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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 17 헤드라인

[동문]나는 매일 성장하는 1번 타자

성장은 비단 나이를 먹고 체형이 커지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단어 안에는 한 사람의 세계가 폭넓어진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을 것. 박해민 동문은 고등학교 때까지 내야수로만 뛴 데다 수비가 약점으로 취급되던 선수였다. 2012년 프로야구 드래프트에서 지명받지 못해 신고(육성) 선수로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다. 2군만 해도 이미 자신만큼 치고 수비하는 선수들이 수두룩해 보였다. 그런 그가 이제는 3년 연속 도루왕에 국내 최정상급 외야수로 평가받으며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그동안 그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취재 미디어전략센터 / 사진 손초원 ▲삼성 라이온즈 박해민 선수(스포츠과학부 08) 신고 선수로 프로에 입문하다 무더위가 온몸을 덮치던 지난여름, 삼성 라이온즈가 원정경기차 찾은 잠실야구장에서 박해민 동문을 만났다. 2012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한 박해민 동문은 특히 도루와 수비 능력이 뛰어난 국내 대표 1번 타자로 통한다. 2014년부터 주전으로 도약하며 팀 우승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이후에도 꾸준히 능력을 향상시키며 2015년부터 2017년까지 3년 연속 도루왕을 차지했다. 뛰어난 낙구 판단과 빠른 발을 활용한 넓은 수비 범위가 빛을 발하며 외야 수비에서도 국내 최정상급이라는 수식어가 따른다. 이제 많은 2군 및 신인 선수들의 롤모델로 손꼽히는 박해민 동문이지만 처음부터 빛을 발했던 것은 아니다. "2012 KBO 드래프트 나갈 당시 대학 선수 중 타격 성적(4할 2푼 9리)이 가장 좋았습니다. 그 때문에 쉽게 뽑힐 줄 알았고, 프로에서도 잘할 자신이 있었는데 지명이 되질 않았죠." 고등학교 때까지 내야수(2루수)로만 뛰던 그는 한양대학교에 입학한 후 야구부 감독 및 코치진들에게 외야수로 전향하라는 제안을 받는다. 내야수로 뛰기에는 송구 등의 수비 문제가 지적된 것. 내야수라는 포지션에 애착이 많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받아들여야 했다. “외야수를 쉽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어려운 포지션에 적응하기 위해 새벽 넘어서까지 연습하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4년 동안 매일 갈고 닦았지만, 전문가들에게 그는 타격이 좋을 뿐 나머지 부분에서 그리 눈에 띄는 선수가 아니었다. 외야 수비는 대학교 들어서야 전향했고, 도루는 대학 통산 7개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드래프트 직후, 그의 가능성을 본 삼성 라이온즈는 그에게 신고(육성) 선수로 입단하라는 제안을 보낸다. ‘신고 선수의 신화’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1군 주전의 열쇠- 주루와 수비 신고 선수는 쉽게 말해 연습생으로 신고만 되어 있을 뿐, 정식 등록 인원에는 포함되지 않는 비정규직이다. 리그 최저 연봉을 보장받지 못하며 당장 언제 퇴출당할지 알 수 없다. 박해민 동문은 그런 악조건을 뛰어넘어 2014년 1군 주전으로 발돋움했다. “2군 코치님들이 제게 강조하신 건 주루와 수비였어요. 그래야 제가 프로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거였죠. 그때부터 타격이나 다른 부분도 열심히 했지만, 특히 주루와 수비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악조건을 뛰어넘으며 1군 주전으로 발돋움한 박해민 선수 경기 후에 충분한 휴식이 보장되는 대학 때와는 달리 프로에서는 일주일에 여섯 번은 경기에 나서고, 매일 훈련을 했다. 그는 직접 부딪치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프로 세계에 맞게 만들어나갔다. 시간과 땀이 쌓일수록 요령이 보였고, 그럴수록 두 눈 앞에는 프로야구의 더 넓은 길이 보였다. 람보르미니가 되기까지 박해민 동문은 야구 인생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2014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손꼽는다. 우승 외에 2014년이 각별한 이유는 또 있다. 그해 비로소 팀의 주전 외야수이자 1번 타자로 발돋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14년 36개 도루를 기록한 그는 2015년부터 2017년까지 3년 연속 도루왕에 오르며 국내 최고의 리드오프로 성장했다. 팬들은 그가 람보르기니처럼 빠르게 질주한다며 ‘람보르미니’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처음 1군에 올라왔을 때 당시 김평호 코치님이 도루 요령을 세심하게 알려주신 덕분에 요령을 터득할 수 있었어요. 가르쳐주신 내용을 실전에 적용하려고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했습니다. 도루를 잘하려면 상대 투수의 버릇을 유심히 관찰해야 해요. 그리고 변화구 때 뛰는 게 시간적으로 조금 더 여유가 있으니 그 타이밍을 파악하려고 애쓰죠. 도루할 때는 그저 ‘한 베이스 더 나가면 충분하다’는 생각으로 임합니다. 중요한 건 내 기록이 아닌 팀의 승리니까요.” ▲박해민 선수는 2015년부터 2017년까지 3년 연속 도루왕에 오르며 국내 최고의 리드오프로 성장했다. 수비 역시 마찬가지다. 외야 전향 직후 ‘수비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따랐지만 대학 때도 프로에서도 그는 묵묵히 연습에 매진했다. 경험이 쌓이면서 자신에게 날아오는 타구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고,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기만 해도 대략 어느 방향으로 공이 오겠다는 감이 생겼다. 매일 더 나은 선수가 되고 싶다 야구선수들은 무더위는 물론 주변 모든 것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 모든 것이 컨디션과 직결되니까 말이다. 박해민 동문이 컨디션을 유지하는 비결은 간단했다. “잠을 많이 자는 게 최고인 것 같아요. 그래야 몸이 충분히 회복될 수 있거든요. 그 밖에는 체력 보강 차원에서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요.” 충분한 수면을 취하며 컨디션 유지에 힘쓰는 건 물론 리그 일정 때문이지만, 올해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지난 8월부터 열린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야구 국가대표로 선발됐기 때문이다. 국가대표가 되기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이 떠오른다는 그는 특히 대학 시절 자신을 지도하고 보살펴준 당시 감독 및 코치진, 그리고 적극적으로 학생들을 지원한 학교 측에 고마움을 표현했다. “야구에 대한 고민이 많던 때에 당시 감독님과 코치님들을 만나 외야수라는 자리에 안착할 수 있었습니다. 공격과 수비 모든 측면에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인간적으로 잘 챙겨주셨죠. 프로 세계에 대한 조언도 해주셨고요. 그분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겁니다. 무엇보다 한양대 야구부 자체가 대학 야구의 명문이잖아요? 학교 측 지원이 워낙 좋았고 야구부 시설이 체계적으로 갖춰져 있어서 훈련과 경기에만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선발된 박해민 선수는, 국가대표가 되기까지 대학 시절 자신을 지도하고 보살펴준 감독 및 코치진, 그리고 적극적으로 학생들을 지원한 학교 측에 고마움을 표현했다. 태극마크는 쉽게 오르기 힘든 만큼 어떤 선수나 동경하는 일일 테다. 그는 자신이 주전이라 생각하진 않는다며 대주자로 나가든, 대수비로 나가든 최선을 다해 우승에 일조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남보다 빠르게 뛰어 베이스를 훔치고, 한 발 앞서 수비하며, 더 정교하게 타격하고자 노력한다. 마치 노력만이 자신의 가장 큰 무기라는 듯이. 때문에 그의 이름 앞에는 람보르미니라는 별명 외에도 허슬 플레이를 하는 선수, 항상 노력하는 선수라는 수식이 붙는다. 그 역시 그 수식이 마음에 드는 눈치다. “아직 부족한 게 많아요.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은 선수가 되고 싶기 때문에 매일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팬 분들도 그런 제 모습을 좋아해주시고요.” 그의 몸은 처음 야구를 시작했던 초등학교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하지만 성장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야구를 대하는 그의 성실함은 ‘그’라는 세계를 좀 더 넓고 여유롭게 만들었다. 앞으로 그의 세계는 얼마나 더 넓어질까. 그리고 그 안에는 얼마나 매혹적인 야구의 이야기들이 펼쳐질 것인가. 그곳에서 그는 오늘도 변함없이 온몸으로 부딪쳐가며 야구와 이 세계를 배워나가고 있다.

2015-01 07

[동문]1%의 기적

"가는 거야, 가는 거야, 저 거친 세상으로" 천둥 같은 함성이 그라운드로 내리 꽂힌다. 사람들은 타석에 들어선 선수의 이름을 환호하며 노래를 부른다. 팀을 상징하는 색깔로 가득 채워진 관중석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거센 파도처럼 넘실댄다. 모두 타석에 오른 선수를 응원하는 모습이다.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프로야구 선수는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거친다. 대학과 고등학교 야구부에서 활약을 한 선수들 중 약 15%만이 프로 팀에 지명을 받고, 그 중에서도 약 7%, 즉 전체 선수의 1%만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환호를 받는 1군 경기에 출전해볼 수 있다. 지명에 실패한 85%에서 함성 소리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1%의 자리에 오른 박해민 동문(생활체육.08)을 만나봤다. 야구, 우연에서 운명으로 한국 프로야구의 최강자를 가리는 한국 시리즈 3차전, 커다란 벙어리 장갑을 끼고 나온 선수가 있었다. 그는 장갑을 낀 채 다른 선수들을 대신해서 주루를 했고, 몸을 날린 수비 장면에서는 해설자의 입에서 칭찬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박해민 동문(생활체육.08)의 벙어리 장갑 아래에는 직전 경기에서 당한 부상으로 제대로 구부리기도 힘든 손가락이 숨어 있었다. 어려움 끝에 프로 선수의 자리에 오른 그의 한국 시리즈 출전은 부상도 막을 수 없었다. 박 동문은 어렸을 때부터 움직이기를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종목은 가리지 않았다. 부천에서 이사온 서울의 초등학교에 야구부가 있었던 것이 그가 야구를 시작하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집에서 조금 먼 학교로 배정이 됐는데 그 곳에는 야구부가 있었고, 집에서 가까운 다른 학교에는 축구부가 있었어요.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배정해달라고 구청에 전화도 했는데 변하는 건 없었어요. 그래서 집에서 먼 학교를 다니면서 야구부를 들어갔습니다. 만약에 야구부가 없었던 다른 학교에 갔다면 축구를 했을 수도 있겠죠." 우연히 시작한 야구에서 재미를 느낀 그는 중학교 즈음부터 프로 선수의 꿈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우리대학에 입학한 박 동문은 운동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습관을 터득했다. 바로 스스로 생각하면서 운동을 하는 습관이었다. "고등학교까지는 '해야 하니까'라는 생각으로 야구를 했습니다. 하지만 대학에 와서는 감독님이 선수들의 자율성을 보장해주시면서 야구에 대한 가치관을 정립하게 됐습니다. 정말 하고 싶어서 야구를 하다 보니 능률도 많이 올랐어요." 박 동문은 결국 4학년 당시 자신의 최고 성적을 올리며 졸업한다. 그러나 드래프트(Draft: 프로 야구 구단이 정해진 순번에 따라 원하는 선수와 계약을 하는 제도) 지명의 날, 박 동문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구단은 하나도 없었다. 입단 실패, 부상… 그리고 비상 "태어나서 제일 많이 울었어요."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가족들과 함께 지명 결과를 확인한 박 동문은 침대에 누워 엉엉 울었다고 말했다. "3일 동안 밥도 안 먹고 울고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어요. 그간 뒷바라지 해주신 부모님께 죄송스럽고, 이제 야구 안 할 거라고 했어요" 지명을 받는 데에는 실패 했지만 프로 야구 구단인 삼성 라이온즈는 박 동문이 신고선수로 구단에 입단하길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신고선수는 한국야구위원회(KBO)에 정식 선수로 등록되지 못하고 신고만 돼, 우리가 흔히 보는 프로야구 경기에는 뛰지 못하는 선수다. 드래프트 1순위의 선수는 많게는 3억에서 최저 2400만원의 계약금을 보장받지만 신고선수는 계약금도 보장 받지 못한다. 박 동문은 '한 번만 더'라는 생각으로 신고 선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신고 선수로 계약한 후 박 동문은 아마추어를 대상으로 하는 야구 월드컵에 출전했다. 각국의 대표 아마추어 선수들 사이에서 박 동문은 3할 8푼이 넘는 성적을 올리고 동점 홈런을 치는 등 큰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그 후 번번이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고질적인 어깨 부상이었다. "처음 입단한 후에도 어깨 부상 때문에 몇 달 동안 재활만 해야 했습니다. 어영부영 한 시즌이 지나가고, 다음 해에도 또 어깨가 아팠어요." 그 때까지도 대학 시절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 사이에서 괴리를 느끼던 박 동문은 다시 야구를 그만둬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그만큼 몸도 마음도 지쳐있었던 것. 그런 그를 다시 일으킨 것은 팀의 트레이너였다. "트레이너 한 분이 자기를 믿고 3개월만 재활을 해보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구단에서 누구도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는데 말이에요. 나를 믿어주는 사람을 위해서 3개월만 더 해보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다시 한 번 재활의 시간을 보낸 그는 부활에 성공했다. 입단 실패와 부상 슬럼프를 견뎌낸 그의 인내는 2014년 4월, 고대하던 1군 무대에 출전하는 것으로 보상받았다. "임팩트 있는 선수보단, 간절한 선수로 기억에 남길" 올해 4월, 1군 무대에 오른 박 동문은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였다. 적시적소에서 터지는 안타로 득점을 올리는 모습은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의 진가는 특히 수비와 주루에서 발휘됐다. 야구는 던지고 치는 싸움이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은 쳐낸 공을 훔치는 수비와 공을 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는 주루 싸움이다. 박 동문은 2군에서 생활하는 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타석은 네 번쯤 들어갈 수 있습니다. 기회가 많죠. 하지만 '파인 플레이(Fine Play)'라고 칭찬받는 호(好)수비는 10번 경기를 할 동안 한 번 나올 정도로 기회가 드물어요. 제가 열심히 연습한 것을 실제 경기에서 해냈을 때의 그 짜릿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2군에서 연마한 실력은 1군에서 폭발했다. 4월부터 10월까지 1군의 외야수로 뛴 그는 한국 프로야구리그의 최종 승자를 가리는 한국 시리즈의 출장 선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의 투지는 한국 시리즈에서도 빛을 발했다. 3차전 주루 과정에서 손가락 인대가 50% 가량 파열되는 부상을 당하고도 손가락을 고정하기 위해 벙어리 장갑을 낀 채 경기에 출전한 모습은 야구 팬들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을 장면이었다. 결국 팀은 통합 8연패를 달성하며 2014년을 마감할 수 있었다. 올 한 해 박 동문이 보여준 야구선수로서의 모습은 놀라웠지만, 이제 그는 프로 리그에서 뛴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선수다. 프로에서 첫 해를 보낸 신인이 들뜬 마음으로 미래를 예견해 보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꿈꾸는 미래는 화려하기보단 신중했다. "홈런 타자들은 임팩트가 있죠. 그것도 좋지만, 저는 한 방은 없어도 빠지면 안 되는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항상 근성이 있고 악착 같이 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고, 주전이 돼도 나이를 먹어도 초심을 잃지 않는 선수로 기억되고 싶어요." 한국 시리즈의 부상에서 이제 회복됐다며 손가락을 움직여 보인 박 동문의 모습에서 그 날의 간절함이 묻어났다. 근성 있는 선수로 남길 바란다는 그는 오늘도 묵묵히 꿈을 향해 몸을 던지고 있었다. 최정아 기자 shaoran007@hanyang.ac.kr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사진/권요진 기자 loadingman@ha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