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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1 22

[동문]`검사의 임무는 처벌 아닌 사회방위`

'어 퓨 굿 맨'이나 '타임 투 킬'과 같은 법정영화 속에서 변호사는 선악 구도 속 피의자를 감싸는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에 반해 검사는 피의자를 기소하고, 판사에게 높은 형량을 요구하는 악역으로 묘사되기 일쑤다. 이러한 영화의 관습적인 반복은 검사라는 직업을 '딱딱하다' 또는 '비인간적'이다라는 식으로 일반인들에게 인상을 남기기 충분했다. 사실, 따뜻한 미소로 기소장을 읽으며 형량을 구형하는 검사란 상상하기 어려운 것 아닌가? 서울지검 동부지청 차장검사로 재직 중인 이동기(법학 78년졸) 동문을 만나며 그 '딱딱함'이 사회를 지키는 힘이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이 동문은 현재 동부지청 차장검사(사시 20회)로 재직 중이다. 오전 11시.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그는 다른 검사들과 사건을 배분하고 있었다. 회의가 끝난 후,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늦게 시작하는 것에 미안해하며 웃는 그에게 던진 첫 질문은 '검사를 왜 선택하게 되었냐'는 것. 다소 틀에 박힌 질문으로 시작했지만 말문을 여는 이 동문의 표정은 사뭇 진지해졌다. "저는 검사라는 직업을 예술가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세상의 모든 악을 검사가 전부 척결하지는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건에 대해 어떻게 처벌하고 대처할 것인지에 대한 검사의 밑그림이 필요한 것입니다. 판사는 이것을 가지고 이 밑그림이 잘 되었는지 평가하고 감정하는 위치라고 할 수 있지요. 저는 감정과 평가라는 작업보다 창조적인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검사의 임무는 기소가 아닌 '사회방위' 검사들도 연륜이 쌓임에 따라 공안사건, 민사사건, 형사사건 등 자신들의 전문분야를 형성한다. 이 동문은 1978년 사범시험에 합격한 후 지난 20여 년 동안 다양한 사건들을 거쳐 자신만의 전문분야를 만들어 왔다. 그의 전문분야는 기획과 연구파트. 이 동문은 법무연수원 기획과장, 법무부 송무국장, 사법연수원 교수 그리고 국가정보원 법률보좌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획, 연구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아왔다. 기획분야에서 오랫동안 근무했기에 이 동문은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을 묻는 질문에 다른 검사들처럼 굵직한 정치 사건이나 사회적 이슈가 있었던 사건들이 많지 않다며 말을 아끼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의 이력 속에는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들도 더러 발견된다. 이 동문은 지난 1991년 낙동강 폐수방류사건 당시에는 부산지검 고등검찰관으로 해당 기업 수사에 앞장섰고, 서해 페리호 사건, 가짜 고서화 사건 등을 성공적으로 해결해 국민들로부터 많은 호응과 격려를 받기도 했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굵직한 사건들도 있었건만 정작 이 동문은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2000년 창원지검 차장검사 시절의 사건을 꼽았다. 피의자는 당시 대학교 1학년 학생으로 혐의는 '강간미수치상'이었다. "실제로 이 죄목은 최소 5년에서 7년이 나올 수 있는 죄목입니다. 하지만 피의자의 가정 환경과 범행 동기가 계획적이지 않고 우발적이었다는 점 등 여러 가지 사항들을 감안해 담당 검사와 상의, 그 학생을 기소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피의자에게 재범의 소지가 없다고 판단됐기 때문이죠. 물론 사실 여부가 분명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냉정하게 피의자를 기소하면 그것으로 검사의 임무는 끝나는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검사는 사회를 방위한다는 위치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기소를 한다면 그 학생 한 명의 인생이 아니라 한 평생 그 학생만을 바라보며 살았던 그 부모들의 인생까지 망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최고보다 최선을 다하는 삶으로 이 동문은 지난해 12월 30일, 대통령이 수여하는 홍조근정훈장을 수훈했다. 이는 정부의 장·차관등 정무직을 제외한 정규 공무원으로는 최고 권위의 훈장이다. 사법시험 동기 중에서도 가장 먼저 수훈했다는 부수적인 영예와 외부의 높은 평가는 이 동문에게 있어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는 "저는 제 개인의 능력으로 그 상을 수상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단지 명의만 제 앞으로 되어 있을 뿐 그 상은 저의 대학 법조계 동문들과 사법 연수원 동기들이 모두 함께 수훈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며 축하의 말에 손사래를 친다. 이 동문은 검사로서의 지금까지의 삶이 무엇인가를 바라고, 이루기 위해 살아온 것은 아니었다 고백한다. 단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대해 최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해왔을 뿐이라는 것이다. "저는 사법연수원 교수 시절에도 학생들에게 항상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 흘러간 시간은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 현재 이 시간에 최선을 다하자고 말이죠. 이것은 저의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저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 최선을 다하면서 지금의 위치까지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에게 꼭 해보고 싶은 지위라든지 일이라는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한양인에게 고함, '도전하라!' 이 동문은 1975년 손용근 동문이 본교 최초로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3년 후인 1978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때문에 그의 주변에는 선배들이 많지 않았다. 2년여에 걸친 연수기간 동안 힘겨운 순간에 부딪힐 때마다 의지할 수 있는 선배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이런 여건 속에서 동문회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법조계에 한양 동문의 수가 줄어든 것을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동문은 과거 90년대 초반, 300명씩을 선발했던 당시에도 25명에서 30명에 달하는 합격자를 배출했는데, 선발인원이 늘어난 것에 비해 합격자 수는 그만큼 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동문은 법조인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재삼 당부를 잊지 않았다. "저희 모교가 짧은 시간 내에 많은 법조인을 배출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전체 법조인 수를 생각해 본다면 저희는 결코 많은 수가 아닙니다. 후배 분들이 항상 내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가졌으면 합니다. 자기가 남보다 똑똑하다 혹은 무엇인가 낫다라는 생각보다는 내가 2배의 노력을 해야 남만큼 될 수 있습니다. 아니 2배 이상해야 남만큼 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노력한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선배들은 그렇게 해왔고, 여러분들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이동기 동문 인터뷰 영상 보기 학력 및 약력 1956년 전북 정읍 출생. 1974년 법학과에 입학해 1978년 제20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983년 대구지방검찰청 검사를 거쳐 부산지검 고등검찰관, 전주지검 정읍지청장, 군산지청 부장검사, 법무연수원 기획과장, 사법연수원 교수, 서울지방검찰청 형사5부장 등을 두루 거쳤다. 1982년, 본교 법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1990년 다시 박사과정을 수료한 '학구파' 검사로 통한다. 1992년 업무유공 법무장관 표창을 받았고, 지난해 12월 홍조근정훈장을 수훈했다. 사진: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2003-01 22

[동문]`시민이 바꾸는 서울` 청계천복원 시민위원 김선아

흔히 서울을 말할 때 '색깔이 없는 도시', '근육만 육중하게 붙어있는 도시'라는 꼬리표를 달곤 한다. 빵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의 문제보다 크게 부풀리는 것이 우선의 가치로 여겨졌던 7, 80년대. 대한민국의 심장으로 닥치는 대로 내달려온 서울은 이제 '복마전'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혼란스럽고 숨막히는 공간이 돼 버렸다. 이러한 중병에 시달리고 있는 서울에 숨통을 틔워주기 위해 청계천 복원 사업의 시민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건축가가 있다. 바로 김선아(건축과 88년졸)동문. 청계천 복원의 기본 원칙을 '보존과 개입'이라 힘주어 말하는 김 동문을 마로니에 공원에서 만나보았다. - 건축가로서 시민위원회 활동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하다. 청계천 시민위원회는 5개 분과로, 각계의 전문가 및 시민단체 활동가들로 구성돼 있다. 서울시 청계천 복원사업 추진 본부에서 위촉을 해, 시민위원회 도시계획 분과에서 활동을 하게 됐다. 베니스 건축대학을 졸업할 때 도시건축 관련 논문으로 졸업을 한 점, 유럽의 건축설계와 도시계획부분을 구분 없이 공부한 것, 그 곳에서 이들과 교류하며 건축가로써 성장한 점이 고려된 것 같다. - 청계천 복원의 이유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은? 한 마디로 서울 강북의 정체성 회복 필요성 때문에 반드시 복원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시민위원으로서 구체적인 활동은 어떠한가. 서울시에서 추진하고 있는 청계천 복원계획의 방향 및 방법에 대한 비판과 감시기능을 하는 것이다. 도시계획 분과위원회는 서울시 도심부 개발과 함께 하는 청계천 복원에 따른 도심부의 발전 방향, 청계천 주변지역의 개발, 청계천 복원후의 서울시 강북의 도시 모습에 대한 서울시 및 서울 시정개발 연구원의 연구과정을 검토하고 방향제시를 한다. 최근까지는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갖고, 활발한 토론을 통해, 문제점 및 보완책을 제시했다. 위원회의 최연소 위원으로써 선배님들에게서 배우기도 하지만, 의견을 발표할 때에는 많은 분들이 경청을 하시며 공감을 표하기도 한다. - 얼마 전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청계천 복원에 대해 '보존과 개입'을 중시하는 유럽식을 강조한 바 있는데. 일단 '유럽식'이라는 말이 일종의 방법론처럼 서울에서 복사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를 해야한다는 것을 먼저 말하고 싶다. 유럽의 건축가들은 새로운 땅에 건물을 설계할 때 그 건물이 지어진 후 도시의 모습의 변화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빈 땅에 뭔가를 설계한다기보다 기존의 도시맥락과 같이 호흡할 수 있는 것을 찾는 다는 것이다. 이 점이 꼭 기존의 도시 맥락을 따르기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조화'라는 것은 다양한 방법으로 찾을 수 있다. 바둑을 하는 것으로 예를 들자면 바둑을 한 수, 한 수 두어갈 때 바둑판의 모습은 그 때, 그 때의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이들은 기존의 도시 맥락에 '개입'을 한다는 개념을 가지고 설계를 한다. - 바람직한 서울시의 상을 그린다면 가장 인상적인 서울의 모습은 도심을 가로지르는 고가도로와 고가도로 하부, 지하철공간, 버려진 인도, 동네를 가로지르는 8차선 도로, 어디를 가도 똑같은 단지계획 모습, 어디를 가도 그 지역의 정체성을 알 수 없는 모습들이다. 이탈리아에 있을 때는 지나치게 보존 위주로 진행돼 스스로 짓눌리는 도시의 숨통을 틔어 주는 좀더 전위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서울에 돌아오니 '개발은 이제 그만, 제발 보존을'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도시를 다듬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고가도로는 우리를 건조하게 만들지만, 그것이 가지고 있는 미학적인 면을 생각해 본다면, 땅위에 또 다른 땅을 만들어 주는 흥미로운 오브제이다. 문제는 현재의 고가도로는 자신이 가진 기능적 역할 외에는 어떠한 배려도 없이 놓여져 있다는 것이다. 또 그 하부를 보라. 얼마나 익명적인 공간이 형성되어 있는지. 인도 역시 5m, 7m 되는 인도들이 아주 무책임한 보도 블록으로 깔려 있을 뿐이다. 고가 도로문제나, 인도 등 공공 공간에 대해서는 공공 공간의 중요성을 역설하기보다는 리모델링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어디를 가나 똑같은 동네의 모습들도 심각하다. - 시민위원회 활동 외에도 사회 각계에서 활약해 오신 것으로 아는데. 정신적으로 가장 성숙한다는 30대를 보낸 곳이 유럽의 이탈리아다 보니, 그곳의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개인적으로 여러 예술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점과 부합돼 건축 외에도 다양한 일들을 하게됐다. 베니스에서 유학기간 동안 95년에 만들어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의 코디네이터일(95년-98년)을 했으며, 한겨레21 통신원(96년-98년) 등 몇몇 언론사에 기사를 쓰는 일을 했다. 이 두 가지 일은 서울로 돌아오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01년 9월에 '서울 2002, 도시 비전과 실천'전을 위해 서울 시정개발연구원 초빙 부연구위원으로 들어오게 됐다. 이 일을 계기로 오랜 시간 떠나 있었던 서울에 무슨 일들이 있었나를 빠른 시간에 밀도 있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 후 자연스럽게 서울시에서 했던 월드컵 공원, 낙산공원에 세워진 전시관기획 및 총괄을 하게 됐다. 그밖에 2002년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프로젝트 코디네이터로 일을 했고, 최근에는 청계천 전시관 기획을 하게 됐다.(김 동문은 현재 'studio seonahKIM' 대표와 명지대 건축과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 - 공사다망한 가운데에도 전시회를 열고 있는 것으로 안다. 제목은 'Visible vs. Invisible'이다. 99.9%의 건축가를 고용할 수 없는 일반 도시민들을 대상으로 했다. 지난해 있었던 2003년도 문예진흥원 기획공모전 선정돼 진흥원의 지원과 '공간', 'A Group 건축 사무소'의 후원으로 1월 17일부터 2월 2일까지 문예진흥원 마로니에 미술관 제2전시실에서 개최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도시' 와 '사람'이라는 두 가지 요소로 전개를 했다. 보이는 도시로는 우리가 흔히 지나다니며 보는 거리들, 거리 풍경, 막연히 서울이라고 생각하는 도시 모습들, 즉 우리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도시 인프라의 이면들, 익명적, 반복적 획일적 공간들을 보여주고자 했다. 내용적으로는 도시건축을 공부한 사람입장에서 또 한 사람의 인간으로써 느끼는 도시 서울의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다. - 한양 가족에게 당부하고픈 말이 있다면.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한양인의 명예를 위해서는 한양인임을 잊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앞으로의 세계는 더욱 경쟁과 능력위주로 움직일 것이다. 한양인들이 유대하고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각자의 분야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생활할 때 가능할 것이다.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2002-12 22

[동문]`이거 로맨틱 코메디 아니에요`

"한양대와 국문과는 영화 위한 아이디어의 원천" 충무로 불문율 속 감독의 고뇌 어린 영화 '피아노 치는 대통령' 전만배 감독(국문 92년졸) 대통령은 현대 국가 권력을 대변하는 최고의 상징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에 대한 인식이 남다를 수 있는 것은 강력한 중앙집권의 정치사를 오래도록 경험한 탓이다. 그러나 대통령에 대한 이 같은 인식도 점차 바뀌어 가고 있다. 대통령을 소재로 한 각종 유머가 일상에 지친 시민의 삶을 위로하기도 하고, 대통령선거는 이제 하나의 '국민축제'로 자리매김하는 모습이다. '대중적 인기'에 내재한 감독의 고뇌 한국 영화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을 주인공으로 다뤄 화제가 된 '피아노 치는 대통령'. 지난 12월 8일 개봉된 이후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 영화는 영화 자체의 흥미도 흥미이지만, 대통령을 유머스럽고 인간적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주목을 받고 있다. 대선을 앞두고 모 방송사가 조사한 '비서실장에 가장 잘 어울릴 연예인'을 묻는 코믹한 설문에 이 영화의 주연배우가 꼽혔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대통령 선거를 불과 10여일 앞두고 개봉된 이 영화에 대한 높은 관심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전만배 감독(국문과 92년졸)을 인터뷰하는 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 감독은 BBC와의 인터뷰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며, 30분이나 늦은 시간에 숨을 헐떡이며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감독, 그것도 이제 막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감독으로서는 아주 행복하죠. 하지만 제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아직도 부끄러움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정말 제 영화가 좋아서 사랑을 받는 것인지, 아니면 '대통령'이란 특별한 소재를 그저 잘 꾸며서 사랑을 받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면 부끄러울 뿐입니다. 영화가 나온 이후로 부끄러워서 잠을 편하게 잔 적이 별로 없습니다." 전 감독은 영화가 조금도 만족스럽지 않다고 거듭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경험하면서 신인 감독이 지난 한계와 이에 따른 경험 부족이 영화 제작 과정에서 만만치 않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영화의 내용을 둘러싸고 벌어진 정치권의 논쟁도 그에게는 부담스러운 짐이었다. 그는 정치권에서 벌어진 논쟁에 대한 질문에 간단히 답했다. "누구 말처럼 정말로 정치권의 개입이 있었으면 재정적으로는 넉넉하지 않았을까요?(웃음) 당연히 영화의 완성도도 지금보다 한층 나았을 것이고, 영화 보급이나 홍보의 측면에서도 훨씬 수월하지 않았겠느냐는 식으로 반론하고 싶습니다. 영화를 제작하면서 재정적으로 넉넉하지가 못해 힘들었던 점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영화를 자세히 보셨으면 알겠지만, 값싸게 찍은 장면도 굉장히 많고요." 진지하고 체온이 깃든 영화 만들고파 전 감독은 '재미있다'는 영화평이 나올 때마다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고 한다. 그가 원래 생각했던 '피아노 치는 대통령'의 대통령은 단순히 로맨틱하고 코믹한 대통령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 감독은 대중적인 평가와는 달리 '피아노 치는 대통령'이란 영화 자체가 사실은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라고 일축한다. 그가 처음에 그렸던 '한민욱 대통령(안성기 분)'은 매우 진지한 대통령이다. 딸의 담임인 최은수(최지우 분)와의 로맨스도 영화의 한 부분에 불과했다. 전 감독이 처음에 써 내려간 영화의 시나리오 역시 대통령과 그 주변 사람들의 고민과 좌절, 기쁨 등을 섬세하게 표현한 아주 진지한 작품이었다. 대통령과 그 주변인들의 인간적인 면을 여성정책, 독도 문제 등과 관련해서 매우 조심스럽고도 진지하게 표현하려던 게 당초 의도였다는 전 감독의 설명이다. 그러나 신인 감독은 첫 영화에서 확실히 흥행을 해야만 미래가 보장된다는 충무로의 '불문율'에서 전 감독은 조금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보다 흥행이 수월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로 기존의 계획을 수정했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영화는 아주 현실적인 문화 활동이며, 충무로는 아주 냉정한 동네입니다. 제가 앞으로 정말 하고 싶은 영화를 하기 위한 작전상 후퇴였다고 하고 싶네요. 제가 정말로 하고 싶은 영화요? '피아노 치는 대통령'하고는 많이 달라요. 진지하고 인간적인 향이 그윽한 영화를 하고 싶습니다. 언제 할꺼냐구요? (웃음) 글쎄요? 언젠가는 해야죠! 또 일단 이번 영화가 괜찮은 반응을 얻었기 때문에 앞으로는 조금씩이나마 저만의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전 감독이 정말 제작하고 싶은 따뜻한 영화는 '춘향이'를 주인공으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삼은 성장 영화이다. 그는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 '춘향이'와는 완전히 다른 '춘향이'를 그리고 싶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자신의 천한 신분에 대해서 월매에게 불평하고, 이몽룡이 단 한번의 잠자리 후 기약도 없이 과거를 보러 떠나는 것에 대해서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는 춘향이가 전 감독이 상상하는 춘향이다. 한마디로 전 감독은 예쁘게 포장된 대중적 상상력을 극복하고 그 속에 내재한 인간의 진지한 내면을 그리고 싶다는 것이다. 아이디어의 원천, '한양대 국문과' 전 감독은 어느 누구보다도 본교와 자신의 출신 학과인 국문과에 대해서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영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는 데 캠퍼스 생활과 국문학적 소양이 특히 많이 작용해 왔다는 것이다. '피아노 치는 대통령'에서 여자 주인공인 최은수가 국어 교사이고, 한민욱과 최은수의 인연을 조금 더 특별하게 만든 매개가 '황조가' 숙제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춘향이'를 주제로 한 성장 영화를 만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도 재학 시절 들었던 '춘향전 원전 강독'이란 전공 과목 덕분이다. 특히 영화의 '황조가' 장면에서는 정확한 한자 자문을 얻기 위해, 과 동기인 이승수(국문과 강사)씨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단다. "국문학적 소양이라... 평상시에 의식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특별히 국문학에 관심이 많은 것도 아니고요. 그렇지만 영화를 만들다 보면 국문학적 소양이 저도 모르게 꽤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습니다. 시나리오를 쓰는 데 있어서도 나름대로 큰 도움이 되는 것 같고요.(웃음) 전공 얘기를 하니까 이제는 박노준 교수님 (인문대·국문과 교수) 생각이 많이 나네요." 학교와 학창 시절에 대한 회고를 통해 그는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전 감독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가 품은 한양대와 한양인에 대한 애정을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전 감독은 본교 출신들이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개인적으로는 학교와 학과에 대한 애착심이 강하면서도 '뭉치는' 데는 조금 약한 것 같다는 지적을 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전 감독은 학교와 동문에 대한 애정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게 필요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화창한 햇살이 빛나던 진사로, 여름 노을이 아름답던 노천극장, 따뜻했던 인문대 그리고 밝고, 진지한 모습으로 캠퍼스를 돌아다니던 한양인들의 모습 속에서 저의 정서를 살찌울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학교에 대한 자부심도 클 수밖에 없었죠. 더군다나 장학금도 줬고요.(웃음) 앞으로도 계속해서 모교에 대한 애정과 감사함을 가질 것이며, 최대한 이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려고 할 것입니다. 후배 여러분들도 열심히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한양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세요!" 이세형 학생기자 sehyung@ihanyang.ac.kr 사진 : 김모련 학생기자 moryun@ihanyang.ac.kr 전만배 감독은 누구? 전만배 감독은 1983년에 본교 인문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학창시절 인문대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었다는 소문도 있었다고 한다. 또 일부 국문과 학생들마저도 그를 보며 연극영화과가 아니냐는 의문을 가질 정도로 영화 속에 빠져 살았노라 스스로를 소개한다. 그래서 졸업도 1992년으로 조금 늦어졌다는 설명이다. 지난 12월 8일 개봉한 입봉작 , '피아노 치는 대통령'을 통해 데뷔했다. 전 감독은 학교에서 후배들과 함께 영화와 살아가는 얘기를 하고 싶다며, 누군가가 자신을 초청(?)해 줄 것을 바라고 있다.

2002-12 15

[동문]`내가 오늘 읽는 것은 너의 미래`

<한양동문이 뛴다 32> 이제 국가의 장래에 대해 감히 '훈수'를 둘 만큼 현대사회의 시민은 도도해졌다. 모든 정보를 국가가 독점하고 사회의 미래에 대한 점괘를 오직 공무원이 놓던 시대는 아득한 추억의 저편에 있다. 현대에 있어 기업활동이란 단순히 양질의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고 판매하는데 그치지 않고, 장기적 관점에서 보다 많은 이윤 창출을 위해 국가와 시장의 미래를 예측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는 순수 연구의 영역까지도 포괄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국내 최고의 씽크탱크 중 하나임을 자임하는 삼성경제연구소는 정부의 경제정책에 곧잘 'F학점'을 내놓기도 하는 '도도한 시민'의 대표주자인 셈이다. 정부에 'F학점'을 내린 기업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컨설턴트로 재직 중인 송영필 동문(도시공학 91년졸)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의 '도도함'에 대해 누구보다 자부심이 높다. 민간 기반의 여타 경제연구소들이 모회사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한데 반해 삼성경제연구소는 자회사는 물론 정부에 대해서도 '입바른 소리'를 일삼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민간기업 연구소의 대부분이 단순히 증권회사를 지지해주는 역할을 수행해 오던 것에 반해 삼성경제연구소는 상대적으로 모회사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지위와 역할을 수행해 왔습니다. 또한 국가 엘리트가 주도하는 경제 연구가 아니라, 민간기업의 시각에서 경제 연구를 하고 있는 것도 저희 연구소의 특징입니다. 점차 그 위상이 높아져 가는 민간 기업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정부의 정책을 평가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저희 연구소의 대표적 업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역시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연구소의 배경을 두고 있는 탓에 삼성경제연구소가 갖는 한계도 없지 않다. 이른바 연구소라는 글자 앞에 붙여 놓은 '삼성'이라는 수식어가 갖는 음영이다. 삼성이라는 거대 기업의 경영 노하우가 축적되었을 것이라는 진실 아닌 진실을 이유로 벤치마킹을 꿈꾸는 다수의 기업들이 연구소에 컨설팅을 의뢰하는 반면, 경쟁 관계에 있는 유사한 규모의 대기업들간에는 기업보안을 이유로 상호 연구를 의뢰하거나, 수주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연구소의 동력, '학제간 연구' 송 동문의 약력을 검토하며 가장 먼저 떠오른 의문은 경제연구소에 몸담고 있는 그의 전공이 '도시공학'이라는 점이었다. 일반적으로 '컨설턴트'라고 하면 상경 계열의 학생들이 최고의 전문직종으로 희망하며, 실제로 해당 직업군을 독점하는 분야로 인식되기 쉽다. 하지만 송 동문은 본교 도시공학과를 졸업한 자신의 경력을 내세우며 경영에 대한 상기의 편견이 왜 협소한 것인지를 조목조목 나열하고 나섰다. 물론 경제연구소의 가장 큰 역할이 경제 예측과 기업 경영에 대한 자문이기는 하지만 경영은 재무와 회계를 넘어선 보다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우리나라에서 자주 목격되는 경제 현상 중 하나가 이른바 '경제 착시현상'이라는 것입니다. 현재에도 전체 경제의 통계 수치만을 살펴보면 상당한 호황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특정 업종군이나, 지역별 경제 상황을 살펴보면 IMF가 다시 도래했다고 느낄 만큼 어려운 분야와 지역이 있습니다. 이는 특정 업종의 고성장과 서울 위주의 발전이 과도한 탓에 통계수치상으로는 그 불황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경영의 바탕에는 일반인이 잘 인식하지 못하는 다양한 연구분야가 존재합니다. 저요? 부동산(real estate)이 제 연구 분야죠." 아울러 송 동문은 거시적인 국가경제 연구가 아닌 미시적인 지역경제 연구에 있어서 자신의 전공이 탁월한 쓰임을 발휘한다고 부연한다. 사실 송 동문 외에도 삼성경제연구소에는 사회학, 정치학은 물론, 문화예술 부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공을 지닌 컨설턴트들이 있다. 이러한 구성인자들이 많은 경쟁 민간연구소들이 도태되는 외환위기 와중에도 삼성경제연구소를 건실하게 지켜주었던 버팀목이 되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대부분의 민간연구소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 경제나 경영 부문인데 반해 저희 연구소는 학제간 연구를 많이 수행합니다. 그러다 보니 동일한 문제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다양한 견해가 제시됩니다. 도출된 의견들을 하나하나 융합하다 보면 기대하지 않았던 매우 놀라운 결론을 이끌어 낼 수가 있지요. 이런 경쟁력이 지난 외환위기 때에도, 오직 삼성경제연구소만이 발빠른 대응책을 낼 수 있게 한 동력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학벌의 신화'를 깬다 삼성경제연구소에 입사하기 전, 송 동문은 '서울시정개발연구원'에 잠시 몸을 담았다. 이후 삼성으로 자리를 옮긴 까닭을 그는 자신의 연구 결과물들이 실제로 어떻게 현실에 반영되는지 알 수 없었던 공공 연구기관의 한계 때문이라 설명했다. 또한 민간연구소가 공공연구소보다 상대적으로 현장 밀착적이라는 점 외에 공공연구기관이 지닌 학벌에 대한 신화가 자신을 옥죄고 있었노라 고백한다. "얼마 전 일본에서 학사 출신의 연구원이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아직까지 학벌이 중요한 우리나라나 공공 연구기관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 연구소에서는 학사, 석사 ,박사 따위의 학력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약 능력과 노력이 있다면 연구소 내의 그 어떤 지위까지도 승진이 가능합니다. 현재 삼성경제연구소를 총괄하는 소장님이 학사출신이라는 점을 알고 계십니까?" 삼성경제연구소가 지닌 개방적인 사고와 유연함은 비단 학력의 문제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공공 연구기관과는 달리, 매우 짧은 시간에 신속한 분석이 요구되는 3개월 미만의 단기 프로젝트들을 주로 수행한다. 따라서 동시대에 이슈화된 경제 전반의 문제들에 대해 그 어떤 공공연구소보다 빠른 연구와 분석을 제공하도록 훈련되어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내가 오늘 읽는 것은 당신의 미래 물론 송 동문은 삼성경제연구소가 단기 연구에 익숙한 탓에 주로 중장기 프로젝트를 하는 공공연구소들에 비해 보다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의 단점이라 말한다. 또한 철저한 능력 중심의 연구소 운영 방침으로 인해 '상시 구조조정'의 위험부담을 안고 살아야 하는 것은 민간연구소가 주는 '근심'이라는 사실도 덧붙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생 책상물림을 면치 못하는 연구원의 직분이 숙명처럼 행복하다 고백한다. 남들보다 늘 앞서 배우며 살아간다는 것이 주는 지적희열 탓이다. "이 직업은 항상 새로운 정보들을 먼저 찾아내고 접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물론 그것을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해 연구하고 공부해야 하지만, 세상의 흐름을 읽어낸다는 성취감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이 일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느라, 오늘 즐거운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불확실한 저의 미래를 걱정하지만, 제가 오늘 읽는 것은 당신의 미래입니다." 김자영 취재팀장 apriljy@ihanyang.ac.kr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학력 및 약력 송영필 동문은 1991년 본교 도시공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 서울대학교에서 도시계획학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같은 해 서울시정개발연구원에 입사했다가 이듬해인 1995년, 삼성경제연구소로 이적했다. 현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컨설턴트인 그는 '지역산업정책' 및 '부동산'을 자신의 전문 연구분야라 소개한다. 최근 '인터넷시대의 지자체 웹사이트 기능 강화방안', '재정동향점검시스템(FTMS)을 이용한 지자체 재정진단', '외국인 직접투자 촉진을 위한 정책과제' 등의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있다.

2002-12 15

[동문]공중파에 등장한 한양의 우먼파워들 백승주·김윤지 양

"여유로움과 당당함, 관련 분야 경력이 합격의 비결" 본교 출신, 최초 KBS 공채 여성 아나운서 '한양의 공중파 점령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지난 23일 발표한 한국방송공사(이하 KBS)의 2003년도 신입사원 공채 결과, 두 명의 한양인이 아나운서 부문에 최종 합격했다. 이미 KBS 9시 뉴스를 맡고 있는 홍기섭 동문과 SBS 8시 뉴스 앵커 이영춘 동문 등 각 방송사의 메인 뉴스 진행자를 배출한 본교지만, 이번의 결과가 주목받는 이유는 합격자가 모두 여성이기 때문이다. 본교 출신 여성으로써 최초로 공중파 방송 아나운서의 길을 걷게 된 이들은 바로 백승주(독문 99년졸) 동문과 김윤지(생과대·소비자가족주거4)양. 2003년 새해부터 브라운관을 통해 마주하게 될 새내기 아나운서들을 만나 당찬 포부를 들어보았다. -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생각하게 된 계기는? 백 : 사실 아나운서라는 직업에 대해 처음부터 관심을 가지진 않았지만 '말하기'라는 분야에 대한 관심은 많았다. 대학원(교육학 전공) 논문도 '말하기'를 주제로 썼고 오하이오 대학에 유학을 갔을 때에도 'public speaking'을 열심히 배우기도 해, 그 분야에선 자신이 있었다. 이후 방송에 관한 것은 삼척 MBC에 입사한 후 뉴스, 공익광고, 내레이션 등을 직접 경험해 보며 더욱 자세히 알게 됐다. 김 : 주위에서 목소리가 좋다는 말을 많이 들어 처음엔 성우를 준비했다. 그러던 중 아나운서 쪽에 관심을 가지게 돼 3학년 말부터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했고 관련 학원과 스터디 그룹, 신문 읽기 등을 통해 차분히 준비했다. - KBS에 입사하기 전 경력은? 백 : 며칠 전 사표를 내기 전까지 삼척 MBC에서 1년 동안 근무했다. 사실 수습 3개월 차까진 '사고'를 우려해 방송을 못하는데 운 좋게 일찍부터 경험을 쌓게 되어 좋았다. 또한 지난 여름 태풍 피해로 인한 수재의연금 모금 방송을 맡은 것도 큰 경험이 됐다. 그리고 각 지역 자체 방송인 '별이 빛나는 밤에'를 진행하면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김 : 작년 모 라디오 전문방송사 공채 시험에 합격해 라디오 DJ로 일해왔다. 새벽 2시와 4시 사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맡아 지난 8월부터 진행해 왔는데, 선곡부터 멘트, 진행까지 경험하며 예전에 알지 못했던 많은 것을 배웠다. 또한 청취자들과 함께 호흡하며 다양한 삶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무척 행복했고 그분들을 잊지 못할 것 같다. - 공채 과정 중 가장 힘들었던 때와 그에 관한 에피소드가 있다면. 백 : 강원도에서 회사를 다니다보니 서울까지 시험 보러 오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한번은 방송과 KBS 카메라 테스트가 겹쳐 각서를 쓰고 총알택시를 탄 적도 있다.(웃음) 일하며 공부를 하다보니 잠도 부족했고 여러 가지 이중고에 시달렸다. 하지만 최종 면접은 사장님과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여유롭게 진행하게 돼 매우 편안했다. 최종 면접에서 '영어 잘하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곧바로 영어로 대답하면서 분위기를 바꾼 것이 유효했던 것 같다. 김 : 마찬가지로 공부와 일을 병행하는 것이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모두 부담이었다. 그러나 제일 힘들었던 순간은 역시 최종 면접이었다. 다소 긴장된 상태에서 '북한 핵'에 관한 질문을 받고 '대화로 해결해야 한다'라는 답을 말했는데 돌아온 질문은 '대화면 돼?'라는 것이었다. 면접관의 당혹스런 질문이었지만 나는 좀 엉뚱하게도 '예, 대화면 됩니다'라고 짧게 말하고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았다. 당시 면접관들의 표정을 떠올리면 지금도 아찔한 순간이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런 여유와 배짱이 합격을 안겨준 듯 하다. - 앞으로 가장 장 맡고 싶은 프로그램과 닮고 싶은 여성 아나운서는? 백 : 뉴스 진행을 가장 하고 싶다. 모든 아나운서들의 공통적인 희망이겠지만 신속하고 정확한 보도를 시청자들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전달하는 매력은 엄청나다. 뉴스와 더불어 MC도 욕심나는 분야다. 너무 튀지도 않고 기죽어 있지도 않은, '평범 속의 비범'을 발산하는 MC가 되고 싶다. 'VJ 특공대'는 사람 냄새가 풍기는 프로그램이어서 꼭 해보고 싶고, 이를 진행하는 황수경 아나운서 또한 가장 닮고 싶다. 김 : 뉴스, 라디오, '도전 골든벨', '가족오락관' 등 하고 싶은 프로그램이 너무 많다. 물론 그 중에서도 뉴스가 가장 욕심나는 분야이긴 하지만 어떤 프로그램을 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즐겁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닮고 싶은 분은 KBS 아나운서실 차장으로 계신 이규원 선배다. 프로그램 진행의 차원을 넘어서 나레이션, 성우 등 다양한 분야를 개척해 아나운서 역할의 지평을 넓혔다. 여러가지 의미에서 꼭 닮고 싶은 분이다. - 아나운서를 지망하는 본교의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백 : 자신의 자질을 검증해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아나운서에게 요구되는 외모, 말투, 지식 등 모든 분야에서 자신의 현재와 비교한 후 부족한 점이 있다면 하나씩 채워나가야 한다. 또한 관련 분야의 경력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이번 최종 합격자의 대부분이 경력자이다. 여유로움과 당당함을 가지고 준비에 임한다면 충분히 성공할 것이다. 김 :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왜 아나운서가 되고 싶은가'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 중요하다. 정말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면 일상생활에서부터 아나운서다운 자신만의 이미지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또한 여성들의 경우 텔레비전 경력은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상 오히려 마이너스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준비하는 과정이 힘들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한다면 분명 누구에게든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윤석원 학생기자 astros96@ihanyang.ac.kr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2002-12 08

[동문]`제 4의 물결은 모바일이 주도할 것`

"흐름을 읽고 앞선 기술을 익히면 '리더'가 됩니다" 모바일 솔루션의 생명은 '신속성'과 '정확성 (주)엠비존 대표이사 허춘호 동문 (사회 89년졸) 최근 대선을 앞두고 선거문화에 있어 과거와 다른 가장 큰 특징을 이른바 '미디어 선거'와 잦은 '여론조사'로 꼽는데 아무도 주저하지 않는다. 특히 소수점을 다투며 연일 신문지상을 장식해 온 여론조사에 당사자인 후보진영은 물론 일반 시민들도 첨예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먼 옛날 거북이의 등껍질과 별자리가 말하던 '모호한' 미래는 이제 과학을 통해 '짐작가능한' 미래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휴대폰 보급률이 90%를 육박하게 됨에 따라 무선망을 이용한 여론조사가 기존의 유선조사 시장을 대체할 새로운 기술로 급부상하고 있다. IMT2000으로 휴대폰에 동영상 서비스가 상용화되면 대인 면접조사도 무선망을 통해 가능할 것이라는 앞선 전망도 나온다. 국내 최대의 모바일 서베이 업체를 자임하는 (주)엠비존의 대표이사, 허춘호(사회 89년졸) 동문은 휴대폰을 이용한 여론조사의 최대 장점을 신속성과 정확성이라고 소개한다. 모바일 서베이의 생명은 '신속성'과 '정확성' "지난 해 9월 어느 날, 오전 11시 즈음에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한 미국의 국군 파병 요청에 대해 여론을 파악해 달라는 의뢰를 모 방송사에서 해왔습니다. 오후 2시에 조사를 시작해서 천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결과를 오후 5시에 방송사에 전달했고, 이 내용은 당일 9시 뉴스에 보도됐습니다. 경쟁사인 타 방송국에서도 같은 날 동일한 조사 결과를 보도했는데 이는 갤럽이 하루 전에 조사한 내용이었죠. 타 방송국에서는 최근 자료임을 강조하려고 '어제 조사한 자료입니다' 라고 멘트가 나갔지만 저희에게 의뢰한 방송국은 '오늘 오후에 조사한 결과입니다'라는 멘트가 나간 적이 있습니다." 모바일 서베이는 기존의 유선전화 조사로는 하루가 꼬박 걸리는 결과를 단 2시간만에 이끌어낼 수 있을뿐 아니라, 낮 시간 재택률이 낮은 20-30대 젊은 층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뢰도를 높일 수 있는 장점도 있다. 특히 지난 6·13 지방선거에서는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 당선자를 실제 득표율과 거의 유사하게 예측함으로써 그 진가를 과시한 바 있다. 엠비존의 경우, 연령과 성별 그리고 지역별로 전국 100만 명의 응답패널을 구축하고 있기에 특정 계층을 겨냥한 조사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모바일 서베이에 대해 허 동문은 결코 '틈새'가 아닌 '메인(main)'을 지향하는 사업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즉 이미 검증된 유선조사의 대체 가능성 외에도 동영상 면접조사를 통해 오프라인 시장까지도 그 영역을 넓힐 수 있다는 것이다. 흐름을 읽고 철저하게 검증한다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50-60대 이상 고령층의 휴대폰 보급률이 현저히 떨어지고 100만 정도의 한정된 패널로부터 표본을 추출함으로써 완벽한 대표성을 갖기 힘들다는 단점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허 동문은 한국조사연구학회 등의 학술단체와 함께 공동 학술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모바일 서베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제가 미디어리서치에 근무할 때, 인터넷을 이용한 서베이 팀을 꾸린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는 인터넷이 폭발적인 성장을 보였던 때였죠. 그런데 인터넷 활용이 특정 연령대에 치우치는 등,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야기됐습니다. 이러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학계에 있는 분들에게 각 단계마다 검증을 받아가며 사업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업계 쪽의 욕심만 키우기보다는 이뤄낸 성과를 검증받고 보완점을 교수들과 함께 논의해 가고자 하는 것이지요." '미디어 리서치', 전자상거래 업체인 '한솔 CSN' 등 마케팅 리서치 분야에 10여 년간 근무했던 허 동문이 모바일 서베이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기존 설문조사 방법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대안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후 유선과 인터넷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을 찾던 중 어떤 통신 매체보다 보급률이 높은 휴대폰에 주목하게 됐다는 것이 허 동문의 설명이다. 이에 그는 2000년 초반에 미디어리서치를 나와 한솔 CSM에 입사하면서 본격적으로 모바일 리서치 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그 후 허 동문은 모바일 솔루션 전문업체인 '텔코스'의 이사를 지내면서 전문경영인 수업을 받고 올해 9월 독립적인 법인을 세운 것이다. '제 4의 물결'은 모바일이 주도한다 허 동문이 구상하는 모바일 사업은 동영상 여론조사뿐만 아니라 광고와 쇼핑까지 아우르는 마케팅 토털 솔루션을 구축해 3-5년 안에 당당히 코스닥에 상장하는 것이다. 한 마리도 모바일을 이용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관심의 대상으로 두고 있는 것이라 그는 설명한다. "최근 '인터넷'이라는 큰 웨이브가 세상을 움직였다면 앞으로의 대세는 모바일이 될 것입니다. 시각에 따라 길거나 짧게 볼 수 있겠지만 확실한 것은 모바일에 의한 큰 변화가 올 것이라는 것이지요. 이를 이용해 마케팅과 광고, 쇼핑을 이끌어 가면서 사회변화에 발맞춰 갈 것입니다." 본교에 사회학과가 설립된지 오래지 않아 입학한 허 동문에게 있어 사회학은 다양한 관점을 배울 수 있었다는 점에서 현재의 사업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말한다. 사회학을 배우다 보면 다양성을 배울 수 있게 되는데 마케팅 조사에서 결과가 나오면 그 인과관계를 다각도로 분석하고 종합하면서 의뢰인이 보지 못했던 것을 잡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연한 생각과 분석적인 사고를 기반으로 사회통계나 조사방법론을 충실히 배운 것이 오늘의 자신을 만들었노라 회고하는 허 동문이다. 허 동문은 대학에 재학중인 후배들을 만나면 여론조사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시각을 가져라'라고 강조한다. 기존의 조사 방법에만 매달리다 보면 사회에 진출해서도 결코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고 선도적인 기술 습득에 게으르지 않으며, 이를 학술적으로 철저히 검증해 가는 허 동문의 삶은 초유의 취업대란에 직면한 졸업 예정자들에게도 매우 유효한 '솔루션'이 되지 않을까? 그의 건승을 기원한다. 서용석 학생기자 antacamp@ihanyang.ac.k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학력 및 약력 허춘호 동문은 1989년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쌍용그룹에 입사, 기획과 마케팅 업무를 3년 동안 담당했다. 이후 1992년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미디어리서치'에 입사했다. 마케팅리서치 부장으로 전자와 정보통신분야의 리서치를 주로 맡아 진행했으며, 야후와 공동으로 인터넷리서치 회사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전자상거래업체인 '한솔 CSN'와 모바일 솔루션 전문 업체인 '텔쿼스'의 이사를 거쳐 올해 9월 모바일 마케팅 전문업체인 (주)엠비존C&C를 설립, 현재 대표이사로 재직중이다.

2002-12 01

[동문]`현장의 긴장감이 제겐 행복입니다`

경찰서 출입 기자 지원한 이색 앵커 "긴장 넘치고 스릴 있는 뉴스를 진행하고 싶다" YTN 김명우 기자 (철학 92) 라디오가 중심 매체이던 6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뉴스는 '대한 늬우스'였다. 70년대 들어서면서 'TV의 시대'가 도래했고, 이때부터는 '9시 뉴스'가 대표적인 뉴스로 자리매김했다. 지금도 가장 대표적인 뉴스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은 공중파 방송의 '9시 뉴스'를 꼽을 것이다. 하지만 영원 불변인 것은 없는 법. '9시 뉴스'의 지위는 예전처럼 독점적이지 못하다. 바로 24시간 뉴스 전문채널이 있기 때문이다. CNN으로 상징되는 뉴스 전문채널은 공중파 방송과 달리 24시간 다양한 종류의 뉴스를 방영한다는 데 특징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95년 YTN이 개국하면서 본격적인 24시간 뉴스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케이블 방송이란 약점 때문에 아직 그 위상이 공중파 뉴스보다 떨어지는 감이 있지만, YTN은 분명 자사의 분명한 지위 확보에 성공한 방송사로 꼽힌다. 이러한 YTN에서 사회부 경찰 출입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김명우 동문(철학 92). 그는 YTN의 매력을 이렇게 말한다. "YTN의 매력이요? 너무 많은데요. 저 개인적으로는 조금 진지하고, 시사적인 것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런 면에서 시사적인 내용에 확실히 특성화가 되어 있는 뉴스 전문채널은 저에게 딱 맞는 직장이죠. 뉴스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가장 빨리 대형 뉴스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고, 24시간 항상 긴장감이 감돈다는 게 YTN의 큰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시청자들의 상당수가 우리나라의 의사결정층과 오피니언 리더라는 것도 큰 특징입니다." 경찰 출입기자 자원한 이색 앵커 김 동문을 만난 것은 꽤 이른 아침이었다. 조금은 부시시한 모습으로 밤새 있었던 사건들을 요약한 보도자료를 검토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전형적인 경찰서 출입 기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원래 기자가 아니다. 그는 '앵커'다. YTN에 입사한 2000년 1월부터 불과 한달 여 전까지, 그는 스튜디오에서 깔끔한 모습으로 시청자들과 만나던 YTN의 주요 '얼굴' 중 하나였다. 'YTN 24', 'YTN 뉴스출발' 등을 진행했던 그는 이번 달부터 사회부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앵커에서 기자로, 그것도 경찰서 출입 기자로 옮긴 데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어 보인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보직 변경이 본인의 희망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 "제 스스로가 원해서 내린 결정입니다. 물론 저는 앵커입니다. 그러나 스튜디오에서 진행하는 것만큼 현장을 경험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시다시피 YTN은 매체 특성상 보도국의 모든 인원이 스튜디오와 현장을 똑같이 능숙하게 맡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에게 꼭 필요한 경험이었고,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김 동문은 앵커와 기자의 특성에 대해서도 모두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구체적으로 그는 '앵커=최후의 뉴스 전달자', '기자=최초의 뉴스 전달자'란 공식을 예로 들었다. 또한 취재 기자는 현장의 생동감, 앵커는 회사의 얼굴이라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는 데 특별함이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앵커의 경우 시청자들과 상대적으로 더욱 가깝게 호흡할 수 있다는 점이 좋다고 말했다. "원래 앵커들은 유명세를 조금 타게 마련입니다. 또 시청자들의 관심을 많이 받게 됩니다. 이메일 같은 것도 비교적 많이 들어오지요. 언론인으로서의 영향력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무척 가치가 있습니다. 시청자들의 반응요? 요즘은 시청자들이 이메일을 많이 보냅니다. 그런데 저 같은 경우 제보나 앵커란 직업에 대해 묻는 이메일들은 조금 많이 받았는데, 팬레터는 거의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웃음) 참고로 다른 동료 앵커들은 부럽게도 많은 팬레터를 받더군요." 앵커가 되려면 이제 겨우 입사 3년 차의 새내기이지만 김 동문에게서는 방송 저널리스트라는 강한 자부심과 투철한 직업의식이 느껴졌다. 그런 만큼 자신의 직업에 대해서 오랜 기간동안 준비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 동문에게 앵커가 되려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느냐는 아주 통속적인 질문을 던졌다. "'언론고시에 왕도는 없습니다. 꾸준히 모든 것을 조금씩 다 해야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상식 공부에 매달리는 것보다는 책을 많이 읽고, 토론과 글쓰기에 치중하는 게 좋다고 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든 하나를 알아도 그것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김 동문은 언론고시를 오랜 기간동안 '제대로' 준비했다. 김 동문은 문화방송 손석희 아나운서의 특강을 듣고, 아나운서 혹은 방송 언론인이 꼭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런 목표를 가슴에 안고 그는 3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언론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본교 '언론준비반'에서 계속 공부를 했다고 한다. 또 개인적으로 아나운서에게 필요한 실무적 소양을 쌓기 위해 MBC 아카데미에 다니기도 했단다. "시험 공부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언론과 주변 현상에 대한 관심인 것 같습니다. 알다시피 언론사 공부는 공인된 과정이 없습니다. 회사마다 천차만별입니다. 그런 만큼, 자기가 가장 지원하고 싶은 회사와 직종에 맡게 알아서 스스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 점이 제일 어렵죠. 그러나 열정만 있다면 힘들어도 보람있는 과정일 것입니다." 미래 대신 과거를 얘기하다 김명우 동문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말한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도 그는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일축한다. 김 동문은 스스로가 아직 새내기 방송 저널리스트라는 점을 강조하며, 갈 길이 '멀었다'라고만 반복했다. 어떤 특정한 계획이나 목표보다는 배우고, 익숙해지는 게 훨씬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작 그가 들려준 말은 먼 훗날이 아닌 지난 과거에 대한 회고였다. 그는 손에 잡히지 않는 미래보다 자신에게 가장 보람 있었고 기억에 남았던 '사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2001년 9월 11일 밤이었습니다. 밤 근무가 없던 날이라 집에서 쉬고 있었는데, 빈 라덴 때문에 보도국 전 인원에 대한 비상소집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당시 보도국의 분위기에는 말 그대로 살기가 느껴지더군요. 뉴스 전문채널의 '전시 분위기'가 어떤 것인지 확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제가 가장 긴장했지만 동시에 가장 자신감 있고, 만족스럽게 뉴스를 진행한 때가 바로 그 때라는 것입니다. 당시의 경험은 잊지 못할 것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번 그런 긴장감 있는 뉴스를 진행하고 싶습니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며 그의 진가는 모든 세상이 긴장할 때에도 잃지 않는 차분함과 침착함에 있음을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방송인의 꽃, 앵커의 직위를 마다하고 사건과 사고로 가득 찬 경찰서를 그가 스스로 선택한 이유를 깨달은 것도 바로 이 때쯤이었다. 이세형 학생기자 sehyung&ihanyang.ac.kr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학력 및 약력 김명우 기자는 지난 1992년 본교 인문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1998년 졸업했으며, 지난 2000년 1월에 YTN에 앵커로 입사했다. 입사한 후 'YTN 24', 'YTN 뉴스출발' 등과 같은 뉴스 프로그램을 진행했으며, 올해 11월부터 사회부에서 경찰 출입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앵커 시절에는 불규칙한 출퇴근 스케줄로, 사회부 근무를 시작한 후에는 경찰서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관계로 여자 친구를 일주일에 한 번 정도밖에 못 만나고 있노라 불만이 많다.

2002-10 22

[동문]`컨설팅이 곧 구조조정을 말하는 것 아니다`

기업의 효율성 극대화 위한 '기업 의사' 베어링포인트 이호림 동문 (경영 92) IMF를 겪으면서 한국 샐러리맨들의 공포대상 1호는 더 이상 깐깐한 직속상사나 골치 아픈 거래처가 아니다. 대부분의 기업체에서 구조조정이 시행되면서, 샐러리맨들의 가장 큰 공포대상은 이제 컨설턴트로 바뀌었다. 이것은 대규모 구조조정이 시행되는 시기가 경영 진단, 즉 컨설팅 결과가 발표되는 때와 맞물려 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이제 샐러리맨들 사이에서는 회사에 컨설팅이 있을 예정이라는 소문이 돌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구조조정을 떠올리는 게 일반적이라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이다. 컨설팅 회사와 컨설턴트. 아직은 우리에게 그리 익숙한 회사와 직업이 아니다. 그러나 지난 97년 IMF 구제금융을 전후로 컨설팅 회사와 컨설턴트들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그만큼 우리 경제에서 컨설턴트들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크다는 증거일 것이다. 실제로 현재까지 컨설팅 회사와 컨설턴트들이 한국 경제에 남긴 '발자취'는 결코 작지 않다. 경영진단과 구조조정이란 개념이 사실상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한국 기업들에게 그 개념과 방법론을 가르쳐 준 것이 바로 컨설팅 회사와 컨설턴트들이었기 때문이다. '감원'이 곧 컨설팅의 목적은 아니다 현재 'PWC(최근 IBM으로 합병)', '액센추어(Accenture)' 등과 함께 세계적인 종합 컨설팅 회사 중 하나로 꼽히는 '베어링 포인트(BearingPoint, 舊 KPMG 컨설팅)'에서 컨설턴트로 활동하고 있는 이호림 동문(경영 92). 그는 컨설팅의 목적이 무조건 구조조정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컨설팅하면 많은 사람들이 구조조정을 떠올립니다. 실제로 IMF를 겪으면서 많은 수의 한국 기업들이 컨설팅을 통해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했습니다. 조직이 지나치게 비대했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컨설팅의 목적이 무조건 구조조정 혹은 인력 '줄이기'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조직 슬림화를 위해 컨설팅을 하는 경우도 많지만, 조직 내에서 좀더 효율성을 갖추고, 적절한 경영 시스템을 구축하는 목적으로 시행하는 컨설팅도 많이 있습니다." 이 동문에 따르면, 현재 실시되고 있는 국내 기업 대상의 컨설팅 중에는 조직 슬림화를 위한 컨설팅보다는 오히려 다른 형태의 컨설팅들이 더 많다고 한다. 예를 들면, 조직 내부의 효율성을 극대화시키는 데 목적이 있는 ERP(Enterprise Resource Planning), 마케팅 효과와 관련 있는 CRM(Customer Relation Management) 그리고 물류 조달 및 관리와 관련이 있는 SCM(Supply Chain Management) 등이 최근 많이 시행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이 외에도 인사 평가제도, 경영전략 수립, 조직설계, e-비즈니스 전략, 조직개편, 홍보전략, 전산 시스템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형태의 크고, 작은 컨설팅들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이 동문은 이 같은 추세에 대해 국내 기업들도 이제 많이 슬림화를 단행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짧은 경력 불구, 굴지의 기업 컨설팅 담당한 '행운아' 경력 2년의 '새내기' 컨설턴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꽤 많은 수의 크고도 중요한 'A급' 프로젝트에 '출전'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파워콤 장기전략 수립」, 「국민은행, 주택은행 통합비전 만들기」, 「하이닉스 계속 기업 가능성 평가」, 「BC카드 e-biz 전략」, 「선물거래소 인사제도 수립」 등 그는 한국 경제의 대표적인 기업들과 관련된 프로젝트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현재도 그는 모 공기업의 인사제도와 관련된 컨설팅을 진행 중이다.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었기에 컨설턴트로서 이 동문은 상당히 '운'이 좋은 편이라고 스스로 고백한다. "제가 생각해도 정말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회사에 입사한 후 줄곧 큼직큼직한 사건들이 터졌고, 이와 관련된 프로젝트에 꾸준히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됐으니까요. 다양한 프로젝트들에 참여하며 많은 경험을 했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컨설턴트로서 느낄 수 있는 '재미'와 '보람'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죠." 컨설턴트의 '재미'와 '보람'으로 이 동문은 스스로 문제를 제기·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즉 '자신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점을 꼽는다. 컨설턴트만큼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창의적이며, 자신의 색깔을 담은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은 드물다는 것이 이 동문의 생각이다. 그러나 이러한 컨설턴트의 매력 뒤에도 여러 어려움도 있다고 그는 부연한다.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해 해당 회사에 나가면, 직원들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구조조정을 시행한다거나, 업무 시스템을 대폭 바꾸는 프로젝트가 추진될 경우에는 더욱 그렇죠. 대우그룹의 구조조정과 관련된 컨설팅이 시행됐을 때, 일부 컨설턴트들은 '테러' 위협까지 받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저 같은 경우는 참 복이 많은 편입니다. 제가 담당했던 프로젝트에서 같이 일했던 클라이언트 쪽 직원 분들은 저에게 호의적이었으니까요. 항상 신중하고,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걸 매일 느끼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문제 해결 능력' 상경 계열 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 중 하나인 만큼, 컨설턴트가 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모든 전문직이 그렇지만, 컨설턴트 역시 오랜 기간의 철저한 준비와 검증된 능력이 있어야만 될 수 있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동문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동문은 '전문성', '다양성', '자율성', '창의성' 등이 보장된다는 점에서 컨설턴트에 끌렸다고 고백한다. 그는 학부 졸업 후 본교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리고 지도교수였던 장석권 교수와 함께 많은 프로젝트에 참여했는데, 이런 경험이 컨설턴트가 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대학원 졸업 후 그는 몇 달간 '정보통신 정책 연구원(KISDI)'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하지만 학문적이고, 다소 정적인 연구소의 분위기는 이 동문에게 맞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연구소 생활을 포기하고, 당시 컨설턴트를 채용 중이던 '아더 앤더슨'에 지원해 합격했다. 그 후 '아더 앤더슨'은 엔론 사태로 인해 'KPMG 컨설팅'으로 합병됐고, 'KPMG 컨설팅'은 다시 '베어링 포인트'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런 이 동문에게 컨설턴트가 되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에 대해 매우 '냄새나는' 질문을 물었다. "학점, 영어능력, 프레젠테이션 능력, 경영학·경제학적 지식 등은 아주 기본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제가 볼 때 컨설턴트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은 문제 해결능력입니다.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를 비판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즉, 진단에 따른 처방까지 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클라이언트에게 아주 이상적이면서 동시에 현실적인 처방을 내려줘야 합니다. 컨설턴트가 되고 싶은 후배들은 일단 학교 공부에 충실하면서 다양한 사회활동과 학회활동 등을 통해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기업에 진출, 자신의 경영기법 발휘하고파 컨설턴트란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이 넘쳐 보이는 이 동문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조금 의외였다. 그의 미래 계획은 컨설턴트로서의 계획이 아니라, '클라이언트'로서의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이 동문은 자신이 컨설팅 회사에서 배운 각종 경영기법들을 실제로 써보고 싶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기회가 된다면 국내외의 유수 기업에 진출해 선진적인 경영기법들을 적용해 보고 싶다는 것이다. "저만의 독특한 계획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컨설턴트들이 기업체로 옮겨서 자신이 배운 경영기법과 노하우들을 적용하는 것은 우리나라나 외국 모두 아주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저희 회사만 해도 제가 입사할 때부터 계시던 분들은 절반 정도밖에 안됩니다. 그리고 회사를 옮기신 분들 중 많은 수가 국내외의 유수 기업체 핵심 부서에서 컨설턴트 시절 배운 경영기법들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변화무쌍한 컨설팅 업계만큼이나 이 동문은 변화를 예측하고, 즐길 줄 아는 사람 같았다. 5일 근무제가 정책적으로 추진되는 지금에도 야근과 휴일 반납이 빈번하지만 일이 무척 재미있다 고백한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직업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적성'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인식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삶이란 매일매일 부딪히는 문제와 고뇌를 하나씩 풀어나가는, 스스로에 대한 끊임없는 컨설팅의 연속이기도 하다. 이세형 학생기자 sehyung@ihanyang.ac.kr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학력 및 경력 이호림 동문은 1998년 본교 경영학부를 졸업했으며, 본교 대학원 경영학과를 2000년도에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정보통신 정책 연구원(KISDI)'에 근무하다 2000년 9월 현 근무처인 '베어링포인트'에 입사했다. 입사 후 '전략 Solution 팀'에 합류했으며 현재는 '인사조직 Solution 팀'에서 컨설턴트로 활동 중이다. 바쁜 업무 때문인지 아직 미혼이다.

2002-10 15

[동문]`가을에는 사랑을 하세요`

"사랑의 끝은 육신의 죽음 아닌 추억의 소멸" 160만 관객 울린, 충무로의 어린 왕자 '연애소설' 이 한 감독 (연영 88) '너무 아파요. 그런데 계속 아프고 싶어요.' 영화 속에 세 주인공은 마치 릴레이라도 하듯이 이렇게 말한다. 너무 아파서 계속 아프고 싶은 기분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마이크로웨이브가 수 분 만에 뱉어내는 인스턴트 식품들처럼 요즘 우리의 만남과 이별은 너무도 쉽다. 만남에서부터 50일을 축하하고, 100일을 꼭 기념해야할 만큼 우리의 사랑은 몇 번의 계절을 넘지 못하는 짧은 감정의 소모품이 되어버렸나? 영화의 주인공처럼 아픈 기분이 생길라치면 그는 이미 새로운 사람에 두근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치는 낯선 인연들은 늘 금속성의 생채기를 남기고 간다. 상처로 가득한 도시에 분홍빛 러브바이러스를 퍼뜨린 사람, 가을의 복판에서 연애소설의 이한 감독을 만났다. 유치해지지 않고서야 네가 낭만을 알랴? 일군의 비평가들은 영화 '연애소설'을 놓고 한국판 '러브레터'니, 내용이 너무 신파적이니, 등장 인물들의 행동과 대사가 지극히 유치하다는 등 혹평을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들이 무색하게, '연애소설'은 이미 전국 160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수많은 관객들의 옷소매를 적셨다. 총과 칼로 무장한 '어깨' 아저씨들이 난무하는 스크린을 비집고 이른바 유치찬란한 '연애소설'이 승승장구를 달리고 있는 것이다. 슬픔이 웃음처럼 허공으로 사라지지 못하는 까닭은 눈물에는 웃음이 갖지 못한 질량이 있다는 말이 새삼 떠오르는 대목이기도 하다. 촌스럽고 어눌하지만 '사랑'으로 무장한 젊은이들을 앞세워 영화는 속삭인다. '가을에는 사랑하세요.' "처음에 사장님을 만나서 '이 영화는 흥행은 안되겠지만 배우가 좋으니까 망하지는 않겠죠'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런 영화가 이렇게 흥행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죠. 기분이 너무 좋습니다. 일부 사람들이 유치하다고도 하는데 유치한 것이 비단 나쁜 것만은 아니죠. 개인적으로 유치하다는 말을 너무 좋아합니다. 우리가 어른들에게 유치하다고는 하지 않잖아요. 유치하다는 말은 어린 아이의 모습에서 나온거죠. 내 영화가 유치하길 바랍니다. 내 영화가 꾸밈없는 아이를 닮아 있길 바랍니다" 아직도 남의 집 벨을 누르고 도망가는 장난이 하고 싶을 때가 있다는 이한 감독은 세상이 조금만 더 유치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너무 어른들만이 사는 세상이 되어 간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서 빨간 장미를 사랑한 어린왕자가 먼저 떠올랐다. '아직 칭찬에는 안 익숙한데…….' 영화에 대한 짧은 찬사에 이 감독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얼굴을 붉힌다.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한 영화가 보여준 순수의 밀도가, 그의 얼굴에도 숨김이 없이 드러나 있다. 한 명의 어린왕자가 지금 내 앞에 있다. "영화는 '러브레터'가 아니라 '소나기'를 모티프로 만들었습니다. 첫 작품에 대한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해왔는데 그 때는 영화 '러브레터'가 만들어지기 한참 전의 일이죠. 어려서 소설 '소나기'를 한 두 번 읽었는데, 어른이 된 후에도 가끔씩 그 소설의 느낌들을 떠올리면 감정적으로 순화가 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 느낌의 영화를 만들어서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도 유행에 타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줄 영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성공한 걸까요?" '입봉'이 '대박', 삭제 장면은 여전히 아쉬워 많은 연인들이 애틋한 시간을 함께 하기 위해 분주히 극장을 다녀가지만, 정작 감독들은 영화를 찍느라 바빠서 제대로 연애도 못한다는 그의 고백이 안쓰럽다. 아침 6시에 모여서 준비하고 9시 정도에는 실제 촬영에 들어간다. 야간 촬영이 있는 경우에는 꼬박 밤을 세고, 24시간 내내 촬영을 하는데 제작 기간 내내 대부분의 나날이 그러했다는 설명이다. '잠은 언제 자느냐'라는 상투적인 질문에 '촬영 끝나고 집에 가서 자요'라고 대답하는 그의 모습이 애처롭다. "너무 힘들었어요. 선배들 얘기를 들어보면 특히 신인감독은 피를 한 바가지나 쏟는다고 했어요. 초짜가 배우와 스탭들까지 수 백명의 사람들을 관리해야 하니까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다고 했는데 그 말이 사실이었죠. 특히 크랭크 인 10일 전부터는 거의 한숨도 잘 수가 없었어요. 긴장감으로 먹은 것은 다 토하고 신경쇠약에 빠졌죠. 크랭크 인 당일에는 다리가 후들거려서 도저히 걸어갈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 거울을 보니 안색이 너무 좋지 않아서 사람들이 저를 못 알아보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을 정도니까요." 모자를 쓰고 갈 것인지 썬글라스를 쓰고 갈 것인지 한참 고민했다는 그의 말에 영화를 위해 고군분투했을 그의 지난 시간이 떠올라 일순 숙연해졌다. 촬영이 모두 끝나고, 개봉 뒤 관객들의 호응을 지켜보면서야 긴장이 조금씩 풀리고 있노라고 그는 덧붙인다. 이른바 '입봉'작에서 '대박'을 터뜨린 감독으로서 그 떨림을 어찌 쉽게 잊을 수 있을까 싶다. 그러나 이미 개봉한 영화에 대한 아쉬움은 모든 감독들에게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이 감독은 말한다. "제가 좋아하는 장면은 상영시간 문제로 다 잘랐습니다. 영화를 다 찍고 편집했더니 2시간이 넘더라구요. 지환이의 현재 모습, 지환이의 어머니와 가족관계 같은, 보다 정서적이고 세밀한 스케치들, 우리 일상의 모습들을 그대로 보여주려고 했죠. 돈을 적게 들이고 제가 만드는 영화라면 모두 넣었을 텐데, 저 혼자만이 아닌 관객이 좋아해야 하니까 눈물을 머금고 잘랐습니다." 알코올... 필름... 그리고 나그네 파전 이 감독이 처음부터 영화감독이 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 시절, 자연계를 선택했던 그가 정작 원서를 쓰려니 하고픈 전공이 없더라는 것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오랜 동안 생각하다가 그것이 음악과 영화인 것을 알았단다. 연극영화과는 자연계열의 과목에 한 과목만 추가로 시험을 보면 지원이 가능했고 '이곳에 가면 적어도 재미는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원서를 넣은 것이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된 것. 재미있겠다 싶어 전공을 선택한 희대의 낭만주의자답게 학창시절에 대한 물음에 '필름'과 '술'이 전부였다는 대답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학창시절은 술과 영화, 그것이 전부였죠. 제 동기 중에 감독들이 많습니다. '해피엔드'의 정지우, '와니와 준하', '비천무'의 김영준, '로스트 메모리즈'의 이시명 감독 등이 모두 동기들입니다. 교수님들이 '너희들은 영화를 참 열심히도 찍는다' 하실 정도로 서로 배우도 하고, 조명도 하고, 감독도 하면서 작품들을 찍었어요. 이렇게 몇 작품만 해도 한 학기가 훌쩍 지나곤 했죠. 그리고 술을 마시고……. 그게 학창시절의 전부입니다. 단골 술집이요? '나그네 파전'을 즐겨 갔었죠." 이 감독은 대학 졸업반 때부터 광고회사에 몸을 담고 직장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우연한 기회로 배창호 감독 밑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다시 영화계로 복귀했다. '러브스토리', '정' 등은 그가 연출부로 땀을 흘리며 '입봉'을 준비한 작품들이다.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작품 구상을 하는 스타일인지라, 지금껏 써놓은 시놉시스며 시나리오만도 수 십여 편. '연애소설'은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랜 나이테를 두른 작품 중에 하나다. 향후 '오즈의 마법사'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을 생각하고 있지만 '연애소설'처럼 흥행의 성공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고. 만약 감독을 시켜주지 않으면 만두집을 하고 싶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그의 얼굴이 해맑기 그지없다. 사랑의 끝은 육신의 '죽음'이 아닌 추억의 '소멸' 영화 '아멜리에'를 너무도 감명 깊게 보았다고 말하는 이 감독에게 '이상형'을 물었다. '웃는 여자는 다 예쁘지 않나요?'라는 싱거운 반문이 되돌아온다. 영화 '연애소설'은 감독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그려진 작품으로 알려지면서 더욱 화제를 모았다. 2002년 가을, 수많은 청춘의 심금을 울린 '연애소설'의 실제 주인공은 과연 누굴까?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 사는 여자가 아니었어요 과 친구의 생일이라 안양에 갔죠. 그곳에서 만났어요. 이름이 수인이었죠. 일행을 버리고 그 여자를 쫓아갔어요. 비밀이 많은 여자였죠. 전화번호도 없고, 만나려면 그 여자가 먼저 전화를 해야만 했죠. 그 사람이 너무 좋아지는데 전화번호도 가르쳐 주질 않고, 자기 정체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말라고 하더군요. 다섯 번쯤 만나고 화가 나서 조금 다퉜는데 이후로 연락이 없었어요. 대학교 1학년 때의 일입니다. 지금도 보고 싶어요." 스무 살 때의 인연을 잊지 못해 지독한 가슴앓이를 했던 그가 생각하는 '연애소설'의 결말은 슬픔일까? 행복일까? 그는 '연애소설'은 단연코 '해피엔딩'이라 말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진정한 끝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눈물이 아련한 추억으로 승화되기를 바란다는 것이 감독의 설명이다. 한 동안은 주인공 지환이 슬픔에 고통스러울지라도, 시간이 지나고 어느 따뜻한 날이 오면 지환에겐 그것은 더 이상 슬픔이 아닌 행복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라는 것. 눈물을 흘린 많은 관객들에게 그가 남긴 말이 있다. 참된 사랑의 끝은 육신의 '죽음'이 아닌 추억의 '소멸'이라고. 김자영 취재팀장 apriljy@ihanyang.ac.kr 사진 : 이재룡 사진기자 ikikata@ihanyang.ac.kr 학력 및 경력 이한 감독은 1988년 본교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배창호 프로덕션에서 연출부로 '러브스토리', '정' 등의 작품에 참여하다, 2002년 영화 '연애소설'로 감독으로 데뷔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장이모 감독을 좋아하며 영화와 음주를 자신이 할 줄 아는 두 가지 일이라 소개한다.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한 데뷔작 '연애소설'은 아련하면서도 밝은 톤의 멜로 드라마로 지난 10월 13일을 기준으로 158만의 관객을 동원하고 있다. 석관동 자택에서 아직 독신의 삶을 살고 있다.

2002-10 08

[동문]`우리의 무대는 세계입니다`

"휴대폰은 살림이 아닌 하나의 패션입니다" '차별성' 앞세워 시장 공략 성공한 SK-텔레텍 윤민승 상무이사 (전기 86년 졸) '미국의 과학자들이 땅을 100미터쯤 파다가 구리조각 하나를 발견한다. 그들은 이를 근거로 2만 년 전에 유선전화망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놀란 일본의 과학자들이 땅을 파다가 작은 유리조각을 발견하고는 자신들은 광통신망을 갖고 있었노라 주장했다. 한국의 과학자들도 땅을 파 보았다. 수 백미터를 파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2만 년 전에 이미 무선통신망을 갖고 있었노라 주장했다.' 웃지 못할 상기의 유머는 어쩌면 오늘날 현실이 되어버린 듯 하다. 2001년을 기준으로 전국 휴대폰 가입자수가 2천 6백 만 명에 달하는 지금, 휴대폰은 마치 제2의 눈과 귀처럼 우리의 일상을 잠식하고 있다. 게다가 기존의 듣고 말하는 즐거움에 만족하던 휴대폰 단말기는 이제 보는 즐거움을 넘어서 외형적인 디자인뿐 아니라 칼라 액정과 대용량 정보 전송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진보를 거듭하고 있다. 특히 정보통신에 있어 세계 선두를 자임하는 국내 휴대폰 시장은 그야말로 세계 휴대폰 기술의 첨단을 보는 것과도 같다. 그 중심에 'SKY'란 브랜드로 잘 알려진 핸드폰으로 국내 시장에 우뚝선 SK-텔레텍이 있다. 후발 주자로 창립 4년 만에 굴지의 휴대폰 제조업체로 성장하기까지 윤민승 상무는 그 시작과 끝을 함께 하고 있는 마케팅 전문가다. 4년만에 시장 공략 성공한 비결, 'It's different' 5분 여를 기다리고 있을 때쯤 40대 초반의 신사가 빠른 걸음으로 들어와 악수를 청한다. 국내 굴지의 핸드폰 제조업체, SK-텔레텍의 윤민승 상무다. 카키색의 와이셔츠에 도라에몽이 그려진 넥타이를 매고 콜라를 마시는 윤 동문과의 첫 만남. 그 느낌은 마치 청량음료의 탄산이 입으로 가득히 퍼지는 기분이다. 독특한 그의 인상이 회사의 광고 문구와도 너무 닮아있다. 'It's different.' "처음 20명으로 시작한 회사가 4년만인 지금 사원 400명이 넘는 메이저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보수적이던 기존 전자업계에서 이 같은 단기간의 성장은 전대미문한 사건입니다. 이런 성장의 요인으로 '차별화' 전략을 내세우고자 합니다. 최초로 아이보리 색상의 단말기, 화음벨소리 그리고 카메라가 부착된 단말기를 국내에 도입한 것이 자사였습니다. 이렇게 기존의 것과 차별화를 주장하는 우리의 슬로건 'It's different'와 거기에 걸맞는 신기술이 결합되어 오늘의 성공이 가능했다 봅니다." SK-텔레텍이 후발주자로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소로 '차별성'을 꼽으면서, 자사 브랜드인 'SKY'의 프로모션을 꾸준히 한 것도 기업 성장의 요인이었다고 윤 동문은 덧붙이다. 또한 자사 브랜드 없이는 시장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는 그의 부연에 현재 단말기 시장을 이끌고 있는 'SKY' 브랜드를 창출한 SK-텔레텍의 위상을 다시금 실감하기도 한다. 회사 창업 때부터 마케팅 팀장을 맡아 시장 개척을 주도하고 현재 상무이사에 오른 그의 경력을 생각할 때, 회사의 성공을 위한 그의 역할과 노력이 사뭇 예사롭지 않았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자신의 별명이 워크홀릭(workholics)이라 소개하는 그의 미소 뒤로 고단했던 지난 시절이 아련히 비친다. 한국의 휴대폰, 세계 시장 공략의 첨병 자임 윤 동문은 본교 재학 시절인 80년대 초, 당시에는 매우 드물었던 배낭여행을 다녀올 정도로 세계에 대한 그의 관심은 유별났다 설명한다. 그래서일까, 1986년 입사초기부터 글로벌 마켓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그가 최근 가장 행복하다 말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누구에게나 매력적인 60억 인구의 중국시장에서 SK-텔레텍이 승승장구를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SK-텔레텍은 중국 유니콤 CDMA 사업장에 단말기 100만개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 아직 어떤 언론에도 공개하지 않은 따끈한 뉴스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즐거워 보인다. "우리나라의 휴대폰이 해외에서 호평을 받는 이유는, 첫째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제조업 분야에 탁월한 손재주를 지녔던 까닭이죠. 둘째로는 단말기 시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많은 연구자원이 투입되어 여타 산업보다 상대적으로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셋째는 60-80년대의 경제성장기를 거치면서 이미 휴대폰에 들어갈 기술적인 부품산업들이 발달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즉 잠재적 역량이 모두 갖춰져 있었다는 겁니다." 특히 그는 우리의 휴대폰 산업이 전자업계에서 일본을 앞지른 최초의 기술 영역이라고 덧붙인다. 항상 일본보다 한 걸음 느린 산업 경영을 하던 우리나라로서 모든 관심이 이 분야로 쏠린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한 관심이 현재 휴대폰 기술의 비약적 발전을 더욱 가속화 시켰다는 것이 윤 동문의 지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 뒤에도 음지가 존재한다. 날이 갈수록 디자인과 색상이 화려해지고, 끊임없이 새로운 기능을 갖추어 가는 휴대폰은 소비자들에게 너무나 유혹적이다. 게다가 기업 간의 경쟁으로 인한 현란한 광고들은 소비성향을 더욱 자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휴대폰이 지닌 내구성과 무관하게 교체 주기가 다소 빠른 현재의 상황은 일면 자원의 낭비라는 지적에 그도 이견을 달지 않는다. 그러나 휴대폰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에서 그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이제 휴대폰은 패션입니다. 새로운 모델의 운동화가 출시되어서, 이미 여러 개의 운동화가 있음에도 그것을 산다고 하면 뭐라고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휴대폰도 운동화와 다를 바 없습니다. 한시도 몸에서 떨어뜨릴 수 없는 필수품입니다. 게다가 국내 소비자들의 소비욕구는 기업들에게 엄청난 생존경쟁을 부추겼고, 그 결과 지금 세계 시장에서 우리의 휴대폰이 이렇게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낭비라고만 생각하기에 그 결과물들이 너무 달콤하지 않습니까?" 윤 동문은 내수시장이 없으면 기업이 살아남지 못한다고 강조하면서, 특히 기업들의 치열한 기술경쟁에는 어떠한 정치적 개입 없이 순수한 자율경쟁만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좁은 한국바닥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어떻게 세계 무대에 나가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겠습니까?"라고 부연하는 그의 말 뒤에는 SK-텔레텍에 대한 자부심이 짙게 배어난다. 잊지 못할 최고의 브랜드, '한양인' 본교 음대 교수를 지냈던 정은모 교수의 차남이기도 한 그의 한양 사랑은 각별하다. 80년대 초 대학 재학시절에 한번도 학교 배지를 가슴에서 뗀 적이 없다는 그의 말 한마디만으로도 한양에 대한 그의 애정은 모든 것을 증명한 셈이다. 그런 그는 요즘 한양인들에 대해 조금은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과거보다 한양인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다소 줄어든 게 아니냐'하는 것이 그의 솔직한 고백이다. "우리나라 산업이 이만큼 발전해 오기까지 한양동문들의 역할은 실로 대단한 것입니다. 어느 산업전선에서나 묵묵히 맡은 바 성실함을 다해 온 한양인들이 자랑스럽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자신이 성공적으로 업무를 수행한 뒤에도 그것을 공공의 성공으로만 돌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동문들과의 연계가 미약한 점도 아쉽습니다. 어느 분야에 가더라도 자랑스런 한양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위대한 한양인들'이라는 수식어를 서슴치 않으며 한양에 대한 기대와 조심스런 걱정들을 풀어놓는 그는 나이를 뛰어 넘어 살가운 선배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1시간 남짓의 짧은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또 다시 회의실로 뛰어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가 남긴 말들을 곰씹어보았다. "입사 면접을 치르면서 당시 최종현 회장에게 '동기 중에서 최초로 해외 지사를 가고 최초로 임원이 되고자 하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작년에 제 동기가 네가 말한 것을 다 이루었다라고 하더군요. 이럴 수 있었던 것은 제 나름대로 10년, 20년의 장기적인 미래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양인 여러분, 멀리 내다보고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미래는 여러분들에게 열려있습니다." 김자영 취재팀장 apriljy@ihanyang.ac.kr 사진: 이재룡 사진기자 ikikata@ihanyang.ac.kr 학력 및 경력 윤민승 상무는 1979년 본교 전기공학과에 입학하여 1986년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같은 해 선경 전자 본부에 입사하여 1991년부터 1994년까지 SK의 뉴욕지사에서 전자과장을 역임했다. 1997년 SK-텔레콤의 기획조정실 부장, 1998년 SK-텔레텍 창립과 함께 마케팅 팀장을 거쳐 현재 마케팅 담당 상무로 재직중이다.

2002-10 01

[동문]`한국의 라이자 미넬리`를 거부한다

"세계적인 배우보다는 작품을 즐기는 배우로 남을 터" 지난 10여년 간 30여 중 대형 작품서 열연 뮤지컬 배우 전수경 동문 (연영 89졸) 역사상 가장 큰 입장권 수익을 기록한 공연 작품이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오페라의 유령'은 뮤지컬 매니아가 아닌 일반 문화 대중들도 일생에 꼭 한 번은 보고 싶은 작품으로 꼽을 정도로 폭발적인 호응을 누렸던 작품이기도 하다. 이러한 여파는 국내에도 뮤지컬 붐이 이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화려한 율동과 연기, 그리고 심금을 울리는 노랫가락이 한 몸처럼 절묘하게 어우러진 뮤지컬이 국내에 상륙한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요즘만큼 뮤지컬에 대한 관심이 집중된 적은 없었다. 이는 지난 10여 년 동안 뮤지컬이 급속하게 대중 속으로 스며들면서 쌓여진 탄탄한 기반도 한 몫 단단히 했다는 평가다. 이러한 한국 뮤지컬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배우가 있다면 바로 30여 편의 중·대형 작품에서 주연과 조연을 넘나들며 열연해온 전수경 동문(연영 89졸)이다. 이러한 뮤지컬 스타를 만나러 가는 길은 멀리서만 볼 수 있는 별을 따듯 가슴 설레고 즐거운 기대감으로 시작됐다. 배우에게 육아는 연기의 깊이를 더할 수 있는 기재 "어서오세요!" 벨을 누르자 170센티미터가 훨씬 넘는 훤칠한 키의 '아줌마'가 문을 연다.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 빼어난 노래 솜씨와 넘치는 끼로 수많은 관중의 마음을 빼앗으며 온갖 박수갈채를 한 몸에 받았던 '스타'의 모습은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거실로 안내를 받고 들어가니 몇 일 후면 백일을 맞이하는 쌍둥이 자매 지온이와 시온이의 낯선 방문자를 신기한 듯 바라보는 맑은 눈망울이 눈에 들어왔다. "요즘 뭐하고 지내냐구요? 아기 돌보는 것이 지금으로선 제 인생에 가장 소중한 일이에요. 엄마가 된다는 것은 여성이 인생에서 경험하게 되는 가장 큰 변화이자 공부라고 할 수 있지요. 비록 예전에 비해 행동의 제약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육아를 바탕으로 한 인생공부를 하는 것이 배우로서 깊이를 더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요. 지금 저의 모습이 전혀 부끄럽거나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걸요." 육아를 자기 발전을 위한 하나의 기재라고 딱 잘라서 말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역시 프로는 다르구나'라는 생각에 처음 가졌던 실망감을 지운다. 사실, 전 동문은 뮤지컬 계에서 끊임없이 도전하는 배우로 유명하다. 대학 4학년 때인 88년도 MBC 대학가요제에서 동상을 수상하며 솔로 음반 작업에 들어가기도 했던 그녀는 독특한 음색의 가창력과 승부욕으로 90년 '캣츠' 오디션에 합격해 뮤지컬에 데뷔한다. 뮤지컬 배우에게 요구되는 것은 노래나 연기 뿐 아니라 춤 솜씨도 필수다. 전 동문은 춤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상태에서 순수한 열정 하나로 뮤지컬의 세계로 뛰어든 것이다. 이런 그이기에 올해 초 '틱,틱...붐!'을 마지막으로 쉴새없이 달려왔던 배우로서 현재의 공백은 휴지가 아니라 다음 작품을 준비하기 위한 끊임없는 연습과 공부의 시간이다. 뮤지컬 대중화와 함께 한 12년 배우 인생 전 동문이 처음 데뷔할 때만해도 우리나라 뮤지컬 수준은 걸음마 단계에 불과했다. 배우가 공연을 하고서도 출연료를 못 받는 경우도 허다했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1980년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이후 90년대 초까지 '캣츠', '코러스라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레 미제라블' 등 해외에서의 유명세가 국내까지 이어진 작품들이 공연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작품의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무대 연출이나 미술, 의상까지 그대로 모방한 표절작품이 풍미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창작극에 대한 요구가 공연제작자나 관객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분위기다. 그러나 창작극에 대한 전 동문에 대한 생각은 우리의 뮤지컬이 아직은 더 많이 배워야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창작을 너무 앞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창작이 필요하긴 합니다. 그러나 '뮤지컬'이라는 말 자체가 벌써 외국말입니다. 남의 나라 것을 하고 있으니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기까지는 모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봅니다. 기술이 쌓이면 그 다음에 우리의 혼도 들어가고 정서에 맞는 새로운 작품이 등장할 것입니다. 창작을 하면서 실패도 하고 여러 가지 시도도 하면서 많이 깨져야합니다. 그러는 중에 '난타' 같은 성공작이 나올 수 있는 거죠. 관객 수준도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좋은 스텝만 보강되면 훌륭한 작품이 나올 거라고 믿습니다." 전 동문이 지적한 작품이나 무대가 열악한 국내 사정에 비해 배우들의 역량은 놀랄 만큼 향상된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오페라의 유령'이 시쳇말로 '대박'을 터뜨리면서 남경주, 조승우씨 같은 베테랑 배우도 오디션에 떨어지고 신예 배우들이 대거 발탁되는 파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정말 긴장될 때가 많다"라고 속마음을 내비치는 전 동문에게 신예들의 도전은 늘 자기 발전의 즐거운 계기를 마련해 준다. 연륜이 쌓일수록 신인들이 도달할 수 없는 연기의 깊이를 더해가면서 늘 새로운 변신을 하게된다는 것이다. 전 동문은 긴 공백기를 거쳐 내년에 서게 될 무대에서는 지금과는 또 다른 모습을 선보일 것이라며 자신 있는 모습니다. 세계적인 배우보다 매 작품을 즐기는 배우로 남을 것 흔히 전 동문을 수식할 때 '한국의 라이자 미넬리'라는 꼬리표를 단다. 흑백영화 시대를 풍미했던 그녀의 어머니 주디 그란드 조차 시샘할 정도로 빼어난 역량을 자랑했던 세계적인 배우로 비유되는 것이다. 그러나 전 동문이 바라는 것은 제 2의 누군가가 아니라, 후배들이 '제 2의 전수경'으로 비유될 만큼 색깔 있는 배우가 되는 것이다. "추한 것조차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는 나이까지 끝까지 무대를 지키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세계적인 배우가 되면 좋겠지만 그것보다는 매 작품을 할 때마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누구와 비교하기보다는 작품을 즐기고 사랑하면서 연기하는 것이 가장 보람된 일이겠지요. 뮤지컬의 역사와 같이 나이를 먹어가며 끊임없이 변신한다는 생각으로 깊이 있는 연기를 키워나갈 것입니다." 전 동문이 설계하고 있는 내년은 비단 어머니가 된 후 배우로서 또 다른 변신을 시도하는 것뿐 아니라 대학원에 진학해 후배들을 양성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가는 해이기도 하다. 끊임없는 변신을 거듭하면서도 배우로서 자신의 위치를 한시도 잊지 않는 전 동문에게서 프로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서용석 학생기자 antacamp@ihanyang.ac.kr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전수경 동문은 누구? 전수경 동문은 1967년 생으로 1985년 본교 연영과에 입학했다. 전 동문은 90년 '캣츠'로 뮤지컬에 데뷔한 이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코러스 라인', '넌센스', '브로드웨이 42번가', '아가씨와 건달들', '갬블러' 등 30여 편에 달하는 작품에 주·조연급으로 연기했다. 그밖에 정극 '사천의 착한 여자', '러브레터' 등에서 열연했고 '돈을 갖고 튀어라', '고스트 맘마', '주노명 베이커리', '공공의 적' 등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수상경력으로는 88년 MBC대학가요제 동상 수상, 97년 제 3회 한국 뮤지컬 대상 여우조연상, 99년과 2002년 동 행사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현재 뮤지컬 배우 주원성 씨와 쌍둥이 자매 '시온', '주온'과 함께 성수동에서 살고 있다.

2002-09 15

[동문]`21세기 한국 해양정책의 집행관`

"해양정책은 '개발'과 '보존' 동시에 잡아야" 최초 중국 항로 개설에서 미래 해양정책까지 해양수산부 해양정책국장 서정호 동문 (법학 73) "해양수산부는 풍요로운 바다를 국민과 함께 만들어 가겠습니다." 해양수산부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모토다. 굳이 이러한 구호가 아니더라도 바다가 풍부한 '자원의 보고'임을 재삼 강조하는 것은 이제 상투적인 느낌마저 든다. 식량자원에서부터 광물자원 그리고 생명산업에서부터 관광산업에 이르기까지 바다가 지닌 가능성은 무한하다. 그런 측면에서, 바다로 먼저 진출한 국가들이 전성기를 누린 19세기처럼, 21세기는 바다의 자원을 먼저 개척하는 나라들이 번성할 것이란 예측을 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개발'과 '보존', 두 마리 토끼 잡는다 해양수산부 해양정책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서정호(법학 73) 동문. 그는 현재 해양수산부 내에서도 각종 해양정책과 관련된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핵심 관료다. 구체적으로는, 해양 환경 보전 그리고 해양 자원 개발과 관련된 정책의 수립 및 집행이 서 국장의 중심 업무이다. '개발'과 '보전'이란 다소 상충된 영역을 동시에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그냥 보면 대립적인 부분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 추진되고 있는 이른바 차세대 해양정책들은 바다를 최대한 보호하면서 동시에 최대한 개발하자는 것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양식기술 같은 것을 개발하면서도 양식장의 인근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관리도 철저히 하는 것이죠. 해양 환경의 보존을 통해 보다 다양하고 많은 양의 자원을 지속적으로 확보하자는 것이 해양수산부의 방침입니다." 서 국장은 이제 단순히 바다를 어업의 현장으로서만 인식해서는 아무런 발전이 없을 것이라 지적한다. 첨단 과학기술과 장기적인 안목을 이제 해양 정책에도 적용시켜야만 한다는 것이 서 국장의 지론이다. 가령 어업의 경우만 하더라도 과거와 달리 단순히 물고기를 잡는 기술 개발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설정하고 있으며, 어류 자원의 고갈 현상이 심각하게 제기되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현재의 WTO 체제에서는 외국산 수산물이 싼값에 국내 시장에 들어오는 것을 막을 길도 사실상 전무한 형편이다. 따라서 지금 당장은 힘들더라도 바이오 기술의 개발을 바탕으로 한 양식산업, 어촌과 갯벌을 활용한 관광산업, 그리고 해저 지하자원을 발굴하는 광물산업 등을 중심으로 해양산업의 전반적인 틀이 옮겨가는 게 바람직하다고 서 국장은 강조한다. 실제로 이러한 변화의 움직임은 이미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서 국장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도 태평양에서 구리, 망간, 니켈, 크롬 등과 같은 심해 광물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또한 수심 200미터에서 흐르는 심층수 개발과 해양 바이오 산업 육성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해양 전문통 해양정책과 관련된 서 국장의 거시적인 시각은 해양수산부 관료로서의 전문성을 잘 증명해 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러한 서 국장의 전문성은 지금까지 그가 걸어온 해양 행정관료로서의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에 배경을 두고 있기도 하다. 대학 3학년 때인, 지난 1975년 행정고시 17회로 관계에 입문한 서 국장은 해운항만청(舊 해양수산부) 진흥과장, 주중 대사관 초대 해양수산관, 기획예산담당관, 공보관, 안전관리관 등과 같은 부처 내 핵심 보직들을 두루 거쳤다. 그리고 지난 2000년부터 2002년까지 현정부 내 100대 요직(월간조선 2001년 2월자 참고) 중 하나로 꼽히는 해운물류국장으로 근무했다. 다양한 보직을 거친 만큼, 서 국장이 이룩한 성과들도 다양하다. 해운항만청 진흥과장으로 근무하던 지난 1990년, 서 국장은 당시 미수교 국가이던 중국과의 과감한 협상을 통해 카페리 항로를 최초로 개설했다. 또한 주중 대사관 해양수산관으로 재임 중이던 1993년에는 '한중 해운협의회'를 정례화 시키기도 했다. 서 국장이 해양수산부 내 '중국통'으로서 인정받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또한 해운물류국장으로 근무하던 시절에는 항만 운영과 관련된 업무의 일부를 민간 부문에 위탁토록 하는 작업인 '항만공사' 설립과 선박회사들의 선박활동을 쉽게 하는 '선박투자회사법'과 같은 큼직큼직한 사안들을 기획하기도 했다.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부처 배치를 받을 때 해운항만청이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처음 만들어진 부처라서 저희 기수에서 20여명이 해운항만청으로 발령을 받았죠. 당시만 해도 아무런 관련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걱정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쪽 분야의 일이 규모가 크고, 변화가 많은 특징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됐습니다. 업무가 제 적성에도 맡는 것 같아 재미도 있고, 보람도 많이 느낍니다(웃음). 어촌 출신은 아니지만 바다에 갈 때마다 아주 기분이 좋고, 친근함을 느낄 정도죠. 배 타는 것에도 비교적 적응을 잘하는 편이고요." 많은 후배들이 공직자의 길 걸었으면 대학 생활 중 기억에 남는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서 국장은 자신의 대학 생활이 너무 '드라이'했던 것 같다며 웃는다. 당시는 사회적으로도 어두웠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캠퍼스의 분위기도 무거울 수밖에 없었노라고 회고한다. 그러나 행정고시반에서 함께 공부했던 동기, 선·후배들과의 추억을 꺼내놓으며 환한 표정이다. "행정고시반에서 같이 공부를 했던 동기, 선·후배들과는 지금도 자주 만납니다. 박혁진(경제 73) 서울지방조달청장, 이종정(경제 73) 국가보훈처 기획관리관, 신현욱(법학 73) 정보통신부 정보통신연구진흥원 수석 전문위원 등과 같은 행정고시반 73학번들과는 지금도 매달 한 번씩 등산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학교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며 서 국장은 좀더 많은 후배들이 공직자의 길을 걸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특히 그는 해양수산부의 경우 업무의 성격이나 규모가 워낙 방대하고, 특수하기 때문에 아직 개척의 여지도 많다며, 공직에 관심 있는 후배들이 해양수산부에도 많이 진출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제가 공직에 있어서이겠지만, 더욱 많은 후배들이 행정고시를 통해 공직에 진출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우리 학교 출신의 행정고시 합격자들은 양적으로도 많고, 전 부처에 걸쳐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특히 초기 합격자들이 소속 부서의 중심적인 국장급으로 활발히 진출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행정계에 들어올 후배들은 선배들의 도움도 많이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웃음). 그런데 갈수록 행정고시보다는 사법고시를 훨씬 더 많이 준비하는 것 같아 조금 아쉽군요." 그는 이번 여름 한바탕 '전쟁'을 치루었다고 했다. 태풍으로 인해 우리나라 인근 연안에 엄청난 양의 쓰레기들이 떠내려왔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규모 적조 현상까지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국무총리 서리 인사가 있었고, 국정감사를 준비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그래서 서 국장은 이번 가을에도 또 한 번의 '큰 전쟁'을 치뤄야 할 것 같다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그의 웃음 속에서 아주 맑은 한국 해양의 기상도를 발견한다. 이세형 학생기자 sehyung@ihanyang.ac.kr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학력 및 약력 서정호 해양수산부 해양정책 국장은 1973년 본교 법학과에 입학해, 3학년이던 1975년, 행정고시 17회로 관계에 입문했다. 해운항만청(舊 해양수산부)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한 후, 지난 1986년 미국 워싱턴대에서 해사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부산지방해운항만청 항무과장, 해운항만청 진흥과장, 행정관리담당관, 주중 대사관 해양수산관 등으로 근무했다. 해양수산부 발족 후에는 기획예산담당관, 공보관, 안전관리관, 해운물류국장 등을 역임했으며, 2002년 현재, 해양정책국장으로 근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