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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 01

[동문]`난타, 그 떨림의 전율`-PMC프로덕션 대표이사 이광호 동문(섬유 82년졸)

'Good Vibes!(기분 좋은 떨림)' 세계적인 언론 뉴욕타임즈는 난타를 이렇게 평가했다. 1997년 국내공연을 시작한지 6년만의 쾌거다. 난타는 역사상 아시아 작품으로는 두 번째, 우리 작품으로는 첫 번째로 뮤지컬의 본고장 브로드웨이 무대를 밟았다. 우리의 작품이 통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도 잠시, 난타의 '기분 좋은 떨림'에 파란 눈의 관객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이 성공을 발판으로 이제 난타는 브로드웨이에서 전용관을 준비하며, 장기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아무도 가지 못했기에 격이 다른 무대로만 여겨졌던 브로드웨이, 그곳에서 우리가 먼저 울고 웃었던 난타가 '쿠킨(Cookin)'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뮤지컬 작품으로 공연 전문기업으로 성장한 PMC 프로덕션, 그 중심에 대표이사이자 경영전문가인 이광호 동문(섬유 82년졸)이 있다. 난타, 문화산업의 새 지평 열다 물론 난타가 처음부터 성공가도를 달려온 것은 아니다. 외국 배급통로가 전무했던 당시, 난타를 브로드웨이 무대에 세우겠다는 신념 하나만을 가지고 송승환 공동대표는 대형 프로모션에 맨몸으로 부딪혀 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공연 비디오 테이프 하나만을 가지고 찾아온 그를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난관에 부딪히고 보니, 저희들은 거꾸로 생각해 보기로 했습니다. 세계적인 공연을 우리나라에 누가 팔았냐는 것이죠. 찾아보니 브로드웨이 아시아의 시몬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우리의 공연을 보여주었고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준비가 모자랐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브로드웨이 공연을 위한 여러가지 절차를 요구했고 브로드웨이에서의 성공은 그 과정에 맞춰 준비해 온 결과라고 할 수 있죠." 브로드웨이 아시아가 요구한 것은 세계적인 뮤지컬이 모이는 에딘버러 페스티발에 참가하는 것. 난타는 99년 페스티발에서 좋은 평가를 받음으로써 하나의 공연에서 종합적인 문화상품으로 거듭나는 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그 때부터 이광호 대표의 진가는 발휘되기 시작했다. 이 동문의 첫 번째 시도는 국내 최초 전용관 건립과 난타를 외국인에게 알리는 것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그 첫 번째 타겟은 당시 외국 관광객의 60퍼센트 이상을 점유했던 일본인이었다. "전용관을 지으면서 제일 먼저 고려한 것은 한국에 가면 난타라는 공연이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위해 일본에서 3년 동안 투어 공연을 했고 TV광고, 여행사 패키지 등 동원 가능한 모든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처음 전용관을 만들고 직원들에게 외국인 한 명 당, 천 원씩 인센티브를 약속했는데, 얼마 후에는 직원들의 수입이 월급보다 인센티브가 많아졌습니다(웃음). 전용관 관객의 외국인 점유율이 50퍼센트만 넘으면 장기공연을 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는데, 첫 해에 50퍼센트, 두 번째 해에는 80퍼센트 수준까지 점유율이 올랐습니다." 문화산업의 최대 경쟁력 '재미' 난타의 브로드웨이 진출의 의미는 크다. 지금까지 아시아의 어떤 공연도 브로드웨이에서 성공하지 못한 현실에서 난타에 대한 호평과 장기공연을 위한 전용관 건립 추진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 과연 다른 공연들과 차별화된 무엇이 난타의 성공요인일까. 이광호 동문은 그러한 질문이 우문이라고 한다. 전 세계인에게 통용될 수 있는 요소가 무엇인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상업성 즉 흥행성입니다. 브로드웨이라는 곳은 전 세계에서 가장 상업적인 지역입니다. 평을 받을 때 예술성이 너무 없으면 나쁜 평을 받을 수 있지만, 흥행성 또한 큰 평가기준입니다. 브로드웨이에선 손님이 들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초기비용이 들었다고 해도 1주일만에 공연을 내려버립니다. 잘 되는 작품은 손익분기점으로 떨어질 때까지 공연을 계속하죠. 10년이든 20년이든 말입니다. 그것이 브로드웨이의 생리입니다. 어느 나라 사람들이든지 뉴욕에 가서 보고 재미있을 수 있느냐가 브로드웨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냐의 가장 중요한 판단사항입니다." 이광호 동문은 PMC 프로덕션 공동대표에 취임하기 전까지 충남방적 전무이사라는 직함만을 가지고 있었다. 섬유공학과를 졸업하고 섬유산업에 종사하는 정석의 코스를 밟아왔던 것이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문화산업에 뛰어들어 어느덧 정상에 서 있다. 하지만 그는 문화산업과 일반기업이 생각만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에 대한 명확한 구분에서 비롯된다. "순수예술은 정부의 재원이나 각종기관에서 지원 육성을 해줘야 합니다. 그것이 바탕이 되었을 때 상업예술이 꽃을 피울 수 있죠. 하지만 우리 회사의 경우 철저한 상업예술입니다. 즉 흥행을 전제로 한 공연을 해야 한다는 것이죠. 저는 공연을 가지고 기업화하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렇다면 유지발전이 제1의 목표입니다. 문화산업이 제조업체의 경영만 가지고 가능한 분야는 아니지만 철저하게 경영적인 것을 가미시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2의 난타를 찾아라 이광호 대표가 요즘 노력하고 있는 것은 난타의 해외 공연과 함께, 제2의 난타 찾기. 그의 문화산업 지론인 지속적인 이익창출을 위해서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이다. 회사명을 공연(Performance), 음악(Music), 영화(Cinema)의 첫 철자로 따온 것도 포괄적인 문화산업을 진행해 보겠다는 그의 욕심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제 문화산업과 함께 난타라는 브랜드 가치를 이용한 의류·외식 산업까지 확장을 꿈꾸는 그의 표정은 진지하다. "제2의 난타를 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 진행중이죠. UFO와 같이 다른 공연작품도 상품화를 위해 노력 중이지만, 영화나 음악산업과 같은 보다 대중적인 분야로의 진출도 준비중에 있습니다. 이와 함께 비록 우리 작품이 아니더라도 외국에 소개할 수 있는 좋은 작품이 있다면 우리가 가진 노하우를 통해 교량 역할을 해 볼 의향도 가지고 있죠. 너무 광범위하다고도 볼 수 있지만 모두 연관된 분야들 입니다." 대학 입학 이후 PMC 대표이사직을 맡기 전까지 섬유산업과 20여 년을 함께 해온 이광호 동문. 전공과 다른 분야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덕담을 부탁한다는 말에 처음부터 전혀 다른 길을 찾는 것은 좋은 모습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그 전공을 선택했냐는 것이다. 이 동문은 현재 자신이 공부한 분야에서 먼저 최고가 되라고 충고한다. "저는 처음부터 다른 길을 찾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봅니다. 4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배운 것을 통해 그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것이죠. 저의 경우나 주위사람들의 경우를 봐도 그 후 인생에서 몇 번의 다른 분야로 나아갈 기회는 찾아옵니다. 그 때는 어느 쪽이 자신에게 도움이 될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새로운 분야를 시작한다는 것은 안전한 길을 갈 때와는 또 다른 성취감을 느낄 수 있으니까요." 프로덕션을 경영하며 느끼는 가장 큰 보람이 전체 수입의 90퍼센트 이상이 외화 수입이라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 동문. 그의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속적인 사업 확장과 함께 언젠가는 돌아가고 싶은 강단이 있기 때문이다. 겸임교수를 그만 둔 이유를 묻는 말에 제자들에게 경영학을 가리키기에 경영자로서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다고 말하는 이광호 동문. 본인 스스로 성공한 경영자라는 판단이 들었을 때 강단에 돌아갈 것이라는 그의 고백이 북소리만큼 경쾌하게 들린다. 학력 및 약력 이광호 동문은 본교 섬유공학과를 1982년 졸업했다. 졸업 후 충남방적 관리부장을 거쳐 1994년부터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일과 학업을 꾸준히 병행한 이동문은 1988년 한남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1992년 대전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7년에는 청운대 경영학과 겸임교수로 강단에 서기도 했던 이동문은 1996년 PMC 프로덕션 공동 대표이사로 부임했고, 지난 1999년부터는 E&T 대표이사로도 활동 중이다. 사진 : 김태호 학생기자 magicguy@ihanyang.ac.kr

2003-10 08

[동문]"모든 프로그램의 주제와 소재는 사람입니다."

90년대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사람들에게 '정은임의 영화음악 듣니?'라는 질문은 친구사이에 동질감을 확인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 적어도 그 늦은 시간까지 깨어 있는 친구는 대개 사춘기의 열병을 겪으며 '한 고민하는' 친구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음악이 널려있는 지금도 사람들은 굳이 방송국에 사연과 신청곡을 담은 엽서를 보낸다. 라디오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화창한 가을날 오후, MBC 8층 라디오 편성국을 찾았다. 그곳에는 시간이 가도 변하지 않는 친구 같은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MBC 라디오의 지휘자 홍동식 동문(신방 84년졸)이 있었다. 그를 만나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드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라디오를 좋아한 소년, 라디오 PD가 되다 "어렸을 적 저희 집 안방에 진공관 라디오가 하나 있었거든요. 라디오를 켜면 진공관이 예열되면서 '우웅' 하는 소리가 나는데 그 부드러운 소리를 참 좋아했습니다. 텔레비전이라고 해 봤자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나왔는데 뭐, 그 때는 텔레비전이 너무 비싸서 아주 부잣집이 아니고서는 엄두도 못 낼 물건이었지요. 중·고등학교 때에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팝송 듣는 걸 아주 좋아했습니다. 60년대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나오면서 라디오를 가지고 다닐 수 있게 되었지요. 덕분에 마당에서 책을 읽으면서도 라디오를 들을 수 있게 되었고……. 지금처럼 조그마한 건전지가 없어서 라디오 뒤에 벽돌 만한 건전지를 붙여서 테이프로 칭칭 감아서 썼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홍 동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에게 있어 라디오는 '생활 그 자체'라고 말한다. 학창 시절을 라디오와 함께 보낸 홍 동문은 대학에 들어와 학교 방송국에서 PD로 활동하며 경험을 쌓았고, 결국 MBC에 입사해서 라디오 PD가 되었다. 그 후 2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기까지 홍 동문은 '별이 빛나는 밤에', '김미숙의 음악살롱', '정은임의 영화음악', '김흥국·박미선의 특급작전' 등 MBC 라디오의 간판 프로그램들을 담당해 오고 있다. 모든 프로그램의 주제는 '사람' 홍 동문은 20년 동안 제작한 모든 라디오 프로그램의 주제와 소재가 모두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는 라디오라는 것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하는 도구이고, 그렇기에 그것은 매우 매력적인 도구라는 것이다. 입사 초기에 그를 비롯한 두 PD의 손을 거친 '길 따라 물 따라'라는 여행 프로그램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가 가진 프로그램에 대한 이런 생각들을 쉽게 엿볼 수 있다. 스테레오 녹음기도 없던 그 시절에 모노 녹음기 하나 달랑 들고 낙동강 상류인 안동·청송에서부터 전라도 끝자락인 광양·장성까지, 그는 격주간으로 이어진 소리를 찾아가는 대장정을 펼쳤다. 격주마다의 출장을 마다하지 않고 만든 프로그램에 강한 애착을 보이는 홍동식 동문. 그럴 수 있었던 원동력을 묻는 질문에 그는 단지 '총각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며 멋쩍게 웃는다. "'길 따라 물 따라'를 만들면서 최대한 그 지방 사람들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많이 담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물론 관광지나 풍광, 인간문화재 같은 유명하고 특별한 이야기도 담았지요. 하지만 정작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부분은 보통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였지요. 빨래터에서 아낙들이 나누는 대화 하나하나, 예를 들자면 '누구 아들은 공부를 잘 해서 좋겠다'든지 '누구네 아빠는 요새도 술이 여전해서 그 집 엄마 고생 깨나 하겠다' 같은 사람 사는 곳에서는 어디서든 들을 수 있는 그런 이야기들 말입니다. 다양하지만 결국 어디에나 있는 그런 삶의 진솔한 모습들을 담아내는 것이 제작의 최우선 목표였습니다" 멀티미디어 시대의 라디오 '미래는 있다' 멀티미디어 시대다, 디지털이다 해서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만큼 방송 환경 역시 빠르게 변하고 있다. 새로운 환경은 새로운 생각을 요구하는 법. 급변하는 방송 환경에서의 라디오의 자리는 과연 어디쯤일까. 홍 동문은 라디오의 미래는 '분명히 있다'고 말한다. 그는 다른 매체와 비교해 가며 라디오가 가진 장점을 조목조목 설명한다. 그것이 바로 라디오가 없어질 수 없는 이유라는 것이다. "앞으로 라디오도 디지털화되어 지금보다 훨씬 많은 대역폭을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텔레비전의 HDTV와 같이 라디오의 음질도 혁명적으로 개선될 것이란 얘기죠. 저는 개인적으로는 라디오방송이 앞으로 더욱 전문화·세분화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라디오는 그런 면에서 변화에 아주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미디어라고 생각합니다. 기존 어떤 미디어에 비하더라도 라디오가 가지는 속보성과 현장성은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라디오는 텔레비전보다 쌍방향 미디어의 총아인 인터넷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요새는 음악 프로그램을 보더라도 DJ가 스튜디오 안에서 실시간으로 청취자들의 의견을 검색하여 프로그램에 반영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텔레비전에서는 여러 가지로 힘든 일이지요." '열린 생각' 가진 후배 기다린다 예나 지금이나 PD는 많은 대학생들이 선망하는 직업이다. 개인이 가진 창의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다는 면에서 PD라는 직업이 가진 매력은 각별하다. 홍 동문 역시 MBC 라디오 PD가 되기 위해 수 백대 일의 경쟁을 거쳐야 했다. 그는 라디오 PD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친절하지만 뼈 있는 조언을 던진다. "다른 모든 일도 그렇지만 이 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적극적인 자세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어려움과 모자람이 없이 자란 때문인지 무엇에 대한 좋아하고 싫어함이 지나치게 분명한 편입니다. 특히 면접을 들어가 보면 특정 음악 장르에 지나치게 빠져서 그 외의 것들은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 취향에 함몰되어 있는 젊은이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송, 특히 라디오 PD라는 일은 사회와 세계의 다양한 면에 대한 종합적인 사고와 지식이 매우 중요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방송의 컨텐츠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라디오는 텔레비전보다 PD의 창의력을 더욱 극대화할 수 있는 열린 공간입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열린 생각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후배들을 기다립니다" 홍 동문은 바쁘다. 인터뷰 도중에도 그의 휴대전화는 10분이 멀다하고 울려댄다. "지금 인터뷰하는 중이니까 제가 7분 정도 있다 전화하겠습니다"라고 조용히 이야기할 정도로 그는 1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 쓰고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 촬영을 위해 그의 책상으로 가니 컴퓨터에는 결재할 서류들이 올라와 있다. 바쁘게 회의에 들어가는 홍 동문을 붙잡고 마지막으로 사무실 명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노라니 한 직원이 웃으며 홍 동문에게 농을 친다. "홍 부장님, 정장 입으신 거 처음 봅니다" 사람 좋은 웃음으로 대답하는 홍 동문,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라디오처럼 그 역시 20대의 젊음과 열정을 따끈하게 간직하고 있는 '캐주얼한' 한양인이었다. 학력 및 약력 1984년 본교 신방과를 졸업하고 MBC 라디오 PD로 입사했다. 20년 동안 MBC 라디오에서 일해 오며 '별이 빛나는 밤에', '김미숙의 음악살롱', '정은임의 영화음악', '손석희의 시선집중' 등과 같은 MBC 라디오의 간판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MBC 라디오국 2차장과 1차장을 역임하고, 라디오 1CP(Chip Producer)를 거쳐 지난 해 3월부터 MBC 라디오의 편성기획을 총괄하고 있다. 2001년에 민언련 민주시민언론상과 2002년 PD연합회 라디오작품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사진 : 노시태 학생기자 nst777@ihanyang.ac.kr

2003-10 01

[동문]`인텔의 아성에 던진 도전장` AMD코리아 대표 박용진 동문(전기공학 82년졸)

'640kb이면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 메모리 용량이다.' 컴퓨터 황제라고 불리는 빌게이츠가 1981년 공식석상에서 한 말이다. 32비트 최첨단 마이크로프로세서(이하 CPU)와 40GB의 용량을 가진 PC를 사용하고 있는 오늘날에 본다면 이는 분명 실패한 미래예측이다. 현대 과학문명 수준을 측정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CPU. 그리고 세계 CPU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인텔과 AMD. 지금까지 2인자의 자리에 만족해야만 했던 AMD가 최근 64비트 CPU를 앞세워 컴퓨터 업계의 지각변동을 선언했다. 인텔의 아성에 도전하는 AMD 코리아 한국대표 박용진(전기공학 82년졸)동문을 만나 그 숨은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PC의 진화, 64비트로 승부한다 박 동문을 만나기 위해 찾아간 삼성동 AMD 코리아 사무실에서는 세계적인 회사라는 느낌보다 소규모 벤처회사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가 풍겼다. 자유분방하면서도 자신들의 업무에 분주한 직원들의 모습은 전형적인 벤처회사의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기다리던 박용진 대표 역시 직원들과 같은 캐주얼 복장.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에 대해 그는 오늘이 '캐주얼 데이'라고 설명했다. 매주 금요일은 전 직원이 캐주얼 복장을 하고 출근을 한다는 것이다. "회사의 규모와 관계없이 우리회사 역시 기본적으로 컴퓨터 즉 IT 관련 업종입니다. 창의성을 중시하기에 회사 분위기는 자유롭습니다. 제가 얼마 전 미국 본사에 갔더니, 그곳은 지나치게 자유로운 분위기가 오히려 문제로 부각되어 넥타이와 와이셔츠 등 복장을 일정수준 규제한다고 하더군요(웃음). 자유로운 분위기에서만 기대될 수 있는 창의성은 IT 업계의 필수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AMD 코리아는 지난 25일, 그랜드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64비트 PC용 CPU 신제품을 선보였다. 4비트로 시작한 CPU의 발달은 컴퓨터 발달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지난 1985년, 개인용 컴퓨터의 32비트 시대가 시작된 이후 약 20여 년 동안 개인용 컴퓨터는 진화하지 못했다. 개인용 64비트 컴퓨팅 시대를 선언한 AMD 코리아 김용진 사장은 64비트가 32비트에 비해 산술적으로 2배만 좋아진 것이 결코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는 64비트 CPU의 개발을 'PC의 혁명'이라 소개하고 나섰다. "이번에 소개된 모델 '64 FX 51'은 일반 CPU와는 확연히 다릅니다. 물론 64비트 CPU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올해 초 애플컴퓨터가‘애플 파워 맥 G5'에 채택했고, 인텔도 서버용 64비트칩 이타니엄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우리 제품이 가지는 의미는 첫 번째로 개인용 컴퓨터용 64비트 칩을 개발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32비트 환경에서도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변환기 컴퓨터 유저들에게 이러한 특징은 상당한 매력으로 다가갈 것입니다." 이러한 성과에 대해 경쟁사인 인텔사는 64비트 CPU에 대해 애써 평가절하를 시도하는 모습이다. 개인용 컴퓨터는 32비트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근래의 IT기술에서 중요한 점은 '필요에 의한 기술 개발보다 새로운 기술이 수요를 창출해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기술력을 가진 AMD의 도전은 인텔의 아성에 위협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인텔' 브랜드 시대의 종언 박 동문은 AMD의 강점을 가격에 대비해 뛰어난 성능이라고 설명한다. 이에 비해 인텔사는 상당부분 브랜드 파워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 이런 박 동문의 분석은 파워유저들에게는 이미 정설로 통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소수의 파워유저들만을 고려해 영업을 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하기에 박 동문은 앞으로 공격적인 마케팅이 시작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제품 선택 성향을 '브랜드'라는 단어로 설명한다. 제품의 성능이나 품질에 대한 고려보다 브랜드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브랜드를 선호하는 것에 대해 탓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 역시 이런 성향에서 전적으로 자유롭다고 할 수 없으니까요. 단지 브랜드에 의존하지 않을 만큼 성능이나 가격에서 차이를 내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홍보한다면 그 선호 브랜드 자체가 바뀔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즉 공격적 마케팅을 통해서 시장 재편은 가능하다는 것이죠." 이런 판단에 따라 AMD의 마케팅 전략은 새로운 변화를 준비 중이다. AMD에 대한 정확한 가치 판단이 선행될 때 효과적인 마케팅 전략이 나온다는 것이 박 대표의 생각이기에 자사에 대한 가치판단을 앞서 진행 중인 것이다. 그가 가장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부분은 이제 '개인용 컴퓨터라는 품목 자체가 성장기에서 성숙기로 넘어가며 거품이 걷히고 있다'는 사실. 이러한 상황 판단은 박 동문이 구상하고 있는 앞으로의 시장 재편과 맞물려 자신감으로 이어진다. "제가 처음 입사했을 당시, 첫 월급이 20만원이었는데, 그 당시 처음 나온 VTR의 가격이 98만원이었죠. 하지만 요즘 VTR은 아무리 브랜드가 좋고 성능이 좋다고 해도 어떤 소비자도 20만원 이상을 주고 사려하지 않습니다. PC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기술은 가격을 하락시킵니다. 경쟁사의 팬티엄에 대한 가격 경쟁력과 샐러론에 대한 성능 경쟁력이 앞으로 우리가 가진 성장 가능성에 대한 지표라고 생각합니다." 21세기형 CEO는 '공대 출신 경영인' "제가 하는 일이 팀원들보다 먼저 출근해서 팀원들의 일이 끝나야 모든 일정이 끝나는 고달픈 직책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기획한 프로그램이 시청자들의 박용진 대표의 이력은 화려하다. 삼성전자에서 컴퓨터 관련 업무를 시작한 이래 줄곧 컴퓨터 및 정보통신 업계에서 종사했다. 그의 직장들은 업계에서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회사들이다. 레이켐 코리아, 퀀텀 코리아, 엔비디아 코리아를 거쳐 현재 AMD 코리아에 이르기까지, 컴퓨터 부품업계에 있어서 그가 거친 회사들의 명성은 가히 최고 수준이다. 박 동문은 자신이 이처럼 꾸준한 경력을 쌓아올 수 있었던 요인을 바로 '공학 전공자'라는 배경에 두고 있다. "21세기에는 어느 한 분야만을 가지고는 전체를 조망하는 CEO의 위치에 오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세계 모든 곳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죠. 그런 관점에서 공대생들은 상당히 유리한 위치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다시 경영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긴 했지만 경영이나 기타 학문분야를 공부한 사람들이 공학을 이해하는 수준과, 공학을 한 사람들이 경영을 받아들이는 수준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제 경험으로 전자가 훨씬 훌륭하다는 것이죠." 그는 최근 범사회적으로 만연한 전공 편중 현상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했다. 기본적으로 대한민국은 공업국가이고 공업이 사회의 원동력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이 무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제기되는 '이공계 위기론'이나 미흡한 해결책들은 그를 더욱 씁쓸하게 만드는 듯 했다. 유난히 본교 동문이 많은 분야임을 떠올리며 '스스로가 한양인이라는 사실이 가장 자랑스러울 때가 언제인가'를 묻자 '사회에 나와보면 바로 알게 될 것이다'라는 답변이 되돌아온다. 후배들에게 '세계를 상대로 세계로 나가라'는 당부를 무엇보다 전하고 싶다는 그의 언어에서 세상을 바꾸는 것은 '작은 칩'이 아니라 사람의 '강인한 의지'임을 다시금 실감한다. 학력 및 약력 박용진 동문은 1975년 전기공학과 졸업하고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이후 세계적인 하드디스크 생산업체인 퀀텀 코리아 대표로 자리를 옮겨 뛰어난 비즈니스 역량을 인정받았다. 엔비디아 코리아 지사장을 거쳐, 지난 5월 AMD 코리아 대표로 부임했다. 연세대학교 MBA 과정을 수료한 박 동문은 레이켐 코리아, 퀀텀 코리아, 엔디비아 등 컴퓨터 및 정보통신 업계에서 20년 넘게 일해오면서 다양한 분야의 업무에서 리더십과 실행력을 두루 갖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사진 : 김태호 학생기자 magicguy@ihanyang.ac.kr

2003-09 08

[동문]"관광 한국의 새 지평 열어갈 메신저를 자임한다"

한민족에게 가장 친숙한 노래를 들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주저하지 않고 전통 민요 '아리랑'을 꼽는다. 남과 북이 단일 팀을 이뤄 공동 응원을 할 때 같이 부르기도 했던 아리랑은 전 세계에 한국적 이미지를 심어주는데 상징적인 코드로 작용하기도 한다. 아리랑은 우리에게만 익숙한 음악이 아니다. 배우기도 쉽고 구성진 가락이 매력이기 때문에 많은 외국인들이 쉽게 따라 부르고 연주하기도 한다. 이렇듯 아리랑이 한국을 알고 있는 외국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노래라고 한다면, 이들에게 가장 친숙한 방송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을 하라면 '아리랑 TV'를 꼽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아리랑 TV는 지난 1997년 국내 거주 외국인을 대상으로 케이블 방송 송출을 시작한 이래, 현재 아시아태평양지역을 비롯해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까지 그 영역을 확대해 한국의 문화를 전파하고 있다. 국제방송교류재단의 기금으로 한국의 역동적인 모습과 고유 문화를 외국인들에게 알리는 메신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아리랑 TV가 개국한 지도 이제 7년째. 초기 창립 멤버로서 집보다 방송국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아리랑 FM 제작보도팀장 정재신(문화인류 88년 졸) 동문을 만나본다. 방송을 위해 고사한 박사학위 정 동문을 만난 시간은 웬만한 직장인들은 퇴근해서 근처 맥주집에서 하루의 스트레스를 풀거나 집으로 돌아가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있을 저녁 8시 경. 바로 하루 전, FM 라디오를 개국하기까지 지난 한 달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정 동문을 만났다. 새롭게 꾸려진 8층 라디오 본부에 들어서자 스튜디오에서는 한창 생방송을 진행 중이었다. 자리를 잡기도 전에 방송 장비며 녹음실과 스텝 소개부터 먼저 시작했다. 방송 프로그램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아나운서나 출연진만으로 절대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알고 있어야 그 방송에 대해 제대로 평가하고 보다 폭넓은 이해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 동문이 방송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1995년, 미국에서였다. 1988년 문화인류학과를 졸업해 곧바로 동 대학원에 진학했고, 서울올림픽 성화봉송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정 동문은 문화인류학 박사과정을 밟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솔직한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정말 하고 싶은 공부를 하자"라는 생각에 문화인류학 박사과정을 정리하고 방송 공부를 시작한 것은 유년 시절부터 음악을 좋아해 라디오 음악 PD를 하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중학교 때부터 이미 밴드를 구성하고 음악과 함께 했던 그가, 평생 음악과 함께 살고 싶다는 꿈을 비록 조금 늦긴 했지만 반드시 이루고 싶었노라 고백하자 주위의 분위기가 숙연해진다. 아리랑 FM라디오 개국은 이런 의미에서 정 동문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라디오 방송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음악방송을 직접 제작해, 스스로도 즐기고 청취자들도 즐겁게 만들자는 것이다. 라디오 개국의 본래 목적은 한국을 방문한 관광객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관광한국의 새 지평 열어갈 '아리랑 FM' "라디오는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관광정보뿐 아니라 그들이 한국을 여행하는데 실질적으로 필요한 날씨, 교통, 숙박, 음식 등 문화 정보를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국내 방송과 차별을 두기 위해 국내 가요보다는 외국 팝송을 많이 틀기도 하지요. 외국인들이 제주도에 떨어지면 혼자서 여행하기가 여간해서 쉽지가 않은데 라디오 단말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실시간으로 정보를 얻게끔 할 수 있습니다. 아리랑 FM만 있으면 여행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오전 6시부터 밤 12시까지 하루 18시간 동안 방송되는 아리랑 FM라디오는 제주시와 서귀포시에서만 공중파로 들을 수 있다는 한계가 있다. 애초에 서울시에서도 방송을 하려고 했으나 더 이상 유휴 주파수가 없어 불가능했다며 아쉬움을 토로하는 그다. 현재 아리랑 FM은 제주도 이외의 지역에서는 인터넷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다(www.arirang.co.kr). 정 동문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내년에 지상파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의 주파수를 확보해 전국으로 방송을 확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DMB란 정보를 기존의 아날로그 방식이 아닌 디지털 방식으로 전송하는 방식인데 개인용 휴대폰이나 PDA, 차량용 단말기를 통해 소리와 동영상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이 외국인 관광객 1천 만 명 시대를 대대적으로 선언함에 따라 그것의 실행방안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DMB방식이 도입되면 아리랑 FM라디오는 새로운 관광한국의 시대를 열어갈 매우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문화유적을 관람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어디에 가서 무엇을 먹을 것인지, 교통사정은 어떠한지를 알려서 관광에 불편함이 없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외국인 방문객들을 위한 배려가 관광의 기본이라고 말하는 정 동문은 한국의 전통음식을 아시아 각 나라들과 비교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다양한 문화를 소개하고 전파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지난 1999년에 직접 기획하고 제작했던 'Asian Cuisine Tour' 프로그램이 대표적인 예다. 학부와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문화인류학을 전공한 만큼 유럽이나 아메리카에 아시아적 가치를 담은 문화를 소개하자는 발상에서 기획된 이 프로그램은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몇 년 전부터 동남아시아에서 불고 있는 한류열풍이 국내 드라마나 뮤직비디오를 아리랑 TV 위성을 통해 소개하면서 시작됐다는 사실 또한 새로운 발견이었다. '유익한 중독' 방송은 생산적인 마약 "제가 하는 일이 팀원들보다 먼저 출근해서 팀원들의 일이 끝나야 모든 일정이 끝나는 고달픈 직책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기획한 프로그램이 시청자들의 좋은 반응을 얻을 때의 쾌락은 경험해보지 않고는 절대 모를 것입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마약이지요. 제가 하고 싶어서 즐기고 중독되는 마약 말입니다." 스스로도 즐겁고, 상대방도 즐거운 생산적인 마약이 방송이라고 말하는 정 동문은 후배들에게 시간이 늦어지더라도 자신이 꼭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기를 당부한다. '당장 할 수 없다'라는 두려움 때문에 시작도 하지 않고 눈치만 보는 것이 인생에 있어 훨씬 더 큰 손실이라는 것이다. 비록 먼 길을 돌아서 왔지만 이제야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산다는 만족감에 하루의 피로를 잊는다는 정 동문. 그와 함께 즐거운 일상을 향한 자신감의 볼륨을 조금만 더 높여보자. 학력 및 약력 정재신 동문은 1988년 본교 문화인류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 진학해 1993년 '서울올림픽 성화봉송단 연구'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뉴욕공과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 기법(Communication Arts)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5년부터 이듬해까지 미국 캔사스에 위치한 LKBY TV 방송국 카메라 AD, KTCC 방송국 DJ, 뉴욕의 LI NEWS TONIGHT 방송국 카메라 AD 등으로 재직했다. 1996년 10월, 아리랑 TV 창립멤버로 입국해 제작국 보도팀 뉴스 프로듀서, 편성팀 프로듀서를 거쳐 현재 아리랑 FM 제작보도팀장을 맡고 있다. 사진 : 노시태 학생기자 nst777@ihanyang.ac.kr

2003-07 29

[동문]"산업재해 사라지는 마지막 그 날까지"

'근골격계질환'을 아십니까? 근골격계 질환은 단순반복작업이나 무리한 작업으로 인해 발생하는 신체적 질환을 통칭하는 말이다. 이 질환은 지난 1995년 한국통신 114 안내원들이 근골격계질환의 일종인 경견완장애로 산재인정을 받으면서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동안 '근골격계질환'은 내가 남들보다 몸이 약해서 생기는 '당연한 병'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1997년 IMF 한파는 '생산성 향상'이라는 미명 아래 산업인력의 더욱 높은 노동강도를 강요했고, 노동자들은 몸이 부서져라 일을 했다. IMF 시절이 끝났다고 회자되는 2003년 오늘, 이 땅의 산업역군들은 '근골격계질환'이라는 IMF 후유증을 온 몸으로 앓고 있는 셈이다. 최근에서야 사회적 이슈가 된 근골격계질환을 일찍부터 주목하고 대책 마련에 앞장섰던 이가 있다. 원진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장인 임상혁 동문(의학 91년졸)이 바로 그 주인공. 근골격계질환을 비롯한 각종 산재현장을 종횡무진 누비는 임상혁 소장. 두 개의 전문의 자격증과 공학박사 학위를 지닌 그이지만 풍족한 삶을 마다하고, 노동자와 함께 하는 힘겨운 여정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노동자가 주인되는 원진녹색병원 그가 근무하고 있는 노동환경건강연구소는 원진녹색병원 부설 연구소이다. 1999년 원진녹색병원의 탄생과 함께 한 임 동문은 자신의 근무지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해 보였다. 그는 병원에 대해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만들어진 병원"이라는 것과 병원의 탄생이 "보건운동 역사 속에서 큰 획을 그은 사건"이라는 것을 시종일관 강조한다. "원진녹색병원은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생명을 담보로 만들어진 병원입니다. 86년 시작되어 92년 후반까지 이어진 세 차례의 투쟁과 병원설립을 위한 투쟁까지 10년여 투쟁의 결과물인 거죠. 노동자 5백여명에 대한 보상금으로 원진녹색병원은 설립됐고, 노동자가 주인인 최초의 병원입니다." 이러한 배경은 자연스럽게 병원의 주인이 노동자라는 것, 그리고 노동자를 위한 병원이라는 의미를 갖게 했다. 실제로 노동자와 지역주민의 건강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녹색병원은 대다수 병원들이 파업했던 의료분쟁 속에서 의료계의 정상진료를 실시해 자신들의 말이 공허하지 않음을 증명했다. 또한 지금도 단식투쟁이나 힘겨운 노동자들의 투쟁이 진행되는 곳에서 마다 의료봉사를 나온 그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연구와 진료는 의료원 아닌 현장에서 임 동문은 2년 전 연구소 내에 근골격계질환센터를 만들었다. IMF 이후 요구되는 노동량과 노동강도를 생각한다면 근골격계질환문제가 당연히 문제가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센터가 노동자들을 자극해서일까, 아님 노동자들이 센터의 도움을 받아서일까. 최근 각 사업장에서는 근골격계질환에 대한 노동자들의 집단요양 신청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다. 2001년 울산 현대정공의 근골격계질환 노동자 71명이 집단으로 산재요양 신청 후 지금까지 근골격계 직업병으로 산재를 인정받은 곳은 대우조선을 포함한 20여 곳. 이러한 사업장의 일선에는 언제나 임상혁 동문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연구는 결코 연구소에 앉아서 진행되지 않는다. 그가 연구하는 곳은 부당한 노동환경을 가진 사업장이고, 그의 연구대상은 현장의 노동자들이다. 아직까지도 직업병은 사용자측이 쉽게 인정하지 않는 산재이다. 때문에 문제가 생긴 현장에서 자료를 모으고 해결하는 것은 언제나 그의 몫이다. '더딘 죽음'을 방치하지 말라 그는 노동자의 건강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노동자 스스로가 인식하는 것'이라 말한다. 지금까지 노동자와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까지도 자신들의 건강문제에 적극적이지 못했음을 지적하는 말이다. "노동자의 건강문제는 지금까지 노동운동에 있어서도 제대로 취급되지 못했습니다. 최근에서야 이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 운동 주제로 인식하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미비한 실정입니다. 다치고 죽어야만 산재가 아닙니다. 서서히 몸이 죽어가는 환경을 알고도 방치하는 것은 명백한 범죄입니다." 그는 '노동환경의 문제점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도 노동자들이고 해결방안을 알고 있는 것도 그들'이라고 말한다. 즉 노동자가 주체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면,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과거 노동자의 건강문제는 외부에서 전문가들이 나서서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에 앞장서는 문제로 인식되었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고 올바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이 임 동문의 확고한 신념이다. 산재는 '노사' 아닌 '노사정'의 문제 임 소장은 산재문제를 노사문제로 한정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대다수 선진국에서는 산재 발생을 최소화하는 작업환경을 법적으로 규정해 관리하고 있으며 사후 보상에 있어서도 산재보험을 통해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국내의 노동 환경은 산재가 아직도 '노사갈등 차원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나아가 임 동문은 국가의 법적 조치와 함께, 사업주의 도덕성을 강조한다. '아무리 사회 안전망을 만든다고 할지라도 사업주의 의지가 없으면 산재가 줄어들 수 있는 환경은 어렵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이런 이유로 그는 회사측의 배려와 함께 노동자나 노조가 참여하는 시스템을 강조한다. 산재를 근본적으로 예방하는 것에 중점을 둬야지 산재에 따른 보상은 미봉책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국가의 제도와 사측의 성의, 노동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3박자를 이룰 때 비로소 산재문제가 궁극적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선진국의 많은 사례들이 잘 뒷받침하고 있다. 기술인 아닌 의료인이 되라 원진레이온 투쟁에 영향을 받아 노동자와 함께 하는 길을 선택한지 이제 10여 년. 동료의사들이 의료계에서 안정된 자리를 잡아나갈 나이에 그는 노동계의 거친 현장에 자리를 잡았다. 돈과 명예에 대한 꿈을 접고, 자신의 신념과 양심에 따라 살아온 삶이 이루어낸 성과라면 성과다. 그런 그가 후배들을 위해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 "첫 번째 강조하고 싶은 것은 주체적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별다른 목표 없이 사람들 속에 묻혀 살지 말고 자신의 삶에 대한 생각과 의지를 가지고 삶의 주인이 되라는 말이죠. 두 번째는 의대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인데, 기술인이 아닌 의료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돈과 명예를 위한 기술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정도면 충분합니다. 앞으로 졸업할 후배들은 물질과 명예를 추구하는 기술인이 아니라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의료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는 앞으로의 소망에 대해 '지금의 연구소를 산재와 관련한 최고의 연구기관으로 만드는 것'이라 고백한다. 노동계에서는 최고로 인정을 받지만 전반적인 사회와 의료계에서는 아직까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임 동문의 불만이다. 모든 준비는 갖추어져 있는데, 함께 만들어갈 후배들이 부족하다며 임 동문은 허허로운 웃음을 짓는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의과대학 정원 축소 방침을 상기하며 '후배가 부족하다'는 그의 말이 소태처럼 씁쓸하게만 들린다. 학력 및 약력 임상혁 동문은 1991년 본교 의학과를 졸업했다. 한일병원에서 1994년 가정의학과 전문의를 획득했고, 1999년 산업의학 전문의가 되었다. 올해 홍익대학교에서 인간공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임 동문은 1999년 원진녹색병원 개원과 함께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을 시작해 현재 연구소 소장직을 맡고 있다. 임 동문은 노동건강연대 대표, 산재보험 공동대책위 위원과 같은 시민단체 활동에서부터 노동부 산하 직업병 심의위원회 위원과 산재보험 심사위원회 위원직까지 산업재해와 관련된 다수의 활동들에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2003-07 15

[동문]"국제 협력과 분단 극복에 관광은 최고의 효자손"

얼마 전 시청자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종영된 드라마 '올인'의 마지막 무대는 제주도였다. 특히 드라마의 후반부는 서귀포의 관광 미항 개발권을 둘러싼 이야기로 펼쳐지기도 했다. 이 드라마는 이른바 한류 열풍을 타고 동남 아시아로 진출하면서 제주도는 젊은이들의 꿈과 낭만이 넘치는 국제적인 관광지로 다시 한번 거듭나게 됐다. 그러나 정작 드라마의 소재로 등장한 서귀포 관광 미항 개발사업이 실제로 추진되고 있는 사업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난 3년 간 한반도를 동북아의 경제 허브로 건설하기 위해 진행되고 있는 제주국제자유도시 사업은, 드라마에서와 같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꾸준한 정책 연구를 통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동북아 '허브' 중심에 관광이 흐른다 박기홍(관광 87년졸) 동문은 이러한 서귀포 관광 미항 사업을 떠올리면 누구보다도 흐뭇해 하는 사람 중의 한 명이다. 이 사업은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에서 관광정책실장을 맡고 있는 박 동문이 연구책임을 맡아 완성된 프로젝트 보고서로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 박 동문이 몸담고 있는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은 지난해 말 문화관광부 산하의 양대 싱크탱크로 일컬어지던 한국관광연구원과 한국문화정책개발원이 통합돼서 설립됐다. 이 통합은 양 분야에 대한 연구를 보다 협력적이고 포괄적으로 함으로써 다가오는 문화와 관광의 세기를 내실 있고 체계적으로 준비하겠다는 정부차원의 관광전을 함축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문화와 관광의 세기를 조용히 준비하고 있는 연구자의 모습은 어떨까하는 상상을 하며 관광정책실의 문을 열고 들어선다. 관광을 연구하는 사람은 산업적 특성상 활기차고 밝을 것이라는 짐작과는 달리 박 동문의 첫 인상은 부드러우면서도 진지했다. 이러한 분위기에 압도된 듯 '관광'하면 떠오르는 신나고 활기찬 이야기는 잠시 미루고 박 동문과의 대화는 동북아 경제 허브 건설에 있어 관광의 역할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로 시작됐다. "정부에서 추진 중인 동북아 경제 허브 건설 계획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잘 살려 문화 교류를 통한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서로의 이해를 증진하기 위한 흐름의 중심에 있겠다는 의도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관광은 경제적 파급뿐 아니라 문화체험을 통해 사람과 사람이 접촉을 통한 상호 이해 증진을 꾀한다는 측면에서 세계 평화에 크게 기여하는 등 비경제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금강산 관광에서도 보듯 순수 민간교류를 통해 남북의 분단을 해소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기도 하지요." 한반도가 동북아 허브로 자리잡는데 아직까지는 관광이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지는 않지만 점점 그 비중이 커져가고 있다고 힘주어 말하는 박 동문은 허브, 즉 중심이라는 개념은 일을 함에 있어 중요한 결정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고 피력한다. 자본과 노동력에서 앞선 일본, 중국과 일대 일로 경쟁해서는 도저히 승산이 없으므로 흐름의 중심에서 부가가치를 얻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자존심과 생활고를 잊게 한 관광의 매력 박 동문의 관심은 처음부터 관광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83년에 부친의 권유로 관광학과 인연을 맺게 된 박 동문이 애초에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경영학이었다. 당시 관광학과는 설립된 지 3년 밖에 되지 않는 신생학과였기 때문에 앞에서 끌어줄 선배 한 명 제대로 있지 않았던 시기. 게다가 전망이 밝다라는 장미빛 미래만 난무할 뿐, 그에 상응하는 사회 진출도 여행사나 호텔 등 극히 협소한 상황이었다. 박 동문은 당시 관광학에 대한 국내의 학문적 역량이 충분치 않았기에 자신의 학문적 갈증은 점점 커질 수 밖에 없었노라 회고한다. "일단 공부해 보고 다른 길을 모색하겠다는 생각으로 일 년을 보내고 얻은 결론은 '흐트러짐 속에서 다양함과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철학적 개념으로서의 관광과 여가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게 됐지요. 결국은 다시 한 번 더 선택했다는 생각에 '여기서 끝을 보자'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석사과정과 군복무를 끝내고 가정까지 꾸리게 된 박 동문이 가장 먼저 사회에 첫발을 디딘 것은 한국관광연구원의 모태가 되는 교통개발연구원 관광연구센터의 아르바이트직이었다. 당시 월급은 20만원. 가정을 꾸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다. 특급 호텔에 취직해서 안정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학문 쪽으로 잠재력을 키운다는 고집으로 아르바이트에서 계약직 연구원을 거쳐 그 해 10월에 정규직 공채에 합격하게 된다. 스스로 '노는 것'의 이면에 함축된 철학적 함의를 학문적으로 구현해보고자 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놀면서 학문하고, 일하면서 논다? 비록 속된 말이지만 '놀아 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관광행위를 놀이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의식주와 함께 인간 행복을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분야를 끈덕지게 연구해 온 박 동문에게 '논다'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에게 있어 논다는 것은 관광을 하건 야유회를 하건 각자가 해야할 일을 적절하게 배분하고 조정해서 최대한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노는 기질'은 타인에게는 행복을 줄 수 있지만 스스로에게는 오히려 업무로 다가올 수 있다. 정책에 대한 검토를 할 때 관광지를 직접 방문하지만 그것에 완전히 젖어서 놀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광학이 매력적인 이유는 일과 관광이 하나의 묶음으로 동시에 이뤄지기 때문이라는 것이 박 동문의 설명이다. "연구를 하면서 관광 대상지를 직접 방문하고 평가를 하는 등 자신의 업무를 즐기면서도 역동적으로 일할 수 있는 분야가 관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내 관광산업이 범위도 과거의 여행사나 호텔에 편중된 것을 탈피해 관광지 개발이나 리조트, 컨벤션 산업 등으로 빠르게 확대되고 있지요. 학문적으로는 여전히 채워나갈 여백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만큼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도 큽니다. 이런 의미에서 관광은 창의적이고 개방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잘 들어맞는 분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책연구실장을 맡은 지 이제 4개월 째 접어드는 박 동문에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업무를 총괄하고 조정하는 일에 주력하다 보니 연구에 투입하는 시간이 줄었다는 것이다. 석사학위를 가지고도 기꺼이 아르바이트생으로 시작해 지금까지 연구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그에게 있어 관광에 대한 탐구는 그 자체가 하나의 '즐거운 여행'처럼만 보인다. 학력 및 약력 박기홍 동문은 1987년 본교 관광학과를 졸업해 1989년과 1997년 동 대학원에서 각각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1년 한국관광연구원의 모태인 교통개발연구원 관광연구센터 연구원 공채로 합격한 박 동문은 APEC 연구컨소시엄 운영위원, 감사원 월드컵 국책감사단 위촉감사관, 한국관광연구원 정책기획 팀장 등을 거쳐 현재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 관광정책연구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한국관광학회와 그 산하에 있는 관광자원개발학회 이사를 겸하고 있는 박 동문은 1994년부터 본교에서 국제관광학을 가르치고 있기도 하다. 상훈으로 한국 관광 발전에 공헌한 점을 인정받아 문화관광부장관으로부터 두 차례의 표창 및 월드컵 기장을 받은 바 있다 사진 : 윤석원 학생기자 astros96@ihanyang.ac.kr

2003-07 01

[동문]`가짜 같은 진짜 연기` `진동거울` 연출자 이정은 동문

'자꾸 나잇살만 늘어간다' 사람 좋게 허허 웃는 이정은 동문(연영 92년졸)은 사람을 아주 편하게 만드는 특별한 재주를 가졌다. 그는 이번에 대학로 동숭무대 소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 '진동거울'을 연출한 젊은 연극인이다. 점심을 걸러 출출한 본 기자가 '짜장면 사 주세요' 넉살을 부려도 '그건 너무 약하니까 좀 더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응수하는 선배의 내공이 심상치 않다. 실랑이 끝에 결국 '짜장면'으로 합의를 보고 대학로에 자리한 허름한 중국집 휘장을 밀치고 들어섰다. 빗줄기가 오락가락하는 장마의 초입, 나름대로 운치 있는 대학로에서 짜장면 두 그릇을 놓고 두 시간 동안 '면발이 불어터지도록' 연극 이야기, 사는 이야기를 재미나게 나누어 보았다. - 이번 작품의 기획 의도는? 그 동안 연극판을 바쁘게 뛰어다녔다. '뜨는' 연극도 많이 했다. 그런 연극들은 초점이 '사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에게 보여줄 모습'에 있었다. 그래서 문득 의문이 생겼다. '이게 과연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일까?'하고. 처음에는 좋은 작품도 점점 횟수를 거듭할수록 왜곡되어갔다. '웃음'이라는 것도 우리가 살면서 하게되는 '아주 작은 실수'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지 결코 '강요된' 것이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결국 원하지 않는 일들을 하면서 서서히 '나이가 들어감'을 느끼고 고민이 슬슬 되기 시작했다. 이러다가는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없을 거라는 위기감도 들었다. 그래서 뜻을 같이 하는 배우들과 함께 사무실을 열었고 3년 동안 연극도 하지 않고 한 반년 배달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해 가면서 '진실한 연기는 무엇일까'에 대해서 열심히 고민도 했고, '어린 시절의 소중한 기억을 되살리는 진지한 연습'도 했다. 그리고 그것을 마음이 맞는 배우들과 같이 해 보고 싶었다. 결국 배우 네 명이 종자돈을 모아서 일을 벌리고야 말았다. 그것이 이번 연극을 하게 된 계기이자 의도이기도 하다. '진동거울'은 '진짜 연기'를 찾아 나선 젊은 배우들의 실험적 시도다. - 자신이 생각하는 '진정한 연기'란? 내 연기에 대한 관점은 항상 '사는 일'에 있다. 나는 배우들이 만들어 내는 삶이 아닌 '세상에 널려있는 사람들의 삶'에 더 관심이 있다. 내가 무대에서 하고있건 안 하고 있건 항상 나의 관심은 그 쪽에 있다. 내 생각에 '진정한 연기'는 그것이 단순히 연기가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배우들은 가짜를 만들어내는 데 매우 능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진심이 아닌 가짜 눈물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관객은 잘 몰라도 우리는 보면 딱 알 수 있다. '저거 지금 거짓말하고 있네' 하고 말이다. 나는 연극을 만들 때에도 '이거 연극이다'하고 생각하고 만들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연극을 개연성이 있는 '거짓말'이라고 인정해 버린다면, 배우는 결국 '나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그래서 계속 '나는 참말을 해야지'하고 연극을 해야 한다. 그래서 배우에게 '연기를 잘 한다'라고 하는 것은 욕이다. '그것 참 연기 같지 않고 자연스럽다'라고 이야기를 듣는 것이 배우에게는 최고의 찬사이다. 사실 이번 연극을 기획하면서 상업 기획자를 만나본 적도 있다. 그 기획자가 작품의 반 정도를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연극을 만들자는 조건을 걸었다. 그것이 뭐 일종의 유혹일 수도 있었다. 작품 스타일이 연출에 따라서 많이 달라지는데 거기에 기획 쪽에서 개입하면 아무래도 작품이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도 아주 친한 그 기획자의 제안을 거절했고, 결국은 우리 고집대로 밀고 나갔다. 결과적으로 한 50퍼센트 정도는 성공한 것 같다. - 그럼 나머지 챙기지 못한 나머지 50퍼센트는? 아직 '진짜'는 아니라는 거다. 다큐멘터리를 보면, 내가 다큐멘터리에 관심이 많은데 휴먼 다큐멘터리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감정은 우리보다 더 슬퍼하면서도 진짜고, 덜 슬퍼하면서도 진짜다. 감정의 수위라는 것도 결국 정말 그 삶을 살아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다. 이 점에서 배우가 유연하게 상상해야 한다. 역을 맡은 배우는 그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게 마련이다. 무대에서 '그 사람인 척하고 연기하는 것'과 '정말 그 사람이 되어서 살아보는 것' 그런 면에서 아직 우리는 우리의 기준으로만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아침에 일어나서 조간 신문을 보는 것도, 직장에서 잘린 사람이 신문을 보는 것과 아침에 배달을 하는 사람이 보는 신문은 그 분위기부터가 다르다. 배우는 그런 모습을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그걸 믿고 가야한다. 개인적으로 한 3년 연극을 쉬면서 연극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어떤 면에서는 그것을 '내 삶이 틀어진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변하는 상황에 따라서 원하는 것도 달라지고 생각하는 것도 달라지는 존재, 난 그것이 연극에서의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번에는 그런 '인물'에 대한 고민이 좀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 연극을 준비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먼저 제작비를 구하는 문제가 제일 힘들었다. 아주 좋은 후배(배우 신하균)가 있는데, 제작비가 필요하다고 그냥 들입다 전화를 걸었다. 나는 보통 제작비를 융통하는 데에는 아주 막무가내다.(웃음) 그 친구가 아주 선선히 제작비를 이자도 안 받고 빌려 주었고, 배우들이 다달이 얼마씩 돈을 갚아나가기로 했다. 그것이 제일 힘들었고 다음으로 배우들이 연출보다 먼저 연기를 포기해 버릴 때도 참 힘들었다. '나는 이게 안되는 놈이야, 나는 그걸 할 수 없어'라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그것을 풀어주는 게 참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 배우의 몸이 아니니까. 공연이 한 달을 넘어가면서 배우들이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습관이 나올 때도 참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배우들이 무대에 많이 서봐서 '내가 이렇게 하면 관객들이 좋아하는구나'라는 걸 잘 알고들 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연기가 아니라 보는 사람을 자꾸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깨는게 참 힘들었다. - 이번이 두 번째 연출이다. 연출이 연기에 비해 더 힘든 점이 있다면? 연출을 제대로 하려면 우선 '나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배우들의 심리를 긁어서 원하는 연기를 얻어내야 하고, 어떨 때에는 배우의 잘못을 명확하게 지적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주변이 좀 산만한 편이라서(웃음) 꼭 한 박자 늦게 지적을 하는 편이다. 그래서 제대로 '말빨'이 안 먹힐 때도 있었다. 연출자는 배우들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집중적으로 관찰하고 동작 하나하나를 지적해야 하는데 나는 아직 그게 부족한 것 같다. 나는 이번 작품에서 구태여 내가 '연출'이 되어서 주도적으로 배우들을 이끌어 나간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그들과 함께 재미있는 작업을 했을 뿐이다. - 그 동안 맡았던 배역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라이어'라는 공연을 하면서 맡았던 '메리'라는 배역이다. 처음에는 배운대로 연기하기에 급급했는데, 나중에는 역할을 하면서 내가 '메리'라는 여자를 조금은 이해하면서 연기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라이어'를 하면서 지금 '눈위에나' 극단을 같이 만든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날 수도 있었다. 취재후기 짧은 시간이나마 이정은 동문은 가슴 속에 있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또 재미있게 풀어냈다. 비록 많은 작품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평생 연극을 생각하고, 연극을 하면서 살아가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 중에 연극 '진동거울'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지만 굳이 여기서 시시콜콜한 내용은 싣지 않으려 한다. 연극을 보기 전에 먼저 내용을 알아버리는 것은 관객의 재미를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진동거울'은 무겁지만 가볍고, 진지하지만 그에 못지 않은 유머도 있다. 판단은 전적으로 연극을 보게 될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의 몫. 기말고사를 마친 일상의 여백은 대학로 소극장을 찾아 좋은 사람들과 좋은 연극 한 편으로 채워보시라. 연극 '진동거울'은 대학로 혜화로터리 근처에 있는 '동숭무대 소극장'에서 7월 6일까지 공연한다. (문의 : 극단 '눈위에나' http://ionthesnow.oh.bz, 741-6342)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2003-06 22

[동문]방송미술의 숨은 노다지를 캔다

용의 눈물, 태조 왕건, 제국의 아침, 무인시대까지. 과거 조선사에 한정되었던 사극의 지평을 넓혔다고 평가받는 KBS 사극의 계보이다. 드라마에도 공영성이 구현될 수 있음을 입증한 이 작품들은 시청자들의 사랑뿐 아니라 정확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역사재현이라는 점에서 학계와 방송계로부터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런 KBS 사극을 한번이라도 본 시청자들이라면 누구나 궁금해하는 사항이 있다. 그것은 삼국시대 비녀에서부터 고려시대 갑옷, 조선시대 왕관, 식민지시대 저잣거리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누가, 어떻게 만드는가 하는 것. 하지만 사정을 알고 나면 의외로 답은 간단하다. KBS 모든 프로그램의 방송미술은 KBS 아트비젼에서 전담하기 때문이다. 이 곳 상임이사로 재직하고 있는 김선옥 동문(신방 72년졸)을 만나, 오늘날 방송미술의 새로운 전망과 비젼을 들어보았다. 전문성은 필요조건 아닌 '필수조건' KBS 아트비젼(이하 아트비젼)은 지난 91년 창립돼 KBS 제작 프로그램에 대한 방송미술을 전담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방송미술 하면 사극을 떠올리지만, 이러한 통념은 절반의 정답이다. 방송미술 중 가장 어렵고, 많은 준비와 노력을 요구한다는 측면에서는 맞지만 오락프로그램 진행자의 옷과 세세한 장신구까지도 신경 쓴다는 부분에 이르면 틀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반인들이 잘 느끼지 못하는 세세한 부분에서부터 정보가 부족한 시대극까지 재현해야 하는 방송미술. 김 동문은 그렇기에 방송미술에 있어 전문성은 더 이상 필요조건이 아닌 필수조건이라고 강조한다. "방송미술은 상당히 어려운 분야입니다. 기본적으로 남들이 쉽게 지나치는 부분까지도 꼼꼼하게 살펴야 하기 때문이죠. 특히 사극이나 시대극에서 있어서는 전문성이 더욱 강조됩니다. 고려시대 장수가 입었던 갑옷의 모양도 알아내야 하고, 60년대 유행했던 넥타이가 폭이 넓은지, 좁은지 어떤 색깔이었는지도 알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저희들은 특성에 맞는 전문가들을 보유하고, 때에 따라서는 학계나 문화계의 전문가들을 통해 고증을 받습니다. 민감한 시청자들은 미세한 실수도 놓치지 않습니다(웃음)." 아트비젼은 이러한 전문성 확보를 위해 선발에서부터 엄격하게 전문가적 재능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이들은 뽑힌 후에도 수많은 제작경험과 재교육을 통해 한 단계 한 단계씩 수준을 높여 간다. 이러한 전문가 집단들의 끊임없는 노력에 의해 60, 70년대 종로거리와 왕조시대의 궁궐과 저잣거리가 우리 앞에 복원된다. 서사는 기본, 미술은 방송의 '양념' 실제로 방송미술의 예산은 사극과 시대극을 제외하고도 프로그램 전체예산의 70-80 퍼센트 수준에 이른다. 출연자 비용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수준. 이런 이유 때문인지 최근 방송계에서는 서사보다 외부적인 요소에 너무 치중하는 것이 아니냐하는 우려의 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런 지적에 대해 김 동문은 서사를 음식에, 방송미술을 양념에 비유해 말한다. 김 동문은 양념 값이 비싸지는 이유를 디지털 방송시대의 도래에서 찾는다. "드라마를 비롯한 모든 프로그램에 있어서 서사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서사를 음식이라고 했을 때, 이 음식의 맛을 내는 양념이 방송미술입니다. 다시 말해 단순한 서사에 리얼리즘을 부여하는 것이 방송미술이라는 거죠. 최근에는 방송이 디지털화되고 있습니다. 화질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방송의 디지털화는 기존에 무심코 넘어갈 수 있는 부분까지도 느낄 수 있게 만들었죠. 심지어는 출연자의 땀구멍까지도 보이니까요. 이러한 변화는 작은 소품, 악세사리 하나까지도 가볍게 여길 수 없는 방송환경을 만들었습니다." 대규모 지방세트 새로운 문화상품으로 부상 지금까지 마련된 대규모 세트만 해도 문경, 제천, 안동 세 곳. 현재 건설 중인 부안세트까지 합치면 총 네 곳이 있다. '용의 눈물' 세트로 유명한 문경은 역사적으로 왕건과 특별한 관계가 없지만 현재 문경시 관광수입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실정이 이렇다 보니, 다른 지방자치단체들도 앞다투어 대규모 세트 유치를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사극에서 사용되는 세트말고도 수원에는 60년대 거리를 재현해 놓은 세트, 삼척에는 동굴탐험이라는 컨셉으로 세계의 동굴 모습과 그 안에 살고있는 동식물을 재현해 놓은 세트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관광이라는 것이 자연적이고 역사적인 것이라는 인식이 강했죠. 하지만 저희 세트 효과를 본 후 지자체들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저희 회사는 지자체와 연계해서 지역적 특성에 맞는 세트를 짓고 이를 통해 지자체와 회사가 함께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아트비젼은 세트사업과 별도로 사극 소품들의 대여사업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현재 가지고 있는 의상, 장신구, 소품 등만 약 3만 여점. 아트비젼은 이것들에 대한 디지털 관리시스템을 구축 중에 있다. 제작도 중요하지만 관리가 더욱 중요하다는 인식이 커졌기 때문이다. 1-2년 내에 완성될 이번 디지털 자료화는 사극뿐 아니라 TV 광고와 영화촬영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복고풍과 사극 소품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획기적 계기가 될 전망이다. '윈-윈' 전략으로 시장 뚫을 터 "우리 회사에 할 일이 많습니다. 과거에는 세트나 소도구만 담당하는 작은 회사였지만 기술의 발전과 문화수준의 향상으로 경매, 간접광고, 캐릭터사업 등 다양한 문화산업을 통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물론 일부에서는 KBS라는 큰 회사가 다하느냐라는 비판을 하고 작은 회사들이 공동사업에 난색을 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희 회사는 저희만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작은 회사들과 협조를 통해 시장 규모 자체를 확장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KBS 라디오국에서 2개월 모자란 30년을 보낸 김 동문은 요즘 새로운 분야에서 일하는 것이 매우 재미있다고 한다. 흡사 새로 입사한 느낌이라고 설명하는 김선옥 동문. 하지만 방송미술이라는 분야가 생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설명한다. "제가 KBS 라디오에서 오랜 시간 일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라디오 제작 분야를 거쳐 경영직인 국장과 7개 채널의 경영을 총 책임지는 라디오 본부장을 5년 동안 했습니다. 단지 분야만 다를 뿐 전체를 보고 경영을 한다는 것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쉰 줄을 훌쩍 넘긴 나이에 새로운 일을 도전하는 김 동문에게 연륜에서 나오는 노련함은 그다지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보다는 젊은이들의 의욕과 패기를 느꼈다고나 할까. 그의 그런 모습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해야 할지 어려웠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그런 정열적인 모습이 아트비젼 제 2의 도약에 원동력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학력 및 약력 김선옥 동문은 1972년 본교 신문학과를 졸업, 1973년 동양방송 프로듀서로 입사했다. 한국방송공사 라디오국으로 옮긴 김 동문은 라디오 3국 국장, 1국 국장 등을 거쳐 2000년부터 라디오 제작센터 센터장을 역임했다. 올해 5월, KBS 아트비젼으로 옮긴 김 동문은 현재 상임이사로 활동 중이다. 프로듀서 당시 약 6백 여편에 이르는 드라마 및 다큐멘터리를 연출, 한국방송대상 라디오 연출상, ABU 라디오 대상, 한국프로듀서상 등 다양한 수상 경력이 있다. 현재 한국 펜클럽 협회와 한국 시인협회 회원이기도 한 김 동문은 자작 시선집『오후 4시의 빗방울』을 출간하기도 했다.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2003-06 15

[동문]경제위기 해법은 수출에 있다

우리는 지난 97년의 구제금융 한파를 아직도 씁쓸히 기억하고 있다. 기업의 연쇄부도로 아버지들은 거리로 내몰렸고, 어머니들은 한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시장에서 실랑이를 벌여야만 했다. 금모으기, 달러모으기 운동이 전개되고 사회·기업·학교·가정이 모두 허리띠를 졸라매고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런데 요즘 또다시 심상치 않은 한숨이 들려온다. 최근 서울경제연구센터의 발표에 따르면 서울시내 청년 실업률이 구제금융 시기의 수준에 근접한 것으로 나타났고, 통계청은 도소매 판매가 석 달 째 심각한 감소세라고 발표했다. 구제금융의 위기가 다시 왔다는 것이 상인들 사이에서는 이미 상식으로 통하고 있다는 언론의 조급한 보도도 있다. 이러한 경제 위기에 대해 한국수출보험공사 사장 임태진 동문(금속 67년졸)은 '수출만이 돌파구'라고 단언한다. 한국의 경제 여건상 수출이 과거 경제 발전의 초석이 되었듯이 지금 같은 위기를 극복할 방법도 역시 수출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찾아온 경제위기, '중동'을 공략하라 "사스(SARS)와 북핵 등의 악재로 수출시장이 부진을 면치 못한다고 걱정들이 많지만 사실 업체들의 노력으로 수출 규모는 작년에 비해 10퍼센트나 늘어났습니다. 한국수출보험공사는 수출업자가 수출을 하거나, 금융기관이 수출금융을 제공한 후 수입자로부터 수출대금을 회수하지 못해 발생하는 손실을 보험 또는 보증으로 지원하는 공적수출신용제도를 운영하는 기관입니다. 우리는 각 국에 수출 전문가를 두고 세계 44개 금융기관과 교류하고 있으며, 10만 건의 바이어 신용정보를 구축해 이를 6개월마다 업데이트하여 최신의 정보를 수출업체에 제공합니다. 한 마디로 기업들의 사기를 북돋워주고 지원하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이지요." 임 동문은 최근 세계적인 경기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중동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른바 제2의 중동특수를 겨냥한 각국의 무역업계 수장들이 잇달아 중동을 방문하고 있고 임 동문도 지난 4월, 윤진식 산업자원부 장관을 비롯한 여러 기업체 관계자들과 함께 이란, 오만, 아랍에미리트(UAE)를 방문했다. 중동에 있어서 한국의 공략점은 바로 플랜트 산업과 담수화 산업. 플랜트란 기술과 기계의 다원적 시스템이 적용되어 만들어진 단위공장으로 생산자가 목적으로 하는 원료나 중간재 혹은 최종 제품을 제조할 수 있는 시설을 뜻한다. 과거 석유파동의 난국을 극복했던 방법이 중동의 건설 특수였다면 현재 국내 많은 기업들은 플랜트 수출 산업을 제2의 중동공략을 위한 방안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값싼 공산품 수출은 중국에 밀리고, 고급품 수출은 선진국에 밀리는 상황이다 보니 중동시장 진출도 쉽지는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작년 LG건설이 세계 최대 가스전인 이란의 사우스파(Southpars) 개발 공사를 수주해 16억 달러를 번 것을 시작으로 많은 우리 기업들이 공사를 수주했지요. 이번 방문중에도 중동의 각 나라들로부터 수출 협약의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냈습니다. 벤처기업 육성을 통해 아이디어 상품을 공산품으로 연결해 판매하고, 우리의 우수한 IT기술이나 플랜트 등 기술적인 분야의 수출을 시도해야 합니다. 어렵긴 해도 아직 희망이 보입니다." 문화컨텐츠 산업 지원 육성 절실해 정보화의 진전에 따라 산업계에도 영화, 애니메이션, 소프트웨어 등 이른바 문화컨텐츠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국내 문화산업은 우수한 정보인프라를 바탕으로 선진국에 내 놓아도 뒤지지 않을 수준이며, 수출 또한 매우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임 동문의 설명이다. 그러나 많은 문화콘텐츠 업체들이 여전히 안정적인 자금확보와 시장에 대한 정보 부족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최근 한 업체가 자금 유동성에 밀려, 확실치 않은 정보에도 불구하고 계약을 체결했다가 외국 바이어에게 사기를 당했던 사례는 이 같은 어려움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이러한 문화컨텐츠 업체들의 어려움을 해소하고자 한국수출보험공사는 지난 3월, 컨텐츠 업체도 최고 1억원까지의 수출보험을 지원 받을 수 있도록 결정했다. "컨텐츠 수출은 그 동안 구매자의 주문에 따라 제품개발이 이뤄지기 때문에 사전에 객관적인 수출 가격이 나오지 않아 보험 지원이 사실상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최근 우리나라의 컨텐츠 수출 물량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음을 감안해 수출보험대상에 이를 포함시키기로 했습니다. 처음 지원했던 것은 심형래씨의 영화 '용가리'였죠. 제작비 지원과 함께 많은 정보를 제공해 성공적으로 수출을 마쳤습니다. 컨텐츠 수출업체가 보험에 가입함으로써 향후 국내 통신사업자, 종합상사 및 솔루션 업체들과의 해외 동반 진출이 보다 활성화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수출보험공사의 경영철학 '사람에 대한 따뜻함' 국내 기업들의 수출 지원을 선두에서 지휘하는 수출보험공사는 자사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선진의 경영시스템을 도입한 것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현재 수출보험공사는 지식경영시스템을 운영중이며 본부 및 팀별 성과에 대한 평가시스템을 독자적으로 개발해 도입했다. 이 같은 노력으로 기획예산처가 주관한 기금평가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고. 또한 전직급 연봉제를 오는 2007년까지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직위와 직급의 분리 운용을 통한 능력위주의 인사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특히 민간기업의 '주니어 보드'(Junior Board-임원진이 아닌 직원이 포함된 인사위원회)와 유사한 조직을 공공기관에 도입해 운영함으로써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우리는 인사위원회에 말단 직원까지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낮은 직급의 직원도 인사에 자신의 의견을 반영하게 함으로써 능력 위주의 공정한 인사가 가능해진 것이지요. 위원회에서 1.5배수의 인원을 추천하게 되므로 위원회의 의견을 90퍼센트 이상 인사에 반영하게 된 셈입니다. 또 민간기업과 같이 기존의 과·부의 체제를 탈피해 팀 체제를 이루고, 팀 안에서 맡은 일의 90퍼센트 이상을 직접 해결할 수 있도록 결제 단계를 3단계로 대폭 줄였습니다. 동호회의 활동비를 지원하고 어학연수나 외국의 대학원에 유학을 보내주는 등 직원의 복지향상에도 힘써 모두가 직장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지요." 임 동문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자신의 신념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똑같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이가 자기 자신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타인의 부족함을 감싸줄 줄 알고, 자신과 다른 생각을 받아들일 줄 아는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사회에 나와서도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장으로서의 전통적인 권위를 과감히 버리고 사람에 대한 따뜻한 관심을 잃지 않는 것은 그가 지닌 경영철학의 핵심이기도 하다. "몇 해 전 고시공부를 하다 쓰러져 반신불수가 된 여학생이 우리 공사에 입사지원서를 냈습니다. 능력이 뛰어나고 성실한 그 학생이 단지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여러 기업의 입사시험에서 고배를 마셨다더군요. 우리 임원진 사이에서도 다소 논란이 있었지만 그 학생의 능력만을 평가해 결국 합격시켰습니다. 현재 그 학생은 유능한 직원으로 성실히 일하고 있으며, 건강도 많이 좋아져 지팡이 없이도 걸을 수 있게 됐습니다. 밝게 웃으며 생활하는 그 여직원을 볼 때마다 합격시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직원에서 출발해 사장이 되기까지 동종업계에서는 드물게 평직원에서 출발해 사장의 자리에 올라 화제가 되기도 했던 임 동문은 오늘의 성공이 투철한 국가관과 성실한 자세에 기인한 것이라 고백한다. 공직자이다 보니 진급에 대한 야망보다는 자신이 맡은 직책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중요하게 여겨왔다는 것. 그는 선택에 기로에 섰을 때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신념으로 항상 공익을 위한 길을 택해왔다. "공직자의 임무는 국민이 잘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공직자라고 하면 일정한 월급이 나오므로 무조건 편할 것이라 생각하는 분들도 계신데, 안정된 생활이 장점인 것은 사실이지만 큰 돈을 벌 수 있거나 일하기가 쉬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공직자는 늘 모든 면에서 타인에게 모범이 되어야하고, 사람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으로 항상 몸가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지난 30여년의 세월을 타인을 위해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묵묵히 살아왔습니다.." 학력 및 약력 임태진 동문은 1943년 전남 장흥 출생으로 1967년 본교 금속학과를 졸업하고, 1995년 고려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상공부를 거쳐 공업진흥청 사무관 및 서기관을 역임했고 1992년 한국수출보험공사로 자리를 옮겼다. 총무부, 보상부 부장을 두루 역임하고 1993년 이사, 1998년 부사장직을 거쳐 2001년부터 한국수출보험공사 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1975년 상공부장관 표창을 받았으며, 1999년에는 IMF 시절 펼친 과감한 중소기업 지원 정책의 공을 인정받아 산업포장을 수상한 바 있다.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2003-06 08

[동문]"한양이여, 양키즈의 응집력을 배워라"

120년이 넘게 지속되어온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는, 야구를 즐기는 모든 이들에게 꿈의 무대로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야구팬들이 본격적으로 '빅 리그'를 접하게 된 것은 박찬호 동문(00년 명예졸업)이 지난 94년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에 입단하면서부터다. 공중파 TV의 생중계를 통해 그의 활약은 생생하게 전달되었고, 그의 손끝에서 사라지는 공 하나하나에 많은 이들이 웃고, 울었다. 최근에는 많은 한국 선수들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게 돼 국내 프로야구만큼 친숙해졌지만, 당시엔 수준 높은 경기와 다양한 볼거리로 신선함을 주기에 충분했다. 메이저리그 해설계의 제1선발 국내 선수들의 메이저리그 진출과 즈음하여 방송사들 역시 앞다투어 경기 중계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방송 중계에 있어 시청자들을 만족시킬만한 인력과 준비는 미흡했던 것이 사실이다. 현역 선수 출신들이 야구 해설위원으로 자리잡고 있던 당시, 메이저리그의 긴 역사와 그 안에서 뛰어왔고, 뛰고 있는 선수들의 면면을 생생히 전달하기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 너무나 부족했던 것. 하지만 지금 MBC-ESPN의 메이저리그 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는 이종률 동문(자원공학 92년졸)은 달랐다. 학창시절부터 'USA 투데이'와 미군방송을 끼고 살며 메이저리그를 접했던 그는, 선수 출신은 아니지만 다른 누구보다도 생생한 해설을 전달하며 메이저리그 해설의 첫 주자로 자리잡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들을 따라 야구장을 많이 갔었어요. 중·고등학교 때에는 AFKN을 한국방송보다 많이 봤고, 대학에서는 동아리를 통해 직접 야구를 하면서 미군부대와 메이저리그 야구서적을 파는 책방들을 다니며 책을 구해 읽었습니다. 이후 우연한 기회로 '주간야구'라는 야구 전문지의 기자로 2, 3년 동안 활동했습니다. 대기업에 합격해 입사를 앞두고 있던 시점에서 저로서는 나름대로 인생의 전환점을 이루는 결정을 했던 것이죠." 야구에 인생의 승부수를 던진 이 동문이지만 그의 선택에 따른 시련은 생각보다 빨리 다가왔다. 첫 직장이었던 '주간야구'가 문을 닫게 되었던 것. 이후 스포츠신문에 지원해 면접을 보게 됐지만 '축구를 취재할 수 있느냐'는 면접관의 질문에 '야구만을 취재하고 싶다'고 단호히 대답한 그는 평범한 회사원으로서 삶을 출발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한번 인연을 맺은 야구는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96년 당시 메이저리그를 중계하던 한 케이블 방송이 그에게 해설위원 자리를 제안한 것이다. 복잡한 해설은 사양, 즐거운 해설 지향해 "해설을 처음 시작할 때는 사실 막막하기도 했습니다. 주로 메이저리그에 대한 정보를 시청자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진행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메이저리그에 대해 저보다 훨씬 해박한 지식을 갖추신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됐고, 저의 해설 방식이 그다지 유용하지 못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저만의 개성을 찾아야 했죠. 그래서 전 해설에 '재미'를 추구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시청자들이 야구를 '편안히'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이 제 해설의 원칙이에요. 시원시원하게, 복잡하게 해설하지 않으려 합니다. 수시로 농담을 건네는 이유도 그것이죠. 승패도 중요하지만, 게임을 즐기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동문이 하루에 보는 메이저리그 경기는 대략 2, 3게임. 하루의 반나절을 야구경기에 모두 투자할 만큼 메이저리그에 정통한 그이지만, 이 동문은 자신의 약점에 대해 솔직히 털어놓기도 한다. 해설자로서 달변이지 못하고 선수생활을 해보지 않아 기술적인 분석에서 미흡하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 중계방송의 해설자 멘트를 그대로 옮겨 자기 말처럼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이 동문은 그런 행위 자체가 시청자에 대한 '반칙'이기 때문에 거부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의 약점을 냉정히 평가하던 그도 박찬호 동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목소리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박찬호의 부진은 작년의 허리 부상에 기인합니다. 기존의 부상에 거액의 몸값으로 이적한 부담이 크다보니 무리한 등판을 강행했고, 이는 부상과 부진의 악순환을 만든 것이죠. 또한 이제는 파워 위주의 투수가 아닌 제구력과 기교를 중심으로 한 스타일로 변화해야 할 때입니다. 사실 파워 투수로 10년 이상 지속한다는 것은 메이저리그에서도 드문 일이죠. 변화의 과도기에 있는 박찬호에 대해 예전만큼의 기대보다는 격려가 필요합니다. 동문의 한 사람으로서 또한 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박찬호를 누구보다 한양인들이 아껴줘야 할 것입니다." 한양에 필요한 것은 뉴욕 양키스의 '응집력' 이 동문이 가장 좋아하는 메이저리그 팀은 내셔널리그의 강호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작년도 월드시리즈 우승팀인 아메리칸리그의 '애너하임 에인절스'다. 지금은 강한 전력을 가졌지만 이 동문이 이 팀들을 좋아했던 것은 90년대 초반부터라고. 이유를 묻자 이들의 전력이 약했기 때문에 오히려 좋아했다는 의외의 대답이다. 천성적으로 약자의 편을 서기를 좋아한다는 그는 지금 자신이 응원하는 팀들이 선전하고 있어 해설할 때마다 기분이 좋다고 귀띔한다. 하지만 본교를 메이저리그 야구팀에 비교해 달라는 질문에 그는 의외로 강한 팀을 예로 들었다. 바로 월드시리즈 26회 우승에 빛나는 전통의 강호 '뉴욕 양키즈'이다. "지금의 한양대를 보면 마치 '애틀랜타 브레이브즈'와 비슷한 이미지입니다. 브레이브즈는 항상 리그 최강의 전력을 가졌음에도 우승과 인연이 많지 않았습니다. 개개인의 능력은 누가 보아도 손색이 없었지만 단결력이 부족했던 것이죠. 지금 우리 학교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사회에 진출한 후에도 서로 협력하는 힘을 보였으면 합니다. 마치 '뉴욕 양키즈'와 같이 말이죠. 양키즈는 항상 최강의 전력은 아니지만, 늘 중요한 순간에 보이지 않는 힘을 발휘합니다. 물론 이 말은 본교 학생들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그 능력과 힘을 한데 모을 수 있는, 양키즈와 같은 응집력을 발휘한다면 한양의 승률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학력 및 약력 이 동문은 1968년 서울 출생으로 지난 1992년 본교 자원공학과를 졸업했다. 1991년부터 1993년까지‘주간야구’에서 기자 생활을 했으며, 1996년부터 2000년까지는 케이블 방송인 ‘스포츠 TV(현 SBS 스포츠TV)’의 메이저리그 해설을 맡았다. 이후 2001년부터 현재까지 MBC 및 MBC-ESPN의 메이저리그 해설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영화보다 재미있는 메이저리그』, 『양키즈는 왜 강한가』 등이 있으며 각종 매체에 스포츠 칼럼을 연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2003-06 01

[동문]"법은 한 시대가 지닌 상식"

우리나라에서 헌법이 현실사회 속에서의 구체성을 실현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5년 전의 일이다. 1988년 9월, 헌법재판소가 설립되기 전까지만 해도 헌법은 매우 관념적이면서도 추상적인 공간에 남아 있었다. 국민 개개인의 존엄과 자유, 권리를 보장하는 최후의 보루라는 헌법은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막연한 이상을 그리는 '아름다운 서사'에 지나지 않았다.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 노희범 동문(법학 91년졸)이 헌법재판소를 '6·10 민주항쟁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의 결과물'이라 표현하는 것에는 이 같은 이유가 있다. 인간의 존엄 지키는 최후의 보루 '헌법재판소' 흔히들 헌법재판소를 두고 9인의 재판관들로 구성된 재판부만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보다 다양한 산하 부서와 법조 인력들로 구성되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소임을 수행 중이다. 특히 재판부 산하에 있는 헌법연구관들은 사건의 심리 및 심판에 관해 실질적인 조사와 연구를 수행하는 헌법재판소의 핵심 인력들. 이들은 사법시험에 합격한 특정직 국가공무원으로 판사급 처우를 받는 법조인들이다. "헌법재판소 출범 당시 헌법 연구를 전문으로 다룰 헌법연구관을 새로 뽑아야 했는데 당시에는 전문 연구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에서 연수를 마친 사람들이 대부분 판사나 검사, 변호사를 선호했고 헌법연구관으로 오기를 꺼려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 만큼 본 기관의 사회적 기여가 작기도 했죠.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헌법재판소가 제자리를 잡고 국민들에게 인정을 받아가면서부터 헌법 연구인력이 확보되기 시작했습니다. 현행법은 특정직으로서 판사와 동일한 처우를 보장하고 있죠." 노 동문이 헌법재판소에 부임한 것은 1998년 3월. 당시 헌법연구관보로 첫 발령을 받은 지 5년만인 올해 초, 그는 헌법연구관으로 승진 임명됐다. 고시에 합격한 이후 무엇인가 더 공부를 해보고, 이를 통해 사회적 기여를 이루어내겠다는 소망을 실현하기에 지금의 헌법연구관이란 지위는 최적의 직책이라 스스로 평가하는 그다. 법률의 구체적인 적용 행위를 수행하는 검사나 판사, 변호사의 지위에 대해 간혹 연민을 느끼지 않느냐는 물음에도 그의 대답은 단호하다. "검찰이나 법원에서 수사나 재판을 수행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헌법 재판을 위한 조사와 연구를 수행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헌법 재판이라는 것은 개개 사건에 관여한다기 보다는 헌법적 가치라는 큰 규범을 통해서 각종 법률과 국가 권력을 통제하는 일입니다. 검사가 하나의 사건에 대한 법적 정의를 실현하고, 변호사가 죄없는 한 사람을 구제한다면 헌법연구관이란 전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일에 종사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법의 변화 더디다고 경시되어서는 곤란해 헌법이란 명실공히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고 국가권력을 통제하는 우리나라의 최고의 규범이다. 따라서 헌법 재판이란 이 같은 헌법적 가치를 통해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고 국가권력을 통제하는, 헌법적 한계를 넘어서는 입법·사법·행정을 통제하는 국가 작용으로 풀이된다. 노 동문은 모든 법률은 '적용'의 문제에 앞서 그 법이 과연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 '좋은 법'인가를 가려내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법률은 단순히 만들고, 적용하고 그리고 집행하는 순환의 고리 속에 방치되지 않고 끊임없이 연구하고 분석해야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헌법이란 인간의 존엄을 실현하는 최고의 가치를 품고 있기에 특정 법률이 이런 가치에 위배되지 않는가를 판단하려면 법률을 끊임없이 연구해야 합니다. 특정 법률이 헌법에 위배된다면 이 법을 없애야겠죠. 헌법 재판은 다른 어떤 재판보다 국민의 의사와 사회의 가치를 반영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사회가 변화하면 그 만큼 법률도 변화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 기준은 바로 헌법에 있습니다. 헌법 재판에 있어서 연구 행위가 더욱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정작 사회의 요구와 가치의 변화를 반영해야 할 법률이지만, 사람들은 일상에서 '현실과 법률의 괴리'를 매우 자주 목격하게 된다. 최근 사회적인 물의를 빚었던 화물연대의 파업이나, 호주제에 관한 논란, 양심적 병영거부를 둘러싼 범사회적 논의들은 이 같은 괴리감을 잘 대변한다. 법률을 연구하는 법조인에게 있어 이 같은 현실사회의 괴리감은 어떻게 이해되고 있을까? "사실 법률은 변화에 다소 더딘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특정 사안에 대해 그때마다 임기응변식으로 변화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지요. 사회의 가치관, 현상, 욕구의 변화에 입법자들도 귀를 귀울여야 하지만 국민들도 인내심을 가져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이율배반적으로 들리겠지만 법도 사회적 갈등의 산물입니다. 많은 대화와 타협, 갈등과 조정을 거쳐 민주적 절차에 따라 지금의 현행법이 만들어진 것이지요. '법(法)'자를 한자로 보면 '물수(水)'자에 '갈거(去)'자입니다. 물이 흐르듯이 가는 것이란 말이지요. 결국 순리를 따라 바른 길을 찾겠지만 그 변화가 더디다고 함부로 경시되는 것은 더욱 곤란합니다." 법은 그 시대의 상식과도 같은 것 헌법을 연구하는 노 동문에게 헌법 조문 중 가장 아끼는 조항이 무엇인가를 묻자 그는 주저없이 헌법 제10조를 꼽는다. 모든 국민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행복 추구에 대한 권리를 보장한 제10조가 단연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 국가의 이념과 구성에 관한 규범에 앞서 인간에 대한 존엄과 권리를 지키는 것이 헌법이 구현해야할 첫 번째 과제라 생각하는 그다. 그리고 이러한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법치주의'에 대한 그의 신념은 확고하다. "대학 입학 후 처음부터 사법시험에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재학 시절에는 가톨릭학생회에서 활동을 하면서 당시 대학생들이 지녔던 보편적인 문제의식들을 함께 공유하기도 했죠. 군대를 다녀온 후 사법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결국 한 사회의 안정과 구성원들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는 법에 의한 통치가 가장 맞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부터입니다. 우리나라의 법치주의에 기여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사회에 가장 기여할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을 했죠. 법이 결국 한 시대의 상식을 대변하는 것이라면 그 상식을 수호하며 사는 일에 나름의 보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력 및 약력 내용을 입력하세요.노희범 동문은 1984년 공주고등학교를 나와 1991년 본교 법대를 졸업했다. 헌법학으로 2001년 동대학원을 수료했고 이후 2002년에는 University of Washington School of Law에서 비교법 석사과정을 다시 수료했다. 1995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1998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1998년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보를 거쳐 올해 초부터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으로 재직 중이다. 사진기자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2003-05 22

[동문]국내 최고의 '크레딧 뷰로' 지향하는 박상태 동문

신용불량자 300만 시대. 지난 20일 은행연합회 발표에 따르면, 4월말 현재 개인 신용불량자는 308만 6천명으로 사상 최다기록을 경신했다. 매월 최다 증가율을 갱신하고 있는 신용불량자 수는 더 이상 개인문제가 아닌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신용불량자 수의 증가는 개인과 기업의 정확한 신용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에서 기인한다. 사회가 선진국형으로 발전함에 따라 신용인프라 구축은 필수적이다. 최근 개인을 대상으로 한 소매금융의 급속한 발전은 기존 담보 거래의 관행에서 신용 중심의 거래로 변화해 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지난 1985년 국내 최초의 신용평가기관으로 출범한 한국신용평가정보는 창사이래 국내 금융산업의 하부구조 인프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오고 있다. 크레딧 뷰로(Credit Bureau 이하 CB) 사업을 통해 제2의 도약을 준비하는 한국신용평가정보 대표이사 박상태(법학 73년졸) 동문을 만나 그의 비전과 생각을 들어보았다. 크레딧 뷰로, 신용정보의 '저수지' 크레딧 뷰로(Credit Bureau: 이하 CB)란 금융기관, 비금융기관, 공공기관이 제공하는 개인의 신용 거래내역(Positive Data) 및 관련 정보를 수집한 후, 이를 가공하여 신용정보 제공기관 및 이용자에게 제공하는 개인신용평가전문기관을 말한다. 이미 미국 등 선진 신용사회에서는 개별 금융회사가 CB로부터 제공받은 개인신용정보를 활용해 대출은 물론 카드발급 등 거래승인여부와 한도결정을 자율 결정하는 시스템을 운영하는 등 CB는 금융산업의 핵심인프라로 부상한지 오래다. 이러한 CB사업의 핵심은 다양한 신용정보 제공기관과 정확하고 신뢰성 있는 정보가공 능력이다. 한국신용평가정보는 5년 전부터 신용사회 정착을 위한 신용정보 인프라의 중요성을 인식해 CB를 준비, 작년 2월 국내 최초로 CB 컨소시엄을 출범시켰다. 국내 주요 은행, 카드사, 캐피탈, 보험사, 백화점 등 120여 개 회원사가 참여한 이번 사업은 국내 신용정보 인프라 중 최대 규모로 평가받는다. 박 동문은 이러한 CB사업을 '신용의 저수지'라 비유한다. "CB가 거대한 저수지라면 신용정보는 저수지를 채우는 물인 거죠. 훌륭한 저수지가 되기 위해서는 물의 양이 많아야 합니다. 저희는 국내 주요 은행, 카드사, 캐피탈, 보험사, 백화점 등 다양한 신용정보 제공원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여 공유하고 있습니다. 은행뿐만 아니라 개인이 거래하는 다양한 신용정보들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죠. 정확한 신용거래 히스토리만이 개인신용평가의 정확도를 높일 수 있습니다." 그는 정보의 양뿐만 아니라 질 또한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정보의 질을 결정하는 신용 스코어의 정확한 산출이 한국신용평가정보가 시장에서 선두자리를 고수할 수 있는 비결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신용정보를 제공하는 저희들은 스스로가 최고라고 자부한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보의 신뢰성은 수용자 즉 이용자들이 결정하기 때문이죠. 다양한 신용정보와 그 정보의 신뢰성 확보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회사 발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는 이를 위해 지난 2000년 세계 3대 CB의 하나인 트랜스 유니온사와 전략적 업무제휴를 맺고 선진 신용스코어 기법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CB 컨소시엄이 저수지를 크게 만드는 작업이었다면, 정확한 신용스코어 산출은 양질의 물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신용사회 인프라 구축 위한 사명감으로 박 동문이 한국신용평가정보 대표이사로 취임한지는 채 한 달이 되지 않았다. 연초에 회사의 경영권 논란 속에 최초로 대표이사후보추천위원회를 통해 선임된 박 동문은 이런 배경 때문인지 어깨가 짐짓 무거워 보였다. 향후 회사 경영 복안을 묻는 질문이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관세청 차장(1급)을 끝으로 공직에서 사기업으로, 공무원에서 회사원으로 신분 변화를 단행한지 이제 20여일. 하지만 그는 짧은 시간임에도 많은 것을 생각하며 준비하고 있었다. "저희 회사는 이미 기업정보에 있어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최고 수준의 정보를 제공해 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신용정보에 있어서는 경쟁사보다 좀 늦게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국내 최초 CB사업의 출발로 이제 이 분야 시장을 선도해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지금은 초기이지만 CB사업이 성숙단계에 이르면, 신용회복과 부실예측 등 다양한 CB서비스를 개발해 수익을 창출해 나갈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공직사회는 공익을, 민간기업은 이윤 극대화를 목표로 한다. 때문에 공무원들은 박봉에도 불구하고 공공이익을 위해 봉사한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업무를 해 나간다. 30여 년을 공직에서 일했던 박 동문 역시 공무원으로써의 자긍심이 컸다고 한다. 그러한 그이기에 공직 이후의 삶을 선택하는데 있어서도 일에 대한 자긍심은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고 박 동문은 회고한다. 이제 정부가 아닌 한 사기업의 대표이사라는 직함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박 동문에게 그 의미와 회사 선택의 배경을 물었다. "기업에 와서 제일 처음 다르다고 느꼈던 점은 언제나 비용과 이익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에서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익을 생각하는 사기업이라 할지라도 일에 대한 자긍심은 중요하다고 봅니다. 저와 우리 직원들에게는 신용사회 인프라를 구축한다는 공공성에 대해 자긍심이 있고, 이 회사를 국내 최고의 크레딧 뷰로로 만들겠다는 목표가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회사 경영을 해보고 싶었고 준비해 왔습니다. 이처럼 일에 대한 사명감과 자긍심까지 가질 수 있는 회사에 취임하게 된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화 시대, 당신의 경쟁력은 무엇입니까? "저는 관세청 차장을 끝으로 일반인들이 말하는 '용퇴'를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선배가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자연스러운 모습이기 때문이죠. 대신 저는 항상 미래를 준비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법학으로 졸업하긴 했지만, 경영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대학과 대학원에서 강의도 해 왔습니다. 공직을 떠난다면 일반기업의 경영을 통해 제2의 인생을 펼쳐보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준비해 온 것이죠." 박 동문은 세계화 시대, 국제화 시대라는 말의 요체는 치열한 경쟁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오늘의 모든 사회는 경쟁을 기반으로 운용되고 따라서 경쟁력을 갖지 못하면 자연히 도태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지난 30여 년 간 몸담아 온 공직생활에서 용퇴한 것은 경쟁에서 밀렸기 때문이지만, 지금 대표이사 직함을 가지게 된 것 또한 경쟁에서 이겼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박 동문. 그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쟁력을 갖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경쟁력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노력하고 준비하는 자에게만 생기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후배들이 지금 이 순간 어떤 목표를 가지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경쟁 사회라는 말속에는 프로는 프로만큼, 아마추어는 아마추어만큼 대접을 받는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신에게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프로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당신의 경쟁력은 무엇입니까?" 학력 및 약력 박상태 동문은 1973년 본교 법대를 수석졸업하고 같은 해 13회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1977년 성균관대 행정대학원과 1988년 태국 방콕대에서 행정학 석사를 취득했고, 1998년 미국 세인트루이스 경영대학원 수료 후 2002년 건국대에서 국제무역학으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78년 재무부 관세국에서 공직을 시작한 박 동문은 보험국, 경제협력국, 세제실 등을 두루 거쳤다. 1996년 관세청 감사관을 시작으로 협력국장, 통관지원국장 그리고 차장을 역임했다. 2002년 자랑스러운 한양인상을 수상한 박 동문은 지난 4월부터 한국신용정보평가(주) 대표이사로 재직 중에 있다. 사진 : 윤석원 학생기자 astros96@iha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