '통합의 공학' "현재 학과 발전전략을 수립해 운영 중에 있습니다. 전략의 핵심은 첫째, 전문화이고 둘째, 국제화 그리고 셋째, 정보화입니다. 이를 위해 전공 트랙을 5개로 분류하고 트랙별로 필수, 선택, 공통 과목을 구분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학교의 학사방침에 저촉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학생들이 복수의 전공 트랙을 선택하여 이수할 경우 학과에서는 각각의 전문성을 '보증'해 주겠다는 의도입니다. 정보경영공학의 영역이 워낙 광범위해서 각자가 이수한 복수의 전공 과정을 학교가 보장해 준다는 것은 사회 진출에 큰 인센티브가 될 수 있지요." 그러나 70년대와 80년대, 제조업을 중심으로 압축적 성장을 통해 경제 기적을 이룩한 우리나라의 산업사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강 교수는 산업공학에 대한 우리 기업들의 인식이 결코 높지 않은 수준이라 말한다. 이웃의 일본만 해도 산업공학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것이 30년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 발전과 응용성이 괄목할만한 수준인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산업공학에 대한 관심은 몇몇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최근에야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특히 중소기업의 경우 이미 범사회적으로 깊숙이 진행된 정보화에 대응할 전담 인력이 부재하고, 관련 기술을 수용할 재원 마련도 쉽지 않은 탓에 더욱 큰 어려움에 봉착해 있는 실정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산업공학이 생산성과 효율성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학문이라면 이에 대한 기업들의 수요는 바야흐로 전략적 차원의 문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998년 강 교수가 중소기업청과 함께 '100PPM 품질혁신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것은 중소기업들이 처한 이 같은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첫 걸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국내 기업 40.6% '100PPM 품질혁신 SW' 쓴다 "현재 품질혁신 소프트웨어들은 대부분 외국에서 수입된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국내 기업들의 상황에 잘 맞지 않고 또한 워낙 고가인 탓에 중소기업들이 구매하기 쉽지 않은 단점이 있었지요. 그래서 쉽고, 간편하고 또한 저렴한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보자 생각하고 제작 지원을 1998년에 중소기업청에 의뢰했고 그 결과로 나온 것이 '100PPM 품질혁신 소프트웨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중소기업청은 강 교수에게 아무런 사전 통보도 없이 이 소프트웨어를 공개, 배부하는 탓에 각고의 노력 끝에 개발한 신기술은 소위 'Share Ware'가 됐다. 하지만 강 교수는 이왕 무료로 보급된 것이라도 확실히 서비스하자는 생각에 연구실의 홈페이지를 통해서 다운로드 기능을 제공하고 사후 서비스도 친절히 제공하도록 노력해 왔다고 말한다. 소프트웨어와 관련해 그야말로 온갖 문의 전화에 연구실은 분주해졌지만 그 누구도 힘든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는 것. 그간의 노력에 대한 보답이었을까? 지난 해 산업자원부가 실시한 품질경영 실태조사 보고서를 엿보던 강 교수는 새로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된다. "2002년 산업자원부가 품질경영 실태조사를 하면서 드러난 결과인데 우리나라 전 기업의 40.6퍼센트가 바로 우리가 개발한 품질혁신 소프트웨어를 쓰고 있었던 겁니다. 이는 정말 우리도 알지 못했던 놀라운 결과였습니다. 단일 소프트웨어로서는 최고의 점유율이었던 것이죠. 아,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구나 하는 자부심도 느꼈고 뿌듯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나중에 이 소프트웨어의 영어판을 만들어서 수출해보자는 새로운 마음을 먹게 됐고 이렇게 해서 기획된 'eZ SPC'가 바로 지난주 일요일에 최종 완료되었습니다." 한양의 자부심으로 세상에 선보인 'eZ SPC' 이렇게 해서 탄생한 'eZ SPC'는 굳이 말하자면 1998년에 개발된 '100PPM 품질혁신 소프트웨어'의 영문판. 그러나 새롭게 개발된 소프트웨어는 단순히 언어만이 전환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프로그래밍에 의해 제작된 '신상품'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강 교수의 주장이다. 품질개념이 도입된 지 채 40년이 되지 않는 우리나라가 이제 품질관리에 대한 독자적인 기술을 확보하고 소프트웨어를 제작, 역수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eZ SPC 개발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첫째, 일단 모든 번역 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언어 전환이 아니고 새로운 프로그래밍이었습니다. 둘째, 어떻게 홍보할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별도의 영문 홈페이지(www.ezspc.net)를 제작해서 운영하기로 했죠. 아울러 소프트웨어의 공신력과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총장님의 인사말과 한국표준협회 대표의 추천사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한국표준협회의 네트워크를 이용해 홍보작업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은 가장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한양대와 통계·품질연구실 그리고 한국표준협회의 이름으로 본 소프트웨어가 전 세계에 공급된다는 겁니다." 새롭게 개발된 'eZ SPC'는 이전 소프트웨어와 마찬가지로 무료로 보급될 계획에 있다. 보급문제와 관련해 미국의 교수들과도 많은 논의를 거쳤지만 한국의 모델을 그대로 적용하기로 했다는 것이 강 교수의 설명이다. 그러나 한양의 이름을 걸고 전 세계에 보급될 소프트웨어는 교환가치로 환산될 수 없는 성과가 있다. 그것은 바로 자부심과 긍지에 관한 것이었다. "1998년 처음으로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때나, eZ SPC를 개발할 때나 개발비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기업 지원을 받지 않고 일부러 정부로부터 용역을 받았던 것입니다. 결국 사비를 들여가며 개발했는데 지금은 졸업한 이배진 박사를 비롯해 대학원생들의 고생이 너무도 컸습니다. 이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해주지 못해 지금도 많이 아쉽습니다. 이번 영문판을 상업화해서 기금도 조성하고, 장학금도 주고 싶었던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러나 결국 한양의 자부심과 명예를 선택한 겁니다." 공학의 위기는 없다 대학원생들의 노고에 답할 방법이 없음에 아쉬움을 토로하는 강 교수에게 이제는 상투적인 화두가 되어버린 '이공계 위기'에 대해 물었다. 그가 단 한 순간도 주저하지 않고 '이공계의 위기는 없다'며 손사래를 친다. 강 교수는 이번 학기에 소속 학부에 개설해 운영 중인 '공학의 비전'이라는 CEO 강좌를 하나의 사례로 든다. 다양한 기업들의 CEO들을 초청해 공학의 필요성을 직접 듣고 그들의 경험과 비전을 나누고 있지만 누구도 공학의 위기를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220명이 수강하는 대단위 강의인데 저도 매번 수업에 참여해서 자리를 지킵니다. 방문하는 모든 CEO들이 강의가 끝나면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안산캠퍼스가 이렇게 훌륭할 줄 몰랐다는 것이고 둘째는 학생들의 수업태도가 너무도 진지하다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말하듯이 공학은 인류를 편리하게 하기 위한 직접적인 학문입니다. 이론과 기술을 연마하는 과정이 결코 순탄치는 않겠지요. 그러나 이 강의에 직접 들어가 학생들의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입니다. 이들이 있는 한 이공학의 위기란 없습니다." 학력 및 약력 강창욱 교수는 1981년 서울캠퍼스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1988년 미네소타대에서 통계학으로 석사학위를, 1990년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1년 공학대 산업공학과 교수로 부임한 이래 국가품질경영상 심사위원, 한국전력공사 품질경영 자문교수, KT 품질경영 자문 교수 등을 두루 역임했다. 1998년 100PPM 품질혁신 소프트웨어를, 올해 eZ SPC를 개발해 주목을 받았다. 현재 한양대-생기원 협력위원회 간사위원, 사단법인 한국산업경영시스템학회장을 맡고 있다. 사진: 윤석원 학생기자 astros96@ihanyang.ac.kr

2003-06 08

[교수]산소가 2% 부족할 때 환경보호 신기술 개발 공대 이영무 교수

오염된 세상을 깨끗하게 걸러주는 거대한 막이 있다면? 공대 응용화학공학부 이영무 교수가 '탄소-실리카 막을 통한 기체 투과' 논문으로 지난 5월 9일 사단법인 한국 막 학회(회장 김병식)가 발표한 제 1회 논문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영무 교수의 논문은 공기 중에 있는 이산화탄소나 이산화황 같은 공해 물질을 걸러주는 분리막에 관한 것으로 대기 오염 방지에 획기적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신기술. 위클리한양은 논문상을 수상한 이영무 교수를 만나 이번 수상의 배경을 들어 보았다. - 수상논문, '탄소-실리카막을 통한 기체 투과'는 어떤 내용인가? 이번에 논문상을 받은 '탄소-실리카 막을 통한 기체 투과'에 대한 논문은 공기에서 산소를 분리하여 21퍼센트인 공기 중 산소 농도를 75-80퍼센트까지 획기적으로 높여주는 '분리막'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대기 중에서 산소나 질소, 이산화탄소 등 일정한 질량을 가진 분자들을 쉽게 분리해서 회수할 수 있으며 공해를 억제하고 환경산업에도 응용할 수 있을 것이다. - '고분자 막'에 대해서 쉽게 설명한다면? '고분자 막'은 혼합물을 선택적으로 분리하는 역할을 하는 장치이다. 예를 들어 정수기에도 오염된 물질을 걸러주는 필터가 있고, 현재 시판되고 있는 '산소 에어컨'에도 공기를 이루고 있는 물질들 중에 산소를 선택적으로 분리하여 공기 중 산소 농도를 높여주는 막을 가지고 있다. - '고분자' 분야와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나? 사실 60-70년대에 각광을 받던 분야는 화학공학 분야였다. 화학 과목을 좋아했지만 대학 입학 때 전공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앞으로 고분자 공학이 장래가 밝다는 조언을 많이 들고 '고분자공학과'에 들어오게 되었다. '고분자막'을 택해서 공부하게 된 것은 대학원에 진학하면서부터이다. 지도교수이셨던 고 김계용 교수님께서 '고분자막'에 대해서 공부해 볼 것을 권하셨다.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공업용 막이 아닌 '생체 고분자막'에 대한 공부를 했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몸도 하나의 단백질 '고분자'라고 볼 수 있으며 '세포막'을 비롯한 많은 막들이 있다. - 학교 밖 활동에도 매우 열심인 것으로 안다. 바쁘게 산다. 일단 바쁘게 살고……. 어렸을 때부터 바쁘게 사는 훈련이 된 것 같다.(웃음) 학교 다닐 때부터 각종 과외 활동을 하느라 많이 뛰어다녔다. 학부 시절에는 공대생이었지만 4학년 때는 학교 영자 신문사에서 편집장을 맡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살지만 중요한 것은 시간과 일을 조직화하는 능력이다. 필요한 자료와 정보, 그리고 일의 순서를 효과적으로 정리하고 조직화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학부 때 영자신문사 생활을 했고 이후에 대학원에 진학해서 교수님들의 지도를 받고, 연구 활동을 해나가면서 트레이닝을 잘 받은 것 같다. 이번 한국 막 학회에서 2005년에 열리는 '세계 막 학회 회의'를 서울에 유치했고, 나는 사무총장을 맡아 요즘에도 매일 꼬박꼬박 시간을 내어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학계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는 저널 'Membrane Science'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바쁜 일정이지만 일과 시간을 효과적으로 조직화하면 동시에 많은 일들을 진행시켜 나갈 수도 있다. - 사회적 논란이 되었던 '이공계 기피현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물론 이공계 졸업생들의 소득이 의대를 졸업한 의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공계는 선택의 폭이 넓고, 그 만큼 기회도 많다. 나는 의대를 가지 않았지만 지금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수험생들이 긴 안목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한다면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 게이츠나 제너럴 일렉트로닉스의 잭 웰치 같은 엔지니어 최고 경영자가 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 향후 관심을 가지고 추진하는 과제가 있다면? 궁극적인 목표야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일단 중기적으로는 '연료 전지용 막'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노트북 같은 기기에 사용되는 충전지에 옥수수에서 추출할 수 있는 바이오 에너지인 메탄올을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 중에 있고, 상당한 진전을 본 상태이다. 특허도 이미 출원한 상태다. 그래서 지금은 메탄올 연료 전지의 연구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향후 메탄올 연료 전지 시장의 규모도 비약적으로 성장할 것이다. 사진: 신버들 학생기자 pleureur@ihanyang.ac.kr

2003-06 01

[동문]"법은 한 시대가 지닌 상식"

우리나라에서 헌법이 현실사회 속에서의 구체성을 실현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5년 전의 일이다. 1988년 9월, 헌법재판소가 설립되기 전까지만 해도 헌법은 매우 관념적이면서도 추상적인 공간에 남아 있었다. 국민 개개인의 존엄과 자유, 권리를 보장하는 최후의 보루라는 헌법은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막연한 이상을 그리는 '아름다운 서사'에 지나지 않았다.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 노희범 동문(법학 91년졸)이 헌법재판소를 '6·10 민주항쟁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의 결과물'이라 표현하는 것에는 이 같은 이유가 있다. 인간의 존엄 지키는 최후의 보루 '헌법재판소' 흔히들 헌법재판소를 두고 9인의 재판관들로 구성된 재판부만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보다 다양한 산하 부서와 법조 인력들로 구성되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소임을 수행 중이다. 특히 재판부 산하에 있는 헌법연구관들은 사건의 심리 및 심판에 관해 실질적인 조사와 연구를 수행하는 헌법재판소의 핵심 인력들. 이들은 사법시험에 합격한 특정직 국가공무원으로 판사급 처우를 받는 법조인들이다. "헌법재판소 출범 당시 헌법 연구를 전문으로 다룰 헌법연구관을 새로 뽑아야 했는데 당시에는 전문 연구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에서 연수를 마친 사람들이 대부분 판사나 검사, 변호사를 선호했고 헌법연구관으로 오기를 꺼려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 만큼 본 기관의 사회적 기여가 작기도 했죠.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헌법재판소가 제자리를 잡고 국민들에게 인정을 받아가면서부터 헌법 연구인력이 확보되기 시작했습니다. 현행법은 특정직으로서 판사와 동일한 처우를 보장하고 있죠." 노 동문이 헌법재판소에 부임한 것은 1998년 3월. 당시 헌법연구관보로 첫 발령을 받은 지 5년만인 올해 초, 그는 헌법연구관으로 승진 임명됐다. 고시에 합격한 이후 무엇인가 더 공부를 해보고, 이를 통해 사회적 기여를 이루어내겠다는 소망을 실현하기에 지금의 헌법연구관이란 지위는 최적의 직책이라 스스로 평가하는 그다. 법률의 구체적인 적용 행위를 수행하는 검사나 판사, 변호사의 지위에 대해 간혹 연민을 느끼지 않느냐는 물음에도 그의 대답은 단호하다. "검찰이나 법원에서 수사나 재판을 수행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헌법 재판을 위한 조사와 연구를 수행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헌법 재판이라는 것은 개개 사건에 관여한다기 보다는 헌법적 가치라는 큰 규범을 통해서 각종 법률과 국가 권력을 통제하는 일입니다. 검사가 하나의 사건에 대한 법적 정의를 실현하고, 변호사가 죄없는 한 사람을 구제한다면 헌법연구관이란 전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일에 종사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법의 변화 더디다고 경시되어서는 곤란해 헌법이란 명실공히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고 국가권력을 통제하는 우리나라의 최고의 규범이다. 따라서 헌법 재판이란 이 같은 헌법적 가치를 통해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고 국가권력을 통제하는, 헌법적 한계를 넘어서는 입법·사법·행정을 통제하는 국가 작용으로 풀이된다. 노 동문은 모든 법률은 '적용'의 문제에 앞서 그 법이 과연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 '좋은 법'인가를 가려내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법률은 단순히 만들고, 적용하고 그리고 집행하는 순환의 고리 속에 방치되지 않고 끊임없이 연구하고 분석해야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헌법이란 인간의 존엄을 실현하는 최고의 가치를 품고 있기에 특정 법률이 이런 가치에 위배되지 않는가를 판단하려면 법률을 끊임없이 연구해야 합니다. 특정 법률이 헌법에 위배된다면 이 법을 없애야겠죠. 헌법 재판은 다른 어떤 재판보다 국민의 의사와 사회의 가치를 반영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사회가 변화하면 그 만큼 법률도 변화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 기준은 바로 헌법에 있습니다. 헌법 재판에 있어서 연구 행위가 더욱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정작 사회의 요구와 가치의 변화를 반영해야 할 법률이지만, 사람들은 일상에서 '현실과 법률의 괴리'를 매우 자주 목격하게 된다. 최근 사회적인 물의를 빚었던 화물연대의 파업이나, 호주제에 관한 논란, 양심적 병영거부를 둘러싼 범사회적 논의들은 이 같은 괴리감을 잘 대변한다. 법률을 연구하는 법조인에게 있어 이 같은 현실사회의 괴리감은 어떻게 이해되고 있을까? "사실 법률은 변화에 다소 더딘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특정 사안에 대해 그때마다 임기응변식으로 변화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지요. 사회의 가치관, 현상, 욕구의 변화에 입법자들도 귀를 귀울여야 하지만 국민들도 인내심을 가져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이율배반적으로 들리겠지만 법도 사회적 갈등의 산물입니다. 많은 대화와 타협, 갈등과 조정을 거쳐 민주적 절차에 따라 지금의 현행법이 만들어진 것이지요. '법(法)'자를 한자로 보면 '물수(水)'자에 '갈거(去)'자입니다. 물이 흐르듯이 가는 것이란 말이지요. 결국 순리를 따라 바른 길을 찾겠지만 그 변화가 더디다고 함부로 경시되는 것은 더욱 곤란합니다." 법은 그 시대의 상식과도 같은 것 헌법을 연구하는 노 동문에게 헌법 조문 중 가장 아끼는 조항이 무엇인가를 묻자 그는 주저없이 헌법 제10조를 꼽는다. 모든 국민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행복 추구에 대한 권리를 보장한 제10조가 단연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 국가의 이념과 구성에 관한 규범에 앞서 인간에 대한 존엄과 권리를 지키는 것이 헌법이 구현해야할 첫 번째 과제라 생각하는 그다. 그리고 이러한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법치주의'에 대한 그의 신념은 확고하다. "대학 입학 후 처음부터 사법시험에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재학 시절에는 가톨릭학생회에서 활동을 하면서 당시 대학생들이 지녔던 보편적인 문제의식들을 함께 공유하기도 했죠. 군대를 다녀온 후 사법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결국 한 사회의 안정과 구성원들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는 법에 의한 통치가 가장 맞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부터입니다. 우리나라의 법치주의에 기여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사회에 가장 기여할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을 했죠. 법이 결국 한 시대의 상식을 대변하는 것이라면 그 상식을 수호하며 사는 일에 나름의 보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력 및 약력 내용을 입력하세요.노희범 동문은 1984년 공주고등학교를 나와 1991년 본교 법대를 졸업했다. 헌법학으로 2001년 동대학원을 수료했고 이후 2002년에는 University of Washington School of Law에서 비교법 석사과정을 다시 수료했다. 1995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1998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1998년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보를 거쳐 올해 초부터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으로 재직 중이다. 사진기자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2003-06 01

[교수]참된 성형은 마음을 고치는 수술-의과대학 성형외과 김정태 교수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몰라보게 예뻐졌다'라는 인사를 건넸다가는 괜한 오해를 사기 쉬운 시대다. 최근 한국에서는 외국 언론으로부터 '성형 천국'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많은 성형수술이 시행되고 있다. 경제적 풍요로움과 함께 '예뻐지고 싶다'는 여성의 욕망이 사회적으로도 당당한 명분을 획득하기 시작하면서 '성형외과'는 그야말로 '성업 중'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아름다움을 위한 미용성형을 먼저 떠올리는 것과 달리, 성형수술은 장애부위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재건성형'이 그 원류라는 사실을 많은 이들은 알지 못한다. "성형외과의 영역은 크게 미용과 재건의 두 분야로 나눌 수 있으며, 성형수술의 본질적인 의미는 재건 성형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재건분야 중 가장 최신 의술인 '미세 재건 수술'을 연구하는 성형외과 김정태 교수의 말이다. 재건 성형은 마음을 고쳐주는 수술 "성형외과 분야는 재건성형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교통사고나 화상으로 인한 외상, 언청이, 소이증(귀가 없는 기형) 등의 선천성 기형을 치료하다 보니 점차 그 범위가 확대되어 오늘날의 미용성형에까지 이르게 됐습니다. 그 중 제가 연구하는 미세 재건 분야는 현미경을 보고 혈관이나 신경을 연결하는 수술인데 성형외과에서 가장 힘든 첨단의 분야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신체 다른 부위에서 필요한 조직을 얻어 결손부의 모양을 새로 만드는 것입니다." 유방암 등의 종양수술이나 교통사고로 신체의 일부가 절제된 사람에게 소실 부위를 새로 만들어 주는 것, 선천적으로 기형으로 태어난 사람들을 정상적인 모습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재건 성형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 특히 유방암으로 유방을 절제한 여성의 경우 심각한 심리적 고통을 수반하게 된다. 따라서 재건 성형은 외모만 고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마음까지 고쳐주는 수술이라는 것이 김 교수의 설명이다. 성형은 독창과 창조의 의학 여러 의학 분야 중 성형외과를 택한 것에 대해 김 교수는 '독창성과 창조성'을 가장 큰 이유로 든다. 성형외과에서는 매번 환자의 상태에 따라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게 되므로, 1년 내내 동일한 수술이 한번도 없을 정도로 케이스가 다양하다. 집도의의 판단과 아이디어에 따라 수술 방법과 결과가 좌우되니 그 결과도 천차만별이다. "성형외과에서는 환자의 상태를 보고 의사의 판단에 따라 독창적인 방법을 택하기도 하며, 환자와의 의견 교환으로 좀 더 잘 맞는 방법을 찾게 됩니다. 다른 외과 수술들이 주로 자르고, 절개하는 등 파괴적인 치료 행위인 반면, 재건 성형의 수술은 새살을 만들어내고, 소실된 부위를 생성하는 등 창조적인 치료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처 부위가 넓거나 심각한 화상을 입은 국내 환자는 외국에 나가 치료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근 일본과 중국의 환자들이 한국에서 수술을 받는 경우가 확연히 늘어났다는 사실이 각종 매체에 의해 보도된 바 있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이제 우리나라의 성형의학 수준은 세계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수준이며, 특히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함께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미 중국, 대만 등 아시아권 여러 나라에서 우리의 의술을 배우기 위해 국내로 들어오고 있으며, 반대로 우리의 의료진을 초청해 가기도 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릇된 '제도'의 성형이 급선무 지난 2000년 의료계 파업이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다뤄진 이후 의사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예전 같지 않다. 특히 사회에 만연한 미용성형과 관련해 난무하는 성형치료에 대한 시선이 결코 곱지 않은 실정이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 성형외과 분야가 가장 먼저 개선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 김 교수는 많은 성형외과 의사들이 재건분야를 도외시하고 상업성을 중시한 미용성형 개업의로 빠져나가는 것을 첫 번째 문제로 꼽는다. 심지어 최근에는 성형외과 교수가 남아있지 않은 대학들도 있다고. "개업을 해 돈을 버는 것도 좋지만, 대학에 남아 연구를 계속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러나 현재 대학 교수들의 연구 환경은 상당히 열악한 수준이며, 시간적인 여유조차 없죠. 따라서 연구인력 확충을 위해 대학 교수들에 대한 처우 개선이 시급합니다. 또한 외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은 성형수술이 대부분입니다. 여러 번 시술이 필요한 선천 기형마저도 첫 번째 수술을 제외하고 나머지 수술에는 보험이 지원되지 않는 현실입니다. 하루 빨리 이러한 제도적 결함이 보완되어야만 합니다." "국내 학계도 중요하지만,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시대입니다. 따라서 외국과의 교류를 통해 세계적인 인력을 배양해야 합니다. 외국 학회에 논문을 자주 발표하면 초청 강연을 할 기회가 많이 생기죠. 가끔 얼굴도 모르는 외국의 학자가 내 논문을 보고 초청해 올 때 가장 뿌듯합니다. 이러한 활동들이 한국의 성형외과 의료 수준을 세계에 다시금 재인식시키는 발판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김 교수는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자세'를 강조한다. 특히 급변하는 시대에 발맞춰 정보를 잡으려면 어학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 "한양대학교는 전망이 밝은 대학입니다. 발전 가능성이 여타 대학에 비해 우월하다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장점이지요. 우리 후배들이 외국어를 열심히 배워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또한 활발한 연구 활동으로 세계 학계에 한양의 이름을 빛내길 기대합니다." 학력 및 약력 김정태 교수는 1987년 본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1990년에 석사학위를, 1994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6년 동아대 의대 교수를 거쳐 이후 일본 가와사키 의대, 미국 베일러대, 대만 장건병원 등에서 연수를 마쳤다. 국내 46편, 국외 5편의 논문이 있다. 대한두경부종양학회, 국제성형외과학회, 대한미세수술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대한성형외과학회 간사를 맡고 있다. 사진: 윤석원 학생기자 astros96@ihanyang.ac.kr

2003-06 01

[교수]`트루먼쇼` 다시 보기 스크린 속의 철학 존 맥과이어 교수

'당신이 모르는 사이 누군가 당신의 삶을 조정하고 있다' 국제문화대학 영미언어·문화학부 존 맥과이어 교수가 '트루먼 쇼의 철학적 주제들(Philosophical Themes in the Truman Show)'이란 제목으로 집필한 논문이 올해 캐나다 고교 과정의 철학 교과서에 실린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화제다. 한편 이 논문은 지난 해 여름, 영국에서 출간되는 대중을 위한 철학 잡지 'Philosophy Now'에 실리기도 했다. 철학은 형이상학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삶 안에 있다고 말하는 맥과이어 교수를 만나 '트루먼 쇼'에 드러난 철학적 흐름과 외국인으로서 그가 느끼는 한국에 대해 물어보았다. - 영화 '트루먼 쇼' 속의 두 가지 철학적 흐름에 관한 글을 썼다고 하는데. 한가지 흐름은 '우리가 믿고 있는 진실이 과연 진실인가'란 질문을 시작으로 한다. 영화 속 주인공 트루먼은 어릴 적부터 텔레비전 쇼를 위해 거대한 무대 세트 안에서 자란다. 그는 배를 타고 바다 끝으로 가 무대 끝에 다다르기 전까지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진실로 본다. 하지만 그의 아내부터 동네 친구, 직장 동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쇼를 위한 연기자였고 이를 알게 된 트루먼은 좌절한다. 데카르트는 회의론에서 인간이 믿는 모든 진실은 거짓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는 '만약 신이 사악한 악마라면?'이라고 묻는다. - 트루먼의 좌절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 않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플라톤의 '동굴의 감옥'으로부터 출발한다. 모닥불이 타고 있는 동굴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다. 발목이 사슬에 묶여 있어서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벽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뿐이다. 플라톤은 체인을 끊고 진실을 알기 위해 동굴 밖으로 나가는 이가 철학자라고 말한다. 동굴 안으로 돌아가 나머지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그들의 임무다. 무대 밖으로 탈출하는 영화 속 '트루먼'을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트루먼 쇼'의 시청자들은 텔레비전이라는 사슬에 묶여있다. 그들은 동굴 벽 그림자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텔레비전이 보여주는 상황만을 보고 진실을 보지 못한다. 텔레비전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텔레비전을 즐겨보는 우리도 다를 것이 없다. 텔레비전을 끄고 진짜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 한국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 대학에서 언어 철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한국의 한 대학에서 철학을 영어로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구인광고를 보고 지원해 한국에 오게 됐다. 한국에 온 지 이제 7년이 다 돼간다. 이 곳에서 근무한지는 2년 정도 됐다. - 우리나라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어려웠던 점은 없는가? 지난 학기에 '미국사회변천사' 강의를 했다. 학기초에는 학생들이 무척 수동적이어서 학생들의 입을 여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숨어있던 학생들의 활발함이 밖으로 표현됐다. 한 학생이 말하는 것을 그치지 않아 수업 시간을 넘긴 적도 있었다.(웃음) - 외국에 오면 적응하기 힘든 것 중의 하나가 음식이다. 제일 좋아하는 한국 음식은? 미역국, 콩나물국, 된장국 등 여러 가지 한국 음식을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돌솥비빔밥을 제일 좋아한다. 캐나다에 있을 때는 채식주의자였다. 지금도 야채를 주로 먹는다. 학교 식당 메뉴에는 고기가 들어간 음식이 많아 밥을 먹을 때마다 고민을 한다. 일주일에 다섯 번 돌솥비빔밥을 먹은 적도 있다. - 강의와 저술을 병행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향후 계획은? 가까이는 올 여름 터키에서 열리는 '세계 철학 회의(World Congress of Philosophy)'에 참가할 예정이다. 4년마다 한번씩 열리는 이번 행사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하기로 했다. 이라크전과 SARS 그리고 최근 터키에서 있었던 지진 때문에 회의 참가를 고려 중이다. 윤리학에 대한 철학적 연구를 하면서 계속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 사진 : 이진례 학생기자 eeka232@ihanyang.ac.kr

2003-05 22

[동문]국내 최고의 '크레딧 뷰로' 지향하는 박상태 동문

신용불량자 300만 시대. 지난 20일 은행연합회 발표에 따르면, 4월말 현재 개인 신용불량자는 308만 6천명으로 사상 최다기록을 경신했다. 매월 최다 증가율을 갱신하고 있는 신용불량자 수는 더 이상 개인문제가 아닌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신용불량자 수의 증가는 개인과 기업의 정확한 신용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에서 기인한다. 사회가 선진국형으로 발전함에 따라 신용인프라 구축은 필수적이다. 최근 개인을 대상으로 한 소매금융의 급속한 발전은 기존 담보 거래의 관행에서 신용 중심의 거래로 변화해 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지난 1985년 국내 최초의 신용평가기관으로 출범한 한국신용평가정보는 창사이래 국내 금융산업의 하부구조 인프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오고 있다. 크레딧 뷰로(Credit Bureau 이하 CB) 사업을 통해 제2의 도약을 준비하는 한국신용평가정보 대표이사 박상태(법학 73년졸) 동문을 만나 그의 비전과 생각을 들어보았다. 크레딧 뷰로, 신용정보의 '저수지' 크레딧 뷰로(Credit Bureau: 이하 CB)란 금융기관, 비금융기관, 공공기관이 제공하는 개인의 신용 거래내역(Positive Data) 및 관련 정보를 수집한 후, 이를 가공하여 신용정보 제공기관 및 이용자에게 제공하는 개인신용평가전문기관을 말한다. 이미 미국 등 선진 신용사회에서는 개별 금융회사가 CB로부터 제공받은 개인신용정보를 활용해 대출은 물론 카드발급 등 거래승인여부와 한도결정을 자율 결정하는 시스템을 운영하는 등 CB는 금융산업의 핵심인프라로 부상한지 오래다. 이러한 CB사업의 핵심은 다양한 신용정보 제공기관과 정확하고 신뢰성 있는 정보가공 능력이다. 한국신용평가정보는 5년 전부터 신용사회 정착을 위한 신용정보 인프라의 중요성을 인식해 CB를 준비, 작년 2월 국내 최초로 CB 컨소시엄을 출범시켰다. 국내 주요 은행, 카드사, 캐피탈, 보험사, 백화점 등 120여 개 회원사가 참여한 이번 사업은 국내 신용정보 인프라 중 최대 규모로 평가받는다. 박 동문은 이러한 CB사업을 '신용의 저수지'라 비유한다. "CB가 거대한 저수지라면 신용정보는 저수지를 채우는 물인 거죠. 훌륭한 저수지가 되기 위해서는 물의 양이 많아야 합니다. 저희는 국내 주요 은행, 카드사, 캐피탈, 보험사, 백화점 등 다양한 신용정보 제공원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여 공유하고 있습니다. 은행뿐만 아니라 개인이 거래하는 다양한 신용정보들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죠. 정확한 신용거래 히스토리만이 개인신용평가의 정확도를 높일 수 있습니다." 그는 정보의 양뿐만 아니라 질 또한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정보의 질을 결정하는 신용 스코어의 정확한 산출이 한국신용평가정보가 시장에서 선두자리를 고수할 수 있는 비결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신용정보를 제공하는 저희들은 스스로가 최고라고 자부한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보의 신뢰성은 수용자 즉 이용자들이 결정하기 때문이죠. 다양한 신용정보와 그 정보의 신뢰성 확보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회사 발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는 이를 위해 지난 2000년 세계 3대 CB의 하나인 트랜스 유니온사와 전략적 업무제휴를 맺고 선진 신용스코어 기법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CB 컨소시엄이 저수지를 크게 만드는 작업이었다면, 정확한 신용스코어 산출은 양질의 물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신용사회 인프라 구축 위한 사명감으로 박 동문이 한국신용평가정보 대표이사로 취임한지는 채 한 달이 되지 않았다. 연초에 회사의 경영권 논란 속에 최초로 대표이사후보추천위원회를 통해 선임된 박 동문은 이런 배경 때문인지 어깨가 짐짓 무거워 보였다. 향후 회사 경영 복안을 묻는 질문이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관세청 차장(1급)을 끝으로 공직에서 사기업으로, 공무원에서 회사원으로 신분 변화를 단행한지 이제 20여일. 하지만 그는 짧은 시간임에도 많은 것을 생각하며 준비하고 있었다. "저희 회사는 이미 기업정보에 있어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최고 수준의 정보를 제공해 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신용정보에 있어서는 경쟁사보다 좀 늦게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국내 최초 CB사업의 출발로 이제 이 분야 시장을 선도해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지금은 초기이지만 CB사업이 성숙단계에 이르면, 신용회복과 부실예측 등 다양한 CB서비스를 개발해 수익을 창출해 나갈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공직사회는 공익을, 민간기업은 이윤 극대화를 목표로 한다. 때문에 공무원들은 박봉에도 불구하고 공공이익을 위해 봉사한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업무를 해 나간다. 30여 년을 공직에서 일했던 박 동문 역시 공무원으로써의 자긍심이 컸다고 한다. 그러한 그이기에 공직 이후의 삶을 선택하는데 있어서도 일에 대한 자긍심은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고 박 동문은 회고한다. 이제 정부가 아닌 한 사기업의 대표이사라는 직함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박 동문에게 그 의미와 회사 선택의 배경을 물었다. "기업에 와서 제일 처음 다르다고 느꼈던 점은 언제나 비용과 이익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에서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익을 생각하는 사기업이라 할지라도 일에 대한 자긍심은 중요하다고 봅니다. 저와 우리 직원들에게는 신용사회 인프라를 구축한다는 공공성에 대해 자긍심이 있고, 이 회사를 국내 최고의 크레딧 뷰로로 만들겠다는 목표가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회사 경영을 해보고 싶었고 준비해 왔습니다. 이처럼 일에 대한 사명감과 자긍심까지 가질 수 있는 회사에 취임하게 된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화 시대, 당신의 경쟁력은 무엇입니까? "저는 관세청 차장을 끝으로 일반인들이 말하는 '용퇴'를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선배가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자연스러운 모습이기 때문이죠. 대신 저는 항상 미래를 준비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법학으로 졸업하긴 했지만, 경영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대학과 대학원에서 강의도 해 왔습니다. 공직을 떠난다면 일반기업의 경영을 통해 제2의 인생을 펼쳐보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준비해 온 것이죠." 박 동문은 세계화 시대, 국제화 시대라는 말의 요체는 치열한 경쟁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오늘의 모든 사회는 경쟁을 기반으로 운용되고 따라서 경쟁력을 갖지 못하면 자연히 도태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지난 30여 년 간 몸담아 온 공직생활에서 용퇴한 것은 경쟁에서 밀렸기 때문이지만, 지금 대표이사 직함을 가지게 된 것 또한 경쟁에서 이겼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박 동문. 그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쟁력을 갖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경쟁력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노력하고 준비하는 자에게만 생기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후배들이 지금 이 순간 어떤 목표를 가지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경쟁 사회라는 말속에는 프로는 프로만큼, 아마추어는 아마추어만큼 대접을 받는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신에게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프로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당신의 경쟁력은 무엇입니까?" 학력 및 약력 박상태 동문은 1973년 본교 법대를 수석졸업하고 같은 해 13회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1977년 성균관대 행정대학원과 1988년 태국 방콕대에서 행정학 석사를 취득했고, 1998년 미국 세인트루이스 경영대학원 수료 후 2002년 건국대에서 국제무역학으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78년 재무부 관세국에서 공직을 시작한 박 동문은 보험국, 경제협력국, 세제실 등을 두루 거쳤다. 1996년 관세청 감사관을 시작으로 협력국장, 통관지원국장 그리고 차장을 역임했다. 2002년 자랑스러운 한양인상을 수상한 박 동문은 지난 4월부터 한국신용정보평가(주) 대표이사로 재직 중에 있다. 사진 : 윤석원 학생기자 astros96@ihanyang.ac.kr

2003-05 22

[교수]`트레일러에 꿈과 미래를 싣고`-자연대 화학과 최정훈 교수

한때 이 땅의 모든 과학자들과 엔지니어들을 우울하게 했던 '이공계 위기론'의 실체와 원인을 규명하는 문제를 놓고 '어른'들이 도출한 결론이란 매우 상식적인 수준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학생들이 힘든 공부를 싫어한다는 것. 그리고 힘들게 공부해봤댔자 사회적 보상이 크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언론들은 다투어 이공계 인력에 대한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고 엄포를 놓았고, '어른 엔지니어'들은 이에 호응하여 자신들의 월급 봉투를 공개하며 격분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자연과학대 화학과 최정훈 교수의 해석은 조금 남다르다. 그는 정작 이공학을 기피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아이'들의 대답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이공학 공부가 한마디로 '재미가 없다'라고 토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강의실은 전국구, 학생들은 대한민국의 청소년 자연과학대학 화학과 최정훈 교수의 강의실은 전국의 초중고교. 그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대한민국의 모든 청소년이다. 최 교수는 작년에 출범한 청소년과학기술진흥센터(이하 청소년과학센터)의 센터장을 맡으면서 홀연히 연구실을 떠나 자신의 낡은 지프차에 몸을 실었다. 청소년과학센터는 한국과학문화재단이 본교와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포항공대 그리고 과학기술대 등 이공학 연구에 있어 명실공히 국내 최고임을 자부하는 6개 대학을 선정, 지원함으로써 시작된 사업이다. 청소년과학센터의 특명은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이 잃어버린 '아인슈타인의 꿈'을 부활시키라는 것. 본교는 지난해 10월, 청소년과학센터 출범에 즈음하여 이동과학교실 트레일러 발대식을 갖고 특명을 완수하기 위한 긴 여정을 시작했다. 약 2억원의 비용을 들여 국내 최초로 제작된 이동과학교실 트레일러는 각종 실험장비와 폐기물 처리시스템을 보유했으며 최첨단 영상장치를 갖춘 '모바일 실험실'. "청소년과학센터의 주력 사업인 이동 트레일러 교실은 작년 10월 발대식을 갖고 불과 두 달 동안에만도 10여개교를 방문했습니다. 전국에서 60여개교가 신청을 해 올만큼 반응은 폭발적이었죠. 올해도 3월부터 접수를 받기 시작했는데 2주만에 80여개교가 신청하는 기록적인 반응을 거뒀습니다. 이동 트레일러 교실은 국내 최초의 시도입니다. 지금까지 정부차원에서 유사한 프로그램을 시행하려는 노력은 많았지만 열의와 컨텐츠의 문제로 대부분 실패한 바 있어요. 그래서 지금 우리의 프로그램과 관련해서 정부기관과 산하단체에서 성공 비결을 묻는 문의가 쏟아지고 있지요." 청소년 과학 교육에 관한 본교의 관심은 수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다. 최 교수는 1997년부터 시작된 '청소년 과학교실'과 '신나는 과학놀이 마당'을 청소년과학센터의 효시로 꼽는다. 이 외에도 '대한민국 청소년 발명아이디어·디자인 경진대회', '전국 과학동아리 경진대회' 등 청소년들의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기 위한 본교의 노력은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배경에 기인한 것일까? 지원사업에 대한 과학문화재단의 평가에 있어서도 최 교수는 본교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모델로 평가받고 있노라고 자신한다. 똑같은 지원을 해도 한양대는 몇 배의 성과를 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사업 성공의 비결은 뭘까? "비결은 우리 연구원들의 가히 희생적인 열정에 있습니다. 아침 6시, 7시에 출발해서 지방 시연을 마치고 귀경하면 밤 11가 훌쩍 넘기도 합니다. 엄청난 노동 강도지요. 또한 일찍부터 전국의 중고 과학교사들로 구성된 '신나는 과학교실' 활동을 후원하면서 그간 이 곳의 선생님들이 개발해 놓은 무수한 컨텐츠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학인재 육성을 위한 본교의 우수한 조직력을 빠뜨릴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과학시연 행사도 우리만큼의 조직력과 전문성, 완성도를 갖지 못합니다. 타 기관이 몇 개월 걸려 준비할 것들을 우리는 하루만에 척척 준비해 내고 있거든요." '이문세의 사이언스파크' 배후에는 한양이 있다 사실 이동 과학교실에 대한 아이디어는 독일의 사례를 제시하며 추진을 독려했던 김종량 총장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현재 이웃의 일본에만도 1백여개가 넘는 과학 트레일러팀이 있지만 국내에서는 번번히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따라서 본교의 이동 과학교실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과 호응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이동 과학교실은 입시 홍보에 있어서도 탁월한 효과를 내고 있다는 게 모든 관계자들의 일관된 평이다. "이동 트레일러가 지방에 가면 현지는 거의 잔치 분위기에 가깝습니다. 지역의 유지들이 현수막을 들고 나온다고 말하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한번은 행사장에 50여명에 달하는 인근 학교의 과학교사들이 모두 모인 적도 있어요. 과거에 입시 홍보를 가면 '바쁘다', '번거롭다' 등을 이유로 현지 교사들이 손사래를 치기 일쑤였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국면입니다. 트레일러를 유치하기 위한 경쟁이 사뭇 치열합니다." 이동 과학교실 외에도 청소년과학센터는 최근 특명 완수를 위한 또 하나의 기획을 진행 중이다. 서울방송의 과학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이문세의 사이언스 파크'의 제작 자문을 맡은 것. 현재 이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는 남형석 프로듀서는 과거 '호기심 천국'을 연출했던 경력이 있다. 최 교수는 최초의 공중파 과학 교양프로그램이었던 '호기심 천국'의 수준을 한 단계 격상시키려는 방송사측의 욕구와 청소년과학센터가 가지고 있는 양질의 컨텐츠들이 최고의 조합을 이루어냈다고 평가한다. 실제 최 교수는 몇 회마다 정기적으로 프로그램에 직접 출연을 하고 있기도 하다. "일요일 저녁, 프라임타임에 방송되는 이 프로그램의 말미에 기술자문으로 한양대학교라는 이름이 항상 나가고 있습니다. 공중파 방송의 대표적인 과학 프로그램을 시청하던 수많은 청소년들이 '아, 이 프로그램의 자문을 맡는 곳이 한양대구나'하고 생각한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들의 머릿속에는 과학=한양이라는 등호가 쉽게 각인될 겁니다. 엄청난 홍보 효과가 아닙니까? 산업인재를 양성하던 공학의 메카가 청소년들의 뇌리에서 이제 첨단과학의 메카로 다시 부상하고 있다는 겁니다." '열심히'보다는 '재미있는' 공부가 효과적 전국을 누비며 청소년들에게 '재미있는 과학', '체험하는 과학'을 선보이고 있는 최 교수의 원래 전공은 유기합성 분야다. 청소년과학센터장을 맡은 뒤로 개인적인 연구에 다소 소홀한 감이 없지 않다고 고백하는 그이지만 미래의 과학 인재를 육성하는 일도 개인적인 연구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그다. 특히 형이상학적 공간을 떠도는 설명보다 과학은 직접 체험하고, 흥미를 느끼게 해야 한다고 굳게 믿는 최 교수는 연구의 질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가르치느냐의 문제가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현재 교수학습개발센터의 자문위원도 맡고 있는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연을 중심으로 한 창의적인 강의입니다. SCI 논문 게재율은 갈수록 높아지는데 왜 기업들은 학생들의 수준이 자꾸만 떨어진다고 비판하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문제는 교수법에 있습니다. 외국의 한 사례를 들자면 물리학 교수가 힘의 분산을 설명하기 위해 못이 촘촘히 박힌 나무판 위에 직접 드러눕는 시연을 본 적이 있습니다. 지나친 열정이 아니냐 반문할지 모르지만 '어떻게 가르치는가'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반성이 필요합니다." 현재 '일반화학' 그리고 '생활화학 및 첨단과학 세계' 등 2개의 강의를 맡고 있는 최 교수는 실제로 자신의 모든 강의를 시연을 중심으로 진행하고 있다. 수강 인원은 물론 '만석'이다. 그는 이제 칠판과 분필로 지식을 전수하던 시대는 지났노라고 단언한다. 학생들이 실제 강의 내용에 빠져들게 하려면 전달하고자 하는 지식과 이론을 눈 앞에서 검증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일지라도 결코 '재미있게' 공부하는 사람만 같지 못하다는 것은 그가 지닌 강의철학의 제 1명제다. 학력 및 약력 최정훈 교수는 1980년 본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이후 서강대에서 유기화학으로 석사학위를, 1986년에는 KAIST에서 광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9년 KIST 연구원을 거쳐 1990년부터 본교 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한화학회 편집위원, 총무실무이사, 환경과학회 기획이사를 역임했고 현재 KIST 겸임책임연구원, 청소년과학기술진흥센터장을 맡고 있다.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2003-05 22

[동문]대학로에서 만난 `빨간 속옷의 사나이` 류태호 동문

지난 4월 개봉한 영화 '살인의 추억'과 지난 86년 시작해 올해로 여섯 번째를 맡는 연극 '날 보러와요'가 생활 속의 코미디를 선사하며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그러나 화성연쇄살인사건이라는 동일한 소재를 지닌 두 작품에서 같은 배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는 배우가 있다는 사실은 더욱 큰 화제다. 영화에서는 빨간 여자 속옷을 입고 다니며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두 번째 용의자로, 연극에서는 다시 용의자로 1인 4역을 소화해내는 류태호(연영 86년졸) 동문이 그 주인공. 위클리한양은 류 동문을 만나 무대에서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 연기를 시작하게 된 동기가 있다면? 특별한 동기는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화 연출을 하고 싶어서 연극영화과에 갔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처음 2년 동안은 공부를 열심히 하지 못해 F를 많이 받았다. 군대에 갔다 와서는 열심히 했다. 연극영화과 최형민 교수님을 만난 것도 그쯤이었다. 최 교수님의 연기 수업을 듣고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 졸업 후 연극에 몸을 담았으니, 17년 동안 배우로서 살아온 셈이다. - 연극 배우는 배곯는 직업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연극을 하면서 힘들었던 적도 많았을 것 같은데. 지금은 이렇게 많은 관객들에게 박수를 받는 배우가 됐지만, 무명 시절에는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을 때가 많았다. 배우 생활 10년째에 접어들었던 지난 95년이 가장 힘든 시기였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웠고 이혼을 했다. 슬럼프에 빠져서 연극을 그만 둘 생각까지 했다. - '날 보러 와요'를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다고 하는데, 그토록 이 작품에 애착을 갖는 이유가 뭔가? 연극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때 이 작품이 전환점이 됐다. 내게 연기의 즐거움을 다시 알게 해 줬고 배우의 길에 매진할 수 있도록 자신감을 줬다. 첫 공연 때부터 매번 용의자로 역할을 맡았다. 논문을 통해 각각의 캐릭터가 작품에 형상화되는 과정이나 작가, 연출가 등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공연 제작의 실체를 드러냈다. - '날 보러와요'를 영화화한 '살인의 추억'에서도 용의자중 1명으로 출연하는데, 촬영 중의 에피소드는 없었나? 빨간 속옷을 입고 무덤 가에서 이상한 짓을 하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줄행랑을 치는 장면을 찍을 때였다. 맹장 수술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뛰는데 무척 힘이 들었다. 경찰 세 명을 따돌리려고 백 미터 달리기 선수처럼 뛰어야 했다. 아직 관객들과 함께 영화를 보지 못했다. 사람들이 어떤 장면에서 웃고 우는지 보고 싶다. - 현재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고도 들었다. 학생들에게 연기를 가르치고 있지만, 내가 배우는 것도 많다. 지금의 학생들은 다른 웃음과 슬픔을 가지고 있다. 시대가 변하면서 사람들의 생각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예전에는 미선이·효순이 사건이 가져다 준 그런 슬픔이 없었다. 월드컵에 열광하던 그 기쁨도 없었다. 학생들이 연기하는 모습에서 새로운 기쁨과 슬픔을 찾을 수 있다. - 무대 위에서의 진정한 성공이란 무엇인가? 성공의 기준을 어디에다 두고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몇 평 아파트에 사는지, 자식은 몇 명인지를 묻는다면 내 나이 또래의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나는 성공한 편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연기를 하면서 나를 보고 웃고 우는 관객들을 보면 행복하다. 행복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늙어서 '파파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배우로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