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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 23

[오피니언][타임머신] '사근동 시절'을 추억하다

▲ 대학을 조업할 때까지 살던 낡은 사글셋방 자리에는 4층짜리 신축 건물이 들어섰다. 월세 12만 원짜리 사글셋방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12만 원짜리 사글셋방으로 기억한다. 별도의 화장실도 없는, 오래된 단층 단독주택 별채에 딸린 허름한 방 한 칸에 불과했다. ‘주방’보다는 ‘부엌’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공간에 쭈그리고 앉아 고무호스를 잡고 한 손으로 머리를 감았다. 온수는 나오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 기억은 불분명하다. 한양대 국문학과 재학 시절, 나는 주로 혼자였다. 학교 후문으로부터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사근동 셋방에서 졸업할 때까지 혼자 살았다. 밥은 학생회관이나 학교 근처 식당에서 혼자 먹는 둥 마는 둥 때웠고, 공부나 과제도 혼자 대충 해결했다. 가끔은 늦은 밤부터 이른 새벽까지 후문 근처에 있는 PC방에서, 역시 혼자 놀았다. 잠이 오든 말든, 12만 원짜리 셋방에서 가만히 혼자 누워 지낸 시 간도 많았다. 대학 졸업 직후에도 꽤 오랫동안 독거인으로 지냈으니, 대학 시절의 경험이 아주 낯선 것만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때를 떠올리면 유독 고립감 비슷한 감정이 느껴진다. 좁디좁은 셋방에 몸을 누인 나는 그때 주로 어떤 몽상으로 시간을 보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시기가 내게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다. ▲ 한양대 후문에서 이어지는 서울 성동구 사근동 골목 IMF 외환위기 직후, 불안의 시대 대학 졸업이 다가올수록 낯선 불안감을 종종 느꼈다. 어디론가 가야 하는데 갈 곳은 없는 처지, 취업난에 내몰린 것이다. 취업난은 해마다 거듭된다. 대졸 예정자의 취업률 곡선이 어떻게 휘고 꺾이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해보지 않았으니, ‘그때가 더 힘들었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청년 실업이라는 단어를 유행가 가사처럼 듣고 있는 지금과 비교하면, 약 20년 전 내가 경험한 취업난은 그나마 나은 편에 속할 수도 있다. 청년 실업 장기화를 겪고 있는 지금의 청년 세대가 우울하다면, 약 20년 전 우리는 불안했다는 정도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굳이 비교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다만 약 20년 전 우리 앞에 놓인 취업난을 애써 기억할 만하다면, 그건 단연 ‘IMF 외환위기’ 탓이다. IMF 외환위기 사태가 불거진 것이 1997년 12월이었고, 그 여파는 내가 대학 4학년이던 1999년까지 이어졌다. 사회 진출을 앞두고도 딱히 진로를 정하지 못한 건 나만이 아니었다. 대학원 진학으로 방향을 튼 몇몇을 빼면 거의 대다수가 ‘미취업자’ 신세였다. 문 닫는 기업이 속출했으니 일자리가 증발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여럿이 함께’의 소중함 불안의 시대에 위로가 된 것은 고통이라면 고통이었을 당시의 경험이 나만의 것은 아니라 우리 모두, 곧 집단의 몫이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IMF 외환위기 직후 학교를 떠나야 했던 우리는 모두 불안했으니 경쟁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서로가 서로를 연민의 대상으로 바라볼 뿐 내가 주저앉혀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원초적 연대 의식이었다. 가끔 이름을 들으면 알 만한 기업의 채용 시험에 최종 합격한 동기를 위해서는 진심으로 축하를 보냈다. 그런 일이 자주 벌어지지는 않았다. 불안감이 커질수록 학교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학교에 있는 시간은 내게 소중하게 다가왔다. 처지가 비슷한 동기를 만나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아도 좋았고, 인문대 앞 벤치에 가만히 앉아 느끼는 가을바람도 좋았다. ‘일삼팔(138) 계단’이라고 부르던 그 길을 오르던 시간, 잠시 그 길 위에 멈춰 내려다보던 행당동 풍경도 근사했다. 1999년 늦가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현길언 교수님은 졸업을 앞둔 ‘예비 백수’들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시간이 오래 지나 현 교수님의 말씀이 머릿속에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얼기설기 다시 엮어보면 이렇다. “취업이 어려워서 다들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걸로 안다. 졸업을 앞두고 있으니 지금 당장 진로를 결정해야 한다는 조급함도 느낄 수 있다. 졸업 이후에도 1~2년 정도 직업을 갖지 못한 채 지낼 수도 있다. 인생 전체에서 그렇게 백수로 지낼 수 있는 시기도 많지 않으니, 너무 조급하게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각자의 미래를 그려보는 것도 좋다.” ‘현대소설론’이었던가, 마지막 수업 시간에 들려주신 현 교수님의 말씀은 나를 비롯한 여러 예비 백수에게 적잖은 힘이 됐다. ▲ 2000년 2월 25일 국어국문학과 졸업 사진 여유를 잃지 말라는 가르침 대학을 졸업한 뒤 실제로도 8개월 남짓 백수로 지냈다. 그 뒤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하기 시작했고, 올해로 기자 경력 18년째를 맞았다. 자신이 맡고 있는 분야에 관한 취재를 한 뒤 기사를 내보내면 끝. 기자의 일에 대해 많은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어쩌면 그게 우리 일에 관한 가장 간결하고 정확한 설명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게 일부의 사실에 불과하다는 데에 있다. 소규모 신문사에 있을 때에는 좀 더 나은 곳으로 가려고 안간힘을 써야 했다. 정작 내가 원하는 신문사에 입사한 뒤에는 선후배 동료보다, 같은 분야를 담당하는 타사 동료보다 빼어난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강인한 ‘멘탈’과 체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건 바람직하지 않다. 마음을 다잡는다. 다른 사람과의 경쟁이 아닌 내가 기자가 되고자 했던 이유에 집중해야 한다. 다른 누구를 바라볼 시간에 자신과의 대화에 좀 더 투자해야 한다.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은데, 어쨌든 노력해야 한다. 이따금 사근동(혹은 한양대) 시절을 떠올린다. 내가 졸업한 뒤 많은 것이 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현길언 교수님은 정년을 마친 뒤 퇴임했다. 한양대역과 학생회관을 직통으로 연결하는 지하철역 출구가 생겼다는 소식에 감탄했고, 일삼팔(138) 계단이 ‘일오팔(158) 계단’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에 한참 웃었다. 내가 졸업할 때까지 머문 12만 원짜리 사근동 셋방은 헐렸다. 그 자리에는 4층짜리 원룸 건물이 들어섰다. 그 어둡고 눅눅한 셋방은 이제 내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 도대체 그때, 내 머릿속에는 무슨 ‘쓸데없는’ 잡생각이 그리 많았던 건지 여전히 궁금하다. 문득 그때의 고요함이 그립다. 사랑한대 2017년 7-8월호 이북 보기

2017-03 31

[오피니언][타임머신] 아름다운 시간 속 추억의 편린들

몇 해 전 일이다. 한양대학교병원을 찾게 된 것은 대학 동창이 내게 전한 부고 때문이었다. 학교 다닐 때 시인이셨던 교수님의 부인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선약이 잡혀 있긴 했지만 약속을 취소하고 강변북로로 핸들을 꺾었다. 그런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만나게 될 친구들과 졸업 후 한 번도 찾지 않은 학교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궁금했다. 이순임(소설가/㈜램프웨이 대표·국어국문학과 85) ▲1988년 팰리스호텔에서 열린 사은회 때의 모습(출처: 이순임 동문) 문득 떠오른 졸업식 날의 풍경 한양대역 근처에 이를 무렵, 문득 졸업식 날이 떠올랐다. 엄마는 새로 맞춘 한복을 곱게 차려 입으셨고 은빛 스팽글이 달린 토트백을 드셨다. 그런데 전철 안은 사람들로 미어터졌고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인파에 밀려 엄마는 맨 아래 계단까지 어떻게 내려왔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지갑이 없어진 걸 알게 된 것은 우왕좌왕 식을 마치고 사진을 찍은 다음이었다. 엄마 안색은 순식간에 달라지셨다. 그제야 엄마는 계단 내리막에서 누군가 툭, 치고 지나간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부모님은 무슨 이유에선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진관에 들러 나란히 독사진을 찍으셨다. 그때 찍은 사진이 엄마의 영정사진이 됐고, 기일이 돌아올 때마다 나는 한복 입은 엄마를 보게 된다. 30년 전 소매치기를 당하고 마음이 상해 있던 엄마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은 역에서 곧바로 갈 수 있도록 학교까지 통로가 이어져 있다고 들었다. 그때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30년의 시간을 거꾸로 돌리다 나는 천천히 차의 속도를 낮추면서 교문을 찾아보았다. 둘이었던 교문이 언제 없어졌는지 하나만 남아 있었다. 정확하게 ▲ 2학년 때 협궤열차 앞에서 국문과 친구들과 추억을 남 겼다. (출처: 이순임 동문) 어느 쪽에 있었는지 구분이 안 됐다. 뒤이어 내 눈을 의심했다. 빼곡하게 들어선 학교의 신축 건물들이 하나둘 모습을 나타냈다. 나는 아예 차를 정차시키고 차창 문을 열어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옛날의 그 학교가 아닌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 하는 기분이 들었다. 1985년에 타임머신을 타고 간 2015년 미래에 대한 이야기. 불현듯 <백 투 더 퓨처 2>란 영화가 떠올랐다. 나 역시 85년도 새내기 대학 생활을 함께했던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어언 30년의 시간을 영화처럼 거꾸로 돌리고 있었으니 맞추기라도 한 듯, 시간의 간극이 일치했다. 나는 이미 지난 시간 속에 묻혀 있었다. 촌스런 펌에 청바지와 운동화 차림이었던 친구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들을 만나면 어깨동무를 하고 겅중겅중 뛰어보다가 지치면 오래도록 포옹하고 싶었다. 그리고 아직도 심장이 뜨겁게 뛰는지 하하호호 웃고도 싶었다. 마음은 벌써 장례식장에 닿기도 전에 저만큼 앞서 가고 있었다. 과거의 한 순간으로 나를 이끈 힘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걷는 것을 유난히 싫어한다. 1985년 신입생 합격자 발표를 보기 위해 나는 정문에서부터 힘겹게 언덕을 올랐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는 합격자 명단이 대운동장에 붙여져 있었다. 어렵게 물어 찾아갔던 그 넓은 운동장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30여 년 전 겨울, 외투에 손을 넣은 채 운동장을 걷는 나의 뒷모습이 그려졌다. 합격자 명 ▲ 학과 친구들과 함께 인천항에서 찰칵!(출처: 이순임 동문) 단 공고문 앞에서 수험번호를 발견하고 안도했던 나. 물론 나는 ERICA캠퍼스가 더 친숙했다. 바람이 많고 허허벌판이었던 안산은 지금 아무리 눈 씻고 찾아보려 해도 옛날의 바람을 만날 수 없으리라. 친구들과 수원과 인천을 오가는 협궤열차를 탄 적도 있다. 어떻게 해서 그 많은 인원이 열차를 타고 인천항에 가게 됐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무엇이 과거의 한 순간으로 나를 이끌었을까. 벌써 학교를 졸업한 지 30년이 다 되어간다. 나도 이제 나이가 먹을 만큼 먹은 셈이다. 묵은 짐을 정리하다가 아이들의 어릴 적 앨범을 펼쳐 보게 됐다. 그 가운데 사진 한 장이 유난히 내 마음을 붙들고 놓아주질 않았다. 사진 속의 두 아들은 볼우물이 파일 만큼 헤벌쭉 웃고 있었다. 특히 눈이 좀 큰 편인 작은애의 까만 눈동자가 조명처럼 빛났다. 게다가 조막만한 양 주먹은 오므리고 두 팔은 가슴께까지 가 있었다. 보면 볼수록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나는 스마트폰의 카메라를 작동시켜 사진을 옮겨두었다. 한동안 매일 아침 사진을 보고 하루를 시작했다. 아름다운 장면은 기억을 불러내는 한, 현재에도 미래에도 늘 살아있기 마련이다. 살아있기에 만날 수 있었던 그새 어둠이 내렸고 장례식장이 어디에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도대체 모르겠군. 천천히 차를 몰며 혼잣말을 하고 있을 때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국문과였던 친구들이 많이 와 있는데 언제 도착하느냐는 물음이었다. 하긴 그 친구를 만나게 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 친구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한다는 말이 “살아있어 줘서 고마워!”였다. 나는 그 말을 오래도록 곱씹었다. 살아있다는 것은 매우 신비로운 일이다. 장례식장에 가는 동안 나는 과거라 말하는 시간 속에서 추억의 편린들을 꺼냈었다. 모두 살아있는 기억들이었다. 30여 년 전에 비해 많이 달라진 학교 전경이야말로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강렬하게 깨닫게 해 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장례식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살아있기 때문에 우리는 만났다. 사랑한대 2017년 3-4월호 이북 보기

2013-06 12

[오피니언]마음의 여행이요 일탈이 되는 축제는 나에게 ‘뜨거운 소란 속의 차가운 고요’였다

떠들썩한 축제 마당 한편에 시화가 걸려 있다. 국문학과의 시인 지망생은 소란이 소란으로 들리지 않았다. 소란 속의 고요, 두 가지 매력이 담겨 있는 것이 축제의 시화전 아니었던가. 아우성 속 또 다른 세상으로 이끌어주었던 액자. 단 한 사람이 알아보고, 꽃 한 송이 걸어주기를 기다리던 신록의 교정 한 모퉁이가 이제는 푸르러졌다. ▲ 글 고운기 (시인, 문화콘텐츠학과 조교수, 80·국어국문) 졸업하고 4반세기가 흘러 모교의 교수로 돌아와 다시 보는 후배들의 축제는 훨씬 조직적이고 윤택해졌다. 축제는 일탈이다. 일상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의 대표가 여행이라면 축제는 마음의 여행이요, 그래서 또 하나의 일탈이다. 일탈은 곧 모험을 동반한다. 마음의 모험 흠뻑 젖어 있는 후배들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 또한 어느새 슬며시 끼어들곤 한다. 주점에서 털리는 지갑의 돈이 솔찬하지만 말이다. 축제 때면 내가 다니던 국문학과는 시화전을 열었다. 글깨나 쓴다는 친구들에게는 기다려지는 행사였다. 시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직접 그림을 그리기도 했으니, 시화전을 통해 재주가 있고 없음이 두루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강의실 하나가 방과 후면 화실로 변했다. 거기에는 재학생뿐 아니라 동문 선배도 함께해 이미 등단한 선배 시인을 만난다는 즐거움도 있었다. 나는 언제쯤 등단이라는 절차를 거쳐 시인이 될까, 시인의 자격으로 옛 강의실을 찾아와 시화를 만들 수 있을까, 내 시가 세상에 나가 많은 사람의 가슴을 적실 작품이 되기는 할까. 어느 때보다 축제의 가슴 설렘은 시화전을 준비하는 한 달 남짓 나의 미래와 결부되어 고양되었다. 열정으로 만든 시 한 편 그리고 고요한 기다림 시화전을 오픈하는 날 아침이면 분주했다. 액자에 담긴 완성된 시화를 찾아오고, 공대 건축학과의 협조를 받아 그들이 쓰는 이젤을 빌려오고, 학생회관 앞 공터를 전시장으로 확보해 진열했다. 학과의 교수와 학생이 모여 엄숙히 치르는 테이프 커팅, 축제 동안 시화는 자랑과 부끄러움을 함께 안고 모두에게 선보여졌다. 그리고 고요한 기다림. 전시장은 당번을 정한 순서대로 지키지만 당번이 아니더라도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맴돌기 일쑤였다. 누가 찾아올지, 누군가 내 시를 읽고 한마디 하지 않을지, 정말 누군가 예쁜 꽃이라도 한 송이 시화 끝에 걸어주지나 않을지. 마음에 둔 여자 후배가 “형, 이번 시도 참 좋아요!”라고 말 걸어오면 뭐라고 답할까. 그때 여학생들은 남자 선배를 ‘형’이라 불렀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 기억 속 시화전에는 꽃도, 여자 후배도 없었다. 아주 의례적으로 달아주는 후배의 꽃송이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면 술 마시러 가자고 이끄는 선배가 있을 뿐이었다. 물론 그건 내 시가 결코 못나서가 아니요, 나를 좋아하는 후배가 없어서도 아니었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 학교 안에는 두세 개 문학 동아리가 있어 그들과 묘한 경쟁심이 발동되기도 했다. 같은 시화전을 여는데 적어도 대학 안의 ‘문학 본산’인 국문학과가 뒤처져서야 쓰겠는가. 내가 후배였을 때 선배들은 은근히 그 같은 중압감을 우리에게 주었다. 내가 선배가 된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더욱 열심히 시를 쓰게 했고, 뭔가 더 기발하게 그림을 그리게 한 원동력이었을 터다. 문학이 무슨 경쟁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3학년 마치던 겨울, 나는 운 좋게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시인으로 등단했다. 4학년 축제 때는 그 시를, ‘신춘문예 당선작’이라는 꼬리표와 함께 전시했었다. 후배들 앞에서 어깨 한번 들썩였던 기억이다. 4월의 개나리가 피고 지고, 교정에는 새순 돋는 신록의 나무가 싱그러워질 때쯤이면 강의실이 화실로 변하는 한 달 남짓의 축제 시화전 준비 기간을, 세상의 어떤 일보다 아름다웠던 일로 추억한다. 우리는 그런 신록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축제 기간에 휴강하지 않는다. 엄격해진 학사관리 때문인지, 수업 결손 없는 축제를 열라고 하는 것 같다. 아무래도 좀 어설프다. 밤새 놀이와 술판에 취했던 학생들이 아침이면 강의실로 꾸역꾸역 모여든다. 이 와중에 결석은 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가상하지만 아무래도 정상적인 수업이 될 리 없다. 꼭 이래야 하나 싶다. 내가 유학했던 일본의 게이오慶應 대학은 목요일 저녁부터 일요일까지 축제를 열었다. 월요일은 보수일補修日이다. 그러니까 금요일과 월요일만 휴강하면 되었다. 주말을 끼기 때문에 동문 선배와 지역 주민이 많이 찾아왔다. 자연스럽게 동문 간, 지역사회 간 유대를 도모하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학교를 매개로 모두가 함께 모여 까무러치도록 노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축제의 일탈만큼은 철저히 보장해주는 쪽이 낫지 않을까. 국문학과가 지금도 시화전을 하는지 모르겠다. 초대해주지 않더라도 올해는 슬쩍 한번 찾아가 보고 싶다. 꽃 한 송이도 준비하겠다. 열심히 쓴 시화 한 편에 달아주고, 마침 주인공이 거기 있거든 그 길로 주점에 데려가 술 한잔 사겠다. 에디터 양효선|사진 최재인

2013-03 20

[오피니언]그 시절의 '쪽지통신' 지금의 너는 상상할 수 있니?

가끔 상상한다. 그때 그 시절, 지금처럼 휴대전화나 아니 적어도 삐삐라도 있었다면 우린 어떻게 되었을까. 마음만 먹으면 어디서나, 누구와도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지금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그 시절의 이야기. 쉽게 닿지 않아 그만큼 애달팠지만 그 누가 부정하랴. 도서관 게시판에 빼곡하게 붙어 있던 수많은 쪽지가 만들어낸 공간들이 꼭 그만큼의 낭만이 되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음을. 대학 2학년 시절 맞이한 봄은 유독 바람의 서슬이 아파서 늘 웅크리고 다녔다. 3월 말이 되어서야 내 여자친구는 “이제야 봄이 왔네. 내일 토요일인데 우리 대공원에 놀러 가자!”고 말했다. 우리는 오전 11시에 한양대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모처럼 나도 봄풀과 봄 나무들이랑 한 타령으로 몸을 흔들어대며 다소 들뜬 마음으로 걸을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전동차가 한양대역에 정차하지 않고 지나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역사에서 화재가 발생했다고 한다. ▲ 1970년대 한양대 중앙도서관의 전경. 수많은 젊은이의 꿈과 사랑 그리고 미래가 공존했던 추억의 장소다. 문자로도 전화로도 쉬이 닿을 수 없던 시절 휴대전화 같은 것은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이럴 때 무전기라도 있으면 그녀에게 연락을 할 텐데’ 하는 생각으로 발만 동동 굴렀다. 건대 입구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한양대역 근처로 돌아왔다. 10여 대의 소방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으나 소방 호스도 제대로 겨냥하지 않고 있는 걸로 보아 화재가 심각하지 않음을 짐작케 했다. 곧 소방차들이 하나둘씩 철수했고 역사로 사람들이 들어섰다. 하지만 그녀는 없었다. 이미 약속 시간은 2시간이 지난 상태였다. 나는 그렇게 역사에서 다시 1시간을 묵히다가 문득 학교 도서관을 떠올렸다. 평소 도서관의 작은 게시판을 통신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문득 그녀가 보고 싶다거나 갑자기 일이 생겨 집에 가야 한다거나 하면, ‘인진아, 나 시골에서 어머니가 오셔서 급하게 집에 가야 해. 미안. 내일 3시에 여기서 보자.’ 그렇게 쪽지에다 적어 게시판에 꽂아두었다. 내 쪽지를 본 그녀는 ‘어머니가 맛있는 거 해주겠네. 낼 보자’ 하는 답글을 내 글 위에다 꽂아두었다. 그 생각이 나자 빛의 속도로 도서관을 향해 뛰었다. 숨을 헐떡거리면서 게시판을 뒤졌으나 그녀가 남긴 쪽지는 없었다. ‘인진아, 나 도서관 4층에 있어. 그리로 와.’ 일부러 눈에 잘 띄도록 붓펜으로 쓴 쪽지를 붙여놓고 도서관 4층에서 기다렸다. 1시간쯤 기다렸을까. 과 친구가 “야, 너 토요일에도 나와서 공부하네. 당구나 치러가자” 하고 거의 강제로 손을 잡아끌었다. 당구가 끝나자 6시가 넘어버렸지만 나는 다시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게시판에 그녀의 쪽지가 보였다. ‘시우야, 4층 가봤더니 없네. 나, 카페 꽃다에 있을게. 4시 2분.’ 빛의 속도로 언덕길을 뛰어서 내려갔다. 일이 꼬이려고 그랬는지 카페 문 앞에는 ‘금일은 쉽니다’라는 푯말이 붙어 있었다. 돌아서려다가 푯말 아래에 붙은 작은 쪽지가 보였다. ‘시우야, 카페 이솝으로 와.’ 나는 다시 빛의 속도로 달렸다. 하지만 아무리 카페 안을 뒤져도 그녀는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도서관으로 갔다. 인진이가 남긴 쪽지는 없었다. ‘인진아, 나 간다. 저녁 7시 15분.’ 그러고 보니 종일 굶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는 고파도 밥은 먹고 싶지 않았다. ▲ 현재 한양대의 지성들이 모이는 백남학술정보관. 깔끔하게 정돈된 서가를 비롯해 최첨단 시설과 휴식 공간을 갖춘 학교 도서관이다. 여백 없는 단순함이 때론 필요할 테지 월요일에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너 그제 무지무지 배고팠지? 나도 그랬어” 하고 입을 열었다. “그래도 무척 좋았어. 비록 옆에 있지는 않았지만 만나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얼마 나 많이 뛰어다녔니? 상상만 해도 즐겁고 웃음이 나와. 꼭 옆에 붙어 있어야만 데이트하는 거 아니잖아? 나한테는 그런 시간들이, 그런 네 눈빛이 더없이 소중하고 고마워. 재밌다! 일부러 하려고 해도 못 하잖아!” 하고 웃었다. 그제야 나도 웃을 수 있었다. 올해 대학에 가는 딸에게 최신형 스마트폰을 사주고 저녁을 먹으면서 그런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가만히 듣고 있던 딸이 그 여친과는 왜 헤어졌냐고 물었다. “3학년 때 그놈이 갑자기 휴학해버렸어. 한마디 의논도 없이. 그게 화가 나서 잠시 헤어져 있자고 한 게…. 하지만 보고 싶을 때가 있었어. 그런데 그때마다 연락이 안 됐어. 그놈이 시골 할머니 댁에 가 있어서. 그때 휴대전화만 있었어도…. 그래, 비록 휴대전화는 옛날 쪽지만큼 여백은 없어도 나름대로 좋은 점도 있더라. 그래서 아빠는 다시 대학 가면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면서 연애 한번 하고 싶어. 가끔은 단순하면서도 빠르고 여백이 없이 사는 너희가 2 부러울 때도 있거든. 그냥….” 글 이상권(아동문학가, 국어국문학과 84학번)|에디터 최미현|사진 홍보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