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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01 기획 > 오피니언 >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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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눈물과 막걸리를 추억하며

조영학(번역가·영어영문학과 85)

디지털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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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yang.ac.kr/surl/LhnB

내용
내가 입학한 1985년은 대한민국 역사의 격동기 와중이었다. 1980년 광주의 한이 캠퍼스까지 이어져 대학은 어디나 하루가 멀다 하고 ‘짱돌과 최루탄의 부등가 교환’이 이어졌다. 우리 대학도 마찬가지였다.

 

낭만을 찾기 힘들었던 시절

 

   
▲ 1985년 대동제 끝나고 인문동산에서 합창하는 모습

 

아침에 등교를 하면 그 전날 쏘아댄 최루탄 냄새가 가시지 않아 수업 시작 전부터 눈물과 콧물을 한 바가지씩 쏟아야 했다. 물론 그날도 어김없이 교문을 사이에 두고 돌과 화염병을 던지고 무자비하게 최루탄을 쏘아댈 테니 등굣길의 눈물은 기껏 전주곡에 불과했다.

 

사실 눈물 없이는 대학 생활 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요즘 학생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최루탄이 날아드는 교정을 상상할 수 있을까? 교정은 어디나 전쟁터처럼 깨진 벽돌과 최루탄 파편이 널브러졌다. 당연히 분위기는 험악하고 낭만은 눈을 씻고 봐도 찾지 못할 수밖에. 그해부터 대학 축제는 대동제로 바뀌고 축제의 상징인 ‘쌍쌍 파티’도 사라졌다. 대동제는 더 이상 청춘을 위한 파티가 아니라 5.18 기념일까지 이어지는, 더없이 투쟁하기 좋은 시즌이었다. 급우들도 운동권과 비운동권으로 갈라져 반목하고, 어느 해부터는 운동권끼리도 사상 투쟁에 휩쓸려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영문과 동기만 해도 시대의 중압감을 견디지 못한 탓에 네 댓 명이 정신병으로 고생했으니 당시의 혼란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인문동산과 동물원의 술자리

 

   
▲ 저 뒤쪽이 인문동산이다. 계단을 올라가면 널따란 공터가 나온다. 지금은 자연대에 가렸겠지만 병원 건물도 보인다

 

돌이켜 보건대, 그 몇 년 동안 술의 힘으로 간신히 버틴 것 같다. 남들은 삶과 사회를 고민하고 괴로워하다가 몸과 마음까지 상했건만 우리 같은 껄렁이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술 속으로 숨어들기만 했다. 돌과 화염병을 던지고 술, 소위 ‘의식화’ 세미나를 끝내고 술, 수업 거부를 하고 또 술… 심지어 시험 기간 중에도 낮술을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어느 교수님은 개강 때마다 나를 보고는 “이번 학기도 어김없이 코가 빨가네”라며 웃곤 하셨다.

 

문제는 술값이었다. 학생이 무슨 돈이 그리 많다고 비싼 술집을 허구한 날 드나들겠는가. 당연히 술자리는 대부분 교정에서 이루어졌다. 술은 슈퍼에서 막걸리와 소주 몇 병, 안주는 대개 한양시장에서 공수해 온 오이, 당근 정도였다. 운이 좋으면 ‘행당 1번지’라는 튀김집에서 오징어튀김이나 고구마튀김을 1,000원 어치 사오거나 공돈 좀 생긴 선배가 이런저런 안주거리를 챙겨 왔다. 아침에 등교할 때 교재 대신 안주거리를 챙겨 오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술자리는 주로 ‘인문동산’과 ‘동물원’이었다. 당시는 캠퍼스 모습이 지금과 많이 달랐다. 인문대 앞 주차장 자리는 지금보다 지대가 훨씬 높았고 자연대 대신 그 자리에 완만한 경사의 풀밭이 있었다. 인문대가 한양대에서 제일 높은 위치였으니 자연히 인문동산이라 이름이 붙은 모양이었다. 동물원은 지금의 정문 위치다. 작은 정문 오른쪽으로 넓지 않은 풀밭이 있었는데 행인들이 오가며 철망 너머로 학생들이 술 마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동물원이었다. 교내에서 최루탄 냄새가 가장 심한 곳이라 투쟁 의지도 다지고 또 최루탄 냄새 핑계로 취중에 울기도 좋았다

 

밤낮없이 쏟은 눈물과 콧물

 

   
▲ 입학 당시의 단체사진. 다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궁금하다

 

우리는 그렇게 술을 마시며 위정자들을 욕하고 노동가요를 부르고 신세 한탄을 하고 눈물을 흘리고… 오바이트를 했다. 낮에도 최루탄 가스에 눈물, 콧물을 쏟고 토악질을 해야 했으니, 요컨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눈물과 콧물과 담즙을 쏟은 셈이었다.

 

교내 술자리가 좋은 이유는 아무래도 ‘자유’ 때문이었다. 우리는 목이 터져라 노동가요를 부르고, 아무 데나 토하고, 아무렇게나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자다가 깨서 술자리가 파하지 않았으면 다시 합류해 술잔을 기울이고, 사위가 깜깜하고 아무도 없으면 툴툴 털고 일어나 집으로 발길을 떼면 그만이었다. 꾸짖는 사람도 없고 신경 쓰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기엔 사회는 틀어진 구석도, 억울한 이면도 너무 많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2학년 때 농활을 마치고 마무리할 때였다. 후배 한 명이 술에 잔뜩 취해서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친 것 이다. 그저 농활 행사를 낭만적으로 생각하고 룰루랄라 따라왔으련만, 하루 종일 중노동을 하고 마을회관에 돌아오면 선배들이 쉬지도 못하게 하고 이런저런 토론으로 괴롭힌 데다 툭하면 마을 파출소와 알력을 빚었으니 무서울 만도 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친구를 재워 놓고 한참을 웃었지만 그나마 그는 그렇게 술의 힘을 빌려 살아남고 우리와 한패가 되었다.

 

후배들을 위한 권주가

 

   
▲ 1985년의 인문대. 오른쪽이 인문동산이다.

 

밖은 여전히 팍팍한 시절이다. 취업문은 훨씬 좁아지고 터무니없는 사건, 사고들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그때가 오히려 호시절이었을 수도 있겠다. 불리한 싸움일지언정 최루탄과 맞장도 떠보고, 마음 놓고 술에 취할 자유라도 있었으니 하는 말이다. 행여 그렇지 못했던들 우리가 쉽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지금이야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했으니 울분을 토로하거나 불의에 저항하는 방법이 우리 시대와는 사뭇 달라졌겠다. 보다 순화하고 정화된 느낌? 21세기의 후배들은 어떻게 이 시대를 버텨낼까? 그러고 보니 언젠가 캠퍼스 내 음주를 불허한다는 뉴스를 본 듯도 하다. 어쨌거나 여전히 우리 모두에게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시대다. 후배들에게 조심스레 막걸리 한 잔 건네 오니, 그대들의 울분일랑 부디 이 한 잔의 막걸리와 취기와 눈물에 실어 조금이나마 씻어낼 수 있기를 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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