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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 12 중요기사

[동문]김예원 동문, 저서 <당신이 오늘은 꽃이에요>로 청춘을 이야기하다

문학 작품을 즐겨 읽던 평범한 학생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김예원(영어교육과 15) 동문은 나태주 시인과 <당신이 오늘은 꽃이에요>를 함께 출판했다. 한양대에서 써 내려 간 김씨의 청춘 이야기는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었다. 김 씨는 생애 첫 북 콘서트도 성공적으로 마쳤다. ▲김예원(영어교육과 15) 동문은 나태주 시인과 <당신이 오늘은 꽃이에요>를 출판하며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었다. 사랑하고 이별하고 행복하고 슬펐던 모든 시간에 시(詩)가 있었다 2015년, 당시 스물한 살 새내기였던 김 씨는 지쳐있었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시험공부 때문이었다. 바람을 쐬러 나오다 도서관 책장에 꽂혀있던 책 한 권을 읽었다. 나태주 시인의 시집 <꽃을 보듯 너를 본다>였다.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속 일상의 언어로 소중함을 노래한 시들은 김 씨의 마음을 적셨다. 그날부터 김예원씨는 나 시인의 팬이 됐다. 그는 노트 한 켠에 시를 옮겨 적었다. 옆에는 하루의 단상을 기록했다. 사랑하고 이별하고 행복하고 슬펐던 시간을 문장에 녹였다. 시를 읽고 생각을 정리하며 지친 마음을 달랬다. 김예원씨는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 나 시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시인은 화답했고 점차 교류가 늘어났다. 김 씨와 나 시인은 50년의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문학을 매개로 소통했다. 그러던 중 시인은 책 출판을 제의했다. 김 씨는 “내밀한 기록을 공개하는 것이 부끄러웠다”면서도 “시인에게 받은 공감과 위로를 더 많은 이들에게 돌려주고 싶어 출판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이렇게 스물다섯 청춘의 감정과 경험이 한 권의 책이 돼 세상에 나왔다. ▲김예원씨는 저서 <당신은 오늘이 꽃이에요>에 스물다섯 청춘의 감정과 경험을 담았다. (시공사 제공) 대학 생활을 이야기하다 <당신이 오늘은 꽃이에요>를 읽은 한양대 구성원들은 한 목소리로 “동질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김 씨가 대학 생활 중 보고 배운 느낀 점을 글에 담았기 때문이다. 에세이에 등장하는 인물 상당수는 한양대 재학 중 만난 사람들이다. 김 작가는 한양대를 자신의 가치관을 형성해 준 고마운 곳이라고 지칭했다. 이어 “학교에 다니며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채로운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김 씨는 영문학 전공 수업을 수강하며 문학 전반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특히 서현주 영어교육과 겸임교수에게서 사사(師事)하며 문학 작품과 삶과 연결하는 법을 배웠다. 그는 “문학적 감성을 통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보게 됐다”며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을 통해 많은 이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싶다”고 밝혔다. ▲김예원 작가가 한양대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당신이 오늘은 꽃이에요>를 집필했다. (김예원 작가 제공) 사람은 사랑을 통해 성숙한다 <당신이 오늘은 꽃이에요>를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제는 사랑이다. 김 작가는 사랑의 대상을 국한하지 않는다. 자신에서 출발해 가족, 연인, 주변인, 자연 등으로 사랑의 범위를 확장한다. 그는 “사람이 사랑을 통해 성숙한다”고 말한다. 김예원씨가 생각하는 사랑의 전제조건은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다. 김씨는 대부분의 사람이 “잘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에 빠져 고통받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안 되는 일이 있다”며 이를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심리학자 앨버트 엘리스(Ellis)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에 대한 당위성, 타인에 대한 당위성, 세상에 대한 당위성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소중함을 찾다 김 작가는 졸업을 앞두고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살았다. 집과 도서관을 오가며 바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향하던 찰나였다. “무심코 본 새벽 하늘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여행을 좋아하는 그는 새로운 여행지에 가면 하늘을 바라본다고 한다. 외국 하늘에 특별함이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그날 바라본 서울 하늘은 유난히도 맑고 푸르렀다고 한다. 김예원 작가는 “하늘을 올려다볼 시간이 없었음”을 자책하고 일상에서 소중함을 찾기로 결심했다. 그날부터 집에 돌아가며 관찰한 내용을 일기장에 기록했다. “매일 똑같은 일상이지만 다른 내용이 담겨있다”는 게 김씨의 생각이다. 눈이 내린 날에는 “학교 직원이 넘어지지 않도록 염화칼슘을 뿌려줬다”고 적었으며 어떤 날은 “집에 가는 길에 부모님과 전화했다”고 메모했다. 김예원씨는 이를 통해 “평범한 일상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며 "그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김예원 씨는 "평범한 일상에 감사하며 행복을 찾는다"고 말했다. 당신이 오늘은 꽃이에요 대부분의 사람은 일상의 피로 속에서 위로의 한 마디를 갈구한다. 하지만 그는 “주위 사람들이 자신의 고민에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삶에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김씨는 그럴 때 시를 읽었다고 한다. 시 속 화자는 다른 상황에 놓여있을지라도 그와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오늘은 꽃이에요>는 삶이 가진 소중한 가치를 암시한다. “당신이 오늘은 꽃이에요”라는 제목에는 “독자들이 책의 진짜 주인공”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김씨는 글로써 긍정적인 영향력을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김예원씨는 “오늘도 오늘을 살지만 내일도 오늘을 살아간다”며 “한 사람이 하는 작은 일이 서로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김예원 작가는 “독자들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전하고 싶다”고 밝혔다. 김 작가는 책을 출판했을 때까지만 해도 향후 집필 계획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모르는 사람들과 소통하며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역으로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다. 김 씨는 “좋은 글감이 모이면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찾아가겠다”며 향후 계획을 밝혔다. 글, 사진/ 오규진 기자 alex684@hanyang.ac.kr

2020-01 23

[동문][동행한대] 김동립 교수, 기부는 후배에 대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2019년 겨울호)

▲ 김동립(기계공학 97) 기계공학부 교수 기부는 후배에 대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김동립(기계공학 97) 기계공학부 교수 기계공학부의 독립건물이 될 기계관 설립을 위해 기계공학부 김동립 교수도 마음을 보탰다. 김동립 교수는 기계관 건립기금으로 지난 해 9월 1억 원의 기부금을 약정하면서 캠페인에 동참했다. 한양대가 있었기에 현재의 자신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김동립 교수는 자신이 받은 혜택과 사랑을 후배들에게 돌려주어야겠다는 마음을 늘 갖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기부 는 더할 나위 없이 큰 만족감을 준 선택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저는 한양대로부터 받은 자부심과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기부라고 생각합니다. 기부는 금액의 크기를 떠나서 시작하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사랑의 실천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Q1. 김동립 교수님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기계관 건립기금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현재 기계관 건립을 위한 활동은 얼마만큼 진행이 되었나요? A1. 많은 동문분들이 건립기금 캠페인에 참여해주셔서 기계관은 현재 설계 진행 중입니다. 기계공학을 선도하는 교육과 연구의 메카로 만들고 싶다는 것이 기계공학부의 바람입니다. 동문회에서 기계공학부에 맞는 공간설계를 위한 큰틀은 정해졌고 현재 세부적인 사안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Q2. 교수님께서 캠페인에 참여한 이유도 궁금합니다. 어떻게 이런 큰 금액의 기부를 결심하게 되셨는지요? A2. 지난 해 한양대가 4차 산업혁명 혁신선도대학으로 지정되고 제가 단장으로 활동하면서 융합지식에 대한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꼈습니다. 지금은 오픈된 문제를 여러 가지 지식으로 해결하는 PBL(Problem-Based Learning)과 융합 교육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생들이 모여서 토의하고 협업하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해외 유수의 대학들도 모여서 문제를 해결하는 식의 연구와 교육을 해나가는 추세입니다. 한양대 기계공학부에도 그런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그러던 중에 동문회에서 기계관 건립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기부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Q3. 학생들을 가르치시는 입장이기 때문에 기계관 건립에 대한 필요성이 더욱 컸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어떤 부분이 가장 기대가 되시나요? A3. 지난 해 2월 종료된 기계공학부 특성화사업이 있습니다. 그때 설계교육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었는데 학생들이 좋아했습니다. 뭔가 만들고 고민하는 공간이 부족했던 차에 생겨서 지금도 많이 활용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기계공학부 친구들은 수업을 듣고 바로 집이나 도서관을 가는 게 아니라 학생들끼리 자발적으로 모여서 프로젝트를 해내기도 합니다. 저에게 찾아와 지도를 해달라고 먼저 제안을 하기도 하고요. 그 아이템으로 창업을 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기계공학부 학생들은 실체가 있는 것을 만들려는 욕구가 강합니다. 그런 학생들을 위한 공간이 만들어져야 사회가 원하는 인재를 배출할 수 있습니다. 기계관이 그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합니다. Q4. 한양대 기계공학부를 졸업한 동문이신데, 재학 당시 학교로부터 받은 혜택이나 기억에 남는 도움이 있으셨나요? A4. 2005년도에 학부 졸업을 한 뒤 미국 스탠포드대학에서 유학을 했습니다. 하루는 상담을 해주는 지도교수인 아카데미 어드바이저가 저와 상담 중에 저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습니다. 그러더니 “내 기억에 남는 우수한 학생 중 하나가 한양대 출신이었다”며 “너는 한양대를 나왔으니 앞으로 잘 할 것이다.”라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 격려가 유학 시절 내내 저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스탠포드대학에서 잘 적응할 수 있었던 것도 제가 학부 때 잘 배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성장에는 한양대라는 기둥이 있었습니다. 자부심과 자신감을 심어준 한양대에 언젠가 제가 받은 도움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을 꾸준히 하고 있었습니다. Q5. 동문회 장학재단의 간사로도 활동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장학금을 받는 학생들을 보면서도 기부에 대한 생각을 하셨을 것 같습니다. A5. 장학재단 간사를 맡으면서 어려운 친구들의 사연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학비를 벌기 위해 밤에 세차 아르바이트를 하던 친구가 장학금을 받으면서 “이제는 공부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을 했을 때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후배들을 보면 뭔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래서 교수가 되고 얼마 안되어 월 2만 원씩 100만 원 정도의 금액을 기부한 적이 있습니다. 적은 금액이었지만 우리 후배들을 위해 쓰일 것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소액을 썼는데도 마음이 커지는 느낌이었습니다. Q6. 기부도 여러 선택 중 하나입니다. 기부를 선택하신 뒤 현재 어떤 마음이신지 궁금합니다. A6. 저에게 기부는 그 자체로 뿌듯한 선택이었습니다. 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뭔가 돌려줄 수 있다는 만족감이 저를 마음 편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한양대로부터 받은 자부심과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기부라고 생각합니다. 기부는 금액의 크기를 떠나서 시작하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사랑의 실천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2020-01 23

[동문][동행한대] 김장순 동문, 늘 생각해온 나눔이 후배들에게 빛이 되길 바라며 (2019년 겨울호)

▲ 김장순(국어국문학 79) 지아이엠시스템 대표 늘 생각해온 나눔, 후배들에게 빛이 되길 김장순(국어국문학 79) 지아이엠시스템 대표 김장순 대표는 1984년 제1기 교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에서 2년 간 유학생활을 했다. 학비가 절실했던 시기에 한양대에서 받은 장학금은 학업을 이어나가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때 받은 도움을 내내 잊지 않았던 그는 2010년부터 최근까지 세 번에 걸쳐 국어국문학과에 1억 원의 장학금을 기부했다. 앞으로도 힘들게 학업을 해나가는 후배들에게 조그만 빛이라도 되어주고 싶다는 김장순 대표와 마음 훈훈한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한양대 국어국문학과에서 국어학을 전공하는 훌륭한 후배들이 많아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합니다.'' Q1. 국어국문학과에 총 1억 원의 장학금을 기부하셨습니다. 학과를 위해 이 같은 기부를 결심하신 계기가 무엇인지요? A1. 저는 11남매 가운데 막내인데, 저희 집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스스로 학비를 책임져야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대학원도 장학조교 생활을 하면서 학비를 벌어서 다녔는데, 마침 교비유학생이라는 제도가 생겨서 신청을 했습니다. 다행히 성적이 좋아서 첫 교비유학생으로 뽑힐 수 있었습니다. 한양대는 국내에서 최초로 교비유학생을 모집한 학교입니다. 그 장학금이 없었다면 유학도 어려웠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한양대에서 받은 도움을 언젠가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기왕이면 국어국문학과 후배들에게 힘이 되고 싶었고요. Q2. 대표님의 아버님께서는 조선어학회 사전편찬위원이자 언어학자인 무돌 김선기 선생이신데요. 1992년에는 한양대에 장서 5천여 권을 기증하시기도 했습니다. 이 역시 후배 사랑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데요. A2. 대학원을 졸업한 후 전공과는 다른 분야인 LG화학에 입사를 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 언어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당시 결혼도 한 상태였고 아이도 키워야 하는 가장의 입장에서 어려운 면이 있었죠. 저의 선택에 후회는 없지만 국어국문학과라는 전공이 직업으로 이어 나가는 데 선택의 폭이 넓지 않다는 것이 늘 안타까웠어요. 특히 언어학은 더욱 그렇고요. 한양대 중앙도서관에 아버지 책을 기부해 ‘무돌문고’라고 별도의 서고를 만든 것도 우리나라의 국어학발전을 위함과 동시에 한양대 후배들이 언어학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길 위 하는 바람에서였습니다. Q3. 졸업하시고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학교와 후배들에 대한 관심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간 한양대와는 어떻게 인연을 유지해 오셨는지요? A3. 국문과 교수님들 가운데 정민 교수와 이도흠 교수가 79학번 동기라 정기적으로 만나는 벗입니다. 제 아내 역시 79학번 동기고요. 만나서 학교 이야기를 자주 하지는 않지만 한양대로 뭉친 인연들이기 때문에 학교에 대한 마음도 각별할 수밖에 없지요. Q4. 국어국문학과의 여러 학생들이 대표님이 기부하신 장학금의 혜택을 받았습니다. 혹시 발전기금을 기부하시면서 장학금이 어떤 학생에게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으셨을까요? A4. 지난 2019년 12월 장학금을 받은 후배들과 간담회 자리가 있었습니다. 장학생 여덟 명을 만났는데, 그 가운데 몸이 불편해서 어머니가 등하교를 시킨다는 학생이 기억이 납니다. 제 기부가 학생의 노력과 어머님의 수고에 조금이라도 힘이 된다면 참 좋은 일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언어학을 전공하는 후배들에게 장학금의 기회가 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듭니다. 현대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이 대부분이고 언어학을 하는 친구는 점점 줄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Q5. 대표님께서 한양대 후배들을 위해 기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데 영향을 주신 분이 있을까요? A5. 무돌문고를 만들 때 故 이종은 교수님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종은 교수님은 제 은사이시자, 저희 아버지의 제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2007년 아버님의 탄신 100주년 기념식도 아버님이 몸 담으셨던 서울대나 연세대가 아닌 이곳 한양대 백남학술정보관에서 개최했습니다. 무엇보다 한양대 국어국문학과에서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을 심도 있는 언어학자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가슴 깊숙이 박혀 있습니다. Q6. 대표님에게 기부란 어떤 의미일까요? 그리고 앞으로 기부에 대해 계획하시는 바가 있으신지요. A6. 살아가면서 ‘사랑의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느낀 순간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기부는 평생을 살며 꾸준히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양대에 기부를 하기 전에도 다니는 교회에 계속 기부를 해왔고요. 회사를 운영하면서 지난 3년간 회사 경상이익의 10%를 무조건 기부하는 것으로 스스로 약속했었고, 결국 실천했습니다. 앞으로도 회사의 이익을 꾸준히 상승시켜 더욱 많은 기부를 하는 것이 제 꿈이자 소망입니다.

2020-01 23

[동문][동행한대] 故 정순애 동문, 한양에 대한 사랑을 기부로 새기다. (2019년 겨울호)

▲ 故 정순애 동문 (간호학 74) 한양에 대한 사랑, 기부로 깊이 새기다 故 정순애 (간호학 74)동문 2019년 6월 13일, 故 정순애 한양대병원 간호사가 생전에 남긴 유언에 따라 한양대학교와 한양대학교병원에 각각 2억 원의 발전기금 전달식이 진행됐다. 1978년부터 2015년 퇴직할 때까지 37년 동안 한양대학교병원에 몸 담았던 故 정순애 간호사는 암 투병 말기에 자신의 유산이 모교와 후배들을 위해 쓰이길 바란다는 뜻을 남겼다. 한양대 간호학과에서 함께 공 부하고, 많은 시간을 한양대병원에서 함께 근무한 최정순(간호학 73) 동문과 박경복(간호 학 73) 동문을 만나 故 정순애 간호사의 한양대와 한양대병원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고인에게 한양대와 한양대병원은 자신의 전부나 다름없는 곳이었어요. 마지막까지 사랑을 실천하고 간 고인을 많은 분들이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성실하고 반듯하게 일했던 간호사 시절 故 정순애 동문은 1974년 한양대 간호학과에 입학한 후 졸업과 함께 바로 한양대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20대의 시작부터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40여 년을 한양대와 함께 지내온 셈이다. 몸이 편찮으신 어머니를 살뜰하게 살피던 효심은 간호사라는 직업적 자세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환자 한 명 한 명을 진심으로 대하는 모습을 최정순 동문은 아직도 기억한다. “간호사로 근무하는 동안, 정말 성실했어요. 옆에서도 누구나 인정할 만큼 근면하게 일했죠. 환자들 사이에서도 평이 좋았어요. 자기 자리를 떠난 적이 없을 만큼 반듯하게 일하던 사람이라 어디가 아프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죠.” 2011년에 유방암이 발병하자 故 정순애 동문은 수술과 항암 치료를 받고 1년 만에 복직을 했다. 동기들도 차츰 퇴직을 준비하던 시기라, 이때 같이 그만두고 쉬면 어떠냐는 제안을 했는데도 본인이 거부했다. 자신은 병원에서 아직 일을 더 해야 한다고 답했다. “유방암 말기였으니까 치료는 했다고 하지만 몸 상태가 예전 같을 수가 없죠. 걱정이 되어서 저희가 퇴직을 권유했는데도 듣지 않았어요. 그만큼 한양대병원과 환자들에 대한 소명의식이 확고했어요.” 2015년 2월 퇴직을 하고 난 뒤, 故 정순애 동문은 할 일을 마쳤다는 듯 11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 전에 모아온 재산을 정리하면서 한양대와 한양대병원에 큰 금액의 기부를 결심한 것은 평생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고 가장 자신답게 살아온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몸에 밴 검소함과 후배에 대한 지극한 사랑 故 정순애 동문은 외투 한 벌로 겨울을 날 정도로 평소 검소하게 생활해왔다. 박경복 동문은 한 번도 고인이 허투루 돈을 쓴 것을 본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기부금을 결심할 때 모아둔 재산을 보고 한 번 더 놀랐다고 말했다. “함께 살던 어머니가 편찮으시니 병원과 집만 오가는 생활을 했어요. 그래도 미혼으로 평생을 살았던 사람이 그렇게 큰 금액을 모아뒀을 지는 몰랐어요. 저희도 나중에 알고 우리가 알고 있던 이상으로 참 착실하게 살았구나하고 다시 한 번 깨달았어요.” 간호부 팀장으로 근무하면서도 성실한 태도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환자를 대할 때 차등을 두지 않고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이런 바른 모습은 후배에게도 귀감이 되었다. 유독 따르는 후배가 많았던 것은 사람을 챙기는 것에도 마음을 잘 썼기 때문이었다. “선배들에게도 깍듯했지만 후배들에게 마음을 많이 썼어요. 후배들이 뭐가 부족하고 뭐가 필요한지를 잘 알아챌 정도로 세심하게 살폈어요. 선배로서 자신이 뭘 도와줘야 하는지를 제때제때 아는 선배였죠. 그래서 후배들과 관계가 좋을 수밖에 없었어요.” 후배와 환자를 향한 사랑의 실천 최정순 동문과 박경복 동문은 故 정순애 동문에게 간호사라는 직업은 천직이었고, 한양대병원이 집과 같은 곳이었다고 기억한다. “대학을 들어왔지만 고등학교 다닐 때처럼 다른 데 한 눈 파는 일 없이 수업을 들었어요. 졸업하자마자 다른 데를 볼 것도 없이 한양대병원으로 취업을 했고요. 이런 생활을 하면서 동기들끼리 서로 애착도 강하고 직업에 대한 자부심도 남달랐죠. 고인도 한양대병원이 최고의 직장이라고 자주 말했어요.” 한양대와 한양대병원에 대한 사랑이 그만큼 깊었기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옆에 있었던 최정순 동문과 박경복 동문에게 故 정순애 동문은 후배와 병원을 위해 기부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직접 전했다. 한양대에는 간호학과 발전과 후배들을 위해 쓰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한양대병원에는 암 환자를 위한 호스피스 병동 건립에 힘을 보탰으면 한다는 뜻을 밝혔다. “고인에게 한양대와 한양대병원은 자신의 전부나 다름없는 곳이었어요. 자신의 기부금이 후배들과 환자들을 위해 쓰이길 원했는데 그 뜻이 잘 전달되어 저희로서도 감사한 마음입니다. 마지막까지 사랑을 실천하고 간 고인을 많은 분들이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러한 故 정순애 동문의 뜻을 기리기 위해 한양대에서는 현재 한창 공사 중인 간호학부 미래교육관에 ‘정순애 홀’을 조성할 예정이다. 평생 사랑을 실천해온 故 정순애 동문은 앞으로도 한양대와 한양대병원이라는 공간에서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이다.

2019-11 10 중요기사

[동문]김민식 동문, ‘김민식’이라는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가다

'뉴 논스톱, 내조의 여왕 등을 연출한 스타 PD',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 등 많은 책을 집필한 베스트 셀러 작가', '두 달 만에 구독자 3만 명을 돌파한 유튜버 계의 신성' 김민식(자원공학과 87) 동문을 설명하는 말들이다. 김 동문은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실력을 펼치며 한양을 넘어 사회 전반에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양한 색깔을 가진 김 동문과의 이야기를 담았다. ▲김민식(자원공학과 87) 동문은 PD, 작가와 유튜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가장 최신작인 MBC 드라마 <이별이 떠났다> 이후의 근황이 궁금합니다. “드라마 종영 후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내년에 차기 드라마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한양대학교 87학번 김민식 동문에게 한양대학교란 어떤 존재인가요? "처음 대학에 입학했을 땐 우울했습니다. 1지망이었던 산업공학과에 떨어지고 2순위였던 자원공학과에 합격했거든요. 자원공학과보다 산업공학과가 제 적성에 맞을 것 같았는데 원치 않는 과에 입학한 것이 참 아쉬웠습니다.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학생 진로 특강에서 늘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은 대학 1지망 학과에 탈락한 것'이라고 말해요. 원치 않는 과에 진학했기 때문에 늘 어떤 직업을 가져야할 지에 대한 고민을 했습니다. 그 고민은 영업 사원, PD, 작가 등 다양한 직업에 도전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지금은 정말 행복합니다." 대학생 시절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대학생 때 연극을 많이 봤어요. 좋아하는 여학생이 연극 동아리원이었거든요. 처음엔 연극이 재미없었지만 그 아이와 잘돼보려고 연극을 시작했습니다. 결국엔 차였지만요. (하하) 근데 신기하게도 연극은 여전히 좋고 재밌더라고요. 연극을 좋아한 덕분에 PD 할 때도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이어지진 않았지만 그 사람의 취향은 제게 남아있습니다." ▲김 동문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연출자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은 무엇인가요? "첫 작품인 ‘뉴 논스톱’이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공대 졸업 후 재밌는 일을 찾기 위해 많은 직업에 도전했어요. PD가 되기 전엔 영업사원으로 일했습니다. 방송계와 관련 없는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PD라는 직업에 확신이 없었어요. 재밌는 것과 잘하는 것은 다르니까요. ‘뉴 논스톱’은 그랬던 제게 확신을 줬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백상예술대상 신인상도 받고 많은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연출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무엇인가요? "협업입니다. 본인이 가장 잘난 사람일 필요가 없어요. 각 분야의 전문가를 모아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제 역할입니다." ‘공짜로 즐기는 세상’ 블로그를 소개해주시고, 시작하게 된 계기를 말씀해주세요. 블로그를 통해 전달하고픈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공짜로 즐기는 세상'은 제 삶, 책과 여행 등의 이야기를 담은 블로그입니다. 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글을 쓰고자 블로그 운영을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제 글을 읽고 ‘세상은 공짜로 즐길 수 있구나!’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도 여러 가지 재밌는 일들을 할 수 있거든요. 동네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것처럼 말이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책을 집필하게 되신 계기가 있나요? "예전부터 책을 너무 쓰고 싶어서 책에 들어갈 원고를 늘 작성했어요. 책을 쓰기 위해 열심히 글을 쓰며 노력했습니다. 열심을 다하다 보니 어느새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가 되었네요." 지난 2018년 作 '매일 아침 써봤니?'부터 올해 출간한 '내 모든 습관은 여행에서 만들어졌다'까지 집필한 총 7권의 책들 중 한양대 학생들에게 가장 추천해주고 싶은 본인의 저서는 무엇인가요? "기초회화 책 한 권만 외워도 영어를 잘할 수 있다고 말하는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라는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이 책에 제 30년 독학으로 습득한 영어 공부 노하우가 담겨있습니다.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도 영어에 대한 자신감을 키울 수 있는 책입니다. 또 제 대학생 시절을 담은 책이라 지금의 대학생들에게도 잘 와닿을 거라 생각해요." ▲김민식 동문의 저서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 표지. 김 동문이 한양대 학생들에게 추천한 책이다. (위즈덤하우스 제공) 유튜버 김민식의 주요 콘텐츠는 무엇인가요? "제 채널명은 ‘꼬꼬독(꼬리에 꼬리를 무는 구독)’(클릭 시 해당 유튜브 채널로 이동)입니다. 주요 콘텐츠는 책입니다. 독서와 관련한 다양한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방송을 제작하는 것과 비교했을 때 유튜브 채널 운영의 재밌는 점이나 인상적인 부분은 무엇인가요? "유튜브 활동이 훨씬 재밌습니다. TV 프로그램에서 PD는 잘 보이지 않는 존재입니다. 보통 작가와 배우에 대한 피드백이 대부분이거든요. ‘꼬꼬독’이라는 채널은 달라요. 대본부터 출연, 심지어 시청자의 반응까지 모든 게 온전히 제 것이라 더 즐겁습니다. 시청자의 반응을 즉각적으로 받을 수 있는 것도 유튜브의 매력 중 하나에요." 김민식 유튜버에게 ‘좋아요’와 ‘구독’이란? "‘좋아요’는 더 잘해야겠다는 ‘동기부여’고, ‘구독’은 더 잘해야겠다는 ‘책임감’입니다. 단시간에 구독자가 는 것에 참 감사합니다." ▲끊임없이 도전하는 김 동문. 그의 도전은 현재 진행형이다. 연출자, 더 나아가서는 언론인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조언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뭐든지 즐기는 게 우선이에요. 콘텐츠 만드는 것 자체를 즐겼으면 좋겠습니다." 선배로서 한양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20대에게 가장 좋은 건 연애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많은 학생들이 연애보다 학업을 중요시하더라고요. 학업도 좋지만 20대엔 연애도 하면서 많은 추억을 쌓았으면 좋겠습니다." 김 동문의 전성기는 특정 시점이 아니다. 그의 전성기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다. 언제 어디서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닦아가는 모습. 어쩌면 그에게 있어 최고의 작품은 ‘자신’일지도 모른다. 그의 전성기는 앞으로 더 아름답게 빛날 것이다. 뉴스H 기자노트 정연 국문기자: 김 동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치 맑은 종소리 같았다. 간결하지만 명쾌했다. 그래서 더 마음에 와닿았다. 모든 일을 즐기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김 동문의 모습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내 꿈과 비전을 위해,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 오규진 영문기자: 롤-모델인 김민식 동문과의 만남은 큰 행운이자 선물이었다. 취재를 기획하고 기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김 동문이 가진 습관이다. 순간순간을 기록하고, 시간을 쪼개 다양한 활동을 하며, 언제나 책과 함께하는 삶. 이를 본받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글을 마친다. 이현선 사진기자: 김 동문이 입은 체크무늬 셔츠는 농부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미소도 잘 익은 벼가 가득한, 황금 들녘에서 행복해하는 농부와 닮은 듯하다. 친근한 인상의 그가 던진 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지금을 즐기시나요?” 글/ 정연 기자 cky6279@hanyang.ac.kr 사진/ 이현선 기자 qserakr@hanyang.ac.kr

2019-10 20 중요기사

[동문]노승철 동문, 국내 최초 여행 동행 플랫폼 ‘트립버디’ 출시 (2)

㈜옵티마이즈 대표 노승철(산업공학과 13) 동문은 국내 최초 여행 동행 플랫폼 ‘트립버디’ 서비스를 진행 중이다. 트립버디는 지난 7월 안드로이드 앱을 출시했다. 한양대학교 창업동아리에서 시작한 작은 아이디어는 현재 수만 명의 사랑을 받는 멋진 사업 아이템으로 성장했다. 누구보다 빨리, 더 많이 뛰며 성공적인 사업가로서의 길을 걷고 있는 노 동문을 만났다. ▲국내 최초 여행 동행 플랫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옵티마이즈 대표 노승철(산업공학과 13) 동문. 노 동문이 운영하는 옵티마이즈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이롭게 하라’는 뜻이다. 회사가 꿈꾸는 세상에 고객이 함께 있는가를 성찰하게 하는 사명이다. 주력 사업 아이템은 ‘나홀로 여행객’을 위한 여행 중개 서비스인 ‘트립버디’다. 트립버디는 혼자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해 ‘여행 친구’를 연결해주는 앱 서비스다. 여행자 본인 성향에 맞는 사람을 적재적소에 맞게 연결하는 것은 물론 여행자들과 여행 상품을 공동 구매할 수도 있다. 동행 신뢰 시스템도 잘 갖춰져 있어 새로운 사람과도 걱정 없이 여행할 수 있다. 최근에는 유명 여행 플랫폼 회사와 제휴 계약을 맺어 1인 여행객을 겨냥해 6만 가지가 넘는 상품을 선보였다. ▲ 간단한 개인 프로필 등록 후 여행 장소, 날짜와 동행 인원 수 등을 작성하면 동행카드가 업로드 된다. (트립버디 제공) ‘트립버디’라는 사업이 인정받기까지는 몇 년간의 노력의 시간이 있었다. 그는 “아이템 시작인 위치 기반 서비스에 대한 고객의 반응은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며 "이를 계기로 이 아이템을 접목시킬 분야를 찾던 중 ‘여행’을 떠올렸다”고 말했다. 타겟 고객을 ‘1인 여행객’으로 전환한 그는 실제 고객과의 만남을 위해 긴 여정을 떠났다. 혼자 4개월간 여행을 하며 약 500명에 달하는 여행자들을 직접 만나고 한 명 한 명 인터뷰했다. 노 동문은 여행객들이 여행 경비, 경로와 여행자들 간의 만남 등에 갈증을 느끼고 있음을 발견했다. 인터뷰를 통해 받은 영감을 토대로 사업 아이템을 확장했다. 힘든 순간도 많았지만 창업에 대한 열정을 갖고 최선을 다했다. 결과적으로 노 동문의 사업 아이템은 SK텔레콤, 한양대학교 BI와 서울창업디딤터 PRE-BI 인큐베이팅 과정을 거쳤다. 마침내 수억 원에 달하는 각종 정부 지원을 통해 지금의 트립버디 서비스를 완성했다. ▲트립버디 앱은 구글 플레이스토어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다. (트립버디 제공)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노 동문은 수많은 고생 끝에 얻어낸 ‘서비스 런칭’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꼽았다. 그는 “고객에게 정말로 필요한 서비스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며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서비스를 고객에게 선보인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유명 여행 플랫폼 회사와 성사된 협업 역시 귀띔했다. “고객들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에 잊지 못할 성과입니다” 업무 하나부터 열까지를 해내야 하는 창업은 쉬운 일이 아니다. 노 동문은 왜 창업에 뛰어들었을까? 새로운 것을 향한 도전정신과 리더십이 지금의 ‘노승철 대표’를 만들었다. 무슨 일이든 주도적으로 도전하기 원했던 그는 어릴 때부터 창업을 꿈꿨다. 노 동문은 고등학교 시절 청소년임에도 불구하고 비즈니스 모델 특허 등록과 실용신안 등록 등 창업과 관련한 여러 가지 일들을 해냈다. 하나하나의 경험이 모여 300쪽에 달하는 창업 포트폴리오를 완성시켰고 창업 선도 대학인 한양대학교에도 입학할 수 있었다. 노 동문은 창업 성공의 공을 한양대에 돌렸다. 그는 “한양대에서 다방면의 도움을 받았다”며 “창업 초기에 한양대의 지원이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한양대는 창업융합학과 전공 수업과 간단한 프로젝트 사업 등 다양한 창업 지원을 통해 학생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한다. 특히 체계적인 창업 지원 시스템으로 창업동아리에서 시작한 사업이 법인설립 단계까지 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사무실, 기숙사, 자금과 멘토링을 제공하는 등 차기 CEO들을 위한 지원도 아끼지 않는다. ▲노 동문은 1인 여행객들이 ‘트립버디’를 쉽게 떠올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트립버디의 꿈은 현재 진행형이다. 노 동문은 “숙박 예약하면 ‘H’사, 항공 예약하면 ‘A’사가 떠오르듯 여행에도 각 분야별로 떠오르는 상징적인 브랜드가 있다”며 “많은 사람들이 1인 여행하면 ‘트립버디’를 떠올리도록 만드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또 “여행 관련 서비스답게 많은 사람들이 부담 없이 자주 여행을 갈 수 있도록 만들고 싶다”며 ‘일상의 여행화’를 강조했다. 끝으로 노 동문은 창업을 하고 싶은 한양대 학생들에게 격려의 말을 남겼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아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인터넷을 검색하기보다는 직접 부딪혀 보는 것을 추천한다”면서 “많은 고객들을 직접 만나며 니즈를 파악해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 정연 기자 cky6279@hanyang.ac.kr 사진/ 이현선 기자 qserakr@hanyang.ac.kr

2019-10 18

[동문][동행한대] 이경록 효봉물산 대표, 기부는 선한 영향력을 실천하는 방법이다. (2019년 가을호)

▲이경록(자원공학 80) 효봉물산 대표 기부는 선한 영향력을 실천하는 방법 이경록(자원공학 80) 효봉물산 대표 30년 가까이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 장학회를 운영할 정도로 오랫동안 나눔을 실천해 온 이경록 대표는 올해 한양대 ROTC 동문회장을 맡게 되면서 한양대 선후배들을 만날 기회가 잦아지자 마음에 계속 담아두었던 결심을 실행했다. 지난 4월, ROTC 재학생 후배들을 위한 발전기금 1억 원을 학교에 기부한 것이다. 나의 도움이 다른 도움을 불러일으킨다는 선한 영향력에 대한 믿음은 그를 꾸준한 기부천사로 만들고 있다. ''저는 어려울 때 도움을 받은 사람이 다시 어려운 사람을 도울 거라는 선한 영향력을 믿고 있습니다. 제 기부가 그런 역할을 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계속 해나가고 있습니다.'' Q1. 한양대 ROTC 동문회장을 맡고 계신데요, 주로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요? A1. 동문회장 자리는 1년씩 돌아가며 순임제를 하고 있는데, 올해는 22기 차례라 제가 동문회장이 되었습니다. ROTC 동문회는 대학 동문 모임이지만 군대 모임이기도 해서 우애와 유대감이 매우 강합니다. 매달 만나 친목을 다지는 활동을 주로 하지만 최근에는 재능기부를 하는 동문들에게 한학이나 민간요법을 배우기도 합니다. 또 동문회 집행부에서 한 달에 한 번 밥퍼 등 봉사활동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Q2. ROTC 발전기금 용도로 기부를 하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A2. 자주 방문하지는 못했지만 모교에 대한 애정은 늘 마음에 품고 있었습니다. 마침 올해 ROTC 동문회장을 맡아 오랜 만에 모교를 찾게 되면서 그 마음을 실천한 것뿐이고요. 거기에 이유를 하나 더 보태자면 우리 동문회에서도 기부 문화가 널리 퍼졌으면 하는 바람도 들어 있었습니다. 제가 현재 ROTC 동문회장이기 때문이 아니라, 좋은 일을 하면서 우리 동문회가 학교와 함께 걸어간다는 느낌을 공유하고 싶은 것이지요. Q3. 광성장학회를 운영하시면서 소년소녀가장이나 탈북 청소년들을 돕고 있으신데요. 어떤 동기로 장학회를 시작하셨는지요? A3. 운영 중인 광성장학회는 1990년에 설립해 어느덧 29년차가 되었습니다. 부친께서는 한국전쟁 시기에 이북에서 내려오셔서 어렵고 힘든 생활 끝에 재산을 모으셨습니다. 이북5도청에서 하는 장학재단에도 관여를 하셨을 만큼 사회공헌에 관심이 많았던 부친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아들인 제가 유지를 받들자는 마음으로 광성장학회를 만들었습니다. 대개 장학금이라고 하면 성적을 보게 마련인데, 저는 성적보다는 어려운 상황을 우선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생활이 어렵기 때문에 나쁜 길로 빠지는 아이들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Q4. 기부는 대표님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대표님께서 생각하는 기부의 가치가 궁금합니다. A4. 사실 저는 부친이 고생하시면서 생활을 잘 일궈내셨기 때문에 학창 시절에도 돈에 크게 구애 받지 않고 학교를 다녔습니다. 요즘말로 ‘금수저’라고 할 수도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부의 가치를 일찍 깨달은 것은 나눔을 실천하는 이들이 사회가 양극화 되는 것을 막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저는 어려울 때 도움을 받은 사람이 다시 어려운 사람을 도울 거라는 선한 영향력을 믿고 있습니다. 제 기부가 그런 역할을 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계속 해나가고 있습니다. Q5. 오랜 만에 모교를 방문하면서 한양대의 변화를 한 눈에 보셨을 텐데요. 기부자로서 한양대에 전하고 싶은 말이나 바라는 점이 있으시다면? A5. 제가 80학번으로 입학할 당시와 비교할 때 지금의 한양대 위상은 너무나 높아졌습니다. 지금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알아주는 대학이 되었습니다. 특히 공과대학의 위상은 국내 최고 수준이기도 하죠. 정말 대단한 성과입니다. 이 같은 한양대의 성장이 졸업생에게는 축복과 같지요. 졸업생 가운데 한 명으로서 학교에 감사드린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Q6. ROTC 발전기금이나 장학회 장학금 등 어려운 학생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신 것 같습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학업을 유지하는 학생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6. 저는 세상이 평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손가락도 각각 길이가 다른 것처럼 사람마다 그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길이가 짧다고 불필요한 존재도 아니고 길이가 길다고 더 잘난 존재도 아닙니다. 차이를 인정하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게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자기 가치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상실감과 열등감을 느끼지 않길 바랍니다. 지금 내가 겪는 어려움이 살아가는 데 힘이 되는 경험이라고 믿으면서 현재의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2019-10 18

[동문][동행한대] 김성윤내과의원의 김성윤 원장, 한양의대의 더 큰 발전을 바라다 (2019년 가을호) (1)

▲ 김성윤(의학 69) 김성윤내과의원 원장 한양 의대, 더 큰 발전을 바라는 마음으로 김성윤(의학 69) 김성윤내과의원 원장 국내 최초 류마티스 전문병원을 한양대 병원에 설립했던 김성윤 원장은 지난 해 의과대학 명예의 전당에 오를 만큼 의과대학의 발전과 함께한 동문이다. 2013년 익명으로 첫 기부를 시작해 조용하게 기부를 이어오던 김성윤 원장이 올해 1월 3억 원이라는 큰 기부를 또 한 번 실천했다. 한양대 의과대학이 지난 50년 간 국내 의료 발전에 큰 기여를 해온 만큼, 앞으로도 더욱 큰 걸음으로 나아가 글로벌 100대 의과대학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길 바라는 마음을 이번 기부에 담았다. 모교에 대한 지극한 애정, 김성윤 원장은 자신의 기부를 아주 작은 ‘사랑의 실천’일뿐이라 말한다. ''올해 5월 24일에 김성윤 LAB이 개관했는데, 감회가 정말 새롭죠. 제 기부가 이렇게 좋은 방향으로 쓰일 줄은 몰랐어요. 후배들이 좋은 상황에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Q1. 올해 1월 의과대학 발전기금으로 3억 원을 기부하셨는데요. 이렇게 큰 기부를 결심하신 계기는 무엇인지요? A1. 한양대의 교훈이 ‘사랑의 실천’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저 교훈으로만 여기고 스쳐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나이가 되어 보니, 이제야 그 의미를 알겠더군요. 한양대는 제가 학창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지만 제 직장이었기도 해서 좋았던 기억도 있고 힘들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20여 년 전, 병원을 그만 둘 때는 ‘다시는 한양대에 발을 디디지 않겠다.’고까지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최근에 그 생각이 바뀌었어요. 지난 해, 의과대학 명예의 전당에 제 이름과 얼굴이 새겨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때 ‘나는 한양대에 서운함이 많았는데 한양대는 여전히 날 잊지 않고 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지요. 학교로부터 사랑을 받는 느낌이었고, 저도 학교와 후배들을 위해 사랑을 실천하고 싶은 마음에 기부를 했습니다. Q2. 2015년에 바이오메디컬센터 건립기금, 2016년에 의과대학 발전기금 등 꾸준히 기부를 해오셨는데요, 그 중에서도 2013년에 하신 첫 기부는 1억 원이라는 큰 금액을 익명으로 하셨습니다. 익명을 원하셨던 이유가 있으신지요? A2. 1975년 한양대 병원에서 인턴생활을 시작하고 레지던트까지 마친 후, 1983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어요.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왔을 때만 해도 류마티스는 정형외과의 영역이었지요. 1989년 한양대 병원에 국내 최초의 류마티스 전문병원을 열었고,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떠나긴 했지만 병원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계속 있었지요. 그래서 류마티스 전문병원에 힘을 보태고 싶어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하고 조용히 기부를 했어요. 이번에 다 드러나 버렸네요.(웃음) Q3. 기부와 나눔에 대한 원장님의 평소 생각도 궁금합니다. A3. 미국 병원에 있을 때, 한쪽 벽에 ‘밀리언달러 트리’라는 게 있었어요. 병원에 기부를 한 사람들의 이름을 나무 잎사귀에 새겼는데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한국에 돌아가면 나도 이렇게 기부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해보기도 했고요. 의사라는 직업은 돈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기부나 나눔을 할 수 있는 직업이잖아요. 일본이나 미국 등 선진국을 보면 재능이나 노력 봉사 등 다양한 기부를 많이 하고 있어요. 우리 사회도 그렇게 발전해나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Q4. 지난 5월 의과대학 내에 김성윤 LAB이 개관했습니다. 직접 한양대에서 강의도 하셨기 때문에 이런 공간을 후원해주신 소감도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A4. 감회가 정말 새롭죠. 제 기부가 이렇게 좋은 방향으로 쓰일 줄은 몰랐습니다. 후배들이 좋은 환경에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뿌듯하고 감사합니다. 김성윤 LAB도 그렇고 의과대학 명예의 전당에 제 얼굴과 이름이 새겨져 있어서, 제가 아들에게 그랬죠. “나중에 나 죽거든 따로 묘지나 묘비를 세우지 말고 여기 와서 묵념을 해라.”고요. 이곳이야말로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잘 보여주는 곳이니까요. Q5. 한양대 병원에서 일하시면서 많은 후배들을 만나셨을 텐데요. A5. 후배나 제자들에게 자주 해주셨던 말씀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제가 입학한 해가 1969년입니다. 그 시절은 제게 가장 힘든 시기면서 가장 좋았던 시기였습니다. 힘들면서도 좋은 이유는 가능성 때문이지요. 제가 나아가려고 하는 꿈에 도달하려면 힘들게 노력할 수밖에 없는데, 그때는 꿈이 있었으니까 너무 행복한 시기예요. 그래서 학생들이나 후배들에게 “지금이 힘들지만 가장 좋은 시기다.”라고 말을 하게 됩니다. Q6. 2000년에는 총동문회에서 자랑스런 한양인상을 수상하시고 2003년에는 대통령 표창을 받으셨는데요. 이처럼 후배에게 귀감이 되고 학교를 빛내는 분으로 자리매김을 하기까지 원장님의 인생철학이 궁금합니다. A6. 한양대 병원에 처음으로 류마티스 전문병원을 세운 공이 인정되어 자랑스런 한양인상을 받고, 이희호 여사님을 오래 치료하면서 대통령 표창을 받았습니다. 류마티스 전문병원을 설립할 때는 ‘다른 곳에서 하지 않은 것을 하겠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서울대 병원도 세브란스 병원도 하지 못한 게 뭘까?’ 생각하다가 선택한 길이었지요. 미국을 건너간 것도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뭔가 새롭게 개척한다는 것은 길을 만든다는 것이지요. 젊은 시절, 그런 오기와 마음가짐이 저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의 그러한 도전을 한양대에서 받아주지 않았다면 결코 이루지 못할 성과였지요. Q7. 벌써 한양대에 네 번째 기부를 하셨는데요. 기부를 해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A7. 기부는 처음 시작하기는 힘들지만, 하고 나면 계속 더 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돈이 생기면 ‘뭘 더 사야지’하는 마음이 아니라 ‘기부를 해야지’하는 마음으로 변화했어요. 이런 것도 중독이라고 해야 하나요?(웃음) 한 번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꾸준히 해야 한다는 자세의 변화는 분명히 있습니다. 또 한가지 변화라면 주변 사람들에게 기부를 장려한다는 점입니다. 제가 하고 있기 때문에 기부가 주는 여러 가지 긍정적 변화를 더 잘 이야기해줄 수 있잖아요. 모교의 미래를 함께하는 것이니만큼, 기부를 하고 난 후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요즘은 젊은 세대들도 기부를 많이 하고 있는 걸로 아는데, 학교와 후배들을 위해 우리 세대들이 더 나서야지요. Q8. 한양대 의과대학에 중요한 획을 그으신 한 분으로서, 앞으로 한양대 의대가 어떻게 발전해나가기를 바라시는지요? A8. 지난해가 한양대 의과대학이 생긴지 5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이렇게 긴 역사를 지닌 의과대학이 국내에 몇 없지요. 지난 5월 참석한 ‘의대 50주년 기념식’에서 우리 한양대 의과대학이 글로벌 100대 의과대학을 목표로 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한양대 의과대학에는 훌륭한 교수진과 의료진이 많으니, 충분히 이룰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뒷받침이 되어 그 목표에 꼭 도달하기를 바랍니다.

2019-10 06 중요기사

[동문]김신비 동문, 한양대학교 최초 외교관 선발시험 합격 (2)

매년 10월이면 한양대학교 캠퍼스에서 5급 기술직 공무원 합격자들을 축하하는 현수막을 볼 수 있다. 특히 올해는 2차 합격자를 18명 배출하면서 전국 1위로 한양대의 위상을 높였다. 예년과 달리 올해는 기술직이 아닌 다른 분야의 합격자를 축하하는 현수막을 볼 수 있었다. 김신비(정치외교학과 12) 동문이 외무고시 폐지 이후 한양대 최초로 외교관 선발시험에 합격했다. 외교관 선발시험은 지난 2013년 외무고시 폐지 이후 신설된 자격시험이다. 외교관 선발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공인된 영어성적 ▲한국사 2급 이상 ▲일정 수준 이상의 제2외국어 시험 성적 요건을 갖춰야 하며 총 3번의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1차 시험은 선택형 필기시험으로 헌법과 공직적격시험(PSAT)으로 이뤄져 있다. 2차 시험은 통합논술 시험인 학제통합논술Ⅰ과 전공 평가시험인 학제통합논술Ⅱ을 통해 과목별 지식과 소양을 테스트한다. 그 뒤 3차 집단심화토의 면접과 개인발표 및 면접을 통해 최종합격자를 선정한다. 최종합격자는 국립외교원에 입교해 1년의 정규과정을 거친 후 외교관으로 임용된다. 올해는 1192명 중 41명의 최종합격자가 선발됐다. ▲김신비(정치외교학과 12) 동문이 수험 기간과 한양대 외교원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Q : 왜 외교관이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됐나요? A : 선화예술고등학교 재학시절 클래식 작곡을 공부했습니다. 당시에 서양 클래식에 한국적인 느낌을 가미한 곡을 쓰려고 했었죠. 자연스럽게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어떻게 알려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덕분에 외교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음악을 더 공부하기보다는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교환학생 경험이 저에게 확신을 줬어요. 저는 한국이 선진국이고 대부분의 외국인이 한국을 알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북한에서 왔니?, 남한에서 왔니?”였습니다. 이런 일을 겪고 난 뒤, 한국을 알리고 싶어 외교관이 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Q : 공부하면서 어떤 부분이 가장 힘들었나요? A : 많은 수험생분들이 공감하실 부분입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가족과 친구들의 많은 이해와 보살핌이 있었지만 결국 혼자 이겨내야 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운 일이 많았습니다. 가장 두려웠던 점은 하루에 12시간 넘게 공부만 하는데, 안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었어요. 운도 필요한 시험이기 때문에 “헛된 공부를 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한양대 국립외교원반에서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과 서로를 다독이며 심적으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Q : 국립외교원반에서 큰 도움을 받으셨다고 했는데, 국립외교원반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A : 외교관 시험을 준비하려고 했을 때, 시험 관련 정보를 몰라서 막막했는데 김성수 정치외교학과 교수님께서 국립외교원반을 추천해주셨습니다. 입반을 위해서는 외교관 1차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요건을 갖춰야 하고 외교원반에서 자체적으로 시행하는 1차 PSAT 모의시험과 면접을 봐야 합니다. 아마 외교원반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합격하지 못했을 거예요. 외교원반은 지원이 많습니다. 5급 공무원 강의 수강료가 매우 비싼 편인데, 이를 보조해줍니다. 재학생과 졸업생 간에 차이는 있지만 열람실과 기숙사도 지원해줍니다. 매달 모의고사를 보기 때문에 저의 위치와 실력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지원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면학 분위기도 좋았고, 대부분 같은 학교 출신이기 때문에 견제하기보다는 서로 도움을 많이 주는 분위기입니다. Q : 바로 국립외교원에 입교하시는 건가요? 어떤 외교관이 되고 싶나요? A : 오는 12월 말쯤에 입교하고 1년 동안 서울 서초구 양재동 국립외교원에서 52주 과정의 교육을 받습니다. 영어와 제2외국어도 공부해요. 그다음 해에 임용되면 광화문 외교부 청사에서 근무합니다. 외교관는 분야가 매우 다양합니다. 저는 의전(儀典)과 경제 분야의 외교를 담당하고 싶습니다. 국빈이 우리나라를 방문할 때 행사를 관리하는 분야인 의전은 우리나라를 알릴 기회가 많아요. 행사 도중에 돌발상황이 많이 발생하는 분야기도 합니다.제가 갈고 닦은 위기 대처능력을 활용하고 싶습니다. 한국은 수입수출 의존도가 높아서 경제 외교가 어떻게 흘러가느냐가 일상에 큰 영향을 줍니다. 국익을 위해 일하고 싶기 때문에 양자외교, 다자외교 모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Q : 마지막으로 합격하신 소감과 앞으로의 다짐 부탁드립니다 A : 합격 통보를 받고 기쁘기도 했지만 감사하는 마음이 컸습니다. 믿고 지켜봐 주신 부모님, 많은 지지를 준 친구들과 큰 도움을 준 외교원반. 이분들이 없었다면 꿈을 이루지 못했을 겁니다. 외교원반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만큼, 조금이라도 외교원반에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더 열심히 해서 모범이 되는 외교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글/ 윤석현 기자 aladin@hanyang.ac.kr 사진/ 이현선 기자 qserakr@hanyang.ac.kr

2019-09 02 중요기사

[동문]디자이너 조득래 동문, ERICA캠퍼스 캐릭터 ‘하냥이’ 만들다 (1)

한양대 ERICA캠퍼스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 팔로워 수가 지난 2018년 400여명에서 현재 4700여명으로 늘었다. 팔로워 수 급증의 중심에는 캐릭터 ‘하냥이’가 있다. 하냥이를 제작한 디자이너 조득래(테크노프로덕트디자인학과 11) 동문과 이야기를 나눴다. 하냥이는 한양인이라면 한 번쯤은 보았을 한양대 마스코트다. 한양대 ERICA캠퍼스를 대표하는 이모티콘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ERICA캠퍼스 공식 페이스북 계정에서는 하냥이 따라 그리기 대회를 진행했고, 학생들은 발표자료에 하냥이를 삽입하기도 한다. ▲ 한양대 ERICA캠퍼스 캐릭터 ‘하냥이’사진. (ERICA캠퍼스 대외협력처 제공) 조 동문 전에도 학교를 대표할 이모티콘을 만들려는 시도가 여러 번 있었다. 교수, 대학원생과 업체 등이 시도했지만 큰 인기를 끌진 못했다. 개발한 이모티콘들 모두 생김새와 선이 복잡해 변형이 어려웠다. 조 동문은 하이리온 캐릭터를 변형해 보다 단순한 형태를 구상했다. 캐릭터를 간단하게 구성하고 동시에 코믹한 매력을 살릴 수 있도록 만든 것. 학교로부터 외주 요청을 받아 지난 2017년 3월 하냥이 제작에 들어간 한 달 뒤 원안이 나왔다. 평소 조 동문은 학교가 먼저 학생들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채널을 운영하길 바랐다. 마스코트는 학생들이 SNS 페이지를 친근하게 느끼는데 한몫한다. 조 동문은 ‘하냥이’의 반응이 좋아 마스코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조 동문은 직접 대외협력처에 찾아가 당시 관리가 소홀했던 ERICA 페이스북 페이지의 홍보단을 만들겠다고 제안했다. 학교는 홍보단 인원을 모아보라고 화답했다. ▲ 조득래(테크노프로덕트디자인학과 11) 동문은 “캐릭터의 수명이 오래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쉽게 그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캐릭터를 하나의 마스코트로 자리매김시키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조 동문은 “인터넷 말투, 캐릭터 성격 설정 등 하나의 인물을 구현하는 작업이었다”고 이야기했다. 캐릭터를 활용한 다양한 콘텐츠 제작도 이어가야 했기에 어려움의 연속이었다고 밝혔다. 조 동문은 “하냥이 원안만 제가 개발하고 이후 SNS 홍보단의 모든 구성원이 함께 캐릭터를 만들어 갔다”며 팀원들에게 공로를 돌렸다. 실제 하냥이는 SNS 홍보단이 갖춰진 해인 2018년에 가장 많은 인지도를 얻었다. ▲ ERICA캠퍼스 페이스북 페이지에 개제된 만화의 일부다. 하냥이는 캠퍼스 이모티콘을 넘어 자유롭게 활용되고 있다. (ERICA캠퍼스 대외협력처 제공) “학생 누구나 캐릭터를 친근하게 느끼며 사용해주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조 동문은 하냥이 개발 초기부터 캐릭터에 관한 모든 라이선스를 한양대에 양도할 생각이었다고 밝혔다. 다만 학생들이 마음껏 사용할 수 있도록 오픈소스 유지 조건을 걸었다. 하냥이 캐릭터는 교내외 학교 홍보, 동아리 활동, 학술적 이용 등에 별도 저작권 표기 없이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다. 다만, 학교 비방 목적으로의 사용은 제한된다. 조 동문은 “학생들이 여러 형태로 변형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사용해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글/ 김현섭 기자 swiken1@hanyang.ac.kr 사진/ 이현선 기자 qserakr@hanyang.ac.kr

2019-07 15

[동문][동행한대] 박화영 인코코 회장, 기부는 당연한 사회적 의무입니다 (2019년 여름호)

▲ 박화영(성악 卒) (주)인코코 회장 기부는 당연한 사회적 의무입니다. 박화영(성악 卒) (주)인코코 회장 미국에서 성공한 기업가로 활동하며 다양한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 (주)인코코 박화영 회장은 지난 해 11월 모교인 한양대에 20억 원의 발전기금 기부를 약정했다. 박화영 회장이 기부에 대해 가지고 있는 태도는 확고하다. 기부는 사회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당연한 사회적 의무 중 하나라는 것. 이번 기부는 거기에 하나의 의미가 더해졌다. 앞으로 후배들의 꿈을 응원하고, 모교 성장에 함께하겠다는 시작의 의미다. ‘’제가 현재 살고 있는 미국에서 기부를 하고 있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지만 제가 태어난 대한민국, 제가 졸업한 모교의 후배들을 위해 기부를 할 수 있다는 건 더 큰 의미이지요.’’ Q1. 미국에 거주하시면서도 한국의 모교인 한양대에 발전기금 기부를 약정하셨습니다. 이번 기부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요? A1. 몇 해 전, 뉴욕대학을 다니는 딸에게 들은 말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학교의 장학기금이 너무 적다고 말해 궁금해서 어느 정도냐고 물었는데 제가 듣기에 상당한 금액이라 깜짝 놀랐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하버드 같은 대학은 장학기금의 규모가 훨씬 더 크더군요. 미국의 많은 대학들은 기부금을 펀드로 운영하며 그 돈으로 인재를 양성하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혜택을 받을 기회가 많을 수밖에 없죠. 그러한 내용을 알고 나니, 문득 모교인 한양대 생각이 났습니다. ‘한양대에는 어느 정도의 기금이 있을까’라는 궁금증이 들었죠. 학교의 운영은 학생들의 등록금만으로 꾸려나갈 수 없습니다. 기부금이 꾸준히 들어와야 미래를 위한 투자가 가능하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침 임덕호 전 총장님과 김종량 이사장님이 미국 동문 행사에 왔다가 저희 회사를 방문해주셨고, 이런 계기로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Q2. 평소 미국에서도 꾸준히 기부를 실천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회장님의 나눔 활동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으며, 어떤 마음으로 출발하셨는지 궁금합니다. A2. 미국 생활 초기에 어머니가 편찮으셨는데 의료보험조차 없었습니다. 치료를 마치고 청구된 치료비는 가난한 제가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병원에 솔직하게 치료비를 낼 돈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제 처지를 듣던 병원 담당자가 저에게 서류를 보내더니 거기에 저희 가족의 경제적 상황을 쓰라고 하더군요. 2주가 지난 뒤, 병원에서 운영하는 자선기금을 통해 어머니 치료비가 감면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사실 미국은 세금 등 제도적인 부분에서부터 사회적인 분위기까지 기부문화가 활성화될 수밖에 없는 배경이 탄탄하게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 또한 자연스럽게 기부를 당연한 사회적 의무라 생각하고 시작했고요. 뿌리교육재단에 박화영 장학금을 만들어서 매년 5명의 한인 장학생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힘든 가정을 돕는 패밀리터치에 기부를 하는 등 10년 전부터 기부를 꾸준히 해오고 있습니다. 기부는 혜택을 받은 사람이 다시 기부를 하게 되는 선순환을 만들어냅니다. 그 선순환의 힘을 믿어야 기부를 통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Q3. 2014년 총동문회로부터 ‘자랑스러운 한양인상’을 수상하시고, 올해 한양대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으셨는데요. 모교와의 꾸준한 인연이 회장님께 어떤 의미인지요? A3. 지난 35년 동안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살면서 한양대와의 인연은 거의 끊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2013년 미국에서 총장님과 이사장님을 만나면서 한양대와 인연이 다시 이어졌습니다. 덕분에 동문들과 교류도 많이 생겼지요. 학교에서 준 자랑스러운 한양인상과 명예공학박사 학위는 그동안 열심히 살았다는 격려로 여기고, 앞으로는 제가 할 수 있는 기부를 통해 한양대의 발전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제가 현재 살고 있는 미국에서 기부를 하고 있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지만 제가 태어난 대한민국, 제가 졸업한 모교의 후배들을 위해 기부를 할 수 있다는 건 더 큰 의미이지요. Q4. 2017년 한양글로벌인재 특강을 통해 후배들을 만나셨습니다. 당시 강연에서 하셨던 말씀 중 기억에 남는 내용이 있을까요? A4.특강 제목이 ‘나의 이야기’였습니다. 음악으로 성공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지만, 막상 미국에서 공부해보니 이 땅에서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좌절감이 들었습니다. 언어적 소통도 힘들었지만 문화적 차이가 더 큰 벽이었습니다. ‘나에겐 아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구나.’하고 절망도 했지요. 음악 공부만 했지 경제적인 공부나 활동을 해본 적 없던 제가 어떻게 가족을 위해 생활을 꾸려나가야 하나 막막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세상에 없던 제품인 ‘붙이는 매니큐어’라는 아이템을 생각해냈고, 그 제품을 만들기 위해 공학 공부까지 하게 되었죠. 그런 제 경험을 토대로 후배들에게 “지금 여러분이 하는 좌절은 가치 있는 좌절이다.”는 말을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실패와 좌절이 없는 사람은 전 세계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100% 승률을 가진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겠죠. 경제적으로 따졌을 때, 좌절을 그대로 남기면 ‘손실’이 됩니다. 대신 실수라고 생각하고 극복하면 ‘자산’이 되지요.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좌절을 자산으로 만듭니다. 모든 건 자기 자세에 달려 있는 것이죠. 미래를 꿈꾸는 우리 후배들이 좌절에 굴복하지 말고 극복하며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건넨 말이었습니다. Q5. 모교에 전달한 회장님의 기부금이 어떻게 쓰이길 원하시는지요? A5. 음악 전공자이면서도 세상에 없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공학자처럼 기계를 제작하고 특허를 냈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기에 처음에는 제 기부금이 공학도에게 쓰이길 원했지요. 생각이 바뀐 건 지난 2월, 한양대를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음악대학을 오랜만에 들러보고는 마음이 찡했습니다. 후배들이 좋은 시설을 갖춘 연습실이나 콘서트홀이 없이 공부하는 게 마음이 쓰이고 안타까웠지요. 그래서 이번에 다시 방문했을 때 음악대학에 필요한 건물을 지으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드렸습니다. 음악을 공부하는 후배들이 마음 놓고 연습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해서요. 음악대학 동문들이 함께 힘을 보태주시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같이 하면 더 아름다운 기부가 될 테니까요. Q6. 마지막으로 기부를 망설이시는 다른 잠재 기부자 분들에게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6. 많은 분들이 기부는 돈이 많은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기부는 왠지 큰 금액을 해야 한다고 여기지요. 하지만 기부는 준비된 사람만이 하는 게 아닙니다. 건물을 지을 때 기둥도 필요하고 못도 필요하지요. 기둥을 기부해야 기부가 아니라 못을 기부해도 기부를 한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돈이 없어 기부를 못하고 돈을 많이 벌면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해요. 기부를 할 형편이 안 된다는 생각 대신 내 형편만큼 기부를 하면 됩니다. 백 원이든 천 원이든 자신의 상황에 따라 기부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기부가 모여 계속 선순환이 되면, 꿈을 가진 젊은이들이 미래를 만들 수 있겠지요.

2019-05 28

[동문][NOW 꿈꾸는 사람들] ‘유척 정신’으로 무장한 대한민국 경제 사령탑 (1)

지난해 11월 9일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임명된 홍남기 동문은 한양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행정고시 29회로 공직에 입문했다. 예산 전문가이자 경제 관료로 초대 국무조정실장을 역임해 국정 과제에 대한 이해도가 넓다고 평가받는 그가 경제 전반을 아우르며 우리나라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정리. 편집실 ▲홍남기 동문(경제학 80) Q. 경제부총리가 된 후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A. 무엇보다 우리 경제의 활력 제고를 위해 정말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경제장관회의 등 각종 회의 주재, 국무회의·총리회의 등 참석, 경제정책 조율회의 진행, 산업 및 수출 현장 방문 일정 등이 빼곡합니다. 특히 취임 시 말한 소위 ‘1+2+3 약속’, 즉 경제팀 one 보이스(1), 정부-청와대 두 목소리(2) 없도록 조율, 소상공인·중소기업·대기업(3) 등 매주 현장 방문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매일 빠듯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최근 한 달 동안 미국 워싱턴DC에서의 G20 재무장관회의 및 IMF/WB(국제통화기금/세계은행) 총회 참석, 북경에서의 일대일로 정상회의 참석, 피지에서의 ASEAN+3(동남아시아국가연합+한·중·일) 재무장관회의 및 ADB(아시아개발은행) 총회 등 세 차례의 국제회의에 대표로 참석했습니다. Q. 현재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A. 1985년 한양대를 떠난 후 줄곧 경제기획원-재정경제원-기획예산처-기획재정부 등 한 부처에서 근무했습니다. 물론 청와대와 외교부(주미대사관) 파견 근무도 있었지만요. 공직을 시작한 경제부처에서 33년 만에 해당 조직의 장에 오르는 운 좋은 기회를 얻었습니다. 제가 공직 생활 내내 지녔던 신조는 두 가지입니다. 나의 역량과 실력을 높이는 것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열심히 성실하게 업무에 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념이 저의 자산이었고 성장에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물론 그 바탕에는 한양대에서 대학원까지 공부하며 축적한 경제학 지식과 늘 몸에 체화되도록 듣고 접했던 건학 정신이자 교훈인 ‘사랑의 실천’이 있었습니다. Q. 공직 경험을 통해 얻은 자신만의 철학이 있다면요? A. 오랜 공직 생활을 하며 한결같이 지닌 마음가짐은 정도(正道)입니다. 이는 업무나 생활에 있어 늘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개인적으로 조선시대 유척을 가장 좋아해 제 스스로 이를 ‘유척 정신’이라 이름 붙이고, 공직 생활 내내 가능한 이를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Q. 재학 당시와 지금의 대학이 다른 점이 있을까요? A. 제가 다닐 때 대학은 ‘학업+학문 연구’에 중점을 뒀다면, 지금의 대학은 ‘학문 연구+산학 협동+창·취업 연계’ 등으로 그 영역이 크게 확대되는 양상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양대는 순수 학문 연구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산학연 연계 강화 및 활발한 창업 연구·지원 등으로 발 빠르게 선제 대응해 온 대학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서울캠퍼스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ERICA캠퍼스의 부각이 가장 뚜렷한 사례라고 볼 수 있지요. Q. 대학 재학 시절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이 있나요? A. 한양대 기숙사에서 졸업할 때까지 숙식하며 공부했기 때문에 제게는 한양대 캠퍼스 자체가 가장 그리운 곳입니다. 대학교, 대학원 생활의 모든 것이 한양대 캠퍼스에 녹아 있어 제 청춘이 그대로 머문 곳이기도 하지요. 기숙사에서 저를 포함한 80학번 동기 네 명이 함께 고시 공부를 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합격했습니다. 모두 기획재정부에서 함께 공직 생활을 하고 퇴직했지요. 저만 아직 공직에 복무 중입니다. 한양대 출신이라는 동지애와 친우애가 공직 생활 내내 큰 자산이었습니다. Q. 예전 인터뷰에서 다시 대학생으로 돌아간다면 ‘세계 여행’을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으신가요? A. 예. 변함없습니다. 대학생에게 공부가 전부는 아닙니다. 큰 세상을 경험해 보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며 글로벌한 시야를 갖는 것이 정말 중요해요. 개인적으로는 공직 기간 중에 영국 유학(2년), 미국 워싱턴주정부 예산성 파견 근무(2년), 워싱턴DC 주미한국대사관의 경제공사참사관 근무(3년) 등 해외 근무 경험과 수많은 해외 출장으로 글로벌 마인드의 중요성을 더욱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대학생으로 돌아간다면 주저 없이 세계 여행을 할 겁니다. 퇴직 후 가장 하고 싶은 저의 위시 리스트 중 하나가 가보지 않은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시야와 견문을 넓히는 것이기도 합니다. Q. 한양의 후배 또는 동문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A. 지금 우리는 초연결, 초지능화로 대변되는 4차 산업혁명의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이제까지 인류가 경험해 보지 못한 대변화가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었다면, 지금은 빠른 물고기가 느린 물고기를 잡아먹는 격이랄까요. 이런 변화에 적응하는 게 쉽진 않겠지만, 빠르게 적응할수록 기회와 가능성은 그만큼 많아질 것입니다. 우리 한양대 동문 그리고 후배들께서 시대를 잘 읽고 그 흐름을 타서 4차 산업혁명의 주역으로 우뚝 서길 기대합니다. 사랑한대 2019년 05-06월 (제248호) 이북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