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기사 등록
검색섹션
검색영역
기사등급
기사형태
검색영역
검색단어 또는
관련기사 검색결과 리스트
관련기사 검색결과 리스트 컨텐츠
검색된 정보가 없습니다.
관련기사 검색결과 리스트
관련기사 검색결과 리스트 컨텐츠
검색된 정보가 없습니다.
게시글 상세보기
정보

2016/04/29 기획 > 오피니언 > 매거진

제목

[타임머신] 교정 구석구석 녹아 있는 청춘의 기억들

신상훈(톡킹스피치 대표·연극영화학과 82)

디지털뉴스팀

URL복사/SNS공유

http://www.hanyang.ac.kr/surl/jaqB

내용
‘어떤 전공을 선택할 것인가?’, ‘어느 대학에 지원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스스로에게 내린 답은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였다. 1989년 졸업 후 27년을 살아온 내 삶을 채점해보면 결코 틀린 답은 아닌 것 같다.

 

연기를 배웠기에 가능했던 일

 

   
▲ 졸업식 기념사진. 뒤의 건물이 한양대학교병원이다. 흙으로 덮인 공터에는 자연과학관이 들어섰다.

 

셰익스피어가 그랬다. 인생은 연극이라고. 우리 삶이 무대 위 연극이라면 가장 뛰어난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 아닐까? 삶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멋진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적절한 타이밍에 명대사를 날릴 수 있었던 비결은 내가 연기를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방송작가로 KBS 연예대상 최우수 작가상을 수상하고, <유머가 이긴다>라는 베스트셀러를 비롯해 16권의 책을 쓰고, 연간 200여 차례 특강에 초대되고, 모교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으니 이 정도면 성공했다 자부할 수 있지 않을까?

 

학력고사를 본 우리 세대는 대부분 점수로 학과와 학교를 결정했다. 그러나 난 오래전부터 스티븐 스필버그나 조지 루카스처럼 영화를 전공해 영화감독이 될 것을 꿈꾸며 연극영화학과만 바라봤다. 그러면 왜 한양대였냐고? 솔직히 집에서 제일 가까웠기 때문이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

 

지금은 청량리역과 왕십리역이 전철로 운영되지만, 1980년대에는 똥차라고 불리던 ‘기동차’로 연결됐었다. 전기 대신 디젤로 달리는 기차였는데, 매일 학교를 가는 게 아니라 교외로 놀러가는 기분으로 등교했다.

 

왕십리역에서 내려 학교로 가는 길은 좁은 골목길이었는데, 지금은 상점들로 바글바글하다. 후문을 통해 인문관으로 올라가는 길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그대로다. 큰 차이라면 운동장이 변해 HIT(한양종합기술연구원)와 사이버대학교가 들어섰다는 점. 그 운동장에서 대학교 입학식을 하고, 거기 들어선 한양사이버대학원을 졸업했으니 나에게 그곳은 크나큰 추억이 담겨 있는 장소다.

 

나의 첫 번째 차, 프라이드

 

   
▲ 내가 번 돈으로 산 나의 첫 번째 차, 프라이드

 

한양대를 갈 때마다 캠퍼스 내의 차량 숫자가 증가해 교통사고가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든다. 가급적 학생들은 편리하게 바로 연결되는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1980년대에는 학교에 차를 가지고 다니는 학생이 학과에 한두 명 정도였다. 그중에 하나가 나였다. 차를 갖고 다니는 것이 부담스러워 병원 주차장에 세워 놓고 걸어서 인문관을 올라 다녔다. 학생이 차를 갖고 있다는 게 창피했던 건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번 돈으로 산 차였으니까.

 

당시엔 학생들이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가 턱없이 부족했다. 지금처럼 편의점이나 PC방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난 창업을 결정했다. 군대를 다녀온 뒤 스스로 학비를 벌기로 결심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불편함을 찾아서 해결해주면 돈이 된다는 진리를 알고 있었기에. 1982년 내가 입학한 해에 18대 1의 경쟁률을 보였던 연극영화학과는 해가 갈수록 인기가 높아졌다.

 

하지만 정작 수험생들은 연극영화학과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서 불편함이 많았다. 그래서 여러 자료와 면접 요령을 적은 20쪽짜리 조잡한 입시요강을 만들어서 팔았다. 그랬더니 정보에 목말랐던 입시생들에게 불티나게 팔렸다. 덕분에 사흘 일하고 300만 원을 벌었다. 여기서 힌트를 얻어 ‘연영과 입시 상담’이란 문구와 함께 집 전화번호가 들어간 명함을 만들어서 예비 모임 때 돌렸다. 전화기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벨이 울려 80명가량의 예약자를 받았다. 혼자서는 도저히 상담이 불가능해 학교 앞 ‘일번지다방’을 통째로 빌리고 동기들을 데려와 입시 상담을 진행했다. 그렇게 이틀 만에 500만 원을 벌었다. 닷새 일하고 번 800만 원으로 ‘프라이드’를 샀다. 첫 번째 마이 카다.

 

전국 일주에서 졸업 행사까지

 

   
▲ 친구와 함께 차 안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전국을 일주했다.

 

그 차로 단짝과 전국 일주를 했다. 차에서 먹고 자고… 그야말로 캠핑카가 따로 없었다. 그때 전국을 돌며 느낀 것은 우리나라가 무척이나 기형적으로 발전했다는 점이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이 도시 밖으로 나가보지 못했던 나는 여행을 하며 전국 방방곡곡의 작은 마을과 길을 돌아다니며 너무나 큰 차이와 차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후 누구나 똑같은 대접을 받는 공정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내 주변의 차별부터 없애야겠다는 마음으로 과대표에 도전해 학회장이 됐다.

 

1987년 학회장 임기 당시 기억에 남는 것은 서울시청에서 모이기로 한 6.10 민주항쟁 때 유일하게 시청 앞까지 진출한 것이다. 전경들이 나는 그냥 통과시켜 줬다. 연극영화학과 복학생이라는 신분이 전경들 눈에도 절대 ‘데모’ 안 하게 보였었나 보다. 그때 연인인 척 데이트를 하면 안 걸린다고 꾀어 같이 시청으로 걸어갔던 이화여대 2학년생의 얼굴이 지금은 점점 희미하게 기억 속으로 사라져 너무나 안타깝다.

 

학회장으로서 전국 최초로 과목평가제를 실시한 것도 떠오른다. 학기 말에 전 학년, 전 강의실을 다니면서 직접 수업에 대한 만족도를 조사한 뒤 대자보를 붙였다. 이제는 교수평가제가 상식이 됐지만, 그때는 정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교수들과 불편하게 지내기도 했다. 그런 내가 이제는 한양대 ERICA캠퍼스 특임교수가 되어 학생들의 평가를 받고 있다.

 

   
▲ 졸업식 후 ‘한양회관’에서 연극영화학과 친구들과 함께한 행사.

 

졸업식은 조금 색다르게 진행했다. 졸업 후 그냥 뿔뿔이 헤어지기가 아쉬워 함께 모여 식사를 했다. ‘한양회관’을 전부 빌려서 졸업식에 참석한 모든 부모님과 친척을 모이게 했다. 그리고 교수님들을 초대해서 행사를 가졌다. 선물 증정도 하고 큰절도 하고 편지도 읽고 친구 부모님들끼리 인사도 하고… 지금 생각해도 멋진 아이디어였다. 그렇게 졸업하고 헤어지면 끝인 줄 알았는데… 어제도 그 친구들과 함께 당구를 쳤다.

 

URL복사/SNS공유

기사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