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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 14

[오피니언][타임머신] 소설이 만들어진 자리

인문대로 향하는 138개의 계단 중 마지막 네 개의 계단을 남겨두고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면 좁은 샛길이 나온다. 중앙도서관 쪽으로 난 좁은 흙길이다. 습관처럼 인문대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섰다가 중앙도서관에 가야 할일이 뒤늦게 생각나거나 제2공학관에 수업이 있는 걸 깨닫고 난감해질 때 계단을 다 올라서지 않아도 지름길로빠질 수 있는 셈이다. 그래봤자 거의 다 올라온 셈이어서 굳이 그 길로 다니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편혜영(소설가·명지대 문예창작학과 교수/국어국문학과 졸업) 사방이 고요한 좁은 흙길 길에는 드문드문 긴 나무의자 세 개가 놓여 있었다. 사람들이 머문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진 의자로, 나뭇결이 갈라져 잔가지가 도드라진 탓에 함부로 만지면 가시가 박히기 십상이고, 어두운 색의 옷을 입고 앉았다 일어서면 페인트 부스러기가 잔뜩 묻어나곤 했다. 볕이 좋은 날이면 의자에 앉아 책을 읽거나 누군가와 수다를 떨기도 했지만, 대개는 혼자 멍하니 앉아 시간을 보냈다. 춥지 않은 바람이 일정한 방향으로 불고 발끝이 바닥에 닿을 때면 가볍게 흙먼지가 일었다가 금세 가라앉고 수업이 시작되어 모두 교실로 몰려갔는지 사방이 고요한 속에 홀로 있으면 당연히 이런저런 생각이 들기 마련이고, 생각이 고이면 언제나 그렇듯 소설이 쓰고 싶어졌다. 간혹 인문대에서 사범대, 중앙도서관으로 이어지는 큰길을 지나가는 사람들 때문에 소란스러워졌지만 그 길의 소음은 금세 고요 속으로 스며들어버렸다. 학교 내에서 그렇게 묵묵한 곳은 드물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었다. 연신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왔지만, 조용하고 고요한 소란스러움이었다. 딱딱한 나무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소설을 쓰다가 마음 내키면 쓰고 있는 소설을 읽거나 쓰다만 소설의 뒷부분을 조금씩 이어 써나갔다. 그곳에 앉아 있다고 해서 놀랄 만큼 일이 잘되거나 수월히 써지는 법은 결코 없었다. 그럼에도 소설이라는 것은 세상과 그다지 멀지 않은 자리에서 세상으로부터 멀어진 기분이 들어야 겨우 조금 쓸 수 있다는 걸 실감했다. 언제나 여전한 인문대 복사실 운 나쁘게도 의자는 셋뿐이어서 누군가 차지하고 있을 때가 더 많았다. 그런 날이면 주저하지 않고 인문대로 갔다. 인문대 지하 계단을 내려서면 가장 먼저 복사실이 보였다. 그곳은 언제나 문이 열려 있고 무료한 표정의 아저씨가 턱을 괴고 앉아 어두운 계단참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사실 복사실 아저씨는 계단참에 무료한 시선을 둘 때보다 복사기 앞에 서 있거나 제본기 앞에서 분주히 손을 놀리고 있을 때가 많았다. 아저씨의 얼굴은 자주 보고 몰래 훔쳐보기도 했지만 잘 기억할 수 없었는데, 그건 아저씨가 얼굴 정면을 내보일 때보다 일정한 속도로 뿜어내는 복사기의 빛 속에서 살짝 얼굴을 드러냈다가 감추는 때가 많아서였다. 누군가 인문대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을 꼽으라면(그러나 아무도 이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나는 주저 없이 복사실이라고 할 작정이었다. 좋아하는 장소라고 해서 특별한 용무 없이 복사실 앞을 서성이거나 무턱대고 들어가서 구경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나는 주로 복사실 앞 휴게실에 앉아 그곳을 조금씩 훔쳐보는 쪽을 택했다. 휴게실은 오래된 기원을 연상시키는 소파와 테이블이 늘어서 있었는데, 언제나 시끄러웠다. 수업이 없고 딱히 갈 곳을 찾지 못한 인문대 학생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 거기였다. 지하에는 연극영화학과 학생들의 연습실이 있어서 목청 높인 연습생의 소리도 들려왔다. 휴게실 안쪽에는 인문대 도서관이 있었다. 지하여서 습하고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는데, 몇몇 선배들은 제집처럼 종이 파일로 벽을 쌓아놓고 고개를 수그리고 책을 들여다보았다. 어깨를 잔뜩 웅크린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 더 추워졌다. 그래서인지 한기 도는 불안한 도서관보다 복사기 빛이 늘 은은히 끊이지 않는 복사실을 보고 있는 게 더 마음 편했다. 나는 휴게실에 앉아 자주 복사실을 힐끔거렸다. 정확히 말하면 복사실을 들여다보기 위해 휴게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복사실 아저씨가 쉬는 시간에, 문을 닫는 점심시간에 어디에서 머물지, 어떤 식사를 할지, 무슨 이야기에 관심이 있을지, 자신이 복사하는 학술서나 원서를 간혹 읽기도 할지, 똑같은 내용의 문장들을 계속 들여다보면 어떤 기분이 들지, 궁금했지만 그보다는 경외심이 더 컸다. 소란스러운 가운데 누군가는 주어진 일을 하고 언제나 꾸준하고 세상과 관계없이 뭔가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사람들 앞에 물건으로 만들어 내놓는다는 게 경이로웠다. 복사실 아저씨는 말하자면 언제나 그곳에 있는 사람이었다. 아담하고 흐트러져 보이지만 질서정연하게 물건이 배치되고 종이와 글자와 문장이 마구 쌓인 그곳에. 성장한다는 것은, 사회인으로 자립한다는 것은 아저씨처럼 정착할 공간이 생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소설을 쓴다는 것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학교를 졸업하고 다행히 나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운 좋게도 여덟 권의 책을 출간했다. 그러는 동안 깨달은 것은 소설을 쓰는 일은 무척이나 숙련도가 낮다는 것이다. 새로 소설을 시작할 때마다 길을 잃은 기분이 든다.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인물은 어떻게 구체화하는지, 매번 처음인 듯 서툴기만 하다. 그렇게 겨우 소설을 완성하고 나서는 소설을 쓰는 일이 매번 같은 강도의 노동을 되풀이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소설을 쓴다는 것이 인적 드문 샛길의 의자와 같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세상 속에서 고요하게 자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무엇이든 쓸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복사하는 일과도 같은지 모른다. 세상이라는 책과 인간이라는 자료집을 들고 그것에 얼마간 빛을 쪼여 베껴내는 일 말이다. 물론 복사한다고 소설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그렇다. 복사광을 쬔다고 한 편의 소설이 순식간에 완성될 리도 없다. 말하자면 이것은 고요와 항상성에 대한 비유라고 말할 수 있다. 많은 것이 달라진다. 아예 사라지기도 한다. 모양이나 용도가 이전과 전혀 달라지기도 한다. 변함없이 시간이 그렇게 만든다. 그럼에도 어떤 것은 그대로 남는다. 변하지 않는 것, 고요한 것을 바라보면 마치 삶을 대할 때 그런 것처럼 뭉클해진다. 지금은 사라진 의자와 지금도 여전한 복사실이 내게는 그렇다. 사랑한대 2018년 01-02월호 이북 보기

2017-12 19

[오피니언][타임머신]두고두고 좋은 인연, 한양대와 바둑

나는 대학에 입학했을 때 바둑 전문선수인 프로기사(棋士)였다. 고등학생 때 프로로 데뷔한 후 한양대 영어영문학과에 진학했다. 당시 프로기사라는 희귀한 직업을 가진 대학생이었기 때문에 학교나 바둑계에서 꽤 인기가 있었다. 신문이나 방송 등 매스컴에 내가 둔 시합과 함께 자주 이름이 올랐다. 정수현(명지대 바둑학과 교수·영어영문학과 76) ▲ 정수현 교수가 바둑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바둑과 학업 두 마리 토끼를 잡다 대부분의 대학생 스포츠 선수들이 그렇듯이 기사 생활과 대학 생활을 양립하기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바둑 시합과 학교 수업이 겹칠 때 출석 문제가 골칫거리였다. 전공과목으로 ‘햄릿’을 가르치던 노교수님이 계셨는데, 학생들에게 일일이 출석표를 나눠주며 직접 이름과 학번을 써내도록 했다. 시합 시 출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한 가지 묘수를 생각해냈다. 바둑 시합이 오전에 열리니 오후에 배정된 교과목을 신청하기로 한 것이다. 즉 오전에 시합을 마치고 얼른 학교에 가 수업에 참석한다는 전략이었다. 그런데 이 방법도 문제가 있었다. 그 무렵에는 한 판의 시합을 하는 데 각자 2~3시간씩 주어졌기 때문에 이 시간을 다 쓰면 오후 3~4시에 끝났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바둑을 최대한 빨리 두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에게 할당된 시간을 최대한 줄여 가급적 점심 무렵에 끝내려고 애썼다. 이로 인해 나는 속기파(速棋派) 기사로 변하게 됐다. 원래는 수읽기를 많이 하는 타입이었는데, 바둑과 학업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보니 감각적으로 두는 속기파가 된 것이다. 그 덕분이었을까. 나는 방송에서 개최하는 속기 시합에 강해졌다. KBS바둑왕전과 SBS바둑최강전에서 고수들을 꺾고 결승까지 오르는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아쉽게도 최고수 이창호 9단을 만나 두 번 다 준우승에 그쳤지만, 출석을 위한 빨리빨리 전략이 속기 훈련이라는 색다른 이점을 준 것이다. 진짜 ‘바둑학 교수’가 되기까지 나의 대학 생활은 상당히 바쁜 편이었다. 당시 학생이었지만 나는 새롭고 창의적인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편이었다. 한국기원에서는 바둑시합 외에도 초보자나 아마추어를 위해 바둑강좌 코스를 만들어 직접 가르쳤다. 또한 월간 바둑지에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성신여대 등 다른 대학교에 가서 바둑을 가르치기도 했다. 새벽에는 영어학원에 다녔다. 이런저런 일을 많이 해서인지 수업 시간에 가끔 졸았다. 한번은 맨 뒷줄에 앉아서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데, 분위기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부스스 눈을 떴더니 학생들이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달콤하게 낮잠을 자다가 교수님이 문장을 읽어보라고 호명하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도 나는 리포트 쓰는 것을 좋아했다. 한번은 짝사랑의 비애를 담은 영어 에세이를 써서 A+를 받았다. 다른 과목에서도 리포트 점수는 높았다. 돌이켜보면 나의 대학 생활에서 가장 많은 도움이 된 것은 리포트 쓰기였던 것 같다. 리포트 작성은 글쓰기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훈련에도 도움이 됐다. 졸업 후 나는 대학에서의 경험을 살려 바둑 관련 서적을 30여 권 저술했다. 그중에는 <바둑 읽는 CEO>, <고수경영>과 같이 바둑의 지혜를 다룬 에세이도 있다. 이런 책을 많이 쓴 덕분에 나는 바둑 기자들로부터 ‘바둑학 교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리고 20년 전에 명지대학교에 사상 처음으로 바둑학과가 생겼을 때 진짜 교수로 부임했다. ▲ 총동문바둑대회 현장 모두가 부러워하는 한양기우회 나의 대학 생활에서 특별히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하나 있다. 대학에 다닐 때 만들었던 ‘한양기우회’라는 동아리 모임이다. 이 동아리의 회원들이 졸업 후 한양(OB)기우회를 만들었다. OB기우회는 대학의 바둑동아리에 장학금을 주고 행사도 후원한다. 이 기우회는 지금까지 35년 이상 이어지고 있다. 수년 전 서울대를 비롯한 다른 대학교 바둑 동호인들이 한양대 기우회를 부러워해 벤치마킹했다. 한양기우회의 탄생은 내 생각에서 비롯됐다. 1980년께 학교에 다닐 때 나는 한양대에 기우회가 없는 것을 아쉽게 생각했다. 그래서 교내에 기우회를 하나 만들었으면 했다. 그러던 차에 같은 영어영문학과 2년 후배인 이일환 동문과 우연히 바둑 얘기를 하게 됐다. 당시 전체 학생회 간부였던 이일환 동문은 매우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훗날 고위 공무원으로 활약했다. 내가 기우회를 만들면 어떻겠냐고 하자 그는 즉시 찬성했다. 그리고는 기우회 소집 안내문을 만들어 벽보판에 붙였다. 기우회 창립을 위한 대망의 발기모임이 교내 노천극장에서 열렸다. 몇 명이나 올지 가슴을 졸였는데, 예상 외로 많은 인원이 참석했다. 그때 멋진 비전을 선언하며 한양대 기우회를 발족시켰다. 바둑계 사람들에 의하면 한양기우회는 특별한 점이 있다고 한다. 회원들 간에 우애가 깊고 분위기가 매우 좋다는 것이다. 회원들은 대학연맹전 출전 같은 문제에서는 양보의 미덕을 발휘하지만, 식사 때는 서로 식대를 내려고 한단다. 유머 있는 해설로 유명한 ‘바둑계의 김구라’ 김성룡 9단도 한양기우회를 좋아한다. 이 기우회에서 만나 부부가 된 커플도 몇 쌍 있다. 한양기우회의 이런 인간적인 분위기에는 역대 회장들이 많은 기여를 했다. 강병두, 이원옥, 한태완 동문 등 여러 회장들이 애정을 갖고 기우회를 이끌었다. 여성 회장이었던 원영숙 동문은 기우회에서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해 바둑계에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현재는 박승자 회장이 맡아 한양동문 바둑대회 등 다양한 행사를 주관한다. 기우회에서는 바둑 모임뿐만 아니라 체육 행사와 엠티(MT) 같은 프로그램도 개최한다. 근래에는 한양대 총동문회와 협력해 동문 바둑대회를 여러 차례 개최해오고 있다. 한양대의 색다른 자랑거리인 한양기우회가 계속 이어졌으면 한다. 사랑한대 2017년 11-12월호 이북 보기

2017-09 14

[오피니언][타임머신] 진사로의 언덕 오르던 87년의 기억 속으로

입학한 지 30년이 지난 이야기를 다시 더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치 어제처럼 가깝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미러 없는 인생은 질주의 피로감을 쉽게 느낀다. 가끔은 뒤를 돌아볼 줄 알아야 건강하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87년을 회상하는 시간은 내 마음속에 새로운 에너지를 솟구치게 하는 작은 축제인 듯싶다. 축제를 즐기러 가는 기분으로 그 시절의 행당동과 사근동을 다시 걸어본다. 한기수((주)필옵틱스 대표·물리학과 87) 동문 ▲ 한기수((주)필옵틱스 대표·물리학과 87) 동문 등산을 하는 거야? 등교를 하는 거야? 나는 부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한양대를 등하교하기에는 참 먼 거리였다. 한양대는 부천과 가까운 서울 서쪽도 아니고, 저기 동쪽 끝에 붙어 있지 않은가. 전철도 한 번에 가지 않는다. 1호선을 타고 사람들이 북적대는 신도림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탄다. 당시에는 지하철 노선이 네 개뿐이었다. 그래서 가는 길도 단순했다. 지방이라고 얘기하기도 애매한 부천에서 다니려면 두 시간 이상의 등교 시간을 각오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자취와 하숙을 선택했다. 그러나 학교와 가깝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우리의 모교 한양대는 참으로 높은 곳에서 우리를 내려보고 있었다. 강의 시간에 늦을 것 같으면 당연히 뛰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 높은 한양산(?)을 뛰어올라야 했다. 겨우 강의실에 도착하면 땀이 범벅이 되어 숨 고르고 땀 식히느라 10여분은 교수님의 강의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덕분에 체력만큼은 그 어느 대학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지금 이 사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지치지 않는 에너지를 유지하는 것도 그 시절 모교의 언덕이 키워준 힘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내가 공부했던 자연과학대는 두 곳으로 갈 수 있었다. 하나는 인문대 방향의 108계단과 또 하나는 사회대 방향의 계단. 두 계단 모두 만만치 않지만 인문대 쪽 계단은 도중에 한 번은 쉬어야 할 정도로 힘든 구간이다. 이 구간을 오르는 여대생들의 기분은 어땠을까? ▲ 87년 당시의 자연대 건물 시국보다 더 어수선했던 신입생 시절 87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격동의 시기였다. 그러나 신입생에게 동문시국은 그냥 흐르는 물이었다. 그 물에 멋모르고 발을 담그는 사람이 있었고, 그 물을 피해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신입생은 그 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수선했다. 아니 공부에 시달렸던 고교 시절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소위 말하는 대학의 낭만을 만끽하고 싶어 했다. 지금은 사라진 사범대 앞 잔디밭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심지어 진달래 지짐을 해먹는 친구도 있었다. 1학년 1학기는 캠퍼스 안팎을 탐방하는 시기였다. 대출 목록을 작성하는 중앙도서관도 새로웠고, 88서울올림픽 배구 경기장으로 활용되는 체육관도 신기했다. 축제 시기에는 노천극장에서 종종 공연이 열렸다. 안치환, 신형원 등 가수들의 공연을 본 기억이 난다. 학교 밖은 놀거리가 더 풍부했다. 돈 없는 자취생이었지만 당구장에서 짜장면 내기를 했고, ‘이모네’에서 선배들과 젓가락을 두드리며 술도 마셨다. 그 나이 또래들이 그렇듯 싸고 맛있는 안주는 순대와 떡볶이였다. 이걸 먹을 수 있는 곳이 학교에서 나와 건널목을 건너면 나오는 먹자거리, 그 한가운데 있는 ‘한양뷔페’다. 이것저것 먹을 게 많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 ▲ 학교 정문에 개교 기념행사로 진행한 행당제전 홍보물이 세워져 있다. ▲ 진사로에 걸쳐져 있는 다양한 현수막들 학창 시절 키워드는 대자보, 동문회, MT 내 기억으로는 그 당시 교가가 두 가지 버전이었다. 하나는 집회를 나가는 학생들이 부르는 교가로 “행당언덕 넓은 터 남청색 진리 아래 모인 우리들~”로 시작하는 노래고, 또 하나는 우리 모교를 세운 김연준 설립자 님이 작곡한 “한양, 한양 무궁하도록~”이라고 부르는 노래다. 그 시절을 돌아보면 생각나는 세 가지 키워드는 대자보와 동문회 그리고 MT다. 대자보는 진사로를 걷다보면 늘 마주치는 대학 내 뉴스다. 나무 사이에 걸린 현수막에는 토익, 토플 강좌를 안내하는 내용이 넘쳐났고, 나무에는 동문회 모임을 알리는 포스터가 색깔별로 붙어 있었다. 교내 신문인 학보도 기억난다. 그 당시 학보는 학교 소식을 알기 위한 기본 목적보다는 다른 대학의 여대생들과 미팅한 후 편지를 주고받는 창구 역할을 했다. 신입생을 설레게 하는 것 중의 하나는 MT였다. MT는 대학의 낭만이었다. 주로 청량리역에서 모여 경춘선을 타고 대성리나 청평으로 갔다. 북한강변에서 캠프파이어를 하며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한양대 캠퍼스를 거닐며 신기했던 것 중의 하나는 연예인을 본다는 것이었다. 당시 인문대에는 연극영화학과가 있었는데 탤런트 박순애와 개그우먼 박미선, 강변가요제에서 상을 받은 꺽다리 이상은 등 TV에 출연하는 탤런트, 개그맨, 가수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동기들의 힘을 하나로! 87홈커밍데이 모교 한양대는 전통적으로 이공계가 강한 대학교다. 지금 사회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모교 출신 선후배들의 활약상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한양대 출신들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맹활약 중이다.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후배들이 자부심을 가져도 좋은 부분이다. 얼마 전 모교를 들른 적이 있다. 학교가 몰라보게 달라졌다. 2호선 한양대역 2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한양대 캠퍼스 안마당으로 연결된다. 전철역이 학교 안에 있는 것이다. 그만큼 학교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걸 의미한다. 자료를 복사하던 가게는 아직도 있었지만, 내가 즐겨 찾던 술집이나 당구장은 거의 없어지고 프랜차이즈 전문점 등으로 바뀌었다. 학교 건물도 87년도와 비교하니 엄청 늘었다. 낡은 건물들은 모두 새롭게 리모델링됐다. “참 좋아졌네”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올 정도였다. 78년 역사의 명문 사립대학다웠다. 기억은 단편적이다. 단편적인 기억은 추억이 된다. 그런데 그 추억이 모여 역사가 되는 법이다. 나는 올해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 87학번 홈커밍데이 준비위원장을 맡았다. 홈커밍데이는 87학번 한양인을 위한 행사다. 이 행사는 우리가 다녔던 그 시절 한양의 추억과 기억을 다시 돌아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특별한 기억을 함께한 87학번 동기들이 이 글을 통해 그 당시의 기억을 되살리고, 홈커밍데이를 통해 모범이 되는 학번으로 힘을 모았으면 한다. 이 자리를 빌려 87학번 홈커밍데이에 동기 분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활동을 부탁한다. 한양대의 역사는 78년의 한 페이지들을 채운 선후배들의 기억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87년도를 회상하며 나는 우리 모교의 힘을 다시 느끼고, 그 시절 나를 키웠던 에너지를 만난다. 한양대, 네가 있어 지금의 내가 있다. 사랑한대, 한양! 사랑한대 2017년 9-10월호 이북 보기

2017-08 23

[오피니언][타임머신] '사근동 시절'을 추억하다

▲ 대학을 조업할 때까지 살던 낡은 사글셋방 자리에는 4층짜리 신축 건물이 들어섰다. 월세 12만 원짜리 사글셋방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12만 원짜리 사글셋방으로 기억한다. 별도의 화장실도 없는, 오래된 단층 단독주택 별채에 딸린 허름한 방 한 칸에 불과했다. ‘주방’보다는 ‘부엌’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공간에 쭈그리고 앉아 고무호스를 잡고 한 손으로 머리를 감았다. 온수는 나오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 기억은 불분명하다. 한양대 국문학과 재학 시절, 나는 주로 혼자였다. 학교 후문으로부터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사근동 셋방에서 졸업할 때까지 혼자 살았다. 밥은 학생회관이나 학교 근처 식당에서 혼자 먹는 둥 마는 둥 때웠고, 공부나 과제도 혼자 대충 해결했다. 가끔은 늦은 밤부터 이른 새벽까지 후문 근처에 있는 PC방에서, 역시 혼자 놀았다. 잠이 오든 말든, 12만 원짜리 셋방에서 가만히 혼자 누워 지낸 시 간도 많았다. 대학 졸업 직후에도 꽤 오랫동안 독거인으로 지냈으니, 대학 시절의 경험이 아주 낯선 것만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때를 떠올리면 유독 고립감 비슷한 감정이 느껴진다. 좁디좁은 셋방에 몸을 누인 나는 그때 주로 어떤 몽상으로 시간을 보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시기가 내게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다. ▲ 한양대 후문에서 이어지는 서울 성동구 사근동 골목 IMF 외환위기 직후, 불안의 시대 대학 졸업이 다가올수록 낯선 불안감을 종종 느꼈다. 어디론가 가야 하는데 갈 곳은 없는 처지, 취업난에 내몰린 것이다. 취업난은 해마다 거듭된다. 대졸 예정자의 취업률 곡선이 어떻게 휘고 꺾이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해보지 않았으니, ‘그때가 더 힘들었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청년 실업이라는 단어를 유행가 가사처럼 듣고 있는 지금과 비교하면, 약 20년 전 내가 경험한 취업난은 그나마 나은 편에 속할 수도 있다. 청년 실업 장기화를 겪고 있는 지금의 청년 세대가 우울하다면, 약 20년 전 우리는 불안했다는 정도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굳이 비교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다만 약 20년 전 우리 앞에 놓인 취업난을 애써 기억할 만하다면, 그건 단연 ‘IMF 외환위기’ 탓이다. IMF 외환위기 사태가 불거진 것이 1997년 12월이었고, 그 여파는 내가 대학 4학년이던 1999년까지 이어졌다. 사회 진출을 앞두고도 딱히 진로를 정하지 못한 건 나만이 아니었다. 대학원 진학으로 방향을 튼 몇몇을 빼면 거의 대다수가 ‘미취업자’ 신세였다. 문 닫는 기업이 속출했으니 일자리가 증발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여럿이 함께’의 소중함 불안의 시대에 위로가 된 것은 고통이라면 고통이었을 당시의 경험이 나만의 것은 아니라 우리 모두, 곧 집단의 몫이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IMF 외환위기 직후 학교를 떠나야 했던 우리는 모두 불안했으니 경쟁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서로가 서로를 연민의 대상으로 바라볼 뿐 내가 주저앉혀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원초적 연대 의식이었다. 가끔 이름을 들으면 알 만한 기업의 채용 시험에 최종 합격한 동기를 위해서는 진심으로 축하를 보냈다. 그런 일이 자주 벌어지지는 않았다. 불안감이 커질수록 학교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학교에 있는 시간은 내게 소중하게 다가왔다. 처지가 비슷한 동기를 만나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아도 좋았고, 인문대 앞 벤치에 가만히 앉아 느끼는 가을바람도 좋았다. ‘일삼팔(138) 계단’이라고 부르던 그 길을 오르던 시간, 잠시 그 길 위에 멈춰 내려다보던 행당동 풍경도 근사했다. 1999년 늦가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현길언 교수님은 졸업을 앞둔 ‘예비 백수’들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시간이 오래 지나 현 교수님의 말씀이 머릿속에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얼기설기 다시 엮어보면 이렇다. “취업이 어려워서 다들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걸로 안다. 졸업을 앞두고 있으니 지금 당장 진로를 결정해야 한다는 조급함도 느낄 수 있다. 졸업 이후에도 1~2년 정도 직업을 갖지 못한 채 지낼 수도 있다. 인생 전체에서 그렇게 백수로 지낼 수 있는 시기도 많지 않으니, 너무 조급하게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각자의 미래를 그려보는 것도 좋다.” ‘현대소설론’이었던가, 마지막 수업 시간에 들려주신 현 교수님의 말씀은 나를 비롯한 여러 예비 백수에게 적잖은 힘이 됐다. ▲ 2000년 2월 25일 국어국문학과 졸업 사진 여유를 잃지 말라는 가르침 대학을 졸업한 뒤 실제로도 8개월 남짓 백수로 지냈다. 그 뒤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하기 시작했고, 올해로 기자 경력 18년째를 맞았다. 자신이 맡고 있는 분야에 관한 취재를 한 뒤 기사를 내보내면 끝. 기자의 일에 대해 많은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어쩌면 그게 우리 일에 관한 가장 간결하고 정확한 설명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게 일부의 사실에 불과하다는 데에 있다. 소규모 신문사에 있을 때에는 좀 더 나은 곳으로 가려고 안간힘을 써야 했다. 정작 내가 원하는 신문사에 입사한 뒤에는 선후배 동료보다, 같은 분야를 담당하는 타사 동료보다 빼어난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강인한 ‘멘탈’과 체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건 바람직하지 않다. 마음을 다잡는다. 다른 사람과의 경쟁이 아닌 내가 기자가 되고자 했던 이유에 집중해야 한다. 다른 누구를 바라볼 시간에 자신과의 대화에 좀 더 투자해야 한다.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은데, 어쨌든 노력해야 한다. 이따금 사근동(혹은 한양대) 시절을 떠올린다. 내가 졸업한 뒤 많은 것이 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현길언 교수님은 정년을 마친 뒤 퇴임했다. 한양대역과 학생회관을 직통으로 연결하는 지하철역 출구가 생겼다는 소식에 감탄했고, 일삼팔(138) 계단이 ‘일오팔(158) 계단’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에 한참 웃었다. 내가 졸업할 때까지 머문 12만 원짜리 사근동 셋방은 헐렸다. 그 자리에는 4층짜리 원룸 건물이 들어섰다. 그 어둡고 눅눅한 셋방은 이제 내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 도대체 그때, 내 머릿속에는 무슨 ‘쓸데없는’ 잡생각이 그리 많았던 건지 여전히 궁금하다. 문득 그때의 고요함이 그립다. 사랑한대 2017년 7-8월호 이북 보기

2017-05 22

[오피니언][타임머신] 배움 그 이상의 가치를 담은 캠퍼스

내게 대학 캠퍼스는 방황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방황과 회의의 날들이 없었다면 나는 전공과목인 수학에만 집중하고 문학, 철학, 미술 등의 영역으로 관심을 확장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함기석(시인/동화작가·수학과 86) ▲ 친구들과 목포항에서 찰칵!(출처: 함기석 동문) 사색의 숲에서 만난 책들 교문에서 진사로를 따라 언덕을 올라가면 1층에 서점과 우체국이 있던 학생회관 건물이 나왔다. 그곳 광장에서 가파른 희망의 계단을 오르면 건물이 하나 나왔다. 자연대와 사회대가 함께 쓰던 곳이었다. 거기서 대학 본관으로 내려가는 길에 작은 쉼터 공간이 있었다. 낡은 나무벤치가 있고 나무들이 많은 그곳을 나는 ‘사색의 숲’이라 부르곤 했다. 그곳엔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과 아름다운 그늘이 있었다.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있었다. 강의가 없는 시간이면 나는 친구들 몰래 혼자 그곳으로 내려가 철학책을 읽곤 했다. 랭보나 발레리 같은 프랑스 시인들의 번역시집, 민중문학 계열의 책들을 읽었다. 책에는 내가 모르던 노동자의 삶과 참혹한 현실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열악한 환경에 처한 노동자들의 울분과 비애가 짙게 배어 있었다. 자본을 매개로 가진 자와 무산자 사이의 대립 구조에서 수탈과 차별이 발생한다는 걸 난 알게 되었다. 이 구조적 모순이 끝없는 대립을 낳고 노동자들의 저항과 분노를 촉발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책도 불구적 현실을 타파할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진 못했다. 오히려 이념과 사상이 개인의 생각과 상상을 획일화시키고 문학의 자유로운 형식을 억압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질문과 낭만과 분노가 어우러진 공간 ▲ 86학번 친구들과 강원도 속초 민박집에서(출처: 함기석 동문) 돌이켜보면 내가 다니던 80년대 중반의 대학 캠퍼스는 단순한 배움의 공간만이 아니었다. 그곳은 시대의 현장이었고 투쟁의 참여마당이었다. 가치 있고 참된 삶의 방향을 찾기 위한 질문의 공간이었고 낭만의 공간이었다. 어떤 학우에겐 연인과의 아름다운 데이트 공간이었고, 어떤 학우에겐 미래를 위한 아름다운 설계 공간이었고, 어떤 학우에겐 시대에 대한 분노의 표출 공간이었다. 시위대를 진압 해산하기 위해 전투경찰이 학내까지 진입하기도 했다. 보통 한양대 시위는 학교 정문 앞의 삼거리 광장이 전투경찰과의 대치 공간이었다. 거기서 거센 구호와 함께 전투적인 투석이 이루어졌고 그에 맞대응한 체루가스 살포와 지랄탄 공격이 이어지곤 했다. 따가운 눈물을 흘리면서도 우린 가슴 속에서 들끓는 불의에 대한 저항을 멈출 수 없었다. 눈에 비닐 랩을 두른 채 화염병을 던졌다. 시위가 점점 과격해지면 전경들은 곤봉과 방패를 휘두르며 매우 조직적으로 전진해왔다. 검은 철모와 무장한 옷과 방패까지 갖춘 전경대원들을 태운 차량이 학내 진사로 광장까지 밀고 들어올 때도 있었다. 그럼 쫓기고 쫓기다 뿔뿔이 흩어졌다가 우린 다시 시계탑에 모여들었다. 그곳은 자연대, 사회대에서 공대, 상대, 인문대, 사범대로 갈라지는 길목이었고 그곳에서 마지막 노래와 구호를 힘차게 외치고는 해산을 했다. 갈등과 번민의 시간을 보내다 그 당시 나는 김남주 시인의 시를 접하기 시작했다. 그의 시는 지배계급의 억압과 착취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독재의 현실과 참상을 노골적으로 폭로하고, 비인간적인 삶을 강요당하는 수많은 근로대중들의 삶과 노동 투쟁을 가슴 아프게 새겨내었다. 그에게 시인은 민중들이 불의와 폭력에 맞서 싸워나가도록 둥둥 북소리를 울리는 자이며, 전투의 나팔 소리를 울리는 자이며, 살인과 고문을 자행하는 압제자의 가슴에 창을 꽂는 자였다. 그에게 시는 이 땅의 독재 권력과 맞서 싸운 무기였고, 무사안일에 빠진 소시민들의 의식을 일깨운 날카로운 채찍이었다. 1980년 광주항쟁 관련 동영상과 자료들 그리고 광주 출신 친구들의 증언을 접하면서 나는 점점 더 깊은 회의와 시대에 대한 상실감에 빠져들었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진실과 역사는 대부분 날조된 것이라는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더 이상 학교에 붙어 있기 힘들었다. 갈등과 번민 속에서 나는 배낭을 싸매고 무작정 서울을 떴다. 서울역에서 마지막 야간열차에 몸을 싣고 남쪽 바다로 떠났다. 한 달 가까운 시간을 전국을 떠돌다 돌아와 보니 기말고사가 시작되었다. 필수과목이었던 군사훈련 과목인 교련을 비롯해 물리실험, 화학실험 등 여러 과목에서 낙제점이 나왔고 나는 도망치듯 군에 자원입대했다. ▲ 수학과 동기생들과 기념 촬영을 했다 (출처: 함기석 동문) 어리고 순수했던 그 시절 돌이켜보면 대학 생활은 참으로 짧다. 친구들과 후회 없이 질퍽하게 놀았고 암담한 시대 속에서 가슴 뜨겁게 보냈던 시절이었다. 규락, 은화, 학주, 재진, 원우, 전우, 흥기, 종태 등등 동기생들을 떠올려 본다. 그들 또한 치기와 열망에 사로잡혔던 그때 그 시절이 몹시 그리울 거다. 그때 우린 어렸고 세상도 어렸다. 그때 우리의 심장은 뜨거웠고 머리는 경직되지 않았다. 태양도 달도 별도 모두 우리 편이었고 우린 깔깔거리며 세상을 맘대로 주물러 반죽했다. 정말이지 그때 우린 어리고 어렸다. 그래서 순수했고 겁이 없었고 실패가 두렵지 않았다. 돌아보면 대학은 아련하고 아픈 고향집 같은 곳이다. 떠나온 지 30여 년이 지나서야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사랑한대 2017년 5-6월호 이북 보기

2017-03 31

[오피니언][타임머신] 아름다운 시간 속 추억의 편린들

몇 해 전 일이다. 한양대학교병원을 찾게 된 것은 대학 동창이 내게 전한 부고 때문이었다. 학교 다닐 때 시인이셨던 교수님의 부인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선약이 잡혀 있긴 했지만 약속을 취소하고 강변북로로 핸들을 꺾었다. 그런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만나게 될 친구들과 졸업 후 한 번도 찾지 않은 학교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궁금했다. 이순임(소설가/㈜램프웨이 대표·국어국문학과 85) ▲1988년 팰리스호텔에서 열린 사은회 때의 모습(출처: 이순임 동문) 문득 떠오른 졸업식 날의 풍경 한양대역 근처에 이를 무렵, 문득 졸업식 날이 떠올랐다. 엄마는 새로 맞춘 한복을 곱게 차려 입으셨고 은빛 스팽글이 달린 토트백을 드셨다. 그런데 전철 안은 사람들로 미어터졌고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인파에 밀려 엄마는 맨 아래 계단까지 어떻게 내려왔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지갑이 없어진 걸 알게 된 것은 우왕좌왕 식을 마치고 사진을 찍은 다음이었다. 엄마 안색은 순식간에 달라지셨다. 그제야 엄마는 계단 내리막에서 누군가 툭, 치고 지나간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부모님은 무슨 이유에선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진관에 들러 나란히 독사진을 찍으셨다. 그때 찍은 사진이 엄마의 영정사진이 됐고, 기일이 돌아올 때마다 나는 한복 입은 엄마를 보게 된다. 30년 전 소매치기를 당하고 마음이 상해 있던 엄마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은 역에서 곧바로 갈 수 있도록 학교까지 통로가 이어져 있다고 들었다. 그때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30년의 시간을 거꾸로 돌리다 나는 천천히 차의 속도를 낮추면서 교문을 찾아보았다. 둘이었던 교문이 언제 없어졌는지 하나만 남아 있었다. 정확하게 ▲ 2학년 때 협궤열차 앞에서 국문과 친구들과 추억을 남 겼다. (출처: 이순임 동문) 어느 쪽에 있었는지 구분이 안 됐다. 뒤이어 내 눈을 의심했다. 빼곡하게 들어선 학교의 신축 건물들이 하나둘 모습을 나타냈다. 나는 아예 차를 정차시키고 차창 문을 열어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옛날의 그 학교가 아닌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 하는 기분이 들었다. 1985년에 타임머신을 타고 간 2015년 미래에 대한 이야기. 불현듯 <백 투 더 퓨처 2>란 영화가 떠올랐다. 나 역시 85년도 새내기 대학 생활을 함께했던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어언 30년의 시간을 영화처럼 거꾸로 돌리고 있었으니 맞추기라도 한 듯, 시간의 간극이 일치했다. 나는 이미 지난 시간 속에 묻혀 있었다. 촌스런 펌에 청바지와 운동화 차림이었던 친구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들을 만나면 어깨동무를 하고 겅중겅중 뛰어보다가 지치면 오래도록 포옹하고 싶었다. 그리고 아직도 심장이 뜨겁게 뛰는지 하하호호 웃고도 싶었다. 마음은 벌써 장례식장에 닿기도 전에 저만큼 앞서 가고 있었다. 과거의 한 순간으로 나를 이끈 힘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걷는 것을 유난히 싫어한다. 1985년 신입생 합격자 발표를 보기 위해 나는 정문에서부터 힘겹게 언덕을 올랐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는 합격자 명단이 대운동장에 붙여져 있었다. 어렵게 물어 찾아갔던 그 넓은 운동장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30여 년 전 겨울, 외투에 손을 넣은 채 운동장을 걷는 나의 뒷모습이 그려졌다. 합격자 명 ▲ 학과 친구들과 함께 인천항에서 찰칵!(출처: 이순임 동문) 단 공고문 앞에서 수험번호를 발견하고 안도했던 나. 물론 나는 ERICA캠퍼스가 더 친숙했다. 바람이 많고 허허벌판이었던 안산은 지금 아무리 눈 씻고 찾아보려 해도 옛날의 바람을 만날 수 없으리라. 친구들과 수원과 인천을 오가는 협궤열차를 탄 적도 있다. 어떻게 해서 그 많은 인원이 열차를 타고 인천항에 가게 됐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무엇이 과거의 한 순간으로 나를 이끌었을까. 벌써 학교를 졸업한 지 30년이 다 되어간다. 나도 이제 나이가 먹을 만큼 먹은 셈이다. 묵은 짐을 정리하다가 아이들의 어릴 적 앨범을 펼쳐 보게 됐다. 그 가운데 사진 한 장이 유난히 내 마음을 붙들고 놓아주질 않았다. 사진 속의 두 아들은 볼우물이 파일 만큼 헤벌쭉 웃고 있었다. 특히 눈이 좀 큰 편인 작은애의 까만 눈동자가 조명처럼 빛났다. 게다가 조막만한 양 주먹은 오므리고 두 팔은 가슴께까지 가 있었다. 보면 볼수록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나는 스마트폰의 카메라를 작동시켜 사진을 옮겨두었다. 한동안 매일 아침 사진을 보고 하루를 시작했다. 아름다운 장면은 기억을 불러내는 한, 현재에도 미래에도 늘 살아있기 마련이다. 살아있기에 만날 수 있었던 그새 어둠이 내렸고 장례식장이 어디에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도대체 모르겠군. 천천히 차를 몰며 혼잣말을 하고 있을 때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국문과였던 친구들이 많이 와 있는데 언제 도착하느냐는 물음이었다. 하긴 그 친구를 만나게 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 친구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한다는 말이 “살아있어 줘서 고마워!”였다. 나는 그 말을 오래도록 곱씹었다. 살아있다는 것은 매우 신비로운 일이다. 장례식장에 가는 동안 나는 과거라 말하는 시간 속에서 추억의 편린들을 꺼냈었다. 모두 살아있는 기억들이었다. 30여 년 전에 비해 많이 달라진 학교 전경이야말로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강렬하게 깨닫게 해 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장례식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살아있기 때문에 우리는 만났다. 사랑한대 2017년 3-4월호 이북 보기

2016-07 01

[오피니언][타임머신] 눈물과 막걸리를 추억하며

내가 입학한 1985년은 대한민국 역사의 격동기 와중이었다. 1980년 광주의 한이 캠퍼스까지 이어져 대학은 어디나 하루가 멀다 하고 ‘짱돌과 최루탄의 부등가 교환’이 이어졌다. 우리 대학도 마찬가지였다. 낭만을 찾기 힘들었던 시절 ▲ 1985년 대동제 끝나고 인문동산에서 합창하는 모습 아침에 등교를 하면 그 전날 쏘아댄 최루탄 냄새가 가시지 않아 수업 시작 전부터 눈물과 콧물을 한 바가지씩 쏟아야 했다. 물론 그날도 어김없이 교문을 사이에 두고 돌과 화염병을 던지고 무자비하게 최루탄을 쏘아댈 테니 등굣길의 눈물은 기껏 전주곡에 불과했다. 사실 눈물 없이는 대학 생활 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요즘 학생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최루탄이 날아드는 교정을 상상할 수 있을까? 교정은 어디나 전쟁터처럼 깨진 벽돌과 최루탄 파편이 널브러졌다. 당연히 분위기는 험악하고 낭만은 눈을 씻고 봐도 찾지 못할 수밖에. 그해부터 대학 축제는 대동제로 바뀌고 축제의 상징인 ‘쌍쌍 파티’도 사라졌다. 대동제는 더 이상 청춘을 위한 파티가 아니라 5.18 기념일까지 이어지는, 더없이 투쟁하기 좋은 시즌이었다. 급우들도 운동권과 비운동권으로 갈라져 반목하고, 어느 해부터는 운동권끼리도 사상 투쟁에 휩쓸려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영문과 동기만 해도 시대의 중압감을 견디지 못한 탓에 네 댓 명이 정신병으로 고생했으니 당시의 혼란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인문동산과 동물원의 술자리 ▲ 저 뒤쪽이 인문동산이다. 계단을 올라가면 널따란 공터가 나온다. 지금은 자연대에 가렸겠지만 병원 건물도 보인다 돌이켜 보건대, 그 몇 년 동안 술의 힘으로 간신히 버틴 것 같다. 남들은 삶과 사회를 고민하고 괴로워하다가 몸과 마음까지 상했건만 우리 같은 껄렁이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술 속으로 숨어들기만 했다. 돌과 화염병을 던지고 술, 소위 ‘의식화’ 세미나를 끝내고 술, 수업 거부를 하고 또 술… 심지어 시험 기간 중에도 낮술을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어느 교수님은 개강 때마다 나를 보고는 “이번 학기도 어김없이 코가 빨가네”라며 웃곤 하셨다. 문제는 술값이었다. 학생이 무슨 돈이 그리 많다고 비싼 술집을 허구한 날 드나들겠는가. 당연히 술자리는 대부분 교정에서 이루어졌다. 술은 슈퍼에서 막걸리와 소주 몇 병, 안주는 대개 한양시장에서 공수해 온 오이, 당근 정도였다. 운이 좋으면 ‘행당 1번지’라는 튀김집에서 오징어튀김이나 고구마튀김을 1,000원 어치 사오거나 공돈 좀 생긴 선배가 이런저런 안주거리를 챙겨 왔다. 아침에 등교할 때 교재 대신 안주거리를 챙겨 오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술자리는 주로 ‘인문동산’과 ‘동물원’이었다. 당시는 캠퍼스 모습이 지금과 많이 달랐다. 인문대 앞 주차장 자리는 지금보다 지대가 훨씬 높았고 자연대 대신 그 자리에 완만한 경사의 풀밭이 있었다. 인문대가 한양대에서 제일 높은 위치였으니 자연히 인문동산이라 이름이 붙은 모양이었다. 동물원은 지금의 정문 위치다. 작은 정문 오른쪽으로 넓지 않은 풀밭이 있었는데 행인들이 오가며 철망 너머로 학생들이 술 마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동물원이었다. 교내에서 최루탄 냄새가 가장 심한 곳이라 투쟁 의지도 다지고 또 최루탄 냄새 핑계로 취중에 울기도 좋았다 밤낮없이 쏟은 눈물과 콧물 ▲ 입학 당시의 단체사진. 다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궁금하다 우리는 그렇게 술을 마시며 위정자들을 욕하고 노동가요를 부르고 신세 한탄을 하고 눈물을 흘리고… 오바이트를 했다. 낮에도 최루탄 가스에 눈물, 콧물을 쏟고 토악질을 해야 했으니, 요컨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눈물과 콧물과 담즙을 쏟은 셈이었다. 교내 술자리가 좋은 이유는 아무래도 ‘자유’ 때문이었다. 우리는 목이 터져라 노동가요를 부르고, 아무 데나 토하고, 아무렇게나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자다가 깨서 술자리가 파하지 않았으면 다시 합류해 술잔을 기울이고, 사위가 깜깜하고 아무도 없으면 툴툴 털고 일어나 집으로 발길을 떼면 그만이었다. 꾸짖는 사람도 없고 신경 쓰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기엔 사회는 틀어진 구석도, 억울한 이면도 너무 많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2학년 때 농활을 마치고 마무리할 때였다. 후배 한 명이 술에 잔뜩 취해서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친 것 이다. 그저 농활 행사를 낭만적으로 생각하고 룰루랄라 따라왔으련만, 하루 종일 중노동을 하고 마을회관에 돌아오면 선배들이 쉬지도 못하게 하고 이런저런 토론으로 괴롭힌 데다 툭하면 마을 파출소와 알력을 빚었으니 무서울 만도 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친구를 재워 놓고 한참을 웃었지만 그나마 그는 그렇게 술의 힘을 빌려 살아남고 우리와 한패가 되었다. 후배들을 위한 권주가 ▲ 1985년의 인문대. 오른쪽이 인문동산이다. 밖은 여전히 팍팍한 시절이다. 취업문은 훨씬 좁아지고 터무니없는 사건, 사고들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그때가 오히려 호시절이었을 수도 있겠다. 불리한 싸움일지언정 최루탄과 맞장도 떠보고, 마음 놓고 술에 취할 자유라도 있었으니 하는 말이다. 행여 그렇지 못했던들 우리가 쉽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지금이야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했으니 울분을 토로하거나 불의에 저항하는 방법이 우리 시대와는 사뭇 달라졌겠다. 보다 순화하고 정화된 느낌? 21세기의 후배들은 어떻게 이 시대를 버텨낼까? 그러고 보니 언젠가 캠퍼스 내 음주를 불허한다는 뉴스를 본 듯도 하다. 어쨌거나 여전히 우리 모두에게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시대다. 후배들에게 조심스레 막걸리 한 잔 건네 오니, 그대들의 울분일랑 부디 이 한 잔의 막걸리와 취기와 눈물에 실어 조금이나마 씻어낼 수 있기를 빌리다.

2016-04 29

[오피니언][타임머신] 교정 구석구석 녹아 있는 청춘의 기억들

‘어떤 전공을 선택할 것인가?’, ‘어느 대학에 지원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스스로에게 내린 답은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였다. 1989년 졸업 후 27년을 살아온 내 삶을 채점해보면 결코 틀린 답은 아닌 것 같다. 연기를 배웠기에 가능했던 일 ▲ 졸업식 기념사진. 뒤의 건물이 한양대학교병원이다. 흙으로 덮인 공터에는 자연과학관이 들어섰다. 셰익스피어가 그랬다. 인생은 연극이라고. 우리 삶이 무대 위 연극이라면 가장 뛰어난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 아닐까? 삶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멋진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적절한 타이밍에 명대사를 날릴 수 있었던 비결은 내가 연기를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방송작가로 KBS 연예대상 최우수 작가상을 수상하고, <유머가 이긴다>라는 베스트셀러를 비롯해 16권의 책을 쓰고, 연간 200여 차례 특강에 초대되고, 모교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으니 이 정도면 성공했다 자부할 수 있지 않을까? 학력고사를 본 우리 세대는 대부분 점수로 학과와 학교를 결정했다. 그러나 난 오래전부터 스티븐 스필버그나 조지 루카스처럼 영화를 전공해 영화감독이 될 것을 꿈꾸며 연극영화학과만 바라봤다. 그러면 왜 한양대였냐고? 솔직히 집에서 제일 가까웠기 때문이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 지금은 청량리역과 왕십리역이 전철로 운영되지만, 1980년대에는 똥차라고 불리던 ‘기동차’로 연결됐었다. 전기 대신 디젤로 달리는 기차였는데, 매일 학교를 가는 게 아니라 교외로 놀러가는 기분으로 등교했다. 왕십리역에서 내려 학교로 가는 길은 좁은 골목길이었는데, 지금은 상점들로 바글바글하다. 후문을 통해 인문관으로 올라가는 길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그대로다. 큰 차이라면 운동장이 변해 HIT(한양종합기술연구원)와 사이버대학교가 들어섰다는 점. 그 운동장에서 대학교 입학식을 하고, 거기 들어선 한양사이버대학원을 졸업했으니 나에게 그곳은 크나큰 추억이 담겨 있는 장소다. 나의 첫 번째 차, 프라이드 ▲ 내가 번 돈으로 산 나의 첫 번째 차, 프라이드 한양대를 갈 때마다 캠퍼스 내의 차량 숫자가 증가해 교통사고가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든다. 가급적 학생들은 편리하게 바로 연결되는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1980년대에는 학교에 차를 가지고 다니는 학생이 학과에 한두 명 정도였다. 그중에 하나가 나였다. 차를 갖고 다니는 것이 부담스러워 병원 주차장에 세워 놓고 걸어서 인문관을 올라 다녔다. 학생이 차를 갖고 있다는 게 창피했던 건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번 돈으로 산 차였으니까. 당시엔 학생들이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가 턱없이 부족했다. 지금처럼 편의점이나 PC방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난 창업을 결정했다. 군대를 다녀온 뒤 스스로 학비를 벌기로 결심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불편함을 찾아서 해결해주면 돈이 된다는 진리를 알고 있었기에. 1982년 내가 입학한 해에 18대 1의 경쟁률을 보였던 연극영화학과는 해가 갈수록 인기가 높아졌다. 하지만 정작 수험생들은 연극영화학과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서 불편함이 많았다. 그래서 여러 자료와 면접 요령을 적은 20쪽짜리 조잡한 입시요강을 만들어서 팔았다. 그랬더니 정보에 목말랐던 입시생들에게 불티나게 팔렸다. 덕분에 사흘 일하고 300만 원을 벌었다. 여기서 힌트를 얻어 ‘연영과 입시 상담’이란 문구와 함께 집 전화번호가 들어간 명함을 만들어서 예비 모임 때 돌렸다. 전화기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벨이 울려 80명가량의 예약자를 받았다. 혼자서는 도저히 상담이 불가능해 학교 앞 ‘일번지다방’을 통째로 빌리고 동기들을 데려와 입시 상담을 진행했다. 그렇게 이틀 만에 500만 원을 벌었다. 닷새 일하고 번 800만 원으로 ‘프라이드’를 샀다. 첫 번째 마이 카다. 전국 일주에서 졸업 행사까지 ▲ 친구와 함께 차 안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전국을 일주했다. 그 차로 단짝과 전국 일주를 했다. 차에서 먹고 자고… 그야말로 캠핑카가 따로 없었다. 그때 전국을 돌며 느낀 것은 우리나라가 무척이나 기형적으로 발전했다는 점이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이 도시 밖으로 나가보지 못했던 나는 여행을 하며 전국 방방곡곡의 작은 마을과 길을 돌아다니며 너무나 큰 차이와 차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후 누구나 똑같은 대접을 받는 공정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내 주변의 차별부터 없애야겠다는 마음으로 과대표에 도전해 학회장이 됐다. 1987년 학회장 임기 당시 기억에 남는 것은 서울시청에서 모이기로 한 6.10 민주항쟁 때 유일하게 시청 앞까지 진출한 것이다. 전경들이 나는 그냥 통과시켜 줬다. 연극영화학과 복학생이라는 신분이 전경들 눈에도 절대 ‘데모’ 안 하게 보였었나 보다. 그때 연인인 척 데이트를 하면 안 걸린다고 꾀어 같이 시청으로 걸어갔던 이화여대 2학년생의 얼굴이 지금은 점점 희미하게 기억 속으로 사라져 너무나 안타깝다. 학회장으로서 전국 최초로 과목평가제를 실시한 것도 떠오른다. 학기 말에 전 학년, 전 강의실을 다니면서 직접 수업에 대한 만족도를 조사한 뒤 대자보를 붙였다. 이제는 교수평가제가 상식이 됐지만, 그때는 정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교수들과 불편하게 지내기도 했다. 그런 내가 이제는 한양대 ERICA캠퍼스 특임교수가 되어 학생들의 평가를 받고 있다. ▲ 졸업식 후 ‘한양회관’에서 연극영화학과 친구들과 함께한 행사. 졸업식은 조금 색다르게 진행했다. 졸업 후 그냥 뿔뿔이 헤어지기가 아쉬워 함께 모여 식사를 했다. ‘한양회관’을 전부 빌려서 졸업식에 참석한 모든 부모님과 친척을 모이게 했다. 그리고 교수님들을 초대해서 행사를 가졌다. 선물 증정도 하고 큰절도 하고 편지도 읽고 친구 부모님들끼리 인사도 하고… 지금 생각해도 멋진 아이디어였다. 그렇게 졸업하고 헤어지면 끝인 줄 알았는데… 어제도 그 친구들과 함께 당구를 쳤다.

2016-03 17 중요기사

[오피니언][타임머신]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의미가 있다

왕십리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나는 30분 일찍 한양대역으로 가고 있다. 학교에 한 번 올라가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갑자기 너털웃음이 나왔다. ‘올라간다니’ 말이다. 그랬다. 다른 학교는 간다고 했지만 우리는 학교에 올라간다고 했다. 임병희(<목수의 인문학> 저자・국문학과 91) 한양대역 2번 출구 ▲ 91학번 친구들을 처음 만난 자리, 인문대 오리엔테이션(1991. 2. 24) 어디로 가든 학교는 올라가야 했다. 특히 국문학과가 있는 인문대는 더욱 심했다. 정문으로 가면 진사로를 올라야 했고, 진사로를 오르면 다시 138계단을 올라야 했다. 왕십리역에 내려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병원 후문을 향하든, 샛길로 나 있는 옹달샘 방향으로 가든 계단과 언덕은 피할 수 없었다. 한양대역, 젊은 청춘들과 함께 지하철에서 내린다. 싱그럽다. 잠시 동선을 그려본다. 학교를 한 번 돌아보려면 뚝섬 방향으로 나가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공대 후문으로 들어가 노천강당에 잠깐 앉았다가 사범대를 거쳐 인문대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웬걸, 한양대역에 내려 보니 없던 입구가 하나 있다. 그렇구나. 그 입구가 뚫렸구나. 학교를 다니다 보면 몇 가지 바람이 생기기 마련이다. 내가 다니던 남자고등학교에는 매년 근처의 여고와 합쳐져 남녀공학이 된다는 전설이 떠돌았다. 물론 근거 없는 남고생들의 소원일 뿐이다. 대학에 다닐 때도 그런 것이 있었다. 왕십리역 계단에 에스컬레이터가 생긴다거나 한양대역에서 학생회관이 있는 한마당 쪽으로 바로 나갈 수 있는 입구가 뚫린다거나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입구가 정말로 생긴 것이다. 첫 번째 충격이었다. 씁쓸한 듯 흐뭇한 학교의 변화 나는 동선을 수정했다. 학생회관 쪽으로 나가 본관을 돌아 노천강당으로 가기로 말이다. 그런데 가슴이 조금 두근댄다. ‘또 어떤 변화가 기다리고 있을까?’ 그 변화가 씁쓸할지 흐뭇할지는 아직 몰랐다. 어쩌면 씁쓸하면서 흐뭇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입구로 가니 몇 계단 오르지도 않았는데 학교에 도착했다. 마치 축지법을 써서 진사로를 건너뛰고 온 기분이다. 아, 그런데 모르는 건물이 보인다. 쌉싸름하다. 그래도 고딕스러운 본관은 여전했다. 노천강당이 보인다. 이곳은 아마 내가 학교를 다니면서 세 번째로 술을 많이 마신 장소일 것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우리는 꽃에 모여든 꿀벌처럼 노천강당의 양지를 찾았다. 새우깡 한 봉지, 소주와 맥주 몇 병을 들고 전공서적을 깔고 앉아 아직 가시지 않은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며 잔을 채우고 비웠다. 비가 오는 날이면 계단 밑에 들어가 마셨고, 날이 좋은 날이면 퍼질러 앉아서 마셨다. 그런데 이 좋은 봄날에 노천강당은 비어 있었다. 아니 사람이 없다는 게 아니다. 술 마시는 사람이 없다는 거다. 이건 새로 생긴 한양대역 입구보다 더 충격적이다. 그래도 잠시 앉았다. 나는 추억이라도 마셔야 했으니까. 사라진 것들에 대한 그리움 ▲ 138계단에서 동기들과 함께(1991. 7. 24) 드디어 인문대에 도착했다. 고개를 갸웃한다. 내가 알던 인문대가 이렇게 좋은 건물이었나 싶다. 2층 베란다도 완전히 달라져있다. 왠지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인문대 앞마당도 한참이나 좁아진 느낌이다. 예전에는 네트를 만들어 족구도 자주 했었는데, 이제는 족구도 잘 안하는 것 같다. 자꾸 쓴웃음이 난다. ‘이런 생각을 하면 꼰대라고 하던데’ 뭐 어쩔 수 없다. 생각이 나는 걸 어찌하겠는가? 마치 이방인처럼 인문대를 스쳐 138계단으로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계단이 나무다. 계단 양쪽에는 가로등도 있다. 문명화된 세상을 처음 보는 산골 촌뜨기가 된 기분이다. ‘그래, 많이도 달라졌구나.’ 시간이 흘러 나도 달라지고, 세상도 달라졌는데, 모든 달라지는 것을 경험하고 살았는데, 마음속에서 나는 옛날 학교의 모습을 부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왕십리 술집에서 친구를 만나 술을 마셨다. 우리는 새로 생긴 것보다 없어진 것들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 닭개장과 술국에 한 수저씩 조미료를 넣어 주던, 지금은 사라진 ‘부귀집’과 오돌뼈, 닭똥집에 소주병 쌓아가던 ‘마기집’도 이야기했다. 천 원짜리 몇 장으로 떡볶이와 순대를 양껏 먹을 수 있었던 시장통 화천 아주머니집도 빠지지 않았다. 언제 다시 오르려나 ▲ 국문학과 MT 캠프파이어(1991. 10. 24) 지금도 누군가를 만날 때면 자주 하는 소개말이 있다. 특히 같은 대학 출신을 만날 때 그렇다. 대신 소개를 해 주어도, 스스로 이야기를 해도 “한양대 국문과 91학번”이라고 말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지금은 가구를 만들며 글을 쓰고 있지만 여전히 나는 ‘한양대 국문과 91학번’이다. 그 속에 녹아 있는 건 단순히 학교와 입학년도가 아니다. 내가 청춘을 어디에서 어떻게 보냈는지를 말해 주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이며 경험이고 또한 지금의 나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진행형의 시간과 공간이다. 학교는 많이 좋아졌다. 그런데 나는 예전이 그립다. 그건 어쩌면 청춘의 내가 그리운 것인지도 모른다. 학교에 가 본 후, 또 많은 시간이 흘렀다. 새로운 건물이 들어선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변화는 피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20대 를 보낸 그곳으로 한양대를 기억한다. 시인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간 곳, 친구들을 만난 곳, 셀 수 없는 술잔을 기울이며 개똥철학과 인생과 사회를 이야기하며 분노하고 웃고 떠들던 곳, 사실 한양대는 학교라는 공간에만 있지 않다. 술에 취해 친구가 데려간 왕십리의 하숙집, 배낭 하나 짊어지고 떠났던 여행지, 138계단을 내려갈 때 느닷없이 달려와 어깨동무를 하던 친구, 그 모든 것이 한양대이다. 나는 다시 학교를 오르는 꿈을 꾼다.