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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 30

[동문]불온한 상상력을 꿈꾸다

"세상에 만족했다면 글을 쓰지 않았을 거예요." 할리우드 영화의 좀비는 인간을 사냥한다. 느리지만 집단으로 뭉치면 매우 위협적인 그들. 이런 좀비의 속성을 노동자에 비유하는 사람,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 같은 히어로물을 보면서 연금조차 받지 못할 그들의 말년을 상상하는 사람이 있다. 환상 문학 속에 사회의 어두운 단편을 녹여내는 작가 이서영(국문.05) 동문. 스스로를 서슴없이 ‘소설 쓰는 사회주의자’라고 칭하는 이다. ‘팬픽’으로 시작한 글쓰기 인생 이 작가는 조부모의 손에서 컸다. 친구가 별로 없던 이 작가에게 책이 친구가 돼줬다. 삼국지를 비롯, 역사책과 소설책을 닳도록 읽으며 밤을 지새웠다. 당시 읽었던 책들은 고스란히 창작의 밑거름이 됐다. “한창 ‘새롬 데이터맨 프로’ 같은 PC통신이 유행했었어요. 그 때 중학생이었는데 남들이 소설을 쓰는 걸 보면서 저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죠. 어렸을 때 좋아하던 삼국지의 팬픽(Fan-fic: Fan과 Fiction의 합성어로 자신이 좋아하는 유명인이나 유명작품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을 PC통신에 연재한 게 제일 처음 쓴 소설이었어요.” 이 동문은 패러디 소설을 연재하면서 글 쓰는 재미를 찾았다. 책을 읽는 것은 유희였지만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창작의 고통을 알게 됐다. “제가 소설을 쓰는 과정은 단순해요. 사회에 대해 고통스럽게 느끼는 부분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그것을 잘 다듬는 거죠.” 그녀에게 소설은 ‘말하고 싶어 넘쳐흐르는 것을 토해내는 작업’이다. “세상을 말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어요. 칼럼이나 대자보는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을 이성적으로 고찰하는 형태인데, 소설은 그 혼란스러운 소용돌이를 그대로 드러내는 거예요. 내면의 혼란과 모순을 날 것 그대로 내놓는 거에요. 적어도 논설문보다는 비이성적이죠.“ 장르문학의 매력에 빠지다 이 작가는 학창시절에 참여한 백일장 대회 수상경력을 인정받아 문학특기자로 우리대학 국문과에 입학했다. 국문과 내 소설학회는 이 작가가 장르문학에 빠져드는 계기가 됐다. “청소년 시절 팬픽을썼는데도 대중문학에 대한 일종의 편견이 있었어요. 그런데 소설학회에 들어가니 선배들이 다 대중문학을 쓰더라고요. 대학에 와서야 그 영향으로 장르문학에 눈을 뜨게 됐죠. 판타지 소설이나 추리 소설 같은 장르 문학을 정말 많이 봤어요.” 장르문학의 매력은 ‘장르문학의 문법 자체’에 있다는 이 동문. “김용 작가의 무협소설을 보면 주인공이 성장하는 과정이 뚜렷하게 보여요. 주인공이 무공을 익히고 성장하면서 강한 적을 물리쳐요. 이런 일관된 플롯이 있고 그 과정이 반복되는데, 장르문학 독자들은 그 뻔한 과정에서 쾌락을 느끼는 거에요. 어떻게 보면 유치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 반복에서 생기는 몰입도가 큰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이 작가는 본인의 전문인 환상문학은 ‘일상의 비일상화’라고 얘기했다. “단순히 일상에서 겪는 일을 쓰는 것과 그 일상을 환상에 접목해 썼을 때의 울림은 전혀 달라요. 환상문학은 내가 겪는 일상이 삼 천 광년 떨어진 우주에서 벌어질 때의 느낌을 전달해줄 수 있어야 해요. 나 하나의 경험을 우주적으로 확장시키는 데서 오는 경이로움이죠. 그 경이로움에서 오는 통찰은 환상문학의 큰 매력이에요.” 운동가의 삶과 소설가의 길 스스로를 ‘맑시스트’라고 생각하는 만큼, 운동가로서의 정체성은 이 작가의 일부다. 이 작가는 “2007년 뉴코아·이랜드 투쟁을 계기로 본격적인 운동권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이랜드 투쟁이 발생하고 나서 제가 지금까지 고민해왔던 섹슈얼리티 문제들이 실제 노동자들의 삶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고민하게 됐어요.당시 총학생회와는 노동운동 지향점이 달라서 학생조직에 들어가진 않았지만 독자적으로 여성운동을 시작했어요. 다른 학교 사람들과 연대활동을 한다든가 포럼에 참여한다든가.” 이 작가는 글 솜씨를 살려 대자보를 썼다. 매일 집회에 나가면서도 문학특기자 장학금 유지를 위해 수업 출석도 잊지 않는 모범생이었다. “이 세계의 핵심적인 문제들은 체제가 변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저는 세상을 직접적으로 바꾸는 활동가는 못 돼지만 세상을 반영하는 유희를 보여주는 일을 하면서 살 거에요.” 여성운동가로서의 지난 경험은 이 작가의 소설 깊이 스며들어 있다. 『악어의 맛』에 실린 단편 「히스테리아」는 여성의 낙태할 권리에 대해 말한다. “사실 한국에서 낙태의 자기결정권 논쟁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어요. 2009년에 ‘프로라이프의사회’에서 ‘낙파라치’ 문제가 대두되면서 낙태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죠. 낙태는 대학생들도 가까이 접할 수 있는 문제에요. 그와 동시에 한 여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문젠데, 우리는 그 이야기를 금기시하죠. 내가 낳을 수 없다고 스스로 결정했는데, 남이 낳으라고 강요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내 몸인데. 낙태문제를 다룬 다른 작품들을 보면 죄다 낙태를 부정적으로 다루고 있어요. 하면 안 된다는 교훈적 내용이 대부분이죠. 여성에게 모든 죄책감을 덮어 씌우는 거에요. 내가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질 권리가 있는 거에요. 여성의 몸은 그릇이 아니죠.” 이 작가는 섹슈얼리티에 대해 노골적으로 다루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학부생시절 가장 처음 쓴 소설은 “브래지어에 깃든 망령”에 관한 것이었다. 소설 속 브래지어는 여성억압의 상징이다. 소녀는 브래지어에 깃든 악령에게 점점 자신의 의식을 빼앗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시선 때문에 브래지어를 포기할 수 없는 소녀를 그렸다. 장르문학적 장치로 민감한 주제를 재치 있게 풀어내는 것은 이 작가의 전매특허다. ‘이기적인 삶’을 사는 소설가, 제일 늦은 걸음까지 본다’ 국문과는 “굶는과”라는 우스갯소리. 아무리 문학에 대한 열망이 커도 소설가를 업으로 삼는 결정은 쉽지 않다. 이 동문은 어떻게 확신했을까. “저는 딱히 미래에 책임감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어요. 현실적인 밥벌이를 생각했다면 흥미와 관계없이 교직이수라도 했을 텐데 그러고 싶진 않았어요.” 이 작가는 소설을 쓰는 것이 ‘이기적’이었다고 얘기했다. “현실적인 문제를 외면한 거죠.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을, 소설을 쓰고 싶은 이기적인 ‘내’가 이겨야 하는 거에요. 아무리 가난해도, 가난에서 탈출하려는 욕구가 강해도 상관없이 글을 쓰고 싶은 ‘내’가 이겨야 해요. 저는 졸업 후에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조교를 하면서 논술학원에서 일하고, 밤에는 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미친듯이 돈을 벌면서 학비를 벌었죠. 말하자면 몸이 편하고 싶다는 마음보다 글을 쓰고 싶다는 ‘이기심’이 이긴거에요.” 자신을 “소설가로서의 정체성과 운동가로서의 정체성이 공존하는 사람”이라 표현하는 이 동문. 하지만 문학을 운동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 “활동가는 제일 앞에서 가야할 길을 비추고, 전략을 제시하고, 어떻게 세상을 바꿀지 이야기해요. 하지만 소설가는 제일 늦게 오는 걸음까지 보는 사람이에요. 에너지로 세계의 모순을 돌파하는 건 활동가의 몫이지만 그 모순을 이해하는 것은 소설가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이 작가는 소설가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쓰고 싶을 때는 써야한다”라고 조언했다.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아니라,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겠다는 갈망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어떤 글이든 쓰기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한다고 충고했다. 잘 쓴 프롤로그 백 편 보다는 조잡한 완성본 한 편이 낫다는 것. “같이 글을 쓰는 사람을 만나서 조언을 듣는 것도 초보 작가들에게는 좋은 자양분이 돼요. 중요한 건 끝을 보는 거죠. 무라카미 하루키는 ‘원고료는 받으면서 느는 것’이라고 했어요. 높은 문학적 이상에 능력이 안 맞는다고 좌절하지 말고 차근차근 성장해 나가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김선희 학생기자 pdg10@hanyang.ac.kr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박보민 사진기자 marie91@hanyang.ac.kr

2014-03 28

[동문]듣고 싶고 담고 싶은 서툰 말

심심치 않게 ‘웃프다’고들 한다. 웃기면서도 슬플 때 쓰는 말인데 강백수(05·국어국문학)의 노래 ‘타임머신’을 듣던 순간이 딱 그랬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일에 한창이던 30대의 아버지와 건강하던 지난날의 어머니를 만나고 싶다던 그는 ‘엄마를 만날 수는 없겠지만, 지금도 거실에서 웅크린 채 새우잠을 주무시는 아버지께 잘해야지’라며 노래를 마친다. 꽤 오랫동안 감도는 여운에 대한 답은 그를 만나 얻었다. “원래 웃으면서 하는 이야기가 더 슬픈 법이잖아요.” 글 최정순 | 에디터 송유진 | 사진 최은영 ▲ 시인·가수 강백수(본명 강인수/05·국어국문학) 문학 Talk, 시인의 ‘아이 해브 어 드림’ 2008년 ‘시와 세계’로 등단한 시인. 국어국문학과 졸업 후 현재는 대학원에서 현대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문학도. ‘음악으로 읽는 소설’이라는 평과 함께 지난해 1집 ‘서툰 말’을 발매한 싱어송라이터. 이것이 강백수의 약력이며 명함이다. 어렸을 때부터 매사 목표를 세워 착실하게 이루어왔던 그는 3월 산문집 <서툰 말>을 세상에 내놓는다. 지난해 여름에 선보인 1집 앨범과 같은 제목이다. “그동안 써온 칼럼과 습작들을 다듬고 보완한 것에 새로운 이야기를 좀 더 추가했어요. 오롯한 강백수, 아니 강민구(그의 본명이다) 자체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죠.” 무표정하게 있으면 왠지 과묵해 보이는 첫인상과는 달리 그는 팬들과의 소통에도 열심이다. 최근 산문집의 표지를 고민하다가 트위터에 후보 시안을 올려 팬들의 투표로 최종 표지를 결정했을 정도다. “초등학교 때 일기 쓰는 것이 싫어서 잔머리를 굴렸어요. 일기장에 동시를 써냈거든요. 야단맞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선생님께서 칭찬해주시는 거예요. 그때부터 시인이 되겠다고 결심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글을 쓰는 것이 좋았고 게다가 잘 쓰기까지 한 강백수가 글 쓰는 삶을 선택한 건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결과였다. 그는 주저 없이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고 시인이 되었다. “시는 활자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가지고, 저로 하여금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게 해줘요. 그것이 계속 시를 쓰고 싶게 만드는 이유죠.” 음악 Talk, 이게 다 ‘하헌재 때문이다’ 학창 시절 요란한 말썽이나 사고를 몰랐던 그는 고등학교에 들어가 밴드를 접하면서 평탄했던 삶도 선회했다. “처음으로 밴드를 같이하자고 꾀었던 하헌재라는 친구가 있어요. 시간이 지나 저는 음악 하는 사람이 됐고 그 친구는 회사에서 인턴 생활 중이에요.” 그는 친구 때문인지 덕분인지 ‘내가 참치 못 사 먹고 참치김밥먹는 거 하헌재 때문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밴드 하자고 꾀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난 공부해서 취직하고 떵떵거리며 살 텐데’라는 거침없는 가사의 ‘하헌재 때문이다’를 만들었다. 음악을 선택해도, 선택하지 않았어도 후회했을 것이라는 강백수는 술자리에서 친구나 주변 사람들의 세상 사는 이야기를 수집한다. “음악 하는 저에게 직장생활 하는 지인들의 경험은 특별한 재료가 되죠. 이전에는 주로 제 안의 기억을 꺼내서 노래로 만들었어요. 대입 수능을 마치고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가슴 아픈 일을 겪어서 ‘타임머신’을 쓰게 됐지만, 저 또한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이 평범해요. 앞으로는 다른 사람들의 그 평범한 이야기를 노래에 담고 싶어요.” 속마음 Talk, 딴따라의 ‘서툰 말’ 2집 앨범을 구상 중인 음악인 강백수에게 작곡, 노래보다 앞서는 건 다름 아닌 노랫말이다. “저는 솔직한 게 제일 쉬워요. 제 방식으로 ‘생활을 베낀다’고 표현하는데 저만의 창작법이기도 하죠.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제가 느끼지 않은 감정에 대해서는 노래할 수 없다는 사실이에요. 경험하지 않은 감정이나 일에 대해서는 노래할 수도, 글을 쓸 수도 없어요. 적어도 저는 제가 아는 이야기를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노랫말에 공들이는 그는 디테일에서도 좀처럼 타협이 없다. “멜로디는 녹음하다가 바뀌기도 해요. 그런 건 그다지 까다롭지 않지만 가사는 그렇게 되지 않더라고요. ‘타임머신’이라는 노래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가사 중 하나인데, 방송 심의 때문에 수정하면서 갈등을 많이 했죠. 가사에 ‘오뎅’을 넣었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걸 바꾸기가 싫더라고요. 제가 엄마와 사 먹었던 건 어묵이 아니라 오뎅이었거든요. 그렇지만 매번 그럴 수는 없는거잖아요. 여러 상황과 여건을 고려해서 타협하고 절충해가고 있어요.” 내주고 얻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자신만의 해답을 찾아가고 있는 강백수가 놓치지 않는 또 다른 키워드는 바로 ‘딴따라’다. 딴따라가 사회에 이바지해야 한다면 그건 노는 영역에 보태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세상에 흥을 보태고 싶어 2집 앨범은 하고 싶은 대로, 후회 없이 온 힘을 쏟아부어 만들어볼 생각이다. 사람들과의 어울림과 그 시간을 좋아하며 그런 것들로 채워진 자신의 삶을, 그 익숙한 시간을 사람들 앞에 꺼내놓으려니 잘하던 것도 서툴게 느껴진다는 강백수의 서툰 말, 서툰 멋을 지켜보아야겠다. 위 기사는 한양대학교 대표 매거진 <사랑한대 Vol. 217 / 2014년 3-4월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목차 / E-book 보기 바로 가기 ▶ ▶ http://www.newshyu.com/cover/viewContent.php?idxno=104

2014-01 15

[동문]거리를 걷다 발견한 이야기

"다시는 없으리라 생각했던 일들이 일어나는 게 충격이었죠" 말이 넘치는 시대다. 페이스북으로 근황을 전하고, 뉴스 댓글로 갑론을박을 벌인다. 어떤 뉴스에는 하루에도 댓글만 수만 건이다. 시인은 죽고, 논객은 늘었다. 사생활은 없다. 누군가는 죽음의 순간마저 대중에게 소비돼야 한다. 그래서 시가 반갑다. 시는 많은 말을 하지 않지만, 결코 쉽게 말하지는 않는다. 시인은 아껴 말하는 사람이다. 사려 깊게 단어를 들어내고, 문장의 빈 틈으로 독자의 감상이 스미길 기다린다. 페이스북에 우울함을 토로해본 사람은 안다. 힘내라는 댓글보다 필요한 것은 지금 내 옆에서 말을 들어줄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묻고 싶다. "오늘 밤,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거리를 걷다 발견한 이야기 단단하고 예쁜 이름, 김이강. 본명은 김혜진(국문.03)이다. 필명을 고민하던 김 동문에게 이승훈 교수(인문대·국문)가 선물한 이름이다. 김 동문은 2006년 <시와 세계>로 등단했고, 지난해 9월 첫 시집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를 발표했다. 그 동안 그녀는 결혼했고, 대학원 박사 과정을 수료했으며 얼마 전 싱가포르에 다녀왔다. 김 동문은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여행을 좋아한다. 한 국가도 모자라, 한 도시에 머물며 일상을 즐긴다. 거창한 계획도 불필요하다. 걷다 보면 새로운 볼거리가 나타나는 법이다. 그녀에게 '걷는' 행위는 특별한 의미다. 김 동문의 첫 시집에는 거리를 걷는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오래 걷는 것을 좋아해요. 복잡한, 특이한 공간을 걸으면 여러 생각을 하게 돼요." 여기서 걸음은 산책보다 고행에 가깝다. 어쩌면 이는 그녀 눈에 비치는 인생의 이미지다. 김 동문은 사랑하는 이를 '동행자'라고 표현했다. "결혼하고 나니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제 로맨스를 꿈꿀 시기도 지났고, 그 이후에 남는 것이 무엇일까. 사랑이란 가장 든든한 친구 한 명과 손을 잡고 가는 것 같아요. 끊임없이 서로를 지지해주는 누군가가 있는 거죠." 여수에서 태어났다. 어떤 곳인가. "우리나라 최남단이라고 할 수 있는 바닷가다. '시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생활권과 바다가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학교 가는 길에 바다가 보고 싶다면 달려가 볼 수 있었다. 시골은 아니었다. 도시 생활을 하는데 바다가 옆에 있었다. 독특했다. 버스가 다니는 길가에 바다가 있었으니까." 책을 많이 읽는 소녀였나. "집에 책이 굉장히 많았다. 주로 언니, 오빠의 책을 읽었다. 책을 하나 하나 해치우는 느낌이 좋았다. 책을 읽으면 집에서 칭찬도 많이 받았다. 그런 재미로 책에 빠져들게 됐다. 계몽사 판 세계문학전집이 있었는데, 초등학교 때 사르트르의 「구토」를 읽었다. 더 어렸을 때 읽은 것 중에는「은 나이프」라는 책이 떠오른다. 나치가 유태인을 학살하던 시절, 유태인 소녀가 풍파를 해치고 탈출하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언제부터 글을 쓰고 싶었나. 왜 하필 시를 썼는지. "이십대 초반이었다. 교수님께서 신경숙 작가의 「부석사」를 타이핑해서 주셨다. '너도 이런 작품 하나 써보라'고 그러시더라. 내가 글을 쓸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 때부터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소설을 쓸 생각으로 한동안 뭔가를 끄적거렸다. 그렇게 이십대 초반을 보냈고, 시 창작 강의를 들으며 시를 쓰게 됐다. 글을 쓰는 건 예상했던 일이었고, 하필 시를 쓰게 된 건 우연이었다." 등단 이후 시를 쓰는 게 더 어려워지지 않았나. "정말 그랬다. 대부분의 시인은 긴 훈련 과정을 거쳐 등단한다. 나는 지금도 문예창작과에서 가르치는 시 작법 같은 것을 잘 모른다. (시 작법을 잘 모르는 것은) 양가적이다. 내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으니까. 교육 과정에서 배울 수 있는 부분을 얻어가는 게 부럽다. 물론 비판할 요소들이야 있다. 하지만 개인 편차가 크기 때문에 일반화하지는 못하겠다. 입시 체제 안에서 규격화된 사람도 있고, 취할 부분만 취하며 성장하는 이들도 있다." '시와 일기 사이에서 머뭇거린다'는 평론에 동의하나. "일상적인 요소가 많고, 사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의미일 거다. 유념해야 할 부분이기도 한데, 피할 수 없는 지점이라 생각한다. 추상적으로 써보고 싶을 때도 있지만 평소 발화 방식 자체가 솔직하다. 하지만 글은 글 자체로 읽어야 한다. 불가피하게 작가를 투영하는 지점이 많지 않나. 카프카의 글을 읽을 때 그의 생애를 떠올리는 것처럼 말이다. 내 글에 대해서는 가능한 작가를 배제하고 읽었으면 좋겠다. 쉽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를 투영하게 만드는 요소가 많아서 걱정은 되는데, 최대한 작가를 배제하고 읽었으면 한다." 발표 전 원고를 남에게 잘 보여주는 편인가. "초반에는 여러 사람에게 많이 보여줬다. 누군가의 객관적인 눈이 늘 궁금했던 거다. 사실 초반에는 많이 쓰고, 많이 버렸다. 일종의 훈련이었다. 등단 전에 훈련을 받은 적이 없어서, 오히려 등단 후에 이런 시간이 길었다. 지금은 시를 고정적으로 보여주는 사람이 아주 적다. 시에 자신이 있기 때문은 아니고, 내 기준에 어느 정도 신뢰가 쌓였다는 판단에서다. (기자: 평론에 대해서도 초연한 타입인가). 비판을 궁금해하는 편이지만, 쉽게 휘둘리거나 귀가 얇지는 않다. 생산적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침체될 수는 있어도 절망하지는 않으려는 거다. 사실 평론이나 연구는 그 사람의 창작물이기도 하다. 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고, 때로는 틀린 이야기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는 개입할 수도 없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직업 시인으로 사는 것, 팍팍하지 않은가. "직업 시인이라는 말 자체가 형용 모순이다. 생활 여건은 매우 열악하다. 시뿐 아니라 문화예술 전반이 그렇다. 정부 차원의 지원이 있기는 하다. 그 혜택을 입은 적도 있고, 어느 정도 전환점이 되기는 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시를 써서 생활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있다. 나를 포함해 젊은 세대의 시인들은, 생활과 작품을 분리해서 생각한다는 걸 많이 힘들어 한다." 전반적으로 책 읽는 사람들이 적기 때문이 아닐까. "양보다는 질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과거에 책을 읽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으며,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적게 읽는지 모르겠다. 물리적인 대상만 놓고 보면 요즘도 많이 읽지 않나. 결국 어떤 책을 선정해서 읽는가의 문제다. 너무 어렵거나 난해한 고전들 대신, 문체부터 익숙한 작품들을 선정해서 읽을 수 있는 여건이 필요하다. 요즘 대학에서 이런 일들을 적극적으로 해나가는 추세인 것 같다." 본인이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인가. "요즘 좋아하는 작가는 밀란 쿤데라(Kundera)다. 마르그리트 뒤라스(Duras)도 좋아한다. 쿤데라는 형식이 독특하다. 뒤라스 같은 경우는 그 특유의 정서랄까, 캐릭터가 갖고 있는 특성이 매력적이다. 시인 중에서는 박상수 시인과 이수명 시인. 두 분은 내가 가장 쓰고 싶어하는 종류의 시를 쓴다. 현대시의 모형에 가장 가까이 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글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우울함을 어떻게 해소하나. "최근에 그런 게 심해진다. 나이가 들수록 할 일이 많아지니까, 시간 분배에 대한 고민이 생기더라. 인생에서 어떤 것들을 배치해야 할까 생각하게 된다. 결혼 후에는 여기에 시도 포함되기 시작했다. 따로 시간을 확보하기가 어려워지는 거다. 실패에 대해서도 점점 예민해진다. 그럴 때면 걷거나 술을 마시며 스트레스를 푼다. 술을 워낙 좋아하는 편이다. 혼자서도 많이 마시고(웃음)." 얼마 전 결혼했다. 전과 달라진 부분이라면. "친한 친구가 계속 옆에 있다는 느낌이다. 굉장히 사소한 것을 함께 즐길 수 있다. 5, 6년 정도 혼자 살았기 때문인지, 누군가와 사소한 일상을 즐기는 것이 생활을 풍요롭게 해준다. 하지만 여전히 '페이스 조절'은 어렵다. 결혼 전에는 깊은 새벽에 잠들어서 늦은 오후에 일어났다. 밤 중에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이제는 상대방의 생활에 일부 맞춰야 하는 게 가장 어렵다." 올해 소망이 있다면. "개인적인 소원은 지극히 평범하다. 가정의 행복,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위. 아주 당연하게 망가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라면, 이 세계가 퇴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힘 없는 사람이 고통 받고, 공권력이 들이 닥치는 이상한 일들. 다시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나. 이런 기이한 현상들이 너무나 충격적이다." 후배들에게 조언한다면. "관심사가 있다면 대가를 치르더라도 시도하는 게 중요하다. 작은 대가를 걱정하면 더 큰 대가를 치르는 법이다. (스펙에 목 매는 후배들이 있는데) 그건 내 세대도 그랬고, 요즘 더욱 심해진 것뿐이다. 물론 안타깝다. 하지만 사회에서 버티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스펙을 쌓는 것이 자신의 최종 목표라면 문제겠지만, 삶을 이어나가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라면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것 같다."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나. "다정다감하거나 따뜻한 성격이 못된다. 그렇다고 자주 싸우거나 냉정한 편은 아닌데, 성격이 좀 그렇다(웃음). 나이가 들어 갈수록 온화해졌으면 좋겠다. 온정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직은 젊고, 당장 내일 그렇게 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렇게 변했으면 좋겠다." 곽민해 학생기자 cosmos3rd@hanyang.ac.kr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박보민 사진기자 marie91@hanyang.ac.kr

2013-11 13

[동문]2013년, 스물 일곱 청년의 노래

그런 음악이 있다.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계속 듣고 싶은 음악 말이다. 강백수의 음악이 그랬다. 솔직히 그는 가창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다. 그의 음악은 화려함이나 풍성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다음 노래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매력을 가졌다. 그 힘은 일상 생활에서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녹여내는 솔직함에서 온다. 와인보다는 소주에 가깝고, 서양식 코스요리보다는 국밥 한 그릇에 가까운 음악.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 보냈거나, 부모님이 보고 싶거나, 걱정 없이 놀고 싶은 청춘들은 강백수의 노래를 들어보자. 가명에 비해 너무나 얌전한 이름의 주인공, 강민구 동문(국문.05)이 든든한 위로를 전해줄 것이다. 저 놈 뛰어 노는 것이 백수광부 같구나 강민구 동문은 현재 ‘강백수’라는 가명으로 활동 중이다. 학부 시절 국문과 학술 답사를 갔다가 붙은 별명이다. 당시 머리를 길렀던 강 동문에게 정민 교수(인문대·국문)가 “저 놈 뛰어 노는 것이 공무도하가의 백수광부 같구나”라고 말했던 것. 그 어감이 마음에 들어 지금까지 가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굳이 가명을 사용하는 이유는 음악을 하는 자신과, 글을 쓰는 자신을 구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음악을 하고 싶지만 음악만 하고 싶은 학생은 아니었다. 시를 쓰고 싶었고, 문학 공부도 계속해야 했다. 강 동문은 “음악 활동을 시작하며 문단과 학계의 보수성을 걱정해 가명을 지었다”며 “하지만 음악 활동이 너무 커지는 바람에 이런 구분은 허사가 됐다(웃음)”고 말했다. 강 동문은 지금까지 총 네 장의 앨범을 발매했다. 솔로 앨범이 두 장, ‘백수와 조씨’라는 2인조 그룹으로 발매한 것이 두 장이다. 그는 고등학교 때 친구의 꾐에 빠져 음악을 시작했다. 그의 최근 앨범에 수록된 곡 ‘하헌재 때문이다’를 들으면 그 전말을 알 수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밴드하자고’ ‘명일여고 축제 가서 공연하자고’ 말하는 친구를 따라 밴드를 시작했다. 강 동문은 “그 후로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계속 음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그가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한 때는 2010년. 졸업과 동시에 EP 앨범을 냈지만 기대만큼 성과는 좋지 않았다. 잠시 학원 강사로 일하며 방황하다가 일 년 만에 회의를 느끼고 음악에 전념하게 됐다. 강 동문은 “음악으로 생계를 유지하게 되면서 이게 내 직업이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강 동문은 일상에서 느끼는 솔직한 감정을 곡으로 옮긴다. “어떤 시기에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을 곡으로 옮긴다”는 것. 강 동문은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 반복하게 되는 이야기가 있다. 그만큼 내 머리 속을 차지하고 있다는 뜻이고, 이런 주제를 잡아 곡을 쓴다”고 밝혔다. 한편 그는 “가끔 내 자신이 징그러울 때가 있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어떤 경험을 하든지 ‘이게 작품이 될까’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 “특히 굉장히 슬픈 일을 겪으면서도 ‘이게 노래가 되겠다’는 생각을 할 때 죄책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소한 감정과 생각이 창작의 가장 큰 원동력이라는 점이다. 그는 악상이나 가사가 떠오를 때 즉시 메모를 한다. 지하철이나 술자리에서 떠오르는 내용을 단어 한 두 개로 기록해 둔다. 그리고 하루를 꼬박 투자해 단편적인 내용을 모아 온전한 곡으로 만들어 낸다. 짠 음식에 물을 붓듯, 덤덤한 척하는 음악 강 동문 음악의 매력을 꼽는다면 단연 ‘가사’다. 그의 가사는 대책 없이 솔직하고, 그래서 긴 여운을 남긴다. 실제로 그는 시 창작에 욕심이 많은 문학도다. 우리대학 국문과를 졸업하고 현재 대학원에서 현대문학을 전공할 정도다. 실제로 그는 학부 시절 이승훈 교수(인문대·국문)의 권유로 문예지 ‘시와 세계’ 에 등단한 시인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는 가사가 될 글과 시가 될 글을 크게 구분하지 않는다. 강 동문은 “특정 주제를 시로 다 표현할 재간이 없을 때, 혹은 언어만으로 표현하기에는 함께 떠오르는 악상이 아까울 때 곡을 쓴다”며 “시도 노래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가사와 시는 별반 다르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의 음악에는 ‘반전’과 ‘해학’의 정서가 녹아 있다. 유쾌한 멜로디에 이끌려 노래를 듣다 보면 마음 한 켠이 찡하다.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슬픈 이야기를 슬프게 하고, 기쁜 이야기를 기쁘게 하는 데 인색하다”고 말했다. 예컨대 연인과 헤어져 속상한 날에도 친구들 앞에서는 ‘에이 뭐, 헤어졌어’라며 덤덤하게 군다는 것. 강 동문은 “속으론 울고 있어도 아닌 척 말하는 모습을 그대로 노래에 옮겼다. 지나치게 신나고, 지나치게 슬픈 음악은 부담스럽다”고 했다. 너무 짠 음식에는 물을 부어 먹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편 그에게 음악은 ‘자화상’을 그리는 작업이다. 그는 “내 모습이 변하면 음악도 변하고, 시도 변하는 것 같다”며 “앞으로 인격적으로 성장하든 몰락하든,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싶다”고 했다. 그가 하고 싶은 음악은 ‘가장 문학적인 음악’이다. 문학 안에는 허구도 있고 진실도 있다. 하지만 문학은 허구에서마저 진실을 가장 진실되게 보여준다. 강 동문의 음악에는 그런 신념이 잘 드러나있다. 예컨대 최근 앨범의 타이틀 곡인 ‘타임머신’은 IMF를 맞아 위기를 맞은 가장을 묘사한다. ‘어느 날 타임머신이 발명 된다면 30대의 아버지를 만나 이 말만은 전할 거야. 아버지 6년 뒤에 우리나라 망해요. 사업만 열심히 하지 말고 잠실 쪽에 아파트나 판교 쪽에 땅을 사요’라고. 그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IMF 때 어려운 삶을 살았다고 말하는 것보다 우리 아버지를 보여주는 게 훨씬 공감되는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앨범 실패에 좌절? 뮤지션으로 취업 안됐을 뿐 강 동문은 종종 ‘음악으로 먹고 살기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는 이러한 편견에 반문한다. 어디 힘든 게 음악만 있겠냐는 것. 그는 “같이 졸업한 동기들도 이제서야 자리를 잡는 추세”라며 “나는 친구들만큼 가난했고, 친구들만큼 먹고 살만했다”고 전했다. 그가 골머리를 앓는 부분은 오로지 창작에 있다. 음악을 전공한 사람에 비해 실용적인 소양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 게다가 생각의 깊이가 얕다는 생각에 좌절할 때가 많다. 강 동문은 “바다가 깊어야 물고기가 많다. 생각도 마찬가지”라며 “글을 쓰면 스스로의 깊이를 알 수 있다. 나는 ‘물이 얕아서 잡을 고기가 없구나’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고 고백했다. 음악적인 고민을 제외하면 그는 여느 취업 준비생과 마찬가지로 살았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앨범을 제작했다. 올해 초 지금의 소속사와 계약하기 전까지 모든 앨범을 자비로 제작했다. 항상 운이 따랐던 건 아니었다. 그의 첫 앨범은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다. 500장의 CD 중 300장이 강 동문의 집에 그대로 있다. 나머지 200장 역시 지인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하지만 쉽게 좌절하지는 않았다. 강 동문은 “취업을 준비할 때도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아직 뮤지션으로 취업이 안됐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후 그는 점차 좋은 평가를 받았다. 두 번째 앨범을 통해 방송에 출연했고, 세 번째 앨범 발매 후 음악으로 생계를 유지하게 됐다. 가장 최근에 발매한 그의 솔로 앨범은 지금까지 작품 활동 중 가장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강 동문은 “한 번도 전작보다 떨어져 본 적은 없다는 것에 자신감을 얻는다”며 “현재만 생각하고 하고 싶은 것을 계속하고 있다”고 만족했다. 사소한 순간, 사소한 실수를 무시하지 말아야 그가 글을 쓰고 음악을 즐기는 또 하나의 이유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강연자로 변신했다. 강연은 그가 서는 무대 중 가장 직접적인 소통의 장이다. 하지만 공연에 비해 돌발상황이 많은 것도 사실. 준비한 내용을 다 말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원고에 없는 이야기가 나오는 경우도 잦다. 그는 지난해 한 회사에서 주최하는 스피치 대회에 참가해 우승했고, 이를 계기로 강연을 시작하게 됐다.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에도 출연해 ‘나는 대단한 꿈을 꾸지 않겠다’라는 주제로 이야기했다. 그는 “꿈은 너무 미래의 일이다. 장차 무엇이 될 것인지를 생각하면 꿈을 이루는 과정이 너무 어렵고 괴롭다”고 설명했다. 현재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발전할 수 있다는 것. 강 동문은 “일기를 짧게 쓰기 위해 동시를 짓다가 시인이 됐고, 고등학교 때 여고 축제에 가기 위해 밴드를 했다가 지금까지 음악을 하고 있다”며 “사소한 순간을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한 달에 열 번 이상 라이브 무대에 선다. 기대 이상의 기량이 나오는 날도 있고 실망스러운 공연을 하는 날도 있다. 그는 “공연을 못하는 날이면 사람들을 속였다는 생각에 속상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강 동문은 컨디션에 따른 기폭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가 무대에 예민하게 반응하게 된 데는 지난해 방송 ‘위대한 탄생 3’에 출연해 탈락의 고비를 마신 탓이 크다. 강 동문은 당시를 회상하며 “음악을 계속하려면 잘할 수 있을 때 잘 하는 것보다, 못할 때도 잘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한편 강 동문은 “공연을 할 때마다 남성 관객의 비율이 70퍼센트를 넘는다”며 웃었다. 그는 “옷 선물도, 먹을 거리 선물도 남자 팬에게 받았다”며 “20대 남자라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남자 팬이 따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열정보다는 치밀함이 필요해 그는 우리대학 학생들에게 “열정보다 ‘치밀함’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예컨대 한양대역에서 홍대입구역까지 가야 한다고 가정해보자. 목적지까지 가는 데 어떤 역들을 지나치는지, 환승역은 어디인지를 정확히 알고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는 “우리 사회가 열정과 패기를 주문하지만, 자신이 원치 않는 분야에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설명했다. 무조건 지하철만 타지 말고 행선지를 정해야 한다는 것, 나아가 행선지는 마음대로 정하되 가는 방법을 치밀하게 고민하라는 것이 강 동문의 조언이다. 한편 그는 인터넷한양과의 인터뷰를 통해 ”교수님들의 걱정을 덜게 됐다”고 기뻐했다. 공부하는 학생이 음악을 한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대학에 와서 선생님을 존경하게 됐고, 스승에 대한 흠모로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다”고 했다. 때문에 교수님들이 먼저 ‘앨범 가져와라’, ‘공연에 초대 안 하냐’ 질문을 하는 것이 그에게는 큰 기쁨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음악을 듣는 이들이 “2013년에 살고 있는 스물 일곱 남자의 정서를 떠올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의 꿈은 매 순간 자신을 대변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며 죽을 때까지 음악을 하는 것이다. 시를 닮은 노래를 부르고, 노래를 닮은 시를 쓰는 문학도. 강백수 동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학력 및 약력 강민구 동문(국문.05) 강민구 동문은 우리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동 대학원에서 현대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그는 2010년 첫 번째 EP앨범 <노래, 강을 건너다>를 발표하며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조현철 동문(국문.05)과 함께 '백수와 조씨(Becks & Josh)'라는 2인조 밴드를 결성, 두 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난 슬플 때 기타를 쳐…음악과 당신만이 날 위로할 수 있거든>(2011)과 <두 파산>(2012)이 그것이다. 최근 앨범 <서툰 말>은 그가 '백수와 조씨', '강백수 밴드'를 거쳐 솔로로 발표한 첫 번째 정규 앨범이다. 강 동문은 2008년 '시와 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한 시인이기도 하며, 최근 강연자로 변신해 다양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곽민해 학생기자 cosmos3rd@hanyang.ac.kr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정규진 사진기자 flowkj@hanyang.ac.kr

2013-11 08

[동문]보이지 않는 소리에 날개를 달다

가지고 있는 재료만으로 요리를 완성할 수는 없다. 여러 가지 재료를 적절하게 사용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 때 요리사가 재료를 얼마나,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결정하고 요리를 완성한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작곡가의 곡만으로는 음악이 완성될 수 없다. 하나의 음반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엔지니어의 손길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녹음된 음악을 적절하게 편집하고 어떤 부분을 사용할지는 엔지니어의 몫이다. 오디오 엔지니어는 음향 기기를 조작해 완성된 음향을 만드는 일을 담당한다. 이상적인 음향을 위해 엔지니어는 음악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 의도를 표현한다. 여기 선미, 원더걸스, 2PM, Miss A, 박진영 등 국내 가요계를 주름잡는 가수들의 음반제작에 참여한 오디오 엔지니어가 있다. 주어진 음악을 완성하는 엔지니어 이재원 동문(국문.05), 인터넷한양이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엔지니어를 말한다 ‘오디오 엔지니어’. 생소한 직업이다. 오디오 엔지니어는 ‘스튜디오 엔지니어’와 ‘SR(Sound Reinforcement) 엔지니어’로 나뉜다. 소리를 녹음하는 점은 같지만 SR 엔지니어는 녹음된 소리를 확장시키는 반면, 스튜디오 엔지니어는 소리를 기계음으로 만들어 낸다. 이 동문은 스튜디오 엔지니어다. 스튜디오 엔지니어는 정해진 음반계획에 따라 녹음을 진행하고, 녹음된 음악을 편집하는 일을 한다. 여러 개의 테이크(Take)로 나누어진 음악을 조합하고 조율해 하나의 음악으로 만든다. 이후에 믹싱 작업(Mixing: 음악의 다른 부분과 균형을 맞추고 혼합하여 어울리는 전체를 생성하는 과정)과 마스터링 작업(Mastering: 믹싱작업이 완료된 음악의 전체적인 밸런스를 잡아 주는 과정)을 거쳐 하나의 음원을 만들어 낸다. 이렇게 우리가 듣는 MP3파일이 탄생한다. 유명 엔터테인먼트 사에서 스튜디오 엔지니어로 활동 중인 이 동문은 음반작업에서 엔지니어는 빠질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한다. “녹음된 음악을 편집하고 조율하기까지 엔지니어의 역할은 굉장히 큽니다. 기계로 작업하는 거의 모든 일을 엔지니어가 맡고 있기 때문이죠.” 이 복잡한 과정은 모두 한 달 안에 이뤄진다. 하지만 이 동문은 바쁜 일정이 후에 더 큰 보상을 만들어준다고 설명한다. “한 시즌에 여러 가수의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기 때문에 밤을 새는 일이 빈번합니다. 그래도 직접 만든 음반이 대중들에게 공개되었을 때, 또 인기를 얻었을 때 엔지니어로서 뿌듯함과 보람을 느끼죠.” 그는 엔지니어가 하는 일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마술’이라고 했다. “엔지니어가 주로 하는 녹음은 보이지 않는 소리를 점점 눈에 보이도록 실체화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소리에서 발생하는 공기의 압력을 측정해 컴퓨터에 기록합니다. 기록된 공기의 압력만큼 스피커를 진동시켜 소리가 나도록 하는 거죠.” 보이지 않는 소리를 실체화 시키는 것. 이 동문이 꼽은 ‘사운드 엔지니어가 매력적인 이유’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배우고 싶은 것을 배워라 엔지니어에 대한 이 동문의 관심은 학창시절 접한 음악에서 시작됐다. 특히 기타 치는 것을 좋아해서 고등학교 시절에는 밴드부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대학에 진학해서도 기타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기타를 꾸준히 치다 보니 그 ‘소리’를 기록하고 싶어졌다. 프로그램을 직접 사용해서 직접 기타를 연주해 녹음했다. 스스로 작업을 하면서 사운드 엔지니어링의 매력을 알게 됐고, 이 동문을 지금의 길로 이끌었다. 이 동문은 학창시절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이자 한 집안의 장남이었다. 엄한 그의 부모님은 아들이 음악을 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 “지금처럼 일정한 직장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경우에는 괜찮지만 기본적으로 엔지니어는 굉장히 고달픈 직업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불안정한 일을 한다는 생각에 걱정이 많으시죠.” 하지만 엄격한 부모님의 반대도 이 동문의 음악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그는 군대에서 틈틈이 화성학과 작곡을 공부했다. 제대 후, 휴학을 하며 1년 동안 한 재즈 아카데미에서 본격적으로 사운드 엔지니어링을 배웠다. 또 발품을 팔아 엔지니어가 필요한 홍대 공연장에서 작업을 했다. 엔지니어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2012년 하반기, 그 동안의 노력을 인정받아 졸업과 동시에 공채에 합격, 현 기획사에 입사했다. 그는 우리대학 국문과 출신이다. 단번에 국문과 음악을 연결 짓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동문의 생각은 달랐다. 그에게 대학은 ‘취업과 직업선택의 장소’가 아니라 ‘진정한 학문의 장’이라고 했다. “국문학은 제가 좋아하고 배우고 싶어서 선택한 것이지 직업을 위해 했던 선택은 아니었어요. 국문학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이 정말 많거든요.” 그는 국문학과 교수로 있었던 이승훈 교수의 이야 기를 했다. “교수님은 일상의 그대로를 시로 표현했어요. 저에게는 특별한 경험이었죠. 흔히 어렵 다고 생각하는 시가 인생이었던 거에요. 그 후로 시란 무엇일까, 인생은 무엇일까 라는 고민을 많 이 했어요” 그는 국문학을 배운 것이 엔지니어 일에 직접적으로 연결 되지는 않는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하지만 일이 힘들 때 국문학도로서의 경험들이 삶의 버팀목이 된다고 했다. 국문학을 통해 생각하고 경험한 것이 그가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사운드 엔지니어가 갖춰야 할 자질 이 동문은 엔지니어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로 '순발력'을 꼽았다. 본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이다. 작년 가수 박진영의 전국 순회 공연에서 그는 플레이백(Playback) 엔지니어로 무대 뒤를 지키고 있었다. 플레이백 엔지니어는 가수와 약속된 동선과 시간에서 음악을 틀고 조절하는 역할이다. 작년 연말, 박진영의 공연 중 “저에겐 첫사랑이 있었어요. 지금 들려드릴 노래는 그 첫사랑과 관련된 노래입니다”라는 멘트가 끝나면 노래를 틀어야 했다. 하지만 잔뜩 긴장이 들어간 그의 엄지손가락은 자신도 모르게 엉뚱한 멘트에 노래를 재생하고 말았다. 이 동문은 "그때 박진영 씨는 '저에겐 사실…’이라며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건데 ‘저에겐..’만 듣고 노래를 틀어버렸어요. 박진영씨는 황급히 노래를 시작해야 했죠"라며 다시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이 동문은 일하다 보면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한다고 했다. 그 상황에서 엔지니어에게는 당황하지 않고 대처할 순발력과 판단력, 그리고 철저한 준비성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이 동문은 “엔지니어는 꾸준히 배워야 한다”고도 했다. 엔지니어로 활동하려면 음악과 기계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과 관심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음악을 알아야 악보를 보고, 작곡가가 원하는 방향대로 음악을 만들 수 있다. 특히 복잡한 장비에 달린 수백 개의 버튼 하나하나가 무슨 용도인지 알아야 한다. "기계를 잘 쓰려면 매뉴얼을 꼼꼼히 읽어야 해요. 많은 사람들이 매뉴얼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매뉴얼을 익히고 기계부터 만지는 것과 무작정 사용하는 것은 작업 효율에 있어 천지차이에요." 오랜 기간 엔지니어로 활동하고 있음에도 그는 꾸준히 배우고 있다. 그의 작업실 한 켠은 엔지니어링에 관한 전문 잡지와 각종 기기 매뉴얼이 정돈돼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동문은 귀를 소중하게 관리하라고 조언했다. 엔지니어에게는 듣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 귀가 좋아야 한다. 선천적인 능력이 뛰어나다는 뜻이 아니라 음악을 듣고 잘못된 부분을 알아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청력은 나빠지기만 할 뿐 좋아지지 않기 때문에 항상 귀 관리에 신경 써야 한다. “엔지니어들은 귀 관리가 필수적이에요. 시끄러운 공연장에서 일을 할 때는 항상 귀마개를 착용합니다. 음악을 들을 때도 이어폰을 착용하지 않아요. 귀 관리를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엔지니어로서의 수명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이죠.” 이어서 그는 엔지니어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음악을 많이 들을 것을 강조했다. “음악을 많이 들어야 해요. 음악을 많이 들을수록 음악을 만드는데 도움이 돼요. 마치 글을 많이 읽으면 글 쓰는 기술이 늘어나는 것처럼 말이죠.” ‘좋은 사람’이 좋은 음악을 만든다 이 동문은 “처음 일을 시작할 때는 당연히 최고의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일하며 그의 꿈은 변했다.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것’.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마이클 잭슨의 엔지니어로 녹음분야 그래미상을 받았던 브루스 스웨딘처럼 뛰어난 엔지니어가 되는 것이 꿈이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현재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하루하루 맡은 바를 다하며 살아가는 거죠. 2007년에 원더걸스(Wondergirls)를 처음 봤어요. 당시 군복무 중이었는데, 휴가를 나와 TV를 켰더니 ‘tell me’라는 노래로 인기몰이를 하더라고요. 5년이 지나고 제가 녹음실에서 소희랑 인사를 하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웃음)” 앞으로 5년, 그리고 그 후를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이야기다. 이 동문은 이직을 준비하고 있다. 현재 일하고 있는 곳이 기획사인만큼 대중음악을 다룬다. 그가 원래 관심 있던 재즈 음악을 다루기엔 기회가 부족하다고. “지금의 회사에서 일을 하면 국내외 내로라하는 아티스트들과 함께 작업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굉장히 영광이었죠. 음악적으로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고요.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장르에서 발전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재즈를 비롯해 여러 장르에 도전할 예정입니다.” 그는 언젠가 우리나라보다 음악 시장이 넓은 일본이나 미국에서 활동하고 싶다고 했다. 장르에 대한 선택의 폭이 넓고 엔지니어에 대한 인식이 다르기 때문. 이 동문은 당분간은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맡은 작업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도전을 위한 고민의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좋아하는 일을 즐기는 그는 스스로 꼭 지키고 싶은 다짐이 있다. 바로 겸손하고 배려하는 사람이 되는 것. “항상 함께 일할 때 균형과 조화가 잘 이루어지고 일이 왠지 술술 잘 풀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항상 좋은 사람이에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이런 사람들이 결국 훌륭한 음악을 만들어 내요. 능력도 있고 인간성도 좋은 엔지니어는 누구라도 함께 일하고 싶어할 테고요. 저도 이들처럼 좋은 사람으로, 좋은 음악을 만드는 엔지니어가 되고 싶습니다.” 서미량 학생기자 minyang08@hanyang.ac.kr 홍윤지 학생기자 yj091@hanyang.ac.kr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2013-08 13

[동문]동화에 생명을 양념하는 요리사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주인공이고 파괴된 자연이 주제가 되는 동화. 동화라면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통념을 뒤엎는다. 보통 동화가 아닌 ‘생태 동화’이기에 설정 가능한 주인공과 주제. 생태 동화는 ‘자연 존중’이라는 가치를 담고 있는 동화다. 이러한 생태 동화를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선보인 사람은 바로 동화작가 이상권 동문(국문.84). 동화는 다른 어떤 문학장르보다 심오한 주제를 다룰 수 있다는 그를 인터넷한양이 조명해봤다. 문학이 구원해준 삶 이 동문의 고향은 전라도 함평. 그의 어린 시절 벗은 바로 자연이었다. 소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강에 나갔고, 곤충들과 놀기도 했고, 도랑치고 가재 잡으며 보냈다. 이 동문의 고향은 주술과 샤머니즘이 남아있는 곳이었다. 마을마다 무당이 굿을 벌였고, 동물을 인간과 같이 존중했다. “동네 샛강에서 자라를 두 마리 잡은 적이 있었습니다. 의기양양하게 마을로 돌아오는데, 이웃집 할아버지께서 혼을 내셨습니다. 자라가 조상의 환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죠.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습지만 동물존중과 자연과의 교감이 깔려있는 것이죠.” 시골에서 유년기를 보낸 이 동문. 그는 고등학교를 광주로 진학하게 된다. 광주에서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했지만, 도시의 생활에 적응하기란 만만치 않았다. 옛날만해도 심했던 선생님들의 구타, 학업으로 인한 스트레스 등 17살 어린 고등학생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시골과 다른 도시의 생활 역시 이 동문을 힘들게만 했다. 성적은 곤두박질을 쳤으며, 설상가상으로 잔병치레가 많아지는 등 몸도 점점 아파만 갔다. 힘들었던 고등학교 시절, 이 동문은 문학에 의지한다. “학업이랑 상관없는 소설책을 하루 종일 10권 이상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체벌에도 개의치 않고 수업시간에도 쉬지 않고 읽었죠.” 소설에 빠져 살던 시절, 운명 같은 책이 이 동문을 찾아온다. 바로 김유정 작가의 소설이었다. “김유정 작가의 소설 속에 나온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제 어렸을 적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라면 저도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부터 펜을 들어 원고지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어렸을 적 제가 겪은 자연과 주술적인 경험을 결부시켜 글을 썼죠. 당시에는 소설이라고 썼는데 지금 보니 동화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글을 쓰기 시작하고 이 동문의 생활은 안정을 찾아간다. “원고지에 글을 쓰고 한편의 작품을 완성했을 때의 뿌듯함은 이로 말할 수 없었죠. 한편 한편 쓰기 시작하니 원고지 더미가 산을 이룰 정도였습니다. 친구들도 이런 저를 달리 보기 시작했고요. 친구관계가 원만해지니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훨씬 편해졌죠. 결국 문학이 저의 고등학교 시절을 무사히 보내게 해준 원천이었죠.” 다시 찾은 작가의 길 계속해서 문학을 사랑했던 이 동문은 우리대학 국문과로 진학한다. 그는 스스로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회고한다. “대학시절 한번도 글로 상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학교에서 주최하는 문학작품 공모전 등 다양한 대회에 작품을 출품했지만 언제나 예선에서 탈락했죠. 아무에게도 제 글을 인정받아 본적이 없었던 거죠. 그래서 저는 글 쓰는 데 재주가 없다 생각했습니다.” 졸업 후 신문사에 취업한 이 동문. 하지만 가슴속에 공허함이 몰려왔다. 이루지 못한 문학의 꿈 때문이었다. 졸업 후 2년이 지난 후, 이 동문은 중대결정을 하게 된다.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쓴 것이다. ”신문사에 계속 다녔어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저를 버티게 만들어준 문학을 다시 하고 싶었습니다. 이걸 하지 않으면 평생을 후회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사표를 내고 작가가 되기 위한 수련에 들어갔죠.” 하지만 당장 수입이 끊기게 된 이 동문은 생업을 위해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에서 일했다. 밤에 리어카를 끌면서 채소를 가게로 배달했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리어카를 끌던 경험이 도움이 됐다. 수입은 생각보다 짭짤했다. 리어카 가득 담긴 채소를 한 번 배달하는데 6000원 정도를 받았다. 6개월 동안 열심히 일한 결과 이 동문은 1000 만원을 모으게 된다. 당시 주간신문 편집국장의 월급이 50만원임을 감안할 때 상당한 거금이었다. 돈을 모은 후, 이 동문은 대학원 진학을 고민한다. 하지만 그는 대학원을 택하지 않았다. 공부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카메라를 들고 전국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지방을 돌아다니며 전국의 산천을 여행하며 야생화 사진을 찍고 사람들을 만났다. 떠돌이 인생이었다. “어린 시절 제가 봤던 풀과 꽃들을 복원시키고 싶었습니다. 카메라를 하나 사서 전국의 풀과 꽃들을 찍고 사람들을 만났죠. 자연을 여행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니 잃어버렸던 저의 정서를 찾게 됐고, 자연스레 문장도 점점 변하더라고요. 특히 사투리 안에 녹여있는 우리나라 토종의 말들을 많이 알게 됐죠.” 떠돌이 생활 2년의 결과, 이 동문은 자신이 만났던 사람들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시골총각과 동네 초등학교 선생님의 사랑이야기였다. 비록 사랑이야기였지만 수입 농산물에 밀린 농촌의 비극적인 현실과 노총각 문제 등 농촌의 비극적인 현실을 꼬집은 소설이었다. 소설은 성공적이었다. 이문구의 필체와 김유정의 낭만이 담긴 소설이라는 극찬이 따라왔다. 단번에 스타작가로 등단했다. 동화로 돌아오다 단번에 스타작가로 등단한 이 동문. 성공이 빠른 만큼 실패도 곧바로 이 동문을 찾아오게 된다. “당시에는 왜 다른 사람들이 제 글을 높게 평가하는 지 몰랐어요. 그저 성공에 들떠있었죠. 김유정의 낭만과 이문구의 필체를 잃지 말라는 충고를 그때는 몰랐죠. 농촌문제를 더욱더 비극적으로 쓰는데 골몰했습니다. 그러니 글에서 해결점을 찾아 볼 수 없더라고요. 글에서 낭만과 자연의 힘을 잃어 버린 것이죠. 점점 글을 쓰는 청탁이 떨어져 가고 수입도 적어졌습니다. 말 그대로 위기였죠.” 작가 인생의 위기를 맞은 이 동문. 그는 초심으로 돌아갔다. 고등학교 시절, 그를 버티게 해준 글들을 다시 떠올렸다. 어렸을 적 경험을 다시 한번 상기 시켰다. 아무 제약 없이 본인이 쓰고 싶은 글을 썼다. 그 결과 탄생한 작품이 바로 이 동문의 동화 데뷔작 ‘하늘로 날아간 집오리’였다. 작품은 성공적이었다. 작품에서 자연과 인간을 단순한 대립 구도로 설정하는 대신, 순수한 아이의 눈에 비친 인간의 잔혹함과 동물의 생명력을 흡입력 있는 화법으로 그려냈다. 각종 단체에서 청소년 권장도서로 선정됐다. 동화작가 이상권의 시작이었다. “이 작품은 소설과 동화의 경계에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자연과 인간을 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작품이었죠. 이 작품을 계기로 동화를 쓰겠다 마음 먹었습니다.” 자연과 인간의 교감을 위한 생태동화 이 동문의 동화는 바로 ‘생태동화’다. 이 동문이 개척한 고유의 장르다. 이 동문은 30년전 우리가 가졌던 자연존중의 가치를 복원시키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생태동화의 핵심이라 설명한다. “옛날에는 동물은 동물 그대로의 삶을 인정했습니다. 예를 들어 제비가 처마 밑에 집을 지어도 제비의 삶을 인정했듯이 말이죠. 오히려 제비가 오지 않으면 그 집에 덕이 없다고 여길 정도였죠. 하지만 지금은 제비는 단순히 귀찮은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이런 우리의 마음을 예전으로 돌려놓는 것이죠.” “20년도 되지 않은 세월 동안 우리는 너무 많이 변했습니다. 현대화와 도시화로 인해 자연을 잊고 산 것이죠. 물론 인간이 도시를 버리고 농촌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유기적으로 농촌과 도시를 이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연과 가까워 지는 삶도 필요합니다. 그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루는 것이죠.” 이런 이 동문의 생각을 전하는데 동화는 더없이 좋은 수단이다. 아이들의 순수성과 이 동문의 자연친화적 사상이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주술을 믿습니다. 순수하죠. 오히려 아이들에게 저의 생각을 전하는 것이 더 편할 때가 있습니다. 어른들은 이미 주술성이 파괴돼 버렸거든요.” 또한 동화는 이야기를 펼치는 데 제약도 없다. 아름다운 이야기뿐만 아니라 문제의식을 가진 이야기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 “동화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으면 동화죠. 닭, 삼겹살, 걸레 등 세상 모든 것이 주인공이고 그들의 이야기를 펼칠 수 있어요. 아름다운 이야기부터 심오한 주제까지 자유롭게 풀어나갈 수 있는 것이 동화의 매력입니다.” 글은 경험이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 동문은 남과 다른 눈이 핵심이라 말한다. 이 동문은 평소 등산을 하며 생물들을 관찰하고 자연과 교감했던 경험이 동화를 쓰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주변에 있는 조그마한 벌레를 관찰하고 그들의 행동을 분석해 벌레가 주인공인 동화를 쓰기도 하고 주변의 인물들을 지켜보면서 작품에 등장인물로 차용하는 것이죠. 주변에 대한 사소한 관심이 중요합니다.” 또한 이 동문은 다양한 경험이 바로 글을 쓰게 하는 힘이라 말한다. 남들과 같은 경험을 하면 남들과 같은 글을 쓸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남과 다른 글을 쓴다는 것은 남과는 다른 경험을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들이 안 하는 것을 한번 해보세요. 이것이 오히려 문학이나 문법공부보다 더 중요합니다. 남들과 다른 생활 다른 사고 방식이 중요하죠.” 남들과 다른 경험. 하지만 이 동문이 이것이 거창한 것은 아니라 주장한다. “같은 경험을 하더라도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같은 경험을 하더라도 본인이 관심 있는 부분에 더 생각을 집중시키는 것이죠. 예를 들어 아프리카에 해외봉사를 간 경험이 동일하더라도 누군가는 소년병의 이야기에 주목할 수 있고, 누군가는 소수민족의 언어에 생각을 집중할 수도 있는 것이죠. 이처럼 경험과 관찰 그리고 관심이 남과는 다른 글을 쓰게 하는 힘이 됩니다.” 학력 및 약력 이상권 동문(국문.84)은 전라도 함평에서 태어났다.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대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갑자기 들이닥친 난독증과 우울증에 걸려 생을 놓아버리고 싶었을 때 문학이 찾아왔다. 소설책을 보고 소설을 쓰면서 사춘기를 보냈다. 그 뒤 우리대학 국어국문과를 졸업하고 신문사에 다니다 그만두고 작가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1994년 계간 『창작과 비평』에 단편소설 「눈물 한번 씻고 세상을 보니」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지금은 일반문학과 아동청소년문학의 경계를 넘어서 동화부터 소설까지 자유롭게 글을 쓰고 있다. 작품으로는 『성인식』 『하늘을 달린다』 『사랑니』 『애벌레를 위하여』 『난 할 거다』 『발차기』 『싸움소』『마녀를 꿈꾸다』 『고양이가 기른 다람쥐』 등이 있다. 손경원 학생기자 son7629@hanyang.ac.kr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정규진 사진기자 flowkj@hanyang.ac.kr

2013-06 12

[오피니언]마음의 여행이요 일탈이 되는 축제는 나에게 ‘뜨거운 소란 속의 차가운 고요’였다

떠들썩한 축제 마당 한편에 시화가 걸려 있다. 국문학과의 시인 지망생은 소란이 소란으로 들리지 않았다. 소란 속의 고요, 두 가지 매력이 담겨 있는 것이 축제의 시화전 아니었던가. 아우성 속 또 다른 세상으로 이끌어주었던 액자. 단 한 사람이 알아보고, 꽃 한 송이 걸어주기를 기다리던 신록의 교정 한 모퉁이가 이제는 푸르러졌다. ▲ 글 고운기 (시인, 문화콘텐츠학과 조교수, 80·국어국문) 졸업하고 4반세기가 흘러 모교의 교수로 돌아와 다시 보는 후배들의 축제는 훨씬 조직적이고 윤택해졌다. 축제는 일탈이다. 일상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의 대표가 여행이라면 축제는 마음의 여행이요, 그래서 또 하나의 일탈이다. 일탈은 곧 모험을 동반한다. 마음의 모험 흠뻑 젖어 있는 후배들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 또한 어느새 슬며시 끼어들곤 한다. 주점에서 털리는 지갑의 돈이 솔찬하지만 말이다. 축제 때면 내가 다니던 국문학과는 시화전을 열었다. 글깨나 쓴다는 친구들에게는 기다려지는 행사였다. 시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직접 그림을 그리기도 했으니, 시화전을 통해 재주가 있고 없음이 두루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강의실 하나가 방과 후면 화실로 변했다. 거기에는 재학생뿐 아니라 동문 선배도 함께해 이미 등단한 선배 시인을 만난다는 즐거움도 있었다. 나는 언제쯤 등단이라는 절차를 거쳐 시인이 될까, 시인의 자격으로 옛 강의실을 찾아와 시화를 만들 수 있을까, 내 시가 세상에 나가 많은 사람의 가슴을 적실 작품이 되기는 할까. 어느 때보다 축제의 가슴 설렘은 시화전을 준비하는 한 달 남짓 나의 미래와 결부되어 고양되었다. 열정으로 만든 시 한 편 그리고 고요한 기다림 시화전을 오픈하는 날 아침이면 분주했다. 액자에 담긴 완성된 시화를 찾아오고, 공대 건축학과의 협조를 받아 그들이 쓰는 이젤을 빌려오고, 학생회관 앞 공터를 전시장으로 확보해 진열했다. 학과의 교수와 학생이 모여 엄숙히 치르는 테이프 커팅, 축제 동안 시화는 자랑과 부끄러움을 함께 안고 모두에게 선보여졌다. 그리고 고요한 기다림. 전시장은 당번을 정한 순서대로 지키지만 당번이 아니더라도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맴돌기 일쑤였다. 누가 찾아올지, 누군가 내 시를 읽고 한마디 하지 않을지, 정말 누군가 예쁜 꽃이라도 한 송이 시화 끝에 걸어주지나 않을지. 마음에 둔 여자 후배가 “형, 이번 시도 참 좋아요!”라고 말 걸어오면 뭐라고 답할까. 그때 여학생들은 남자 선배를 ‘형’이라 불렀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 기억 속 시화전에는 꽃도, 여자 후배도 없었다. 아주 의례적으로 달아주는 후배의 꽃송이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면 술 마시러 가자고 이끄는 선배가 있을 뿐이었다. 물론 그건 내 시가 결코 못나서가 아니요, 나를 좋아하는 후배가 없어서도 아니었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 학교 안에는 두세 개 문학 동아리가 있어 그들과 묘한 경쟁심이 발동되기도 했다. 같은 시화전을 여는데 적어도 대학 안의 ‘문학 본산’인 국문학과가 뒤처져서야 쓰겠는가. 내가 후배였을 때 선배들은 은근히 그 같은 중압감을 우리에게 주었다. 내가 선배가 된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더욱 열심히 시를 쓰게 했고, 뭔가 더 기발하게 그림을 그리게 한 원동력이었을 터다. 문학이 무슨 경쟁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3학년 마치던 겨울, 나는 운 좋게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시인으로 등단했다. 4학년 축제 때는 그 시를, ‘신춘문예 당선작’이라는 꼬리표와 함께 전시했었다. 후배들 앞에서 어깨 한번 들썩였던 기억이다. 4월의 개나리가 피고 지고, 교정에는 새순 돋는 신록의 나무가 싱그러워질 때쯤이면 강의실이 화실로 변하는 한 달 남짓의 축제 시화전 준비 기간을, 세상의 어떤 일보다 아름다웠던 일로 추억한다. 우리는 그런 신록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축제 기간에 휴강하지 않는다. 엄격해진 학사관리 때문인지, 수업 결손 없는 축제를 열라고 하는 것 같다. 아무래도 좀 어설프다. 밤새 놀이와 술판에 취했던 학생들이 아침이면 강의실로 꾸역꾸역 모여든다. 이 와중에 결석은 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가상하지만 아무래도 정상적인 수업이 될 리 없다. 꼭 이래야 하나 싶다. 내가 유학했던 일본의 게이오慶應 대학은 목요일 저녁부터 일요일까지 축제를 열었다. 월요일은 보수일補修日이다. 그러니까 금요일과 월요일만 휴강하면 되었다. 주말을 끼기 때문에 동문 선배와 지역 주민이 많이 찾아왔다. 자연스럽게 동문 간, 지역사회 간 유대를 도모하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학교를 매개로 모두가 함께 모여 까무러치도록 노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축제의 일탈만큼은 철저히 보장해주는 쪽이 낫지 않을까. 국문학과가 지금도 시화전을 하는지 모르겠다. 초대해주지 않더라도 올해는 슬쩍 한번 찾아가 보고 싶다. 꽃 한 송이도 준비하겠다. 열심히 쓴 시화 한 편에 달아주고, 마침 주인공이 거기 있거든 그 길로 주점에 데려가 술 한잔 사겠다. 에디터 양효선|사진 최재인

2013-03 20

[오피니언]그 시절의 '쪽지통신' 지금의 너는 상상할 수 있니?

가끔 상상한다. 그때 그 시절, 지금처럼 휴대전화나 아니 적어도 삐삐라도 있었다면 우린 어떻게 되었을까. 마음만 먹으면 어디서나, 누구와도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지금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그 시절의 이야기. 쉽게 닿지 않아 그만큼 애달팠지만 그 누가 부정하랴. 도서관 게시판에 빼곡하게 붙어 있던 수많은 쪽지가 만들어낸 공간들이 꼭 그만큼의 낭만이 되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음을. 대학 2학년 시절 맞이한 봄은 유독 바람의 서슬이 아파서 늘 웅크리고 다녔다. 3월 말이 되어서야 내 여자친구는 “이제야 봄이 왔네. 내일 토요일인데 우리 대공원에 놀러 가자!”고 말했다. 우리는 오전 11시에 한양대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모처럼 나도 봄풀과 봄 나무들이랑 한 타령으로 몸을 흔들어대며 다소 들뜬 마음으로 걸을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전동차가 한양대역에 정차하지 않고 지나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역사에서 화재가 발생했다고 한다. ▲ 1970년대 한양대 중앙도서관의 전경. 수많은 젊은이의 꿈과 사랑 그리고 미래가 공존했던 추억의 장소다. 문자로도 전화로도 쉬이 닿을 수 없던 시절 휴대전화 같은 것은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이럴 때 무전기라도 있으면 그녀에게 연락을 할 텐데’ 하는 생각으로 발만 동동 굴렀다. 건대 입구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한양대역 근처로 돌아왔다. 10여 대의 소방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으나 소방 호스도 제대로 겨냥하지 않고 있는 걸로 보아 화재가 심각하지 않음을 짐작케 했다. 곧 소방차들이 하나둘씩 철수했고 역사로 사람들이 들어섰다. 하지만 그녀는 없었다. 이미 약속 시간은 2시간이 지난 상태였다. 나는 그렇게 역사에서 다시 1시간을 묵히다가 문득 학교 도서관을 떠올렸다. 평소 도서관의 작은 게시판을 통신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문득 그녀가 보고 싶다거나 갑자기 일이 생겨 집에 가야 한다거나 하면, ‘인진아, 나 시골에서 어머니가 오셔서 급하게 집에 가야 해. 미안. 내일 3시에 여기서 보자.’ 그렇게 쪽지에다 적어 게시판에 꽂아두었다. 내 쪽지를 본 그녀는 ‘어머니가 맛있는 거 해주겠네. 낼 보자’ 하는 답글을 내 글 위에다 꽂아두었다. 그 생각이 나자 빛의 속도로 도서관을 향해 뛰었다. 숨을 헐떡거리면서 게시판을 뒤졌으나 그녀가 남긴 쪽지는 없었다. ‘인진아, 나 도서관 4층에 있어. 그리로 와.’ 일부러 눈에 잘 띄도록 붓펜으로 쓴 쪽지를 붙여놓고 도서관 4층에서 기다렸다. 1시간쯤 기다렸을까. 과 친구가 “야, 너 토요일에도 나와서 공부하네. 당구나 치러가자” 하고 거의 강제로 손을 잡아끌었다. 당구가 끝나자 6시가 넘어버렸지만 나는 다시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게시판에 그녀의 쪽지가 보였다. ‘시우야, 4층 가봤더니 없네. 나, 카페 꽃다에 있을게. 4시 2분.’ 빛의 속도로 언덕길을 뛰어서 내려갔다. 일이 꼬이려고 그랬는지 카페 문 앞에는 ‘금일은 쉽니다’라는 푯말이 붙어 있었다. 돌아서려다가 푯말 아래에 붙은 작은 쪽지가 보였다. ‘시우야, 카페 이솝으로 와.’ 나는 다시 빛의 속도로 달렸다. 하지만 아무리 카페 안을 뒤져도 그녀는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도서관으로 갔다. 인진이가 남긴 쪽지는 없었다. ‘인진아, 나 간다. 저녁 7시 15분.’ 그러고 보니 종일 굶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는 고파도 밥은 먹고 싶지 않았다. ▲ 현재 한양대의 지성들이 모이는 백남학술정보관. 깔끔하게 정돈된 서가를 비롯해 최첨단 시설과 휴식 공간을 갖춘 학교 도서관이다. 여백 없는 단순함이 때론 필요할 테지 월요일에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너 그제 무지무지 배고팠지? 나도 그랬어” 하고 입을 열었다. “그래도 무척 좋았어. 비록 옆에 있지는 않았지만 만나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얼마 나 많이 뛰어다녔니? 상상만 해도 즐겁고 웃음이 나와. 꼭 옆에 붙어 있어야만 데이트하는 거 아니잖아? 나한테는 그런 시간들이, 그런 네 눈빛이 더없이 소중하고 고마워. 재밌다! 일부러 하려고 해도 못 하잖아!” 하고 웃었다. 그제야 나도 웃을 수 있었다. 올해 대학에 가는 딸에게 최신형 스마트폰을 사주고 저녁을 먹으면서 그런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가만히 듣고 있던 딸이 그 여친과는 왜 헤어졌냐고 물었다. “3학년 때 그놈이 갑자기 휴학해버렸어. 한마디 의논도 없이. 그게 화가 나서 잠시 헤어져 있자고 한 게…. 하지만 보고 싶을 때가 있었어. 그런데 그때마다 연락이 안 됐어. 그놈이 시골 할머니 댁에 가 있어서. 그때 휴대전화만 있었어도…. 그래, 비록 휴대전화는 옛날 쪽지만큼 여백은 없어도 나름대로 좋은 점도 있더라. 그래서 아빠는 다시 대학 가면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면서 연애 한번 하고 싶어. 가끔은 단순하면서도 빠르고 여백이 없이 사는 너희가 2 부러울 때도 있거든. 그냥….” 글 이상권(아동문학가, 국어국문학과 84학번)|에디터 최미현|사진 홍보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