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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3 한양뉴스 > 문화

제목

일본 제국주의. 그들의 은밀한 속내를 엿보다

‘조감도, 제국의 야심을 그리다’ 특별전

오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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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yang.ac.kr/surl/TbCP

내용

지난 10월 16일을 시작으로 11월 3일까지 한양대학교 박물관 3층 기획전시실에서는 일제 시대 제작된 국내 최초 한반도 관련 조감도(鳥瞰圖) 전시가 열린다. 원래 조감도란 ‘날아가는 새의 눈으로 내려다보고 그린 그림’이라는 뜻으로 보통 건축도면에 많이 활용된다. 또한, 해당 지역을 포괄적이고 전반적인 시각으로 나타내기 위해 제작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조감도는 달랐다. 전체적인 모습을 담아내는 것 뿐만 아니라, 왜곡된 시각에서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세세하게 집어넣었다. 당시 최고의 명세를 떨친 ‘요시다 하츠사부로(吉田初三 郞)’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런 식의 조감도를 제작했을까. 당시 조감도가 만들어진 배경과 그 의미, 그리고 일제가 꿈꿨던 욕망을 알아보기 위해 동아시아건축역사연구실의 서동천 겸임교수(건축학부)를 만났다.  

 
 
조감도에 숨은 이면을 파헤치다

동아시아를 대상으로 일본이 서서히 식민지를 넓혀가던 20세기 초. 일본의 조감도 전문 화가였던 요시다 하츠사부로(이하 ‘요시다’)의 첫 작품은 1913년 ‘게이한 전차안내(京阪電車御案內)’ 였다. 처음엔 주로 좁은 시각에서 한정된 지역만을 그리던 그는, 10년 뒤인 1922년부터 주변국을 대상으로 하는 광범위한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1929년에는 한반도와 만주를 대상으로 하는 20개 이상의 조감도를 생산해냈다.

이에 대해 서 교수는 “당시 조감도는 축소 인쇄를 거쳐 판매나 배포용으로 제작됐다."며 "그 말은 작가 개인의 조감도를 그리고 싶어서 그렸다기보단 뒤에서 그를 조종하고 이용하려는 세력이 있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즉, 당시 조감도는 관광이나 홍보 등 상업적인 목적으로 다방면에 활용됐고, 이를 단순히 작가 개인의 작품 성과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한양대학교  박물관에서는 지난 10월 16일부터 다가오는 11월 3일까지 국내에서는 최초로 '요시다 하츠사부로'식의 조감도를 가능한 모든 범주에서 수집해 전시 중이다.
▲한양대학교 박물관 3층 기획전시실에 전시 중인 여러 조감도의 모습. (출처: 한양대학교 박물관 페이스북)

그렇다면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이러한 조감도를 생산∙ 배포하도록 의뢰했을까? 서 교수는 당시 일본의 제국주의를 주도한 ‘조선총독부’나 여러 ‘철도∙전기 주식회사’ 등 정부 조직과 민관 조직이 이를 의뢰했다고 답했다. “일본 관청과 식민지 사업체 등에서 의뢰를 하면, 요시다와 그의 문하생 그리고 다른 작가들이 조감도를 생산했죠. 이렇게 생산된 조감도는 일본 및 식민지 국민들에게 판매됐습니다.”

특히 일제강점기 시정(施政: 정치를 베풂) 20주년을 맞아 1929년에 요시다가 그린 ‘조선박람회도회’는 당시 일본 제국주의의 속내를 그대로 엿볼 수 있는 그림이다. 이 작품은 식민지 시대 경성의 모습을 파노라마로 보여준다. 당시 도로정비 사업으로 인해 도심의 교통망이 완성된 모습과 함께 ‘조선총독부’, ‘경성부청’, ‘경성역’. ‘신궁’ 등 식민지 지배와 밀접하게 관련된 곳을 강조하여 그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만약 당시 조감도를 한국인 입장에서 그렸다면, 창덕궁∙ 숭례문∙ 종묘 등을 중심으로 그렸을 겁니다. 즉, 당시 그려진 조감도가 정보 제공의 역할보다는 식민지 지배의 야심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 것이죠”
▲요시다 하츠사부로가 1929년에 그린 '조선박람회도회'의 모습. 당시 조감도를 통해 일제의 식민지 지배 욕망과 그들의 지역을 인식하는 관점을 확인할 수 있다. 1번부터 4번까지 차례로, ‘조선총독부’, ‘경성부청’, ‘경성역’. ‘신궁’이다. (출처: '번안물로 본 사회와 문화', 백욱인 저)

건축은 역사를 담아내는 그릇

식민 지배 당시 일제는 도시 건설 전략을 통해 조선 왕조의 맥을 끊고, 근대 자본주의화와 군사기지화를 위해 경성의 모습을 바꿔나갈 계획을 꾸리기도 했다. 몇백 년간 근간을 유지해 온 유교 질서를 허물고 본인들이 받아들인 근대 서양 건축과 문물의 흐름을 주입시키고자 했던 것. 게다가, 조선 시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상 속에서 건축장인들은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를 유지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건축물이 대거 소실되고 목재가 부족해지면서 조선 후기에는 상대적으로 뛰어난 건축물을 건설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세도정치를 거치며 조선이 쇠퇴하는 동안, 다른 나라들은 근대화 시기를 거치며 급발전을 거듭했다.

“1945년 해방 이후 도시 계획들 역시 일제강점기를 답습한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당시 경제력이나 기술, 다른 여건들이 많이 부족했고 그렇기에  일본인들이 남겨 놓은 자산들을 활용할 수 밖에 없었거든요.” 하지만, 사실 고대에는 한국이 일본에 많은 신식 문물 등을 전파 했고, 우리 역시 중국에서 많은 문화와 사상, 기술 등을 전파받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고대 건축기술을 되찾고 앞으로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전체의 역사를 바라보고 아울러야 합니다. 또 단순히 과거에 있던 건축물 하나만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을 둘러싼 다양한 역학 관계들을 함께 이해해야 하죠. 당시 그런 건물을 짓게 된 정치적∙ 경제적 상황과 기술∙자본 등도 파악해야 해요.”
▲서동천 겸임교수(건축학부)는 "여러 역사들의 영향관계가 하나로 모아져 나오는 매체가 건축이라며,  건축을 보다 명확히 알기 위해서는 역사연구 역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많이 얻어 가길

이번 특별전을 개최한 동아시아건축역사연구실은 지금껏 매해 전/후반기 두 차례 전시를 열고 있다. 전반적인 주제는 한동수 교수(건축학부)가 정하지만, 세부적인 부분은 연구실 내의 다른 대학원생이나 서 교수와 상의를 거쳐 결정한다. “전시를 통해 갖고 있는 자료를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공유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자극할 수 있고, 서로가 연구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 수 있거든요.” 또 학생들 입장에서는 전시하는 과정 자체가 본인들에게 도움이 되기도 한다. 어떤 자료를 수집할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본인의 성과를 어떻게 시각적으로 보여줄 것인지 고민하게 되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좀 더 넓은 시각을 가지고 접근했으면 해요. 단순히 건축물만을 보는 게 아니라, 그를 둘러싼 당시 시대상과 역사,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글/ 오상훈 기자             ilgok3@hanyang.ac.kr
사진/ 김윤수 기자         rladbstn625@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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