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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07 인터뷰 > 동문

제목

1%의 기적

삼성 라이온즈 외야수 박해민 동문(생활체육.08)

최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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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yang.ac.kr/surl/BWBS

내용

"가는 거야, 가는 거야, 저 거친 세상으로"

 

천둥 같은 함성이 그라운드로 내리 꽂힌다. 사람들은 타석에 들어선 선수의 이름을 환호하며 노래를 부른다. 팀을 상징하는 색깔로 가득 채워진 관중석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거센 파도처럼 넘실댄다. 모두 타석에 오른 선수를 응원하는 모습이다.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프로야구 선수는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거친다. 대학과 고등학교 야구부에서 활약을 한 선수들 중 약 15%만이 프로 팀에 지명을 받고, 그 중에서도 약 7%, 즉 전체 선수의 1%만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환호를 받는 1군 경기에 출전해볼 수 있다. 지명에 실패한 85%에서 함성 소리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1%의 자리에 오른 박해민 동문(생활체육.08)을 만나봤다.

 

야구, 우연에서 운명으로

 

   

한국 프로야구의 최강자를 가리는 한국 시리즈 3차전, 커다란 벙어리 장갑을 끼고 나온 선수가 있었다. 그는 장갑을 낀 채 다른 선수들을 대신해서 주루를 했고, 몸을 날린 수비 장면에서는 해설자의 입에서 칭찬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박해민 동문(생활체육.08)의 벙어리 장갑 아래에는 직전 경기에서 당한 부상으로 제대로 구부리기도 힘든 손가락이 숨어 있었다. 어려움 끝에 프로 선수의 자리에 오른 그의 한국 시리즈 출전은 부상도 막을 수 없었다.

 

박 동문은 어렸을 때부터 움직이기를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종목은 가리지 않았다. 부천에서 이사온 서울의 초등학교에 야구부가 있었던 것이 그가 야구를 시작하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집에서 조금 먼 학교로 배정이 됐는데 그 곳에는 야구부가 있었고, 집에서 가까운 다른 학교에는 축구부가 있었어요.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배정해달라고 구청에 전화도 했는데 변하는 건 없었어요. 그래서 집에서 먼 학교를 다니면서 야구부를 들어갔습니다. 만약에 야구부가 없었던 다른 학교에 갔다면 축구를 했을 수도 있겠죠." 우연히 시작한 야구에서 재미를 느낀 그는 중학교 즈음부터 프로 선수의 꿈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우리대학에 입학한 박 동문은 운동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습관을 터득했다. 바로 스스로 생각하면서 운동을 하는 습관이었다. "고등학교까지는 '해야 하니까'라는 생각으로 야구를 했습니다. 하지만 대학에 와서는 감독님이 선수들의 자율성을 보장해주시면서 야구에 대한 가치관을 정립하게 됐습니다. 정말 하고 싶어서 야구를 하다 보니 능률도 많이 올랐어요." 박 동문은 결국 4학년 당시 자신의 최고 성적을 올리며 졸업한다. 그러나 드래프트(Draft: 프로 야구 구단이 정해진 순번에 따라 원하는 선수와 계약을 하는 제도) 지명의 날, 박 동문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구단은 하나도 없었다.

 

입단 실패, 부상… 그리고 비상

 

   

"태어나서 제일 많이 울었어요."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가족들과 함께 지명 결과를 확인한 박 동문은 침대에 누워 엉엉 울었다고 말했다. "3일 동안 밥도 안 먹고 울고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어요. 그간 뒷바라지 해주신 부모님께 죄송스럽고, 이제 야구 안 할 거라고 했어요" 지명을 받는 데에는 실패 했지만 프로 야구 구단인 삼성 라이온즈는 박 동문이 신고선수로 구단에 입단하길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신고선수는 한국야구위원회(KBO)에 정식 선수로 등록되지 못하고 신고만 돼, 우리가 흔히 보는 프로야구 경기에는 뛰지 못하는 선수다. 드래프트 1순위의 선수는 많게는 3억에서 최저 2400만원의 계약금을 보장받지만 신고선수는 계약금도 보장 받지 못한다. 박 동문은 '한 번만 더'라는 생각으로 신고 선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신고 선수로 계약한 후 박 동문은 아마추어를 대상으로 하는 야구 월드컵에 출전했다. 각국의 대표 아마추어 선수들 사이에서 박 동문은 3할 8푼이 넘는 성적을 올리고 동점 홈런을 치는 등 큰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그 후 번번이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고질적인 어깨 부상이었다. "처음 입단한 후에도 어깨 부상 때문에 몇 달 동안 재활만 해야 했습니다. 어영부영 한 시즌이 지나가고, 다음 해에도 또 어깨가 아팠어요." 그 때까지도 대학 시절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 사이에서 괴리를 느끼던 박 동문은 다시 야구를 그만둬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그만큼 몸도 마음도 지쳐있었던 것. 그런 그를 다시 일으킨 것은 팀의 트레이너였다. "트레이너 한 분이 자기를 믿고 3개월만 재활을 해보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구단에서 누구도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는데 말이에요. 나를 믿어주는 사람을 위해서 3개월만 더 해보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다시 한 번 재활의 시간을 보낸 그는 부활에 성공했다. 입단 실패와 부상 슬럼프를 견뎌낸 그의 인내는 2014년 4월, 고대하던 1군 무대에 출전하는 것으로 보상받았다.

 

"임팩트 있는 선수보단, 간절한 선수로 기억에 남길"


올해 4월, 1군 무대에 오른 박 동문은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였다. 적시적소에서 터지는 안타로 득점을 올리는 모습은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의 진가는 특히 수비와 주루에서 발휘됐다.

 

   


야구는 던지고 치는 싸움이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은 쳐낸 공을 훔치는 수비와 공을 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는 주루 싸움이다. 박 동문은 2군에서 생활하는 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타석은 네 번쯤 들어갈 수 있습니다. 기회가 많죠. 하지만 '파인 플레이(Fine Play)'라고 칭찬받는 호(好)수비는 10번 경기를 할 동안 한 번 나올 정도로 기회가 드물어요. 제가 열심히 연습한 것을 실제 경기에서 해냈을 때의 그 짜릿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2군에서 연마한 실력은 1군에서 폭발했다. 4월부터 10월까지 1군의 외야수로 뛴 그는 한국 프로야구리그의 최종 승자를 가리는 한국 시리즈의 출장 선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의 투지는 한국 시리즈에서도 빛을 발했다. 3차전 주루 과정에서 손가락 인대가 50% 가량 파열되는 부상을 당하고도 손가락을 고정하기 위해 벙어리 장갑을 낀 채 경기에 출전한 모습은 야구 팬들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을 장면이었다. 결국 팀은 통합 8연패를 달성하며 2014년을 마감할 수 있었다.

 

올 한 해 박 동문이 보여준 야구선수로서의 모습은 놀라웠지만, 이제 그는 프로 리그에서 뛴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선수다. 프로에서 첫 해를 보낸 신인이 들뜬 마음으로 미래를 예견해 보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꿈꾸는 미래는 화려하기보단 신중했다. "홈런 타자들은 임팩트가 있죠. 그것도 좋지만, 저는 한 방은 없어도 빠지면 안 되는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항상 근성이 있고 악착 같이 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고, 주전이 돼도 나이를 먹어도 초심을 잃지 않는 선수로 기억되고 싶어요." 한국 시리즈의 부상에서 이제 회복됐다며 손가락을 움직여 보인 박 동문의 모습에서 그 날의 간절함이 묻어났다. 근성 있는 선수로 남길 바란다는 그는 오늘도 묵묵히 꿈을 향해 몸을 던지고 있었다. 

 

   

 

 

 

최정아 기자 shaoran007@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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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권요진 기자 loadingman@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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