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7건
뉴스 리스트
게시판 리스트 컨텐츠
2017-04 28

[인포그래픽]국내 6대 로펌 변호사 출신대학, 한양대 TOP 4

국내 6대 대형 로펌(매출액 및 변호사 수 기준)에 재직 중인 변호사들의 출신대학 조사 결과, 한양대는 38명으로 네 번째 많게 나타났다. 머니투데이 더엘(theL)은 광장·김앤장·세종·율촌·태평양·화우 6곳에 재직 중인 국내 변호사 2163명을 전수조사하고 4월 8일 자 기사로 소개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학부 기준으로 서울대 출신이 1395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고려대 325명, 연세대 190명, 한양대·성균관대 각 38명, 경찰대 37명, 카이스트 21명, 이화여대 20명, 부산대 9명, 서강대 8명 등의 순으로 조사됐다. 해외지역 대학 출신은 14명이었다. 출신 로스쿨별로는 한양대가 10명으로 전체 2.62%를 차지해 7번째 높았다. 서울대 로스쿨 출신이 146명(38%)으로 가장 많았고 연세대 74명(19.42%), 고려대 70명(18.37%), 성균관대 16명(4.20%), 서강대·이화여대 각 12명(3.15%), 한양대 10명(2.62%), 경희대 7명(1.84%) 등의 순이었다. 출신 시험별로는 사법시험 1757명, 변호사시험(로스쿨 출신) 381명, 군법무관 15명, 고등고시 10명으로 나타났다. 성별로는 남성 1679명, 여성 484명으로 남성 변호사가 여성 변호사보다 3배 넘게 조사됐다. 한편, 조사 대상 6대 로펌 2163명의 국내 변호사 중 김앤장이 555명으로 가장 많았고 광장 402명, 태평양 395명, 세종 305명, 화우 258명, 율촌 248명 순이었다.

2016-08 03

[동문]판타지·무협 소설 연재하는 변호사, 강정규 동문

▲ 강정규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동문(이미지출처: 머니투데이) 머니투데이 8월 1일자 <“국내 웹소설 2~3년내 中서 게임·드라마로 성공할 것”> 기사에서 강정규 변호사가 소개됐다. 강 변호사는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출신으로 변호사 시험 2회에 합격해 변호사가 됐으며, 인터넷에서 판타지·무협 웹소설을 연재한 남다른 이력이 알려져 주목을 받았다. 기사에 따르면, 강 동문의 로스쿨 진학 스토리 또한 남다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작가를 꿈꿨다. 실제로 대학시절 취미로 연재를 하며 꿈을 키워가던 중, 군입대 전 출간한 작품이 출판사가 문을 닫으면서 저작권 분쟁에 휘말렸다. 이후 저작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고 로스쿨에 입학했다. 이러한 계기로 강 동문은 현재 저작권 전문 변호사가 돼 한국교육방송공사(EBS)에서 저작권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글을 쓰고 책을 내 문학상을 받는 변호사는 더러 있지만, 특이하게 판타지·무협 소설 장르에서 활약하고 있는 그는 기사를 통해 앞으로의 포부를 밝혔다. 향후 강 동문은 로스쿨 학생들을 소재로 한 작품을 출간할 계획이며 웹소설의 지적재산권(IPR)을 중국에서 게임화하는 게 목표라고 전했다.

2015-12 30 중요기사

[동문][한양패밀리] 노력으로 쌓는 시간의 켜, 그 힘을 믿는다 (1)

브라운관에서 내일의 날씨를 예보하던 기상 캐스터 한수정 씨는 이제 변호사라는 새로운 명함을 갖게 되었다. 현실에 안주하기보다 변화를 갈구하고, 자신이 택한 길에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성실함은 그녀만이 가진 막강한 무기다. 한수정 변호사는 노력하는 시간은 절대로 배반하지 않는다는 쉽고도 어려운 깨달음을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에디터 박선영 | 글 임상범 | 사진 성균 | 스타일링 및 헤어&메이크업 이윤정, 이윤선(목 커뮤니케이션) ▲ 한수정 변호사 (신문방송학·02) Q. 대학 시절을 돌이켜볼 때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요? 아나운서가 되기를 꿈꾸며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고, 1학년 때부터 방송국 활동을 했어요. 선후배와 친하게 지내며 방송에 관한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죠. 대학 방송의 꽃이라는 오디오 방송을 진행하고, 드라마나 뮤직비디오를 찍느라 밤새 연기를 하며 제작물을 만들기도 한 재미있는 시간이었어요. Q. 아쉽거나 후회되는 일도 있었겠죠? 아나운서로 취직하려면 나이가 중요해서 빨리 졸업하려고 교환학생이 될 기회를 포기했고, 친구들처럼 해외 배낭 여행도 못 해봤다는 점이 아쉬워요. 고생해도 좋고, 허름한 숙소에서 잠을 청해도 좋은 그런 시기였는데 말이죠. 학교 졸업 후 여행을 가보니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것은 물론 깨달음이 생기더라고요.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들의 사는 방식을 보며 또 최소한의 짐을 가지고 다니면서 옷이나 가구 등 물질적인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건강의 소중함도 배웠고요. Q. 일찍 장래희망을 결정하고 매진해온 학생이었네요. 글을 쓰거나 말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에 관심이 많았어요. 고등학생 때, 이런 바람과 연관 지어 떠올릴 수 있는 직업이 아나운서라 막연하게나마 되고 싶었어요. 아나운서는 글도 쓰고 방송에서 직접 말을 할 수도 있고 작가는 나중에라도 할 수 있으니까 일단 지금 가능할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뚜렷한 장래희망이 있었는데도 경영학을 부전공하고, 석사학위를 받는 등 참 열심히 살아왔구나 싶어요.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무조건 시도해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거든요. 언제, 어떻게, 어떤 일을 할지 모르니까요. 걱정이나 두려움이 따르지만 상황을 만들고 나를 던져놓는 식으로 살아왔어요. 그래서 저는 늘 고생해요.(웃음) 로스쿨 진학도 마찬가지였어요. ▲ 한수정 변호사 (신문방송학·02) Q. 방송사를 그만두고 변호사가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여성 방송인을 보는 사회 일부의 시선이 느껴졌어요. 기상 캐스터나 아나운서로 전문성을 키워도 한계가 있겠구나 싶었어요. 29, 30세 무렵 아나운서 학과 강의를 맡을 기회를 얻었는데, 벌써 후학을 키우는 자리에 서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 더 늦지 않았을 때 변화를 시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Q. 목표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겠지요? 이런 표현이 좀 우스운데 저는 굉장히 성실한 타입이에요.(웃음) 타고난 재능이 전혀 없으니 남들보다 노력해야 그들을 따라 갈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거든요. 처음에는 채널A로 옮기면서 로스쿨을 다닐 계획이었어요. 근무 시간을 짧게 잡아 계약했는데도 학업 병행이 어려워 퇴사를 결정하게 되었어요. Q. 승승장구해온 듯 보이지만 실패와 좌절의 순간도 있었겠죠? 대학 4학년 때 전국일주라고 할 만큼 부산, 제주도까지 전국의 방송사 시험에 도전했어요. 경험을 쌓기 위해 아나운서는 물론 기자 시험까지 도전했어요. 스무 번 넘게 낙방하니 주변에서 “아나운서와 맞지 않다, 아나운서 하지 마라” 하는 이야기도 많았어요. 로스쿨에 다닐 때는 직장까지 그만두고 왔는데 1학기 성적을 받고 놀랐어요. 그 이후론 ‘열람실에 오래 앉아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각오로 시간을 투자해가며 공부했고, 로스쿨 친구들에게 묻고 또 물어가며 과정을 밟아나갔죠. 저는 어떤 일이든 3년 동안 해보고, 그때도 안 되면 포기하라는 말을 믿었던 것 같아요. 내가 하고 싶은 분야라면 스스로 납득이 될 정도까지 시도해보고 포기해야 나중에라도 미련이 없을 테니까요. 후배들에게도 하고 싶은 분야를 찾았다면 포기하지 않으면 어떻게든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Q. 드디어 올해 변호사가 되셨죠? 신입 변호사로 주로 어떤 일을 맡고 계신가요? 일반 민·형사, 상법 쪽으로는 기업 자문도 하고, 영업비밀과 상표권, 특허 분야처럼 미처 생각지 못한 쪽도 시작했어요. 금융 분야도 공부 중이에요. 경영학을 부전공하며 어렵게 배운 재무회계가 기업의 대차대조 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더라고요. 변호사는 정말 다양한 분야를 알아야 하는 만큼 경험을 쌓으며 제 것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Q. 어떤 변호사가 되고 싶은가요? 새로운 사건이 들어올 때마다 그 분야를 파악하기 위해 많은 공부가 필요한 직업이에요. 사회가 변하고 법도 달라지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전문적인 지식을 쌓으며 스스로를 발전시켜야 해요. 앞으로는 기상 캐스터의 경력을 살릴 수 있는 환경 분야나 도전할 거리가 많은 금융 분야에 좀 더 관심을 두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잡기 힘든 공을 잡아내는 믿음직한 외야수 같은 역할을 하고 싶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매번 홈런을 약속하진 못하지만 1루라도 나가서 경기의 활로를 터주는 믿음이 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도 했다. 누구보다 이력이 화려하기에 그녀의 답변은 소박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분명한 건 한수정 변호사는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피하지 않고 스스로를 상황 안으로 내던질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묵묵히, 성실하게. 한수정 변호사 (신문방송학·02) 프로필 한양대 신문방송학, 경영학 부전공 (2006) 한양대대학원 저널리즘·커뮤니케이션 석사 (2009) YTN (2006 ~ 2011) 채널A (2011 ~ 2012) 한국기상산업진흥원 홍보대사 (2011) 한양대법학전문대학원 (2015) CnP법률사무소 (2015 ~ 현재)

2015-04 08

[동문]검사로서의 신념을 이어가는 변호사

항상 약자의 편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길 우리는 각종 뉴스와 신문을 통해 살인, 사기 등 법을 어긴 사람들을 수 없이 마주친다. 엄연히 법이 존재하건만, 이를 지키지 않거나 악용하는 이들은 너무나도 많다. 이들의 범죄를 수사하고, 기소하여 사회의 정의(正義)를 구현하는 사람을 우리는 검사(檢事)라고 부른다. 권력과 외압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과 법에 따라 범죄를 수사했던 검사들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어왔다. 22년간의 검사생활을 끝마치고 변호사로 제 2의 인생을 시작한 최운식 동문(법학.81)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빈농의 자식에서 뛰어난 검사가 되기까지 지난 2011년, 총 7곳의 대형저축은행이 영업정지처분을 받으며 시작된 '저축은행비리사건'은 대한민국을 큰 충격에 빠트렸다. 저축은행을 믿고 돈을 맡겼던 많은 서민들이 큰 피해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검찰청은 '저축은행비리합동수사단'(이하 합수단)을 설치하여 수사를 시작했고, 최운식 동문에게 지휘를 맡겼다. 최 동문의 지휘 하에 합수단은 무려 525일간 철저한 수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각 저축은행들의 불법투자와 부실대출, 비자금 조성사실 등 온갖 비리를 낱낱이 밝혀냈다. 또한 합수단은 비리 관련자들로부터 총 6564억 3100만원에 달하는 책임재산을 환수했으며, 특히 이명박 전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전 의원 등 대통령의 최 측근과 정두언 새누리당 의원, 박지원·이석현 민주통합당 의원 등 정관계 거물 21명을 기소하는 놀라운 성과를 남겼다. 이처럼 검사로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최 동문이지만, 그가 검사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최 동문은 강원도 춘천의 가난한 농부집안에서 태어나 충남 금산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작은 논을 일궜지만 가족이 겨우 먹고 사는 정도였고 최 동문은 항상 배고픔을 달고 자라야 했다. 꽁보리밥과 고구마밥을 먹으며 자란 그의 어린 시절은 한마디로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최 동문은 "그래도 굶지는 않았던 것 같다" 며 덤덤하게 과거를 회상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담임선생님이 합숙을 시켜가며 고교 진학을 지도했고, 결국 대전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선생님 두 분께서 번갈아 합숙을 하시면서 가르치셨어요. 결국 시험을 봐서 좋은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생활이 만만치 않았어요. 집이 너무 멀어서 친구 누나가 해주는 밥을 먹으면서 공부했죠." 고교 시절, 프랑스어 선생님을 동경하며 시인을 꿈꾸던 최 동문은 대학에서도 프랑스어를 전공하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고, 그는 결국 우리대학 법학과에 진학하게 됐다. "사실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감당하기가 힘들었죠. 그래서 우리대학 법학과를 선택하게 됐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대학 법학과에 진학했지만 처음에는 법학에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항상 술과 농구에 빠져 지냈고, 결국 1985년에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바로 입대를 선택했다. 제대 후 취직을 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맘처럼 되지 않았고, 결국 사법고시를 준비하게 됐다. "취업도 안됐고, 한 번 제대로 공부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 시험을 봤을 때 1차 시험에서 떨어졌지만 점수는 높아서 법대 고시반에 들어갈 수 있었죠. 그때부터 고시반에서 특강을 들으며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워낙 활발한 성격이었던 최 동문은 공부도 혼자 하지 않았다. 후배들을 모아 함께 나올만한 문제를 예상해가며 공부를 했다. 각 대학 법학과 수업의 시험문제를 모아서 책자를 구성했고, 교수님들의 성향을 분석했다. "그때는 참 공부하는 것이 즐거웠어요. 다 함께 공부를 하다가 나가서 축구 한판하고 음료수 한 잔씩 하고 다시 공부하곤 했죠." 최 동문의 전략적인 공부방식은 효과가 있었다. 그 해 사법고시에 출제된 24문제 중 11문제가 모두 예상했던 문제였던 것이다. "민법 시험 전날 느낌이 왔어요. '무효행위의 전환'이 시험에 나올 것이란 확신이 들었고 후배들에게 자료를 줬죠." 결국 그 해 사법고시에서 우리대학은 29명의 합격자를 배출했고 최 동문은 3등을, 같이 공부하던 친구는 2등을 차지했다. 검사로서의 신념 28살에 공부를 시작해 2년 만에 사법고시를 통과한 최 동문은 사법연수원을 거쳐 검사가 됐다. 판사, 변호사의 삶도 택할 수 있었지만 검사의 길을 선택한 최 동문은 정말 나쁜 짓을 한 사람을 법정에 세우고 싶었다고 한다. "약한 사람에게 나쁜 짓을 하는 것은 사람을 두 번 죽이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프고 약한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싶었죠. 검사라는 직업은 정말 의지와 노력에 따라 그 결과를 바꿀 수 있는 직업이니까요." 이런 그의 생각은 검사생활 내내 이어졌다. 사건을 바라보는 자세에 있어서도 최 동문은 항상 약자의 편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려 노력했다고 한다. "다양한 사건들을 맡았었고, 정말 가슴 아픈 일들도 많았어요. 검사인 나에게는 매일 일어나는 일들이지만 정말 억울한 사람들에게는 평생에 한번 있는 일이잖아요. 초기에 수사가 제대로 안돼서 법정에 세울 수 없을뻔했던 사건들도 많았지만 다시 한번 꼼꼼히 살펴보면서 잘못된 부분을 찾을 수 있었죠. 검사로서, 스스로 먼저 나서서 누군가 아픈 구석이 있는지 찾아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22년간의 검사생활 동안, 최 동문은 수 많은 사건들을 처리했고 억울한 피해자들을 구제하는데 앞장섰다. 꽤나 규모가 큰 사건들도 많이 맡았지만, 최 동문은 가장 기억에 남았던 사건으로 한 중소기업 여직원에 관한 일화를 언급했다. "어떤 중소기업 여직원이 10년 넘게 동고동락하던 사장으로부터 8000만원을 사기 당한 사건이 있었어요. 여직원은 사기를 당했다고 주장했지만, 경찰에서는 사장을 무혐의로 판단해버렸죠. 사실 그런 경우에는 검찰에서도 그냥 경찰과 같은 의견이라고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꽤 있어요. 그런데 그 8000만원이라는 금액이 제게는 조금 다르게 다가왔어요. 적어도 그 여직원에게는 평생 모은 돈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고 한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이라고 판단했죠. 결국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한 번 철저히 조사해본 결과, 3일 만에 사장의 사기행각을 밝혀낼 수 있었어요. 곧바로 사장을 기소해서 법정에 세웠고, 여직원은 자신의 돈을 돌려받게 됐습니다. 그 사건을 마치고 나서 여직원이 제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을 때 더할 나위 없는 보람을 느꼈고, 제 검사생활 22년 동안 맡은 사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됐습니다." 검사로 재직하며 검사로서의 신념과 충돌하는 일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최 동문은 신념을 지켜나갔다. "아무래도 검사로서의 제 신념에 반하는 일들이 없지는 않았어요. 반드시 수사해야 하는 사건인데 외압이 들어오고, 간섭하려 할 때는 사표를 써내고 수사한적도 여러 번 있었죠. 비록 검찰이라는 조직이 피라미드 형태로 구성돼 있고 상명하복의 관습이 존재하지만, 사건을 맡은 검사가 자기 자리까지 내걸고 수사를 하겠다는데 그걸 막을 수는 없어요. 심지어 '옷 벗으면 그만'이라는 생각도 많이 했죠. 그때야 퇴직하고 변호사로 생활해도 먹고 살 걱정은 없었을 시절이니까요(웃음)." 변호사, 새로운 출발 꿋꿋이 검사로서의 신념을 지켜나가던 최 동문은 올해 돌연 퇴직을 결심했다. 지금이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지금이 딱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장 행복할 때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사실 처음 검사가 될 때는 아내에게 딱 10년만 검사하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어느덧 돌아보니 22년이 흘렀더군요. 저는 항상 검사로서 너무나도 행복했는데, 제 가족은 그렇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난 2월, 대구지방검찰청 김천지청장으로서의 직무를 마지막으로 검사복을 벗은 최 동문은, '법무법인 대륙아주'에서 변호사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최 동문은 변호사로서 주로 금융, 조세 분야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검사 재직시절 금융조세1부 부장을 맡아 다양한 사건을 맡기도 했고, 저축은행비리합동수사단장으로도 활약을 펼친 만큼 금융, 조세 분야에 있어서 전문가로 확실히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최 동문은 변호사의 업무도 검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강조했다. "변호사라고 하면, 막연히 나쁜 사람을 변호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생각이 좀 달라요. 물론 잘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겠지만, 억울하게 누명을 쓴 부분도 있을 수 있는 거죠. 실제로 그런 사례가 많이 있습니다. 변호사는 유죄를 무죄로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관계를 명백히 밝혀서, 죄를 지었다면 그 죄만큼만 처벌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최 동문은 후배들에게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삶'을 주문했다. "저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운이 좋았던 만큼 많이 베풀려고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정말 큰 보람을 느낄 수 있었죠. 뻔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여러분 삶의 주인은 바로 여러분이에요.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려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보람을 찾을 수 있어야 해요. 그게 무엇이 되었든, 여러분이 하는 일에서 보람을 느낄 수 있길 바랍니다." 정우진 기자 wjdnwls@hanyang.ac.kr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사진/박설비 기자 sbi444@hanyang.ac.kr

2014-01 02

[동문]바다 건너 변호사가 된 공대생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제도 도입으로 국내 법조시장은 치열한 경쟁체제에 돌입했다. 더불어 한국과 유럽연합(EU)의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라 지난 2011년부터 국내 법률시장은 유럽 로펌에 단계 별로 개방 중이다. 대규모 영국로펌들은 아시아 시장 진출을 꿈꾸기 시작했다. 신영훈 동문(신소재.97)은 이런 법조시장의 흐름을 꿰뚫었다. 향후 개방된 국내 법률시장에서 한국계 영국 변호사로 활약하며 국제 경쟁력을 갖추겠다는 것. 영국 변호사를 꿈꾸며 바다를 건넌 어느 공대생의 이야기. 영국로펌 링클레이터스(Linklaters LLP) 변호사 신영훈 동문을 만났다. 간단히 본인 소개를 부탁한다. 2004년에 신소재공학부를 졸업했습니다. 외국계 금융회사에서 4년간 일 하다 변호사가 되기 위해 영국 로스쿨로 유학을 떠났죠. 영국의 퀸즈메리 런던대학교(Queen Mary, University of London), 영국의 비피피 대학(BPP University)에서 공부를 마치고 올해 세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로펌 링클레이터스 런던 본사에 취업했습니다. 내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합니다. 신소재공학부를 졸업했다. 법은 생소했을 텐데, 법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라면. 대학에 입학할 때 공학에 뚜렷한 비전이 있진 않았어요. 사실 점수에 맞춰 과를 선택했거든요. 그러니 공학이 아닌 다른 공부도 해보고 싶었습니다. 졸업 후에도 특별히 제 전공인 공학을 살리는 길을 택하지 않고 외국계 금융회사에 입사했습니다. 본격적으로 법과 관련된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한 건 직장을 다니면서였죠. 회사에서 매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이런 프로젝트들은 법적인 이슈들을 주로 다루고 있었어요. 예를 들어 주식매입제도는 회사 모든 지부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로 자사 직원들에게 미국의 주식을 매입할 수 있게 하는 제도에요. 한국 직원들이 미국 주식을 구입하다 보니 자격, 개인정보, 세금 등의 여러 문제들이 관련돼있습니다. 회사직원으로서 로펌 변호사들과 함께 일을 진행하는데, 변호사들의 업무가 매력적이더라고요. 하나의 프로젝트를 완수하기 위해 언제나 스스로에게 지적인 자극을 주는 직업이라는 점이요. 함께 일하는 변호사들에게 진로 상담도 많이 했죠. 결국 퇴사하고 변호사의 길을 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국내 로스쿨이나 사법시험을 통해 국내 변호사의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굳이 영국계 변호사를 꿈꾼 이유는 무엇인가. 아버지가 무역업계에 종사하신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많은 해외 경험을 쌓았어요.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며 훗날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과 유럽의 자유무역협정으로 인해 법률시장이 개방되면서 영·미계 로펌이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현재 해외에서 국내에 들어온 변호사 대다수가 미국 변호사죠. 반면 '한국계 영국 변호사'는 그 수가 매우 적고 영국 로스쿨 및 로펌에 대해 국내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어요. 세계 탑 10 로펌 중에 영국계가 절반이나 있고, 미국 소재 기업을 제외한 국제 기업 간 거래는 영국법을 이용할 만큼 영국법이 세계적인데도 말이죠. 저는 국내 법률시장 개방 이후에는 '영국계 한국인 변호사'란 직업이 블루오션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2012년부터 영국계 로펌이 국내에 활발하게 진출하는 만큼 '한국계 영국변호사'도 곧 주목을 받을 거라고 생각해요. 영국은 우리나라보다 비 법전공자들에게 법조계 진입장벽이 낮다던데. 어떤 과정을 거쳤나. 영국은 미국 로스쿨 제도와 다르게 법대를 졸업하면 변호사가 될 수 있습니다. 우선 영국 법대에 입학하려면 고등학교 때의 학점, 자기소개서가 필요했죠. 영국 법대는 기본적으로 3년 과정인데 몇몇 학교에서는 학부를 졸업한 사람에게는 2년 과정을 제공했어요. 저는 나이가 있다 보니 2년 과정을 제공하는 학교에만 지원서를 넣었고요. 영국 변호사는 크게 사무변호사를 뜻하는 설리시터(Solicitor)와 법정변호사를 뜻하는 배리스터(Barrister)로 나뉘는데, 설리시터가 되기 위해서는 법대를 졸업한 후 1년짜리 법률실습과정인 LPC(Legal Practice Cuurse)를 거쳐야 합니다. 설리시터는 법정에서 직접 의뢰인을 변호하는 배리스터와는 달리 기업에서 일하는 변호사로 기업 업무와 관련된 송무를 담당하죠. 저는 설리시터가 되기 위해 영국의 퀸즈메리 런던대학교에서 2년간 법대과정, 영국 비피피 대학에서 1년 간 LPC과정을 거쳤습니다. 이 후 로펌과 T.C(Training Contract)를 맺게 되면 트레이니 설리시터(Trainee Solicitor)로서 변호사 업무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로펌에서 일정 견습기간이 끝나면 퀄리파이 설리시터(Qualify Solicitor), 진정한 변호사로서 활약하게 됩니다. 우리나라법이 아닌 영국법을 배운다는 점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다. 사실 '영국법' 보다도 용어 자체가 너무나 어려웠어요. 비유하자면 법은 영어로 된 것이 아니라 '법'이라는 새로운 언어로 만들어진 것 같았죠. 영국법은 우리나라 같은 대륙법이 아닌 영미법 체계로 법전의 조문보다는 판례 중심으로 돼 있어요. 판사들이 판례를 작성하는데 대부분 만연체라서 읽기 어렵더라고요. 예를 들어 부정의 부정은 긍정인데 이런 방법으로 부정을 한 대 여섯 번씩 반복해 놓으면 부정인지 긍정인지 엄청 헷갈려요.(웃음) 익숙해지는데 꽤 오래 걸렸던 것 같아요. 법대 재학시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재학 중에 무료법률서비스를 제공하는 프로보노(Pro Bono)라는 기관에서 실습한 적이 있었어요. 실제 변호사와 대동해서 사연을 듣고 무료 법률자문을 해주는 거죠. 동유럽에서 오신 한 아주머니가 기억에 남습니다. 식당에서 일했는데 임금을 제대로 못 받았다고 하시더라고요. 아주머니께서 영어를 사용하지 못해 손짓, 발짓을 이용해 간절한 표정으로 설명하시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제가 맡은 일은 해당 고용주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었어요. 사건이 이러이러하니 밀린 임금을 주지 않으면 법적인 조치를 취하겠다는 일종의 경고장이었죠. 아주머니가 말씀하신 사실을 바탕으로 초안을 짰어요. 노동법 등 책을 찾아가며 힘들게 작성했죠. 다 완성해서 고용주에게 보내고 나니 무척 뿌듯하더라고요. '일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이러한 무료법률서비스에 참여해야겠다'고 느꼈던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영국에서는 법조계에 진입하는 장벽은 낮은 대신, 좋은 로펌에 입사하기는 어렵다고 들었다. 링클레이터스에 입사한 비결을 꼽자면. 법대 2학년 때 T.C(Training Contract)를 맺기 위해 약 20여 개의 로펌에 지원을 했는데 다 떨어졌어요. 뭔가 조치를 취해야겠다 싶어서 학교에서 제공하는 잡페어나 세미나 등을 모두 참석했어요. 그곳에서 현업에서 일하고 있는 변호사들과 만나 원서를 어떻게 작성해야 하는지 묻고 또 물었습니다. 변호사들과의 수많은 대화를 거치고 나니 어떻게 원서를 쓰는지 노하우가 생기더라고요. 예를 들어 학창시절에 자신이 농구부 주장, 밴드부 활동을 했다면 이런 활동들을 통해 리더십이나 소통능력 등등 내가 무엇을 얻었는지를 설득력 있게 쓰는 거죠. 당연한 얘기지만 실제로 원서를 쓸 때 많은 도움이 되더라고요. 변호사들의 두 번째 조언은 입사를 희망하는 로펌에 대해 철저한 사전 조사를 하라는 것이었어요. 입사지원서 항목 중 '왜 우리 로펌에 지원했는가'라는 질문이 있는데 인사담당자들은 답변을 보면 이 사람이 정말 우리 회사에 오고 싶어하는지를 바로 느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여러 번의 실패 후에 변호사들의 조언을 귀담아 착실히 준비한 것이 좋은 결과를 낳지 않았나 싶습니다. 향후 로펌 링클레이터스(Linklaters LLP)에서 본인이 하게 될 업무는 무엇인가. 어떤 분야의 법률전문가가 되고 싶은지. 링클레이터스는 영국 내에서 탑5안에 드는 세계적인 로펌이에요. 제가 링클레이터스에 지원한 이유 또한 이 로펌이 세계적으로 활동하기 때문이죠. 특히 링클레이터스는 한국 법률시장에도 굉장히 관심이 많습니다. 주로 기업인수합병(M&A) 업무를 많이 맡는 만큼 저 또한 기업과 관련된 송무를 맡고 싶습니다. 법률시장 개방으로 영국로펌이 국내로 진출하게 될 텐데 양 국가의 경험을 모두 가지고 있는 제가 교두보 역할을 담당하고 싶고요. 영국에서는 비 법전공자들에게도 법률시장이 많이 개방된 만큼 변호사들이 법만 아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지식에도 전문성이 있어요. 또한 영국계 로펌에서도 변호사들에게 상업적인 판단능력을 요구하고 있고요. 저는 제 자신이 로펌에서 요구하는 이런 상업적 마인드를 잘 갖췄다고 생각합니다. 경제 사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며 이런 것들이 사회, 로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그 흐름을 읽을 수 있어야 하죠. 저는 현재 법 공부와 더불어 파이낸셜타임스(Financial Times)와 같은 경제지 등을 스크랩하며 이런 준비를 해나가고 있습니다. 변호사가 돼 국제무대로 진출하고자 하는 후배들을 위해 조언을 해준다면. 일단 저는 외국 거주경험이 있어 영국변호사가 되는데 유리한 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나는 해외경험이 없기 때문에 안 될거야'라고 포기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번에 저와 함께 로펌에 입사한 동기는 해외 경험이 전혀 없었던 친구였거든요. 그만큼 꿈이 있다면 미리 겁먹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후배들이 쉽게 도전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변호사라는 직업이 멋져 보이기 때문에', '수입이 많을 것 같아서' 라는 이유로 뛰어들기에는 위험부담이 매우 큰 직업이기도 합니다. 해외에서 활약하는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는 변호사들이 무슨 업무를 하는지 직접 알아보고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인지 확신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배슬찬 취재팀장 yahoo202@hanyang.ac.kr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정규진 사진기자 flowkj@hanyang.ac.kr

2013-09 09

[동문]모교에서는 석좌교수로, 로펌에서는 후배들의 뒷심으로

손용근(71·법학) 변호사는 ‘한양대 1호 법조인’이다. 명예와 은혜로운 부채를 함께 준 그 꼬리표를 짐으로 여기지 않고 성공의 발판으로 삼아 법조계의 큰 산이 됐다. 수십 년을 모교의 빛이 되어온 그는 2년 전 35년간 입었던 법복을 벗고 법무법인(유) 동인의 대표 변호사로 새 인생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여러 명의 한양대 후배들이 노년의 선배를 도와 함께 일하고 있다. 글 손미경 | 에디터 최미현 | 사진 정현구 ▲ 손용근 법무법인(유) 동인 대표 변호사 신이 보낸 윙크, 병영교회와 한양대 우리가 우연이라 여기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서로 얽히고설켜 신비의 고리를 만들며, 그 고리는 우연을 가장해 인생을 변화시킨다. 손용근 변호사가 그와 같은 느낌을 처음으로 받은 것은 고교 진학 무렵이었다. “중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병영상업 고등학교 특별 장학생으로 입학하려던 제게 광주 제일고등학교 입학을 권유하신 분이 병영교회 김성래 목사님이셨어요. 그때 그분의 권유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거예요. 내 인생에서 가장 감사했던 순간이지요.” 병영상업고등학교를 선택했다면 금융인 혹은 공무원이 되어 평범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어려운 가정 형편’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당시 상황을 생각한다면 그 길이 마땅했으나, 삶의 고리는 광주제일고등학교와 이미 연결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2002년 병영교회 100주년 기념비에 자신의 글씨를 남긴 이유도 바로 그 고마움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느낌을 두 번째로 받은 것은 대학 진학무렵이었다. “당시 한양대에서는 우수 인재를 적극 유치하고 특히 법조인을 배출하기 위해 파격적인 장학금을 주었는데, 그때 저도 한양대에 입학하게 되었지요.” ‘한양대 1호 법조인’. 그것은 명예로운 일이었으나 마음의 빚이기도 했다. 학교에서 베풀어준 고마음에 대한 빚. 이끌어줄 선배 한 명없는 구조 속에서 판사의 길을 올곧게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그토록 소원하던 대법관 임명에서 여섯 번 내리 후보로만 머물러야 했음에도 마음의 중심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은혜로 운 부채 때문이었다. 아름다운 마무리, 35년의 법조인 인생 손용근 변호사가 35년의 법조인 공직 생활에서 물러난 것이 두 해 전이다. 법복을 벗고 집으로 돌아와 든 생각은 “내가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구나”였다. 12·12 사태 때 재야 인사들을 무혐의로 풀어준 대가로 도망자 신세가 되기도 했고,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 반골로 찍히기도 했으며, 임창렬 전 경기도 지사 사건과 한국판 심슨사건이라 불리며 유무죄 사건이 엇갈렸던 치과 의사 살해 사건 등이 그때까지도 심중에 묵직하게 남아있었지만, 모든 것이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대법관의 꿈을 못 이룬 것 하나가 아쉬웠을 뿐 미련은 없었어요. 그만큼 최선을 다해 법조인의 길을 걸어왔으니까요. 주변에서 더 큰 일을 해야 하지 않느냐 만류도 했지만 가장 신뢰받을 때 퇴임한 것은 지금도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가장 정점일 때, 가장 사랑하는 이들 속에서, 새로운 다음을 위해 자리를 비운 손용근 변호사는 자신이 그와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음에 감사해 한다. 그리고 이제는 법복 대신 양복을 정갈하게 차려 입고 로펌으로 출근하는 노년의 변호사가 되었다. “퇴임 당시 여러 곳에서 함께하자는 제의가 있었어요. 그런데 법무법인(유) 동인과 함께하겠다는 마음을 굳힌 것은 ‘우리는 당신이 진정 필요합니다’ 라는 진심이 느껴져서였습니다.” 당시 단 두 명뿐이던 한양대 후배들이 지금은 여덟 명으로 늘었다. 모두 운영심사위원회의 엄정한 심사를 거쳐 함께 일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손용근 변호사는 뿌듯하기 짝이 없다. 선배의 길을 잘 따라와 준 것도 그렇거니와 ‘한양대’라는 공감대를 형성하며 일을 할 수 있으니 더욱 그렇다. 그리고 그 후배들과 한양대법학전문대학원과 관련하여 1심에서 승소한 사건을 최근 맡아 주력 중이다. 여럿이 힘을 모으니 뒷심이 되고, 그 뒷심은 결국 모교와 동문들에게 보다 나은 법률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어 뿌듯하다. “법무법인(유) 동인이 전국 로펌 10위권인데 앞으로 2위로까지 끌어 올리려고 해요. 또 기부와 나눔 봉사에 대해서도 좀 더 구체적으로 계획을 해보려고 합니다.” 지난 6월 손용근 변호사는 한양대에 학교발전기 금으로 1000만 원을 선뜻 내놓았는데, 처음이 아니었다. 그동안 세 차례에 걸쳐 총 3300만 원을 이미 기부한 바 있다. 일시적인 기부보다 지속적인 기부가 옳다고 여기는 그는 앞으로도 꾸준하게 학교 발전을 위해 보탬이 되고자 한다. 이쯤 되면 손용근 변호사가 왜 한양대총동문회로부터 ‘자랑스러운 한양인’으로 선정되었는지 짐작이 되지 않을까. ▲ 손용근 변호사와 함께 법무법인(유) 동인을 이끌어나가고 있는 한양 동문들. 위 왼쪽부터 강현·송해은·강경원·박혁·윤현철·정재우 변호사. Q&A Q1 평소 묵향과 가까이 지내시는데요, 늘 염두에 두고 계신 지혜의 글귀가 있으신가요? 거고사추 지만계일 居高思墜 持滿戒溢 입니다. 높은 곳에 있을 때는 떨어질 것을 생각하고, 가득 찼을 때는 넘칠 것을 경계하라는 말씀이지요. 지위가 높을 때는 그 지위가 없어졌을 때를 생각해야 하고, 부자일 때는 방탕과 교만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35년 법조인으로 공직에 몸담는 동안 저를 지탱해준 글귀입니다. Q2 호 號가 ‘수인’ 이신데요, 뜻이 궁금합니다. ‘수인 修仁’은 제 고향 강진군 병영면에 있는 산 이름입니다. ‘수인산인 修仁山人’ 라고도 씁니다. ‘수인’은 ‘어진 마음을 수양한다’는 것인데, 저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꼭 전하고 싶은 뜻이기도 합니다. Q3 법조계를 떠나시면 고향 강진에서 묵향과 더불어 사실 계획이신지요? 물론입니다. 알다시피 강진은 동백과 모란이 유명하고 시인 김영랑과 다산 정약용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 아닙니까. 나는 내게 그런 고향이 있다는 것이 너무도 감사하게 여깁니다. 지금 계획으로는 일흔 살쯤 내려가 글씨를 쓰고 그림도 그리며 농사짓고 살고 싶어요. 그렇게 틈틈이 쓰고 그린 작품으로 전시회도 갖고요. 사담입니다만, 한국에서는 제가 법조인으로 더 유명하지만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제 글씨와 그림을 꽤 알아줍니다. 한 가지 더 욕심이있다면 청춘들에게 고하는 책도 한 권 냈으면 합니다. 이미 초고를끝냈는데 그들에게 꼭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Q4 한양대에 있는 후배들과 법조인 후배들에게 조언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우선 나와 같은 길을 걷는 법조인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조언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진실과 마주할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 특히 언론의 반응에 따라 움직이고 결정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앙과 같은 절대적인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 이것이 법조인이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그리고 모교인 한양대 후배들에게는 인생의 그림을 그리고 현실로 옮기라는 것입니다. 머리로만 계획하면 되는 것이 없습니다. 생각하고 움직이고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2013-03 27

[동문]노력이 경쟁력을 만든다

세계적인 권위의 로펌 평가 미디어인 Chambers and Partners가 발행하는 로펌 가이드북 'Chambers Global' 2011년 판에서 작년에 이어 올해도 ‘김&장 법률사무소’가 국내 로펌 1위로 선정되었다. 김종국 동문(법학·81)은 13년 6개월 동안 검사로 봉직하다가 2005년 8월 부장검사로 퇴직하고, 현재 ‘김&장 법률사무소’의 변호사로서 기업형사사건을 담당하고 있다. 항상 부족함을 느끼고 계속 노력한다는 그는 후배들에게 법조인 대량 배출 시대에 경쟁력 있는 법조인이 되라고 말한다. 이번 ‘한양 People’ 코너에서는 한양대 예비 법조인의 멘토인 김종국 동문을 만나보았다. ▲ 김&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김종국(법학·81) 동문 전설의 81학번 김종국 동문이 입학한 1981년도의 법학과 입학정원은 76명이었다. 그러나 한양대 81학번 사법고시 합격생은 46명이다. 다른 학번보다 고시합격자가 많았던 학번이라 그는 전설의 81학번이라 말하며 자랑스러워했다. 김 동문은 그 당시에는 현재와 같은 변호사가 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 “출세한 법조인보다는, 제가 처리하는 사건에 관련되는 사람들에게 좋은 법조인이 되고 싶었죠.”라고 김 동문은 말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검사 재직 중 수원지검에서 환경전담 검사로는 가장 오랫동안 일하면서 환경 관련된 다양하고 많은 사건을 처리하였는데, 처벌보다는 기업들로 하여금 환경관련 투자 및 공해 절감을 위해 스스로 노력하도록 했을 때가 특히 보람 있었다고 한다. 또한, 주중국대사관에 법률참사관으로 2.5년 동안 파견근무하면서 한국과 중국, 양국 사법기관 간 교류협력에 기여하였고, 중국에 진출한 우리나라 기업들의 여러 법률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래서 그는 현재도 중국 법조계 유력인사 300여 명과 매년 연하장 및 서신교환을 하는 탄탄한 인맥을 형성할 수 있었다. 김 동문의 고시생활 추억은 공부와 연애했던 기억이 대부분이다. 주중에는 고시반 기숙사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주말에는 지금의 아내(법학·82)와 데이트를 하였다. 그는 방학 때는 퇴계원에 있는 학교 농장과 유명 산사 암자에 찾아가서 공부하였다. 그는 “2008년 봄, 20여 년 만에 김천 직지사 운수암을 다시 방문했어요. 청운의 큰 뜻을 품고 공부했던 때가 생각나더군요. 그때의 청년은 세파에 시달린 중년이 되었죠.”라며 웃었다. 기업형사 사건의 전문가 김&장 법률사무소는 인수합병, 세무·회계, 지적재산권 등 50개가 넘는 전문 분야에, 분야별 분업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김종국 동문은 이곳에서 영업비밀 침해, 환경, 공정거래에 관련된 업무, 중국과 관련된 업무를 비롯하여 기업에 관련된 모든 형사문제를 담당하고 있다. 김 동문에게 기억에 남는 사건을 묻자, 전도양양한 기업들이 영업 비밀을 침해당했을 때 상대방을 고소하여 응당한 법적 처분을 받게한 사건을 꼽았다. “기업이 형사사건에 휘말리는 경우 공격도 하고 방어도 합니다. 관계 당국이나 경쟁회사로부터 고발·고소당하는 경우 변호활동을 하고, 영업기밀이 유출되거나 사기를 당하면 고소를 합니다. 기업의 정상적인 경영 활동을 도와주어 경제 발전과 고용 등 국익에 이바지한다고 생각해요.”라고 그는 말했다. 법조인의 조건 3가지 김종국 동문은 정책과학대학의 멘토링 행사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로스쿨생과 법조인 선배들과의 만남의 자리가 더욱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에게 법조인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부탁하였다. “지금은 로스쿨 2,500명과 사법시험 1,000명이 매년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경쟁력을 갖춰야 합니다. 변호사가 직업이 아닌 자격인 시대가 온 거죠. IT, 금융, 회계, 환경공학, 항공 등 경쟁력 있는 법조인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전공 한두 개는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외국어에 능통해야 하며 세상을 넓게 보고 높은 곳에서 관조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라고 김 동문은 조언한다. 김 동문 역시 부족함을 느끼고 계속 노력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중국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관련된 책을 읽는 것이다. 중국 사람들을 만날 때 계절, 장소, 상황에 맞도록 중국어로 당시 한두 수 정도 암송하면 중국 친구들이 아주 좋아한다고 한다. 인터뷰의 또 다른 화두는 김&장 법률사무소에 근무하고 있는 한양대 동문이었다. 이곳에는 800여 명의 변호사와 전문가 그룹이 있는데 정여순, 정종철, 이송호, 강윤구, 조명수, 장현주, 그리고 김종국 동문까지 7명의 변호사와 이영우, 이정훈, 박도하, 오창영, 장범진, 권형섭 등 6명의 전문가 그룹이 있다. 생각보다 많은 동문이 김&장 법률사무소에 있었다. 이 수는 다른 대학과 비교했을 때, 3, 4위 정도의 순위이다. 김 동문은 “우리 학교 후배들은 능력은 좋은데 너무 겸손한 거 같아요. 좀 더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도전했으면 좋겠어요.” 라며 후배들에게 자신감을 가지라고 말했다. 윤리와 환경의 시대인 21세기, 그는 법조인으로서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고 이 분야를 개척하여 후배들에게 또 하나의 넓고 새로운 활동의 장을 마련해 주길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