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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 19

[오피니언][짧은 글 긴 이야기] 한양대에서 출발한 학문적 여정

1997년 봄이 오기 직전 매섭게 차가운 바람이 불던 어느 날, 나는 경기도 용인의 놀이공원으로 가는 차에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다른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정말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 놀이공원에 가는 줄만 알았다. 글. 강성훈 교수(정책과학대학 정책학과) / 그림. 안우정 20여 년 만에 다시 선 교정 용인에 도착했을 때 차는 갑자기 방향 감각을 잃은 듯 이상한 시골길로 향했다. 저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간판에는 기숙학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부모님은 당시 내가 합격한 대학교에 진학하는 대신 1년 더 공부하길 원하셨다. 나는 부모님의 기대대로 순순히 기숙학원에 들어갔다. 그때 부모님은 나에게 긴 편지와 함께 “넌 할 수 있어”라는 말을 하시고 떠났다. 처음에는 그 말이 진부하게 들렸지만 이상하게도 큰 동기부여가 됐다. 이후 1년 동안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렸다. 1998년 초 어느 눈 내리는 추운 겨울날, 나는 한양대 운동장 한편에서 합격자 명단에 적혀 있는 내 이름을 보면서 인생의 첫 번째 마라톤을 무사히 완주했다고 생각했다. 합격 소식을 듣자마자 펄쩍펄쩍 뛰며 좋아하셨던 부모님과 할머니의 모습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렇게 나는 가족의 사랑을 받으면서 한양인(경제금융학부 98)이 됐다. 2017년 9월 가을이 시작될 무렵, 나는 학생이 아닌 교수로 다시 한양대에 들어섰다. 한양인으로서 첫발을 내딛은 지 거의 20년 만이다. 처음 교단에 섰을 때 느낌이 묘했다. 어린 학생들 틈 속에서 내가 보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질문과 토론에 적극적인 학생들 세월이 지났어도 한양대의 언덕이 어디 가질 않듯 새내기는 새내기고 고학년은 고학년이었다. 새내기와 고학년의 큰 차이는 취업에 대한 무게일 것이다. 그 무게는 예전에도 있었지만 요즘은 더 크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수업에 임하는 학생들의 자세가 남다르게 느껴진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질문에 적극적으로 답하거나 토론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에는 수업 시간에 자신 있게 의견을 내고, 복도에서 친구들과 함께 토론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그런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아빠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이 질문과 토론이었다.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내용을 수업 시간에 질문하거나 토론할 때 내 의견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 번지점프를 하는 것보다 어려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모르는 것에 대해 질문하는 용기를 가지게 됐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 기울이면서 내 의견을 다른 사람과 자신 있게 나눌 수 있게 됐다. 그러면서 무척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수업 시간에 자신 있게 질문하고 때로는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되면서 수업을 준비하는 나의 자세도 바뀔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학생과의 상호 작용을 통한 수업이 필요하다고 느낀 것이다. 얼마 전 수업 시간에 간단한 경매 게임을 한 적이 있다. 이 게임은 승자의 불행(또는 승자의 저주)에 관한 게임이었다. 나에게는 첫 시도였는데,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줘서 무척 고마웠다. 누군가의 진로를 바꾸는 수업 수업은 한 학생의 진로를 결정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도 한 수업을 듣고 진로를 결정했다. 석사학위 지도교수인 경제금융학부 홍종호 교수님의 학부 수업을 들으며 경제학에 흥미를 가지게 됐고, 이것이 유학을 결정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이 수업을 통해 내가 경제학에 흥미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다소 어려울 수 있었던 경제학 개념을 현재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와 연결해 설명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수업을 통해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경제학이라는 학문에 큰 매력을 느낀 것이다. 홍종호 교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나도 내 수업에서 경제학 개념을 현실적인 이슈와 문제를 활용해 설명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학생들이 살아가면서 세상을 이해하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는 데 수업 시간에 배운 경제학 개념이 도움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 연구는 교수 생활의 엔진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수업이라는 또 다른 엔진과 연결돼 있다. 수많은 새로운 연구가 매년 수행되고 있고 우리의 지식은 쌓여간다. 만약 연구가 멈춘다면 수업 내용은 과거에만 머물게 될 수 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가장 크게 느낀 점 중 하나는 그들의 연구가 매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수업과 외부 활동으로 바쁜 하루하루를 살아가지만 한 해에도 여러 편의 연구가 끊임없이 SSCI급 저널에 게재된다. 교수들의 연구 성과가 수업의 질을 향상시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양대에서 출발한 나의 학문적 여정은 이제 새로운 장을 맞이했다. 모든 것이 감사하고 새롭고 설렌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수업과 연구라는 두 엔진을 열심히 가동해서 내가 이 자리에 설 수 있도록 도와주신 훌륭한 교수님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려고 노력할 것이다. 특히 석사학위 지도교수이신 홍종호 교수님과 박사학위 지도교수이신 마크 스키드모어(Mark Skidmore) 교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이 내 제자들에게도 잘 전달될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랑한대 2017년 11-12월호 이북 보기 ;

2017-12 19

[오피니언][타임머신]두고두고 좋은 인연, 한양대와 바둑

나는 대학에 입학했을 때 바둑 전문선수인 프로기사(棋士)였다. 고등학생 때 프로로 데뷔한 후 한양대 영어영문학과에 진학했다. 당시 프로기사라는 희귀한 직업을 가진 대학생이었기 때문에 학교나 바둑계에서 꽤 인기가 있었다. 신문이나 방송 등 매스컴에 내가 둔 시합과 함께 자주 이름이 올랐다. 정수현(명지대 바둑학과 교수·영어영문학과 76) ▲ 정수현 교수가 바둑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바둑과 학업 두 마리 토끼를 잡다 대부분의 대학생 스포츠 선수들이 그렇듯이 기사 생활과 대학 생활을 양립하기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바둑 시합과 학교 수업이 겹칠 때 출석 문제가 골칫거리였다. 전공과목으로 ‘햄릿’을 가르치던 노교수님이 계셨는데, 학생들에게 일일이 출석표를 나눠주며 직접 이름과 학번을 써내도록 했다. 시합 시 출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한 가지 묘수를 생각해냈다. 바둑 시합이 오전에 열리니 오후에 배정된 교과목을 신청하기로 한 것이다. 즉 오전에 시합을 마치고 얼른 학교에 가 수업에 참석한다는 전략이었다. 그런데 이 방법도 문제가 있었다. 그 무렵에는 한 판의 시합을 하는 데 각자 2~3시간씩 주어졌기 때문에 이 시간을 다 쓰면 오후 3~4시에 끝났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바둑을 최대한 빨리 두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에게 할당된 시간을 최대한 줄여 가급적 점심 무렵에 끝내려고 애썼다. 이로 인해 나는 속기파(速棋派) 기사로 변하게 됐다. 원래는 수읽기를 많이 하는 타입이었는데, 바둑과 학업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보니 감각적으로 두는 속기파가 된 것이다. 그 덕분이었을까. 나는 방송에서 개최하는 속기 시합에 강해졌다. KBS바둑왕전과 SBS바둑최강전에서 고수들을 꺾고 결승까지 오르는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아쉽게도 최고수 이창호 9단을 만나 두 번 다 준우승에 그쳤지만, 출석을 위한 빨리빨리 전략이 속기 훈련이라는 색다른 이점을 준 것이다. 진짜 ‘바둑학 교수’가 되기까지 나의 대학 생활은 상당히 바쁜 편이었다. 당시 학생이었지만 나는 새롭고 창의적인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편이었다. 한국기원에서는 바둑시합 외에도 초보자나 아마추어를 위해 바둑강좌 코스를 만들어 직접 가르쳤다. 또한 월간 바둑지에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성신여대 등 다른 대학교에 가서 바둑을 가르치기도 했다. 새벽에는 영어학원에 다녔다. 이런저런 일을 많이 해서인지 수업 시간에 가끔 졸았다. 한번은 맨 뒷줄에 앉아서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데, 분위기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부스스 눈을 떴더니 학생들이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달콤하게 낮잠을 자다가 교수님이 문장을 읽어보라고 호명하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도 나는 리포트 쓰는 것을 좋아했다. 한번은 짝사랑의 비애를 담은 영어 에세이를 써서 A+를 받았다. 다른 과목에서도 리포트 점수는 높았다. 돌이켜보면 나의 대학 생활에서 가장 많은 도움이 된 것은 리포트 쓰기였던 것 같다. 리포트 작성은 글쓰기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훈련에도 도움이 됐다. 졸업 후 나는 대학에서의 경험을 살려 바둑 관련 서적을 30여 권 저술했다. 그중에는 <바둑 읽는 CEO>, <고수경영>과 같이 바둑의 지혜를 다룬 에세이도 있다. 이런 책을 많이 쓴 덕분에 나는 바둑 기자들로부터 ‘바둑학 교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리고 20년 전에 명지대학교에 사상 처음으로 바둑학과가 생겼을 때 진짜 교수로 부임했다. ▲ 총동문바둑대회 현장 모두가 부러워하는 한양기우회 나의 대학 생활에서 특별히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하나 있다. 대학에 다닐 때 만들었던 ‘한양기우회’라는 동아리 모임이다. 이 동아리의 회원들이 졸업 후 한양(OB)기우회를 만들었다. OB기우회는 대학의 바둑동아리에 장학금을 주고 행사도 후원한다. 이 기우회는 지금까지 35년 이상 이어지고 있다. 수년 전 서울대를 비롯한 다른 대학교 바둑 동호인들이 한양대 기우회를 부러워해 벤치마킹했다. 한양기우회의 탄생은 내 생각에서 비롯됐다. 1980년께 학교에 다닐 때 나는 한양대에 기우회가 없는 것을 아쉽게 생각했다. 그래서 교내에 기우회를 하나 만들었으면 했다. 그러던 차에 같은 영어영문학과 2년 후배인 이일환 동문과 우연히 바둑 얘기를 하게 됐다. 당시 전체 학생회 간부였던 이일환 동문은 매우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훗날 고위 공무원으로 활약했다. 내가 기우회를 만들면 어떻겠냐고 하자 그는 즉시 찬성했다. 그리고는 기우회 소집 안내문을 만들어 벽보판에 붙였다. 기우회 창립을 위한 대망의 발기모임이 교내 노천극장에서 열렸다. 몇 명이나 올지 가슴을 졸였는데, 예상 외로 많은 인원이 참석했다. 그때 멋진 비전을 선언하며 한양대 기우회를 발족시켰다. 바둑계 사람들에 의하면 한양기우회는 특별한 점이 있다고 한다. 회원들 간에 우애가 깊고 분위기가 매우 좋다는 것이다. 회원들은 대학연맹전 출전 같은 문제에서는 양보의 미덕을 발휘하지만, 식사 때는 서로 식대를 내려고 한단다. 유머 있는 해설로 유명한 ‘바둑계의 김구라’ 김성룡 9단도 한양기우회를 좋아한다. 이 기우회에서 만나 부부가 된 커플도 몇 쌍 있다. 한양기우회의 이런 인간적인 분위기에는 역대 회장들이 많은 기여를 했다. 강병두, 이원옥, 한태완 동문 등 여러 회장들이 애정을 갖고 기우회를 이끌었다. 여성 회장이었던 원영숙 동문은 기우회에서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해 바둑계에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현재는 박승자 회장이 맡아 한양동문 바둑대회 등 다양한 행사를 주관한다. 기우회에서는 바둑 모임뿐만 아니라 체육 행사와 엠티(MT) 같은 프로그램도 개최한다. 근래에는 한양대 총동문회와 협력해 동문 바둑대회를 여러 차례 개최해오고 있다. 한양대의 색다른 자랑거리인 한양기우회가 계속 이어졌으면 한다. 사랑한대 2017년 11-12월호 이북 보기

2017-11 20

[오피니언]마케팅 단어에 혹하지 말라, 그건 젊음이 아니다

세대에 대한 정의. 베이비붐세대, 386 혹은 486세대, X세대. 비슷한 세대로 비슷한 정치적/사회적 상황을 접한 이들을 키워드로 묶는 시도는 과거부터 있어왔다. 주로 한 분야의 전문가나 유명한 평론가가 이를 언급하면 언론에서 이를 인용하는 방식으로 단어들은 퍼졌다. 그 과정에서 단어는 힘을 얻어 고유명사에서 일반명사가 되거나 반대로 힘을 잃고 스스로가 아는 이들만 아는 특정 시대의 은어가 되곤 한다. 최근 급작스레 나타나 긍정과 부정 양 방향으로 뜨거운 단어가 있다. '영포티(Young+Forty)', 어린 40대란 뜻이다. 40대에 대한 자발적인 긍정이 담겨있던 명명법은 스스로를 누가 띄워주기를 원하던 또다른 40대들에 의해 엄청난 사용빈도를 보이고 있다. 신조어에도 인용지수(IF)가 있었다면 아마 올해의 인용지수 1위를 기록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단어는 그 이용량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 영포티란 단어에 대한 불편한 속내를 과감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자기 자랑에 불과한데? 사실 영포티는 시작부터 불안정한 단어였다. 과거 IMF 직후 모 은행의 “부자되세요~”만큼이나 마케팅적인 요소로 가득하다. 언론에 처음 영포티를 등장시킨 기사는 작년 초 한국일보에 게재된 <한국사회 변화의 열쇠 ‘영포티(Young Forty)’>라는 기사다. 여기서 기자는 김용섭 소장(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을 만나 “그 나이가 되면 당연히 해야 하는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이어받지 않고 자신들만의 삶의 방식을 찾아낸 첫 중년 세대”라는 해석과 함께 현 40대가 영포티라고 명명했다. 기사를 쓴 기자 본인과 김 소장이 40대라는 점은 그냥 웃고 넘어가자. 자신들만의 삶의 방식. 그들이 이전까지의 40대와 자칭 ‘영포티’를 분류하는 기준이다. 구체적으로는 다음의 여섯 가지가 ‘영포티의 특징’이다. ① 내 집 마련에 집착하지 않는다. ② 보수냐 진보냐의 이념보다 합리와 상식을 우선시한다. ③ 결혼, 출산에 대한 관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④ 현재에 충실하다. 미래를 위해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거나 희생하지 않으며, 일보다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를 원한다. ⑤ 형식과 허울, 체면치레 같은 허식을 내려놓는다. ⑥ 트렌드에 민감하다. 왕성한 소비자이자 새로운 것에 대한 수용 능력이 높다. 특징일지 바람일지 모르겠다. 특히 6번의 경우, 꽤 씁쓸한 구석이 있다. 왕성한 소비자는 거저 생겨나지 않는다. 소비를 하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 물론 돈이 있어도 소비를 자제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돈이 없어서 왕성한 소비를 하지 못한다. 선택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비단 소비뿐만 아니다. 형식과 허울, 체면치레 같은 허식은 그 사람의 삶에서 배운 결과이기도 하다. 한평생 권위주의 속에서 살아온 이들에게 갑자기 ‘권위는 허상일 뿐이다’라고 말하면 선뜻 받아들이겠는가? 일보다는 가족을 택하는 것 또한 야근에 찌든 이들에게는 선택의 영역이 아니다. 결국 영포티의 특징이라 소개한 내용은 곧 ‘나는 이런 것을 누리고 있어’라는 자기 자랑 서사에 지나지 않는다. 세대를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거 안어울려요” 더 큰 논란은 이 자가자랑 서사에 ‘아재’들이 몰입하면서 생겼다. 애초 시작부터 마케팅 혹은 자기 과시용 소지가 다분했던 영포티는 ‘나도 영포티야!’라 말하는 자신감 넘치는 이들 덕에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어리고 싶은 욕망이야 이해가 간다. '늙지 않으려는 욕구'는 지극히 보편적이다. 필자 주변에 흔한 20대들도 자신보다 어린 이들에게 부러움을 느낀다. 20대 후반은 20대 초반에게, 20대 초반은 10대에게. 돌이켜보면 고등학생 때는 중학생을 부러워했으니 이는 모든 인간의 후회가 담긴 바람일 게다. 그럼에도 자칭 영포티는 전혀 공감을 얻지 못하는 세대로 남아있다. 20대, 30대에게 영포티라는 말은 그저 웃어넘기기엔 조금 불편하다. 우리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N포세대라는 말을 들어왔다. 연애, 결혼, 출산 세가지를 포기하면 삼포세대, 취업과 내 집 마련까지 포함하면 오포세대 등 여러 가지를 포기한 세대라는 표현이다. 비교해보면 재밌다. 영포티와 N포세대 모두 내 집 마련을 포기했지만, 그 설명은 다르다. 영포티에 한정해 내 집 마련은 ‘더 이상 제태크 수단이 아니’기에 포기한 행위다. N포세대에게 내 집 마련은 ‘불가능해서 포기해야 하는’ 행위다. 요즘말로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나 할까. ▲'영포티(Young Forty)'. 관념 저항 의지로 가득찬 시대 정신같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실상은 세대를 다 아우르지 못하는 형용 모순의 언어일 뿐이다. 결국은 최근 활발한 꼰대 담론으로 회귀한다. 나는 될 대로 하겠다. 나 정도면 괜찮은, 젊은이 아니냐. 물론 그 와중에도 나이차로 발생한 권력 구도는 유지해야 한다는 식이다. 그래서일까, 영포티에 대한 불만은 젊은 이성에게 들이대는 40대에 대한 불만과도 겹쳐진다. “나도 어린데 왜 안만나줘, 나 돈 많아”도 영포티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행태다. 앞서의 반복이지만 영포티라는 정체성에는 ‘안정적이고 적당히 건강을 챙길 수 있는 사무직’이란 의미도 내포돼 있다. 20대와 30대 때 젊음을 혹사한 적 없는 이들. 그래서 오늘도 근근히 살아가는 40대 비정규직에게, 영포티는 더 잔인하다. 여성이 배제되어 있는 것도 큰 문제다. 최근 대중문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나이든 남성과 젊은 여성과의 사랑 내러티브가 그 일환이다. 중년 남성의 '젊은 삶'을 위해 여성이 대상화 되는 셈이다. 단순하게 생각하자. 과로사 인구가 제일 많고 퇴직을 걱정하기 시작하는 것이 대한민국 40대의 현실이다. 물리적으로도 젊음과는 거리가 먼 이들을 급작스레 호명한 것은 인구 분포와 사회 경제적 주권 계층에 큰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한때 '신세대'라는 별칭을 부여받으며 급격히 민주화된 사회 속에서 번영을 누려왔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현실을 비추어 봤을 때 '영포티'를 진심으로 내재할만한 40대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평범한 마케팅이고 일상적인 프레이밍이다. 정말 젊은 합리를 지니고 있다면 여기에 호도되어서는 곤란하다. 자칭 영포티에겐 조소를, 명칭조차 없는 이들에겐 위로를. 글/ 이상호 기자 ta4tsg@hanyang.ac.kr

2017-09 14

[오피니언][짧은 글 긴 이야기] 인공지능과 바오밥나무

인공지능이라는 화제 속에는 편리함과 동시에 어쩔 수 없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어린 왕자>와 신화 속 바오밥나무라는 렌즈를 통해 인공지능을 바라본다면 이 두려움이 어떻게 바뀔까요? 글. 안연경(의학과 14) / 그림. 안우정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 <어린 왕자>에는 바오밥나무에 대한 흥미롭고도 무서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너무 크고 깊게 자란 바오밥나무 세 그루가 어느 별을 점령해버렸다는 이야기인데요. 요즘 우리가 인공지능에 대해 걱정하는 바가 이와 같지 않을까요?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인공지능으로 인해 직업을 뺏기진 않을지, 인간을 넘어선 인공지능이 오히려 인간을 착취하진 않을지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작년 이세돌 9단을 이겨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알파고는 올해 더 발전한 모습으로 돌아와 중국 커제와의 대국에서 완승했습니다. 일찍이 승패보다는 알파고가 어떻게 이길지에 초점을 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벌써 인공지능이라는 바오밥나무가 우리 키를 훌쩍 넘어서 자라고 있다고 믿는 듯합니다. 그런데 과연 인공지능은 인간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요? 바오밥나무에는 이런 신화도 있습니다. 신이 가장 먼저 창조한 나무가 바오밥나무인데, 정작 이 나무는 다른 예쁜 나무들을 부러워해 자신의 모습을 바꿔달라고 신에게 청했다고 합니다. 결국 신의 노여움을 산 바오밥나무는 뿌리가 하늘을 향한 채 거꾸로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다네요. 가지는 아래로, 뿌리는 위로 향한 신화 속 바오밥나무에서 우리는 인공지능의 일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바오밥나무의 가지, 줄기 그리고 뿌리 먼저 아래로 향한 가지는 땅 속에 박혀 있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정보를 알려주는 인공지능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공지능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미처 알지 못했거나 분석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방대한 정보를 빠른 시간 안에 알려줄 수 있으니까요. 뿐만 아니라 인문, 예술, 과학 등 인간이 이미 활동하고 있는 다른 분야까지도 무섭게 침투해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인간의 오랜 꿈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일을 대신해주는 편리함은 물론이고, 최근에는 감성으로 영역을 넓혀 인간의 친구 역할까지 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하지만 한편으론 두려운 인공지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 시작은 우리 눈에 보이는 바오밥나무의 줄기부터입니다. 인공지능이 각각의 가지마다 모은 여러 정보는 줄기라는 패러다임으로 흘러들어옵니다. 이 패러다임은 인간이 결정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어떤 정보가 필요하고 그 정보를 어떻게 활용할지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줄 따름입니다. 예를 들어, 운전이나 교육 등의 활동은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있겠지만, 운전을 해서 무엇을 어디로 보낼지 혹은 누구에게 어떤 교육을 시킬지와 같은 큰 틀을 결정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입니다. 학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공지능이 분석을 하거나 학습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정도의 고차원적 사고가 가능할지는 미지수입니다. 이 생각은 바오밥나무의 뿌리로 이어집니다. 뿌리는 인공지능의 사바오밥나무고방식입니다. 인간 뇌와 달리 인공지능의 사고방식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그칩니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넘어설 수 없는 이유이자 우리의 자리를 뺏길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인간 뇌의 사고 회로를 모방해 빠른 시간 안에 학습하는 프로그램을 탑재했다고 하지만 그건 일부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인간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완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인간은 삼각형을 그려 놓고 ‘산’이라고 서로 공감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단순화 과정이 뇌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 일어나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마치 땅에 박혀 있어 보이지 않는 보통 나무들의 뿌리처럼, 우리조차도 알지 못하는 인간의 사고를 인공지능이 넘어설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인공지능의 사고방식은 거꾸로 박힌 바오밥나무의 뿌리처럼 훤히 보이니까요. 인간과 인공지능의 평화로운 공존 지금까지 인공지능이 인간을 넘어설 수 있을지 바오밥나무를 통해 알아봤습니다. 사실 인공지능이라는 바오밥나무가 무분별하게 자라 인간이라는 별을 점령한다고 해도 우리에겐 마지막 방법이 남아 있습니다. 바로 전기를 차단하는 것입니다. 물론 농담입니다. 인공지능은 결국 인간이 인간 자신을 위해 개발한 것이고, 그렇게 사용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전혀 인공지능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여기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인공지능을 우리에게 이롭게 활용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특히 윤리적인 측면에서 인공지능을 통제할 방법을 합의할 수 있다면, 인간과 인공지능의 평화로운 공존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한대 2017년 9-10월호 이북 보기

2017-09 14

[오피니언][건강한대] 꾸준한 자외선 차단으로 평생 피부 건강 지킨다

자외선은 피부 표면에 있는 균과 피지선 땀구멍 등에 있는 균을 죽이며, 칼슘의 신진대사와 뼈를 만드는 데 필요한 비타민D를 합성한다. 또 피부과적 질환의 치료에 이용되는 등 사람에게 이로운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일광화상, 광과민성 피부 질환, 광노화, 피부암 등의 비정상적인 반응을 초래하기도 한다. 글. 노영석 교수(한양대학교병원 피부과) / 그림. 안우정 자외선의 해악 A to Z 자외선에 의해 발생하는 대표적인 피부 반응은 홍반반응과 색소침착이다. 홍반반응은 자외선 노출 직후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즉시홍반반응과 자외선 노출이 지속될 경우에 나타나는 지연홍반반응이 있다. 색소침착은 자외선 노출 직후 주로 UVA에 의해서 일어나서 수분 내에 소실되는 즉시색소침착과 자외선 노출 3일 후에 주로 UVB에 의해서 일어나는 지연색소침착이 있다. 즉시색소침착의 경우에는 멜라닌의 산화와 멜라닌 과립의 기저층으로의 이동이 증가해 발생하지만, 지연색소침착의 경우에는 멜라닌 세포의 증가에 의해 발생한다. 일광화상은 강한 햇빛에 피부가 노출되면 노출 부위에 홍반과 가려움증이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4~8시간 후에 나타나 24시간 후 최대에 이르며 3~5일 경과 후 색소침착을 남기고 서서히 소실된다. 중증일 때는 홍반 외에도 물집이 형성되고 통증이나 부종이 동반되기도 하며 일주일 이상 고생한다. 손상된 피부는 자외선 노출 10~14일 후 아래쪽에 새로운 피부가 재생되면서 박리되어 떨어져 나간다. 하지만 일단 검게 탄 피부가 원래의 피부색으로 되돌아가기까지는 수개월이 필요하다. 광과민성 피부 질환은 광선 자체가 원인이거나 광선이 질병의 발생에 관여하는 경우를 말한다. 원발성, 외부의 화학 물질, 유전 및 대사성, 광선에 의한 기존 질환 악화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주로 광선 노출 부위에 다양한 피부 병변이 관찰된다. 광노화란 자외선, 주로 UVB에 의해 피부 노화의 자연적인 과정이 촉진되는 것으로 만성적으로 과도하게 태양광선에 노출돼 발생한다. 진피 내의 교원섬유가 감소하고 피지 분비가 줄면서 피부가 건조해지며 모공이 넓어진다. 또 피부가 탄력을 잃고 거칠어지면서 잔주름과 깊은 주름이 생기고 불균일한 색소침착을 일으킨다. 강한 햇볕을 지속적으로 오래 쪼이는 것은 진피 내 세포의 DNA를 손상시킨다. 이것이 피부 종양으로 발전해 편평상피세포암, 기저세포암, 흑색종과 같은 악성 종양을 일으킬 수 있다. 우리나라는 외국에 비해 피부암이 차지하는 비율이 낮지만 피부암 환자는 해마다 건강한대늘고 있는 추세다. 자외선 관리는 어린 시절부터 자외선의 파장은 200~400nm인데 이를 다시 파장에 따라 세분화하면, 320~400nm를 자외선A, 290~320nm를 자외선B, 200~290nm를 자외선C로 구분할 수 있다. 자외선A는 주로 진피에 작용해 광노화, 광발암 현상에 영향을 주며 노출 시 피부를 붉게 만들거나 검게 그을리게 한다. 자외선B는 주로 표피에 작용하며 급성 피부 반응으로 홍반, 부종, 동통 및 발열 등의 일광화상을 일으키고 종양에 대한 면역 감시 기능의 저하로 피부암을 유발한다. 오존층에 의해 흡수되는 가장 짧은 파장의 자외선C는 자외선B와 같이 피부의 DNA에 주로 작용해 광화학 반응을 일으키며 피부암을 발생시킨다. 최근 환경오염 물질에 의한 오존층의 파괴로 인해 지표에 도달하는 자외선의 양, 특히 자외선C의 양이 증가하고 있는데, 이것이 피부암 발생률 증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성 자외선 노출에 대해 실험동물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육안으로도 주름이 많아지고 피부가 처지는 것이 확인됐다. 또 종양 발생의 빈도가 높아지며 조직학적으로 피부가 두꺼워지고 콜라겐 섬유가 감소됐음이 보고됐다. 태양광선에 노출되는 부위와 노출되지 않는 부위에 각각 자외선을 쪼인 후 피부가 거칠어진 정도의 차이를 나이에 따라 비교한 외국의 연구를 보면, 소아에서 성인보다 그 차이가 적은데 이것은 소아가 성인보다 특별히 자외선에 민감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대상자 수는 적지만 인체 표피의 자외선 투과율에 관한 국내 연구에서도 나이에 따른 차이는 뚜렷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젊은 연령에서는 야외 활동 시간이 성인에 비해 훨씬 길어 평생 노출되는 일조량의 80%를 18세 이전에 받는다는 보고가 있다. 따라서 자외선에 의한 만성적인 손상은 평생 동안 자외선 노출이 축적되어 생기는 것임을 생각할 때 어린 시절부터의 자외선 관리는 매우 중요하다. 사랑한대 2017년 9-10월호 이북 보기

2017-09 14

[오피니언][타임머신] 진사로의 언덕 오르던 87년의 기억 속으로

입학한 지 30년이 지난 이야기를 다시 더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치 어제처럼 가깝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미러 없는 인생은 질주의 피로감을 쉽게 느낀다. 가끔은 뒤를 돌아볼 줄 알아야 건강하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87년을 회상하는 시간은 내 마음속에 새로운 에너지를 솟구치게 하는 작은 축제인 듯싶다. 축제를 즐기러 가는 기분으로 그 시절의 행당동과 사근동을 다시 걸어본다. 한기수((주)필옵틱스 대표·물리학과 87) 동문 ▲ 한기수((주)필옵틱스 대표·물리학과 87) 동문 등산을 하는 거야? 등교를 하는 거야? 나는 부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한양대를 등하교하기에는 참 먼 거리였다. 한양대는 부천과 가까운 서울 서쪽도 아니고, 저기 동쪽 끝에 붙어 있지 않은가. 전철도 한 번에 가지 않는다. 1호선을 타고 사람들이 북적대는 신도림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탄다. 당시에는 지하철 노선이 네 개뿐이었다. 그래서 가는 길도 단순했다. 지방이라고 얘기하기도 애매한 부천에서 다니려면 두 시간 이상의 등교 시간을 각오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자취와 하숙을 선택했다. 그러나 학교와 가깝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우리의 모교 한양대는 참으로 높은 곳에서 우리를 내려보고 있었다. 강의 시간에 늦을 것 같으면 당연히 뛰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 높은 한양산(?)을 뛰어올라야 했다. 겨우 강의실에 도착하면 땀이 범벅이 되어 숨 고르고 땀 식히느라 10여분은 교수님의 강의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덕분에 체력만큼은 그 어느 대학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지금 이 사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지치지 않는 에너지를 유지하는 것도 그 시절 모교의 언덕이 키워준 힘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내가 공부했던 자연과학대는 두 곳으로 갈 수 있었다. 하나는 인문대 방향의 108계단과 또 하나는 사회대 방향의 계단. 두 계단 모두 만만치 않지만 인문대 쪽 계단은 도중에 한 번은 쉬어야 할 정도로 힘든 구간이다. 이 구간을 오르는 여대생들의 기분은 어땠을까? ▲ 87년 당시의 자연대 건물 시국보다 더 어수선했던 신입생 시절 87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격동의 시기였다. 그러나 신입생에게 동문시국은 그냥 흐르는 물이었다. 그 물에 멋모르고 발을 담그는 사람이 있었고, 그 물을 피해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신입생은 그 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수선했다. 아니 공부에 시달렸던 고교 시절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소위 말하는 대학의 낭만을 만끽하고 싶어 했다. 지금은 사라진 사범대 앞 잔디밭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심지어 진달래 지짐을 해먹는 친구도 있었다. 1학년 1학기는 캠퍼스 안팎을 탐방하는 시기였다. 대출 목록을 작성하는 중앙도서관도 새로웠고, 88서울올림픽 배구 경기장으로 활용되는 체육관도 신기했다. 축제 시기에는 노천극장에서 종종 공연이 열렸다. 안치환, 신형원 등 가수들의 공연을 본 기억이 난다. 학교 밖은 놀거리가 더 풍부했다. 돈 없는 자취생이었지만 당구장에서 짜장면 내기를 했고, ‘이모네’에서 선배들과 젓가락을 두드리며 술도 마셨다. 그 나이 또래들이 그렇듯 싸고 맛있는 안주는 순대와 떡볶이였다. 이걸 먹을 수 있는 곳이 학교에서 나와 건널목을 건너면 나오는 먹자거리, 그 한가운데 있는 ‘한양뷔페’다. 이것저것 먹을 게 많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 ▲ 학교 정문에 개교 기념행사로 진행한 행당제전 홍보물이 세워져 있다. ▲ 진사로에 걸쳐져 있는 다양한 현수막들 학창 시절 키워드는 대자보, 동문회, MT 내 기억으로는 그 당시 교가가 두 가지 버전이었다. 하나는 집회를 나가는 학생들이 부르는 교가로 “행당언덕 넓은 터 남청색 진리 아래 모인 우리들~”로 시작하는 노래고, 또 하나는 우리 모교를 세운 김연준 설립자 님이 작곡한 “한양, 한양 무궁하도록~”이라고 부르는 노래다. 그 시절을 돌아보면 생각나는 세 가지 키워드는 대자보와 동문회 그리고 MT다. 대자보는 진사로를 걷다보면 늘 마주치는 대학 내 뉴스다. 나무 사이에 걸린 현수막에는 토익, 토플 강좌를 안내하는 내용이 넘쳐났고, 나무에는 동문회 모임을 알리는 포스터가 색깔별로 붙어 있었다. 교내 신문인 학보도 기억난다. 그 당시 학보는 학교 소식을 알기 위한 기본 목적보다는 다른 대학의 여대생들과 미팅한 후 편지를 주고받는 창구 역할을 했다. 신입생을 설레게 하는 것 중의 하나는 MT였다. MT는 대학의 낭만이었다. 주로 청량리역에서 모여 경춘선을 타고 대성리나 청평으로 갔다. 북한강변에서 캠프파이어를 하며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한양대 캠퍼스를 거닐며 신기했던 것 중의 하나는 연예인을 본다는 것이었다. 당시 인문대에는 연극영화학과가 있었는데 탤런트 박순애와 개그우먼 박미선, 강변가요제에서 상을 받은 꺽다리 이상은 등 TV에 출연하는 탤런트, 개그맨, 가수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동기들의 힘을 하나로! 87홈커밍데이 모교 한양대는 전통적으로 이공계가 강한 대학교다. 지금 사회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모교 출신 선후배들의 활약상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한양대 출신들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맹활약 중이다.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후배들이 자부심을 가져도 좋은 부분이다. 얼마 전 모교를 들른 적이 있다. 학교가 몰라보게 달라졌다. 2호선 한양대역 2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한양대 캠퍼스 안마당으로 연결된다. 전철역이 학교 안에 있는 것이다. 그만큼 학교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걸 의미한다. 자료를 복사하던 가게는 아직도 있었지만, 내가 즐겨 찾던 술집이나 당구장은 거의 없어지고 프랜차이즈 전문점 등으로 바뀌었다. 학교 건물도 87년도와 비교하니 엄청 늘었다. 낡은 건물들은 모두 새롭게 리모델링됐다. “참 좋아졌네”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올 정도였다. 78년 역사의 명문 사립대학다웠다. 기억은 단편적이다. 단편적인 기억은 추억이 된다. 그런데 그 추억이 모여 역사가 되는 법이다. 나는 올해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 87학번 홈커밍데이 준비위원장을 맡았다. 홈커밍데이는 87학번 한양인을 위한 행사다. 이 행사는 우리가 다녔던 그 시절 한양의 추억과 기억을 다시 돌아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특별한 기억을 함께한 87학번 동기들이 이 글을 통해 그 당시의 기억을 되살리고, 홈커밍데이를 통해 모범이 되는 학번으로 힘을 모았으면 한다. 이 자리를 빌려 87학번 홈커밍데이에 동기 분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활동을 부탁한다. 한양대의 역사는 78년의 한 페이지들을 채운 선후배들의 기억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87년도를 회상하며 나는 우리 모교의 힘을 다시 느끼고, 그 시절 나를 키웠던 에너지를 만난다. 한양대, 네가 있어 지금의 내가 있다. 사랑한대, 한양! 사랑한대 2017년 9-10월호 이북 보기

2017-09 11

[오피니언]호칭이 애매하다고? 호칭에 쫄지말자!

살면서 우린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한 심리학자는 사람이 한 평생동안 대략 3,500명의 사람들과 친분을 맺게 된다고 했다. 지금은 멀어진 사이일지라도, 우린 이미 초중고를 거치며 십 여명의 담임교사와 수십명의 교과목 교사, 몇 백명의 동창들과 알고 지냈다. 평균수명 100세를 바라보는 입장에서 수긍 가는 숫자다. 그런데 우린 서로를 부를 때 주의할 점이 있다. 서로의 이름을 알든 모르든, 그저 이름으로만 대하지 않는다. 김 교수님, 아무개 형, 혹은 그저 선생님. 막역한 친구가 아닌 이상 호칭은 상대를 부를 때 필수다. ▲대화할 때 서로에 대한 존중은 필수다. (자료사진/출처: 게티이미지뱅크) 호칭을 부르는 건 생각보다 간단하다. 상대의 직업이 중요하면 직업으로, 나와의 관계가 중요하면 그 관계를, 그저 존칭이 필요할 땐 ‘선생님’ 등의 호칭으로 부르면 된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명명이 까다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상대와의 관계가 하나로 정리돼지 않을 때. 선배와 형 누나, 혹은 언니 오빠. 선배라 부르는 건 조금 딱딱하고, 그렇다고 편하게 부르기엔 아직 낯선 상대다. 특히 재수 등의 이유로 늦게 입학한 이라면 더 머리가 복잡하다. ‘저 선배는 나랑 동갑일까? 동생인가? 선배라 하면 어려워할까? 편하게 부르면 막 대하는거 같은데?’ 이런 상황에서 왜 호칭이 존재하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가장 먼저, 호칭은 내가 인식하는 상대를 재정의한다. 가령 교수에게 교수님, 조교에게 조교선생님 등으로 부르는 건 곧 내가 상대를 그런 직책으로 인식하고, 또 존경의 표시로 ‘님’과 ‘선생님’을 붙였단 얘기다. 혹은 추후 회사에서 이 부장, 김 대리 등으로 서로를 부르는 것 또한 서로를 ‘바로 그 직책’의 사람으로 대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호칭은 때론 위세를 지니고 있기도 하며, 반대로 존중과 존경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형, 언니는, 조금 다르지만 비슷한 이유다. 둘은 동성의 연장자에게 쓰는 호칭이다. 이를 쓴다는 의미는 상대를 별다른 직책으로 인식하기 보다는, 보다 인격적이고 가까운 상대로 곧 친밀한 상대로 인식함을 담고있다. 다시 말해 화자가 청자를 가까운 사이로 인식하는 중이다. 상대방의 호칭을 고민한다는 얘기는, 정리하면 상대방을 학교에서의 관계로 불러야 할지, 혹은 보다 친밀하게 불러야 할지 고민한다는 얘기가 된다. 즉 이 고민은 ‘난 저 사람과 친해지고 싶은데, 아직 보다 편하게 부르기엔 어렵다’는 얘기도 되겠다. 하지만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지 말자. 애초에 호칭은 서로에 대한 인식을 확인하는 동시에, 상대에 대한 존중이 담긴 표현이다. 상대와 나 상호간의 약속이, 다른 이들의 말보다 중요하다. 호칭을 부르는데 있어 어렵다면, 상대와 터놓고 얘기하자. “저… 선배라 부를까요 형이라 부를까요?”처럼 말이다. 아마 “선배가 편해”나 “편한대로 불러” 등 아주 간단하게 약속이 정해질 거다. 혹여나 저 질문에 화를 내는 선배가 있다면, 그땐 상대가 뭐라든 ‘선배’라며 존칭을 쓰기를 권한다. 관계는 그토록 중요하면서도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호칭은 결국 대화 당사자끼리 정하면 되는 문제다. (자료사진/출처: 게티이미지뱅크) 글/ 이상호 기자 ta4tsg@hanyang.ac.kr

2017-08 23

[오피니언][타임머신] '사근동 시절'을 추억하다

▲ 대학을 조업할 때까지 살던 낡은 사글셋방 자리에는 4층짜리 신축 건물이 들어섰다. 월세 12만 원짜리 사글셋방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12만 원짜리 사글셋방으로 기억한다. 별도의 화장실도 없는, 오래된 단층 단독주택 별채에 딸린 허름한 방 한 칸에 불과했다. ‘주방’보다는 ‘부엌’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공간에 쭈그리고 앉아 고무호스를 잡고 한 손으로 머리를 감았다. 온수는 나오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 기억은 불분명하다. 한양대 국문학과 재학 시절, 나는 주로 혼자였다. 학교 후문으로부터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사근동 셋방에서 졸업할 때까지 혼자 살았다. 밥은 학생회관이나 학교 근처 식당에서 혼자 먹는 둥 마는 둥 때웠고, 공부나 과제도 혼자 대충 해결했다. 가끔은 늦은 밤부터 이른 새벽까지 후문 근처에 있는 PC방에서, 역시 혼자 놀았다. 잠이 오든 말든, 12만 원짜리 셋방에서 가만히 혼자 누워 지낸 시 간도 많았다. 대학 졸업 직후에도 꽤 오랫동안 독거인으로 지냈으니, 대학 시절의 경험이 아주 낯선 것만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때를 떠올리면 유독 고립감 비슷한 감정이 느껴진다. 좁디좁은 셋방에 몸을 누인 나는 그때 주로 어떤 몽상으로 시간을 보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시기가 내게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다. ▲ 한양대 후문에서 이어지는 서울 성동구 사근동 골목 IMF 외환위기 직후, 불안의 시대 대학 졸업이 다가올수록 낯선 불안감을 종종 느꼈다. 어디론가 가야 하는데 갈 곳은 없는 처지, 취업난에 내몰린 것이다. 취업난은 해마다 거듭된다. 대졸 예정자의 취업률 곡선이 어떻게 휘고 꺾이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해보지 않았으니, ‘그때가 더 힘들었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청년 실업이라는 단어를 유행가 가사처럼 듣고 있는 지금과 비교하면, 약 20년 전 내가 경험한 취업난은 그나마 나은 편에 속할 수도 있다. 청년 실업 장기화를 겪고 있는 지금의 청년 세대가 우울하다면, 약 20년 전 우리는 불안했다는 정도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굳이 비교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다만 약 20년 전 우리 앞에 놓인 취업난을 애써 기억할 만하다면, 그건 단연 ‘IMF 외환위기’ 탓이다. IMF 외환위기 사태가 불거진 것이 1997년 12월이었고, 그 여파는 내가 대학 4학년이던 1999년까지 이어졌다. 사회 진출을 앞두고도 딱히 진로를 정하지 못한 건 나만이 아니었다. 대학원 진학으로 방향을 튼 몇몇을 빼면 거의 대다수가 ‘미취업자’ 신세였다. 문 닫는 기업이 속출했으니 일자리가 증발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여럿이 함께’의 소중함 불안의 시대에 위로가 된 것은 고통이라면 고통이었을 당시의 경험이 나만의 것은 아니라 우리 모두, 곧 집단의 몫이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IMF 외환위기 직후 학교를 떠나야 했던 우리는 모두 불안했으니 경쟁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서로가 서로를 연민의 대상으로 바라볼 뿐 내가 주저앉혀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원초적 연대 의식이었다. 가끔 이름을 들으면 알 만한 기업의 채용 시험에 최종 합격한 동기를 위해서는 진심으로 축하를 보냈다. 그런 일이 자주 벌어지지는 않았다. 불안감이 커질수록 학교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학교에 있는 시간은 내게 소중하게 다가왔다. 처지가 비슷한 동기를 만나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아도 좋았고, 인문대 앞 벤치에 가만히 앉아 느끼는 가을바람도 좋았다. ‘일삼팔(138) 계단’이라고 부르던 그 길을 오르던 시간, 잠시 그 길 위에 멈춰 내려다보던 행당동 풍경도 근사했다. 1999년 늦가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현길언 교수님은 졸업을 앞둔 ‘예비 백수’들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시간이 오래 지나 현 교수님의 말씀이 머릿속에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얼기설기 다시 엮어보면 이렇다. “취업이 어려워서 다들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걸로 안다. 졸업을 앞두고 있으니 지금 당장 진로를 결정해야 한다는 조급함도 느낄 수 있다. 졸업 이후에도 1~2년 정도 직업을 갖지 못한 채 지낼 수도 있다. 인생 전체에서 그렇게 백수로 지낼 수 있는 시기도 많지 않으니, 너무 조급하게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각자의 미래를 그려보는 것도 좋다.” ‘현대소설론’이었던가, 마지막 수업 시간에 들려주신 현 교수님의 말씀은 나를 비롯한 여러 예비 백수에게 적잖은 힘이 됐다. ▲ 2000년 2월 25일 국어국문학과 졸업 사진 여유를 잃지 말라는 가르침 대학을 졸업한 뒤 실제로도 8개월 남짓 백수로 지냈다. 그 뒤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하기 시작했고, 올해로 기자 경력 18년째를 맞았다. 자신이 맡고 있는 분야에 관한 취재를 한 뒤 기사를 내보내면 끝. 기자의 일에 대해 많은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어쩌면 그게 우리 일에 관한 가장 간결하고 정확한 설명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게 일부의 사실에 불과하다는 데에 있다. 소규모 신문사에 있을 때에는 좀 더 나은 곳으로 가려고 안간힘을 써야 했다. 정작 내가 원하는 신문사에 입사한 뒤에는 선후배 동료보다, 같은 분야를 담당하는 타사 동료보다 빼어난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강인한 ‘멘탈’과 체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건 바람직하지 않다. 마음을 다잡는다. 다른 사람과의 경쟁이 아닌 내가 기자가 되고자 했던 이유에 집중해야 한다. 다른 누구를 바라볼 시간에 자신과의 대화에 좀 더 투자해야 한다.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은데, 어쨌든 노력해야 한다. 이따금 사근동(혹은 한양대) 시절을 떠올린다. 내가 졸업한 뒤 많은 것이 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현길언 교수님은 정년을 마친 뒤 퇴임했다. 한양대역과 학생회관을 직통으로 연결하는 지하철역 출구가 생겼다는 소식에 감탄했고, 일삼팔(138) 계단이 ‘일오팔(158) 계단’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에 한참 웃었다. 내가 졸업할 때까지 머문 12만 원짜리 사근동 셋방은 헐렸다. 그 자리에는 4층짜리 원룸 건물이 들어섰다. 그 어둡고 눅눅한 셋방은 이제 내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 도대체 그때, 내 머릿속에는 무슨 ‘쓸데없는’ 잡생각이 그리 많았던 건지 여전히 궁금하다. 문득 그때의 고요함이 그립다. 사랑한대 2017년 7-8월호 이북 보기

2017-08 16

[오피니언][건강한대] 당신의 장은 건강합니까?

장 점막이 손상되어 염증이 생기는 질병인 장염. 소장염, 대장염으로 구분 짓기도 하는 장염은 음식물로 인해 발생하는 경우가 많아 일반적으로 여름에 생긴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장염의 원인은 음식물 외에도 다양하며 계절에 상관없이 발병한다. 글. 이항락 교수(한양대학교병원 소화기내과) / 그림. 안우정 장염을 일으키는 다양한 원인 끼니를 자주 거르거나 과식과 폭식을 하고, 육류 등 고열량식을 자주 섭취하며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면 장 건강에 더욱 유의해야 한다. 장내 세균에 의해 부패 물질이 많이 발생해 장염, 과민성 대장염과 같은 장 질환으로 진행하기 때문이다. 장염의 원인은 감염성과 비감염성으로 나눌 수 있다. 감염에 의한 장염은 크게 세균성 장염과 바이러스성 장염으로 나뉜다. 세균성 장염은 대장균과 같은 일반 세균에 의해 장염이 발생하는 것이다. 장티푸스, 이질, 콜레라 등 치사율이 높은 장염도 세균성 장염에 속한다. 주로 위생 상태가 불량하기 쉬운 여름에 식중독과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바이러스성 장염은 가장 흔한 장염이다. 여름보다는 늦가을에서 초봄에 걸쳐 유행한다. 특히 ‘가성 콜레라’라고 부르는 로타 바이러스는 바이러스성 장염을 일으키는 대표적인 원인이다. 비감염성 장염은 너무 차거나 매운 음식을 많이 먹거나 폭음, 폭식, 약물에 대한 알레르기 등의 원인으로 발병한다. 장이 약한 사람이 과로한 경우 나타나기도 한다. 만성 장염의 원인은 다양하다. 급성 장염이 적기에 치료되지 않으면 만성 장염으로 진행하는 경우도 있고 처음부터 만성 장염으로 시작되는 경우도 있다. 직장인에게 흔히 보이는 과민성 대장염은 장이 지나치게 민감해져 나타난다.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장의 운동 기능 이상, 스트레스와 같은 심리적 요인, 장염 등으로 인해 장의 감각이 과민해져 신체 조절 기능에 이상이 생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인이 확실치 않아 완치가 힘들며 재발이 잘 되고 오랜 기간 불편을 초래한다. 설사, 복통, 구토, 발열 증상 감염성 장염에 걸리면 장 점막에 염증이 발생해 소화 흡수에 장애가 생긴다. 설사, 복통, 구토, 발열 등이 일어나고 하루에도 여러 번 설사를 하게 되며, 이로 인해 탈수증을 일으켜 전신 쇠약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복통이 나타나는 경우에는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는 묵직한 통증이 가장 흔하다. 이렇게 시작해 뒤틀리는 듯이 심하게 아픈 통증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심하면 탈수로 인한 쇼크가 나타나기도 한다. 만성 장염은 급성 장염 증세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몇 개월 또는 몇 년간 증상이 계속되면서 배변이 불규칙해지고 지속적으로 설사를 하게 된다. 설사 대신 변비가 있기도 하며 때로 설사와 변비가 반복되는 경우도 있다. 복통은 어느 한 부위가 계속 건강한대아프기보다는 돌아가며 여러 부위에 무거운 통증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변을 보아도 시원치 않고 남아 있는 느낌이 들거나 장출혈로 인해 변에 피가 묻어나오기도 한다. 구토가 나거나 식욕 부진, 복부 팽만감, 소화 흡수 장애로 인해 영양 상태가 나빠져 빈혈이나 체중 감소를 동반하기도 한다. 대변에 피가 묻어 나오거나 잠에서 깰 정도의 심한 복통, 체중 감소와 같은 동반 증상이 있는 경우에는 다른 질환이 있는지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좋다. 장염에 걸리지 않으려면 이렇게 균이나 바이러스를 통해 감염되는 급성 장염의 경우에는 음식의 청결 상태가 상당히 중요하다. 음식을 만들 때는 손을 청결히 하고 신선한 식재료를 선별해 구입하며 음식을 사 먹을 때는 위생 상태가 좋은 음식점을 선택한다. 너무 차갑거나 자극적인 음식은 장 건강에 특히 해롭다. 더욱이 여름철에는 장의 기력이 약해져 자극적인 음식을 조금만 섭취해도 장염에 걸릴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스트레스가 주원인인 만성 장염은 일단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장이 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만성 장염에 걸리기 쉬우므로 평소 배를 따뜻하게 하고 너무 차거나 맵거나 딱딱한 음식 등은 멀리하는 생활 습관이 필요하다. 무조건적인 지사제 사용은 금물 장염의 치료는 우선 환자를 안정시키고, 탈수 증세를 호전시키기 위해 수액을 보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설사 증세를 보인다고 임의로 지사제를 복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세균성 장염인 경우 원인균을 치료하지 않은 채 설사만 멈추게 하면 장 속의 독소가 제대로 나오지 못해 증상이 악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균성 장염에 걸렸을 때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원인균에 맞는 항생제, 항균제 등 약물 치료를 한다. 비감염성 장염의 경우 복통의 원인이 되는 음식물을 제거하기 위해 하루 이틀 절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심한 복통에는 진경제(근육의 경련을 가라앉히는 약)를 쓰기도 하며 설사를 멈추기 위해 지사제를 투여하고, 탈수가 있으면 수액을 보충해 준다. 약물 치료를 병행하면서 하루 이틀 수분만 섭취하는 것이 증상 완화에 도움이 된다. 그 후 식사는 유동식에서 시작해 반유동식, 연식, 경식 등으로 증세에 따라 점차 바꾸어 간다. 고지방식이나 생 채소, 자극성 음식물은 회복 후에도 한동안 금하는 것이 좋다. 사랑한대 2017년 7-8월호 이북 보기

2017-08 16

[오피니언][짧은 글 긴 이야기] 나의 마지막 여름 방학

추운 겨울보다는 더운 여름이 좋다. 차갑게 내리는 장맛비보다는 포근하게 내리는 함박눈이 좋다. 나에게 여름 방학은 '좋아요'와 '싫어요' 그 사이였다. 글. 한지연(신문방송학과 14) / 그림. 안우정 방학마다 찾은 부산, 내 고향 ‘아무래도 난 돌아가야겠어. 이곳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화려한 유혹 속에서 웃고 있지만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해.’ 기숙사에서 혼자 로이킴의 노래 ‘서울 이곳은’의 첫 소절을 듣고는,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울음이 터진 날을 기억한다. 20년을 부산의 어느 바다 앞에 살던 아이의 안산 생활도 어느덧 4년 차에 접어들었다. 부산을 벗어나면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 그곳을 너무나도 떠나고 싶었다. 그렇게 스물세 살이 되었다.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타지 생활. 힘들어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결국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똑같다는 것을 부산을 떠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왜 그렇게 그곳을 도망가고, 벗어나려 했나 싶어서 혼자 펑펑 울기도 했다. 그래서 방학이 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리나케 부산으로 향했다. 엄마, 아빠, 동생들이 그리웠고 친구들과 바다가 보고 싶어서…. 하지만 방학에도 학교 근처에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첫 번째 여름 방학은 학회, 두 번째는 학보사, 세 번째는 대외 활동이 나를 기다렸지만 나는 늘 부산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이 있을 때마다 무궁화호를 타고 왕복 10시간의 통학을 감수해야만 했다. 방학 중에 학보사 기획 회의가 끝나고 다른 기자들이 지하철역으로 향할 때 나는 기차역으로 발길을 돌렸다. 다들 출발한 지 1시간도 채 안 되어 집에 도착할 때 나는 긴긴 시간을 무궁화호에서 보내고 새벽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그런 나를 미련하게 바라봤던 서울 사람들. 그런데도 방학마다 내가 집으로 향했던 것은 지치고 힘들었던 안산에서의 생활을 접어두고 그리운 가족의 품으로, 부산으로 잠시 찾아와 쉴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회는 없다. 부산으로 갈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방학 그 ‘끝’에는 내가 돌아가야만 하는 곳이 있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좋아요’와 ‘싫어요’ 딱 그 사이였다. 다시, 로이킴의 노래 한 소절. ‘하지만 언젠가는 돌아올 거야. 휴식이란 그런 거니까.’ 나에게 지금까지의 여름 방학은 그런 의미였다. 4학년 방학이 갖는 의미 방학의 사전적 의미는 일정 기간 수업을 쉬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또 다른 수업에 뛰어들기 위해, 스스로의 수업을 준비하고 있다. “이제 종강하면 마지막 여름 방학이겠구나.” 종강을 앞둔 4학년 학생들에게 교수님이 던지신 말씀. 그 한마디에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4학년’이 주는 부담감 때문이었을까. 당연히 부산행이던 내 여름 방학이 이번은 조금 다를 것 같다. 다들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 같아서 나도 뭔가 해야만 한다는 부담감이 스스로를 짓눌렀다. 새내기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4학년이라는 현실이 밉고 싫기만 하다. 난 아직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말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내가 할 수 있는 ‘하계 인턴’과 ‘하반기 인턴’ 등 할 일을 찾느라 손도 마음도 바쁘다. 수업이 끝나면 적막만이 기다리는 자취방으로 돌아와 노트북 앞에 쭈그리고 앉는다. 나 대신 ‘나’를 말해줄 이력서와 자기소개방학서를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만들어진 자기소개서는 곧 좋은 소식을 가져올 것처럼 당차게 내 손을 떠나버리지만 며칠 뒤 “죄송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돌아온다. 바다와 가족을 만나러 가기 위해 방학을 기다리는 내가 아닌, 방학에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좌절하는 4학년의 마지막 여름 방학 앞에 서 있다. “4학년인데 이번 방학에는 뭐할 거야?” 요즘 나에게 안부 인사처럼 이렇게 물어보는 사람도 많고, 나 스스로 묻기도 하는 이 질문. 대체 4학년의 방학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특별한 경험과 의미 있는 도전을 해야 할 것처럼 ‘마지막’이라는 수식어가 거창하게 다가온다. 여전히 부산이 그립고 바다가 그리워서 여름 방학이 오길 기다리다가도 마지막 여름 방학이 무섭고… 어디로 훌쩍 떠나버릴까 하다가도 통장 잔고를 보면 속상하고… 그냥 모든 것이 복잡하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어볼 사람도 없고, 정답도 없어서 두렵고 불안하기만 하다. 2017년 마지막 여름 방학, 그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뜨거운 햇살과 차갑게 내리는 장맛비 속의 내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어디에 있을지도 아직은 모른다. 그래도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나를 성장시켜주고 또 다른 나를 향한 발걸음이라고 생각해야지. 그저 스물세 살 여름 방학의 끝엔 마음이 넓어지고 자유로워진 나를 만나고 싶다는 다짐만 반복하며 나의 마지막 여름 방학을 기다린다. ‘좋아요’와 ‘싫어요’ 그 사이 어중간한 위치에서 다가오고 있는 방학을. 사랑한대 2017년 7-8월호 이북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