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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 15

[오피니언][오피니언]당신은 왜 대학을 원했나요

“왜 사는가?” 쉬운 단어들로 이뤄진 짧은 문장에 그 누구도 쉽사리 답하지 못한다. 별다른 이유가 없어서 일 수도 있고, 간단히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질문을 좁혀보자.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거의 셋 중 하나일 것이다. 대학에 가고 싶거나, 대학을 다니고 있거나, 대학을 졸업했거나. 대학 입시의 마무리 단계인 정시발표 즈음해서 던져본다. 당신은 왜 대학에 왔나요, 혹은 오고 싶나요. 커다란 사회로 전입, 그리고 재전입 준비 대학 견학 등을 통해 처음 대학교를 방문한 이들이 공통으로 놀라는 요소가 있다. 크고 넓다. 그전까지 본 학교는 기껏해야 건물 한두 채와 운동장 정도로 이뤄져 있었는데 대학은 무척 넓고 건물도 많다. 그 규모는 처음 와본 이의 마음을 압도한다. 나중에는 너무 커서 이동할 때 마다 불평하는 요소가 되지만. 큰 대학에는 사람도 많다. 대략 서울캠퍼스와 ERICA캠퍼스에 각각 만 오천 명 가까이 되는 학생이 등록한 상태다. 매년 졸업하는 만큼 새로운 신입생이 들어오고, 군대로 떠나는 만큼 전역해서 복학한다. 교직원을 넣지 않아도 무지막지한 수다. 그 자체로 하나의 사회다. 그렇기에 대학은 여지껏 겪지못한 크기의 집단에서 살아가는 체험현장이다. 일찌감치 사회 생활을 해보고 들어온 이도 있지만, 대부분 고등학교 졸업 후 잠깐의 아르바이트, 혹은 수험 생활의 연장을 겪고 새 출발을 대학에 맞이한다. 좋은 일이다. 대학의 사회적 위치는 아직 어정쩡한 학생들에게 좋은 공간이 된다. ▲동아리에 가입이 부담스러울 땐 단기활동에 참가할 수도 있다. 특히 여름 겨울 방학시즌에는 다양한 봉사 프로그램이 열린다. 대학은 일반 기업과는 다르다. 회사가 사람을 구하는 이유는 노동력 때문이다. 회사가 원하는 건 사람 이전에 능력이기에 적합한 능력이 없으면 뽑지 않고, 뽑더라도 나중에 이별을 고한다. 맘편한 공동체는 아닌 것이다. 대학의 본질이 공동체는 아니다. 그렇지만 대학을 다니며 얻는 공동체 생활은 분명 색다르다. 기본적인 학과생활, 혹은 같은 관심사를 찾아 들어간 동아리, 중장기적인 프로젝트에서 만난 사람들. 이들과 한 배를 타면서 얻는 희로애락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능력에 냉정한 회사와는 달리 1년 먼저 겪은 선배의 도움과 동기들의 위로는 분명 든든한 안전망이다. 동아리는 종류도 많다. 중앙동아리, 과 동아리 할 것 없이 밴드, 극회, 춤 등의 예술 분야 동아리부터 탁구, 축구 등의 스포츠 동아리와 자신의 배움을 보강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적합한 학술동아리까지. 엄청난 실력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대개 당신을 환영하고, 먼저 터득한 내용들을 당신에게 전수해줄 것이다. 그들과 함께하며 정드는 체험은 어정쩡했던 대학생활이 성숙해지는 과정과 함께한다. 다른 곳에서 배울 수 없는 배움천지 대학의 꽃은 공부다. 고등학교 때처럼 시험에 나올 문제만 푸는 공부가 아니다. 전공별로 실습도 해보고 컴퓨터도 돌려보고 자료도 찾아보는 것도 공부다. 오히려 고등학교 때에 비해 수업시간은 적다. 대신에 그 시간 동안 교수님이 제시하는 방향을 잡고 고민할 수 있도록 많은 시간이 주어진다. 일생 동안 전공분야를 파온 이들로부터 얻는 영감은 그 분야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큰 동력이 된다. 간혹 전공 수업이 맞지 않아 고민인 이들도 있다. 교양 수업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그리고 교양 수업에서 접한 내용은 한 사람의 미래를 바꾸기도 한다. 수업에서 접한 셰익스피어에 이끌려 영문학자의 길을 택한 공대생, 학점 때문에 들은 법학 교양에서 비롯돼 변호사를 꿈꾼 상경대생은 아주 낯선 얘기가 아니다. 다중전공이나 복수전공의 기회도 있다. 본인의 전공을 놓지 않으며 다른 전공을 수강함으로써 자신의 전공에 필요한 기술이나 지식을 보강한 사람도 많다. ▲교내 곳곳에 위치한 도서관 및 열람실을 이용하거나, 개방된 공간에서 배움을 이어갈 수 있다. 때론 연구의 기회가 주어진다. 많은 대학 내 연구실에서는 학부연구생이란 이름으로 학부생을 연구원으로 뽑는다. 배움이 짧은 탓에 능동적으로 연구를 수행하긴 어렵지만, 그 안에서 부딪히며 얻은 연구경험은 후에 대학원을 가지 않더라도 유용하다. 혹은 학부생끼리 함께 고민하며 참여한 학술대회 경험은 스스로의 지식을 늘릴 뿐 아니라, 자신의 진로를 고민하는 데도 방향을 잡아준다. 이 또한 같은 전공으로 만난 이들과 함께 있기에 할 수 있는 경험이다. 당신만의 이유 찾을 수 있길 필자의 경우, 전공수업은 방황 중이며 여전히 진로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대학에 와서 '뉴스H'의 기자로 활동하게 되며 끊임없이 훈련 받았고 지금도 그렇다. 대학 내의 여러 단체들은 외부의 비슷한 단체보다 교육성이 강하다. 앞서 말했듯 회사는 대체로 일 못하는 이를 그냥 두지 않는다. 어지간한 잠재력이 아닌 한 그의 미래는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그렇지만 대학은 들어온 이를 가차없이 내보내지 않는다. 보다 큰 사회로 나갈 수 있는 발판을 찾을 수 있는 기회다. 이 대학 사회 내에서, 당신도 무언가 크게 얻어갈 수 있길 바라며, 그게 '대학에 온 이유'가 될 수 있길 바란다. 글/ 이상호 기자 ta4tsg@hanyang.ac.kr

2017-11 20

[오피니언]마케팅 단어에 혹하지 말라, 그건 젊음이 아니다

세대에 대한 정의. 베이비붐세대, 386 혹은 486세대, X세대. 비슷한 세대로 비슷한 정치적/사회적 상황을 접한 이들을 키워드로 묶는 시도는 과거부터 있어왔다. 주로 한 분야의 전문가나 유명한 평론가가 이를 언급하면 언론에서 이를 인용하는 방식으로 단어들은 퍼졌다. 그 과정에서 단어는 힘을 얻어 고유명사에서 일반명사가 되거나 반대로 힘을 잃고 스스로가 아는 이들만 아는 특정 시대의 은어가 되곤 한다. 최근 급작스레 나타나 긍정과 부정 양 방향으로 뜨거운 단어가 있다. '영포티(Young+Forty)', 어린 40대란 뜻이다. 40대에 대한 자발적인 긍정이 담겨있던 명명법은 스스로를 누가 띄워주기를 원하던 또다른 40대들에 의해 엄청난 사용빈도를 보이고 있다. 신조어에도 인용지수(IF)가 있었다면 아마 올해의 인용지수 1위를 기록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단어는 그 이용량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 영포티란 단어에 대한 불편한 속내를 과감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자기 자랑에 불과한데? 사실 영포티는 시작부터 불안정한 단어였다. 과거 IMF 직후 모 은행의 “부자되세요~”만큼이나 마케팅적인 요소로 가득하다. 언론에 처음 영포티를 등장시킨 기사는 작년 초 한국일보에 게재된 <한국사회 변화의 열쇠 ‘영포티(Young Forty)’>라는 기사다. 여기서 기자는 김용섭 소장(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을 만나 “그 나이가 되면 당연히 해야 하는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이어받지 않고 자신들만의 삶의 방식을 찾아낸 첫 중년 세대”라는 해석과 함께 현 40대가 영포티라고 명명했다. 기사를 쓴 기자 본인과 김 소장이 40대라는 점은 그냥 웃고 넘어가자. 자신들만의 삶의 방식. 그들이 이전까지의 40대와 자칭 ‘영포티’를 분류하는 기준이다. 구체적으로는 다음의 여섯 가지가 ‘영포티의 특징’이다. ① 내 집 마련에 집착하지 않는다. ② 보수냐 진보냐의 이념보다 합리와 상식을 우선시한다. ③ 결혼, 출산에 대한 관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④ 현재에 충실하다. 미래를 위해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거나 희생하지 않으며, 일보다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를 원한다. ⑤ 형식과 허울, 체면치레 같은 허식을 내려놓는다. ⑥ 트렌드에 민감하다. 왕성한 소비자이자 새로운 것에 대한 수용 능력이 높다. 특징일지 바람일지 모르겠다. 특히 6번의 경우, 꽤 씁쓸한 구석이 있다. 왕성한 소비자는 거저 생겨나지 않는다. 소비를 하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 물론 돈이 있어도 소비를 자제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돈이 없어서 왕성한 소비를 하지 못한다. 선택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비단 소비뿐만 아니다. 형식과 허울, 체면치레 같은 허식은 그 사람의 삶에서 배운 결과이기도 하다. 한평생 권위주의 속에서 살아온 이들에게 갑자기 ‘권위는 허상일 뿐이다’라고 말하면 선뜻 받아들이겠는가? 일보다는 가족을 택하는 것 또한 야근에 찌든 이들에게는 선택의 영역이 아니다. 결국 영포티의 특징이라 소개한 내용은 곧 ‘나는 이런 것을 누리고 있어’라는 자기 자랑 서사에 지나지 않는다. 세대를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거 안어울려요” 더 큰 논란은 이 자가자랑 서사에 ‘아재’들이 몰입하면서 생겼다. 애초 시작부터 마케팅 혹은 자기 과시용 소지가 다분했던 영포티는 ‘나도 영포티야!’라 말하는 자신감 넘치는 이들 덕에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어리고 싶은 욕망이야 이해가 간다. '늙지 않으려는 욕구'는 지극히 보편적이다. 필자 주변에 흔한 20대들도 자신보다 어린 이들에게 부러움을 느낀다. 20대 후반은 20대 초반에게, 20대 초반은 10대에게. 돌이켜보면 고등학생 때는 중학생을 부러워했으니 이는 모든 인간의 후회가 담긴 바람일 게다. 그럼에도 자칭 영포티는 전혀 공감을 얻지 못하는 세대로 남아있다. 20대, 30대에게 영포티라는 말은 그저 웃어넘기기엔 조금 불편하다. 우리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N포세대라는 말을 들어왔다. 연애, 결혼, 출산 세가지를 포기하면 삼포세대, 취업과 내 집 마련까지 포함하면 오포세대 등 여러 가지를 포기한 세대라는 표현이다. 비교해보면 재밌다. 영포티와 N포세대 모두 내 집 마련을 포기했지만, 그 설명은 다르다. 영포티에 한정해 내 집 마련은 ‘더 이상 제태크 수단이 아니’기에 포기한 행위다. N포세대에게 내 집 마련은 ‘불가능해서 포기해야 하는’ 행위다. 요즘말로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나 할까. ▲'영포티(Young Forty)'. 관념 저항 의지로 가득찬 시대 정신같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실상은 세대를 다 아우르지 못하는 형용 모순의 언어일 뿐이다. 결국은 최근 활발한 꼰대 담론으로 회귀한다. 나는 될 대로 하겠다. 나 정도면 괜찮은, 젊은이 아니냐. 물론 그 와중에도 나이차로 발생한 권력 구도는 유지해야 한다는 식이다. 그래서일까, 영포티에 대한 불만은 젊은 이성에게 들이대는 40대에 대한 불만과도 겹쳐진다. “나도 어린데 왜 안만나줘, 나 돈 많아”도 영포티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행태다. 앞서의 반복이지만 영포티라는 정체성에는 ‘안정적이고 적당히 건강을 챙길 수 있는 사무직’이란 의미도 내포돼 있다. 20대와 30대 때 젊음을 혹사한 적 없는 이들. 그래서 오늘도 근근히 살아가는 40대 비정규직에게, 영포티는 더 잔인하다. 여성이 배제되어 있는 것도 큰 문제다. 최근 대중문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나이든 남성과 젊은 여성과의 사랑 내러티브가 그 일환이다. 중년 남성의 '젊은 삶'을 위해 여성이 대상화 되는 셈이다. 단순하게 생각하자. 과로사 인구가 제일 많고 퇴직을 걱정하기 시작하는 것이 대한민국 40대의 현실이다. 물리적으로도 젊음과는 거리가 먼 이들을 급작스레 호명한 것은 인구 분포와 사회 경제적 주권 계층에 큰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한때 '신세대'라는 별칭을 부여받으며 급격히 민주화된 사회 속에서 번영을 누려왔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현실을 비추어 봤을 때 '영포티'를 진심으로 내재할만한 40대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평범한 마케팅이고 일상적인 프레이밍이다. 정말 젊은 합리를 지니고 있다면 여기에 호도되어서는 곤란하다. 자칭 영포티에겐 조소를, 명칭조차 없는 이들에겐 위로를. 글/ 이상호 기자 ta4tsg@hanyang.ac.kr

2017-09 11

[오피니언]호칭이 애매하다고? 호칭에 쫄지말자!

살면서 우린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한 심리학자는 사람이 한 평생동안 대략 3,500명의 사람들과 친분을 맺게 된다고 했다. 지금은 멀어진 사이일지라도, 우린 이미 초중고를 거치며 십 여명의 담임교사와 수십명의 교과목 교사, 몇 백명의 동창들과 알고 지냈다. 평균수명 100세를 바라보는 입장에서 수긍 가는 숫자다. 그런데 우린 서로를 부를 때 주의할 점이 있다. 서로의 이름을 알든 모르든, 그저 이름으로만 대하지 않는다. 김 교수님, 아무개 형, 혹은 그저 선생님. 막역한 친구가 아닌 이상 호칭은 상대를 부를 때 필수다. ▲대화할 때 서로에 대한 존중은 필수다. (자료사진/출처: 게티이미지뱅크) 호칭을 부르는 건 생각보다 간단하다. 상대의 직업이 중요하면 직업으로, 나와의 관계가 중요하면 그 관계를, 그저 존칭이 필요할 땐 ‘선생님’ 등의 호칭으로 부르면 된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명명이 까다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상대와의 관계가 하나로 정리돼지 않을 때. 선배와 형 누나, 혹은 언니 오빠. 선배라 부르는 건 조금 딱딱하고, 그렇다고 편하게 부르기엔 아직 낯선 상대다. 특히 재수 등의 이유로 늦게 입학한 이라면 더 머리가 복잡하다. ‘저 선배는 나랑 동갑일까? 동생인가? 선배라 하면 어려워할까? 편하게 부르면 막 대하는거 같은데?’ 이런 상황에서 왜 호칭이 존재하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가장 먼저, 호칭은 내가 인식하는 상대를 재정의한다. 가령 교수에게 교수님, 조교에게 조교선생님 등으로 부르는 건 곧 내가 상대를 그런 직책으로 인식하고, 또 존경의 표시로 ‘님’과 ‘선생님’을 붙였단 얘기다. 혹은 추후 회사에서 이 부장, 김 대리 등으로 서로를 부르는 것 또한 서로를 ‘바로 그 직책’의 사람으로 대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호칭은 때론 위세를 지니고 있기도 하며, 반대로 존중과 존경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형, 언니는, 조금 다르지만 비슷한 이유다. 둘은 동성의 연장자에게 쓰는 호칭이다. 이를 쓴다는 의미는 상대를 별다른 직책으로 인식하기 보다는, 보다 인격적이고 가까운 상대로 곧 친밀한 상대로 인식함을 담고있다. 다시 말해 화자가 청자를 가까운 사이로 인식하는 중이다. 상대방의 호칭을 고민한다는 얘기는, 정리하면 상대방을 학교에서의 관계로 불러야 할지, 혹은 보다 친밀하게 불러야 할지 고민한다는 얘기가 된다. 즉 이 고민은 ‘난 저 사람과 친해지고 싶은데, 아직 보다 편하게 부르기엔 어렵다’는 얘기도 되겠다. 하지만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지 말자. 애초에 호칭은 서로에 대한 인식을 확인하는 동시에, 상대에 대한 존중이 담긴 표현이다. 상대와 나 상호간의 약속이, 다른 이들의 말보다 중요하다. 호칭을 부르는데 있어 어렵다면, 상대와 터놓고 얘기하자. “저… 선배라 부를까요 형이라 부를까요?”처럼 말이다. 아마 “선배가 편해”나 “편한대로 불러” 등 아주 간단하게 약속이 정해질 거다. 혹여나 저 질문에 화를 내는 선배가 있다면, 그땐 상대가 뭐라든 ‘선배’라며 존칭을 쓰기를 권한다. 관계는 그토록 중요하면서도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호칭은 결국 대화 당사자끼리 정하면 되는 문제다. (자료사진/출처: 게티이미지뱅크) 글/ 이상호 기자 ta4tsg@ha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