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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8 22

[동문]펀드 매니저, 그 화려한 삶의 음영

'부를 위해 이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진정 꿈꾸는 것은 참된 '라이프 매니저' 현대투신 부본부장 백승삼 동문(경제 79) "자본주의의 꽃, 억대 연봉을 받는 금융 전문가." 펀드매니저를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각이다. 외환위기 이후 국내 금융시장이 급격히 재편되면서 펀드매니저는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최고의 직업 중 하나가 됐다. 막대한 자본의 행방을 결정하는 사람으로서 명실공히 현대 금융시장의 '조타수'를 자임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양지의 찬란함 뒤엔 늘 가려진 그늘이 있는 법. 누구도 알 수 없는 미래를 내다보며 피를 말리는 결단을 내려야 하는 펀드매니저들의 하루하루는 흡사 치열한 전장(戰場)을 누비는 것에 비유되기도 한다. 불혹의 나이를 지나면 벌써 '늙다리' 취급을 받는 것이 또한 펀드매니저의 세계다. 지난 8월 19일 발표된 금융감독원의 보고는 국내 펀드매니저의 89%가 40세 이하임에 주목하며 이른바 '화려한 시절'의 씁쓸한 음영을 잘 말해주고 있다. 현대 금융시장의 '조타수'를 자임한다 그 치열한 싸움터에서 늘 승리를 놓치지 않는 백전노장이 있다. 올해로 펀드 운영경력 17년째를 맞은 마흔 두 살의 백승삼(경제 79) 동문이 바로 그 주인공. 현재 현대투자신탁운용 부본부장을 맡고 있는 백 동문의 화려한 '승률'은 동업종의 펀드매니저들에게조차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지난 94과 95년, 연속 3투신사 최우수 펀드매니저상을 수상했으며, 지난해에는 그가 근무하는 현대투신이 주식혼합형 최우수 운용사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또한 지난 6월, 국내 펀드평가사인 '한국 펀드평가'가 선정한 수익률 상위 10위에 포함되면서 '검증된' 펀드매니저로서 그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다. "주식투자라 하면 운이 70퍼센트를 좌우하고, 개인의 노력이나 능력이 30퍼센트를 좌우한다고 합니다. 그 사람의 이성이나 능력범위를 벗어나는 총체적인 요인들에 의해 시장이 움직이기 때문에, 내가 수익을 얻겠다고 하여 수익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여기서 운이라 하는 것은 장기적 안목에서 누구에게나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30%의 노력이 전부라고 할 수 있지요" 백 동문의 화려한 경력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말하는 70퍼센트의 운이 그에게는 700퍼센트쯤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아니라면, 결과를 30퍼센트만큼만 좌우한다는 노력이 그에게는 300퍼센트로 발휘되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를 "플레잉 코치"라고 하는 백 동문의 말은 그가 타고난 노력가임을 짐작하게 한다. 펀드매니저는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면 일반관리직으로 업무를 전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백 동문은 부본부장으로서 4개 팀의 펀드매니저들을 관리하는 동시에 지금도 직접 펀드를 운용하고 있다. 본인이 스스로 원하는 일이고, 앞으로도 펀드매니저라는 업무를 길게 가져가겠다는 그의 포부에는 금융시장의 '조타수'를 자임하는 노장의 자신감이 배어 나온다. 화려한 포장 뒤, 치열한 생존게임 펀드매니저의 하루는 스트레스의 연속이다. 그는 "글로벌 시대에는 정보의 활용이 곧바로 생존 능력과 직결된다"고 말한다. 이른 새벽이면 전날의 미국 주식시장을 체크하고, 장중이나 그 후에도 계속 국내외의 모든 정보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온통 긴장으로 점철된 업무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 않느냐는 질문에 백 동문은 단호하게 "견뎌내는 것도 능력"이라 일축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능력에 대한 보상은 얼마나 될까? "선정적인 가십을 좋아하는 언론의 보도와는 많이 다릅니다. 물론 일반 평범한 회사원들보다는 약 2,30퍼센트 정도는 많다고 할 수 있죠. 작은 증권 부티크 같은 곳에서 일하는 프리랜서 펀드매니저들은 수 억대의 연봉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돈만큼이나 권위와 명예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국내 시장을 주도하는 회사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비록 프리랜서들보다는 작은 연봉을 받더라도 제가 얻을 수 있는 명예의 교환가치는 별개의 것입니다. 몇 억을 운용하는 그들이 누리는 성취감 보다 수 조를 운용하는 저의 성취감은 비교할 수 없죠." 백 동문은 단순히 돈을 위해 펀드매니저가 되겠다는 욕망은 반드시 지양해야 한다고 엄중히 경고한다. 금융계의 대표적 직무군인 브로커와 애널리스트 그리고 펀드매니저 중에서 가장 작은 연봉을 받는 것이 펀드매니저라는 그의 설명이다. 그러나 가장 큰 명예와 성취감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역시 펀드매니저라고 덧붙인다. 문제는 펀드매니저로서 성취된 명예와 만족감도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효율성이 중시되는 금융시장에서 성과가 없이 무한한 생존을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언제든지 과거의 경력이나 업적이 한 순간에 사라질 수 있으며, 따라서 다른 직업과 달리 펀드매니저는 신규 편입자와 십 년, 혹은 이 십 년의 경력자가 모두 동일한 경쟁선상에서 출발하는 '써든데스(sudden death)'의 게임이라고. "우리는 항상 전쟁터에 서 있다. 장수가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상사(兵家常事)다. 다만 이기는 확률을 조금 높이기 위해서 노력하자. 다만 한 번이라도 긴 관점으로 봤을 때, 승리의 확률을 높이는 작업을 하자." 팀원들을 독려하기 위해 그가 자주 하는 말이다. 지난 월드컵 때, 승리를 거듭하면서도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말했던 거스 히딩크의 모습을 그에게서도 발견한다. 어쩌면 성취감을 향한 백 동문의 '허기'는 히딩크 감독의 그것을 능가할지도 모른다. 꿈★은 이루어진다, 참된 '라이프 매니저'를 향하여 5·17과 12·12 등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 그 복판에서 대학 생활을 경험한 그에게 학창시절을 물었다. 백 동문은 연일 계속되는 휴교와 사회적 혼란 속에 일반적인 수업 자체가 어려웠다는 회고로 기억을 더듬기 시작한다. 솔직히 모범생은 아니었다고 고백하는 백 동문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번진다. '학점매니저'로서 그의 성취감은 어떤 것일까? "인생을 충실히 살았다는 것이 학창 시절의 결과물인 학점으로 평가될 수 있기에 학업이 중요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공부를 잘한다고 인생을 반드시 충실히 사는 것은 아닙니다. 공교롭게도 펀드매니저는 단순한 학점과는 큰 상관이 없습니다. 펀드매니저의 경우, 경제 분야의 협소한 지식보다는 종합적인 사고력을 가지고 전체를 보는 안목이 중요합니다. 편협한 사고를 지양하고 종합적으로 변화의 흐름을 읽어내는 사고력은 인생사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소양입니다" 그는 펀드매니저가 되기를 희망하는 한양인들에게도 종합적인 사고력과 안목을 갖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강조한다. 그 이후에 FM검증 시험을 통해 공인된 자격을 갖추기를 권고했다. 시시각각 급변하는 세계 경제의 흐름을 보다 빨리 이해하고, 해외 투자자들의 동향과 생각을 예측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이 불편하지 않도록 어학 공부에도 성실히 매진할 것을 덧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꿈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그는 거듭 강조한다. "저는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도, 대단한 학력의 소유자도 아니었습니다. 학연, 지연에서도 내세울 게 없었죠. 게다가 아버님도 안 계셨고, 가정이 넉넉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단 한번도 미래를 향한 꿈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단 한번도, 다소 허황해 보일지라도, 항상 꿈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단 꿈을 가지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것을 위해 노력하게 되니까요. 우리 젊은이들이 그것을 결코 잃어버리면 말았으면 합니다." 후학들에 대한 조바심이 어린 자녀들에 대한 생각으로 미친 것일까. 일곱 살과 다섯 살 박이 두 자녀를 두고서도 그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나누지 못함을 아쉬워하는 백 동문은 냉철한 펀드매니저에서 어느새 가슴이 따뜻한 아버지로 돌아와 있었다. 인터뷰의 시작하면서부터 묻고 싶었던, 국내 최고의 '펀드매니저'가 추천하는 투자 1순위의 종목이 다름 아닌 '가족'임을 알기까지 꼬박 1시간이 걸렸다. 그의 건승을 기원한다. 김자영 취재팀장 apriljy@ihanyang.ac.kr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학력 및 약력 1979 한양대학교 경제학과 입학 1986 국민투자신탁 입사 1987 운용부 주식운용과 발령 1994·1995 3투신 최우수 펀드매니저상 수상 2001 주식혼합형 최우수운용사 선정 2002 '한국펀드평가' 선정 수익률 상위 10위 내 펀드매니저

2002-07 29

[동문]<`한양동문이 뛴다` 특집 3> 언론분야

일간지 편집국장ㆍ공중파 메인뉴스 앵커로 활약 중 언론준비반 지원 확대 통해 우수 언론인 양성 기대 기자와 프로듀서(PD) 등 언론인은 법조인들과 행정관료 등과 더불어 우리 사회 최고의 엘리트 집단 중 하나로 꼽힌다. 사회의 중심 의제를 설정하고, 이를 통해 여론을 선도할 수 있는 막강한 영향력이 있는 언론계는 예전부터 사회 현상과 사회적 영향력에 관심이 있는 대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분야 중 하나이다. 이러한 언론계에서 본교 동문들이 최근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어 큰 주목을 받고 있다. 경제계, 법조계, 행정계 등과 같이 전통적으로 본교가 강세를 보여온 분야에 비해 진출 역사가 다소 짧은 감이 없지 않지만 언론계 동문들은 신문기자의 '꿈'이라는 중앙지 편집국장으로 3명, 방송기자의 '꽃'이라는 3대 공중파 메인 뉴스의 앵커로 2명이 활동하고 있어 본교의 위상을 더욱 높이고 있다. 종합 일간지·경제지 편집국장으로 3명 활동 현재 10개의 중앙 일간지와 4개의 중앙 경제지에서 편집국장으로 활동중인 동문으로는 최홍운(신방 70학번) 〈대한매일〉편집국장과 김기웅(신방 71학번) 〈한국경제신문〉편집국장, 이용규 (신방 73학번) 〈내외경제신문〉편집국장이 있다. 본교는 중앙 일간지와 경제지 편집국장 배출 수에서 서울대 (4명)에 이어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단일 학과 기준으로는 1위이다. 동문 언론인들이 언론계의 핵심에서 눈에 띄는 활동을 보이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최홍운 〈대한매일〉편집국장은 지난 2000년 10월 우리나라 신문사 사상 최초로 편집국 직선투표를 거쳐 편집국장에 선출됐다. 최 동문이 편집국장으로 선출된 후 〈대한매일〉은 중앙 일간지로는 유일하게 국세청의 언론사 세무조사의 징수 내역과 관련된 내용을 상세히 밝히고, 이에 대한 사과문을 신문지상에 올려 주목을 받기도 했다. 올해 4월 〈한국경제신문〉편집국장에 취임한 김기웅 동문은 정치부 차장과 산업부장, 편집국 부국장 그리고 광고국장 등과 같은 요직을 두루 거쳤다. 김 국장은 편집국장에 취임한 후 최근 언론계에서 큰 주목을 받은 〈한국경제신문〉의 특종행진을 주도했다. 또한 올해 1월 편집국장에 취임한 이용규 동문은 〈내외경제신문〉 공채 1기 출신으로 출발해 편집국장까지 오른 '내외맨'이다. 이 동문은 증권부장, 정경부장, 논설위원 등과 같은 요직을 거쳤으며 편집국장이 된 후에는 과감한 데스크급 인사를 단행해 〈내외경제신문〉의 재도약을 이끌고 있다. 이들 외에도 많은 수의 동문 언론인들이 신문사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신문사의 중견간부급 중 대표적인 동문으로는 최철주(화공 60학번) 〈중앙일보〉 논설위원 실장, 임경록(신방 77학번) 연합뉴스 출판국장, 이상우(신방 65학번) 〈문화일보〉 논설위원, 이영일(신방 72) 〈한겨레〉편집국 부국장 등이 있다. 특히 최철주 동문은 동문 최초의 종합 일간지 편집국장 출신으로 한양언론인동문회의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특정 분야의 전문기자나 데스크급 그리고 특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동문들도 많다. 대표적인 동문들로는 유영구(정외 78학번) 〈중앙일보〉북한문제 전문위원, 한상춘(경제 84학번) 〈한국경제〉국제금융 담당 전문위원, 손현덕(경제 79학번) 〈매일경제〉워싱턴특파원, 김용수(신방 78학번) 연합뉴스 동경지사장, 이해영(신방 72학번) 연합뉴스 국제뉴스국 기획의원, 조순래(정외 72학번) 연합뉴스 북한부장, 송재조(신방 78학번) 〈한국경제〉증권부장, 김낙훈(경영 77학번) 〈한국경제〉벤처중소기업팀장, 이성춘(신방 80학번) 〈스포츠서울〉야구팀장 등이 있다. 공중파 뉴스 앵커 등 방송서도 두각 방송사에도 신문사 못지 않게 많은 본교 출신들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국내 공중파 방송의 메인뉴스 앵커 3명 중 2명이 본교 동문이다. 홍기섭(경제 80학번) KBS 9시뉴스 앵커와 이영춘 (경제 79학번) SBS 8시뉴스 앵커 외에도 MBC '4시뉴스'의 앵커인 김상호 (독문 88학번) 아나운서와 YTN '뉴스출발'의 김명우(철학 92학번) 앵커가 활동 중이다. 또한 KBS '연예가중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재홍(관광 91학번) 아나운서도 본교 출신이다. 홍기섭 앵커는 사회부, 경제부, 정치부 등에서 취재기자로 활동하다 지난 99년 KBS '뉴스광장'에서 앵커로 데뷔했으며 같은 해에 KBS 앵커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올해 3월 5일부터 KBS '9시뉴스'의 앵커로 활동 중이다. 지난 96년 10월 강릉 무장공비 수색작전 당시 특종 보도로 잘 알려진 이영춘 앵커는 2000년 8월부터 현재까지 SBS 8시뉴스의 메인앵커로 활약 중이다. 그는 보기 드물게 30대에 메인뉴스를 맡아 앵커가 직접 취재를 담당하는 '앵커 리포트제'를 도입하기도 했다. 또한 방송사의 중견간부급으로 활동하고 있는 동문으로는 김선옥(신방 68학번) KBS 라디오센터장, 한안성(경영 67학번) KBS 경영본부장, 김민기(영문 68학번) KBS 라디오3국장, 김성묵(사학 69학번) KBS 제주방송총국장, 이승원(사학 75학번) KBS 강릉방송국장, 신견옥(영문 73학번) MBC 경영관리국장, 홍은주(식영 77학번) MBC 해설위원, 박동주(신방 68학번) SBS 라디오본부 편성사업팀장 등이 있다. 이와 더불어 제작 현장에서 책임 프로듀서급으로도 많은 동문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성완(신방 67학번) KBS 보도제작국 선거방송기획 주간, 최영근(경제 76학번) MBC 예능국 2CP, 이종현(영문 78학번) MBC 시사제작국 4CP, 백종문(신방 78학번) MBC 시사제작국 6CP, 홍동식(신방 77학번) MBC 라디오 1CP, 김상일(신방 75학번) SBS 라디오 2CP 등이 있다. 이 외에도 각 방송사의 유명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는 동문 프로듀서들로는 KBS 'TV동화 행복한 세상'의 박인식(신방 87학번) PD, MBC '음악캠프'의 고재형(신방 81학번) PD, 인기를 끌었던 MBC 드라마 '아줌마'의 이태곤(신방 86학번) PD, 역시 인기리에 방영됐던 MBC 시트콤 '뉴논스톱'의 김민식(자원 87학번) PD 등을 꼽을 수 있다. 최근 들어 언론사 입사를 준비하는 학생들의 수가 과거에 비해 늘어나고 있어 언론계에 진출하고 있는 본교 출신들의 수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이에 따라 학교 측에서도 언론사 입사를 희망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언론고시반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그러나 사법고시반이나 행정고시반 등에 비해 지원이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편이다. 따라서 언론준비반을 중심으로 보다 적극적인 학교 측의 지원과 관심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치열한 기자정신과 창의성을 지닌 동문 언론인들의 활약과 더불어 소명의식과 윤리성을 갖춘 새로운 언론인들이 배출되어 한양의 위상제고는 물론 사회 발전의 밑거름이 되길 기대해본다. 이세형 학생기자 sehyung@ihanyang.ac.kr

2002-07 08

[동문]월드컵 4강 신화 일군 `특급 참모`

오랜 코치생활 통해 실력 쌓은 '준비된 감독' 히딩크 감독 이어 대표팀 감독 물망에 올라 우리나라 대표팀의 월드컵 경기를 지켜본 사람 중 가장 가슴을 졸였던 사람은 누구일까. 아마도 한국팀 벤치, 구체적으로는 코칭스태프였을 것이다. 경기 중 항상 서서 작전을 지시하던 히딩크 감독 옆에는 보좌관이 한 명 있었다. 그는 그렇게 자세히 알려진 사람이 아니었지만 작전지시를 한다거나 선수를 교체할 때 항상 히딩크 감독과 함께 움직였을 정도로 히딩크 감독과 가까운 사람이었다. 또한 경기 중에는 항상 상기된 표정으로 히딩크 감독 혹은 다른 코치들과 대화를 나눴다. 한국팀이 득점하면 히딩크 감독과 함께 가장 먼저 환호성을 지르며 뛰어오는 선수들 쪽으로 다가가고 반대로 한국팀이 실점을 하거나 위기에 몰리면 가장 먼저 안타까운 표정을 짓던 사람, 경기가 끝났을 때 히딩크 감독과 가장 먼저 뜨거운 포옹을 하는 사람, 그 사람은 바로 대표팀 코치 박항서 동문(체육과 81년졸)이었다. 화려한 코치 경력 쌓아 박항서 동문은 자타가 공인하는 히딩크 감독의 '특별 보좌관'이었다. 물론 히딩크 감독에게는 핌 베어백 코치라는 외국인 수석코치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인 수석 코치로서 선수들의 경기나 훈련은 물론이고 여러 가지 경기 외적 요소들까지도 일일이 신경을 써야했던 박 동문은 대표팀이 유럽과 미주 국가가 아닌 나라로는 처음으로 4강에 오르는 업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 자타가 모두 공인하는 1등 공신 중의 1등 공신으로 꼽힌다. "너무 대단한 칭찬을 받는다는 생각뿐입니다. 제가 해야했던 일들 그리고 저에게 주어졌던 일들을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또한 이번 월드컵에서의 성과는 모든 코칭스태프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각각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마치 처음으로 대단한 일을 한 사람처럼 이렇게 겸손하게 말하지만 사실 박 동문의 코치 경력은 매우 화려하다. 히딩크 사단은 물론이고 그는 94년 미국 월드컵에서도 공격수 전문코치, 즉 대표팀 감독의 보좌관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활동했다. 물론 프로축구 팀의 코치 경력도 화려하다. 1989년부터는 럭키금성(현재의 안양LG) 트레이너와 코치로 활동했으며 1997년부터 1999년까지는 수원삼성의 코치를 맡았었다. 그런만큼 그는 감독을 수행하며 팀을 운영하는 데 있어 노하우가 완전히 축적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히딩크 감독과의 인간적인 만남 어쩌면 이런 능력과 경험을 갖추고 있는 박 동문이었기 때문에 언어적, 문화적으로 큰 차이가 있는 히딩크 감독을 아무런 문제없이 수행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훈련과 경기를 같이 했고 작전구상이라던지 선수선발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있는 기회가 많았기에 박 동문과 히딩크 감독의 친분은 남달랐다. 한 스포츠 일간지의 보도처럼 박 동문과 히딩크 감독은 히딩크 감독이 네덜란드로 출국하던 날 기내에까지 따라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작별의 아쉬움을 나눌 정도였다고 한다. "히딩크 감독님과 친하냐고요? 물론 친하죠. 또 앞으로도 연락을 계속할 생각이냐고요? 당연하죠. 같이 대표팀을 이끌었던 인연인데요. 인간적인 정도 많이 쌓였습니다." 하지만 박 동문은 대표팀을 운영하면서 히딩크 감독과 의견차이가 있었던 적도 많았다고 말했다. 박 동문은 감독과 코치가 항상 의견이 같을 수는 없으며 그러한 의견의 차이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서로 상대방의 의견을 중시했고 서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다. "코치인 저 같은 경우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히딩크 감독님에게 전달하고 건의하는 것이지 히딩크 감독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건 아니거든요. 마찬가지로 히딩크 감독님도 어떤 일을 할 때 자신의 혼자만의 생각으로 해서는 코칭스태프의 의견을 참고해야죠. 이런 면에서 저와 히딩크 감독님 모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지금 생각해보면 별 것 아닌 것일 수도 있겠지만 박 동문의 대표팀 생활이 항상 편했던 것은 아니다. 박 동문은 가장 어려웠던 때가 언제냐는 말에 '5:0 사건'이라고 대답했다. 지난해에 있었던 컨페드레이션스컵 대회에서 프랑스에게 5:0으로 패하고, 이후 체코와의 평가전에서도 역시 5:0으로 패해 여론의 비판이 빗발쳤을 때 박 동문은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포기한다거나 가능성이 없다는 생각을 가진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고 덧붙였다. 대표팀 감독 물망에 올라 현재 일부에서는 박 동문이 히딩크 감독의 뒤를 이어 대표팀을 이끌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대표팀의 수석코치였던 만큼 히딩크 감독의 선진적인 대표팀 운영방식을 가장 확실히 인식한 사람이 박 동문이라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이른바 '박항서 승계론'이다. 이에 대해 박 동문은 정색을 하며 너무 와전된 소문들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현재 계획은 조금 과장해서 '없다'고 밝혔다. "제가 대표팀 감독을 맡을 것이란 얘기가 어떻게 나오는 건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저는 당황스럽고, 부담스럽기만 합니다. 대표팀 감독 문제는 그것을 담당하시는 분들이 알아서 하실 부분입니다. 현재 저는 쉬고 싶고,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을 뿐입니다. 누군가가 돈을 많이 준다면 오랫동안 여행을 가고 싶습니다.(웃음)" 그러면서 그는 어떤 훌륭한 지도자가 차기 대표팀을 맡아도 무척 힘들 것이라고 걱정스럽게 예상했다. 월드컵 4강이라는 어마어마한 성과와 전국민적 관심의 틀에서 조금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라도 국민들의 대표팀에 대한 꾸준한 사랑과 전폭적인 지원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같은 축구사랑만큼이나 박 동문은 본교에 대한 사랑도 남달랐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의 학교 사랑은 쉽게 느껴질 수 있었다. 본교 총동문회의 '월드컵을 빛낸 동문 축하연'에 참석하기 위해 학교를 찾은 박 동문은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체육부실을 찾아 축구부 관계자들과 시간을 보냈다. "한양인들과 모교가 항상 저에 대해 생각해 주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깊이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겠다."는 인사말도 잊지 않았다. 이세형 학생기자 sehyung@ihanyang.ac.kr 박항서 동문 프로필 박항서 동문은 경남 산청 생초초등학교, 생초중학교, 서울 경신고, 한양대를 나와 1981년 제일은행 축구팀에 입단했다. 1984년 한국 프로축구 리그가 생기면서 럭키금성팀의 창단 멤버로 활약했고 1989년부터 럭키금성의 트레이너와 코치로 활동했다. 1997년부터 1999년까지 수원 삼성의 코치를 지냈으며 1994년 미국 월드컵과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수석 코치, 공격수 전문 코치를 맡았다.

2002-07 01

[동문]월드컵 4강의 주역 `김남일 동문`

빼어난 실력ㆍ준수한 외모ㆍ솔직한 성격에 10대 열광 가난과 시련 극복한 남다른 인생역정도 큰 감동 줘 한달 간의 '축구전쟁'이 끝이 났다. 숱한 이변 속에 전세계 축구팬들을 울리고 감동시켰던 2002 한·일 월드컵의 우승컵은 '삼바군단' 브라질의 품에 안겼지만 진정한 승자는 바로 '대한민국'이었다. 강인한 체력을 바탕으로 한 탄탄한 조직력, 끈질긴 승부근성으로 대표되는 한국 축구는 동아시아 변방에서 일약 세계 축구 주류 무대로 진출했으며 무명에 가까운 대표팀 선수들이 보여준 열정적인 플레이는 상업성에 물든 스타 선수들에 익숙해져 있던 전세계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실력·외모·성격에 10대 팬들 열광 유럽 강호들과의 대결에서 불굴의 투지를 불태운 태극전사들은 전 국민의 영웅이 되었음은 물론 유럽 유명 팀에서 손짓하는 세계적인 스타로 성장했다. 그 선두에 세계적 명성의 상대 공격수들을 꼼짝 못하게 막아내며 강인한 인상을 남긴 수비형 미드필더 김남일 동문(체육 00년 졸)이 있다. 폴란드 전에서 중원을 완벽하게 장악하며 월드컵 첫 승의 숨은 공신이었던 김 동문은 미국, 포르투갈, 이탈리아 전에서 상대팀 플레이메이커를 꽁꽁 묶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외모와 어려운 가정환경을 딛고 일어선 남다른 인생역정 등이 알려지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국내 최대 인터넷 커뮤니티인 '다음'에서 김 동문과 관련된 카페가 6백 개가 넘으며 이는 가수 서태지의 212개 보다 세배나 많은 숫자다. 또한 월드컵 이전에 2천여 명에 불과하던 한 팬클럽의 회원수가 현재 20만 명을 넘어서는 등 현재 전체 팬클럽 회원수가 6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쯤 되면 가히 신드롬 수준이다. 김 동문은 특히 최대의 대중문화 소비계층인 10대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10대들은 김 동문의 귀여우면서도 터프한 이미지와 솔직담백한 성격에 열광하고 있다. 180cm, 75kg의 다부진 몸매에 상대 공격수들에게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강한 눈빛과 인상 그리고 세계적인 선수들과의 일대일 대결에서도 조금도 밀리지 않는 그의 당당한 플레이는 이제 대표팀의 트레이드마크 중 하나가 됐다. 상대팀 공격수를 모두 쓸어버리는 뜻으로 히딩크 감독이 붙여줬다는 '진공 청소기'라는 별명답게 그는 상대 플레이메이커를 끈질기게 따라다닐 수 있는 체력과 몸싸움 능력 그리고 수비수로서는 드물게 정교한 패스능력과 볼키핑 능력을 이번 월드컵을 통해 보여줬다. 이번 월드컵에서 이러한 자신의 강점을 유감없이 보여준 김남일 동문은 이미 유럽의 빅리그에서도 얼마든지 통할 수 있는 정상급의 기량을 갖춘 수비수로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세계 톱 수준의 수비수로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이 충분하다는 평가를 국내외의 축구 관계자들로부터 받고 있다. 현재 김 동문은 스페인 1부리그 데포르티보 등으로부터 스카웃 제의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적 플레이메이커들 '기피대상 1호' 김남일 동문이 이번 월드컵에서 집중적으로 상대한 선수들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유명한 선수들이다. 카우지니(폴란드), 레이나(미국), 피구(포르투갈), 토티(이탈리아) 등 모두 유럽의 빅리그에서 엄청난 몸값을 자랑하는 스타 플레이메이커들이다. 평가전까지 포함한다면 지단(프랑스), 스콜스(잉글랜드) 같은 스타들도 상대했다. 이런 스타 플레이메이커들을 집중 마크해야하는 수비수들은 기량과는 관계없이 이들의 명성만으로도 주눅드는 게 현실이다. 특히 빅리그 경험이 전무한 선수들에게는 더더욱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김 동문은 전혀 달랐다. 얼마든지 해볼 수 있다는 식의 자세로 특유의 당당한 플레이를 구사했고 이러한 그의 플레이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어떻게 그런 선수들을 막을 때 긴장하지 않고, 주눅들지 않겠어요? 저도 경기 초에는 많이 긴장했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경기가 지속되면서 이들과 몸싸움도 하고, 공도 뺐고, 또 신경전도 펼치면서 저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졌고 좋은 플레이를 펼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막말로 해볼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편하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김 동문은 이번 월드컵의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로 포르투갈과의 예선 마지막 경기를 꼽았다. 또한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로는 자신이 마크하는 데 가장 힘들었던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플레이메이커 토티를 들었다. 김 동문은 토티의 거친 플레이와 정교한 개인기를 막는 게 힘들었지만 일단 해보자는 과감성으로 밀어 부친 게 나름대로 성공한 것 같다고 특유의 천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김 동문의 이러한 과감한 성격은 그의 뛰어난 축구 기량을 더욱 빛나게 하는 요소로 인정받고 있다. 뛰어난 기량이 바탕이 된 김 동문의 과감성은 경기장에서 악착같은 플레이로 이어졌고, 세계적인 플레이메이커들의 발을 꽁꽁 묶는데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이제 그는 세계적인 플레이메이커의 '기피대상 1호'가 됐다. 시련 극복하고 '히딩크 황태자'로 성장 이처럼 '스타 수비수'로 인정받는 김 동문이지만 힘든 시련의 시절은 있었다. 가난한 집안형편 때문에 고교 시절에는 적잖이 방황하기도 했다. 1998년 아시안게임,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에 선발됐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저 체력과 근성이 좋은 선수로 인식됐던 게 사실이다. 축구명문인 부평고와 본교를 거쳐 전남드래곤즈에 입단할 때만 해도 김 동문은 자신의 기량을 맘껏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좀처럼 잡지 못했다. 하지만 김 동문은 발전 가능성이 있는 선수를 찾기에 여념이 없던 히딩크 감독의 눈에 띄었고, 지난해 8월 유럽전지훈련을 앞두고 깜짝 발탁됐다. 당시 국내의 축구 전문가들은 '한국에 그만한 수비형 미드필더는 없다.'는 히딩크 감독의 말에 거의 동의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김 동문이 체코와의 평가전에서 우리 골문을 향해 어중간하게 드리블을 하다 실수로 볼을 빼앗겨 골을 내줘 우리 대표팀이 5:0으로 대패하는 간접적 원인 제공을 하자 김 동문과 히딩크 감독에 대한 비판 여론은 매섭게 일어났다. 이러한 와중에도 김 동문에 대한 히딩크 감독의 신뢰는 계속됐고 김 동문 역시 처음의 실수를 만회하듯 꾸준한 실력향상을 보였다. 그리고 지난해 11월에 있었던 '발칸의 강호' 크로아티아와의 평가전에서부터 김 동문은 확실한 대표팀 주전 멤버로서 자리를 굳힌다. 이 경기에서 김 동문은 철저하게 상대의 플레이메이커를 봉쇄했으며 코너킥을 헤딩골로 성공시켜 자신의 A매치 첫 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지난 3월에 열린 핀란드와의 평가전에서는 수비와 공격간의 가교 역할과 함께 핀란드가 자랑하는 최전방 공격수인 미카엘 포르셀을 완전히 고립시켜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켰다. 월드컵 직전에 열린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프랑스와의 평가전은 그의 기량이 월드컵을 앞두고 완전히 궤도에 올랐다는 것을 여지없이 증명시켜 준 경기들이었다. 그리고 월드컵이 끝난 지금, 김 동문 자신은 다소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라며 부끄러워하지만 송종국, 최태욱, 박지성 등 몇몇 '히딩크 황태자' 가운데 진정한 황태자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김 동문에 대한 히딩크 감독의 신뢰는 각별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독일전에서 패한 뒤 히딩크 감독은 충분한 가치를 발휘할 수 있었던 김남일이 이런 빅게임에 빠지게 된 건 매우 아쉬운 일이다. 그가 있었더라면 체력저하로 인한 미드필더의 허점으로 골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한 그에게 미안함을 느낀다.고 말해 남다른 제자사랑을 보여줬다. 'CU @ K리그' 월드컵 열기를 국내 프로무대로 국민대축제가 있던 날 잠깐 시간을 내어 체육부실을 찾아 한문배 감독 등 스승과 후배들에게 인사를 전하러 온 김 동문은 오랜 합숙훈련과 연이은 경기로 인해 정신적, 육체적으로 매우 지쳐있는 듯 했다. 그리고 자신에게로 향한 주위의 폭발적인 관심과 사랑을 부담스러워하는 듯 했다. 하지만 김 동문의 특유의 당당함과 자신감은 여전했다. 이탈리아전과 스페인전에서 다친 발목도 많이 좋아졌다면서 조만간 시작되는 K리그에서도 국민들을 열광시킨 '김남일표 플레이'를 펼쳐 보일 것을 다짐했다. "물론 쉬고 싶죠. 여유도 갖고 싶고요. 하지만 프로리그에 참여하는 건 당연합니다. 그런데 기쁜 마음으로 프로리그에 참여하고 싶지만 월드컵 기간 중 나타난 축구열풍이 과연 K리그로까지 이어질까 하는 걱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입니다. K리그와 대학경기에도 월드컵에서 보여준 사랑을 보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경기장에 많이들 오셨으면 합니다." 월드컵 기간 중 시청과 광화문 못지 않게 본교의 한마당, 인문대 앞 등에서도 열광적인 응원이 펼쳐졌다. 대표팀 선수들이 소개될 때마다 떠나갈 듯한 함성소리로 가득했지만 특히 김 동문이 소개될 때는 한양인들은 더욱 큰 함성과 박수로 환호했다. 한양인으로서의 자부심과 남다른 애정이 작용한 것이리라. "(크게 웃으며) 정말 제가 소개될 때 그랬나요? 저에 대한 한양인들의 애정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더 많이 응원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또 우리 학교 축구팀에도 더욱 많은 관심을 가져 주시기 바랍니다." 월드컵 4강 진출로 김남일 동문은 병역문제가 해결돼 유럽 진출에 아무런 걸림돌이 없는 상태다. 임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완전 이적도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특히 월드컵을 통해 김동문의 기량은 검증 받았기 때문에 유럽 무대 진출은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보도도 있었다. 하지만 김 동문의 입장은 매우 신중하다. 특히 본교와 전남드래곤즈에서 계속적으로 인연을 맺고 있는 이회택 감독과 하위권을 맴돌고 있는 소속팀의 상황도 김 동문은 고려해야하기 때문이다. "아직 아무 것도 결정된 게 없습니다. 그러니 뭐라고 말씀드릴 수도 없고요. 우선은 국내 리그에 전념할 것입니다. 하지만 기회가 허락된다면 꼭 유럽에서 뛰고 싶습니다. 유럽리그에서 뛰는 것은 모든 축구선수들의 목표 아닙니까? 저 역시도 마찬가지고요. 유럽에 가게 된다면 그곳에서도 멋진 플레이를 펼칠 수 있게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항상 지켜봐 주십시오." 이세형 학생기자 sehyung@ihanyang.ac.kr 김남일 선수 프로필 생년월일 : 1977년 3월 14일 키, 몸무게 : 180cm, 75kg 학 력 : 부평초등학교-부평동중학교-부평고등학교-한양대학교 포 지 션 : 미드필더(MF) 소 속 : 전남 드래곤즈 A 매치 데뷔 : 98년 아시안게임 베트남전 A 매치 기록 : 22경기 출전 1골(2001년 11월 10일 크로아티아전

2002-06 15

[동문]합리성 강조하는 `정통파` 김기웅 동문

합리성 강조하는 '정통파' 편집국장 "내 이름을 단 칼럼을 쓰는 게 꿈입니다" "이렇게 보여도 (나도) 닛케이를 읽고 있어요. 한창 자유분방할 나이라 흥미 본위의 기사만 좋아하고 경제신문은 보지 않을 것 같다고요? 오해하지 마세요. 경제신문을 보지 않고 어디 현대를 살아간다고 할 수 있나요. 경제신문이야말로 정보의 보물창고이자 생활의 길잡이 아닙니까?" 경제지보다는 패션잡지를 들고 있어야 어울릴 법한 젊은 미녀모델이 등장한다는 일본의 대표적인 경제지 〈니혼게이자이신문〉(일본경제신문)의 광고카피이다. 이 광고 카피처럼 경제지는 현대사회에서 확고한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우리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기업인, 은행원, 증권맨, 경제부처의 공무원, 경제학자 등과 같은 경제전문가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개인투자자와 경제를 공부하는 학생들, 심지어는 좀더 돈을 아껴가며 생활해야 하는 서민들에게도 경제지는 필수적인 '경제 교과서'가 되었다. 날로 높아지는 경제신문의 위상 "우리나라 경제지들은 70, 80년대부터 꾸준히 성장해 오다 90년대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향력이 커지게 됩니다. 그리고 IMF를 전후로 시장이 급격히 팽창하고, 매체영향력과 관련된 부분에서도 완전한 자리매김에 성공하게 됩니다. 현재 신문업계는 모든 면에서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등 3대 종합일간지와 〈한국경제〉, 〈매일경제〉의 양대 종합경제지, 즉 'Big 5'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경제〉편집국장 김기웅 동문(신방 78년졸)은 현재 우리나라 경제지의 위상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특히 97년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경제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경제지의 위상이 많이 올라갔으며 99년 이후 증시의 활황으로 금융계, 산업계, 관계, 벤처업계 등의 경제지의 수요가 크게 늘어났다고 김 국장은 풀이한다. 이제 경제지들은 기업들의 시장전략, 정부의 경제 및 사회정책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물론이며 한국에 주재하고 있는 외국언론들이 한국경제와 관련된 전반적인 뉴스들을 입수하는 주된 통로 역시 경제지일 정도이다. 또한 주요 종합일간지들의 경우도 경제부문에서는 경제지들의 양과 깊이를 따라가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더욱 고무적인 것은 경제가 국가, 사회, 개인 모두에게 가장 큰 사회적 관심사인 만큼 경제지의 시장과 영향력도 계속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한경맨'으로서의 자부심 그러나 이와 같은 경제지의 눈부신 성장이 반드시 좋은 영향만을 주는 것은 아니다. 이로 인한 적지않은 부작용도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 해전 종합일간지들의 판매경쟁이 과열되면서 벌어진 판매지국간의 폭력사태가 물의를 일으킨 것처럼 경제지도 시장이 급속도로 팽창하면서 경쟁신문간에 광고유치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그 결과 일부 경제지에서는 기자들이 광고유치에 동원되기도 했는데 이런 과정에서 광고주 및 취재원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건전한 비판적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기자들이 기업인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기도 했다. 얼마전 일부 경제지의 기자들이 대거 연루돼 충격을 준 벤처비리 '패스21 게이트'도 이러한 과당경쟁이 큰 원인이었다고 김 국장은 진단했다. '패스21 게이트'로 인해 김 국장은 기자의 한 사람으로서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국경제〉의 기자, 즉 '한경맨'으로서의 자부심을 더욱 느낄 수 있었던 계기였다고 말한다. 바로 자신이 몸담고 있는 〈한국경제〉에는 게이트에 연루된 기자가 한명도 없었고 특히 패스21을 담당했던 후배 기자가 집요하게 접근해 오던 비리유혹을 물리쳐 언론계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저는 〈한국경제〉를 '정통파 경제신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쉽다고 해도 잘못된 길은 절대 가려고 하지 않는게 우리 〈한국경제〉의 편집철학입니다. 광고유치와 관련해서도 그렇습니다. 사실 부장급 정도가 되면 경영감각도 꼭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기자에게 광고를 유치하라고 요구하는 건 저희 회사의 분위기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누구든 이런 요구를 하면 곧바로 비판여론이 제기되는 분위기가 편집국에 오래전부터 조성돼 있습니다. 심지어는 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는 범위의 주식투자 같은 경우도 기자들이 꺼리는 분위기입니다. 경제신문 기자로서 그런 걸 하면 좀 그렇지 않느냐는 것이죠." 이러한 '진지한' 분위기탓에 〈한국경제〉의 위상은 일반 독자들보다도 경제전문가와 경제기자들 사이에서 더 높다고 김 국장은 자랑한다. 그는 '프로는 프로를 알아본다'며 이른바 경제전문가들 사이에서 보도의 신뢰성과 관련된 부분에서 〈한국경제〉는 명실상부한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강조했다. 특종행진으로 행복한 편집국장 편집국장으로서 김 국장은 굉장히 행복한 사람이다. 지난 4월 그가 취임한 이후로 〈한국경제〉는 특종행진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의 특종행진은 지난 달 20일 '덕수궁옆 15층 미 대사관 파문', '경찰이 돈 받고 H양 미행' 기사가 보도된 것을 시작으로 22일 '쌍방울 3105억에 팔린다', '중국, 한국산 철강 수입제한', 23일 '은행 주5일근무 합의', '롯데, 미도파 인수' 기사가 나란히 단독 보도됐다. 특종은 계속 이어져 27일 시내판 1면에 실린 한화그룹의 대한생명 인수 포기 기사가 한화 측의 기자회견보다도 앞서 보도됐고, 30일자 롯데그룹의 TGI프라이데이스 인수 기사와 지난 3일자에 실린 '서울시, 조흥·서울은행장 등 고발' 기사 역시 특종보도였다. 이러한 〈한국경제〉의 특종행진은 언론계에서 좀처럼 드문 것이다. 이와 관련된 비결이 있느냐는 질문에 김 국장은 그저 자신은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또한 자신은 가장 편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편집국을 운영하는 이른바 '정통파'로 분류할 수 있는데 자신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인 '지나친 합리성'이 편집국의 분위기를 쇄신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된 것 같다고 나름대로 평가했다. 구체적으로 김 국장은 기사와 기자를 편견 없이 대하고, 자연스러운 가운데 우호적인 경쟁 분위기를 편집국에 만들려고 한 게 나름대로 성공한 것 같다고 덧붙혔다. "당연히 행복하죠. 요즘 기획회의와 편집회의 때는 모두 웃는 얼굴로 들어와서 웃는 얼굴로 나갑니다. 물론 잘못된 건 날카롭게 지적도 하고 긴장도 하죠. 하지만 분위기가 참 좋습니다. 얼마전에는 특종행진을 축하하고, 기자들의 사기를 올리는 차원에서 편집국 전체 맥주파티를 열기도 했습니다." 언론계서 대약진하고 있는 한양인 김 국장의 편집국장 취임으로 본교는 2명의 종합경제지 편집국장(이용규 내외경제 편집국장)과 1명의 종합일간지 편집국장(최홍운 대한매일 편집국장)이 현재 활동하고 있다. 10개 종합일간지와 4개 종합경제지 가운데 서울대(4명) 다음으로 많은 수의 편집국장을 배출했다. 특히 3명의 편집국장 모두가 신문방송학과 출신으로 단일학과로는 가장 많다. "최근 많은 한양인들이 언론계에 진출하고 있고, 기존의 동문들도 활약이 대단합니다. 편집국장도 많고, 3대 공중파 방송의 메인뉴스 앵커도 가장 많지 않습니까? 이런 모습에 자극을 받아 더욱 많은 후배들이 언론계 진출을 꿈꾸고, 학교 측에서도 언론계에 더욱 많은 지원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또 우리 후배들이 어떤 일을 하든 한양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자신감을 갖고 사회에 진출했으면 좋겠습니다. 한양인들은 이제 우리 사회 어느 곳에서나 자타가 인정하는 최정상급의 엘리트로 대접받고 있습니다. 특히 법조계, 행정계, 경제계, 언론계 등 사회 전반에 걸쳐 동문들의 활동이 활발할 뿐만 아니라 동문들이 상대적으로 젊은 편이기 때문에 한양의 위상은 더욱 높아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모든 기자의 꿈이라는 편집국장에 오른 김 국장이지만 그에게는 언론인으로서 남아있는 꿈이 있다. 바로 자신의 이름으로 칼럼을 쓰는 칼럼니스트가 그의 편집국장 이후의 목표이다. 가장 중요한 건 회사의 결정이겠지만 그는 계속 글을 쓰는 기자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이상하리만큼 끈끈한 인연이 신문과 이어져 왔다는 김 국장의 모습에서 언론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애정이 느껴졌다. 이웃집 아저씨처럼 푸근하면서도 냉철한 비판정신이 번뜩이는 김 국장의 얼굴을 담은 '김기웅 칼럼'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이세형 학생기자 sehyung@ihanyang.ac.kr 김기웅 동문은 누구? 김기웅 편집국장은 1971년 본교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해서 78년에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내외경제신문에 입사했으며 80년부터 한국경제신문으로 자리를 옮겨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다. 그는 김영삼 대통령 시절 정치부 차장으로 청와대에 출입하기도 했으며 산업부장, 편집국 부국장, 광고국장 등을 역임했다. 올해 4월부터 편집국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김 동문은 본교 언론인들의 모임인 '한양언론인회'의 총무로도 활동 중이다.

2002-06 08

[동문]신흥 의료엘리트의 산실 을지의대 박준영 총장

소수정예 기치로 급부상한 신흥 의료엘리트의 산실 "부와 명예를 원하거든 차라리 벤처산업으로 가야겠지요" 글 싣는 순서 ① 충북대 신방웅 총장 ② 강릉대 임승달 총장 ③ 안동대 권영건 총장 ④ 호원대 강희성 총장 ⑤ 삼척대 장태연 총장 ⑥ 을지대 박준영 총장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음에 나의 생애를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의과대학 졸업시 행해지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두고 의료인이 갖춰야할 양심과 자세를 가장 잘 함축한 말이라 한다. 그러나 이는 일반인들이 의료인에 대해 거는 기대와 요구가 가장 잘 집약된 것이기도 하다. 열대의 오지에서 의료봉사에 전념했던 슈바이처는 모두가 소원하는 전형적인 의료인의 표상이었던 동시에 대한민국의 모든 부모들이 갈구한 훌륭한 사위의 표상이기도 했다. 그래서 지난 2000년 있었던 병의원 파업과 의료대란은 국내 의료체계 전반은 물론 의료인의 위상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는 성찰의 기회를 주었다는 지적도 일면 타당하다. 이제 부와 명예는 더 이상 의사의 삶과 함께 가지 않는다. 을지의과대학의 박준영 총장(의대 84년졸)의 말이다. '소수정예' 신흥 의료엘리트 산실 꿈꾼다 박준영 총장은 84년 본교 의학과를 졸업한 이후 해부학으로 동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과정을 밟았다. 1997년 일본 게이오대에서 산부인과로 박사학위를 다시 받았고 서울을지병원 산부인과 과장, 서울보건대 학장, 을지중앙의료원장을 거쳐 지난 해 을지의과대학의 제 2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1997년 설립된 을지의과대학은 국내 최고 수준의 교육환경과 더불어 소수정예주의를 표방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 내년 첫 졸업생 배출을 앞둔 신흥 의과대학으로서 그 성장과 발전의 가능성에 의료학계가 주목하고 있습니다. 타 의과대학과 비교해서 을지대학이 지닌 나름의 경쟁력을 어떻게 보십니까? 『우리 의과대학의 근간에 을지중앙의료원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의료계의 의사로서 한 획을 그었다고 자랑할 수 있을 만큼 43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구요. 공익의료법인으로 성장한 것은 대한민국에서 사립병원들 중 3번째가 됩니다. 의과대학을 설립하면서 좀 늦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반면에 나름대로 소수 정예의 유연성을 갖고 대처할 수 있는 그런 의과대학을 운영하고자 합니다. 모든 의과대학이 마찬가지이겠습니다만 서울에 있는 을지병원을 비롯해서 여러 곳에 위치한 의료원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의과대학으로서 발전의 발판이 되는 충분한 메리트가 되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 을지의대의 발전을 위해 「3단계 발전계획」을 수립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계획 입안의 취지와 함께 그 전략적 특징들이 궁금합니다. 『2005년 WTO의 의료시장 개방을 앞두고 의료업계가 국내만을 지향해서는 발전도 그러고 생산적 교류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시장 개방과 더불어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중국이나 동남아로의 진출입니다. 실제 그 나라에 병원을 설립하고 의료진을 파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고 더 쉬운 방법으로는 화상진료시스템 내지는 최근의 기술로 가능해진 원격수술의 추진입니다. 따라서 최근 이러한 부분에 좀더 투자를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의과대학에 3단계 계획을 세워본 적이 있습니다. 그 첫 단계가 졸업생이 나오는 내년까지 각종 인프라를 구축하는 작업입니다. 대전에 1,053병상의 병원을 건립하는 것이나 오는 9월부터 재단 전체를 원격화상진료시스템으로 묶는 전산개발 작업에 착수한 것도 이러한 계획의 일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 원격진료시스템이 구축되면 중국은 물론 가까운 북한에도 의료진의 파견 없이 손쉽게 의료지원이 가능해 질 것으로 봅니다.』 발전계획의 1단계가 마무리되는 내년 이후, 을지의과대학은 2008년까지를 제 2단계의 도약기로 보고 대학원 설립을 비롯하여 기초의학분야 연구와 산학협동 활성화를 통해 국내 최고 수준의 교육 및 의료환경을 완비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다. 2009년부터 시작되는 발전계획 제 3단계는 세계적 수준의 경쟁에 주목한다. 각종 첨단 연구소를 육성하는 것은 물론 학생 3인당 교수 1인 비율의 교원을 확보하고 국제 학술대회 개최와 학술지 발간을 통해 명실공히 세계적 수준의 의학명문으로 거듭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산학협동을 통한 새로운 의약품 및 의료기술 개발의 가시적 성과를 기대하는 것도 바로 이 시기다. 의료원 발전의 키워드, '리더십'과 '전문화' 국내 의료시스템의 사회적 성격은 대형병원들이 성장하는데 큰 장애가 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이른바 미국은 「시장형」의료 시스템, 영국은「공영」시스템 그리고 프랑스와 독일은「중간형」의료 시스템인데 비해 국내 의료체계는 외형적으로는「중간형」이면서도 실내용은 매우 기형적이라는 것이다. 민간 의료기관이 전체의 90%를 넘는 압도적인 상황에서 「중간형」을 표방함으로써 발생하는 사회정서적 괴리와 경제적 손실을 모두 민간병원이 부담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대학병원을 비롯한 종합병원의 경우 방대한 규모에 비해 수입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지 않음으로써 향후 생존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위기설도 심심찮게 흘러나온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박 총장은 모교 한양의대와 의료원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을까? - 최근 모교 한양의대 출신으로 전국 의과대학에 재직 중인 교수의 수가 전국 6위라는 언론보도가 있었습니다. 류머티즘 분야 등 나름의 특화된 전략으로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모교인 한양의대 및 의료원의 위상과 향후 개선점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지금도 병원을 경영하며 항상 귀감이 되는 학교 중에 한양의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매우 짧은 시간에 한양의대가 전국적으로 인정을 받는 대학으로 성장을 했구요. 의료원 수준 역시 선진국에 뒤처지지 않는 괄목할만한 수준에 왔고 제가 의료인의 한 사람으로서 본 받고 싶고 그 내실있는 경영을 배웠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다만 한 가지 조직이 크면 단순히 맨파워가 커서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고 마찬가지로 그만큼 규모의 성과물이 나올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요즘 병원들도 전문화, 특성화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슈퍼마켓처럼 온갖 좌판을 다 펼쳐놓고 모든 것을 다루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만을 정해서 중점적으로 해 보겠다, 어찌보면 쓸데없는 것들을 다 정리하고 알찬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쪽으로 매진하겠다는 것이죠. 이러한 추세로 산부인과전문병원이니, 척주전문병원이니, 미용성형전문병원이니 이렇게 특화된 소형 병원들이 많이 생겨납니다. 이런 병원들과의 경쟁에서 대형병원은 상당히 압박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 한양의대를 비롯해서 대학병원이 지닌 규모의 조직이 오히려 발전의 저해가 된다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그렇다면 그 대안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요. 『맨파워는 대학병원이 더 많은데 이런 맨파워의 집중력은 오히려 소형병원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국가에서 나오는 연구비도 이제는 상당히 전문화된 쪽으로 배정됩니다. 연구비나 지원금을 받게 되면 의과대학이나 대학병원은 너나 없이 모두 나눠줘야 합니다. 100원을 가지고 10분의 교수님들께 10원씩 나눠주게 되면 거기서 나올 수 있는 소기의 큰 성과를 기대할 수 없어요. 그런데 맨파워가 집중된 소형병원은 100원을 어느 한 곳에 집중해서 투자할 수 있거든요. 이것이 이제 종합병원의 경영을 어떻게 해야하느냐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의과대학이 성장을 하는데는 좀더 강력한 리더가 있어야한다는 생각입니다. 크게 보면 총장이 될 수도 있고 작게 보면 어느 학과의 학과장, 어느 디파트먼트의 한 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전체를 조화롭게 이끌면서도 특화된 발전의 방향을 설정하고 이를 이끌 수 있는 그런 리더십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부와 명예를 원하거든 벤처로 가라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 최고의 처방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밝게 사는 것」이라 답하는 박 총장이 의료인의 삶을 선택하기까지에는 아픈 기억이 있다. 선친의 가업을 이어 의사의 길을 가고자 서울의대에 재학 중이던 맏형이 그만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 이를 계기로 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자신이 다시 의학에 전념하게 됐다고 박 총장은 고백한다. 사람을 잃어본 자가 깨닫는 생명의 소중함일까? 부와 명예를 떠나 의료인의 자세에 대해 박 총장이 견지하는 생각은 매우 원칙적이다. - 의료인 양성은 사람의 생명을 다룬다는 점에서 일반 전문인력을 육성하는 것과 동일한 접근이 곤란합니다. 총장님께서 갖고 계신 교육철학이나 의료인의 자세에 대한 원칙 등이 궁금합니다. 『의료교육 자체가 분명히 기술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인술이기 때문에 나름의 정신적인 무장,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돈이나 명예를 위해서라면 요즘 한창 유행인 벤처에 투자하는 것이 낳지 않겠느냐 싶구요. 흔히 일반인들이 의사는 돈을 많이 벌겠고 시집, 장가도 잘 간다는 생각을 하죠. 그러나 저는 항상 신입생들에게 돈을 벌려고 의사가 되려거든 빨리 다른 쪽으로 방향전환을 하는 게 좋겠다고 얘기합니다. 의사는 항상 아픈 사람, 또 희생과 봉사를 기본에 두고 있지 않으면 참 수행하기 어려운 직종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왜곡된 사회적 통념과 정책적 오류, 갖은 오해 속에서도 의료인의 길에 대해 원칙적 입장을 통해 묵묵히 소임을 다하는 의료인을 양성하겠다는 박 총장의 언어가 지극히 평범하기 짝이 없다. 생각해보면 진리란 늘 지극히 평범한 상식 속에 존재하는 법이다. 글 : 최 홍 취재팀장 choihong@ihanyang.ac.kr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 동신대학교 이상섭 총장은 지병 관계로 인터뷰 및 보도가 취소되었습니다. 이상섭 총장님의 빠른 쾌유를 기원합니다. - 편집자주 학력 및 경력 1984 한양대 의과대 1990 한양대 대학원 해부학 석사 1993 한양대 대학원 해부학 박사 1997 일본 게이오대 의학부 대학원 산부인과 박사 1988 일본 게이오대 병원 산부인과 방문연구원 1989 서울 을지병원 수련의 과정 수료 1993 서울을지병원 산부인과 전공의 과정 수료 1993 서울을지병원 산부인과 과장 1993 을지학원, 서울보건대학, 을지병원 이사장 1995 노원을지병원 설립 1997 을지의과대학 설립 (현) 을지의과대학교 제2대 총장 (현) 한양대 의과대 외래교수 (현) 한양대 총동창회 상임이사 (현) 대한병원협회 상임이사 (현) 일본 산부인과학회 정회원 (현) 일본 불임학회 정회원 (현) 의료법인 을지병원 이사장

2002-06 01

[동문]`강원도의 힘` 삼척대 장태연 총장

지역사회에 대한 애정으로 다시 쓰는 '강원도의 힘' "한 명의 훌륭한 소방관을 만든는 것은 서울대가 하지 못하는 일" 글 싣는 순서 ① 충북대 신방웅 총장 ② 강릉대 임승달 총장 ③ 안동대 권영건 총장 ④ 호원대 강희성 총장 ⑤ 삼척대 장태연 총장 ⑥ 동신대 이상섭 총장 홍상수 감독의 영화 '강원도의 힘'을 두고 세간의 평은 크게 엇갈린다. 일상을 가감 없이 냉철하게 그려낸 독특한 작가주의 작품으로 칭송을 받기도 하고, 이전 데뷔작의 진술을 단순 반복하는데 그친 진부한 작품으로 폄하되기도 한다. 삶에 대한 냉소와 허무로 가득 찬 「반낭만주의」라는 진술은 상반된 평가의 중간 어디쯤을 차지한다. 삼척대학교 장태연 총장(토목 58학번)은 그런 면에서 홍 감독과 닮은 구석이 있다. 홍 감독이 일상에 대해 꾸밈없는 시선을 견지한다면 장 총장에게는 지역사회에 대한 냉철한 현실인식이 있다. 그는 지역이 처한 척박한 현실을 애써 감추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강원도를 굳이 「시골」이라 묘사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거나 지역사회가 가진 상처의 흔적들을 현란한 언어로 포장하지도 않는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냉소와 허무를 뛰어넘어 지역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는다는 것. 학문이란 사태의 인과관계를 밝히기 이전에 사태의 상처에 관여한다는 사실은 그가 견지하는 또 하나의 연출 포인트다. 배움이 부족한 주민들을 위해 위탁교육 과정을 신설하고 저개발 지역사회를 위한 기술인력 육성에 주력하는 등, 지역의 상처를 학문으로 치유하려는 그의 진솔한 교육철학을 들어보았다. 열린교육, 평생학습 장태연 총장은 토목공학과 58학번이다. 이후 인하대에서 석사와 박사과정을 밟았다. 1964년 「화천실업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한 그는 삼척대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삼척공업고등전문학교」, 「삼척공업전문대학」 그리고 「삼척산업대」를 거쳐, 종합대학으로 승격한 삼척대의 제2대 총장으로 지난 98년 취임했다. 교편을 잡기 전 삼척군청에서 근무했던 시간까지 따지자면 30년의 세월을 강원도와 함께 한 영원한 「강원인」이다. 그래서인지 대학경영의 궤적을 설명하는 장 총장의 말 마디마디에도 지역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묻어난다. - 올해로 임기 4년의 마지막 해를 맞이하고 계십니다. 재임 기간 중 가장 기억에 남고 보람된 일들을 소개해 주신다면. 『시골 벽지의 학교에서 애로사항이 많은데 총장이 되고 나서 위탁교육 그리고 최고경영자 과정을 처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시골 사람들이 서울의 유명 인사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초빙하고 또 그런 강사진을 모아서 최고경영자 과정을 시작했는데 매년 150여명씩 다녀갑니다. 또한 지난 번 개교 60주년 행사의 일환으로 KBS 「열린 음악회」를 주최했는데 지역이 좁다보니까 예산 확보가 어려움이 많았어요. 그런데 다행히 시에서 협조를 잘 해주고 동문들과 지역 주민들이 또한 적극 협조를 해서 개최할 수 있었습니다. 학교의 예산이 없는데도 지역사회가 베풀어준 따뜻한 협조, 이런 것들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 삼척대가 지역사회로부터 받기만 하는 것은 아닐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른 바 '열린교육, 평생학습'을 모토로 실시하는 위탁교육은 지역사회를 위한 대학의 노력을 엿보게 합니다만. 『시골에 있으면서 이곳보다 더 오지, 즉 태백이나 정선 등에 직장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 예전에 전문대학을 졸업했다든지 혹은 아예 대학을 마치지 못하고 학위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위탁교육제도를 실시했습니다. 이런 기회로 그 사람들은 학위를 받을 수 있지만 대학으로서는 큰 홍보 효과도 있었습니다. 또한 대다수가 직장을 가진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참으로 성실하게 열심히 해 주었습니다. 비록 시골에 있는 대학이지만 지역사회에 많은 배움의 기회를 주고 있다는 데서 자부심을 느끼고 있지요.』 지역사회 발전의 밑그림, '그린 프로젝트' 삼척대의 강원사랑은 비단 주민들의 학구열을 채워주는데 그치지 않는다. 이른바 '그린 프로젝트'로 명명된 삼척대의 특성화 정책은 강원도의 저개발 혹은 훼손된 환경 복원을 통해 지역사회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매우 구체적인 노력으로 꼽힌다. 산불과 휴폐광, 시멘트 광산 등으로 파괴된 자연환경을 복원하면서 2차 환경오염을 방지하는 한편, 체험관광을 활성화하는 환경기술을 개발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이미 활성화된 산학협동 과정과 함께 지역사회의 발전을 도모하려는 삼척대의 노력을 잘 대변하는 사업들이다. - 삼척대에서 추진 중인 '그린 프로젝트'에 대해 세간의 관심이 많습니다. 사업 추진의 배경이나 주요 성과들이 궁금합니다. 『삼척대가 처음에는 주로 토목, 광산학에서 시작해서 성장, 발전을 해왔습니다. 주로 이 지역에서는 산업기술 인력을 필요로 하고 그러한 수요에 부응하려다 보니까 주로 공과계열 학과들이 많이 발전했지요. 지금도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학과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재작년의 경우 산불이 많이 나서 큰 피해를 보았고, 특히 당시에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불을 진화시키지 못해 애를 먹었는데 이러한 지역 현실을 감안해서 우리가 서울 유수의 대학처럼 행정고시나 사법고시 수험인력을 기르지 않고 지역의 실정에 맞는 기술인력을 양성해서 환경기술인으로서 취직을 잘 시키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누가 소방관이 되려고 서울대를 가겠습니까?』 - 같은 맥락입니다만 삼척대의 산학협동전략은 특히 우수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외에 삼척대의 경쟁력으로 꼽을 수 있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전국에서 우리 학교가 등록금이 가장 쌉니다. 한 학기에 100만원 정도 합니다. 사립대학 같은 경우는 300만원에 달하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100만원 미만으로 저렴한 등록금에다 아주 좋은 자리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취직도 잘 되고 해서 시골에 있으면서도 발전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산학협동의 성과에도 물론 자부심이 있지요. 본교의 자연공학과, 토목과 그리고 환경공학과 소속의 교수님들이 쌍용이나 동양시멘트 등 인근 기업의 기술자문을 하는데 많은 참여를 하고 있습니다. 지역이 발전을 하려면 기업들이 먼저 성장을 해야한다고 생각해서 저희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함께 연구, 개발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산학협동에 대한 삼척대의 각별한 노력은 지난 해 있었던 강원도내 산학연 컨소시엄 사업 지원결과에서도 잘 드러난다. 강원도와 강원지방중소기업청이 산학연 공동기술개발 컨소시엄 사업에 선정된 도내 9개 대학을 평가한 결과, 삼척대가 규모 면에서 월등히 앞선 여타 대학들을 모두 제치고 가장 많은 지원금을 받았던 것이다. 이는 행정기관과 지역사회가 삼척대에 대해 갖는 기대를 잘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재직교수의 출신 대학도 '한양'이 최다 장 총장이 대학에 입학한 것은 한양대가 종합대학으로 승격되기 1년 전인 1958년이다. 충북대 신방웅 총장과는 2년의 터울이 있는 선후배 사이가 된다. 모교에 대한 감회를 묻자 장 총장은 「돌산」에 대한 회고로 말문을 시작하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 이야기를 좀 많이 거슬러 보겠습니다. 총장님께서 대학을 다니던 50년대 말, 60년대 초는 한양대학교가 종합대학으로 승격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습니다만 지금에 와서 모교의 발전상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그때는 모교가 참 부족한 점이 없지 않았지요. 우리가 들어갔을 때만해도 아직 종합대학 승격 전인 한양공과대학이었습니다. 지금은 참으로 발전을 많이 해서 뿌듯한 마음이 있지요. 저희 삼척대의 교수님들도 학부 출신을 따지자면 한양대가 가장 많아요. 저희가 공과계열 학과가 많다보니까 그런 점도 있지요. 제가 강원도 교육위원을 두 번 역임하고 교육감 선거에도 출마해서 최종 경선까지 간 적도 있습니다. 영동지역의 인구가 좀 작다보니까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는데 그러한 선거의 과정에서도 보니까 어디를 가도 한양 출신들이 상당히 많이 분포하고 있어서 참 반가웠습니다. 부디 자부심을 가지고 더욱 열심히 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장 총장은 급격한 발전상에 뿌듯한 마음을 표하면서도 결코 자만하지 않는 한양인이 될 것을 주문한다.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의 소임을 다할 것을 당부하는 말도 잊지 않는다. 가까운 이웃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는 대학이 어떻게 손에 잡히지도 않는 국가를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느냐 되묻는 그다. 삼척대가 연출하는 '강원도의 힘', 그 진솔한 학문의 꿈에 다섯 개의 별을 드린다. 최 홍 취재팀장 choihong@ihanyang.ac.kr * 동신대학교 이상섭 총장은 지병 관계로 인터뷰 및 보도가 연기되었습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 편집자주 학력 및 경력 1958 강릉상고 졸업 1963 한양대 토목공학 학사 1982 인하대 대학원 토목공학 석사 1990 인하대 대학원 토목공학 박사 1964 화천공업고등학교 교사 1966 삼척공업고등전문학교 전임강사 1979 삼척공업전문대학 교수 1991 삼척산업대학교 교수 1991 강원도교육위원회 위원 1995 강원도교육위원회 교육위원 1995 강원도교육위원회 부의장 1998 삼척대학교 총장

2002-05 29

[동문]실용학풍의 전당 호원대 강희성 총장

전원에 건설하는 실용학풍의 전당 "2010년, 전북 최고의 사립명문으로 도약하겠다" 글 싣는 순서 ① 충북대 신방웅 총장 ② 강릉대 임승달 총장 ③ 안동대 권영건 총장 ④ 호원대 강희성 총장 ⑤ 동신대 이상섭 총장 ⑥ 삼척대 장태연 총장 전북 군산 인근에 위치한 호원대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세 번은 놀라게 된다. 국도를 타고 야트막한 언덕을 넘을 때쯤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 전원 캠퍼스의 아름다움에 처음 놀라고, 막상 교정에 들어서면 본관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5년 전 지금의 옥구 캠퍼스로 이전하면서 강의와 연구시설 건립을 최우선으로 추진했던 탓이다. 학생에게 직접적으로 필요한 모든 환경이 구비된 후에 본관이 완공될 것이라는 관계자의 설명이 무척 인상적이다. 중앙도서관 건물의 1층 화장실 옆, 구석의 공간을 빌어 위치한 총장실에서 비서팀장이 귀띔한다. 『총장님을 처음 뵙는 많은 분들이 곧잘 놀라시곤 합니다.』 앞 뒤 설명 없는 말의 의중을 헤아리기도 전에 성큼성큼 다가와 대뜸 악수를 청하는 신사가 있다. 40의 나이를 갓 넘겼을까 싶은 젊은 인상과 세련된 외모의 그가 환한 미소로 자리를 권한다. 호원대 강희성 총장(경제 75학번)이다. 「서해안 시대」 주도할 젊은 지성의 전당 강희성 총장은 경제학과 75학번이다. 젊은 인상과 격식을 차리지 않는 유려한 언변이 그의 연륜에 대한 「오해」를 종종 낳지만 굳이 나이를 따지자면 40대 후반인 셈이다. 강 총장은 학부를 마친 이후 미국 뉴욕의 Pace University에서 MBA를, 다시 모교인 한양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8년 호원대의 전신인 전북산업대에서 교직을 시작한 이래 사무처장과 기획실장을 거쳐 지난 해 제 4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서해안 개발의 붐을 타고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전략이 요구되는 지역정서와 대학의 요구가 그의 젊음을 높이 평가했다는 것이 주위의 평가다. - 호원대는 25년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급격한 성장이 돋보입니다. 새롭게 도래한「서해안 시대」라는 지정학적 발전 가능성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 합니다만. 『1978년에 군산공업전문학교로 개교한 이래 지금의 호원대학교에 이르기까지 매우 급속히 성장한 대학이라 자부합니다. 무엇보다 모든 학부나 전공들이 실용적 학문으로 구성되어 실생활이나 산업계의 요구에 직결되어 있었고, 이는 졸업생들의 사회 진출에 큰 동력이 되었습니다. 특히 서해안고속도로의 개통과 새만금간척사업의 재개, 군산자유무역지대 지정 등으로 인해 환황해권 중심도시로서 군산시의 위상이 급격히 높아진 것이 사실입니다. 지역에 가득 찬 이러한 활력을 바탕으로 젊은 우리 대학도 그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맥락의 질문일 듯 싶습니다. 지난 해, 취임사를 통해 「지역사회에 대한 소명」을 강조하셨습니다. 산학협력 혹은 지역 연계사업의 구체적 모습들이 궁금합니다. 『제가 총장에 취임하면서 지역사회에 대한 소명을 강조한 것도 앞서 말한 군산시의 발전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 일환으로 호원테크노경영원를 설립하고 이를 통해 산업체와의 지속적인 산학협력체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전라북도 내 공공기관이나 기업체와 함께 각종 위탁교육을 실시하는 것도 그렇고 지역사회 정보화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인근의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각종 전산교육과 체험학습을 진행하고 있지요. 재학생들의 사회봉사 학점제는 대학이 지역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매우 실용적인 헌신임과 동시에 학생들은 강의실에서 얻지 못하는 중요한 체험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제도입니다. 지금까지의 성과도 매우 우수합니다. 실제로 본교의 학생들이 사회봉사분야에 있어 도지사 표창을 비롯해 많은 상을 받고 있습니다. 지역사회와 연계한 각종 협력과 실용주의 전략은 호원대의 가장 큰 원칙입니다.』 취업률 100%, 실용학풍이 경쟁력이다 호원대는 백화점식 커리큘럼을 갖춘 종합대학 모델을 답습하지 않고 철저하게 실용학풍에 기초한 특성화 전략을 고집한다. 젊은 총장의 리더십이 지닌 활력을 증명하듯이 그는 서구에서 체험한 독특한 합리주의적 사고를 바탕으로 호원대는 호원대만의 전략이 유효하다는 강한 자신감을 피력한다. 세분화된 전공과정과 대폭 강화된 실무 중심의 커리큘럼으로 언제든지 현장에 투입될 수 있는 준비된 전문인력을 양성하겠다는 것이다. - 호원대의 커리큘럼을 이른바 '맞춤교육'이라고 평가한 언론 보도를 보았습니다. 이론과 실무의 적정 배율을 어느 정도로 고려하고 계십니까? 『물론 지방 중소대학이 나름의 특화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것입니다만 본교의 교육은 산업계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전문직업엘리트」를 양성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론교육 이상으로 실습, 실험과 같은 실무교육에 타 대학보다 월등히 많은 투자와 시간이 들어갑니다. 모든 전공에서 최소 30% 이상, 많게는 50%까지 실무교육과목을 개설하도록 권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교수진도 전임교수 외에 산업계의 임원급을 겸임교수로 대폭 채용하여 활용하고 있습니다.』 - 특화된 교육과정의 내용만큼이나 그 성과도 궁금합니다. 최근 호원대의 취업현황은 어떻습니까? 『일개 특정학과를 선별해 말씀드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모든 학과가 고루 우수한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취업률을 중심으로 본다면 컴퓨터 학부, 관광학부, 유아교육과, 사회체육학과 그리고 산업디자인학과 등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100%의 취업률입니다. 학생들이 각 전공별로 독자적인 교육과정을 이수하는 동시에 전자상거래나 e-비즈니스와 같이 최근에 부각되고 있는 주요 학문을 빠르게 접할 수 있는 「창업실무 및 전공심화학습과정」을 3,4학년을 대상으로 탄력적으로 운영했던 것이 더욱 큰 도움이 됐습니다.』 강 총장은 호원대의 실용학풍을 가장 잘 대변하는 곳으로 관광학부를 꼽는다. 강의의 내용과 방식을 호텔 및 여행업계 대표, 관련 공무원들이 포함된 산학협력위원회서 구성하고 현장에 투입해 즉시 활용 가능한 커리큘럼을 구성한다. 또한 특급호텔의 지배인, 여행사 간부 등이 겸임교수로 출강하여 현장실무를 교육한다. 외국어 역시 이러한 커리큘럼에서 빠지지 않는다. 토익과 토플 등 단순한 어학점수 취득에서 탈피하여 영어, 중국어, 일어 등 다국적 회화능력 향상에 중점을 둔 강의가 진행된다. 강의로도 부족하여 관광학부 내에서만 매년 20여명의 학생들이 어학연수를 떠날 만큼 실용회화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성적표로 대변되는 이른바 '죽은 지식'은 호원대에서 결코 환영받지 못한다. 내 집 같은 학교, 「첨단 주거형 캠퍼스」 도심에서 떨어져 호젓한 전원에 위치한 캠퍼스의 교육환경은 또 하나의 경쟁력이다. 나지막한 산세를 등에 엎고 자리한 교정의 맑은 공기와 쾌적한 자연환경은 학생들이 자랑하는 가장 큰 강의실이다. 교내에 조성된 호수와 산책로는 신축된 건물들과 함께 하나의 리조트를 방불케 한다. 인터뷰에 이어 강 총장이 직접 캠퍼스를 안내하며 소개한 기숙사와 학생식당 그리고 샤워장과 헬스시설에 이르기까지 교내 곳곳에 갖추어진 각종 복지시설도 수준 급이다. - 캠퍼스 구성 자체가 매우 치밀한 계획에 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학을 이전하면서 특히 역점을 두셨던 부분이 있습니까? 『보시면 알겠지만 저희 대학은 5년 전에 새로 이사를 온 캠퍼스입니다. 대학을 이전하면서 건설비용은 더 들었지만 캠퍼스를 가장 아늑하고 편리하게 만드는데 초점을 두었습니다. 지역 출신의 학생들도 많지만 서울, 경기를 비롯해서 수도권 출신의 학생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마치 집에서 다니는 것처럼 학교를 「첨단 주거형 캠퍼스」의 개념에 부합되도록 조성하고자 했지요. 그 동안의 노력 덕택에 모든 방문객과 학부모님들이 캠퍼스에 대해 매우 좋은 평가를 주고 계십니다.』 강 총장은 지난 97년 캠퍼스 이전 직후 호원대가 추진한 첫 번째 사업은 대학을 「종합생활문화공간」으로 육성하여 우수한 교육여건과 면학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있었다고 설명한다. 이후 호원대는 교육의 질적 향상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모아 「호원비전 2010」이라는 대학의 중장기발전계획을 수립해 놓은 상태다. 2010년께는 전북 최고의 사립명문으로 도약하겠다는 포부도 숨기지 않는다. 강 총장이 일축한「작지만 강한 대학」은 호원대를 소개하는 가장 적절한 정의다. 최 홍 취재팀장 choihong@ihanyang.ac.kr 학력 및 경력 1975 대광고등학교 졸업 1979 한양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1986 미국 New York Pace Univ., MBA 1996 한양대학교 경제학박사 1988-99 전북산업대 사무처장·기획실장 1996 전북산업대 특임대우교수 1998 호원대 부교수 1999 호원대 부총장 2001-현 호원대 총장

2002-05 22

[동문]`공익 우선하는 삶, 평생을 떳떳하게 사는 길`

공익 우선하는 삶, 평생을 떳떳하게 사는 길 "돈 많이 벌고 싶으면 공직생활 피해가라" "젊은 사무관부터 청와대까지 사고가 굳어져 있다. 정부의 관료체계가 군(軍) 관료체계와 똑같다." 공정하고 객관적인 공무원 인사와 인사제도의 개혁을 위하여 국민의 정부 들어 처음 신설된 중앙인사위원회 김광웅 초대 위원장의 이임사 한 대목이다. '공무원 조직의 상상력과 창의력 실종'을 개탄한 그의 이임사는 공직자들이 듣기에는 그야말로 '기절초풍'할만 하다. "공직 인사에 혈연·지연·학연 등이 혈액의 흐름을 막는 혈전(血栓)처럼 끼어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국민의 정부가 추진한 개혁의 성과마저도 한순간에 빛이 바래는 느낌이다. 임해종 동문(법학과 81년졸)을 만나러가는 날 열린 국무회의에서는 공무원 정원을 6백여명 늘리는 것을 의결했다. 언론에서는 대번 국민의 정부가 약속한 '작은 정부'에 역행하는 조치라며 비판했다. 중앙인사위원장의 이임사도 그렇고, 공무원 증원 계획에 대한 언론의 비판을 생각하니 '작지만 효율적으로 국민에게 봉사하는 정부'를 만들기 위해 신설된 기획예산처 정부개혁실에서 개혁업무에 주력하고 있는 임 동문을 만나러가는 길은 이래저래 심난했다. 공공부문 개혁은 행정 효율이 핵심 정부개혁실에 들어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40대 중반의 푸근한 인상의 사나이가 곁으로 다가왔다. 정부개혁실 행정1팀장 임해종 동문이었다. 임 동문은 평소 공무원들의 모습에서 느꼈던 딱딱하고, 고압적이며 엘리트적인 '관료'의 인상보다는 퇴근후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이웃집 아저씨(?)에 더 가까웠다. IMF 구제금융의 부담을 떠 안고 출범한 현 정부가 노동과 금융, 기업 그리고 공공부문의 4대 개혁을 천명한지 4년이 넘었다. 그 작업의 성과를 결산하는 시점에서 공공부문의 개혁이 가장 부진하다는 비판이 언론뿐만 아니라 국민들 사이에서도 계속적으로 제기돼 온 것이 사실이다. 이에 대해 임 동문은 공공부문 개혁의 범위를 좀더 명확히 해야함을 역설한다. "공공부문 개혁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정부 산하기관, 공기업을 일하는 분위기로 바꾸는 작업입니다. 선진국에서도 정부개혁이라 함은 자체 정비와 일하는 분위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지요. 그런데 국민들은 조직관리에 한정하지 않고 의료, 사법, 정치, 부패 등의 문제와 같이 생각합니다. 이런 것은 크게 보면 정부 공공개혁 범주에 들어가지만 솔직히 기획예산처 소관이 못됩니다. 정치개혁은 정치인, 사법개혁은 법원이나 검찰이 해야하고 교육, 의료개혁은 교육부와 보건복지부가 하는 일이지요." 임 동문은 국가경영에 대한 평가기관인 스위스의 IMD(Institution of Management Development)가 우리나라의 국가경영 수준을 97년의 세계 30위에서 27위로, 행정효율은 38위에서 25위로 올렸다면서 이는 대대적 개혁의 성과물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국민들의 비판에 마냥 회피하는 것은 아니다. 임 동문은 "좀 억울하기 하지만 뭐라고 반박할 수도 없다"라고 실토한다. 비록 거대한 정부에서 세부적인 일을 담당하고 있지만 크게 봐서 '국민'의 정부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공공의 책임을 느낀다는 것이다. '멸사봉공' 정신으로 쉴 새 없이 내달린 20년 임 동문은 법대 77학번으로 민주당 최고위원인 추미애 동문과는 동기동창이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법대생들이 많았지만 그는 행정고시를 선택해 3학년때 1차, 4학년때 2차에 합격해 81년 총무처 수습행정관으로 처음 공직에 몸담았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경제기획원, 재정경제원 금융정책실, 청와대 경제구조조정기획단 등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재직 중에 영국 서섹스대학에서 국제경제학 석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90년대 경제분야의 주요한 이슈였던 부동산, 선물거래제도, 준조세제도 등 우리 나라 경제기획의 주요 사안은 모두 임 동문의 손길이 배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습'딱지를 떼고 '엘리트' 공무원들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경제기획원을 지원하게 된 동기를 묻자 임 동문은 '왠지 가고 싶어서'라고 대답한다. 타 부서보다 창의적이고 발전적인 일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의욕으로 작용했을까. 임 동문은 그의 20여년 공직생활을 다른 것을 별로 생각할 겨를 없이 '쉴 새 없이 달려왔다'라고 표현한다. 재정경제원과 기획예산위원회를 거쳐 현재의 기획예산처에 이르기까지 각종 재정관련정책과 제도개선, 재정운영 계획수립과 집행관리 그리고 공공부문의 재정개혁과 행정개혁에 관한 사무를 책임지는 업무는 일하는 보람도 많겠지만 그만큼 어려움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법이다. "인원이 250명 정도로 공무원 수로 보면 아주 적은데 할 일은 아주 많은 조직이 기획예산처입니다. 야근도 많고 예산이라는 게 국회 승인이 나야 집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처지이기 때문에 힘든 게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정부개혁실도 '떡 하나 더 주기 보다는 더 많이 먹는다고 뺏는 일을 하는' 곳이라 할 수 있지요. 그래서 겉보기와는 달리 화려하지도 않고, 별로 환영받는 조직도 아닙니다. 일을 처리할 때 불편부당하지 않도록 조절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요." "어떤 위치까지 왔냐구요? 아직 졸병이죠 뭐" 임 동문이 생각하는 공직 생활은 '멸사봉공(滅私奉公)'으로 압축된다. 모든 일에 대한 판단 기준을 공익성에 두다 보면 가장 보람있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사람은 공직생활이 절대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정부자체 개혁의 일환으로 학자금 무상 지원을 폐지하고 퇴직금도 줄었습니다. 월급도 초봉과 지금을 비교해 보면 크게 오르지도 않았습니다. 일하는 것도 공공성을 앞세우다 보니 효율성보다는 민주적이고 합법적인 절차를 많이 따지게 되죠. 10년 정도 공직에서 일하다 보면 민간 부문 종사자와는 일에 접근하는 방법이 확연하게 달라집니다. 어떤 일을 해서 자기 조직에 얼마나 많은 이익이 들어오느냐 보다는 국민전체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때문에 평생 떳떳하게 살아가는 방법이 될 수 도 있지요. 능력을 발휘해서 성취감을 느끼고 명예까지 얻을 수 있는 삶, 공직자가 누릴 수 있는 행복입니다." 뚜렷한 공직관을 지닌 젊은 관료에게 인생관이랄까 뭐 거창하지는 않지만 인생철학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임 동문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저는 그런 것에 대해선 할 이야기 없는 사람인데요. 이건 생략합시다. 자식에게도 어떤 철학을 가지고 살라는 이야기를 못하는데요 뭘. 그런 거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직 성숙되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직생활 20년이면 이제 중고참이다. 고시를 통하지 않은 공무원들이라면 평생동안 근무해도 오르기 힘든 4급 서기관이다. 하지만 임 동문은 스스로를 여전히 '졸병'이라고 말한다. 정권말기가 가까워오면서 벌써부터 '복지부동'이니 '줄서기'니 하는 공직사회의 고질적인 병폐가 재연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는 지금, '공무원 조직의 상상력과 창의력이 실종됐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시점에서 만난 임 동문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충실한 '공복(公僕)'의 모습 그것이었다. '졸병' 서기관 임해종 동문의 정부개혁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서용석 학생기자 antacamp@ihanyang.ac.kr 임해종 동문은 누구? 임해종 동문은 77년 본교 법학과에 입학해 80년 24회 행정고등고시에 합격했다. 87년부터 94년까지 경제기획원(행정사무관), 94년부터 96년까지 재정경제원 금융정책실(서기관)에서 근무했다. 이후 충남도청 경제협력관, 재정경제부 경제홍보기획단 국내홍보과장, 청와대 경제구조조정기획단 국민경제자문회의 사무처를 거쳐 지난 2001년부터 기획예산처 정부개혁실에서 재직하고 있다. 재정1팀장을 거쳐 현재 행정1팀장을 맡고 있는 임 동문은 92년 영국 서섹스대학에서 국제경제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대통령표창(93년)을 수상한바 있다.

2002-05 15

[동문]21세기 신인재 기른다 안동대 권영건 총장

"훌륭한 전통과 도전적 창조정신 있으면 '위기'는 없다" 글 싣는 순서 ① 충북대 신방웅 총장 ② 강릉대 임승달 총장 ③ 안동대 권영건 총장 ④ 호원대 강희성 총장 ⑤ 동신대 이상섭 총장 ⑥ 삼척대 장태연 총장 경북 안동은 예로부터 '조선인재(朝鮮人才) 반다영남(半多嶺南), 영남인재(嶺南人才) 반다안동(半多安東)'이라 할 정도로 명현거유(名賢巨儒)가 많이 배출된 선비의 고장이다. 퇴계 이황을 비롯하여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등 안동이 배출한 시대의 석학과 그 제자들을 모두 열거하자면 조선 유학의 학문적 계보, 그 자체를 확인하는 작업이 된다. 이러한 학문적 전통을 바탕으로 안동대학교는 경북 남부를 대표하는 국립대학으로서 지식인 양성과 지역 개발의 소임을 묵묵히 수행해 온 학문의 전당이라 자임한다. 전통에 기인한 것인가. 속세에 팽배한 '입신양명(立身揚名)'의 신열을 극복한 것은 비단 퇴계만이 아니다. 『정치인이 되기 위한 과정으로 고향, 안동에 내려와 대학에 몸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현실정치에 뛰어들어 보니까 생리적으로 맞질 않아요. 그래서 수단으로서 택했던 학문을 천직으로 삼아 지금까지 왔습니다.』안동대학교 제3대 총장 권영건 동문(정외 64학번)의 말이다. 국내 유일무이한 국학의 전당 [인터뷰 동영상보기] 권영건 총장은 정외과 64학번이다. 이후 연세대와 고려대를 거쳐 다시 모교에서 박사 과정을 밟았다. 1983년 안동대 행정과 교수로 부임한 이후 2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고향에서 묵묵히 학자의 길만을 걸어온 이른바 '선비'의 대표적인 표상이다. 그렇다고 그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전통적 가치만으로 동시대 학문적 요구와 시대적 수요를 외면하고 있다는 생각은 큰 오산이다. - 안동은 조선유학과 선비문화를 대표하는 학문의 고장입니다. 민속학과 한문학 등 안동대의 특화된 분야가 이를 반증합니다만. 『물론 지역·문화적으로 유교문화의 오랜 전통을 가진 고장이기 때문에 한국학, 동양철학, 한문학, 민속학 분야 등 국학이 발전했습니다. 특히 민속학은 우리나라에서 하나밖에 없는 분야입니다. 그래서 굉장한 인기를 얻고 있는 학과입니다. 그리고 이 지역의 70%의 주민들이 농업에 종사합니다. 이런 주민들의 경제적 입장을 생각해서 농학계열을 특성화했고 4년 전부터 국책대학으로 인정받아 매년 60억 정도를 지원 받고 있지요.』 - 너무도 당연한 까닭에 세계화, 정보화에 대한 요구가 벌써 진부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만 전통을 계승하는 것 외에도 대학에 대해 현재 급변하는 사회적 요구는 보다 다양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국학이나 농학만이 안동대의 경쟁력은 아닙니다. BK21 사업에 본교 기계공학부가 참여해서 지난해 평가에서 전국 4위를 차지했습니다. 기계공학분야에도 저희 대학의 경쟁력이 만만치 않습니다. 앞으로는 지역의 특성을 감안해서 환경분야나 한의학 등 다양한 부분을 특성화시켜 발전시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제화, 세계화라는 시대적 흐름이 있는데 뭐 한국학 쪽의 고유분야는 당연히 특성화해야 하지만 중소도시에 있는 대학으로서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오히려 정보화, 세계화에 적극적으로 부응하는 것이 생존력이다 하는 생각입니다.』 '선비'는 지금 비즈니스 중 그는 전통과 창조의 관계에 내재한 역동성을 누구보다 잘 인식하고 있다. 이른바 선비의 표상이던 권 총장이 국내 교육계 내에서 최고의 '비즈니스 총장'이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는다는 사실은 이러한 역설을 잘 반증한다. 안동대가 최근 3백 20억원의 국고지원 예산을 확보해 전국 국립대 최대 규모의 기숙사 신축과 제2도서관, 국제관 등 대규모 교육시설 확충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권 총장의 적극적인 비즈니스 마인드에 기인한 성과라는 데 아무도 이견을 달지 않는다. 권 총장이 지원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김덕중 전 교육부총리를 만나 '시골 출신 학생들에게 더욱 최고의 대우를 해 주고 싶다'며 함께 눈시울을 적셨던 일은 많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숨겨진 일화다. 한정된 국고 예산으로 대학을 운영해야 하는 지방 국립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점잖던 '선비'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이다. - 지방 국립대가 지닌 어려움 중 가장 큰 것이 예산의 문제라는데 공통된 인식이 있습니다. 안동대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재정문제는 이른바 다다익선이라고 하는데 지역이 중소도시이고 주민들의 경제적 상태가 좋지 않아서 저희대학은 발전기금을 모으는데 상당한 제약이 있습니다. 그리고 국립대학 자체가 수익사업을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아서 자체 사업으로 재정을 확충할 방법이 없습니다. 등록금도 정부에서 가이드라인을 제한해서 마음대로 올릴 수 없지만 장학금은 전교생의 40% 이상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국립대학이니까 정부에서 세웠으니까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으로 정부 관계 부처에 적극적으로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지난 3년 동안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사업을 진행하는데 큰 불편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현재 안동대가 건설 중인 12층 규모의 제 2기숙사는 골조공사가 완료된 상태다. 건물 내외부를 모두 대리석 자재로 마감하고 각 실마다 화장실과 샤워시설을 따로 갖춘 호텔급 기숙사가 될 것이라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학생들의 기숙사치고 너무 사치스런 면이 있지 않느냐는 지적에 권 총장의 답변이 명쾌하다. 교수들을 위한 시설을 이토록 화려하게 한다는 것은 비난의 여지가 있지만 학생들을 위한 시설을 최고로 만들겠다는데 무슨 논란이 있을 수 있냐는 것이다. 더욱이 안동대 소속 학생의 대부분이 농촌 출신임을 감안할 때 '농부의 자녀'들에게 도회보다 훌륭한 최고의 시설을 제공하고 싶다는 그의 취지를 듣고 나면 대개가 숙연해지기 마련이다. 5개 대학 통합한 '대구경북국립대학교' 추진 21세기의 '선비'는 한학은 물론 양학과 컴퓨터에도 조예가 깊어야 하는 것인가? 안동대의 영어 관련 커리큘럼과 컴퓨터 교육은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다. 이는 학생들의 해외 진출에 대한 권 총장의 각별한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 국학의 중심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안동대는 해외 인턴쉽 제도를 비롯한 국제화 프로그램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영어는 학생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경쟁력입니다. 본교에는 현재 19명의 외국인 교수가 있습니다. 전교생이 3년 동안 영어회화, 토플, 토익을 필수과목으로 이수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컴퓨터 수업도 1년 과정의 필수로 지정되어 있어서 학점을 이수하지 못하면 졸업을 하지 못합니다. 이런 면에서 안동대 학생이라면 영어와 컴퓨터에 있어 어느 정도의 수준을 갖춘 것으로 자부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재학생들의 해외 경험을 유도하기 위해 3년째 해외 인턴쉽 사원을 파견하고 있습니다. 해외의 기업에서 6개월 혹은 1년간 일을 하고 돌아와 학점을 인정받는 것입니다. 작년도에 일본의 자스넷 회사와 제휴하여 19명의 학생들을 그곳에 취업시킨 성과도 있습니다. 앞으로는 4, 50명까지 확대할 생각입니다.』 지방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안동대의 노력은 비단 커리큘럼과 학사제도 개혁에 그치지 않는다. 현재 안동대는 상주대, 금오공대, 경북대, 대구교대 등 대구·경북 지역의 5개 대학을 통합한 종합 국립대학 건설을 주도적으로 추진 중이다. 이러한 사업의 배경에는 국립대학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만큼 그 운영에 있어서도 가장 효율적인 형태를 갖춰야 한다는 권 총장의 생각이 깔려있다. 지방 국립대간 유사학과 통합과 시설 및 학제간 교류를 극대화하여 예산의 중복 지출을 막고 연구와 교육의 효율을 극대화한다는 것이다. - 대구·경북국립대학(TKNU) 건설 사업은 현재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지방대의 경쟁력을 강화시켜야겠다는 생각으로 미국의 위스컨신 주립대학과 캘리포니아 주립대의 모델을 가지고 대학간 통합 기획안을 교육부에 제출했습니다. 대구·경북지역의 5개 대학간에 교수와 학생, 직원간의 교류 및 공동연구 그리고 도서관 등 학교 제반 시설을 공동으로 활용하는 것은 물론 유사학과의 통폐합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금년도까지 사업 기반을 조성하고 2005년까지는 기반 강화, 2010년도에 교명을 '대구경북국립대학교'로 통합하면서 캠퍼스는 5개로 나누어지는 모델입니다. 지금은 사업의 성공여부를 확신할 수 없지만 관건은 5개 대학 구성원들의 의지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여하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저는 이러한 프로그램이 전국의 국립대학이 나아가야 할 확실한 지표라는 생각입니다.』 21세기적 선비정신은 '사랑의 실천' 정치학을 전공한 정치학도로서 '입신양명(立身揚名)'의 뜻을 접고 후학 양성의 길을 택한 권 총장에게 시국에 대한 세평을 물었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높은 의식수준을 후진적인 정치인들이 따라오지 못한다'는 날카로운 일침이 곧장 되돌아온다. 이 시대에 필요한 '선비정신'이란 무엇인지 다시 물었다. 『한양대학교의 교시가 사랑의 실천 아닙니까? 그런데 저는 학교를 다닐 때나 젊어서 이 교훈을 깊이 음미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생을 조금씩 살면서 나이도 들고, 경륜이 쌓이다 보니 지금에 와서야 이 말이 지닌 진정한 가치를 깨닫습니다. 그래서 한양인의 도덕적 기반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도덕적 기반이자 가치 있는 규범으로 생활해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최 홍 취재팀장 choihong@ihanyang.ac.kr 학력 및 약력 1968 한양대 정치외교학과(학사) 1973 연세대 행정대학원 외무행정(행정학석사) 1977 고려대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교육학석사) 1986 한양대 대학원 정치학과(정치학박사) 1974-83 가톨릭상지대 전임강사·조교수·부교수 1983-91 안동대학교 행정학과 조교수·부교수 1986-88 미국 애쉬랜드대 교환교수 1991-99 안동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1995.1-95.12 한국정치학회 이사 1995-96 안동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소장 (현) 학교법인 경일학원 이사장 (현) 안동대학교 총장

2002-05 08

[동문]우리 문화 보급의 첨병 박형식 정동극장장

공익성ㆍ수익성 조화로 극장 내실 다져 "예술가이자 경영자인 삶도 조화시키고파" '최근 일요일을 맞아 서울 정동극장을 가족과 함께 찾았다. 매표소 입구에서 한복을 차려입고 입장객들에게 정성을 쏟는 직원들에게서 상쾌한 기분을 느꼈다. 산조 합주를 비롯해 부채춤, 사물놀이와 관현악 연주, 판굿 등 우리의 전통예술에 흠뻑 취했다. 한글과 영어·일어 자막서비스는 물론 출연자와 신명나는 뒤풀이 한마당과 출연자와의 기념촬영은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문화상품으로 손색이 없었다. 해외에도 널리 알려졌는지 외국인들이 성황을 이루어 보기에 흐뭇했다. 왜 이런 곳을 진작 몰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전 모 일간지 여론면에 실린 독자투고글이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객석 4백석 규모의 작은 공연장인 정동극장의 진면목을 알기에 이 글에서 빼고 더할 것이 없다. '고객편의주의'를 표방하는 극장의 철저한 서비스 마인드와 전통예술공연을 통해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겠다는 극장장의 경영철학이 관객의 눈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수익성과 공익성을 조화시키는 게 경영목표 기자가 찾은 지난 4일에도 극장 내 쌈지마당에는 어린이날을 하루 앞두고 아이와 함께 아동극〈강아지똥〉을 관람하러온 주부들은 물론 이제 막 회사를 마친 직장인 그리고 외국인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쌈지마당을 지나 찾아간 극장장실은 채 5평도 채 되지 않아 보였다. 이 작은 사무실에서 한해 15억의 공연 수입을 올리는 '작지만 큰 극장' 정동극장의 경영전략과 공연기획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박형식 동문(성악 78년졸)이 지난 2000년 3월 신임 극장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문화계에서는 기대반 호기심반의 시선을 보낸바 있다. 95년 문을 열 당시만 해도 연간 9천만원에 불과하던 극장 수입을 5년만에 17억원으로 끌어올려 '스타 극장장 시대'를 연 홍사종(현 숙명여대 문화관광과 교수) 전임 극장장이 워낙 매스컴의 주목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위의 시선을 의식한 듯 취임 당시 박 동문은 "전임 극장장이 너무 잘해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라면서 "조금씩 변화와 새로운 색깔을 더해나가겠다"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인바 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 박 동문은 과거의 부담감을 얼마나 떨쳐버렸을지 궁금했다. "극장이 수익성을 너무 따지면 공익성이 약해지고 또 공익성을 강조하면 수익성이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최근 저희 극장이 적극적인 마케팅을 통해 많은 수입을 올린 것으로 유명해졌습니다만 저는 정부에서 운영하는 극장이니만큼 공익성도 잘 살려나가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익과 공익을 조화시키는 것이 저의 경영목표입니다. 아직 부족한 부분도 있지만 잘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동극장은 95년 국립중앙극장 분관체제로 문을 열었다가 97년 국가가 운영비를 일부만 지원하는 민간위탁방식으로 전환한 문광부 산하 공공법인이다. 박 동문은 정부가 좋은 위치에 극장을 지어 운영하도록 한 것은 공익성에 더 비중을 두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수익만을 생각했다면 차라리 사무실을 지어 임대료를 받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라는 그는 좋은 볼거리를 문화상품으로 만들어 사람들의 정신적인 고통을 어루만져줌과 동시에 좋은 배우와 작품을 발굴, 개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확대된 전통예술공연, 외국 관광객에게 인기 비록 전임자의 성과이긴 하지만 정동극장은 민간 기업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될 정도로 독특한 경영기법과 마케팅 전략으로 우리 극장문화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유리도 없이 훤하게 트인 곳에서 표를 살 수 있도록 한 열린 매표소, 주부와 가족 관람객을 배려한 어린이 탁아소, 관객들이 공연을 기다리면서 무료함을 달랠 수 있도록 마련한 화랑 등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여타 극장들이 쉽게 도입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직장 여성을 위해 모포를 나눠주고 음악을 감상하게 한 낮잠상품과 겨울철 야외 공연시 군밤을 나눠준다거나 1천원짜리 커피를 제공하는 등의 '깜짝 이벤트'는 신선하다 못해 충격적이었다. '그곳에 가면 뭔가 즐거운 것이 있다'라는 관객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줌과 동시에 이들로부터 받은 사랑을 보다 양질의 공연과 문화예술 프로그램으로 되돌려줘야한다는 것이 박 동문의 생각이다. 이러한 박 동문의 생각은 전통예술공연의 확대를 통해 엿볼 수 있고 앞으로 운영할 문화센터를 통해 보다 구체화될 것으로 보인다. "99년까지 주 2회 운영해왔던 전통예술공연을 2000년 4월부터는 주 6회로 늘렸습니다. 이 상설국악공연에는 지금까지 3만명 이상이 관람했는데 전체 관람객의 80% 가량이 외국인이에요. 월요일을 제외하고 오후 8시 극장앞에는 어김없이 관광버스가 서 있습니다. 외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국전통문화를 보급하는 첨병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자부합니다. 러시아의 볼쇼이극장과 같은 세계적으로 이름난 극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더욱 더 노력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문화 인프라가 취약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문화적 소양을 기를 수 있는 기회를 얻기가 매우 힘든게 사실이다. 특히 주5일제 근무제가 도입되어 여가시간이 크게 늘어나면 사람들의 문화적 욕구 또한 증가하기 마련이다. 물론 각 구청마다 문화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고, 각종 사설 문화센터가 속속 생겨나고 있기는 하지만 문화예술기관이 앞장서서 국민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줘야한다는 것이 박 동문의 지론이다. 악기도 배워보고, 직접 연기를 해보는 등의 체험을 통해 길러진 문화적 소양이 결국 연극, 공연관람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 극장측으로서도 '밑지는 장사'는 아닌 셈이다. "음악은 나의 운명 …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할 뿐" 극장의 경영자이기 이전에 박 동문은 성악가이다. '명태'라는 노래로 유명한 바리톤 오현명 전 음대 교수로부터 사사받은 그는 20여년간 서울시립합창단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각종 오페라에서 주역으로 활약했고, 많지는 않지만 홀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는' 성악가의 길이 아닌 '예술경영'이라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다. 왠만한 음대생이라면 다 간다는 외국 유학을 마흔살을 훌쩍 넘긴 나이에 다녀온 박 동문이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면서 느낀 게 있다면 '나오지 말았어야 좋았을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성악을 전공했다고 해서 모두 성악가로 살수는 없습니다. 무대, 조명, 음향 등을 성악과 출신이 하지 못하란 법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실력이 있건 없건간에 유학도 가고, 그것에만 매달립니다. 예술경영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는 성악가 출신이 이런 극장을 맡으면 부정적으로 보았던 게 사실입니다. 지금도 여전하지만 많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스스로 이 분야에 대해 문의도 하고, 관심이 부쩍 늘고 있다는 게 피부로 느껴질 정도니까요." 어렸을 때 소풍을 가면 꼭 노래를 불렀다는 점, 학창시절 음악선생님이 꼭 수업시간에 독창을 주문했다는 점을 회고해볼 때 음악을 하라는 운명을 타고났던 것 같다는 박형식 동문. 매 시기에 요구되는 일을 열심히 하다보니 지금의 자리에까지 왔고, 임기가 끝나면 기다리고 있을 또 다른 일을 즐겁게 해 나갈 뿐 현재에 충실하겠다는 그는 앞으로도 돋보이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꼭 필요한 존재, 화려하기보다는 소중한 존재가 되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갈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전임 극장장 못지 않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정동극장문을 나설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를 가져보게 된다. 서용석 학생기자 antacamp@ihanyang.ac.kr 박형식 동문 학력 및 약력 바리톤 박형식 동문은 지난 78년 본교 음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서울시립합창단에 입단해 수석단원, 기획실장, 단장을 역임했다. 86년에는 단국대학교 대학원 성악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89년 중앙대 예술행정대학원을 수료했다. 95년부터 97년까지 이탈리아 리노로타 음악원에서 지휘와 성악을 공부했다. 국립오페라단 '원효대사', '세빌리아의 이발사, 김자경오페라단의 '카르멘' 등 다수의 작품에 주역으로 출연했으며 두차례의 독창회를 열었다. 서울시장 표창과 중구문화예술상(2001년)을 수상한 바 있다.

2002-05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